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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 눈길 이어쓰기 공모전

이북 원문에서 글자만 옮긴 전체 텍스트입니다. 표·그림·사진과 원래 모양은 이북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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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퍼뜩 잠에서 깨니 이제 막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열린 장지문 사 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은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제법 따가웠다. 방 안을 덥히는 햇살, 기 분 좋게 지저귀는 참새 소리, 집 안의 적막을 깨우는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한데 어우러 져 몸이 나른해졌다. 옆을 바라보니 아내는 여전히 단잠에 빠져 있었고, 노인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으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칼질하는 소리가 그녀의 위치를 짐작게 했다. 탁. 탁. 탁. 칼날이 도마에 부딪히는 소리가 마치 시계 초침처럼 일정하였다.

‘이 냄새는 … ’

스멀스멀 느껴지는 구수한 냄새로 미루어보았을 때 오늘 아침은 된장국인 모양이었다. 된장 국이라 … 간밤에 본인이 풀어놓은 애달픈 이야기에 잊고 있던 추억이 되살아난 것일까, 노 인은 그날 밤 우리가 이미 팔려버린 집 안에서 묵묵히 먹었던 그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생 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문득 시선에 닿은 옷궤의 존재가 다시 심장 한편을 돌덩이처럼 무겁게 짓눌렀다. 지난밤 뜨거워졌던 눈시울은 새벽녘의 감성 탓이었는지, 역시 아직은 노인의 눈물 겨운 모성애에 마냥 감동하기 어색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의 두 다리는 어느새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간 내 속을 불편하게 어지럽혀왔던 저 망할 옷궤를 이 손으로 한 번 쓸어보려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옷궤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 오른손을 뻗어 문짝 부근 을 더듬거렸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옷궤의 표면은 나뭇결이 많이 상해 거칠거 칠하였을 뿐 아니라 이곳저곳 못이 튀어나와 이음새들이 덜그럭거렸다.

“거 서서 뭣하고 있냐. 이리 와서 밥상이나 받아라.”

나는 옷장의 녹슨 못을 만지작거리다 뒤에서 들려오는 노인의 목소리에 못할 짓을 걸린 어린 아이처럼 화들짝 놀라 퍼뜩 밥상을 건네받았다.

“아유, 어머니. 저 깨우시지 어떻게 이걸 다 혼자 준비하셨어요.”

작은 소란에 잠이 깼는지 아내는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 졸린 눈을 비볐다.

“됐다. 너거들 서울까지 갈 길이 천리 길인데 내 아무리 늙었기로서니 어미로서 내가 한 밥 한 숟갈 맥이고 보내고 싶어 그런다.”

노인은 별거 아니라는 듯한 말투로 덤덤하게 밥상 앞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아내는 늦잠을 잔 것이 머쓱한지 괜히 음식 냄새가 너무 좋다는 둥, 반찬에 윤기가 자르르하다는 둥 호들갑 을 떨었다. 그러한 아내의 반응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 짓고 젓가락을 쥐었을 때였다.

“아!”

작은 비명이었을 뿐인데도 순식간에 두 여인의 네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나는 황급히 통증의 원인을 찾으려 오른손을 살폈다. 자세히 보니 검지의 손톱 측면 부근이 발개져 있었다. 조금 전 옷궤를 만질 때 튀어나온 못에 긁히기라도 한 것인지 살갗이 약간 벌어져 있었으나 스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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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 티도 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생채기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손가락의 상처 부 분을 입으로 가볍게 쪽 빨은 뒤 식사를 이어갔다. 된장국은 약간 짰다. 그날의 맛이었다.

“저흰 이만 가볼게요”

* * *

아내는 차에 올라타며 노인에게 작별 인사를 전했다.

“그래, 왔다 갔다 하느라 욕본다. 날도 더운데 얼른 올라가 봐라.”

노인은 왼손은 뒷짐을 지고 오른손엔 장죽을 든 채 집 앞까지 나와 우리를 배웅했다. 무엇인 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우물우물 입술을 달싹였으나 결국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 인이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왠지 알 것 같았으나 나는 애써 외면하며 차를 몰았다. 백미러로 비치는 노인은 한참 동안이나 우리를 배웅 나왔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노인의 뒤로 보이는 낡고 초라한 오두막의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어기영차! 어기영 … 어디선가 자그마하게 남 정들의 힘쓰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당신 어제 안 자고 있었죠?”

