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문예 74호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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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문예 통권 74호 2024년 12월 1일 발행 (겨울호) 2006년 3월 15일 등록 : 서초바00053
Asian Literary Arts 2024 겨울호 통권 74호
삼악산 봉(峯)
島松 송병훈
용꿈 품고 내딛는 발길 용화봉 청운봉 등선봉
인내와 용기 온 힘 다해 오르고 오르고 또 올라서
포기를 모르는 향학열은 학문의 최종 박사학위로
220명 모두 산봉에 서게 한 세계 유일의 서면 박사마을.
島松 宋炳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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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천사도 시(天使島詩歌)’ 미국 화인 디아스포라 시의 이해│박남용 역 천사도 시 7편
고정기고
74 감사문화│제갈정웅
예술종합
96 아리랑│조용호
129 숲 문화와 힐링│김상범
마음 에너지 방정식
78 현대 효(HYO) 특강(2/2)│김시우 하모니 효(HYO)와 경제공동체 행복 ― 성경적 효복사상과 경제발전의 상관성 ―
한강의 뜻과 식민사관 논점 연구
가로경관 『담장』에 대한 소고(小考)
141 신작시
147 신작수필
159 신작동화
164 신작소설
191 지역특집
솜구름│공혜주 칠엽수│송용재 땅별 이야기│장정화 소복소복 함박눈이│조희숙 마지막 여행│최시영
동강에서 보낸 하루│강종원 보릿고개│최선화
지호의 꿈│윤수자
장 씨│김광한
K-맘(Mom)의 발상지 춘천 박사마을│島松 송병훈
신인상│시 193 문기명│아버지 마라톤 다짐 나뭇잎 겨울에 핀 꽃 199 유선희│등대 가로등 비 퇴근길 노인의 기도
208 알림
Asian Literary Arts 2024 겨울호 / 통권 74호
사랑은
西松장성자
밤하늘에 내리는 눈-
꿈처럼 살포시 내려 앉는다
방울저 흐르는 눈 물은
커다란 지구 덩이를 부수고
파랑새 눈 뜨는 날
해를 안고 그윽한 향의 꽃을 벙근다.
西松 張誠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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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언
운명적인 유랑과 다양한 삶의 추이
― ‘파초와 호수의 시인’, 김동명의 삶 ―
엄창섭
모름지기 조국의 해방 직후에 함흥 서호중학교 재직 당시 흥남학생 의거사건(1946년)에 동조한 혐의로 며칠간 교화소에 연금을 당한 초허 (超虛) 김동명(金東鳴, 1900-1968) 시인은 그 나름으로 정치에 뜻을 두 었기에 탈북(脫北) 전에 조선민주당 함남도당위원장을 지냈다. 또 한편 그 자신이 시집 『하늘』을 간행한 1947년, 정치탄압을 피해 단신 월남하 여 한국신학대학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또 같은 해 조선민주당 정치부장을 걸쳐 1952년에는 민주국민당 문화 부장 직함으로 활동하며 과거의 시풍인 서정성과는 별개로 현실과 정 치, 사회풍자와 관념적인 색조의 정치평론과 에세이 집필에도 관심을 지니고 몰두하였다. 그렇다. 그 자신은 월남 이후에도 정치에 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서 이화여대 교수 재임 중에 『東亞日報』를 중점적으로 정치평론의 지평 을 여는 활동과 신춘문예 심사(1960년 조지훈 *정진규의 <나팔 抒情>) 도 담당하였다. 그 같은 경력은 시대를 거슬러 도쿄 유학 시절에도 도산 (島山)의 정치집회에 줄곧 참석하며 사회문제를 또 다른 시적 세계로 인
식한 시각을 키워나간 일면은 민족애가 남다른 기질적 차별성의 결과 다. 비록 4·19 혁명 이후 이화여자대학에서 교수직을 사임하고 민주당 후보로 서울 종로에서 참의원에 당선되지만 5.16 군사 정변으로 6개월 남짓 정객(政客)의 길에 몸담게 되었다. 그 이후 장르에 구별 없이 집필 활동을 지속하나 생계와 의료비를 걱정하며 곤궁한 처지를 이어가는 삶 의 일상은 슬픈 자화상 자체였다. 각론하고 청빈한 삶의 일상에서 물욕을 유독 견제하며 자연의 순리 에 거역함이 없는 따뜻한 미소와 지극선(至極善)을 소유한 고매한 품격 의 시인이었다. 여기서 필자와 오랜 날 인간관계를 맺어온 황금찬(黃錦 燦) 시인은, 초허가 교수 재임 중에 중절모자를 즐겨 썼고 왈츠 곡인 요 한 스트라우스(Johann Strauss)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나 윤심 덕(尹心悳)의 <死의 讚美>을 콧노래로 흥얼거렸다는 지적은 매우 인상 적이다. 또 대조적으로 강단에서는 강한 어조와 서슬 푸른(刃) 시선으로 건강한 비판의식을 지니고 “관조와 행동이 공존해야 비로소 시대적 예 술임”을 역설하였다. 이처럼 초허는 부조리와 굴욕에 맞서 예리한 비판 정신을 곧추세우다 가도 학업에 열중하는 제자들 앞에서는 밝은 표정과 자제력을 잃지 않았다. 모름지기 초허의 그 멋스러운 인간적인 풍모를 항상 기억에 담아둔 동향(同鄕)이며 학과 제자인 허미자 교수는「이화에서의 超虛 선생님」회 고담에서 “선생님은 저희에게 현대시, 문학창작, 비평문학 등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생략…. 마치 좁은 강의실을 벗어나 무한히 넓은 창공을 훨훨 자유롭게 비상하는 독수리와 같이 자유로운 상념의 비상을 하면 서, 선생님은 침묵으로 저희에게 조용함 속에 날카로운 눈과 발톱을 가 진 독수리처럼 강인한 비판 정신을 가르쳐주셨습니다.”라며 그렇게 ‘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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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눈을 지닌’ 자상한 스승에 관한 감회 또한 토로하였다. 비교적 명상 적 태도로 즉물적 대상을 비유적 이미지와 회화적 기법으로 형상화한 초허는 한국 현대사에서 다양한 발자국을 남긴 실체이다. 그 자신이 고 뇌와 갈등 끝에 50대 후반, 정치평론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지평을 열어 가며 지적인 정객(政客)으로 변신하여 이 땅의 진정한 민주화를 위해 대 처하였다. 한 시대의 암울함을 신앙심으로 굳건히 지켜내면서 밝은 꿈 을 확신했던 미래지향적인 저항 시인이었음은 다시금 수긍할 바다. 까 닭에 민족의 혼인 조선어가 말살된 격동의 와중에서도 1942년 봄까지 <狂人>, <술 노래>, <종으로 마다시면> 등과 같은 불멸의 시혼을 올곧게 토해냈다. 특히 그의 유년 시절 정주와 이주의 반복은 역사의 변곡점에 잇닿고 모친은 기질적으로 단호하고 강한 결단력을 지닌 존재감이 강한 편이 다. 또 한편 초허는 따님인 월정(月汀) 여사가「나의 아버지 김동명 2」에 서 회고하듯 ‘평범하고 내성적이나 비교적 무학의 부친보다 강인한 모친의 성품을 이어받은 편이다. 이 처럼 환경조건에 관한 이미림 교수가「이데올로기의 혼효(混淆)」에서 지 적한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이동하여 공동체에서 벗어났던 작가의 운명은 장소애로 그려지며 정원을 가꾸는 일과 꽃과 나무에 대 한 사랑으로 드러난다.”에서 새삼 뜻깊다. 까닭에 ‘위대한 조선 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그와의 운명적인 만남’은 지난 2012년 『江原日報』가「강원랜드」 후원으로 기획한 <강원 의 역사 인물 심포지엄>에서 필자 그 나름으로 확증한 바 있다. 따라서 이 땅의 진정한 저항 시인으로 평가받아 마땅한 초허는 <水仙花>, <芭蕉> 에서 ‘불멸의 영혼’으로 천명되었듯 정치 악과 불의를 거부한 것으로 그
정체성이 입증된다. 또 한국 근현대문학사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간 정치평론집 『나는 證言한다』(新雅社, 1964)에서 “이 책은 겨레에게 보 내는 제7 시집이다.”라는 주장은 그 자신이 대륙의 심장을 지닌 지사적 존재를 입증한 결과다. 또 한편 “강보에 싸였을 때부터 내 기억은 물소 리에서부터 시작된다. 방안에 앉아서도 그윽이 들려오는 물소리!”라는 아련한 기억 흔적과 함께 맑은 영혼을 적셔주는 물의 흐름처럼 가슴 저 며오는 전별(餞別)과 운명적인 행적은 맞물려 있기에 산문집 『모래 위에 쓴 落書』처럼 그 자신의 서러운 인생의 여정은 사주팔자처럼 그렇게 시 작될밖에 없다. 그같이 ‘망향의 꿈, 102년 뒤 선영에 묻히다.’라는 언론 보도처럼 수필집 『세대의 揷話』(日新社, 1958)에서의 다양한 삶의 행적 은 무채색의 아득한 정신풍경화인 에피소드(Episode)다. 모처럼 때늦은 초허의 봉안식이 지난 2010년 10월 10일, 그가 탯줄 을 묻은 사천면 노동하리 산 322번지의 낮은 산자락에 자리한 종중 영 원(靈園)에서 거행되었고 필자도 그날에 기념사를 하였지만, 가을 햇살 은 청명하였고 그의 맑은 영혼은 모두의 가슴을 짐짓 저미게 하였다. 이 날에 경주김씨 수은공파 강릉 사천 종중은 서울 망우리 문인공원묘지에 안치된 유해를 102년 만에 이장하였다. 또 한편 강릉시에서 그의 생가 터에 생가와 문학관이 2012년 12월에 건립되었다. 이처럼 ‘시대적 상 황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답하기에 어려움이 따르지만 여덟 살 나이에 유랑을 시작했던 그의 디아스포라(diaspora)는 부모의 손을 잡고 고향을 떠난 그 시간대에 더없이 맞물려 운명적인 삶을 체험 케 하였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일제강점기→자유당 부패→군사독재’라는 시대 상황에 당당하게 대응하며 격변하는 한국 현대사에 온 몸을 던져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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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을 몸소 수행한 민족의 정신적 지도자로 국어에 대한 남다른 애정 과 관심을 지니고 정신작업에 종사한 한 시대의 진정한 지사적 인물로 서 ‘시, 소설(越南記), 수필, 평론’으로 다양하고 폭넓게 문학의 장르를 넘나들며 문학의 외연(外延)을 보다 넓혀간 당당한 자존감의 실체였다. 