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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의 길, 사람을 믿고 다시 일어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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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쪽

정암의 길

사람을 믿고 다시 일어서기

● 서병식 글

2쪽

정암(廷岩) 서병식(徐秉植)

정암 선생은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당시 생사를 넘나드는 피난길 끝에 홀로 남쪽으로 내려와 사업을 시작했으며, 1957년 융기산업을 창업한 데 이어 1962년 동남갈포공업을 설립하며 제조업의 길에 들어 섰다. 동남갈포공업은 새마을 공장 1호부터 7호까지 지정되고, 1971년부터 1979년까지 연속으로 천만 달러 수출탑을 수상하며 한국 수출 산업 의 한 축을 이루었다. 그는 기업 활동과 더불어 지역사회에도 헌신해 남서울 로타리클럽 회장을 역임하고, 이후 재단을 설립해 사회 환원과 인재 양성에 힘써 왔다. 삶의 고비마다 사람을 믿고 다시 일어 서려 했던 태도는 그의 기업과 삶을 관통해 온 중심이었다.

3쪽

정암의 길 사람을 믿고 다시 일어서기

글 · 서병식

4쪽

목차

프롤로그

제1장 어린 시절

1. 내 고향 연백 따뜻했던 어린 시절 나의 가족 세 해 늦게 시작한 학교 연백농업중학교 시절

2. 해방 예고 없이 찾아온 날 38선이 그어진 연백 땅 학도호국단과 나 해방과 분단 사이에서

3. 6·25전쟁의 발발 전쟁의 그림자와 연백의 함락 교동도로 먼저 피난 가다

유엔군 북진과 고향으로의 잠시 귀환

5쪽

제2장 청년 시절

4. 남쪽에서의 숨 가쁜 삶 비봉산 물탱크 임시 수용소 은인들과의 만남 남하 결심과 인천으로

다시 피난길에 오르다

5. 부산에서 5년 부산 피난 생활 부산정치파동을 겪으며 진짜 첫 직장 폐결핵과의 싸움

6. 사업을 시작하다 1955년, 서울로 아내와의 만남 융기산업을 일으키다

인천 배다리 시장, 경비원이 되다

6쪽

7. 수출업자로 변신하다

제조업의 즐거움 제조업의 어려움

8. 세계 시장을 개척하다 수출만이 살길이다

세계시장의 친구들

9. 박정희 시대와 나 청와대에서 들은 한마디 밀어주고 끌어주는 사이

10. 생의 전환점이 된 교통사고 또다시 죽을 뻔한 그날 병원에서의 40일

수입업자에서 제조업자로

새마을운동과 산업의 각성 새마을정신과 나의 철학

104 105 5년 이내에 세계시장을 장악하자 111

‘밥하는 대통령’에 대한 기억

회복 이후, 내려놓기로 결심하다

7쪽

11. 사업에 대한 생각 도전의 시대를 살다 “벽지가 벌어졌다!” 사업가는 등대지기다 적을 만들지 마라 사업이 남긴 것들

12. 가족에 대한 생각 나의 사랑하는 자식들 명문가문이 부럽지 않다 70년을 함께 걸은 사람 내 삶을 지탱한 유머, 그리고 진실

13. 하와이에서 보내는 겨울 186 하와이, 나의 사색 골프 천국 하와이 192 하와이에서의 가족의 시간 195

하와이에서 배운 삶의 속도 198

책을 마치며

골프는 인생이다

다시 필드로

골프와 친구들

골프와 건강

건강과 장수에 대하여

164 15. 내 인생의 마지막 무늬 165 171 174 181

154 14. 골프와 건강 그리고 친구들 200 201 202 205 208 209

일과 삶의 중심은 결국 사람이다

벽지에서 배운 ‘종합예술’의 세계

나눔이 남긴 가장 깊은 무늬

8쪽

프롤로그

*** 다시 일어서는 길 위에서

나는 인복이 많은 사람이다. 살아오는 동안 나를 이끌어 주고 손 내밀어 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의 도 움과 믿음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돌아보면 그것은 운이라기 보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걸어온 시간의 선물이었다. 내

9쪽

인생은 결국 ‘사람이 만든 길’이었다. 어릴 적부터 나는 생각이 떠오르면 곧바로 행동으로 옮 기는 성격이었다. 머릿속에만 두고 있으면 병이 날 것 같 았다. 실행하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운 체질이었다. 그 덕 분에 시행착오는 많았지만, 배운 것도 그만큼 많았다. 세 상은 아이디어보다, 아이디어를 실행하는 힘에 의해 움직 인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다. 내가 태어난 시대는 일제 강점기였다. 학교에서는 일본 어로 수업을 받았고, 우리 역사는 배울 수 없었다. 해방이 되었을 때 나는 열다섯 살의 소년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 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념의 대립이 시작되었고, 마을에 는 38선이 그어졌다. 내 고향 연백은 그 경계선 아래 있 었고, 전쟁이 터졌을 때 가장 먼저 포화를 맞았다. 스무

프롤로그 7

10쪽

살도 채 되기 전에 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여러 번 오갔 다. 전쟁은 모든 것을 무너뜨렸고, 인간의 존엄까지 흔들었 다. 그러나 그 잿더미 속에서도 나는 ‘살아 있는 것’ 그 자 체의 의미를 배웠다. 피난길에서 만난 사람들, 서로 도움 을 주고받았던 인연들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그 속

“사람이 사람을 살린다.”

에서 나는 한 가지 믿음을 세웠다.

그 믿음이 내 인생의 첫 번째 철학이 되었고, 훗날 내가 사업을 하며 사람을 대하는 기준이 되었다. 부산 피난 시절, 나는 장사에 눈을 떴다. 무엇이든 부족 했고,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야 하던 때였다. 그 어려운 시대를 버티고 나아가는 방법은 일밖에 없었다. 새벽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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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을 돌고, 밤에는 다음 날의 거래를 준비했다. 처음엔 먹고 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일은 점차 내 인생의 중심이 되었다. 세상은 단순히 열심히 일하는 사람보다, 끝까지 해내는 사람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 그때부터 나 는 어떤 일이든 “마침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되려고 했 다. 사업의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공장이 불타기도 했 고, 동료를 잃기도 했다. 배신과 실패도 겪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을 견딜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사람 덕이었다. 나를 믿고 함께해 준 이들이 있었고, 그 신뢰가 내 인생을 지탱했다. 사업은 혼자의 일이 아니었다. 결국 함께 살아 가는 일이었다. 나는 평생 ‘1퍼센트의 정신’을 믿었다. 음악이든 미술이

프롤로그 9

12쪽

든, 건축이든 사업이든 진정한 가치는 늘 그 1퍼센트 안 에 있다. 그 자리를 차지하려면 장인의 마음이 필요하다. 성공은 기다리는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늘 준비된 마음으로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에게 온다. 그것이 내 신 념이었다. 사람을 믿는 일 또한 내 인생의 중심이었다. 특별한 인 재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누다 보 면 누구나 함께할 수 있는 동반자가 된다. 사람은 저마다 역할이 있고, 서로가 서로를 채워 준다. 그 관계 안에 존 중과 사랑이 있을 때 비로소 신뢰가 생긴다. 나는 그런 사 람들과 평생을 함께했고, 그 믿음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 다. 이제 아흔을 넘긴 나이에 돌아보면, 내가 이룬 것은 결

13쪽

국 사람과의 관계였다. 내 곁을 지켜 준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평생의 동료들에게 감사한다. 행운은 우연이 아니 다. 늘 준비된 사람 곁에는 언제나 좋은 인연이 머문다. 그 인연들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지금 이 글을 읽는 후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성실하게, 그리고 따뜻하게 살아라.”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사람 사이의 신뢰만큼 값진 자 산은 없다. 인생은 혼자 걷는 길 같지만, 결국 함께 살아 야 완성된다. 그게 내 인생의 결론이다.

2026년 봄, 신문로 서가에서 정암 서병식

프롤로그 11

14쪽

제1장

어린 시절

1. 내 고향 연백

2. 해방

3. 6·25전쟁의 발발

15쪽

이 고향의 풍요는 우연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의 힘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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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연백

어린 시절의 꿈 아직 내 곁에 있어 강물을 비추는 달빛처럼 부서져 나의 인생을 비춘다. 걷잡을 수 없는 빛인 나의 인생을. 내가 움직이면 움직이고 나를 영원히 인도한다.

- 존 트로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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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31년 12월 2일,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 모정리 에서 4남 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사를 짓 는 한편 포목 장사를 겸하셨고, 그 일은 훗날 맏형이 이어 받았다. 연백은 비옥한 평야가 끝없이 펼쳐진 고장으로, 황해도에서도 손꼽히는 곡창이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들 판과 개울을 놀이터 삼아 뛰어다녔다. 우리 집은 대지주 의 저택은 아니었지만 항상 따뜻했고, 식구들의 얼굴에는 근심이 적었다. 연백평야의 쌀은 유난히 수확이 좋았다. 나중에 학교에 서 배운 사실이지만, 땅속 얕은 층에 넓게 깔린 토탄층이 흙을 살찌게 해 주었고, 그 덕분에 같은 볍씨를 심어도 더 풍성한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그때 이미 막연히 느 꼈다. “이 고향의 풍요는 우연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 는 뿌리의 힘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1장 어린 시절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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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였던 나는 성곽 터에서 깨진 기와 조각을 보물처럼 주워 품고 다녔고, 비봉산과 남산의 낮은 능선을 오르내 리며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를 배웠다. 그 시절의 기억은 지금도 내 인생에서 가장 따뜻한 바탕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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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키가 크고 과묵하셨다. 젊은 시절 서당에서 천 자문과 사서를 익히셨고, 말보다 행동으로 예의를 가르치 셨다. 외출하실 때면 늘 감색 양복에 넥타이를 매셨고, 신 용과 성실을 생명처럼 여기셨다. 어머니는 평산 신씨였고 단정하고 부지런하셨다. 막내 복순을 마흔여덟에 늦둥이로 얻으셨고, 하루도 손을 쉬지 않으셨다. 어머니가 계시던 동안 우리 집은 다복했고, 언 제나 질서가 있었다. 내가 우물가에서 세수를 하면 형수 님들이 번갈아 수건을 내어 주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 하다. 맏이 봉기 형님은 아버지를 닮아 농장과 생업을 도맡았 고, 안순 누님은 공부에 뜻이 커 혼자 서울 숙명여학교에 진학하였으나 아버지와 형의 만류로 내려왔고, 훗날 다시 서울로 올라가 혼인하였다. 전쟁 후 부산 피난 시절, 나는

제1장 어린 시절 17

20쪽

매형의 큰 도움을 받았다. 어머니는 전쟁 중에 세상을 떠나셨다. 돌아가시기 전, “왕기야, 서울 가서 나랑 함께 살자.” 하시던 어머니의 말 씀이 자주 떠올랐다. 왕기는 나의 아명(兒名)이다. 그 약 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평생의 아쉬움으로 남았다.

*** 세 해 늦게 시작한 학교

나는 여덟 살 무렵, 이웃 농장의 경찰견에게 물려 크게 다쳤다. 허벅다리에 깊은 상처를 입어 오랫동안 절뚝이며 지냈고, 형들이 매일 손을 잡아 걸음 연습을 시켜 주었다. 그 세월이 내 몸을 단단하게 만들었고, 그 일로 학교 입학 은 세 해 늦어졌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나는 세상을 다 르게 보는 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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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백국민학교는 일제 말기의 일본식 교육을 그대로 따 랐다. 교실에서는 일본어만 써야 했고, 우리 역사는 교과 서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래도 집에서는 늘 우리말이 당 연했고, 나는 마음속으로 늘 외쳤다. “나는 조선 사람이 다.” 또래보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아 주눅 들지 않았고, 서당에서 형들이 배운 글을 어깨너머로 익혀 학업에도 빨 리 적응했다. 훗날 피난지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그 경찰 견을 기르던 농장 주인과 우연히 다시 마주쳤을 때, 놀랍 고도 기이한 인연이라 느꼈다. 하지만 나는 그때 이미 과 거를 원망하기보다 앞을 보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제1장 어린 시절 19

22쪽

태평양전쟁 말기, 공출(供出)이 심해지고 수업 대신 산에 올라 송진을 채취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연백농업중 학교에 진학했다. 처음에는 막연히 법학의 길을 꿈꾸었지 만, 농업을 배우며 생각이 달라졌다. 먹고사는 일이 먼저 이고, 그 위에 예의와 법이 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당 훈장님이 말씀하시던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 大本)”의 뜻을 몸으로 이해했다. 연백평야의 높은 수확을 조사하며, 땅속의 토탄층이 모 든 생장을 떠받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그때부 터 믿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기반이야말로 모든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그 후로 나는 사람의 인생 도 마찬가지라 생각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밑에서 받쳐주는 힘이 있으면 삶은 몇 배로 단단해진다. 그것은

가족, 신뢰, 그리고 성실 같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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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나는 모정리의 농기구 제작소를 자주 드나들었 다. 트랙터나 콤바인이 없던 시절이라 손 도구와 낡은 기 계가 전부였지만, 그곳에서 ‘일을 더 효율적으로 하는 법’ 을 스스로 궁리했다. 손재주는 부족했지만, 관찰과 아이 디어로 보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일제 말기에도 관개(灌漑)와 시범농장 사업은 이어지고 있었다.

제1장 어린 시절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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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속에서 나는 체계와 조직의 힘을 보았다. 틈틈이 「흙」과 「상록수」를 읽으며 농촌의 의미를 생각했고, 덴마 크의 협동조합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무렵 나는 깨달았다. 농사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삶의 태도라는 것을. 겉보다 속을 보고, 표면보다 기반을 중시하는 법, 그리고 생각이 떠오르면 반드시 실행으로 옮기는 습관—그 모든 것이 그 시절 연백에서 내 안에 뿌 리내렸다. 그 뿌리는 이후 내 인생을 지탱한 첫 번째 근본 이 되었다.

제1장 어린 시절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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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 줄리안 그렌펠

그대를 기억하면 우리는 용감하고 강해지며 모든 위험한 날을 만세 부르며 환영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큰 모험에 직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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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여름방학 중이던 나는 집에 있었다. 일본 천황의 ‘옥음방송(항복방송)’이니 ‘종전’이니 하는 말은 알지 못했다. 우리 집에는 라디오가 없었기 때문이 다. 그러나 해가 기울 무렵 읍내는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 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거리로 몰려나와 만세를 외쳤 고, 일장기 위에 검은 먹을 칠해 만든 태극기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태극기라는 것을 보았다. 들뜬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말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또 어떤 이들은 서로의 얼굴 을 바라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음 날에 는 흰옷 차림의 인파가 더 많이 모였고, 꽹과리와 징 소리 가 마을 전체를 울렸다. 해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는 없었지만, ‘신꼬꾸(神國)’라던 대일본제국이 하루아침 에 무너졌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제1장 어린 시절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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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면 라디오가 있는 집 마당마다 촉 낮은 전등이 걸리고, 남녀노소가 모여 시국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제 의 감시 아래 입을 다물고 살아야 했던 세월이 끝났다는 해방감이 사람들 얼굴에 어려 있었다. 방공호를 파고 몸 빼 차림으로 동원훈련을 받던 일상도 그날로 달라졌다. 거리에서 일본 순사가 보이지 않는 것—그것이 우리가 처 음 체감한 해방이었다. 학교는 혼란 탓에 9월 중순이 되어서야 개학했다. 일본 인 교사들은 사라졌고, 일본말로 수업하던 조선인 교사들 까지 아무렇지 않게 우리말로 수업을 시작했다. 교과서도 없이 들은 첫 ‘국어 수업’은 교실 전체를 숨죽이게 만들 만큼 벅찼다. 모두가 말보다 울음으로 그 시간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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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좌우의 대립과 찬·반탁 논쟁이 마을을 갈랐다. 연백농업중학교 연단에는 조봉암, 김규식 같은 인물이 올라와 연설을 했고, 한편에서는 송 진우, 장덕수, 여운형, 김구 같은 지도자들이 차례로 암살 당했다. 나라 전체가 격랑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무엇보다 충격이었던 것은 고향 한가운데를 가르듯 그 어진 38선이었다. 마을의 이쪽은 이남, 저쪽은 이북이 되 었다. 그 선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지 만,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주둔한다는 현 실은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38선 일대 밀수는 일상적이었다. 남쪽의 경성고무공장 고무신이 북으로 올라갔고, 북쪽의 명태는 남쪽 제사상에 올랐으며,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의약품은 최고의 인기 품목이었다. 보따리장수들에게는 38선이 사실상 존재하

제1장 어린 시절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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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는 셈이었다. 그러나 ‘해방공간’의 혼란 속에서 연백이 겪은 가장 큰 사건은 단전과 단수였다. 북한은 1948년 5월 14일 정오, 남한에 보내던 전력을 일제히 차단했다. 발전설비의 대부 분이 이북에 있었던 탓에 남한은 전적으로 북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공장들은 멈춰 섰다. 단수는 더욱 심각했다. 연백평야는 남쪽에 있었지만, 물 길을 쥐고 있던 저수지들은 대부분 북쪽에 있었다. 어느 날 북쪽이 물꼬를 막아버리자 논은 순식간에 말랐고, “물 이 필요하면 백미를 내라”는 무리한 요구가 뒤따랐다. 모 내기 철이면 새벽마다 물을 찾아 논으로 달려가야 했고,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를 조정해야 할 미군정의 대응은 신속하지 못했다. 사 람들은 “하지 하지 하고 하지 않는 게 하지(Hodge) 중 장”이라고 냉소를 섞어 말했다. 또 이런 속담도 돌았다. “미국을 맹신 말고, 소련에 속지 말고, 일본은 다시 일 어날지 모르니 조심하라.”