복잡한 표정의 날 발견한 아내가 조용히 물었다. 나의 반응이 궁금한 듯 입가엔 장난스러운 미소가 옅게 걸려 있었다. 나는 일부러 아내 쪽을 바라보지 않고 운전을 핑계로 정면만을 주 시하며 얼버무렸다.

“아니 … 뭐 밤에 잠이나 잘 것이지 얘기들을 나누고 있어? 잠깐 깼다 다시 잤어.” “그래서. 어머님이 하신 말씀 들었어요?”

그냥 못 들었다고 할까. 목구멍으로 마른 침이 꿀떡 넘어갔다. 이 질문이 뭐라고 대답이 이리 도 고민된단 말인가.

“그냥 뭐, 조금 들었지.” “당신 기분은 어떤데요?” “기분이 뭐 어떻고 자시고 할 게 있나 … 그냥 그랬구나 하는 거지.”

내 대답이 불만족스러운 듯 아내는 흠, 하는 콧소리를 내며 팔짱을 끼고 내 표정을 유심히 살 폈다. 옆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눈빛을 나는 필사적으로 모른 척하려 애썼다. 한참 뒤 시선을 거둬들인 아내는 이번엔 다른, 하지만 훨씬 더 날카로운 질문을 건넸다.

“어머님이 집을 굉장히 고치고 싶어 하시는 것 같던데, 어떡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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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눈치가 없는 것인지, 어쩜 이렇게 곤란한 질문들만 쏙쏙 골라서 할 수가 있을까? 하지만 사실 아내는 오히려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지금 그녀는 노인에게 그날의 심정을 집요하게 캐 물었던 것처럼 내 속마음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이다. 교묘하게 대답을 피해 간다 해도 아내는 계속해서 이 얘기를 꺼낼 것이다. 이럴 땐 괜히 시간 끌지 말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최선이 었다.

“노인네가 저리 말하니 해드리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집 고치는 게 어디 쉽나. 돈도 돈이지 만 일단 일을 시작하면 내내 들여다보고 해야 할 텐데 우리는 집도 멀고 하니 … ”

나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는 여전히 정면으로 고정한 채 눈동자만 살짝 굴려 아내를 힐긋 쳐다 보았다.

“그래요. 그건 맞는 말이죠”

아내는 순순히 내 말에 수긍했다.

“그렇지만 어머님 마음이 너무 이해가 돼요.”

후일을 생각하면 집을 고쳐드리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며 아내는 쫑알댔다. 자식의 도리라. 노 인이나 나는 서로에게 빚이 없는 처지인데 … 분명 그랬는데 … 어젯밤 노인의 회고를 듣 고 난 뒤부턴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 속에 무엇인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익숙지 않 은 느낌에 이것이 무슨 감정인지 당최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노인이 어렵사리 내비친 그 소 망에 대해 약간은 긍정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는 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일에 착수할만한 정도의 마음가짐도 아니었기에 나는 판단을 미루기로 했다. 아내는 한참을 혼자 떠들다 대답 없는 내 쪽을 잠깐 응시하더니 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시간은 그렇게 속절없이 흘렀다. 온 동네 개들이 헥헥대며 혀를 빼무는 한여름의 무더위도 어느새 한풀 꺾이고, 거리에 찌릿한 은행 냄새가 진동하는 가을이 왔다. 그간 업무상의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에 나는 집에서 간만의 휴식을 즐기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리 에 낙엽이 잔뜩 흩날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기분이 헛헛해지는 것이, 이런 게 바 로 계절을 탄다는 것인가 하고 쓸데없는 생각 중이었다. 나는 물감으로 칠한 듯 파란 하늘을 더 제대로 느끼고 싶어 창문을 살짝 열었다. 창 사이로 느껴지는 시원한 공기가 가을을 실감 하게 했다. 따뜻한 침대에 풀썩 드러누워 선선한 바람을 맞고 있으니 곧 정신이 몽롱해졌다. 속절없이 잠에 막 빠져들려 하던 그때였다.

