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대첩 제12호(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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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p “부산대첩 정신 시민정신으로 승화시켜, 부산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이영활 전 (사)부산대첩기념사업회 이사장
07p “이순신 정신으로 세계속의 부산 우뚝 세우자” 정태준 (사)부산여해재단 이사, (주)한맥기술 고문
12 제
2025 Autumn
Vol. 12
호
20p 난중일기 공부방 : 붉은 바다 한산도를 가다 이종배 이순신 아카데미 4기
www.busangrandvictory.com
2025 Vol.12 가을호
#표지이야기
한반도에 최초의 서양인(포루투칼인 주 앙 멘데스)이 도래한 것을 기념하는 조 형물이 세워진 경남 통영시 삼덕리에서 바라 본 당포 해안.
03 발행인 편지 부산대첩 정신을 계승하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으며
이용흠 (사)부산대첩기념사업회 〮 부산여해재단 이사장
04 포커스 대담
이영활 전 (사)부산대첩기념사업회 이사장 “부산대첩 정신 시민정신으로 승화시켜
부산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배재한 편집위원
07 이순신 정신을 실천하는 사람들
정태준 (사)부산여해재단 이사, (주)한맥기술 고문 “이순신 정신으로
세계속의 부산 우뚝 세우자”
유순희 부산대첩기념사업회 이사
10 부산대첩이야기 ⑫ 용두산공원에 선 이순신 동상을 보며, 부산대첩기념관을 꿈꾼다.
김종대 ㈔부산대첩기념사업회 명예이사장
12 제9회 이순신 독후감 공모 당선작 폭풍우 속의 항해일지, 『의역 난중일기』
민예림 일반부 최우수 (37세 〮 여, 서울)
14 기획 부산대첩의 의미와 임진왜란 전적지를 찾아
김태현 한국해양대학교 전임강사 겸 초빙연구원
17 탐방 ➀ 이순신 아카데미 강사과정 제9기 여수 〮 남해 전적지
이방재 이순신 아카데미 9기 교육생
발행인 이용흠 편집인 유순희 발행처 ㈔부산대첩기념사업회 발행일 2025년 9월 25일 디자인·제작 ㈜프린테크 (051)301-3113
20 탐방 ➁ 난중일기 공부방 : 이순신의 발자취를 찾아서 붉은 바다 한산도를 가다
이종배 이순신 아카데미 4기
23 칼럼 부산은 강남주를 기억할 수 있을까?
배재한 편집위원, 전 국제신문 사장
25 사업회 소식 ㈔부산대첩기념사업회 NEWS
29 문화프리즘 부산박물관 - 부산, 그 역사의 시작
하종숙 편집위원, 여해차문화진흥원 원장
30 BOOK - 이 한권의 책 친일파의 굴욕
김효정 편집위원, 부산일보 부국장
31 편집후기 회원가입 안내
편집위원 유순희, 배재한, 김태현, 김효정, 하종숙, 유재기 구독안내 (051)923-1000 등록일 2020. 04. 14 등록번호 연제, 사 00004 홈페이지 www.busangrandvictory.com 주소 부산 연제구 중앙대로 1073 부산은행 4층
‘부산대첩’은 ㈔부산대첩기념사업회가 만드는 문화 매거진입니다.
발행인 편지
인사말
부산대첩 정신을 계승하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433년이 흘렀지만, 이
첫째, 교육적 가치입니다. 우리 청소년들이 순신 장군의 부산대첩은 여전히 우리에게 값진 선조들의 희생정신과 국난 극복 의지를 생생 교훈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게 체험할 수 있는 산 교육장이 될 것입니 최근 우리 사업회의 오랜 노력이 결실을 맺 다. 둘째, 관광 자원화입니다. 국내외 관광객 어가는 과정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부산시에서 들에게 부산만의 독특한 역사 문화 콘텐츠를 부산대첩기념관 건립과 관련한 용역 절차를 진 제공하여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것입니 행하고 있다는 소식은 매우 고무적입니다. 이 다. 셋째, 시민 정체성 강화입니다. 부산시민 는 단순한 행정 절차를 넘어서, 부산의 역사적 들이 자신의 고장에 대한 자부심을 더욱 깊이
이사장 이용흠
㈔부산대첩기념사업회
정체성을 회복하고 미래 세대에게 올바른 역사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인식을 심어주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특히 북항터는 부산대첩의 실제 격전지로서 부산대첩은 조선 수군이 왜적의 본거지를 직 기념관 건립에 가장 적합한 입지 조건을 갖추 접 공격하여 적의 보급선을 완전히 차단한 전 고 있습니다. 역사적 현장성과 접근성, 그리고 략적 대승이었습니다. 이 해전을 통해 조선은 도심 재생이라는 현대적 의미가 조화롭게 어 남해 일대의 제해권을 확고히 하였고, 왜적의 우러질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 할 수 있습니다. 추가 침입을 원천봉쇄하는 결정적 전기를 마련
현재 부산시에서 진행 중인 용역을 통해 구 했습니다. 특히 부산포는 왜군의 핵심 거점이었 체적인 건립 계획이 수립될 것으로 기대됩니 기에, 이곳에서의 승리는 전쟁 전체의 판도를 다. 우리 사업회는 이 과정에서 역사적 고증과 바꾼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처럼 중대한 역사적 의 않을 것입니다. 미를 지닌 부산대첩이 우리 지역에서 제대로
전문적 자료 제공 등 적극적인 협력을 아끼지
부산대첩기념관 건립은 단순한 건물 하나 조명받지 못해왔습니다. 다른 지역의 소규모 해 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부산의 역사적 전 현장들이 이미 기념공원과 전시관을 갖추고 자산을 현재화하고, 미래 세대에게 올바른 역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정작 가장 큰 승첩을 거 사관을 전수하며, 나아가 부산이 진정한 역사 둔 부산에서는 이를 기념하는 상징적 공간이 도시로 도약하는 상징적 의미를 갖습니다. 부재했던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보여준 불굴의 의지와 창의 이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북항 재 적 전략, 그리고 나라 사랑의 정신이 기념관을 개발이 진행되면서 새로운 부산의 모습이 갖추 통해 현대적으로 계승되어, 모든 방문자들에게 어져 가고 있고, 이순신대로 개통에 이어 부산 감동과 교훈을 전해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대첩기념공원 명칭 지정과 기념관 건립이 구체
부산대첩의 역사적 가치가 마땅히 인정받 화되고 있습니다. 이는 우연이 아닌 필연적 흐 고, 이를 기리는 공간이 조속히 마련되어 부산 름입니다. 부산대첩기념관이 건립되면 여러 방면에서 랍니다.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의 새로운 문화 명소로 자리잡기를 간절히 바
감사합니다.
“부산대첩 정신 시민정신으로 승화시켜 부산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 부산대첩기념공원·부산대첩기념관 건립 타당성 용역 기념사업회 활동 성과물 - 부산대첩기념공원과 기념관 건립되는 그날까지 여론 모으는 가열찬 노력 필요
이영활 전 (사)부산대첩기념사업회 이사장
이영활 전 부산대첩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재단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다”는 일성으로 자신의 일상(日常)을 전했다.
다음은 이 전 이사장과의 일문일답이다.
이영활 전 부산대첩기념사업회 이사장과의 인터뷰는 불 볕더위가 절정이었던 8월 12일 낮 부산여해재단 사무실에 서 진행됐다. 오랜 만에 셔츠와 양복 상의를 입고 나왔다는 이 전 이사장은 “지난 해 3월 부산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을 끝으로 부산시를 비롯한 41년간의 공직생활을 마무리 하고 인생에서 가장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서 “이 제 한 사람의 시민으로 부산발전을 응원하며 지켜보고 있
이 전 이사장은 “2023년 5월 부산북항 재개발지역 내 신 설 도로명이 이순신대로로 결정되고, 부산대첩기념관 건립 타당성과 적정 위치 선정을 위한 기본 용역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그동안 기념사업회 활동의 결실”이라며 “기념관이 빠 른 시일내 건립될 수 있도록 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시민 여 론을 모으고, 부산시를 비롯한 관계기관의 적극적인 참여와 도움을 이끌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부산대첩기념사업회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2018년 국립부산과학관장 임기를 마치고 부산외국어대 석좌교수로 근무할 때 이순신아카데미에 대한 소개를 받 고 2019년 이순신아카데미 4기 수강을 하게 된 것이 첫 인 연이었습니다. 우리역사의 위대한 영웅으로만 알고 있었던 이순신 장군의 사랑 정성 정의 자력으로 대표되는 내면의
가치와 그 정신을 보다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부산대첩 대는 대략 85척 내외의 전선으로 130여 척의 일본군 함선 의 의미와 가치도 새삼 알게되었죠. 초대 이사장으로 이순신아카데미를 이끌고 계셨던 김종
을 격파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부산대첩은 또 부산의 정서와 지역성과 딱 맞아떨어집니 대 전 헌법재판관께서 자신의 후임 이사장을 맡아달라고 다. 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로서 낙동강 전선의 최후보루 말씀하시길래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는 사람으로서 이순신 로서 풍전등화에 놓였던 나라의 운명을 지켜냈듯이 부산 장군의 정신은 물론 부산대첩의 의미를 시민들에게 널리 대첩은 조선을 구한 결정적 전투입니다. 이순신 장군 스스 전파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하여 수락했습니다. 지역사회 로 최고의 전투라고 하고 있지않습니까. 에 봉사한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이사장 재임 기간 다양한 사업과 활동으로 부산대첩기념 사업회의 기틀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부산대첩 승리의 의미를 부산의 시민정신으로 승화시켜 부산발전 나아가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합니다. 부 산 시민정신으로 자리잡은 해양성, 개방성, 포용성은 물론 불의에 맞서는 저항정신은 이순신 정신과 맞닿아 있습니다, 명예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을 비롯한 제가 이사장을 맡은 뒤 부산항 북항 일대에 부산대첩기념공 재단 관계자와 기념사업회 회원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이 원을 조성하고, 신설되는 북항 재개발지역 내 도로에 부산 순신 장군의 정신과 부산대첩의 의미를 시민들에게 제대 대첩로라는 이름을 붙이고, 중장기적으로 부산대첩기념관 로 알리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습니다. 다양한 기념행사와 을 건립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일부는 이뤄졌고, 일 전적지 탐방, 부산MBC에 요청해 부산대첩 다큐를 제작하 부는 현재 진행형이지만 아쉬움이 남는 부분도 있습니다. 는 등 지역사회에 부산대첩을 알리고 중요성을 인식시키 는 데 주력했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때 부산북항 관통 대로를 부 산대첩로로 명명하자는 제안은 결국 이순신대로로 탄생하
의미는?
재임 시절 적지않은 성과를 이뤘는데 아쉬움이 남는다는
아쉬움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공직생활 전반을 는 계기가 됐습니다. 부산북항 일원에 부산대첩기념공원과 돌아봤을 때 10월 5일을 부산시민의 날로 정해 범시민적으 부산대첩기념관을 건립하자는 제안은 이제 부산시가 타당 로 기념하면서도 정작 그날의 유래인 부산대첩을 기리는 성 용역을 진행하고 있어 큰 전환점을 맞게되었습니다. 기 데는 다소 소홀했다는 것입니다. 34년을 부산시에 근무한 념사업회를 중심으로 우리 모두가 이뤄낸 성과입니다.
