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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문화놀이매거진 POT 36호

이북 원문에서 글자만 옮긴 전체 텍스트입니다. 표·그림·사진과 원래 모양은 이북에서 확인하세요.

1쪽

N.36 마음의 모양

ISSN 2508 6316

춘천문화매거진 2023 가을

2쪽

사랑이여 탄생의 미묘한 때를 알려다오 – 김지하 ‹줄탁›

3쪽

PLAY 문화로 같이 즐기다

OPEN 문화로 마음을 활짝 열다

TALK 문화로 함께 이야기하다

매거진 ‹pot›에는 ‘(다양한 것을 담는)그릇, 솥’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문화로 함께 즐기고, 소통하며, 이야기할 수 있도록 지역의 다양한 문화 콘텐츠와 이슈, 생동감 넘치는 춘천의 문화예술을 담아내는 그릇이 되고자 합니다.

‹pot›에서 이야기하는 춘천문화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한 시민의 삶 속에서 엿볼 수 있는 일상의 순간, 그 안에 담긴 보석 같은 이야기를 말합니다. ‹pot›은 춘천 시민과 많은 관계인구가 춘천이라는 지역을 즐겁게 바라보고 깊이 알아갈 수 있도록 다채로운 이야기를 펼쳐 보이겠습니다.

장승근 作 ‹꽃 한 줌›, 2023, oil on canvas, 33.4×33.4cm

꽃 한 다발이라는 말보다는 꽃 한 줌이라는 말이 좋다. 꽃 한 다발은 상대를 향한 마음이 견고하고 빽빽하게 정돈된 말이라면, 꽃 한 줌은 상대를 향해 어찌할 줄 모르는 상기된 마음을 생생히 뜯어온 느낌이다. 그런 그 사람의 손톱엔 막 흙이 껴있다.

CONTENTS

LETTER

편집장의 여는 글

MOMENT

책갈피에 꽂아둔 마음

POST BOX

사랑의 발견

Share your heart

THEME PIECES

TOOLS

박시월 작가의 도구, 서늘한 유리 위 아름다움

INTERVIEW 1

가까이 품을수록 빛나는, 별빛사회적협동조합

INTERVIEW 2

우리가 사랑한 것들이 우리를 구원할 때, 소설가 허남훈

POT-PEDIA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서 CHUNCHEON PLAYLIST

WALK

사랑의 흔적이 골골이 가득, 효자동 산책

PLAYGROUND

어쩐지 근사한 소도시에서의 삶 #3. 나만 아는 식물 이야기

COLUMN

춘천과 로맨티시즘

WIDE

삶, 다양체, 연결

SCENE 1

만들고, 뿌리고, 버리기 vs 기대하고, 사랑하고, 소장하기

SCENE 2

흠이 없는 구슬, 나의 아이에게

MOOD

그런 사랑

EDITOR’S NOTE

4쪽

LETTER

당신의 사랑은 어떤 모양인가요?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 작가 오쿠다 히데오 소설 『꿈의 도시』(2010)에는 날로 쇠락해가는 인구 12만의 지방 소도시 䢮유메노䢯(夢の, yume no)가 등장합니다. 작가는 시청 공무원, 여고생, 은둔형 외톨이, 여성 보안요원, 시의원 등 다섯 명의 인물군상을 통해 䢮복지국가 일본䢯의 허상을 꼬집는가 하면, 어떻게 䢮유메노䢯라는 도시가 혼자 살다 혼자 죽는 도시가 되었는가를 탁월하게 표현합니다. 인구 소멸 및 지역 소멸이라는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가볍게 풀어내되 묵직한 의미가 전달되는 䢮오쿠다 월드䢯의 탁월한 솜씨에 절로 탄복하게 됩니다.

각자도생이라는 말은 낯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각자도생을 넘어 䢮각자도사 사회䢯라는 말까지 등장했습니다. 의료인류학자 송병기는 『각자도사 사회』(2023)에서 결국 고립된 삶이 아니라 䢮커뮤니티 케어䢯가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쉽게 말해 나와 우리가 사는 도시·사회가 혼자 살다 혼자 죽는 도시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보살필 줄 아는 도시와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돌봄 찬 사회라고 해야 할까요? 이를 위해 (소)도시의 사랑법이

이번호 ‹pot›의 테마는 소도시에서의 䢮사랑䢯을 다룹니다. 20세기 고전인 『사랑의 기술』(1956)을 저술한 에리히 프롬은 䢬사랑의 기술은 모든 기술과 마찬가지로 습득되어야 한다䢭고 강조합니다. 그가 특히 사랑의 기술을 강조하는 것은 현대 자본주의에 이르러 우리가 갈수록 䢮사랑하는 능력䢯의 상실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애, 신에 대한 사랑, 모성애, 부성애, 자기애 등 사랑의 양상들은 현대에 와서 자본주의적 교환가치로 변했습니다. 저 오쿠다 히데오의 䢮유메노䢯가 지금-여기 우리 현실이 아니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누군가를 돌보고 관계를 연결하는 사랑의 행위는 우리가 사는 도시와 사회를 䢮살맛䢯 나게 합니다. 춘천의 왕진의사 양창모 선생은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2021)라는 책에서 䢮없어서 없는 존재䢯가 되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인술(仁術)을 이야기합니다. 䢮이웃복지사䢯와 함께 마을 돌봄을 꾸준히 펼치는 춘천 별빛사회적협동조합의 활동에 주목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허남훈 소설가는 명창 박녹주를 짝사랑했던 䢮김유정의 사랑䢯을 지금의 맥락에서 생각해보는가 하면, 박시월 작가는 유리라는 예술가의 도구를 통해 타인의 아름다움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소)도시의 사랑을 다루는 칼럼을 특별히 주목해 주셨으면 합니다. 권혁희 교수는 1960년대 후반 이후 䢮호반의 도시䢯라는 닉네임을 얻고, 1970-1980년대 경춘선의 대중화와 더불어 청춘과 낭만이라는 로맨티시즘의 수사학이 득세하게 된 도시 문화적 의미를 짚습니다. 이경미 평론가는 연극 ‹무출산무령화사회›를 리뷰하면서 왜 우리 문명의 중심에 돌봄이 없는가를 성찰합니다. 䢮내 가족주의䢯를 넘어 우리 모두를 품을 수 있는 난삽한 돌봄(a promiscuous care)의 의미를 생각하며 재미있는 정책사업을 구현하는 도시문화를 기대해봅니다. 내가 사는 도시가 저 䢮유메노䢯 같은 도시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䢮꿈의 도시䢯는

고영직 문학평론가, 편집장

5쪽

MOMENT

책갈피에꽂아둔마음

언젠가 공을 들여 '愛'를 쓰고 있는

예쁘지 않은 것을

할멈에게 엄마가 물은 적이 있다.

예쁘게 보아주는 것이 ─근데 엄마, 그거 무슨 뜻인지 알고나 쓰는 거야? 사랑이다 할멈이 도끼눈을 떴다. ─그럼! 그러더니 낮게 읊조렸다. ─사랑. ─그게 뭔데? 엄마가 짓궂게 물었다. ─예쁨의 발견. 손원평, ‹아몬드›에서

우리는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과 뜨거운 차 한 잔을 원한다. 김소연, ‹마음사전›에서

사랑은 달리 말하면 재미있는 시간을 함께할 사람을 찾는 과정이다

타인의 이마에 손을 맡기고 있을 때 나는 조금 선량해지는 것 같아

윤홍균, ‹사랑수업›에서

너의 양쪽 손으로 이어진 이마와 이마의 아득한 뒤편을

꽃이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나는 눈을 감고 걸어가보았다

꽃이 졌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길이 되었다.

이마의 크기가

길 위에서 신발 하나 먼저 다 닳았다.

손바닥의 크기와 비슷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천양희, ‹너에게 쓴다›에서

나태주, ‹사랑에 답함›

듯 탐구하며……

느낌이라는 층위에서 나와 너는 대체로 타자다. 나는 그저 ‘나’라는 느낌, 너는 그냥 ‘너’라는 느낌.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느낌의 세계 안에서 드물게 발생하는 사건일 것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표명될 수 없는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 그러니까 어떤 느낌 안에서 두 존재가

사랑할 것이다.

만나는 짧은 순간.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를 사로잡고 있는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느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느낌의 세계 안에서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만난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사랑은 능력이다. 신형철, ‹느낌의 공동체›에서

착하지 않아도 돼.

사랑하게 하면 돼.

허은실, ‹이마›에서

어떻게 하면, 당신이 원하는 꿈을 꿀 수 있을까?

사랑이란 지금 여기에서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물결처럼 베개를 높이고, 낮추고……

결심이다. 그게 우리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이다.

나는 당신이 꾸는 꿈을 꾸고 싶다. 밤새 내가 하는

사랑하기로 결심하면 그 다음의 일은 저절로 일은 잠든 당신의 얼굴을 뜯어보듯 관찰하며, 파고들 일어난다. 사랑을 통해 나의 세계는 저절로 확장되고 펼쳐진다. 김행숙, ‹주어 없는 꿈›에서 그러니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길. 기뻐하는 것을 더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을 더 사랑하길. 그러기로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결심하고 또 결심하길.

그대는 모든 사람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그리하여 더욱더 먼 미래까지 나아가길.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김연수, ‹너무나 많은 여름이›에서

사랑하는 한, 그대는 정녕 그대 자신을

그냥 목소리에 다정함이 사라지고 무성의한 익숙함만 남았던 거지. 말하자면 사소한 거였어. 하지만 사랑은 다른 어디에도 아닌 사소한 것들에 깃들어 있거든.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에서

크리스티앙 보뱅, ‹가벼운 마음›에서

참회하며 드넓은 사막을 무릎으로 건너지 않아도 돼. 손자야, 너는 이 할미가 너에게 쏟은 정성과 사랑을 그저 너의 몸이라는 여린 동물이 사랑하는 걸

갚아야 할 은공으로 새겨둘 필요가 없다. 어느 화창한 봄날 어떤 늙은 여자와 함께 단추만 한 민들레꽃 내음을 맡은 일을 기억하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그건

메리 올리버, ‹기러기›에서

아주 하찮은 일이다. 나는 손자에게 쏟는 나의 사랑과 정성이 갚아야 될 은공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아름다운 정서로 남아 있길 바랄 뿐이다. 나 또한 사랑했을 뿐 손톱만큼도 책임을 느끼지 않았으므로.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에서

6쪽

POST BOX

사진 한상지, 강은영, 강인구 에디터 이인혜

사랑

의

발견

*post box는 시민들로부터 받은 필름 사진을 기사에 담았습니다.

고양이를 주웠더니

춘천 추곡, 길에서 태어난 아주 작은 생명체가 가을바람에 꺼질세라 집으로 데려왔다. 2014년 추석날, 보름달과 함께 찾아온 녀석이라 이름도 보름이.

아무리 비싼 장난감을 사줘도 쳐다도 안 보고 최고급 간식을 사줘도 사료만 먹는 무뚝뚝한 녀석이지만 나는 길에서 사랑을 주워 온 것이 확실하다.

외출 후 돌아오면 괜히 어슬렁 나와봐 줄 때 내 다리에 작은 몸을 쓰윽 비비고 모르는 척 지나갈 때 무서운 꿈을 꾸다 잠에서 깨면 저만치에서 지켜봐 줄 때

고양이를 들였더니 집 안 구석구석 늘 따뜻한 사랑이 돌아다닌다.