‘이 시간에 웬 전화람?’

느닷없이 거실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리는 탓에 잠이 다 깨고 말았다. 모처럼의 쉬는 시간을 방해받은 것 같아 받지 말까 잠시 고민하였으나, 이내 침대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켜 거실을 향해 미적대며 움직였다. 수화기를 막 집어 들려는 찰나, 거짓말처럼 벨 소리가 뚝 끊겼다. 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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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그냥 계속 누워 있을걸. 약간 짜증스러운 채로 등을 돌리려던 그때, 전화벨이 다시 요란 스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급한 연락인 건가? 갑자기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아들자 수화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처음 듣는 이의 목소리였으나,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전혀 낯설지 않은, 익숙한 이름이었다.

“네? 저희 어머니가요?”

나는 당황했다. 전화를 건 낯선 이는 자신의 할 말만 한 채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노인이 병 원으로 긴급이송 되었다고 했다. 노인. 나의 어머니가 말이다.

아내와 함께 헐레벌떡 병원을 찾았으나 간호사는 노인이 중환자실 입원 환자이기 때문에 정 해진 면회 시간을 지켜야한다고 했다. 차가운 말투로 면회 시간을 준수해 내일 다시 오라 말 하는 간호사의 모습이 원망스러웠다. 이 먼 길을 한달음에 달려왔는데 얼굴조차 바로 볼 수 없다니 …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일단 노인의 집으로 향했다. 주인 잃은 단칸방은 금방이라 도 쓰러질 듯 했다. 집 안을 훑어보던 내 시선이 가뜩이나 좁은 방 한 켠을 차지한 낡은 옷궤 에 닿았다. 아니, 정확히는 옷궤에 튀어나와 있는 녹슨 못에 시선이 갔다. 병원을 나서기 전, 간호사와의 마지막 대화가 떠올랐다.

‘아니, 그래도 제가 보호자인데. 어디가 아프신 겁니까?’ ‘파상풍이십니다.’

지난 여름 노인의 집에 왔을 때 옷궤의 못에 찔려 상처가 났던 것이 생각났다. 저 빌어먹을 애물단지가 결국……!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무엇 때문인지는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동안 지속적으로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던 물건이기 때문일까? 노인의 병의 이유가 저 옷궤 가 아닐 수 있는데도, 나는 당장이라도 그것을 부술 것처럼 옷궤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나는 대번에 옷궤 안의 옷들을 모조리 방바닥으로 던져버리고 그것을 집 밖으로 끌어냈다. 갑 작스러운 나의 행동에 아내는 화들짝 놀라 마당으로 뛰쳐나왔다.

“당신 갑자기 왜 이래요!”

아내의 외마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미친 사람처럼 옷궤에 발길질을 했다. 워낙 낡아빠 져서일까, 이 나무 궤짝은 힘없이 내 발이 닿는 대로 우지끈 부서졌다. 꼴도 보기 싫었다. 이 미 팔린 집 안에서 노인과 함께 된장국을 먹던 그 날 밤. 가구랄 것도 없이 휑한 집 안에서 홀로 위풍당당한 옷장은 오히려 강한 이질감을 들게 했다. 이 집은 팔렸구나. 우리는 진짜 망 했구나. 내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살겠구나. 나 한 사람에게 노인과 형수, 조카들까지 몇 사람 들의 목숨줄이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옷궤가 완전히 제 모습을 잃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발길질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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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기운이 제법 쌀쌀한데도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 맺했다. 옆에서 말없이 바라보던 아내가 터 벅터벅 걸어와 이젠 나무판자 조각이 돼버린 것을 주워들었다. 나무판자엔 간신히 알아볼 수 있게 동백꽃 무늬가 남아 있었다. 나는 그제야 겨우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걸 이제 어째요?”

아내는 체념한 듯 내게 물었다.

“몰라. 내다 버려.”

나는 그대로 등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 노인이 20년 가까이 지켜온 집안 살림이니 너무 흥분했나 하고 후회도 살짝 되었지만, 속이 한결 후련했다.