또 한편 단순한 주장의 타당성을 보다 확증하기 위하여 절제된 감정으 로 객관성을 유지하며 일관되게 피력한 논조의 동일성을 유지한 과정에 견주어 앞서 『초판본 김동명 시선』(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2)의 출판 사 서평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론의 타당성을 일깨워주고 있음은 다시 금 헤아릴 일이다. 어디까지나 초허의 시 세계는 시적 대상과 시 정신으로 볼 때 서로 다 른 두 세계가 공존하는 시대적 상황이야말로, 자연물과의 회감(懷感)이 섬세하게 그려지는 순수서정의 세계와 사회현실을 언어로 승화시킨 세 계의 맞물림이다. 까닭에 순수서정과 현실지향의 두 세계는 그 자신의 시편에 공존하면서 서로 교차하며 한 인간으로서 그가 지닌 문학성을 향한 열정과 현실에 대한 참여 의지는 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모처럼 ‘순수서정을 노래하는 시인의 내면에서 현실적 고뇌를 발견하게 되고, 현실참여를 향한 의지에서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 초허는 민족사의 격랑기에 몸담으면서도 문단이라는 울타리 속에 안주하거나 머물기를 원치 않은 탓에 정치인에게는 ‘문단 밖의 낭 인(浪人)으로’ 소외되었고, 또 일부의 문학가에게는 ‘카인의 말예(末裔)’ 로 소외된 탓에 그가 처한 시대 상황의 문인에 견주어 비중 있게 검증되 지 못한 점은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자녀교육에 각별한 관심이 주어진「시인의 눈부신 이름, 모국어 의 사랑」에 결부 지은 초허의 삶에서 “우리 아가는 곧잘 말과 문법을 창
조한다. (아가의 말)”나 또 다른 시편에 해당하는 <우리말>은 우리의 역 사이며 민족의 정신적 자산인 국어의 상실에 따른 지각과 미래의 염원, 그리고 결의의 다짐은 유의미하여 비장감이 묻어있다. 그 자신에게 절 대적인 사랑과 희망의 대상인 ‘우리말’에 향유(香油)를 부어주거나 ‘황 금의 목걸이’를 걸어주는 대신 오히려 ‘가시관을 얹었다’라는 뼈아픈 자 책감은 시적 자아가 그간에 우리말을 통해서 ‘불멸의 소곡’을 읊어내며 ‘보이지 않는 영광’에 심취한 결과에 해당한다. 각론하고 신사참배의 조짐이 사회 곳곳으로 파급되는 시간대에 기독 교 교세의 확장을 위해 명분상 교파 간의 분파 조성보다 통합을 다져야 하는 힘의 역동성을 언급하며 시대를 앞서나간 기독교계에 본격적인 논 문「長監兩敎派合同可否問題」( 『眞生』54호, 1929. 6)의 중시할 타당성은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비록 임종 직전에 천주교로 개종(영세명 프란시 스코)하였지만 생전 장로교에 교적을 두었고 1923년 도일하기 전 서호 (西湖)에 체류할 때 매월 1회꼴로 교회에서 설교한 행적에 비춰 자유분 방한 종교성도 무관치 않다. 아울러 1947년 4월 김재준 목사의 사택에 거처하며 한국신학대 교수로 재임하고 1948년 5월~1960년 6월까지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하였음도 결코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다. 이 같은 정황에 비춰 한남대학교에서 정년을 마친 김병우의 부친에 대한 회상에서 ‘그 자신은 지사적이며 날(刃) 푸른 선비정신의 품격과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모국어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있다.’라는 구체 적 정황은「아버지 金東鳴에 관한 書翰」에서 “詩人이 생명을 불어넣는 말 에 귀 기울임으로써 사람은 원래 그 말 속에 간직된 조상들의 얼이 숨 쉬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통하는 겨레가 現存하는 세계의 주민이 되는 것입니다.”라는 가늠할 바이나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 이후에 초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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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사용을 강하게 거부하며 절필하였음도 다시금 헤아릴 바다. 이처 럼 그의 시편에 울분과 비애의 색조가 묻어나지만, 일제강점기에 저항 의 나날을 보냈고 해방 이후에 독재정권에 맞서 필주(筆誅)의 칼을 휘두 른 것은 못내 극명할 따름이다. 무엇보다도 ‘정치는 제2의 詩임’을 역설하며 1960년에 이화여대의 교수직을 사임한 뒤에 곧이어 정객(政客)으로 변신한 그 자신의 신념을 격조 높게 참여적인 시적 형상화로 표출하였다. 그는 “부질없는 미련을 버리고, 내 연륜의 선물인 ‘고혈압’을 훈장 삼아 넌지시 차고 늙음의 대 도(大道)를 성큼성큼 걸으리라. (自畵像)”의 보기처럼 가난과 병고로 시 달리다 1968년 1월 21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의 자택에서 숙 환으로 분망하되 느꺼운 삶을 마감하였다. 또 한편 “날이 새이면 나는 결코 그대의 길을 더디게 하지는 않으려네. 허나 그대가 떠나기가 바쁘 게 나는 다시 돌아오는 그대의 말방울 소리를 기다릴 터이니.(‘손님)”라 는 시문처럼 푸른 해풍을 전신으로 맞으며, 1985년 당시에 사천면 미노 리 7번 국도변의 ‘슬피 울며 타박타박 걸어가는 타박여’와는 대조적으 로 주인의 늦은 귀향을 역사의 격랑을 헤치며 한 시대를 올곧게 살다간 초허의 시비가 뒤늦게나마 조성되었다. 현재 그 시비는 생가터인 김동 명문학관 부지에 이전되었으나 ‘민족적 수난의 시대에 태어나 잃어버 린 조국의 저항 시인으로 교육자로 광복을 맞아 의연한 정치가로서의 비장한 삶’을 끝내 마감하였다. 차제에 지난 2005년에 「강원일보사」가 ‘강원의 인물’로 선정하여 초 허의 업적을 논하는 학술세미나를 진행하였다. 뒷날에 초허의 삶과 문 학에 관하여 강릉시의 시책인 문화관광 프로젝트로 추진되고 있지만 ‘생가복원과 연계성을 지닌 학술작업의 활성화는 당연한 시대적 요청
에 해당한다.’ 또 한편 정치인에게 지조(志操)가 생명처럼 소중한 것임 을 천명한 그의 심성은, “유별나게 긍지와 자존심이 강한 모친”에게서 물려받은 정신적 유산이다. 비록 만년에 정객으로의 변신은 자아의 결 단에 의한 것이나 자유당의 부패와 부정, 그리고 4·19의거가 정치참여 의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초허의 삶에서 지극히 사적인 견해나 창작 으로 일관했다면 우리 근현대문학사에서 비중 있게 평가받았을 것이라 는 여지가 있다. 그것은 루이스(Clive Staples Lewis)가 즐겨 인용한 W. 오웬(John Owen)의 ‘진실한 시인이 진실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있 다.’처럼 동일시된다. 이같이 그 자신의 문학에서 시대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지만 순수한 일면에서 “예술은 엄격히 자기를 통제할 때 비로소 존 속한다.”라는 지적은 고독한 자아의 모색으로 응당 예술로 파악된다. 까 닭에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시사적(示唆的) 보편성은 한국적인 것을 간직한 세계인이 되라는 가르침이기에 외국어의 수용문 제는 교육과 노력으로 격차를 줄여나갈 것이나 합리적인 인식이 바탕이 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렇다. ‘불멸의 혼이고 역사인 국어가 위기’에 처한 문제는 일차적 으로 국어교육과 연구에 전념하는 이들의 몫이나 ‘자성과 애정의 결핍, 또 문인의 심장에서 국어에 관한 소명의식이 사라지고, 영어교육의 필 요성을 대안 없이 강변하는 한국 사회가 자초한 결과임’은 지극히 경계 할 바다. 무엇보다 “부질없는 미련을 버리고, 내 연륜의 선물인 ‘고혈압’ 을 훈장 삼아 넌지시 차고 늙음의 대도(大道)를 성큼성큼 걸으리라. (自 畵像)”와 같이 끝내 그 자신은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다 낡은 가옥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할 무렵까지 “마음이 깨끗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 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 (마태 5:8)”라는 그 좌우명처럼 ‘그의 삶은 청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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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을 뿐 아니라 직업도, 한 푼의 수입도 없는 말 그대로의 ‘빈손’이었 다. 이 같은 점은 마치 2014년 유네스코가 선정한 인류의 정신적 스승 헤르만 헤세의 <꺾어진 나뭇가지>와도 비견되듯 그의 시편인 “시간은 갈매기같이 날으고(술 노래)”처럼 타계하기 6일 전까지 붓과 원고지만 큼은 손에서 놓지 않은 강한 신념의 존재였다. 차제에 그 자신의 유일한 유품으로는 ‘육필원고와 아내의 선물인 초침이 멈춘 회중시계뿐이기’ 에 고뇌에 찬 모진 세월은 허망하다. 그렇다. 초허가 1968년 1월 21일 오후 자택에서 숙환으로 삶을 마감 한 그 날은 공교롭게도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으로 짙은 스산함이 적막했다. 1월 25일 한국 문인 장으로 치러진 이 날의 영결식 은 신학자 김사익의 조사와 성악가 김천애가「<내 마음은>을 조가로 불 렀다. 특히 다소 뒤늦은 감이 있으나 지난 2012년 그의 생가터에 호수 면 의 배(船)를 모형으로 설계한 『김동명문학관』이 완공되어 화강암에 부 조된 흉상과 주옥같은 시편이 각인되었다. 그간에 “문단 밖의 낭인이라.” 는 지적도 있으나 격동의 시간대에 신념을 지니고 초허는 당당한 존재감 으로 현실에 대처했으나 문학의 길에 전념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엄창섭
(사)K-정나눔 이사장. 김동명학회 회장. 가톨릭관동대명예교수. 본지고문.