보이지 않아도 만질 수 없어도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

정의할 수 없어도 누구나 알고 있는

그래서 가장 위대한, 그래서 가장 경이로운 순간을

보름이네 집사 한상지 길냥이도 사랑으로 반려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사람

7쪽

공존(共存)

근화동 옛 미군 부대 䢮캠프 페이지䢯 터 끝자락 오래되고 낡은 집들 사이에 기와지붕과 어깨를 기댄 자그마한 책방을 짓고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기대어 책을 팔며 살아가는 것.

젊은 시내버스 기사가 운전석에서 내려 허리 굽은 할머니의 짐을 내리는 동안 휴대전화에서 눈을 들어 창밖의 잠자리 한 쌍 나풀거림을 쳐다보며 잠시나마 숨겨보는 내 부끄러움.

‘책방 바라타리아’ 주인장 강은영 기억과 이야기를 모으고 파는 사람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사라지고 생겨나는 시간 속에서 세월에 닳은 계단이 내어 준 허리를 붙잡고 한발 한발 자신의 세계를 넓혀 가는 초록의 담쟁이덩굴.

때로는 허술한 듯, 하지만 소모되지 않는 경이로운 방식으로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며 함께 살아가는 것.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간혹 䢮사랑䢯만이 해내는 것. 때로는 하나의 세계를 변화시키기도 하는 그것.

8쪽

사랑은 사랑으로 자란다

집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쏟아지는 아이들의 䢮아빠䢯 호출.

䢬아빠, 이거 해주세요!䢭 䢬아빠, 이거 봐봐요!䢭 䢬아빠, 이게 뭐예요?䢭

아이들이 자랄수록 난도가 높아지는 질문과 다양한 요구사항에 진땀이 날 때도 있지만 최대한 성심성의껏 응해주려고 노력한다. 정답이 아닐지언정 아빠의 사랑이 부족하지는 않길 바라며.

세 아이를 키우며 몰랐던 것을 매일 새롭게 깨닫고 있는 요즘. 결론은 늘 하나로 통한다.

사랑은 오직 사랑으로 자란다는 것.

적어도 3명의 아이에게는 천하무적인 남자 강인구 영상을 제작하는 일보다 사랑을 키우는 일이 더 소중해진 PD, 아빠

9쪽

THEME PIECES

사진 김효주

Share your heart

내 품을 기꺼이 드러내는 일

13쪽

TOOLS

박시월 작가의 도구

서늘한 유리 위 아름다움

14쪽

당신이 본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타인의 아름다움을 훔친다고 나의 것이 될 수는 없다. 답하겠는가. 아마도 생의 기억을 뒤적여 보며 많은 순간을 찾아볼 것이다. 그 순간이 선명한 사람도 있겠지만, 오랜 시간 되감기를 하며 시간이 걸릴 수도

작가도 아름다움을 재현하는 건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기억의 주인조차 기억이 왜곡되기 때문이고, 나와 타인이 가진 언어와 이미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있다. 그렇게 길어 올린 장면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일러스트나 사진이 아닌 회화작업을 하는 이유는 재현이 아름다운 장면을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다양한 것이

아닌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닿을 듯 혼재해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될 것이다. 아름다움의 닿지 않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알 듯 모르겠는 정의는 저마다 다르고, 그 순간에 느꼈던 감정과 보았던 아름다움. 그의 작품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는 그가 것들이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았다. 상상했을 때 분명히 보인다고 생각하지만, 눈을 뜨면 빈 화면이 앞에 있다. 내리는 눈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손을 펼치면

박시월 작가는 䢮네가 본 아름다운 것을 훔치고 싶었다䢯라는 주제로 작업한다. 작가는 다른 사람에게 사라지는 것처럼.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묻는다. 그리고 타인이 들려준 이야기를 듣고, 자신만의 해석을 박시월 작가가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방법은 유리에 통해 그 기억을 유리 위에 그린다. 이 주제로 작업하게 된 연필로 새기는 것이다. 평평한 유리를 갈아 요철이 생긴 계기는 이석원 작가의 책에서 본 구절의 영향이 컸다.

유리 위에 연필로 세로선을 긋는다. 차가운 속성을 가진 䢮나는 내가 본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돈으로도 유리 위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연필이 올려진다. 작가는 살 수 없는 귀한 것. 오직 너에게만 보여주고 싶은 것.䢯* 유리에 작업하기 전 종이에 드로잉을 먼저 하여 작품의 박시월 작가는 마치 좋아하는 시구절처럼 외워서

전체적인 분위기를 본다. 종이 위에 연필로 그린 드로잉은 읊어주었는데 그가 계속 품고 있는 문장이라는 걸 알 수 여전히 좋아하는 작업이다. 있었다.

䢬 문장 단위마다 제 마음에 걸렸어요. 결국, 사랑을 말하는 문장이잖아요. 이 사람이 봤다는 그 아름다운 것도 궁금하고,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걸 오직 너에게만 보여주고 싶은 그 마음도 알고 싶었어요. 저는 사랑이나 아름다움 같은 추상적인 것은 사실 없다고 생각해요.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도 그 아름다움을 알고 싶어서 훔치게 됐습니다.䢭

* 이석원, ‹보통의 존재›, 달, 2009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Part 1~3 / pencil on paper, glass / 30×30cm / 2022

15쪽

䢬 저는 아름다움의 대상에 대해 알 수 없는 상태라고 느꼈어요. 아름다움의 대상을 정확히 어떻게

처음부터 유리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투명감을 표현하기 위해 찾은 반투명 트레이싱지는 물에 너무 약했고, 아크릴판은 열에 취약했다. 여러 실험 끝에 찾은 게 유리였다. 유리는 깨지기 쉽지만,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아름다움과 닮아있다. 무엇보다 유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존재한다. 타인과 세상을 비추며 자신을 드러낸다. 또한, 유리의 촉감은 서늘하다. 작가는

종이와 연필을 사용하게 된 건 대학원 재학 시절 때였다. 자신이 표현하는 아름다움이 서늘하게 보이기를 원했다. 아직 자신의 작업 방향이 정해지지 않았을 무렵, 조교로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은 적절한 정도가 사이를 일하면서도 작업을 할 수 있는 도구가 필요했다. 나름의 오래 유지하게 만드는 것처럼. 아름다움도, 누군가의 방식으로 찾다 보니 가지고 다니며 작업할 수 있는 종이와 기억도 약간의 거리가 있을 때 더 잘 보이기 때문이다. 연필을 골랐다. 종이와 연필로 작업하지만 최소한의 규칙을 정했다. 통화할 때 무의식적으로 쌓은 짧은 선이 박시월 작가가 입주해 있는 춘천예술촌 작업실 곳곳엔 떠올랐고, 세로 선으로만 그림을 완성하기로. 이 규칙은 갖가지 크기의 유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미 완성한 지금까지 이어져 종이 위에 그릴 때도, 유리 위에 그릴 때도 작품도, 작업 중인 작품도 있었는데 유리로 만들어진 세로 선을 쌓는 방식으로 그림을 완성하고 있다. 작가의 작품이라 더욱 조심스러웠다. 정작 그는 아무렇지 그림을 자세히 보면,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의 중심을 비우고, 나머지를 강조한 표현 방식을 쓴다.

않았는데, 유리의 깨지기 쉬운 속성을 자신이 감수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너의 죽음을 걸어두었다»는 깨진 유리를 이용하여 완성한 작품이다.

작가가 수집한 아름다움에는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해서 비워두었는데 구름그림자, 돌, 얼음, 새들이 나온다. 문득 그가 저는 투명감이라고 느꼈던 것 같아요. 비워지고,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물성을 찾다 보니 유리를 발견하게 되었고, 유리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䢭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궁금했다.

䢬 할머니가 리본을 모으고 계셔요. 할머니는 리본이 돈보다 귀한 거라고 얘기해요. 저희가 선물 드린 포장지의 리본에 마음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할머니가 리본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저에게도 전해져 쉽게 잡을 수 없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좋아하게 만든 것 같아요. 구름도 좋아하고, 바다에 떠 있는 구름의 그림자도, 시간이 쌓인 돌도 좋아해요.䢭

«너의 죽음을 걸어두었다»

16쪽

아름다움을 탐구하고, 표현하는 박시월 작가에게

10월 개인전을 앞둔 그가 작업하는 작품은 태몽이다.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여전히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고 어머니에게 물어본 아름다운 순간에는 자신의 태몽이 답한 그는 다만, 아름다움은 사랑처럼 분명히 정의 내릴 있었다. 인생이 너무 힘들어 아름다움이란 잘 몰랐던 수 없다고 말했다.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아름다움을 어머니가 만난 아름다움은 딸을 품고 있을 때 본 들으며 느낀 바는 아름다움이란 사람마다 다르다는

태몽이었다. 처음에 그는 어머니의 아름다움이 마음에 것이었다. 누군가는 첫 아이를 낳았을 때의 기억이, 또 들지 않았다. 인생이 너무 힘들었던 시기였다는 것도, 다른 이는 죽은 새의 모습이, 어떤 이는 어렸을 때 불탔던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닌 꿈이라는 것도, 그리고 그 결과가 집의 화염과 불빛이 아름답다고 얘기했다. 옳다 그르다 자신이라는 것도. 가족이어도 미워할 수 있는 시기가 따위의 가치 판단이 들어가지 않았을 때 타인의 아름다움을 훼손하지 않을 수 있었다.

있는데 어머니를 미워하기 싫어 작가는 어머니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그랬더니 미움보다 애틋함이 남았다. 모른다면 미워할 수 있지만, 알게 된 이상 미워만 할 수 없기 마련이다. 사랑이란 똑바로 보는 것, 제대로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구름 그림자 / oil and pencil on glass / 50×50cm / 2022

작가의 작업 중에 가장 흥미롭다고 느낀 지점은 타인의 사랑과 아름다움은 한 가지로 단호하게 정의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 행위에 있었다. 타인이 본 가장 아름다운 사실이 마음에 든다. 정답이 없기에 숱한 노래와 이야기가 순간을 묻고 듣는 경청하는 장면, 이후 자신만의 시간 끊임없이 변주되어 나온다고 믿는다. 사랑도, 아름다움도 속에서 작업으로 풀어나가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야기한 사실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박시월 작가의 작품을 가만 자와 듣고 표현한 자. 그리고 완성된 작품을 보는 감상자. 보면 스스로 묻게 된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귀한 것, 오직 작품을 가운데 두고 삼각구도가 상상되었다. 분명 하나의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보여주고 싶은 아름다운 기억이 아름다움에 출발한 작업이지만 각각의 아름다움에

무엇인지. 그리고 슬쩍 고개를 돌려 옆 사람에게도 가닿아 있을 거였다. 완전한 이해가 아닌 오해를 하고서. 물어보고 싶어진다. 당신이 본 아름다운 것은 무엇인지. 그런데도 거기엔 여전히 아름다움이 있다. 내가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몸을 기울이는 태도에. 당신의 아름다움을 이해해보겠다는 시도에.

17쪽

INTERVIEW 1

가까이 품을 수록 빛 나는

별빛사회적협동조합

신가숙 서울에서 살다가 남편과 함께 사북면 고성2리에 귀촌. 기본에 충실한 것을 좋아함. 자연을 잘 모르고 살다가 현재 자연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는 중.