다음 날 찾아간 병실엔 노인이 자는 듯 누워 있었다. 작은 미동도 없는 것이 혹시 숨이 멎은 것은 아닐까 조마조마했다. 작은 몸에 주렁주렁 달린 이름 모를 기계들이 버거워 보였다. 담 당 의사는 노인이 워낙 고령이라 예후가 좋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내게 혹시 모를 마지막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며 유감을 표했다. 이 상황에서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 실 알고 있었다. 이 순간 내가 노인을 위해 해야 할 것은 명백했다.

“어기영차! 어기영 … ”

지난여름 남의 집에서 들었던 남정들의 힘쓰는 소리가 이젠 노인의 집에서 나기 시작했다. 아 내는 말없이 내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지붕 개량은 물론 손이 가는 작업이긴 했지만, 생각만 큼 돈이 들진 않았다. 노인의 말대로 용석이 아버지라는 사람이 흙일을 도와주어 수월했다. 단칸방 오두막의 터가 새롭게 닦여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마을 이장이 다가와 잘 생각했다며 껄껄 웃었다. 알고 보니 노인이 병원에 이송됐다 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이장이었다. 지붕 개 량 사업 건으로 한 번 더 얘기해보려 집에 들렀다 호흡곤란이 온 채 경련하고 있던 노인을 발 견했단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작이 제일 어려웠던 것을 … 집이 새롭게 태어날 때까지 노인이 기다려줄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다행히 노인은 일반실로 옮겨왔다. 아직 눈을 뜨고 있진 못하지만 적어도 위독한 때는 넘겼 다는 뜻이었다. 어느 날은 병실에 찾아가니 아내가 노인의 병상 옆에서 무엇인가 열심이었다. 중환자실은 한 번에 한 사람밖에 면회가 되지 않아 아내는 오랜만에 노인을 보는 것이었다. 무엇에 그리 열중인가 들여다봤더니 아내는 노인의 베갯잇에 십자수를 놓고 있었다. 선홍빛 꽃잎이 매력적인 동백꽃이었다.

“깨어나시면 옷궤 일로 마음이 상하실 것 아니에요.”

아내는 쑥스러워하며 웃었다. 얼른 기운을 차리셔야 할 텐데, 하며 그녀는 손을 바삐 놀렸다.

하지만 노인은 한 계절이 다 가도록 깨어나지 못했다. 나무들은 울긋불긋한 옷을 벗어 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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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앙상해졌다. 날씨도 이젠 두툼한 외투를 껴입고도 목을 옷깃에 파묻어야 할 정도가 되었 다. 원래 이렇게 오래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냐 의사에게 따져 물었지만, 의사는 되려 지금 살아계시는 것이 기적이라며 자신들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말했다. 그사이 집은 거 의 다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방도 한 칸 늘어난 데다가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기와를 얹으니 이제야 제법 사람 사는 집 같았다. 노인도 이 사실을 알면 아마 기뻐서 벌떡 일어나지 않을 까. 나는 그날 저녁 노인의 병실을 찾아갔다. 노인은 갈수록 몸이 말라가는 것이 마치 저 창 밖의 나뭇가지들 같았다. 양 볼이 푹 패인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목이 턱 메어왔다.

“어머니, 누워 계시는 동안 제가 무슨 일을 했는 줄 알아요?” “ … ” “지붕 개량 사업, 그거 하기로 했어요. 하고 싶어 하셨잖아요.” “ … ” “원하시는 대로 방도 한 칸 더 늘어났고요, 지붕도 기와로 다 얹었어요. 우리 예전 살던 집 이랑 비슷해요.”

그토록 소망하던 일이었음에도, 노인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런 얘기를 한다고 해서 노인이 번쩍 눈을 뜰 것이라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살짝 기운이 빠졌다.

“일 때문에 올라가야 해서, 다음에 또 올게요.”

이번에 올라가면 곧 연말이라 바쁘기에 꽤 오래 내려오지 못할 터였다. 나는 대답 없는 노인 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병실 문을 닫았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나는 서울에 간 지 얼마 되 지 않아 다시 노인을 찾아가게 되었다.

