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청 인천광역시사 제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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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사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상
인천광역시사편찬위원회
발간사
“바다와 함께 성장한 해양도시 인천의 역사와 문화를 담다”
인천은 대한민국 대표 해양도시입니다. 천혜의 자연을 품은 갯벌과 서해 5도를 비롯한 168개 섬은 해양 생태계 보고(寶庫) 입니다. 백령도 두무진과 대청도 서풍받이, 소청도 분바위는 태 고의 지구를 떠올려보게 할 만큼 신비롭고 웅장한 분위기를 자 아내는 비경입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감히 상상하 지도 못할 오랜 시간이 만들어준 자연의 선물입니다. 서해안 문화권 중심에 자리 잡은 인천은 고대 환황해연안항로 요충지로서 해양과 내 륙을 아우르는 지정학적 특성으로 주변 지역과 활발한 상호교류를 이뤄왔습니다. 사통 팔달(四通八達), ‘모든 길은 인천으로 통한다(All ways INCHEON)’라는 말이 과하지 않 은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893년 고종은 해군 장교 양성을 위해 대한민국 최초 해군사관학교인 조선수사해방학 당을 강화도에 설치했고, 근대식 군함인 양무호를 도입했습니다. 해관에서는 부정 수출입 을 막기 위해 광제호를 감시선으로 운영했는데, 우리나라 최초 함장과 도선사가 탄생한 계 기가 되었습니다. 광복 이후에는 정부 주도로 인천해양대학이 설립되기도 했습니다.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통상 관계를 공식화하면서 새롭게 편제되었고, 인천 앞바다는 제국주의 열강 각축장으로 변모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민족과 바다를 지키기 위한 노 력은 인천에서 계속됐습니다. 그 노력은 6·25전쟁 당시, 풍전등화의 대한민국을 인천상 륙작전으로 살려내고, 국제평화도시 인천으로 도약하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인천은 글로벌 해양강국으로 도약하는 대한민국 거점 도시, 세계 초일류도시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인천항은 대한민국 경제·산업 중심항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특히 인
천신항 개발과 내항 재생사업을 추진해 해양강국 실현의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눈부신 성과는 바다를 사랑하고 가꿔온 ‘인천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 다. 이번에 발간된 인천광역시사 제15호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에는 오랫동안 바 다와 섬을 지키고 사랑해 온 우리 ‘인천 사람’의 역사와 문화가 담겨 있다는 사실에 주목 해야 할 것입니다. 상권에서는 인천의 섬과 연안의 갯벌 등 해양환경과 천혜의 자연유산, 인천해역 침몰 선과 출수유물, 고대부터 근대까지 이어진 해양교류, 인천 포구, 조선 후기 인천 연안 방 어체제, 인천항 축항과 갑문에 이르는 해양역사를 살폈습니다. 하권에서는 인천 연안 간척과 매립으로 변화된 모습, 인천 갯벌을 터전으로 한 주민 들의 삶, 해양문화콘텐츠 원천이 되고 있는 해양설화, 인천 바다와 항구를 바탕으로 한 문학작품으로 인천의 해양문화를 다채로운 시각에서 다뤘습니다. 이번 시사 발간을 통해 해양도시 인천의 역사와 문화가 더욱 알려지고, 인천 지역사 연구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계기가 되길 희망합니다. 아울러, 시사 편찬을 위해 애쓰신 인천광역시사편찬위원회 위원님을 비롯한 집필에 참여해 주신 연구자 여러분께 진심 어 린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저도 인천시장으로서 ‘오직 인천, 오직 시민, 오직 미래’만을 바라보며 지금까지 달려 온 것처럼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자랑스러운 해양도시 인천의 300만 시민 모 두가 행복한 세계 초일류도시를 만들겠습니다. 함께해 주신 모든 분의 건강과 행복을 기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인천광역시장 인천광역시시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축간사
“인천광역시사 제15호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발간을 축하하며”
안녕하십니까? 제9대 인천광역시의회 의장 정해권입니다. 해양문화교류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해양도시 인천을 재조 명한 인천광역시사 제15호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발간 을 매우 뜻깊게 생각하며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처럼 의미 있는 인천광역시사를 편찬하기 위해 애쓰신 인 천광역시사편찬위원님과 집필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시는 1965년 인천시편찬위원회 구성 이래, 1973년 첫 인천시사 를 시작으로 50년 넘게 지역의 역사를 편찬해오고 있습니다. 고향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하고 연구함 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지역사 연구는 도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지역주민과 소통을 통해 자부심을 드러내 는 역할과 기능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간 축적된 자료를 기반으로, 앞으로도 활발한 조사와 연구를 지속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인천의 바다는 인천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자 풍부한 해양문화자원을 지니고 있습 니다. 바다와 갯벌은 생업의 현장이면서도 해양민속, 신앙, 설화의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 인천의 바다는 세계를 향한 인천 사람들의 도전과 개척의 정신이 담겨있 습니다. 인천은 대한민국 이민의 출발지였습니다. 우리 민족의 공식 이민은 1902년 12 월 22일 하와이 첫 이민단이 인천 제물포에서 항해를 떠난 것을 시작으로 합니다. 이때 이민을 떠난 121명 중 80퍼센트가 제물포, 강화, 부평, 교동 출신의 인천 사람 들이었습니다. 이민자들은 타지에서의 고된 생활에도 불구하고 국권 회복과 후대 양성 을 위한 노력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개척정신과 조국에 대한 헌신을 우리
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300만 인천 시민과 700만 재외동포가 함께 만들어갈 세계 초일류 도시를 꿈 꾸는 이때, 넓은 바다와 아름다운 섬에서 펼쳐진 인천의 역사와 문화를 시민 여러분께 소개할 수 있어서 매우 기쁩니다. 끝으로 인천광역시사 제15호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발간을 다시 한번 축하드 리며, 시민 여러분과 미래 세대에게도 소중한 역사적 자료로 활용되기를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인천광역시의회 의장
1. 편찬 방침 ■ 2024년 인천광역시사 제15호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은 해양 도시 인천의 역사와 문화를 주제별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 인천은 선사부터 근현대까지 다양한 해양유산을 간직하고 있으며, 오 랜 기간 경기만 연안과 섬 그리고 황해를 총괄하는 중심 거점으로서 역할하고 있다. 이러한 인천 해양의 역사와 문화를 시민에게 소개하 기 위해 인천광역시사 제15호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을 편찬 하게 되었다. ■ 이 책에는 사진, 옛 지도 등을 수록하여 해양도시 인천의 발자취를 효 과적으로 전달하고자 하였다.
2. 구성과 내용 ■ 본문의 내용은 체계적인 구성을 위해 총설과 총 11장으로 서술하였 다. 책은 방대한 내용을 담기 위해 상·하 2권으로 구성하였다. ■ 상권은 총설과 제1~5장으로 이루어졌다. 제1장에서는 인천의 섬과
연안의 갯벌 등 해양환경과 자연유산을 정리하였고, 제2장에서는 인 천해역 침몰선과 출수유물에 대해 살펴보았다. 제3장에서는 고대 한 나루부터 근대 개항기 제물포까지의 해양교류를 서술했으며, 제4장 에서는 양난 이후 강화도를 중심으로 하는 인천 연안의 방어체제 구 축 및 양요와 개항에 따른 방어체제 변화를 조명하였다. 제5장에서는 인천항 축항을 기점으로 근대 문물의 유입과 전파 그리고 광복 후 인 천항 확장에 이르는 변화상을 정리하였다. ■ 하권은 총 6장으로 구성하였다. 제1장은 인천 연안과 섬의 간척과 매 립을 통해 본 도시 변화상을 알아보았으며, 제2장은 인천 갯벌을 터 전으로 한 주민들의 삶을 살펴보았다. 제3장은 지명에 남아있는 인천 의 크고 작은 포구를 소개하고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포구 문화를 담 았으며, 제4장은 대표적인 인천 해양설화의 구조와 특성을 분석하고 해양문화콘텐츠로의 활용을 제안하였다. 제5장에서는 근대전환기부 터 최근까지 한국문학에서 인천 바다가 어떻게 형상화되었는지를 서 술하였다. 제6장은 다채로운 시각으로 다뤄진 인천의 해양문화를 한 데 묶어서 정리하였다.
3. 집필 및 편집 방침 ■ 서술의 시간적 범위는 각 원고에 따라 선사부터 현대에 이르며, 공간 적 범위는 현재 인천 영역을 중심으로 한다. ■ 서술상 고유한 용어 및 명칭은 학계에서 통용되는 용례에 따랐으나, 해당 주제에 따라 일부 학술용어는 집필자의 견해를 따랐다. ■ 문장은 한글 표기를 원칙으로 하되, 고유명사는 한자나 원어를 병기 하였고, 한자나 외국어가 필요한 경우 첨자나 괄호 안에 병기 또는 단 독 표기하였다. ■ 연대는 서력기원으로 표시하고 필요한 경우 왕력 등을 부기하였다
구분
책
논문
■ 각주와 참고문헌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기재하였다.
상세내용
저자, 책 이름, 발행처, 발행연도, 쪽수. 예) 홍길동, 『인천광역시사』, 인천광역시, 2023, 22~30쪽.
저자, 논문 제목, 게재지 이름, 발행처, 발행연도, 쪽수. 예) 홍길동, 「인천시사의 편찬 경향」, 『시사연구』 1, 인천시사학회, 2023, 5~7쪽.
4. 저작권과 출처표기 ■ 이 책의 저작권은 인천광역시에 있으며 이 책에 수록된 도표와 사진 등 에는 출처 또는 원저작권자를 표기하였다. 인천광역시가 제작·소장하 거나 집필자가 편집·제공한 자료는 별도로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 이 책에 수록된 내용, 도표, 사진 등을 이용할 경우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야 하며,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 없다. 또한 별도의 원저작자가 있는 자료는 해당 저작권자의 동의를 구해야 하며 무단으로 사용할 수 없다. ■ 집필 내용과 관련하여 발생하는 저작권 관련 문제의 책임은 해당 집 필자에게 있다.
총설
제1장
제2장
제3장
차례|상권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1. 인천의 해양환경 2. 인천의 자연환경 3. 인천의 인문환경
수중고고학적 궤적, 인천해역의 침몰선
1. 영흥도선의 발굴과 출수유물 2. 마도3호선 발굴과 출수유물 3. 고승호(高勝號) 조사
인천 해양교류의 발자취, 한나루와 제물포
1. 고대 해양교류의 교두보, 한나루 2. 근대 인천의 해양교류와 제물포
제4장
제5장
조선후기 인천 연안의 방어체제 구축과 변화
1. 양난(兩亂) 시기 인천의 전황 2. 17세기 인천 연안 수비체제의 핵심, 강화도 3. 18세기 도성 방어체제 확립과 강화도의 전략적 개념 변화
4. 개항기 서구열강의 침략과 인천의 방어체제
해양교류의 거점, 축항과 갑문
1. 바다 위의 관문, 인천항과 항로 2. 내항과 외항의 등장 3. 일제강점기 축항 건설과 갑문의 설치 4. 광복 후 제2선거의 완성과 인천항의 확장 5. 닫힌 바다에서 열린 바다로
제1장
제2장
제3장
차례|하권
인천해안지형의 변모, 간척과 매립
1. 해양도시 인천의 위용과 역동성 2. 인천의 갯벌과 간척 3. 강화의 해안지형 변화 4. 월미도와 인천항 5. 서북부 연안의 간척과 매립 6. 우리나라 최초의 염전과 산업단지 7. 영종도와 인천국제공항 8. 송도 갯벌과 간척 9. 준설토 투기장
인천 갯벌과 주민의 삶
1. 해류 2. 물때 3. 갯벌과 조개 서식 환경 4. 어촌계와 마을어장 관리 5. 조개와 해조류 채취 6. 연체류와 기타 7. 김양식 8. 돌살과 건강망
해양문화 접경지, 인천의 포구
1. 포구의 기능 2. 지명 속의 인천의 포구 3. 인천 포구의 어제와 오늘
제4장
제5장
제6장
찾아보기
해양문화콘텐츠의 원천, 서해의 해양설화
1. 해양설화의 특성과 갈래 2. 인천 해양설화자원의 유형과 대표설화 3. 인천 대표 해양설화 서사 구조와 그 특성 4. 의의와 활용
한국문학에 투영된 인천의 바다와 항구
1. 섬과 바다를 아우른 항구도시, 인천 2. 근대전환기 문학에 투영된 인천의 바다 3. 낭만과 모더니즘의 산실, 인천의 항구와 바다 4. 어부의 바다, 노동자의 인천항 5. 해방 직후, 새롭게 발견한 인천항 6. 한국 현대사의 역사를 간직한 인천의 바다 7. 인천의 바다, 시로 다시 태어나다 8. 인간의 삶과 함께 한 인천의 바다
바다와 섬, 항구도시 인천의 해양문화
1. 바다 도시 인천 2. 인천의 해양문화 양상
교류와 소통의 공간, 인천의 해양
임학성
인하대학교 사학과 교수
교류와 소통의 공간, 인천의 해양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바다가 차지하는 면적이 70%나 되어 육 지에 비해 바다가 훨씬 더 넓다. 그래서 ‘지구地球’가 아닌 ‘해구海球’로 불러야 한다는 역발상은 나름 설득력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더군다 나 우리나라는 한반도韓半島라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3면이 바다 와 접하고 있는 반도 국가이다. 한반도 내에서도 인천 지역은 동북아시아 환環황해 지대의 중심에 위치하였다. 따라서 오랜 시대부터 인천 지역은 중국은 물론 동남아 시아, 일본까지 하나로 연결하는 해양교통망을 형성하였으며, 이를 토 대로 하나의 공통된 문화권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인천 지역이 환황해 지대 해양 교류와 소통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환경은 이 책(상권)의 제1장으로 수록된 김기룡의 글(「인천의 해양환 경, 자연과 인문환경」)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인천
16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의 환경을 해양·자연·인문의 세 분야로 나눠 서술하고 있는데, 해양 환경 부분에서는 인천의 오랜 생활 무대였던 황해의 생성 기원과 지 형, 해류, 조류 등을 설명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고 있다. 특히 황해 의 조류는 조차가 4~8m에 달하며 썰물인 경우 북동쪽에서 남서쪽으 로, 밀물인 경우는 반대 방향으로 조류가 흘러 동력선이 없었던 시대 에는 해류보다는 조류가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고 한다. 인천의 해양문화는 바다가 ‘열렸던’ 시대와 ‘닫혔던’ 시대에 따라 그 양상 및 성격에서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인천의 바다가 ‘열렸던’ 시대는 우선 한성백제시대기원전 18년~475년였다. 인천은 『삼국 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년조 기사에서 처음으로 그 역사적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인 기원전 18년 고구려에서 이 주해온 형제 중 아우인 온조는 한강 유역을 도읍으로 정하고 ‘십제十濟’ 를 세웠고, 형 비류는 서해 바닷가인 인천에서 도읍을 정하고 나라의 명칭을 ‘미추홀彌鄒忽’이라 했다는 건국 설화이다. 비옥한 농경지대인 한강 유역에서의 온조 집단과의 공존을 거절하고 비류 집단이 바닷가 인천을 도읍지로 선택한 이유는 농경보다는 소금 생산 및 해상교역에 유리한 곳을 선택했던 때문으로 이해된다. 인천은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넓은 갯벌을 지니고 있었기에 소금 생산[자염煮鹽]에 매우 적합 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비류로 상징화된 해양세력이 한국 최초로 해양국가를 건설하려 했으며, 이는 인천이 해양도시라는 정체 성을 지니고 태동했음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 이러한 해양도시 인천의 역사적 정체성은 삼국시대 국제항구로 기 능한 연수구 옥련동의 ‘한나루大津, 漢津’ 사실을 통해서도 재차 확인된 다. 한나루는 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을 받아 웅진(현, 충청도 공
총설 17
주)으로 천도하기까지 약 100여 년간372~475년, 중국의 국가들과 교 류하기 위해 백제 사신이 출입했던 항구였다. 한국과 중국의 역사기 록에서 총 29회의 교류 횟수가 확인되며, 교류 국가는 남조의 동진과 송, 북조의 북위 등이었다. 이때의 항로는 한나루 ↔ 덕물도(덕적도) ↔ 등주·래주(중국 산동반도)의 서해(황해)를 횡단하는 ‘등주登州항로’ 였다. 이 책에 수록된 김경화 글(상권 제3장의 「인천의 해양교류의 발 자취, 한나루와 제물포」)은 고대 인천의 해양 교류 내용을 상세히 설 명해 주고 있다. 오래전부터 인천 지역이 지녀왔던 환황해 해양교류·소통의 거점 역할이 적잖이 위축되게 된 계기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강 유 역을 빼앗기고 충청도 공주 지역으로 천도하면서부터였다. 고구려는 인천 한나루를 국제항구로 활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환황해 해양교류·소통의 중심지를 경기도 화성 지역에 위치한 당항성으로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천의 바다가 ‘닫혔던’ 것은 아니었다. 인천은 한반도 내의 남부와 북부로 오가는, 그리고 중국으로 오가는 해양교통의 주 요 항로였던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인천의 해양교류 흔적을 ‘영흥도 선’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신종국의 글(상권 제2 장의 「수중고고학적 궤적, 인천해역의 침몰선」)에서는 옹진군 영흥 도에 속한 무인도 섬업벌의 서남쪽 해역에서 2010년과 2012년 수중 탐사를 통해 발견된 ‘영흥도선’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다. 선체의 구 조와 출수 유물,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영흥도선’이 통일신라시 대의 선박이었음을 밝혀준다. ‘영흥도선’은 지금까지 공백이었던 통 일신라시대의 선박사와 당시 인천을 둘러싸고 활발하게 전개된 해양
18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교류사를 밝혀주는 실증적인 자료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해양교류의 거점이라는 인천의 역할은 고려시대에 들어와 크게 신 장하게 된다. 우선 고려의 창업 군주 왕건은 강화도에 자신의 수군세 력을 두었고, 강화도 일대를 해양방어의 요충지로 삼았던 것이다. 이 러한 조치는 강화도를 둘러싼 인천의 해역이 수도 개경의 목구멍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12세기 전반, 송나라의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했던 서긍徐兢이 찬술한 고려 견문기 『선화봉사 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따르면 고려 정부가 인천 영종도에 ‘경원 정慶源亭’이라는 객관(오늘날의 게스트하우스)을 설치하여 해양교류의 편익을 제공하였다는 사실을 살필 수 있다. 또한 영종도(옛 자연도)는 예성강(벽란정) ↔ 자연도(경원정) ↔ 고군산도(군산정) ↔ 마도(안흥 정) ↔ 흑산도 ↔ 명주(중국 절강성)를 잇는 ‘명주明州항로’의 한 축을 담당했을 것으로 짐작되고도 있다. 중국 남쪽과 교류하는 명주항로를 택한 이유는 중국 북쪽을 차지한 요遼 거란족이 세운 국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그러하던 인천의 바다가 ‘닫히게’된 때는 성리학적 이데올로기로 국가를 통치하려 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이다. 중국 명나라가 먼바다 로의 출입을 금지한 ‘해금海禁정책’을 실시하자 조선 또한 그 정책을 따랐던 것이다. 이러한 정책을 취했던 데에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는 시기에 왜구가 한반도의 서해 연안으로 다대하게 침략하여 섬 과 바다에 대한 조선 정부의 군사적, 행정적 통제력이 극히 제한적이 며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고려시대까지 인천이 지녔던 해양교 류·소통의 역할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천이 지닌 ‘해양성’은 조선 정부에서도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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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1413년태종 13 ‘주州’ 자가 들어가 있는 전 국의 고을 중 3품 벼슬 이하가 부임하는 고을은 모두 ‘주’자 대신 ‘산 山’ 또는 ‘천川’ 자로 고치도록 하였다. 이때 총 55개 고을이 그 대상이 되어 명칭을 고쳤는데, ‘산’자로 개명된 고을이 20개, ‘천’자로 개명된 고을이 35개였다. 그런데 ‘천’자로 개명된 고을은 대체로 영역 내에 바다나 강이 있는 경우였다. 인천의 경우 서쪽과 남쪽 양면이 큰 바다 와 접해있었기에西南大海皆七里 ‘천’자로 개명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 다. 비록 인천의 먼바다는 국가 정책에 의해 막혔지만, 바다를 가진 고 을이었다는 점에서 지명으로나마 해양성은 전습되었다고 하겠다. 한편,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부가 해금정책을 실시하였다고 하지만 해양을 완전히 쓸모없는 공간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국방상의 이 유로 말의 사육이 적극적으로 추진되면서 목축 조건이 좋은 제주도는 물론 내륙 인근의 섬에 국영목장을 설치하여 말을 키웠기 때문이다. 인천 지역에서도 강화도를 비롯하여 주문도, 장봉도, 신도, 영종도(자 연도), 용유도, 무의도, 덕적도, 이작도, 영흥도 등 여러 섬에 국영목장 을 설치하였다는 사실을 조선시대 문헌기록과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확인되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들어와 인구가 증대하고 농경지가 부족해짐에 따라 농경지 확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섬 지역의 국영 목장을 축소 또는 혁파하는 일이 많아졌다. 오랫동안 말을 키우면서 비옥한 땅으로 변모한 목장은 농경지로 바꿀 수 있는 최상의 땅이었 던 것이다. 더군다나 정묘丁卯 1627년와 병자丙子 1636년의 두 차례 호란을 겪으 면서, 조선 정부는 강화도를 중심으로 하고, 그 주변 섬에 군사 시설을
20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인천 서해지역은 중국과 마주하고 있어 17세 기 중엽 이후 황당선荒唐船이 적잖게 출몰하고 있었으며, 경상도·전라 도·충청도의 3남 지방과 황해도에서 거둬들인 세금을 운반하는 조운 선漕運船이 지나는 주요 해로였기에 해방처海防處로서의 역할이 더욱 강 조되었던 때문이었다. 인천 지역의 여러 섬에서 국영목장을 혁파하고, 사람들을 입도入島시켜 농경지를 경작케 하는 정책으로 전환한 것은 섬에 군사 시설, 즉 수군진水軍鎭을 설치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입도한 사람들에게 농토를 경작케 하면서 수군 역役을 지게 하였던 것이다.
조선 후기 강화도가 보장처保障處 외침이 있을 때 왕실 및 조정이 보호받을 수
있는 곳로 인식되어 진鎭·보堡·돈대墩臺 등이 설치된 내용, 교동도에 경 기수영(후에 경기·황해·충청의 수영을 통괄하는 ‘삼도수군통어영’으 로 확장)이 설치된 내용, 그리고 강화도의 남부에 위치한 자연도에 수 군 영종진이 이설移設된 내용 등은 이 책에 수록된 배성수의 글(상권 제4장의 「조선후기 인천 연안의 방어체제 구축과 변화」)을 통해 자세 히 다루고 있다. 그런데 18세기에 들어오면서 만약에 있을 청淸의 침공을 방어하겠 다던 전략은 쓸모가 없어졌다. 17세기 중엽 부왕父王 인조가 당한 수 모(‘삼전도의 굴욕’을 말함)에 대한 복수를 명분으로 내세운 효종과 서인 정권의 ‘북벌론北伐論’이 효종의 사망으로 중단되었을 뿐만 아니 라, 청의 강희康熙 재위 1662~1722년·건륭乾隆 재위 1736~1795년 시대를 맞이 하면서 동북아시아의 질서가 청을 중심으로 안정 체제에 들어섰기 때 문이었다. 이후 커다란 혼란 없이 평온한 상태를 유지해오던 인천 지역은 해 양은 청국이 아닌 다른 외부로부터의 충격을 받게 된다. 바로 ‘이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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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樣船’의 출현이었다. 해금과 해방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던 ‘은둔의 왕 국’ 조선의 앞바다에 서양의 이양선들이 본격적으로 출몰하기 시작 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였다. 이양선의 출현은 세계문명사적 측 면에서 해석하면 ‘근대(문명)’의 침입이었지만, 조선 정부는 해양을 통해 온 근대를 악령으로 받아들였다. 더군다나 중국(청)이 아편전쟁 1840~1842으로, 그리고 일본(에도막부)이 함포외교1854로 서양세력에 문호를 개방한 사실이 전해지면서 조선 정부는 서양 세력의 침략에 대한 경외심이 더욱 커져갔던 것이다. 19세기 말 인천 앞바다와 강화 도 해안 및 내륙에서 벌어진 서양 세력과의 충돌은 1866년고종 3 9월 (~11월)에 발생한 ‘병인양요’와 1871년고종 8 5월(~7월)에 발생한 ‘신 미양요’였다. 병인양요는 1866년 2월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조선인 천주교 신도 수천 명이 학살당한 ‘병인박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P.G. Roze가 군함을 이끌고 조선에 침략한 사건이 다. 로즈 제독은 강화도 읍치와 통진의 문수산성을 점령하는 전과를 얻었으나, 양헌수梁憲洙 부대와의 정족산성 전투에서 패한 후 강화도에 서 철수하고 조선해안을 떠나면서 종료되었다. 신미양요는 1866년 8월 대동강에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격침되고 선원 24명이 사망한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발생한 조·미간 의 전쟁이다. 1871년고종 8 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J. Rodegers가 군함을 이끌고 조선에 침략하여 강화도의 해방시설들(초지진, 덕진 진, 광성보 등)을 차례로 점령한 후 철수하면서 종료되었다. 두 차례의 ‘양요’에서 보장처 강화도가 쉽게 점령당하자 조선 정부 는 해방 시스템을 수정하게 되었다. 신미양요 직후 강화 앞바다에서 도성(한강)으로 진입하는 길목인 염하수로鹽河水路의 초입에 위치한 초
22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지진, 덕진진, 광성보, 용진진 등에 포대砲臺를 축조하여 도성으로 향 하는 수로를 방비하였던 것이다. 이는 강화도가 보장처에서 도성의 해상출입구를 지키는 ‘인후처咽喉處’로 그 역할이 변모하였음을 의미 한다. 이와 함께 강화도 남쪽에 늘어서 있던 인천 섬의 수군진들도 보 장처 강화도를 위호하는 것에서, 도성으로의 출입 해로를 지키는 인 후처로 그 역할이 변모하였던 것이다. 19세기 말 서양 열강의 침략과 인천의 방어체제는 배성수의 글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갈대가 우거진 한적한 포구에 불과했”던 인천 제물포의 근대적 개 항(1883년)은 인천뿐 아니라 ‘은둔의 나라’ 조선 사회 전체에 큰 충격이 자 기회였다. 강화도에서 프랑스1866년 병인양요와 미국1871년 신미양요으로 대표되는 서구 제국주의 세력과의 충돌을 무사히(?) 넘긴 조선의 쇄국 정권은 서구 제국주의를 모방한 일본의 기습1875년 운양호사건에 속수무 책으로 당하여 이듬해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동·서·남해 연안의 항 구를 개항할 수밖에 없었다. 바닷길을 열었던 고려 정부와 달리 성리학 적 질서, 특히 바다를 버리고[이른바 ‘해방’海防정책] 내륙 중심의 통치 질서를 추구했던 조선 정부는 ‘근대적’ 개항의 충격에 주체적으로 대 처하지 못하고 일본과 청국을 비롯한 서양 열강에 의해 이끌려 갔다. 그렇지만 전통 질서가 파괴되는 충격과 함께 문명을 흡입할 수 있 는 기회도 마련되었는데, 여타 개항장보다 인천은 조선의 수도 서울 과 인접했다는 특징 때문에 다양한 서구 문명을 더욱 많이 흡수할 수 있었다. 이에는 일본 또는 청국의 전관조계專管租界만이 설치된 여타 개항장과 달리 청·일 양국의 전관조계뿐 아니라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서구 각국의 공동조계가 함께 설치된 것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하겠다. 이러한 조건에 힘입어 인천에는 전기, 전신,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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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교회, 은행, 무역상사, 우체국, 영사관, 기상관측소, 해관海關, 등 대, 갑문閘門 dock 등 새로운 근대 문물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그 창구 는 동아시아의 국제항구로 변모한 인천항 제물포였다. 근대 국제항구 로 발전한 과정은 이 책에 수혹한 김현석의 글(제5장의 「해양교류의 거점, 축항과 갑문」)에서 다루고 있다. 개항기 국제항구도시로 성장한 인천은 1910년 8월 29일 일본 제 국에 주권을 약탈당하고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그 성장이 정체되고 바 다도시의 성격이 왜곡되었다. 개항으로 얻어진 ‘다양적’ 기회를 상실 한 채 일제의 탐욕에 의한 ‘일방적’ 편제만이 이식되었는데, 인천을 공업화하여 병참기지화했던 것이 그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인천항 또한 식민지 조선을 경영하는데 요긴한 무역항으로서만 기능하였다. 인천의 바다는 다시 ‘열렸’지만 이는 식민지 상태에서의 ‘열림’이었던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전으로 인천은 이식된 식민성과 왜곡 성을 청산하고 옛 시절에 지녔던 해양성을 재생할 절호의 기회를 얻 었다. 그렇지만 해방 정국의 어수선함과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한 북 한군의 점령, 그리고 인천상륙작전 등의 여러 후유증 때문에 그 기회 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조성된 공업도시의 성격 을 여전히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확대하게 되었는데, 특히 군 사 쿠데타 정권에 의해 추진된 산업 성장지상주의 여파로 그 기형성 이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인천은 1,600여 년 동안 수도와 연접한 지역이었다는 매우 독특한 지정학적 성격을 지녀왔고 지금도 그 성격이 계속되고 있다. 기원전 18년~475년의 약 500년 동안 백제의 수도가 한성漢城, 918년~1392
24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년의 약 500년 동안 고려의 수도가 개성, 1394년~1910년의 약 500 년 동안 조선의 수도가 한양, 그리고 해방 이후 지금까지 약 80년 동 안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이었던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인천 지역은 수도로 출입하는 길목, 수도를 중심으로 한 위성도시로 인식·간주되어 왔다. 그렇지만 해양사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인천 지역은 수도의 ‘위성’ 도시만은 아니었다. 어느 특정 시기에 수도와 함께 묶여 ‘육지화’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해양화’하였던 또는 하려했던 경우도 여러 차례 있 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인천광역시는 해양문화도시로서의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 우선 인천 시정의 방향 및 목표의 기본 골격에 해양성이 들어가 있다는 점이 그러하고, 무엇보다 해양 과학 및 역사, 문화 연구 및 정 립의 총체라 할 수 있는 ‘국립인천해양박물관’이 2024년 말 개관을 앞두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번에 인천광역시사 제15호로 기획·발간하는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은 경기만 연안, 섬, 황해와 관련한 인천의 역사와 문화를 주요 내용으로 하여 상, 하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권에는 인천의 해양환경, 해양유물, 해안방어, 해양교류 등을 주제로 모두 5편의 글 이, 하권에는 인천 해안의 간척·매립, 해양민속, 해양설화 및 문학, 포 구와 항구, 해양문화 등을 주제로 모두 6편의 글이 수록되었다. 상권에 수록한 글들은 인천의 해양사를 정리하면서 소개·언급하 였지만, 하권에 수록된 주제들은 김윤식 선생이 하권의 마지막 제6장 (「바다와 섬, 항구도시 인천의 해양문화」)에서 잘 정리해 주어 이 총 설에서는 생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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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이번에 발간하는 시사는 인천이 지닌 지정학적, 역사적, 문 화적 정체성을 정리함은 물론 향후 인천이 해양도시로서 나아갈 길 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매우 뜻깊은 작업이다. 더군다나 자연과학 은 물론 역사학, 문학, 고고학 방면의 다양한 전공자들이 함께하는 융 합적 연구 성과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아울러 각 글을 읽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적절한 사진 및 그림 자료들을 다양하 게 제시하고 있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런 점에서 이 시사는 ‘동아시아 해양도시’라는 인천의 정체성을 포착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하리라 본다. 이번 시사를 계기로 추후 인 천의 정체성을 육지보다는 해양에서 찾는 인식과 노력이 확대되기를, 그리고 인천 해양의 역사와 문화 등을 주제로 한 다양하고 심도있는
26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책들이 기획·발간되기를 기대해 본다.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김기룡
(사)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장
1. 인천의 해양환경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1) 황해黃海, Yellow Sea의 기원
황해는 서태평양의 북부에 위치하며, 북서쪽으로는 중국, 동쪽으 로는 한반도에 둘러싸인 반 폐쇄성만이다. 황해란 명칭은 국립지리원 지명위원회의 의결에 따라 1961년에 고시되었으나, 한국에서는 한 반도의 서쪽에 있는 바다라는 의미의 서해와 함께 사용하고 있다. 국 제수로기구IHO에 따르면 황해는 남쪽으로 제주도에서 중국 상하이 부근 양쯔강 하구까지 선을 잇고, 북쪽으로 랴오둥반도와 산둥반도 를 선으로 잇는 범위로 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보하이만(발해만)과 구분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보하이만을 황해에 포함한다. 황해의 크기는 남북으로 1,000km, 동서 간 최대 폭이 700km, 평균수심은
30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44m 정도이다. 면적은 487,000km²로 한반도의 약 2배이며, 황해에
황해는 동고서저 지 형의 한반도와 서고동 저 지형의 중국의 지리 적 특성으로 인해 만들 어진 바다이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한반도 와 중국의 강들은 대부 분 황해로 흘러든다. 일 반적으로 한국보다 중국 에서 훨씬 많은 양의 퇴 적물을 공급하고 있다. 특히, 중국 황하의 상류 사막 지역에서 흙탕물이
담긴 해수의 총량은 약 19조 톤 정도이다.
당빌D’Anaille이 제작한 「중국전도」에 표기된 황해HOAN HAI
꾸준히 유입됨으로 인해 강물이 누렇게 보여서 황해라고 붙여졌다고 한다. 황해라는 명칭은 1737년 프랑스의 당빌D’Anaille이 제작한 지도 1 에서 최초로 사용했다. 그렇다면 황해는 어떻게 생성된 것일까? 신생대 제4기인 1만 5천~1만 8천 년 전의 마지막 빙하기에는 해 수면이 현재보다 약 130m 정도 낮았다. 그래서 이 시기에 황해는 대 부분이 육지였을 것이다. 이후, 후빙기에 해수면이 점차 높아져 낮 은 지역이 바닷물에 잠겨서 황해가 생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5
1 당빌D’Anville, 『신중국지도첩Nouvel Atlas de la Chine』, 1737.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31
신생대 4기 최종 빙기 때 해안선과 옛 하천 (서울대학교 해양학과 박용안 교수 자료 인용)
년 블롬과 박용안은 7,000년 ~8,000년 전 이후 해수면이 매우 느리게 지속적으로 상 승했는데 초기 해침이 일어 난 기간에 해수의 상승 속도 는 연간 약 1.6mm이었으나, 그 이후 5,000년 동안 해수 면은 연간 0.3mm로 느리게 해수면 상승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2 그러나 1988년 신동 혁은 해수면은 소규모 상승 과 하강을 반복했으며, 후기 홀로세 동안 해수면의 변화는 볼룸과 박용안의 주장과 달리 해수면의 상승이 지속된 것이 아니라 상승과 하강을 여러 차례 반복하였다고 주장했다. 3 김정률 등이 약 14,000년 전에 형성된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하 모리층에서 발견한 화석에서도 유영 능력이 거의 없는 사람, 장비류長鼻類 발자국이 산출되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는 황해가 형성되지 않았고, 제주도가 한반도, 중국, 일본 등과 육지로 이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Bloom,A.L, Park,Y.A, 1985, 「Holocene sea-level history and tectonic movements Republic of Korea」, Quaternary Research 24 : 77-84. 3 신동혁, 『한국 서해안 가로림만 조간대 퇴적환경과 홀로세 해수면 변동』, 인하대박사학위
논문, 1988.
32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제주도 사계리 해안의 사람 발자국 화석
제주도 사계리 해안의 장비류長鼻類 발자국 화석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33
2) 황해 한반도 서해안의 지형 한반도 서해안의 대표적인 만으로는 경기도에 위치한 경기만과 평 안북도와 평안남도 사이에 있는 서한만이 있고 이보다 작은 만인 철 산만, 광량만, 해주만, 남양만, 아산만, 천수만, 비인만, 줄포만, 함평만 등이 북에서 남으로 발달 되어 있다. 한반도 서해안에 발달한 반도로 는 철산반도, 장연반도, 옹진반도, 태안반도, 변산반도 등이 있다.
황해Yellow sea의 경계 및 대표적인 만
34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서한만은 랴오둥반도 끝에서 장산곶을 잇는 한반도 서해안에 있는 만 으로, 그 폭은 약 150km, 만입은 약 70km이며, 수심은 30m 정도로 한반 도 서해안에서 가장 크다. 서한만으로 청천강, 대동강이 흘러들고 있다. 경기만은 황해도의 옹진반도 남단 등산곶과 충청남도의 태안반 도 사이에 있는 반원형의 만으로, 해안선 길이는 528km, 너비는 약 100km, 만입은 약 60km이다. 경기만은 굴곡이 심하며, 만 안에는 강화도, 영종도, 덕적도, 교동도, 석모도 등 크고 작은 많은 섬이 있었 으나 간척공사로 섬들이 매립되어 육지화되었다. 경기만으로는 한강, 임진강, 예성강, 안성천 등에서 많은 토사가 공급되어 수심이 얕고, 조
3) 황해의 해류
수간만의 차가 커서 갯벌이 발달되었다.
황해의 해류는 1934년 일본인 학자 우다Uda 의해 처음으로 연구 되었고 그 결과가 지금까지 자주 인용되고 있다 4. 황해의 해류는 황 해 중앙을 따라 북상하는 황해난류Yellow Sea Warm Current : YSWC와 한
국 연안 및 중국 연안을 따라 남하하는 중국대륙연안류Coastal Water of
China Contiental : CWCC가 대표적이다. 황해 중앙을 북상하는 황해난류는 고온 고염분의 해류로 황해로 열과 염분을 실어 나르고 있다. 황해난류의 기원은 동중국해 남쪽을 따라 흐르는 쿠로시오 해류이다. 쿠로시오 해류에서 갈라진 대만난류 TWC가 동중국해를 북상하면서 다시 갈라져 오른쪽으로 흐르는 쓰시
4 Uda, M., 「The results of simultaneous oceanographical investigations in the Japan Sea and its adjacents in May and June」, 1932.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35
황해의 해류 및 수괴 분포 (고철환, 『한국의 갯벌 환경, 생물, 인간』, 1998. 그림 전재) (YSWC : 황해난류, CWCC : 중국대륙연안류, TWC : 대만난류, YSBCW : 황해저층냉수)
마난류가 황해로 유입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이 해류는 제주도 북 쪽으로 북상하여 우리나라 남해안과 일본 사이를 거쳐 동해로 흘러든 다. 이 중 일부가 황해로 들어와 황해 중앙부로 흐르게 되는데, 이를 황해난류YSWC라고 한다. 6 황해난류는 4월부터 북상하기 시작하여 8 월에 그 세력이 가장 활발하다. 10월부터 황해난류의 약세와 북서 계 절풍에 의해 중국대륙연안류CWCC가 형성되어 남하한다.
5 승영호, 「한반도 주변의 수괴와 해수순환」, (한국해양학회지) 『바다』 27, (사)한국해양학 회, 1992, 24~331쪽. 6 이석우, 『한국근해해상지』, 집문당, 1992.
36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4) 황해의 조류 조류는 밀물과 썰물이 방향이 바뀌며 바닷물의 흐름이 바뀌는 수 평운동으로, 지역적 편차가 심하고 대단히 복잡하다. 조류를 일으키는 힘인 기조력起潮力은 달과 태양의 인력과 지구, 달, 태양의 운동으로 인 해 생기는 원심력에 의해 형성된다. 유속은 황해 외해에서 1m/s 이상 이고, 내해로 올수록 더 빨라져 최대 2m/s까지 이른다. 황해에서 조 류가 큰 해역은 조차가 4~8m에 달하며, 조류의 방향은 썰물 때는 북 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밀물 때는 반대 방향으로 흐른다.
경기만 일대 밀물 때 조류 방향(좌) / 경기만 일대 썰물 때 조류 방향(우) (고철환, 『한국의 갯벌 : 환경, 생물 그리고 인간』, 1998. 그림 전재)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37
울도등대에서 바라본 덕적군도
5) 인천 해양환경의 특징 황해에 접한 인천 해양환경의 특징으로는 반폐쇄적인 지형, 얕은 수심, 한강을 비롯한 하천으로부터 유입된 퇴적물, 조류 등에 영향을
(1) 갯벌
받아 형성된 갯벌과 풀등이라고 할 수 있다.
갯벌이란 만조에 바닷물로 덮여 있다가 간조에 드러나는 연안의 평평한 지형으로, ‘갯’은 바닷가를, ‘벌’은 넓은 들을 의미한다. 즉, 갯 벌은 바닷가의 넓은 뜰이라는 말이 되므로 우리나라 서해안에 펼쳐지 는 넓은 지형은 갯벌이다. 7 서해안의 갯벌은 북쪽이 막히고 아래쪽은 터진 형태의 지형적 특징과 얕은 수심으로 인한 큰 조차로 폭이 좁고 길이가 긴 형태를 갖는다. 인천 연안 갯벌의 면적은 838.5km²로 우
7 고철환 편저, 『한국의 갯벌 : 환경, 생물 그리고 인간』,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1998.
38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리나라 전체 갯벌 면적의 35%를 차지한다. 인천 연안 갯벌은 강화도, 석모도, 볼음도 주변과 장봉도, 영흥도, 자월도, 덕적도, 영종도, 용유 도 일대에 넓게 분포한다. 특히, 강화도 장화리에서 동막, 선두리, 초 지리에 이르는 강화남단 갯벌의 면적은 300km²로 인천 최대 갯벌을 이루고 있다. 인천이 속한 경기만 일대는 후빙기 이후 해수면 상승으로 말단부 가 침수되어 해안선이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을 이루고 있다. 인천은 우리나라에서 전남, 경남, 충남에 이어 4번째로 많은 168개의 섬을 보유하고 있다. 인천 섬들은 6,000년 이전에는 멸악산맥(백령도, 대 청도, 소청도, 연평도, 소연평도)과 마식령산맥(덕적군도, 자월도, 장 봉도, 영흥도 등)의 말단부에 속하여 육지부로 남아 있다가 해수면의 상승으로 바닷물에 잠겨 육지로부터 격리된 것이다. 해안가에는 파도와 조류의 침식 작용으로 형성된 해식절벽, 해식대 지, 해식동굴, 시-스택sea-stack, 시-아치sea-arch 등과 같은 특징적인 침식 지형을 볼 수 있다. 또한, 지형과 해안을 따라 모래나 자갈이 퇴적되어 만들어진 해빈海濱, 조류의 영향으로 퇴적물이 쌓여 섬 주변에 있는 작 은 섬이 이어져서 간조 때가 되면 걸어갈 수 있는 육계사주陸繫沙洲 등과 같은 퇴적지형이 발달 되어 있다.
(2) 풀등 풀등의 ‘풀’은 모래를, ‘등’은 언덕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루 두 번 썰물에 의해 나타나는 바다 한가운데의 모래언덕을 말한다. 경기만에서는 대이작도와 장봉도의 풀등이 대표적이다. 풀등은 ‘풀치’ 또는 ‘하벌천퇴下伐川退’라고도 하는데 조류와 해류의 영향으로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39
운반된 모래가 퇴적되어 만들어진 해양생태계의 보고이다. 풀등은 꽃 게와 넙치 등 해양생물의 서식지로, 풀등 주변 해역은 소라, 굴, 피조 개, 광어 등 다양한 생명들이 살아가고 있다. 풀등에 쌓인 모래는 해양 생물에게 안정적인 서식처를 제공하고 새들에게는 쉬어가는 휴식처 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파랑波浪 에너지를 감소시켜 태풍이나 해일 같 은 외부의 힘을 차단하는 천연 방파제의 역할도 하고 있다.
40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① 대이작도 풀등
대이작도 풀등(옹진군청)
대이작도 풀등은 대이작도 남쪽 바다에 위치하며, 동서로 약 3.6km, 남북으로 약 1.2km, 면적은 약 47만 평에 달한다. 대이작도
풀등 주변 지역은 뛰어난 자연경관은 물론, 생물과 기타 저서생물底棲
生物의 주요 서식지인 해역을 보호하기 위해 해양수산부로부터 2003 년에 ‘해양생태계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 그러나 인 천시 조사에 따르면 대이작도 근해의 풀등의 면적은 2007년에 250 만m²에 달했지만 2021년 66만m² 정도만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 다. 이는 건축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바다 모래를 채취했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41
② 장봉도 풀등 장봉도 풀등은 간조 때 장봉도와 동·서만도 사이, 장봉도 북서쪽 해안과 강화도 남서단 사이의 바다에 걸쳐 노출되는 커다란 모래섬이 다. 장봉도 풀등은 장봉도의 특산물인 백합 조개를 비롯한 다양한 해 양생물의 천연 서식지로 알려져 있다. 한강 하구의 전형적인 모래갯 벌인 장봉도 풀등은 멸종위기 야생동물인 노랑부리백로, 저어새, 검은 머리물떼새, 알락꼬리마도요를 비롯한 다양한 조류가 서식하고 있고 다른 지역에 비해 생물다양성이 매우 우수하다. 한때 장봉도 풀등 속 에 포함된 티타늄을 채광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으나, 2003년에 주민 들의 자발적 요청으로 ‘갯벌해양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어 보호하 고 있다.