김여진 사북면 고탄리 출신. 서울에 살다가 귀향. 이웃복지사로 활동 중이며, 동네 어르신들을 엄마, 아버지로 부르는 가족 부자.

이순미 별빛에서 䢮엄마쌤䢯으로 불린다. 사북면 송암리 출신이며 2005년 송화초 학부모 모임을 하다, 2009년부터 별빛에서 일하는 중. 현재는 산골유학센터장 겸 다양한 마을 돌봄을 사랑으로 도맡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신가숙, 김여진, 이순미

춘천에서 화천 가는 길. 굽이굽이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산골 마을에 자리 잡은 춘천 별빛 사회적협동조합(이하 ‘별빛’)이 나온다. 푸른 나무가 울창하고 새들이 노래하는 곳. 별빛에 도착하자 세 분이 우리를 웃음으로 반겨주신다. 동네 아주머니가 곧 우리 엄마인 마을. 동네 사람들이 함께 저녁을 보내고 술 한잔하는 그런 마을. 별빛은 청년과 아이들이 동네 어르신과 함께 밥을 먹고 함께 대화하는 마을을 만든다. 남녀노소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게 관심과 사랑을 마을에 전한다.

18쪽

별빛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별빛은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이순미 2005년 아이들 공부방으로 시작했어요. 농사짓는 학부모가 많아 방과 후 아이들이 갈 곳이 없었거든요. 그러다 점점 학생 수가 줄어들어 학교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어요. 신입생이 한 명인 해도 있었고요. 학부모 모임을 통해 학교를 존속할 방법을 찾다가 농촌유학을 알게 됐죠. 그렇게 작은 학교 살리기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3년 동안 산골유학 캠프를 했고,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농촌유학생을 받은 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산골유학 덕분에 학교가 살아난 셈이네요. 이순미 전교생이 53명이나 되던 적도 있어요. 작은 학교인데도 체육관을 새로 지었고요. 놀이터도 숲속 놀이터로 꾸며줬죠. 산골유학 덕분에 가능한 일이에요. 학생 수가 점점 줄어드는 추세지만 꾸준히 40명 이상 유지하고 있어요. 올해는 서울시, 강원도 교육청과 MOU를 맺어 7명이 추가로 입학했어요. 힘든 상황이지만 기운이 나요.

산골유학을 하러 올 아이들이나 학부모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이순미 아이들이 어릴 때 흙에서 뛰어놀았으면 좋겠어요. 도시보다 농촌 마을에서 시간을 함께 보내면 좋겠고요. 䢬내 아이만 잘 봐주세요.䢭 하는 분들이 간혹 계세요. 충분히 이해는 되지만 별빛에 온 이상 䢮우리 아이䢯로 키웠으면 좋겠어요. 내 아이가 아닌 우리 아이, 내 부모가 아닌 우리 부모처럼요.

마을 어르신 돌봄도 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이순미 아이 돌봄으로 공부방을 운영했고, 학교를 살리기 위해 농촌유학을 했어요. 한숨 돌리니 어르신들이 보이더라고요. 4년 전쯤 䢮나이 들기 좋은 마을䢯 팀을 꾸려 어르신 돌봄을 하게 되었어요. 사업비를 받아 2년 동안 두 분이 팀을 운영했는데, 현재는 인건비가 넉넉지 않다 보니 같이 하고 있진 않아요. 그래서 그 일을 제가 겸하고 있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어르신 돌봄은 놓치면 안 되겠더라고요. 저도 그 나이가 되었을 때 돌봄 받고 싶거든요. 앞으로도 힘을 내어 별빛을 잘 유지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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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복지사’*라는 개념이 새로워요. 두 분께선 어떤 역할을 하고 계신지 그리고 어르신 돌봄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궁금해요. 신가숙 전문적인 복지사라기보다, 어르신들을 돕는 䢮이웃䢯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좋겠어요. 가까운 곳에서 어르신들을 자주 뵙는 이웃이요.

김여진 맞아요. 우리는 동네 어르신의 일상생활을 도와드려요. 약은 제대로 드시는지 살피고요. 편찮으시면 병원에 모셔 가요. 수요일에는 도시락을 배달해 드리고, 자부담이지만 이·미용을 별빛에 모셔 와서 해드려요.

신가숙 소양강댐효나눔복지센터, 호호방문진료센터와 어르신 사이의 다리 역할도 하고 있어요. 집수리 전문가를 연결해서 방충망, 형광등, 콘센트 등을 수리할 수 있게 조치해 드려요. 혈압, 혈당, 산소포화도 측정을 곁에서 지원해 드리기도 해요.

어르신 돌봄을 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있을까요? 김여진 어르신 한분한분 성향이 다르다 보니 거기에 맞추려고 해요. 공감대를 이루려고 노력하고요. 어르신을 엄마라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불러요. 저희 부모님은 돌아가셨지만 고향이 이곳이라 어르신들 중에는 부모님과 젊은 시절을 함께 보낸 분들이 많아요. 옛날이야기를 들으면 더 잘 통하고 반갑죠. 어르신들이 䢬아유, 우리 딸이야.䢭 그래요.

이순미 이웃복지사를 배정할 때, 우리 마을 어르신은 우리가 담당하려고 해요. 그 마을에 사람이 없으면 최대한 가까운 분이 할 수 있게 하고요. 가까운 곳에서 어르신들을 돌보는 거죠. 이곳이 고향인 분들, 또는 다른 지역에서 오신 분들이 이웃복지사로 함께 하고 계시는데요. 서로서로 챙기고 술도 한잔하는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신가숙 어르신들이 편찮으실 때 호호방문진료센터를 통해 진료받아요. 어르신들은 보통 의사 선생님이 오는 걸 안 좋아하세요. 䢬조금 있으면 나을 텐데, 나이 들어서 병원 간다고 좋아질 것도 아닌데.䢭라고 이야기하시죠. 그러다 몸이 좋아지면 몇 번씩 고맙다고 말씀하세요. 겉으로 이야기하시는 것과 속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일하면서 어르신들의 의외의 면을 많이 발견해요.

춘천 별빛사회적협동조합의 䢮우리마을119䢯 사업에서 시작 됐으며 지역 주민이 지역 어르신을 돌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 이웃복지사: 인구밀집도가 낮아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어르신들을 위한 사회서비스형 노인 일자리 사업이다. 2019년

공동체가 유지되는데 이웃복지사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계시네요. 이순미 저희 같은 경우에는 마을 돌봄을 촘촘히 하자는 마음에서 시작했어요. 요양보호사나 생활복지사분들이 오셔도 어르신들 입장에선 처음 보는 분들이니까 돌봄을 부담스러워하기도 해요. 하지만 이곳은 여기 사는 분들이 직접 이웃복지사로 활동하다 보니 조금 더 편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돌봄 활동을 하고 있지만 반대로 어르신에게 받는 사랑도 있을 것 같아요. 신가숙 어르신들이 텃밭에서 농사지은 가지, 오이, 호박 같은 농작물을 주세요. 반찬 배달할 때, 거실에서 방충망 사이로 빼꼼 보고 계시고, 또 마중 나와 계세요. 저를 기다리고 계셨던 거예요. 커피나 베지밀 같은 걸 주시는데, 이곳저곳에서 마셔서 속이 달 때가 많을 정도죠. 자기가 주는 건 안 마신다고 서운해하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웃음)

김여진 올봄에도 감자를 캐서 박스에 가득 담아 주셨어요. 안 받아 가면 안 된다고, 꼭 줘야 한다고 말씀하세요. 저는 그게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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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농촌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별빛에서 ‘청년 살기 좋은 마을’이란 슬로건을 본 적이 있거든요. 이순미 서울시 청년허브에서 별의별 이주* 프로젝트를 통해 2주 동안 지낼 청년을 지역에 연결해줘요. 청년들은 돌봄교사로 일하며 농촌생활을 함께하죠. 보통 퇴사 후 이직 전이나 입대 전에 주로 와요. 5년째 진행되고 있는 사업인데요. 어떤 친구들은 일자리만 있으면 오고 싶다고, 일자리를 만들어달라고 해요. 꼭 여기서 일을 하지 않더라도 시내에서 일을 하고 저녁에 만나 일상을 함께 하면 어떨까 생각해요. 집이라도 저희가 여기에 마련해 놓으면 되지 않을까 같은 상상을 하고 있어요.

마을에 돌봄이 가득하게 느껴져요. 아이들과 어르신도 자연스럽게 어울릴 것 같고요. 이순미 아이들과 어르신들이 함께 텃밭을 가꾸고 팽이, 썰매 같은 장난감도 만들어요. 아이들과 제철에 맞는 음식을 만들기도 하고요. 자연스럽게 세대 간 교류가 되는 거죠. 주말에는 어르신 댁에 가서 이웃복지사들과 반찬을 하고 어르신 댁에서 밥을 먹고 왔어요. 2년 정도 중단되었다가 다시 진행하는 중이에요.

결국 이 모든 것은 마을에 대한 사랑이나 이웃에 대한 애정 없이는 할 수 없는 일 같아요. 사랑에 대해 여쭤보고 싶어요. 사랑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김여진 사랑은 나눔이라고 생각해요. 사랑이 없고 관심이 없으면 나눌 수 없거든요. 마음을 나누고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서 공감해 주는 마음이 사랑인 것 같아요.

신가숙 사랑은 관심이에요. 특히 어르신께는 이웃 간의 사랑과 관심도 중요하지만, 가족 간의 관심도 중요해요. 자식들이 맞벌이로 일하다 보면 부모를 찾아오는 게 소홀해지는데, 부모는 서운하면서도 몸이 아플 때는 자식이 걱정할까 봐 말도 안 하세요. 저는 어머니한테 자주 못 가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꼭 전화를 드려요. 그것만으로도 엄마가 좋아하시더라고요.

청년들이 해보고 싶었던 일과 원하는 삶의 방식을 실험해 볼 수 있도록 2주 동안 지역살이를 지원한다. * 별의별이주: 서울시청년허브의 삶의 경로 탐색 프로젝트로, 정확한 명칭은 ‹별의별 이주 ○○›다.

