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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온 길, 남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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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나의 어린시절 1

2 나의 부모님 2

3 나의 청소년기 5

4 나의 청년기 7

5 나의 결혼시절 8

6 나의 중, 장년기 11

7 우리집 반려견 강아지 (레오) 12

8 나의 노년기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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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의 어린시절

걸어온 길, 남은 길

뒤돌아 보니, 모두가 소중 했다.

심훈구

나의 어린 시절은 울산 큰집에서 자랐다. 어머니께서 몸이 아프셔서 외갓집에서 요양을 하고 나와 동생은 큰집 에 맞겨 졌다. 큰집은 울산에서 큰 과수원(배)을 했다. 큰 기와집 본채와 왼편에 사랑채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큰 창고가 있었 으며, 사랑채의 왼편에는 농사에 필요한 물을 공급하는 작은 연못이 있 었다 집 뒤편으로는 꽤 규모가 큰 과수원이 있었고, 그 당시 그 지역에 서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다. 학교(초등)에서 친구들과 함께 점심 도시락을 먹는데 친구들은 대부분 꽁보리밥에 그 속에 고구마를 섞은 밥이었는데 나는 보리밥이 조금 섞 인 쌀밥에 멸치볶음 반찬 이였다. 그 당시 학교 교실이 부족해서 오전 오후반으로 교대로 다닌 것이 기 억난다. 오후반 일 때는 학교 가는 길에 친구들과 놀다가 양지바른 논 두렁에 앉아 도시락 먹었다. 정말 꿀맛 이였다. 그리고 등에 맨 책보따리 속 빈도시락의 숟가락 부 딪치는 소리가 “철거덕 철거덕” 거리며 학교로 뛰어갔다. 미국 원조 분유로 학교에서 큰 가마솥에 우유를 끓여 나누어 주었고. 방과 후에는 줄을 서서 빈 도시락에 분유를 나누어 받았다. 그 분유를 밥할 때 밥 위에 계란 찌듯이 찌면 돌 처름 딱딱한 우유덩어리가 되는 데, 당시 별다른 간식이 없던 터라 그것을 깨어서 사탕 처름 빨아먹었 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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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는 교실 난방을 위한 땔감(솔방울, 나무)을 구하려고 전교생이 산에 갔는데 그때 산토끼도 잡고 눈밭에서 눈싸움을 하면서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았다.