그 말 속에는 시대의 피로와 불안이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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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이던 나에게 해방정국의 혼란은 실로 멀미 나는 것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스스로를 비정치적 인간이라고 생각해 왔다. 아버지는 사업적 수완은 뛰어났 지만 어떤 정치적 이념에도 휘말리지 않는 분이었고, 형 들 역시 생활인에 가까웠다. 그래서 나는 좌우익이 극한 적으로 대립하던 시절에도 어느 조직에도 가담하지 않았 다. 그러나 연백농업중학교 시절, 나는 학도호국단에 가입 했다. 1949년 4월 22일, 문교부 안호상 장관이 학생들의 사상 통일과 유사시 향토방위를 명분으로 조직한 단체였 다. 당시 학생 대부분은 자동 가입이었고, 나 역시 학교의 요구에 따라 가입했다. 학도호국단은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군사훈련과 반공교 육을 실시했고, 정부 지원 아래 전국 체육대회·웅변대회

제1장 어린 시절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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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잡지 발행까지 할 만큼 조직의 규모는 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단체는 점점 학생을 정치적 도구로 동원 하기 시작했다. 우익 성향의 학생들이 ‘시감찰’, ‘도감찰’ 완장을 차고 교정을 누비며 우쭐대자 학교 안에는 위화감 이 생겨났다. 이런 흐름은 국제적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당시 유엔총 회에서는 소련 측 대표인 말리크가 학도호국단과 그 지 도부를 히틀러 유겐트에 빗대어 강하게 비판했다는 보도 가 나왔고, 안호상을 둘러싼 평가 역시 서방 외교가에서 는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대해 안호상은 “우리 화랑 을 본뜬 것이지 나치식 단체가 아니다”라고 해명했지만, 학생들 사이에 퍼진 ‘이북 총진군’ 같은 구호는 그 해명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 시절 나는 똑똑히 배웠다. 아무리 좋은 취지나 정책 이라도 실행 방식이 잘못되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사상은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쉽게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학도호국단에 가입한 것 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그 경력은 훗날 6·25 전쟁기 북쪽

점령하에서 내게 큰 위험이 되어 돌아왔다.

33쪽

해방과 분단 사이의 연백 일상은 기쁨과 혼란, 기대와 불안이 동시에 존재했다. 새 시대가 열린 듯했지만, 그 속 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누구도 답을 갖고 있지 않았 다. 논에 물을 대기 위해 새벽마다 들판을 오가던 아버지 의 뒷모습, 교과서 없이도 우리말 수업을 다시 시작하던 교사들의 목소리, 방향을 잃은 채 흔들리던 마을의 공기 속에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서서히 깨달았다. 사람을 지탱하는 것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는 것. 생활을 유지하려는 성실함,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 그리 고 양심—그런 조용한 가치들이야말로 한 사람의 삶을 붙 들어 주는 진짜 힘이라는 것을 나는 그 시절 연백에서 배 웠다. 그 깨달음은 훗날 내 삶의 또 하나의 뿌리가 되었다.

제1장 어린 시절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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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자들이 전쟁을 일으키면 못 가진 자들이 전쟁에서 희생된다.’

- 장 폴 사르트르

6·25 전쟁의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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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이후 38선 인근에서는 총성이 자주 들렸다. 연 백은 최전방이었지만,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그 모든 위험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아침 만큼은 달랐다. 멀리서 포성이 울렸고, 곧이어 탱크 궤도 가 땅을 긁는 진동이 집 안까지 들려왔다. 형과 나는 담장 너머를 내다보려 했지만, 아버지는 단호하게 우리를 안으 로 밀어 넣으셨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안으로 들어가라.” 그 한마디로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몇 번 의 포성, 몇 번의 총성이 들렸을 뿐인데 연백은 순식간에 인민군의 손에 넘어갔다. 시가전조차 없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개전 직후 국군 대대장이 전사했고 통신이 끊기면서 전선이 갈라져 버린 탓이었다. 국군은 장비를 바다에 버리고 해군 LST를 타고 급히 철수했다고

제1장 어린 시절 33

36쪽

한다. 어린 나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한편으로는 “전 쟁이 통일을 가져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기대 를 잠시 품었다. 그러나 골목을 지나던 탱크의 검은 포신 을 보는 순간 그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라디오는 “의정부 탈환”을 외쳤지만, 눈앞의 연백은 이미 고립과 공포의 도 시였다. 장터에는 하루아침에 북조선 인민폐와 남한 돈이 뒤섞여 돌았고, 곡물값은 며칠 사이 몇 배로 뛰었다. 사람 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귀를 세우며 소문을 주워들었다. 누구는 금방 내려온다 하고, 누구는 곧 밀어낸다 했다. 그

37쪽

혼란스러운 공기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전쟁의 얼굴’을 목격했다.

전쟁이 장기전으로 접어들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아버 지는 내게 일단 연백을 떠나 있으라고 권하셨다. “우선 남쪽 섬으로 피하는 게 좋겠다. 바다 건너면 숨 돌릴 데가 있지 않겠나.” 내가 향한 곳은 강화도 교동이었다. 연백과 불과 몇 킬 로미터 떨어져 있어 날만 맑으면 평야가 한눈에 들어오는 가까운 섬이었지만, 군사분계선이 생기고 전쟁이 시작되 자 그 거리는 갑자기 아득해졌다. 나는 밤을 틈타 작은 배를 타고 교동으로 건넜다. 안개

제1장 어린 시절 35

38쪽

가 짙게 깔려 바다와 갯벌의 경계가 흐릿했고, 파도 소리 와 노 젓는 소리만 어둠 속에 퍼졌다. 그 배 위에서 나는 이 길이 앞으로 내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 놓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어렴풋이 받았다. 교동에 닿았을 때 섬은 이미 피난민들로 붐비고 있었다. 전쟁 전까지 교동 사람들은 강화보다 연백을 더 많이 오 갔다고 한다. 연백 장터에 농산물을 내다 팔고, 넓은 평야 에 모내기 품을 팔러 다니던 인연 때문인지, 교동에는 연 백 출신 피난민이 특히 많았다. 그해 교동은 흉년이었다. 원주민의 살림도 팍팍했고, 피 난민들은 식량을 들고 와 방과 잠자리를 곡식으로 빌리곤 했다. 내가 묵은 집도 연백 출신이 주인인 곳이었다. 그는 배로 들어온 쌀을 팔아 피난민 몇 가족의 끼니를 도왔고, 그 집에는 북에서 내려온 여러 가족이 한 지붕 아래 살았 다. 다행히 아버지가 미리 마련해 주신 남한 돈이 있어 당 장 굶을 걱정은 없었다. 교동의 첫인상은 안개와 갈대였다. 바다에서 피어오르 듯 포구를 덮는 안개, 저수지 둑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 는 갈대밭, 초저녁 달빛에 섞여 들려오던 기러기 울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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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지금도 선명하다. 전쟁은 북쪽으로 번져 가고 있었지 만 그 가을의 교동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해가 저물 면 나는 저수지 둑을 따라 걸으며 자연스레 북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기 건너편에 아버지도, 형제들도, 누이 도 다 있는데….’ 그 생각이 들면 저절로 눈물이 났다. 피난민이 늘면서 큰길 한복판에 멍석을 깔고 생필품을 사고파는 노점이 하나둘 생겼는데, 그것이 훗날 대룡시장

제1장 어린 시절 37

40쪽

의 시작이었다. 그 한복판에서 나는 정보장교인 중위 한 분을 처음 만났다. 그는 차분한 사람이었고 전황을 담담 히 설명해 주었다. 나는 월남 사연과 연백에 남겨진 가족 이야기를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그는 한참 듣더니 짧게 말했다. “살아남은 건 이유가 있는 거야. 언젠가 알게 될 거다.” 그 말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았고, 훗날 갈포벽지를 만 들 때도 자문을 구할 만큼 인연이 이어졌다.

1950년 가을,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전세가 급격히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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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혔다. 교동에도 “국군이 북으로 진격한다”, “곧 서울 수 복이다”라는 소식이 잇따라 들려왔다. 사람들은 하나둘 짐을 꾸리며 말했다.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나 역시 마음이 들썩였다. 전황이 안정됐다는 얘기를 듣 자 결국 참지 못하고 연백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바 다 건너 평야의 흙냄새를 다시 맡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고향에 도착해 보니 마을은 이미 깊은 상처를 안고 있었 다. 타버린 지붕, 부서진 담장, 사라진 이웃들…. 그래도 가족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그 모든 상처를 덮는 듯했다. 사람들은 조심스레 밭을 갈고 장터를 다시 열면서 “이제 는 정말 끝나겠지” 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그러나 그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중공군 참전 소식이 들리면서 전선은 또다시 무너져 내렸다. 연백은 두 번째 전쟁의 물결에 휩쓸렸고, 나 역시 그 한복판에서 비봉산 물탱크 임시 수용소와 인생의 은인들을 만나게 된다. 그 리고 그 인연들이 곧 나를 인천으로, 다시 부산으로 향하 는 길로 이끌게 된다.

제1장 어린 시절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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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청년 시절

4. 남쪽에서의 숨 가쁜 삶

5. 부산에서 5년

6. 사업을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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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눈빛과 걸음에서 어떤 공통된 기운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확신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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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머셋 모옴

남쪽에서의 숨 가쁜 삶

젊은이들은 밤중에 태어나서 이튿날 아침 해돋이를 처음 보는 갓난애들 같기 때문에, 어제란 으레 없었던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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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참전 이후 전선이 다시 남쪽으로 밀리자, 연백 일대는 첫 점령 때보다 더 거친 공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두 번째로 들어온 인민군과 정치보위부는 “이번에는 반드 시 반동을 뿌리 뽑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점령 닷새째 되는 날, 붉은 완장을 찬 청년들과 학생들 이 들이닥쳐 나와 옆집 친구를 끌고 갔다. 그들이 향한 곳 은 연안 비봉산 자락의 정수장 물탱크였다. 비행기에서도 보이지 않도록 만든 콘크리트 구조물로, 전쟁 전에는 수 돗물을 저장하던 곳이었지만 점령 직후에는 수백 명을 몰 아넣는 임시 수용소가 되어 있었다. 그 안은 축축하고 어둡고, 사람들의 숨과 두려움이 뒤섞 여 있었다. 세 개의 물탱크에 약 900명 가까이 갇혀 있었 고, 정치보위부 군관들이 한 사람씩 불러내 사상 심문을 벌였다.

제2장 청년 시절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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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학도호국단에 가입했나?” “대한민국이 옳으냐, 인민공화국이 옳으냐?” 잠시의 머뭇거림도 용납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말이 막히면 “악질 반동!”이라는 호통이 내려왔다. 나는 학도 호국단 경력 때문이었는지, 혹은 손이 곱다는 이유였는지 곧바로 ‘노동을 안 한 부르주아’라는 낙인이 찍혔다. 심문 중 “누가 옳으냐”는 질문이 나왔을 때 나는 살기 위해 “인민공화국이 옳습니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그다 음 질문에 잠깐 뜸이 들었던 순간, 군관은 총 개머리판으 로 내 어깨를 내리쳤다. 몇 차례 내리 찍히는 고통 끝에 나는 그대로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깨고 보니 어깨 위로 피가 흘렀고, 조금만 움직여도 숨 이 막힐 만큼 통증이 몰려왔다. 그 순간 나는 전쟁이라는 것이 총알만이 아니라, 사람의 감정과 증오가 뒤섞여 만 들어내는 잔혹한 시간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곧 나는 임시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그곳에서 악몽 같은 시간이 이어졌지만, 동시에 내 삶을 바꿔 놓을 인연들이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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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 있던 어느 날, 내 상처를 보고 안쓰러워하던 경 비요원이 다가왔다. 그는 평양고등보통학교 출신이라 했 고, 날 숨죽여 지켜보던 사람들과 달리 부드러운 사람 냄 새가 났다. 그는 몰래 옥도정기(소독약)를 가져와 상처를 소독해 주고, 때로는 엿, 주먹밥을 건네며 전황을 설명해 주었다. “이 싸움은 남한과의 싸움이 아니라 미국과의 싸움이 오. 전세는 반드시 뒤집힌다. 살아남아서 남쪽으로 가오.” 변소 근처에서 그가 건네준 따끈한 주먹밥은 전쟁 속에 서 다시 느낀 인간의 온기였다. 하지만 함께 끌려갔던 옆 집 친구는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며칠 뒤, 나는 또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인민군 소 장—훗날 알게 된 바로는 연안파 무정 장군 휘하에서 잔 뼈가 굵은 지휘관이었다. 그는 나를 식당으로 데려가

제2장 청년 시절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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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고기와 냉면을 먹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었다. 나는 농업학교에서 읽었던 덴마크의 개간 사례, 그룬트비, 달 가스 이야기를 줄줄이 말했다. 처음엔 경계하던 그의 눈 빛이 점차 누그러졌다. 그날 밤 그는 조용히 말했다. “나는 이 전쟁을 반대했어. 겨우 찾은 해방인데 왜 동족 에게 총을 겨누느냐.” 그리고 다음 날, 두꺼운 《마르크스–레닌 전집》을 건네 며 말했다. “이 책을 들고 내 이름을 대라. 문턱을 몇 개는 넘을 수 있을 게야.”

전쟁 한복판에서 들은 가장 인간적인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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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이 낙동강 일대에서 주춤하자 그는 마지막으로 말 했다. “우리 쪽이 밀리고 있다. 자네는 자네의 길을 찾아야지. 가고 싶으면 얼른 가라.” 그날 밤 나는 인민군 소장과 같 은 방에서 잠을 잤다. 새벽에 눈을 떴을 때 그는 이미 없 었고, 나는 그길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해 여름 장티푸스로 쓰러졌지만, 큰 형수가 의사를 데 려와 치료해 준 덕분에 가까스로 몸을 추슬렀다. 유엔군 이 북진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탈옥범이나 다름없는 처지였던 나는 가족회의 끝에 남하를 결심했다. 집을 떠나 군청 앞을 지나는데 한 노인이 불쑥 나를 보 며 말했다. “학생, 어딜 가든 죽지 않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 말은 이상하리만큼 내 마음

제2장 청년 시절 47

50쪽

을 붙잡아 주었다. 나는 인민군 소장이 건넨 두꺼운 책을 겨드랑이에 끼고 남쪽으로 걸었다. 검문은 몇 번 있었지 만 그의 이름을 대자 모두 무사통과했다. 아무리 생각해 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장날이던 어느 들판에서는 ‘쌕쌕이’가 낮게 날며 기관총 을 퍼부었고, 해안가에서는 미군의 함포사격이 이어졌다. 그날은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날이었다. 겁에 질 린 채로도 나는 그 두꺼운 책을 꼭 껴안고 있었다. 이상하 게도 그것이 나를 살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며칠을 걸으며 피난 행렬과 뒤섞여 남쪽으로 내려오니, 어느새 인천에 가까워졌다. 항구 도시 특유의 소란스러운 공기, 군인과 피난민, 상인들이 뒤엉킨 풍경 속에서 ‘내가 이미 멀리 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나는 먼저 이곳에서 발 디딜 자리를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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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이 곧 올 것만 같았던 그때, 나는 남쪽에서 먼저 살 길부터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인천에 머무르던 중, 우연히 큰형의 친한 친구를 만났다. 그는 서울은 피난민 이 너무 많아 일거리를 구하기 어렵다며, 우선 배다리 시 장 경비 일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전쟁 중 이라 모두가 각자의 자리를 찾아야 했고, 나에게는 그 제 안이 하나의 다리가 되어 주었다. 나는 스무 살의 나이로 곧장 야간 경비를 맡았다. 배다 리는 수로와 육로가 만나는 큰 시장이었다. 예전에는 갯 골을 따라 배가 드나들던 곳이라 ‘배다리’라는 이름이 붙 었고, 전쟁 통에도 포목, 그릇, 먹을거리,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양키 시장 물건들까지 온갖 문물이 모여들었다. 일제 강점기에 쫓겨난 조선인들, 해방 후 피난민들이 엉 켜 살며 버티던 동네이기도 했다.

제2장 청년 시절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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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라 불빛 단속이 엄격했다. 창틈으로 새는 불빛 하 나가 공습의 표적이 될 수 있었으므로, 경비원의 한마디 가 상인의 생계와도 직결됐다. 상인들은 내 지시에 잘 따 랐고, 나는 그 신뢰에 보답하려 더 꼼꼼히 순찰했다. 전쟁 통 시장의 한복판에서 나는 비로소 알았다. 사람마다 맡 은 역할이 있고, 서로의 몫을 존중할 때 공동체가 굴러간 다는 것을. 시장에는 그래도 생기가 있었다. 포탄과 피난 소식이 오 가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물건을 사고팔고, 흥정을 하고, 아이를 안고 웃었다. 나는 밤에 일하고 낮에 잠을 자야 하 는 고단한 생활이었지만, 시장 골목을 돌다 보면 세상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다는 감각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 다. 훗날 회사를 경영하면서 나는 늘 이때를 떠올렸다. 거대 한 비즈니스도, 조용한 골목시장도 결국은 같다. 각자의 자리를 성실히 지키는 사람들 덕분에 전체가 움직인다. 경비원 시절 내가 가졌던 작은 책임감과 자부심은 평생 내 경영의 기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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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쟁의 물결은 또다시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중 공군의 본격적인 개입으로 전선이 다시 남쪽으로 무너지 면서, 인천조차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게 되었다. 나는 결국 더 남쪽, 부산으로 내려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 었다.