특별대담
“문학을 좋아하는 바른 목회자”
시인·수필가·저술가·독서운동가, 바울의교회 송광택 목사
“아시아문예” 2024겨울호에 시인, 수필가, 저술가 겸 명칼럼니스 트이시고 존경받는 목회자이신 바울의교회 송광택 목사님을 모시고 귀한 대담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대담 :김시우| 본지 특집위원, 성산효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아시아문예•21
오랜만에 청명한 가을 날씨에 아시아문예 특집대담에 참여해주신 시인이시며 저술가이시고 오랫동안 교회독 서운동을 해오시며 문학을 사랑하시는 바울의교회 송광택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지난 몇 년간 창궐했던 팬더믹 코로나19 사태로 가족 중 특히 노인 분 들께서 고통을 겪으셨는데, 송 목사님과 가까운 가족 분들의 건강은 어떠신지요? 다행히 팬더믹 상황 가운데서도 가족이나 교우들 그리고 송광택 제 주위 분들은 큰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현재 저희 가족은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김시우
송 목사님은 1953년 생으로 아주 건강해 보이시는데, 평 소의 건강관리의 비결 및 최근의 근황은 어떠신지요? 그리고 6.25 동이신데, 전쟁 중 혹은 피난길에 부모님 특히 전란 중 잉태하신 어머님의 고생이 많으셨을 텐데, 혹시 들으신바 어릴 때 어
김시우
디에서 어떻게 자라셨는지요? 건강관리를 위해 특별히 노력하는 것은 없지만, 매일 ‘8 송광택 천보 이상 걷기’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제가 경기도 고양 시에 살고 있는데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가까운 거리는 걸어서 갑니다. 거의 매일 가까이에 있는 지역 도서관이나 교회 도서관에서 여러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독서한 후에는 중요한 내용을 발췌하 거나 주제나 제목별로 정리를 합니다. 유명 작가별로 명언을 정리하 기도 합니다. 현재도 강의 요청이 있으면 기꺼이 응하고 있고 기회가 주어지는 대 로 독서 동기부여 강의를 하거나 인문고전 읽기의 중요성을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제가 사는 지역의 목회자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독서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6.25 전쟁 중에 태어났습니다. 어찌 보면 부모님은 전쟁 상황으 로 인해 만나셨습니다. 서울 종로구에 사시던 어머니는 가족과 함께 전라남도까지 피난을 가셨고, 그 곳에서 중매로 경찰공무원(경위)이 셨던 아버지를 만나셨습니다. 제가 들은 바로는 아버지가 보낸 편지 한 통이 어머니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합니다. 저는 1953년 양력으로는 5월 24일 아침, 완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전남의 여러 지역에서 경찰로 근무하시다가 제가 어렸을 때(5세 쯤) 서울로 올라오셨습니다. 저는 노량진국민학교를 졸업했 는데 남동생 둘과 여동생도 같은 학교를 다녔습니다. 노량진과 상도 동이 제 10대와 20대를 보낸 지역입니다. 송 목사님은 목회자로서 바쁘신 활동을 하시면서도 시인 김시우 혹은 수필가로서 또한 저술가, 번역가로서도 열정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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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을 하시며 문학을 좋아하고 계시는 데, 시와 수필을 언제부터? 문학적인 글을 쓰시게 된 동기는 어떠하신지요?, 본격적으로 등단하 시게 된 계기는요? 저는 9살 때 처음으로 <보물섬>, <서유기>, <안데르센 동 송광택 화> 같은 문학서적을 접했습니다. 물론 완역본이 아닌 아 동문학 세트 형태로 나온 책들이었지만, 칼라 삽화가 있었고 하드카 버로 잘 만들어진 책들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이러한 책을 통해 동 서양의 ‘문화충격’을 경험했습니다. <보물섬>에 선술집 장면이 나오 는데,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럼주’라는 서양 술 이름을 처음 접했습 니다. 각주에서 간단하게 럼주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문맹의 상태에서 벗어난 후 문학을 통해 상상력과 호기심이 크게 자 극을 받은 것은 의미 있는 독서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고등학교 3년 동안은 문예반에서 시나 산문을 썼고, 두 번 교지 편집에 참여했 습니다. 헌책방에서 <현대문학> 과월호를 구입해서 유명 작가들의 시나 단편소설을 감상하기도 했습니다.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썼 던 습작기였지만 그 경험들이 창작의 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19세 때 <월간 샘터> 독자란에 ‘어머니’가 실린 이후, 여러 차례 문 학작품 공모에 응모하였습니다. 최종심에서 박두진 시인, 황금찬 시 인 등이 심사해 주셨습니다. 이성교 시인은 ‘새벽’이라는 제 시를 높 이 평가해 주시고 격려해주셨습니다. 세월이 좀 흐른 후 월간 창조문 예에서 신인작가상을 받았습니다(2000년). 하지만 많은 시를 쓰지는 못했습니다. 송 목사님은 명칼럼니스트로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 어 김시우 느 매체들에 기고하셨는지 듣고 싶습니다.
저는 독서 관련 칼럼을 주간 <들소리> 신문에 연재한 적 이 있고, 월간 <신앙세계>에 10여년간 수필과 북리뷰를 연재했습니다. 월간 <교사의 벗>, 월간 <빛과 소금>, <월간 목회>, 월 간 <목회와 신학> 등에 신간을 소개하는 글이나 서평을 연재하기도 했습니다. <국민일보>에 기독교고전을 소개하는 글을 1년 가까이 집 필했고, 인터넷 신문인 <본 헤럴드>나 <유럽 크리스천신문>에도 북 리뷰를 연재했습니다. 현재는 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홈페이지에 독서발췌를 꾸준히 올리고 있습니다.
송 작가님이 보시는 문학이란 무엇인지? 문학관은? 소설가 김동리는 “문학이란 언어가 문자를 통해서 미적 (美的)으로 구성된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문 학이란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예술적 표현으로 묘사한 언어의 기록 입니다. 문학의 주제는 인간의 체험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삶의 특성을 우리가 경험하는 그대로 구현해 내는 것입니다. 문학은 체험
김시우
송광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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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을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제공합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문학은 기계를 조립하기 위 한 설명서라기보다는 기계 그 자체의 그림입니다. 그리고 문학은 우리를 넓혀 줍니다. 종종 문학은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경험이나 관점을 형상화시켜 줍니다. 문학은 다른 예술과 마찬 가지로, 상상력을 통해 시공을 벗어나 여행을 하면서 보고, 배우고, 즐 길 수 있게 해줍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더 성숙한 모습으로 보고 배우고 즐길 수 있게 됩니다. 한 편의 소설은 우리로 하여금 경험 과 삶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창문이요 렌즈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입장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고, 다 른 사람의 상상력으로 상상하며,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느끼고 싶어합 니다. 우리에게는 바라볼 창문이 필요하지요. 영문학자 리런드 라이켄 은, 이것이 문학이 가진 특이한 가치요 이점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우리는 문학을 읽으면서 우리 주변 사람들에 대한 각성된 의식을 갖 게 됩니다. 문학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필요에 민감해지도록 만들 어 주지요. 문학은 우리로 하여금 인류가 간직한 기쁨과 슬픔, 그리 고 고뇌와 환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무엇보다도 문학은 위대한 주제나 사상에 대해 생각하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한 편의 시나 소설 속에는 하나의 인생관이 담겨 있습니 다. 한마디로 문학은 지금까지 사람들이 의지하여 살아왔고 또 기대 어 살아가게 될 세계관을 제시해 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인으로서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문학의 장르 중 시와 수 김시우 필이란 무엇이며, 굳이 정의하신다면?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시의 목적은 놀랄 만한 사고로 우리를 눈부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한순간 을 잊히지 않는 순간으로 또 견딜 수 없는 그리움에 값하는 순간으로 만드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당나라 중기의 대시인 백거이(白居 易)는 말하기를 “시란 정(情)을 뿌리로 하고 말을 싹으로 하며, 소리 를 꽃으로 하고 의미를 열매로 한다.”고 설파했지요. 저는 시의 언어에 음악성이 반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 미지와 은유, 그리고 상징 등으로 형상화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무엇 보다도 시는 짧게 함축된 진술입니다. 장시도 있고 산문시도 있지만, 저는 서정시나 일상의 삶을 바탕으로 한 생활시를 선호합니다. 쉬운 듯해도 깊이 생각하게 하고 음미하도록 이끄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 각합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바와 같이, 수필은 형식의 제약을 받지 않고 개인적인 서정이나 사색과 성찰을 산문으로 표현한 문학양식입니다. 수필은 어느 문학 형식보다 친숙하고 친밀하며 자연스럽게 읽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소설이나 시 그리고 희곡이 인물이나 이미지 그리 고 행동을 통해 그 주제를 간접적으로 제시한다면 수필은 직접적으 로 제시합니다. 작가가 독자를 앞에 놓고 조곤조곤 이야기하듯 내용 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지요.. 또한 수필은 특별한 형식이 없이 자유롭습니다. 이것은 정해진 규범 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성을 무시하는 글은 아닙니다. 수필을 쓰는 방식에 있어서 서사, 묘사, 설명, 묘사가 모두 쓰일 수 있습니다. 수필은 제재가 다양하고 광범위하여 인생이나 자연 등 세상의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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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 다 소재가 될 수 있는 문학이죠. 뿐만 아니라 수필은 개성적이 며 자기고백적인 글입니다. 글쓴이의 심정, 개성, 취미, 지식과 이상, 인생관 등이 생생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죠. 글의 서술은 일인칭으로 하여 경험을 토대로 자기 생활을 그려내는 글입니다. 더 나아가 수필은 심미적이며 철학적인 글입니다. 작가의 심미적 안목 과 철학적 사색의 깊이가 드러나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문학 애호가로서 시나 수필을 어떻게 하면 잘 쓰실 수 있 김시우 는지 조언이나 참고의 말씀을 주신다면? 저는 ‘관찰’을 강조합니다. 시나 수필을 잘 쓰려면 오감으 송광택 로 사물을 잘 관찰하고 바라보고 귀 기울여야 합니다. 우 리는 보일 때까지 응시(凝視)해야 한다. 봄(관찰)을 통해 통찰 (insight)에 도달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나무’를 소재로 시나 수필을 쓰고자 한다면, 여러 시간 동 안 나무를 지켜봐야 합니다. 처음에는 나무의 외양만 보이지만 한참 보고 있으면 뿌리로부터 나뭇가지로 수액이 올라가는 것도 느껴집니 다. 나중에는 나무와 내가 하나가 되는 신비적 합일(合一)의 경지에 이를 수도 있겠지요. 이런 관찰과 집중이 통찰(insight)에 이르는 길 이 아닐까요. 송 작가님이 어릴 때를 회상하여, 부모님이나 조부모님 김시우 의 가훈이나 밥상머리교육, 사회 어른들과 학교 스승님 의 가르침과 교훈이 개인 성장 과정이나 직업선택과 목회자 생활을 하는데 혹은 문학 활동을 하는데 어떠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시 는지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스승님들과 그 가르침의 내용을 소개해 주신 다면?