* * *

“그러면 이제 완공된 거지요?” 나는 아침부터 걸려온 반가운 전화에 화색이 돌았다. 드디어 노인의 집 지붕 개량이 끝났다 는 것이었다. 그동안 이것 때문에 정기적으로 서울과 노인이 있는 곳을 왕래하느라 꽤 힘이 들었는데 짐이 하나 덜어진 기분이었다. 아내 또한 소식을 전해 듣고 뛸 듯이 기뻐했다. 바로 내려가서 이 두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었으나, 아직은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어 당장은 무리였 다. 그러나 다음에 걸려온 전화는 이 할 일들을 모조리 미루게 만들기 충분했다.

“갑자기 왜 상황이 나빠진 겁니까?”

나는 병실 앞에서 의사에게 소리쳤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여태까지 버틴 것이 용하 다는 것이었다. 노인은 다시 중환자실에서 알 수 없는 기계들을 잔뜩 달고 쌕쌕 숨을 몰아쉬 고 있었다. 그 숨소리가 너무 거칠어서, 지금 당장 달칵 숨이 끊겨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의사는 임종이 다가왔다며, 이젠 진짜로 마음의 준비를 해야한다 전했다. 정말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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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타이밍이었다. 이제야 집이 다 완성됐는데. 보고 좋아할 일만 남았는데 … 이 노인은 한평생 고생하며 떠돌기만 하다가 이렇게 가는 것일까.

그날 밤, 나는 노인의 곁을 지켰다. 급한 연락에 부랴부랴 혼자 내려왔기에 아내는 아직 서 울이었다. 아내가 버스를 타고 와줄 때까지만 노인이 견뎌주었으면 했지만 너무 큰 바람인 듯 했다.

“편히 가셔도 돼요. 집 공사가 완전히 끝났대요. 형수랑 조카들도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어색하게 노인의 하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 말만을 기다린 것일까. 동이 터오는 새벽, 노인은 조용히 떠났다. 그녀의 마지막을 함께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노인의 감긴 눈위로흰 천이 덮이고 사람들은 바삐, 하지만 엄숙한 모습으로 움직였다. 속이 텅 빈 것처럼 공 허했으나 눈물은 나지 않았다. 시간을 보니 아내가 차부에 도착할 시간이었다. 나는 마중을 위해 차를 타고 아내가 와 있을 차부까지 운전해갔다. 차를 세우자, 날 발견한 아내는 한달음 에 달려와 내 안색을 살폈다.

“여보, 괜찮아요?”

조심스러운 그녀의 물음에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차 열쇠를 건넸다. 차 열쇠를 받아 든 아내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당신 먼저 가 있어. 난 좀 걷고 싶어서.”

말을 마치고 내가 차에서 내리자 아내는 군말 없이 운전석에 올랐다. 아내가 차에 시동을 걸 고, 그녀가 운전하는 차 꽁무니가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동네까지 무작정 걸었다. 조금 걷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직 눈이 오기엔 이른 시기이기에 기묘한 일이었다. 하늘이 내 속을 알아주는가. 비라기엔 슬픈 마음이 그리 처절하지 않고, 해라기엔 부모 잃은 자식 마음가짐이 그럴 수 없으니 애절한 마음이 소복이 쌓여 불어나는 눈이 제격이었다. 하늘하늘 흩날리던 눈 송이는 어느새 함박눈이 되어 펑펑 내렸다. 첫눈임에도 불구하고 눈발이 제법 굵어 산길에 도 착했을 땐 세상이 온통 하얀색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뚜렷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 는 것들이 있었으니, 바로 동백꽃이었다. 동백꽃들은 소복이 쌓인 눈 사이로 붉어진 얼굴을 부끄러워하며 살짝 내보였다. 예전에도 이곳에 동백꽃이 있었나? 마치 내가 갈 곳을 알려주듯 길가를 따라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붉은 꽃들이 아름다웠다. 온통 하얀 옷을 껴입은 세상 속에 서 홀로 색을 과시하는 저 보드라운 꽃잎들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 어머니, 어머니 … 나는 동백꽃들이 호위하는 흰백의 눈길 위에 눈물을 뿌리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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