제2장 청년 시절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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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참전 소식이 본격적으로 들리며 공기는 다시 무 거워졌다. 북쪽에서 내려왔다가, 한동안 인천에서 버티다 가, 이제는 또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는 피난 행렬이 하나 둘 눈에 띄기 시작했다. 라디오는 여러 소식을 쏟아냈지 만 누구도 전쟁이 어디까지 번질지, 어디가 안전한지 알 수 없었다. 그즈음 형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부산으로 피난 내려 간 누님 부부가 나를 찾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생각해 보 면 나는 남쪽에서 태어나 전쟁을 겪고, 북쪽 땅에서 살다 가, 다시 남쪽으로 향하는 기이한 여정 한가운데 있었다. 이번만큼은 더 남쪽 끝까지 내려가야겠다고 마음을 굳혔 다. 나는 시장 상인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양키 시장에 서 산 미군 배낭 하나를 메고 상인 몇과 함께 길을 나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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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트럭을 얻어 타고 수원 쪽으로 내려가던 중, 저공으로 날아든 전투기가 갑자기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모두 도랑 밑으로 몸을 날렸다. 흙먼지와 연기, 귀를 때리는 총성 속 에서 심장이 요동쳤다.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지만, 그날 의 소리는 한동안 등골을 타고 내려갔다. 밤이 되자 멀리서 꽹과리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숨을 죽였다. 라디오는 “중공군이 서울을 넘지 못했다”고 했지 만, 중공군이 수원 부근까지 내려온 것이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본대가 아니라 우리 병력을 혼란시키기 위 해 내려온 침투부대의 소리였다. 그날 밤, 하늘에서는 전 투기들이 얽혀 공중전을 벌였고, 우리는 어둠 속에서 불 빛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수원역은 유리창이 모두 깨진 채 종이로 바람을 막고 있 었고, 대전으로 내려가는 화물열차에 어렵게 몸을 실었 다. 화물칸 지붕에는 피난민들이 까맣게 매달려 있었고, 졸다 떨어져 다치는 사람도 있었다. 기차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오산, 평택, 천안을 지나 느릿느릿 남하했다. 대전역에 도착하니 광장과 플랫폼은 사람들로 가득했 다. 모두 부산행 열차를 기다리며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제2장 청년 시절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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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출발할지 누구도 알 수 없었지만, 누님을 만나야 한 다는 생각 하나로 나는 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역 앞 식당에서 내 모습을 한참 바라보는 사 람이 있었다. 양복 깃에는 로터리 배지가 달려 있었다. 그 는 조심스레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밤새 역에서 기다리면 위험합니다. 제 집에서 쉬었다 가시지요.”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그의 눈빛은 맑고 단정했다. 그는 따뜻한 밥을 내주고, 씻을 물을 준비해 주고, 방 한 칸을 내주었다. 낯선 도시에서 그만한 친절을 받을 줄은 상상 도 못 했다. 그는 그저 “젊은 친구가 위험해 보여 도울 뿐”이라고 말 했지만, 내게는 전쟁 한가운데서 만난 ‘살아 있는 등불’ 같은 존재였다. 훗날 내가 로터리 활동을 하게 된 것도 그 에게서 받은 인상 때문이었다. 말수는 적었지만, 삶의 태 도가 곧 그의 인품을 보여주었다. 그 덕분에 다음 날 아침, 나는 비교적 안전하게 부산행 열차에 오를 수 있었다. 대전역 같은 혼란 속에서 그런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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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만났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기적에 가깝다. 기차는 김천, 대구를 지나 일사천리로 남하했다. 부산진 역에 내리자 온몸을 죄고 있던 긴장이 조금씩 풀렸다. 교 동의 안개, 연백평야의 바람, 배다리 시장의 불빛, 수원 들판의 총성, 대전역의 군중, 그리고 한 은인의 따뜻한 손 길—그 모든 우연과 인연이 나를 부산으로 이끌었다. 나는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제2장 청년 시절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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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트케(비스마르크 시대의 명장)

부산에서의 5년

나는 항상 청년의 실패를 흥미롭게 지켜본다. 청년의 실패야말로 그 자신의 성공의 척도다. 그는 실패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그리고 어떻게 거기에 대처했는가. 낙담했는가, 물러섰는가. 아니면 더욱 용기를 북돋아 전진했는가. 이것으로 그의 생애는 결정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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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부산진역에서 멈추었다. 역사 앞은 발 디딜 틈 없을 만큼 붐볐고, 피난민들의 울음과 아우성이 뒤섞여 또 하나의 전쟁터 같았다. 임시 수도 부산의 인구는 어느 새 백만을 넘어 있었고, 사람들의 절망과 체념이 공기처 럼 떠다녔다. 손에는 누님 댁 주소가 쥐어져 있었다. 그 한 장의 종이가 마음을 붙잡아 주었다. 부산진에서 초량, 남포동, 남부민동을 지나 송도까지 걸 었다. 산비탈 곳곳에는 판잣집과 움막이 층층이 박혀 있 었고, 도로와 하천 변에는 전쟁고아와 행려병자들이 널려 있었다. 겨울바람 속에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는 피난민 들의 울부짖음처럼 들렸다. 그날 밤을 어디서, 어떻게 보 냈는지 기억은 희미하기만 하다. 다만, 내 몸과 옷에 밴 피난살이 냄새만은 오래 남았다. 이튿날 송도 언덕 끝에서 마침내 누님 댁을 찾았다.

제2장 청년 시절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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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양옥, 겨울 정원이 딸린 넓은 집이었다. 거실 중앙 의 드럼통 스토브에서 따뜻한 열기가 퍼지고, 동남쪽 유 리창 너머로 바다가 들어왔다. 매형은 수완 좋은 개성상 인이었고, 이미 부산에서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한 상태였 다. 따뜻한 밥상이 놓인 식탁 앞에서 눈물이 왈칵 치밀어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몇 달 동안 나는 그 집에 얹혀 살며, 오랜만에 배불리 먹고, 제대로 된 이불을 덮고 자는 호사를 누렸다. 전쟁의 그림자를 잠시 잊을 수 있었던, 피 난 생활 중 가장 고마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1·4 후퇴와 중공군 참전으로 전세가 다시 기울 고 “부산도 위험하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도시는 곧 다시 불안에 잠겼다. 피난민들은 북에서 한 번, 남에 서또한번 떠밀려 왔고, 어디에도 ‘안전한 땅’은 없어 보 였다. 그 혼란 속에서도 한 가지는 분명히 보였다. 굶주린 피난민이 노천에서 밤을 지내는 동안, 남포·광복 일대 유 흥가는 네온으로 환했고, 댄스홀 앞에는 세단과 군 지프 가 줄을 섰다. 전선에서 청년들이 떨어져 나가고 있는데, 후방의 일부는 전쟁을 잊은 듯 다른 세상처럼 보였다.

“이게 전쟁 중인 나라가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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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품었던 분노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전쟁은 총 성과 포성으로만 오는 것이 아니라, 같은 도시 안에서의 이 극단적인 온도 차로도 느껴진다는 사실을, 나는 부산 에서 처음으로 뼈저리게 실감했다.

제2장 청년 시절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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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머무르던 어느 날, 도시는 또 한 번 뒤흔들렸다. 1952년 5월 26일,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난 것이 다. 야당 의원들을 태운 버스가 크레인에 매달린 채 헌병 대로 실려 가고, 계엄령 아래에서 직선제 개헌이 강행되 었다. 체포된 의원들을 제외한 166명 가운데 찬성 163, 반대 0, 기권 3. 비밀투표가 아닌 기립 투표였다. 숫자보다 더 인상 깊었던 것은, 라디오와 소문으로 전해 지던 그날의 공기였다. 누구도 크게 소리 내어 비판하지 못했고, 신문은 침묵하거나 에둘러 말했다. 언로가 막힌 시대였고, 국민은 권력의 진짜 속내를 확인할 길이 없었 다. 전선에서는 수십만이 피를 흘렸지만, 권력은 연장만 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우리 민주주의의 첫 단추가 어긋났 다고 느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나는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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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남짓한 청년이었지만, 이미 한 차례 전쟁의 무능 과 무책임을 보았고, 이제는 정치권력의 민낯까지 목격한 셈이었다. 깊이 절망했고, 그 뒤로 오랫동안 정치를 멀리 하게 되었다. 그러나 삶은 멈추지 않았다. 세상과 거리를 두고 싶어 도, 먹고살아야 하는 문제는 하루도 쉬지 않았다. 부산에 서의 5년은 전쟁의 참상뿐 아니라 사람의 온기 또한 함께 보여 준 시간이었다. 굶주림과 사치, 비겁함과 용기, 부패 와 선의가 뒤엉킨 도시에서 나는 한 가지를 배웠다. 젊은 날의 분노와 상처를 어디에 쓰느냐가 인생을 갈라놓는다 는 것. 낙담 대신 전진—그 결심이 이후의 여정을 결정지었다. 나는 세상의 모순을 목격한 채로도, 그 분노를 삶을 붙잡 는 에너지로 바꾸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제2장 청년 시절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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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자 부산에도 새로운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지만, 어떤 이들에게 위기는 두려움이었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기회였다. 매형의 염 료 상회는 전시에도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나는 가게 일을몇달 도우며 장사의 기본과 거래처 응대를 익혔다. 매형과 함께 일하던 분도 자주 들렀는데, 후에 경제계에 서 큰 역할을 하게 되는 분이었다. 전후 부산의 혼란 속에 서도 그런 사람들은 무언가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곧 나는 대한염료에 입사했다. 인천 배다리 시장의 경비 는 ‘일’이었지만, 대한염료가 바로 내 첫 ‘직장’이었다. 국 내 염료시장의 개척자로 불리던 회사는 전쟁 속에서도 부 산으로 내려와 영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피난민이 몰려든 부산은 하루가 다르게 팽창했고, 부산항으로 들어오는 원 조 물자는 늘 부족했다. 시장은 ‘들여오면 팔리는’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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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가에겐 놓칠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 무렵 이병철 회장은 동대신동의 10평 남짓한 사무 실에서 삼성물산을 시작했고, 정주영 회장은 미군 공사 를 독점하며 현대건설의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나와 같 은 건물, 같은 층에서 근무하던 사람 중에는 훗날 남영나 일론을 세우는 남상수 선배도 있었다. 스무 살의 나는 그 런 이름들이 훗날 얼마나 큰 족적을 남길지는 알지 못했 지만, 그들의 눈빛과 걸음에서 어떤 공통된 기운—“새로 운 시대가 온다”는 확신을 느낄 수 있었다. 출장은 잦았다. 대구 염색공장에 납품을 가고, 한국은행 입찰 서류를 처리하고, 일본에서 수입되는 물량을 검수했 다. 숫자와 계약, 납기와 물류—그리고 사람. 그 모든 요 소가 모여야 비로소 하나의 사업이 된다는 것을, 나는 현 장에서 몸으로 익혔다. 매형의 사업도 확대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화산업 이라는 군수 제조업체를 창업했고, 나는 그 과정도 곁에 서 지켜보며 배웠다. 사업은 아이템이나 기술만이 아니 라, 결국 사람과 구조의 조화라는 것—누군가는 아이디어 를 내고, 누군가는 돈을 대며, 또 누군가는 묵묵히 시스템

제2장 청년 시절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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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부산에서 깨달았다. 대한염료에서는 크고 작은 사건도 겪었다. 목조 창고는 불에도, 태풍에도 약했다. 한 번은 화재가 나 폭죽처럼 염 료가 터지며 창고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고, 또 한 번은 태 풍에 보세창고 물건이 바다로 떠내려갔다. 도둑이 든 일 도 있었다. 나는 인보이스 색깔과 숫자를 기억해 추적했 고, 결국 내부 범인을 찾아냈다. 회사는 그 사건을 계기로 관리 체계를 전면적으로 손봤다. 청년 사원 한 명의 ‘집요 한 기억력’이 회사를 한 번 구한 셈이었고, 나는 그 일을 통해 책임감과 디테일의 힘을 배웠다. 부산에서 나는 사업의 A부터 Z까지를 배웠다. 잘된 사 례보다, 실패한 사람들에게서 더 깊은 교훈을 얻었다. 욕 심, 부정확한 판단, 준비 없는 실행—사람을 무너뜨리는 공통된 원인이었다. 혼란의 도시 한복판에서 익힌 이 기 술과 감각은 훗날 내 삶의 바닥 토양, 보이지 않는 토탄층 이 되었다. 겉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언제든 다시 일 어설 수 있는 힘을 안에서 길러 주는 그런 토양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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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밝아 보이던 때였다. 배우고 일하는 매 순간 이 새로웠고, 사업가들을 곁에서 지켜보며 ‘언젠가 나도’ 라는 꿈이 자라나던 시기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기침 이 멎지 않더니 피 섞인 가래가 나오기 시작했다. 엑스레 이 결과는 폐결핵 3기. 그 시대에 결핵은 사실상 ‘불치병’ 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누님 댁 2층에서 함께 지내던 청년이 오래 기침을 했는 데, 결국 병은 나에게도 옮은 듯했다. 대한염료에서는 사 표를 받지 않았고, 치료비까지 도와주었다. 회사의 배려 가 고마웠지만, 마음은 오히려 더 무거웠다. 젊은 나이에 ‘전도유망’ 대신 ‘불치병’이라는 말과 함께 이름이 불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은 거의 없었고, 요양 은 자연에 의지하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송도 바닷가 모래사장 끝에 텐트를 치고 살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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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바닷바람, 햇빛, 쉼. 가장 단순한 것들이 그때의 ‘최 선의 의학’이었다. 해녀들에게 “두 배를 드릴 테니 가장 싱싱한 해산물로 달라”고 부탁했고, 그들은 매일 해삼·전 복·멍게를 건네며 말했다. “힘내요, 청년.” 몇 달 뒤 판자로 여섯 칸짜리 방가로를 세웠다. 한독약 품 김신권 회장이 어렵게 구해 준 파스와 스트렙토마이신 이 큰 도움이 되었다. 주사는 방가로를 지어준 목수가 직 접 놔주었다. 자연요법과 약물치료가 함께 효과를 내며 각혈이 멎고 몸에 온기가 돌아왔다. 폐 사진은 서서히 좋 아졌고, 숨을 쉬는 것 자체가 다시 감사한 일이 되었다. 하지만 병보다 더 무서웠던 건 마음이었다. 불면과 우 울, 그리고 자포자기. 한창 일하고 배울 나이에 세상과 떨 어져 모래사장 끝에 홀로 누워 있다 보면, ‘여기서 그냥 끝내자’는 유혹이 자주 찾아왔다. 어느 날 나는 삭발을 하 고 바다로 나갔다. 배를 멀리 몰고 가 스스로 몸을 던졌 다. 물속으로 가라앉던 순간, 나는 모든 걸 놓으려 했다. 그런데 눈을 뜨자 내 손은 배 난간을 꽉 붙잡고 있었다.

죽으려던 나를, 내 몸이 먼저 거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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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나는 웃었다. ‘이렇게까지 살아 있으려 하는데, 왜 포기하려 했던가.’ 나는 모든 것을 다시 긍정하기 시작했다. 병은 줄고 식 욕이 돌아왔고, 매일 걷고 책을 읽었다. 문학과 철학서를 닥치는 대로 삼켰고, 그 독학은 훗날 대학 공부의 큰 밑천 이 되었다. 완치 뒤로도 술·담배는 오랫동안 하지 않았다. 담배는 끝내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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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환도 뒤에도 결핵의 그림자는 한동안 내 곁을 떠나 지 않았다. 나는 이탈리아 병원에서 검진을 받았고, 그곳 의 간호사는 밝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훗날 그녀는 주치 의였던 이탈리아 의사와 결혼해 밀라노에서 살게 되었고, 세월이 지난 뒤 내가 벽지 사업으로 밀라노를 찾았을 때 우리는 우연히 다시 만났다. 그녀가 집에서 열어 주던 작 은 와인 파티 속에서, 나는 문득 송도 바닷가의 그 어둡고 차가운 밤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난간을 붙잡던 손끝 의 감각도. 살아남은 자에게는 다시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나는 그 사실을 바다에서—그리고 부산에서—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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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로비스 호리

사업을 시작하다

기업가 정신이란 꿈이며 예술이며 과학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매우 인간적인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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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부산에서의 5년을 마치고 나는 서울로 올라왔 다. 병은 완전히 나았고, 대한염료가 본사를 서울로 옮기 면서 나 역시 본사 근무를 하게 되었다. 누님 내외는 이미 서울 순화동에서 사업을 다시 일으키고 있었고, 나는 처 음엔 이 하숙 저 하숙을 옮겨 다니다가 아현동의 작은 하 숙집에 정착했다. 폐허 위에서 다시 일어서는 서울은 서 서히 생기를 되찾고 있었고, 내 마음속에는 ‘이제는 한낱 직장인이 아니라, 언젠가 독립해야 한다’는 결심이 자라 났다. 병을 이겨낸 뒤라 그런지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예전 에는 막막하게만 보이던 풍경이 이제는 기회처럼 보였다. 일요일이면 전차를 타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시간을 보냈 고, 비싼 라이카 카메라를 목에 걸고 골목과 시장, 북촌의 기와지붕을 렌즈에 담았다. 지금은 ‘북촌’이라는 이름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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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유명해졌지만, 그때의 북촌은 그저 기와지붕이 촘촘한 동네였다. 고즈넉하고 품위 있는 그 풍경을 나는 좋아했 고, 필름 값이 아까운 줄도 모르고 셔터를 눌렀다. 영화관과 음악회도 자주 찾았다. 그 무렵 문을 연 음악 다방, 서울 대학로의 학림다방은 내 청춘의 작은 아지트 였다. 바흐와 베토벤이 흐르고, 커피 향에 담배 연기가 섞 인 좁은 공간에서 젊은이들은 인생과 예술을 이야기했다. 골목과 라디오 수리점, 작은 구멍가게와 고전 음악실—세 월이 흘러 하나둘 사라져 간 것들이지만, 그때의 나는 사 라질 것들을 미처 알지 못한 채 그저 새로움을 즐기고 있 었다. 세월은 많은 것을 지워 갔지만, 사라진 것들만 붙잡고 살 수는 없었다. 나는 과거의 향수보다 미래의 준비를 택 했다. 공장이 다시 서고 상점이 문을 열고 사람들 얼굴에 희망이 번져가던 그 시절, 나는 회사 일을 하면서도 언젠 가 내 이름을 건 회사를 세우겠다는 생각을 거듭 다졌다. 그 무렵 인생의 반려자를 만났고, 동시에 내 사업을 시작 했다. 병을 딛고 선 한 청년이 마침내 무대 앞으로 걸어 나오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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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와의 만남