부모님은 삶으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버지는 성실한 공무원과 직장인으로 사셨습니다. 은퇴 후에도 친척의 회사에서 일본어로 된 기계 설비 매뉴얼을 번역하셨고, 회사 직원들 이 일본 연수를 갈 때 통역자로서 동행하셨습니다. 음식을 골고루 드 셨지만 기본적으로 소식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모성애가 넘치는 분이셨습니다. 저희 집이 믿음의 가정이 되는 데 어머니의 순수한 신앙은 씨앗이 되었고, 자녀들이 모두 기독 교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구걸하는 사람이 집에 찾아오면 어머니는 언제나 무 언가를 주셨고 어떤 사람도 박대하지 않으셨습니다. 때로는 제가 쌀 을 퍼서 걸인에게 드리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기억에 남는 선생님 중에는 우선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이 떠오 릅니다. 모든 과목을 잘 가르치셨습니다. 교실 창문 밖으로 멀리 정 육점이 보였는데, 선생님께서는 “공부하지 않는 사람은 정육점에 매 달려있는 고깃덩어리와 다르지 않다”고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증학 교 때는 여선생님이 영어를 열정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수업 시간 마다 단어 시험을 본 것으로 기억합니다. 20대 시절에 출석한 일신교회에서 저는 믿음의 아버지인 안길옹 목사 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목회자로서 언행일치의 모범을 몸소 보여주셨기에 그 무엇보다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총신대학교 신학과와 신대원에서 만난 은사님들은 제 인생의 멘토입 니다. 저는 우러러보는 존경심으로 강의를 들었습니다. 인격적 감화 가 무엇인지를 체험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한성교회에서 대학부를 지도할 때 모셨던 김진택 목사님으로부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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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사랑과 진리에 대한 학구적 탐구의 자세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특히 청년부를 지도하셨던 최홍석 목사님(총신대 신대원 조직신학 교수)은 신학생들에게 ‘성자’로 불리는 겸손한 분으로서 제게도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송 목사님은 바쁘신 목회 생활과 외부 특강을 하시면서도 많은 저술 및 번역 활동도 하시는데 그동안 저술하신 저 서들과 주요 내용들에 대해서 소개를 해 주신다면? 저는 주로 독서 관련 책들을 썼습니다. <목회자 독서법> 송광택 은 책벌레로 유명한 교계 지도자들을 찾아가 인터뷰한 내 용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연동교회 이성희 원로 목사, 서울중앙교회 한기채 목사, 하이 패미리 송길원 목사 등이 기꺼이 인터뷰에 응해주 셨습니다. 이 책은 목회자가 독서를 해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밝히 고,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고전의 숲에서 하나님을 만나다>에서는 모던 클래식을 포함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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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권의 기독교고전을 해설했습니다. <우 리 아이 영성을 키우는 책읽기>는 부모나 교사가 어린이 독서지도를 할 때 성품 계 발 중심으로 하도록 안내하는 책입니다. <나를 단련하는 책읽기>는 청년부터 장 년에 이르기까지 책을 가까이 하도록 안 내하는 자기계발서라고 할 수 있고, <독 서가 미래를 결정한다>는 청소년을 위한 독서 가이드북입니다. <예수께 인문을 묻다>는 성경이나 기독교 또는 신앙생활과 연관된 80가지 문답이 그 내용입니다. 그밖에 <기독교인의 서재>, <시로 만 나는 하나님> 등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송 작가님은 문학작품 혹은 독후감 공모 심사위원이나, 김시우 출판문화 심사위원으로도 많이 활동을 하시고 여러 직함 을 갖고 계시는데, 그 주요 활동들과 보람에 대해서도 소개를 좀 해 주십시오. 대단한 활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제게는 모두 의미있는 송광택 일이었습니다. 특히 ‘한국기독교 출판문화상’ 심사위원 으로 17년째 참여한 것은 영광이지요. 국민은행 <동화는 내 친구> 심 사위원으로, 극동방송 생활간증공모 심사위원과 독후감공모 심사위 원장, 그리고 북한이탈주민 생활수기 심사위원, 세움북스 신춘문예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는 소중한 경험들을 했습니다. 글쓰기에 도전하 는 분들 가운데 문단에 등단하여 작품집을 내거나 좋은 글을 통해 선 한 영향력을 주위에 펼치는 것을 볼 때 기쁨을 느낍니다. 또한 출판
출간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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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발전에 미력이나마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람이 있습니다. 송 목사님은 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bookleader. org) 김시우 대표로서 오랜 기간 독서운동의 대부로서 봉사활동 중이 신데, 그 연혁과 동기, 주요 활동을 소개해 주시고, 현대인과 특히 문학 인 및 목회자에게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1980년대 말에 독서모임 <글사랑>을 조직한 적이 있습니 송광택 다. 그 모임을 통해 독서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독서회원들 의 책사랑은 뜻을 같이하는 분들의 도움을 받아 독서운동으로 발전하였 습니다. 1993년 조만제 교수(‘책읽는 젊은이에게 미래가 있다’의 저자)를 명예 회장으로 모시고 출발한 독서운동은 여러 차례 독서세미나를 열었고, 독서지도자를 위한 교육 과정을 개설하여 많은 교육생을 배출하였습니 다. 초기에는 교회 교육관과 사회관 등을 빌려 강의를 했고, 일신교회와 두란노 문화센터에서 단기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기독교방송과 극동방 송, 그리고 CGN TV에 출연하여 독서운동을 소개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2004년 봄에는 총신대학교 평생교육원에 <독서지도사> 과정을 개설하 여 2016년까지 많은 수료생을 배출하였습니다. 늦깎이 수강생 중에는 향학열이 불타 올라서 상담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한 분이 있었고, 60 대에 시인으로 등단한 장로님도 계셨습니다. 독서지도사 과정을 운영하 면서 느끼고 확인하는 점은 ‘독서가 변화의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개인 과 가정, 그리고 교회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방편입니다. 질문하신 독서의 중요성에 관하여 간단히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다산 정약용은 말하기를 “나는 소시적에 새해를 맞을 때 마다 꼭 일년 동안 공
부할 과정을 미리 계획해 보았다. 예를 들면 무슨 책을 읽고 어떤 글을 뽑아 적어야겠다는 식으로 작정을 해놓고 꼭 그렇게 실천하곤 했다”고 했고, 임어당은 <생활의 발견>에서 “평소에 독서하지 않는 사람은 시간 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자기만의 세계에 감금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로버트 클린턴 교수도 말하기를, “많은 위대한 지도자들이 전기(傳記) 등 여러 종류의 책들에 기록된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큰 도움을 받았 다. 간접경험 과정이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의 기록(책)을 통해 지도자 에게 교훈을 주는 과정을 말한다”라고 독서의 영향력을 강조했습니다.
오래 전에 차인석 교수는 한 일간지에서 “책의 표지를 닫아놓으면 이 세 계도 우리에게 닫혀진다. 그리고 남는 것은 어둠뿐이다. 인간의 배움은 우선 가정과 이웃을 통해서 시작되지만 참 배움은 책을 통해서 비롯된 다”고 현대인이 책을 가까이해야 할 이유를 설파했습니다. 특히 역사와 문학에 관한 지식은 문학인에게 필수적입니다. 특히 교양 으로써의 독서를 이야기하자면 고전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고전을 읽 어야 할 이유는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지요.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의미 있는 대화라면, 고전 독서도 이와 크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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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전을 읽음으로써 과거의 지적 유산을 이어받 을 수 있고, 현재의 좌표를 파악할 수 있으며, 미래도 전망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인이 고전을 가까이하려고 노력하는 일은 여러모 로 의미가 있습니다. 오랜 기간 독서운동의 대부로서 우리와 우리 자녀 손들의 김시우 인문고전 읽기의 중요성과 독서 지도에 대해서 도움말을 주신다면?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고전이란 인류의 가장 고귀한 생 송광택 각을 기록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고전’이라 는 말만 들어도 많은 사람이 부담을 느낍니다. 저는 고전에 관한 강의 를 하면서, “고전은 우리로 고전(苦戰)케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 다. 고전은 사실 가볍거나 쉬운 책이 아닙니다. 고전은 인류의 정신적 영적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그 작품들은 세월의 엄중한 검증을 거쳤기 때문에 ‘고전’이라는 명예의 전당에 그 이름이 올라갔습니다. 10대와 20대 시절에 인문고전을 가까이하면 학습능력이 업그레이드 되고, 세계관과 인생관을 정립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지도자의 자질을 갖출 수 있지요. “지도자는 독서가다!”(Leaders are readers)라는 말 이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책읽기는 젊은이들의 미래를 준비시킵니다. 자녀손들에게 양서와 인문고전을 가까이하게 하려면 보모와 조부모 그리고 인생 선배인 어르신들이 독서하는 모습을 일상에서 자연스럽 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선행되어야지요. ‘독서기가지본(讀書起 家之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글을 읽는 것은 가문을 일으키는 근본” 이라는 뜻으로 풀 수 있겠지요. 가정에서부터 ‘독서가족’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평생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를 하신 목회자로서, 신앙은 무엇이며 특히 AI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성경의 지혜를 소개해 주신다면? 종교개혁 이후로 신앙(믿음)에 대해 제시된 묘사들은 아주 송광택 많고 다양합니다. 신앙이란 물론 하나의 지식이며 지적인 동의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의지의 신뢰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고 용서와 구 원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일반적 믿음이 아니라, 이러한 용서와 구 원이 개인적으로 나에게도 주어졌다는 특별한 신뢰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단지 역사적 지식만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님 의 용서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전인격적인 응답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요, 칼뱅(John Calvin)은 말하기를,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생각과 견 고하고 굳건한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안전하게 안식하도 록 이끄는 믿음만을 온전한 믿음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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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에 AI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성경은 다양한 측면에서 지혜와 통찰을 줄 수 있습니다. 첫째, 성경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중요한 가치와 원칙을 제공합니다. 예를 들어, 잠언서에서는 지혜와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하나님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합니다. 둘째, 성경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살도록 가르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 리”라고 하여 물질적 욕심을 경계합니다. 셋째,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 와 목적을 찾도록 돕습니다. 넷째, 성경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 이 아니라, 그 지혜를 실천하도록 격려합니다. 끝으로, 성경은 사회적 책임과 윤리를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현대 사회에서는 경제적 평등 과 사회적 복지를 중요시하며, 이는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한 것입니 다. 이와 같이 성경은 현대인들에게 도덕적, 윤리적, 그리고 영적인 지 침을 제공하며, 이를 통해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돕습니다. 목회자로서 이력을 보면, 송 목사님은 청소년, 대학생들 김시우 을 대상으로 지도를 많이 해 오신 것으로 보이는 데, 특별 히 기억에 남는 사례와 보람 같은 것이 있으시면? 인생의 선배로서,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 후배 들에게 독서 인생의 중요성과 특히 인생의 참된 행복관 혹은 인생의 철학과 교훈, 지혜와 덕담을 들려 주시다면? 초등학생으로 구성된 독서모임을 여러 해 지도한 적이 있 송광택 는 데, 세월이 지나 이제는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되었습니 다. 그 아이들이 커서도 독서습관을 유지하고 책을 가까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 보람을 느꼈습니다. 또한 친구들이나 후배가 저를 한 국교회 독서운동의 1세대로 인정해주는 말을 해줄 때 부끄럽기도 하