장봉도 풀등
42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2. 인천의 자연환경
1) 인천의 위치 인천의 위치는 126°37′ E, 37°28′N 8로, 비슷한 위 도선에 있는 도시는 양평, 횡성, 삼척, 울릉이고, 비슷 한 경도선에 있는 도시는 홍성, 군산, 완도, 서귀포, 개성, 강계 등이 있다. 위도 상 인천과 유사한 다른 나 라의 도시는 포르투갈 리 스본, 그리스의 아테네, 미 국의 샌프란스시코와 워싱
동경 약 126°
자성
강계
곡산
개성
양평
횡성
홍성
군산
나주
완도
서귀포
삼척
북위 약 37°
울릉
인천과 비슷한 경도, 위도상의 도시 (인천광역시사편찬위원회, 『인천광역시사』 제1권 자연환경과 지리, 2002. 지도 편집)
턴 등이고, 경도상으로는 중국의 하얼빈, 지린,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섬,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등이 있다. 9 인천은 서해 경기만에 접하는 내륙지역과 강화도, 영종도를 비롯 한 도서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기만의 중앙에 위치한 인천은 수 도 서울의 관문이자, 황해를 오가는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하고 예성 강, 임진강, 한강이 황해와 만나는 곳으로 서해와 중부 내륙지방을 연 결하는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육상교통과 해상교통이 좋을 뿐만 아니라, 서울과 경기도 등 수도권과 인접한 지리적 특색으로, 인천에
8 인천광역시 공식 홈페이지(인천소개-인천안내-위치) 9 인천광역시사편찬위원회, 『인천광역시사』 제1권 자연환경과 지리, 2002.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43
연평면
37° 35′
백령면
옹진군
대청면
인천광역시 관내 지도
126° 00′
126° 30′
양사면
교동면
송해면
하점면
강화읍
강화군
선원면
삼산면
불은면
양도면
강화군
서도면
길상면
화도면
인천광역시
북도면
경기만
서해
옹진군
자월면
덕적면
영흥면
경기도
서구 계양구
부평구
동구
중구 미추홀구
남동구
연수구
는 제당, 제분, 제철, 정유, 제재, 가구 등과 같은 중량이 많이 나가는 수입 원자재를 가공하는 공업이 주로 발달 되었다. 인천의 면적은 2023년 기준 1,067.1km²로 전 국토 면적의 1%를 차지하고 있다. 10 인천은 1995년 광역시로 승격되면서 경기도에 속했 던 강화군, 옹진군, 김포군 검단면이 편입되었고, 2000년 이후 공유 수면 매립으로 그 면적이 꾸준히 증가해 왔다.
10 e-나라지표(https://www.index.go.kr/enara) 행정구역별 국토면적 통계표.
44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2) 인천의 지형과 수계 한반도는 신생대 제3기 경동성 요곡운동으로 동고서저의 지형을 보이는데 이러한 특징은 중부지방에 특히 두드러진다. 후빙기 이후 해수면 상승으로 경기만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해안선이 복잡하고 많 은 도서가 산재하는 리아스식 해안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조수간만의 차가 큰 연안에는 광활한 갯벌이 발달하였다. 인천의 산지는 오랜 침식으로 전반적으로 기복이 적은 구릉과 평 지로 구성되어 있어서 하천의 발달이 미약하다. 평야는 인천 북부의 계양구 일대에 신생대 제4기 층이 퇴적되어 비교적 넓은 부평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인천의 산세는 계양산으로부터 산곡동 철마산, 만월 산, 만수동 철마산을 거쳐 남동부 거마산, 소래산까지 이어진 활弓 모 양을 이루고 있으며, 남부에는 문학산과 청량산이 직교하는 아래 하下 모양 산세를 하고 있다. 그래서 인천 북부는 남북 방향의 시가지가 형 성되어 있고 중부는 동서 방향으로 발달되어 있다. 11 인천이 전반적으로 낮은 구릉성 지형이기 때문에 인천의 하천 발 달은 미약하다. 인천의 하천망은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북류하여 한강으로 유입되는 대표적인 하천인 굴포천, 서류하여 황해로 유입되 는 하천인 계양산에서 발원한 빈정천과 가정동 철마산에서 발원한 심 곡천이 있다. 그러나, 현재는 동아매립지 조성으로 인공배수로를 따라 황해로 유입되고 있다. 황해로 남류하는 하천으로는 소래산 일대에서 운연동과 시흥시를 따라 소래포구로 유입되는 범내천과 철마산에서 발원한 만수천, 거마산에서 발원한 장수천, 승기산에서 발원하여 남동 공단 하수종말처리장을 거쳐 배출되는 승기천이 있다.
11 인천광역시사편찬위원회, 『인천광역시사』 제1권 자연환경과 지리, 2002.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45
백운산(255m)
인천의 주요 산지 분포
3) 인천의 지질
계양산(395.4m)
철마산(266.5m)
호봉산(61.2m)
만월산(186.2m)
월미산(93.8m)
상아산(151m)
문학산(213m)
청량산(171m)
성주산(216.5m)
거마산(209m)
소래산(299.4m)
오봉산(105.8m)
인천을 포함한 경기도 일대는 선캄브리아대 변성암류를 기반암으 로 하여 중생대 쥐라기에 형성된 대보화강암류와 백악기에 형성된 화 산성 쇄설암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천의 지질은 동구, 중구, 미추홀 구, 연수구의 구릉지는 중생대 쥐라기에 생성된 화강암류로 구성되어 있고, 남동구는 중생대 백악기에 생성된 철마산 응회암과 선캄브리아 대 편암류, 제4기의 충적층과 매립지가 남북으로 발달되어 있다. 서구 는 매립지가 넓게 분포하는데 서부의 구릉지와 산지를 따라 백악기의 유문암 및 맥암류가 분포하고, 북부 구릉성 산지를 중심으로 선캄브 리아대 편마암과 편암류가 분포한다. 부평구는 백악기 철마산 응회암, 쥐라기 화강암이 주류를 이루고 서부 평지에는 충적층이 형성되어 있 다. 계양구는 남에서 북으로 가면서 중생대 쥐라기 화강암, 중생대 백 악기 응회암, 선캄브리아대의 편암류가 분포하고 제4기 충적층이 존
46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재한다. 12 강화도는 서부의 화강암 지대와 동부의 호상 편암 지대로 구 분할 수 있는데 강화도 서부인 양사, 하점, 양도, 화도면 일대와 석모 도, 서도면 일대에는 중생대 쥐라기 대보화강암이 널리 분포한다. 강 화도 동부는 대체로 선캄브리아대의 호상편마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황산도 일대에는 백악기 화산암류가 소규모로 발달 되어 있다.
4) 인천의 기후 인천은 바다와 접한 해안에 있으나 해양의 영향이 비교적 적고 기 온의 교차가 심한 편이다. 2021년 기준으로, 평균기온은 13.4℃이며, 최저기온은 1월 –17.5℃이고 최고기온은 7월 34.5℃이다. 2021년 총 강수량은 3,205.2mm이며, 평균 강수량은 267.1mm이다. 최소 강수 량은 2월 23.0mm이고 최대 강수량은 8월 768.0mm이다. 13
인천광역시 월별기온(2021년 기준) (인천광역시, 『제62회 인천통계연보(2022)』, 2023, 9쪽.) 12 최위찬 외, 「김포, 인천도폭 지질조사 보고서」, 한국지질자원연구원, 1995. 13 인천광역시, 『제62회 인천통계연보(2022)』, 2023, 64~67쪽.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47
5) 인천 연안의 갯벌 (1) 인천 연안 갯벌의 형성
인천광역시 월별 강수량(2021년 기준) (인천광역시, 『제62회 인천통계연보(2022)』, 2023, 9쪽.)
인천이 위치한 경기만은 조차가 약 9m 정도로 크고, 해안선이 복 잡하며, 섬이 많고,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의 하천이 대량의 토사를 유입시켜 갯벌이 넓게 발달 되어 있다. 경기만의 갯벌은 한강 하구 유역에 인접한 강화군의 섬 주변에 발 달 되어 있고, 옹진군의 외해와 직접 연하여 있는 서쪽 해안에는 독립 적인 갯벌이 산재 되어 있다. 경기만의 갯벌은 교동갯벌, 볼음갯벌, 강 화갯벌, 영종북갯벌, 영종-용유갯벌, 무의갯벌, 인천갯벌, 시화갯벌, 대부갯벌, 남양갯벌의 10개 갯벌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크게 강화수 로 북쪽과 남쪽에 갯벌이 발달되어 있다. 14
14 고철환 편저, 『한국의 갯벌 : 환경, 생물 그리고 인간』,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1998.
48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인천 연안의 갯벌 분포 (고철환 편저, 『한국의 갯벌 : 환경, 생물 그리고 인간』,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1998.)
갯벌을 형성하는 기본 요인은 조석인데 조석은 달의 인력이 가장 중요하다. 지구에서 달에 가까운 곳에서는 달의 인력이 크므로 해수 면이 솟아올라 만조가 되고, 그 반대쪽도 인력이 원심력보다 약하므 로 역시 해면이 올라와 만조가 된다. 만조가 되는 곳에서 90°떨어진 곳에는 반대로 해수면이 낮아져 간조가 된다.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49
그러면 우리나라 서해 갯벌은 언제 형성되었을까? 1988년에 발표 한 김여상의 논문에 따르면 지금의 갯벌 아래쪽에 존재하는 토탄층을 채취한 후 탄소동위원소를 사용하여 연대를 측정한 결과 우리나라 서 해 갯벌이 약 7,000년 전 이후에 형성된 것을 주장하고 있다. 15
(2) 인천 연안 갯벌의 가치 지질학적으로 갯벌은 침적토, 점토, 바다 생물의 분해물이 쌓여 만 들어진 노출된 진흙층을 말한다. 갯벌은 각종 어패류의 서식지로 전 체 어획량의 60% 이상을 생산하며, 자연재해와 기후 조절의 기능이 있고, 특유의 경관 때문에 관광 사업으로의 가치를 가진다. 갯벌은 다양한 생물이 살고 있어 인간을 비롯한 조류 등에도 먹이 섭 취 장소로 매우 중요하다. 갯벌 생태계의 생산력은 대륙붕의 10배, 외해 역外海域의 30배 이상 높아서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생산력을 보이는 생 태적 기능을 하고 있다. 대부분 어류나 게, 새우류 등은 하구역이나 주 변 연안의 염습지 식생 또는 갯벌에서 알을 낳거나 어린 시기를 보낸다. 그러므로 전 세계 수산물의 80~90%가 연안의 천해 수역에 직간접으로 의존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갯벌은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유럽보다 약 4.3배 많은 717종의 대형저서동물들이 살아갈 만큼 생물다양성이 뛰어나다. 육상의 지표수가 갯벌을 거쳐서 바다로 유입될 때 갯벌이 영양 염 류나 오염물질을 흡수하므로 갯벌은 자연정화 기능, 하수 처리 시설 의 기능을 하고 있다. 또한, 갯벌 습지는 홍수나 빗물 등의 급류를 일
15 김여상, 『한국 서해 천수만 사장포 해안의 조간대층의 퇴적환경과 진화』, 서울대학교 해 양학과 박사학위논문, 1988.
50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차적으로 차단하여 흡수한 뒤 천천히 방류시키는 동시에 많은 양의 물을 저장할 수 있으므로 해안의 침식을 막고 홍수의 피해도 최소화 하는 완충지의 역할을 한다. 또한 갯벌에 살고 있는 생물은 대기의 온 도와 습도를 조절하는 기후 조절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갯벌의 공 기 정화 능력은 숲의 10배, 농경지보다 100배 이상의 경제적 가치가 있다고 한다. 해양수산부는 우리나라 갯벌이 약 1,300만 톤의 탄소를 저장하고 있으며, 연간 26만 톤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한다고 밝혔다. 이는 승용차 11만 대가 내뿜는 막대한 양의 이산화탄소를 처리하는 것이다. 최근 갯벌은 낚시나 해수욕, 휴식, 관광 등을 제공하는 레저 공간과 사진작가나 화가 등의 작가들에게 작품의 소재를 제공하는 공 간으로, 그 문화적 가치가 더욱 중요시되고 있고, 자연 탐구를 위한 체 험활동 교육장으로서 기능도 담당하고 있다. 경기만은 한강, 임진강, 예성강의 하구가 되기 때문에 강화갯벌과 같은 넓은 갯벌이 이루어져 있으며, 한국 서해안 갯벌은 캐나다 동부 해안, 미국 동부 해안과 북해 연안, 아마존강 유역과 더불어 세계의 5 대 갯벌로 알려져 있다.
북해연안
캐나다 동부연안 미국동부 조지안연안 아마존 유역(연안)
서해갯벌
세계 5대 갯벌의 분포(해양환경정보포털)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51
① 인천 연안 갯벌의 특성
(3) 인천 연안 갯벌의 특성과 현황
갯벌은 파랑의 세기에 의해 모래나 펄로 바닥이 구성되므로 퇴적 형 태에 따라 모래갯벌, 펄 갯벌, 모래와 펄이 혼합된 혼합 갯벌로 나뉜다. 모래갯벌은 바닥이 주로 모래질로 형성되어 있으며, 모래 알갱이 의 평균 크기는 0.2~0.7mm 정도로 중사의 비율이 높다. 유기물 함량 은 1~2% 정도로 적은 편이고, 실트와 점토 성분 함량의 비율도 대체 로 4%를 넘지 않는다. 인천에서 모래갯벌은 외해에 위치한 백령도, 대청도에서 주로 볼 수 있다. 펄갯벌은 모래질이 차지하는 비율이 10% 이하로 펄 함량이 90% 이상 되는 갯벌이다. 퇴적물이 한강 상류에서 하구를 통해 경기만으 로 운반, 유입되어 만들어진 강화도 주변 갯벌이 대표적인 펄 갯벌이 다. 이 지역 갯벌의 표층 퇴적물 입자의 평균 지름은 0.031mm이며, 깊이가 수 m 되는 곳도 있어 함수량이 높아 걸을 때 허벅지까지 빠지 기도 한다. 펄갯벌에서는 갑각류나 조개류보다 갯지렁이류가 많이 서 식한다. 혼합 갯벌인 모래펄 갯벌은 송도 주변 개척 전 갯벌의 하부에서 볼 수 있다. 송도 주변의 갯벌은 썰물 때 바다 쪽으로 4km 정도 노출되 는데 상부는 이질이 90%인 펄갯벌이고, 상부에서 하부를 향하여 내 려갈수록 펄 함량의 비율이 차츰 낮아지고 반대로 모래 함량은 많아 지는 입도 분포를 보인다. 또한 유기물도 상부에서 하부로 내려가면 서 3.2~1.4%로 점차 감소한다.
52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② 인천 연안 갯벌의 현황
옹진군
원래 인천 땅 매립되어 생긴 땅
교동도
석모도
옹진군
영종도
실미도
영흥도
서구
계양구
부평구
동구
중구 미추홀구
남동구
연수구
인천 갯벌 매립으로 넓어진 땅(인천광역시시립박물관, 『사라진 섬, 파묻힌 바다, 태어난 땅』, 2015.)
우리나라 갯벌은 한강, 낙동강, 영산강, 금강 등 조차가 큰 강 하구 에 대단위로 발달 되었다. 우리나라 서남해안에 분포하는 2,393km² 의 갯벌 중 경기도를 포함한 인천 관내에 35%인 838.5km²가 분포 하며, 이중 인천 연안에 분포하는 갯벌은 745km² 정도이다. 대규모 간척·매립 사업이 진행되기 이전인 1910년대 인천 연안에는 북부의 김포 갯벌, 중부의 송도 갯벌, 남부의 남동 갯벌이 넓게 분포하였는데, 김포 갯벌은 송도 갯벌과 남동 갯벌에 비해 면적이 넓고 대규모 갯골 이 잘 발달해 있었다.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53
인천 연안의 갯벌이 일찍부터 매립된 이유는 첫째, 인천의 지형 특성 상 평야가 부족했기 때문이고, 둘째, 조차가 크고 해안선이 복잡하여 갯벌 이 넓게 발달했기 때문이고, 셋째, 수도인 서울과의 인접성 때문이었다. 갯벌의 간척과 매립은 고려시대에 식량 확보를 위한 농경지 확대 로 시작되어 60년대 이전까지 소규모로 진행되었으나, 60년대 이후 대규모의 간척과 매립 사업들이 진행되면서 갯벌이 훼손되고 갯벌 부 근에 있었던 섬들이 육지화되어 사라지고 있다. 16 그러나 1990년대 중 반 이후부터 갯벌의 효율적 이용을 위한 노력이 추진될 수 있게 되어 현재에는 우리나라 주요 갯벌에 대한 모니터링과 정화 및 효율적 관 리 방안을 다양하게 모색하고 있다. 인천 연안에 있는 강화 갯벌, 김포 갯벌, 영종 갯벌의 매립 과정은 다음과 같다. 강화권 섬은 1232년고려 고종 19 몽골의 침입으로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많은 난민을 부양하기 위한 농경지의 필요에 따라 매립이 시작되었다. 조선시대 숙종 때 강화도와 마니산 사이의 갯벌이 매립 되었고, 조선 초까지 송가도, 석모도, 어류정도漁遊井島로 나누어져 있 던 석모도는 세종 때 소규모로 매립이 시작되었다가 임진왜란 이후 본격적인 매립으로 송가도와 석모도가 연결되어 송가평이 생기게 되 었다. 교동도는 고려말 왜구의 출몰이 빈번해지자 교동 전체를 요새 화하면서 매립되어 영산평과 영주평이 생기게 되었다. 17
16 조철민, 「갯벌왕국의 자존심, 인천의 갯벌과 간척이야기」, 인천학술진흥재단 학술보고 서, 2013. 17 최영준, 『국토와 민족생활사』, 한길사, 1997.
54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간척이전
미법도
서검도
주문도
1990년대
영주평
서검도
간척지
신이포
인점포
송정포
승천포
교동도
제포
미포 미포
망월도
송가도
정포
석모도
가릉포
어류정도
고가도
선두포
흥왕포
영산언
교동도
송정평
망월언
상주언 송가평
강화도
석모도
가릉평
선두평
선두포언
옥포
이포
대청포
탁포
굴포
동검도
대청언
굴포언
간척 이전 강화도(상) / 1990년대 강화도(하)(최영준, 『국토와 민족생활사』, 한길사, 1997.)
인천 서북부의 김포 갯벌 매립은 1960년대 난민 정착 사업의 일 환으로 추진되었다. 이후 1980년대 동아건설이 경기도 김포 일대, 장 도, 일도, 청라도 등을 연결하여 1989년에 완성하였다. 이후 동아 매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55
립지 중 북쪽이 수도권 매립지가 되었고 남쪽이 청라 경제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영종도 일대는 인천국제공항을 조성하기 위해 주변에 있던 삼목 도, 신불도, 용유도가 매립되어 하나의 섬이 되었다.
매립 후 영종도 주변 섬 분포(2015년)(영종역사관 전시 자료 변형)
(4) 세계자연유산으로 포함되어야 할 인천 연안 갯벌 신안 갯벌, 보성순천 갯벌, 서천 갯벌, 고창 갯벌 등 한국의 갯벌이 2021년에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한국의 갯벌이 지구 생물다양성 보전을 위해 세계적으로 중요하고 의미있는 서식지 중 하나이며, 특히 멸종위기 철새의 기착지로서 탁월한 보편 적 가치가 인정된다”하여 한국의 갯벌을 세계자연유산에 등재한다고 발표하였다. 세계유산위원회는 한국의 갯벌을 세계유산 등재 결정을 하면서 4 가지를 권고하였는데, 첫째, 2025년까지 유산 구역을 확대할 것, 둘
56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세계자연유산에 포함되어야 할 강화남단 갯벌
째, 유산의 통합 관리 체계를 구축할 것, 셋째, 유산에 부정적인 영향 을 줄 수 있는 개발을 관리할 것. 넷째, 멸종위기 철새 보호를 위해 동 아시아 철새 이동 경로상의 국가들과 협력할 것이었다. 이중 첫째 권고 사항이 나온 이유는 한국의 갯벌이 신안 갯벌을 제 외하고는 갯벌이 넓지 않고, 한국의 갯벌 중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인천 주변의 경기만 갯벌을 포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천광역 시와 경기도의 갯벌은 우리나라 갯벌 면적의 35%를 차지하고 있고 강 화도와 영종도 남쪽 해안은 국제조류보호회의ICBP가 지정한 철새 주요 서식지다. 특히 강화군 길상면 동검리에서 화도면 동막리와 여차리 일 대의 강화 남단 갯벌은 단위 갯벌로는 우리나라 서해안 갯벌 중에서 가 장 넓은 면적을 자랑할 뿐만 아니라, 멸종위기종 1급인 저어새를 비롯 하여 수많은 도요물떼새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먹이활동을 하는 곳이다.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57
세계자연유산 보전을 위하여 인천광역시와 강화군은 중장기적인 계획 을 수립하여, 대상 지역과 관련한 학술연구, 지역주민 협력, 국내외 협
6) 인천 섬의 자연환경
력 및 홍보, 행정관리 등을 준비하여야 할 것이다.
경기만 수역에 존재하는 168개의 인천 섬은 마식령산맥과 광주산 맥의 서단부에 있었던 구릉들이 최종빙기 최성기(2만 4,000년 전~1 만 8,000년 전) 이후 이후 해수면이 상승하여 황해가 형성될 때 만들 어지게 되었다. 인천 섬의 자연환경에 대하여 인천에서의 접근성과 지형과 지질학적 특징을 고려하여 5개 권역(백령권 섬, 연평권 섬, 덕 적·자월권 섬, 영흥·중구·북도권 섬, 강화권 섬)으로 구분하여 살펴보 고자 한다.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백령권 섬
강화권 섬
석모도
대연평도
볼음도
소연평도
북방한계선(NLL)
연평권 섬
장봉도
영흥, 중구, 북도권 섬
남한
덕적도
굴업도
덕적, 자월권 섬
문갑도
백아도
지도 선갑도
울도
강화도
인천
신, 시, 모도
영종 용유도
무의도
영흥도
소야도
자월도 승봉도
이작도
인천 섬의 구분(백령권 섬, 연평권 섬, 덕적·자월권 섬, 영흥·중구·북도권 섬, 강화권 섬)
58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1) 백령권 섬의 자연환경 ① 백령권 섬의 자연 개요 백령권 섬은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등 유인 섬과 몇 개의 부속 섬 으로 구성되어 있다. 백령도는 북위 37°59′로 서해의 휴전선 바로 남 쪽에, 동경 124°57′로 남한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섬이다. 백령도 는 인천에서 직선거리로 약 180km 떨어진 곳이며, 북한의 황해도 장 산곶에서는 불과 17km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지리적인 조 건과 북방한계선NLL에 인접한 이유로 아직 훼손되지 않은 청정한 자 연환경을 유지하고 있다. 섬 전체는 대부분이 200m 이하의 낮은 구 릉지대로 노년기 지형을 이룬다. 섬 중앙에 업죽산(184m)을 중심으 로 동서 방향으로 구릉지대가 이어진다. 섬 전체가 ㄷ자형으로 섬 동 쪽의 만입 지형은 갯벌 조간대를 이루어 바다와 접하며 그 외의 해안 지역에는 해식애가 발달한 암석 해안을 이룬다. 백령도는 대부분 중 원생대(16억년 전~10억년 전) 말에 퇴적된 사암이나 이암이 변성되 어 형성된 규암과 점판암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부로부터 남포리층 (10.94억년전), 중화동층, 두무진층(10.4억년전)으로 구분한다. 또한, 신생대 제3기 말(약 600만년전)에 형성된 감람암포획현무암이 진촌 북쪽 하늬해안에 분포하고 있다. 18 대청도는 면적 15.56km², 해안선 길이 24.7km로 비교적 자연이 잘 보존된 섬이다. 전체적으로 경사가 급한 산지이며, 섬의 동쪽과 남 쪽 해안은 급한 해안절벽으로 해식애, 시-스택, 해식동굴 등 다양한 해안지형이 발달 되어 있다. 남쪽에는 가장 높은 삼각산(343m)이 위
18 조등룡, 이승환, 박정영, 「백령도·대청도·소청도도폭 지질조사보고서」, 한국지질자원연 구원, 2021.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59
치하고 북동쪽에 검은낭산(206m)이 능선으로 연결되며, 서쪽 해안에 는 200m 정도의 고지들이 삼각산과 연결되어 전체적으로 U자형의 산세를 이룬다. 북동쪽의 검은낭산 아래 산기슭에 길이 약 1.6km, 폭 약 600m(축구장 70개 면적)의 옥죽동 사구가 발달해 있는 것이 특 징이다. 옥죽동 사구는 현재에도 해안으로부터 모래가 날아와 쌓이고 있으며 그 규모가 커 한국의 사하라 사막으로 불리기도 한다. 대청도 는 중원생대 말에 퇴적된 사암과 이암이 변성을 받아 생성된 규암과 점판암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부로부터 규암과 점판암이 교호하는 지두리층과 규암 속에 점판암이 간혹 협재해 있는 독바위층(10.7억년 전)으로 구분한다. 소청도는 동경 124°55′, 북위 37°52′에 위치하며 면적 2.94km², 해 안선 13.1km의 크기를 지닌 섬으로, 인천광역시 옹진군 대청면에 속한 다. 북쪽의 대청도에서 9.6km, 백령도와는 14km 떨어져 있으며, 인천 연안부두에서는 직선상으로 약 166km 떨어져 있다. 소청도는 신원생 대 초에 퇴적된 이암과 석회암이 변성을 받아 생성된 점판암, 결정질 석 회암, 이 암석들을 관입한 휘록암(8.84억년전)으로 구성되며, 하부로부 터 예동층, 분바위층으로 구분한다. 소청도 남동쪽 해안에 노출된 분바 위층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약 9억년전) 스트로마톨라이트 화석이 산출된다.
60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② 백령권 섬의 대표적 자연유산
두무진
백령도
남포리 습곡과 용트림바위
농여해변 나이테바위
물범바위
미아동해변 연돈바위
하늬해변
감람암 포획 현무암
대청도
동백나무자생북한지
사곶해변
사곶천연비행장
서풍받이
콩돌해안
자연유산 분포지
옥죽동 사구
소청도
분바위
자연유산 분포지
백령권 섬의 대표적 자연유산 분포
백령권 섬은 남한에서 10억년 전·후에 퇴적된 상원누층군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으로, 지질 유산이 매우 우수하여 1999년에 백령·대 청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백령권 섬의 대표적인 자연유산으 로는 백령도에는 두무진, 감람암포획현무암, 사곶사빈(천연비행장), 콩돌해안, 남포리습곡과 용트림바위, 점박이물범이 있으며, 대청도에 는 옥죽동사구, 농여해안 나이테바위, 미아동해안 연흔바위, 서풍받 이, 대청부채 등이 있고, 소청도에는 분바위가 대표적이다. 「두무진」은 백령도 북서단 해안에 남북 방향으로 길이 약 4km, 높 이 약 40~50m의 해식절벽과 시-스택, 시-아치, 해식동굴 등이 발달 되 어 있어 국가유산 명승(옹진 백령도 두무진)으로 지정되었다. 두무진층 은 조간대 환경에서 퇴적되었으며, 바닷가에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두른 모습이 절경을 이루어 ‘서해의 해금강’이라고 한다. 「감람암포획현무암」은 백령도의 북동부 하늬해안에 분포하는데 상부 맨틀 부근에서 생성된 현무암질 마그마가 지각을 뚫고 나올 때 맨틀의 물질인 황록색 감람암을 포획하여 함께 분출한 것이 급속히 냉각되어 형성된 것이다.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61
백령도 두무진 선대암
백령도 하늬해안의 감람암포획현무암
62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백령도 사곶사빈(천연비행장)
현대는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첨단 시대지만 지구 내부의 맨틀까 지는 직접 시추하지 못하는 실정이므로, 백령도 하늬해안의 감람암포 획현무암은 지구 내부 맨틀의 성분과 특성을 직접 연구할 수 있게 해 주는 지질학적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옹진 백령도 진촌리 맨틀포획 암 분포지)로 지정되었다. 「사곶사빈(천연비행장)」은 백령도 북동단 해안가에 길이 3km, 폭 300m의 규모로, 고운 입자의 모래가 파도 에너지가 약한 오목한 해 안에 쌓여 형성된 것이다. 사곶사빈은 모래의 질이 좋은 해수욕장으 로도 유명하지만, 비행기가 뜨고 내릴 만큼 견고하고 널찍해 천연비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63
백령도 콩돌해안
백령도 남포리습곡과 용트림 바위
64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행장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자동차가 달려도 바퀴 자국이 생 기지 않을 만큼 모래가 치밀하고 단단하게 쌓여 있어 한국전쟁 당시 비상 활주로로 이용되기도 했다. 자랑스럽게도 이곳은 이탈리아의 나 폴리 해안과 함께 세계에서 두 곳밖에 없는 천연비행장으로 천연기념 물(옹진 백령도 사곶 사빈)로 지정되었다. 「콩돌해안」은 백령도 동쪽 해안에 위치한다. 남북 길이 900m, 폭 50m 규모의 자갈마당으로, 동글동글한 콩알 크기의 자갈들로 구성되어 있다. 콩돌해안의 콩돌은 흰색, 갈색, 회색, 보라색, 적갈색, 검은색 등 형 형색색의 아름다운 규암으로 이루어져 지질학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므로 천연기념물(옹진 백령도 남포리 콩돌해안)로 지정되었다. 「남포리습곡과 용트림바위」은 백령도 남동쪽 해안에 위치하며, 남 포리습곡은 지층이 지각변동을 받아 형성된 높이 50m, 길이 80m의 커다란 습곡이 해식 절벽 형태로 노출되어 있다. 이런 규모의 습곡은 국내에서 보기 드물고 한반도 지각 발달사를 규명하는데 귀중한 자 료가 인정되어 천연기념물(옹진 백령도 남포리 습곡구조)로 지정되 어 있다. 남포리 습곡은 백령도 일대에 광범위하게 분포하는 원생대 남포리층이 동아시아 일대에 광범위하게 일어났던 고생대 말~중생대 초의 지각변동을 받아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남포리 습 곡구조에서 남동쪽 약 200m 해안에는 마치 용이 승천하는 듯한 모양 의 용트림 바위가 파식대지에 시-스택으로 남아 있다. 용트림 바위는 이암과 사암이 교호하여 쌓인 남포리층이 변성작용을 받아 생성된 점 판암과 규암으로, 오랫동안 차별침식을 받아 생성된 것이다. 「물범바위」는 백령도 북동쪽 하늬바다의 암초로, 만조 때 바닷물 에 잠기고 간조 때 바위로 노출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점박이물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65
두무진 갯바위에서 쉬고 있는 점박이물범
범이 모여서 쉬는 곳으로 유명하다. 백령도 점박이물범은 고래를 제 외하면 서해안의 유일한 해양 포유류로 백령도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운이 좋다면 청명한 날 간조 때 물범바위에 올라와 쉬고 있는 점박이 물범을 관찰할 수 있다. 백령도 점박이물범은 번식을 위해서 12월에 서해 연안을 따라 북상하여 발해만에서 겨울을 지내고, 이듬해 4월경 에 백령도로 다시 오는 왕복 1,600km의 여정을 반복하는 것으로 알 려져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점박이물범의 개체 수가 줄고 있어 현 재는 멸종위기 야생 동·식물Ⅱ급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보호
66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대청도 옥죽동사구
한 덕분인지 요즘엔 다행히 그 개체 수가 조금씩 늘고 있다. 「옥죽동사구」는 대청도 북동부에 위치한 사구로, 전체 면적은 약 660,000m²(축구장의 약 70배)로 해안에서부터 해발 40m에 걸쳐서 분포하는 활동성 사구로 알려졌으나 1990년대 식재한 소나무 방사 림 때문에 특유의 옛 모습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옥죽동사구는 물이 빠지는 썰물 때면 드러나는 옥죽포 해변과 농여해변의 드넓은 백사장 에서 모래들이 강한 바닷바람에 실려 날아와 한알두알 모여서 쌓여 형성된 것이다.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67
농여해안 나이테바위
「나이테바위」는 대청도 북동쪽 농여해안에 있는 시-스택으로, 대청 도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바위이다. 나이테바위는 점토가 퇴적되어 생성 된 적색 이암층과 모래가 퇴적되어 형성된 백색 사암층으로 반복적으 로 쌓여진 지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지각변동을 받아 지층이 거의 수 직으로 서 있고 이암은 점판암으로, 사암은 규암으로 변성되어 있다. 차 별침식으로 이암층에 구멍이 뚫어져 있어 나이테바위를 구멍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이테바위 주변에는 연흔, 사층리 등의 퇴적구조가 선 명하게 나타나는데 이를 통해 나이테바위가 조간대 환경에서 생성되었
68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고, 바다 쪽에 있는 암석이 먼저 생긴 암석임을 알 수 있다.
미아동해안의 연흔바위와 현생 연흔
「연흔바위」는 미아동 해안가에 노출된 암석으로, 퇴적 당시 지층 면에 생긴 밭고랑 모양의 물결무늬 자국 연흔漣痕이 발달 되어 있는 것 을 확인할 수 있다. 연흔은 파도, 유수, 바람에 의해 만들어진 규칙적 인 줄무늬 모양의 퇴적구조이다. 연흔은 물의 마찰을 가장 작게 받기 위해서 물이 흘러오는 방향으로는 완만한 경사면을 이루고 반대 방향 은 급한 사면을 이룬다. 그래서 이와 같은 특성을 이용하여 퇴적 당시 에 퇴적물을 운반하는 바람이나 물의 흐름을 판정할 수 있다. 미아동 해안은 10억 7천만년 전에 생긴 물결무늬 자국과 모래갯벌 표면에 생 긴 현생 물결무늬 자국을 같은 장소에서 볼 수 있어 지질학적으로 매 우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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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풍받이」는 대청도 남서단 해안가에 발달한 해식절벽으로, 서해 를 거쳐 불어오는 강한 북서풍을 받아 형성된 높이 60~70m의 해식 절벽과 기암괴석이 낙조의 빛과 어울릴 때 그 아름다움을 더한다. 서 풍받이 산책로는 광난두정자각에서 약 2.6km 거리로, 높낮이가 심하 지 않아서 누구나 걷기 좋고, 천천히 걸어도 약 2~3시간이면 다녀올 수 있다. 서풍받이를 이루고 있는 암석은 약 10억 7천만년전 모래가 퇴적되어 생성된 사암층이 변성되어 만들어진 규암층으로 주로 구성 되어 있다. 규암층에는 지각변동을 받아 깨진 틈인 절리와 단층이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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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되어 있고 이를 따라 해식동굴이 형성되어 있다.
대청도 서풍받이
「대청부채」는 우리나라의 대청도, 백령도, 함경북도 등에 자라는 붓꽃속 식물로, 세계적으로는 만주, 러시아 극동 지역, 몽골 등에서만 자라는 희귀식물이다. 우리나라 붓꽃속 식물들이 대부분 봄에 꽃을 피 우고 늦은 것이라 해도 여름이면 지는 게 보통인데, 이 식물은 8월 하 순부터 9월 중순에 피므로 가을에 꽃 피는 유일한 붓꽃 종류이다. 꽃이 우아하고 아름다워 무분별하게 채취하고 염소 등을 방목하여 급격히 개체수가 줄어들어 멸종위기종 Ⅱ급에 지정되었다. 대청부채라는 이 름은 대청도에서 처음 발견되었고, 잎이 부채살 모양처럼 퍼져있는 모 양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71
대청도 미아동해안의 대청부채
「분바위」는 소청도 남동단 해안가에 노출된 백색의 결정질 석회암 이다. 암석이 분칠한 것처럼 하얗게 보인다고 하여 분바위란 이름이 붙여졌고, 등대가 없을 때 달빛을 반사하여 자연 등대의 역할을 해서 월띠라고 부르기도 했다. 분바위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화 석인 스트로마톨라이트 화석이 산출된다. 스트로마톨라이트란 바다나 호수 등에 서식하는 남조류 군체들이 만든 엽층리가 잘 발달한 생퇴적구조를 갖는 석회암 화석의 일종이 다. 소청도에서 발견되는 스트로마톨라이트는 약 9억 년 전 우리나라 에서 가장 오래된 생명체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지사학적 의의가 매우 높아 천연기념물(옹진 소청도 선캄브리아 스트로마톨라 이트와 분바위)로 지정되었다.
72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소청도 분바위
소청도 스트로마톨라이트(굴딱지 암석)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73
스트로마톨라이트는 렌즈상 석회암층에서 산출되는데 그 형태가 굴껍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원추상의 성장구조와 유사하게 보여 소청 도 주민들은 스트로마톨라이트를 포함하고 있는 암석을 굴딱지 암석 이라고 한다.
(2) 연평권 섬의 자연환경 ① 연평권 섬의 자연 개요 인천에서 뱃길로 145km 떨어진 옹진군 연평면 대연평도는 면적 이 6.9km²이고, 해안선의 길이가 16.5km인 섬이다. 동북쪽의 낭까 리봉뿌리, 남서쪽의 가래칠기뿌리, 그리고 서북쪽의 개모가지낭뿌리 의 3개 뿌리를 이루고 있어 해안선 역시 삼각선을 이루고 있다. 대연평도의 지질은 대부분 중원생대의 석영편암, 운모편암, 석류 석편암, 석류석-각섬석편마암, 규암 등의 결정편암계의 암석과 이들 암석을 관입하여 생성된 중생대 현무암 암맥으로 구성되어 있다. 19 소 연평도는 대연평도 남쪽 6.4km 거리에 있는 섬으로, 해발 214m의 높은 봉우리를 중심으로 거의 원형에 가까운 섬이다. 소연평도는 섬 전체가 고원생대와 중원생대의 변성암류로 구성되어 있는데 최고봉 인 봉화산을 중심으로 각섬암이 넓게 분포하고 있으며, 각섬암과 주 변 암석 경계부에 티타늄자철석이 함유되어 있다. 1990년대 중반까 지 철광산이 개발되어 티타늄자철석을 채광하기도 하였다.
19 조등룡, 이승환, 박정영, 「백령도·대청도·소청도도폭 지질조사보고서」, 한국지질자원연 구원, 2021.
74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② 연평권 섬의 대표적 자연유산
대연평도 구리동해수욕장
연평권 섬의 대표적인 자연유산으로는 대연평도의 서쪽 해안을 따 라 발달된 대연평도의 유일한 해수욕장으로 알려진 구리동해수욕장, 해식절벽과 해식대지 등을 이루고 있는 가래칠기해안, 대연평도 북동 단에 발달된 낭까리봉(아이스크림 바위)과 거북바위가 있고 소연평도 남쪽 해식절벽에 발달된 얼굴바위가 있다. 「구리동해수욕장」은 대연평도 중부리 서쪽의 구룬나루 마을 부근 에 위치한다. 길이는 1km, 폭 50m 해빈으로, 모래와 자갈로 구성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모래는 세립질이고, 자갈은 아각형 내지 아 원형으로 자갈과 왕자갈로 대부분이 규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75
대연평도 가래칠기해안
「가래칠기해안」은 대연평도 남서쪽에 남북방향으로 발달된 해식 절벽으로 구성된 해안으로 대연평도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해안이다. 암석은 대부분 고원생대의 석영편암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생대에 이 암석을 관입한 현무암질 암맥, 석영맥 등이 소규모로 산출된다. 가 래칠기해안은 북서풍에 의한 강한 파도로 형성된 해안절벽과 해식대 지가 발달되어 있다. 가래칠기란 갈매기가 날개를 펼쳐 나는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낭까리봉(아이스크림바위)과 거북바위」은 대연평도 북동쪽 해안 에 있는 시-스택으로, 볏단을 쌓은 낫가리와 유사하여 낭까리봉이라 고 한다. 낭까리봉은 추운 겨울에 눈과 바닷물이 얼어붙으면 마치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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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연평도 낭까리봉(아이스크림 바위)
대연평도 거북바위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77
소연평도 얼굴바위
이스크림처럼 생겨서 일명 ‘아이스크림 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낭 까리봉에서 동남쪽으로 10m 떨어진 곳에는 석영편암을 관입한 현무 암질 암맥이 풍화침식을 받아 거북 모양의 형상을 갖는 거북바위가 있다. 거북바위는 장수와 무사 건강을 위한 상징물로 여겨 주민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소연평도 얼굴바위」는 인천에서 연평도행 여객선을 타고 가다가 소연평도 선착장에 도착하기 5분 전 서쪽 방향에 보이는 해식절벽이 다. 모양이 사람의 얼굴과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얼굴바위라고 부른다.
78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얼굴바위는 약 12억년전에 형성된 소연평도 각섬암으로 구성되었다. 소연평도에 분포하는 각섬암에는 티타늄을 함유한 자철석이 포함되어 있다. 소연평도 최고봉인 봉화산 정상에서는 함티타늄자철석을 채광 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얼굴바위 위쪽에는 소연평도 등대가 있다.
① 덕적·자월권 섬의 자연 개요
(3) 덕적·자월권 섬의 자연환경
덕적군도라고 부르는 덕적권 섬은 47개의 유·무인섬이 각기 다른 색채와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덕적도, 소야도, 문갑도를 제외하고 대 부분의 섬은 중생대 백악기의 화산활동에 의해 생긴 화산쇄설물이 퇴 적되어 형성된 응회암과 집괴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덕적도는 소재해 변에 노출되어 있는 신원생대 퇴적기원 변성암류를 기반암으로 하여 덕적도 북서단 능동자갈마당에 분포하는 중생대에 쥐라기의 덕적층 과 덕적도 전체적으로 분포하는 흑운모화강암, 화강반암 등으로 구성 되어 있다. 소야도의 지질은 덕적도와 거의 동일하고, 육계사주를 많 이 간직한 섬으로 가장 전형적인 육계사주는 갓섬-간뎃섬-송곳여-물 푸레섬, 장군섬, 뒷목섬 등이 있다. 문갑도는 섬 전체가 중생대 쥐라 기의 흑운모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해안가에 노출된 화강암에 는 풍화혈이 잘 발달되어 있다. 굴업도, 백아도, 울도, 지도와 가도, 각 흘도를 비롯한 주변의 무인섬들은 약 9천만 년 전 화산분출로 생성된 화산쇄설물들이 퇴적되어 형성된 응회암을 비롯한 화산쇄설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20
20 조등룡, 이승배, 「굴업도, 덕적도, 백아도, 선갑도 지질조사보고서」, 한국지질자원연구 원, 2016.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79
자월권 섬은 자월도, 소이작도, 대이작도, 승봉도 4개의 유인섬과 9개의 무인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월도는 중생대에 형성된 섬장암 이 섬의 중심부와 동쪽을 제외한 대부분의 해안가에 걸쳐서 폭넓게 분포하고 섬의 서쪽과 하늬께 마을 앞 해안에는 화강반암이, 섬의 동 쪽에는 정편마암, 준편마암, 규암 및 혼성암 등으로 구성된 편마암 복 합체로 구성되어 있다. 21 이작도는 대이작도와 소이작도로 구분하는데 대, 소이작도는 변성암과 화강암이 혼재된 혼성암과 편마암류, 중생대 쥐라기의 덕적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이작도의 작은 풀안해안에 분포 하는 혼성암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25억 1천 만년 전에 생성되 었다. 또한 대이작도 남쪽에는 간조 때만 노출되는 모래섬인 풀등이 있 다. 승봉도는 고도차가 거의 없는 평지로 구성되어 있어 남녀노소 불구 하고 도보 여행하기 좋은 섬으로, 약 3~4시간이면 섬 전체를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작지만 매력이 가득한 섬이다. 승봉도는 섬장암과 신원생 대의 퇴적기원 변성암류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승봉도 동쪽해안에서 해안가의 전형적인 침식 지형인 해식동굴, 시-아치, 시-스택 등을 볼 수 있다. 선갑도는 덕적군도에 접해 있지만 행정구역상 옹진군 자월면 승 봉리에 속한 면적 3.93km², 둘레 16.16km로 대단히 넓고 해발고도 역 시 352.4m인 섬이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무인섬이었으나, 섬 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주소지를 옮겨 거주하면서 유인섬이 되었다. 섬 의 서쪽에는 분화구처럼 보이는 C자형의 만이 발달 되어 있다. 선갑도 의 해안선은 일부만을 제외하고 모두 암벽으로 시-스택, 해식동과 같은 침식지형이 발달되어 있고 특히, 해식절벽에는 주상절리가 선명하다.
21 최영범, 김유흥, 전희영, 「영흥도, 풍도, 격렬비도, 궁시도, 거아도, 내파수도도폭 지질조
80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사보고서」, 한국지질자원연구원, 2016.
② 덕적권 섬의 대표적 자연유산
덕적도 능동자갈마당
인천의 다도해라고 할 수 있는 덕적권 섬을 대표하는 자연유산으 로는 덕적도의 능동자갈마당, 소재해변의 시-스택인 솔섬, 소야도의 갓섬-간뎃섬-송곳여-물푸레섬 육계사주(일명 모세의 기적), 문갑도의 남동쪽 해안에 있는 벌집바위, 굴업도의 목기미사주와 코끼리바위, 소 굴업도의 해식와海蝕窪, 백아도의 기차바위, 선단여 등이 있다. 「능동자갈마당」은 덕적도 북동쪽 해안에 위치한다. 대부분 직경 10~20cm 정도의 큰 자갈로 구성되어 있다. 자갈은 변성퇴적암류에서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81
덕적도 능동자갈마당 낙타바위
떨어져 나온 조립질 사암이 주를 이루며 일부 역암이 보이기도 하는데, 오랜 세월에 걸친 해파의 작용으로 원마도가 양호한 편이다. 자갈마당 북쪽 해안가에는 낙타가 막 일어나려는 형상의 낙타바위가 있다. 「소재해안 솔섬」은 덕적도 북쪽 소재해안의 동쪽에 있는 시-스택 으로, 바위틈에 노송이 식생하고 있어 초여름철이 되면 아름다운 일 출을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소재해안은 덕적도에서 가 장 오래된 퇴적기원의 신원생대 변성암류로 구성되어 있는데 변성암
82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덕적도 소재해안 솔섬(시-스택)
류는 밝은색 규암과 검은색 점판암이 교호하며 규암은 대부분 세립질 석영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소량의 흑운모가 엽리면을 따라 배열되 어 있다. 솔섬은 덕적도의 기반암으로 알려진 신원생대 변성암을 관 입한 중생대의 흑운모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83
소야도의 갓섬-간뎃섬-송곳여-물푸레섬 육계사주(옹진군청)
「소야도 갓섬-간뎃섬-송곳여-물푸레섬 육계사주」는 소야도 큰말 북쪽에 발달되어 있는데 이는 인천에서 가장 긴(약 1,300m) 육계사 주로 알려져 있다. 육계사주란 만조 때는 독립된 섬이지만, 간조 때가 되면 모래와 자갈 등이 노출되어 다른 섬으로 걸어갈 수 있는 것으로 일명 모세의 기적이라고도 한다. 간조 때 육계사주로 연결되는 섬을 목섬이라고 하는데, 소야도에는 이곳 이외에도 장군섬, 죽노골해안의 뒷목섬이 대표적인 목섬이다. 소야도에는 인천 섬에서 가장 많은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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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을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섬으로 알려져 있다.