1. 어린시절 (맨왼쪽 나) 2. 초등학교 1학년 3. 오른쪽 두 번째 나

2. 나의 부모님

아버지는 울산이 고향으로 할아버지는 농사를 지어셨고 아들만 5명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형제 중 유일하게 공부를 잘한 아버지는 울산농 고를 졸업하고 경성법학전문학교(현 서울법대 전신)를 졸업하고, 이어서 당시 신설된 경찰전문학교(현 경찰대학 전신)에 입학하여 1회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위로 임관하여 경찰전문학교 조교로 근무를 시작 하였고, 26세에 경감이 되었다. 요즈음으로 치면 사법고시에 합격한 젊은 판검 사 처름 그 당시 장래가 촉망되는 엘리트 신랑감 이였다. 어머니는 부산에서 부자집 딸로 태어났다. 부산남성여고를 졸업하고 시 집 갈 생각이 없는데, 외할아버지께서 좋은 실랑감이 있으니 결혼하라 고 하자 어머니는 좀 있다가 결혼하겠다고 반대 하였으나, 외할아버지 는 딸 중에 하나는 법을 전공한 경찰계통의 사위가 있어야 겠다고 생 각하여 결혼할 것을 강하게 강요하여 어머니는 19세 때, 26세의 아버 지와 결혼하여 서울에서 신혼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50. 4. 3 내가 태어났고, 3개월 후 6.26 전쟁이 일어났다. 아버지는 전투경찰 중대장으로 공비토벌 과 6.25 전투에 참전한 역전의 용사로 화랑무공훈장, 대통령방위포장 등을 수훈 받았고, 그 후 한국일보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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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기자생활, 중앙정보부 창설 맴버로 근무하였으나, 성격이 불의와 타 협하지 않는 곧은 성격으로 당시 시대상으로 볼 때 부정부패와 권모 술수가 만연한 때라 이에 적응하지 못하였고, 내가 고등학교 때 낙향하 여 부산영도에 있는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게 되셨다. 엘리트로써 자존 심과 꿈을 이루지 못한 좌절감에 사로 잡여 술을 많이 마시고 술주정 도 하셨다. 내가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를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에 아버지께서 술주정하는 것이 정말 싫었다. 아버지께 서 술을 잡숫고 오는 인기척이 들리는 날이면 우리 집은 완전이 비상 이 걸렸다 때로는 나와 동생은 밖으로 도망 처 아버지가 주무실 때 까 지 기다렸다가 들어가곤 했다. 그래서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늘 어렵게 살았다. 울산에 살 때는 어머니께서 과수원의 배 봉지 체우는 고된 노 동도 하셨고, 부산에서 살 때는 우리 집 주변에 외항선을 타는 선원가 족들이 많이 살았는데 소위 보따리 밀수품(비타민,전기제품,화장품등)를 받아 조금 마진을 붙여서 친척들에게 팔아 생활에 보태곤 하였다. 때론 집세가 밀려 집주인이 집 비우라고 난리 친후 어머니가 우시는 모습도 보았다. 중학교 때 학교에 내는 월사금이 여러 번 밀려 집으로 쫒겨간 적이 있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운지라 말 못하고 함께 쫒겨 난 친구와 함께 중간에 있다가 학교로 되돌아 간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기도의 어머니였습니다. 아버지 의 잦은 술주정과 경제적으로 어려움으로 인한 고달픈 삶이였지만 어 머니는 불평 한번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들에게 “너의 아버지를 이해 해야한다” “아버지가 불상하지 않나” “아버지가 술 끊고 교회 나가도록 기도하자” 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 같이 어머니는 아버지의 술주정과 모든 허물과 죄를 사랑 과 포용으로 받아들이며 기도하는 어머니였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도 그런 신앙의 어머니가 계셨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그날따라 아버지의 술주정이 유난히 심하여 한 바탕 난리를 친후 아버지께서 잠들고 고요한 밤에 신음소리가 들리어 살며시 가서 봤더니, 어머니의 기도소리 였다. 어머니는 꿇어앉아 울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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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 어머니가 너무 불쌍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 는 돌아와 이불속에서 소리는 내지 못하고 엉엉 울었다. 그리고 일어나 “하나님!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내가 앞으로 돈을 벌어 서 어머니에게 효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후 오늘날 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마다 무릅 꿇고 기 도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면 정신이 번쩍 들고 네 자신을 돌아보 며 더 잘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가 응답되어 아버지는 65세에 교직에서 정년퇴임 하고 술을 끊고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나가며 신앙생활을 하시다가 94 세에 소천 하셨다, 정년퇴임 후 서예에 심취하셔서 붓글씨를 잘 쓰셨 다. 6번의 개인전시회도 하셨고 국전에도 입선하셨다. 아버지께서 남긴 서예작품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信, 望, 愛 (믿음 ,소망 ,사랑)은 현재 우리 집 거실에 걸려있다. 어머니는 아버지께서 소천하시고 5개월 후 87세로 소천 하셨다. 어머니께서 소천하시기전 3개월 동안 병원에서 투병하셨는데 인공호홉기를 착용하고 있어 말을 할 수 없어서 볼팬으 로 종이에 글을 쓰서 의사소통을 하였는데 어느 날 나에게 종이에 “나 의 병이 어떠하냐” 고 물어셔서 “폐에 물이차서 인공호홉을 하고 있 다”고 했더니 종이에 “나를 살리려고 하지마라, 하나님 날 데려가시라 고 기도 해다오, 너무 괘롭다” “나를 천국에 보내다오” “아들아 고맙 다” 라고 쓰셨다. 나는 어머니의 따뜻한 손을 꼭 잡고 울었다. 나는 아 직도 그 종이를 간직하고 있다. 지금 생각하니 어머니께서 인공호홉을 하면서 얼마나 괘로웠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아픔니다. 병원에서는 노환 으로 돌아가실 것을 뻔히 알면서도 병원수익을 올리려고 호전될 수 있 다고 연명치료를 계속 하였고, 또 만일 우리가 알았다 하더라도 연명치 료를 중단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환자만 괘로울 뿐 이다. 나는 죽음도 인생의 한 부분인데 마지막 날 하나님 고통 없이 나 를 데려가 주십시오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나는 연명치료를 하지 않을 것 을 다짐 했다. 아버지께서 화랑무공훈장 수훈자로 두분 모두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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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졌다. 나는 아버지께서 정년퇴임한 후 약30년 동안 부모님을 따로 아파트에 모시고 매월 생활비를 드리며 효도로 부양할 수 있어서 다행 으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1.부친 경찰 경감시절(맨왼쪽) 2.신망애(믿음,소망,사랑) 3.부친 서예 개인전