아현동 하숙집 옆에는 ‘임산부인과’가 있었다. 원장 부 인의 동서가 내 처 이모님이라, 우리 집안 여자들은 모두 그 병원에서 아이를 낳았다. 당시로서는 드문 여의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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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이었고, 세련되고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분이었다. 그 남편—후에 나와 큰 인연을 맺는 분—이 어느 날 나 를 부르더니, 영화배우 사진이 인쇄된 카드를 여러 장 내 밀며 한 장을 고르라고 했다. 장난처럼 보였지만, 지금 돌 이켜보면 내 ‘취향’을 슬쩍 떠보는 복선이었다. 정작 내가 어느 배우를 골랐는지는 기억에 없다. 얼마 뒤 그는 한 아가씨를 소개해 주었다. 수도여자사 범대 국문과를 다니던 임원옥. 미리 챙겨 준 영화표를 들 고 우리는 광화문 국제극장으로 갔다. 그해 새로 문을 연 극장이었다. 앤서니 만의 영화 「세레나데(SERENADE)」 시골 포도 농장 청년이 신이 내린 목소리로 최고의 성악 가가 되어 가는 이야기였다. 마리오 란자의 노래가 극장 안을 울리자, 그녀는 넋을 잃은 듯 스크린에 빠져들었다. 나는 영화보다 그 표정을 더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 순간 알았다. 내 마음이 이미 한 사람에게로 향하고 있음을. 식사 자리에서 나는 괜히 긴장해 물컵을 쓰러뜨렸다. 일부러였는지, 정말 실수였는지는 지금도 확신할 수 없 다. 다만 그 어색함을 함께 웃으며 넘기던 그녀의 눈빛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 후로 우리는 자주 만났고,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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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백했다. 그녀는 조용히 웃으며 내 손을 잡아주었 다. 상견례 자리에서 장인어른은 한참 나를 보시더니 이렇 게 말씀하셨다. “결혼하면 밥은 안 굶기겠구먼.”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밥만 안 굶기는 게 아니라, 반 드시 호강시켜 드리겠습니다.” 결혼식 들러리는 고향 친구 박명서가 섰다. 부산 피난 시절 다시 만난 죽마고우로, 그의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 는 고향에서 술친구였다. 박명서를 보면 자연스레 아버지 와 연백 생각이 났다. 그는 신촌의 한 식당에서 불이 났을 때 2층 창문에서 뛰어내려 가까스로 살아난 일이 있었다. 그 무모하면서도 끈질긴 생존담은, 내게 늘 ‘우리는 여기 까지 와 있다’는 묘한 위안을 주었다. 대한염료 전무의 아들 김승호와도 서울에서 가끔 만났 다. 그의 여동생과도 한때 왕래가 있었는데, 훗날 그는 유 명 아나운서의 아내가 되었다. 이런 인연들이 하나둘 엮 이며, 전후 서울의 작은 인간관계망이 나의 젊은 날을 지 탱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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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내 결혼과 초기 사업의 든든한 버팀목은 언제 나 누님과 매형이었다. 아이들 사진첩을 들추다 나는 깜 짝 놀랐다. 입학식과 졸업식 사진마다 두 분이 빠지지 않 고 서 있었던 것이다. 정작 아버지인 나도 그러지 못했는 데, 두 분은 늘 내 자리를 지켜주셨다. 나는 내 힘으로 서 있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인생의 고비마다 늘 누군가가 조용히 받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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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사랑을 키워가던 바로 그때, 머릿속에는 늘 같은 생각이 맴돌았다. 이제는 내 이름을 걸고 해야 한다는 것. 부산과 서울에서 남의 사업을 도우며 쌓은 경험은 충분했 다. 1957년, 나는 결혼과 동시에 창업을 결심했다. 주위 의 어른들도 “이제 독립할 때가 됐다”고 등을 떠밀었다. 피난 도시에서 배운 상업 감각과 “스스로 서겠다”는 의지 만을 가지고 나는 융기산업(隆起産業)을 세웠다. 말 그대 로 ‘돋아오른다, 우뚝 일어선다’는 뜻을 스스로에게 걸어 본 셈이었다. 사무실은 서울역 근처 봉래동의 작은 건물 한쪽—절반 은 치과였고, 나머지 절반에 ‘융기산업’ 간판을 걸었다. 그곳이 나의 첫 본진이었다. 전화 한 대, 책상 몇 개, 그리 고 수입 견적서와 영수증들이 첫 자산의 전부였다. 내 사업은 처음부터 무역이었다. 화공약품, 나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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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지, 수은, 아라비아고무(우표풀용), 철판, 심지어 냉장 고까지, 들여올 수 있는 건 뭐든 다뤘다. TV를 사려면 보 증인이 필요하던 시절, 냉장고 수입은 모험이었지만 나는 겁이 없었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이라면 언젠가 는 다 팔린다’는 단순한 믿음이 있었다. 철판을 취급하기 시작했을 때는 창고조차 없었다. 봉래

“도둑맞지 않겠느냐?”

동 길바닥에 철판을 깔아놓고 팔았다.

사람들이 걱정했지만, 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걸 들고 달아날 사람이 어디 있겠소?” 실제로 아무도 훔쳐 가지 못했다. 철판은 너무 무거웠 고, 나는 그만큼 단순하고 현실적인 방식으로 일했다. 그 철판에 아연도금을 입혀 팔아 수익을 냈을 때, ‘상품은 아 이디어와 실행이 합쳐질 때 비로소 돈이 된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달았다. 한편 나는 섬유 원료인 갈포(葛布)에 눈을 돌렸다. 산림 청이 농가소득 향상과 수출 증진책으로 갈포 생산을 지원 하던 시절, 나는 그 선봉에 서서 일본 시장을 두드렸다. 갈포 염료 수출에 성공하면서 일본 바이어들과의 인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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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겼고, 그 인연으로 일본에서 갈포를 벽지로 만드는 기 술까지 배우게 되었다. 훗날 제조업으로 옮겨 가는 발판 이 되었고, 나중에 동남갈포공업으로 이어지는 긴 여정의 씨앗이 바로 여기서 뿌려졌다. 하나의 거래가 다음 시대 를 여는 문이 된 셈이다. 물론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비료를 들여왔던 어 느 해, 정권이 갑작스럽게 가격 동결 조치를 발표했다. 시 장은 얼어붙었고, 창고에 쌓인 비룟값이 폭락했다. 회사 는 흔들렸고, 나도 함께 흔들렸다. 나는 은행에서 500만 원을 융자받아 간신히 버텼다. 그때 매형이 조용히 말했 다. “자네, 은행 돈 쓰면 잠 못 잘 걸.” 과연 그랬다. 며칠을 뜬눈으로 보냈다. 남의 돈으로 버 틴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불안과 책임감이 어떤 것인지 온몸으로 배웠다. 그 이후 나는 평생의 원칙을 세웠다. 될 수 있으면 남의 돈이 아니라, 내 힘으로 버틴다. 그 다짐은 이후 갈포 벽지 사업, 그리고 동남갈포공업 으로 이어지는 나의 긴 여정의 기초가 되었다. 피난민 청 년으로 시작해 병을 이겨내고, 봉래동의 작은 사무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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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연 융기산업은 그렇게 서서히—그러나 꾸준히—‘융 기(隆起)’해 가고 있었다. 겉에서 보기에는 작은 간판 하 나였지만, 내게는 전쟁과 피난, 병과 가난을 통과한 한 인 간이 비로소 자기 이름으로 세상과 마주 서는 첫 선언이 었다.

제2장 청년 시절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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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수출업자로 변신하다

8. 세계 시장을 개척하다

9. 박정희 시대와 나

10. 생의 전환점이 된 교통사고

사업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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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민이 쓸 물건은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 생각이 점점 확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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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비드 레터맨

수출업자로 변신하다

나는 여러 사람의 성공담을 많이 읽어봤지만 모두 분석해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성공의 전환점이 실패의 이유와 책임을 다른 곳에 전가하려고 하지 않은 순간에 찾아온다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 깨닫고 헌신적인 생활을 시작한 순간 모든 것은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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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이 끝나고 사회가 점차 안정을 찾아가자, 모 든 것이 부족했다. 피난민 수백만 명이 이남으로 내려왔 지만 공장은 파괴되었고, 전력도 부족했다. 생필품은 거 의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했다. 그만큼 외화가 새어 나가 고 있었다. 나는 융기산업을 통해 각종 화공약품과 철판, 비료, 갈포 원료를 수입하며 ‘부족한 것’을 채우는 역할을 맡고 있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언제나 물음표가 있었다. 그때 발 빠른 기업가들은 일찍이 제조업으로 방향을 틀 고 있었다.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 대표적이었다. 1953년 부산에서 제일제당을 세우고, 이듬해 대구에 제일모직을 설립했다. 설탕과 직물—당시 가장 귀하던 생필품이었다. 그의 사업은 정부의 ‘수입대체 산업화’ 정책과 맞물리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수입품을 국내에서 직접 생산하는 정 책은 한국 산업화의 첫 불씨가 되었다.

제3장 사업가의 길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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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무역업을 하면서 이런 흐름을 예의주시하고 있 었다. 1950년대 후반에 이르자 수입업은 과당 경쟁으로 수익성이 급격히 떨어졌다. 정부 정책 하나에 가격이 동 결되고, 창고에 쌓아둔 비룟값이 순식간에 반 토막 나는 일을 겪으면서, 나는 ‘수입업만으로는 오래 버티기 어렵 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언제까지나 외국 물자 만 들여오다가는 한계가 분명했다. ‘우리 국민이 쓸 물건은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 생각이 점점 확고해졌다. 단순한 애국심이 아니라, 계속 사업을 한다면 언젠가 제조업으로 옮겨 타야 한다는 냉정한 계산이기도 했다. 나는 자본이 풍족한 것도, 배경 이 든든한 것도 아니었지만, 최소한 무엇을 준비해야 하 는지는 알 수 있었다. 제조업으로 전환할 시기가 왔음을 직감했다. 그 무렵, 나라 안팎의 정세도 급변하고 있었다. 내가 이 런저런 사업 구상으로 여러 나라를 오가던 동안, 한국에 서는 4·19 혁명이 일어났고, 곧이어 5·16 군사정변이 뒤 따랐다. 새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의장은 경제개발을 최 우선 과제로 내세웠고,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가 서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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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전체를 덮어 가고 있었다. 그해 11월, 신문 한 장의 사진이 내 인생의 방향을 바꿔 놓았다.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의장이 케네디 대통령 부 부와 함께 백악관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그런데 내 눈길 은 사람보다 벽으로 향했다. 그 벽에 걸린 벽지 무늬가 어 딘가 익숙했다. ‘저건 갈포벽지잖은가?’ 갈포벽지는 칡넝쿨 줄기를 삶아 손으로 짜내 만든 고급 벽지다. 습도 조절, 방음, 온도 유지, 자연스러운 질감까 지 갖춰 유럽과 미국에서도 인정받는 천연 벽지였다.

제3장 사업가의 길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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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의 벽을 장식할 만큼 품격 있는 소재라면, 한국에 서도 반드시 해볼 만한 사업이었다. 내가 수입·수출을 오 가며 갈포 염료를 취급하던 경험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지 는 영역이었다. 그 순간 일본에서 만난 한 사람이 떠올랐다. 갈포벽지 장인 가키자와(柿澤) 씨였다. 대한염료 시절, 내가 갈포 염료를 수출하던 인연으로 알게 된 사람이다. 그는 시즈 오카에서 3대째 갈포벽지를 만드는 집안이었다. 나는 곧 장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가키자와는 몇 년 만에 만난 나를 반갑게 맞았다. 내가 한국에서 갈포벽지를 만들고 싶다고 하자 그는 웃으며 말 했다. “한국은 칡이 잘 자라는 땅이니까 원료 걱정은 없을 겁 니다. 게다가 인건비도 낮으니 국제 경쟁력도 충분하지 요.” 그의 말은 내게 확신을 주었다. 그는 기술 지도를 흔쾌 히 허락했다. 며칠 후 그의 집에 초대를 받았을 때,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거실의 벽을 장식한 갈포벽지가 무려 50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색이 바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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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고, 오히려 세월이 더한 은은한 멋이 배어 있었다. 나는 그 벽 앞에 한동안 서 있었다. ‘이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그의 아들 오카모토는 나와 동갑이었고, 우리는 금세 친 구가 되었다. 나는 일주일 가까이 시즈오카에 머물며 부 자(父子)에게 갈포벽지 제작 기술을 배웠다. 손끝으로 섬 유를 고르고, 천천히 말리고, 바탕에 문양을 입히는 과정 하나하나가 예술이었다. 무역상으로 쌓은 감각 위에, 비 로소 ‘만드는 사람의 눈’을 더하는 시간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시장조사에 나섰다. 그 당 시 농촌에는 여전히 초가집이 많았고, 벽에는 신문지를 바르고 사는 집이 대부분이었다. 한지로 벽을 바르는 집 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나는 갈포벽지가 고급 주택을 중심으로 수요를 만들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 리고 장기적으로는 해외시장까지 나아갈 수 있으리라 생 각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제품이 출시되기도 전에 해외 주문 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한국산 칡은 일본산보다 곧고 질 겨 벽지 원료로서는 훨씬 우수했다. 처음 수출한 나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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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었다. 국내 판매를 시작하기도 전에 생산품의 거의 전부가 수출로 빠져나갔고, 우리 제품은 “한국에서 이런 벽지가 나오느냐”는 놀라움과 함께 시장에 소개되었다. 나는 여러 차례 일본을 오가며 기술을 다듬고, 설비를 들 여와 본격적인 생산 준비에 착수했다. 1962년, 동남갈포공업(東南葛布工業)을 설립했다. 연희 동에 3,000평의 부지를 매입해 공장을 세웠고, 고급 갈 포벽지 생산에 전념했다. 무역회사 융기산업에서 쌓은 거 래 경험과 인맥이 제조업의 초석이 되었고, 갈포벽지는 내 인생 두 번째 장을 여는 무대가 되었다. 내 나이 서른 이었다. 수입상에서 제조업자로, 또 수출업자로 거듭나는

새로운 인생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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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커덕, 철커덕……” 갈포벽지 작업장의 젊은 여직원 들이 베틀을 움직이는 소리가 일정한 리듬을 이룬다. 작 업장 안에는 마른 칡넝쿨의 향긋한 냄새가 가득했다. 삶 은 칡의 껍질을 벗겨 2~5미터 길이의 섬유를 뽑아내고, 그것을 손으로 찢어 가늘게 만든 뒤 씨줄과 날줄로 엮는 다. 그 과정을 통해 길이 17센티미터, 둘레 7센티미터의 갈사(葛絲)가 직조기에 걸리고, 북이 톡톡 튀며 한 폭의 벽지가 짜여진다. 베틀보다 단순하지만 손끝의 감각이 전 부였다. 한 줄이라도 걸리면 기계는 멈췄고, 손으로 바로 잡아야 했다. 기술은 금세 익혔지만 숙련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손이 빠른 직원들은 하루에 여덟 자 다섯 치짜리 피륙 네 필을 짰고, 익숙해지면 여섯 필도 거뜬했다. 하지만 벽지의 품 질은 짜는 솜씨보다 원료 처리—발효와 표백의 기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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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 있었다. 표백이 고르지 않으면 색이 들쭉날쭉했고, 금세 퇴색했다. 그래서 나는 늘 공장에 들어가 눈으로 확 인했다. 갈포벽지의 진가는 자연 그대로의 빛깔과 질감 에 있었다. 칡의 거친 숨결이 그대로 살아 있으면서도 실 내의 공기를 부드럽게 감싸는, 말 그대로 ‘벽에 붙은 살아 있는 직물’이었다. 어느 날 나는 소설가 송기숙의 『자랏골의 비가』에서 이 런 구절을 읽었다. “갈포벽지라는 아주 비싼 고급 벽지, 그것도 외국으로 수출된대요. 그 원료가 여러분 곁의 칡덩굴 아닙니까?” 그 문장을 읽으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렇다. 우리가 만든 것은 단순한 벽지가 아니었다. 이 땅의 풀뿌리와 손 끝으로 빚은 작품이었다. 숙련공이 된 이들은 부업보다 훨씬 높은 수입을 올렸고, 결근하는 일도 없었다. 나는 그 들의 일하는 모습을 보며 진정한 보람을 느꼈다. 사람들 에게 일자리를 주고, 그들의 손끝으로 가정을 지탱하게 하는 것—그것이야말로 제조업의 즐거움이었다. 국가의 경제개발 정책이 속도를 내면서 사업은 순항했 다. 동남갈포공업은 점차 “갈포벽지 하면 떠오르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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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되었고, 전쟁 직후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웠던 나라에 서 우리의 벽지가 영국을 비롯한 외국의 거실을 장식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나 자신도 믿기 어려운 변화였다. 특히 우리의 갈포벽지가 프랑스 파리의 대형 전시회에 초청되었을 때, 나는 기업의 성취보다 더 큰 감정을 느꼈 다. 그것은 오랜 세월 함께 흘린 땀의 결실이자, 후진국이 던 대한민국의 저력이 세상 앞에 처음으로 또렷하게 드러 난 순간이었다. 그 전시장에서 나는 우리 제품이 아니라 우리 사람들의 힘이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자부심을 느꼈다.

*** 제조업의 어려움

그렇다고 처음부터 순조로운 건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 는 불량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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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 직원들이 숙련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고, 또 생산 량에 따라 임금을 지급하다 보니 품질보다 속도를 우선하 는 분위기가 자리 잡았다. 그 시절 한국은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막 넘어가던 때였다. ‘공장 일’이 생활의 중심 이라는 인식이 아직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 나는 미국의 한 공장을 방문하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작업 중 잡담도 없고, 지각도 없었다. 그들은 일할 때 오 직 일만 했다. 나는 그들의 태도에서 “왜 미국이 세계 최 강국인가”를 보았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결심했다. 우리 공장도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 먼저 출퇴근과 지각, 조퇴에 관한 규정을 엄하게 세웠 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품질이었다. 창업 후 몇 해가 지나도 불량률은 좀처럼 줄지 않았다. 한때는 회사를 접 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기술은 배울 수 있지만, 마 음까지 바꾸기는 이렇게 어려운 것인가’ 하는 회의도 들 었다. 그 무렵 아주 성실한 근로자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그 는 남들보다 두 배 가까운 생산량을 올리면서도 불량품이 거의 없었다. 나는 그를 칭찬하고 모범으로 삼으라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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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오히려 동료들은 그를 따돌렸다. 결국 그는 회사를 떠 났다. 그 일을 겪고 나서 나는 ‘기술’보다 ‘마음’이 더 어 렵다는 걸 배웠다. 그 후 나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었다. 출퇴근을 엄격히 지키되, 품질 중심으로 제도를 설계했다. 하루에 다섯 필 을 짜던 사람에게 “이제는 두 필만 짜라. 그래도 다섯 필 짠 임금을 주겠다”고 했다. 일주일 뒤 불량률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그래도 만족스럽지 않아 이번에는 이렇게 말했 다. “앞으로는 한 필만 짜세요. 대신 불량품을 내면 한 필의 임금도 없습니다.” 그 한마디가 전환점이 되었다. 한 달 뒤, 공장에서 불량품이 거의 사라졌다. 물론 처음 엔 적자가 났다. 하지만 기적 같은 변화가 뒤따랐다. 근로 자들이 스스로 더 많이, 더 정성스럽게 짜기 시작한 것이 다. ‘미안한 마음’이 ‘자발적 성실’로 바뀌었다. 생산량은 점점 늘어 결국 사람당 다섯 필을 넘어섰고, 나는 약속대 로 임금을 대폭 인상했다. 그날 공장 안에서는 박수가 터 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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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알았다. 기업의 성장도, 품질의 완성도 결국 은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그 믿음이 있었기 에, 동남갈포공업은 마침내 세계 벽지 시장을 향해 나아 갈 수 있었다.