사람으로서 돌이켜보면 부산대첩에 대해 이해가 부족했던 사실 부산대첩에서의 승리는 바람 앞의 촛불같았던 조선 점이 부끄럽습니다. 또 이순신 장군의 사랑 정성 정의 자력 을 구한 기적같은 승리였습니다. “이때까지 네 번이나 출전 등 내면의 가치를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 이순신 정신을 사 하고 열 번을 싸워 번번이 승첩을 거두었으나 장수들과 군 표로 삼아 더 나은 공직생활을 하고, 나아가 부산시민 정신 졸들의 공로를 논한다면 이번 부산싸움(부산대첩)보다 더 으로 자리잡도록 하는 데 공직자로서 좀 더 큰 역할을 하지 큰 것이 없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년(1592년) 네 차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입니다. 해전(옥포 당포 한산 부산)중 부산대첩을 승리로 이끈 뒤 선
두 번째는 부산시 공직자 출신으로 지역사회에 대한 봉 조에게 직접 올린 장계(壯啓)에서도 잘 드러나지 않습니까? 사활동으로 이사장을 맡았지만, 취임 2개월 만에 부산상공 부산대첩은 조선수군이 먼저 왜군의 본진을 공격한 최초 회의소 상근부회장을 맡게 돼 이사장직에 전념하지 못한 의 전투였으며, 이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함 것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부산대첩기념관 건립 타당성과 적정 위치 기본 용역이 9 월부터 시작됩니다. 의미 있는 일이지만 과제도 만만찮다 는 지적도 있습니다. 부산시가 타당성 용역에 착수한다는 것은 부산대첩의 중요성과 부산대첩기념관의 필요성을 현 실적으로 인식하고 행동에 나섰다는 것입니다. 이는 매우 긍정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제대로 된 기념관을 만들고 부산항 북항에 부산 대첩기념공원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부산대첩의 정신을 부산발전의 원동력으로 삼기 위해 반 드시 기념관과 기념공원이 조성되도록 기념사업회를 중심 으로 더욱 더 가열차게 시민의 의지를 하나로 모아 나가야 할 것입니다.
새 정부 출범과 함께 부산이 아주 중요한 시기를 맞고 있죠?
저출산 고령화와 인구 유출로 지역과 수도권 격차는 갈 수록 커지고 있어 부산으로서는 위기와 기회가 상존하는 녹녹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재명 정부가 해양수산부를 부 산으로 이전하고, 또 HMM 부산이전, 동남권 투자은행을 부산에 설립하겠다는 것은 부산발전을 위한 긍정적 요소 입니다. 부산시민의 염원인 가덕신공항과 산업은행 이전, 글로벌도시특별법 제정 등이 답보 상태에 놓여있거나 표 류하는 것은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중앙정부와 머리를 맞 대고 의논해 빠른 시일 내 해법을 찾아야 합니다.
부산시에서 공직자로서 첫 발을 내디뎠고, 34년 근무하며 경제부시장으로 퇴임했으니 부산발전과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기억나는 일이 있다면?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거의 대부분 기획 재정 경제 분야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 이영활 전 (사)부산대첩기념사업회 이사장 프로필 > • 부산대 경영학과 졸업(1976년 2월) • 행정고시 24회 합격(1981년 3월) • 부산시 기업지원과장, 비서실장, 재정관, 기획관, 경제진흥실장, 미래전략본부장, 정책기획실장 • 부산시 경제부시장(2011년 11월~2014년 7월) • 부산외국어대 석좌교수 • 국립부산과학관 초대 관장 겸 이사장(15년 7월~17년 7월) • 부산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21년 4월~24년 3월) • 부산대첩기념사업회 이사장(21년 2월~23년 12월) • 홍조근정훈장 수훈(2006년) • 동명대상 공공부문 수상(2014년)
산을 위한 대형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추진하며 부산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것과 지역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한 것도 공직생활의 보람으로 남았습니다.
부산시 근무 34년을 비롯해 국립부산과학관 초대 관장, 부 업무를 맡았습니다. 부산에 컨테이너세를 도입해 부산의 산외국어대 석좌교수, 부산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등 41년 심각한 교통난 해소를 위한 재원으로 활용하는 데 역할을 간의 공직생활을 대과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한 것은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항만배후도로와 광안대 감사할 일입니다. 앞으로는 지역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 로 건설비도 컨테이너세가 톡톡히 한몫을 했습니다. 강서국제물류산업단지, 동부산관광단지 조성 등 미래 부
회공헌 활동, 젊은이를 위한 멘토로서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배재한 편집위원
“이순신 정신으로 세계속의 부산 우뚝 세우자”
정태준 (사)부산여해재단 이사, (주)한맥기술 고문
부산대첩기념사업회 통합이사).
온 토목분야 전문가.
◆ 산업의 동맥잇는 국토개발 · 관리전문가 ‘국토맨’, ‘토목맨’으로 평생을 국토개발 유지관리 보수 등 산업의 대동맥을 잇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온 정태 준 전 부산지방국토관리청 도로시설국장(부산여해재단
정태준 이사는 지난 2007년까지 35년 여간 우리나라 국토의 3분의1에 해당하는 경상남·북도, 부산 대구 울산 등 3개 광역시와 5개 유지관리사무소를 관할하는 부산지 방국토관리청에서 국토개발계획, 설계, 시공, 관리, 유지 보수 등의 업무를 총괄해온 인물이다. 한양대 공대 토목공학과 출신의 정 이사는 국토를 잇 는 도로, 교량, 터널 3대 공사 현장감독을 비롯해 시공감 리 설계 측량에 이르기까지 국토개발과 관리업무를 총괄 하며 대한민국 국토의 변화 발전과정을 일선에서 목도해
사람과 산업의 소통과 흐름을 잇는 국토의 동맥은 사 람의 동맥 못지않게 과학적 연구와 철저한 전문성을 요
한다. 건설과정에서 혹은 완공 후 안전사고나 붕괴는 대참 대처와 현장 안전점검, 원칙준수 등 공정에 집중하며 최선 사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리던 시간이 절반으로 줄어 이제는 전국 어디를 가든 잘 닦
비포장도로가 대부분이던 시절엔 평균 6~8시간 이상 걸 ◆ ‘이순신 맨’이 된 인연
을 다해온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조직 속에서 정 이사는 책임감, 전문성은 물론 인품이 훌 여진 도로 덕분에 서 너 시간 정도면 못 갈 곳이 없는 시대. 륭하다는 말을 종종 들어온 사람. 평소 이순신 장군을 존경 정 이사는 퇴임하기 전까지 부산국토청 산하 도로건설 해온 그는 맨 처음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의 저서 ‘내게는 80여 건의 현장을 진두지휘하며 도로건설과 개통을 진행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습니다’(2004)를 만나는 순간 더욱 해왔다. 당시 조기 도로개통을 위해 불철주야 현장의 민원 이순신에 매료되었다고 밝힌다. 이후 ‘신은 이미 준비를 마 을 해결해가며 안전에 만전을 기해온 정 이사는 “각 공사 쳤나이다(2012)’ ‘이순신, 하나가 되어 죽을 힘을 다해 싸웠 현장 마다 공사구간의 많은 민원이 제기돼 공사의 지연도 습니다(2022)’로 이어지는 개정판을 모조리 다 섭렵할 정 있었으나, 현안사항에 대해 긍정적으로 판단해 검토·처리 도로 20여년간 이순신에 푹 빠져 살아왔다. 하고 각종 민원에 대해서는 봉사자세로 민원을 원만하게 해결함으로써 전체 공사 준공에는 차질이 없도록 공사를
그도 그럴것이 요즘도 기-승-전-이순신으로 통할만큼 어 추진해온 덕분”에 여러 기간국도 건설이 차질없이 순조롭 딜가나 이순신이야기로 시작해 이순신이야기로 끝나는 게 게 진행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발표를 하고 있는 정태준 이사.
생활화 돼있다.
각에서 적극 알리게 되었지요.”
“이순신의 4대 정신에 대한 엑기스를 제대로 알게 된 것 은 이순신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하면서 부터입니다. 이때 진정으로 만나게 된 이순신의 정신을 체득화 하면서 더 많 은 사람들이 저처럼 성웅 이순신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
“‘3번의 파직과 2번의 백의종군을 한 이순신은 자신의 입 장을 원망하기보다 나라와 백성을 먼저 생각했는데 그 에 너지의 원천은 무엇인지 그 마음이 궁금’했고, 여기엔 그가 평생 일관되게 실천해온 ‘사랑 정성 정의 자력’이라는 4대 그는 “공사기간 동안에는 태풍 등 천재지변으로 인한 사 실천가치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부터 접목하고 고대비가 중요하다. 그동안 쌓았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 실천하고 싶었다”는 정 이사. 그는 아카데미 수료 후 이순 로 여러 차례 태풍 홍수해 등에도 완벽하게 대비할 수 있었 신의 내면가치와 정신을 알리기 위해 자처해서 강사로 활 고 각 현장에 아무런 피해가 없이 공사를 잘 진행할 수 있 동해왔다. 었던 것은 복”이라며 무엇보다 “민원사항에 대한 적극적
초·중등 현장실습이나 부산진성 탐방 등 강의 시, 주로
이순신의 사람됨과 따뜻하고 인간적인 부분을 어필하면서 흥미를 유발하기도 한다는 정 이사는 ‘사랑’이라는 단어로 집약되는 이순신의 리더십을 많이 언급하고 있다.
“추운 밤 보초를 서는 군사가 창을 잡고 조는 모습을 본 이순신은 대신 창을 잡아주며 함께 보초를 서주고 등을 두 드리며 격려해주었던 부하 사랑이야기나, 부하가 부친상을 당했을 때 자기 말을 내어주며 타고 가라고 해준 사례 등 사랑의 리더십으로 군대를 통솔했던 이순신의 부하사랑은 부하들이 목숨을 내놓고 전장에서 싸울수 밖에 없었던 근 원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순신맨’ 정태준 이사는 이순신 아카데미 2기를 수료했다.
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아시아 유럽을 연결하는 유라시 아의 관문, 부산은 다시한번 세계로 도약하는 중심도시가 “이순신은 장수라기보다 ‘성인’ ‘성웅’이라고 표현하는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게 맞는 거 같다.”는 정 이사. 그는 “물질만능주의시대 돈과 권력이면 모든 게 통하는 피폐한 사회, 이념의 갈등과 분
덧붙여 정 이사는 “북항 중심도로 명칭이 이순신대로로 열, 사회 양극화로 병들어가는 현대사회에서 이순신의 4대 확정되었고 곧 친수공원으로 임시로 붙여진 북항내 공원 정신만한 치유수단은 없는 것 같다”며 “이순신의 4대 정신 의 이름을 ‘부산대첩공원’으로 확정짓고, 이어 부산대첩기 엑기스를 뽑아낸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의 말처럼 우리 사 념관까지 건립되면 명실공히 부산은 이순신정신이 살아 회의 병폐를 해결하고 치유하는 처방수단으로 삼자는 그 숨쉬는 역사문화도시로 재탄생하게 될 것”이라며, 아울러 말이 너무 가슴에 와 닿는다”고 말한다.
◆ 이순신 정신으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주도 아울러 그는 “부산은 아시아의 현관, 유라시아의 관문이 라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며 “지정학적 위치만 봐도 부산
고 밝혔다.
“이순신 정신을 국내는 물론 전 세계시민이 평화로운 지구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 시대정신으로 삼게되길 소망한다”
한편 정 이사는 한양대 토목공학과 졸업 후, 건설교통부 은 언젠가 크게 전 세계에 떨치게 될 것인데 그럴러면 부산 에 입사해 수송정책실 도로건설과, 부산지방국토관리청 진 만의 정신이 있어야 되고 그 정신을 이순신 정신으로 삼았 영국도유지건설사무소장, 건설교통부 정책조정개발팀 지원 으면 한다”고 강조한다. 그야말로 이순신 정신으로 유라시 근무, 원주지방국토관리청 건설관리실장, 부산지방국토관 아 이니셔티브를 주도하자는 것이다.
