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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온 길, 남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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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의 어린 시절

걸어온 길, 남은 길

뒤돌아보니, 모두가 소중 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울산 큰집에서 자랐다.

심훈구

어머니께서 몸이 아프셔서 외갓집에서 요양을 하고 나와 동생은 큰집에 맡겨졌다. 큰집은 울산에서 큰 과수원(배)을 했다. 큰 기와집 본채와 왼편에 사랑채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큰 창고가 있었으며, 사랑채의 왼편에는 농사에 필요한 물을 공급하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집 뒤편으로는 꽤 규모가 큰 과수원이 있었고, 그 당시 그 지역에서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다. 학교(초등)에서 친구들과 함께 점심 도시락을 먹는데 친구들은 대 부분 꽁보리밥에 그 속에 고구마를 섞은 밥이었는데 나는 보리밥 이 조금 섞인 쌀밥에 멸치볶음 반찬 이였다. 그 당시 학교 교실이 부족해서 오전 오후반으로 교대로 다닌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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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억난다. 오후반 일 때는 학교 가는 길에 친구들과 놀다가 양지바른 논두렁에 앉아 도시락 먹었다. 정말 꿀맛 이였다. 그리고 등에 맨 책 보따리 속 빈 도시락의 숟 가락 부딪치는 소리가 “철거덕 철거덕” 거리며 학교로 뛰어갔다. 미국 원조 분유로 학교에서 큰 가마솥에 우유를 끓여 나누어 주 었고. 방과 후에는 줄을 서서 빈 도시락에 분유를 나누어 받았다. 그 분유를 밥할 때 밥 위에 계란 찌듯이 찌면 돌 처름 딱딱한 우 유덩어리가 되는데, 당시 별다른 간식이 없던 터라 그것을 깨어 서 사탕 처름 빨아먹었던 기억이 난다. 겨울에는 교실 난방을 위한 땔감(솔방울, 나무)을 구하려고 전교 생이 산에 갔는데 그때 산토끼도 잡고 눈밭에서 눈싸움을 하면서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았다.

1. 어린시절 (맨왼쪽 나) 2. 나와 동생

3. 확대 사진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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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의 부모님

아버지는 울산이 고향으로 할아버지는 농사를 지어셨고 아들만 5 명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형제 중 유일하게 공부를 잘한 아버 지는 일제강점기 때 울산농고를 졸업하고 현 서울법대 전신인 경 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이어서 해방 후 신설된 현 경찰대학 전신인 경찰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회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위로 임관하여 경찰전문학교 조교로 근무를 시작 하였고, 26세에 경감 이 되었다. 요즈음으로 치면 사법고시에 합격한 젊은 판검사 처 름 그 당시 장래가 촉망되는 엘리트 신랑감 이였다

1. 아버지 2. 어머니 3. 맨오른쪽 어머니

어머니는 부산에서 부잣집 딸로 태어났다. 부산남성여고를 졸업 하고 시집 갈 생각이 없었는데, 외할아버지께서 좋은 실랑 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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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니 결혼하라고 하자 어머니는 좀 있다가 결혼하겠다고 반대 하였으나, 외할아버지는 딸 중에 하나는 법을 전공한 경찰계통의 사위가 있어야 갰다고 생각하여 결혼할 것을 강하게 강요하여 어 머니는 19세 때, 26세의 아버지와 결혼하여 서울에서 신혼생활 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50. 4. 3 내가 태어났고, 3 개월 후 6.26 전쟁이 일어났다.