지만 동시에 고마운 생각도 듭니다. 앞만 보고 뚜벅뚜벅 30여년간 독 서운동을 했는데 부족하나마 그 열매가 익어가는 것을 보며 매우 행복 합니다. 지도자는 최고의 책을 읽어야 합니다. 가치 없는 책에 투자할 시간은 없습니다. <월든>(Walden)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우리가 이왕 글자를 배운 이상 문학에서의 최고의 작품을 읽어야 할 것”이라 고 말합니다. 저는 역사를 좋아합니다. 역사는 우리 모두에게 실제적인 가치를 지니 고 있는데, 경고와 격려, 위로와 조언의 보고(寶庫)입니다. 역사 속에 는 모든 시대의 인간을 향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역사의식이 있는 지 도자로서 깨어있는 파수꾼이 되기 위해 우리는 역사를 읽어야 하지요. 빌 게이츠(Bill Gates)는 여러 분야의 책과 신문 잡지를 폭넓게 읽는다고 합니다. 그는 특히 전기 류를 좋아하는데, 영웅 이나 사업가들의 인생역 정은 항상 흥미롭고 배 울 것이 많다고 했습니 다. 문학인으로서 우리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접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는 없겠으나, 기본적인 개념 이해를 위해 입문서 정도는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문화의 인문고전이라 할 수 있는 명심보감(明心寶鑑) 김시우 「치가(治家)편」에 의하면 “자효쌍친락 가화만사성(子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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雙親樂 家和萬事成)”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성경의 관련 구절과 비 교해서 오늘날 가정과 효의 중요성에 대해서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 탁드립니다. 그리고, 가족 소개와 부부관계와 부모자녀 관계를 원만 히 혹은 행복하게 유지하는 삶의 비결 같은 것을 소개해 주신다면? 김 박사님 말씀대로, 효도하면 어버이가 즐겁고, 집안이 송광택 화목하면 만사가 이루어진다는 명심보감의 가르침은 지 금도 유효합니다. 가정은 힘든 인생의 안식처요, 사랑이 싹트는 곳이어야 하지 또한 가 정은 안심하고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으며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며 사 랑받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은 최초의 학교이며, 최고의 학교라는 말도 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가정의 단란함이 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기쁨이다. 그리고 자녀를 보는 즐거움이 사람의 가장 거룩한 즐거움이다.”라고 했는데요. 단란한 가정은 밖에서 보면 견고한 성이요, 안에서 보면 훌륭한 보금자리입니다. 따라서 그 어떤 성공도 가정에서의 실패를 보상하지 못한다는 말은 맞습니다. 십계명에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제4계명은 축복의 약속과 함께 주 어졌는데요. 옛 이스라엘에서 자식들이 연로한 부모를 보살피는 것 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연로한 부모가 더 이상 자기 힘 으로 삶을 지탱해나갈 수 없는 상황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이든 부모를 배려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노년에도 존엄한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자식들이 늙은 부모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늙은 부모 편이 되어주셨습니다.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부모의 지혜와 경험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현존재의 뿌리를 존중하는 것을 말 하지요. 아울러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항상 자기 존중과도 관련됩니 다. 내가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도 공경심으로 부모 에 대한 추억을 마음에 간직한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변함없이 부모 로부터 공급받는 힘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좋은 영 향을 끼치고, 내 고단한 삶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줍니다. 우리나라는 유구한 역사적 문화와 수많은 애국선열들과 김시우 어진 백성들의 피와 땀, 눈물로 오늘의 자유대한민국이 존립하고, 특히 최근에 노벨문학상 수상, K-Pop 등 문화와 경제 부 분에서 선진국의 대열에 오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 에 노소간, 이념간, 노사간의 갈등과 사회 경제적 양극화, 또한 여러 가지 도덕적 병리 현상과 정치적 후진성 등 문제점들이 야기되고 있 습니다. 문인으로서 혹은 목회자로서 국민들과 정치인들에게 들려주 실 문제 해결 방안이나 묘책이 있으시다면? 인류학자는 인간 심성에 내재된 공격성향이 갈등을 유발 송광택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갈등은 두 사람 이상이 상호 배타적인 목표를 동시에 지닐 때도 발생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유한한 자원을 서로 갖기 위해 경쟁하고, 두 사람의 목표가 양립 불가능할 때 갈등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문제가 발생할 때 그 갈등이 복잡하다고 예상하여 그 갈등에 적극적으로 개 입하는 것을 피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바람직하지 않지요. 우월적 지위를 활용하여 갈등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도 마친가지입니다. 때로 는 갈등 당사자들끼리 적절한 해결책을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제3자 에게 그 해결책을 맡기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물론 갈등이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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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 부정적인 면만 가진 것은 아닙니다. 갈등을 해결하려고 노력하 는 과정을 통해 그 사회는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나라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갈등은 그 해결책이 쉽게 제 시될 수 없다는 데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원론적으로 말한다면 대화 와 타협, 양보와 관용 그리고 마래를 향한 열린 자세가 필요합니다. 진 영 논리에 함몰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모든 사안을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보려고 하는 노력도 필요하겠지요. 서로가 윈윈(Win- Win)하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청소년 때부터 대화와 타협 그리고 역동적이고 평화로운 토론문화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당면한 문제 중에는 전통적 가족구조 김시우 의 변화와 효(孝)문화의 쇠퇴로 인해 가정과 사회에 패륜 범죄와 생명경시 묻지 마 살인, 자살 등이 증가하고, 특히 젊은이들 이 결혼을 포기 하거나 자녀출산을 포기 혹은 억제하는 사례가 증가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위 저출산에 따른 국가적 인구절벽 시대를 맞아 가문의 절손, 농어촌 마을의 소멸 혹은 장기적으로는 국가의 소 멸이라는 엄중한 경고를 받기도 합니다. 이러한 문제점들의 예방 대 책이나 해결 방안으로서 문학의 역할이나, 전통적 효 정신의 회복 혹 은 현대화에 대한 목회자로서 혹은 작가님으로서 고견과 좋은 말씀 을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효문화의 쇠퇴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접근이 필요합니 송광택 다. 몇 가지 주요 해결 방안을 예로 들겠습니다. 첫째는 교육과 홍보입니다. 효 문화를 학교 교육 과정에 포함시켜 학 생들이 어릴 때부터 효의 중요성을 배우도록 합니다, 둘째는 미디어 활용입니다. TV, 라디오, 인터넷 등을 통해 효 문화를 홍보하고, 효
행 사례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합니다. 셋째는 정책적 지원입니다. 정부가 효 문화를 장려하는 법률을 제정 하고, 효행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제공하는 정책을 마련하 는 것입니다. 넷째는 노인 복지 강화입니다. 노인 인력을 활용하고 노인 복지 정책을 강화하여 노인들이 존중받고 효 문화를 실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합니다. 다섯째는 사회적 분위기 조성입니다. 지역 사회에서 효 문화를 장려하는 캠페인과 행사를 개최하여 주민 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합니다. 여섯째는 가족 중심의 문화 확 산입니다. 가족 간의 유대감을 강화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가족 단위의 활동을 장려해야 합니다. 이와 동시에 전통적인 효 문화를 현대 사회에 맞게 재해석하여 젊은 세대가 공감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또한 효 문화를 주제로 한 다양한 콘텐츠(영화, 드라마, 책 등)를 개발하여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고희를 넘은 연세에도 송광택 목사님은 구령복음 사역 및 생명치료 의 목회자로서 다양한 저술 활동과 독서 운동을 하시면서 또한 왕성 한 문학 작품 애호가로 우리 사회의 하모니 메이커 원로로서 존경을 받고 계십니다. 본 대담에서도 해박한 지식과 조리 있으신 언변과 문 장력으로서 장시간 대담에 친절히 귀한 말씀을 들려주심으로 특히 주변에서 올곧게 살아오신 바른 인격의 목회자로 마음 깊이 되새기 며 대담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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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택(宋光澤) 목사 프로필
1953년 4월 12일생 가족 : 처와 1남 1녀
현) 바울의 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목사 현) 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현) 크리스찬북뉴스 편집고문 현) 크리스천 북뉴스 자문위원 현) 한국사립작은도서관협회 자문위원 현)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 현) 계간 국제문학 편집이사 현) 총신문학회 회원
1973-1976년 총신대학교 신학과 졸업 1977-1980년 총회신학연구원(현 신대원) 졸업 1982-1983년 총신대학교 대학원(신학석사) 졸업 1990-1992년 총신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전) 기독지혜사 <성서대백과> 번역위원 전) 총신대학교 강사(칼빈주의 개론) 전) 서울신학대학교 교양학부 강사 (독서와 토론, 논리와 비판적 글쓰기, 교양독서와 글쓰기) 전) 총신대학교 평생교육원 [독서지도사 과정] 운영자 및 주강사(2004-2016) 전) 극동방송 [신앙서적 길라잡이] 진행자 전) 국민일보 부설 사회교육센터 [파워독서능력] 과정 책임교수 한국기독교 출판문화상 심사위원(2007-2012, 2014-2024)
국민은행 <동화는 내 친구> 독후감 공모 심사위원(2010-2012) 극동방송 생활간증공모 심사위원(2010) 극동방송 독후감공모 심사위원장(2010)
수상경력 기독교문예 신인상(1988) 신춘파주문학상(1993) 월간 창조문예 신인작가상 수상(2000) 월간 아동문학 신인상 수상(2001) 총신문학상(2024)
북한이탈주민 생활수기 심사위원(2020-2022) 세움북스 신춘문예 심사위원(2021-2024)
목회내용 일신교회 전도사, 한성교회 전도사 강도사 부목사(대학부 지도) 목양교회 교육목사, 서울반석교회 교육목사(대학부 지도) 바울의교회 교육목사(청년부 지도) 및 글향기도서관 담당 사역목사 기고기관 국민일보, 주간 기독신문, 주간 크리스천투데이, 주간 기독교, 월간 목회와 신학, 월간 빛과 소금, 월간 생명의 삶, 월간 목회
출연기관 CBS(‘새롭게 하소서’에서 간증), CGNTV, CTS 라디오 JOY 저서 하나님 중심의 삶(할렐루야서원, 1993) 독서가족만들기 31일(임마누엘선교미디어, 1995) 좋은 독서가족 길라잡이(비전북출판사, 2003) 목회자 독서법(한언, 2006) 고전의 숲에서 하나님을 만나다(평단문화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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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서
기독교인이 죽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할 책 100(팬덤북스, 2010) 우리 아이 영성을 키우는 책읽기(넥서스CROSS, 2012) 나를 단련하는 책읽기(끌레마, 2012) 예수께 인문을 묻다(강같은 평화, 2012) 기독교인의 서재(보아스, 2013) 독서가 미래를 결정한다(글샘, 2015) 참된 장로교인(대한예수교장로회출판부, 2015)[공저]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 100(팬덤북스, 2016) 시로 만나는 하나님(팬덤북스, 2022)
봉사론(호움즈 롤스톤, 성광문화사, 1982) 크리스마스 풍습들(허버트 워넥, 생명의말씀사, 1982) 목회자 가이드(하워드 석든, 생명의말씀사, 1984) 불구를 딛고 선 조니(조니 에릭슨 타다, 생명의말씀사, 1988) 쉬게 하리라(기엔 카젠, 생명의말씀사, 1988) 교회사 핸드북(라이온출판사 편, 생명의말씀사, 1989) 존 번연의 생애(생명의말씀사, 1990) 언약과 축복(앤드류 머레이, 생명의말씀사, 1991) 교회사 이야기(노만 랭포드, 요나출판사, 1994) 기독교교육학(마빈 테일러, 장로교출판사, 1995) 새로운 교회개혁 이야기(그레그 옥덴, 미션월드라이브러리, 1998) 영혼을 위한 열 가지 비타민(알리스테어 벡, 두란노, 2000) 내 마음의 하이웨이(조지 모리슨, 두란노, 2001) 흐트러짐(리차드 스틸, 지평서원, 2009) 장로핸드북(제랄드 벌고프 외, 개혁된실천사, 2020)
사랑의 이름으로
명문가의 딸 장아이링張愛玲
송철규
장아이링이라는 여성 작가는 1940년대 중국에서 매우 유명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는 홍콩으로 거처를 옮겨 대륙에 서 잊힌 작가였으나, 최근 그녀의 문 학 세계가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장아이링의 출세작은 『도시를 뒤엎는 사랑(傾城之戀)』이고, 가장 유명한 작품은 중편인 『황금 족쇄 (金鎖記)』이다. 장아이링張愛玲은 1920년에 태어 났다. 그녀의 할아버지인 장페이룬 張佩倫은 청나라 말기의 고위 관리 이자 양무파洋務派 관료였던 리홍
장아이링張愛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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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李鴻章의 사위였다. 만청 4대 견책 소설 가운데 하나인 『얼해화蘖海 花』에 그녀의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을 정도이다. 그녀는 리홍장의 외손녀였다. 장아이링은 이처럼 어려서부터 명문가에서 자랐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아편을 피우고 여자를 밝히는 바람둥이였기 때문이다. 반면 어머니는 프랑스 유학파로서, 높은 교양을 쌓은 신여성이었다. 나중에 부모가 이혼하자, 장아이링은 아버지와 계모에게 학대받으며 고생하다가 집을 뛰쳐나왔다. 이후 그녀는 사람을 피하고, 민감한 성 격이 되었다. 그녀는 영국 런던대학에 합격했지만,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출국 하지 못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홍콩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녀는 일곱 살 때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열넷에는 당시 원앙호접파의 필치 를 흉내 내어 『모던 홍루몽(摩登 紅樓夢)』을 썼다. 이 작품에서는 가보 옥賈寶玉의 어머니가 아들과 여러 누이를 데리고 항저우杭州 시후西 湖에 놀러 가, 수상 운동회를 구경하고 아이스크림을 먹는 내용이 있다. 장아이링이 문단에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40년대의 일이다. 당시 홍콩의 몰락을 지켜본 그녀는 상하이로 거처를 옮겨 『침향 가루, 첫 번 째 향로(沈香屑第一爐香)』, 『침향 가루, 두 번째 향로(沈香屑第二爐香)』, 『도시를 뒤엎는 사랑』, 『황금 족쇄』, 『심경心經』 등을 차례로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44년에는 상하이에서 『전기傳奇』라는 이름 으로 자신의 소설집을 출판했다. 한 평론가는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 마치 오랜 세월을 거쳐 빚어 맛이 깊고 그윽한 화디아오주花雕酒(상등 의 샤오싱紹興 황주黃酒를 일컬음)를 마시는 것과 같다고 평가했다.