리청 건설관리실장 등을 역임한 건설교통부의 베테랑으로 뛰어난 업무처리 능력과 인화력을 인정받아온 인물. 은퇴후 “머잖아 북극항로가 열리면 세계 물류가 바닷길로 보다 (주)한맥기술 부회장, 고문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단법인 원활하게 소통하게 될 것이고, 북극을 거쳐 네덜란드까지 부산여해재단 부산대첩기념사업회 통합이사를 맡고 있다. 유순희 이사 물류비 절감과 운반시간 단축이라는 획기적인 시대를 맞
부산대첩이야기 ⑫
명예이사장이 들려주는 부산대첩 이야기
#12
김종대
㈔부산대첩기념사업회 명예이사장
용두산공원에 선 이순신 동상을 보며, 부산대첩기념관을 꿈꾼다.
한달 전 쯤 용두산공원에 올라가 1956년 3월에 세워진 이순신 동상을 보 았다. 부산대첩의 역사를 알리려고 온갖 노력을 하고 있는 나에게 벼락치듯 눈에 들어온 것은 동상 뒷면에 새겨져 있는 비문이다.
이 동상의 뒷면에는 1955년 12월 22일자 이은상 선생의 비문이 새겨져 있 고, 그 비문 중 나를 무거운 감격 속으로 몰고 간 부분은 아래와 같다.
「 … 이제 그의 동상을 구태여 이곳에 세우는 뜻은 저 임진란 때 왜적이 이 땅에 첫발을 올려놓은 곳이 바로 여기였기로 그날의 고난을 뼈저리게 기 억하자 함이요, 또 그가 왜적과 더불어 7년 동안 싸우던 중에서도 부산 앞 바 다의 큰 승첩이 가장 결정적이었기로 그것을 외치며 자랑하자 함이요, 그리 고 또 여기가 이 나라의 관문이라 예서부터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워 국토 수호의 피어린 정신을 안팎으로 나타내자 함이니, 겨레여 두 팔을 들어 그를 찬양하고 또 그의 앞에 맹세하자 … 」
이 글이 나에게 특별히 눈에 들어온 것은 부산대첩기념사업회에서 부산대 첩기념공원과 기념관을(이하 부산대첩기념관으로 쓴다) 세우고자 하는 뜻 과 이 동상을 세운 뜻이 어찌도 이리도 같을까 하며 탄복했기 때문이다.
부산대첩기념 사업도 시작된지 8년이 지나고 있다. 우리 사업회는 그동안 부산포해전으로만 읽던 부산승첩의 이름을 부산대첩으로 만들고, 부산의 대 부분 시민들이 부산대첩에 관해 모르고 있던 상황에서 그날이 부산시민의
날의 연원된 역사적 사실임을 홍보해 왔다. 그결과 4년
그러면 부산대첩이 이루어진 북항터에 부산대첩기념 전에는 부산시의회에 의해 「부산대첩기념사업 지원 조 관을 건립하는 뜻은 무엇이어야 할까? 례」가 제정되어 부산대첩은 이제 공식 명칭의 지위를 얻 었고 또 법적으로 공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명분을 얻 었다.
2년 전에는 부산대첩이 이루어진 북항의 중심도로 이 름이 「이순신 대로」로 명명되었고 작년에는 부산시로부
을 다음과 같이 새겨 보았다.
지금 용두산공원에 세워진 이순신 동상에 새겨진 비 문을 재 구성해 부산대첩기념공원과 기념관 건립의 뜻
「 … 부산대첩기념관을 구태여 이곳 북항 터에 세우 터 북항2단계 개발지역내에 부산대첩기념관 건립을 약 고자 하는 뜻은 첫째, 저 임진왜란 때 왜적이 첫발을 올 속받았으며, 올해는 기념관 건립 타당성을 위한 용역에 려놓은 곳이 바로 여기 북항이었기로 여기서 그날의 고 까지 나아가고 있다. 북항친수공원이란 임시명을 바꿀 난을 뼈저리게 기억하자 함이요, 둘째로 이순신이 왜적 때는 반드시 북항에서 거둔 승리의 역사를 살려 부산대 과 더불어 7년 동안 싸우던 중에서도 적의 수륙병진 전 첩기념공원으로 해야 한다는 여론이 각계의 여론과 언 략을 깨부수어 나라를 지켜낸 가장 결정적 승첩이 바로 론에서 지지해 주는 만큼 잘 되리라 믿는다.
부산의 이 북항 바다에서 거둔 부산대첩이므로 우리 함 께 그것을 온누리에 외치며 만방에 자랑하자 함이요, 그 이제 부산대첩기념공원이 생기고 그안에 부산대첩기 리고 마지막으로 여기가 이 나라가 문을 연 첫 관문이고 념관이 건립되면 우리의 기념사업은 한 매듭을 지을 수 해양수도 건설의 상징이며 북극항로 개척의 거점인지라 있다. 이 기념관을 중심으로 부산대첩의 자랑스런 역사 여기서부터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워 부산의 호국 역사 가 만방에 드러나고 여기에서 이순신의 정신을 배우는 를 되살리고 부산대첩의 승리 정신을 계승하여 번영하 작은 이순신들이 수없이 배출되면 이 나라는 특히 부산 는 내일을 기약하자 함이니, 부산의 주인들이여 두 팔을 은 지금보다 나은 도시가 되어 갈 것이니 우리의 미래를 들어 부산대첩을 찬양하고 이곳에 부산대첩기념관을 세 그려보면 흥분을 감추기 어렵다.
워 만대에 우리의 번영을 맹세하자! … 」
제9회 이순신 독후감 공모 당선작
폭풍우 속의 항해일지, 『의역 난중일기』
민예림 (37세 〮 여, 서울) 독후감 일반부 최우수 당선작
난중(亂中)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영혼의 조각들 서가에 꽂힌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의역 난중일기』는 마치 오랜 시간 바닷속을 표류하다 마침내 해안가에 밀려온 유리병 속 편지 처럼, 나에게 특별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승리의 기록이나 영웅의 연설문이 아니었다. 400여 년 전, 절체절명의 전쟁 한복판 에서 한 인간이 하루하루를 버텨내며 남긴, 때로는 건조하고 때로 는 격정적인, 날것 그대로의 영혼의 조각들이었다. 김종대 전 헌법 재판관이 ‘의역(意譯)’이라는 섬세한 작업을 통해 현재의 언어로 되 살려낸 이 일기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이순 신이라는 거대한 이름 뒤에 가려진 한 인간의 내면 풍경 속으로 우 리를 깊숙이 초대한다. 우리는 이순신을 완벽한 영웅, 불굴의 지휘관으로 기억한다. 그의 동상은 광장의 가장 높은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그의 이름은 위 기 극복의 상징처럼 회자된다. 그러나 『의역 난중일기』의 책장을 넘 기는 순간, 우리는 그 단단한 청동상 아래 숨겨진, 피와 살을 가진 한 인간의 고독과 마주하게 된다. 일기 속 그는 때로는 병마에 시달리고 (몸이 몹시 불편하여 신음하다), 때로는 악몽에 잠 못 이루며(밤새도 록 번민하다), 때로는 인간적인 정에 흔들리고(어머니 생각에 눈물 짓다), 때로는 현실의 부조리에 분노한다(원균의 행태를 한탄하다). 이 ‘의역’된 일기는 단순한 번역을 넘어, 행간에 숨겨진 그의 감정과 고뇌를 오늘 우리의 심장으로 직접 전달하는 통역관 역할을 한다. 일기라는 형식 자체가 지닌 힘은 바로 이 ‘날것’의 진솔함에 있다.
영혼의 지진계, 일기장: 고뇌의 파도를 기록하다 『의역 난중일기』는 이순신이라는 한 인간의 영혼에 설치된 정밀 한 지진계와 같다. 매일의 기록은 그가 겪었던 내면의 미세한 떨림 부터 거대한 격동까지 고스란히 담아낸다. 우리는 일기를 통해 전 투에서의 용맹함뿐 아니라, 전투를 앞둔 그의 깊은 불안과 고독을 엿본다. 어머니의 부고를 접했을 때의 인간적인 슬픔(“간담이 찢어 지는 듯하다”),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들었을 때의 참담함(“내 마음이 어찌 다를까?”), 원균과 같은 이들의 모함과 조정의 불신 속에서 느 꼈을 깊은 배신감과 울분 등, 그의 감정은 꾸밈없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영웅의 이미지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위대 함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든다. 그가 강철 같은 의지만 가진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슬픔과 분노, 불안을 느끼면서도 그것에 함몰 되지 않고 자신의 소명을 향해 나아갔다는 사실은 더욱 경이롭게 다가온다. 마치 거친 파도에 끊임없이 부딪히면서도 제자리를 지키 는 등대처럼,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휘몰아치는 감정의 폭풍우 속 에서도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단 하나의 불빛을 놓지 않았다. 특히 일기 곳곳에 등장하는 날씨에 대한 관찰, 꿈 이야기, 점을 치 는 모습 등은 흥미롭다. 이는 그가 초인적인 힘에 의존했다는 의미 가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며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 했던 절박한 몸부림으로 읽힌다. 치밀한 전략과 철저한 준비라는 이성적인 면모 뒤에는, 이처럼 인간적인 고 뇌와 불안을 다스리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매일 밤 촛불 아래에서 붓을 들었던 행위 자체는 어떤 의미였을까? 그것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서 자신을 객관화하고 내면의 질서를 잡으려는 자기성찰의 과정이었 을 것이다. 격랑 속에서 배의 균형을 잡는 밸러스트처럼, 일기를 쓰 는 행위는 그가 시대의 광풍 속에서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도록 붙 잡아주는 닻과 같았을지 모른다. 오늘날 우리 역시 수많은 정보와 감정의 파도 속에서 길을 잃기 쉽다. 어쩌면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 은, 하루의 끝에서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기록 하는 ‘나만의 난중일기’가 아닐까? 그의 기록은 우리에게 자기성찰 의 중요성을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일깨워준다.
일상의 씨줄과 리더십의 날줄: 평범함 속에 깃든 비범함 흔히 리더십은 화려한 연설이나 극적인 결단과 같은 비범한 순간 에 발휘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의역 난중일기』는 리더십이 그것은 후세를 위해 다듬어진 글이 아니라, 폭풍우 치는 망망대해 오히려 꾸준하고 성실한 ‘일상의 반복’ 속에서 단련되고 발현됨을 보여준다. 일기에는 거북선 건조 과정, 군량미 확보, 병사들의 건강 위 흔들리는 배 안에서, 내일의 생사를 알 수 없는 한 인간이 스스 상태 점검, 부하들과의 소통, 정보 수집과 분석 등, 전쟁 지휘관으 로를 다잡기 위해, 혹은 그저 흘러가는 상념을 붙잡기 위해 써 내려 로서 그가 매일 처리해야 했던 수많은 평범하고 때로는 지루하기 간 내밀한 기록이다. 이 독후감에서 나는 이 깨어진 영혼의 조각들 까지 한 업무들이 빼곡히 기록되어 있다. 을 조심스럽게 주워 맞춰보려 한다. 영웅 이순신이 아닌, 인간 이순 이는 마치 정교한 직물을 짜는 장인의 모습과 같다. 그는 ‘일상’이 신의 내면이라는 깊은 바다를 탐험하며, 그가 남긴 파편들이 오늘 라는 씨줄 위에 ‘리더십’이라는 날줄을 엮어, ‘승리’라는 결과물을 우리의 삶이라는 해안선에 어떤 무늬를 남기는지, 그 은유적 의미 만들어냈다. 작은 나사 하나가 풀리면 거대한 기계가 멈추듯, 그는 를 찾아 항해를 시작하고자 한다. 12
사소해 보이는 일 하나하나가 전체 전력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이 해하고 있었다. 부하들의 작은 공을 칭찬하고(이것이 김종대 역자 가 강조하는 ‘조직의 인간성’ 존중일 것이다), 병사들의 식사와 잠 자리를 걱정하며, 때로는 함께 술잔을 나누며 마음을 다독이는 모
지해 폭풍우를 헤쳐나가야 하듯, 이순신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결 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일기는 우리에게 속삭인다. 아무리 절망 적으로 보이는 상황일지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분명 우리가 기댈 수 있는 ‘12척의 배’가 남아있다고.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발견하고, 습 속에서, 그의 리더십은 차가운 전략이 아니라 따뜻한 인간애에 그것을 바탕으로 다시 일어설 용기를 내는 것이다. 뿌리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리더십은 또한, 마치 묵묵히 밭을 가는 농부의 모습과도 닮 아있다. 그는 당장의 성과에 일희일비하기보다, 멀리 내다보며 끊
이처럼 『의역 난중일기』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 우 리의 삶과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김종대의 ‘의역’을 통해 우리는 이순신의 목소리가 시대를 넘어 우리에게 직접 말을 걸어오는 듯 임없이 준비하고 대비했다. ‘유비무환’의 정신은 그의 일기 전체를 한 생생한 경험을 하게 된다.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이다. 그는 승리에 도취하지 않았고, 패배에 좌절하지 않았다. 다만 매일의 기록을 통해 상황을 복기하고, 문제 점을 파악하며, 더 나은 방책을 강구했을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정
미완의 일기장, 우리 손에 들린 붓 책장을 덮으며, 나는 이순신의 『난중일기』가 여전히 미완의 기록 성(精誠)’의 리더십, 즉 결과뿐 아니라 과정 하나하나에 온 마음을 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가 남긴 마지막 기록 이후, 그의 다하는 자세의 발현일 것이다.