문갑도 벌집바위
「벌집바위」는 문갑도의 남동쪽 해안에 노출되어 있는 흑운모 화강 암으로, 이 암석은 구멍이 벌집처럼 뚫어진 특이한 형태의 풍화혈을 간직하고 있어 벌집바위라고 부른다. 바닷가에서는 파도에 의해 바닷 물이 암석을 구성하고 있는 광물 틈 사이로 스며들어 있다가 태양 빛 을 받아 틈에 들어간 바닷물이 증발되면 바닷물에 용해되어 있던 염 결정이 정출 된다. 이와 같은 과정이 반복되면 염의 결정이 커져서 암 석에 큰 압력을 주므로 결국 틈이 점점 커지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 치는 풍화를 염풍화작용이라고 한다.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85
굴업도 목기미사주
「굴업도 목기미사주」는 조류에 운반된 모래가 퇴적되어 굴업도의 동섬과 서섬이라는 두 섬으로 분리된 굴업도를 하나의 섬으로 이어준 역할을 하고 있는데. 현재에도 사리 만조 때는 굴업도가 두 개의 섬으로 나누어진다. 「굴업도 코끼리바위」는 굴업도 연평산 남측 호주머니형 해안에 있 는 시-스택이다. 이 시-스택에는 단층을 따라 차별침식을 받아 생긴 시-아치가 있다. 시-스택에 생긴 시-아치가 보는 각도에 따라 코끼리 처럼 보여 코끼리바위라고 한다. 코끼리바위를 구성하고 있는 암석은 화산재가 쌓여서 생성된 굴업도 응회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굴업도 해식와」는 굴업도 남쪽에 있는 무인섬 소굴업도 동쪽 해안에는 해식동이 약 100m 정도로 길게 이어진 해안 침식지형이다. 소굴업도 해식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고 규모가 커서 지난 2010 년 문화재청에서는 천연기념물(옹진 굴업도 해식지형)로 지정예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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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업도 코끼리바위
소굴업도 해식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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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아도 기차바위
선단여(옹진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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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으나, 섬 소유주의 반대로 지정이 유보된 상태이다. 소굴업도 해식 와는 만조 때에 해식와 상부면까지 바닷물에 잠겼다가 빠지는데, 이 러한 환경이 해식와의 형성을 가속화하고 있다. 「백아도 기차바위」는 백아도의 선착장 부근 북동쪽해안에 있는 바 위로, 주상절리와 관련된 침식으로 증기기관차가 바다 위를 달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기차바위라고 한다. 기차바위에는 직육면체 모 양의 수직 주상절리가 뚜렷하게 관찰되고 정상부에서는 주상절리와 층리를 따라 풍화되어 생긴 토르가 확인된다. 「선단여」는 굴업도와 백아도 사이의 해상에 바다 위로 솟아오른 3 개의 바위로 구성된 시-스택이다. 선단여는 보는 각도에 따라 하나로 도 보이고, 두 개나 세 개로 보이기도 한다. 선단여를 이루는 3개의 바 위 이름은 각각 마귀할멈바위, 처녀바위, 총각바위이다. 선단여에는 이 바위의 이름을 주제로 한 슬픈 전설이 하나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내 용은 ‘백아도에 살고 있던 노부부가 어린 남매와 함께 살다가 돌아가 시자 외딴 섬에 살고 있던 마귀할멈이 여자아이를 데려가 살게 되었 다. 세월은 흘러 남자아이는 장성하여 어부가 되었고 고기잡이 나갔 다가 풍랑을 만나 외딴섬에 피신하게 되었는데 섬에 살고 있던 처녀 에게 반해 결혼을 하기로 했다. 이를 알게된 하늘이 선녀를 보내 남매 라는 사실을 설명했으나, 혼인하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아 벼락을 내 려 죽게하여 3개의 바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89
자월도 장골해수욕장(옹진군청)
③ 자월권 섬의 대표적 자연유산 자월권 섬의 대표적인 자연유산으로는 자월도의 장골해수욕장과 떡바위, 대이작도의 한반도 최고령 암석과 풀등, 소이작도의 손가락바 위, 승봉도의 부채바위, 남대문바위, 촛대바위가 있다. 「장골해수욕장」은 자월도 달바위 선착장에서 도보로 약 5분 거리 에 있으며, 야영시설 및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해변의 길이는 1km, 폭 400m로 반달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서남쪽 끝에는 간조 때 만 걸어갈 수 있는 목섬인 독바위가 있다. 독바위를 구성하고 있는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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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은 중생대 쥐라기에 형성된 섬장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월도 떡바위(옹진군청)
「떡바위」는 자월도 북동쪽 해안에는 넓게 분포하는 흑운모 화강암 이다. 이곳은 옛날에 다리를 만들 때 필요한 넓적한 바위를 채석했던 곳이다. 바닷가에 넓적한 바위가 비스듬히 놓여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떡바위는 파랑에 의한 침식으로 상당히 넓고도 길게 노출된 바위로서 흑운모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화강암에는 수평 방향의 판상 절리와 더불어 두 방향의 수직절리가 발달하는데, 마치 떡처럼 보인 다고 하여 떡바위라고 한다.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91
대이작도 한반도 최고령 암석(혼성암)
「한반도 최고령암석」은 대이작도의 작은풀안해수욕장 동쪽 해안가 에 노출된 암석에서 발견된다. 작은풀안해수욕장의 동쪽 해안을 따라 조성된 데크 산책로가 설치되어 있는데 데크의 산책로 중간쯤에 노출 된 얼룩덜룩한 암석이 한반도 최고령 암석이다. 암석의 절대연령을 측 정해 본 결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25.1억 년전에 형성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이작도 작은풀안의 한반도 최고령암석의 검은색 부분은 변성암의 특징을, 밝은색 암석은 화강암의 특징을 함께 간직하고 있어 혼성암이라고 한다.
92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손가락바위」는 소이작도 남동쪽 해안 끝에는 검지 손가락을 펴고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듯한 시-스택으로, 손가락 바위를 자세히 살펴보 면 층리 구조가 선명한 덕적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바닷물의 염풍 화작용을 받아 구멍이 많이 뚫려 있는 타포니Tafoni, 풍화혈 구조를 관찰 할 수 있다. 「승봉도 부채바위」는 승봉도의 동쪽 해안에 부채를 펼친 것 같은 폭 이 넓은 시-스택이다. 부채바위는 승봉도에 귀양 온 선비가 이 바위를 종이 삼아 문장을 쓰던 곳으로, 선비가 유배가 풀린 후 과거시험에서 장 원 급제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부채바위에 소원을 빌 면 소원을 성취하게 해준다고 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승봉도 남대문바위」는 승봉도 부채바위에서 바닷가를 따라 남쪽 으로 좀 더 이동하면 시-아치로, 바위의 모양이 남대문과 유사하게 보 여 남대문바위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남대문바위는 해안가 에 노출된 해식 절벽에 있던 약한 틈을 따라 긴 세월 동안 풍화 침식 을 받아 만들어진 시-아치이다. 남대문바위는 썰물 때만 접근할 수 있 고 보는 각도에 따라 코끼리의 형상이나 개미핥기처럼 보이기도 하여 코끼리바위, 개미핥기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승봉도 촛대바위」는 신황정이라는 정자가 정상에 위치해 있으며, 소리개산 동쪽 해안가에 있는 촛대와 같은 모양의 시-스택이다. 촛대 바위는 풍화 침식에 매우 강한 규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촛대바위 뒤 쪽으로는 인천의 4개 유인등대 중의 하나인 부도등대가 있다.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93
소이작도 손가락바위
승봉도 부채바위
94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승봉도 남대문바위
승봉도 촛대바위와 신황정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95
(4) 영흥·중구·북도권 섬의 자연환경 ① 영흥·중구·북도권 섬의 자연 개요 영흥도는 인천항에서 남서쪽으로 23.7km, 동경 126°28′, 북위 37°15′에 위치한 연륙도서로 그 면적은 23.46km², 해안선 길이는 42.2km이다. 영흥도의 최고봉인 국사봉(127.7m)을 제외하면 대체 로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해안에는 모래 해안이 펼쳐진 조간대가 넓 게 발달되어 있다. 영흥도의 지질은 신원생대 퇴적기원의 변성암류를 기반암으로 하여 고생대 데본기의 퇴적된 퇴적암, 중생대 화강암 등 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종·용유도는 인천국제공항이 형성되면서 서로 떨어져 있던 영 종도, 삼목도, 신불도, 용유도가 매립되어 하나의 섬이 되었다. 영종· 용유도를 구성하고 있는 암석은 선캄브리아대에 형성된 퇴적암이 저 변성작용을 받아 형성된 흑운모편암과 석영편암을 기반으로 하여 중 생대 트라이아스기와 쥐라기에 이를 관입하여 형성된 화강암과 그 이 후 이들 암석을 관입한 석영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의도는 인천 에서 남서쪽 18km에 위치한 섬으로, 면적은 9.43km², 해안선 길이 는 31.6km로 용유도와 연도교로 이어져 있다. 무의도와 실미도는 중 생대 쥐라기에 형성된 적자색 화강암으로 주로 구성되어 있고, 이 암 석을 후에 관입한 산성암질 암맥들이 발달 되어 있다. 해안가에는 파 도에 의해 형성된 해식절벽, 시-스택, 해식대지와 해수욕장 등이 발달 되어 있다. 북도권 섬은 행정구역상 인천광역시 옹진군 북면에 있는 섬으로, 유인섬으로는 장봉도, 모도, 시도, 신도가 있다. 장봉도는 영종도에서 북쪽으로 약 5km, 동경 126°20′도 20분, 북위 37°33′에 위치하며
96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동서 길이 약 9km, 남북 폭 약 1.5km, 면적은 7.32km², 해안선 길이 는 22.5km에 달한다. 국사봉(149m)을 중심으로 동서로 뻗어 나간
높고 낮은 산봉우리들이 북서-남동 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어 긴 장長
자와 봉우리 봉峰자를 사용하여 장봉도라고 한다. 장봉도는 원생대에 퇴적된 퇴적암류가 변성되어 형성된 흑운모편암, 석회질 편암, 결정질 석회암 및 석영편암으로 구성된 장봉편암과 이를 중생대에 관입하여 형성된 적자색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도, 시도, 모도는 연도교 로 이어져 있어 왕래가 자유로운데 이 섬을 구성하고 있는 암석은 선 캄브리아대에 형성된 퇴적암이 변해서 만들어진 장봉편암과 중생대 쥐라기에 이를 관입하여 생성된 화강암 등이다. 22
② 영흥·중구·북도권 섬의 대표적 자연유산 영흥·중구·북도권 섬의 대표적인 자연유산으로는 영흥도의 십리 포해수욕장, 선재도의 목섬(항도), 용유도의 선녀바위, 무의도의 하나 개해수욕장, 장봉도 쪽쪽골해안의 장봉편암, 한들해수욕장, 강구지 쌍 해식동굴이 있다. 「영흥도 십리포해수욕장」은 영흥도 진리선착장에서 북서쪽으로 십리(4km)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하여 붙여진 해수욕장이다. 십리포해 수욕장에서는 팔미도와 송도신도시, 인천대교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십리포해수욕장 서쪽 해안가를 따라 거닐다 보면 해안가에 노출된 암 석을 만나게 되는데 이 암석이 바로 이 지역을 대표하는 십리포층이 다. 십리포층의 돌출된 암석은 사암이 변성된 규암이고 움푹 패인 검 은색 암석은 이암이 변성된 점판암이다. 암석의 표면이 울퉁불퉁한
22 황재하, 김유동, 「강화·온수리도폭 지질조사보고서」, 한국지질자원연구원, 2005.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97
십리포해수욕장 동쪽해안의 십리포층
것은 풍화 침식에 대하여 견디는 정도가 다른 차별침식 때문이다. 규 암과 점판암은 십리포층 암석 내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점판암 의 미세 엽층리에서는 규모는 작지만 연속성이 좋은 습곡구조가 관찰 되기도 한다. 이는 오래전 바다에 쌓인 퇴적물들이 층리를 이룬 후 심 한 횡압력을 받아 생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선재도 목섬(항도)」은 대부도와 선재도를 이어준 선재대교(550m) 를 지나 선재도 초입의 남쪽해안가에 위치한 무인섬으로 주민들은 항도 라고 한다. 선재도 목섬은 2016년 CNN 방송국이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 운 섬 33곳 중 1위를 차지할 정도로 풍경이 아름다운 비경을 자랑하고 있다. 특히, 겨울에 볼 수 있는 목섬의 설경은 천혜의 비경을 보여준다. 선재도의 목섬을 구성하고 있는 암석은 고생대 데본기에 퇴적된 암석이 변성작용을 받아 형성된 규암과 점판암과 이를 관입한 암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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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재도 목섬(항도)
용유도 선녀바위
「선녀바위」는 용유도의 서쪽 해안가에 있는 시-스택으로, 밝은 밤 에 선녀들이 내려와 놀고 갔다는 전설이 전해져 붙여진 이름이다. 선 녀바위는 적자색을 띤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2억 3천만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99
무의도 호룡곡산에서 바라본 하나개해수욕장
년~2억 2천만 년 전에 마그마가 지하 깊은 곳에 관입하여 서서히 냉 각되면서 생성된 암석으로, 광물의 입자가 비교적 크고 정장석이 많 아 적자색을 띤다. 선녀바위 주변에는 다양한 모양의 기암괴석들과 해수욕장이 발달되어 있어 사람들이 즐겨 찾고 있다. 「하나개해수욕장」은 무의도의 대표적인 해수욕장이다. ‘하나’는 크 다는 뜻이고 ‘개’는 개벌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 합쳐진 것으로, 무의도
100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무의도 하나개해수욕장 남서쪽 해안의 화강암
에서 가장 큰 갯벌이라는 뜻을 간직하고 있다. 하나개해수욕장 주변에 는 드라마 세트장이 있고, 남서쪽 해안가에는 대규모 암석 해안이 발달 되어 있는데 이곳의 암석은 대부분 중생대 쥐라기에 형성된 적자색을 띠는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개해수욕장 남서쪽 해안가를 따 라 산책로가 설치되어 있어 물때에 관계없이 해안가의 암석과 지형들 을 관찰할 수 있다.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101
장봉도 쪽쪽골해안의 장봉편암
「장봉편암」이 가장 전형적으로 노출된 지역으로는 장봉도의 남서 쪽 윤옥골 해안과 쪽쪽골 해안이다. 쪽쪽골 해안 주변에 노출된 암석 은 두께가 매우 얇은 어두운색 층(석회질 점판암)과 밝은색 층(규암) 이 반복되어 나타나는데 두 층의 차별침식으로 석회질 점판암은 움푹 들어가 있고, 규암은 상대적으로 돌출되어 있다. 장봉편암은 약 10억 년전 중원생대 말경에 모래와 석회 성분을 함유한 점토가 반복적으로
102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한들해수욕장 남동쪽해안의 대리암 노두
퇴적되어 생긴 사암층과 이암층이 지각변동을 받아 변성되어 생긴 규 암층과 점판암층이 교호하는 퇴적기원의 변성암이다. 「장봉도 한들해수욕장」은 장봉도 남쪽 해안에 있는 길이 400m, 폭 30m 정도의 해수욕장으로, 해안가에는 아름드리 해송이 모래 해 변을 끼고 울창하게 펼쳐진 풍경이 아름답다. 한들해수욕장은 수심이 얕고 경사가 완만하여 이곳이 있으면 마음이 한없이 한가롭다고 하여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103
한들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한들 해수욕장 남동쪽 해안에는 장봉편암 중에 협재된 대리암 부분이 잘 노출된 곳으로, 방해석맥, 단 층, 포획암, 돌개구멍, 시-아치 등을 관찰할 수 있다. 「강구지해안 쌍해식동굴」은 장봉도의 남쪽 해안의 해식절벽에 있 는 커다란 두개의 해식동굴이다. 강구지해안 해식절벽에는 커다란 해 식동굴이 2개가 인접해 있는데 멀리서 보면 해골 모양으로 보인다. 두 개 해식동굴은 하나로 이어져 20~30명이 동시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
104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장봉도 강구지해안 쌍해식동굴 내부에서 바라본 풍경
내부가 넓으며, 내부에서 밖을 바라다보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 강구지 해안은 점판암과 규암으로 구성된 장봉편암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 금도 해식절벽에 있는 절리와 단층을 따라 침식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 어 앞으로도 더 많은 해식동굴이 생성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105
(5) 강화권 섬의 자연환경 ① 강화권 섬의 자연 개요 강화권 섬은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 강화도를 비롯하여 11 개 유인도와 17개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강화도는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이 합류하는 하구에 위치하고 동쪽으로는 강화해협을 경계로 김포와 분리되어 있다. 서쪽으로는 교동도, 석모도를 넘어 서해로 통
하고 남쪽으로는 신, 시, 모도와 가깝고, 북쪽으로는 NLLNorthern Limit
Line, 북방한계선을 경계로 북한과 마주하고 있다. 지질적 특징을 보면 강 화도의 동쪽은 선캄브리아시대의 변성암류이고, 서쪽은 중생대 화강 암류로 구성되어 있다. 김포와 접하고 있는 강화해협 주변에는 중생 대 백악기의 문수산층(역암, 사암), 화산쇄설암(응회암, 각력질 응회 암) 등이 소규모로 분포한다. 교동도는 강화도 북서부에 위치하며 북쪽으로는 황해도 연백과 NLL로 접하고 있으며, 강화도와 연도교로 이어져 접근성이 매우 좋 아졌다. 교동도는 세 개의 섬이 간척되어 하나의 섬으로 되었는데 교 동도의 최고봉인 화개산(269m)에 올라 주변을 바라보면 간척되어 농지로 변한 것을 쉽게 인식할 수 있다. 교동도의 지질은 선캄브리아 대의 온수리 편암, 장봉편암, 중생대 쥐라기에 생성된 반상흑운모화강 암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석모도는 강화 본섬에서 서쪽으로 약 2km 떨어진 곳에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리아스식 해안으로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갯벌의 충 적층이 두터워 해협의 수심이 얕다. 석모도의 지질은 중원생대의 장 봉편암을 기반암으로 하여 이를 관입한 중생대 쥐라기 및 백악기의 화성암류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를 부정합으로 피복하는 충적층
106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이 석모도 전반에 분포한다. 볼음도와 주문도는 강화도에서 멀지 않은 섬으로, 민통선 안에 위 치하고 있다. 볼음도와 주문도의 지질은 고원생대의 반상변정질 화강 편마암과 중원생대의 규암, 흑운모편암, 석회질 편암을 기반암으로 이 후에 관입한 관입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23 볼음도 물엄곶에서는 과거
② 강화권 섬의 대표적 자연유산
에 티탄자철석을 채굴한 광산이 있다.
강화권 섬의 대표적인 자연유산은 강화도의 분오리돈대 포유암, 박 리작용으로 인한 구상풍화와 핵석, 각시바위, 참성단 소사나무, 갑곶리 탱자나무, 사기리 탱자나무가 있고, 석모도의 눈썹바위, 볼음도의 물엄 곶, 볼음도 은행나무가 있다.
말도
볼음도은행나무
자연유산 분포지
미법도
서검도
석모도
볼음도
아차도
보문사 눈썹바위
볼음도물엄곶
내리 후포항 핵석
주문도
석도
장화리 해안 구상풍화
강화군청
갑곶리탱자나무
강화도
함허동천 핵석
사기리 탱자나무
마니산 참성단 소사나무
동검도
분오리돈대 포유암
각시바위 시-스택
강화권 섬의 대표적 자연유산 분포 23 조등룡, 이승배, 「무학·주문도·용유도도폭, 지질조사보고서」, 한국지질자원연구원, 2016.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107
분오리돈대의 포유암
「분오리돈대 포유암enclave」은 강화도 최남단에 위치한 분오리돈대 주변을 구성하고 있는 중생대에 형성된 암석에서 볼 수 있다. 분오리돈 대 주변을 구성하고 있는 화강섬록암을 살펴보면 얼룩무늬 검은 반점 을 확인할 수 있다. 화강암은 마그마의 성분에 따라 서로 다른 색을 띠 는데 마그네슘Mg, 철Fe이 풍부한 고철질 마그마가 식어서 굳으면 어두 운 암석을 생성하고, 규소Si가 풍부한 규장질 마그마가 식으면 밝은 암 석이 생성된다. 규장질 마그마가 완전히 굳지 않은 상태에서 액체 상태 의 고철질 마그마와 만나면 고철질 마그마는 상대적으로 차가운 규장 질 마그마 내에 액체 상태로 들어오기 때문에 둥근 형태의 덩어리로 뜯 겨지면서 급격히 냉각된다. 냉각되면 무거워져 규장질 마그마 속에 가 라앉게 된다. 쪼개지고 갈라진 고철질 마그마는 규장질 마그마의 대류
108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흐름에 실려 이동하는데 이 과정을 거치면서 크기가 다양한 세립질 화 성암을 만드는데 이를 ‘세립 고철질 포유암MME’이라고 한다. 분오리돈 대 주차장에 노출된 암석 속에는 검은색 포유암이 원래 액체 상태였음 을 지시해주는 흐른 흔적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구상풍화와 핵석」은 마그마 관입으로 지하에서 생긴 암석은 내부 압력과 외부압력이 평행 상태를 유지하면서 생성된다. 지하에 있던 암 석이 풍화, 침식, 융기로 인해 지표로 노출되면 내부압력이 커지게 되 어 암석이 팽창하므로 암석 표면이 양파껍질처럼 갈라지게 되는데 이 를 구상풍화라고 한다. 외부의 암석이 양파껍질처럼 벗겨지는 박리작 용으로 암석의 안쪽에 둥근 암석이 남게 되는데 이를 핵석이라고 한다. 강화도에서 구상풍화와 핵석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은 함허동천에서 동 막해수욕장으로 넘어가는 나지막한 언덕 우측과 강화도 장화리 해안 이다. 또한 강화 내리 후포항 부근 갯벌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클 것 으로 추정되는 핵석이 있다.
함허동천 부근의 핵석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109
장화리해안의 구상풍화
후포항 부근의 핵석
110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각시바위와 저어새
「각시바위」는 강화도 남단 갯벌(동막해수욕장과 동검도 사이) 위 에 있는 화강암으로 구성된 시-스택으로, 저어새가 번식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저어새는 몸길이 75cm로 주걱모양의 검은색 부리와 검 은 뺨을 가지고 있으며 온몸이 흰색이다. 우리나라에는 3월 초부터 11월 초까지 머물며 이 기간 동안 번식하여 새끼를 키운다. 「마니산 참성단 소사나무」는 수령 약 150년으로 추정된다. 마니산 정상 부근 참성단 부근에 뿌리를 내리고 생존하고 있는데 천연기념물 (강화 참성단 소사나무)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 소사나무는 자작 나무과 서어나무속에 속하는 나무로 우리나라 중부 이남의 해안이나 섬 지방에서 주로 자라고 있어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나무이다.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111
강화 참성단 소사나무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
112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강화 사기리 탱자나무
강화도는 탱자나무가 자랄 수 없는 북쪽 한계선에 위치하고 있음 에도 불구하고 탱자나무 2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강화도 역사박물관 옆에 서 있는 「천연기념물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와 이건 창 생가 앞에 있는 「천연기념물 강화 사기리 탱자나무」이다. 강화도 의 탱자나무는 강화도에 성을 쌓고 보수하면서 성의 바깥쪽에 심어서 외적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갑곶리의 탱자나무 와 사기리 탱자나무는 수령이 약 40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113
석모도 눈썹바위(인천광역시 유형문화유산 보문사 마애석불좌상)
「석모도 눈썹바위」는 석모도 보문사 뒤편 낙하산 중턱에 있는 바위 로 마애관음보살이 조성되어 있다. 눈썹바위는 화강암에 나타나는 구상 풍화와 절리가 원인이다. 지표면 암석이 풍화와 침식을 받으면 지하의 화강암이 융기하게 된다. 이때 융기하는 화강암 표면에 절리가 발달하 고 절리의 모서리가 풍화작용을 받으면서 둥근 공 모양의 풍화가 진행 되는데 이것이 구상풍화이다. 구상풍화를 받은 화강암의 윗부분은 남고 나머지 부분은 떨어져 나가면서 눈썹모양의 바위가 된 것이다. 「볼음도 물엄곶」은 볼음도의 남서단에 위치한 해안으로 과거 함티 타늄자철석을 채석했던 광상鑛床이 있었다. 물엄곶은 기반암인 장봉편 암을 관입한 각섬암이 혼재되어 나타나는데. 이곳의 암석에는 다양한 습곡들이 관찰되며 지층을 구성하고 있는 암석의 성분에 따라 차별침 식을 받아 울퉁불퉁한 형태를 하고 있다. 볼음도 함티타늄자철석 광
114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상은 각섬암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볼음도 물엄곶의 함티타늄자철석
볼음도 물엄곶 해안가 암석의 횡와습곡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115
강화 볼음도 은행나무
「강화 볼음도 은행나무」는 볼음도 북쪽 해안가 부근의 볼음저수지 에 근처에 있다. 서도은행나무로 불렀으나 2008년 강화 볼음도 은행 나무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 나무는 800여년 전 태풍과 큰 홍수로 인해 황해남도 땅에서 뿌리째 뽑혀 바다에 떠내려온 것을 당시 마을 사람들이 지금의 땅에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볼음도 은행나무의 규 모는 높이 24.5m, 밑동 둘레 9.8m, 가슴높이 둘레 9m로 어른 다섯이 팔을 벌려도 안지 못할 정도로 크다. 아마 우리나라 섬에 있는 은행나 무로서는 가장 클 것으로 추정된다. 볼음도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민속적·생물학적 자료 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116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3. 인천의 인문환경
1) 국제교역의 중심 인천 인천의 역사는 비류가 현 문학산 일대로 추정되는 미추홀에 도읍 을 정하면서 시작되는 것으로 전해지는데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시 대를 거처 황해에 접한 중국과 교역의 역사를 함께해 왔다. 근대사의 여명기에는 해외문물을 전국에 전파하는 개항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에는 인천상륙작전을 통하여 조국을 지킨 근거지였고 6, 70년대에는 우리나라 경제건설을 이끄는 역할을 해왔다. 현재는 국제 교역의 중심이자 세계적인 항구도시로서 대륙과 해양을 향한 세계화의 관문 도시로 부상하고 있다.
해방 후 인천항(인천광역시교육청화도진도서관)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117
2) 인천의 인구 변화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인천국제공항 홈페이지)
인천은 개항(1883년) 당시에는 인구가 4,700명 정도인 작은 포 구에 지나지 않았으나,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 여 1947년에는 약 24만 명에 달했고, 1960년에는 40만 명을 돌파하 게 되었다. 이후 인구는 계속 증가하여 1966년에 52만 명에 달했고,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된 이후 1980년에는 100만명, 1987년에 150 만 명으로 인구가 늘었다. 특히, 1995년 경기도 강화군, 김포군 검단 면, 경기도 옹진군이 편입되어 광역시로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인구 가 급증하게 되었고, 1997년 말에는 246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인천 의 인구 증가는 남동공단 등 공업단지 조성, 택지개발 및 대단위 아파 트 신축, 주거생활 개선 욕구, 수도권 지역 중에서 비교적 집값이 저렴 하고 서울로 출퇴근이 용이한 환경변화로 많은 인구가 유입되는 것이
118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주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인구는 2018년을 정점으로 점차 감소 되는 추세이지만, 인천시에서는 송도신도시, 청라신도시, 영종신 도시 그리고 검단지역의 개발 등으로 계속 증가되었으며, 2030년에
3) 인천의 공간 변화
는 400만에 달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24
1883년 개항은 인천의 공간 변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개항 전에 는 문학산과 관교동 주변의 인천 구읍과 계양산 남쪽과 계산동 일대 의 부평 구읍을 중심으로 발달 되었으나, 개항 이후 제물포를 중심으 로 인천의 본격적인 발전은 이루어졌다. 인천 개항은 서울과 인접한 접근성 때문에 다른 개항 도시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천의 공간 변화는 주변 지역의 인천 행정구역으로 편입과 갯벌의 매립으로 이루어졌다. 문헌상에 나타난 최초의 인천시역은 1914년 개항장 일대로 6.06km²이었다. 1914년 최초 행정구역 결정 이후 제 1차(1936년)와 제2차(1940년) 행정구역 확장은 일본의 군수공업을 위한 공업용지 확보를 위한 것이었고, 제3차(1953년) 확장은 서쪽해 안가 일대가 편입되면서 행정구역 면적이 166.3km²로 확대되었고, 제4차(1989년) 확장은 직할시로 되면서 경기도 김포군 계양면, 옹진 군 영종면과 용유면이 편입되어 행정구역 면적이 313.4km²로 증가 하였다. 제5차(1995년) 확장은 광역시로 변하면서 경기도의 강화군 과 옹진군이 편입되어 954.2km²로 증가하였다. 이외에도 해안가의 갯벌이 매립되어 공장 부지와 신도시 부지가 확대되면서 인천의 면적
24 방순석, 「인천의 인구에 대한 고찰」, 인천학술재단 학술보고서, 2013.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119
행정구역 확장 시기 최초 결정(1914) 제1차 확장(1936) 제2차 확장(1940) 제3차 확장(1953) 제4차 확장(1989) 제5차 확장(1995)
120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인천의 행정구역 면적 변화
편입지역 및 특징 개항장 일대, 부내면, 다소면 부천군 다소면, 문학면 부천군 서곶면, 부내면, 남동면, 문학면 물치도편입, 해안지역 확장 인천직할시 6구제 편입 확장 인천광역시 8구 2군제 확장
제5차확장 (95.3.1)
제3차확장 (63.1.1)
제4차확장 (89.1.1)
제1차확장 (36.10.1)
처음의 仁川府域 (14.4.1)
면적(km²) 6.06 27.12 165.82 166.3 313.4 954.2
제2차확장 (40.1.1)
(면적)
인천시역 확장 과정(인천광역시사편찬위원회, 『인천광역시사』 제1권, 2002.)
이 증가하게 되었다. 25 현재 인천의 면적은 2023년 기준 1,067.1km² 로, 우리나라 7대 특·광역시(서울, 부산, 인천, 대구, 대전, 광주, 울산) 가운데 대구에 이어 두 번째로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으며, 특·광역시
4) 인천의 산업 변화
가운데 가장 많은 섬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개항 전의 인천은 대부분 해안가 습지였다. 1883년 개항 직후 인 천의 교통수단은 기차 이외에는 거의 없었고, 상업 위주의 정미소나 양조장 같은 소규모 공업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후 점차 공업의 규 모가 늘어나고 또한 1930년대에는 인천에 중공업과 군수공업이 급 격히 발달하고 경인선을 중심으로 철도와 도로가 확충됨에 따라 도시 는 개항장 주변에서부터 용현동, 학익동과 부평지역까지 확대되었다. 1960년대의 경제개발계획에 의해 경인 지구가 공업단지로 건설되고 고도 경제성장으로 산업구조가 변모하면서 경인고속도로와 경인선
25 인천광역시사편찬위원회, 『인천광역시사』 제1권, 2002.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121
철도 및 국도를 따라서 시가지가 발달하여 구시가지와 부평시가지가 서로 결합되고 이웃 부천시와 연계되면서 서울에서 인천 간에 연결이 이루어졌다. 1990년대 이후에는 송도 신도시 건설, 서해안 고속도로 건설, 북항 개발, 인천국제공항건설 등으로 세계화의 거점도시로 발전 해 나가고 있다. 앞으로 인천은 세계화에 부응하고 미래를 향한 광역 시의 부푼 꿈을 이루기 위하여 구시가지인 도심권은 상업, 업무, 행정, 문화생활의 중심권으로, 북부권인 강화는 해양관방유적과 역사의 관 광지로, 검단은 최첨단 무공해 공단과 전원도시로, 서부권인 영종 및 옹진 섬은 공항 및 지원단지와 해양 등 천혜의 자연을 이용한 관광단 지로, 남부권인 송도신도시는 국제무역, 금융, 정보통신 서비스, 바이 오 관련 산업 등의 최첨단 도시로 중점 개발해 나갈 계획에 있다.
아암도와 능허대(인천광역시교육청 화도진도서관)
122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5) 교류의 거점 인천 인천은 백제, 고려, 조선시대에 각기 수도와 황해를 잇는 관문이었 다. 이는 인천이 지정학적으로 황해로 연결하는 한반도의 중심이기 때 문이다. 인천 연안에 분포하고 있는 섬들 사이에는 많은 항로가 존재하 던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는 영흥도, 대부도, 이작도 등의 수중에서 발굴 되는 선박과 해저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교류의 거점으로 인천의 역할을 역사적 측면으로 살펴보면 그 시 점은 백제 한성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중심은 미추홀彌鄒忽과 능허대凌虛臺이다. 백제의 미추홀 관련 유적으로는 문학산성, 능허대 등이 있고, 인천 미추홀구 옥련동 해안가의 능허대와 대진大津은 백제 의 사신이 배를 타고 중국으로 떠나는 곳이라는 역사적 기록에서 찾 아볼 수 있다.
6) 교류의 거점 인천 섬 (1) 사료로 살펴본 교류의 거점 인천 섬이 교류의 거점으로 역사 기록에 나타난 것은 나당연합군 의 백제 침공과 관련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7세기경부터 등장한다.
① 덕물도(현 덕적도)와 소야도 5세기 후반부터 삼국 간의 전쟁이 격화됨에 따라 동아시아 연안해 로는 장기간에 경색 국면에 빠져들게 된다. 삼국 통일전쟁의 과정에서 황해 횡단로가 본격적으로 개척되고 활성화되면서 동아시아 해양 교류 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648년 연합한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를 공 격하자 고립에 몰린 신라는 나·당 군사동맹 체결에 성공하였다. 당은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123
660년 백제를 먼저 공격하기 위해 소정방을 사령관으로 한 13만 대군 을 보냈는데, 덕물도(현 덕적도) 옆 소야도 담안에 정박하여 신라 태자 김법민과 양국 간 군사적 연합을 협의하였다. 이 회합에서 나당연합군 의 작전이 결정되고 마침내 이들에 의해 백제는 멸망한다. 26 덕적도 국 수봉 정상에는 소정방이 본국을 향해 제를 지냈던 제단이 있었다고 전 해지며, 덕적도에 이웃한 소야도에는 소정방 군대의 주둔지(소야초등 학교 사택 지역과 북망산 기슭의 담안), 당군이 군량을 수송하던 길(단
소야도 담안의 위치
단한 갯벌이란 의미의 담)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27
또한 가탐(730~805)이 저술한 『황화사달기皇華四達記』에도 덕물도 (현재의 덕적도)가 나오며, 백제 부흥군이 왜군과 합류하여 백제에 주 둔한 당군을 압박할 때도 당나라 장수가 덕물도를 거쳐 웅진부성으로
27 인천시 옹진군, 『옹진군향리지』, 1966.
124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26 『삼국사기三國史記』 권5, 신라본기新羅本紀 5, 태종무열왕 7년(660) 3월
행했다
28는 기록이 있다. 또한 고구려 부흥운동과 관련하여 670년문무왕
10에 당나라 군대와 싸우면서 신라로 향하기 위해 서해 사야도(현 소 야도)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29 여러 문헌을 분석했을 때 덕적도와 소야도는 당과 교류 거점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과 중국을 잇는 항로는 크게 세 가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옹진군 지역의 도서들은 이러한 횡단항로 상의 중요한 기항지 였다. 그러므로 옹진군의 도서들은 신라가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국제사회에서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중 요한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황해를 연결하는 고대항로 분포(허우범 외,『항해로드』, 2023.)
28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6, 문무왕 3년(663) 29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6, 문무왕 10년(670) 6월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125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1861)에 묘사된 자연도
② 자연도(현재 영종도) 송나라 서긍이 저술한 『고려도경高麗圖經』은 송에서 1123년 3월 6 일 출발하여 6월 12일 고려의 예성항 벽란정에 이르는 항해 항로와 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자연도(현재 영종도)에 도착하여 융숭한 접대를 받았으며, 자연도 경원정에 제물사가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해로상 자연도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알려주고 있다. 자연 도는 예성강(벽란정)-자연도(경원정)-고군산도(군산정)-마도(안흥정)- 흑산도-명주를 잇는 명주항로의 한 축을 담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 한 자연도는 강화도와 김포 사이의 물살이 빠르고 좁은 해협으로 알려 진 손돌목을 통과하기 위해 물때를 맞추고자 정박한 섬으로 추정된다. 또한, 자연도에 인접한 용유도의 왕산포구 부근에는 중국과 왕래하던
126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해동지도海東地圖』(1750)에 묘사된 영종진
길목인 조천대朝天臺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를 통해 자연도가 중국과 내
(2) 설화를 통한 교류의 거점 ① 거타지居陁知 설화와 백령도
항하는 기항지로서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 진성여왕의 막내아들 양패良貝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풍 랑이 크게 일어 곡도鵠島, 현 백령도에서 10여 일 동안 묵게 되었다. 백령 도 주변의 빠른 물살은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소설 소재로 사용되 기도 하였지만, 『삼국유사』에도 당나라로 가는 신라 사신 일행이 백 령도에서 거센 풍랑을 만나서 발이 묶여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30 양 패 일행이 풍랑을 잠재우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데, 꿈에 노인이 나타
30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기이奇異 2, 진성여대왕眞聖女大王 거타지居陀知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127
나 “활 잘 쏘는 사람 하나를 섬에 남겨 두면 순풍을 얻을 것이오.”라고 했다. 그래서 남게 된 사람이 거타지居陁知이다. 혼자 남은 거타지 앞
에 노인이 나타나 노인 가족의 간을 빼어 먹는 중을 죽여줄 것을 부탁 하였고, 거타지가 활을 쏘아 중으로 변신한 여우를 죽인다. 노인은 그 에 대한 감사로 딸을 거타지의 부인으로 시집보낸다. 노인은 그 딸을 꽃으로 변하게 해서 거타지의 품속에 넣어 주고, 용 두 마리에게 명 하여 거타지의 배를 호위하여 당나라에 들어가도록 했다. 용의 호위 를 받아 당나라에 온 거타지의 비범함에 당나라 황제는 거타지를 후 하게 접대하였고, 거타지는 본국으로 돌아와 품속에 간직한 꽃을 꺼 내어 여자로 변하게 하여 함께 살았다고 한다. 거타지 설화는 『삼국유 사』에 나오는 많은 설화 중 각별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으로, 거타지 설화를 통해 곡도는 중국으로 오가는 황해 횡단 해로의 중간기착지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백령도는 위치상 황해의 요충지로, 중 국의 산둥반도, 만주의 랴오둥반도와 가까운 곳에 있어 한반도와 중 국 간의 황해무역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던 섬으로 추정하고 있다.
128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② 임경업林慶業 장군 설화와 연평도 임경업 장군은 병자호란의 원한을 설 욕하고자 애쓰다가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삼 국충신이란 별호를 가진 명장군이다. 임경 업 장군이 간신들의 모함과 청국의 계략 에 빠져 중국으로 건너갈 때 심한 풍랑으 로 연평도에 오랜 기간 머물게 되었다. 이 때 임경업 장군은 가시나무를 당섬과 모이
임경업 장군 영정(옹진군청)
연평도 충민사(1943년 촬영, 옹진군청)
연평도 충민사(인천관광공사)
도 사이의 갯골에 치게 하여 바닷물이 빠진 뒤에 가시나무에 걸린 조
기를 잡았다고 한다. 31 이를 배운 연평도 주민들이 가시나무로 조기를
잡게 되었고, 어법이 발달 되면서 그물을 쳐서 큰 조기를 대량으로 잡
31 『옹진군지』 제3편 민속과 문화, 제2장 구비문학과 방언, 제1절 옹진군 설화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129
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연평도 선착장이 있는 당섬에 임경업장 군 사당을 만들어 조기의 신으로 모시고 있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어 연평면 사무소 뒤편 당산 정상에 충민사라는 임경업장군 사당을 세워 풍어와 안녕을 소원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임경업장군 설화를 통해 보더라도 연평도는 중국으로 가는 중간기착지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덩저우
③ 진시황 불로초 설화와 덕물도(현재 덕적도)
인천
덕적도
군산 선유도
남해 고흥반도 서남단
제주 서귀포
서복의 불로초 추정 항로(허우범 외,『항해로드』, 2022.)
부산
통영
거제
서복徐福이 진시황의 지원을 받아 불로초를 찾아 동방으로 향했다 는 기록이 있다. 32 서복이 도착한 곳이라는 전설이 있는 여러 곳이 있 는데 덕적도 국수봉도 그중 하나이다. 『인천부사仁川府史(1933)』에 따
32 『사기史記』 권6,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130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르면 덕적도 북단 국수봉은 진시황이 불로초라는 영약을 구하기 위해 서복으로 하여금 동남동녀 500명을 보내어 영약 국로를 발견한 곳이 라는 전설이 남아 있다. 또한 서복이 도착했다고 전해지는 곳으로는 군산 선유도, 고흥반도 서남단, 거제, 통영, 부산, 제주도 서귀포 등에 이르기까지 연안을 따라 산재한다. 이를 기반으로 서복의 불로초 항로
① 교동도
를 추정해 보면 왼쪽의 그림과 같다. 33
(3) 지명地名과 사적史蹟으로 살펴본 교류 거점
남산포구 부근의 사신당
교동도는 개경, 황해도와 충청, 삼남 지방의 물류를 연결해 주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므로 한반도와 중국을 왕래하는 선박들은 교동 도, 연평도, 백령도 등을 중간기착지로 이용하였다. 교동도 지명 중 남
33 허우범 외 8명, 『황해로드』, ㈜인천출판사, 2022, 157쪽.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131
남산포구 사신등선지로使臣登船之路
산포 부근에 대빈창待賓倉과 사신당使臣堂이 있다. 대빈창이란 우리나라 에 입국한 중국 사신들의 처소가 있었던 곳으로, 교동도 남산포 앞산 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아, 중국 사신들이 해로를 따라 우리나라에 입 국할 때 처음으로 당도하는 지점이 교동도 남산 포구였을 것으로 추 정된다. 교동도 남산포에 있는 사신당은 고려 때 송나라 사신이 배로 왕래할 때 교동도 앞바다를 지나면서 무사태평하기를 기원하며 제사 를 지내던 당집이다. 사신당은 한국전쟁 때 없어졌던 것을 1969년 다 시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남산포 해변 선착장 부근에는 화강암 을 징으로 쪼아 만든 계단인 ‘사신등선지로使臣登船之路’가 남아 있어 당 시의 모습을 짐작하게 해준다.
① 유교 전파의 거점 교동도
(4) 유교, 기독교, 천주교 전파의 거점
교동도는 중국문화를 수용하는 관문으로 기능을 했다는 것을 교동
132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향교를 통해 알 수 있다. 교동향교는 1127년고려 인종 5년 화개산 북쪽 기슭에 세워졌는데, 1286년충렬왕 12 안향安珦이 원나라에 다녀오던 길 에 공자상을 가져와 이곳 문묘에 봉안하였다. 이로써 우리나라 향교
역사상 최초로 공자상을 모시게 되었다. 이후 교동향교는 1741년영조
17에 화개산 남쪽 기슭의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현재 교동향교 입 구에는 홍살문이 있고 수령변장하마비守令邊將下馬碑라고 새긴 비가 남 아있다. 교동향교에는 대성전, 동무, 서무, 명륜당, 동재, 서재, 제기고 등의 건물이 있다.
② 기독교 전파의 거점 백령도
교동향교
백령도 중화동교회에 설치된 백령기독역사관에 전시된 자료를 통해 백령도에 성경과 기독교 교리가 전파된 역사를 살펴보면 서양의 군함 에 탑승한 선교사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기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133
독교 역사는 19세기 선교의 물결과 더불어 시작되는데, 백령도와 인근 해역은 바깥 세계와 접촉하는 해상의 중요한 교통 요충지였기 때문에 백령도가 우리나라에서 매우 빠르게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백령기독역사관의 전시에 따르면 1832년 구츨라프 선교사가 백령 도 중화동 포구, 1865년 토마스 선교사가 두무진 포구와, 1866년 중 화동 포구를 방문하여 포교를 위해 노력했다. 선교에 많은 어려움이 있 었으나 1898년에 전도와 교회 설립 등의 모든 제한이 풀리자 서경조 형제가 중화동의 서당에서 중화동교회 설립 예배를 인도하였고, 1899 년 소래교회에서 건축자재를 공급받아 초가 6칸(39.6m²) 규모로 중화 동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이렇듯 백령도는 기독교 역사의 관문이었으 며, 현재에도 백령도 주민의 80% 정도가 기독교 신자라고 한다.
중화동교회와 백령기독교역사관(옹진군청)
134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백령기독교역사관
백령기독교역사관 내부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135
백령성당
백령성당에 설치된 김대건 신부 상
136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③ 천주교 선교사들 입국의 거점 백령도 김대건金大建 신부는 조선교회와의 연락망을 복원하고,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한 공로로 1845년 한국인으로 가장 먼저 사제품을 받 는다. 김대건 신부는 중국의 어선들이 고기잡이를 위해 해마다 음력 3월 초에 백령도 부근에 모였다가 5월 하순에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 고, 이들을 이용하면 선교사를 영접하고, 편지를 전달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이를 시도하였다. 34 이 편지에는 황해도 해안의 섬과 암초의 배치, 그 밖에 주의해야 할 것들에 대한 설명과 함께 조선지도 2장을 동봉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발각되어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김대건 신부가 개척한 백령도 부근을 통한 선교사 해상입 국로가 완성되어 1856년 3월 이후로 선교사들은 백령도 부근을 통한 해상입국로를 이용하여 조선에 들어왔다. 이를 기념하여 백령성당 정 원에는 김대건 신부 상이 설치되었고, 김대건 신부의 치아를 본당에 봉 안해 놓아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성지순례를 위해 백령성당을 찾고 있 다. 백령도를 활용한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을 보더라도 백령도는 중국 과 조선 간 입국 중간기착지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5) 경기만에서 발견된 고선박 유물을 통한 해상교류 경기만 지역의 연안에서 확인된 고선박으로는 영흥도선, 대부도 선, 대부도 2호선 등 3척이다. 영흥도선은 어부들에 의해 발견되면서 2010~2013년에 발굴되었는데 출토 유물은 배의 밑바닥과 측판이 발 굴되었고 고려시대의 도자기가 출수되었다. 35 대부도선은 조개를 채취
34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20번째 편지 「이 빈들에 당신의 영광이」. 35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인천 옹진군 영흥도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14.