1. 부모님 결혼사진 (구식) 2. 나 어릴 때 사진

아버지는 전투경찰 중대장으로 공비토벌 과 6.25 전투에 참전한 역전의 용사로 화랑무공훈장, 대통령방위포장 등을 수훈 받았고, 그 후 한국일보 정치부 기자생활, 중앙정보부 창설 맴버로 근무 하였으나, 성격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곧은 성격으로 당시 시 대상으로 볼 때 부정부패와 권모술수가 만연한 때라 이에 적응하 지 못하였고, 내가 고등학교 때 낙향하여 부산영도에 있는 중학 교 교사로 재직하게 되셨다. 엘리트로써 자존심과 꿈을 이루지 못한 좌절감에 사로 잡여 술을 많이 마시고 술주정도 하셨다.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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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를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지만, 중고등학 교 시절에 아버지께서 술주정하는 것이 정말 싫었다. 아버지께서 술을 잡숫고 오는 인기척이 들리는 날이면 우리 집은 완전이 비 상이 걸렸다 때로는 나와 동생은 밖으로 도망 처 아버지가 주무 실 때 까지 기다렸다가 들어가곤 했다.

그래서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늘 어렵게 살았다. 울산에 살 때는 어머니께서 과수원의 배 봉지 채우는 고된 노동도 하셨고, 부산 에서 살 때는 우리 집 주변에 외항선을 타는 선원가족들이 많이 살았는데 소위 보따리 밀수품(비타민 ,전기제품, 화장품등)를 받아 조금 마진을 붙여서 친척들에게 팔아 생활에 보태곤 하였다. 때 론 집세가 밀려 집주인이 집 비우라고 난리 친후 어머니가 우시 는 모습도 보았다. 중학교 때 학교에 내는 월사금이 여러 번 밀 려 집으로 쫓겨 간 적이 있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운지라 말 못 하고 함께 쫓겨 간 친구와 함께 중간에 있다가 학교로 되돌아 간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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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기도의 어머니였습니다. 아버지의 잦은 술주정과 경제적으로 어려움으로 인한 고달픈 삶 이였지만 어머니는 불평 한번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들에게 “너의 아버지를 이해해야 한다” “아버지가 불상하지 않나” “아버지가 술 끊고 교회 나가도록 기도하자” 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 같이 어머니는 아버지의 술주정과 모든 허물과 죄를 사랑과 포용으로 받아들이며 기도하 는 어머니였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런 신앙의 어머니가 계셨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그날따라 아버지의 술주정이 유난히 심하 여 한바탕 난리를 친후 아버지께서 잠들고 고요한 밤에 인기척이 들리어 살며시 가서 봤더니, 어머니의 기도 소리였다. 어머니는 꿇어앉아 울면서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 어머니가 너무 불쌍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돌아와 이불 속에서 소리는 내지 못하고 엉엉 울었다. 그리고 일어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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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눈물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내가 앞으로 돈을 벌어서 어머니에게 효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은 좋 지 못한 기억들은 기억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 에겐 좋 지 못한 기억이지만 나의 마음을 두드리는 소중한 기억으로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 잡아 그 후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마다 무릅 꿇고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면 정신이 번쩍 들고 네 자신을 돌아보며 더 잘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가 응답되어 아버지는 65세에 교직에서 정 년퇴임하고 술을 끊고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나가며 신앙생활을 하시다가 94세에 소천 하셨다, 정년퇴임 후 서예에 심취하셔서 붓글씨를 잘 쓰셨다. 6번의 개인전시회도 하셨고 국전에도 입선 하셨다. 아버지께서 남긴 서예작품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信, 望, 愛 (믿음 ,소망 ,사랑)은 현재 우리 집 거실에 걸려있다. 어머 니는 아버지께서 소천하시고 5개월 후 87세로 소천 하셨다. 어머 니께서 소천하시기전 3개월 동안 병원에서 투병하셨는데 인공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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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기를 착용하고 있어 말을 할 수 없어서 볼 팬으로 종이에 글을 쓰서 의사소통을 하였는데 어느 날 나에게 종이에 “나의 병이 어 떠하냐” 고 물어셔서 “호홉이 약하여 인공호홉을 하고 있다”고 했더니 종이에 “나를 살리려고 하지마라, 하나님 날 데려가시라고 기도 해다오, 너무 괴롭다” “나를 천국에 보내다오” “아들아 고맙 다” 라고 쓰셨다. 나는 어머니의 따뜻한 손을 꼭 잡고 울었다. 나 는 아직도 그 종이를 간직하고 있다.