정신과 가치는 시대를 넘어 수많은 사람의 삶 속에서 다르게 변주 오늘날 우리는 어떤 리더를 원하는가? 화려한 언변과 카리스마도 되고 이어져 내려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일기장은 끊임없이 새롭 중요하지만, 『의역 난중일기』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구성원 들의 ‘인간적인 삶’을 돌보고,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묵묵히 자 신의 자리를 지키는 꾸준함이야말로 진정한 리더십의 바탕이 아닐 까? 이순신의 일기는 거창한 구호가 아닌, 성실한 일상 속에서 공동 체를 지키고 성장시키는 리더십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게 쓰이는, 인간 정신의 위대함과 고뇌에 대한 영원한 기록일지도 모른다. 『의역 난중일기』는 나에게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박제된 영웅이 아니라, 끊임없이 흔들리고 고뇌하면서도 자신의 신념과 책임을 향 해 나아갔던 한 인간으로 깊이 느끼게 해주었다. 그의 일기는 완벽 함이 아니라, 불완전함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치열한 성찰과 실 천의 기록이었기에 더욱 값지다. 영웅의 가면 뒤에 감춰진 그의 인 간적인 눈물과 한숨은, 오히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 큰 위
시대를 관통하는 메아리: ‘현대의 원균’과 ‘12척의 희망’ 김종대 엮어 옮김 『의역 난중일기』의 백미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 을 현재의 언어로 옮기는 것을 넘어, 그 기록이 오늘 우리 사회에 로와 용기를 준다. 우리 역시 완벽하지 않기에, 그의 고뇌에 공감하 던지는 의미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연결하는 데 있다. ‘의역’은 과 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가 되어, 400년 전 이순신의 고민이 놀랍도 록 우리의 현실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일기 속에서 이순신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원균의 존재는 오늘날
고 그의 극복 과정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종대의 ‘의역’은 이 고전이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에 말을 거는 살아있는 텍스트임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그의 해석을 통해 우리는 이순신의 목소리를 빌어, 분열과 불신으 에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익명성에 기댄 온라인상의 비방과 로 가득 찬 현대 사회의 문제를 진단하고,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 혐오, 정치권의 끊임없는 책임 전가와 네거티브 공세, 조직 내에서 의 시기와 모함 등은 모두 ‘현대판 원균’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일 기에서 이순신은 원균에 대한 분노와 답답함을 토로하면서도, 대의
는 법을 배우며, 일상의 성실함 속에 숨겨진 리더십의 가치를 재발 견하게 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한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는 경이 를 위해 극단적인 대립을 피하려는 고뇌를 보인다. 이는 우리에게 로운 경험을 했다. 그리고 이제 내 손에는 보이지 않는 붓이 들려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우리는 우리 안팎의 ‘원균’에 대처해 야 하는가? 이순신처럼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서 공동체의 통합이 라는 더 큰 가치를 위해 인내하고 지혜롭게 대처하는 자세가 필요 함을 그의 기록은 말해준다. 분열이야말로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서 운 내부의 적임을 그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명량해전을 앞두고 남은 12척의 배를 보며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 졌던 기록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인간 정신의 상징과도 같
있는 듯하다. 나 자신의 삶이라는 일기장에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 어떤 고뇌와 성찰을 담아낼 것인가? 이순신이 그러했듯, 매 순간 진심을 다해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책임을 기록하고 감당해낼 수 있을까? 『의역 난중일기』는 웅장한 교향곡이라기보다는, 폭풍우 치는 밤 홀로 연주하는 첼로의 낮은 선율과 같다. 그 선율은 화려하지 않지 만 깊은 울림을 지니며, 듣는 이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린다. 다. 이 ‘12척의 배’는 오늘날 청년 실업, 경제위기, 개인적인 좌절 등 이제 그 선율을 따라, 우리 각자의 ‘난중일기’를 써 내려갈 차례이 우리가 마주한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아직 남아 있는 가능성’ 혹은 다. 이순신이 남긴 고독한 자기성찰과 희망의 기록은, 우리가 삶이 ‘우리가 붙잡아야 할 희망의 근거’로 재해석될 수 있다. 마치 망망 대해에 떠 있는 작은 조각배일지라도, 그것이 전부라면 그것에 의
라는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동안 길을 밝혀주는 영원한 북극성이 되어줄 것이다.
부산대첩의 의미와 임진왜란 전적지를 찾아
김태현
한국해양대학교 전임강사 겸 초빙연구원
수영읍성
자성대진성
임진왜란의 자랑스러운 유산이 부산에는 많이 남아 있다. 부산 찍 출발하면 가덕도나 다대포를 시작으로 승전지를 대첩을 거둔 부산항 일대 바다와 목숨을 바쳐 끝까지 왜적과 싸운 다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여수에서 출발해 부산포까 육지에서나. 이젠 조상들이 목숨을 걸고 남겨준 부산항의 자랑거 지 목숨을 걸고 찾아온 조선 통합함대의 결의를 느껴 리와 자부심을 드러낼 때다. 부산대첩의 의미를 살펴보고 부산에 보자. 많은 사람이 여러 스토리텔링 과정을 통해 부산 있는 임진왜란 전적지를 찾아본다. 시간이 날 때나 시간을 내어 부 의 새로운 꿈과 도약을 추진하고 있다. 사실에 근거한 산 일대를 둘러보는 역사탐방을 해보자. 혼잡한 정치 세태 속에서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다. 이순신이 거북선을 이끌고 부산시민의 자긍심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부산포해전
부산 북항 바다에서 적선 130여 척을 깨고, 수많은 적 을 죽여 꼼짝 못 하게 해놓고 갔다. 찬란한 부산대첩 의 역사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제대로 이순신이 부산과 첫 번째 인연을 맺은 것은 1592년 9월 1일 부산 의미와 뜻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 이젠 의미를 제대로 포 해전이다. 부산 일대는 임진년 전쟁을 마무리한 곳이다. 육지에 드러내보자. 부산포해전, 부산대첩을 가슴에 품자. 그 서는 왜적에 망가져도 바다는 이순신과 조선 수군이 지켜냈다. 이 리고 애정 어린 눈길로 조상의 숨결을 느껴보자. 순신은 1592년 6월 13일(음력 5월 4일) 첫 출전해 옥포(합포, 적진
올해부터 부산 북항 일대를 부산대첩공원으로 만들 포)에서 승리했다. 7월 8일(음력 5월 29일) 두 번째 출전해 당포(사 자는 열기가 살아나고 있다. 이순신이 옥포와 당포, 한 천 당항포 율포) 승첩을, 8월 10일(음력 7월 4일) 세 번째로 출전 산, 부산 승첩을 통해 제해권을 확보했다는 의미를 부 해서는 한산(안골포) 승리를 이뤄냈다. 네 번째 적의 본진을 격파 산사람들의 심장에 담아보자는 의지다. 일본과의 전쟁 하러 9월 29일(음력 8월 4일) 출전한 곳은 부산. 이곳에서 조선 수 에서 단 한 차례만 패배했다면 조선은 일본의 손아귀 군은 장림,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영도), 초량목을 거쳐 에 들어갔고,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사라졌을 것이다. 부산포에서 승리를 거둔다. 130여 척의 왜선을 격파해 대첩을 이 공원화는 절체절명의 시기에서 조선을 구했다는 뜻을 룬 자랑스러운 곳이다. 부산 어디에서나 오전 9시 이전에 차로 일 담고 있다. “사랑, 정성, 정의, 자력”의 이순신 정신으로
새로운 부산을 만들고, 강건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강한 의지의 만호영이다. 가덕도의 동편으로는 가덕진성이 위치 표현이다. 부패한 고위공무원이 판치는 부산을 뿌리부터 새롭게 만 해 안골포와 웅천으로 이동하는 왜구를 견제하고, 천 들어보자는 의지도 담는다.
성진성은 가덕도의 서편에서 거제로 이동하는 왜군을 부산은 임진년과 정유년 때 왜군에 침략당해 7년 전쟁 내내 일 살폈다. 강서구 천성동에는 연대봉 봉수대도 있다. 조 본 군대가 주둔한 병참기지 역할을 했다.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선 전기부터 있던 봉수대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13일) 대륙침략의 탐욕에 빠진 일본은 수륙병진 전략을 세우고 조 일본군의 침입 사실을 처음으로 관측한 곳이다. 선을 침범했다. 조선은 1년 전부터 침략의 조짐을 알았지만 ‘설마’
사하구 다대동으로 넘어오면 다대포 해전지가 있 라는 안일함으로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했다. 20일 만에 서울을 다. 다대포첨사 윤흥신과 그 동생 흥제가 왜군과 접전 내주고, 선조 왕은 의주로 도망가는 참변을 당했다. 백성들은 고향 을 펼치다 사망한 곳이다. 이순신이 이끈 조선 수군은 을 떠나 피난처를 찾아 헤매야 하는 참혹한 난리를 겪었다.
1992년 9월 1일에는 일본 대선 8척을 격파한 곳이기 육지에서 왕과 신료, 지방을 지키는 육군과 수군 장수들은 왜적 도하다. 부산포해전에서 전사한 녹도만호 정운 장군 을 막지 않고 도망쳤다. 이때 여수에 주둔한 이순신의 전라좌수군 을 기리기 위한 정운공순의비도 있다. 임진왜란 때 의 만이 미리부터 국난을 예견했다. 거북선을 만들고 훈련을 강화하 병장으로 활약했던 안방준의 《부산기사(釜山記事)》 는 등 철저한 대비를 했다.