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137
하던 마을 주민들의 제보로 발견되어 2006년 발굴 조사 되었는데 조 사 결과 한 개의 돛을 사용하는 범선으로 연안을 항행하던 선박으로 추정된다. 36 대부도 2호선은 2014년 대부도 방아머리 인근에서 맨손 어업을 하는 어부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출토된 선체는 저판, 좌우 외 판 등이 확인되었고 유물도 청자와 목제품 등 다양하다. 37 경기만 지역의 연안과 수중에서 발굴되는 선박과 해저 유물을 통 해 알게 된 황해 해상교류 관련 사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경기만 일 대의 해상교류는 통일신라부터 이루어졌고, 둘째, 영흥도선, 대부도 선, 대부도 2호선은 모두 고려시대의 배로 청자의 발달과 함께 국내 외 해상교류가 활발해졌으며, 셋째, 과거의 항법은 육지의 목표지점을 설정하고 연안을 따라 항해하는 연안 항해로, 전남 혹은 충남 해역보 다는 배가 많이 몰리는 경기만에 많은 고선박의 잔해들이 지금도 수 장되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영종도, 강화도, 대이작도 등 주변 섬 지역에서는 많은 청 자류가 발견될 가능성이 매우 크므로 황해 중부 섬 지역의 해양조사 를 체계적으로 실시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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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국립해양유물전시관, 「安山大阜島船 水中發掘調査報告書」, 2008. 37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안산대부도2호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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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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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인천의 해양환경, 자연과 인문환경 141
수중고고학적 궤적, 인천해역의 침몰선
신종국
국립해양유산연구소 수중발굴과 과장
수중고고학적 궤적, 인천해역의 침몰선
고고학考古學; Archaeology은 과거 사람들의 물질적 흔적(건물터, 무 덤, 성곽, 옛 도시 등)을 조사하고 연구하여 당시 문화의 여러 측면 즉, 기술·사회조직, 문화·역사를 복원하고 과거 사회가 어떻게, 왜 변화되 었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1 수중고고학도 고고학의 한 분야이기 때 문에 육상에서 이루어지는 고고학적 연구와 근본적인 부분에서는 같 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수중이라는 특수한 환경에 의해 자료의 종류 와 잔존상태에서 차이가 발생한다. 선사시대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해양활동과 관련된 정보는 대부분 바다에서 얻을 수밖에 없 다. 육상 유적에서는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유물들이 본래 상태에서 변형되어 소멸해 가지만, 개흙에 묻힌 침몰선과 유물들은 훨씬 더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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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성락, 『고고학 입문』, 학연문화사, 2008, 15쪽.
한국 수중유산 발굴해역과 침몰선 위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편, 『한국의 보물선, 타임캡슐을 열다』, 2016.)
제2장 수중고고학적 궤적, 인천해역의 침몰선 145
랜 기간 동안 본래의 상태가 유지되고 보존된다. 특히 과거 어느 한순 간에 난파한 것이 확실한 침몰선과 그 안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특정 시점의 생활상과 사회상 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바닷속 타임캡 슐’로서, 육상 유물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던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2 수중발굴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학문적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이루어 지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중반 이후의 일이다. 그 이전의 수중발굴은 대 부분 일반 잠수부들에 의해 진행되었고, 수중고고학은 19~20세기 초반 잠수 장비와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태동하게 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3 한국의 수중유산 조사는 197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1976년 중국 동남부에서 출발하여 일본으로 항해하다가 신안 앞바다에서 침 몰한 ‘신안선新安船’이 발견되고, 원元시대의 유물 2만 5천여 점이 인 양되면서 본격적으로 수중고고학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안선 발굴을 계기로 일반인들도 바다에 ‘수중유산’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 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수중유적에 대한 신고가 이어지면서 1980년 대의 완도선莞島船, 1990년대의 진도선珍島船과 달리도선疸里島船, 무안 도리포 해저 유적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진다. 2000년대부터는 기존 에 해군의 도움을 받아서 이루어지던 수중조사의 한계를 벗어나면서 진정한 수중고고학으로의 발전이 시작된다. 특히 2007년 이후 태안 해역에서 연이어 발굴된 침몰선에 대한 조사는 한국 수중고고학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 신종국, 「제1장 보물선과 수중고고학의 탄생」, 『한국의 보물선 타임캡슐을 열다』, 공명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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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 2016. 3 장 이브 블로, 『해양고고학』, ㈜시공사, 2006, 49∼50쪽.
1976년 신안선부터 2023년 군산 선유도해역까지 47년간 14척의 침몰선과 유물 집중 매장해역 9개소 4에 대한 수중발굴조사가 이루어졌 다. 아울러 조사를 통해 102,500여 점에 달하는 유물과 14척의 선박을 인양하였다. 5 신안선과 진도선은 고려시대 중국 등 외국에서 출발하여 항해 중 한반도 서·남해에서 난파한 배이며, 12척은 한국의 전통선박이 다. 12척 중 영흥도선靈興島船은 통일신라시대9C의 선박이고, 마도馬島4 호선은 조선시대15C 전반, 나머지 10척이 고려시대의 배이다. 인천의 해역에서는 지금까지 2척의 침몰선이 발견되어 조사가 이 루어졌다. 앞서 언급한 통일신라시대의 영흥도선과 1894년 청일전쟁 과 관련된 고승호高陞號 추정 선박이 각각 2013년과 2016년에 조사된 것이다. 고려시대부터 현대까지의 수도인 개성과 서울의 입구인 인천 해역은 전국의 물산이 드나드는 주요 항로였고, 근세 청일전쟁과 러 일전쟁 당시에는 해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인천해역에서 유물 발견이 신고된 지역 은 24개소로 서해의 다른 해역에 비해 빈도가 높은 편은 아니다. 유 물 발견해역 중 16개소에 대해서는 탐사가 이루어졌으며, 위치 불명 또는 깊은 수심으로 조사가 불가능한 지점은 3개소, 아직 조사가 이
4 9개 해역은 제주 신창리해역(’80·’83·’96·’19년), 태안해역(’81~’87년, ’07~현재), 무안 도 리포해역(’95~’96년), 군산 비안도해역(’02~’03년), 보령 원산도해역(’04~’05년), 군산 야미도해역(’06~’09년), 태안 원안해역(’10년), 태안 마도해역(’08~’19년), 진도 명량대첩 로해역(’12~’19년)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주요업무통계자료집』, 2019. 5 마도3호선과 마도4호선은 발굴조사 후 선체를 인양하지 않고 매몰한 상태로 보존하고
있다. 이외에도 제부도의 조간대潮間帶에서 2척의 배가 발견되었으나 아직 조사하지 않았 고, 최근 해남 송호리 해변에서도 1척의 추정 고려시대 선박이 발굴되었지만 보고서가 발 간되지 않아 본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제2장 수중고고학적 궤적, 인천해역의 침몰선 147
루어지지 않은 해역이 4개소,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해역이 영흥도선 발굴해역 1개소이다. 6 추정 고승호 발견해역에 대해서는 2016년 정 밀탐사가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소량의 유물도 발견되었다. 한 편, 인천해역에서 발견된 침몰선은 아니지만 도착지가 고려시대 임 시 수도였던 강화도일 가능성이 높은 선박이 바로 태안해역에서 발 견된 마도3호선이다. 2011년에 발굴되었으며, 출수된 목간을 통해 1265~1268년 사이, 전남 여수일대에서 화물을 싣고, 강화도에 거주 하던 관직자와 삼별초 등의 기관에 보내는 화물을 선적했음을 알 수 있었다. 본고에서는 인천해역에서 발굴된 영흥도선과 고승호, 그리고 강화 도를 목적항으로 항해하던 중 침몰한 마도3호선의 조사경과, 난파된 선박의 상태, 출수유물 등에 대해 상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 조사 경과
1. 영흥도선의 발굴과 출수유물
영흥도선은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 섬업벌이라는 무인도의 서 남쪽에서 발견되었다. 섬업벌의 동쪽에는 영흥도가, 서쪽에는 자월도 가 있으며, 이곳은 서해 남부에서 중·북부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꼭 지나야 하는 항로이다. 예로부터 이곳 해역을 항해할 때는 안전을 위 해 육지와 가까운 항로 즉 안면이라고 부르는 영흥도와 그 동쪽에 있 는 선재도나 대부도 사이를 주요한 뱃길로 이용했다고 한다. 이외에
6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유물발견신고 목록』, 2023. 지역별 유물 발견 신고 건수는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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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역 10개소, 충남 104개소, 전북 43개소, 전남 141개소이다.
영흥도선 발굴해역 위성 사진(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영흥도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14.)
도 영흥도의 서쪽에 있는 덕적도나 이작도 사이를 지나는 항로는 빠 르게 이동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날씨가 좋은 날은 뒷면이라고 불리 는 이 물길을 이용했다고 한다. 수심은 5~30m 정도이며, 영흥도선이 확인된 곳은 조석潮汐에 따라 10~15m의 수심을 보인다. 해저면은 모 래와 자갈들이 혼재해있으며 섬과 가까울수록 암반과 바위들이 많다. 2010년 9월 스쿠버다이빙을 하던 중 청자 4점을 발견, 신고하면 서 섬업벌해역의 유물 매장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해 11월 14일부터 4일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긴급조사팀을 꾸려 1차 탐사조사 를 실시한 결과 246점의 도자기들이 수습되었고, 2012년 4월에 다시 2차 탐사를 하였는데 7일간 75점의 유물들이 추가로 확인되었다. 이 처럼 다량의 도자기들이 발견되면서 이 해역에 고선박이나 유물집중 매장처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었고, 이에 탐사에서 발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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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발굴(2012년)
2차 탐사(2011년)
1차 탐사(2010년)
2차 영흥도선 발굴(2013년)
남동편 신고해역 탐사(2012년)
영흥도선 발굴해역 조사현황도(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영흥도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14.)
사로 전환하여 정밀조사를 실시하였다. 그해 5월부터 8월까지 50일 간 제1차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유물이 출수됐던 500×300m의 범위 를 조사구역으로 정하고 다시 그 내부를 50×50m로 구획하여 조사하 는 방식이었다. 그리드 내부에서 520여 점의 청자와 도기陶器 등의 유 물들을 수습하였고, 조사구역 중심부에서 철제솥과 도기 등이 적재된 선박 1척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13년 5~7월 실시한 제2차 발굴조사에서는 선체와 도기 호壺 등 55점의 유물이 출수되었는데, 지난 조사에서 800여 점 가까이 출수 된 청자는 선체 내부에서 한 점도 확인되지 않았다. 또한 선체는 현재 까지 발굴된 고려시대 선박과 비슷한 점도 있으나, 저판재底板材의 연 결 방식 등에서 큰 차이가 있으며, 선체 내에는 화물로 적재한 철제솥 과 선상생활용으로 추정되는 도기만이 확인되었다. 영흥도선 조사와 는 별개로 2012년 섬업벌 남동편에서도 유물발견 신고가 들어와 조 사하였는데 백자 발鉢 8점, 철제솥 1점, 닻돌 등이 출수되었다. 백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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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흥도선 발굴해역 유물 분포도(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영흥도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14.)
물들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청자유물이 주를 이룬 섬업벌 서남편의 영흥도선 및 그 주변 지역과는 별개의 선박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추 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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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사 내용
(1) 영흥도선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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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다발 노출상태(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영흥도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14.)
선체 유물 적재 상태(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영흥도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14.)
선체 노출 상태(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영흥도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14.)
2010년과 2012년의 탐사를 통해 섬업벌 서남쪽 해역에서 다수 의 청자가 발견되었으나 유물 집중매장처나 선체가 확인되지 않았다. 이에 2012년 5월의 1차 발굴조사부터는 유구 확인을 위해 유물 출 수 위치를 토대로 섬업벌 서편해역의 500(남↔북)×300m(동↔서) 범 위를 정밀조사 구역으로 설정하고, 다시 내부를 50×50m로 구획하여 총 60개의 그리드로 세분하였다. 북동쪽 그리드부터 조사를 시작하여 해당 구역 전체를 정밀탐사하는 방식이었다. 2010년과 2012년 탐사를 포함한 조사에서는 800여 점의 청자 들이 확인되었는데 대부분은 그리드의 동북쪽에서 출수되었다. 그리 드 북쪽 외곽에서도 소량의 청자들이 확인되기도 했고, N3E1그리드 에서는 파편을 포함해 110여 점의 청자발이 다발로 확인되기도 했다. 서쪽으로 가면서 유물이 매우 소량만 출수되었는데 W2나 W3그리드 의 해저지형이 급격히 경사지며 수심이 깊어지기 때문이다.
제2장 수중고고학적 궤적, 인천해역의 침몰선 153
조사구역 중앙부인 N0E0 그리드에서는 특이한 결구 방식을 가진 3개의 선체편과 그 상부에 여러 점의 도기와 철제솥 등이 응결된 상 태로 노출되어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 선체는 소재지를 고려하여 ‘영흥도선靈興島船’으로 명명했다. 그리드 내부에서 닻돌도 총 7점이 확 인되었는데 N3E0, N2E1, N1E2, N0E2그리드에서 5점, N0E0의 영 흥도선 주변에서 2점이 확인되었다. 앞선 5점 모두 선체의 북쪽과 북 동쪽 사이에서 출수되었으며 영흥도선과의 거리는 150m 이내이다. 조사해역은 조류가 매우 강한 곳으로 선박이 닻을 이용해 묘박을 하기에 는 적합한 지역이 아니므로 이 해역에서 침몰했거나 사고를 당한 선박의 닻돌일 가능성이 높다.
(2) 영흥도선의 발굴 영흥도선은 길이 약 6m, 폭 약 1.4m 크기이며, 저판재 1개, ‘ㄴ’자 모양의 만곡종통재彎曲縱通材로 추정되는 2개 부재의 선체편이 3단으로 결구되어 있었다. 선체는 남반부 약 3m 가량의 부재만 명확하게 확인 되며, 그 나머지 선체는 두껍게 철부식물이 뒤덮고 함께 응결돼 형태를
알 수 없었다. 선체 부재의 생김새는 만곡종통재와 비슷하며 외판재外板
材는 단면이 ‘ㄴ’자, 저판재는 ‘ㄷ’자 모양으로 다듬어 졌으며治木, 세 부 재를 관통하는 나무못長槊이 1개 지점에서 확인된다. 기존 고려시대의
십이동파도선이나 완도선의 만곡종통재나 마도1·2·3호선의 외판재와 는 결구방식이나 단면형태의 차이가 크다. 선체 상단에 노출된 유물들 의 양상을 살펴보면 도기 및 철제솥들이 선체에 응결된 상태로 서쪽으 로 기울어져 있는데, 이를 통해 ‘ㄷ’자 모양의 상단은 저판, ‘ㄴ’자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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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하단과 중단은 외판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영흥도선 평·단면도(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영흥도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14.)
선체 중앙 부분에는 도기가 자리하고 있고, 그 주변에 철제솥과 응 결물이 있었다. 도기들은 철제솥들과 가깝게 적재되어 있어 철 산화물 과 응결됨으로써 조류에 휩쓸려 없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있었던
제2장 수중고고학적 궤적, 인천해역의 침몰선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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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4,5그리드 철솥(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영흥도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14.)
E3,4그리드 도기(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영흥도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14.)
E4그리드 도기병(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영흥도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14.)
것으로 보인다. 선체 중앙의 동편에 해당하는 E4, E5그리드에 도기호 2점, 도기병 2점, 도기장군 2점이 집중 분포하고 있었다. 일부 도기들 은 현장에서 분리해 수습했고, 일부는 파손을 막기 위해 선체 및 철제 부식물과 응결된 상태로 함께 인양했다가 보존처리 과정에서 분리하 였다. E5그리드에서는 철부식물에 덮여있던 소형 도기병 1점 확인되 었는데 그 속에는 경화된 것으로 보이는 갈색의 유기물이 남아 있었다. 그리드의 남동편 외곽에서도 영흥도선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도기병, 도기호 각 1점과 도기구연부 파편 1점이 출수되었다. 2010년과 2012년 조사에서 약 800여 점의 청자가 넓은 범위에 산포된 상태로 출수 되었던 것과는 달리 선체 내부에는 한 점의 청자 도 확인되지 않았다.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과 출수 도기로 볼 때 선체
제2장 수중고고학적 궤적, 인천해역의 침몰선 157
와 주변 출수 청자와의 시기 차가 분명하므로 청자들은 영흥도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E2그리드와 D3, E3그리드의 경계에서 사슴뿔이 각각 1점씩 확인되었다. D3의 사슴뿔은 가지의 끝부분이며 선체 옆 해저면에서 확인됐다. 다른 1점은 녹좌鹿座와 가 지 부분이며 철부식물과 응결된 상태로 출수됐는데 마도3호선에서도 출수된 것처럼 가공 흔적이 없는 상태이다. 사슴뿔을 이용한 공예품 을 만들기 위해 재료로 선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흥도선에서는 철제솥이 여러 점 출수되었는데 대부분 겹쳐진 상 태로 확인되어 화물로서 선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과거 다른 고 선박에서 발굴된 대부분의 철제솥들이 선원들의 취사용이었던 것과 는 차이가 있다. D1, D2, D4, D5그리드에서 완형의 철제솥이 2점씩 겹쳐 응결된 상태로 확인되었고, D2와 E2그리드 사이와 선체의 동쪽 과 서쪽 근접한 곳에서 각각 1점씩의 완형의 철제솥이 확인되었다. 응 결물 분리과정에서도 철제솥의 파편들이 여러 점 발견되었는데 철제 솥은 영흥도선의 주요 선적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다량이 적재된 철제화물에 의해 선체와 유물 대부분이 철 부식물에 뒤덮이거나 응결된 상태였는데, 응결물들을 분리하는 과정 에서 화물의 충전재充塡財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초본草本들과 가공 의 흔적이 남아 있는 원통목 2점, 납작하게 가공한 용도 미상의 목제 품 1점도 수습했다. D3그리드의 응결물 속에서 초본이 담겨있는 동 제 용기 1점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응결된 유물들은 정과 망치를 이용 해 결에 따라 분리한 후 인양하였다.
158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E3그리드 사슴뿔 출수 상태(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영흥도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14.)
D3그리드 청동용기(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영흥도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14.)
제2장 수중고고학적 궤적, 인천해역의 침몰선 159
(3) 영흥도선 선체 구조 영흥도선은 지금까지 해양에서 발굴되었던 고려시대 선박들과는 구조적인 측면에서 매우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인양된 선박의 일 부분만으로 전체의 구조를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선체의 중앙저판으 로 보이는 부재는 턱걸이장부이음 방식으로 2개의 부재가 결구되어 있고, 이음부 양 옆 상면에 용도를 알 수 없는 움푹 파인 부분이 확인 된다. 또한 양 옆의 부재를 올리기 위해 만든 턱이 만들어져 있고, 그 턱 위에 올려진 부재의 상단 외측에는 클링커 이음Clinker Built 홈이 있 어서 다시 그 위에 부재를 올릴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또한 부재들 의 상면에는 여러 개의 구멍이 발견되는데 초본류가 박혀 있는 것도
영흥도선 잔존 선체 복원 모식도
있으며, 용도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7
영흥도선 단면 복원 모식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영흥도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14.)
7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영흥도선 저판재와 1단 만곡부종통재, 1단과 2단 만곡부종통재를 결구하기 위해 구멍을 뚫고 나무못이 아니라 초본류로 단단하게 묶었을 것으로 보는 견 해가 있다. 이에 따르면 만곡부종통재의 구멍 또한 초본류로 결구하기 위한 구멍으로 볼 수 있다. 허문녕·윤용희, 「통일신라기 선박구조 이해」, 『해양문화재 17호』, 국립해양문화 재연구소, 2022.
160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월지선 평·단면도(문화재관리국, 『안압지발굴조사보고서 도판편』, 1987.)
월지선(국립경주박물관, 『명품 100선 국립경주박물관』, 2007.)
영흥도선 발굴 당시에는 선체 주변에 산포되어 있던 도자기들의 편년을 근거로 12세기경의 선박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중앙저 판으로 간주할 수 있는 부재의 형태부터 그 측면에 결구되는 부재들 까지 지금껏 발굴된 고려시대의 선박과는 구조적인 측면과 나무못의 결구 양상이 전혀 달랐다. 선체를 인양한 후 이러한 의문점을 해결하
제2장 수중고고학적 궤적, 인천해역의 침몰선 161
기 위한 수단으로 선체의 방사성탄소연대 분석을 실시한 결과 8~9세 기경의 선박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8 분석결과를 신뢰한다면 영흥도선은 통일신라시대의 배가 되는데 이 시기의 선박이 발굴된 사례는 지금까지 경주 월지에서 발굴된 월지선 月池船, 구 안압지선이 유일하다. 하지만 월지선은 연못에서 사용되었던 유 선遊船으로 바다에서 사용된 선박들과는 구조적으로 차이가 있을 것으 로 생각되어 왔다. 그런데 영흥도선과 월지선은 구조적으로 매우 유 사한 점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중앙저판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운데의 부재를 중심으로 양 옆 에 시설되는 부재들의 결구 방식이 매우 비슷하다. 월지선은 중앙저판 에 고리형태의 구멍을 돌출되게 만들어서 양 옆의 부재를 결구하였으 며, 영흥도선은 장삭長槊의 크기에 맞추어 홈을 만들고 양 옆의 부재들
과 결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결구된 장삭은 양 옆 부재의 외부로 돌출되면서 마감하였다. 이러한 영흥도선의 장삭 결구 방식은 현재까지 발굴된 고려시대 선박에서는 전혀 확인된 적이 없는 형태이다. 월지선은 세 개의 부재만을 접합하여 선박을 완성하였지만, 영흥 도선은 현재 인양된 것 이외에도 부재들이 더 있었을 것이며, 구조적 으로도 발전된 양상을 띠고 있었을 것이다. 만약 당시에 유선遊船과 강 선江船, 그리고 해선海船이 기본적인 구조형식은 한 뿌리를 두고, 용도
8 선체 저판에서 10년 간격으로 채취된 연속적인 5개 연륜 블록의 방사선탄소연대 측정 결과 95.4% 신뢰구간에서 A.D.710~730년과 A.D.750~774년의 두 연대 구간으로 분 석되었다. 다만 초본류 연대 구간이 A.D.893~981년, A.D.775~970년의 연대가 측정되 어 앞의 연대와는 차이가 있다. 모든 연대가 8~10세기에 포함되며, 중심연대는 통일신라 시대인 8~9세기로 볼 수 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영흥도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14, 347쪽.
162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에 따라 구조적으로 발전된 양식을 채택하여 선박 건조를 하였다면 월지선과 영흥도선이 동시대에 사용되었던 선박이라는 점은 충분한 타당성을 가진다.
전통 한선(고려시대)의 각부 명칭
제2장 수중고고학적 궤적, 인천해역의 침몰선 163
1-1. 중국선박(신안선) 첨저형 구조
겹이음홈 (외측상단)
겹이음홈 (내측하단)
2-1. 중국(좌), 한국(우) 외판 접합
1. 달리도선 저판연결 형태
장삭
2. 저판 가로방향 연결 방법
4. 고려 선박 선수부(달리도선)
고려 선박의 단면과 부재별 연결 방식
164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만곡부종통재
1-2. 고려선박(완도선) 평저형 구조1
※저판과 외판 ‘L’자형 彎曲部縱通材
2-2. 마도1호선 외판 상하단 접합(縱連)
3.장부이음 (저판)
4. 가로형반턱이음 (저판, 외판)
피삭
6. 세로형 반턱이음(저판)
3. 저판 연결 방식(2:橫連, 3-7:縱連, 4·5 외판은 橫連)
5. 고려 선박 선미부(달리도선)
1-3. 고려선박(마도1호선) 평저형 구조2
※저판과 외판 쪽매방식 연결
2-3. 저판과 외판 쪽매방식 연결
5. 맞댄이음 (저판, 외판)
7. 턱걸이 장부이음(저판)
6. 고려 선박 돛대 연결 세부
3) 영흥도선 출수유물 (1) 도기류 영흥도선에서는 도기와 철제솥, 청동용기, 기타 골각류가 출수되 었다. 철제솥에서 생성된 철부식물에 의해 선체와 유물들이 고착된 상태로 확인되었으며, 도기는 파편을 포함하여 총 6점으로 병 2점, 장 군橫缶 2점, 호 2점이다.
영흥도선 출수 도기호(좌), 영흥도선 출수 반구병(우)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영흥도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14.)
영흥도선 출수 도기호는 용량이 30리터를 상회하는 중대형의 크 기로, 어깨 부위에 1조의 돌대突帶가 형성되어 있으며, 내외부는 깨끗 하게 정면되었다. 대형호의 어깨부위에 돌대를 붙이는 것은 통일신 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중대형의 대형호에서 자주 보이는 특징이 다. 도기병은 반구형盤口形의 구연형태로 내외면은 깨끗하게 정면되었 고, 일부에 자연유가 형성되었다. 반구형태의 구연은 통일신라시대부
제2장 수중고고학적 궤적, 인천해역의 침몰선 165
울릉도 천부리 2호 석실분 출토 반구편병 (국립중앙박물관, 『울릉도』, 2008.)
터 병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여 고려시 대로 가면서 호에서도 보인다. 영흥도 선의 반구병은 고려시대 반구병에 비 해 목이 짧은 형태로 비슷한 기형이 통 일신라시대의 울릉도 천부리 석실묘 와 미륵사지 동원 남문지 출토품이 있 어 참고할 수 있다. 10
형태나 시문 문양이 독특하다. 동체부 에 음각 횡선으로 문양대를 두고 문양 대 안에 8치齒의 다치구多齒具를 이용 해 파상집선문波狀集線文을 동체 하부에
파상집선문이 시문된 반구소병은
서 상부까지 4단에 걸쳐 시문하였으며, 각 단 사이에 공백을 두었다. 높 이 14.8cm의 작은 병에 이렇게 파상집선문을 시문한 사례는 드문 편이 다. 11 파상집선문 자체는 5세기 무렵부터 백제와 신라지역의 회청색 경질 토기에 많이 보이는 문양으로 주로 기대器臺, 대부장경호臺附長頸壺, 장경호 長頸壺 등의 기종에 시문된다. 이후 통일신라시대 후기 인화문印花文이 점 차 소멸하는 8세기 중후엽, 주름무늬병 등이 등장하는 시기에 다시 유
9 국립중앙박물관, 『울릉도鬱陵島』, 2008. 10 이종민, 「영흥도선 출수 도자의 양식적 특징과 편년」, 『영흥도선 수중발굴보고서』, 2014, 381쪽. 11 충남 논산군 표정리 출토품 중 기형과 문양이 비슷한 토기가 출토된 바 있으나 5세기
경 조성된 표정리 고분군 출토품인지 확실하지 않아 시대를 확정할 수는 없다. 백제개 발연구원, 『百濟土器 圖錄』, 1984, 圖.104
166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행하다가 9세기 전반 이후 점차 소멸한다고 한다. 12 실제 8~9세기 유적인 경주 안압지, 장도 청해 진, 해남 백야리 오시골 통일신라 시대 도기가마 유적 등에서 작은 호나 병으로 추정되는 토기에 음 각 횡선으로 구획하고, 그 사이에 파상집선문을 시문한 유사한 사 례가 확인되고 있다. 13 고려시대
영흥도선 출수 반구소병(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영흥도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14.)
에는 다치구에 의한 파상집선문은 보이지 않고, 대호와 같은 큰 항아리 의 목부분에 단치구를 이용한 파상문을 시문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이 러한 시문 양상은 9세기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고려시대까지 지속 된다. 이와 같이 파상집선문이 동체 전면에 정연하게 시문된 도기병은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와 출토 사례를 고려할 때 통일신라시대 후기, 나 말여초羅末麗初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으로 장군은 삼국시대인 5세기대부터 나타나지만 많이 발 견되는 기종은 아니다. 통일신라시대 장군은 그 출토 수량이 많지 않 아 제작 시기나 형식 변화를 확인하기 힘들며, 고려시대에는 장군의 출토 사례가 거의 없다. 영흥도선의 장군과 같이 한쪽 면이 평평하고
다른 면이 둥근 형태는 울릉도 천부리 2호 석실분과 경주 안압지雁鴨
池 등 통일신라 유적에서 주로 확인되고 있다.
12 변영환, 「주름문병에 대한 시고」, 『중앙고고연구3』, 중앙문화재연구원, 2005. 13 김건수 등, 『해남-삼산간 도로 확장구간내 해남 백야리 요지』, 호남문화재연구원, 2004, 104쪽.
제2장 수중고고학적 궤적, 인천해역의 침몰선 167
논산 표정리 소병 (백제개발연구원, 『백제토기 도록』, 1984.)
울릉도 천부리 2호 석실분 출토 장군 (국립중앙박물관, 『울릉도』, 2008.)
168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영흥도선 출수 장군(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영흥도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14.)
양상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해남 백야리 도기(호남문화재연구원, 해남-삼산간 도로 확장구간내 해남 백야리 요지』, 2004.)
영흥도선 출수 도기들은 수량이
많지 않지만, 제작 특성이나 문양에
있어 통일신라시대인 8~9세기경의
(2) 철솥鐵釜
영흥도선 출수 솥(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영흥도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14.)
당진 호구마루 솥(충청문화재연구원, 『당진 대운산리 호구마루 유적』, 2005.)
영흥도선 출수 철제유물은 총 17점으로 D, E그리드 내에서 집중 적으로 출수되었다. 응결물 상태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철제솥으로 12점에 달한다. 철제솥은 2점을 제외한 나머지 10점이 2점씩 겹쳐있 는 상태로 확인되었다. 적재된 상태와 출수된 양으로 보아 선상에서 사용하던 것이 아닌 화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철제솥은 전부 다 리가 없는 부釜 형태로 전은 상부에 가깝게 위치하고, 솥의 폭에 비해 깊은 형태로 양주 대모산성, 창녕 말흘리 유적 등 통일신라시대 철부 와 유사하다. 14
14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철부의 형태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가 동체형태에서 확 인된다. 동체의 깊은 정도인 심도(높이/구경)로 수치화될 수 있는 동체 형태의 양상을 보면 통일신라 철부는 예외 없이 1.2~1.35 사이이며, 고려시대 철부는 0.7~1 정도로 얕 아지고, 조선시대에는 더 얕아진다. 영흥도선 철부의 심도는 1.27 정도로 전형적인 통일 신라시대 철부의 형태를 가진다. 신종국, 『고려 침몰선의 성격과 출수유물 연구』, 공주 대학교박사학위 논문, 2020, 234~239쪽.
제2장 수중고고학적 궤적, 인천해역의 침몰선 169
영흥도선의 성격에 대해 고찰한 윤용혁은 철솥들이 ‘철산지鐵産地
가 집중되어 있던 황해도 지역 혹은 충주에서 생산된 물품’이었을 가 능성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15
(3) 청동용기 D3 그리드에서 초본류가 담긴 채 발견된 청동제 용기 1점이 출수되었 다. 구연부는 직선화되어 올라가다가 안쪽 방향으로 꺾여있고, 주구注口가 있다. 동체부에서 바닥면까지 완만하게 곡선화되어 있으며, 바닥에 굽 을 연결하는 고정못 자리가 없는 것으로 보아 별도의 굽은 없는 것으 로 보인다. 동체부의 한쪽 측면에는 고정못이 3개 남아있는데 이것은 손잡이가 부착되었으나 떨어져 나간 흔적으로 보인다. 전체적인 기형 및 주구의 형태, 측면부에 손잡이가 있는 등의 특징이 광양 마로산성 의 통일신라시대 건물지(I-6건물지)에서 출토된 청동용기와 매우 흡 사하다.
영흥도선 출수 청동용기(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영흥도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14.)
15 윤용혁, 「옹진 섬업벌 ‘영흥도선’ 유적의 역사적 성격」, 『영흥도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170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14, 395~397쪽.
(4) 영흥도선 주변 출수 청자
광양 마로산성 출토 청동용기(국립순천대학교박물관)
영흥도선 주변에서는 870점의 도자기가 출수되었으며, 이 중 청 자가 851점으로 대부분을 차지한다. 청자의 기종은 발이 351점, 접 시가 406점, 완碗 13점, 뚜껑 76점, 통형잔 5점으로 발과 완이 주류이 다. 출수된 청자는 대부분 포개구이 방식으로 구워졌으며, 유색은 녹 청색, 녹황색, 회청색을 띠고 있어 일정한 환경에서 번조된 것은 아니 어서 품질이 아주 우수한 최상급 청자는 아니다. 대부분의 청자는 문 양이 없으며, 일부 기종에서 음각기법과 압출양각기법에 의한 선문線文, 모란당초문牡丹唐草文, 앵무문鸚鵡文, 운문雲文이 시문되었다. 발견된 청 자들은 특별하게 시대를 달리하는 것으로 볼 수 없어 한 배에서 퍼져 나간 것이 확실하다고 보고 있다. 청자류의 기형과 문양으로 볼 때 12 세기 후반경에서 13세기 전반경으로 추정되며, 그 중심 시기는 12세 기 후반경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고 있다. 16
16 이종민, 「영흥도선 출수 도자의 양식적 특징과 편년」, 『영흥도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14, 377~379쪽.
제2장 수중고고학적 궤적, 인천해역의 침몰선 171
172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영흥도선 주변 출수 청자 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영흥도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14.)
영흥도선 주변 출수 청자 접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영흥도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14.)
영흥도선 주변 출수 통형잔과 청자뚜껑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영흥도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14.)
4) 소결 영흥도선은 12세기 후반경 제작된 청자가 발견·신고 되면서 조사 가 시작되었으나 발견된 선체의 구조와 출수유물, 방사성탄소연대 측 정 결과, 이 배가 고려가 아닌 통일신라시대의 선박이었음이 밝혀졌 다. 이에 따라 영흥도선은 바다에서 확인된 최고最古의 해선海船으로 서 선박사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비록 남아 있는 선체가 많지 않고, 출수유물 수량이 적지만 당시의 활발했던 해 상활동의 증거로써 그 의의가 적지 않다. 다만 위와 같은 한계로 인해 과연 영흥도선의 출항지가 어디이며, 주요 화물이었던 철제솥이 어디 에서 만들어졌고, 어디로 향하던 배였는지 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 문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영흥도선이 침몰하고 400년 후, 전라도산 청자 운반선이 이 해역에서 침몰한 것이 확실하지만 그 난파선이 어
1) 조사내용 (1) 개요
디에 잠들어 있는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2. 마도3호선 발굴과 출수유물
태안 마도해역 광역탐사 중이었던 2009년 9월 12일 신진도 북쪽 해변에서 불과 300m 떨어진 지점에서 선체 편으로 추정되는 목재들 이 발견되었다. 이 지점에 대한 집중 탐사에서 화물로 추정되는 사슴뿔 세 점과 약 10m에 달하는 선체를 확인하였다. 이 선박에 대한 발굴은 2011년 5월 4일부터 동년 10월 24일까지 이루어졌으며, 선체는 인양
제2장 수중고고학적 궤적, 인천해역의 침몰선 173
하지 않았다. 발굴 해역의 수심은 3~6m 정도로 비교적 얕다. 17 마도3호선의 규모는 길이 12m, 폭 8m, 선심 2.5m 가량이고, 선체 는 좌현 쪽(서쪽)으로 8~12°가량 기울어졌다. 저판은 총 5열로 이루어 져 있으며 선수부가 선미부보다 넓다. 저판 가운데 열에 돛대구멍 2개 가 있으며, 저판끼리의 연결방식은 선체를 인양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 확하게는 파악할 수 없었다. 선미 쪽으로 가면서 중앙저판을 제외한 좌 우 2열의 저판재가 외판재화 되면서 선미에 이르면 중앙저판 1열만 저 판으로 남는다. 마도1·2호선에 비해 저판열이 7열에서 5열로 줄었지만 선미 쪽으로 가면서 저판이 줄어드는 양상은 동일하다. 좌현 외판은 10단, 우현은 9단까지 확인되었는데 이는 지금까지 발 굴된 난파선 중 가장 많은 단수이다. 외판의 연결 방식은 다른 고려 선 박과 유사하며, 외판재는 두꺼워서 선체가 단단한 편이다. 마도3호선은 고려 선박으로는 처음으로 선수부터 선미까지 온전하게 남아있었으며, 중앙의 돛대까지 확인되어 선박 전체의 구조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 었다. 선수부는 총 4열의 부재를 세로로 나란히 결구했으며, 양 끝의 선 수재는 외판과의 연결을 위해 톱니바퀴 모양으로 깎아냈다. 선미재는 가로로 결구되었으며, 7단이 남아있었다. 선체의 중앙부에서는 좌현 쪽 으로 기울어진 채로 돛대 구조물이 확인되었다. 항상 중앙저판에서 돛 대구멍만 확인되다가 돛대가 직접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3열의 부재를 나무못으로 한꺼번에 연결하였으며, 가운데 부재는 돛대의 역할을 하고 양 옆의 부재는 돛을 지지해 주는 역할이다.
17 신종국·홍광희, 「조사개요·조사일지」, 『태안 마도3호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국립해양 문화재연구소, 2012, 12∼39쪽. 18 노경정, 「선체조사」, 『태안 마도3호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12
90~91쪽.
174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마도3호선 3-1차(위)·3-2차(아래) 노출면 평·단면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태안 마도3호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12.)
제2장 수중고고학적 궤적, 인천해역의 침몰선 175
마도3호선에 대한 정보는 35점의 목간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목 간 판독 결과 이 배는 1264~1268년 사이에 침몰했음이 밝혀졌다. 19 수취인으로 나오는 신윤화辛允和, 유천우兪千遇, 김준金俊의 관력官歷을 통해 밝혀진 사실이다. 화물 발송지로 확인되는 유일한 지명은 여수 현呂水縣; 현 麗水市으로 이곳에서 출발했거나 거쳐 간 것으로 보인다. 최 종 목적지는 당시 고려의 임시수도였던 강화도다. 목간에 기록된 화 물은 전복, 홍합, 상어 등 고급 어·패류와 소량의 곡물, 그리고 포布였 다. 수취인은 당대의 무신집정이었던 김준을 비롯한 고위관직자인데, 특히 김준과 정치·혈연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인물이나 기 관이었다. 마도1,2호선과 다른 특징은 도관都官, 중방重房, 전민변정도 감田民辨正都監, 삼별초三別抄 등 관청이 수취인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20 마도3호선의 침몰연대는 관력官歷 파악이 가능한 인물들에 대한 연구 결과를 참조한다면 1265년일 가능성이 높다. 21 태안선과 마도 1·2호선의 목간에서는 화물의 발송 지역이 기재된 목간이 다수 확인 된 것에 비해, 마도3호선에서는 여수현呂水縣; 현재의 麗水市 목간 1점에 불과하여 다른 유물들의 양상과 교차하여 검토해야 할 것으로 보인
19 임경희, 「마도3호선 목간의 현황과 판독」, 『목간과 문자』8, 한국목간학회, 2011, 224쪽. 20 임경희, 「목간」, 『태안 마도3호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12, 221~263쪽. 21 윤용혁은 마도3호선 출수 목간에 등장하는 김준과 유승제兪承制; 유천우의 관력을 분석
하였다. 김준이 ‘영공令公’ 칭에 적합한 것은 1265년 1월 시중 임명 이후이며, 유천우兪千
遇; 1209 1276년가 승선承宣=承制;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관직의 직을 맡은 것이 1263년 12월∼ 1264년 7월이지만 목간이 공문서가 아니라 편의상의 인식표이므로 관직의 이동이 바 로 적용되지 않았을 수 있어 1265년이 가능성이 많다고 보았다. ‘유승제’라는 지칭을 참 고할 경우 1266년 이후는 가능성이 희박할 것으로 추정하였다.(윤용혁, 「태안선과 마도 3호선의 침몰연대」, 『한국중세사연구』44, 한국중세사학회, 2016, 194~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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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또한 목간에 기재된 화물 중 곡물의 수량이 극히 적고, 대부분의 화물이 해산물을 위주로 한 식품류이거나 포목류로 도기항아리에 담
(2) 마도3호선의 공간활용
아 선박의 중앙칸과 선미 쪽의 제6칸에 선적하였다.
마도3호선은 지금까지 발굴된 침몰선 중 잔존상태가 가장 양호하 며, 유물의 출수 맥락이 잘 기록되었다. 이에 고려시대 화물선의 화물
마도3호선 3-1차 노출 양상
선적과 선상생활 추정을 위한 좋은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제1칸 제2칸
곡물 등 화물
제3칸
화덕과 조리용기, 식기, 식료품
제4, 5칸
곡물 등 화물
제6칸
대나무상자 등 화물
마도3호선의 공간 구획과 출수유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태안 마도3호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12.)
마도3호선 3-2차 노출 양상
선수와 선미가 모두 남아 있고, 외판도 최대 10단까지 남아있는 마도3호선을 보면, 좌우 외판을 연결하는 가룡목에 의해 선체내부의
제2장 수중고고학적 궤적, 인천해역의 침몰선 177
공간이 여섯 칸으로 구분된다. 선수부의 제1칸은 경사가 심하고, 호롱 (닻돌을 올리고 내리는 물레)을 받치는 구조물 등이 설치되어 별도의 화물이나 선상용품이 배치되지는 않은 것 같다. 곡물 등의 화물은 제 2·4·5칸에 적재되었는데, 3-1차 노출면에서 보듯이 이 공간에는 곡 물이 바닷물에 젖지 않도록 받침목이 깔려 있었다. 제6칸은 선미부로 매우 좁은데, 상어포 등을 담은 대나무상자와 젓갈을 담은 도기항아 리 등이 발견되었다. 돛대가 설치된 중앙부 제3칸의 좌현 쪽은 취사를 위한 화덕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주변으로 쇠솥 2점과 승선자를 위 한 식기류, 반찬거리를 담은 도기항아리 등이 있고, 나머지 공간에는 화물용 식료품(젓갈류 등)을 담은 항아리가 빽빽하게 적재되어 있었 다. 즉, 선체하부의 선창船倉 여섯 칸 중 네 칸에는 화물이 적재되어 있 고, 중앙칸(제3칸)에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설치한 화덕과 조리용 쇠 솥, 선상용 식기류와 식품류를 담은 도기 항아리가 보관되어 있었다. 중앙칸과 제2칸의 사이에는 나무뚜껑이나 초본류로 밀봉한 화물용 식품을 담은 도기 항아리 19점 정도를 적재하는 도기적재부를 마련 하였다. 제2·4·5칸에 선박의 주요화물인 곡물을 적재하고, 중앙칸에 선상 용품과 식품류 화물이나 자기류나 금속류 화물을 배치하는 양상은 십 이동파도선十二東波島船이나 마도1·2·4호선에서 모두 유사하게 나타났 다. 결국 선창 안은 태반이 화물을 적재하거나 선상용 생활물품을 보 관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고, 1×2m 정도의 조리를 위한 빈 공간만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78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2) 출수유물 마도3호선에서 발견된 유물 수량은 많지 않다. 마도해역의 다른 선박에서는 소량이라도 화물로 운송하던 자기나 대나무공예품 등이 확인되었는데 이 배에서는 그런 화물이 없었다. 목간이 달렸던 화물 은 소량의 곡물류와 각종 해산물을 중심으로 한 식품류가 대부분이 며, 공예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포布가 유일하다. 이에 따라 선박 내부에서 출수된 식기류는 모두 선상용으로 볼 수 있다. 다만 도기호 가 38점으로 다른 선박에 비해 많고, 상당수는 식품류 화물 운송을 위 해 적재한 것이다. 이에 마도3호선의 유물에 대해서는 도기와 목간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도기 마도3호선의 도기 수량은 다른 선박에 비해 많은 편으로 호의 용 량을 합하면 거의 600ℓ에 이를 정도여서 승선원들만을 위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마도3호선에서 출수된 목간 35점 중 18점이 항아리 에 담긴 식료품(전복, 전복젓갈, 물고기기름, 홍합젓갈 등)이 표기된 것이며, 목간에 나와 있는 항아리의 수량이 26점에 달한다. 목간이 나 무나 대나무이기 때문에 침몰 시 유실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식품운반용 도기호의 수량은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마도3호선 용도별 도기호의 적재상태(추정)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태안마도3호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12.)
제2장 수중고고학적 궤적, 인천해역의 침몰선 179
선상생활용과 식품운반용 도기의 구분은 선박 내에서의 출수 위치 를 통해서도 추정이 가능하다. 도면은 유물의 출수 위치를 토대로 선 박 내에서 도기의 적재 또는 보관 상황을 복원한 것이다. 도기적재부 는 제3칸의 선수부 쪽에 가룡목(외판 1단 결구)과 받침목에 의해 너 비 약 60cm로 구획된 부분으로 19점의 도기들만 확인되어 화물용 도기를 별도로 적재해 놓은 곳으로 생각된다. 제6칸에는 5점의 목간 과 함께 화물용 대나무상자 2점과 4점의 도기호가 발견되어 이 또한 화물용 식료품이 확실하다. 제2칸의 이면편호(16번)는 도기적재부에 서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마도3호선 출수 각종 도기(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태안 마도3호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12.)
제3칸의 돌로 만든 노지 주변에서는 13점의 도기호와 도기병 3점, 도기접시 1점이 확인되었다. 뿐만 아니라 청자 식기류 20점(대접6, 발1, 접시9, 잔3, 뚜껑1)과 청동식기류 등이 쇠솥과 함께 발견되어 선 상용품들을 노지 주변에 보관했음을 알 수 있다. 도기적재부와 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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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기호[유물번호 마도3-48번](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태안 마도3호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12.)