출세작 『도시를 뒤엎는 사랑』 『도시를 뒤엎는 사랑(傾城之戀)』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연애 이야기이다. 여주인공인 바이류쑤白流蘇는 몰락한 가문의 딸로서 기혼녀였다. 그런데 인간 같지 않은 남편 때문에 이혼하고, 지금은 친정으로 돌아 와 살고 있었다. 이런 전력 때문에 그녀는 친정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각종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오빠라는 사람은 그녀의 돈을 빌려 투기 하다가 본전까지 날리자, 미안해하기는커녕 그녀가 ‘재수 없는 년’이라 자신이 손해를 봤다고 억지를 부리기까지 했다. 작가는 이처럼 친정에 정착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갈 곳도 없어 떠나지도 못하는 류쑤의 모습을 통해 이혼녀가 겪는 고통을 보여주었다. 한번은 사촌 동생에게 선이 들어와, 그녀도 함께 따라 나갔다. 맞선 을 볼 사람은 서른쯤 된 판류위안范柳原이란 남자였다. 그는 영국에서 태어난 화교로서, 부유한 노총각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판류위안은 그녀의 사촌 동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녀가 맘에 들어 그녀에게 춤을 청했다. 바이류쑤는 그런 그의 행동에 지금까지 느껴 보지 못한 즐거움을 누렸다. 춤이 추면서 그녀의 맘속에는 복수심이 생겼다. 그토록 자신을 구박하던 사람들에게 아직 자신이 매력을 잃지 않았음 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후 그녀는 판류위안의 초청으로 홍콩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둘은 서로를 무척 사랑했다. 그러나 바이류쑤는 판류위안에게서 어려 움을 모르고 자란 부잣집 도령의 모습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애인으로 삼으려고만 하지, 결혼하여 가정의 의무를 맡으려고 하지는 않을 사람이었다. 이에 주관이 강한 신여성 류쑤는 비록 집도 편치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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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곳이지만, 과감하게 그를 뒤로하고 상하이로 돌아온다. 오래지 않아 판류위안은 다시 그녀를 홍콩으로 초대했다. 한동안 떨어져 있어 그들의 사이는 더욱 애틋해졌다. 그들은 둘만의 소중한 시간을 마음껏 누렸다. 그러던 어느 날, 판류위안은 사업 때문에 배를 타고 외국에 갈 일이 생겼다. 그래서 류쑤가 상하이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다음날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어, 판류위안의 해외 출 장은 취소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류쑤와 함께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쓸 려 온갖 고통을 겪는다. 둘은 자신들의 살길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멀리 떨어진 산의 물을 길어다 밥을 짓고, 땅을 일궈 채소를 가꾸는 등 힘들게 생활했다. 이런 전란을 겪으면서 그들은 돈이나 땅처럼 지금껏 소중하게 여겨 왔던 모든 것이 다 부질없으며,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음식과 곁에 함께 있는 사람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침내 그들은 인생의 진리를 깨 닫고 결혼하여 정식 부부가 되었다.
“그는 이기적인 남자에 지나지 않았고, 그녀 역시 이기적인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전란의 시대에 개인주의는 설 곳이 없었
다. 오직 한 쌍의 평범한 부부가 되어서야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러한 작자의 말에는 인생의 경험과 인생의 진리가 담겨 있다. ‘도시를 뒤엎는 사랑’이라는 제목의 ‘경성傾城’이란, 여자가 너무 아름다워 성안의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그녀에게 쏠려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도시의 함락을 뜻한다. 그러나 남녀 주인공은 함락된 도시의 처지를 진실한 사랑으로 승화시켰다. 작품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홍콩 함락은 그녀를 도와주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이 세상에 서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 누가 알겠는가? 또 누가 알겠는 가? 어쩌면 그녀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큰 대도시 하나가 넘어가 버린 것인지. 수천수만의 사람이 죽어가고, 수천수만의 사람이 고통스러워 하면서 뒤이어 온 경천동지할 대개혁 … 류쑤는 결코 자신의 역사적인 지위가 어떤 미묘한 점을 지니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단지 빙그레 웃 으며 일어나 모기향 접시를 탁자 밑으로 넣을 뿐. 전기(傳奇, 당대唐代의 단편소설) 속에 나오는 국가를 쓰러뜨리고 도시를 쓰러뜨린 사람들의 이야기는 대개 이러하다. 전기의 이야기는 곳곳에 있지만 늘 이렇게 원만한 결말이 날 것 같지는 않다. 호금胡 琴이 앵앵 울리고 있다. 모든 등불에 불이 켜지는 밤에 다 마치지 못할 처량한 이야기를 켜고 또 켠다. 묻지 않아도 그만인 것을!
문단 최고의 수확 『황금 족쇄』
『황금 족쇄(金鎖記)』도 몰락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쟝姜씨 가문에는 삼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결혼한 상태였다. 맏이 는 많은 소설 속의 인물이 그러하듯이, 모든 일에 법도를 지키는 특별 한 개성이 없는 사람이었다. 반면 막내는 활력이 넘쳤지만, 도박과 여 색을 밝히는 바람둥이였다. 그래서 집안의 재산을 대부분 탕진한 장본 인이었다. 둘째는 골결핵을 앓는 환자였다. 이런 상황에서 양갓집 규 수라면 누가 그와 결혼하려고 하겠는가? 마나님은 고심 끝에 둘째를 평민의 딸인 기름집의 치챠오七巧라는 아가씨와 혼인을 시켰다. 쟝씨 가문에 들어간 치챠오는 귀족과 결혼한 하녀 꼴이 되어, 아무 도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더욱이 그녀는 말이 걸고, 행동에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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낌이 없어 예의를 중시하는 이 가문의 사람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쟝씨네가 고상하고 명망 있는 가문도 아니었다. 돈 몇 푼 있다고 기운이 펄펄한 아가씨에게 다 죽어 가는 둘째를 시중들게 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치챠오는 차츰 사지가 멀쩡한 막내 도령 지저季澤에게 눈길을 주었 다. 그런데 밖에서는 망나니짓하는 막내였지만, 집안에서는 ‘예의 규 범’을 철저히 따져 둘째 형수를 멀리했다. 결국 치챠오는 모든 희망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남편과 시어머니가 모두 죽을 때까지 10년을 힘들게 견디 었다. 그 덕분에 치챠오는 돈을 손에 쥐고 분가했지만, 한 번 흘러간 청 춘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때 막내인 지저가 옛정을 들먹이며 치챠 오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치챠오는 그가 자신의 부동산과 돈을 노리고 있음을 간파하여, 욕을 퍼부으며 그를 내쫓았다. 그녀는 이때부터 자 기 돈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창바이長白라는 아들과 창안長安이라는 딸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자식들이 행복을 누릴 기회를 허락지 않았다. 그리고 자 식들이 아편에 손을 대게 이끌었다. 이는 그들을 자신 곁에 묶어 두려 는 속셈이었다. 나중에 창바이가 결혼하여 신부를 맞이하자, 그녀는 며느리를 구박 하여 아들의 결혼 생활을 파탄으로 이끌었다. 서른을 바라보는 창안도 어렵게 유학생과 사귀어 결혼을 약속했지만, 치챠오는 집요하게 그들 사이를 훼방 놓았다. 사위 될 남자를 집으로 초대한 자리에서 일부러 창안이 아편 중독자임을 밝힐 정도였다. 사실 창안은 이미 아편을 끊 은 상태였다. 이처럼 그녀에게는 무서우리만치 지독한 편집증과 악랄
함이 가득했다. “사랑은 한 사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서너 사람의 행복과 생명을 저당 잡으려 한다”라는 어느 평론가의 말은, 이 소설에 담긴 비극적 성 격을 잘 말하고 있다. 치챠오는 자신의 청춘을 다 바쳐 돈과 맞바꿨지 만, 그 돈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녀는 황금으로 만든 족쇄에 묶 인 신세였다. ‘황금 족쇄’란 제목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음악을 평가하는 예민한 감수성 장아이링의 산문은 세밀한 필치에 개성이 넘친다. 그녀는 예술에 매우 예민하여, 자신의 산문에서 그림과 음악 및 문학에 관한 남다른 견해를 피력했다. 그녀의 산문집 『유언流言』에는 유년의 기억과 가족 이야기, 그림과 음악, 옷에 대한 남다른 집착 등을 솔직하고 재치 있게 표현한 글들이 실려 있다. 음악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살펴보자.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이올린이다. 물처럼 흐르면서 인생에 서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일들을 강물처럼 흘러가게 만들기 때문이 다. 호금胡琴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비록 처량하지만, 언제나 “ 세상을 돌고 돌아 결국은 다시 돌아왔노라.”라고 했던 북방 인의 말 처럼 돌아오기 때문이다. 바이올린에서 나오는 소리는 언제나 ‘절묘’하다. 온몸을 파고들고, 계속 듣고 싶어지며,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그래서 악기 가운데 가 장 슬픈 악기이다. …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합주, 또는 3~4명으로 이루어진 작은 오케스 트라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주로 하는데, 나는 듣기가 싫다.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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듬감이 떨어지고 영 어색하여 합치되지 않는다. 그 결과 여러 화가 가 합작으로 그리는 중국화와 비슷해진다. 미인과 다른 인물, 화분, 배경의 정자와 누각을 저마다 다른 화가가 그려서 종종 그림이란 느낌이 들지 않는다. 물론 대규모 오케스트라는 이와 다르다. 그것은 호호탕탕한 5.4운 동처럼 들린다. 각자의 노랫소리를 오케스트라로 변화시켜, 전후 좌우의 소리가 모두 자신의 소리처럼 들린다. 입을 열 때마다 자신 의 목소리가 이처럼 웅장하고 중후한 것에 놀랄 것이다. 또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을 때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듣는 것처럼, 본인이 하는 말인지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인지 몰라 모호한 공포감 을 느끼는 경우와 같다. …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는 「비파행」에서 비파 소리를 생동적으로 묘사했다. 그런데 장아이링은 이 글에서 자신이 음악을 들을 때 느끼 는 주관적 감정에 치중하여 묘사했다. 서로 다른 내용이긴 하지만, 문 학적 수양이 깊고 예술에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처럼 정교 하면서도 오묘하게 음악을 묘사하겠는가? 한편 장아링의 소설 『십팔춘十八春』과 『붉은 장미와 흰 장미(紅玫 瑰與白玫瑰)』는 각각 “반생연半生緣”과 “레드 로즈 화이트 로즈”란 제 목으로 영화로 만들어져, 국내에도 소개되었다. 2007년에는 그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색, 계色,戒』가 발표되어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장아이링은 1995 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하였고, 뒤늦게 발견되어 태평양에 재로 뿌려졌다.