인터뷰를 마치고 이웃복지사 선생님이 옥수수를 나눠줬다. 옥수수에는 더운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운동장에는 수업이 끝난 아이들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며 마음껏 소리치고 웃고 있었다. 수요일을 맞아 이웃복지사 선생님은 도시락을 배달하러 가셨고, 우리도 서둘러 뒤따라갔다. 한 가득 도시락을 싣고 전기 카트를 운전하는 선생님이 그렇게 늠름하고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세상 가장 따뜻한 사랑이 집마다 전달되고 있었다. 반가운 얼굴들이 만나 따뜻한 대화가 오가는 걸 보면서, 이웃 간 사랑이 이런 거구나 느꼈다. 내가 본 마을은 가족이었다. 우리가 어떻게든 받아들여야 하는 또 다른 형태의 가족이 있다면, 그게 바로 별빛의 품이 아닐까. 혈연을 훌쩍 뛰어넘은 몇 마디 대화와 관심, 시선이라는 연결고리들이 산골 구석구석을 이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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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2

우리가 사랑한 것들이

우리를 구원 할 때

허남훈 소설가

소설가 허남훈. 춘천에서 태어나 명지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첫 장편소설 ‹우리가 거절을 거절하는 방식›으로 2021 한경신춘문예 장편소설 부문에 당선되었다. 2023년 김유정문학촌 상주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춘천 사람들에게 김유정 소설가는 특별하다. 백 년이 넘도록 김유정의 작품은 읽히고 있고, 연극, 뮤지컬 등이 되어 우리 곁에 있다. 김유정이 살았던 실레마을은 여전히 사랑받고 있으며, 그곳에 김유정문학촌이 있다. 2023년 김유정문학촌 상주 작가인 허남훈 소설가를 김유정문학촌 집필실에서 만나 소설과 삶의 이야기를 두루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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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문학촌 상주 작가로 지내는 작가님의 요즘 일상이 궁금해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상주 작가 집필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매달 한 편씩 문학촌 소장 자료를 바탕으로 한 스토리텔링 원고를 쓰고 있어요. 토요일에는 문학촌 방문객분들을 위한 䢮상주작가 문학체험䢯을 진행하고 있고요. 김유정 작가의 삶과 작품, 그리고 1930년대에 활동했던 작가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소설의 뒷이야기도 함께 그려보는 프로그램입니다. 그 외의 시간에는 문학촌에서 발간하는 문학 잡지 ‹문예제일선›의 교정 작업을 하거나, 최근 초고를 완성한 장편 소설을 퇴고하고 있어요.

김유정문학촌에서 집필하면서 김유정 소설가에 관해 더 많이 알게 되었을 것 같아요. 작가님이 바라보는 김유정 소설가는 어떤 사람인가요? 䢮천재䢯죠. 적어도 소설가로서는 그렇습니다. 김유정 작가는 1933년에 잡지 ‹제일선›에 「산골나그네」를 처음 발표하고, 1935년에 䢮조선일보䢯와 䢮조선중앙일보䢯 신춘문예에 당선, 1937년 3월 사망하기까지 작품 활동을 한 기간이 고작 4년 정도입니다. 그동안 무려 서른세 편의 소설과 열두 편의 수필을 썼습니다. 그 와중에 찰스 디킨스를 비롯한 외국 작가의 작품을 번역했고요. 서른세 편의 소설에는 미완성 장편(‹생의 반려›)이 한 편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즘 소설가들이 일 년에 단편소설 세 편을 발표하면 부지런하다는 얘기를 듣는데요. 서른세 편은 정말 놀라운 숫자입니다. 그 서른세 편의 수준이 고르게 높고, 그 기간 내내 김유정 작가가 폐결핵과 치질, 그리고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4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나 많은 작품을 쓴지 몰랐네요. 특별히 좋아하는 김유정 작가의 소설을 골라본다면요? 저는 「봄·봄」을 가장 좋아해요. 김유정 작가의 소설 중에 「봄·봄」은 다른 작품과 스타일이 다르거든요. 점순이와 장가를 가고 싶어 하는 䢮나䢯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잖아요. 사실 김유정 작가의 다른 작품은 어두워요. 1930년대가 살기 힘든 시절이니 작품에도 반영되었겠죠. 33편의 소설 중 14편이 자전소설이에요. 김유정 작가가 힘든 삶을 살았잖아요. 짝사랑에 실패하거나 형한테 두들겨 맞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밝은 느낌을 주는 「봄·봄」을 가장 좋아해요. 또 한 편을 뽑자면 「만무방」이라는 작품이 있어요. 짤막하게 이야기하자면, 형은 백수고 동생은 소작농이어서 열심히 농사를 지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동생의 논에 도둑이 들어요. 누가 논의 벼를 베간 거죠. 그래서 형이 동생 밭에 드는 도둑을 잡아야겠다 해서 잠복해요. 범인을 잡았는데, 누구겠어요. 동생이에요. 동생이 자기 논의 벼를 훔치는 거예요.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지주에게 다 갖다 바쳐야 하니 자기가 도둑질하는 거죠. 식구들을 먹이려고요.

잠깐 들었는데도 김유정 작가의 소설을 다시 읽고 싶어지네요. 김유정 소설의 특징은 정말 슬픈 얘기를 명랑하게 해요.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이야기를 밝은 톤으로 재미나게 하니까 읽으면서는 그렇게 우울하지 않아요. 다 읽고 나서 내용을 곱씹으면 당대의 현실을 잘 드러내고 비판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여운이 오래 남죠. 역사책에서 몇 명이 굶주렸고, 죽었다는 기록은 할 수 있으나 당대의 분위기와 사회의 세밀한 부분은 소설을 통해 이어지고, 기억되고, 알게 되는 것 같아요. 김유정 작가가 백 년 전의 사회상을 소설로 기록했기에 지금의 우리도 그 시절을 생생히 떠올릴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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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편 소설 ‹우리가 거절을 거절하는 방식›이 2021년 한국경제신춘문예에 당선되었어요. 대학에서는 주로 시를 공부하셨다고 했는데 소설을 쓰지 않다가 어떻게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되었나요? 강원고등학교 재학시절 문예 동아리 䢮여울䢯 활동을 했는데요, 어느 날 친구들과 편집회의를 하다가 하나의 테마로 네 명이서 단편 소설을 한편씩 써보면 어떨까 하는 의견이 나왔어요. 당시에 저는 백일장에 나가면 항상 시를 썼고 소설은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교지에 실을 소설을 쓰면서 며칠 밤을 새운 그 시간이 즐거웠던 기억이 있어요. 아마도 그때의 영향이 아닌가 싶어요. 대학 졸업 후 펜을 놓은 지 십여 년이 지났음에도 어느 날 문득 소설을 쓰고 싶어진 것이. 그래서 3일 만에 첫 단편 소설을 썼고 그게 함께 독서 모임을 하던 친구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써 볼 용기를 얻었던 것 같아요. ‹우리가 거절을 거절하는 방식›은 세 번째 단편 소설로 구상한 작품이었어요. 䢮보험회사 영업 사원의 좌우충돌 영업기䢯를 쓰려고 했는데요. 막상 쓰다 보니 구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 소설에 담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겁도 없이 장편으로 전환했고, 일과 병행하다 보니 완성까지 3년이나 걸린 작품이에요.

소설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청춘들의 이야기가 공감되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어요. 나름의 방식으로 길을 찾아가는 모습에 응원도 하게 되었고요. 작품 속 인물들에게는 서로가 있었던 것 같아요. 누가 더 나을 것도 없는 상황이지만, 힘을 내어 일하고, 불공정한 일이 있을 때는 자기 일처럼 나서주고요. 이런 친구가 옆에 있다면 다시 힘을 내어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립되는 청춘들이 많은 요즘, 작가님이 말하는 작은 연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박노해의 책 제목이기도 한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늘 마음속에 품고 살았어요. 장사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말이죠. (웃음) 장사를 하며 사람들에게 상처도 많이 받고, 소위 말하는 진상 고객에 시달릴 때면 사람만이 정말 희망일까 하고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요. 그런데도 역시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꿈도, 희망도, 사랑도, 위로도, 현실 변혁의 의지도 결국엔 사람에게서 나오니까요. 소설을 통해 䢮함께 걷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주는 위로䢯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도 맞아요. 또, 이야기하자면 연속된 실패 속에 마주한 작은 승리의 과정을 담고 있어요. 그럼에도 이 소설이 우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면 그건 말씀하신 䢮작은 연대䢯 덕분이 아닐까요. 소설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 함께하고 있다는 신호를 서로에게 끊임없이 보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주인공의 나이가 서른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작가님의 서른은 어땠나요? 30대 초반에 다니던 회사가 파산했어요. 갑자기 백수가 되고 재취업을 준비하면서 혼자 대학 도서관을 두어 달 다녔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리 심각할 필요는 없었는데 당시엔 깊은 절망에 빠졌죠. 이번 생은 쫄딱 망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만큼 시야가 좁았던 거죠. (웃음) 아무튼 그때 도서관에서 혼자 컵라면을 먹으면서 생각했어요. 이십 대에 가장 많은 열정을 바쳤던 것이 문학과 영화인데, 내 삶의 위기에서 이 둘은 전혀 도움이 안 되는구나. 그렇다면 다시는 이 둘을 거들떠보지 않으리라. 그리곤 30대를 오직 돈 버는 데에만 바치기로 결심했어요. 마흔 살에 은퇴하는 것을 목표로 말이죠. 그리고 정말 미친 듯이 일만 한 거 같아요. 유아용품 온라인 쇼핑몰로 시작해서, 의류 쇼핑몰을 운영하고, 이어서 오프라인 매장을 열고, 의류 도매도 하고, 동시에 100평 규모의 닭갈비 식당을 운영했으니까요. 거의 7~8년 정도를 추석과 설 연휴를 제외하고는 쉬어본 적이 없어요. 그렇게 일만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소설가가 된 거죠. 결국, 문학이 저를 구원한 거예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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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게 일하며 소설을 완성할 수 있었다니 놀라워요. 소설을 쓰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이 소설의 초고를 완성했을 즈음엔 소설을 써도 되겠다는 약간의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래서 소설 퇴고를 위해 여러 사업을 정리하고, 최소한의 것만 남겨놓았어요. 다 접고 조용한 칠전동에 작업실 하나 얻어서 퇴고에만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다행히 2021년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누군가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을 목표로 하고, 만족감을 얻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문학이 삶을 구원했다는 표현을 하셨어요. 코로나19 전염병이 돌면서 오프라인 매장에 손님이 오지 않기 시작하는데 이게 오래 가겠다는 예감이 들었어요. 또, 제가 7~8년간 돈을 버는 것에만 집중하다 보니까 지겹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밥벌이의 지겨움이라고 할까요? 누구에게나 버킷리스트라는 게 있잖아요. 제가 사업을 시작할 때 40살에 은퇴하는 게 목표였어요. 10년 동안 정말 미친 듯이 일하고, 평생 쓸 돈을 벌자는 생각을 했죠. 막상 마흔이 되었는데 당연히 그 정도로 돈을 벌지는 못했고요. 그래서 은퇴를 할 수 없었는데 소설가가 되면서 강제 은퇴가 되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소설이 제게 새로운 삶을 열어준 거죠.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책이 나오고, 30대에 살았던 삶하고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으니까요.

지금의 소설가로 사는 삶과 30대 때 사업가로 일했던 삶의 간극이 꽤 클 것 같아요. 지난 삶이 그립지는 않으세요? 제가 돈을 많이 벌고 싶었던 이유는 저 자신을 위한 게 아니었어요. 개인적으로는 돈 욕심이 없거든요. 지금도 제가 가장 원하는 삶은 강원도 홍천에 폐가 하나 얻어서 밭이나 가꾸며 책 읽고, 영화 보고, 일주일에 한 번 삼겹살이나 구워 먹는 삶이에요. 그런 삶이면 사실 돈도 얼마 안 들어요. 그렇지만 제겐 가족이 있고, 아이들이 결혼할 때까지 뒷바라지해야 하니까 그런 이유로 돈을 벌고 싶었어요. 사업을 접고 나서 한 2~3년은 수입이 많이 줄었어요. 사실 늘 불안해요.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하고요. 그래도 어릴 때부터 글 쓰는 일이 제 꿈이었기 때문에, 지금 제가 원했던 삶을 살고 있어서 후회는 없어요.