용품 사이에서 발견된 도기호의 용도는 판단이 쉽지 않다. 7점 중 3점 의 호가 나무뚜껑이나 초본류로 단단하게 밀봉된 상태였고, 도기 안 에서 화물표인 죽찰이 발견된 점 22 등을 고려할 때 이 도기들도 식품운
22 48번 도기호 내부에서는 “유승제 댁에 전복 젓갈(을 담은) 고내지(항아리)를 올림”이라 고 기록된 죽찰(24번)이 확인되었다. 완전한 상태로 출수된 도기의 상태로 볼때목부 분에 매달려 있던 죽찰이 침몰 후 항아리 안으로 들어간 것 같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 소, 『태안 마도3호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12, 184~185쪽, 250~260쪽.)
제2장 수중고고학적 궤적, 인천해역의 침몰선 181
반용 도기로 생각된다. 48번과 함께 47번 도기호는 각각 34, 31ℓ 크 기로 식품운반용으로는 다소 큰 편이다. 하지만 3호선 목간의 식료품 중 생전복이나 전복젓갈 등은 하나하나의 덩어리가 비교적 큰 편으로 가득 채웠다고 하더라도 성인이 들지 못할 정도의 무게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48번 도기호 옆의 49번 도기호는 용량이 50ℓ 이상으로 상당히 크다. 마도3호선에서는 다른 선박에서 발견되는 대호가 발견 되지 않아 선상용 음료를 담는 용도로 추정하였다. 결국 목간 내용과 도기의 출수맥락 등을 고려하면 식품운반용 도 기는 호류 31점이며, 선상생활용 도기는 호류 14점, 도기병과 접시 등 식기류 5점을 포함한 19점으로 추정할 수 있다. 23 선상용 도기의 기종은 식기류로 접시(1점)와 소병(3점), 병(1점)이 있고, 식료품 저 장용 장신호(10점)과 이면편호(1점), 단경호(3점)이다. 화물용 도기는 중형의 장신호(24점)와 이면편호(2점), 중대형의 단경호(3점)와 반구 호(1점)가 있다.
(2) 목간 마도3호선에서는 곡물, 포布, 사슴뿔 등 다양한 종류의 유물과 함께 35점의 목간이 출수되었다. 마도3호선도 마도2호선과 같이 간지가 적 힌 목간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목간에 나오는 인물들을 통해 침몰 시기 를 추정할 수 있었다.
23 목간 기록에 의해 확인 가능한 식품운반용 도기 항아리는 최소 26점으로 도기 출수 위 치에 의해 산출된 31점과 큰 차이가 없다. 목간 기록에 근거한 추정은 최소 개체수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마도 화물용 도기호가 30점 내외였을 것이다.
182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림. 전복 젓갈 한 항아리”라고 적힌 목간에 등장하는 신윤화는 최씨 무
신정권을 무너뜨린 무오정변戊午政變
에 참여하여 공을 세운 뒤 장군으로 승진했고, 고려 원종 원년(1260년)에 몽골에 사신으로 다녀온 인물이다. 장군과 시랑은 같은 정4품으로, 이를 통해 마도3호선이 1260년을 전후한 시기에 침몰했음을 추측할 수 있었 다. 여기에 더하여 “유兪 승제承制 댁
예를 들어 “신윤화 시랑 댁에 올
마도3호선 연대 추정 목간 (국립해양유산연구소 제공)
에 올림. 전복 젓갈(을 담은) 고내기 하나”라고 적힌 목간의 승제는 승선承宣
이라고도 하는데, 왕명 출납을 담당하던 관직명을 뜻한다. 1260년을 전 후한 시기에 유씨 성을 가진 승제로는 유천우兪千遇가 있다. 유천우는 고려 원종 초기부터 1268년까지 승제직을 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지막으로 “사심 김 영공님 댁에 올림. 홍합 젓갈 한 항아리. 세 말을 담음. 현례.”라고 적힌 목간이 있는데, 김 영공은 무신정권의 집 권자인 김준金俊을 가리킨다. 당시 영공이라는 호칭은 제왕에게만 붙 이는 극존칭으로, 노비 출신이었던 김준은 고려 고종45년(1258년)에 무오정변을 통해 당시 집권자인 최의崔竩를 죽이고 권력을 잡은 인물
이었다. 이후 고려 원종 6년(1265년)에 시중市中에 임명되었고 곧이 어 해양후海陽侯에 봉해졌는데, 이때부터 영공이란 칭호를 사용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유 승제와 신윤화, 김 영공이 활동했 던 시기를 근거로, 마도3호선은 1265년~1268년 사이에 항해하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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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3호선 출수 목간(국립해양유산연구소 제공)
마도에서 침몰된 선박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특히 김 영공에게 보내는 목간에서 눈 여겨볼 것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심事審’이라는 용어이다. 고려시대에는 지방 에 내려 보내는 지방관 외에 지방 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사심관제도를 실시했다. 지방 에 연고가 있는 중앙관료를 그 지방의 사심으로 임명하여 부호장 이 하의 향리 임명권을 주는 대신, 그 지방에서 반역과 같은 일이 일어나 면 연대책임을 묻는 제도였다. 즉, 김준에게 보내는 홍합 젓갈은 김준 이 사심으로 관할하던 지방에서 보낸 것이라는 뜻이 된다. 사심이란 용어는 “여수呂水 현 부사심 댁에 올림. 전출 겉보리 일곱 말. 배에 싣는 걸 맡아 함. 승동정 오. 수결”이라고 적힌 목간에서도 발 견되었다. 여기서 ‘부사심副事審’이란 사심 다음가는 사심이라는 뜻으 로 고려 성종 때부터는 한 지방에 2~4명의 사심을 두었기 때문에 이 를 구분하는 용어이다. 정리하면 마도3호선에는 여수 현의 부사심에 게 보내는 겉보리가 실려 있었으며, 이를 통해 마도3호선의 출발지가 지금의 전남 여수 인근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마도 3호선에서 발견된 목간에서는 화물의 배송지로 전민변정도 감, 삼별초, 도관 등 당시 관청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으며, 곡물 이 외에도 전복生鮑, 개고기포, 물고기 기름, 홍합, 상어 등 다양한 물품명 이 화물로 적혀 있었다. 또한 당대의 무신집정武臣執政이었던 김준에게
184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보내는 목간과 김 시랑이라는 인물에게 보내는 목간 등에는 “~댁에 올림”이라는 뜻의 용어인 ‘宅上’ 외에 ‘主宅上’이라는 용어가 확인되는 데, 특히 김 시랑侍郞에게 화물을 보낸 사람은 김준에게 물건을 보낸 사 람과 동일 인물인 현례玄禮로 확인되었다. 이로 보아 김 시랑은 김준과 같은 집안사람으로 추정되며, 당시 김준의 집안사람 가운데 시랑의 관직에 있었던 인물로서 김준의 아들 중 한 명임이 유력해졌다. 즉, 마도3호선은 당시 집권자인 김준과 그 주변 인물들에게 보내 는 물건을 싣고 임시수도인 강화도로 향하던 선박이었음을 알 수 있 다. 고려 무신정권 시대에 집권 세력가의 화물을 운송하다 침몰된 난 파선의 거대한 퍼즐이 목간을 통해 마침내 완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3) 소결 마도3호선은 비록 인천해역이 아닌 태안해역에서 발견되어 발굴 되었으나 화물에 부착되었던 목간의 내용으로 보아 그 목적지는 당시 임시 수도였던 강화도가 거의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화물을 받는 것 은 당대의 무인집정이었던 김준을 포함해 신윤화, 유천우 등 고위 관 직자와 우삼번별초, 전민, 도관 등 권력 기관으로서 강화도에 거주했 던 인물이나 집단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목간 부착화물들은 식료 품을 중심으로 수취처가 특정되었던 화물이었을 것이고, 화물의 태반 을 차지했던 곡물에는 목간이 부착되지 않았던 것 같다. 목간이 부착 되지 않았던 곡물의 수취처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권력자와 권 력기관으로 향했던 식료품은 전복과 홍합, 상어포나 꿩고기, 개고기포 등 최고급 식재료로써 바다를 통해 지방으로부터 수도인 강화로 물산 이 모여들었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제2장 수중고고학적 궤적, 인천해역의 침몰선 185
3. 고승호高勝號 조사
1894년 7월 25일 인천 옹진군 울도 해역에서 청나라 군사를 싣고 운항 중이던 고승호가 일본 함대의 포격을 받아 침몰한 이후 이 배를 발굴하기 위한 시도는 일제 강점기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 다. 실제 2001년부터 2002년에는 ‘문화재 발굴’이 아닌 ‘매장물 발굴’ 허가를 통해 추정 고승호 위치를 확인하여 발굴하였다. 25 그러나 매장 물 발굴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보고나 조사 결과는 공개되지 않았으 며, 2010~2015년 해당 해역에서 추정 고승호에 대한 추가적인 ‘매장 물 발굴’이 있었다. 2014년 12월 매장물 발굴자들은 출수된 중국 동전 41점을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에 신고하였고, 이에 대한 확인조사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국립해양유산연구소)에서 2015~2016년 실시 하였다. 조사 결과, 고승호로 유력하게 추정할 수 있는 근대 선박과 탄 알, 무기류 등이 확인되었다.
24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고승호 정밀탐사 결과 보고』, 2016. 고승호 조사 내용에 대해 서는 2016년 작성된 보고서를 참고하였다. 25 문화재의 발견과 신고, 조사에 대해서는 「문화재보호법」과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여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고 실시한다. 하지만 고승호 발굴은 「국유 재산에 매장된 물건의 발굴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제28211호)」에 의거하여 진행하였 다. 바다에 매장된 물건은 해양수산부장관 또는 지방해양수산청장의 허가를 받아야 한 다. 발굴된 물건이 국유매장물일 경우 80%에 해당하는 물건을 발굴자에게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출처 : 국가법령정보센터)
186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1) 고승호의 침몰과 발굴의 역사 (1) 풍도해전豊島海戰과 고승호 침몰 1894년 7월 25일 울도 앞바다에서 청나라 병사를 태우고 있던 고 승호가 일본 군함의 포격으로 침몰하는 풍도해전이 발발하면서 청일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1894년 2월 동학농민군의 봉기와 전주 성 함락(동년 4월)에 위기감을 느낀 조선 정부가 청에 파병을 요청하 였고, 그해 6월 청의 선발대가 아산만에 도착하였다. 당시 조선 점령 을 위해 청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던 일본은 청의 움직임에 맞서 6월 7일 제9여단을 파병하고, 16일에는 4,000명의 선발대를 인천에 상륙시켜 서울로 입성하였다.
고승호 위치 율도
덕적도
서산
오이도
울도 및 고승호 위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동학농민군 총대장 전봉준은 6월 11 일 전주성에서 스스로 철수하였고, 조선 조정은 청일 양국에 군의 퇴
제2장 수중고고학적 궤적, 인천해역의 침몰선 187
거를 요청하였다. 목적지를 잃은 청군은 상륙지인 아산만에 주둔하게 되었고, 일본은 6월 15일 일청 양국이 공동으로 조선 내정개혁을 진 행하고, 청이 거부하면 일본이 단독으로 진행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21일 청이 제안을 거부하자 제9여단의 나머지 부대를 조선에 파병하 여 27일에는 여단 8,000명의 병력 모두가 조선에 주둔하게 되었다.
침몰하고 있는 고승호(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고승호 특별전 도록』, 2015.)
7월 9일 영국의 조정안을 청이 거절하자 일본은 이를 비난하고, 청과의 국교를 단절한다. 청 황제 광서제光緖帝는 이에 격분하여 북양 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에게 개전 의사를 알렸다. 7월 16일 이홍장은 아산만에 주둔 중인 섭사성聶士成에게 해로를 통해 평양으로 이동하라
고 지시하였으나, 섭사성은 해로가 위험하여 이동이 어렵다고 하였다. 이에 청은 아산만에 증원군을 파병하였고, 이때 병력을 싣고 출항한
188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배 중 한 척이 바로 ‘고승호’이다. 26 군함은 선실이 좁아 많은 수의 병력이 승선할 수 없기 때문에 청 은 파병을 위해 자딘 매디슨사JardineMatheson&Co., London27에서 3척의 화물선을 용선傭船하였다. 3척의 배는 애인호愛仁號와 비경호飛鯨號, 그
리고 고승호高勝號였다. 고승호는 1883년 영국 바로우조선소Barrow
Shipbuilding Co. Ltd., Barrow-In-Furness에서 건조한 2,134t, 길이 76.2m, 폭 11.95m, 높이 6.4m, 최고 속도 10노트의 화물선이다. 1894년 당시 인도차이나 스팀 내비게이션사IndoChina Steam Navigation Co. 소유로 이 회사는 영국 런던의 자딘 매디슨사의 자회사였다.
1894년 7월 청의 증원군은 3일에 걸쳐 태고항太沽港; 현재의 天津市
에서 조선 아산만으로 출항하였다. 21일에는 애인호가 병사 1,150명 을, 22일에는 비경호가 병사 400명과 말 100필을 태우고 출발하였 으며, 23일 오후 9시 50분에는 고승호가 1,200명(혹은 1220명, 혹은 1100명)의 병사와 신형대포 12문을 싣고 출발하였다. 운송선은 각각 호위함護衛艦과 동행하였는데 고승호의 호위함은 조 강操江함이었고, 앞선 애인호와 비경호의 호위함은 제원濟遠함과 광을 廣乙함, 위원威遠함이었다. 한편, 일본군 대본영은 7월 19일 이미 연합
26 신영우, 「1894년의 풍도전투와 고승호 격침사건」, 『고승호-격랑의 청일해전 특별전 도 록』,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인천광역시립박물관, 2015, 236~237쪽. 27 자딘 매디슨회사의 중국 이름은 이화양행怡和洋行으로, 1832년 동인도회사 소속 무역선
의 선장이던 스코츠 윌리엄 자딘Scots William Jardine과 제임스 매디슨James Matheson이 광둥성 광저우에 설립하여 아편과 중국차(홍차)의 무역에 주력하였다. 창립한 지 2년 후에 동인도회사의 대중국무역 독점이 폐지되자 아편전쟁을 계기로 상해, 홍콩 등에 진 출하였으며, 1859년에는 일본 요코하마, 1883년에는 인천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네이 버 지식백과] 자딘매디슨 [Jardine Matheson Limited]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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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대에 조선 서해안 풍도 및 안면도 부근을 점거하여 근거지를 삼고, 증원병을 태우고 오는 청국함대와 운송선을 파괴하라는 작전명령 1 호를 내렸다. 또 23일에는 경복궁을 점령하고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세운 뒤 청군 축출과 전쟁 협조가 중심인 동맹조약을 강제로 맺었다. 애인호와 비경호를 호위하여 조선에 도착한 호위함 중 제원함과 광을함은 고승호와 조강함을 맞이하기 위해 7월 25일 아산만 입구
에 위치한 풍도까지 나왔다가 일본 해군 제1유격대 함정 요시노吉野
함, 나니와浪速함, 아키츠시마秋津洲함과 만났다. 7시 45분 요시노함이 3,000m 거리에서 제원함에 발포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으며, 제원 함도 응사하였으나 전투는 함선의 성능과 무기에서 앞선 일본군의 일 방적인 승리였다. 제원함은 백기를 내건채 서쪽으로 도망쳐 청으로 돌아갔으며, 광을함은 인근 연안에 접근하여 선체를 불태우고 선원들 은 하선하였다. 일본군은 불탄 광을함을 일본으로 보내어 수리 후 사 용하였다. 일본 함정이 도주하는 제원함을 쫒던 중 고승호와 조강함을 발견 하였다. 당시 고승호는 영국 국기를 달고 있었으며, 선장은 영국인 갤 스워시T. R. Galsworthy였다. 나니와함은 고승호를 나포하기 위해 고승 호에 접근하여 일본 군함을 따라오라고 지시하였다. 하지만 당시 고 승호에 있던 청군들이 반발하였고, 선장은 일본이 선전포고를 하고 전투가 시작된 것으로 생각하고, 선전포고 전에 고승호가 출발하였기 때문에 출발지인 태고항으로 돌아가도록 허용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은 이를 무시하고 12시 40분 고승호를 공격하였다. 어 뢰와 대포를 맞은 고승호는 빠르게 침몰하기 시작하였다. 바다로 뛰 어내린 청군은 울도로 헤엄을 쳐서 도망갔고, 일본군은 보트를 타고
190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도망치는 청군과 침몰하는 고승호에서 반발하는 청군에게 사격을 가 하였다. 조강함은 아키츠시마함에 의해 나포되어 일본 해군 함선으로 편입되었다. 울도로 도망쳐 구조된 사람은 147명이었으며, 덕적진 첨사 이수명 이 여러 섬을 돌며 추가로 57명을 더 찾아 204명이 구조되었다. 나니 와함에서 보트로 구조한 인원은 선장과 사관 등 외국인 3명뿐이었다.
(2) 고승호 발굴의 역사 고승호 침몰 후 생존자들은 고승호에 군자금으로 사용하기 위한 은량 銀兩과 마제은馬蹄銀이 다량으로 실려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그 결과 일 제강점기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이 은을 찾고자 하는 발 굴이 수차례 시도되었다. 이런 사실은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어제 새벽昨曉부터 인양에 착수한 인천 해저의 은 괴”(매일신보 1925년 8월 7일), “해저에 깊게 묻힌深藏 백만원의 은괴 제2차 인양작업 착수”(매일신보 1925년 11월 19일), “해저에 든 삼천 만원 은괴! 사오월에 인양 작업”(동아일보 1935년 2월 24일) 등이 있 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1970~90년대 지속적인 발굴 시도가 있었다. “바다 밑 「노다지」캐기에 부푼 꿈”(매일경제 1980년 3월 8일), “인천 앞바다 보물선” 사실일까(한겨례 1999년 4월 13일)
이런 고승호 발굴 시도 중 실제로 은이 확인된 것은 2001년~ 2002년 골드쉽(주)에서 실시한 ‘매장물 발굴’이다. 발굴 결과 실제 로 은량과, 멕시코제 은화가 확인 되어 세간에 화재가 되었다. 골드쉽
28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인천광역시립박물관, 『고승호-격랑의 청일해전 특별전 도록』, 2015, 43~539쪽.
제2장 수중고고학적 궤적, 인천해역의 침몰선 191
(주)은 2001년과 2002년 울도 서남방 2km 지점(2015~2016년 조 사 지점)에서 고승호 발굴을 실시하였다. 2001년 3월 5일부터 4월 14일까지 실시한 조사에서 침몰선을 발견하였고, 4월 25일부터 6월 4일까지 200t 규모의 탐사선에서 탐사를 실시한 뒤, 6월 18일부터 한 달간 준설선浚渫船을 이용하여 유물을 인양하였다. 다음 해인 2002 년에는 10월 1일부터 한 달간 대형 집게를 이용하여 발굴을 진행하 였다. 29 당시의 발굴에서는 은량과 멕시코제 은화, 인도차이나 스팀 네 비게이션사의 마크가 찍힌 접시, 소총, 권총, 실탄, 총검, 중국 동전, 선 체 부속구 등 1,800여점의 유물과 유골이 확인되었다. 이 유물들은 2001년 7월 21일 문화재위원회에서 심의한 결과 “근대문화유산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명되었고, 유물 중 일부가 인천시립 박물관에 보관되었다. 2001년~2002년 고승호 발굴에 참여하였던 발굴자는 2008년 울 도 서남방 1.5km 해역에서 고승호와 은의 매장물 발굴을 신청하였으 나 실질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2010년 7월부터 2011년 4월까지 또 다른 발굴자가 은, 구리, 납의 매장물 발굴을 신청하여 발 굴조사를 하였고, 30 2011년 다시 매장물발굴을 신청하였으나, 2010 년 발견하였다고 신고한 문고리의 실물이 확인되지 않아 발굴이 승 인되지 않았다. 2012년 이들은 다시 매장물발굴을 신청하였고, 이후 2015년 10월 30일까지 매장물 발굴을 실시하였다. 2010년부터 2015년까지 매장물발굴자들이 발굴한 것은 2001년 ~2002년에는 고승호를 발굴한 것으로 판단된다. 발굴자와 면담을 통
29 편도영, 「海底探査 埋藏物 引揚 計劃書(매장물발굴승인신청서 첨부물」, 2008, 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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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발굴위치는 울도 서남방 1.5km로 좌표는 기입하지 않았다.
해 먼저 준설선을 이용하여 선체 주변을 제토하고 이후 10인치 에어리 프트를 이용하여 선수 부분을 집중적으로 제토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2015년에는 3인치 에어리프트를 사용하다가, 9월과 10월 10인치 4 개를 연결한 대형 에어리프트를 제작하여 제토를 실시하였다.
2) 고승호 정밀탐사 경과 2014년 11월 울도 인근에서 중국 동전 41점이 발견·신고된 31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2015년 4월 울도 인근 해역에서 탐사 조사 를 실시하였다. 4월 9일 2001년 고승호 발굴 좌표로 이동하였고, 이 곳에서 매장물 발굴 바지선barge船; 艀船과 발굴자를 만났으며, 발굴자 는 바지선 고장으로 해당 위치에 위치하게 된 것이라고 하여 4월 10 일 바지선은 북서쪽으로 190m 가량 이동하였다. 4월 9일과 10일 다 중빔음향측심기로 울도 남서쪽 2km 해역의 해저면을 조사한 결과, 고승호로 추정되는 선체를 발견하였다. 32 하지만 선체 바로 위에 바지 선이 위치하고 있어 잠수조사를 실시하지는 못하였다. 이후 6월 26일 부터 10월 30일까지 매장물발굴조사에 7차례 입회하였다. 그 중 2차 입회 시에 수중조사를 통해 선체를 확인하고, 세면대 편을 수습하였 으며, 다중빔음향측심기 조사도 실시하였다. 2016년 5월에는 좌표에 대한 혼동을 없애고, 2015년 확인된 선체 가 2001년~2002년 발굴한 고승호와 동일한 선박인지, 즉 고승호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정밀탐사를 실시하였다. 고승호 정밀탐사는 2016년 5월 10일부터 19일, 5월 25일부터 6월 2일까지 2차에 걸쳐 실시하였다.
31 중국동전을 발견 신고한 사람은 당시 매장물발굴자이다. 32 1km×1km 정도의 구간을 조사하였으며, 선체가 발견된 지점은 단 한 곳이었다.
제2장 수중고고학적 궤적, 인천해역의 침몰선 193
3) 조사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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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겨진 선체 모습(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고승호 조사 약보고서』, 2016.)
노출된 총탄의 상태(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고승호 조사 약보고서』, 2016.)
고승호 정밀탐사는 조사 선박이 2001년~2002년 발굴된 고승호 와 동일한 선박인지를 밝히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따라서 선체 내부 와 주변에서 현재 인천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고승호 유물과 동 일한 형태의 유물이 발견되는가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또한 매장물 발굴자들이 선체 중심에서 선수쪽으로 치우친 부분을 집중적으로 제 토하였기 때문에, 이 근처에 제토 중 노출된 유물이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이 지점을 집중적으로 탐색하기로 하였다. 탐색방법은 육안조사 및 탐침봉을 이용한 탐침조사를 실시하였으 며, 수중촬영 또한 시도하였다. 탐색을 진행함에 따라 탐색 라인을 선 수쪽으로 조금씩 이동하여 조사범위를 확장하였고, 2차시 조사부터 는 집중 제토 지점에서 실탄과 같은 유물이 소량이지만 지속적으로 발견되었다. 유물 탐색과 함께 선체의 전반적인 잔존 상태에 대한 조 사도 실시하였다. 먼저 다중빔음향측심기 조사를 통해 선체가 남북기 준에서 서쪽으로 29° 틀어져 있으며, 선미부로 추정되는 지점에서 북 쪽으로 약 40m 지점에 증기선의 연돌이 쓰러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고승호 도면과 비교 시 연돌의 위치 및 규모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잠수 조사를 통해 연돌 북쪽으로 약 10~20m 구간은 선체 철 판이 찢겨져 있고, 해저면을 기준으로 5~6m 깊이로 파여져 선체 외 벽과 격벽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는 2001년부 터 2015년까지 매장물 발굴자들이 고승호 선수 창고 구간을 대형 집 게(그랩)와 에어리프트를 이용하여 집중적으로 제토하였기 때문으 로 파악된다. 북쪽으로는 선체가 거의 확인되지 않는데 이는 2001년 ~2002년 선체 하부까지 발굴된 후 다시 매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선체 우현 외곽에는 인양 중 떨어진 것으로 보이는 선체부속품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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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호 매장상태(다중빔음향측심기) 및 고승호 도면 비교(국립해양유산연구소 제공)
산재되어 있으며, 이곳에서도 실탄 및 총검이 발견되었다. 연통 남쪽
4) 출수유물
으로는 선체의 격벽이 드러나 있는 상태를 확인하였다.
추정 고승호에 대한 정밀탐사 결과 17건 25점(석탄 일괄 9점)의 유 물이 출수되었다. 세면대편 1점이 2015년 수중조사에서 출수된 것이 고, 나머지는 모두 2016년 조사에서 발견되었다. 유물 종류별로 보면 총탄과 포탄, 총검 등의 무기류 9점, 청나라시대 동전 1점, 청동제품 1 점, 철제품(손잡이, 고리 등) 4점, 시유된 세면대편 1점, 석탄 9점이다. 이 유물 중 중국동전, 총탄, 총검, 세면대편은 2001년 고승호 발굴 당시 신고된 유물과 거의 동일하다. 정밀탐사의 목적이 2001년 발굴 된 고승호와 이번에 조사한 선박이 같은 배인지를 확인하는데 있다는 점에서 이 유물들은 매우 중요하다. 이에 따라 인천시립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2001년 출수 고승호 유물과 이번에 출수한 정밀탐사
(1) 도광통보道光通寶
유물 중 동일 종류로 보이는 유물을 직접 비교가 필요하다.
2016년 출수품(좌)과 2001년 출수품(중간·우)(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고승호 조사 약보고서』, 2016.)
제2장 수중고고학적 궤적, 인천해역의 침몰선 197
청나라 동전으로 1820~1850년淸 宣宗 연간에 주조되었으며, 2001 년 고승호 발굴에서도 같은 동전 2점이 출수되었다. 이외에도 강희통 보康熙通寶, 건륭통보乾隆通寶 등 7종의 청나라 동전이 공개된 바 있다. 33 2016년 출수품과 2001년 출수품은 직경 2.3~2.4cm, 무게 3.3~3.8g 으로 거의 비슷하다. 다만 동전 뒷면의 만주어로 쓴 주조국鑄造局 표기 중 좌측의 문자는 모두 유사하나 우측의 문자는 세 점이 모두 다르다. 보통 주조국은 매우 다양하고, 같은 2001년 출수품도 서로 다르므로 유의미한 차이는 아니다. 인접해역의 서로 다른 두 침몰선에서 같은 청나라 동전이 출수될 가능성은 거의 없으므로 같은 선박 출수품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2) 총탄
2001년(좌)과 2016년(우) 출수 총탄(국립해양 문화재연구소, 『고승호 조사 약보고서』, 2016.)
후장식 소총의 실탄으로 총 알과 탄피가 결합된 완형의 총탄 이 5점, 탄피가 2점 출수되었다. 이 중 탄피 1점(16고승호-9)은 직 경이 1.5cm 이상으로 좀 크고 나 머지는 모두 비슷한 크기(길이 6.3cm 내외)이다. 2001년 고승호 발굴에서도 수 백점의 실탄이 출수되었으며, 길이 6.3~6.4cm 크기의 총탄이 많고, 그보다 짧은 약 4cm 내외의 총탄도 있다. 이번에 출수 된 것은 길이 6.3cm 내외의 실탄으로 2001년 출수품과 동일한 제품 이다. 길이 5.3cm 내외의 탄피에 끝이 둥근 탄두를 가졌으며, 공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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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인천광역시립박물관, 앞의 책, 2015, 92~93쪽.
때리는 탄피 하부 중앙에는 직경 0.5cm 정도의 원형부가 있다.
(3) 총검 후장식 소총에 결합하여 사용했던 총검의 일종으로 추정되는 철 제품이다. 2001년에도 동일한 종류의 유물 2점이 출수된 바 있다. 횡 단면은 장방형을 이루며 끝이 창이나 송곳처럼 뾰족하게 마무리되며, 총과 결합되는 부분에는 둥근 구멍이 있다. 오늘날의 총검처럼 날이 없기 때문에 검이라기보다는 찌르개에 가깝다. 길이는 40cm 내외, 무게는 530~600g이며, 결합 구멍이 있는 부분의 두께는 1.5~1.8cm 로 끝으로 가면서 얇아진다. 단조 방식으로 제작되어서인지 나무의 나이테와 같은 결이 켜켜이 확인된다.
2001년(위 2점), 2016년(아래 1점) 출수 총검(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고승호 조사 약보고서』, 2016.)
(4) 자기 세면대편 2015년 탐사 시 집중제토지점에서 출수된 세면대의 파편(15고승 호-1)이다. 2001년에도 여러 편의 세면대 파편이 인양되어 일부가 접 합되어 전시된 바 있다. 34 백자로 제작되었으며, 빙렬氷裂이 생기면서 색이 변색되었다. 2015년 출수품은 잔존길이 6cm이며, 인천시립박
34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인천광역시립박물관, 앞의 책, 2015년, 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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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보관품과 접합 여부를 확인하였으나 접합되지는 않았다. 서로 섞어 놓으면 구분하기 힘들 만큼 유사하여 제작 시점이나 제작지가 동일할 것으로 생각된다.
(5) 기타유물
고승호 출수 백자세면대편(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고승호 조사 약보고서』, 2016.)
이외에도 문이나 가구 등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철제 손잡이, 철제못, 철제 고리와 포탄, 원통형 청동제품, 석탄 등이 탐사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5) 소결 2015~2016년 인천 울도 해역 정밀탐사를 통해 확인된 근대 철선鐵船은 선체의 위치와 잔존상태, 출수유물 등으로 보아 2010년~2015년 ‘매 장물 발굴자’들이 발굴하였던 울도 서남방 2km 해역의 침몰 선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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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2002년 발굴된 바 있는 ‘고승호’로 확인되었다.
고승호는 1894년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청·일전쟁에서 일본 군함 나니와함에 의해 격침된 역사적인 선박으로 근대문화유산으로서 가 치가 충분하다. 하지만 고승호는 선체에 실려 있다고 알려진 은을 캐 내기 위한 발굴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노출되고 훼손되었다. 이는 아직까지 수중에 묻혀있는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하루속히 이런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관리할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 확인된 고승호는 인천해역이 전근대 주요 항로였을 뿐만 아니라 근·현대의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인천해역은 뱃길을 통해 개경과 서울(한양)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 시 지나야 했던 중요 항로였다. 본고에서는 인천해역에서 조사·발굴 되었던 두 척의 침몰선, 즉 영흥도선과 고승호, 그리고 태안해역에서 침몰했으나 강화도를 목적지로 했던 태안 마도3호선에 대해 살펴보 았다. 앞선 두 척의 배는 각각 바다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배와 가 장 최근의 배로서 그 역사적 의미가 가볍지 않다. 영흥도선은 지금까 지 공백이었던 통일신라시대 선박사와 해양교류사를 밝히는 실증적 인 자료이며, 고승호는 1894년 청·일전쟁을 실물로 보여주는 역사적 유적이다. 비록 영흥도선은 남아있는 선체가 부분적이며, 출수유물이 적어 선박의 구조나 출항지와 목적지, 화물 발송지에 대해 밝혀지지 않았지만 보다 세부적인 연구와 향후 발견될지 모르는 동시대 선박을 통해 보완될 수 있을 것이다. 고승호는 안타깝게도 문화유산 발굴조 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매장물 발굴’을 통해 확인되고 훼손되면서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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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있는 자료가 많지 않다. 근현대의 역사적 산물로서 침몰선에 대한 관심과 보호가 절실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마도3호선은 지금까지 발 굴된 선박 중 그 잔존상태가 가장 양호하여 선박의 전체 모습과, 지방 에서 수도인 강화도로 향했던 해상 물류 유통 양상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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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수중고고학적 궤적, 인천해역의 침몰선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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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제2장 수중고고학적 궤적, 인천해역의 침몰선 207
인천 해양교류의 발자취, 한나루와 제물포
김경화
인하대학교 사학과 강사
인천 해양교류의 발자취, 한나루와 제물포
선사시대 이래로 한반도는 해로를 통해 중국 및 일본과 활발하게 교류해 왔고, 이를 통해 경제적, 문화적 이득을 누릴 수 있었다. 특히 인천은 황해를 사이에 두고 중국 동남해안과 마주 보고 있어 일찍부 터 중국과 한반도내륙을 연결하는 해상교통로가 발전했다. 게다가 한 반도 동남쪽에 위치한 일본과의 관계까지 고려해 본다면, 인천은 가 히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의 교류와 교섭의 장이라 불릴 수 있다. 인천 은 동아시아의 정치, 경제, 문화의 교류가 활발하게 행해지던 열린 공 간이었다. 이 때문에 고대부터 근대까지 한반도는 인천을 중심으로 외부 세력과 다양한 교류 활동을 벌여왔다. 고대 인천의 해상교류는 주로 중국과의 관계를 통해 확인할 수 있 다. 한반도에서 중국에 이르는 해상교류는 두 가지 루트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서해안에서 북상하여 발해만을 거쳐 다시 중국 동
210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해안으로 남하하는 ‘황해연안항로’이며, 다른 하나는 곧바로 황해를 횡단하여 양자강 유역으로 들어가는 ‘황해중부횡단항로’이다. 인천은 고대 각국의 정치적 변동에 입각하여 두 가지 루트 중 한 가지를 선택 하여 해상교류에 활용하였다. 백제 개로왕蓋鹵王 대475년,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에 의해 한강 유역을 빼앗긴 뒤 백제 해양 교류의 교두보로서 인천의 위상은 다소 주춤한 듯 보였다. 하지만 19세기 두 차례의 양요를 거치면서 외부 세력이 한 반도를 침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다시금 인천을 눈여겨보기 시작했 다. 그리고 여기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나라는 일본이었다. 일본은 제 국주의 침탈의 목적으로 강화도조약에 입각하여 인천을 개항장으로 선정하였고, 적극적으로 인천을 활용하여 그 목적을 완수하고자 하였 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인천은 다른 지역보다 먼저 근대화를 경험하 였고, 이를 발판으로 근대 해양도시로의 발전을 도모하게 된다.
1. 고대 해양교류의 교두보, 한나루
서태평양 북서부에 위치한 황해는 중국 대륙과 한반도에 둘러싸여 있으며, 해역의 북쪽은 발해만과 구분되고, 남쪽으로는 제주도와 양자 강을 연결하는 선을 경계로 하고 있다. 그 크기는 남북 간 약 1,000km, 동서간 700km에, 수심은 80m 이하로 상당히 얕은 편이다. 또한 반도 와 만, 섬이 많아서 조류가 동해나 남해에 비해 상당히 강하며, 조수간 만의 차가 크고 해안을 따라 갯벌이 넓게 형성되어 있다. 이 같은 황해의 해양환경적 특징은 고대의 해양교류에 많은 영향 을 주었다. 특히 황해 연안에 자리한 세력들은 이 지역의 지리적 특성
제3장 인천 해양교류의 발자취, 한나루와 제물포 211
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로서, 당시 황해를 통한 해상교류 발전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1 그리고 이 과정에서 주목해 볼 수 있는 지역이 바로 인천이다. 황해를 품고 있는 인천은 그 지정학적 이점을 바탕으 로 광범위한 대외교역을 추진하여 고대 동아시아 해양교류의 교두보로 성장할 수 있었다.
1) 신분고국臣濆沽國과 ‘황해연안항로’
한반도 서해안 일대는 굴곡이 많아 육상교통이 불편한 반면, 도처 에 항만이 발달하여 이른 시기부터 해상교통이 가능하였다. 고대에 주로 활용된 해상항로는 ‘황해연안항로’이다. 황해연안항로는 중국 동해안변을 따라 북상하여 발해만을 거쳐서 압록강 입구에 이르고, 여기서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남행하여 낙랑, 대방군을 거쳐 경기만 을 지나 서남해지역에 이르며, 여기서 다시 방향을 바꾸어 남해안을 따라 동행하다가 대한해협을 건너 대마도對馬島를 거쳐 일본열도에 이 르는 항로를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장거리 연안항로는 연안을 따라 형성된 해상세력 의 도움 없이 운용되기 어렵다. 즉 연안항로에 필요한 항해술은 이른 바 ‘시인거리視認距里 연안항해’인데, 이는 시인거리 내에서 연안 해양 환경을 숙지한 지역의 해상세력이 중요하다. 특히 황해와 남해 연안 은 조류 변동이 심하고 항해의 방해 요소가 많기 때문에 각 지역의 기 항지를 확보한 해양세력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광활한 갯벌, 조수간만의 차이, 거센 조류 등의 해양학적 특징으로 말
1 이재준, 「백제의 해양 환경과 수군 운용」, 『한국고대사탐구』38, 2021, 47~50쪽.
212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미암아 황해 연안의 해상세력은 남북방향 연안항로의 필수 경유지로 성장할 수 밖에 없었다. 2 연안항로가 언제부터 동아시아 해양 교류의 주요 통로로 활용되었 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기원전 3세기 진시황秦始皇의 명으로 불로초 를 찾아 떠난 서복徐福 일행이 거쳐 간 항로이자, 고조선 준왕準王이 위 만衛滿에게 쫒겨 남으로 내려올 때 택한 길이 바로 이 황해연안항로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당시 고조선은 연안항로의 길목을 통제하여 중 국과 한반도 및 왜의 직접교류를 방해하는 한편 이들 사이의 중개무 역을 통해 큰 이득을 보기도 하였다. 이후 연안항로는 고조선을 멸망 시킨 중국의 군현세력이 중국대륙과 한반도 및 일본과 물류를 주도할 때 사용하였고, 낙랑樂浪, 대방군帶方郡이 축출된 이후에는 백제가 이 항로를 통해 동아시아 해양교류를 주도하였다. 3 한무제漢武帝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평양지역에 낙랑군을 설치하 였다. 그리고 후에 공손씨公孫氏가 낙랑의 남쪽에 추가로 대방군을 설 치 하였는데, 이 시기 한반도로 이주한 많은 중국인들이 동북아시아 국제 해상무역을 주도하였고, 이들을 통해 황해 연안에서 한반도 서 남해안을 거쳐 일본열도로 이어지는 황해연안항로가 활성화되었다.
낙랑, 대방군에서 해안을 따라 남으로 가다보면 한국韓國에 이르게 되고, 여기에서 다시 남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꺾어 항해해 가다보면 구 야한국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에서 바다를 건너면 대마도에 이른다. 4
2 임동민, 「백제 한성기 해양 네트워크 연구」,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2, 23~27쪽. 3 강봉룡, 「해양사의 관점에서 본 우리 역사」, 『한국 해상세력의 형성과 변천』, 2004, 22쪽.
4 『삼국지』 위서 권30 동이전 제30 왜조
제3장 인천 해양교류의 발자취, 한나루와 제물포 213
위 기록에 따르면 당시 교역선이 낙랑, 대방군→서해안남행→한국 韓國→서해안남행→남해안동행→구야한국→남해남행→대마도로 해안선 을 따라 연안항해를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이를 통해 한반 도 여러 세력이 중국 군현, 더 나아가 중국 본토와 연안항로를 통해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 그리고 이는 변진의 철이 중국 군현에 수출되었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6 당시 낙랑과 대방은 국제무역의 중심기지로, 이곳에서 활동한 중 국 상인들은 중국은 물론 삼한, 왜와도 활발한 교역을 벌였다. 즉 낙 랑, 대방군에 중국인들이 대거 정착함으로써 삼국의 황해무역은 더욱 활성화되었고, 결국 한반도 황해 연안의 정치 집단의 발전을 촉진시 키게 된 것이다. 7 3세기 한반도 황해 연안에서 주목되는 세력은 『삼국지』 한전에서 찾을 수 있다.
경초 연간237~239에 명제가 몰래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 사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대방·낙랑의) 두 군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여러 한국韓國의 신지에게는 읍군의 인수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읍장(의 벼슬)을 주었다. … 부종사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 국韓國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 하 였다. 그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면서 틀리게 설명하는 부분이
5 이도학, 「백제의 교역망과 그 체계의 변천」, 『한국학보』63, 1991, 69~70쪽. 6 『삼국지』 위서 권30 동이전 제30 한조 “(변진의) 나라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韓(한)·濊 (예)·倭人(왜인)들이 모두 와서 사 간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서 마치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으며, 또 (낙랑과 대방의) 두 군에도 공급하였다.” 7 권덕영, 「고대 동아시아의 황해와 황해무역」, 『사학연구』89, 2008, 9~12쪽.
214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있어, 신분고국이 격분하며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이때 (대 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 8 데, 준은 전사하였으나 두 군은 마침내 한韓을 멸하였다.
〔고이왕 13년(246)〕 가을 8월에 위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 삭방태수 왕준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왕이 빈틈을 타서 좌장 진 충을 보내 낙랑의 변경 주민을 습격하여 빼앗으니 유무가 듣고 노하 였다. 왕이 침략당할 것을 염려하여 그 주민들을 돌려주었다. 9
『삼국지三國志』에 의하면 조위曺魏 정시正始 연간인 246년 부종사部
從事 오림吳林이 대방군 관할 아래 있던 ‘진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군 에 통할하려 하자, 여기에 분노한 신분고국이 대방군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고, 이에 대방태수 궁준弓遵이 죽고, 한韓은 멸망에 이를 정도 의 큰 타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관
련 기록이 등장하는데, 고이왕 13년 유주자사幽州刺史, 낙랑태수樂浪太
守, 대방태수帶方太守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그 틈에 좌장左將 진충眞忠 보 내 낙랑의 변방 주민을 잡아 왔다고 한다. 위 두 기록은 『삼국사기』의 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이 『삼국지』에서는 대방태수 궁준으로 나와 있는 것을 빼고는 동일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기리영 전쟁을 주도한 ‘신지극한臣智激韓’의 정체에 대해 논란이 분분한데 최근에는 『삼국지』 판본 비교를 통해 마한 제국諸國 중 하나인 ‘신분고국’이라는
8 『삼국지』 위서 권30 동이전 제30 한조 9 『삼국사기』 권제24, 백제본기 제2 고이왕조
견해 10가 많은 학자의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10 윤용구, 「삼한의 대중교섭과 그 성격」, 『국사관논총』85, 1999.
제3장 인천 해양교류의 발자취, 한나루와 제물포 215
만일 기리영전투의 공격주체가 신분고국이라고 한다면, 이들은 왜 중국군현과의 전쟁을 벌이고자 하였을까. 이에 대해 당시 조위가 동 이경략東夷經略의 한 방편으로 전담 군현을 두고 이들에게 조공과 호시 互市 교역을 관장하도록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의 교역체제에 대 한 개편이 이루어졌고, 여기에 불만을 품은 마한 세력들이 기리영 전 쟁을 벌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주목된다. 그러면서 논자는 기리영 전 쟁을 벌인 세력들은 주로 수로 교통이 가능한 연안지역에 분포하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11 즉 기리영전투는 연안지역에 분포한 세력이 주로 참 여하였을 것이고 이러한 가정이 맞다고 하면, 서해 연안 지역에 위치한 미추홀집단이 어떠한 형태로든 이 전쟁에 관여했으리라 생각된다. 12 더욱이 최근에 ‘중국 동방언어학東方言語學’에서 제공한 고대 독음 을 활용하여 마한 50여국을 한자상의 고독음으로 전환한 결과 ‘신분 고국’을 미추홀 지역으로 비정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3 또한 신분고국이 백제국 바로 앞에 언급된 점도 신분고국이 북쪽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데, 즉 이곳이 대방, 낙랑군과의 관계에 영향을 많이 받 는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따라서 신분고국은 백제의 북쪽, 군의 남쪽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 며 좀 더 구체적으로는 강화 또는 최근 발굴조사에서 마한계 분구묘 및 4주식 주거지가 발견된 인천~김포지역이 주목된다. 특히 김포 운 양동 지역에는 2세기 중후반에 부여, 고구려, 진변한계의 철제 무기류 가 부장되기 시작하여 3세기 전반이 되면 진변한계 철제무기가 대량
11 윤용구, 「마한제국의 위치재론」, 『지역과 역사』, 2019, 21~27쪽. 12 김경화, 「인천-김포지역 분구묘와 마한」, 『한국학연구』65, 2022, 278~279쪽. 13 박순발, 「유물상으로 본 백제의 영역화 과정」, 『마한, 백제와 하나되다』, 2013, 126쪽.
216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으로 유입된 바 있는데, 이는 대규모 전쟁 수행과 관련된 것으로 자연 스럽게 신분고국의 가능성을 생각해 보게 한다. 14 그리고 만약 신분고 국이 인천~김포를 잇는 지역에서 발전한 정치체라고 한다면, 적어도 3세기 중반까지 이 지역은 황해연안항로의 해상 교두보로서 상당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본다. 기리영전투로 ‘마침내 한이 멸하였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신분고국은 상당한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 리고 이를 계기로 미추홀세력은 같은 계통인 고이왕에게 귀속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밖에 황해연안항로를 통한 교류에서 역시 주목해 볼 세력은 섬 을 기반으로 하는 해상세력이다. 특히 영종도는 조선시대까지 삼남지 방의 조운선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지점이자, 대부도, 영흥도 등을 지
나 올라오는 항로들의 합류점이다. 고려시대에도 영종도에 객관客官
이 설치되어 경기만을 남북으로 잇는 연안항로의 요충지 역할을 하였 다. 영종도에는 기원전 1세기부터 중국계 토기가 확인되고 있으며, 3 세기에 전성기를 맞아 취락, 정주성 패총, 분구묘 등이 발견되기도 했 다. 그중 운남동 유적에는 3세기 후반 이후부터 흑색마연토기, 삼족기 등 백제 한성기 토기가 발견되어 백제의 영향력 확산을 보여주고 있 으며, 운북동 유적에는 오수전, 철경동촉 등이 출토되어 중국, 낙랑과 의 교류 양상을 추정해 볼 수 있다. 15 즉 영종도에서 당시 해양교류를 기반으로 한 모종의 정치세력이 성장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지 만 인천~영종도 지역에 위치한 세력은 3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쇠퇴
14 김길식, 「2~3세기 한강 하류역 철제무기의 계통과 무기의 집중유입 배경」, 『백제문화』 50, 2014, 165~169쪽. 15 임동민, 2022, 앞의 논문, 45~50쪽.