1960~70년대는 나라의 국운과 내 사업의 운이 맞물려 상승한 시기였다. 1970년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자, 동남 갈포공업도 새로운 시대의 물결 위로 떠올랐다. 나는 이 운동을 단순한 국가 정책이 아니라,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시대 전체의 열망이 모인 움직임으로 보았다. 그 시절 매일 새벽이면 동네마다 ‘새마을노래’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빗자루와 삽을 들고 골목을 쓸며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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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열었다. ‘근면·자조·협동’이라는 세 단어가 전국의 구 호가 되었고, 새마을의 초록 깃발은 농촌을 넘어 도시·학 교·공장으로 퍼져갔다. 새마을운동은 단지 마을 정비사업 이 아니었다. 그것은 의식의 개혁이었고, 공동체의 재건 이었다. 1973년 이후 운동은 공장으로 확산되었다. 정부는 산 업현장의 생산성과 노사협력을 동시에 끌어올리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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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새마을운동’을 제창했고, 나는 곧장 동참했다. 동남 갈포공업은 새마을공장 1호부터 7호까지를 연이어 운영 하며 선도적 역할을 했다. 우리는 농촌 유휴인력을 모아 칡넝쿨을 채취하고, 그 원료를 벽지로 가공해 수출했다. 농림부 자료에 따르면 칡넝쿨 10만 관(375t)을 캐내려면 연인원 27만 명이 필요했다고 한다. 그만큼 농민에게 일 자리를 주고, 농촌의 숨통을 틔워준 셈이다. 공장 안에서는 ‘새마을분임조’를 중심으로 품질관리, 에 너지 절약, 무결점 운동이 전개되었다. 직원들은 스스로 작업장을 개선했고, 나는 기숙사·식당·휴게실을 직접 마 련했다. ‘노동자를 가족처럼, 공장 일을 내 일처럼’이라는 구호 아래, 모두가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렸다. 현장이 살아

나자 회사도, 사람도 함께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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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새마을운동에 참여한 이유는 정부의 지시 때문만 은 아니었다. 가난의 사슬을 끊고자 했던 한 세대의 염원 이 내 안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농촌은 초가와 우 물에 의존하던 시대였다.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는 단지 구호가 아니라 삶을 바꾸겠다는 절박한 약속이었다. 아내와 함께 수원 새마을연수원에서 합숙훈련을 받았던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다. 그곳에서는 산업은행 총재, 제 일은행장 같은 금융계 인사들까지도 같은 작업복을 입고 화장실을 청소했다. 권위나 계급의식이 사라진 현장에서 나는 새마을운동의 또 다른 얼굴을 보았다. ‘누가 더 높으 냐’가 아니라, ‘함께 나아가자’는 분위기였다. 새마을운동을 통해 나는 내 청춘의 꿈—“함께 잘 사는 사회”—를 현실에서 조금이나마 실현할 수 있었다. 연희 동 본공장을 중심으로 전국 공장을 돌며 분임조 회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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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하고, 농촌의 유휴노동을 일자리로 바꾸는 과정을 지 켜보았다. 국가의 성장과 기업의 성장은 따로 있지 않았 다. 서로의 어깨를 빌려 일어서는 공동의 상승이었다. 지금 새마을운동은 세계적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2013 년 유네스코는 새마을운동 기록물 2만 2천여 건을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유네스코는 “새마을운동은 최빈 국이었던 대한민국이 산업국가로 도약한 경험을 보여주 는 인류의 자산”이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UN과 OECD는 새마을운동을 개발도상국의 빈곤퇴치 모델로 연구하고 있고, 아프리카와 아시아 여러 나라가 한국의 경험을 배 우러 오고 있다. 나는 새마을운동이 단지 경제적 성취를 넘어, 생각을 바 꾸는 운동이었다고 믿는다. 가난을 벗어난 것은 돈만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이 달라진 결과’였다. 그 시절 우리가 품었던 “잘 살아보자”는 마음가짐이, 내 삶의 사업 철학 이자 이 나라 산업화의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갈포 넝쿨을 벽지로 바꾸던 그 현장에서도, 나는 같은 믿음을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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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믿고, 함께 일어나야 한다.’ 내 사업의 이름이 ‘융기(隆起)’였던 것도, 지금 돌이켜보 면 그런 염원의 다른 표현이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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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데이비드 소로

세계 시장을 개척하다

인간의 능력은 아직도 한계가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사람에게는 무엇이 가능한지조차 알 수 없다. 인간이 도전한 일은 너무 적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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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와 1970년대는 한국이 ‘수출입국(輸出立國)’ 을 내걸고 산업화의 초석을 다지던 시기였다. 당시 우리 나라의 산업 수준은 참으로 보잘것없었다. 자원도 변변 치 않았고, 내수시장도 작았다. 1960년 우리 수출액은 3,300만 달러에 불과했지만 수입액은 3억 4,300만 달러 에 달했다. 수출보다 수입이 10배 이상 큰 엄청난 적자 구조였다. 1961년 1인당 국민소득은 82달러로, 179달 러였던 아프리카 가나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전쟁 복구가 시작된 1953년부터 1961년까지 미국의 원조액은 무려 23억 달러였다. 그 숫자를 당시 우리의 수 출액과 견주어 보면 미국 원조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말 그대로 대다수 국민이 미국산 원조 밀가루를 먹고 연명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1950 년대 후반부터 그 원조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무상원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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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유상원조로 바뀌기까지 했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나 라가 파산할 수밖에 없었다. 석유와 밀가루 같은 기초 생 필품도 외화가 없으면 수입조차 할 수 없었다. 당시 미국의 국제정치 잡지인 「포린어페어스(Foreign Affairs)」 1960년 10월호에는 한국에 대해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실업자는 노동인구의 25%,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00달러 이하, 수출은 2,000만 달러, 수입은 2억 달러. 한국의 경제 기적 가능성은 전혀 없다.” 남의 나라 잡지에 실린 냉정한 한 줄이었지만, 현실을 정확히 반영한 진단이었다.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야 했 다. 4·19 혁명 이후 정권을 잡은 장면 정부는 ‘경제제일주 의’를 내걸고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1960년 9월 정부는 이 계획을 공식 정책으로 채택하고, 재원 조달을 위해 미국에 4억 2천만 달러의 외화 지원을 요청했다. 미국 측은 이 계획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고, 장면 총리는 1961년 7월 케네디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그에 앞서 한국 경제관료들이 5월에 미국을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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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가 실무 협의를 벌였고, 5월 15일에는 국무회의에 경 제개발 5개년 계획이 보고되었다. 부흥부는 이날 계획안 을 공식 발표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정권 을 잡은 박정희 정부는 이 계획을 보다 구체화해 수출 주 도형으로 밀어붙였다. 미국 원조가 줄어든 상황에서, 남 은 해법은 사실상 하나였다. “수출만이 살길이다.” 이것 이 1960년대 한국 경제의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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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수출 주종 품목은 광물과 수산물이었다. 생사와 합 판, 철광석과 중석(텅스텐), 무연탄과 흑연, 마른오징어와 활선어, 심지어 돼지털까지 수출 품목이 되었다. 여인들 의 누에치기로 생산한 생사, 엿장수가 시골 아낙네 머리 카락을 모아 만든 가발, 여탕에서 긁어모은 머리카락까지 모두 수출을 위한 원료였다. 돈 되는 것이라면 뭐든지 내 다 팔던 때였다. 쥐 털·다람쥐·갯지렁이·뱀·메뚜기·번데기 까지 수출 대상이 되었다. 귀여운 한국산 다람쥐가 세계 각국으로 팔려가 쳇바퀴를 돌리던 시절이었다. 청와대와 상공부에서는 매일같이 “뭐라도 수출할 것이 없겠는가”를 놓고 회의를 벌였다. 원단 공장에서는 일본 기모노 원단을 가공해 수출했고, 실을 묶어 무늬를 내 염 색하는 홀치기 제품도 효자 품목이 되었다. 시설도 빈약 하고 원자재도 부족했지만, 인건비가 싸다는 점이 유일한 경쟁력이었다. 내가 동남갈포공업을 세운 1962년은 아직 수출 주도 전략이 막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였다. 1963년 상공부 박충훈 장관이 ‘수출제일주의’를 외치며 그해를 ‘수출 제 일의 해’로 선포했고, 한국은 1964년에 들어서야 간신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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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간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할 수 있었다. 그 1억 달러 돌파의 순간을 알리는 일화는 지금도 인상 적이다. 1964년 12월 1일, 박충훈 장관이 박정희 대통령 에게 “어제 날짜로 수출액이 1억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라고 보고하자, 대통령은 눈시울을 붉히며 이렇게 말했다 고 한다. “봐라, 하면 되지 않느냐.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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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것이 없어 미국에 손을 벌리던 나라가 수출로 1억 달러를 벌어들이자, 가난한 농촌 출신 대통령으로서 감격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날을 기념해 11월 30일 은 ‘무역의 날’로 제정되었다. 나는 바로 그 시대의 흐름 속에서 동남갈포공업을 세우 고, 수출업자로서 세계 시장을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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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포벽지의 품질에서 우위를 확보한 뒤, 동남갈포공업 은 자연스럽게 해외시장 개척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갈포벽지를 수출하는 나라는 일본 하나뿐 이었다. 일본산 갈포가 세계 시장을 선점하고 있었지만, 한국산 칡이 더 곧고 질겨 원료 경쟁력만큼은 우리가 앞 선다는 확신이 있었다. 우리가 단합만 한다면, “제대로 된 가격”을 받고 세계 시장을 제패(制覇)할 수 있으리라 생각 했다. 1964년 1월, 갈포벽지 수출조합이 결성되었고, 나는 젊은 나이에 이사로 선출되었다. 이사장과 부이사장 세 분은 내게 아버지뻘 되는 선배들이라 무척 조심스러웠지 만, 나는 첫 총회에서 이런 제안을 했다. “우리 힘을 모아서 5년 이내에 세계시장을 장악합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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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분과 다른 이사들도 원칙에는 동의했다. 국내 업체끼 리는 불필요한 경쟁을 자제하고, 해외시장에서는 한 팀처 럼 똘똘 뭉쳐 협력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그 약속을 믿고, 조합을 중심으로 수출을 조직적으로 키워 보겠다는 기대 를 걸었다. 훌륭한 선배들과 함께 “5년 이내에 세계 시장을 장악하 자”고 선언하고 협약까지 맺었으니, 내 가슴이 얼마나 뛰 었겠는가. 나는 발이 부르트도록 해외를 뛰어다니며 수출 시장 개척에 혼신의 힘을 쏟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시간이 흐르자 약속은 점차 흐려졌다. 각자의 사정과 이해관계가 앞서면 서, 국내에서는 가격을 놓고 경쟁을 벌이고, 해외 시장에 서는 조합의 인감과 추천서를 무단으로 사용해 질서를 어 지럽히는 일까지 생겨났다. 벽지 수출조합의 인감과 추천 서를 위조해 갈포벽지를 수출하여 무역 질서를 문란하게 만든 사건은 지금 떠올려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결국 무역윤리위원회가 나서 해당 업체를 제재했고, 조 합은 그 회사를 제명했다. 나는 그 과정을 지켜보며, 우리 민족의 큰 장점과 아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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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점을 동시에 보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은 훌륭하지만, 함께 힘을 모으는 일에는 약한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해외 교포 사회가 유대인이나 화교 네트워크에 비해 느 슨하다는 말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결국 나는 결심했다. “이제는 독자적인 길을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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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과 더 이상 엮이지 않고, 내 책임 아래 수출을 개척해 나가기로 했다. 그때부터 진짜 ‘맨발의 개척’이 시작되었다. 나는 영국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프랑스, 스칸디나비아 3국 등 유럽 시장을 두드렸고, 미국·캐나다·케냐로 수출 시장을 다양화하며 넓혀 나갔다. 비행기를 타고 세계 곳 곳을 옮겨 다니며 바이어를 만나고, 샘플을 보여주고, 조 건을 조율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다행히 한국산 칡은 일 본산보다 곧고 질겨 갈포벽지 원료로서 품질이 뛰어났고, 공예용 고급 벽지로서 충분한 경쟁력이 있었다. 기술력과 품질, 그리고 성실함이 쌓이자 자연스럽게 주문이 이어졌 다. 동남갈포공업은 1971년 수출 천만 달러 탑을 받으면서 해외 시장에서 본격적으로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1976 년에는 칡넝쿨로 만든 갈포벽지를 백악관과 피카소 미 술관에 납품하는 영광도 누렸다. 농촌의 칡넝쿨이 세계 최고의 권력과 예술이 모인 공간의 벽을 장식하게 된 것 이다. 돌이켜보면, 처음 약속한 대로 “5년 안에 세계시장을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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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다”는 목표를 완전히 이루지는 못했다. 다만, 우리 가 합심만 했다면 훨씬 더 큰 힘을 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 아쉬움과 별개로, 나는 1972년부터 1983년까지 장기간 갈포벽지 수출조합 이 사장을 맡았다. 갈포벽지와 수출에 대한 나의 집념, 그리 고 동남갈포공업의 위상이 그만큼 남달랐기 때문일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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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시장을 개척하겠다고 마음먹은 뒤로는 발바닥이 닳 도록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국내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해외 체류 시간이 더 길 때가 많았다. 지금도 마 음 한켠에 남는 것은 아이들이 한창 자라던 시기에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미안함이다. 아버지로서 제대로 역할 을 다하지 못한 듯하고, 자녀 교육을 아내에게 고스란히 떠맡긴 것 같아 늘 미안한 마음이다. 하지만 하나를 잃으면 다른 하나를 얻는 법이다. 국내 에서보다 해외에서 맺은 인연이 더 많았고, 세월이 흘러 도 그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는 사실은 내 인생의 큰 선물 이다. 처음 만난 바이어가 훗날 진짜 친구가 되기도 했고,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 아들과 인연이 이어지기도 했다. 프랑스의 거래처였던 노빌리스 사의 알라는 내가 늘

“와인 친구”라고 부르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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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리 갈포벽지를 바른 집에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만든 갈포벽지를 보면, 마치 숲 속에서 자는 기 분이 듭니다.” 그 말 한마디에, 시골 산에서 자란 내 마음도 함께 울렸 다. 알라는 늘 말하곤 했다. “사업이라는 건, 자주 만나서 와인 잔을 ‘쨍!’ 하고 부딪 치면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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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떠난 지 오래지만, 지금도 내가 프랑스에 가면 그의 아들, 프랑소와가 공항까지 마중을 나온다. 아버지 의 사업을 물려받은 아들과도 어느새 절친이 되었다. 몇 해 전에도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그는 어김없이 공항으 로 나와 나를 집으로 데려가 와인 잔을 다시 ‘쨍!’ 하고 부 딪쳐 주었다. 이탈리아에는 또 다른 친구가 있었다. 이탈리아 거래선 이자 평생의 친구, 브랜들리다. 그는 우리를 “반도에 사는 사람들”이라 부르며, 이탈리아반도와 한반도 사람들끼리 기질이 통한다고 했다. 그는 팔만대장경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드문 외국인이기도 했다. 어느 날 프랑스 프라자 호 텔에서 그와 와인을 마셨는데, 그는 와인 라벨을 떼어다 다리미로 곱게 펴더니 거기에 이렇게 적어 내게 건넸다. “이 와인은 나의 영원한 친구 서병식과 함께 마셨습니 다. 늘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그는 그림과 벽화, 심지어 거북이까지 선물로 보내주곤 했다. 한 번은 그의 사무실에서 내 와이셔츠 커프스 버튼 하나가 떨어졌는데, 찾지 못한 채 급히 귀국해야 했다. 얼 마 후 그가 그 단추를 찾아 보험까지 들어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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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알고 보니 값비싼 보석이 박힌 단추라 세관에서 시비까지 붙을 정도였다. 나는 그의 정성과 우정에 깊이 감동했다. 이쯤 되면 물건을 사고파는 거래 관계가 아니 라, 인생의 한 페이지를 함께 나누는 친구라고 불러도 좋 을 것이다. 미국 거래선 도스킨은 유대인이었다. 처음에는 유대인 바이어라고 해서 까다롭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막상 만나 보니 성격이 수수하고 명랑했다. 뉴욕대학 출신으로 박식 했고, 재치도 넘쳤다. 무엇보다 동양 사람 못지않게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미국인 거래선은 자기 집에 외국 손님을 초대하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도스킨은 예 외였다. 그는 나를 여러 차례 집으로 불러 식사를 대접했 고, 그 집에서 먹었던 랍스터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어떨 때에는 내 입맛에는 맞지 않는 음식도 준비해 놓았 지만, 그의 성의를 생각해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그 외에도 내게는 외국 친구들이 많다. 독일 프랑크푸 르트의 드리슬러, 일본의 다나카·다케우치·도미타, 뉴욕 의 차킨, 시카고의 빅터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샌프란 시스코의 얼 키니는 한때 미국에서 가장 잘나가던 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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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운영하던 사람이었다. 우리 아이들과도 친해져 함 께 식사를 하고, 골프도 치며 지냈다. 수출 거래로 시작된 만남이 세대를 잇는 우정으로 자라난 셈이다. 아들은 여 전히 그의 아이들과 좋은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 손자 원 상이는 버클리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며 첫 케이스 스터디

과제로 키니를 인터뷰해 소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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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넉넉한 자본도, 대단 한 노하우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버 틸 수 있었던 힘은 결국 해외 거래선들의 신뢰였다. 그들 은 내 말을 믿고 주문을 주었고, 결제 대금을 제때 보내주 었다. 때로는 신용장(L/C)을 곧바로 열어 주어 다음 거래 를 준비할 수 있게 숨통을 틔워 주기도 했다. 북유럽 핀란드의 제지공장에 갔을 때 겪은 일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도착해 보니 공장 앞 게양대에 태극기가 걸려 있었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는 순간 가 슴이 뭉클해져 눈물을 참지 못했다. 공장 책임자가 다가 와 나를 꼭 끌어안았고, 이유를 다 알지 못하면서도 함께 울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핀란드 역시 러시아와 스웨덴 사이에서 오랫동안 시달린 역사를 가진 나라였다. 외세와 내전의 상처를 겪은 두 나라 사람들이, 말로 다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했던 것이다. 그날 우리는 종이 수입 계약을 맺었고, 그 책임자와 함께 사우나를 즐기고, 저녁 에는 댄스파티에도 초대를 받았다. 스칸디나비아 여러 나라를 도는 길에 스웨덴의 어느 집 을 방문한 일도 있다. 그 집은 제법 큰 가정집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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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석으로 장식한 1층 홀을 빼고 지하 1층부터 3층까지 모든 벽을 우리 갈포벽지로 도배해 놓고 있었다. 나는 그 집을 둘러보며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 “이제 유럽 사람들의 안방까지 들어왔구나. 언젠가는 전 세계인의 안방도 우리의 벽지로 채워야겠다.” 이렇게 세계 곳곳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 그리고 그 인연 위에 쌓인 신뢰가 내 수출 사업의 가장 튼튼한 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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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다. 사업은 결국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다. 숫자와 계약 서 뒤에는 늘 사람이 있고, 그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이 있다. 돌이켜보면, 내 수출 인생의 비결은 자본도, 곡예 같은 기술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말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신뢰는 곧 수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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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우선 천천히 걷기 시작해야 한다.