를 보자. “국가를 되찾은 것은 호남을 잘 보전했기 때 이순신이 전쟁 첫해 1592년 5월부터 10월에 걸쳐 거둔 임진년 4 문이고, 호남을 잘 보전한 것은 이순신의 수전(바다전 대 승첩은 어느 것이나 구국의 기초가 된 소중한 승첩이라 아니할 투)에 힘입은 것이며, 이공의 수전은 모두가 녹도만 수 없다. 김종대 부산대첩기념사업회 명예이사장은 “옥포승첩은 호 정운의 용력에서 말미암은 것이다”라고 썼다. 서평 승리의 씨를 뿌린 것이고, 당포승첩은 그 씨가 자라 잎과 가지가 무성해진 것이고, 한산승첩은 마침내 꽃을 피운 것이며, 부산승첩 은 그 열매를 맺은 것이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부산포 해전 이전의 전적지 육지 쪽에서 둘러볼 곳도 많다. 강서구 가덕도에서 여정을 시작 하면 좋다. 부산포해전을 치르기 위해 여수에서 출동한 조선 수군 은 가덕도에서 8월 28일부터 9월 1일까지 3일 동안 머물렀다. 8월 28일에는 천성 선창에서, 29일에는 가덕 북변에서, 9월 1일에는 다 시 천성 선창에서 밤을 보냈다. 가덕도는 부산포해전을 치르기 위 한 작전기지 역할을 한 곳이다. 가덕진은 현재 행정구역으로 부산 광역시 강서구 성북동 일대다. 조선시대 행정구역으로는 웅천현 에서 남쪽 방향 수로로 30리 떨어진 곳에 있다. 원래 섬이었지만 이젠 가덕대교를 통해 육지와 연결됐다. 천성만호진성은 강서구 천성동 일원이다. 천성진성은 1544년 사량진왜변이 일어난 후 해 안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첨사영이 가덕진성과 같이 축성됐던
부산북항
장림포
포 해전지는 사하구 구평동 일대에, 윤공단은 사하구 다대동에 있 니시 유키나가가 주둔했다. 모리 테루모토가 조선성 다. 서구에도 전적지 유산이 있다. 대신공원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을 허물고, 나온 돌 등으로 쌓은 왜성이다. 임진왜란 보이는 돌비석이 ‘충무공 이순신 영모비’다. 사상구에는 ‘사상 9인 때 명나라 원군으로 온 장수 만세덕이 진주한 적도 있 의사비’가 있다. 후손들이 연구계를 결성해 연구제단을 설치하고, 어 ‘만공대’라고도 한다. 중구에는 용두산공원에 이순 400년에 걸쳐 봉행하고 있다.
신 동상이 부산항을 내려다보고 있다. 용두산은 산의 동구, 남구지역은 왜적의 본거지로 조선 수군이 오늘날까지 최 모양이 용이 머리를 들고 바다를 건너는 듯한 모습을 고의 전과를 거둔 현장이다. “왜적 전함들은 부산진성 동쪽에서 5 취하고 있다는 데서 비롯됐다. 리(2㎞)쯤 되는 언덕 아래에 세 군데로 나뉘어 정박하고 있었다.
수영구에도 가슴 아픈 임진왜란 유산이 많다. 경상 큰 배, 중간 배, 작은 배 모두 합쳐 470여 척 됐지만, 아군의 위세에 좌수영의 본영이 부산 수영사적공원에 있어서다. 경 눌려 감히 바다 가운데로 들어올 수 없었다. 판옥선들이 바다를 짓 상좌수영은 낙동강 동쪽 남해(부산)에서 경주까지 해 이기듯이 밀고 들어가자 전선에 타고 있던 왜적들과 산 위의 소굴 안을 방어했다. 수영사적공원은 1995년 문화재 정비 속에 있던 왜적들은 모두 총과 활을 옆구리에 끼고 산으로 올라갔 사업을 전개해 수영공원을 역사 교육장과 시민휴식 다. 적은 여섯 군에 진을 친 채 아래를 내다보며 총알과 화살을 퍼 처, 관광지로 단장했다. 임란 때 수령, 경상좌수사 박 부어댔다. 마치 비가 오고 우박이 쏟아지는 듯했다. 적들 가운데 홍은 전쟁이 나자 즉시 도주하고, 이를 본 백성들과 편전을 쏘는 자들은 모두 조선인 것처럼 보였다.(선조실록 1592년 관군이(25의용단) 분개해 의병을 일으킨 곳이다. 공원 6월 28일자 기사) 동구 좌천동 앞바다였던 부산포 해전지에서 조 에는 수영성 남문과 곰솔나무, 송씨할매 사당, 경상좌 선 수군은 470여 척 중 100여 척의 왜선을 격파했다. 중앙공원이 수영 선소 유허비 등이 있다. 동래구에는 부산 충렬사 나 증산공원에 올라 조망하면 이 일대 바다가 잘 보인다. 정공단 가 있다. 임진왜란 때 부산에서 순절한 분들을 모시는 은 임진왜란 때 순절한 부산진첨사 정발을 비롯한 여러분들을 모 사당이다. 신분 차별 없이 의사 93명의 신위를 모시고 신 곳이다. 1766년 부산진첨사 이광국이 부산진성 남문 터에 세웠 있다. 동래읍성 전투 때 전사한 선열들을 기려 세워진 다. 동구 범일동에 있는 자성대공원은 1592년 왜군의 선봉장인 고 송공단은 동래시장길 27에 있다. 동래부사였던 송상
동래읍성
역사관도 둘러보는 것이 좋겠다.
해야 할 때다.
현의 동상은 송상현 광장에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다. 전사이 가도난(戰死易 假道難 싸워서 죽기는 쉬 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오늘날 부산 정신으로 표상되는 글을 남긴 송상현은 왜적과 맞서 싸우던 중 전사했다. 동래읍성과 동래읍성 북문 앞의 동래읍성
부산대첩공원에서 부산포해전의 자부심을 가져보 자. 임진왜란 육지 패전에서 비롯된 부정 인식을 극복 해 ‘다크 투어리즘’ 차원에서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보 자. 한일 평화 시대를 선도하자. 과거의 아픔과 원한을 이겨내고, 새로운 화해의 역사를 써가는 노력을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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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진남관에서 느낀 정신의 무게와 환대
껴졌다. 그 환대와 배려 덕분에 우리는 더욱 깊이 역사 속으 이후 우리는 여수 진남관으로 향했다. 국보 제304호로 지 로 들어가 장군의 정신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분들의 친절 정된 이 건물은 조선시대 최대 규모의 객사로, 현재는 장군 은 이번 답사에서 큰 감동으로 남았다. 을 기리는 상징적 공간이다. 장군이 직접 머문 건물은 아니
그리고 무엇보다 구국의 성지 여수는 그 자체로 매우 특 지만, 전란 직후 재건된 진남관은 후대가 장군의 정신을 기 별했다. 여수 여해재단 관계자분들과 해설사분들의 설명 속 리고자 세운 기념비적 건축물이다.
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대한 자부심이 진하게 배어 있 정면 15칸, 측면 5칸의 웅장한 건물 앞에 서니 압도적인 었다. 여수 사람들에게 이순신은 단순한 장군이 아니라, 곧 기세가 느껴졌다. 김숙연 해설사는 “진남관은 단순한 관청 지역의 정체성이자 삶의 중심이었다. 이 모습을 보며, 비록 건물이 아니라, 충무공의 정신을 후대에 전하고자 한 염원 부산에도 부산대첩이라는 대승의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 의 상징”이라 설명했다. 아울러 이순신광장에 전시된 거북 고 아직까지 이순신 장군에 대한 홍보와 기억이 충분치 않 선을 바라보며 ‘장군이 왜 비밀 병기를 창조해야만 했을까’ 다는 아쉬움을 느꼈다. 우리도 여수처럼 더 많이 알리고, 자 라는 물음을 스스로 던졌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려는 긍심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다짐이 마음속 깊
정한 리더십이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여수 여해재단 강용명 이사장님과 서천석 교장선생 님을 비롯한 선배님들의 친절한 안내와 정성 어린 설명은
창의와 집념,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본받아야 할 진 이 자리 잡았다.
4. 순천왜성에서 되새긴 전략의 의미
점심 식사 후 찾은 곳은 순천왜성이었다. 낮은 구릉지대 단순한 해설을 넘어, 후학들을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이 느 에 쌓인 성은 정유재란 당시 소서행장이 최후의 방어기지로
여수 진남관 앞에서 찍은 제9기 이순신 아카데미 강사과정 단체사진.
삼았던 곳이다. 무너진 성벽에 서니 조선 수군이 바다를 잃 고 내륙 깊숙이 적의 침략을 허용했던 아픈 역사가 떠올랐
순천왜성
이락사
다. 그러나 동시에 끝내 바다를 되찾고 전세를 역전시킨 이 의 글자가 아니라 생생한 전투의 현장이 눈앞에 되살아나 순신 장군의 전략적 안목이 빛나는 현장이기도 했다.
는 듯했다. “싸움이 급하니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장군의 이영선 해설사는 이곳을 가리켜 “견내량 고수 전략의 위대 마지막 유언은 장군의 희생이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오늘 함을 되새겨야 하는 장소”라 강조했다. 돌 하나하나에 전쟁의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임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긴박한 기운이 서려 있는 듯했고, 적의 심장부를 압박하며 다 시 국운을 되살렸던 장군의 치밀한 판단력이 실감되었다.
5. 관음포 이락사에서 숙연한 순간과 맹세
6. 돌아오는 길, 마음에 남은 것들
버스 안에서 동기들과 나눈 대화의 중심은 한결같았다. “책에서 배우는 것과 현장에서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르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남해 관음포의 이락사였다. 노량 묘도의 이순신대교, 진남관의 기둥, 순천왜성의 돌담, 이락 해전의 승리와 동시에 장군이 순국한 성지다. 제승당 현판 사의 솔숲이 우리에게 전해준 감동은 어떤 글로도 대신할
귀는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이곳에서 우리 제9기생들은 충 무공의 영정 앞에 모여 작은 맹세를 드렸다.
의 ‘대성운해(大星隕海, 큰 별이 바다에 떨어졌다)’라는 글 수 없었다. 이순신 장군은 철저한 준비와 창의적 전술, 불굴의 의지 로 나라를 지켰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나라와 백성을 “삼가 충무공 이순신께 맹세합니다. 저희 부산의 작은 이순 먼저 생각했다. 이번 현장 학습은 단순한 답사가 아니라, 오 신 사도들은 충무공께서 남기신 사랑, 정성, 정의, 자력의 정 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정신을 품고 살아야 할지 묻는
오늘 드린 맹세가 반드시 실천으로 이어져 후손들이 건강한 대한민국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다하겠습니다.”
신을 본받아, 병든 사회를 치유하는 주춧돌이 되고자 합니다. 성찰의 시간이었다. 특히 여수 여해재단 이사장님과 교장선생님, 그리고 선배 님들의 따뜻한 환대는 이번 답사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다. 짧은 맹세였지만, 모두의 눈빛은 달라졌고 마음은 벅차올 현장에서 받은 그 친절과 격려는 장군의 정신을 배우려는 우 랐다. 역사적 성지에서 드린 그 약속은 각자의 삶 속에서 반 리의 발걸음을 든든히 지켜주는 또 하나의 큰 힘이 되었다. 드시 실천해야 할 책임이자 사명으로 깊이 새겨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날은 한여름의 무더운 날씨 속에서도 첨망대에 올라 노량해전의 전장을 내려다보니, 역사책 속 우리의 열정이 빛났던 하루였다. 땀방울이 흐르는 가운데서
이락사
도 서로 격려하며 끝까지 진지하게 참여했던 그 모습 자체 가 이번 답사의 또 다른 의미이자 큰 성과였다. 우리 9기생들은 그날 이락사에서 드린 맹세처럼, 충무공 의 정신을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작은 이순신으로서의 사명 을 다할 것을 다시 한 번 다짐하며 부산으로 돌아왔다.