장헌수 이의 『춘명외사』와 『금분세가』 1940년대 장아이링 말고도 장헌수라는 작가가 중국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는 통속적인 장회章回 형식을 이용하여 대중이 즐기 는 애정 소설을 써서, 장아이링보다 더 큰 유명세를 누렸다. 현대 중국 작가들 가운데 장헌수이는 작품을 가장 많이 쓴 작가로도 손꼽힌다. 장헌수이張恨水(1895~1967)는 장아이링보다 25살이나 많은, 문단의 원로라 할 수 있다. 장아이링도 어렸을 때 장헌수이의 소설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장헌수이는 『울고 웃는 인연(啼笑因緣)』을 출판한 뒤, 스스로 감격하여 이렇게 말했다. “위로는 당국의 유명 인사들부터 아래로는 속세의 소녀들까지, 나를 보면 『울고 웃는 인연』을 묻는 통에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장헌수이의 본명은 장위안신張遠心이고, 본적은 안후이성安徽省 쳰산潛山이나 태어난 곳은 쟝시성江西省 광신廣信이다. 그의 할아버지 는 무관 출신이었고 아버지는 말단 관리였다. 그는 서당에서 공부할 때 부터 고전 소설의 재미에 푹 빠져 지냈다. 특히 『홍루몽』과 『서상기』 등을 작문의 본보기로 삼았을 정도였다. 그가 열일곱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공부를 접고 신문사에 투고하는 일로 생업에 뛰 어들었다. 나중에는 심사를 거쳐 신문사의 총 편집자가 되었다. 그는 끊임없이 글을 썼다. 그러나 초기작들은 대부분 음풍농월하 고, 남녀의 연애를 다루는 등 수준 이하의 것들이 많았다. 그러다 1920~1930년대에 들어 『춘명외사春明外史』와 『금분세가金粉世家』 라는 대작을 발표하면서 예술적으로 성숙해졌다. 『춘명외사』는 장헌 수이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 90만 자에 달하는 명실상부한 장편 대 작인데, 이는 신문에 연재하던 작품이었다. 작가의 말을 빌자면, 이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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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은 『홍루몽』의 서술 방법을 이용한 『유림외사』이다. 소설의 중심은 사랑 이야기이다. 남자 주인공인 양싱위안楊杏園은 글재주가 뛰어난 정의파 기자였다. 그는 기녀인 리윈梨雲과 양갓집 규 수인 리동칭李冬靑 사이에서 누굴 택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한 여자는 죽고 다른 여자는 떠나, 결국 양싱위안만 남는다. 결국 그는 자신의 처 량한 신세를 이기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죽는다. 보다시피 이 작품은 기존 재자가인의 형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옛 독자들은 재미있을 지 몰라도, 현대의 젊은 독자들은 이런 분위기에 식상할 것이다. 그러 나 당시에는 큰 인기를 누린 작품이다. 『금분세가』도 신문에 연재하던 작품인데, 『춘명외사』보다 훨씬 긴 100만 자에 달하는 장편이다. 『춘명외사』가 사회 애정 소설이라면, 『금분세가』는 가정 애정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홍루몽』처럼 대가족의 흥망성쇠를 다루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 작품을 ‘중화민 국의 홍루몽’이라고 불렀다. 진金씨의 주인은 내각 총리인 진진金鍂이었다. 『홍루몽』의 가賈씨 에 비해 그 위상이 훨씬 높다. 그런데 진진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무위 도식하며 허송세월했다. 그러다 가문의 기둥인 진진이 죽자, 집안은 순식간에 몰락했다. “부자도 3대를 못 버틴다”라고 했던가?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이런 이론을 생생하게 그렸다.
일세를 풍미한 애정 소설 『울고 웃는 인연』
이어서 세상을 뒤흔들었던 『울고 웃는 인연』 살펴보자. 이 작품도 애정 소설로 분류할 수 있는데, 무협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남자 주인공인 판쟈수樊家樹는 평민으 로 전락한 명문가의 도령이었다. 그는 베이 징으로 올라와 사촌 형 집에 머물며 공부하 고 있었다. 다른 부잣집 도령들과는 달리 계 급의식이 없던 그는, 평범한 친구들과 사 귀기를 꺼리지 않았다. 한번은 톈챠오天橋에 갔다가, 건달 출신 의 관서우펑關壽峰을 알게 되었다. 당시 관 서우펑은 중병을 앓고 있었다. 이에 쟈수는 치료를 받도록 그를 병원에 데리고 가 목숨을 구해 주었다. 이를 계 기로 관서우펑의 딸인 슈구秀姑가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쟈수는 이미 톈챠오에서 대고서大鼓書를 공연하는 가난한 아가씨 선펑 시沈鳳喜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녀는 예쁠 뿐만 아니라 총명하고 품 성이 착해 쟈수의 마음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쟈수는 펑시가 힘든 민간 예술의 길을 접고, 신식 교육을 받을 수 있 도록 도와주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거처를 마련해 주고 생활비를 대주 었다. 그의 배려 덕분에 펑시는 거리의 예술가에서 교양 있고 정숙한 여학생으로 변했다. 그러나 펑시에게는 돈을 밝히는 엄마와 권세를 중시하는 아저씨가 있었다. 그들은 펑시를 빌미로 쟈수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시작했고, 쟈수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얼마 뒤 쟈수가 어머니를 뵙고자 고향을 찾은 사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펑시의 아저씨인 선산쉔沈三弦은 앞서 말했듯 권세와 재물을 탐하 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조카딸을 끌어들여 군벌인 류劉 장군에게
『울고 웃는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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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근하려고 했다. 선산쉔은 조카딸 덕분에 류 장군과의 협상에서 유리 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류 장군은 펑시에게 반해, 틈만 나면 함께 식사하자고 청하거나 장 신구를 선물하기도 했다. 펑시는 쟈수를 배반하는 것 같아 괴로웠지만, 군벌의 권력으로 밀어붙이는 류 장군의 기세를 감당하기는 힘에 부쳤다. 그는 펑시를 집으로 데려와 공연을 강요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아예 집 안에 감금하기에 이르렀다. 쟈수는 떠나기 전에 관서우펑에게 펑시 모녀를 보살펴 달라고 당부 해 두었다. 관서우펑은 펑시가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몇몇 부하 들과 함께 죽음을 각오하고 구출에 나섰다. 그런데 뜻밖에도 관서우펑 이 류 장군의 공관에 잠입하여 창문 넘어 본 광경은, 펑시가 돈에 매수 되는 현장이었다. 결국 그녀를 구출하려던 계획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고향에서 돌아온 쟈수는 펑시가 그를 배반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어렵게 약속해서 만난 자리에서 펑시는 쟈수를 냉대하며, 자신 은 이미 류 장군 사람이니 더 이상 마음 쓰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그동안의 은혜에 보답하는 의미로 그 자리에서 쟈수에게 4천 원짜리 수표를 건넸다. 쟈수가 그동안 자신에게 2천 원 정도 썼다고 계산해서, 그 2배에 해당하는 돈을 건넨 것이다. 쟈수는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미친 듯이 웃으며 수표를 잘게 찢어 허공에 뿌렸다. 작은 흰나비처럼 춤추며 떨어지는 종이조각 과 함께 쟈수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 버렸다. 그러나 펑시의 헛된 꿈은 오래가지 않았다. 류 장군이 펑시가 자기 몰래 쟈수를 만난 사실을 알고는 채찍으로 그녀를 심하게 때린 것이다. 아울러 혼미한 상태에서 류 장군이 예전에 전처를 총살했다는 하녀의
말을 듣고는, 살려 달라고 소리치다가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결국 평시는 정신이상이 되었다. 이런 자소와 펑 시의 원수를 갚으려고 나선 사람은 다름 아닌 소구 였다. 그녀는 류 장군의 결혼 제안에 응하는 척하면서, 그를 서산 西山의 사찰로 불러내 살해했다. 한편 오랫동안 판 자소를 쫓아다니던 헬레나何麗娜란 아가씨가 있 었다. 헬레나의 외모는 펑시 못지않게 예뻤지만, 쟈수의 맘속에는 오 로지 펑시뿐이었다. 『울고 웃는 인연』은 출판되자마자 각 계층의 독자들을 매료시켰다. 그 결과 판을 거듭하여 책을 찍었고, 각종 연극으로 개편되기도 했다. 심지어 두 영화사가 판권을 따려고 법정 소송을 벌일 정도였다. 이런 결과는 작가 자신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작품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을 만하다. 번듯한 가문의 도령이 가난한 집의 아가씨를 사랑한다는 내용이, 계층을 불문 하고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이끌어 낸 것이다. 판쟈수의 주위에는 세 아가씨가 있었지만, 그가 오로지 한 여자만 사랑했다는 점도 대중의 도 덕관과 맞아떨어졌다. 게다가 얽히고설킨 애정 속에 시원스런 무협을 가미하여,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이야기 전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점도 이 작품의 강점이다. 다만 작품 속에 보이는 소시민 의식이나 소극적 반항 정신은 한계 로 지적된다. 그러나 이 점은 당시의 작가들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장헌수이는 위의 작품들 말고도 100여 편이 넘는 소설을 남겼다. 1930년대에는 『깊고 어둔 밤(夜深沈)』, 『지는 노을 외로운 오리(落霞孤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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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강홍滿江紅』 등을 썼다. 그리고 중일전쟁 때에는 『열혈지화 熱血之花』와 『석두성石頭城』, 『동쪽으로 흐르는 강(大江東去)』, 『전투 가 있던 밤(巷戰之夜)』, 『촉도난蜀道難』 등을 남겼다. 작품들 제목만으 로도 알 수 있듯이, 장헌수이는 열정적이면서도 애국적인 작가였다. 중일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어두운 사회 현실을 폭로하는 소설들을 많이 발표했다. 예를 들어 『81개의 꿈(八十一夢)』은 황당한 형식으로 후방 관료 사회의 부패를 폭로했다. 그런데 소설의 내용이 실권자들을 자극하여, 8개의 꿈만 다룬 상태에서 붓을 놓아야 했다. 이와 비슷한 소재의 작품으로 『도깨비 세계(魍魎世界)』와 『오자등과五子登科』 등 이 있다. 장헌수이는 다작으로 유명한 만큼 책을 쓰는 방식도 남달랐다. 어떤 경우에는 6~7편의 소설을 동시에 써서 각기 다른 신문에 연재하기도 했다. 이처럼 등장인물과 줄거리가 서로 다른 6~7편의 작품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쓸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특출한 작가 임에 틀림없다.