- 셰익스피어

박정희 시대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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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우 아버지, 차 한 잔 드세요.” 1971년, 동남갈포공업이 수출 천만 달러 탑을 받던 날 이었다. 청와대 시상식이 끝나고 다과 시간이 이어질 때, 육영수 여사가 다가와 커피잔을 내밀며 내게 이렇게 말했 다. 그 순간 주변이 술렁였다. 대통령 부인이 기업인을 그 렇게 다정히 부르는 장면은 그 자리에 있던 누구에게도 낯선 광경이었다. 나 역시 얼떨떨했지만, 두 손으로 잔을 받아 천천히 커 피 향을 맡았다. 그 잠깐 사이에 여러 사람의 시선이 내게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수출탑보다 더 큰 영예라도 얻은 듯한 분위기였지만, 사실 그 따뜻한 호칭에는 사연이 있 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 군과 내 큰아들 서창우 가 같은 국민학교에 다녔고, 내가 그 학교의 육성회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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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고 있었다. 학부모로서 여러 차례 학교 행사에 참석하 면서 영부인을 뵐 기회가 있었고, 그런 인연이 있었기에 공식 석상에서도 나를 “창우 아버지”라고 불러 주신 것이 다. 그분의 목소리는 유난히 온화했다. 사람의 이름을 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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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조차 따뜻함이 묻어 있었다. 그날 청와대의 공기, 찻잔 의 온기, 그리고 그 한마디—“창우 아버지, 차 한 잔 드세 요.”—그 모든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해는 내 인생에서도, 대한민국의 역사에서도 특별한 해였다. 우리 동남갈포공업이 천만 달러 수출을 돌파했 고, 나라 전체의 수출액이 마침내 10억 달러를 넘어섰다. 나라가 가난의 고개를 겨우 막 넘기기 시작하던 시기였 다. 몇 해 뒤,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의 총탄에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깊은 충격에 빠졌다. 정치 문제 에는 무심한 편이었던 나도 그분의 죽음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이후 한동안, 내 귀에는 늘 그 따뜻한 목소리가 맴 돌았다. “창우 아버지, 차 한 잔 드세요.” 그 한마디는 내게 단순한 인연을 넘어, 거친 시대 속에 서도 분명히 존재했던 인간미의 한 단면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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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우리 회사는 거의 해마다 천만 달러 이상을 수출했다. 그 성과의 절반은 직원들의 땀과 헌신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정부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 덕이었다. 내가 회사를 세운 시기와 박정희 정권이 수출 중심의 경 제개발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시기는 거의 일치한다. 처음 박정희 정부는 통화개혁을 통해 정부 주 도의 자립경제를 꾀했지만, 곧 한계를 느끼고 실용주의 노선으로 방향을 틀었다. 경제기획원의 젊은 엘리트 관료 들, 미국의 경제고문단, 이병철 회장을 비롯한 기업가들 이 머리를 맞대면서 민간 중심의 성장 전략이 마련되었 다. 그 결과, 정부는 길을 닦고 제도를 만들고, 기업은 그 길을 따라 뛰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 면 거칠고 미완의 제도였지만, 당시 현장에서 느끼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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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번 밀어붙여 보자”는 기세가 분명히 있었다.

그 시절 한국은 팔 수 있는 건 무엇이든 팔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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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물과 수산물이 주력이었고, 아낙네들이 누에를 길러 생 산한 생사(生絲)가 귀중한 외화를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 성과들이 모여 1964년 수출 1억 달러 달성의 기적을 만들었다. 그때부터 기업인들은 말 그대로 불철주야 뛰었 다. 수출은 곧 자신의 생존이었고, 동시에 나라의 명운이 기도 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971년에는 수출 10억 달러를 돌파 했고, 우리 회사도 그해 천만 달러를 기록했다. 당시 국가 총수출의 100분의 1을 우리가 담당한 셈이니, 직원들의 자부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후 약 7년 만인 1977년 말에는 한국이 수출 100억 달러를 넘어섰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고 한다. “10억 불에서 100억 불이 되는 데 서독은 11년, 일본 은 16년 걸렸다. 우리는 불과 7년 걸렸다. 새로운 출발점 으로 삼자.” 그 문장을 나중에 접했을 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 통령이 “수출이 아니면 죽음이다”라고까지 말하던 이유 를 그때쯤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우리에게 수출은 단지 경제지표가 아니라, “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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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후퇴할 수 없다”는 공동의 절박함에 가까웠다. 우리 회사는 차관을 들여온 적도, 특혜 융자를 받은 적 도 없었다. 그러나 수출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변수가 생길 때면 정부 관계자들이 직접 나서서 문제를 풀어 주 곤 했다. 서류 절차가 막혀 선적을 못 하게 생긴 일이 있 었는데, 관계 부처 공무원이 늦은 밤까지 도와준 일도 있 다. 당시 상공부 장관이 우리 공장을 직접 방문해 격려해 주 었던 순간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수출을 위해 온 힘을 다하던 우리에게는 큰 영광이자 동력이었고, 직원들 역시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되었다. “정부는 기업을 밀어주고, 기업은 나라를 끌어줘야 한 다.” 어느 한쪽만 잘해서는 버티기 어려운 시대였고, 서로 기 대고 끌어줘야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나는 분명 행운아였다. 나라가 막 산업 화의 걸음을 떼던 시기에 기업을 시작했고, 시대의 흐름 과 보폭을 맞추어 함께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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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행운이 어느 한 사람 덕분만은 아니었다. 정부의 선택, 현장의 노동, 기업인의 모험, 농촌과 도시의 희생이 함께 섞여 만들어낸 시대의 결과였다고 보는 편이, 그 시절을 더 정확하게 기억하는 방법일 것이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떠올릴 때마다 자연스럽게 ‘밥하 는 대통령’이라는 표현을 생각한다. 그가 남긴 정치적 유 산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엇갈리고, 앞으로도 계속 논쟁 이 이어질 것이다. 다만 당시 수출 현장에서 뛰던 한 기업 인의 눈에 비친 그는, 무엇보다 보릿고개의 배고픔을 직 접 겪은 세대의 사람, 국민이 굶지 않는 나라를 만들겠다 고 마음먹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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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16 거사 새벽, 혁명공약 제4항에 그는 이렇 게 썼다.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 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이 문장은 정치적 구호로도 읽히지만, 당시 현실을 생각 해 보면 한 사람의 다짐이자 세대의 목표이기도 했다. 그 다짐은 산업화 정책으로 이어졌고, 결과적으로 근대화의 초석이 되었다. 서독을 방문해 광부들 앞에서 했던 연설도 마찬가지다. “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 나오지 않 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정말 반드시…” 그 장면에서 대통령과 광부들이 함께 울었다고 전해진 다. 권위자의 눈물이라기보다, 같은 가난을 겪었던 한 국 민의 눈물로 기억되었다. 물론 그가 걸었던 길에는 지금도 평가가 갈리는 선택 들이 많다. 한일국교 정상화는 거센 반대 속에 추진되었 고, 베트남 파병 역시 많은 희생과 상처를 남겼다. 시간 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빛과 그늘을 함께 보게 된다. 다 만 내가 그 시절 수출 현장에서 체감한 것은, 일본 자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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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 들어온 뒤 산업 기반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는 사 실, 그리고 베트남 파병으로 얻은 외화와 미국의 지원이 KIST와 대덕연구단지 같은 기초 연구 인프라로 이어졌다 는 현실이었다. 그 선택들이 “옳았느냐, 그르냐”는 후대의 역사와 학계 가 더 깊이 논할 문제일 것이다. 당시의 나는, 그리고 많 은 기업인들은, 눈앞에서 바뀌어 가는 공장과 항구, 도로 와 항만, 전력 사정을 통해 “나라가 달라지고 있다”는 느 낌을 먼저 받았다. 1960년대 초, 우리나라 공장들은 참으로 형편없었다. 칫솔은 두 번만 쓰면 털이 빠졌고, 치약은 뚜껑이 아니 라 옆구리가 먼저 터졌다. 그런 나라가 불과 20여 년 만 에 수출 100억 달러를 넘어섰다. 그것은 숫자만의 변화 가 아니라, “이제 우리도 해볼 수 있다”는 마음가짐의 변 화였다. 그 시절 사람들은 “잘 살아보세”를 노래하며 서로를 다 독였다. 정부는 밤낮없이 수출을 독려했고, 기업은 밤새 제품을 포장했다. 농촌에서도, 도시 공장에서도,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려 했다. 그 모든 열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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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겹겹이 쌓여 오늘의 한국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이제 나는 아흔을 넘기고, 그 시절을 한 걸음 떨어져 돌 아보게 되는 나이가 되었다. 경제가 흔들리고, 사회의 신뢰가 시험받는다는 말을 자주 듣는 요즘, 나는 다시 이 런 생각을 한다. “정치를 앞세우기 전에, 먼저 국민의 밥을 생각하는 지 도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것은 특정 인물을 다시 불러내자는 뜻이 아니다. 말보다 실행이 앞서고, 이념보다 생계를 먼 저 생각하며, 성과를 떠나 책임을 지려고 했던 리더십에 대한 그리움에 가깝다.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한 세 대의 절실함, “다시는 보릿고개를 겪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다른 모습으로 이어지기를 바 랄 뿐이다. 그렇게 본다면, 내가 기억하는 ‘밥하는 대통령’은 한 사 람에 대한 찬사가 아니라, 가난을 딛고 일어서고자 했던 시대 전체의 얼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시대를 함께 통과하며 기업을 일으킨 한 사람으로서, 나는 그 빛과 그 늘을 함께 떠올리며 조용히 고개를 숙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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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톨스토이

생의 전환점이 된 교통사고

시간이 흘러간다고 우리들은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옳은 표현이 아니다. 가고 있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우리들이다. 우리들이 보트를 타고 강을 건널 때 보트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강가의 경치가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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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50대 후반이던 나는 태안 만리포 별장으로 향 하고 있었다. 마음이 답답하거나 잠시 숨을 고르고 싶을 때면 어김없이 찾던 곳이었다. 하늘은 쾌청했고 바람도 상쾌했다. 평소 같으면 어렴풋한 불길한 예감이 스치곤 했지만, 그날은 전혀 없었다. 다만 “이곳은 사고 다발 지 역입니다”라는 표지판이 몇 번 눈에 들어왔을 뿐이다. 그 순간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시외버스가 중앙선을 넘 어 그대로 돌진해 왔다. 버스가 흔들리며 치솟더니 내 차 위로 덮쳤다. 쿵—, 우지끈—. 눈 깜짝할 새 세상이 꺼졌다. 의식은 희미했고 몸은 움 직일 수 없었다. 금속이 찌그러지는 소리, 먼 곳에서 울리 는 사이렌 소리만이 흐릿하게 들렸다. 누가 나를 꺼내 구 급차에 실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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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병원 응급실에서 유리 파편을 뽑아내는 손길이 어 렴풋이 느껴졌다. 의식이 돌아오자 온몸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피로 젖은 셔츠, 한 짝만 남은 운동화—그 절망적인 풍경 속에서도 희미하게 “살 수 있겠다”는 생각 이 들었다. 그때 내가 사업상 외제 대형 세단을 타고 있었 다는 사실이 생사를 갈랐다. 차는 폐차가 되었지만 나는 남았다.

사고 소식을 들은 가족은 서둘러 움직였다. 응급조치를 받았지만 지방 병원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마침 큰아 이의 장인인 석세일 박사가 서울대병원에 계셨고, 나는 그 의 손에 맡겨졌다. 수많은 척추 수술을 집도해 온 명의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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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침착했고, 나는 그의 손을 빌려 으깨어진 몸을 하나하 나 되찾는 40일을 보내야 했다. 그 시간은 내 인생을 되돌아보는 긴 터널이었다. 여덟 살 무렵 일경의 경찰견에게 물려 허벅지 뼈가 드러났던 일, 전쟁 중 정치보위부에서 개머리판에 얻어맞고 쓰러졌던 밤, 폐결핵을 비관해 바다에 몸을 던졌다가 난간을 붙잡고 살아나기로 결심했던 순간, 피난길의 기총소사와 함포사 격…. 삶은 여러 번 나를 내던졌고, 나는 여러 번 되돌아왔 다. 어느 새벽, 곁에서 흐느끼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아내였다. “왜 울어?”

“옆에 있어 줘서 고마워.”

“살아나 줘서 고마워서요.”

그 짧은 대화 한마디가 병실의 공기를 따뜻하게 바꾸었 다. 퇴원 즈음에는 두통과 어지럼증이 남아 있었지만 견딜 만 했다. 그리고 나는 하나를 깊이 새겼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기억이야말로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이라는 것, 죽 을 각오로 임하면 극복 못 할 일도 두려울 일도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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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천천히 몸을 추스르며 또 하나의 전환점이 왔음 을 직감했다. 서른을 넘겨 제조업을 시작했을 때가 첫 번 째 전환점이었다면, 이제는 정리의 시간이었다. 예순을 훌쩍 넘었고, 갈포벽지 시장도 서서히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2세 경영’, ‘후계자’라는 말이 주위에서 흘러나 왔지만, 나는 내 사업이 물려줄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판 단했다. 내려놓으려면 맑고 깨끗하게 내려놓아야 했다. 그 무렵 성당을 다니기 시작했다. 특별히 경건해서가 아 니라, 일주일에 한 번 마음이 맑아지는 시간이 좋았다. 사 업의 이해득실과 다른 세계, 주고 나누는 데서 기쁨을 느 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온기 속에서 나는 ‘천천히 정리 한다’는 방식을 배웠다. 험한 산을 오르려면 먼저 천천히 걷는 법이다. 명예직으로 이름만 올려두라는 권유도 많았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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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런 은퇴가 얼마나 많은 갈등과 균열을 낳는지 너 무 많이 보아왔다. 그래서 스스로 한 발 물러서 시대의 속 도를 조금 비켜서 보기로 했다. 완전히 퇴장한다는 뜻이 아니라, 삶의 방식에 대한 새로운 선택이었다. 사업을 접어도 삶은 바빴다. 골프, 여행, 모임—그리고 무엇보다 ‘기분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 오래된 인연들은 고향도 성씨도 같지 않았다. 인연은 계산이 아니라 흐름 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나는 젊은이들에게 종종 이렇게 말한다. “기분 좋은 사람을 만나라. 마음이 맞지 않으면 밥도 술 도 독이 된다.” 세월이 흐르며 사고의 후유증은 옅어졌다. 모든 것을 내 려놓자 마음이 가벼워졌고, 몸도 가벼워졌다. 약속에 늦 은 적은 없었고, 저녁이면 아내와 와인을 나눴다. 사람들 이 혈색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나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시간이 흘러간 것이 아니다. 내가 그 시간을 건너온 것이다.

제3장 사업가의 길 151

154쪽

11. 사업에 대한 생각

12. 가족에 대한 생각

13. 하와이에서 보내는 겨울

14. 골프와 건강 그리고 친구들

15. 내 인생의 마지막 무늬

후회 없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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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것은 좋고, 나쁜 것도 나쁘지 않다. 나쁜 것도 모아놓으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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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은 늦어도 실행은 빨라야 한다.

- 존 드라이든

사업에 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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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내 한평생은 ‘사업’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뛰어들었지만, 시간이 흐를수 록 그것이 내 운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준비된 사람이 라기보다, 주어진 현실을 헤쳐 나가다 보니 길이 만들어 졌고, 그 길 위에서 평생을 보냈다. 내가 만난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애초부터 사업가 가 되겠다고 결심했던 이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붙잡았고, 그 일 이 생업이 되었으며, 어느 순간 ‘사업’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산업화 시대의 1세대 창업가들 이었고, 그 정신은 한마디로 ‘도전’이었다. 무에서 유를 만들겠다는 의지, 남이 가지 않은 길을 먼저 가겠다는 결심—나는 그 중심에 있었다. 갈포벽 지 하나로 세계를 누비며 ‘우리 제품으로 세계인의 집을

제4장 후회 없는 삶 155

158쪽

채우자’는 생각을 품었던 젊은 시절, 그것이 내 청춘의 전 부였다. 동남갈포공업은 세계 30여 개국에 수출했고, 천 만 달러 수출탑을 여덟 번 받았다. 그러나 그 길은 처음부 터 순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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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직원들이 다급히 외쳤다. “사장님, 벽지가 벌어졌습니다!”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문제는 원단과 종이를 붙이 는 접착제였다. 칡 섬유의 직조 기술만 집중하느라, 정작 중요한 접착 공정을 가볍게 본 것이 화근이었다. 작은 오 류 하나가 회사를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깨달 았다. 나는 곧장 일본으로 날아가 스승 같은 존재였던 가키자 와를 찾았다. 그는 짧게,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다. “기술의 핵심은 정성입니다. 풀을 쑤더라도 시간과 마 음이 들어가야 합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공장에 커다란 가마솥을 걸어 직 접 풀을 만들었다. 물과 밀가루를 섞고, 30분을 저어 또 30분, 다시 30분…. 마지막에 아주 소량의 아교를 넣는

제4장 후회 없는 삶 157

160쪽

것이 비법이었다. 손으로 저으며 시간을 들이는 과정 속 에서 비로소 ‘기술은 결국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 을 배웠다. 그렇게 만든 접착제는 다시는 떨어진 적이 없었다. 사소 해 보이는 공정 하나가 회사를 살렸고, 작은 배움 하나가 세계 시장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에디슨을 단순한 발명가가 아니라 ‘위대한 사업가’로 생각해 왔다. 그는 아이디어를 현실로 바꾸는 능력이 있었고, 세상과 시장을 바라보는 감각이 뛰어났다. 발명은 실험실에서 끝나지만, 사업은 사람과 시장 속에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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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슨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전구의 필라멘트 를 찾기 위해 식물 탄화 실험만 6,000번을 했다고 한다. 그는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행되지 않는 방법을 알아낸 것”이라고 말했다. 집중력과 끈기—그 두 가지가 그의 삶 을 관통했다. 내가 본 성공한 사업가들의 공통점도 크게 다르지 않았 다. 결단이 빠르고,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았으며, 난관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용기와 집중력은 외로움을 감 내하는 힘에서 나오고, 진짜 신념은 혼자 있는 시간에 더 욱 단단해진다. 그래서 나는 사업가를 ‘등대지기’라고 부르고 싶다.