소설 쓰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텐데 작가님에게 소설 쓰는 일이란 무엇인가요? 쉽지 않죠. 소설에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무엇을 어떻게 쓸까 고민하다 보면 마지막엔 항상 䢮내가 언제까지 소설을 쓸 수 있을까䢯에 가 닿거든요. 소설가라는 직업이 들이는 시간에 비해 경제적인 보상이 따르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거나, 미래가 보장되는 직업도 아니니까요. 그런데 최근에 어떤 힙합 가수가 이런 얘기를 하는 걸 봤어요. 䢮당신이 오늘 하루 종일 한 일, 그게 바로 당신이다.䢯 제가 그날 종일 뭘 했는지를 돌아봤어요. 그랬더니 주로 책을 읽고, 소설을 쓰고, 그렇지 않으면 소설 생각을 하며 하루를 보냈더라고요. 그래서 䢮아, 나 소설가 맞구나. 그럼 더이상 미래를 의심하지 말자䢯 하고 스스로 단정을 지어 버렸어요. 그랬더니 마음이 한결 나아지더라고요. 소설 쓰는 일이란 제겐 그저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에요.

소설을 계속 쓰게 만드는 원동력이 궁금해요. 작가님만의 소설 쓰는 방법도 있을까요? 소설을 쓰게 만드는 원동력은 작품마다 조금씩 달라요. 첫 번째 장편은 제가 가장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썼어요. 반면에 최근 초고를 완성한 두 번째 장편은 제가 가장 읽고 싶은 이야기를 썼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진정한 영웅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했던 분들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분들을 떠올리면 가슴이 벅차고 뛰었어요. 일제강점기가 배경이고 독립운동가들이 나오는 소설을 완성하고 있어요. 그리고 아마도 다음 장편은 제가 가장 도전해보고 싶은 형식에 관한 소설을 쓰게 될 거 같아요. 소설을 쓰는 저만의 방법은 따로 없는 듯해요. 다만 소설가들과 얘기해보면 보통 허리디스크와 목디스크, 손목 통증을 달고 사시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런 게 하나도 없어요. 주로 누워서 쓰고, 그마저도 10분 끄적이다 50분 동안 데굴데굴 굴러다니기 때문에 그런 거 같아요. (웃음)

앞으로 어떤 작품을 쓰고 싶나요? 시간을 버티는 작품을 쓰고 싶어요. 김유정의 「봄·봄」이나 「동백꽃」처럼요. 동시에 황석영, 김훈,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오래도록 현역 작가로 활동하고 싶고요. 꿈이 크죠. (웃음)

어느 날 문득 소설가가 되었다는 허남훈 소설가. 그러나 긴 시간 소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여러 일을 돌고 돌아 소설가가 된 건 그가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잊지 않고 품고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건 우리네 인생인 것 같다. 20대에 가장 사랑했던 문학과 영화가 자신을 저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자기를 결국 구원한 건 문학이라고 말한 것처럼. 허남훈 소설가와 이야기를 나눈 뒤에 내게 남은 건 하나의 사실이었다. 한때 우리가 사랑한 것들이 언젠가 우리를 구원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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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T-PEDIA

일러스트 한선주 에디터 이인혜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서 CHUNCHEON PLAYLIST

선곡표 [명사]

많은 곡 가운데 곡조나 노래를 골라 놓은 표.

노을 질 무렵 불그스름하게 물드는 호수 손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경춘선의 낭만 물안개처럼 일렁이는 마음의 정서를 담아, 춘천에서 피어난 노래 여섯 곡을 골라 담았다.

Playlist 01. 그리움은 쌓여 가고 ‹소양강 처녀› ‘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1970년. 소양강 근처에 살던 18살 소녀는 가수가 되기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 ‘일단 부딪히고 보자.’ 작은 음악 회사에 취직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소녀는 노래를 열심히 배워나갔다. 그러던 중, 회사에서 만난 선생님들을 고향으로 초대한 소녀. 당시 소녀의 초대로 춘천을 방문했던 반야월 작사가는 석양 녘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다가 메모지를 급하게 꺼내 들었다. ‘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그렇게 어느 소양강 처녀의 초대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린 명곡이 탄생했다. Playlist 02. 호반의 도시를 알린 ‹춘천댁 사공› ‘춘천댁 사공이, 꽃각시 사공이, 한사코 오마던 그 임을 기다리네….’ 1967년 의암댐 준공을 앞두고 있던 시절. 춘천시에서는 ‘호반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홍보하고자 재미있는 공모전을 개최했다. 바로 ‹노랫말 공모전›. 당시 조선일보 춘천 주재 기자였던 사공구(가명) 씨는 서면 서상리로 시집와 유학 간 남편을 기다리며, 생계로 사공일을 하고 있던 16살 새댁의 사연을 가사로 제출했다. 그렇게 가수 이미자의 목소리로 발표된 ‘춘천댁 사공’은 두 달 넘게 음원 차트 상위권을 차지하며 큰 인기를 누렸다. 잠잠한 북한강 위, 남모르게 떠 있던 열여섯 춘천댁의 사랑은 구슬픈 멜로디가 되어 전국으로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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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ylist 03. 영원히 도착하지 않는 ‹춘천 가는 기차› ‘춘천 가는 기차는 나를 데리고 가네, 5월의 내 사랑이 숨 쉬는 곳….’ 서울 망우역과 춘천역을 이었던 낭만 열차 경춘선. 1989년, 가수 김현철은 춘천으로 가는 길에 옛사랑을 그리워하는 노래 ‹춘천 가는 기차›를 발표했다. 애틋한 가사에는 가수 김현철의 사랑의 순간이 담겨 있다. 재수생 때 난생처음 여자친구를 사귀어 데이트하러 춘천으로 간 날. 하필이면 모든 역에서 정차하는 완행열차를 타는 바람에 가도 가도 춘천이 나오지 않아 그냥 아무 데서나 내려 버렸다고 한다. 후에 그날을 떠올리며 만든 노래가 ‹춘천 가는 기차›이다. 이제 다시 노래를 들어보자. 그 어디에도 춘천에 도착했다는 가사는 없다. 아무렴 어떠한가. 사랑을 실은 기차는 종착역 없이 계속해서 달리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Playlist 04. 새로운 춘천 상징 노래 ‹Always Happy! 춘천!› ‘오늘도 춘천은 행복합니다….’ 문화특별시 춘천에서는 시대에 맞춰 도시를 상징하는 노래를 발굴하고자 2019년 ‘춘천 상징 노래 경연대회’를 개최했다. 시민심사단의 투표와 전문 심사단, 대중음악 평론가 임진모, 작곡가 김형석의 점수를 합산하여 공정한 평가를 진행했다. 대상을 차지한 곡은 CJK팀의 ‹Always Happy! 춘천!› 행복한 춘천 시민의 모습과 희망찬 미래를 노래한 곡이다. 봉의산의 푸른 정기, 활짝 핀 개나리꽃을 담고 있는 이 사랑스러운 노래는 춘천시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Playlist 05. 춘천을 사랑하는 이유 ‹춘천으로› ‘춘천으로 와, 발걸음이 가는 데로 시간 보낼 수 있는….’ 춘천의 감성을 가사에, 멜로디에 꾹꾹 눌러 담아 오랫동안 노래한 밴드가 있다. 5인조 그룹 ‘모던다락방’이다. 모던다락방은 올해로 10년 차 밴드로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음악을 선보여 왔다. 그중에서도 소소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춘천의 이야기, ‹춘천으로›라는 곡은 시민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사람들이 항상 물어 춘천이 뭐가 좋냐고, 딱히 좋은 건 없지만, 가끔 하늘을 볼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곳이야….’ 누군가 춘천을 사랑하는 이유를 묻거든 눈부신 가을날, 이 노래를 꼭 들려주고 싶다.

Playlist 06. 춘천의 보물을 만든 보물 ‹명곡사› ‘명곡사 지날 때면 내 노래가 들려요. 내가 아저씨에겐 자랑이래요…’ ‘닭갈비 골목’, ‘소양강’ 등 춘천의 명소들을 노래한 가수도 있다.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식당의 이름, ‘소양 보리밥’을 줄여서 활동명으로 쓰고 있는 ‘소보’이다. 소보의 따뜻한 노래 중 ‹명곡사›는 1981년부터 시청 앞을 지키고 있는 아날로그 음반 가게 ‘명곡사’를 위한 헌정곡이다. LP에서 테이프로, CD로, MP3로, 스트리밍으로 변화한 세월에도 오프라인에서 음악을 만나는 희열을 판매하고 있는 가게. 춘천의 보물 명곡사와 그곳을 드나들다 가수가 된 어느 소년의 이야기가 노래로 들려온다. 춘천의 사랑이 또 한 번 노래로 기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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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K

사랑의 흔적이 골골이 가득

효자동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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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효자동의 작은 자취방에서 살았다. 1층 원룸이었고 수 있는 공간에 밭이 있었다. 밭은 나무와 채소가 가득해 건물 사이에 있어서 해는 잘 들지 않았다. 대신 심야전기를 숲처럼 느껴졌다. 나무 그늘에서 고양이는 세상 편하게 사용해서 겨울에도 추위 걱정 없이 따뜻했다. 그 집은 허물어지고 이젠 빌라가 들어섰지만, 1년을 살고 나가던 마지막 날에는 집주인 부부가 밥을 대접해주었던 기억이 내려간 길을 다시 올라갔다. 벤치 옆에는 집이 한 채 있고 난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내도 같은 건물에서 살았다고 사이에 길이 있다. 가정집 뒷마당으로 이어질 듯한 길은 한다. 대학 시절을 생각하며 효자동 골목을 걷다 보니 익숙한 공원이 나온다. 과학 꿈나무 공원이다. 무심코 돌아보니, 자취방 골목은 대학을 향하고 있었다.

낮잠을 잤다.

둥지길이라는 푯말이 서 있다. 길에 들어서자 좁은 골목길이 나왔다. 한 사람 정도 다닐 수 있는 골목길은 밑으로 내려갈수록 집들이 옹기종기 있었다. 무릎 정도 오는 담장이 있는 집도 있고, 아예 없는 집도 있었다. 골목 끝에는 봉의산이 한눈에 보였다. 청소년수련관을 길에는 시멘트가 마르기 전에 밟아버려 사람과 고양이 앞에 두고 샛길로 내려갔다. 길 왼쪽에는 호박과 고구마가 발자국이 나란히 남아 있다. 거동이 불편하신 어르신을 자라고 있다. 절벽에 어떻게 심었나 살펴보니 나무계단 위한 보조 난간이 설치되어 있었다. 꽤 많은 집이 비어 옆에 작은 문이 있다. 문 자체도 신기했지만, 절벽 옆에 있는 듯했다. 골목은 조용했다. 좁은 골목을 빠져나오자, 자라는 고구마라니. 벽 위에서 고구마를 수확하는 어떤 건설사의 재개발 주민 사업설명회 현수막이 보였다. 사람을 상상해 봤다. 길 반대쪽에는 건물 한 채가 들어설 효자동도 점점 개발되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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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벽돌로 지어진 연립주택들이 이어 나온다. 벽돌에 새마을 고개를 넘는다. 이름표 하나 없어도 택시 기사들은 적힌 ‘스마일’이 눈에 띄었다. 따라 읽어보고 웃었다. 모두 다 안다는 고개다. 고개 어딘가에 비석 하나가 세워져 효제초 아이들은 수업을 마쳤는지, 학교 앞 슈퍼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고개를 넘으면 또 골목이 나오고 시끌벅적하다. 아이들은 슈퍼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나무뿌리같이 작은 골목이 나온다. 교토에 있는 사색의 길 요즘도 뽑기를 하고 만화 캐릭터 카드를 사는구나.