4. 어머니 5. 가족사진(1981년)(부모님, 뒷줄 왼쪽-가운데 동생, 오른쪽 나) 6. 화랑무공훈장



3. 나의 청소년기

나는 초등학교 때 공부를 썩 잘했다. 그 당시 중고등학교 진학 시 시험 을 쳤는데 나는 부산에서 제일 좋은 부산경남중학교에 합격했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가정형편과 사춘기로 잠간 방황한 적이 있었다. 성적 이 떨어지자 어머니께서 많이 걱정 하셨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앞두 고 있을 때 아버지께서 앞으로 서울로 가서 일하게 될 예정이라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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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 고등학교를 서울로 가야 한다고 하여 나는 서울보성고등학교(고려 대학교 부속고등학교)로 응시하여 540명중 9등의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서울서 자리를 잡을 때 까지 아버지와 나는 임시로 서대문구 북아현동 에 있는 하숙집에서 생활하였다. 하숙집에는 대부분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생들이었고 고등학생은 나 하나 뿐 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일 이 예상대로 잘 진척되지 않아 점점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하숙비도 밀 리게 되어 독촉받게 되자 나만 남겨둔 채 하숙집에 오지 않았다. 하숙 집 주인은 하숙비가 밀렸다고 점심 도시락를 싸주지 않았다. 나는 아침 을 의도적으로 많이 먹고 점심은 수도가에 가서 물배로 채웠다. 그런 사정을 알게 된 대학생 형이 주말에 하숙집근처의 곰탕집으로 나를 대 리고 가서 위로하면서 식사비를 내고 먼저 갔다. 나는 곰탕을 앞에 놓 고 한참 울다가 곰탕을 먹은 적이 있다. 학교 가는 길은 북아현동에서 종로5가 까지 전차를 타고 가서 다시 종 로5가 에서 학교가 있는 혜화동까지 버스를 타야 했다. 어떤 때는 차비 가 없어 헌책방에 가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지리부도책을 팔아서 차비로 사용 한 적도 있었다. 하숙집 주인의 독촉은 점점 더 심해졌고 견디다 못한 나는 1학년 9월달 학업을 중단하고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어머니는 무척 놀라고 당황해 하셨다. 어머니의 설득으로 중학교 3학년 교과 과목을 다시 공부하여 가정형편 상 실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일반 고등학교 입시에 앞 서 특차로 부산공업전문학교 5년제(후일 부경대학과 합병)와 독일원조 로 신설된 부산기계공고(해운대)가 있어서 나는 특차로 부산기계공고와 부산상고에 응시하여 2군데 모두 합격했으나, 친척들이 역사와 전통이 있는 부산상고에 가는 것이 좋겠다 하여 부산상고에 입학하였다. 1학년 8개 학급 중 취업반5개, 진학반3개로 편성 되었는데 나는 취업 반으로 들어갔다. 상업학교라 주산, 부기, 타자등 당시 상업실무에 필 요한 과목이 별도로 있었는데 나는 열심히 했다. 특별활동은 부기반에 들어가 활동했다. 3학년 졸업 때까지 부기2급을 취득하면 되었으나 나 는 1학년 때 이미 부기2급 자격증을 취득했다. 교련이라는 군사교육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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련시간이 있었는데 얼룩얼룩한 교련복을 입고 발목에 각반을 차고 운 동장에서 줄맞추어 행군을 한 것이 생각이 난다. 당시 부산상고는 축구 와 야구를 잘했다. 가끔 전교생이 구덕운동장에 응원하러 갔었다 그래 서 내가 지금도 스포츠 중에서 축구와 야구를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왼쪽부터 1.경남중학 졸업사진 2.부산상고 졸업사진 3.부산상고 재학시절