이종배
이순신 아카데미 4기
통영 앞바다의 붉은 노을 <수국작가촌에서>
난중일기 공부방 : 이순신의 발자취를 찾아서
붉은 바다 한산도를 가다
‘난중일기 공부반’은 지난 7월 12일 토요일과 13일 일요일 1박 2일 일정으로 거제, 통영, 한산도 일대를 탐방했다. ‘난중일기 공부반’은 김종대 명예이사장이 발간한 ‘난 중일기: 이순신이 보고 쓴 임진왜란 7년사’를 교재로 하여 ‘난중일기’를 심도있게 공 부하는 모임이다. 공부반은 김종대 명예이사장을 스승으로 모시고 매달 모여 공부 하고 있는데 7월 모임은 한산도 탐방으로 진행됐다. 한산도는 이순신 장군이 왜란이 일어난 임진년부터 정유년 백의종군하기 이전까지 남해를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로 조선 삼도 수군의 진이 있던 곳이다. 때문에 난중일기 대부분이 한산도 생활을 담고 있어 한산도는 난중일기를 공부하기 위해선 반드시 들러야 하는 장소이다. 아울러 거제와 통영 등 전략적 요충지와 해전이 있던 곳을 함께 둘러 봄으로써 책에서는 느 낄 수 없는 생생한 현장감을 통해 당시 상황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 가서는 400여 년 전의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를 따라가 봄으로써 나와 이순신 장군 이 하나가 되는 계기라는 점에서 이번 탐방은 너무나 소중한 기회로써 개인적으로 는 설렌 탐방이었다.
통영케이블카 전망대에서 단체사진.
한산도 탐방은 구체적으로 1일차(7월 12일)에 옥포대첩 분야에 있어 ‘실감콘텐츠’는 관람객에게 몰입감을 극대화 기념공원을 시작으로 한산대첩 홍보관, 통영케이블카 전망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만 기획 단계에서 담 대, 당포성 방문 일정으로 짜였고, 2일차(7월 13일)는 한산 을 내용을 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향후 유지보수와 콘텐 도 일주, 통영타워 휴게소, 거제 장문포 왜성, 북항친수공원 츠 업데이트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방문으로 진행됐다. 이번 일정은 김태현 공부반 반장과 박
통영 케이블카 전망대와 탐방 둘째 날 방문한 통영타워 신정 팀장, 최복룡 교수 등이 사전답사를 통해 정성스레 계 휴게소는 당시 한산대첩의 전황을 이해하기 좋은 계기가 됐 획했다. 그 정성이 정말 하늘에 통했을까? 원래 계획된 일 다. 통영 전망대와 통영타워 휴게소에서 내려다본 견내량 정에는 상당한 비가 예고됐지만 참 신기하게도 우리가 탐 앞바다에서는 거북선을 앞세워 학인진을 펼친 조선 삼도 수 방 장소에서 활동할 때는 하늘이 맑았고 이동 중에만 비가 군의 위용이 눈앞에 생생히 그려지는 듯 했다. 또 한편으로 오거나 탐방 일정이 마무리돼서야 큰 비가 쏟아졌다. 그것 는 왜성으로 둘러싸인 거제 앞바다를 유유히 지나가는 통제 이 이순신 정신의 힘이 아닐까 싶다.
첫 탐방지인 옥포대첩기념관과 한산대첩 홍보관은 우리 가 한마음으로 추진하고 있는 부산대첩기념관 건립에 있 어 참고할 만한 정보들이 많았다. 1996년 대우조선의 김우 중 회장이 건립한 옥포대첩기념관은 규모 면에서는 기념 관으로 손색이 없지만 전시물과 시설들이 전반적으로 낙 후되어 아쉬웠다. 이어 방문한 한산대첩 홍보관은 큰 실망 을 주었다. 디지털 시대에 걸맞게 증강현실(AR)과 반응형 콘텐츠로 구성되었지만 시설이 수리 중이어서 살펴볼 수 없었고 현장 안내도 없었다. 또 그 내용도 부실했다. 전시
견내량을 바라보고 있는 탐방팀.
탐방지에서도 난중일기 공부는 계속 되었다. 사진은 수국작가촌에서.
신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지 아닐까 싶다.
병이 희생됐던 핏빛 바다를 떠올리면 생각의 대조가 극명 하다. 이순신 장군이 스스로를 ‘나그네’로 칭한 것처럼 나 또한 과거와 미래 사이 역사의 한 점에 서 있는 나그네로서 역할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어쩌면 그 고민의 시작이 이순
이번 탐방의 마지막 방문지인 북항 친수공원은 우리가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해나갈지 각오를 되새기는 장소였다. 요즘엔 반려견도 이름을 함부로 짓지 않는데 ‘친수(親水)’ 말그대로 ‘물과 친하다’는 지명을 부여하는 것은 너무나 성 의가 없는 작명이다. 이순신 장군과 조선 삼도 수군이 싸워 사 원균이 이끄는 삼도 수군의 모습도 그려졌다. 같은 장소, 임진왜란의 전황을 바꿔놓은 ‘부산대첩’이 있던 곳, 그런 각기 다른 시간에 그곳을 지나가던 조선 수군의 심정은 어 점에서 동북아 평화를 이끈 곳, 평화를 기반으로 북극항로 떠했을까?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지만 안타까운 역사, 되풀 의 중심지라는 미래성이 공존하는 곳. 그러한 중요한 장소 이되는 역사를 볼 때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가 이순신을 왜 에 의미를 부여하여 후대에 전달하는 것. 우리의 임무를 다 배워야 하는지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한산도는 내가 항상 방문하기를 고대하던 장소였다. 이순 신 장군의 한산도 진중 생활을 내 상상만으로 그려 내기 어 려웠기 때문이다. 직접 본 한산도는 난중일기에서 표현한 그대로였으나 내 생각보다는 꽤 컸다. 한산도의 위치와 전 략 노출이 어려운 포구, 탐방하기 좋은 한산도의 높은 봉우 리, 근처 위치한 작은 섬들은 한산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이 해할 수 있었다. 김종대 명예이사장님은 난중일기 공부반에 서 우리에게 제3자의 입장에서 벗어나 이순신 안으로 들어 가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나는 배울수록 이순신 장 군의 괴로움이 느껴지기에 그 안으로 들어가기 망설여진다. 이순신 장군에게 한산도는 질병과 죽음, 배고픔과 척박 함, 추위와 더위, 그리움과 외로움이 있던 곳이다. 그러나 현재의 한산도는 난중일기와 다르게 너무나 아늑하고 평 화롭게 느껴졌다. 탐방 첫날 숙소 앞바다에서 우리를 맞이 했던 황홀하기까지 한 붉은 석양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내 가 본 석양의 아름다움과 과거 거제 앞바다에서 수많은 장
시금 되새기며 이번 탐방을 마쳤다.
옥포에 씨를 뿌리고 당포에 줄기를 내려 한산에 꽃을 피우고 부산에서 열매를 맺었더라 충신의 혼은 만인의 등불 임진년 슬픈 역사 잊지말아야할 교훈일세
임진4대승첩
유순희
玉浦種播 唐浦棒 옥포종파 당포대 閑山開花 釜山果 한산개화 부산과 忠信之魂 萬民炬 충신지혼 만민거 壬辰哀史 不忘訓 임진애사 불망훈
탐방 마지막날 한산도를 둘러보고 유순희 이사가 쓴 즉석 시.
부산은 강남주를 기억할 수 있을까?
배재한
편집위원 전 국제신문 사장
- 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 문화행정가로 부산문화계 남다른 족적 - 조선통신사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 이끈 한일우호 교류 ‘아이콘’
‘흔적 없는 바람이나 구름으로/내 그대 곁에 오래 머물 정신을 되살린 공로는 태산처럼 우뚝 솟아 있습니다. 조선 고 싶다./(…)/메마른 가슴 적시는 그대의 덧없는 옛날이고 통신사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 등재를 고인과 싶다.(…)’ <강남주 시, 『떠도는 자의 일기』 中>
함께 이끈 일본 조선통신사연지연락협의회 마츠바라 가즈 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로 부산문화계에 남다른 족적을 유키 이사장 일행이 빈소를 찾은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남긴 강남주 전 부경대 총장이 지난 6월 홀연히 우리 곁을
부산 문화계는 큰 어른을 잃었습니다. 고인은 무에서 유 떠났습니다. 발인을 하루 앞둔 6월 27일 저녁, 부산 해운 를 만드는 창조형 인간이었습니다. 문인으로서 창작열은 대백병원 장례식장에서 고인과 깊은 인연을 맺었던 후학 10권이 넘는 시집과 평론집에 오롯합니다. 74세 때 소설가 과 문인, 제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한 추도식이 열렸습 로 등단하고 80세에 첫 장편소설 <유마도>를 펴낼 수 있었 니다. 1982년 발표한 고인의 대표시 ‘떠도는 자의 日記’가 던 건 창작과 도전의 촉수가 갈수록 민감해졌기 때문일 터 낭독되자 빈소에는 먹먹함과 막막함이 감돌았습니다.
라고 믿습니다. 그 촉수를 벼리는 바탕은 결국 사람이고, 사 부산 국립국악원 무용극 <춤, 조선통신사 유마도를 그 람이 살아온 흔적입니다. ‘인간이 역사 그 자체인 호모 히스 리다>의 일본 요코하마 공연을 한 달 앞두고 그의 갑작스 토리쿠스(Homo Historicus)’란 말이 새삼스럽습니다. 런 타계는 안타까움을 더했습니다. 그는 일본 공연에 직접
역사에서 길어올린 유산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작 참석도 약속했던 터였습니다. <유마도(柳馬圖)>는 18세기 업이야말로 창조형 인간이기에 가능한 역사였습니다. 고 동래 출신 화가 변박의 예술세계와 조선통신사의 여정을 인은 1994년 8월 6일 일본 쓰시마섬에서 조선통신사 행렬 그린 그의 첫 장편 역사소설입니다. 최근 입원 중에도 “내 재현 행사를 처음 봤습니다. 방문교수 자격으로 후쿠오카 일·모레 퇴원한다”고 장담했던 터라 그저 슬픔과 황망함 대학에 머물던 때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을 가눌 길이 없었습니다.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 행사를 일본이 지자체 차원에서 오 그는 부경대 총장을 지낸 학자이자 교육자이며 초대 대 랫동안 하고 있다는 사실은 문화적 충격이었습니다. 우리 표로 부산문화재단 초석을 닦은 문화행정가였습니다. 조 는 성신교린의 정신으로 이어진 한일 간 교류의 역사인 조 선통신사의 ‘성신교린’(誠信交隣·성실과 믿음으로 사귄다) 선통신사의 흔적 조차 자꾸만 지우려 하는 데 오히려 일본
은 이를 알리고 행렬을 재현하고 있었습니다. 나아가 임진 사실과 대비됐습니다. 조선통신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왜란 이후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 이어진 조선통신 등재를 위한 한일학술위원회 한국 학술위원장을 맡아 세 사 한일 교류의 역사를 새로운 한일관계 개선의 주춧돌로 계기록유산 등재를 이끌어냄으로써, 부산이 하나 뿐인 유 승화하려 노력하고 있다는 데 큰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놓 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보유 도시가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도 했습니다. 이 대학에서 공부하던 지인 아들 소개로 쓰 그의 업적은 길이 기억돼야 합니다. 살얼음판을 걷던 한 시마 출신 해운회사 사장을 만났습니다. 그 사장으로부터 일 관계가 지금처럼 안정적으로 유지됨은 물론 우호관계 조선통신사에 관해 들었고, 운명처럼 조선통신사에 빠져들 를 더욱 확대 발전시켜야 한다는 두 나라의 국민적 공감대 었습니다. 조선통신사 정신 부활을 꿈꾸던 사장이 바로 마 가 형성된 것도 민간차원에서 한일 우호관계 개선을 위해 츠바라 가즈유키 이사장으로, 30년 이상 성신교린의 정신 반세기 가까이 애쓴 고인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으로 도원결의라도 한 듯 고인과 의기투합했습니다.