제3장 인천 해양교류의 발자취, 한나루와 제물포 217
의 길을 걷게 되는데, 이는 백제의 영향력이 이들 지역에 확대되었음 을 의미한다.
2) 한나루16와 ‘황해중부횡단항로’ 4세기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에 의해 축출되면서 백제와 고구 려는 황해연안항로의 주도권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당시 두 나라는 평안도, 황해도 일대를 중심으로 군사적 대결을 벌였는데,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이 태자 근구수近仇首로 하여금 평양성 에 진군하여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시킨 사건을 계기로 황해연안항 로의 주도권은 백제가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근초고왕은 동 진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관계를 맺고 동진으로부터 ‘진동장군영낙 랑태수鎭東將軍領樂浪太守’를 제수받는다. 즉 이때부터 백제는 본격적으 로 중국과 통교하게 된 것이다. 당시 백제에서 동진東晉으로 가는 루트로 일단은 황해연안항로의 활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황해연안항로는 육상 지표물을 눈 으로 보면서 항해하는 항로이기에 연안지리정보의 숙지와 보급을 위 한 안전한 기항지寄港地의 확보가 필수적이며, 이는 연안지역의 정세변 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당시 백제의 사신이 황해연안항로를 통해 동진에 가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거쳐야 할 곳은 고구려 연안일 것이 다. 그런데 백제는 371년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죽음에 이르 게 한 바 있다. 따라서 적대국인 백제의 사신선이 고구려 연안의 기항
16 능허대 인근 나루터를 우리말로 배가 드나드는 큰 나루, 즉 한나루로 불렀다. 한자어로
218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대진大津’ 또는 ‘한진漢津’이라 하기도 한다.
지를 확보하여 장거리 연안을 항해하였을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
이에 새로운 항로개척이 필요하였을 것이고, 이때 활용된 것이 황 해중부횡단항로이다. 황해중부횡단항로는 말 그대로 황해 중부 해상 을 횡단하는 항로이다. 백제가 황해중부횡단항로를 통해 동진의 건 강까지 갔다면 한강 하구~황해연안~산동반도~강소성~양자강 하구에 이르는 경로를 거쳤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 18세기 『여지도서輿地圖書』와 19세기 『인천부 읍지仁川府邑誌』의 기록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대진大津 [도호부 서쪽 10리길 다소면에 있다. 삼국 대치 중 백제 가 동진에 사신을 보낸 길인데 고구려가 길을 막았으므로, (백제) 사 신이 중국에 가고자 할 때는 이곳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등주와 내주 에 이르렀다고 한다] 능허대 [도호부 서쪽 10리길 원우곳면 청량산 기슭에 있다 (그 모 습은) 해변으로 뻗어 치솟아 있는데, 높이가 100여척이며, 그 위는 30명 정도가 앉아서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18
능허대 [부에서 서쪽으로 10리에 있다. 해변에 있는데 그 높이가 100여척이며, 꼭대기에서 끝없이 펼쳐진 대양이 바라다 보이고, 아래 에는 큰 나루가 있다.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으로 나뉘어져 있을 때, 백제 의 조천로朝天路가 고구려에 의하여 막히게 되자 중국으로 들어가는 (백제의) 사신이 이곳에서부터 배를 띄워 등래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19
17 임동민, 앞의 논문, 2022, 84쪽. 18 『여지도서』 형승(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 『譯註 仁川府邑誌』 輿地圖書, 2004, 100쪽 재인용). 19 『인천부읍지』 형승(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 『역주 인천부읍지』 22쪽 재
인용)
제3장 인천 해양교류의 발자취, 한나루와 제물포 219
위 기록에 따르면 능허대 아래에 대진大津이 있어 백제의 사행로가 고구려에 의해 막히자 중국에 들어가는 사신들이 이곳에서 배를 띄워 등주와 내주로 건너갔다고 한다. 더욱이 인천과 산동반도 사이는 덕물 도덕적도가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이를 중계지로 하여 중국에 도달할
수 있다.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킬 때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
이 산동반도의 내주에서 덕물도를 거쳐 한반도에 도착하였다는 사실 도 주목된다. 즉 이 전승을 신빙한다면 능허대는 372년 이후 횡단항 로의 출항지로 볼 수 있다. 20 또한 이러한 사행 전승이 조선시대까지 지속되었던 이유 역시 능허대~등주로의 활용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능허대
「화도진도」에 나타난 능허대(국립중앙도서관)
220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고 분석한 견해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21
문학산
청량산
20 박광성, 「능허대에 대하여」, 『경기문화연구』4, 1974, 38쪽. 21 윤용구, 「인천 능허대와 중국사행로」, 『인하사학』10, 2003, 140~147쪽.
그런데 위 기록은 읍지에 실린 전승이라는 사료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고고학자료의 활용이 필요한 데, 그래서 한때 주목한 것이 문학산성이다. 그런데 문학산성은 대부 분 신라~통일신라 유물이 분포되어 있다. 향후 추가 조사에서 한성백 제기 유구가 확인될 수는 있겠으나 현재로서 4세기 이후 백제의 활용 여부가 명확하지 않다. 최근 문학산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구월동 및 남촌동 등지에서 삼국시대 주거지 및 분구묘가 발견된 바 있으나, 이 역시 앞 시기인 3~4세기 초반대의 것이므로 근초고왕 이후의 백제와 관련짓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물론 능허대~문학산성~광명 소하리 유적~안양천의 교통로를 한성백제기 대외교섭과 연결시킨 견해가 있 기는 하다. 22 그러나 문학산성의 편년이 불확실한데다가 더욱이 광명 소하리 유적의 경우 안양천을 따라 모락산성과 화성지역으로 연결되 는 남북방향 교통로의 거점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에 당시 백제 사신 의 출항지는 능허대 일대보다 영종도~김포일대와 화성 남양만 일대 에서 두드러진다는 반론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때문에 능허대와 관련 해서는 좀 더 신중한 해석이 필요해 보인다. 한편 당시 백제는 상당히 수준 높은 항해 기술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왜에서 송으로 갈 때) 백제를 경유하는 항로에서 (중국에) 조공할 수 있도록 배를 치장하게 하였다. 23
22 박종서, 「한강하류 고대 교통로에 대한 검토-경기 남서부와 인천지역의 최근 발굴자료 를 중심으로」, 『겨레문화연구』2, 2011, 9~13쪽. 23 『송서』 권917, 열전57, 왜국조
제3장 인천 해양교류의 발자취, 한나루와 제물포 221
478년 왜왕 무武의 상표문으로 당시 송나라로 갈 때 백제에 들러 선박을 꾸미고 수리한 ‘道遙百濟 裝治船舫’ 기록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방舫”은 2척의 배를 연결하고 그 위에 목판을 덧대어 마치 하나의 배 처럼 만든 것으로, 원양항해의 안정성과 함께 충분한 적재 중량을 확 보하고, 갑판 위에 누각 등의 항해에 필요한 시설물을 설치한 상당한 규모의 대형급 선박이다. 이를 보면 당시 백제는 대형선박을 만들 수 있는 선박건조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응신천황) 31년 … 신라의 조공 사신이 모두 무고武庫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신라 사신의 숙소에서 갑자기 불이 나 모아 놓은 배에까지 번져 많은 배가 타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인을 책망하였다. 신라 왕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여 즉시 뛰어난 장인匠人을 바쳤다. 이들이 저명부猪名部 등의 시조이다.
(효덕천황 백치 4년) 당에 파견하는 대사 소산상小山上 길사장주吉 士長舟 등 121명이 한 척의 배에 탔다. 또한 대산하 고전수근마려高田首
根麻呂 등 120명이 한 척의 배에 탔다.
위 기록에 의하면 300년응신 31 신라 사신의 숙소의 화재로 배가 불타자 신라왕이 뛰어난 장인을 바쳤고 그가 저명부猪名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 신라왕이 보낸 장인은 백제인으로 판단되며 26 그
24 『일본서기』 권10, 응신천황 25 『일본서기』 권25, 효덕천황 26 『신찬성씨록』에 이나베노오비토[爲奈部手]는 백제국 나카츠하테[中津波手]에서 나왔다 고 한다.
222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당시 백제의 뛰어난 조선술이 일본에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653년효덕
백치 4 왜는 당나라에 사신이나 유학생을 파견하였는데, 이때 백제선을 사용하였으며, 승선 인원은 120명이 넘었다. 이를 통해 볼 때 백제는 선박 건조 기술이 상당히 발전하였고 이것이 왜에까지 전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백제는 뛰어난 해상전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동성왕 10년) 위나라 군사가 쳐들어 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이 해 (북)위 오랑캐가 또다시 기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 격하여 그 지경地境에 들어가니, 모대牟大가 장군 사법명沙法名·찬수류 賛首流·해례곤解禮昆·목간나木干那를 파견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오랑캐
군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 건무 2년에 모대가 사 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 … 지난 경오년에는 험윤이 잘못 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 왔습니다. 신이 사법 명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케 하여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흉리匈梨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 다. 이 기회를 타서 쫓아가 베니 시체가 들을 붉게 했습니다. 이로 말 미암아 그 예기가 꺾이어 고래처럼 사납던 것이 그 흉포함을 감추었 습니다. 지금 천하가 조용해진 것은 실상 [사법]명 등의 꾀이오니 그 공훈을 찾아 마땅히 표창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사법명을 가행
정로장군假行征虜將軍 매라왕邁羅王으로, 찬수류를 가행안국장군假行安國 將軍 벽중왕辟中王으로, 해례곤을 가행무위장군假行武威將軍 불중후弗中侯
로 삼고, 목간나는 과거에 군공이 있는 데다 또 성문과 선박을 때려 부수었으므로 행광위장군行廣威將軍 면중후面中侯로 삼았습니다. 엎드려
27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26
제3장 인천 해양교류의 발자취, 한나루와 제물포 223
바라옵건데 천은을 베푸시어 특별히 관작을 제수하여 주십시오” 28
위 기록은 백제의 수군이 북위의 대규모 선단의 공격을 막아냈다 는 것이다. 공격의 주체나 전투 장소 등에 있어 다소 논란은 있지만 당시 백제와 북위 양국 간에 큰 전쟁이 있었고, 목간나가 “성문과 선 박을 때려 부수었다”는 것으로 보아 이 전쟁에서 백제 수군의 활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백제는 황해를 중심으로 한 해상강국으로 고대 한반도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황해 연안에 위치한 고대 인천이 상당한 역할을 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한편 6세기 신라 가 한강 하류지역에 진출에 성공하면서 대중국 해양진출의 발판을 마 련하게 된다. 당시 신라는 황해횡단항로를 이용하여 당과 직접적으로 연결하고자 했다. 물론 황해횡단항로는 연안항로에 비해 위험도가 높 았다. 하지만 북쪽에는 여전히 고구려가 존재했고, 게다가 가장 짧은 기간에 중국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이 항로를 포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에 그 출발점을 인천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게 되는 데 바로 당항성이다.
겨울 11월에 왕이 고구려와 화친을 맺었는데, 신라의 당항성을 빼앗아 (당나라로) 조공하러 가는 길을 막으려고 한 것이었다. 마침내 군사를 내어 (당항성을) 공격하니, 신라왕 덕만이 사신을 보내 당나라
28 『남제서』 권58, 열전39
224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그 말을 듣고 군사를 철수시켰다.
기록에 따르면 643년의자왕 3 백제가 고구려와 화친하고 신라의 당 항성을 빼앗아 신라 사신이 당나라로 가는 길을 막았다고 한다. 이는 황해횡단항로의 출발지로 더 이상 인천을 활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 미한다. 하지만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백제를 공격하는 대규모 군사작전에는 여전히 인천 연안지역이 적극 활용된다.
〔태종무열왕 7년(660)〕 3월에 당나라 고종이 좌무위대장군 소 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김인문을 부대총관으로 삼아, 좌 효위장군 유백영 등 수군과 육군 130,000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 게 하였다 … 소정방은 내주에서 출발하여, 많은 배들이 꼬리를 물고 1,000리를 이어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 (6월) 21일에 왕이 태자 법민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덕물도에서 소정방을 맞이 하게 하였다. 방이 법민에게 말하기를, “나는 7월 10일에 백제의 남쪽 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서 의자의 도성을 무찔러 깨뜨리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30
삼국 전쟁 당시 당나라 군대는 산동반도 내주(성산)를 출발하여 황 해를 횡단하여 덕물도(덕적도)에 잠시 진주하였다가 이를 발판으로 백제에 상륙한다. 결국 이 작전은 성공하여 황해횡단항로의 활용 가
29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제6 30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제5
제3장 인천 해양교류의 발자취, 한나루와 제물포 225
능성은 더 높아졌다. 하지만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 당나라가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부리면서 나당전쟁이 시작되었고, 이에 황해횡단항로는 또다시 경색되게 된다. 물론 기벌포 해전의 승 리로 신라는 황해 해상제해권을 장악하게 하였으나, 8세기까지 황해 의 군사적 긴장관계는 계속되었다. 31 이후 통일신라기에 주로 사용된 항로는 남양만에서 산동반도에 이 르거나 또는 영암방면에서 흑산도를 거쳐 명주에 이르는 황해사단항 로였다. 이후 후백제 견훤이 중국에 사신을 보낼 때도 주로 나주에서 배를 띄웠을 것이고, 고려의 경우 국도가 개성이었기 때문에 예성강 하구 벽란도를 통해 중국과 통교하였을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 니 자연히 인천에서 출발하여 중국 산동반도에 이르는 황해연안항로 는 백제시기와 비교해 봤을 때 현저하게 그 활용이 줄어들게 된다.
2. 근대 인천의 해양교류와 제물포
고려 말 몽골과의 항쟁을 주도해 온 삼별초의 몰락과 함께 고려 조 정은 삼별초에 동조한 서남해 지역의 해상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을 시행하였다. 이때 행해진 대표적인 것이 공도空島조치이다. 공도조 치는 도서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본토로 이주시키는 정책으로, 이로 인 해 섬을 근거지로 삼아오던 해상세력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쇠퇴하 게 된다. 이를 이어받은 조선왕조는 조정의 허락 없이 섬에 들어가면 처벌한다는 이전보다 훨씬 강도 높은 공도정책을 시행하였다. 여기에
31 강봉룡, 앞의 논문, 2004, 80~82쪽.
226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명나라가 해양 활동을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해금정책海禁政策이 더해지 면서 조선에서 해상세력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찾을 수 없게 된다. 32 사실 전통적인 화이체제華夷體制 하에서 조선시대의 황해는 원칙적 으로 해금지역에 속하며 선박의 통행이 불허되는 지역이다. 하지만 19세기 전반 이후 동아시아에 밀어닥친 서양제국주의의 개방 요구를 조선이라고 피할 수 없었다. 1816년부터 1866년까지 50년간 진행된 영국과 프랑스 함대의 반복적이고 모험적인 탐사의 결과, 서해안 및 인천해역의 해로가 밝혀지고, 염하鹽河와 한강 수로를 통해 수도 서울 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알려지게 된다. 33
1) 외세 침략과 인천 제물포의 개항 처음 조선의 해역에 관심을 가진 것은 영국이었다. 1816년 영국 의 윌리엄 에머스트William Amherst 사절단이 통상교섭을 위해 북경을 방문하였는데, 당시 이를 호위하던 영국 해군 맥스웰Murry Maxwell 대 령의 알세스트The Alceste 호와 홀Basil Hall 대령이 지휘하는 리라The Lyra 호가 처음으로 서해안 탐사를 나섰다. 그리고 이때 처음으로 중국 산 둥반도에서 동쪽으로 항해하여 조선의 서쪽 끝 지방에 이르는 해로를 확인하게 된다. 이후 1856년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함대사령관 해군 소장 게랭De Guerin을 파견하여 동해안의 영흥만에서부터 남해안을 돌 아 서해안 덕적군도에 이르는 조선의 전 해안을 탐사하여 해도를 작
성하였다. 그리고 이때 작성된 해도는 1866년 로즈Pierre Gustave Roze
32 강봉룡, 앞의 논문, 2004, 30~31쪽. 33 이영호, 『개항도시 제물포』, 민속원, 2017, 60~63쪽.
제3장 인천 해양교류의 발자취, 한나루와 제물포 227
제독이 강화도 침공을 위해 해로를 탐색할 때 활용된다. 34 1866년 발생한 프랑스 함대의 강화도 침략은 조선정부의 천주교 박 해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당시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에 대한 강경한 탄압 조치로 프랑스 신부 및 수천의 천주교도들을 처형 하였고, 이때 탈출한 리델Ridel신부가 텐진天津에 있던 로즈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리게 되면서 병인양요가 시작되었다. 로즈함대는 1866년 9월 18일부터 10월 3일까지 조선의 서해안 일대의 수로와 경비 상황을 점 검하는 1차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때 염하를 거쳐 한강을 거슬러 올라 서강까지 정찰을 하였으며, 인천 앞바다의 월미도를 로즈섬이라 명명하 기도 하였다. 그리고 10월 11일 6척의 함선과 1500명의 병력으로 2차 침략을 단행하는데, 10월 16일에는 우선적으로 강화부를 점령하여 한 강을 봉쇄하였고, 10월 26일에는 통진부의 문수산성을 점령한다. 하지 만 11월 10일 정족산성에서 양헌수 부대에 패한 뒤 다음 날 강화도에 서 철수하고 21일 마침내 조선을 떠난다. 35
한편 그보다 10년 전인 1846년 조선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金大建
이 프랑스 신부의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조선전도朝鮮全圖』를 작성 하여 프랑스에 전달한 바 있다. 당시 김대건은 페레올Ferreol 주교의 지 시로 프랑스 신부들의 입국을 위한 이른바 ‘김대건의 『조선전도』’를 작성하였는데, 당시 지도에는 조선의 행정구역 및 관청의 위치와 병 영, 수영, 그리고 도서와 해안선을 명확히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특 히 주목되는 것은 이때까지 탐사되지 못한 인천지역의 해역을 자세히
34 이영호, 앞의 책, 2017, 63~72쪽. 35 이영호, 「점령자의 시선과 주민의 반응」, 『근대제국과 만난 인천 : 충돌과 변화』, 글로벌 콘텐츠, 2013, 14쪽.
228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그려 놓았다는 점이다. 이로인해 프랑스는 이미 일찍부터 조선 침략 의 주요 통로로 강화도를 주목하였는데, 즉 강화도를 점령한 뒤 조선 과 교섭한다면 조선이 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36
이후 인천해역의 강화도 탐사는 독일 출신의 오페르트Ernest Jacob
Oppert에 의해 행해졌다. 그는 조선의 통상 개방을 목적으로 세 차례나 조선의 서해안을 탐사하였고, 마침내 이전까지 아무도 발견하지 못 한 한강 입구를 찾아내 이를 프랑스 로즈 제독에게 제공한다. 그리고 1866년 병인양요 당시 로즈제독은 당시 오페르트가 제공한 해도를 적극 활용하게 되는데, 즉 덕적군도를 거쳐 남양만으로 들어온 후, 월 미도와 작약도를 지나는 길목에 위치한 염하를 찾아내 이를 통해 한 강으로의 진입을 시도한 것이다. 당시 로즈가 작성한 지도를 보면 남 양만에서 경기만에 이르는 해역, 제물포와 강화도를 중심으로 한 인 천해역, 서울로 통하는 염하와 한강수로를 모두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이때부터 서양 제국은 한양으로 통하는 해로를 확보하게 되었고, 이 로써 덕적도에서 월미도, 영종도를 거쳐 강화도에 이르는 인천해역의 지리적 중요성이 외부세력에 처음으로 인식되게 된다. 당시 프랑스 함대는 인천해역 일대를 기록한 9장의 해도를 작성하여 출간하였는 데, 이를 통해 인천의 해도가 전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37 병인양요는 프랑스의 패배로 끝났지만 이후 강화도는 외세 침략의 시발점이 된다. 1866년 8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 호가 대동강에서 통상을 요구하다 방화되어 침몰한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 를 빌미로 1871년 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John Rodgers가 남양
36 이영호, 2017, 앞의 책, 73~77쪽. 37 이영호, 2017, 위의 책, 81~84쪽.
제3장 인천 해양교류의 발자취, 한나루와 제물포 229
만에 침투하는 이른바 신미양요가 시작된다. 미국함대는 5월 19일 수 로를 탐사하며 작약도, 월미도로 올라와 6월 10일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하고, 광성보에서 어재연魚在淵 부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승리한다. 하지만 전투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9월 3일 조선 통상의 목 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철수하였다. 38 한편 앞서 서구열강의 강화도 점령을 지켜본 일본도 프랑스 해군에 서 작성한 해도를 기초로 하여 인천해역과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서양함대의 방식을 모방하여 강화도 앞바다에 서 의도적으로 운요호雲揚號 사건을 일으킨다. 1875년 9월 20일부터 22 일까지 3일 동안 운요호의 도발을 계기로 강화만에서 조선의 수비대와 교전한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근대에 들어서 발생한 일 본의 최초 한반도 침략이다. 1868년 12월 메이지유신 이후 성립된 일 본의 신정부는 조선과 정식수교를 요청하면서 대마도주 명의의 서계를 작성하였는데, 이것이 종전의 서계격식 체계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 유로 접수가 거부되면서 조-일간의 외교문제가 발생하였다. 당시 일본 이 보낸 서계에는 황皇, 칙勅 등 당시 청나라만 쓸 수 있던 황제의 표현이 들어가 있었는데, 이것이 조선 조정에서 일본을 조선보다 상국으로 보 고자 하는 의도로 파악되면서 큰 논란이 된 것이다. 여기에 그 당시 조 선에 알려진 야도 준슈쿠八戶順叔의 정한론이 더 큰 불씨를 지피게 된다. 1867년 3월 홍콩에 체류 중이던 야도라는 일본인이 『중외신문中外新聞』 에 “조선 국왕이 5년에 1번씩 에도에 가서 대군大君을 알현하고, 공물을 바치는 것이 고례古例이나 조선 국왕이 이런 예를 폐한지 오래되므로 일 본이 군함 80척을 구입하고 발병發兵하여 조선국을 정토할 뜻을 가지고
38 이영호, 2013, 앞의 책, 14~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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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는 이른바 정한설을 주장하는 신문 기고를 내게 되고, 이에 중국 정부에서는 조선에 조심하라는 경고를 보낸 바 있었다. 이후 1875년 2 월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는 새로운 서계를 가지고 다시 조선을 찾았는 데, 이때의 서계 역시 조선의 요구대로 천황과 같은 단어는 빠졌으나, 여전히 ‘대일본’과 같은 용어가 사용되어 조선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 분한 것이었다. 이에 조선의 위정척사파들은 일본과의 통상 협정을 극 렬히 반대했으며, 당시 동래 부사는 일본 사신이 대례복(메이지 정부의 공식 관복으로 서양식 의복)을 입고 성문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기도 하였다. 이렇게 조선과의 교섭이 난항을 겪게 되자 모리야마는 일본에 조 선 압박을 위한 군함 파견을 요청하였고, 이에 같은 해 5월 운요호가 파견된다. 5월 25일 부산에 입항한 운요호는 부산 연해를 측량한다거 나 또는 훈련이라는 명목하에 크고 작은 포를 발사하며 시위에 나섰 고, 한때 영흥만, 영일만 일대에 상륙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원하는 목 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퇴각한다.
운요호(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대사료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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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운요호의 함장은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였는데, 1차 운요호 사건 이후 해군성에 조선 침략을 건의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일본 정 부에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재차 조선침략을 요청하였고, 결 국 해군대보海軍大輔 가와무라 스미요시川村純義로부터 운요호의 목적 지를 청나라의 잉커우로 변경한다는 허락을 받는다. 그리고 9월 20 일 운요호는 잉커우營口로 가는 도중 굳이 강화도 초지진 앞바다에 정 박하여 3일간 조선군과 전투를 벌인다. 당시 조선군의 피해는 사망자 35명, 포로 16명이었으나, 일본군은 단지 2명의 경상자만 냈을 뿐이 었다. 하지만 일본은 운요호사건을 빌미로 조선에 통상수교를 요구하 였고, 마침내 최초의 불평등 근대조약인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조약의 결과로 인천 제물포가 개항된다. 당시 조선과 일본 사이에 맺었던 강화도 조약의 내용의 일부를 수 록하면 다음과 같다.
제4관 조선국 부산의 초량항에는 일본 공관이 있고 다년간의 양 국 인민의 통상지이다. 금후 종전의 관례와 세견선 등의 일을 개혁하 고 이번에 새로 의결되는 조관에 준하여 무역사무를 처리할 것이다. 그리고 이 외에 조선국 정부는 제5관에 기재하는 2개의 항구를 개항 하고 일본인이 왕래 통상함을 허가한다. 우장소에서 지면을 임차하여 가옥을 조영하며 또한 소재의 조선인민의 가옥을 임차함은 각기 수의 에 맡긴다.
제5관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의 연해 중 통상에 편리한 항구 2개소를 택한 후 지명을 지정할 것이다. 개항기는 일본력 명치 9 년 2월 조선력 병자 2월부터 계산하여 20개월후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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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관 조선국의 연해 도서 암초는 종전에 탐험을 하지 않은 까닭 에 지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의 항해자가 자유로 해안을 측량함을 허 가하여 그 위치 심천을 명세히 하고 지도를 작성하여 양국 선객으로 하여금 위험을 피하고 평온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한다. 39
일본은 강화도조약의 제4관과 제5관을 통해 일본은 부산 이외의 2개의 항구를 더 개항하도록 했다. 즉 왜관이 있던 부산의 초량항을 즉각 통상무역항으로 개항하는 것 외에 20개월 이내 2개 항구를 추가 로 개항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일본이 자유로이 조선 연 해를 측량하여 지도를 작성할 수 있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때 일본은 동해안에서 군사적 요충지로 일찍이 알려져 있던 원산을 개항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서해안에서는 어디에 개항장을 설치할지 조사가 필 요하였다. 이에 일본은 1877년 9월부터 측량에 나서 목포, 옥구, 그 리고 남양만에서 인천부 제물포를 거쳐 월미도와 영종도를 조사한다. 이때 일본 대리공사代理公使 하나부사花房義質는 목포, 남양, 제물포, 강 화 모두 개항장으로 마땅치 않다고 평가하는데 일찍이 제물포에 대해 “모래밭이 멀리 바다 가운데까지 있고, 배의 통로는 극히 불편하여 양 항이 못 되는 것은 일찍이 모든 사람이 본 바와 같다. 오직 인천은 … 해안에 겨우 수십 채의 초가집이 있을 뿐이므로 일시적으로라도 개항 장으로 하는 데는 다소의 조영이 필요한 곳이다, 먼저 다른 곳을 탐색 하여 구한 후가 아니면 이곳의 개항은 논의하지 않는 쪽이 마땅하다 고 생각한다”고 평가하였다. 하지만 이후의 조사에서 금강연안, 아산 만 일대, 인천 연안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였는데, 이때 하나부사는 함
39 『조일수호조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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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두 척을 동원하여 제물포 일대를 상세히 측량하였고, 마침내 개항 지 후보로 인천을 추천하게 된다. 인천은 파도의 위험이 적고, 조류가 비교적 완만하며,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긴 해도 작은 선박은 접안이 가능하고, 부두 공사에 많은 비용이 들지 않는 점이 장점이었다. 그리 고 무엇보다 육로와 해로 모두 서울과 가까워 서해안에서는 인천만한 곳이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와 동시에 일본 해군은 제물포 일대의 지도를 작성하여 제물포 개항이 가능하다는 근거를 제시하였 고, 이에 1879년 6월 조선 정부에 인천개항을 요구한다. 당시 조선정 부는 인천이 서울에 가까운 ‘보장최요지지保障最要之地’이므로 결코 개 항할 수 없다고 거절한다. 이후 개항지와 개항시기를 둘러싼 기나긴 협상이 이어지게 되고, 결국 인천을 개항하기로 확정한다. 비록 조수 간만의 차가 크기는 하지만 월미도 앞의 정박지는 여러 섬에 둘러싸 여 풍랑이 크지 않고, 간조 시에도 깊은 수심을 유지하는 수로가 있으 며, 부두를 용이하게 축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서해안 최적의 개항장 으로 판단된 것이다. 40
40 이영호, 2017, 앞의 책, 96~103쪽.
234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개항 초기 제물포항 일대(인천광역시교육청화도진도서관)
2) 제물포 개항장 풍경 1883년 1월 1일 인천은 일본에 의해 부산항, 원산항에 이어 세 번 째로 개항하였고, 제물포에 항구와 조계지가 설치되었다. 이때부터 수 도 서울의 관문인 제물포는 국제 항구이자 외래 문물의 도입지, 외국 인 주거지로서 주변 다른 지역보다 빠른 근대화를 경험하게 된다. 한강 하류를 잇는 제물포는 내항과 외항을 합해 수면이 약 200만 평 이상이며, 용유, 무의, 자월, 영종, 강화, 영흥 등 대소 도서가 성벽 처럼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바람과 파도가 높지 않은 그야말로 겨울 에도 얼지 않는 천연의 항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조수간만의 차 가 커서 간조 때 해안 일대가 물이 빠져 작은 배도 하역이 불가능하다 는 불편함이 있었다. 이에 일본은 1884년과 1893년 두 차례에 걸쳐 인천항만 축조 공사를 벌였고, 이후 한반도의 실질적인 지배권을 장 악한 1906년에는 대대적인 축항 공사를 벌인다. 그리고 마침내 1911 년 사도沙島에서 지금의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아래 지역에 이르는 해 안 지대를 매립하여 4,500톤 급 선박 3척이 동시 접안할 수 있는 크 기의 제1선거船渠를 축조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7년 만인 1918년 10 월 완공하였다. 이어서 내항으로 토사가 밀려드는 것을 막고, 배가 안 전하게 정박하기 위한 월미도 제방축조 공사까지 완성되면서 인천항 은 명실상부 상업항으로서 기능을 갖게 된다. 제물포는 그 당시 국제적 무역항으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하게 되는데, 이는 수도 서울을 배후지로 하여 중부 조선의 방대한 상 권을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서쪽으로 서해를 사이에 두고 중국과 마주하고 있어, 대중국 무역의 대부분을 점할 수 있었다. 이에 1928 년도 말 무역 총액이 1억 4천만엔을 돌파하게 되는데, 이는 개항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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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비교해 봤을 때 상당한 수치라고 할 수 있다. 41 한편 개항과 더불어 당시 제물포에는 각국의 조계지租界地가 들어 서게 되는데, 1883년 일본전관조계日本專管租界를 시작으로, 1884년 청국 조계, 각국조계各國租界 등 3개의 조계가 설정된다. 이후 개항장에 는 해관, 감리서, 각국 영사관들이 속속 설치되었으며, 이와 발맞추어 외국인 상사, 서구식 주택, 공원, 호텔, 경인철도 등 각종 근대 문물과 사회시설이 처음으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청일조계 경계지 언덕길(인천광역시교육청화도진도서관)
당시 제물포 개항장에는 온갖 근대적 물질문명이 쏟아져 들어왔 고, 이를 누리기 위해 전국 각 지방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에 개항 장에는 여러 이질적인 문화가 융합되어 어우러졌으며, 이것들은 다시 인천을 거점으로 하여 서울을 비롯한 내륙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인 천은 서울과 가장 가까웠기에 다른 개항장보다 많은 서양인이 드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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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주 인천과 인천항』, 2009, 83쪽.
었고, 이 때문에 서양 문물을 가장 빠르게 접촉할 수 있었다. 이에 인 천은 근대 문명의 문화의 본거지로 변모하였다.
20세기 초의 제물포는 매우 흥미로운, 화제의 장이다. 1883년 개 항한 이 항구도시는 한강 어귀를 수비하기 위해 요새를 돌보는 군인 소작농이 사는 부근의 군대 마을과 강가 언덕 뒤편에 잘 보이지 않는 초라한 어촌의 군집 마을이 전부였으나, 16년이 지난 현재는 2만 명의 여러 국적 사람들이 사는, 급속히 성장하는 도시가 되었다. 제물포의 성장은 지속적이고 거의 놀랄만한 것이었다. 초기에는 이 항구의 영역 이 확장될 징후는 없었지만, 현재 이 항구의 경계는 처음 시작된 곳 근 처에 있는 해관에서부터 2마일까지다. 무역은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 다. 자산은 그 가치 면에서 여러 번 배가 되었다. 통신선이 곳곳으로 개 통되었다. 여전히 항구의 성장과 가능성이 대단하고도 강력하다.
위 기록은 제물포 내리교회의 담임목사인 조원시趙元時, George H.
Jones 목사가 1901년 영문잡지 Korea Review 창간호에 수록한 “The New Century” 라는 글의 한 대목이다. 그는 이 글에서 인천 제물포 개항장의 드라마틱한 발전상을 강조하고 있다. 당시 인천은 근대적 생활양식과 문화의 기항지이자 발신처였다. 무엇보다 그 당시 조선 사람들의 유교적 사유체제를 뒤흔드는 근대 적 세계관과 문명관의 변화를 일깨워 주었다. 위생과 보건에 대한 재 인식, 주거와 건축, 도시환경의 변화, 새로운 사회복지 시스템 등이 인천 개항장에서 시작되었고, 주변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또한 인천
42 윤인섭 외 역, 『외국인의 기록으로 보는 인천근대』,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2007, 5쪽 재인용.
제3장 인천 해양교류의 발자취, 한나루와 제물포 237
항을 통해 석유, 시계, 바늘 등 근대적 물품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조 선 사람들의 생활에 큰 변화가 찾아온다. 43 이처럼 인천은 제물포 개 항과 함께 새로운 근대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고, 그 명성은 오늘날까 지도 이어지게 된다. 황해는 수심이 얕고,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으로 이루어져 있는 자 연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에 황해 연안에 사는 사람들은 일찍부터 바다를 생활영역으로 삼았으며, 연안을 따라 먼 거리의 사람들과 접 촉하거나 또는 바다 멀리 진출하여 해양 반대편의 사람들과 교류하였 다. 이들은 황해를 중심으로 한반도와 중국 및 일본까지 하나로 연결 하는 해양교통망을 형성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하나의 공통된 문화권 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황해의 이러한 해양 지리적 특징은 해 양토착세력이 탄생할 수 있는 좋은 토대가 될 수 있었으니 44 바로 인 천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고대에는 미추홀세력이 황해를 중심으로 중국 및 그 주변지역과 활 발한 해양교류를 펼쳤다. 이들이 주로 사용한 항로는 황해 연안항로와 사단항로였다. 3세기 중반까지는 황해연안항로를 중심으로 인천~김포 일대에서 발전한 신분고국이 해상 교두보로서 상당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이후 백제가 이 지역을 관할하게 되면서 능허대를 기점 으로 하여 중국과 교류하였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이후 황해를 통한 해양교류의 중심지가 당항성이 위치한 경기도 화 성지역으로 바뀌게 되면서 인천의 해양교류는 위축되게 된다.
43 이희환, 「근대문화의 수용, 빛과 그림자」, 『인천시사편찬 50주년 기념, 인천광역시사_제 2권 역사학이 탐구한 인천』, 인천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23, 208쪽. 44 윤명철, 「황해문화권의 형성과 해양활동에 대한 연구」, 『선사와 고대』11, 1998, 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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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인천은 수많은 왕비를 배출한 인주이씨의 본거지, 즉 왕 실의 어향으로 상당한 위상을 갖추게 된다. 하지만 고려시대 해양활 동은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에 이전 시기만큼 활발해 보이지는 않는다. 몽골침략기 왕이 강화도로 몸을 피하게 되 면서 인천 연안이 군사적으로 주목을 받게 되지만 이후 몽골과의 항 쟁을 주도해 온 삼별초의 몰락과 함께 삼별초에 동조한 서남해지역 해상세력은 큰 타격을 받는다. 게다가 명나라의 해금정책의 영향이 조선에 파급되었고, 조선왕조는 쇄국정책을 실시하여 바다를 향해 빗 장을 걸어잠그는 반해양적 성향을 갖게 되면서 황해 연안에 자리 잡 은 인천 역시 쇠퇴의 길을 맞이한다. 인천이 다시 활기를 찾게 된 것은 근대 한반도에 드리워진 제국주의 세력의 침투에 따른 위기와 맞물려 있다. 19세기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과 일본의 야욕으로 한반도는 전에 없는 큰 위기를 맞게 된다. 당시 제국주의 열강들은 서해안지역, 특히 수도 서울에 이르는 입 구인 인천의 해안지역으로 밀려들었고, 이를 막으려는 조선의 병사 들과 군사적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883년 운요 호 사건을 계기로 호시탐탐 조선 진출을 노리던 일본에 의해 인천의 제물포가 개항된다. 이때를 시작으로 중국 및 서구 여러 나라와도 통 상조약이 체결되면서 제물포에는 여러 외국인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 에 개항장을 중심으로 외국인 거류지가 생겨났고, 해관, 감리서, 외국 인상사, 서구식주택, 공원, 호텔, 등대, 철도 등 각종 근대 문물과 사회 시설이 최초로 조성되었으며, 이를 통해 이전에는 경험 못한 근대 문 물들이 선보여졌다. 즉 황해를 통한 해상교통이 폐쇄된지 500년 만에 다시 인천이 국제적 도시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제3장 인천 해양교류의 발자취, 한나루와 제물포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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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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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인천 해양교류의 발자취, 한나루와 제물포 241
조선후기 인천 연안의 방어체제 구축과 변화
배성수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유물관리부 부장
조선후기 인천 연안의 방어체제 구축과 변화
황해도 옹진반도와 충청도 태안반도 사이 내륙으로 만입灣入된 지 역을 경기만이라 부른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인천 연안은 경기만 의 일부, 즉 해주반도에서 남양만 일대 해안과 도서 지역을 가리키는 곳으로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 초입에 위치하고 있어 서해 바다와 한 반도 중부 내륙을 이어주는 관문에 해당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고려 가 개성에 도읍을 정한 후부터 한양을 도읍으로 삼은 조선에 이르기 까지 도성으로 향하는 조운 수로의 길목에 해당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이곳은 예로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외침外
侵이 이어져 왔고 시대에 따라 위협을 가하는 상대가 달라지면서 방어 체제도 변해 왔다. 조선전기 인천의 방어체제는 왜구 방어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왜 구는 일본 큐슈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해적 세력으로 고려 충정왕忠定王
244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때부터 서남해안에 출몰하기 시작하여 조선 건국을 전후해서 경기만 일대와 한강, 예성강 유역까지 그 범위를 넓혀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천 연안의 피해는 커질 수밖에 없었고, 조선 정부는 대책을 마련해 야만 했다. 건국 초에는 경기도 수군을 좌도와 우도로 나누어 왜구에 대비했다. 남양부 화지량에 좌도 수군첨절제사영을 두고 삼남에서 남 양만을 거쳐 한강으로 들어오는 조운 수로를 지키게 했고, 교동현 응 암량鷹岩粱에는 우도 수군첨절제사영을 배치하여 황해도에서 강화도 북쪽 해안을 따라 도성으로 이어지는 물길을 방어하게 했다. 1 조선 건국 후 혼란을 거듭하던 지방 군사 제도는 1457년세조 3 각 고을을 주진主鎭-거진巨鎭-제진諸鎭으로 편성하는 진관鎭管체제로 확립 되었다. 진관체제의 골자는 전국의 행정조직인 읍邑을 군사조직인 진 鎭으로 편성하여 각 고을 수령에게 군사지휘관의 임무도 겸하게 하는 데 있었다. 평상시에는 거진에서 제진의 군병 조련을 관할하다가 유 사시가 되면 수비태세를 갖추게 하여 비록 한 곳의 진관이 함락되더 라도 주변 진관이 이어서 적병의 진출을 막도록 하는 방어 체제였다. 2 인천 지역의 진관 편성은 육군의 경우 수원 진관에 인천과 부평이, 강 화와 교동은 장단 진관에 속해 있었다. 수군의 경우 경기 좌도와 우도
로 분리되어 있던 것을 하나로 합쳐 남양 화지량에 수군절도사영水軍 節度使營을 주진으로 두고, 거진으로 교동 월곶에 수군첨절제사영水軍
僉節制使營이 있었다. 그 아래로 영종포(남양), 초지량(안산), 제물량(인 천), 정포(강화), 교동량(교동) 등 다섯 개의 제진이 속해 있었다.
1 임용한, 「14~15세기 교동의 군사적 기능과 그 변화」, 『인천학연구』 3, 인천대학교 인천학 연구원, 2003, 16~17쪽. 2 서태원, 「조선전기 유사시 지방군의 지휘체계」, 『사학연구』63, 한국사학회, 2001, 4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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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6세기 들어 왜구의 침입 양상은 서남해안 전역을 대상으로 소규모 병력이 일시적 약탈을 자행하던 것에서 남해안 주요 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공격을 감행하는 ‘왜변倭變’의 형태로 변해간 다. 기존의 진관체제로는 효과적인 대응이 어려웠고 조선 정부는 새 로운 대응책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1. 양난兩亂 시기 인천의 전황
1457년세조 3 확립된 진관체제는 전국을 일원적인 군사체제로 편 성한 위에 각 진을 독자적인 방어단위로 설정하여 지휘체계의 중복 과 혼란을 막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 지역에 집중되는 공격에 대 해서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16세기 들어 남해안에 집중되었 던 왜구의 공격에 효율적 대응이 힘든 결과를 가져왔다. 진관체제의 한 계는 1510년중종 5 부산포 일대에서 일어난 삼포왜변과 1544년중종 39 사량진왜변을 겪으면서 더욱 부각되었다. 삼포왜변 때는 제포진과 부 산포진이 왜구에 함락되자 중앙에서 황형黃衡과 유담년柳聃年을 각각 경상 좌·우 방어사로 임명하여 진압하게 했으며, 사량진왜변 당시에 는 중앙군이 투입되지 않은 데다 왜구의 공격을 받는 동안 주변 진관 의 조력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진관체제의 한계가 불거지자 1555년 명종 10 전라도 강진, 진도 일대에서 일어난 을묘왜변 때는 ‘제승방략’ 에 따라 방어체제를 갖추고 이준경李浚慶을 전라도 도순찰사로, 김경 석金景錫과 남치근南致勤을 각각 좌·우 방어사로 임명하여 전투를 지휘 하게 했다. 진관체제가 삼포왜란과 을묘왜변을 겪으며 한계를 드러내 자, 유사시 미리 정한 거점으로 각 도의 모든 군사가 집결하고 중앙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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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파견되는 순찰사의 지휘를 따르는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로 전환하 게 된 것이다. 그러나 1차 방어에 실패할 경우 사실상 추가 방어선 구 축이 어렵다는 치명적인 단점도 있었다. 실제 임진왜란 초기의 참패 는 제승방략의 이러한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었다. 3 1592년선조 25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지휘하는 일본 군 선발대가 부산진을 함락시키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조선 건 국 이후 큰 변란 없이 일상적인 군사훈련만 실시해 왔던 조선군은 전 국시대를 거치며 정예화된 병력을 갖추고 있던 일본군에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불과 20여 일만에 도성을 내주었고 임금 은 의주까지 피신해야 했으며, 전라도와 평안도 일부를 제외한 전 국 토가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제승방략 체제의 문제점은 인천에서 도 나타났는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정은 부임한지 한 달밖에 안 된 인천부사 이정호李廷虎를 무관인 이시언李時言으로 교체하였다. 하지 만 당시 일본군이 조령을 넘어 도성을 압박해오는 상황에서 이시언은 도원수 김명원金命元과 부원수 신각申恪의 부름을 받아 한강을 방어하 는 삼전도 중위장으로 출전했다. 4 인천부사의 직위에 있었기 때문에 개인의 자격으로 출전한 것이 아니라 인천부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방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일본군이 도성을 함락시키자, 이시언은 진을 양주로 옮겨 평양으로 향하는 길목인 장 수원長水院을 막아 지켰고, 해유령蟹踰嶺 전투에서는 부원수 신각을 도 와 일본군 70여명을 전사시키는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5 조정은 그의
3 『한국군사사』 8 조선후기 2, 육군본부, 2012, 2~3쪽. 4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주 인천부읍지仁川府邑誌』, (인천역사문화총서9), 2004, 59쪽. 5 『선조실록』 권26, 선조 25년 5월 20일.
제4장 조선후기 인천 연안의 방어체제 구축과 변화 247
전공을 인정하여 인천부사직을 유지한 채 황해도 좌방어사를 겸하게 했다. 6 그러나 평양마저 함락되면서 황주를 중심으로 산발적인 전투 를 치르고 있었다. 당시 이시언이 이끌던 병력은 1,800명으로 처음부 터 함께 했던 인천 병력이 주축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관체제의 편제대로라면 수원 진관에 속해있던 인천부의 병력은 부사 지휘 아래 인천에 진을 치고 일본군을 방어해야 했다. 그러나 16 세기 중엽을 거치며 제승방략 체제로 변화를 주었던 탓에 인천부사와 인천의 병력은 삼전도로 집결해서 일본군의 한강 도강을 저지하는 임 무를 수행했다. 정작 인천부에는 전란으로부터 부민을 보호해야 했던 수령도, 병력도 남아있지 않아 일본군의 공격에 42명의 사상자가 발 생하고 말았다.
7 부평의 상황도 이와 다를 바 없었다. 부평부사 남유南瑜
는 일본군이 접근하기도 전에 관곡을 배에 싣고 도주하여 ‘적을 공격 하고 싶어도 장수가 없다’는 청원에서 8 알 수 있듯이 별다른 전투 없 이 함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란의 피해는 인천이 부평보다 적었 는데 9 1592년 12월 부사로 부임한 김민선金敏善이 문학산성을 거점으 로 일본군에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10 문학산성은 수원 독성산성, 고양 행주산성과 함께 경기도 방어에 핵심이 되었던 곳으로 당시 조 선 정부는 험난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백성들이 스스로 지켜냈던
6 『선조실록』 권26, 선조 25년 5월 28일. 7 『선조실록』 권26, 선조 25년 5월 20일; 같은 책 권29, 선조 25년 8월 7일. 8 『선조실록』 권26, 선조 25년 5월 23일. 9 『선조실록』 권42, 선조 26년 9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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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여지도서』 「인천도호부」, 고적; 『선조실록』 권46, 선조 26년 12월 3일.