사진 1 – 2 병원 중환자실. 사진 3 의사소통 메모 종이

지금 생각하니 어머니께서 인공호홉을 하면서 얼마나 괴로웟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아픕니다. 병원에서는 노환으로 돌아가실 것을 뻔히 알면서도 병원수익을 올리려고 호전될 수 있다고 연명치료 를 계속 하였고, 또 만일 우리가 알았다 하더라도 연명치료를 중 단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환자만 괴로울 뿐입 니다. 나는 죽음도 인생의 한 부분인데 마지막 날 하나님 고통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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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데려가 주십시오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나는 연명치료를 하지 않을 것을 다짐 했다.

아버지께서 화랑무공훈장 수훈자로 두 분 모두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졌다. 나는 아버지께서 정년퇴임한 후 약30년 동안 부 모님을 따로 아파트에 모시고 매월 생활비를 드리며 효도로 부양 할 수 있어서 다행으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1.부친 경찰 경감시절 (맨 왼쪽) 2.부친 서예 개인전 (뒷면 전부 부친작품) 3..신 망 애 (믿음, 소망,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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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어머니 5. 가족사진(1981년)(부모님, 뒷줄 왼쪽-가운데 동생, 오른쪽 나) 6. 화랑무공훈장

3. 나의 청소년기

나는 초등학교 때 공부를 썩 잘했다. 그 당시 중고등학교 진학 시 시험을 쳤는데 나는 부산에서 제일 좋은 부산경남중학교에 합 격했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가정형편과 사춘기로 잠간 방황한 적이 있었다. 성적이 떨어지자 어머니께서 많이 걱정 하셨다. 고 등학교 입학시험을 앞두고 있을 때 아버지께서 앞으로 서울로 가 서 일하게 될 예정이라고 하면서 고등학교를 서울로 가야 한다고 하여 나는 서울보성고등학교(고려대학교 부속고등학교)로 응시하 여 540명중 9등의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서울서 자리를 잡을 때 까지 아버지와 나는 임시로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있는 하숙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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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생활하였다. 하숙집에는 대부분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생들이 었고 고등학생은 나 하나 뿐 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일이 예 상대로 잘 진척되지 않아 점점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하숙비도 밀 리게 되어 독촉 받게 되자 나만 남겨둔 채 하숙집에 오지 않았 다. 하숙집 주인은 하숙비가 밀렸다고 점심 도시락을 싸주지 않 았다. 나는 아침을 의도적으로 많이 먹고 점심은 수돗가에 가서 물배로 채웠다. 그런 사정을 알게 된 대학생 형이 주말에 하숙집 근처의 곰탕집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위로하면서 식사비를 내고 먼저 갔다. 나는 곰탕을 앞에 놓고 한참 울다가 곰탕을 먹은 적 이 있다. 학교 가는 길은 북아현동에서 종로5가 까지 전차를 타고 가서 다 시 종로5가 에서 학교가 있는 혜화동까지 버스를 타야 했다. 어 떤 때는 차비가 없어 헌책방에 가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지리 부도 책을 팔아서 차비로 사용 한 적도 있었다. 하숙집 주인의 독촉은 점점 더 심해졌고 견디다 못한 나는 1학년 9월달 학업을 중단하고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어머니는 무척 놀라고 당황해 하셨다. 어머니의 설득으로 중학교 3학년 교과 과목을 다시 공부하여 가 정형편상 실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일반 고등학 교 입시에 앞서 특차로 부산공업전문학교 5년제(후일 부경대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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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병)와 독일원조로 신설된 부산기계공고(해운대)가 있어서 나는 특차로 부산기계공고와 부산상고에 응시하여 2군데 모두 합격했 으나, 친척들이 역사와 전통이 있는 부산상고에 가는 것이 좋겠 다 하여 부산상고에 입학하였다. 1학년 8개 학급 중 취업반5개, 진학반3개로 편성 되었는데 나는 취업반으로 들어갔다. 상업학교라 주산, 부기, 타자등 당시 상업 실무에 필요한 과목이 별도로 있었는데 나는 열심히 했다. 특별 활동은 부기반에 들어가 활동했다. 3학년 졸업 때까지 부기2급을 취득하면 되었으나 나는 1학년 때 이미 부기2급 자격증을 취득했 다. 교련이라는 군사교육훈련시간이 있었는데 얼룩얼룩한 교련복 을 입고 발목에 각반을 차고 운동장에서 줄맞추어 행군을 한 것 이 생각이 난다. 당시 부산상고는 축구와 야구를 잘했다. 가끔 전 교생이 구덕운동장에 응원하러 갔었다 그래서 내가 지금도 스포 츠 중에서 축구와 야구를 좋아하게 된 것 같다.