제4장 후회 없는 삶 159

162쪽

등대지기는 외롭지만, 그 불빛 덕에 많은 배가 길을 잃지 않는다. 세상은 결국 그 외로운 빛 위에서 항해한다.

오래 사업을 하다 보면 가장 어려운 영역은 기술도, 돈 도 아니었다. 바로 ‘사람의 마음’이었다. 사람은 보고 싶 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그래서 아무리 똑 똑한 사람도 실수를 한다. 그만큼 기업가에게 비판적 사 고와 균형 감각이 중요했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정의를 지켜야 할 상황에서는 단 호했지만, 불필요한 갈등은 만들지 않았다. 자신보다 지 혜로운 사람과 어울렸고, 늘 귀를 열어 두었다. 무엇보다 적을 만들지 않았다. 사업은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고,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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뢰가 모든 관계의 기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칼이 실력이라면, 칼집은 겸손이고 부드러움이다. 아무 리 좋은 실력을 갖고 있어도 절제가 없으면 스스로를 해 칠 수 있다. 진짜 힘은 부드러움 속에 있고, 그 부드러움 은 경험과 성찰에서 비롯된다. 사람에게는 모두 자기 역할이 있다. 그래서 서로를 존 중해야 한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신뢰와 존경이 있어 야 오래간다. 예리한 실력과 균형 잡힌 성품을 함께 가진

제4장 후회 없는 삶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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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나는 그런 리더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이끈다고 믿는다.

돌아보면 사업은 내게 단순한 생업이 아니라, 삶을 배우 는 과정이었다. 실패는 스승이었고, 성공은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과 같았다. 세계 곳곳에서 만난 사람들, 부딪히 며 얻은 기술, 그리고 매 순간의 도전들이 오늘의 나를 만 들었다. 사업을 떠났지만, 그 시절 배운 것들은 여전히 내 삶 곳 곳에서 살아 있다. 생각은 단순하게, 판단은 신중하게, 행 동은 빠르게—그 원칙은 지금도 나를 지탱해 준다. 나는 이제 사업가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을 걸어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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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눈으로 그 시절을 바라본다. 그리고 조용히 이렇 게 말하고 싶다. “결심은 늦어도 실행은 빨라야 한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언제나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그렇게 살아온 시간들이 내게 남긴 가장 큰 자산이다.

제4장 후회 없는 삶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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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프 톨스토이

가족에 대한 생각

남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이면서 자신은 남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야말로 진정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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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1957년 결혼과 함께 첫 사업을 시작했고, 이듬해 큰아들 창우가 태어났다. 이어 딸 창희, 둘째 아들 창록이 차례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에 는 사업에 전념하느라 아이들 곁에 있어 주는 시간이 많 지 않았지만, 세 아이 모두 스스로 길을 찾아 걸어주었고

제4장 후회 없는 삶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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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점을 누구보다 고맙게 생각한다. 큰아들 창우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보 였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벽화전에 참석해 돌아와 그 린 기행그림은 지금도 내 사무실 벽을 장식한다. 열 살짜 리 아이의 손에서 나왔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장대한 그 림이다.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아이였지만, 당시의 현실 을 생각해 나는 경영 공부를 권했다. 이중섭 같은 화가가 생계를 제대로 꾸리지 못하던 시대를 살아온 탓이었을 것 이다. 지금 돌아보면, 그 아이의 예술적 꿈을 더 넓게 틔 워주지 못한 점이 마음에 남는다. 창우는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마이애미대학 교에서 석사를 마친 뒤 2002년 한국파파존스를 설립했 다. 배달 중심 모델로 새로운 길을 열어 청담, 도곡, 대치, 서초를 비롯한 전국 수백 개 매장을 운영하는 중견기업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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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성장시켰고, 국제로터리와 여러 공익 활동에도 헌신하 고 있다. 딸 창희는 집안의 빛 같은 존재였다. 어린이잡지 표지모 델로 활동하고, 방송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모습이 지금 도 선하다. 나는 아이들에게 “한 사람당 악기 하나는 다 룰 줄 알아야 한다”고 했는데, 그 말을 가장 잘 따라준 것 이 딸이었다. 이화여대 불문과를 졸업한 뒤 코오롱가의 이웅렬 회장과 결혼해, 지금은 사회공헌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꽃과 어린왕자’ 재단을 설립해 학생들을 돕고 있 고, 코오롱가족 사회봉사단 총단장으로 따뜻함을 나누고 있다. 이름 그대로, 꽃을 돌보던 어린왕자의 마음으로 사 람을 돌보고 있는 셈이다. 둘째 아들 창록은 유난히 에너지가 많았다. 리틀야구 선 수로 뛰며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공을 쫓던 모습이 아직도

제4장 후회 없는 삶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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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선하다. 프로야구도 없던 시절, 어린 아들이 그렇게 야구를 좋아하는 것이 내게는 꽤 신기한 일이었다. 그는 서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터프츠대학교 플 레처스쿨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고려대 국제대학원 원장 과 인권센터장을 맡았다. 편한 길보다 옳은 길을 택하는 아이였다. 2006년 인권 단체 휴먼아시아를 설립했고, 이후 유엔 자유권위원회의 한국인 최초 위원, 그리고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국제무대 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오고 있다. 아버지로서, 나와 전혀 다른 분야에서 ‘사람을 중심에 두는 일’을 자신의 소명으 로 삼고 있다는 점이 가장 자랑스럽다.

*** 명문가문이 부럽지 않다

나는 자식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강요한 적이 없다. 다만 두 가지—외국어와 음악—이것만큼은 꼭 배워야 한다고

제4장 후회 없는 삶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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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쳤다. 해외에서 만난 유대인 친구들에게서 얻은 교훈 이었다. 그들은 여러 언어를 구사하고, 집안에는 자연스 레 음악이 흐르고, 그 교양이 그들의 사고를 자유롭게 만 들었다. 우리 세대는 가난으로 공부를 마음껏 하지 못했 던 시절을 지나왔기에, 아이들에게만큼은 폭넓은 감성과 기초를 갖추게 하고 싶었다. 그 교육의 중심에는 언제나 아내가 있었다. 아이들에게 내 사업을 물려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사업은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 믿었다. 우리 부부는 그런 점에서 묵시적으로 뜻이 같았 다. 세 아이 모두 각자의 재능과 열정으로 자신만의 세계 를 구축했고,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내가 존경하는 가문을 하나 꼽으라면 경주 최씨 가문이 다. 300년을 지켜온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최부잣집 육 훈’은 시대를 넘어선 품격의 규범이었다. 권력을 탐하지 말 것, 재산을 지나치게 모으지 말 것, 흉년에 재산을 늘 리지 말 것, 과객을 후히 대접할 것…. 이 단순한 가훈들 은 가문의 겉모습보다 사람의 품격을 먼저 생각하는 삶의 원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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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자식들에게 늘 말했다. “아버지가 이만큼 살아올 수 있었던 건 좋은 사람들의 인연 덕분이다. 너희도 그런 사람들을 곁에 둘 줄 알아야 한다.” 진정한 성공은 능력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사람을 모으 는 힘, 사람을 끝까지 지켜보는 인덕에서 나온다. 인덕이 있는 사람은 어떤 위기에서도 길을 찾는다. 나는 아이들 이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며, 언젠가는 스스로 그런 사람 이 되기를 바랐다.

*** 70년을 함께 걸은 사람

2017년은 아내와 내가 회혼(결혼 60주년)을 맞은 해였 다. 내 인생을 굳이 둘로 나눈다면, 아내를 만나기 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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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로 나눌 수 있다. 결혼과 창업을 같은 해에 시작했으니, 내 삶의 출발점에는 언제나 아내가 있었다. 아내는 평생 내 삶의 동반자이자 조용한 지휘자였다. 좋 은 일이 생기면 내 앞에서 먼저 웃어주고, 어려운 일이 닥 치면 말 없이 옆에 앉아 곁을 지켜주었다. 아이들의 교육 도, 집안의 안정도 온전히 그녀의 몫이었다. 외국어와 음 악교육을 주도했고, 아이들 셋을 각자의 길로 세우면서도 자신의 삶 또한 적극적으로 가꾸었다. 아내는 테니스를 국가대표 선수들과 겨룰 만큼 잘 쳤 고, 한국여자테니스연맹 제2대 회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 도 골프보다 테니스를 더 즐긴다. 오페라에 대한 애정도 깊어 십수 년간 스터디 활동과 관람을 이어왔고, 90세가 넘은 지금도 공연장을 찾는 열정이 식지 않았다. 내가 벽 지를 종합예술로 생각했던 것처럼, 아내에게 오페라는 인 생 전체가 올라서는 무대였던 듯하다. 나는 사업 때문에 며칠씩 술에 취해 들어가거나, 해외 출장을 이유로 집을 비우기 일쑤였다. 그래도 아내는 먼 저 원망의 전화를 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 대신 내가 들어 오면 야단보다 건강부터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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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일 하는 남자의 마음을 편하게 해줘야 한다”는 생 각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다. 그 인내와 배려를 떠올리 면 지금도 가슴이 저릿하다. 해외 벽지 박람회를 다닐 때 함께했던 시간들도 많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북유럽, 미국과 캐나다…. 나는 바이어를 만나고 부스를 지키느라 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뛰어다녔다. 하루는 아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제 당신하고는 같이 못 다니겠어요. 너무 배가 고파 서…” 그 말을 들었을 때, 미안함이 깊이 밀려왔다. 함께하자 고 데려와 놓고, 결국 또 다른 고생을 시킨 셈이었다. 그 럼에도 아내는 다음 박람회 때도 말없이 내 옆자리에 앉 아 비행기를 타주었다. 그 시절 가장 맛있던 기내식이 팬암(Pan Am) 비행기였 다는 소소한 기억이, 지금은 우리 부부가 함께 지나온 세 월을 떠올리게 하는 작은 표지가 되었다. 바쁜 세월이 한 참 지나고, 이제 우리는 같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뉴스를 보고, 저녁이면 와인 한 잔을 나누며 조용히 하루를 정리 한다. 돌아보면,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은 좋은 사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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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인맥도 아니었다. 70년 동안 곁을 지켜준 이 한 사 람을 만난 것이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유머를 인생의 윤활유라 여겨왔다. 사 람 사이를 부드럽게 잇는 힘은 관심과 배려, 그리고 작은 유머에서 나온다. 세상이 아무리 어둡다고 해도, 우리가 반드시 같이 어두워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밝게 웃고, 가 볍게 넘길 것은 넘기되, 해야 할 일을 끝까지 하는 태도가 긴 인생을 버티게 한다. 내가 자주 하던 말이 있다. “좋은 것은 좋고, 나쁜 것도 나쁘지 않다. 나쁜 것도 모 아놓으면 좋아진다.”

제4장 후회 없는 삶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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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사업 철학이었다. 한 번 은 B급 제품만 모아 사내 전시회를 연 적이 있다. 색이 약 간 다르고, 무늬가 고르지 못하고, 우리가 보기에는 ‘아쉬 운’ 제품들뿐이었다. 그런데 이탈리아 바이어 브랜들리가

“굿 하모니!”

그것을 한참 보더니 두 손을 들며 말했다.

그는 반짝반짝한 A급 제품보다, 오히려 약간씩 다른 톤 과 질감을 가진 B급 제품들이 만들어내는 조화에 감탄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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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빛나는 것들 사이가 아니라, 조금씩 어긋난 것들 사이 에서 더 풍부한 음영과 깊이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그 말 을 들은 뒤 우리는 B급 제품들만 모은 컬렉션을 따로 구 성했고, 예상 밖의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완벽함이 아니라 불균질의 조화— 그것이 인생의 진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사람도 일도 모두 결점이 있다. 그래서 서로 기대고, 서로를 보완하며, 서로 다른 빛을 낸다. 그 조화가 쌓이면 하나의 ‘작품’이 되는 법이다. 나는 평생 사람을 믿고 인연을 믿으며 살아왔다. 그 믿 음이 회사를 세우고, 가족을 지탱하고,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 이제 아이들은 각자의 세계에서 스스로 설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아내는 여전히 내 곁에서 조용히 웃어주고 있다. 나는 ‘명문’을 꿈꾸지 않았다. 스스로 서고, 서로를 북돋 아 주며, 함께 밝아지는 집을 꿈꾸었다. 그리고 지금, 그 꿈은 내 눈앞에서 충분히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바로 나의 가족이다.

제4장 후회 없는 삶 183

188쪽

하와이에서 보내는 겨울

- 랄프 왈도 에머슨

인생의 가장 가치 있는 보상, 즉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운은 좋아하는 취미를 가지는 것이며 그 안에서 일과 행복을 발견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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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한가운데 떠 있는 하와이. 나는 오래전부터 이 섬을 사랑해 왔다. 처음 그 땅을 밟 은 것은 1961년 무렵, 갓 서른의 나이에 세계 시장을 향 해 첫걸음을 떼던 때였다. 미국 시장 조사를 마치고 돌아 오는 길, 우연히 들른 하와이에서 나는 그야말로 한눈에 반했다. 그 시절 하와이는 지금처럼 관광지로 번듯하게 개발 되어 있지 않았다. 길은 한산했고, 편의시설은 부족했으 며, 도시의 불빛보다 별빛이 더 많았다. 그러나 그 불편 함조차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단순함이 마음을 편하 게 했다. 공기는 맑았고 바람은 향기로웠으며 햇살은 따 뜻했다. 알록달록한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호놀룰루 거리 를 거닐며, 나는 세속의 번잡함에서 잠시 벗어난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느꼈다.

제4장 후회 없는 삶 187

192쪽

그해는 참 묘한 해였다. 케네디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 되었고, 훗날 44대 대통령이 되는 버락 오바마가 바로 그 하와이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나는 인생의 새로운 길목에 서 이 섬을 처음 만났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부터 하와이 는 내 인생의 한 장면이자 하나의 생각 방식, 작은 철학이 되었던 것 같다. 사업으로 분주하던 시절, 미국 출장을 마치고 귀국할 때 면 나는 늘 하와이에 잠시 머물렀다. 짧은 체류였지만, 그 며칠이 주는 고요와 여유는 머릿속의 복잡한 실타래를 풀 어주는 시간이었다. 현장의 긴장과 숫자의 압박에서 벗어 나 조용히 걸으며 생각을 가다듬는, 일종의 사색의 순간 이었다. 특히 처음 하와이에서 골프를 쳤던 날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검은 용암이 이어진 페어웨이, 드문드문 솟은 야자수, 벙커 너머로 반짝이는 코발트빛 바다. 파도 소리 가 귓가에 가까이 밀려와 스윙에 집중하기 어려울 정도였 다. 그날 이후 하와이는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해마다 마음을 비우고 다시 채우는 장소가 되었다. 당시에는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가 해마다

193쪽

두 차례 ‘생각 주간’을 갖고 별장에서 세상의 변화를 정리 한다는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나는 그 소식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에게는 하와이가 그런 장소구 나.”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더 이상 그 생각을 정리 해 새로운 사업을 일으킬 마음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저 생각 그 자체를 즐기고, 걸으며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음으로써 마음을 다시 채우는 시간이었 다. 은퇴 이후 나는 매년 겨울이면 하와이로 향했다. 이제

제4장 후회 없는 삶 191

194쪽

하와이는 잠시 들르는 경유지가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또 하나의 고향이 되었다. 하와이의 겨울은 한국의 9월과 닮 았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바람은 부드럽고 하늘은 늘 열 려 있다. 계절의 변화가 거의 없는 그 일정한 리듬은 마음 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그곳에서는 하루가 길지 않고, 인 생도 조급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그 섬에서 해마다 다시 젊어지는 기분을 느낀다.

하와이는 내게 그야말로 골프의 천국이다. 여섯 개주요섬 전역에 약 70개의 코스가 흩어져 있고, 어디를 가 든 바람과 바다가 함께한다. 공을 치러 나갔다가도 절반 은 풍경을 보며 감탄하다 돌아오는 곳이 바로 하와이다.

195쪽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곳은 마우나케아 골프 장이다. ‘하늘의 산’이라 불리는 마우나케아 기슭에 자리 한 이 코스는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 같다. 활화산이 만든 검은 용암 지대 위에 녹색 잔디가 깔리고, 그 너머로 태평양의 수평선이 끝없이 펼쳐진다. 티샷을 날릴 때마다

제4장 후회 없는 삶 193

196쪽

공이 산과 바다 사이를 가르는 작은 빛처럼 느껴진다. 이 골프장은 록펠러 가문의 3세대이자 벤처 투자자인 로런스 S. 록펠러(Laurence S. Rockefeller)가 “지상에 서 가장 아름다운 코스를 만들겠다”고 꿈꾸며 건설한 곳 이다. 그는 설계가 로버트 트렌트 존스 시니어에게 설계 를 맡기고, 거친 용암 밭을 일일이 고르게 한 뒤 농장에서 흙을 실어와 잔디를 입혔다. 트럭 4만 대 분량의 흙이 사 용되었다고 하니, 말 그대로 ‘꿈을 실어 나른’ 셈이었다. 그 결과 탄생한 마우나케아는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장대 한 자연미를 품은 코스로 손꼽힌다. 지금도 골퍼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순례지’ 같은 곳이다. 산과 바다, 용암과 잔디가 절묘한 대비를 이루는 그곳에서 나는 매번 인생의 또 다른 경지를 느낀다. 공이 잘 맞는 날이면 하늘로 떠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고, 동행 들과 웃으며 샷을 주고받을 때면 세상 모든 근심이 잠시 물러난다. 하와이의 공기는 겨울에도 따뜻하고, 바람은 몸과 마음 을 적당히 식혀준다. 골프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다 시 살아 있게 하는 일종의 명상 같은 시간이다. 푸른 페어

197쪽

웨이와 새하얀 벙커, 새까만 용암과 청록빛 바다가 만들 어내는 색채의 대비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다시 정돈한 다.