같은 집과 작은 공원도 있다. 나무 그늘 탓에 이끼가 끼어 아이들은 노란 승합차에 타기도 하고, 조그만 가방을 메고 있고 축축해 보이는 낙엽과 성벽 같은 벼랑이 있는 곳이다. 어딘가로 열심히 걸어간다. 아이들 곁에서 걷다 보니 동네 이곳을 지나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니 금세 조용해지고 사거리에 이르러 성원이용원 앞이다. 가게 유리에 ‘1964년 작은 새들의 노랫소리만 들렸다. 낡은 초인종이 눈에 띈다. 그해 봄’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사장님께 여쭤보니 5월 빛바랜 초인종이 작동할지 궁금했다. 어릴 적 벨을 누르고 16일에 지금의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결혼도 다른 해, 같은 도망갔던 기억이 났다. 초록 대문에 새겨진 사자 두 마리가 날에 해서 절대 잊을 수 없는 날짜라고 했다. 사장님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지만 왠지 정겹다. 여전히 그해 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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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길가에 상추와 들깨가 자라고 있고 할아버지 한 분이 골목길 산책은 즐겁다. 골목을 걸을 때는 일부러 길을 화단에 물을 주고 계신다. 효자동 골목에는 식물이 참

잃기도 하고, 목적지까지 뱅뱅 돌아서 간다. 익숙함 사이에 많다. 곳곳에 스티로폼 박스와 플라스틱 화분에도 파와 새로운 공간을 발견하는 게 좋기 때문이다. 운전하면서 고추가 자란다. 깨진 전봇대 안에서 풀이 무성하고, 시멘트 산책이 줄었지만 지금도 종종 골목을 걷는다. 점점 골목이 바닥 사이를 풀이 메우고 있다. 특히 빈집은 숲처럼

아파트 단지로 개발되어 사라지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느껴진다. 풀은 담장보다 키를 키우고, 대문 위에도 머리 지금의 효자동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오래된 사랑의 자라듯 강아지풀이 자란다. 사람이 떠난 집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걸까.

흔적 위에 지금도 또 다른 사랑이 차곡차곡 포개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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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YGROUND

글 · 사진 공혜진(일상기록공작가)

어쩐지 근사한 소도시에서의 삶 # 03

나만 아는 식물 이야기

대문을 여닫을 때마다 바로 옆, 빨간 벽돌로 된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의 줄기를 보게 된다. 담쟁이덩굴의 잎과 줄기는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처음에는 쪼그리고 앉아야 잎을 볼 수 있었는데, 며칠 사이 줄기가 내 키만큼 자라났다. 식물은 곁을 내주고 눈길을 주면 그 성장을 함께할 수 있다. 살아있는 존재니 너무도 당연한 얘기다.

식물과 매일 인사를 나누면, 어떤 모습이든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챙기는 잘 아는 사이가 된다. 그렇게 함께한 시간이 쌓이면 우리만의 이야기들도 쌓인다. 그러면 우리는 화려한 꽃 때문에 식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초록 잎 한 장을, 삐죽 자란 줄기 하나를,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게 된다. 식물과 나만 아는 우리 둘만의 순간이 생겨나면 그 식물이 점점 더 궁금해지고, 더 많은 시간을 쌓고 싶어진다. 나는 그런 순간의 기억을 확대하고 조합하여 이야기를 만들고, 안타깝거나 대단하게 생각했던 식물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길에서 모은 잎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형태를 만들고, 이름을 지어 부르며, 식물과 계절을 한땀한땀 마음에 새겨 본다.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식물도감› 미끼초 도시 언저리 땅에서 자생한다. 대부분 식물은 잎이 떨어지기 전에 단풍이 드는데, 미끼초는 싹이 돋으면서 곧장 단풍이 든다. 식물이 화려한 꽃 없이 잎 자체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 때가 있는데, 바로 단풍이 들 때다. 미끼초는 잎이 나오자마자 먼저 단풍이 드는 덕에 싹이 나올 때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다.

도시의 길가에 자생하면 일반적으로 잡초로 여겨져 사정없이 뽑히곤 한다. 미끼초는 화려한 잎들로 사람들에게 눈도장을 찍혀 쉽게 뽑히지 않는다. 한번 사람들이 눈길과 관심을 주게 되면 길가에서 자라도 잘 뽑히지 않게 되는데, 아마 식물이 그 점을 공략한 것 같다. 흙도, 빛도, 양분도 어느 하나 충분하지 않은 길가 틈에서 자랄 때 가장 큰 위험요소는 사람이다. 수많은 악조건에서도 잘 성장하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의 손에 뿌리까지 뽑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 미끼가 되는 잎을 먼저 키워내 사람들의 환심을 산 뒤, 위험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도록 진화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미끼초는 단풍 든 잎이 떨어지면 그제야 초록색의 본잎이 나온다. 잎에 집중한 이 식물은 꽃잎이 열리지 않는 폐쇄화(閉鎖花)다. 꽃이 피지 않고 자가수정 되어 씨앗을 만든다. 단풍 든 잎과 새로 나온 잎, 그리고 씨앗 모두를, 말하자면 식물의 성장 과정을 모두 한 개체에서 볼 수 있다. 한 사람의 성장 앨범 전체가 한 장의 사진 안에 담긴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하나의 생물이 성장할 때 겪는 성장의 변곡점을 모두 담은 모습을 한순간에 볼 수 있는 것이 식물을 볼 때 가장 감사하고 신비한 점이다. 식물에게는 언제나 기꺼이 미끼가 될 마음가짐이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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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글 권혁희 (강원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로춘맨천티과시즘

어느 순간부터 춘천은 ‘호반의 도시’, ‘청춘과 낭만의 도시’로 불리기 시작했다. 국내에는 춘천이 아니어도 호수가 많은 면적을 차지하거나 호수를 앞세운 관광 도시는 여러 곳 있다. 그렇지만 춘천만큼 오랜 시간 동안, 그리고 강렬하게 호수를 중심으로 하는 도시의 표상이 만들어진 곳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징은 다분히 춘천의 내부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의미뿐만 아니라 춘천의 장소성을 경험하거나 소비하는 외부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진 역사이기도 하다. ‘호반의 도시’, ‘청춘과 낭만의 도시’라는 메타포는 춘천의

도시 역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이러한 도시 브랜드를 갖추게 된 역사를 사회적 과정과 실천으로 치환시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가장 먼저 경춘선과 댐 건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더 역사적 연원을 거슬러 가면 경춘선 이전에 1915년 경춘가도(京春街道)의 건설이 있었다. 교통의 오지를 벗어나 서울로의 이동을 단축하려는 노력은 춘천의 근현대사 그 자체이자 역사의 중요한 일부였다. 험준한 산과 깊은 물을 건너야 하는 강원도의 수부 도시는 경춘가도의 개설로 오명을 씻은 듯했으나, 춘천은 도로가 아닌 철도가 필요했다. 1896년 원주에서 춘천으로 강원도의 감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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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된 이래 춘천의 도시 위상은 오랜 시간 도전 받아 왔다. 어쩌면 이러한 도시 위상의 콤플렉스를 벗어나기 위해 춘천은 서울과의 연결을 더욱 갈망했는지도 모른다. 일제강점기에는 철도 때문에 경원선의 도시인 철원에 수부 도시의 위상을 위협받을 정도였다. 당시 춘천 읍민의 숙원으로 경춘선 개통은 운동으로까지 번졌고, 결국 1939년에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해방과 전쟁을 거쳐 경춘선이 강변 촌락들을 오고 가게 되면서 비로소 서울을 벗어나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철도로 애용되기 시작했다.

경춘선과 호수의 만남은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다. 의암댐과 춘천댐으로 호수를 갖게 된 춘천은 1973년 소양강댐까지 만들어지며 명실공히 ‘호반의 도시’를 완성하게 된다. 이후 안개 낀 호수의 몽환적인 이미지는 낭만의 판타지를 만들며 무수히 많은 청춘을 이곳으로 끌어들였다. 1968년 『도시문제』에 ‘낭만이 손짓하는 호반 도시 춘천’이라는 글이 게재된 이래 춘천은

로맨티시즘(Romanticism)을 번역한 낭만(浪漫)이라는 상징을 얻게 된다. 여기서 ‘낭만’은 프랑스어 ‘로망(Roman)’에서 기원했음은 널리 알려졌지만, 호수와의 상관성은 잘 이야기되지 않고 있다. ‘호수의 낭만’이라는 은유는 18세기 말 낭만주의의 선구자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 1770-1850)가 전원적 호반시인(Lake Poets, 湖畔詩人)으로 알려진 것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들은 잉글랜드 북서부의 호수와 산이 아름다운 지방에서 우정을 나누며 시작(詩作)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1937년 김동명이 ‘내

마음은 호수요’로 시작하는 아름다운 시를 발표한 이래로 여전히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시구로 내려오고 있다. 이제는 상투적인 은유가 된 호수의 메타포는 ‘춘천’이라는 장소와 상호작용하며 대중들의 감수성 속에서 사랑과 낭만의 수사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수사학(rhetoric)은 인간의 경험으로 축적되고 증폭되며 두 세대에 걸친 시간을 지나왔다. 이는 ‘호반의 도시, 춘천’에서 호수를 제거할 수 없음과 춘천 시민들이 다른 도시가 ‘호반의 도시’란 타이틀을 갖는 것을 수용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과 유사하다. 춘천을 방문했던 외부자들도 과거로부터 소추되는 노스탤지어의 집합적 경험이 서로 다른 기억의 켜 속에 얽혀 있을 것이다. 철길과 강의 풍경이 겹쳐지는 젊은 날의 기억은 중장년층을 다시 이곳으로 불러들인다. 늘 현실 속에서 치열하게 현재를 살아가고 미래를 전망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과거의 시간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다.

춘천의 역사에서 이토록 강렬한 상징이 있었던가. 춘천의 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은 바로 ‘호반의 도시’, ‘청춘과 낭만의 도시’로의 명명과 이를 현재까지 지속시키는 현실일 것이다. 과거의 유산으로서 헤리티지의 의미를 초월하여 현재 춘천에서 살아가는, 그리고 이곳을 상상하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무엇이 춘천의 헤리티지(heritage)가 될 수 있는가? 여러 유무형의 대상과 주제 속에서 ‘사랑과 낭만’을 상징하는 도시의 브랜드가 그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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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1

에디터 권용식

만들고, 뿌리고, 버리기 VS 기대하고, 사랑하고, 소장하기

문화도시 춘천 브랜딩 라운드테이블 ‹만들고, 뿌리고, 버리고›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다 보면 종종 굿즈*를 만들게 된다. 직접 그린 그림에 의미와 이야기를 담아 포스터와 엽서를 제작하는데, 재료를 정할 때 가장 고민이 많아진다. 환경을 생각하는 브랜드 ‘파타고니아’에 대한 책을 읽고 나니 생산자로서 책임과 환경에 관한 생각이 더 커졌다. 최대한 자연에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무로 제작된 종이 대신, 설탕을 만들고 남은 사탕수수 잔여물로 종이 굿즈를 제작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사람들이 굿즈를 좋아하고, 그 의미를 알아줄 때면 뿌듯하지만 남겨진 재고를 볼 때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아무리 자연을 해치지 않는 소재로 만들었다고 해도, 애초에 제작하지 않는 것이 자연에 더 이롭기 때문이다. ‘좋은 굿즈’란 무엇인지 고민이 커지던 지난 8월, 굿즈에 대한 생각을 나누는 문화도시 춘천 브랜딩 라운드테이블 ‹만들고, 뿌리고, 버리고›가 진행되었다.