곳으로 평가했다. 11
문학산성 항공사진(인천시립박물관, 『문학산성정밀지표조사보고서』, 2007.)
일본군의 부산진 공격이 시작된 4월 14일, 조선 정부는 경기수사 변언수邊彦琇를 수성우위대장守城右衛大將으로 차출한 12 데 이어 4월 29 일에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아 도성을 지키게 했다. 도성 방어를 위해 경기 연해의 해로를 지키던 경기수사를 차출한 것이다. 5월 18 일 임진강 전투에서 조선군이 패한 뒤 원인을 분석하는 자리에서 윤 두수尹斗壽는 “어제 임진에서 얻은 지도를 보니 강화, 교동 등지의 뱃 길과 거리를 자세히 적어서 왜적에게 준 것이어서 매우 통분스럽다”고 하였고, 해로의 수비 상황을 묻는 선조에게 최흥원崔興源과 한준韓準은
11 『선조실록』 권46, 선조 26년 12월 3일; 같은 책 권53, 선조 27년 7월 17일; 같은 책 권 82, 선조 29년 11월 3일. 12 『선조수정실록』 권26, 선조 25년 4월 14일.
제4장 조선후기 인천 연안의 방어체제 구축과 변화 249
“임진강 전투에서 패한 뒤 경기수사가 1,500명의 군사를 데리고 강원 도로 향했다”고 보고했다. 이로 미루어 임진강 전투에 참전했던 경기 도 수군은 연해의 해로를 방어하면서 필요에 따라 장소를 이동해 가 며 전투에 투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경기도에서 전란 의 피해를 겪지 않았던 지역은 강화부와 교동군이 유일했다. 강화도 에는 경기도 의병장 우성전禹性傳과 전라도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전라 병사 최원崔遠의 군사가 들어와 웅거하고 있었고 1593년 2월 전라도 관찰사 권율이 주도한 행주산성 전투에서 지원군으로서 한강 하구에 진을 치고 배후를 담당하였다. 한편, 임진왜란이 끝나갈 무렵 강화도는 국가의 보장처保障處로 부 각되기 시작했다. 선조의 의주 파천이 가져온 문제점을 극복하고 고 려시대 몽골과 항전 때처럼 왕실이 장기간 웅거하면서 난을 이겨낼 수 있는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명의 원군 파병과 조선군의 반 격으로 전세가 소강상태에 있던 1596년선조 29 일본군의 움직임이 심 상치 않자, 조정에서 어가 파천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이에 지세가 험 하고 하삼도와의 교통이 가능한 강화도가 후보지로 결정되었고, 이듬 해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내전과 옹주의 피난이 거론되기도 했다. 또,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인조는 즉위 초 이괄의 난을 겪으면서 도성 을 버리고 공주로 몽진하는 고초를 겪어야 했는데 그 후 강화도와 남 한산성을 기각지세의 보장처로 정하고 우선 강화도 수비체제를 정비 하기 시작했다. 경기도 일원의 속오군束伍軍을 강화도에 배치시켜 군사 력을 증강시키고 곡식을 비축하여 군량을 확보하는 한편, 남양에 있 던 경기수영을 교동으로 옮겨 경기도 수군의 중심으로 삼았다. 특히 1627년인조 5 1월 후금의 침입 때 왕실과 조정이 강화도에서 약 3개월
250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문수산에서 바라본 강화도 갑곶나루 일대
동안 머물면서 난을 피하게 되는데, 인조는 도성으로 돌아온 직후 비 변사의 건의에 따라 강화에 유수와 낭청을 두고 유수부留守府로 승격 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강화도 방어 체제가 꾸준히 강화되었음에도 불구하 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왕실 일부가 피난해 있던 강화 도는 청淸에 함락되었다. 그 해 12월 13일 청의 군대가 국경을 침입하 여 안주를 통과했다는 보고에 따라 정부는 서둘러 황해도 방면의 방비 를 강화하였다. 이튿날 개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조정은 파천을 결정하고 일부 대신에게 종묘사직과 왕실 일부를 호종하여 강 화도로 들어가게 했다. 뒤를 이어 인조와 조정 대신들이 출발할 계획이 었는데 그날 오후 도성 근교 양철평良鐵坪에 청의 군대가 도달했다는 보 고를 받고 강화도가 아닌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결빙된 한강을 건넌 청 병이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목에 매복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 이었다. 이는 결국 왕실과 조정이 남한산성과 강화도, 둘로 갈라지는 결 과를 초래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병력이 분산되는 혼란을 가져왔다.
제4장 조선후기 인천 연안의 방어체제 구축과 변화 251
청의 군사 1만 6천명은 12월 30일 염하鹽河 건너 통진에 도착하 여 그대로 강화로 진격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13 그러나 한강하구로 부터 유빙遊氷이 떠내려오는 시기였기에 배를 이용한 도강이 어려웠 다. 청병은 문수산에 진을 치고 강화부를 정찰하는 한편, 도강에 필요 한 선박을 수집하거나 뗏목을 건조하면서 유빙이 풀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월 22일 날씨가 따뜻해져 유빙이 사라지자 통진 일대의 병 력을 갑곶에 집결시켜 염하를 건너기 시작했다. 조선군 수비대의 방 어망을 뚫고 강화도에 상륙한 청병은 불과 반나절만에 강화부를 함락 시켰고, 왕실 일부가 머물고 있는 강화부 관아를 포위하고 항복을 권 했다. 결국 봉림대군이 직접 항복 의사를 전달함으로써 강화도는 청 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고려 왕실이 천도한 이래 강화도가 적병에 게 함락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으며, 이는 하늘이 내린 요새로 불리 며 국가의 보장처로 인식되었던 강화도 방비문제가 다시 부각되는 사 건이었다.
1) 인천·부평의 수비체제
2. 17세기 인천 연안 수비체제의 핵심, 강화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 빼앗겼던 도성을 수복하고 전황이 소강상 태에 들어갈 무렵인 1594년선조 27 조정은 무너진 지방군 재건에 착수 했다. 이때 도입된 것이 속오군 편제에 기초한 영장제營將制였다. 영장 제는 포수, 살수, 사수 등 삼수병으로 구성된 속오군 창설과 시작을 같
13 유재성, 『한민족전쟁통사』 Ⅲ-조선시대, 국방군사연구소, 1996, 367~368쪽.
252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이 한다. 속오군 편제의 기본을 이루는 진영鎭營이 설치되고 최고 지휘 관으로 영장이 임명됨으로써 진관체제나 제승방략과 차별화되는 조 선후기 특유의 지방군제가 새롭게 나타난 것이다. 14 진관체제의 큰 틀 을 유지하면서 영장이 군사의 조련과 지휘를 맡게 했으며, 각 영의 군 사 조직은 영營-사司-초哨-기旗-대隊로 편제되어 있었다. 지방에 따라 달 랐지만 일반적으로 3대가 1기를, 3기가 1초, 5초가 1사, 5사가 1영을 구성 했고 하나의 영에 대략 2,500명의 속오군이 속해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인 1595년선조 28 경기도 속오군 체제는 도성 방어를 위해 조직된 훈련도감을 중영으로 하여 좌영에 용진, 우영 수원 독성禿城, 전영 용인 석성石城, 후영 에 파주산성 등 5영 체제로 이뤄져 있었다. 인천과 부평은 우영인 수원 독 성에 소속되었다. 15
영 소재지 용진 좌영
龍津 수원독성
우영
水原禿城 용인석성
전영
龍仁石城 파주산성
후영
坡州山城 한성
중영
漢城
『징비록』 「편오사목編伍事目」의 경기도 속오군 편제
속진 전사前司 이천, 좌사左司 여주, 중사中司 양근·지평, 우사右司 광주, 후사後司 양주·포천
수원, 남양, 인천, 부평, 양천, 통진, 김포, 안성
죽산, 음산, 진위, 안산, 양지, 용인, 과천
고양, 파주, 교하, 풍덕, 장단, 연천, 삭령, 영평, 개성부
훈련도감군
14 『한국군사사』 8 조선후기 2, 육군본부, 2012, 4~5쪽. 15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5, 190~191쪽.
제4장 조선후기 인천 연안의 방어체제 구축과 변화 253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중앙 군제는 5군영 체제로 확립되 었지만, 지방 군제는 여전히 자리 잡지 못한 채 변화를 거듭하고 있었 다. 그러는 가운데 경기도 각 고을의 지방군은 인조 때 도성 방어를 위 해 설치된 수어청과 총융청에 소속되었다. 인천은 진관체제 하에서 수 원 진관에 속해있던 부평과 함께 1624년인조 2 창설된 총융청에 배속 되었다.
16 총융청에 속한 인천부 병력은 장초군壯抄軍 125명과 둔장초屯
壯抄 14명, 표하군標下軍 9명 등 148명, 보인保人은 군수보軍需保 135명 와 둔군수보 27명을 합해 162명이었다. 17 그 중 장초군 등은 2년에 한
번 꼴로 상번上番하여 도성 방어를 담당했다. 부평부 병력은 장아병壯牙
兵과 표하군 등 모두 761명이었다. 또 강화도가 왕실의 보장처로 주목 받으면서 주변 고을의 군병을 강화에 속하게 하여 유사시 왕실과 조정 이 옮겨올 강화도 방비를 튼튼히 하자는 건의가 이어졌다. 정묘호란이 시작된 1627년인조 5 1월 비변사는 후금군을 피해 파천을 고심 중이던 인조에게 양천·김포·통진·풍덕·인천·부평의 속오군을 강화도에서 관 할케 하자는 건의를 올렸다. 18 그리고 1년 뒤에도 인천 등 다섯 고을의 군병을 강화도로 예속시키되 평시에는 각 고을 수령이 조련을 담당하 게 하자고 치계하여 왕의 재가를 받았다. 19 이처럼 전란이 이어지던 상 황에서 인천과 부평 등 주변 고을 군병은 일시적으로 강화도에 속했지
17 『여지도서』, 인천부, 군병軍兵. 18 『인조실록』 권15, 인조 5년 1월 25일. 19 『인조실록』 권18, 인조 6년 2월 24일.
254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만, 병자호란이 끝난 후에는 다시 총융청에 환속되었다.
16 최효식, 『조선시대 군제사연구』, 신서원, 1995, 81쪽.
군영 중영 전영 소재지 강화 속읍
『강도지(1696)』에 기록된 17세기말 진무영의 군사편제
좌영
부평
통진
풍덕 인천, 안산 김포, 양천, 금천 교하, 고양 배천 충청 12개 고을
우영 후영 별중영別中營 연안
해미
한편, 1684년숙종 10 강화도 방비를 위해 진무영을 창설하면서 강 화부의 진무 중영을 중심으로 전영에 부평부, 좌영 통진부, 우영 풍덕 부, 후영 연안부 등 다섯 개의 외영을 배치하고 충청도의 해미영을 별 중영으로 두었다. 인천부는 전영인 부평부의 속읍이었다. 20 그 후 별중 영이던 해미영을 다시 충청도로 이속시키면서 갑오개혁으로 혁파될 때까지 진무영은 5영 체제로 유지되었다. 인천부는 형식적으로 수원 진관에 속해있으면서 실제로는 진무영의 전영인 부평부의 속읍이었 고, 인천 속오군은 모두 진무영의 군병에 포함되었다. 18세기 중엽 인 천부 군병은 정군과 보인을 포함하여 모두 1,555명이었고, 그 중 진 무영에 속한 속오군은 578명으로 전체 군병의 37%에 달했다. 부평 부의 경우 3,136명의 군병과 보인 중 진무영 속오군은 780명으로 인 천의 비율보다 조금 적은 25%였다. 21 그 외 보인을 제외한 일부 병력 은 다른 고을과 마찬가지로 중앙 5군영에 상번하여 각각의 임무를 맡 아보았다.
20 이형상, 『강도지』, 속읍屬邑. 21 『여지도서』, 인천부, 군병.
제4장 조선후기 인천 연안의 방어체제 구축과 변화 255
2) 경기도 수군체제의 정비 고려 말부터 경기도 연해 지방과 도서 지역에 빈번했던 왜구의 출 몰은 15세기 말부터 크게 줄어들었다. 조선전기 정비된 수군체제는 해안에 상륙하여 약탈을 일삼았던 왜구를 해상에서 봉쇄하기 위한 것 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군영이 해안선을 따라 배치된 것이 특징이었 다. 왜구의 국지적인 도발이 줄어드는 대신 일본군의 전면적인 침략 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 조선의 수군제도에 큰 변화가 있 었다. 조선전기 수군체제가 각 군영이 맡고 있는 해역을 독자적으로 방어하는 거점 방어의 형태였다면, 임진왜란을 거치며 몇 개의 군영 이 연합하여 해상을 봉쇄하는 공간 방어로 변해갔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경상좌도, 경상우도, 전라좌도, 전라우도, 충청도 등 다섯 개 수 영을 총괄 지휘할 목적에서 창설된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에서 비롯된다. 22 전쟁이 끝난 후 조선 정부는 임시 기구였던 통제영을 상설 화시키는 한편 일본군의 침입로를 예측하여 기존 군진을 재배치하는 조치를 취한다. 17세기 초 통제영 체제의 정비는 일본 수군을 주적으 로 설정하고, 이들의 침략이 예상되는 서남해안의 해상 방어를 강화 하기 위한 것이었다. 23 통제영을 중심으로 서남해안의 방비체제가 어 느 정도 갖춰지자 조선 정부는 인천 연안의 수군진을 재배치하여 경 기 서해안 방어를 강화해 갔다. 이곳은 도성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고 왕실의 보장처로 부각되고 있던 강화도가 위치하여 그 중요성이 서남 해안에 못지않았다. 더욱이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따라 일본군의 침 략 가능성이 낮아지면서 서남해안의 전략적 가치는 줄어들고 있었던
22 송기중, 「17세기 수군방어체제의 개편」, 『조선시대사학보』 53, 2010, 9~21쪽.
256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23 송기중, 『조선 후기 수군 연구』, 역사비평사, 2019, 32~50쪽.
삼도통문三道統門이라 불리던 교동읍성 남문(국가유산청)
반면, 두 차례의 호란 이후 중국 국내 정세가 불안해지면서 인천 연안 의 군사적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커져가던 상황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갈 무렵인 1597년선조 30 3월 유성룡柳成龍은 남양 부 화량에 있던 경기수영을 강화나 교동 등지로 이속하자고 건의했 다. 24 화량은 도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외적이 해상을 통해 도성을 공격할 경우 적절한 대응이 어려운데 비해 한강 초입에 위치한 강화 와 교동은 도성 방어의 마지막 보루가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유 성룡의 건의는 인조가 즉위하고 나서야 비로소 실행에 옮겨진다. 정 묘호란이 끝나고 강화도 방비가 본격화 될 무렵인 1629년인조 7 조정 은 화량에 있던 경기수영을 교동으로 이설했다. 25 경기수영을 교동으 로 옮긴 것은 인조 즉위 초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을 겪으며 도성 방어
24 『선조실록』 권86, 선조 30년 3월 9일; 『연려실기술』 별집 권 8 「관직전고」 통어사. 25 『인조실록』 권20, 인조 7년 2월 13일. 이때 교동현도 도호부로 승격시켜 정3품의 경기 수사가 교동부사를 겸하게 했다.
제4장 조선후기 인천 연안의 방어체제 구축과 변화 257
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과 더불어 보장처였던 강화도의 외해外海를 방 어하기 위해서였다. 경기수영을 교동으로 옮긴 지 4년이 지난 1633 년에는 경기수사에게 삼도수군통어사를 겸하게 해서 충청과 황해도 수군까지 지휘하게 할 수 있게 했다. 26 왕실의 안전한 이동과 강화도 방비를 위해 지휘체계를 유기적이고 명확하게 하자는 지중추부사 정 응성鄭應聖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27 효종 때에는 경기도 연해를 따라 설치되어 있던 수군진을 재배치했다. 1653년효종 4 남양에 있던 영종 진을 강화도 아래 자연도로 옮겼고, 1656년에는 이미 혁파된 인천의 제물진과 안산 초지진을 강화도로 이설했다. 28 조선전기 인천 연안에 있던 수군진 중 화량진을 제외한 3곳의 진을 강화도와 그 주변으로 옮긴 것이다. 경기수군의 재편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 함락 원인을 분석하고 이 를 반영한 것이었다. 병자호란 당시 청 군대는 조선의 예상과 달리 염 하를 손쉽게 건너와 강화도를 함락시켰고, 강화로 향하는 길을 장악 하여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했다. 결국 남한산성에서 농성전 을 펼치던 인조가 청 황제 홍타이지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굴욕을 당 하며 두 달 가까이 지속된 병자호란이 끝났다. 조선 정부는 병자란의 패전 경험을 극복하기 위해 경기도 수군체제를 정비하여 통진과 강화
26 『만기요람』 군정편 4, 주사 총례. 27 『인조실록』 권27, 인조 10년 9월 19일.
도 사이를 흐르던 염하를 봉쇄하고자 했던 것이다.
28 초지진과 제물진은 1653년 영종진을 자연도로 이설할 당시 혁파되어 소속 수군을 신설
258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된 군영인 철곶으로 옮긴 상태였다(『비변사등록』 16책, 효종 4년 3월 3일).
3) 진무영과 강화도 방어체제29
임진왜란 때까지 강화도는 지리적인 조건으로 외적의 상륙이 쉽지 않다는 이유에서 별다른 방비가 없어도 지켜낼 수 있는 천험의 요새 라는 인식이 퍼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 함 락이 조선에 가져다 준 충격은 작지 않은 것이었다. 조선 정부는 강화 도 함락 원인을 분석하여 문제점을 찾아내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 련해 갔다. 우선 1653년효종 4 정포, 덕포, 용진 등 강화도 해안에 설 치된 수군진 네 곳의 지휘권을 경기수사로부터 강화유수에게로 옮겼 다. 30 이로 인해 강화도 방비를 유수留守 주도 하에 체계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또 1665년 현종 6에는 강화유수 서필원徐必遠이 강화도 군무軍務에 대해 건의하면서 월곶 첨사진 등 4개의 수군진을 병마진으 로 교체해야 한다고 하여 국왕의 윤허를 받았다. 31 이로써 강화도의 방 어체제는 수군체제에서 육군체제로 개편되었다. 이 조치는 유사시 강 화도로 접근하는 적선을 경기수영에 속한 수군진에서 방어하고, 이를 뚫고 상륙하는 적병은 강화도 해안에 설치된 육군진에서 막아내는 이 중 방어선이 갖춰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29 조선후기 강화도 관방체제에 대한 연구에는 박광성, 「병자난 후의 강화도 방비구축」, 『기전문화연구』 3, 1973; 이민웅, 「18세기 강화도 수비체제의 강화」, 『한국사론』 34, 1995; 반윤홍, 「비변사의 강도보장책 연구」, 『전통문화연구』 5, 1997; 송양섭, 「17세기 강화도 방어체제의 확림과 진무영의 창설」, 『한국사학보』 13, 2002; 배성수 「숙종초 강 화도 돈대의 축조와 그 의의」, 『조선시대사학보』 27, 2003; 이홍두, 「병자호란 전후 강 도의 진보설치와 관방체계의 확립」, 『인천학연구』 9, 2008; 송양섭, 「17세기 강화도 진 보의 운영과 둔전책의 추진」, 『한국사연구』 176, 2017 등이 있다. 30 이형상, 『강도지』상, 진보.
31 『현종개수실록』 권13, 현종 6년 9월 28일; 『비변사등록』 25책, 현종 6년 10월 30일 「강 도사목江都事目」.
제4장 조선후기 인천 연안의 방어체제 구축과 변화 259
병자호란을 전후하여 구축되기 시작한 강화도 관방체제는 숙종 때 가 되어서야 완성된다. 경기수사를 중심으로 해상 방어체제가 정비되 었다면, 육상 방어의 지휘권은 강화유수에게 있었다. 그러나 유수는 병 부兵符가 없어 병사를 일으킬 권한이 없었고, 강화부에 발병發兵의 권한 을 주어야 한다는 대신들의 건의가 이어졌다. 32 숙종은 1678년숙종 4 강 화유수 윤이제尹以濟에게 병부를 주어 진무사를 겸임하게 했고, 1684년 에는 진무사 사목事目을 마련하여 진무영을 창설했다. 33 진무영은 강화의 중영中營을 중심으로 인근 네 곳의 고을로 편성된 외영外營과 충청도 12 개 읍이 소속된 해미海美의 별중영別中營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강 화도에 상륙을 시도하는 적병을 막아내기 위해 해안을 따라 군진을 배 치하여 18세기 초 13진보 체제가 완성되었다. 한편, 숙종은 즉위 초부터 강화도 해안에 유사시를 대비한 방어시 설을 축조해갔다. 1679년숙종 5 병조판서 김석주의 건의로 강화도 해 안을 따라 모두 48개의 돈대를 쌓기 시작한 뒤, 다섯 개 돈대를 추가 로 축조하여 18세기 초가 되면 53개 돈대가 강화도를 빈틈없이 둘러 싸는 형태가 되었다. 34 돈대 축조가 완료되면서 해안으로 상륙하는 외 적에 대한 촘촘한 방어망 구성이 가능해졌다. 또 염하 연변 방비를 강 화하기 위해 1690년숙종 16 초지부터 옥포까지 17km에 걸친 외성을 축조했고, 1694년에는 염하 건너 문수산에 산성을 쌓았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가 문수산 정상에서 강화부를 정찰한 뒤 강화도를 함 락시켰던 사례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임금이 머물 강
33 『비변사등록』 38책, 숙종 10년 10월 20일. 34 배성수, 앞의 글, 2003, 157~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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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이형상, 『강도지』 상, 관원; 『숙종실록』 권7, 숙종 4년 10월 17일.
화행궁을 수어하기 위해 1711년숙종 37 강화부 관아만을 두르고 있던 강화부성을 남산까지 확대 개축했다.
1684년 경 『강도전도江都全圖』에 그려진 돈대와 진보(영남대학교박물관)
제4장 조선후기 인천 연안의 방어체제 구축과 변화 261
강화도를 보장처로 삼아야 한다는 인식은 임진왜란 때부터 계속되 어 왔으나, 본격적으로 관방체제가 구축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엽 부터다. 1665년현종 6 서필원의 「강도사목江都事目」으로 강화도 해상과 육상의 이중 방어선 개념이 형성되면서 경기수영과 강화유수(훗날 진 무영)가 각각의 지휘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18세기 초가 되면 진무영, 13진보, 53돈대로 이어지는 지휘 체계의 정비와 함께 강화부를 둘러싸 고 강화산성, 돈대, 외성, 문수산성 등 방비시설 축조가 마무리됨으로써 강화도 육상 방어체제는 비로소 완성을 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4) 영종진 이설과 방어영 승격35
병자호란 때처럼 강화 가는 길이 끊기거나 겨울철 한강 하구에서 떠 내려 오는 유빙으로 염하 수로가 막힐 경우를 대비해 어가의 우회로를 확보해야 했다. 당시 거론되었던 우회로는 도성에서 인천부와 자연도를 거쳐 강화도 남쪽 해안으로 상륙하는 길이었다. 36 1653년효종 4 영종진 을 자연도로 이설한 목적도 여기에 있었다. 인천부에서 강화도로 가려 면 뱃길로 월미도와 자연도를 거쳐야 하는데 월미도까지는 거리가 짧 아 조수와 상관없이 건너갈 수 있었지만, 여기부터는 물때를 기다려 이 동해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 적병의 추격을 막고 어가御駕를 수어守禦할
35 조선후기 강화도 관방체제에 대한 연구에는 박광성, 「병자난 후의 강화도 방비구축」, 『기전문화연구』 3, 1973; 이민웅, 「18세기 강화도 수비체제의 강화」, 『한국사론』 34, 1995; 반윤홍, 「비변사의 강도보장책 연구」, 『전통문화연구』 5, 1997; 송양섭, 「17세기 강화도 방어체제의 확림과 진무영의 창설」, 『한국사학보』 13, 2002; 배성수 「숙종초 강 화도 돈대의 축조와 그 의의」, 『조선시대사학보』 27, 2003; 이홍두, 「병자호란 전후 강 도의 진보설치와 관방체계의 확립」, 『인천학연구』 9, 2008; 송양섭, 「17세기 강화도 진 보의 운영과 둔전책의 추진」, 『한국사연구』 176, 2017 등이 있다. 36 송기중, 앞의 글, 2020, 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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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이 필요했기에 남양부에 있던 영종진을 자연도로 옮겨온 것이다. 아울러 물때를 기다리는 어가 행렬을 위해 월미도에 행궁을 설치하기 도 했다. 그와 함께 별도의 사목事目을 정해 백성을 모집, 자연도에 들어 와 살게 하여 병력을 확충했으며 37 수군 입역처入役處를 조정해서 백성들 의 부담을 줄이고 유사시 병력 동원의 효율성을 높였다. 그 외에도 군량 마련을 위해 통영의 미곡 2,000석을 분배받았고, 이를 보관하기 위해 10칸 규모의 창고를 만들었다. 38 조선 정부는 1681년숙종 7 영종진 수군 만호를 첨사로 승격시켜 어 영청 파총을 겸하게 했다. 39 경기수영 관할이던 영종진을 어영청의 지 휘 아래 둔 것은 영종진 첨사가 수군과 육군의 지휘관을 겸하게 되었 다는 것을 의미한다.
40 그 배경에는 영종진의 역할을 어가의 수어守禦
에 한정시키려는 조정의 의도가 있었다고 보인다. 유사시 경기수사의 통제를 받는 다른 수군진과 달리 영종진 병력은 어영대장 지휘 아래 영종도에 머무르는 것으로 조정되었다. 41 영종진 본연의 임무는 인천 부 성창포에서 월미도와 자연도를 거쳐 강화도로 들어가는 어가 행렬 의 안전한 보호에 있었기 때문이다. 수군 병력만으로 해상에서의 수 어는 가능했겠지만, 어가 행렬이 거쳐 가는 월미도, 자연도에서 물때 를 기다리는 동안 뒤를 쫒는 적병과의 육상 전투도 대비해야만 했다. 어가 행렬을 육상과 해상에서 수어하기 위해서 영종진 첨사가 어영청
37 『승정원일기』 140책, 효종 7년 6월 28일. 38 송기중, 앞의 글, 2020, 101쪽.
40 송기중, 앞의 글, 2020, 103~107쪽.
39 『여지도서』 「영종방영도지永宗防營圖誌」 건치연혁.
41 『어영청등록』 6책, 숙종 8년 6월 14일 「자연도절목」.
제4장 조선후기 인천 연안의 방어체제 구축과 변화 263
파총을 겸하게 했고, 그 휘하에 육군 병력도 배치했던 것이다. 영종진을 첨사영으로 승격시키고 어영청의 지휘 아래 두는 조치를 취한 지 9년 만인 1690년숙종 16 조선 정부는 영종진을 다시 방어영으 로 승격시킨다. 42 그와 함께 영종 첨사를 영종방어사로 높이고 어영청 천총을 겸하게 했다. 이제 영종방어영은 경기수사의 통제를 받지 않 고 오로지 어영대장의 지휘만 받게 되었다. 18세기 중엽 영종방어영 에는 수군 279명과 군선 9척(방패선 2척·병선 2척·거도선 1척·급수
42 『비변사등록』 44책, 숙종 16년 10월 12일. 43 『여지도서』 「영종방영도지」 수륙군병; 선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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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4척), 그리고 육군 1,088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1760년 경 『여지도서』 「영종방영도지永宗防營圖誌」(한국교회사연구소)
3. 18세기 도성 방어체제 확립과 강화도의 전략적 개념 변화
1) 도성 수비론과 4도都 체제 확립
17세기 국가 방어체제에서 강화도가 갖는 전략적 중요성은 ‘보장중지 保障重地’라는 단어로 귀결된다. 임진왜란 이후 몇 차례 국난을 겪으며 도 성 방어에 자신감을 상실했던 조선은 유사시 험지에 웅거하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고자 했고, 그렇게 선택된 곳이 남한산성 과 강화도였다. 특히 강화도는 넓게 펼쳐진 갯벌과 경강 수로의 거센 물 살로 적선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 천혜의 요소로 인식되었다. 그 럼에도 병자호란 때 홍이포를 앞세운 청병淸兵에 함락되었던 경험은 훗 날 진무영을 중심으로 수비체제가 개편되고, 방어시설이 갖추어지는 계 기가 되었다. 특히 숙종 즉위를 전후하여 청국에서 발생한 삼번三藩의 난이 조선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방비를 더욱 튼튼히 해야 한다는 조정 중신들의 건의가 이어졌다. 그에 따라 1679년숙종 5 강화도 해안에 48 개의 돈대를 축조하여 바다를 통한 외적의 접근을 막고자 했으며, 청의 공격이 있었던 염하 변으로 적병의 상륙을 봉쇄하기 위해 외성과 문수 산성을 쌓았다. 보장처로 중시되었던 강화도의 전략적 위상에 변화의 조짐이 보 이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들어 도성 수비론이 부각되면서부터다. 44 1703년숙종 29 북한산에 성을 쌓고 또 다른 보장처로 삼아야 한다는
44 18세기 도성 수비론의 대두에 대해서는 이근호, 「영조대 도성 수비 논란의 검토」, 『향토 서울』83호,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2013; 노영구, 「17~18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조선의 도성 수비체제 이해의 동향」, 『조선시대사학보』71, 조선시대사학회, 201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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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에 대해 유사시 임금이 보장처에 들어가기보다 도성에 남아 주민 과 함께 국난을 극복해야 한다는 반대 의견이 이어졌다. 45 이듬해에는 그간 군비를 확대해 왔던 5군영의 무질서한 편제를 정비했다. 훈련도 감을 중앙에 두고 금위영과 어영청을 양 날개로 삼아 도성을 수비하 는 ‘삼군문三軍門 도성 방어체제’가 갖추어졌고, 46 북한산성과 도성 성 곽 등 방어시설도 축조했다. 이는 국가 방어체제의 중심축이 남한산 성과 강화도로 대표되는 보장처에서 도성으로 옮겨지고 있던 상황을 말해준다. 숙종 집권 후기 정비되기 시작한 도성 방어체제는 영조 때인 1747 년영조 23 어영대장 구성임具聖任에게 「수성절목守城節目」을 만들게 하 고, 47 1751년영조 27 이를 책자로 엮은 『수성윤음守城綸音』을 도성 주민 에게 보급하면서 48 완성되었다. 삼군문이 도성 방어를 전담하고, 도성 민을 각 군문에 소속시켜 유사시 모든 주민이 군영의 통제를 받으며 수비한다는 계획이었다. 즉위 4년 만에 이인좌의 난을 겪어야 했던 영 조는 집권 초기부터 도성 수비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있었다. 1726년 영조 2 대신들과 인견하는 자리에서 ‘국가가 도성을 지키기 위해 물러 나지 않겠다는 뜻을 보이면, 도성민이 놀라고 소동하는 혼란이 없을 것’이라며 49 자신의 뜻을 피력했다. 이인좌의 난이 발생하자 ‘도성에 종사宗社와 백성이 있고, 공경사서公卿士庶가 모두 부모처자를 두고 있
45 『숙종실록』 권38, 숙종 29년 3월 15일. 46 이태진,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연구원, 1985, 225~232쪽. 47 『영조실록』 권65, 영조 23년 2월 5일. 48 『영조실록』 권74, 영조 27년 9월 11일. 49 『승정원일기』 623책, 영조 2년 9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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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니 조정에서 굳게 지키겠다는 뜻을 보인다면 백성은 죽음을 무릅쓰 고 지켜낼 것’이라고도 50 했다. 이와 같은 영조의 도성 수비 의지가 드
수비에 대한 불안감이 표출되고 있 었다. 이는 도성 방어체제를 만들어 갔던 숙종이나 도성 수비에 대해 확 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던 영조의 입 장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도 성 수비를 강화하면서도 만일을 대 비해 강화도를 보장처로 방비하겠다
러난 것이 「수성절목」과 『수성윤음』이다. 18세기 들어 수도 방어의 축이 보장처에서 도성 중심으로 전환되어 갔지만, 여전히 조정 일부에서 도성
는 전략은 영조가 『수성윤음』을 반포 했던 18세기 중엽까지 이어지고 있
『수성윤음守城綸音』1751년,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었다. 1684년숙종 10 진무영 설치로 완비된 강화도 수비체제는 다섯 곳의 외영 중 해미의 별중영別中營이 제외되었을 뿐, 큰 변화 없이 유지 되고 있었다. 유사시 강화도에 들어와 진무사의 지휘를 따르도록 규 정했던 외영 체제에 변함이 없었다는 것은 보장처로서 강화도의 전략 적 개념이 지속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진무영의 지휘체계와 표하군 標下軍, 별군관別軍官 등으로 구성된 1만여 명의 군액軍額, 그리고 비상시 를 대비해서 강화부에 보관해야 했던 비축미도 가급적 원액대로 유지 시키려 했다.
50 『영조실록』 권16, 영조 4년 3월 14일.
제4장 조선후기 인천 연안의 방어체제 구축과 변화 267
군영
중영中營
소재지
강화부
영장
진무중군
속읍
『강화부지(1783)』에 기록된 18세기말 진무영의 군사편제
전영前營
좌영左營
우영右營
부평부
통진부
풍덕부
부평부사
통진부사
풍덕부사
인천부
김포군
후영後營
연안부 연안부사 배천군
그럼에도 『수성윤음』이 반포된 후부터 강화도 방비에 대한 조정의 관심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1726년영조 2 작성돈대鵲城墩臺 축조를 마 지막으로 더 이상 돈대를 쌓지 않았으며 무너진 성벽과 문루 등에 대 한 보수만 간간이 이루어졌을 뿐, 이전처럼 대규모 공역이 투입되는 축 성 공사는 실시되지 않았다. 정조 즉위 후 도성 수비체제에 큰 변화가 있었다. 1793년정조 17 정조는 수원부를 유수부로 승격시키고 유수가 장용외사壯勇外使를 겸하게 하여 도성의 남쪽 길목을 튼튼히 했다. 51 2년 뒤에는 광주부를 다시 유수부로 승격시키고, 도성 내에 있던 수어경청 守禦京廳을 혁파하여 광주유수를 수어사로 삼았다. 52 이로써 외곽에서 도 성으로 들어오는 사방의 길목 중 북쪽은 개성유수부의 관리영管理營이, 서쪽 해문은 강화유수부의 진무영과 삼도수군통어영이, 동쪽과 남쪽 은 수원유수부 장용외영과 광주 수어청이 방비를 책임지는 4도都 체제 가 확립되었다. 53 이처럼 18세기 도성 수비론이 조야의 중론으로 자리
51 『정조실록』 권37, 정조 17년 1월 12일. 52 『정조실록』 권43, 정조 19년 8월 18일. 53 4도 체제에 대한 연구로 배우성, 「정조의 유수부 경영과 화성인식」, 『한국사연구』 127, 한국사연구 회, 2004; 이방섭, 「정조의 장용영 운영과 정치적 구상」, 『조선시대사학보』 53, 조선시대사학회, 2010; 정두영, 「정조대 도성방어론과 강화유수부」, 『서울학연구』 51,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2013; 이왕무, 「조선후기 수도권 방위체제의 정비와 군사도시화 경향」, 『군사』 90, 2014; 신영문, 「조선후기 도성방어체계의 추이와 독산성의 위상변화」, 『백산학보』 119, 백산학회, 202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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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게 되면서 강화도의 전략적 개념은 유사시 왕실과 조정이 들어가 국 난을 극복하는 보장처에서 도성의 외곽을 방어하는 4도 중 한 곳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2) 황당선의 출몰과 해방체제로의 전환 전쟁이 끝나고 반세기가 흐른 17세기 말, 조선의 사회와 경제는 점차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인천 연안의 도서 지역에 서도 감지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조선 정부가 도서島嶼 정책을 ‘공 도空島’에서 ‘입도入島’로 전환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54 자연도 등 여 러 섬에 설치했던 국영 목장을 폐지하고 여기에 백성을 모아 경작하 게 했으며, 이들을 섬에 설치한 수군진의 병력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인천 연안 방어체제도 다시 정비되어 갔다. 1665년현종 6 반포된 「강도사목」으로 강화도 해안에는 강화유수가 지휘하는 육군이 포진하고, 주변 해역은 경기수사가 통솔하는 수군이 방어하는 개념으 로 변화되었다. 17세기 말 경기수영에는 정포(강화), 철곶(강화), 덕포 (통진), 영종(자연도), 그리고 화량(남양)이 속해 있었다. 화량진을 제 외하고 교동의 수영을 포함해서 다섯 개 군진이 강화도와 그 인근 지 역에 위치하고 있어 당시 경기 수군의 주 임무가 강화도 주변 해역의 방어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경기 수군이 강화도 해상 방어 에 주력하다 보니 먼 바다에서 도성과 강화도로 들어오는 해로의 방 비는 상대적으로 느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황당선荒唐船의 출몰이 늘어나고 그로 인한 피해가
54 임학성, 「조선 후기 경기 도서지역의 수군진 설치와 주민 생활 양태 – 수군방어영이 설 치된 영종도의 호적 자료 분석 사례-」, 『역사민속학』 57, 2019, 29~38쪽.
제4장 조선후기 인천 연안의 방어체제 구축과 변화 269
확산되자 강화도 외곽 해역에 대한 경계 및 방어 필요성이 강조되었 다. 55 그리고 인천 연안 여러 섬에 군진을 설치하여 해상 방어를 강화 하자는 신료들의 건의가 이어졌다. 이러한 건의는 18세기 초가 되어 서야 정책에 반영되어 1708년숙종 34 덕적도와 대부도에 수군진을 설 치하였다. 56 덕적도는 1652년효종 3 강화도의 외곽 방어를 위해 둔전을 설치하고 만호를 두어 어영청에서 관할하고 있었는데 숙종 때 이를 수군진으로 개편한 것이다. 57 1712년숙종 38 강화도 북쪽 철곶진을 주 문도로 옮겨 첨사가 다스리게 했고, 1717년에는 정포진마저 장봉도 로 이설시켰다. 58 18세기 초 경기수영에 속한 수군진은 주문, 장봉, 덕 적, 대부, 화량, 덕포 등 여섯 개였다. 18세기 경기도 수군의 지휘 체계는 주변 상황에 따라 여러 차례 변 동이 있었다. 경기수영 휘하의 대부진은 적선의 제어에 효율적이지 못 하다는 이유에서 1723년경종 3 경에 혁파되었다. 59 당시 덕적진도 대부 진과 함께 혁파되었으나 1740년영조 16 「덕적진설치절목德積鎭設置節目」 에 따라 독진으로 복설되었다. 60 한편, 영종방어영으로 승격한지 25년 이 지난 1715년숙종 41 조정은 영종진의 관할을 어영청에서 경기수영 으로 다시 옮겼다. 61 이 조치는 18세기 초 도성방어론이 대두되면서 보
55 송기중, 앞의 글, 2010, 21~31쪽. 56 『비변사등록』 60책, 숙종 34년 12월 29일. 57 『대동지지』 권4, 덕적도진. 58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 「병전」 외관직. 59 『비변사등록』 104책, 영조 14년 11월 2일. 60 『비변사등록』 107책, 영조 16년 7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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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어영청영종진등록』, 무인년영조34, 7월 28일.
18세기 인천 연안 방어체제
장처로서 강화도의 전략적 가치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어가의 우회로 확보보다는 황당선 출몰에 대한 대응과 도성으로 향하는 해로 방어가 중시되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40여 년 뒤인 1758년영조 34 조선 정부는 「영종독진절목永宗獨鎭節目」을 반포하고 영종방어영의 지휘 권을 다시 어영청으로 옮겨왔다. 62 이로써 유사시 어가의 우회로 확보
62 『비변사등록』 135책, 영조 34년 10월 11일.
라는 영종진 본연의 임무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제4장 조선후기 인천 연안의 방어체제 구축과 변화 271
정조 즉위 후 경기수영의 지휘체계에 다시 한번 변화가 일어난다.
1778년정조 2 번고어사反庫御史로 강화도를 심찰하고 돌아온 심염조沈念祖
는 교동에 있던 삼도수군통어영을 강화도로 옮겨 강화유수가 관할하 게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63 교동도의 통어영을 강화도로 옮기자는 의 견은 1704년숙종 30 이인엽李寅燁이 처음 주장한 이래, 김진규金鎭圭, 유 척기俞拓基 등 주로 강화유수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64 그들의 주장은 강
화도 외해를 관할하는 통어영과 어가의 우회로를 통제했던 영종방어 영을 강화유수가 총괄하게 함으로써 보장처였던 강화도를 체계적으로 방어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에 비해 심염조의 건의는 강화도 에는 수군과 전선戰船이 없어 연해를 거슬러 올라오는 선박을 검찰할 수 없기 때문에 통어영을 강화도로 이속해서 도성의 해문 방비를 튼튼 히 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조정의 의견이 갈리면서 논란이 지속되었고, 결국 심염 조의 건의가 채택되어 1779년정조 3 교동도의 삼도수군통어영이 강화 유수부에 합쳐졌다. 65 통어영이 있던 교동은 강화도의 서북쪽에 위치 하여 양서兩西의 물길은 제어할 수 있겠지만, 삼남 지방에서 염하를 따 라 도성으로 이어지는 동쪽 수로는 방비하기 어렵다는 순심사 구선복 具善復의 보고에 따른 조치였다. 이 조치로 이미 진무사를 겸하고 있던 강화유수가 삼도수군통어사까지 겸임했고, 영종과 교동을 통어영의 좌·우 방어영防禦營으로 삼았다. 동헌 격인 대변청大變廳은 강화도 북쪽 해안인 송정포에 두었고, 동쪽 제물진과 용진진 사이를 조련장으로
63 『정조실록』 권5, 정조 2년 2월 22일. 64 정두영, 앞의 글, 2013, 34~36쪽. 65 『정조실록』 권7, 정조 3년 3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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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아 매년 봄, 가을로 습조習操를 실시했다. 또 강화도 서남쪽의 말질 도, 볼음도, 장봉도에 요망군을 배치하여 해상 경계를 강화했다. 66 통어 영이 있던 교동도를 우방영右防營으로, 영종도를 좌방영左防營으로 삼은 것은 도성으로 향하는 강화도 동쪽과 북쪽의 두 물길을 모두 제어하 기 위해서였다. 이로써 강화도는 보장처라는 기존의 전략 개념에 도 성의 해문 방비처라는 새로운 개념이 더해졌다. 그러나 강화도로 이 속된 통어영은 불과 10년 만에 다시 교동으로 되돌아갔다. 67 상대적으 로 교동의 방비가 허술해진데다 강화도의 조수 차가 심해 병선과 전 선으로 이루어진 선단船團의 정박이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과정에서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은 ‘강화도의 동쪽 물길은 손돌목이라는 험로를 거쳐야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물살이 약한 북쪽 수로의 방비 를 강화해야 하고, 그러자면 교동을 수군의 거점으로 삼는 것이 효과 적이기 때문에 통어영을 교동에 되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18세기 경기도 수군은 수영이 위치한 교동에서 주문과 장봉을 거 쳐 남으로 화량과 대부, 덕적을 감싸고 다시 북쪽의 덕포에 이르는 반 원형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경기 수군의 방어선은 유사시 염하를 건너 강화도에 접근하는 적선을 막아내는 본연의 임무 에 더해 바다에서 도성으로 진입하는 선박을 감시 및 저지하는 역할 이 추가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다. 17세기 중엽 강화도 동쪽을 흐 르던 염하 방어를 목적으로 재편된 경기 수군 방어체제가 18세기 들 어 염하 방어는 물론 황당선과 수적水賊을 외해外海에서 방어하는 형태 로 재편된 것이다.
67 『정조실록』 권27, 정조 13년 5월 26일.
66 『강화부지』 권上, 부해府廨; 같은 책 권下, 군제軍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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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개항기 서구열강의 침략과 인천의 방어체제
1)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 방비실태 18세기 말 정조에 의해 완비된 도성 방어체제는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등 삼군문이 도성을 맡아 지키고, 북한산성의 수비는 총융청 이 관할하는 것으로 짜여 있었다. 또 도성의 외곽에 개성 관리영, 강화 진무영, 광주 수어청, 수원 장용외영을 두고 도성으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게 하는 4도 체제를 확립시켰다. 이처럼 도성과 그 외곽을 겹겹이 방어하는 이중 구조의 도성 방어체제는 19세기 들어서도 큰 변화 없 이 유지되었다. 1802년순조 2 영의정 심환지를 비롯한 중신들의 건의 에 따라 장용영이 혁파되면서 수원부에 두었던 장용외영을 없애고 총 리영이 그 역할을 대신했고, 68 헌종 때 총융청을 총위영으로 확대 개편 했다가 3년 만에 환원시키는 등 69 약간의 변화가 있었을 뿐이다. 정조 이후 강화도의 전략적 개념은 왕실의 보장처에서 도성의 해 문 방비처로 변해갔지만, 그에 따른 실질적인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지휘체계와 방비시설 등 모든 면에서 보장처 방어에 적합했던 기존의 수비체제가 19세기 중엽까지 변화없이 이어졌던 것이다. 이는 1823년순조 23 진무영 외영의 교체를 통해서도 확인되는데 그해 7월 순 조는 진무영의 우영이었던 풍덕부를 가까운 거리에 있던 개성 관리영 에 속하게 했다. 70 풍덕부가 관리영 관할로 옮겨간 지 두 달 후, ‘경기 각 고을 중에서 다른 진에 소속되지 않으면서 가까운 지역의 한 곳을 재빨
68 『순조실록』 권4, 순조 2년 2월 7일.
70 『비변사등록』 211책, 순조 23년 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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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배항섭, 『19세기 조선의 군사제도 연구』, 국학자료원, 2002, 32~38쪽.