4. 나의 청년기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하기 위해 신체검사를 받고 8개월 후 입대 하라는 영장을 받았다. 입대 전 공백 기간 동안 아르바이트를 했 다. 상고1학년 부기 그룹과외, 초등학생 5,6학년 과외를 했다. 그리고, 1971. 8월 무더운 여름날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여 기초군사 훈련를 마 치고 제1보충대를 거쳐 경기도 북단 최전방 철원 육군 제6사단 88포병 대대(155㎜) 인사과에 배속되어 3년간 군복무를 하게 되었다. 최전방이 라 북한의 대남방송이 크게 들리고 경계보초를 나갈 때는 소총에 실탄 을 장전하고 매일 새로운 암호를 하달 받은 후 경계근무를 했다. 캄캄 한 밤 경계근무 때 사람이 나타 났을 시 암호를 물었을 때 답하지 못 하면 사격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살벌하고 두려움도 있었지만 차차 잘 적응했다. 당시 부대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저녁에는 석유 등불을 켰는데 매일 그을은 등불유리를 닦는 일은 항상 졸병들이 해야 했다. 한겨울 부대를 떠나 포사격 훈련을 가면 밤에 눈보라 치는 벌판에 군 용 삼각탠트를 치고 가운데 작은 간이난로를 놓고 땔감이 없어 포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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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화약)를 땔감으로 난방을 했다 몸 앞은 따뜻했지만 등 뒤는 살얼음 이 피고 정말 추웠다. 1년에 한 번씩 강하고 극한 훈련인 유격훈련를 받는데 고된 훈련으로 마지막 날 계단을 걸어 내려오지 못하고 주저앉 아 엉등이를 끌면서 내려온 것이 생각난다. 따듯한 봄에는 부대 뒤 연 못가에 개구리가 많았는데 주말에 막대기로 개구리를 잡아 기름에 튀 겨 먹었는데,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지난 군생활을 되돌아보니 고된 일. 힘들었던 일, 재미있었던 일들이 주마등 같이 지나간다. 군대의 특 성상 엄한규율과 고된 훈련으로 힘던 생활 이였지만 그 과정을 거쳐 남자로써 더욱 성숙해지는 것 같다.

 군복무 시절 (사진1. 오른쪽 사진2. 뒤줄 가운데 사진3. 가운데) 5. 나의 결혼 시절 그 당시 내 친구들은 보통 27살에 결혼을 많이 했다. 그러나 나는 회 사에서 인정받고 승진하기 위해 앞으로만 보고 열심히 달렸다.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전셋집에서 살고 있어 경제적인 측면에서 더 준비가 필 요하여 결혼을 미루다가 노총각 되었다. 그동안 회사와 거래처, 주위에 서 중매가 많이 들어 왔지만 그러한 이유로 모두 거절했다. 그러다가 내가 34세 때 회사에서는 경리과장이였고 결혼하기 위하여 21평 신축 아파트 한 채를 취득하게 되어. 이제 더 늦기 전에 결혼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어머니께서 잘 아는 교회 권사님의 중매로 선을 보게 되었는데 첫눈에 반해서 내가 결혼하자고 청혼을 하게 되었고, 처는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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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노처녀였다. 선본지 4개월 만에 동래중앙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처가는 장인이 목사님으로 내가 존경하는 목사 중에 목사님이셨다. 처 는 5남매 (아들3,딸2) 중4째 였다. 옛날 목회자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그래도 아들3명은 대학을 딸2명은 고등학교를 졸업시켰다. 결혼 후 처의 이야기가 음대에 합격하였으나 돈이 없어 못 갔다고 하였다. 처는 장인께서 목회하고 있는 교회 성가대 피아노반주 를 하고, 교회재단에 꽃꼿이 봉사를 하면서, 아르바이트로 피아노 레슨 을 하고 있었다. 결혼 후에도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약20년간 성가대 반주로 봉사하였다. 결혼할 당시 준비된 새 아파트에서 신혼생활을 할 까 생각하다가 부모님이 전셋집에 사는 것이 마음에 걸리고 신부가 보 기에 모양세가 좋지 않다고 생각되어 새 아파트에 부모님을 모시고 나 는 따로 전세아파트를 얻어 신혼생활을 시작헀다. 부모님이 무척 기쁘 하신 모습이 기억난다. 처는 부끄러움이 많은 편이나 가정적이고 조용 하고 신앙이 좋으며 특히 패션 감각이 뛰어나 항상 옷을 잘 차려입는 멋쟁이다. 결혼한 다음해에 아들이 태어났다 산부인과 분만실 복도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간호원이 아들이라고 알려줄 때 얼 마나 기뻐 했는지 모른다. 삼일 후 병원에서 퇴원하여 집에 도착하여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갑자기 아기가 크게 울었다. 아이 울음소리에 우리 부부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깜짝 놀랐다. 그때서야 나는 식구가 한사 람 늘어 셋이 되었음을 실감하고 행복감을 느꼈다. 그리고 일년 후 딸 이 태어났다 그때도 너무 기뻐 병원 벽을 주먹으로 쳤다 그 이유는 태 어난 딸이 4대 독녀이기 때문이다. 나와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 대 모 두 아들로 딸이 없었는데 이번에 귀한 딸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아이들 이 어릴 때 연년생을 키우느라 처가 무척 힘들어 하던 것이 기억이 난 다. 아이들은 다행으로 건강하게 무럭무럭 잘 자랐다. 나와 처는 자녀들을 첫째, 신앙으로 키우려고 했다. 교회의 유년주일학 교, 중고등부, 대학부까지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교육했 다. 아들과 딸은 이에 잘 순종하여 신앙으로 성장해 주었다. 나는 자녀 들을 볼 때마다 교회 주일학교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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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학교가 지식을 가르치고, 병원이 사람을 치료하고 건강하게 하지 만, 교회는 사람의 인성과 품성을 가르칩니다. 부산상고 정문에 들어서 면 앞에 큰 비석이 있는데 비석에 “먼저 사람이 되라” 라고 큰 글씨로 쓰여 있다. 이것은 지식에 앞서 인성과 품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 조한 글이라 생각된다. 둘째, 재산을 물려주는 것 보다 지식을 넣어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 어, 자녀들이 원한다면 공부를 많이 시키기로 하였다. 아들은 연세대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대학 국제정치외교행정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치고 귀국 국제기구에서 근무하고 있고. 딸은 이화여대를 졸 업하고 이화여대 교육대학원 교육학석사 과정을 마치고 중등학교 교원 자격증를 취득했다. 사위는 고대 법대를 졸업하고 고대법무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치고 좋은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고, 며느리는 한양대학을 졸 업하고 방송국 아나운서로 근무하고 있다. 이제 손자, 손녀도 태어나고 자녀들이 믿음 안에서 가정을 이루고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때그저 감사할 뿐 입니다. 내가 젊은 시절에 앞으로만 보고 달릴 때 곁에서 자녀들을 키우고 조용히 내조해준 아내가 정말 고맙고 사랑스럽습니다. 아내와 결혼한 것이 하늘이 준 내 생애 최고의 선물이라 생각 됩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와 장인 목사님의 신앙의 유 산이 있었기에 오늘의 나와 내 가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1.나 결혼사진(1983년) 2.아들 대학원 3.딸 대학원 졸업사진 4.손자 돌(가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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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나의 중 · 장년기