1.경남중학 졸업사진 2.부산상고 졸업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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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의 청년기

3. 부산상고 재학시절 4. 졸업장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하기 위해 신체검사를 받고 8개월 후 입대 하라는 영장을 받았다. 입대 전 공백 기간 동안 아르바 이트를 했다. 상고1학년 부기 그룹과외, 초등학생 5,6학년 과외를 했다. 그리고, 1971. 8월 무더운 여름날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여 기초군사 훈련을 마치고 제1보충대를 거쳐 경기도 북단 최전방 철원 육군 제6사단 88포병대대(155㎜) 인사과에 배속되어 3년간 군복무를 하게 되었다. 최전방이라 북한의 대남방송이 크게 들리 고 경계보초를 나갈 때는 소총에 실탄을 장전하고 매일 새로운 암호를 하달 받은 후 경계근무를 했다. 캄캄한 밤 경계근무 때 사람이 나타났을 시 암호를 물었을 때 답하지 못하면 사격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살벌하고 두려움도 있었지만 차차 잘 적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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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부대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저녁에는 석유 등불을 켰는 데 매일 그을은 등불유리를 닦는 일은 항상 졸병들이 해야 했다. 한겨울 부대를 떠나 포사격 훈련을 가면 밤에 눈보라 치는 벌판 에 군용 삼각텐트를 치고 가운데 작은 간이난로를 놓고 땔감이 없어 포탄장약(화약)를 땔감으로 난방을 했다 몸 앞은 따뜻했지만 등 뒤는 살얼음이 피고 정말 추웠다. 1년에 한 번씩 강하고 극한 훈련인 유격 훈련를 받는데 고된 훈련으로 마지막 날 계단을 걸 어 내려오지 못하고 주저앉아 엉덩이를 끌면서 내려온 것이 생각 난다. 따듯한 봄에는 부대 뒤 연못가에 개구리가 많았는데 주말 에 막대기로 개구리를 잡아 기름에 튀겨 먹었는데,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지난 군 생활을 되돌아보니 고된 일. 힘들었던 일, 재 미있었던 일들이 주마등 같이 지나간다. 군대의 특성상 엄한규율 과 고된 훈련으로 힘든 생활 이였지만 그 과정을 거쳐 남자로써 더욱 성숙해지는 것 같다.