사용되기도 하고 아이돌, 관광지, 캐릭터 등 콘텐츠를 활용한 일종의 기획 상품. *굿즈: 상품, 제품 등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에서 유래하여, 마케팅 도구로

팀이 목표 금액을 정해 일정 기간 익명의 다수에게 투자받는 방식. *크라우드 펀딩: 아이디어는 있지만 자금이 부족한 개인 또는

굿즈, 이대로 괜찮습니까?

듯했다.

굿즈에 진심인 사람들

춘천문화재단에서도 굿즈를 만든다. 재단이나 사업의 비전을 소개하는 굿즈를 만들고 문화도시 사업이 추구하는 가치를 굿즈에 담는다. 이번 라운드테이블을 준비한 도시문화브랜딩팀 최수현 팀장은 사람들이 굿즈를 단순히 예쁘고 쓸모 있는 물건으로 취급해 아쉽다고 했다. 굿즈는 분야별 전문가들이 함께 모여 만드는 아름답고 다정한 물건이라 생각하는데, 때로는 쉽게 뿌려지고 버려지는 굿즈에 대한 아쉬움이 큰

와디즈에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굿즈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이수정 디렉터는 크라우드 펀딩*을 통한 굿즈 사례에 관해 이야기했다. 와디즈는 굿즈가 가장 많이 소비되는 플랫폼 중 하나인데, 크라우드 펀딩은 제작자에게 있어 꽤 매력적인 굿즈 제작 방법이다. 필요한 만큼만 만들 수 있고 비교적 홍보도 잘 되기 때문이다. 이수정 디렉터는 세계관을 반영한 굿즈, 추억을 건드리는 굿즈가 인기 있으며, 내가 만들고 싶은 굿즈보다 사람들이 원하는 굿즈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덧붙었다. 계속해서 굿즈를 만드는 이들의 발표가 이어졌다. 발달장애인을 디자이너로 양성하고, 고용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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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년까지 모든 사람이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한 목표로 2015년 UN에서 채택. *SDGS: 지속 가능한 발전 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는 전 세계 빈곤을 종식하고 지구를 보호하며

스튜디오 ‘키뮤’는 복지관에서의 미술 수업 이후 버려지는 그림에 대한 남장원 대표의 아쉬운 마음에서부터 시작했다. ‘키뮤’는 발달장애인 디자이너를 ‘특별한 디자이너’라 부른다. 세상의 편견을 허물며 비장애인과 장애인 간의 협업으로 다양한 원화 작품 데이터를 쌓아가고 있다. 작품을 기반으로 다양한 굿즈를 만들고, UN에서 지정한 SDGS*를 주제로 예술 작품과 포스터를 제작하고 있다. 미국 애틀랜타에서 난민 후원 캠페인으로 전시를 진행했는데, 전시 수익금을 기부하며 ‘특별한 디자이너’의 작품들을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선보였다. 근래에는 많은 기업이 ESG*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키뮤에게 다양한 협업 제안을 한다고 했다.

뒤이어 ‘민들레마음’의 발표가 진행됐다. ‘민들레마음’은 대학 시절 병원 봉사활동을 계기로 사업을 시작했다. 창업동아리로 시작하여 중증 희귀 난치질환을 가진 아동이 그린 그림을 상품으로 제작하고 판매 수익을 나눈다. 민들레마음은 아이들이 약하고 도움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문제해결을 하고 성장할 수 있게 돕는다. 아이들을 꼬마 작가로 대우하고 명함도 만들어 준다.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은 흔한 상장 하나 받기 힘든데, 그런 마음을 헤아려 ‘뛰어난 상상’이란 상장도 수여하고 있다고. 민들레마음은 수익금의 절반을 소아, 청소년 완화의료팀에 후원하고 있었다.

소비자들이 ESG 경영을 하는 회사 제품을 선호하면서 ESG가 선택 아닌 선택이 되고 있음. 관점에서 친환경 및 사회적 책임을 갖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단어. 최근 *ESG: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의 약자로, 장기적인

NFT(Non-fungible token, 대체 불가능 토큰)*를

*NFT: 블루체인 기술을 이용해 디지털 자산의 소유주를 증명하는 가상 토큰을 의미

마지막으로 지역 사례가 소개됐다. 이번 춘천마임축제에서는 지역 맥주회사인 ‘감자아일랜드’와 ‘마임맥주’를 공동 기획해 굿즈로 제작했다. 마임축제는 지역 브랜드를 축제에 끌어들이고 맥주를 제공받는 대신, ‘마임맥주’와 ‘감자아일랜드’를 홍보했다. 이러한 협업 덕분에 마임축제 현장 사진마다 마임맥주가 늘 등장하게 됐다. 마임축제는 마임맥주로 축제가 가진 정체성을 높일 수 있게 됐고 감자아일랜드는 지역에 맥주회사가 있다는 것을 축제에서 알릴 수 있었다.

발표가 끝나고 사람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대체로 굿즈를 제작하는 방법부터, 환경을 지키는 대안으로 결국, 좋은 굿즈에는 사랑이 담겨있다. 자연을 이용하는 것에 대한 의견, 지속 가능한 브랜딩과 굿즈 등에 걱정하는 마음과 지역을 사랑하는 마음, 아픈 아이를 위하는 마음, 다름을 이해하고 함께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다양한 맥락과 의견이 있었지만, 성장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사랑이 듬뿍 담긴 굿즈는 분명한 목적성을 갖고 가치와 이야기가 담겨있어야 굿즈는 세상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사람의 마음은 한다는 하나의 맥락으로 좁혀지는 것 같았다. 구할 수 있을 테다. 손꼽아 기다리고, 기쁜 마음으로 건네고 간직할 수 있는 굿즈가 많아졌으면, 나도 그런 굿즈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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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2

글 신리라

흠이 없는 구슬, 나의 아이에게

2021년 1월 28일 1시 28분. 바람에

‘이토록 따듯하게 내리는 눈을 지금껏 흩날리는 민들레 홀씨처럼 가벼웠던 나의 나는 본 적이 없다.’ 딸 로서가 2.8kg의 무게 때문에 하늘에서 내게로 내려온 날, 하얗고 따듯한

나의 엔젤 로서는 따듯한 봄날 들판에 핀 눈송이들도 함께 내렸다. 차갑게 얼어버린 들국화처럼 내 마음속 상실의 방을 도시를 새하얗게 덮어 주던 그 함박눈은 꽃들로 가득 메워 주었고 금세 방안은 어느 젊은 날 “안녕”이란 인사조차 없이 로서의 향으로 가득했다. 평온했던 유년 하늘로 떠나버린 엄마로부터 시작되어, 시절을 그리워하며 끊임없이 과거로 점점 엉켜만 가던 서늘한 내 마음의 방을 회귀하던 나를 생생하게 반짝이는 현재로 포근히 감싸는 할머니의 솜이불 같았다. 데려와 준 고마운 나의 딸, 나의 아이. 늘어진 팔다리를 돌볼 힘조차 남지 않은 쌔근쌔근 곤히 잠든 너는 무슨 꿈을 꾸고 채로 간신히 눈꺼풀만 들어 올리며 생각했다.

있을까?

로서야. 늘 반복되는 하루의 마무리처럼 발에 걸리는 것이 있는지 살피고 남은 너를 씻기고 먹이고 재운 후 잠든 너를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잊지 않는단다. 뒤로하고 지친 몸을 일으켜 책상 앞에 이렇게 하루에 만나는 자식을 사랑하는 앉았어. 며칠 전에는 엄마가 로서를

수많은 마음과 그 모습을 적으려면 사랑하는 마음을 눈치챘는지 로서를 향한 엄마는 오늘 잠들지 못할 수도 있겠다. 마음을 글로 적어 달라고 하더구나. 처음 글 제안을 받았을 땐 춘천에서 ‘딸바보’로 최근 들어 너는 한 계절 한 계절이 다르게 소문이 난 건가 싶었단다. 나는 특별한 너무 빨리 커버리는 것 같아. 너를 낳고 엄마가 아닌데, 내가 본 엄마들은 모두가 1년은 완전히 달라진 일상에 몸과 마음이 나처럼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한데. 어떻게 하면 로서에 대한

조금 지쳐서 육아라는 끝없는 동굴 속을 걷고 또 걷는 느낌이었는데, 요즘은 마음을, 자식을 향한 엄마들의 마음을 하루가 아쉬울 만큼 예쁜 널 보며 우리의 글로 담아낼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어. 시간이 그냥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는 실없고 이기적인 상상을 한단다. 아마도 너와 함께 아침을 준비하고 엘리베이터를 엄마는 너를 만나서 혹시 모르고 지나칠 뻔했던 ‘끝도 없는 사랑’을 배우게 된 것 타러 나가는 순간부터 엄마들을 만난단다.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공손히 같아. 너를 보고 있으면 문득 너를 제외한 인사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내릴 때는 세상 모든 것이 불필요하다는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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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 너는 마치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이렇게 우리는 서로를 키워주며 나아가고 신비롭고 광활한 우주의 한 조각을 예쁘게 오려 엄마 손에 고이 쥐여 주는 것 같아. 삶의 많은 문제를 직면할 때마다 모든 것에 무심한 엄마는 눈물이 없는 너를 바라보면 쉽게 답을 찾을 수 있게 사람으로 아빠한테 유명한데(아빠와 되었단다.

있는 것일까?

음식을 먹고 맛있다며 웃고, 흐르는 음악에 신나게 몸을 맡기고, 비타민 하나에도 즐거워하는 로서를 보면 엄마는 시원한 바람을 부채질해주면 “고마워”라고 가끔 반성도 한단다. 엄마는 로서 보다 말할 때, 엄마가 침대에서 떨어질까 봐 많은 것을 갖고 사는데도 로서만큼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하며 심각한 표정을 즐겁지 않을 때가 있어. 로서는 엄마에게 지을 때 등 수없이 많은 순간 엄마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 사랑과 고마움, 나눔과 위로 등 흐릿해졌던 감정들을

크나큰 감동을 느낀단다. 태어나서 평생 해야 할 효도를 아이일 때 전부 한다고들 새로이 느끼게 해주는 선생님 같기도 해. 하던데, 엄마도 그 말에 무척 공감해.