부산에 부임하는 일본 총영사가 첫 번째로 찾아뵙는 인사 필자는 고인과 깊은 인연을 맺었습니다. 부경대(옛 수산 가 고인이라는 말씀을 직접 듣기도 했습니다. 부산 일본총 대) 졸업생으로 고인의 제자입니다. 대학신문 기자 시절 영사관 총영사가 고인의 빈소를 두 번이나 찾은 것도 한일 주간 교수님이 고인이셨고, 대학에서 자연과학(해양학)을 교류와 관계개선에 큰 역할을 한 고인에 대한 감사와 존경 공부했음에도 진로를 신문기자로 바뿐 것도 고인이 기자 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출신(문화방송과 중앙일보 동양방송에서 13년가량 기자 로 활동)이었던게 결정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대학을 졸업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습니다. 상실의 슬 하고도 국내는 물론 일본 여행에 여러차례 동행할 정도로 픔을 뒤로 하고 고인이 남긴 유산을 찬찬히 살피며 이를 40년 가까이 사제의 정을 이어오고 있었습니다.
북돋아 부산 문화를 제대로 꽃피우는 일은 이제 남은 우 장례기간 내내 빈소를 지킨 필자는 과연 부산은 누구를 리들 몫입니다. 일본에서 온 조문객이나 조의의 뜻이 이를 기억하며 강남주 전 부경대 총장을 기억할 수 있을까 하는 재촉합니다. 고인을 추모할 기회를 만들어달라는 것이었 깊은 회의감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빈소를 찾은 조문객은 습니다. 올해 한일 수교 60주년을 맞아 양국 현안으로 떠 고인이 몸 담았던 대학과 부산문화재단 등 교육계와 문화 오른 관계 정상화에선 조선통신사의 성신교린 정신이 부 계 언론계 인사, 후학, 제자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고인이 각될 수밖에 없습니다. 부산시를 비롯한 책임 있는 기관과 30년 가까이 해운대 신시가지에서 살았지만 해운대구청 뜻있는 사람들이 조선통신사 정신을 계승하고 고인을 기 은 고인이 해운대 주민이라는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하는 억할 추모사업에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사람은 두 번 죽습니다. 한 번은 육 사람 수십 명만 모이는 모임이나 행사에도 얼굴을 내미 체적으로, 또 한 번은 타인의 기억 속에서 사라짐으로써 는 단체장들이 자기 고장과 지역을 빛낸 인사의 마지막 가 정신적으로 죽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 는 길을 찾아 조문하거나 조화 한 송이 보낼 수 없었는지 군의 정신을 배우고 기억하듯이 부산을 부산답게 만든 고 묻고 싶었습니다. 빈소가 조문객으로 북적이는 게 꼭 좋은 인을 기억하지 않으면 우리 부산은 누구를 기억해야 합니 일은 아니지만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의 쓸쓸함은 진한 아 까? 부산시를 비롯한 책임 있는 기관과 뜻있는 사람들이 쉬움으로 남았습니다. 이런 빈소의 모습은 고인이 일생을 조선통신사 정신을 계승하고 고인을 기억할 추모사업을
문학활동 문화행정 학문의 영역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는 구체화해야 합니다.
박형준 부산시장 예방 대첩기념관 건립 용역 감사인사
(사)부산대첩기념사업회는 지난 8월 21일(목) 김종대 명예이사장, 김한민 영화감독(명량·한산·노량 영화감독), 박병대 이사, 신한춘 고문회 회장, 이윤희 고문은 부산대첩기념관 건립, 부산대첩 영화제작 등 주요현안 업무를 건의하기 위하여 박형준 시장을 면담했다. 먼저, 부산대첩기념관 건립 타당성 용역이 진행되고 있는 점에 대하여 부산시장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에 박 형준 시장은 최신 영상을 설치하여 멋진 기념관이 되도록 설계단계부터 직접 챙겨보겠다고 했다. 한국 영화 중 역대 최대 관람객(1,761만명)을 기록한 명량의 김한민 감독은 부산은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고 임 진왜란 7년 전쟁 테마중에서 부산대첩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부산대첩을 영화로 제작해 보겠다는 의향을 밝혔는데 박형준 시장은 부산대첩 영화 제작시 시와 협의해서 하는게 좋겠다고 말했다.
부산대첩기념관 건립 위원회 확대 개편
부산대첩기념관 건립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비 5 천만원이 지난 6월 19일 시의회 본회의를 통과하여 8월 12일 사전규 격을 공고하고 8월 25일 입찰공고를 했다. 과업기간은 착수일로부터 6개월이며 과업수행 중 착수·중간·최종보고회를 개최하고 일정대로 진행될 경우 내년 3월초 용역결과물이 나올 예정이다. (사)부산여해재단과 (사)부산대첩기념사업회 통합이사회는 부산시 의 기념관 건립 용역 진행에 적극 대응하기 위하여 2024년 7월부터 구성·운영중인 「부산대첩기념관 건립 추진위원회」 위원을 기존 10명 에서 15명으로 확대하기로 의결했다. 설계 등의 건축분과 3명, 콘텐츠 등 소프트웨어의 기획분과 4명, 내부회원 동원 및 시민단체 협력의 조직분과 4명, 언론·방송의 홍보 분과 2명, 국회·시의회 등 대외관계의 대외협력분과 2명으로 각 분 과별 전문성을 갖춘 인물들로 구성했다. 무엇보다 부산대첩기념관이 미래세대에 길이 물려줄 자랑스러운 유산이 될 수 있도록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적 인 관심과 노력을 다하기로 했다.
제9회 이순신 독후감 시상식 개최
(사)부산여해재단은 사랑·정성·정의· 자력의 이순신 정신을 널리 전파하고자 제9회 이순신 독후감 공모전을 개최하여 지난 4월 28일 시상식을 개최했다. 이순신 독후감은 임진왜란이라는 위기 상황에서 나라를 구할 수 있었던 이순신 리더십의 뿌리를 배우고, 체화하여 작은 이순신으로 거듭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기 위해 시작된 행사로 공모기간동안 총 218편이 접수되었다. 이는 제8회 이순신 독후감 접수 건수인 73명보다 약 3배 늘어난 수로 학생부와 일반부 모두 참여자 수가 늘어났다. 이날 시상식에는 일반부 6명 시상금 310만원, 청소년부 5명 시상금 105만원, 가작 9명 45만원으로 총 20명이 수상했다.
제480주년 이순신탄신 기념세미나 개최
(사)부산대첩기념사업회와 (사)부산여해재단은 이순신탄신 480주년을 맞아 지난 4월 28일 영광도서 문화홀에 서 ‘이순신과 비교되는 세계 위인들과 이순신정신 가치의 세계화’를 주제로 김주식 한국해양사학회 회장을 초청 연사로 세미나를 가졌다. 토크사회는 남송우 부산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장이 진행해 이순신과 비교되는 세계 위인들의 모습에 대해 진지한 토론의 장을 펼쳐 이순신의 세계적 위상을 공감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순신 아카데미 운영
•이순신 강사과정 아카데미는 이순신의 생애와 정신을 가르칠 강사와 이순신 정신으로 무장된 지도자를 양성하 고자 제9기 과정(32명)을 지난 3월 5일부터 12월 3일까지 이론 및 토론 수업과 함께 여수, 남해 등 현장학습을 병행 하여 운영하고 있다. •청년 이순신 아카데미는 2016년 이순신학교 개교와 함 께 운영되어 왔다. 2022년에는 부산시 청년 프로그램 지 원사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특히 매회 우수한 대학생 수료자들을 대상으로 (재)소담장학회(이사장 이경헌 성모안과병원 설립자)에서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다. 제15기 는 지난 4월 8일부터 6월 16일까지 31명이 수료하였고, 제16기는 9월 23일부터 11월 25일까지 운영한다.
부산대첩기념공원 명칭 지정 추진
(사)부산대첩기념사업회는 부산시에서 ‘부산대첩기념공원’과 ‘북항친수공원’에 대한 중구·동구 주민대상 선호 도 조사를 8월말까지 진행함에 따라 부산대첩을 널리 알려서 주민들이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홍보 활동을 전개했다. 중구와 동구 행정복지센터 21개소를 방문하여 부산대첩을 설명하고 홍보용 부채 8,500개를 주민들에게 배부 하였다. 지하철 1호선 중앙동역, 초량역, 부산진역에서 아카데미 강사 15명이 참여하여 홍보용 부채 3,500개, X 배너, 홍보용 보드판 등을 활용하여 홍보하였고, 중구와 동구 주요지역에 현수막 100매를 설치하여 부산대첩기 념공원 명칭 지정의 필요성을 홍보했다. 아울러 부산상공회의소 등 관내 120여개 주요단체에 협조공문을 발송하 여 부산대첩기념공원 명칭 지정의 필요성을 알렸다. 그리고 강주택 부산시의원은 7월 16일 본회의 시정질문에서 부산대첩기념공원 명칭으로 조속히 지정할 것을 요청했다.
강사 역량 강화 현장 워크숍
고문 6명 신규 위촉
(사)부산여해재단은 아카데미 강사 역량 강화를 위하여 지난 4월 30일 초·중·고등학생 교육프로그램 현장탐방 코스인 옥포대첩~옥포대첩기념 관~효충사~천성진성~북항을 답사했다. 아울러 8월 27일에는 실내교 육 시연 및 평가를 위한 워크숍을 개최했다.
(사)부산대첩기념사업회는 부산대첩기념관 건립의 당위성을 지역사회에 널리 알리고 사업회 자문 역할을 하고 있는 고문회 회원 6명을 신규로 위촉하여 지난 5월 16일 간담회를 개최했다. 아울러 5월 17일 고문진과 이사 등 총 10명이 참석한 가운데 상반기 주요 추진사항 보고와 하반기 주요 추진계 획을 논의했다.
(사)부산여해재단은 이순신을 공부하고 그 정신을 널리 펴자며 이순신 사 업을 시작한지 10년을 맞아 지난날을 되돌아 보고 앞날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고자 1~4기 수료생과의 간담회를 개최했다. 지난 4월 14일 2기 수료생 8명을 시작으로 4월 21일 4기 수료생 13명, 5월 12일 1기 수료생 12명, 5월 19일 3기 수료생 12명 등 총 4회에 걸쳐 김종대 명예이사장의 특강과 수료생들의 다양한 의견을 청취하는 시간을 가졌다. 김종대 명예이사장은 이순신 사업은 경제적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물질적 사업이 아니라 국가 사회의 건강성 제고를 위한 정신적 사업으로서 반드시 성공적으로 운영되어야 할 사업이며, 수료생들의 자발적이고 헌신적 노력으 로 국민들에게 공감을 얻어가고 있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다며 작은 이순신들을 더 많이 양성해야 할 선도자로서
의 책임을 기쁘게 받아들여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를 당부했다. (※ 1기 수료생은 1천만원을 재단에 기부하였다.)
산불피해 돕기 성금모금 및 포장증 수여
(사)부산여해재단과 (사)부산대첩기념사업회는 갑작스 러운 산불로 삶의 터전을 잃은 경북, 경남 이웃들에게 빠 른 복귀를 바라는 따뜻한 마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순신 정신을 실천하고 전파하는데 노력하고 있는 ‘이순신 아카 데미 강사과정(1~9기)’ 수료생들을 대상으로 성금을 모금하여 총 2천 20만원을 지난 4월 21일 대한적십자사부 산지사에 전달했다. 특히 (사)부산여해재단은 지난 7월 31일 대한적십자사로부터 사랑과 봉사정신을 발휘하여 인류의 복지 증진 에 기여한 공으로 적십자회원유공장 은장을 수상했다. 당항포 승첩 기념비 제막식
아카데미 2기 수료생 김용규 회원은 지난 5월 13일 고 성 노벨CC에서 당항포 승첩 기념비 제막식을 개최하였 다. 당항포해전은 두 차례에 걸쳐 전투가 벌어졌다. 1차는 1592년 7월 13일 이순신 장군이 일본군 선박 40여 척 을 포위·격침하였고, 2차는 1594년 4월 23일과 24일에 걸쳐 적선 31척을 격파한 승첩이다. 기념비의 글은 김종대 명예이사장이 썼고 아카데미 2기 수료생 김용규 회원이 세웠다.