군복무 시절 (사진1. 오른쪽, 사진2. 뒤줄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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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가운데)

5. 나의 결혼 생활

그 당시 내 친구들은 보통 27살에 결혼을 많이 했다. 그러나 나 는 회사에서 인정받고 승진하기 위해 앞으로만 보고 열심히 달렸 다.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전셋집에서 살고 있어 경제적인 측면 에서 더 준비가 필요하여 결혼을 미루다가 노총각 되었다. 그동 안 회사와 거래처, 주위에서 중매가 많이 들어왔지만 그러한 이 유로 모두 거절했다. 그러다가 내가 34세 때 회사에서는 경리과 장이였고 결혼하기 위하여 21평 신축아파트 한 채를 취득하게 되 어. 이제 더 늦기 전에 결혼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어머니 께서 잘 아시는 교회 권사님의 중매로 선을 보게 되었는데 첫눈 에 반해서 내가 결혼하자고 청혼을 하게 되었고, 처는 30세 노처 녀였다. 선본지 4개월 만에 동래중앙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처가는 장인이 목사님으로 내가 존경하는 목사 중에 목사님이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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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처는 5남매 (아들3,딸2) 중4째 이었다. 옛날 목회자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그래도 아들3명은 대학을 딸2 명은 고등학교를 졸업시켰다. 결혼 후 처의 이야기가 음대에 합 격하였으나 돈이 없어 못 갔다고 하였다. 처는 장인께서 목회하 고 있는 교회 성가대 피아노반주를 하고, 교회재단에 꽃꼿이 봉 사를 하면서, 아르바이트로 피아노 레슨을 하고 있었다. 결혼 후 에도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약 20년간 성가대 반주로 봉사하였다.

1. 장인 목사님 2. 교회 성가대 반주(처)

결혼할 당시 준비된 새 아파트에서 신혼생활을 할까 생각하다가 부모님이 전셋집에 사는 것이 마음에 걸리고 신부가 보기에 모양 세가 좋지 않다고 생각되어 새 아파트에 부모님을 모시고 나는 따로 전세아파트를 얻어 신혼생활을 시작 했다. 부모님이 무척 기뻐하신 모습이 기억난다. 처는 부끄러움이 많은 편이나 가정적 이고 조용하고 신앙이 좋으며 특히 패션 감각이 뛰어나 항상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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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잘 차려입는 멋쟁이다. 결혼한 다음해에 아들이 태어났다 산 부인과 분만실 복도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간호 원이 아들이라고 알려줄 때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삼일 후 병원에서 퇴원하여 집에 도착하여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갑자기 아 기가 크게 울었다. 아이 울음소리에 우리부부는 서로 얼굴을 마 주보며 깜짝 놀랐다. 그때서야 나는 식구가 한사람 늘어 셋이 되 었음을 실감하고 행복감을 느꼈다. 그리고 일 년 후 딸이 태어났 다 그때도 너무 기뻐 병원 벽을 주먹으로 쳤다 그 이유는 태어난 딸이 4대 독녀이기 때문이다. 나와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 대 모두 아들로 딸이 없었는데 이번에 귀한 딸이 태어났기 때문이 다. 아이들이 어릴 때 연년생을 키우느라 처가 무척 힘들어 하던 것이 기억이 난다. 아이들은 다행으로 건강하게 무럭무럭 잘 자랐다.

1.아들 2. 딸 3. 딸 돌때

나와 처는 자녀들을 첫째, 신앙으로 키우려고 했다. 교회의 유년주일학교, 중고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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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부까지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교육했다. 아들 과 딸은 이에 잘 순종하여 신앙으로 성장해 주었다. 나는 자녀들 을 볼 때마다 교회 주일학교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학교가 지식을 가르치고, 병원이 사람을 치료하고 건강하게 하지만, 교회는 사람의 인성과 품성을 가르칩니다. 부산상고 정문 에 들어서면 앞에 큰 비석이 있는데 비석에 “먼저 사람이 되자” 라고 큰 글씨로 쓰여 있다. 이것은 지식에 앞서 인성과 품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글이라 생각된다.