회사의 경리부서의 말단 사원으로 입사하여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가 끔 고졸에 대한 눈에 보이지 않는 차등을 느낄 때도 있었다. 때로는 대 학을 가지 못한 것을 후회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게 주어진 현 실 속에서 최선을 다하여 선의의 경쟁를 할 수밖에 없었다. 맡은 바 정 직하고 성실하게 일하고 자기개발을 통하여 나를 업그레이드 함으로써 실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다짐했다. 우선 내 근무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경리, 회계 는 물론이고 그와 관련된 세법, 원가계산, 경영분석, 은행금융등을 공 부하기 시작했다. 관련서적을 탐독하고 부족한 부분은 학원에도 다녔 다. 정말 열심히 했다. 시간이 흐름에 실력이 쌓이고 자연스럽게 회사 업무에 반영이 되면서 인정을 받게 되어 회사 내 대졸동료들이 있었지 만 항상 먼저 승진을 그듭 했다. 경리부장 때 있은 일이다. 회장님과 대화 중 회장님께서 자기 토지 중 일부가 도로에 편입되어 보상을 받 았는데 그 돈으로 이번에 건물을 하나 취득 했다고 자랑스럽게 말씀하 셨다. 나는 지방세법에 공공의 목적으로 부동산을 수용했을 경우 그 수 용당한 자는 그 보상 받은 날로부터 1년 이내에 보상 받은 금액 한도 내에서 다른 부동산을 취득할 경우 취득세와 등록세를 감면하는 조항 이 있는데 이를 설명하자 회장님의 안색이 굳어지더니 곧바로 일어나 가셨다. 그 후 회장님으로부터 관련서류를 받아 잘못 납부한 세금을 돌 려달라고 과오납 환급신청을 하고 보름 후 약 이천만원을 환급받았다. 내가 세법을 공부한 것은 조세의 포탈이 아니라 절세를 위함인데 열심 히 한 결과여서 무척 기쁘고 보람을 느꼈다. 그 다음해 나는 직장의 꽃 이라는 임원으로 승진하게 되었다. 임원이 되면서 경리 뿐만아니라 총 무, 자재, 구매를 묶어 관리이사로써 회사의 중요한 업무를 맡아 수행 했다. 1990년대 한 회사가 노동쟁이를 하면 옆 회사는 빈 관이라도 지 고 곡이라도 한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전국적으로 노동운동이 일어날 때, 우리 회사도 처음으로 노조가 생겨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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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하겠다고 투쟁을 하였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여러 날 밤늦게 협상 회의를 하고 노동법과 근로기준법등을 공부한 것이 주마등 같이 스쳐간다. 관리이사직을 무사히 마치고 순환보직으로 영업이사가 되었 다. 영업팀을 이끌고 동종업체와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회사제품을 팔 기 위하여 열심히 뛰었다. 납품한 업체가 부도가 나자 밤 세워 대책회 의를 하면서 고군분투한 것이 생각난다. 그 후 상임감사를 거처 마침내 대표이사 사장이 되었다. 나는 기업의 사장들이 야간대학에서 공부하고 정보를 교환하고 교제하는 동아대학교 경영대학원 1년. 부산외국어대학 경영대학원 1년를 수료했다. 그리고 그 후 또 다른 회사에서 사장과 고 문직을 거친 후 정년퇴임를 하였다. 나는 기독교인으로 신앙생활도 열심히 했다. 1993. 6.19 44세 때 장로 로 장립되어 25간 봉직하다가 2018. 2월 은퇴 하였다.