문화프리즘
부산박물관 ― 부산, 그 역사의 시작
하종숙
편집위원 여해차문화진흥원 원장
■ 근대의 물결과 식민의 그늘
근대화의 그늘’이었다.
래 운영되던 독특한 장소였다. 전시는 이를 ‘교류와 통제의 공간’이라 정의하며, 국제도시 부산의 기원을 보여준다.
1876년 개항 이후, 부산은 서양 문물이 들어오고 일본 세 력이 뿌리내리는 격변의 무대가 되었다. 항만과 철도, 관청 이 들어서며 도시가 근대화되는 듯 보였으나, 사실은 일본 의 식민지 수탈을 위한 기반 시설이었다. 전시실의 설명처 럼, 부산의 근대화는 자율적 발전이 아니라 ‘짙게 드리워진
부산박물관을 찾으면 한 도시가 걸어온 긴 역사를 차례로 ■ 피란 수도와 시민의 연대 만나게 된다. 선사시대부터 조선, 개항과 일제강점기, 그리
1945년 광복의 기쁨도 잠시, 한국전쟁은 부산을 다시 역 고 오늘날 국제도시로 성장하기까지의 여정을 한눈에 볼 수 사 한복판에 세웠다. 전국에서 몰려든 수십만 명의 피란민 있는 곳, 바로 부산관 전시실이다. 이곳은 “부산이라는 도시 들로 부산은 포화상태에 이르렀지만, 사람들은 서로 의지하 가 왜 늘 역사와 세계의 한가운데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답 며 버텼다. 국회와 정부 기관이 옮겨와 임시수도 부산이 되 을 주는 곳이다. 역사의 시간에 따라 간략히 소개한다.
■ 전쟁과 항전의 기억 전시는 먼저 임진왜란의 참상을 보여준다. 1592년 4월, 부
■ 국제 허브 도시로
었고, 거리는 눈물과 희망이 뒤섞인 삶의 무대가 되었다.
오늘날 부산은 세계가 주목하는 항만도시다. 부산국제영 산포와 동래성은 일본군의 첫 침략지였다. 동래부사 송상현 화제(BIFF), 벡스코(BEXCO), APEC 정상회의까지, 국제적 은 “싸워 죽는 것은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는 말 이벤트들이 부산의 위상을 높였다. 이는 과거 통신사와 왜 을 남기고 끝내 전사했다. 다대진 첨사 윤흥신, 전라좌수사 관에서부터 이어진 세계와의 만남의 전통이 현대적으로 되 이순신, 수많은 군민들의 항전이 이어졌다. 관람객은 그날 살아난 모습이기도 하다. 의 피비린내 나는 현장을 글과 유물로 마주하며, 부산이 지 켜낸 ‘첫 항전의 도시’라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 교류와 외교의 창구
■ 맺음말 부산박물관 상설로 전시하고 있는 부산관은 부산의 정체 성을 단순히 ‘항구 도시’로 그리지 않는다. 전쟁과 항전의 도 전쟁 이후 부산은 단절을 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통신사 시, 교류와 통제의 도시, 근대화와 식민의 도시, 피란 수도와 의 출발지가 되어 일본과의 외교와 문화 교류를 이어갔다. 재건의 도시, 그리고 국제 허브 도시까지 ― 부산은 늘 세계와 수백 명의 수행원이 일본으로 건너갔고, 그 과정에서 학문· 맞닿아 있던 도시였다. 이번 전시는 관람객에게 과거를 기 시문·예술이 오갔다. ‘왜관’이라는 공간도 있었는데, 일본인 억하게 하고, 오늘의 부산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며, 미래의 거주지이자 무역 창구이면서 동시에 조선의 철저한 통제 아 부산이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
시의회 정책제언 Book - 이 한권의 책
친일파를 향한 민중의 통쾌한 반격
친일파의 굴욕
난 민중들에게 맞아 죽었다. 김홍집 내각 1945년 해방, 1949년 반민특위 활동이 기 의 농 상공부대신이었던 정병하 역시 맞아 준점이다. 우리 민족은 강력한 에너지를 모 죽었다. 또 다른 친일 내각 각료와 을미사 아 제국주의와 친일파에 당당하게 맞섰고, 변 관련자들은 일본으로 달아나서 10년 이 그들을 무너뜨렸다. 1945년 일제 패망은 상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을미사변에 원자 폭탄 두 방이 결정적 계기였지만, 일 가담했던 조희연은 친일로 벌어들인 돈을 본이 오로지 원폭 때문에 패망한 것은 아 모두 탕진하고 빚더미에 올라앉았고, 결국 니다. 일본군 105만이 중국에 묶여 있었기 남작 작위까지 박탈당했다. 이용 가치가 에, 미국의 원폭 투하가 훨씬 더한 충격이 없어지자, 일제로부터도 버림받은 것이다. 됐다. 일본군의 발을 중국 땅에 묶어놓은 ‘친일파’라는 말이 생겨난 지 100년도 넘 을사오적이 당한 이야기도 있다. ‘매국의 것은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도 있지만, 한국 었다. 여전히 이 말은 잘못한 사람에 대한 아이콘’ 이완용은 22살의 청년 독립투사 독립군의 기여도 빼놓을 수 없다. 모욕으로 쓰일 정도로 불쾌한 용어이다. 이재명의 칼에 찔려 폐가 상하는 치명상을 저자는 해방에 대한 한국인들의 기여도 친일파를 확실히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입었다가 겨우 살아났다. 이완용의 뻔뻔한 가 낮았다면, 자칫 이 땅이 미국의 항구적 대한민국의 비극이 이어진다는 말도 있다. 매국 행위에 성난 민중들은 그의 집을 불 점령지가 됐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미군 친일파의 후손들은 여전히 떵떵거리며 잘 태워 버렸다. 그때 이완용 조상의 신주까 정이 3년 만에 끝난 것은 한민족의 역량과 살고,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독립투사 지 몽땅 타버렸다. 여전히 유교의 영향력 독립운동 성과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의 후손은 가난과 고통으로 괴로움을 당했 이 강했던 시절이라 신주가 타버린 것에 때문이다. 국제정치에서 강대국이 약소국 다는 건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친일파의 굴욕
김종성 지음 / 세계사
이완용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을 배려하는 일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매국을 한 친일파들은 일제강점기 동안 이근택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항상 순 미국이 계속 한국을 점령할 수 없었기 때 호의호식하며 계속 행복했을까. <친일파 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출퇴근했다. 그럼에 문에 3년 만에 손을 놓은 것이다. 의 굴욕>은 친일파 23명의 연대기를 통해 도 독립투사 기산도 일행은 이근택의 집 반민특위 역시 결과에 대한 아쉬움이 항 그들이 당했던 굴욕과 수모, 복수에 관한 을 침입해 그를 칼로 찔렀다. 권중현은 일 상 따라붙지만,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악 이야기를 보여준다. 당시 민중은 친일파에 본군의 호위 속에도 결국 길에서 암살단 조건에서 출범했다. 이 상황에서 친일 청 대한 반감이 어마어마했고, 의로운 분노를 의 습격을 받았다. 권중현은 아우로부터도 산 기구 반민특위가 시작될 수 있었던 건 표출하며 그들을 처단하고 굴욕을 줬다. 의절 당했다. 아우는 형제의 연을 끊고 산 대중의 친일 청산 열기를 국회가 거부할 친일파들은 크고 작은 공격을 받으며 불안 중에 은거했다.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일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에 떨었고, 사병과 일본군의 호위 속에서 난 3·1만세 시위를 진압하려 출동한 헌병 친일파에 대한 민중의 반격 이야기는 통 길을 다닐 수 있었다. 형제로부터 의절당 보조원 강병일은 분노한 시위 군중의 손 쾌하다. 더불어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 한다거나 심지어 집에서 부리던 몸종에게 에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 3·1만세 시 는가 생각하게 된다. 까지 모욕당하기도 했다.
위를 비웃는 망언을 했던 황해도 은율군수 책에 등장한 몇 개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최병혁은 망언 1년 반 뒤에 군수 관사에 나 보자. 친일 내각의 총리였던 김홍집의 최 타난 대한독립단 단원들이 쏜 총에 맞아 후는 처참했다. 고종은 김홍집 등을 해임 즉사했다. 하면서 포박령도 내렸다. 왕명에 따라 순 이 책은 친일 진영과 일제를 응징하고 무 검이 그를 체포했지만, 끌려가는 그를 민 릎을 꿇린 네 개의 연도를 중심으로 서술 중들이 가로챘다. 김홍집은 길거리에서 성 했다. 1894년 동학혁명, 1919년 3·1운동
김효정
편집위원 부산일보 부국장
편집 후기
‘삼복더위가 전 보다 더하여 온 섬이 찌는 것 같아 사람이 견디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갑오년 여름 난중일기를 보면 예나 지금이나 여름은 혹독하다. 올 여름 유난히 뜨거웠던 가마솥 찜통더위를 겪으며 그 불볕더위에도 활쏘기를 멈추지 않고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군의 기강을 잡았던 이순신을 다시한번 떠올려본다.
윤달이 끼여서 그런지 올 여름 유난히 길었다. 위태로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지금 우리의 현실이 수백년전 백척간두에서 위태위태했던 조선의 그 날처럼 아슬아슬하게 여겨지는 것은 왜일까.
온 국민이 하나되어 이겨내고 또 이겨내어 세계속의 대한민국을 제대로 세우길 간절히 바라며 … 이순신으로부터 추출해낸 ‘사랑 정성 정의 자력’의 K-정신을 만방에 떨치는 그날이 오기를 …
공지
제433주년 부산대첩기념일 행사 ▶ 부산시민의날 및 부산대첩기념식
- 일시 : 2025. 10. 2(목) 오전 10시 ~ 오전 11시 - 장소 : 부산광역시청 1층 대강당 - 주최 : 부산광역시, (사)부산대첩기념사업회
▶ 부산대첩 승전로 탐방
- 일시 : 2025.10.2.(목) 11시~17시 - 코스 : 해경부두집결-태종대-몰운대-가덕도-북항 (✽ 가덕도에서 북항 이동시 전국체전 성화채화 해상봉송 행사와 병행)
- 참가 : 부산시민 선착순 200명(기념품 및 점심식사 제공) - 후원 : BNK부산은행, 부산해양경찰서, (사)부산여해재단 - 문의 : 051)923-1000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부산시민의 결사항전·호국정신을 재조명합니다. 역사·문화적 유산으로 복원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시대정신과 리더십을 재조명하고 시민교육으로 활성화합니다.
<희>
정기후원
가입
2025 가을호 부산대첩 편집위원회 회의 모습 (좌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유순희, 김태현, 김효정, 배재한, 하종숙 편집위원.
㈔부산대첩기념사업회는
부산대첩을 시민 누구나 자랑스러워할 역사적 유산으로 복원하고 이순신 정신을 알리고 실천하여, 부산을 품격 있고 건강한 문화도시로 만드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부산대첩을 자랑스러운
부산대첩기념공원과 기념관을 조성합니다.
부산대첩기념식(부산시민의날) 및 축제 부산대첩 기념세미나(심포지엄), 이순신 아카데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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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첩지는 2025년도 부산광역시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 지원사업으로 제작한 간행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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