연애할 땐 좀 울었단다. 이 얘긴 나중에.) 널 낳은 후로는 가끔 눈물이 왈칵 쏟아질 때가 있어. ‘꼬물이’였던 네가 커서 엄마한테 갑자기 “사랑해”라고 말해 줄 때

총 19명의 예술인이 각자 기획한 프로그램으로 참여했다. 시민들과 함께 교감하며, 문화예술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경험하는 시간을 보냈다. 설치, 악기 제작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춘천예술촌 입주작가와 지역 예술인이 *2023년 8월부터 10월까지 춘천문화재단에서 진행한 시민참여 예술창작활동. 회화, 사진

어떻게 이렇게 존재만으로도 완벽*할 수 따사로운 햇볕이 거리를 비출 때 있을까?

*완벽(完璧): 흠이 없는 완전한 구슬.

높은 하늘 사이로 새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거닐 때 존재만으로도 모든 걸 해내는 널 보며 풀 향기 머금은 비가 후두둑 후두둑 떨어질 때 한때는 아이였던 엄마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단다. 너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뜨끈하게 지은 밥에 모락모락 김이 날 때 한마음으로 지켜보며 너의 모든 걸음을 오르고 내리는 삶의 능선에서 상쾌한 응원하듯 할머니, 할아버지의 소중한 딸인 바람이 얼굴을 스칠 때 엄마 자신에게도 너그러이 사랑의 마음을 삶의 좋은 순간을 모두 베풀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단다. 한때는 작고 귀여운 아이였던 이 글을

너에게 주고 싶구나. 그 순간들에 찾아와 줘서 고맙다. 읽는 모든 이모 삼촌들에게도 말해 주고 빛나는 구슬처럼 또르르 굴러가렴. 싶어. 당신은 존재만으로도 모든 걸 해내고 있다고. 충분히 기뻐하고, 충분히 행복해도 된다고.

너의 세상으로 멋지게 훨훨 날아가렴.

2023 춘천예술촌 시민참여 예술창작 활동 〈예술이 모락모락*〉 ‘반짝이는 영원한 순간’

맑게 빛나는 아이와의 순간을 영원히 새겨두고 싶었던 것처럼, 다양한 이들과 함께 그 사랑의 순간을 꺼내고, 그림을 그려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지난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춘천예술촌 프로그램을 통해 만난 각자의 사랑은 그 내용과 느낌이 대체로 비슷하였습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사랑과 동물에 대한 사랑까지. 사랑하는 이와의 특별했던 순간을 이야기할 때면 우리는 모두 반짝였습니다. 어떤 순간은 생을 가로지르며 영원히 간직되기도 합니다. 일상에 그을린 우리는 그 순간을 입 밖으로 내기 시작하면서, 얼굴에 형광등이 켜진 듯 환한 빛으로 물들어 갑니다. 그렇게 벅찬 순간이 우리에게 와 주었다는 것. 가슴 속에 간직되어 때론 그 순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축복 같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충만했던 그 사랑의 순간을 우리 함께 오래오래 기억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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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D

에디터 이인혜

그런 사랑

외할머니는 무엇이든 넉넉하게 준비해 두는 사람이었다. 교자상 몇 개를 붙여도 다 올라가지 못할 정도로 음식은 항상 넘치게 준비했고, 스무 명이 넘는 대식구가 종일 먹어도 부족하지 않도록 과일이나 떡 같은 주전부리를 광 가득 채워두시곤 했다. 얘기하는 걸 좋아하는 할머니는 이야깃거리마저도 늘 넘쳐났다. 뒷동네 어느 아재의 이야기, 보릿고개 시절 얘기까지 몇 시간이 지나도 할머니의 이야기는 동이 나지 않았다. 가을밤에는 외할머니의 큰 손이 조금 겁나기도 했다. 땔감을 몇 그루 넣었는지, 등이 데일 정도로 달궈지던 바닥. 누워있기가 힘들어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며 나도 이렇게 구워지는 건가, 하고 생각했다.

그에 비해 엄마는 소박한 것을 좋아했다. 식탁에는 밑반찬 두세 가지에, 찌개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조금 더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부족해야 맛있는 거라며 엄마의 작은 손은 늘어나는 법이 없었다. 그런 엄마가 달라진 건 내가 결혼한 후부터였다. 친정에 들러 밥을 먹을 때면 새로 담근 김치며 고기에 전골까지 온갖 제철 진미를 한 번에, 그리고 한가득 차려냈다. 식후에는 계절을 담아놓은 듯한 큼직한 과일 접시가 코스처럼 식탁에 올라왔다. 부른 배를 쥐어 잡고 일어나려고 하면 엄마는 무거운 보따리를 내게 안겨 주었다. “반찬을 너무 많이 했어.” 하면서.

소박한 유품이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그런 엄마의 보따리 덕분에 며칠은 부엌에 들어가지 않아도 솜씨 좋은 아내가 될 수 있었는데, 갑자기 손이 커진 엄마에 대해 대수로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하늘이 유독 맑았던 9월의 어느 날. 작년부터 편찮으셨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식구들은 마음을 다해 외할머니를 더 좋은 곳으로 배웅했다. 그리곤 이대로 헤어지기가 아쉬워 잠시 외할머니 집 앞에 모여 섰다. 오랜만에 들른 외갓집은 휑하니 비어 있었다. 끝도 없이 맛있는 음식들이 나오던 할머니의 광에는 쌀 한 톨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고, 한겨울에도 언제나 뜨겁던 할머니 방은 썰렁하게 식어 있었다. 마치 더는 이곳을 찾아올 이유가 없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처럼. 난생처음 마주하는 외갓집의 공허함에 눈물이 났다. 마르지 않던 우물의 바닥을 보고만 기분이었다. 그나마 이마저도 다시는 없을 외갓집에서 마지막 시간. 한 아름 정도로 남은 할머니의

외할머니의 큰 손은 엄마의 보따리와 같은 것이었을까. 품을 떠난 자식의 방문을 기다리며 하나씩 채워두었던 사랑. 그리곤 기회를 만났을 때 몽땅 비워내야만 했던 사랑. 끝없이 차올라 ‘적당히’가 잘 안되는 주체할 수 없는, 그런 사랑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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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 TOR’ S NO

TE

정승희 pot을 만들 때마다 하나의 주제에 관해 깊게 생각하게 된다. 이번 호의 주제는 ‘사랑’. 에디터 회의에서 각각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사랑은 애달프고, 안쓰러워지는 것. 사랑은 마치 비가 쏟아지는 것처럼 어쩔 수 없는 감정. 사랑은 헌신과 희생. 사랑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선한 마음. 내겐 사랑은 언제나 용기였던 것 같다. 사랑하기 위해 용기가 필요했다. 사랑은 많은 것들을 바꿔버리니까. 여전히 사랑하는 것보다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 더 많다. 조금씩 사랑을 확장시키며 살아가는 것이 이번 생의 목표이다.

권용식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지 생각해봤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한다. 그리고 배우는 것을 사랑한다. 유튜브를 보다가 순간 깨달았다. 다른 나라 언어를 배우고 여행을 다니고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배움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pot에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글을 쓰는게 쉽지 않지만 늘 배울 수 있어서 즐겁다. 이번 호는 유독 어려웠지만 사랑 가득한 사람들을 만나서 행복했다. pot 식구들에게도 호 주제를 빌려 사랑한단 말을 전하고 싶다. 감사한 가을이다.

이인혜 글을 쓸 때는 빼놓지 않으면서 말로는 결코 꺼내지 않는 단어가 있다. 바로 ‘사랑’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느끼는 감정인데 왜 사랑한다는 말은 절대 나오지 않을까. 그렇다고 사랑보다 더 나은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아낀다고 득이 되는 것도 없는데 … 괜히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감정을 꺼내 보이면, 발가벗은 느낌이 들까 봐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 같다. 지구 최고 겁쟁이인 나는 그래서 이번에도 종이 위에다 열심히 사랑을 속삭였다. 말처럼 달콤하진 않아도, 진실과 진심을 전부 담았으니 이 사랑도 기꺼이 받아주시길 바라본다.

박인옥 사람이 무르익을수록 사랑의 대상이 바뀐다. 십 대 때는 아이돌 오빠들을 죽도록 사랑했다가 이십 대에 들어 현실연애를 시작하니 남자친구를 불같이 사랑했다. 토끼같은 아이들이 태어났을 땐 정말이지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사랑을 느꼈다. 다시 사회에 뛰어들었을 때 사랑의 냄새가 점점 옅어지는 듯했다. 불같이 맹목적이던 사랑이 범지구적인 사랑으로 바뀌었다고 해야되나… 아무튼 자연을 사랑하게 됐고, 동물원 판다를 사랑하게 됐으며 동료를 사랑하게 됐다. 거기에 음악과 공간, 순간까지 전부. 괜히 신경쓰이는 부분들이 모두 사랑으로 둔갑하는 것만 같다. 이 놈의 사랑, 어떡하면 좋니.

유주연 매번 기획 회의를 할 때면, 우리는 가장 먼저 주제에 대한 정의를 내리곤 합니다. 봄에는 ‘일’이란 무엇인지, 여름엔 ‘놀이’란 무엇인지 머리를 맞대곤 답을 찾기 위해 고민했죠. 하지만 이번 호는 달랐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정의하려 하지 않았어요. 대신 각자 사랑의 순간을 나누고, 서로의 사랑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이렇게도 비슷하고도 다른 사랑의 얼굴이라니. 정의할 수 없고, 정답이 없는 것이라 더욱 아름다운 것이 사랑이더군요. 그 아름다운 것을 더 많은 이들에게 쥐여 주고 싶은 계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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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t Back Issues

N. 01 춘천PLAY

N. 02 낭만PLAY

N. 03 공감PLAY

N. 04 시작팟팟

N. 05 함께팟팟

N. 08 화음팟팟

N. 09 도움팟팟

N. 10 봄봄팟팟

N. 11 배움팟팟

N. 12 무한팟팟

N. 15 시작팟팟

N. 16 변화팟팟

N. 17 기대팟팟

1N. 18 환경

N. 19 여성

N. 22 나의 안부

N. 23 너의 둘레

N. 24 마주보는 우리

N. 25 걷다가 문득

N. 26 환상과 낭만

N. 29 친애하는 나에게

N. 30 시작하는 기쁨

N. 31 솟구치는 용기

N. 32 흩어지는 마음

N. 33 기다리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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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06 열정팟팟

N. 07 잇다팟팟

N. 13 온기팟팟

N. 14 기억팟팟

N. 20 문화도시

N. 21 평화

N. 27 떠오르는 환대

N. 28 멀고도 가까운

N. 34 우리는 매일매일

N. 35 이마엔 땀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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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R 발행인 최연호

EDITOR IN CHIEF 편집장 고영직

CONTENTS & EDITORIAL DIRECTOR 부편집장 박인옥

EDITOR 에디터 권용식, 정승희, 이인혜

PHOTOGRAPHER 사진 이종희, 김효주

ART DIRECTOR 디자이너 이건하

COVER ARTWORK 표지 작품 장승근

ILLUSTRATOR 일러스트 한선주

ADMINISTRATION 기획총괄 이강숙

MANAGEMENT 운영 김태경, 유주연

CONTRIBUTING WRITER 기고 공혜진, 권혁희, 이경미, 신리라

THANKS TO 고마운 분 한상지, 강은영, 강인구, 김종욱, 김수현, NAOMI, INFINITI, 아메, 이로서

춘천문화매거진 POT 제36호 「마음의 모양」 2023년 10월 발행

발행처 춘천문화재단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효자상길 5번길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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