둘째, 재산을 물려주는 것 보다 지식을 넣어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어, 자녀들이 원한다면 공부를 많이 시키기로 하였다. 아들 은 연세대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대학 국제정치 외교행정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귀국 국제기구에서 근무하고 있고. 딸은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교육대학원 교육학석 사 과정을 마치고 중등학교 교원자격증를 취득했다. 사위는 고대 법대를 졸업하고 고대법무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좋은 회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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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근무하고 있고, 며느리는 한양대학을 졸업하고 방송국 아나운 서로 근무하고 있다. 이제 손자, 손녀도 태어나고 자녀들이 믿음 안에서 가정을 이루고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때 그저 감사할 뿐 입니다. 내가 젊은 시절에 앞으로만 보고 달릴 때 곁에서 자 녀들을 키우고 조용히 내조해준 아내가 정말 고맙고 사랑스럽습 니다. 아내와 결혼한 것이 하늘이 준 내 생애 최고의 선물이라 생각 됩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와 장인 목사님의 신앙의 유산이 있었기에 오늘의 나와 내 가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진 1.- 2. 나 결혼사진 (1983년)

사진 3. 아들 대학원 졸업 (유학) 사진 4. 딸 대학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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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 아들 결혼사진. 사진 6. 손자 돌 가족사진

6. 나의 중 · 장년기

회사의 경리부서의 말단 사원으로 입사하여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서 가끔 고졸에 대한 눈에 보이지 않는 차등을 느낄 때도 있었 다. 때로는 대학을 가지 못한 것을 후회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게 주어진 현실 속에서 최선을 다하여 선의의 경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맡은 바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고 자기개발을 통하여 나를 업그레이드함으로써 실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다 짐했다. 우선 내 근무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경리, 회계는 물론이고 그와 관련된 세법, 원가계산, 경영분석, 은행금 융등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관련서적을 탐독하고 부족한 부분은 학원에도 다녔다. 정말 열심히 했다. 시간이 흐름에 실력이 쌓이 고 자연스럽게 회사업무에 반영이 되면서 인정을 받게 되어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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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대졸동료들이 있었지만 항상 먼저 승진을 거듭 했다. 경리부 장 때 있은 일이다. 회장님과 대화 중 회장님께서 자기 토지 중 일부가 도로에 편입되어 보상을 받았는데 그 돈으로 이번에 건물 을 하나 취득 했다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다. 나는 지방세법에 공공의 목적으로 부동산을 수용했을 경우 그 수용당한 자는 그 보상 받은 날로부터 1년 이내에 보상 받은 금액 한도 내에서 다 른 부동산을 취득할 경우 취득세와 등록세를 감면하는 조항이 있 는데 이를 설명하자 회장님의 안색이 굳어지더니 곧바로 일어나 가셨다. 그 후 회장님으로부터 관련서류를 받아 잘못 납부한 세 금을 돌려달라고 과오납 환급신청을 하고 보름 후 약 이천만원을 환급받았다. 내가 세법을 공부한 것은 조세의 포탈이 아니라 절 세를 위함인데 열심히 한 결과여서 무척 기쁘고 보람을 느꼈다.

그 다음해 나는 직장의 꽃이라는 임원으로 승진하게 되었다. 임 원이 되면서 경리뿐만 아니라 총무, 자재, 구매를 묶어 관리이사 로써 회사의 중요한 업무를 맡아 수행했다. 1990년대 한 회사가 노동쟁의를 하면 옆 회사는 빈 관이라도 지고 곡이라도 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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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생길 정도로 전국적으로 노동운동이 일어날 때, 우리 회사 도 처음으로 노조가 생겨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파업을 하겠 다고 투쟁을 하였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여러 날 밤늦게 협 상 회의를 하고 노동법과 근로기준법 등을 공부한 것이 주마등 같이 스쳐간다. 관리이사직을 무사히 마치고 순환보직으로 영업 이사가 되었다. 영업팀을 이끌고 동종업체와의 치열한 경쟁 속에 서 회사제품을 팔기 위하여 열심히 뛰었다. 납품한 업체가 부도 가 나자 밤 세워 대책회의를 하면서 고군분투한 것이 생각난다. 그 후 상임감사를 거처 마침내 대표이사 사장이 되었다. 나는 기 업의 사장들이 야간대학에서 공부하고 정보를 교환하고 교제하는 동아대학교 경영대학원 1년. 부산외국어대학 경영대학원 1년을 수료했다. 그리고 그 후 또 다른 회사에서 사장과 고문직을 거친 후 정년퇴임을 하였다.