1.회사근무 모습 2.동아대학교경영대학원 3.부산외대경영대학원 4.장로장립기념패 7. 우리집 반려견 강아지 「레오」 레오는 몸무게 3㎏ 조금 넘는 작은 강아지다. 레오는 나이가 8살 이고 수컷으로 몸통의 털빛이 검정색이며, 가슴에 반달곰 처름 하얀색이 있 고, 발 4개가 하얀 양말을 신은 것 처름 하얀색으로 귀여운 강아지 이다. 7년6개월 전 생후 6개월로 추정되는 새끼강아지가 여름휴가철 고속도 로 휴게소에서 버려져 휴게소 건물 옆쪽 화단에서 동물복지문제연구소 측에 의해 발견되어 구조된 후 우리에게 입양되어 한가족 처름 지내고 있다. 발견 당시 레오는 낯선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면 차들이 쌩쌩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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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는 고속도로 쪽으로 뛰어들려고 하는 등 높은 경계심을 보였다고 한 다. 그 때의 공포심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생긴 것인지 레오는 비교적 겁이 많고 예민한 편이다. 나는 원래 개를 좋아하지 않았고, 한 번도 개를 키워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레오와 7년6개월을 한 가족처름 지내다 보니 정이 들었다. 자녀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처와 단둘이 살고 있는 우리집에 레오가 온 후 달라진 점은 첫째, 레오는 집안에서는 절대 대, 소변을 보지 않고, 산책을 나가 밖 에서 본다. 따라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각 30분씩 받드시 산책을 해야 한다. 비바람이 칠 때나, 태풍이 올 때에도 나가야 한다. 운동이 필요하고 게으른 나에게 하루 10,000보 이상 걷게 한다. 노인 건강과 정서적으로 매우 좋다 둘째, 문단속을 안 한다. 개는 청력과 후각이 발달하여 소리와 냄새에 민감하여 외부침입자를 감시하는 파수꾼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요즘 택배를 아파트 문 앞에 두고 간다. 갑자기 레오가 짖는다 문을 열고 나 가보면 택배가 와 있다. 셋째, 위생에 더 철저히 신경을 쓴다. 레오는 털이 빠진다 그래서 아침 저녁으로 청소기로 청소하고, 레오가 자는 방석을 찍찍이로 묻은 털을 제거해 준다. 보름에 한 번씩 삼푸로 몸을 씻기고, 드라이로 몸을 말리 고, 칫솔로 이도 닦는다, 그리고 간식도 준다. 늦둥이를 하나 키우는 것과 같다. 넷째, 나와의 교감을 통하여 사회성도 교육하여야 한다. 레오도 산책 중 낯선 개을 만나면 서로 눈치를 보다가 일단 가까이 다가서면 상대 방 항문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게 되는데, 항문 냄새로 상대의 건강상 태, 정서적 안정도, 성적인 성숙도, 나이 같은 정보를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중요한 의사소통의 수단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권장 허용하고 있다. 여행을 갈 때나 식당에 갈 때 함께하지 못하고 다른데 임시로 맡 겨야 하는 등 불편한 점도 있지만 그래도 단점보다도 장점이 많아 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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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다. 내가 외출 후 집에 돌아오면 두발로 서서 팔짝 뛰며 반갑게 맞아주는 레오를 보면서 비록 동물이지만 한 가족 처름 정을 느낀다. 레오가 우리 집에 사는 동안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 되기를 기도한다.