하와이에 머물며 가장 즐거운 때는 언제나 가족이 찾아 올 때다. 손주들이 오면 집 안이 금세 웃음소리로 가득해 진다.

“할아버지, 정말요?”

“무궁화의 원산지는 하와이래.”

“그렇지. 그래서 하와이의 주화도 무궁화란다.” 아이들은 신기해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에게 하와 이는 단순한 휴양지가 아니라 자연과 역사, 그리고 세대

제4장 후회 없는 삶 195

198쪽

를 잇는 하나의 큰 교실이다. 겨울이 되면 마우나케아 정상에 눈이 쌓이고, 우리는 그 아래 이밀로아 천문센터를 찾는다. 아이들은 망원경으로 우주를 바라보며 별의 이름을 외운다. 그 반짝이는 눈동 자를 보고 있노라면, 내 어린 시절에는 상상도 못했던 세 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대견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화산이다. 활화산 분화구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유황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아이들 은 “정말 지구가 살아 있네!”라며 감탄한다. 하와이 화산 국립공원은 살아 있는 지구과학 교과서이고, 아이들에게 는 평생 잊지 못할 자연의 수업이 된다. 해안선도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흑사장과 백사장, 초록 빛 모래사장이 번갈아 이어지고, 알라모아나 비치의 석양 은 황금빛 물결로 하루를 덮는다. 그 빛 속에서 가족들과 웃으며 저녁을 나누다 보면, 인생이 얼마나 단순하고 아 름다울 수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매일 해변을 걷거나 화산을 오르지 는 않는다. 다만 천천히 차를 몰고 섬을 한 바퀴 도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 오후에는 가볍게 필드를 걷고, 저녁

199쪽

이면 집 테라스에서 파도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마무리한 다. 아이들은 제자리로 돌아가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나 는 그들이 남기고 간 웃음의 잔향 속에서 조용히 밤을 맞 는다.

제4장 후회 없는 삶 197

200쪽

*** 하와이에서 배운 삶의 속도

하와이에 있을 때면 이런 생각이 든다. 좋아하는 취미 속에서 일과 행복을 함께 발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 생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보상이라는 것. 젊은 시절에는 골프도, 여행도, 사업을 더 잘하기 위한 도구였을지 모른 다. 이제는 그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충분한 기쁨이 되었 다. 하와이의 바람은 여전히 부드럽고, 시간은 서두르지 않 는다. 그 속에서 나는 나이 든 자신을 더 편안히 받아들이 는 법을 배운다. 하늘이 늘 같은 색으로 열려 있는 그곳에

조급하지 않게. 그러나 멈추지도 않게.

서, 나는 내 남은 인생의 속도를 배웠다.

그것이 내가 하와이에서 배운 삶의 법칙이다. 그리고

201쪽

이제, 그 법칙을 품은 채 남은 시간들을 천천히, 그러나 뚜벅뚜벅 걸어가 보려 한다.

제4장 후회 없는 삶 199

202쪽

- 잭 니클라우스

골프와 건강 그리고 친구들

나의 염원은 일류가 되는 것이었다. 골퍼(golfer)에게 이 기분이 없으면, 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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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골프채를 잡은 것은 1961년이었다. 그 무렵 한국에서 골프장을 찾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지금의 어 린이대공원 자리에 있던 서울컨트리클럽이 사실상 유일 했고, 정식으로 배울 곳도 없었다. 해외 출장을 다니며 귀 동냥으로 들은 이야기들이 전부였고, 그러던 중 미8군 PX에서 우연히 골프채 한 세트를 구입한 것이 시작이었 다. 나는 원래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유난히 큰 편이 다. 무엇이든 한 번 손에 잡으면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 는 성격이었고, 골프도 예외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저 공 하나 치는 운동이겠지”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필드에 서보니 전혀 다른 세계였다. 눈앞의 공 하나를 두고도 욕 심과 긴장이 교차했고, 한 번의 실수에도 마음이 요동쳤 다. 곧 깨달았다. 골프는 몸을 쓰는 운동이 아니라 마음을

제4장 후회 없는 삶 201

204쪽

다스리는 과정이라는 것을. 당시는 교본도, 영상도 없던 시절이었다. 일본 출장길에 사 온 일본어 교본을 들여다보며 스윙 각도와 궤적을 스 스로 분석했고, 새벽부터 밤까지 연습장에 서 있었다. 어 느 날 끝내 잡히지 않던 슬라이스가 도무지 고쳐지지 않 자 사진사를 불러 스윙 장면을 한장한장 찍게 했다. 사진속내 자세를 보며 원인을 찾고 고치고, 다시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그렇게 석 달이 지나 싱글타에 올랐다. 그 성취는 재능이 아니라, 순전히 집중력과 끈기에서 나온 열매였다.

*** 다시 필드로

동남갈포공업을 세우고 나서는 골프를 거의 내려놓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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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사업이 바빴고, “사장이 골프장에 나간다”는 소문 하 나로 은행 대출이 막힐 수도 있던 시절이었다. 기업인의 취미는 곧 사치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해 분위기가 달라졌

제4장 후회 없는 삶 203

206쪽

다. 레저 산업이 성장하고 전국 곳곳에 골프장이 생기면 서, 나는 다시 조심스레 필드를 밟았다. 이번에는 예전처 럼 기록에 집착하지 않았다. 공을 치기 전, 바람과 지형, 그리고 내 마음의 각도를 먼저 읽었다. 집중이 잘 되는 날 에는 공이 생각한 궤적 그대로 날아갔다. 그 짜릿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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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지금도 생생하다. 골프는 심판이 없는 경기다. 룰과 양심이 전부다. 세계 적인 대회에서, 아무도 모르는 규칙 위반을 스스로 신고 해 우승을 반납한 선수의 이야기는 지금도 기억에 남는 다. 그는 패배했지만, 그의 품격은 그날 누구보다 빛났다. 골프를 통해 나는 경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스스로에게 떳떳한 태도’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나는 골프를 통해 수많은 인연을 얻었다. 필드에서는 직 함도, 나이도, 사회적 지위도 잠시 내려놓고 오로지 ‘동반 자’로 하루를 보낸다. 그 과정에서 쌓인 인연은 오래 남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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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기억에 남는 모임은 ‘삼일클럽’이다. 한양컨트리클 럽이 문을 열던 시절, 서울식품·현대칼라 등 각계 대표들 이 모여 만든 작은 골프 모임이었다. 그중 현대칼라 장남 수 회장은 유난히 위트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삼일절 라 운드에서 내가 계속 실수를 하자 장 회장이 이렇게 말했 다. “삼일정신으로 기세 좋게 쳐보게!” 모두가 배를 잡고 웃었고, 그날을 계기로 모임 이름이 자연스럽게 ‘삼일클럽’이 되었다. 우리는 사업 이야기도 했지만, 언제나 웃음이 앞섰고, 경쟁보다 우정이 중심이 었다. 그런 여유로운 분위기 덕분에 골프는 내 삶에서 ‘사 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가 되었다. 해외에서도 골프를 통해 많은 인연이 생겼다. 박세리 선 수가 LPGA에서 우승한 이후, 세계 여러 골프장에서 “코 리아?”라는 인사를 받은 적이 많다. 낯선 땅에서도 골프 채 하나만으로 금세 친구를 만들 수 있었고, 그 만남들은

시간이 흘러도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210쪽

골프는 오래 걷고, 지속적으로 집중해야 하는 운동이다. 한 라운드는 8~9킬로미터를 걷는 셈이고, 스윙 자세가 나쁘면 허리나 갈비뼈를 다칠 수도 있다. 그런데도 나에 게 골프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건강을 지탱해 준 축’ 이었다. 아흔이 넘은 지금도 하와이에서는 거의 매일 라운드를 돌고, 한국에서는 금요일마다 지인들과 함께 필드를 걷는 다. 그들은 나보다 젊지만, 욕심 없이 즐기는 태도 덕분에 나와 잘 맞는다. 필드에서 함께 걷다 보면 세대 차이가 무 색해진다. 그저 ‘사람과 사람이 함께 걷는 시간’이 될 뿐 이다. 가끔 혼자 필드를 걸을 때면, 인생이 골프와 참 많이 닮 았다는 생각이 든다. 실수도 하고, 마음을 다시 다잡고, 또 한 발씩 나아가는 과정. 그 반복 속에서 몸은 단단해지

211쪽

고 마음은 가벼워진다. 공이 어느 날은 이상하게도 말을 안 들어도, 해가 지고 나면 “그래도 오늘 하루 잘 걸었다” 는 생각이 든다.

나는 늘 이렇게 말한다.

많은 이들이 내게 묻는다. “선생님의 건강 비결은 무엇입니까?”

“비결이 없는 게 비결입니다.” 나는 특별한 장수법을 따른 적이 없다. 세계 곳곳을 다 니며 어떤 음식이든 그 나라 맛 그대로 잘 먹었고, 편식하 지 않았으며, 과식하지 않았다. 몸이 받아들이는 만큼만 먹고, 몸이 좋아하는 리듬대로 살아왔다.

제4장 후회 없는 삶 209

212쪽

일과 생활의 균형도 중요했다. 일주일에 두 번 필드에 나가기로 했으면 그 약속을 지켰고, 와인은 기분이 좋아 질 만큼만 마셨다. 그런 소박한 습관들이 지금의 건강을 만들어준 셈이다. 젊은 시절 나는 장티푸스와 폐결핵을 앓았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를 붙들어준 것 은 거창한 건강 비법이 아니라,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 루지 않는 태도”와 “사람과의 약속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마음”이었다. 그 삶의 습관이 결국 내 몸과 마음을 함께

213쪽

지켜준 셈이다. 돌아보면, 골프와 건강, 그리고 친구들. 이 세 가지가 내 삶의 균형추 역할을 해주었다. 골프는 내 몸을 움직이게 했고, 친구들은 내 마음을 따뜻하게 지켜주었으며, 그 사 이에서 건강은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나는 내 인생을 과장해서 정리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 렇게는 말할 수 있다. 내 인생에는 골프가 있었고, 좋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과 함께 걸을 수 있었던 시간이 있 었다고.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제4장 후회 없는 삶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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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스 바튼

내 인생의 마지막 무늬

현재의 처지에 굴하지 않고 그보다는 훨씬 나은 그 무엇이 자기 안에 숨겨져 있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의 성취보다 더 훌륭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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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나는 평생을 사업에 바쳤지만, 시간이 갈수록 분명해진 것은 사업의 중심은 돈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 실이었다. 공장 설비나 자본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함께 땀 흘리는 직원들이었고, 거래 조건보다 더 깊이 남 는 것은 서로에 대한 신뢰였다. 나는 회사를 자식처럼 여겼다. 자식이 어느 정도 자라면 부모가 한 걸음 물러서야 하듯, 회사도 어느 지점이 되면 억지로 끌고 가기보다 흐름을 지켜보며 방향만 잡아주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일이 잘될 때에는 과도한 확장을 경 계했고, 어려울 때에도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으 려 했다. 그래서 내 경영에는 늘 한 가지 마음가짐이 함께했다. 욕심을 줄이고,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고, 인연을 억지로 구하지 않는 것. 돈에 아쉬운 소리를 하면 마음이 좁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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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쪽

고,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면 관계가 비틀어진다는 것을 나는 일찍이 배웠다. 필요한 것은 노력해서 얻고, 인 연은 흘러올 때 받아들이는 편을 택했다. 동남갈포공업을 40년 넘게 이끌다가 회사의 수명이 다 했다고 느꼈을 때, 나는 미련 없이 조종석에서 내려왔다. 시장이 변하고 갈포벽지의 시대가 저물어 가는 것을 인정 하자, 오히려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욕심을 버릴수록 삶이 단순해지고, 단순해질수록 사람을 더 또렷하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더 확실히 깨달았다.

내가 평생 다뤄온 것은 벽지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벽 지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하나의 종합예술처럼 느껴졌 다. 집에 들어온 사람이 가장 오래 마주하는 것은 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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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의 색과 무늬와 질감이 그날의 기분을 만들고, 한 가족 의 기억을 담아내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해외 출장을 갈 때마다 미술관과 거리 화 랑을 빠짐없이 찾아다녔다. 유명 작가의 작품도 좋았지 만, 길거리에서 파는 이름 없는 화가의 그림을 사 오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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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쪽

이 더 많았다. 그 나라의 하늘빛과 골목의 공기, 사람들의 표정이 담긴 그림들은 그대로 다음 시즌 벽지의 색감과 무늬가 되었다. 핀란드의 차분한 흰색, 이탈리아의 따뜻 한 황톳빛, 멕시코의 강렬한 원색, 스칸디나비아의 맑은 회색빛까지 모두 내 머릿속에서 새로운 조합으로 이어졌 다. 언젠가 이병철 회장이 우리 연꽃무늬 벽지를 보고 “이 건 예술작품이오.”라고 말해주던 장면이 아직도 선명하 다. 그 인연으로 신라호텔과 호암미술관, 경주 신라호텔 의 여러 공간에 우리의 연꽃 벽지가 쓰였다. 나중에는 갈 포벽지가 프랑스 피카소 미술관과 미국 백악관에까지 들 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용히 말만 전해 듣고 한동안 멍해졌던 그 순간의 감정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종이 한 장이 국경을 넘어 세계의 방들을 채운다는 사실이 그 만큼 경이로웠다. 벽지는 직조, 색채, 조명, 건축, 심리까지 모두 연결된 세계였다. 한 방의 분위기가 바뀌면 그 방에서 사는 사람 의 표정도 조금은 달라진다. 그래서 나는 평생 같은 마음 으로 생각했다. “벽지는 사람의 하루를 감싸는 배경이다.

219쪽

그렇다면 그 배경은 최대한 따뜻하고 품위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내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자, 작은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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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쪽

나는 재벌은 아니었지만, 언젠가부터 ‘벌어들인 것의 일 부는 반드시 세상에 돌려줘야 한다’는 마음을 품고 살았 다. 사업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고향의 후배들이었다. 내가 겪었던 가난을 그들이 조금 덜 겪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1973년, 연백장학회를 만들었다. 고향 사람들과 뜻을 모아 시작한 작은 장학회였지만,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발 기인 대부분이 세상을 떠나고 이제는 나 혼자 남았다. 그 래도 그 약속은 계속 이어가고 있다. 장학증서를 건네는 순간 나는 늘 같은 생각을 한다. “내가 젊었을 때 이런 도 움을 받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서 더 기쁘게 내어 놓게 된다. 2007년에는 정암재단을 세웠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공 부하려는 젊은이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장학금을 받은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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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들이 시간이 지나 다시 찾아와 인사를 건넬 때면 가슴 한쪽이 뜨거워진다. 희망의 불씨는 이렇게 사람을 통해 이어지는 것이구나—그 생각이 절로 든다. 돌이켜보면, 나눔은 언제나 순수한 동기만으로 이루어

제4장 후회 없는 삶 219

222쪽

지지는 않는다. 그 안에는 어느 정도의 허영과 만족도 섞 여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한 도움이 된다면, 나는 그 허영조차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223쪽

내 인생의 벽지를 한장한장 들춰보면 사업의 무늬도, 도전의 색깔도 남아 있지만, 마지막에 가장 또렷한 자국 을 남긴 것은 결국 나눔의 흔적이다. 남에게 건넨 작은 도 움, 격려의 말, 장학금 봉투 하나가 시간이 지나도 가장 깊은 무늬로 남는다. 그 무늬는 내가 떠난 뒤에도 오래 사 라지지 않을 것이다.

제4장 후회 없는 삶 221

224쪽

책을마치며

*** 부활의 삶을 믿으며

진실한 마음으로 무엇을 계획하고

- 스탕달

그 일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가장 즐거운 생활이다.

당신은 오늘의 계획을, 또 내일의 설계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성실한 마음으로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225쪽

나는 인생을 살며 여러 번 넘어졌다. 일제 말기의 혼란, 해방과 전쟁, 장티푸스와 폐결핵, 사업의 위기와 큰 교통 사고까지—몸도 마음도 수없이 무너졌지만, 그때마다 나 를 일으킨 힘은 특별한 기술이나 요령이 아니라 “한 번 더 걸어가 보자.”는 마음이었다. 천주교 신앙을 갖고 살아오면서 나는 부활을 죽음 이후 의 약속으로만 보지 않았다. 삶 속에서 실패와 상실을 겪 을 때마다 다시 일어서려는 마음, 다시 사랑하고 다시 나 누려는 용기—그 모든 것이 이 땅에서 경험하는 부활이라 고 믿었다.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에도 언젠가 다시 아침 이 온다는 신뢰가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 요즘 젊은 세대가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이야기를 들

책을 마치며 223

226쪽

을 때면 마음이 아프다. 내가 젊던 시절의 한국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하고 거칠었다. 그럼에도 우리 는 어떻게든 살아냈고, 다시 일어섰다. 회복하고 다시 시 작하는 힘, 그것이 이 나라가 가진 가장 큰 자산이라고 나 는 믿는다. 그래서 후손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넘어질 수 있 다. 실패할 수 있다. 억울한 일을 겪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마다 다시 일어서려는 마음만 잃지 말라고. 욕심을 줄이고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며, 맡은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언젠가는 뜻밖의 손길이 다가오고, 또 다른 길이 열린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결국 사라지지만, 좋은 마음으로

227쪽

한 일과 다시 일어서려 했던 그 순간은 오래 남는다. 벽지 한 장의 무늬가 방의 분위기를 바꾸듯, 한 사람의 선한 의 지는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든다. 나는 평생 벽지를 만들며 그 사실을 배웠고, 사람들과 더불어 살며 그 믿음 을 확인했다. 인생의 마지막 골목에 들어선 지금, 나는 조용히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말고, 사람을 믿고, 다시 일 어서라.” 이 말은 내가 살아오며 깨달은 마음의 원칙이며, 후배들 과 후손들에게 조용히 건네고 싶은 이야기다. 이 문장이 그들에게도 때때로 힘이 되어 주길 바란다.

책을 마치며 225

234쪽

정암의 길

사람을 믿고 다시 일어서기

지 은 이 서병식 펴 낸 이 김은정 펴 낸 곳 리치사 초판인쇄 인쇄일 2026년 4월 6일 초판 1쇄 발행일 2026년 4월 10일 출판등록 2005년 7월 25일 신고번호 제 315-2005-00032호 주 소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 823-7 강남역우정에쉐르 203호 전 화 02-562-6289 팩 스 02-562-6589 홈페이지 www.richmagazine.co.kr 디 자 인 손주애

비매품 ISBN 979-11-99706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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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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