1.동아대학교 경영대학원 2.부산외대 경영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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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회사 근무모습

나는 기독교인으로 신앙생활도 열심히 했다. 1993. 6.19 44세 때

장로로 장립되어 25년간 봉직하다가 2018. 2월 은퇴 하였다.

사진 1∼2 장로장립기념패 3. 임직식예배 순서지

7. 우리집 반려견 강아지 「레오」

레오는 몸무게 3㎏ 조금 넘는 작은 강아지다. 레오는 나이가 8살

이고 수컷으로 몸통의 털빛이 검정색이며, 가슴에 반달곰 처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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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색이 있고, 발 4개가 하얀 양말을 신은 것 처름 하얀색으로 귀 여운 강아지 이다. 7년6개월 전 생후 6개월로 추정되는 새끼강아지가 여름휴가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버려져 휴게소 건물 옆쪽 화단에서 동물복 지문제연구소 측에 의해 발견되어 구조된 후 우리에게 입양되어 한 가족 처름 지내고 있다. 발견 당시 레오는 낯선 사람들이 관 심을 보이면 차들이 쌩쌩 달리는 고속도로 쪽으로 뛰어들려고 하 는 등 높은 경계심을 보였다고 한다. 그 때의 공포심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생긴 것인지 레오는 비교적 겁이 많고 예민한 편이다. 나는 원래 개를 좋아하지 않았고, 한 번도 개를 키워본 적이 없 었다. 그러나 레오와 7년6개월을 한 가족처럼 지내다 보니 정이 들었다. 자녀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처와 단둘이 살고 있는 우리 집에 레 오가 온 후 달라진 점은 첫째, 레오는 집안에서는 절대 대, 소변을 보지 않고, 산책을 나 가 밖에서 본다. 따라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각 30분씩 받듯이 산책을 해야 한다. 비바람이 칠 때나, 태풍이 올 때에도 나가야 한다. 운동이 필요하고 게으른 나에게 하루 10,000보 이상 걷게 한다. 노인 건강과 정서적으로 매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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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문단속을 안 한다. 개는 청력과 후각이 발달하여 소리와 냄 새에 민감하여 외부침입자를 감시하는 파수꾼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요즘 택배를 아파트 문 앞에 두고 간다. 갑자기 레오가 짖 는다 문을 열고 나가보면 택배가 와 있다.

셋째, 위생에 더 철저히 신경을 쓴다. 레오는 털이 빠진다 그래서 아침저녁으로 청소기로 청소하고, 레오가 자는 방석을 찍찍 이로 묻은 털을 제거해 준다. 보름에 한 번씩 삼푸로 몸을 씻기고, 드 라이로 몸을 말리고, 칫솔로 이도 닦는다, 그리고 간식도 준다. 늦둥이를 하나 키우는 것과 같다.

넷째, 나와의 교감을 통하여 사회성도 교육하여야 한다. 레오도 산책 중 낯선 개를 만나면 서로 눈치를 보다가 일단 가까이 다가 서면 상대방 항문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게 되는데, 항문 냄새로 상대의 건강상태, 정서적 안정도, 성적인 성숙도, 나이 같은 정보 를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중요한 의사소통의 수단이기 때문에 적 극적으로 권장 허용하고 있다. 여행을 갈 때나 식당에 갈 때 함 께하지 못하고 다른데 임시로 맡겨야 하는 등 불편한 점도 있지 만 그래도 단점보다도 장점이 많아 괜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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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아지 (레오)의 최근 모습 2. 카카오기사에 게재 된 강아지 레오의 사연

내가 외출 후 집에 돌아오면 두발로 서서 팔짝 뛰며 반갑게 맞아 주는 레오를 보면서 비록 동물이지만 한 가족 처름 정을 느낀다. 레오가 우리 집에 사는 동안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되기를 기도 한다.