1.강아지 (레오)의 최근 모습 2.카카오기사에 게재 된 강아지 레오의 사연 8. 나의 노년기 부모님 모두 소천하시고, 아들과 딸 모두 결혼하여 서울에서 살고 있 고, 나는 현재 정관에서 처와 단둘이 살고 있다. 해운대에서 살다가 정 관으로 이사 온지 벌서 16년이 되었다. 세월이 참 빠르게 느껴진다. 정 관에 이사 오게 된 것은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를 분양 당첨되었을 때 제일꼭대기의 복층 아파트였다. 아파트가 아래 49평, 계단으로 올라가 면 2층 16평과 단독 베란다가 있는 복층구조로 되어있다. 이런 아파트 는 희소성의 가치가 있어 포기하기가 아까워서 이사하게 되었다. 정관 은 공기가 좋고, 조용하여 노인들이 살기에 좋은 곳이다. 은퇴 전에는 나는 회사 일에 몰두하였고 집안일은 처가 전부했다. 그 때는 세탁기나 전기밥솥의 작동방법을 전혀 몰랐다. 그런데 지금은 잘한다. 가끔 스파 게티등 요리도 한다 처가 맛있다고 한다. 처가 손목이 아파 설거지와 집 청소, 재활용쓰레기 버리기는 항상 내가 도맡아 한다. 노년에는 집 안일을 나누어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 생각해 보니 결혼생활이란 결국 양보하고 서로에 맞추어 사는 것이라 생각된다. 카톡에 올라온 글인데 “젊게 살려 면 운동을 하고, 오래 살려 면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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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고, 행복하게 살려 면 사랑을 하고, 즐겁게 살려 면 취미생활을 하 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은퇴 후 취미생활을 해야겠는데 무엇을 할까 생 각하다가 영상을 취미생활로 하게 되었다. 어떤 사물이나 이야기를 촬 영하고, 편집하여 동영상을 만드는 작업이다. 비디오 카메라등 촬영장 비도 마련했다. 요즈음은 헨드폰의 카메라 기능이 많이 업그레이드 되 어 헨드폰 으로도 영상을 쉽게 촬영할 수 있다. 촬영, 편집 기능은 관련서적이나 유투버등으로 공부하고, 부족한 것은 학원에서 배운다, 노인들의 치매 예방에도 좋다고 한다. 나와 같이 영 상을 취미로 하는 노인들이 모여 함께 영상을 공부하고, 제작하고, 사 회봉사하는 정관노인복지관 영상동아리 〔레디액션〕의 현제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해마다 열리는 부산실버영상제에 3년 연속 우수상 (9.10.11회)을 수상했다. 5G, 유투버, SNS, AI 등 날로 발전하는 미디 어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신노인으로 자부심을 느끼며 생활하고 있 다. 자서전를 쓰려니 글쓰기가 부족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망설이다가 이제는 말할수 있다고 생각해 용기를 내어 썼다. 지난날의 생애를 되돌 아보니 기뻐던일, 행복했던일, 힘들고 어려웠던일, 슬픈일들이 주마등 같이 지나간다. 힘들고 어려웠던 일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지만 고난을 인내라는 연단을 통하여 자기 것으로 잘 승화하면 더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지난 모든 생애를 낱낱이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 고 남은여생 바르고 경건하고 사랑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 드립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친할머니의 기도와 외할아버지 목사님의 신앙의 유산 을 잘 상속받아 한사람도 삐뚤삐뚤 튀어 나오지 않도록 믿음의 대열을 잘 정비하여 자손대대 복된가정 이루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끝으로 내 자신에게 말 합니다. “고생했다, 수고했다,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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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사진 부산실버영상제 3년 연속 우수상 수상 3. 본인사진

2025. 4. 22 심 훈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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