리 옮겨 정해야만 보장이 허술하다는 개탄이 없을 것’이라는 강화유수 송면재宋冕載의 장계에 따라 인천부를 진무영의 우영으로 정했다. 71 표면 적으로는 단순한 외영의 교체였을 뿐이지만, 보장처 방비를 소홀히 하 지 않겠다는 조정의 의지가 담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하는 이양선의 출몰이 잦아지 기 시작했고, 조선 정부는 멀리서 온 이들에게 관용을 베푼다는 ‘유원 지의柔遠之義’를 명분삼아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조선의 미온 적인 대응이 이어지면서 이양선 출몰 지역은 점차 도성의 입구인 한 강 하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급기야 1864년고종 1 덕적진 굴업도에 이양선 선원들이 상륙하여 주민을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72 당시 경기수사 한원식韓元植은 사건이 발생한지 8일이 지난 후에야 이를 조 정에 보고했다. 조정에서는 이양선의 약탈을 방관했던 덕적진 첨사를 파직하는 한편, 보고를 지체했다는 이유로 경기수사 한원식의 처벌을 건의했다. 당시 경기수영이 보였던 기강 해이는 2년 뒤 프랑스군의 침 입 때 진무영에 의해 그대로 반복된다. 1866년고종 3 두 차례에 걸친 프랑스 함대의 침입에서 프랑스군은 아무런 제지 없이 서강까지 진입할 수 있었고, 도성 지척에 있던 강화 도를 한 달 이상 점령하면서 조선의 도성 방어체제를 일순간에 무력 화 시켰다. 18세기 진무영-경기수영-영종방어영의 삼각 체제로 완비 되었던 인천 연안 수비체제가 정작 프랑스군의 침입이라는 국가 위기 상황에서 제대로 가동되지 않았던 것이다. 프랑스 함대가 우리 해역 을 침범하여 염하 수로를 통과하는 동안 경기수영 소속 수군진과 진
71 『승정원일기』 2170책, 순조 23년 9월 25일. 『비변사등록』 211책, 순조 23년 9월 26일. 72 『통어영계록』, 고종 1년 갑자년 8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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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 휘하 13진보는 어떠한 대응도 하지 못했다. 적병의 상륙을 봉쇄 하기 위해 쌓은 돈대와 성곽은 제 기능을 못했고, 그곳을 지키던 수비 군은 프랑스군의 공격에 제대로 된 반격도 없이 강화부를 내주어야 했다. 조선군에 비해 월등했던 프랑스군의 전술과 근대식 무기체계가 강화부 함락의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도성의 외곽 방어를 담당했던 수비체제의 허술함도 주요 원인으로 작동했다 1차 침입 당시 프랑스 함대의 동향은 지휘계통을 따라 조정에 신 속하게 보고되고 있었다. 영종방어영과 덕포진, 문수산성진 등 각 군 영은 프랑스군의 이동 상황과 동태를 각각 경기감영과 수영, 통진부 에 보고했다. 프랑스 함대가 염하 수로의 입구인 작약도에 진입했을 때부터 영종방어영과 경기수영을 비롯해서 통진, 김포, 양천, 시흥 등 프랑스군의 이동경로에 해당하는 한강 연변 고을에서는 지속적으로 문정問情을 시도하여 그들의 침입목적이 무엇인지 파악하려 했다. 그 러나 정작 염하 수로의 방비를 책임지고 있던 진무영은 프랑스군이 이미 월곶진을 통과한 이후에야 조정에 첫 보고를 올릴 수 있었다. 73 강화도에는 염하 수로를 따라 초지진과 덕진진 등 다섯 개 진보에 진 장과 병사가 배치되어 있었지만, 진무영으로부터 조정에 보고된 것은 없었다. 강화도 수비체제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었다면, 해안에 배치된 돈대에서 이양선을 발견하는 즉시 봉화를 올려 인접 돈대와 진보에 알렸을 것이고 각 진보에서는 이를 다시 진무영에 치보했을 것이다. 진무사를 겸하고 있던 강화유수는 각 진보의 보고를 통해 파악한 상 황을 조정에 신속하게 알려야 했다. 각 돈대로부터 조정에 이르는 보 고체계 중 어느 단계에서 누락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조정은 때늦
73 『고종실록』 권3, 고종 3년 8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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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보고와 문정이 없었던 것을 이유로 진무중군 이일제李逸濟를 파출 시켰다.
프랑스군의 강화도 상륙 (앙리 쥐베르Henri Zuber, 『조선원정기Une Expe´dition En Core´e』)
프랑스군이 강화부를 함락시킨 2차 침입 때에도 적함의 이동 상황 은 각 군영을 통해 조정에 보고되었다. 특히 진무영의 초기 대응은 1 차 침입 때와 달리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9월 5일 프랑스 함대의 작약 도 정박 사실을 정족산성 요망장이 강화유수 이인기李寅冀에게 보고했 고, 강화유수는 이를 다시 개성유수에게 전달하여 강변의 방비를 튼 튼히 할 것을 주문했다. 74 9월 6일 이양선이 염하를 거슬러 올랐다는 초지진 첨사와 선두보 별장의 보고가 있었고, 다음날 강화유수는 다 른 이양선 한 척이 통진 쪽에 정박하고 있다고 조정에 알려왔다. 강화 부 관원을 프랑스군 진영으로 보내 문정을 실시한 결과, 이들이 병인
74 김인호·노혜경·임용한 역주, 『개성부원록』, 혜안, 2015, 96쪽.
제4장 조선후기 인천 연안의 방어체제 구축과 변화 277
박해의 배상을 요구하기 위해 침입해 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75 그러나 1차 침입 때와 마찬가지로 적 함대의 염하 통과를 지켜보고만 있었고, 선제적 무력 대응은 하지 않았다. 갑곶 상륙 때에 도 아무런 대응 조치가 없었다. 프랑스군이 갑곶에 진을 치고 강화부 성을 함락할 때까지 이틀의 시간이 있었음에도 동문과 남문에서의 전 투 상황은 진무영의 방어 태세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프랑스군은 상륙 다음날인 9월 7일 동문을 공격했고, 성문을 지 키던 조선 병사 2명이 전사하면서 수비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 다 음날 남문의 수비군은 접근하는 프랑스군에 먼저 사격을 가하긴 했지 만 상대방의 몇 차례 포격에 도주하는 병사가 속출했고, 끝내 강화부 는 함락되고 말았다. 문신이었지만 진무사를 겸하고 있던 강화유수 이인기는 방어태세 를 갖추고 병사를 지휘해야 했지만 장령전의 어진을 보호한다는 핑계 로 서문을 빠져나와 강화도 서쪽 끝에 있는 인화보로 몸을 피했다. 당 시 군무를 총괄했던 진무중군 이용회李龍會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강화부 함락 다음날 조정은 강화유수를 무신인 이장렴李章濂으로, 중군 을 박희경朴熙景으로 교체했다. 신임 유수 이장렴은 즉시 강화도로 들 어가려 했으나 이미 물길이 끊겨 통진부에 대기할 수밖에 없었고, 9월 16일 개성부로 들어가 이틀 뒤 인화보에서 철수하는 전임 유수 이인기 에게 진무사의 인신印信을 인계받았다. 이장렴이 언제 강화도에 들어가 진무사로서 임무를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퇴각 할 때까지 진무영의 대응 태세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미루어 강화부 함락과 동시에 진무영의 지휘체계 및 군령軍令이 모두
75 『고종실록』 권3, 고종 3년 9월 8일.
278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무너졌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병인양요는 급조된 중앙군이었던 기보 연해순무영畿輔沿海巡撫營의 순무천총 양헌수 부대가 정족산성에서 프 랑스군을 격퇴시키면서 막을 내릴 수 있었다. 당시 프랑스 함대의 한 강 진출과 강화도 함락은 도성 방어의 한 축이 무너졌음을 의미한다. 18세기 이후 꾸준히 정비해 왔던 도성 방어체제와 인천 연안 수비체 제가 허점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에 따라 조선 정부는 기존의 도성 방 어체제를 전면 개편했다. 금위영과 어영청을 훈련도감과 같이 장번제 長番制로 전환했고, 여기에 포군 4초哨, 1초당 약 100명를 증설했다. 아울러 총융청에도 포수 125명을 선발해서 포군 1초를 신설했다. 군사 지휘 체계도 정비하여 각 군영을 총괄 지휘할 삼군부三軍府를 설치했다. 이 처럼 병인양요는 19세기 도성 방어체제의 허점이 드러난 사건이었지 만, 동시에 이를 극복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2) 신미양요와 인천부 방어체제 병인양요 직후 조선 정부는 허점이 드러난 인천 연안 방어체제를 개편하여 교동의 삼도수군통어영을 강화부로 이속시키고 영종과 교 동을 각각 진무영의 좌·우 해방영海防營으로 삼았다. 문신인 강화유수 가 진무사를 겸했던 것에서 무신인 진무사가 강화유수를 겸하는 것 으로 바꾸고, 품계도 종2품에서 정2품으로 올렸다. 진무 중군은 아장 亞將을 지냈던 사람 중에서 선발하여 종2품으로 품계를 올렸고, 군무 에 관한 일은 중군이 조정 회의에 직접 참석할 수 있게 했다. 진무영 의 병력도 포군 위주로 증설하여 2년 뒤에는 200여 명의 포군을 확보
제4장 조선후기 인천 연안의 방어체제 구축과 변화 279
할 수 있었다. 76 또 선두포 매립으로 전략적 위상이 떨어져 있던 선두 보를 프랑스군을 격퇴시켰던 정족산성으로 이설하여 유사시 방어 거 점으로 삼게 했다. 한편, 그동안 문관이 부임해 왔던 인천부사와 부평 부사를 무관으로 파견하기 시작했다. 1869년고종 6 무과 출신으로 영 종첨사 시절 오페르트의 잔당을 처결했던 신효철申孝哲이 인천부사로 부임한 이래, 개항 때까지 인천부사는 줄곧 무관이 배치되었다. 1870 년 부평부사로 부임한 이기조李基祖도 병인양요 때 순무영 별군관으로 참전했던 무관이었다. 무과 출신의 인천부사들은 문과 출신과 달리 병기를 정비하고 병력을 증강하는 등 인천부의 군사력을 강화해갔다. 특히 1870년고종 7 인천부사에 부임한 구완식은 별무사 300명을 선발 하고 이들을 3초로 나누어 초관哨官의 지휘아래 훈련시켰다. 77 별무사 에 선발된 인원에게는 한명 당 7마지기, 초관에게는 10마지기의 급료 를 지급했고, 별무사 요포전料布錢을 마련하여 이를 가지고 매달 시험 에 합격한 자에게 포상하는 등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78 구완식과 이기조가 각각 인천부사와 부평부사로 재임하고 있던 1871년 4월 미국 정부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보상과 조선의 통상개방을 요구하기 위해 아시아함대를 조선에 파견한다. 4월 6일 인천부사 구완식은 덕적진 첨사로부터 이양선이 풍도 앞바다에 정박 하고 있다는 치보를 받고 인천부의 병력을 선발하여 해안 포구와 고 개 등 요충지에 배치하였다. 당시 병력배치를 분석하면 해안과 읍내
76 연갑수, 「병인양요 이후 수도권 방비의 강화」, 『서울학연구』 8, 서울학연구소, 1997, 69~80쪽. 77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주 소성진중일지邵城陣中日誌』, (인천역사문화총서36), 2007, 18쪽.
78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주 인천부읍지仁川府邑誌』 (인천역사문화총서9), 2004, 199~201쪽.
280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신미양요 당시 인천부의 방어태세를 기록한 『인천진중일기仁川陣中日記』(인천광역시립박물관)
방어를 강화하는 쪽으로 방비책이 수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임 시로 임명한 방수장防守將들에게 병력을 인솔하게 하여 제물포 등 9개 해안 포구에 분산 배치했는데, 이들의 임무는 주로 적선의 동태를 관 측하는 한편 유사시 적의 상륙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또, 관아 입구와 문학산 삼호현 및 제월봉, 도찬현 등 해안에서 읍내를 향하는 고개에 초병들을 배치하여 관아 주변을 지키게 했다. 문학산성에는 봉군을 배치하여 봉수를 올리게 했고, 문학산과 관아 뒷산인 승학산에 화포 군을 매복시켜 적들이 상륙하였을 때 화포로 응수하게 하였다. 읍내 로 진입하는 길목인 무주현, 마근현 등지에는 화포군과 수노병手弩兵을 배치해서 적이 침입했을 때 깃발과 횃불로 알리도록 하였다. 주요 도 로의 입구에는 민병을 동원하여 땅을 파고 매복시켰으며, 서울로 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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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가는 길목인 성현星峴에도 의병을 배치하였다. 우병방 채연하에게는 척후의 임무를, 좌병방 김홍구 등에는 군량을 주관하게 했고, 도령장 都領將 이우현 등은 군기軍器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79 4월 6일 요충지마다 병력을 배치하고 경계를 강화한 이후, 인천부 사 구완식은 곳곳에 배치된 방수장과 초병들로부터 미국 함대의 움 직임을 날마다 보고받고 있었다. 섣부른 공격보다 저들의 침입 목적 을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기에 적선의 동태 파악에 적극적으로 임했 다. 적 함대가 호도虎島의 정박지를 향해 움직일 때 해무로 관측이 쉽 지 않자 군선을 근접시켜 정탐하게 하였고, 적선의 정황이 심상치 않 을 때에는 직접 군졸을 이끌고 문학산에 올라 적의 이동 상황을 살펴 보기도 하였다. 4월 14일 손돌목에서 미국 함선과의 교전이 발생하자 조정에서는 각 진영으로 병력 및 군기를 지원하였는데 인천에 증원된 병력은 훈련도감군 100명과 수어영 별파진 50명 등 모두 150명이었 다. 4월 20일 구완식은 이들을 중심으로 2차 병력배치를 단행했다. 1 차 병력배치가 해안포구 및 관아 주변의 경계 강화를 목적으로 했다 면, 2차 병력배치는 적병의 상륙에 대한 대비가 주 목적이었다. 우선 해안 포구 중 적병이 상륙할 만한 지점을 선별하여 중요도에 따라 배 치될 병력 수를 다르게 했다. 제물포에 150명, 고잔포에 100명, 옹암 포와 주안포구, 한진에 모두 100명의 병력을 배치했는데 그 중 제물 포에 별파진 등 경군京軍을 배치한 것으로 보아 적병의 상륙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곳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부사가 지휘하는 본 진을 장천현(지금 숭의동)으로 옮기고 320명의 병사를 배치하여 제
79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주 소성진중일지邵城陣中日誌』, (인천역사문화총서36), 2007, 19~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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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포에서 읍내와 서울로 향하는 길목을 차단하고자 했다. 이 외에도 각 요충지마다 포계군砲稧軍 100명을 분산 주둔시켰으며, 거경대로
距京大路의 마지막 관문인 성현에는 조동 포계군 100명을 배치하였다. 이날 인천부 주요 지역에 배치된 병력은 모두 1,190명 가량으로 경군 京軍 150명을 제외한 1,000여명이 인천부에 소속된 병력이었다.
배치장소
제물포
제물포 귤현 고잔포 관아 주변 문학산
장천현
산정상 등 요충지 성현
기타 요해처
1871년 4월 20일 인천부 2차 병력배치 현황
현위치
담당
병력
수어청 초관 이복우
북성동
출신 이용구 신현 포계군 100명 훈련도감 초관 이병오
경동
훈련도감군 100명
화수동
중군 이규현 남촌 포계군 100명
문학동
좌병방 김홍구 본 읍 별무사 100명
문학동
봉대별장
봉군 20명 인천부사 구완식 별무사 등 220명 본진 지휘
숭의동
출신 이병태 다소면 포계군 100명
문학산
이우항
100명
만수동
포계장 이항진 조동 포계군 100명 경계 및 방어 주안포, 옹암포, 한진 간석동, 옥련동 포계장 최홍순 주안 포계군 100명 포계군 100명
임무 수어청 별파진 50명 경계 및 방어 매복 매복 매복
설진設陣 봉수 및 요망
지원 요망 및 방어
매복 분산 주둔
4월 23일 미국함대는 두 척의 범선을 강화로 출진시켜 초지진을 점령하고, 다음날 광성보를 함락시켰다. 많은 병사가 전사하고 광성 보가 끝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인천부에 전해진 것은 이틀 뒤인 4월 25일이다. 조정에서는 전국의 산읍山邑에서 선발된 포수들을 진무영
제4장 조선후기 인천 연안의 방어체제 구축과 변화 283
을 비롯한 각 진으로 파견하였고, 인천으로는 안성, 파평, 양근, 가평 등지에서 79명의 포수가 출정하였다. 5월 5일 구완식과 선전관 김태 형金泰衡은 지방에서 파견된 포수들을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3차 병력배치를 실시한다. 3차 배치에서는 병력배치 장소가 2차 배치에 비해 다섯 곳 줄어들었고, 병력도 1,190명에서 871명으로 약 300명 감소하였다. 3차 배치에서 눈에 띠는 것은 각 지방에서 파견된 포수가
배치장소
제물포
고잔포
귤현橘峴 좌우
장천현
문학산성
성현
대부분 제물포와 장천현 본진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1871년 5월 5일 인천부 3차 병력배치 현황
현위치
병력
수어청 별파진 47명 안성 포수 40명
북성동
신현 포계군 60명
파평 포수 4명 본읍 별무사 100명 남촌 포계군 50명
고잔동
경동
훈련도감군 100명
양근 포수 20명 가평 포수 15명 별무사 100명 포계병 20명 사수 20명 아전과 교관 50명
숭의동
무사 100명 아전과 노비 등
문학동
봉대군 25명
만수동
포계군 100명
임무
경계 및 방어
매복
매복
설진設陣
본진本陣
요망대 방어
신미양요 당시 세 차례에 걸친 인천부의 병력배치 상황을 살피면 인천부사 구완식은 미국 함대의 움직임과 중앙 병력의 파견에 따라
284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병력을 탄력적으로 운용하고 있었다. 즉 미국 함대가 호도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을 때는 인천부 전역에 병력을 배치하여 적선의 움직임을 경계하는 데 전력을 쏟았고, 손돌목 전투가 있은 후에는 본진을 지금 숭의동 장천현에 두고 병력을 서쪽 포구와 고지대에 배치해서 혹시 모를 적병의 상륙에 대비하게 했다. 광성보 전투 후 미 함대가 퇴각 할 무렵에는 제물포와 고잔포에서 장천현 본진을 거쳐 성현까지 도성 으로 향하는 도로의 주요 거점에만 병력을 집중 배치하고 있어 적병 의 상륙과 도성으로의 이동을 차단하고자 했다. 또 중앙에서 파견된 훈련도감과 수어청의 정예병,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파견된 포수들을 제물포와 본진이 있던 장천현에 배치하고 있어 이곳이 신미양요 당시 인천부의 방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충지였음을 알게 해준다.
3) 화도진과 연희진의 설치 1875년고종 12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 해역을 침범한 사건이 발생한다. 수로 측량을 위해 남해안과 서해안을 거슬러 올라 인천 연 안에 도착한 운요호는 물을 얻겠다는 핑계로 강화도 해안에 접근했 고, 이에 대해 초지진에서 총격을 가하며 양측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조선군의 강력한 대응에 운요호는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퇴각하면 서 영종진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1876년 2월 조선 정부는 일본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일명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12조의 조문으로 구성된 이 조약에는 ‘부산을 포함하 여 통상하기 편리한 두 곳의 항구를 골라 20개월 이내에 개항한다(제 5조)’와 ‘연안 항해의 안전을 위해 일본 항해자의 해안 측량을 허용한 다(제7조)’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1877년 10월 일본은 앞의 조항을
제4장 조선후기 인천 연안의 방어체제 구축과 변화 285
근거로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를 대리공사로 파견하여 서남해안을 측량하면서 상경하겠다고 조선에 통보했다. 강화도조약 제7조에 따 라 조선 해안에 대한 본격적인 해로 측량을 시작하겠다는 의도였다.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대책이 논의되었고, 이 자리에서 고종은 인 천과 부평이 강화도 못지않은 관방의 요충이므로 방어태세를 튼튼히 할 것을 지시했다. 80 그 이유로 물살이 험한 염하 수로를 통과하기보 다 인천 또는 부평 해안에 상륙하여 육로를 이용해 서울로 가는 것이 훨씬 편리하고 거리상 가깝다는 점과 일본이 이미 인천 해안에서 서 울까지 이어지는 육로를 파악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일본이 합의 를 무시하고 무력도발을 해 올 경우 진과 보, 돈대와 포대 등 군사 시 설이 갖춰져 있던 염하 수로보다는 상대적으로 방비가 허술했던 인천 해안에 상륙하여 서울로 진격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듬해 8 월 인천과 부평에 진을 두고 포대를 설치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자는 무위소武衛所의 건의에 따라 고종은 어영대장 신정희申正熙를 공역감동 당상工役監董堂上에 임명하고 공사를 총괄하게 했다. 81 신정희는 신미양 요 직후 서구열강의 근대식 군함을 막기 위해 강화도와 통진 해안에 포대를 축조했던 강화유수 겸 진무사 신헌申櫶의 아들이었다. 신헌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으며 사거리가 짧고 화력이 약 한 기존의 곡사曲射 화포만으로는 철갑을 두른 서양의 근대식 군함을 제압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터득했다. 또 조선시대 강화도의 주력 방 어시설 돈대는 대부분 해안가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어 외적의 군함 에 노출되기 쉬웠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신헌은 염하 수로의 해안 저
80 『일성록』 197책, 고종 14년 10월 15일.
286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81 『승정원일기』 2853책, 고종 15년 8월 27일.
지대를 골라 포대를 쌓았다. 해안 쪽 겉면에 때를 입혀 낮은 언덕처럼 보이게 하고, 화력이 강한 화포를 제작하여 포대에 배치했다. 염하 수 로로 진입하는 적선이 은폐된 포대를 지날 때 화포를 직사直射로 발사 하여 강한 타격을 주려 했던 것이다. 실제로 신헌이 축조한 강화도 포 대와 여기에 설치된 화포는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의 염하 수로 통 과를 저지하는데 큰 효력을 발휘했다. 신헌의 아들 신정희에게 인천 과 부평의 해안 포대 축조를 총괄하게 한 것에는 부친의 경험을 이어
제4장 조선후기 인천 연안의 방어체제 구축과 변화 287
『화도진도花島鎭圖』(1879년 추정, 국립중앙박물관)
받아 공사를 제대로 마무리 하라는 고종의 의도가 담겨 있었다. 1878년고종 15 8월 27일 인천·부평의 포대 축조와 군진 창설 공사 의 공역감동당상에 임명된 신정희는 다음날 포대 건설 공사를 감독 하기 위해 인천으로 향했다. 그가 인천에 도착해서 처음 한 일은 포대 쌓을 장소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그것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있지 않 아 포대 위치를 정하는 기준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공사가 완 료된 뒤 간행된 『화도진도』를 통해 그 기준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화 도진도』에 따르면 인천도호부에는 모두 8개의 해안 포대가 축조되었 다. 북으로부터 묘도猫島 북변과 남변, 북송곶北松串 북변과 남변, 제물 濟物 북변과 남변, 호구포대, 장도포대 순으로 여덟 개 포대의 형태가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고, 포대마다 포좌의 개수, 사격 방향까지 그려 져 있다. 8개 포대 모두 갯골 초입의 해안 돌출부에 위치하고 있어 갯 골이 포대 설치에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바다 에서 육지로 길게 이어진 갯골은 적선의 상륙 통로로 이용될 가능성 이 높았기 때문이다. 인천 연안은 수심이 얕고, 조수 차가 심해 군함 등 대형 선박의 접 안이 불가능했다. 신미양요와 운요호사건 때에도 규모가 큰 모함은 비교적 수심이 깊은 호도와 물치도 사이에 정박해 있고, 해안을 공격 하거나 상륙을 시도할 때는 종선從船이나 소형 단정短艇으로 옮겨 타야 했다. 만일 적군이 인천 연안에 상륙하여 서울로 진격한다면 상륙 지 점은 갯골의 끝자락이 될 것이고, 소형 상륙정으로 갯골을 거슬러 올 라야 하기 때문에 신정희는 그 초입에 포대를 쌓아 적선을 방어하는 전략을 세웠다. 1872년에 간행된 『전국지방지도全國地方地圖』 「인천부 지도仁川府地圖」에는 인천 해안의 갯골이 그려져 있는데 각 갯골에서 서
288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전국지방지도』 「인천부지도」(1872년,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제4장 조선후기 인천 연안의 방어체제 구축과 변화 289
울까지의 거리가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에 따르면 인천에서 가장 크 고 깊은 갯골은 지금 만석동에서 간석오거리까지 흘러들던 십정포十井浦 갯골이었고 여기서 서울까지의 거리가 70리라 적혀있다. 그 외에도 서 울까지의 거리를 표기한 갯골은 도장포道章浦와 신현포新峴浦로 각각 70 리와 60리였다. 십정포 등 세 곳의 갯골은 각각 서울 가던 길목인 원통 현과 성현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 고개만 넘으면 한강까지 넓은 평지 와 얕은 구릉으로 이어져 서울로 진격하는 적군을 방어할 만 한곳이 없 었다. 다시 말해 인천 내륙으로 흘러드는 세 개의 큰 갯골은 바닷길과 서울로 향하는 육로를 이어주는 통로였고, 조선의 입장에서는 일본군이 상륙하여 서울로 진격하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반드시 막아 야 했던 곳이었다. 신정희는 세 개의 갯골 중 십정포 갯골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 으로 보인다. 화도진 관할 8개 포대 중 6개를 제물포에서 묘도에 이르 는 해로에 배치했기 때문이다. 묘도를 지나면 그대로 십정포 갯골에 진입하게 되므로 여기에 화력을 집중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제물포 에서 묘도까지의 바닷길은 고려시대부터 조운수로로 이용되어 왔으 며, 넓은 바다가 제물포와 영종도 사이에 이르러 갑자기 좁아지기 때 문에 ‘제물량濟物梁’이라 부르는 곳이었다. 적의 군함이 제물량을 통과 해 십정포 갯골로 진입하기 전 일시에 제압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었을 것이다. 신정희는 강화도에 포대를 축조했던 부친의 경험 을 살려 제물량의 해안 돌출부, 즉 곶串의 양쪽 사면 저지대 6개 지점 에 포대를 쌓고 여기에 모두 31문의 화포를 배치하였다. 십정포 외에 도장포와 신현포 갯골에도 만일을 대비해 포대를 쌓았다. 다만, 바다 에서 그대로 갯골로 진입할 수 있고, 갯골의 폭도 십정포에 비해 좁아
290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화도진 관할 8개 포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논현동 논현포대
서 거친 물길을 통과해야 하는 제물량에 비해 전략적 가치가 낮은 편 이었다. 신정희는 도장포 초입에 위치한 해안 돌출부 서쪽에 호구포 대를, 신현포 초입의 노루섬 남쪽에 장도포대를 축조하고 각각 2문과 3문씩 화포를 배치했다. 『화도진도』를 통해서 인천부 해안에 설치한 포대는 모두 8개이고, 여기에 36문의 화포를 배치했다는 사실이 확인 되지만, 부평부의 포대 배치 상황은 기록이나 지도가 남아있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구전을 통해 연희동, 가정동, 원창동, 가좌동 등의 해안 돌출부에 모두 여섯 개 포대가 있었다고 전해질 뿐이다. 82 1879년고종 16 7월 1일 무위소는 인천 연안의 해안포대 축조 공사 를 완료했다고 보고했다. 고종은 인천부와 부평부에 화도진과 연희진
82 인천광역시 서구사편찬위원회, 『(인천광역시) 서구사』상 서구의 발자취, 2014, 3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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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설치하고 해안 포대를 관할하게 했다. 화도진과 연희진은 포대 축 조공사를 주관했던 무위소에 소속되었다. 무위소는 1874년 6월 궁 궐 수비를 위해 창설한 군영이다. 무위소가 포대 축조를 주관하고, 화 도진과 연희진의 지휘를 맡게 된 것은 결국 중앙군 증강과 수도 방어 체제 확립이라는 큰 틀에서 계획된 것이었다. 그러나 1881년 2월 조 선 정부가 일본 측과 제물포 개항을 합의하면서 적선의 해안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설치한 화도진과 연희진의 역할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 다. 그 해 11월 24일 고종은 기존의 5군영과 무위소 등으로 분리되어 있던 각 군영을 무위영과 장어영으로 통합시키라 지시하고 12월 25 일 이경하를 무위대장에, 신정희를 장어대장에 임명했다. 83 훈련도감 과 용호영, 호위청을 통합한 무위영은 주로 궁궐 수비를 담당했고, 장 어영은 도성의 외곽 방어를 맡았던 금위영, 어영청, 총융청이 통합된 군영이었다. 인천의 해안 방어를 위해 설치된 화도진은 연희진과 함 께 장어영에 속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듬해 6월 임오군란이 시작되면서 고종은 군인들의 불만 을 해소시킨다는 명목으로 통합시킨 군영을 원래대로 환원시켰다. 84 그와 함께 부평의 연희진을 혁파하고 화도진은 훈련도감에 소속시키 라는 명을 내렸다. 85 제물포 개항으로 역할이 축소된 데다 임오군란의 여파로 군영을 개편하면서 내린 조치였다. 제물포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기능을 상실했던 연희진과 달리 화도진은 개항장에 위치하였기 에 외국 선박의 감시나 혹시 모를 변란을 대비하는 차원에서 존속시
84 『고종실록』 권19, 고종 19년 6월 27일.
292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83 『승정원일기』 2895책, 고종 18년 12월 25일.
85 『승정원일기』 2901책, 고종 19년 6월 28일.
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883년고종 20 1월 인천이 개항할 때까지 반 년 동안 화도진의 관할 군영은 훈련도감, 금위영, 총융청으로 연이 어 바뀌게 된다. 임오군란의 수습에 청이 개입하면서 조선의 군사제 도가 혼란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도성으로 향하는 길목의 초입을 방 어하기 위해 설치했던 화도진과 연희진은 개항기의 혼란 속에 본연의 임무를 잃고 말았다.
4) 개항 이후 인천 연안 방어체제의 변화 인천 개항을 6개월 앞둔 1882년고종 19 6월 임오군란의 여파로 부 평부에 설치했던 연희진이 혁파되었다. 부평의 연안 방비는 허술해 질 수밖에 없었고, 이듬해 9월 부평부사 박희방朴熙房은 해안에서 부평 부로 진입하는 계양산 자락 경명현(일명 징맹이 고개)에 성곽을 축조
한다. 그리고 ‘백성들 마음으로 쌓은 성’이라는 의미에서 중심성衆心城
이라 이름 붙였다. 당시 부평부 부내면 주민들이 모은 돈으로 공사비 를 충당했기 때문이다. 중심성은 계양산 정상에서 경명현을 거쳐 맞 은편 중구봉에 이르는 약 1.7km 구간에 돌로 쌓은 석축성으로 지금 은 계양산에서 경명현까지 북쪽 구간 약 900m구간 정도만 남아 있 다. 86 부평 해안에서 도성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경명현은 높이가 100여m에 불과한 작은 고개이지만 이 고개를 지나면 서울까지 평지 에 가까운 지형이어서 해안으로 상륙한 적병을 반드시 막아야 하는 요충이었다. 따라서 중심성은 연희진 혁파 후 허술해진 부평 해안 방 비를 대체하려는 의도에서 경명현을 방어 거점으로 삼기 위해 축조된 성곽으로 볼 수 있다.
86 인하대학교 박물관, 『계양산 중심성 지표조사 보고서』, 2003, 21쪽.
제4장 조선후기 인천 연안의 방어체제 구축과 변화 293
인천 개항이 이뤄지면서 기존 경기수영과 영종방어영에서 담당했던 경기도 해방 체제는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조선 정부는 경기 서해안 지 역의 해안 방어를 내륙의 육군에서만 맡고 있어 방비가 소홀해 질 수밖 에 없다고 판단하고, 경기 연해의 육군과 수군을 총괄할 수 있는 지휘체 계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에 따라 1884년 1월 경기도 연해 방어를 총 괄할 기연해방영畿沿海防營을 부평부에 설치하고 민영목閔泳穆을 기연해 방사무에 임명했다. 기연해방영을 부평에 두었던 이유는 바다에 면하 고 있어 연해 고을의 병사를 통제하기가 쉽고, 도성과 가까워 중앙의 지휘가 용이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영문營門을 설치한 지 얼 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새로운 진사鎭舍 건물을 마련하는 동안 우선 부평부 관아를 임시로 사용하게 한 것이다.
87 그리고 부평부사 허진許璡
을 육군 별장에 임명하여 여기에 소속된 병사들을 지휘하게 하였다. 기 연해방영은 경기 연해지역을 관할 구역으로 하고 육군과 수군으로 편 성되었으며, 경기는 물론 황해도와 충청도의 수군을 총괄하게 했다. 88 따라서 종전의 삼도수군통어영은 자연스레 혁파되었고, 교동의 경기 수영은 해방영 휘하의 방어영이 되었다.
한편 임오군란 수습을 위해 조선에 파견된 청의 위안스카이袁世凱
는 자국의 군사제도를 조선에 이식시켰고, 조정은 청의 군제를 모방 해 친군영親軍營을 신설했다. 친군영은 도성 수비를 담당했던 기존의 5 군영을 대체하였으며, 1884년고종 21 11월 전·후·좌·우·별영 등 5영 체제가 완성되었다. 총융청 소속이던 화도진은 전영에 속하였고, 이듬
87 『승정원일기』 2921책, 고종 21년 3월 7일.
294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88 배항섭, 『19세기 조선의 군사제도 연구』, 국학자료원, 2002, 255쪽.
해 5월 다시 좌영으로 이속된다. 89 1886년 3월에는 경기 연해의 방비 를 전담하던 기연해방영을 친군기연해방영으로 바꿔 친군영 체제에 속하게 했다. 중앙군을 친군영 체제로 재편한 지 3년이 지난 1888년 고종 25 4월 친군영 우영과 후영, 그리고 기연해방영을 통위영統衛營으 로, 친군영 전영과 좌영을 장위영壯衛營으로 통합하고, 친군영 별영의 이름을 총어영摠禦營으로 바꾸었다. 이 조치로 기연해방영이 혁파되면 서 경기 연해의 해안 방어는 매우 취약해졌고, 친군영 좌영에 속해 있 던 화도진은 장위영 관할이 되었다.
강화도 해군 동영(『The Morning Calm』 79호, 1899.2)
조선 정부가 경기도 해안 방어의 취약함을 깨닫고 근대식 해군의 양
성을 통해 해방에 박차를 가한 것은 그로부터 5년 뒤인 1893년고종 30
이었다. 그 해 1월 26일 고종은 해연총제영海沿摠制營을 남양부에 설치
89 『고종실록』 권22, 고종 22년 6월 23일.
제4장 조선후기 인천 연안의 방어체제 구축과 변화 295
하고, 독판내무부사 민응식閔應植을 총제사로 임명했다. 조선 정부가 총제영을 창설하고 1품 아문으로 지위를 올린 것은 단순히 1개 군영 이 아니라 전국의 해군을 총괄하는 군영으로 만들겠다는 의도가 담긴 것이었으며, 90 해군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근대식 해군을 건설하겠다 는 고종의 의지가 표명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강화도 진무영을 총
제영 관할로 두어 강화도에 장교 양성기관인 수사해방학당水師海防學堂
과 해군 동영東營을 신설하기도 했다. 1893년 4월에는 인천부를 총제 영에 소속시켜 인천 병력 120명을 이속시켰으며, 인천부 경찰관 우경 선禹慶善을 대관隊官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동학교도들의 궐기가 시작 되고, 진압을 위해 조선에 들어온 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면 서 근대식 해군 양성을 향한 조선의 의지는 꺾일 수밖에 없었고, 결국 1894년 갑오개혁으로 군제가 개편되면서 해연총제영은 창설 1년 여 만에 혁파되고 만다. 조선 전기 인천 연안 방어체제가 왜구의 출몰에 대비한 거점 방어 의 형태였다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보장처 강화도를 중 심으로 하는 공간 방어 형태로 변화하게 된다. 국지전이 아닌 전면전 에 대비하는 형태로 변해간 것이다. 특히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 함락 에 따른 조선 정부의 충격은 이후 인천 연안 방어체제 정비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진무영을 중심으로 하는 지휘체계 재편이 이뤄졌고 남양 부에 있던 경기수영을 교동도로 이설하여 이를 삼도수군통어영으로 확대·개편했다. 또 어가御駕의 우회로 확보를 위해 영종진을 자연도로 옮겨 방어영으로 승격시키는 등 인천 연안은 강화도와 외곽 해역, 어 가 우회로 방어의 삼각 방어체제가 갖춰졌다. 방비 시설 축조에도 박
90 배항섭, 앞의 책, 2002, 271쪽.
296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차를 가했는데 강화도 해안을 따라 쌓은 53개 돈대와 외성, 강 건너 문수산에 신축한 문수산성을 통해 해안 방어를 강화했으며, 유사시를 대비해 강화부성을 확장 증축하기도 했다. 숙종 말부터 도성수비론이 대두되면서 조선 정부는 강화도 방비에 힘쓰는 대신 도성으로 이어지 는 길목을 방어하는 형태인 4도 체제를 확립하게 된다. 즉 기존의 관 리영과 진무영이 설치되어 있던 개성, 강화는 물론 광주와 수원에 수 어청과 장용외영을 신설하여 도성의 외곽 방어를 맡겼던 것이다. 이 제 인천 연안의 방어체제는 보장처 강화도를 중심으로 하는 공간 방 어체제에서 도성의 길목인 해문海門을 집중 방어하는 거점 방어 형태 로 변화하고 있었다. 19세기 들어 이양선의 출몰이 잦아지고 청과 일 본이 개항을 통해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음에도 조선의 군사 체제와 무기체계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 다. 프랑스, 미국, 일본 함대의 연이은 침략에 맞서면서 근대식 병력 양성과 무기의 도입이 절실해졌고, 일본과 조일수호조규 체결을 통해 개항이 결정되면서 조선의 군사체제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도성 에서 불과 30km 거리에 있던 인천이 개항장으로 선정되자 인천 연안 방어체제의 전면적인 개편이 필요했지만, 국내외 정세에 따라 군사제 도가 수시로 바뀌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지면서 인천 연안 방 어체제도 혼란을 거듭하며 제대로 정착되지 못했다.
제4장 조선후기 인천 연안의 방어체제 구축과 변화 297
•『각사등록各司謄錄』 •『강화부지江華府志』 •『경국대전經國大典』 •『대동지지大東地志』 •『만기요람萬機要覽』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여지도서輿地圖書』 •『일성록日省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경기수영계록京畿水營啓錄』
•인천광역 시 역사자료관, 『역주 인천부읍지仁川府邑誌』, (인천역사문화총서9) 2004. •인천광역 시 역사자료관, 『역주 소성진중일지邵城陣中日誌』, (인천역사문화총서 36) 2007. •인천광역 시 역사자료관, 『역주 강도지江都志』, 인천광역시, (인천역사문화총서 78) 2015. •인천광역시 서구사편찬위원회, 『(인천광역시) 서구사』, 2014. •이왕무 외, 『한국군사사』8 조선후기 2, 육군본부 군사연구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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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조선후기 인천 연안의 방어체제 구축과 변화 301
해양교류의 관문, 축항과 갑문
김현석
생태역사공간연구소 공동대표
해양교류의 관문, 축항과 갑문
1. 바다 위의 관문, 인천항과 항로
인천항은 법률상 무역항이다. ‘무역항’은 「항만법」에서 그 용어의 정의를 찾아볼 수 있는데, ‘국민경제와 공공의 이해利害에 밀접한 관계 가 있고, 주로 외항선이 입항·출항하는 항만’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1 이 중 외항선은 ‘국내항과 외국항 사이를 운항하는 선박’을 말한다. ‘국내에서만 운항하는 선박’은 내항선이라고 따로 부른다. 2 인천항에는 내항선도 드나들고 외항선도 입출항을 한다. 게다가
1 「항만법」[시행 2024. 4. 25.] [법률 제19778호, 2023. 10. 24., 일부개정] 2 「 선박의 입항 및 출항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시행 2023. 12. 12.] [대통령령 제33913호, 2023. 12. 12., 타법개정]
304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인천광역시는 서울과 인접해 있다. 그래서 인천항과 인천광역시는 ‘수도권 관문항’, ‘대한민국 관문도시’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만큼 인천항은 수도권 물류산업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제교역거점으로서 기능도 강화시켜 가고 있다. 인천항은 무역항 중에서도 국가관리무역항에 해당한다. 국가관리 무역항 역시 항만법에 용어가 정의되어 있다. ‘국내외 육상·해상운송 망의 거점으로서 광역권의 배후화물을 처리하거나 주요 기간산업 지 원 등으로 국가의 이해에 중대한 관계를 가지는 항만’을 말한다. 3 우리 나라에 무역항은 모두 31곳이 있고, 그 중 국가관리무역항은 14곳이 다. 인천광역시에는 인천항과 경인항이 무역항이자 국가관리무역항 으로 지정돼 있다. 4 경인항은 인천광역시 서구와 경기도 김포시 등에 걸쳐 있는 항구로 인천터미널과 김포터미널을 운영중이다. 5 항만은 배가 드나들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항만산업과 긴밀히 연결된 항만배후도시, 혹은 항만배후단지와 관계 를 맺고 있다. 더구나 무역항인 인천항은 기간산업을 움직이는 촉매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외항선 등을 통해 외국과 교류하는 거점 역할 을 담당하고 있다. 그만큼 배후단지의 역할도 적지 않다. 인천항은 일반적으로 내항과 외항으로 구역이 구분된다. 구분하는 기준은 ‘갑문閘門’이다. 내항은 ‘갑문을 기점으로 한 선거船渠내’의 항만 구역이다. 갑문을 통과해서 선거 안으로 들어오면 내항에 ‘입항’하는 것이고, 갑문을 통해 선거 밖으로 나가면 외항으로 ‘출항’하는 것이다.
3 「항만법」[시행 2024. 4. 25.] [법률 제19778호, 2023. 10. 24., 일부개정]. 4 「항만법 시행령」[시행 2024. 1. 26.] [대통령령 제34153호, 2024. 1. 16., 타법개정]. 5 해양수산부 인천지방해양수산청 홈페이지(https://incheon.mof.go.kr/).
제5장 해양교류의 관문, 축항과 갑문 305
인천항 외항의 항만구역은 남항, 연안항, 북항, 인천신항 등이 있고, 송도의 한국가스공사 돌핀이나 영흥도의 영흥화력 돌핀, 거첨도의 모 래부두 등도 외항 구역의 항만시설에 해당한다. 6 내항 부두는 모두 8개가 있다. 각 부두는 하역하는 화물이나 운영 목 적에 따라 성격이 분류된다. 1부두는 공영 부두, 2부두는 철재 부두, 3 부두는 잡화 부두, 4부두는 자동차·사료 부두, 5부두는 자동차 부두, 6 부두는 철재 부두, 7부두는 양곡·잡화 부두, 8부두는 공영 부두다. 양곡·잡화 부두인 7부두에는 사람들 사이에 많이 회자되는 사일 로가 있다. 이곳의 사일로는 곡물을 저장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1979 년에 건설됐다. 여기에 그린 외벽의 벽화는 ‘세계에서 가장 큰 야외벽 화’로 기네스북에 이름이 올라가 있다. 16개의 저장창고에 책 표지를 본따서 그림을 그려 넣었다. 2017년부터 작업을 해서 완성한 것이다. 이 사일로 벽화는 2019년에는 세계 3대 디자인 공모전으로 알려져 있는 독일의 ‘iF 디자인 어워드 2019’에서 본상을 수상하였고, 미국 에서 열린 ‘IDEA 디자인 어워드’에서도 본상을 수상했다. 7 부두에 접근한 배들이 정박할 수 있도록 설치한 접안시설을 선석 船席이라고 하는데, 인천항 내항에는 모두 43개의 선석이 있다. 그 중 5만 톤급 이상의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곳은 12개이다. 각 부두의 선 석은 1부두가 10개, 2부두가 7개, 3부두가 7개, 4부두가 5개, 5부두 가 4개, 6부두가 4개, 7부두가 4개, 8부두가 2개다. 공영부두는 공공 업무를 수행하는 선박만이 접안할 수 있는 시설이면서 자연재해가 발 생했을 때 대응하기 위해 운영하는 부두다. 6부두와 7부두의 일부도
7 『경인일보』, 2019. 8. 22.
306 해양문화교류의 거점, 인천
6 「인천항 항만시설 운영규정(2023)」, 인천항만공사, 2023.
공영선석으로 운영중이다. 8 인천항에 입항하거나 출항하는 배들은 정해진 항로를 따라 이동해 야 하는데, 그것이 동수도 항로와 서수도 항로이다. 팔미도 인근에서 양쪽으로 갈린다. 인천항에 입항할 때는 동수도 항로를 이용한다. 영 흥도 동쪽을 지나 팔미도로 연결되는 항로다. 출항할 때는 서수도 항 로를 이용한다. 자월도의 동쪽 해역을 지나 소야도와 이작도 사이를 지나가는 항로이다. 백령도나 연평도로 향할 때는 덕적도의 서북쪽 항로를 이용한다. 각 항만의 선석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배들이 입항할 순서를 기다 리며 바다 위에 줄을 지어 정박해 있을 때도 있다. 항만에서 처리해야 할 물동량이 늘어날 경우, 여러 날을 대기해야 하는 상황도 빈번히 발생한다. 지금은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이나 국제여객터미널에 인천지역의 안팎을 오가는 여객선들이 모여 있지만 연안여객터미널, 즉 연안부두 가 생기기 이전까지는 인천 해안의 곳곳에 있던 부두에서 배들이 바 다를 오갔다. 화물선이나 어선도 마찬가지다. 인천항은 화물을 주로 처리하는 항구다. 과거에는 화물과 여객의 구분 없이 해안가 부두에 사람과 짐이 뒤섞이며 분주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흔적이 남아 있 는 곳이 북성포구, 화수부두, 만석부두다. 이 세 곳의 항구가 화물이나 여객의 수송 실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진 않지만, 포구와 부두를 잇 는 인천 해운의 자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는 크다. 인천항은 광복 후 꽤 큰 변화를 겪었다. 갑문이 이동해 내항 전체 를 선거화 시켰고, 항구의 변화에 맞춰 경인고속도로의 건설이나 경 인철도의 전철화가 이루어졌다. 인천항 내항 밖에도 신항의 건설이나
8 인천항만공사 홈페이지(https://www.icpa.or.kr/).
제5장 해양교류의 관문, 축항과 갑문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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