8. 나의 노년기

부모님 모두 소천하시고, 아들과 딸 모두 결혼하여 서울에서 살 고 있고, 나는 현재 정관에서 처와 단둘이 살고 있다. 해운대에서 살다가 정관으로 이사 온지 벌서 16년이 되었다. 세월이 참 빠르 게 느껴진다. 정관에 이사 오게 된 것은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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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분양 당첨되었을 때 제일꼭대기의 복층 아파트였다. 아파트가 아래 49평, 계단으로 올라가면 2층 16평과 단독 베란다가 있는 복층구조로 되어있다. 이런 아파트는 희소성의 가치가 있어 포기 하기가 아까워서 이사하게 되었다. 정관은 공기가 좋고, 조용하여 노인들이 살기에 좋은 곳이다. 은퇴 전에는 나는 회사 일에 몰두 하였고 집안일은 처가 전부했다. 그 때는 세탁기나 전기밥솥의 작동방법을 전혀 몰랐다. 그런데 지금은 잘한다. 가끔 스파게티 등 요리도 한다. 처가 맛있다고 한다. 처가 손목이 아파 설거지와 집 청소, 재활용쓰레기 버리기는 항상 내가 도맡아 한다. 노년에 는 집안일을 나누어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 생각해 보니 결혼생 활이란 결국 양보하고 서로에 맞추어 사는 것이라 생각된다. 카톡에 올라온 글인데 “젊게 살려 면 운동을 하고, 오래 살려 면 많이 웃고, 행복하게 살려 면 사랑을 하고, 즐겁게 살려 면 취미 생활을 하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은퇴 후 취미생활을 해야겠는데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영상을 취미생활로 하게 되었다. 어떤 사물이나 이야기를 촬영하고, 편집하여 동영상을 만드는 작업이 다. 비디오카메라 등 촬영장비도 마련했다. 요즈음은 핸드폰의 카 메라 기능이 많이 업그레이드되어 핸드폰으로도 영상을 쉽게 촬 영할 수 있다. 촬영, 편집 기능은 관련서적이나 유투버 등으로 공부하고, 부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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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학원에서 배운다, 노인들의 치매 예방에도 좋다고 한다. 나 와 같이 영상을 취미로 하는 노인들이 모여 함께 영상을 공부하 고, 제작하고, 사회봉사하는 정관노인복지관 영상동아리 〔레디액 션〕의 현제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해마다 열리는 부산실버영 상제에 3년 연속 우수상( 9.10.11회 )을 수상했다.

1.-2. 사진 부산실버영상제 3년 연속 우수상 수상

3. 우수상 상패 4.. 기장신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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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G, 유투버, SNS, AI 등 날로 발전하는 미디어 시대에 뒤떨어지 지 않는 신노인으로 자부심을 느끼며 생활하고 있다. 자서전을 쓰려니 글쓰기가 부족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망설 이다가 과거를 뒤돌아보니 모두가 소중하여 용기를 내어 썼다. 지난날의 생애를 되돌아보니 기쁘던 일, 행복했던 일, 힘들고 어 려웠던 일, 슬픈 일들이 주마등 같이 지나간다. 힘들고 어려웠던 일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지만 고난을 인내 라는 연단을 통하여 자기 것으로 잘 승화하면 더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지난 모든 생애를 낱낱이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남은여생 바르고 경건하고 사랑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 도록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친할머니의 기도와 외할아버지 목사님의 신앙의 유산을 잘 상속받아 한사람도 삐뚤삐뚤 튀어 나오지 않도록 믿음 의 대열을 잘 정비하여 자손대대 믿음의 복된 가정 이루기를 간 절히 바랍니다. 끝으로 내 자신에게 말 합니다. “고생했다, 수고했다,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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