친서우어우의 『가을 해당』
친서우어우秦瘦鷗
친서우어우秦瘦鷗는 장헌수이와 함께 구파舊派의 애정 소설가로 분류되는 작가이다. 그는 1908년 쟝쑤성江蘇省 쟈딩현嘉定縣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무역을 전공했다. 졸업한 뒤 에는 기자, 편집인, 교사로 활동했다. 그는 어 려서부터 연극을 좋아하여, 곤곡昆曲과 경극 京劇을 비롯한 전통극과 현대 화극, 영화, 발레
등 연극과 관련된 모든 장르를 섭렵했다. 그래서인지 나중에 그가 쓴 『가을 해당(秋海棠)』이란 작품의 주인공도 배우이다. 우쥔吳鈞이란 이름의 배우는 ‘가을 해당’이란 예명으로 불렸다. 무대 위에서 여장하고 여자 주 인공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안바오판袁 寶藩이란 군벌이 그에게 악의를 품고 있었다. 당 시 돈과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사람이라면 대부분 여성을 희롱하는 것은 물론, 신분이 낮은 남자들 을 하대했다. 그런데 가을 해당은 신분은 낮을 지언정, 훌륭한 품성만큼 기백이 넘쳐흘렀다. 가을 해당은 톈진天津에서 공연하다가, 건달패의 난동에 맞서 감옥 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위안바오판의 첩에게 도움을 요청 했다. 위안바오판의 첩 뤄샹치羅湘綺는 원래 사범대학에 다니던 순수 한 학생이었는데, 위안에게 속아서 시집을 왔다. 그녀와 가을 해당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로 호감을 가졌다. 이후 둘은 편지를 주고받았 으며, 한 집을 빌려 밀회의 장소로 이용하기도 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이 소문이 위안바오판의 귀까지 들어갔다. 그는 가을 해당을 체포하여 칼로 얼굴에 십자十字를 그었다. 얼굴에 흉 이 남은 가을 해당은 더 이상 무대에 오를 수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뤄샹치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메이바오梅寶를 데리고 시골로 내려가, 농사지으며 아이의 교육에 힘썼다. 이후 위안바오판이 전쟁터에서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가을 해당은 뤄샹치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추한 얼 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그녀가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
『가을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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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놀림 받는 것도 원치 않았다. 나중에 가을 해당은 전란을 피해 딸을 데리고 상하이로 향했다. 당 시 가을 해당은 가난과 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메이바오는 어 쩔 수 없이 술집에서 노래를 하게 되었다. 메이바오는 그곳에서 대학 생 뤄사오화羅少華를 만난다. 그런데 그는 바로 뤄샹치의 조카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뤄샹치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 사람이었다. 메이바오 는 뤄사오화와 함께 뤄샹치를 만나 감격적인 상봉을 하게 되고 그간의 소식을 전했다. 뤄샹치는 꿈에도 그리던 가을 해당을 만날 꿈에 부풀었다. 오랜 세월 헤어져 있던 모녀는 수레를 몰아 가을 해당을 만나러 갔다. 그러나 가을 해당은 이미 자신의 외모와 병을 견디지 못하고 절망하여 투신자살한 뒤였다. 대단원을 맞이하기에는 가을 해당이 겪은 고통이 너무 컸다. 만일 가을 해당이 살아서 뤄샹치를 만났다고 해도 행복한 삶을 되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송철규│(사)푸른세상 이사
문학박사. 한국외대 중국어과, 동 대학원 졸업. 오성연구소 소장. 계간 아시아문예 편집위원. (저서) 대륙의 십자가, 중국고전이야기(전2권), 경극, 송선생의 중국문학교실(전3권), 스토리를 파는 나라 중국, 현대중국의 연극과 영화(공저)외 다수. (역서) 제갈공명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라, 묘수, 묵자 등 다수.
‘천사도 시(天使島詩歌)’
미국 화인 디아스포라 시의 이해1)
박남용
1945년 이전, 미국의 화인 디아스포라의 시 창작은 근대와 현대 시 기의 유학생이나, 외교관, 작가, 학자 등에 의한 주로 창작되었다. 이러 한 작가와 작품들을 통해 중국과 미국의 비교문학의 영향과 수용 관계를 고찰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미국 화인 디아스포라들의 문학창작은 사실상 미국으로 이주하여 노동자로 살아가는 가운데 미국 현지에서의 고달픈 삶을 반영하고 있는 작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197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앞의 천사도(천사 섬: Angel Island)에서 발 견한 ‘검문소 목조건물 벽시(木屋詩)’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왕더웨이(王德威)가 주편한 『중국현대문학사』에는 이 ‘천사도 시’에 대한 부분이 스티븐 야오(姚錚: Steven Yao)의 글로 소개되어 있다. 이 글에 천사도 시에 대한 발견과 출판 과정이 대략 서술되어 있다. 그 내용 을 잠깐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이 글은 2024년 9월, 세계문학비교학회에서 발행하는 『세계문학비교연구』 제88집에 게재했던 글의 일부로, 내용 표현을 약간 수정하고 작품 번역(7수)을 끝부분에 추가하였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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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어느 날, 캘리포니아주립 공원의 경비원 웨이스(韋斯: Alexander Weiss)가 천사도의 이민국 구류소 벽에서 중국어 글자를 발견하였다. 웨이스는 그 사실을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 교수 조지 아라키(George Araki) 박사에게 자신의 발견을 알렸다. 이곳의 무명 화인들이 쓴 약 150여 수의 시들을 엮어 『천사도 중국 이민의 시와 역사(Poetry and History of Chinese Immigrants on Angel Island, 1910-1940』(『埃 崙詩集』)라는 제목으로 1980년에 미국 화문문학의 선구자인 麥禮謙 (Him Mark Lai), 林小琴(Genny Lim), 楊碧芳(Judy Yung) 등이 번역 출판하였다.2) 이 책은 시 작품의 전체적 면모를 소개하며 ‘벽에 새긴, 천사도 중국 이민의 시’라고 소개하였다. 천사도 시는 1940년 천사도 구류소의 대문이 닫히고 천사도의 중국 이민의 시도 오랫동안 봉쇄되고 잊혀졌지만 1970년 알렉산더 웨이스가 다시 발견하였고, 후에 관련자 의 구술 인터뷰를 진행하며 시를 추가하여 약 200여 수를 기록했다고
서술하고 있다.3)
이처럼 천사도 시집은 미국 화인 디아스포라 시 창작의 첫 번째 문학 작품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바, 그 역사적 가치도 매우 높다. 하지만 아직 까지 한국에서는 이와 같은 사실을 잘 모르고 있으며 전혀 연구된 바가 없다. 다만 영시를 연구하는 정은귀4)가 천사도 벽시 중에 기록된 재미 한 인에 대한 시를 발굴하여 연구하고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천사도의 벽시에는 중국 화인의 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 한국, 필리핀, 인도
2) 王德威 主編, 『中國現代文學史(下)』, 麥田出版, 2021, p. 187. 이 책의 중국어 번역본은 『枕 底無花夢不香-天使島中國移民的詩歌與歷史』(杭州, 浙江文藝出版社)라는 제목으로 룽리위(
3) [美]麥禮謙 林小琴 楊碧芳 編著, 榮立宇 譯, 『枕底無花夢不香-天使島中國移民的詩歌與歷 史』, 杭州, 浙江文藝出版社, 2019, pp. 45-46.
榮立宇)의 의해 2019년에 출판되었다. 필자는 추후에 이 시집에 대한 체계적 연구를 진행할 예정이 며 이 글에서는 일부 시만 소개하며 분석해 보기로 한다..
등 아시아 각 나라의 작품들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목조건물 로 지어진 검문소(木屋)로, 이민을 신청하여 미국으로 들어온 화인 이민 들이 갇혀 있던 이민 입국 심사 구류소이다. 그곳은 바로 샌프란시스코 해관 부근의 천사도(엔젤 섬)에 있는데 그곳의 벽에 ‘피눈물로 씌어진 시’
라고 할 수 있다.5)
우선적으로 천사도에 억류된 화인 노동자의 심정을 살펴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시(65)를 살펴보겠다.
무슨 까닭으로 여기까지 와서 감옥에 갇혔나요 나라가 약하고 집이 가난하기 때문이지요 부모님은 문에 기대어도 아무 소식이 없고 처자식은 이불 감고 고단함을 탄식하네 비준되어 설령 부두에 오를지라도 언제 돈을 벌어 조국으로 돌아갈까 예부터 문을 나서면 대부분 비천해지거늘 지금까지 전쟁에 나가 몇이나 돌아왔을까6)
4) 정은귀는 「천사도와 사진 신부-초기 재미 한인 이민문학의 재구성」이란 글에서 천사도의 한인 관 련 시 3편을 소개하며 ‘사진신부’에 대해 쓴 이민 3세의 시를 분석하고 있다. 천사도의 3편 시는 「천사도」(구름 작), 「이별」(이정휴 작), 「내 어머님-이민국 일야」(최경식 작) 등이다. 한인 관 련 천사도 시는 현재 3편만 알려져 있으며, 아직까지 한인 관련 시는 발굴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정은귀, 「천사도와 사진 신부-초기 재미 한인 이민문학의 재구성」, 『외국문학연구』, 55집, 한 국외대 외국문학연구소, 2014. 5) 蓋建平, 「“木屋詩”硏究: 中美學術界的旣有成果及現存難題」, 『華文文學』, 總第89期, 2008.6, p. 79. 6) “爲乜來由要坐監? /只緣國弱與家貧. /椿萱倚門無消息, /妻兒擁被嘆孤單. //縱使批准能上埠, /何日滿載返唐山? /自古出門多變賤, /從來征戰幾人還?” [美]麥禮謙 林小琴 楊碧芳 編著, 榮 立宇 譯, 『枕底無花夢不香-天使島中國移民的詩歌與歷史』, 杭州, 浙江文藝出版社, 2019, p.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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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인 노동자(주로 농민 출신, 상공업자 및 일부 지식인 식자층 계급) 가 멀리 배를 타고 미국으로 왔지만, 입국 심사장에 억류되어 감옥에 갇 혀 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들은 여기에서 자신의 인생의 고단함과 한탄, 비분과 그리움의 감정을 잘 묘사하였다. 모든 것이 나라가 힘이 없고 집 이 가난하여 발생한 일이라고 지적하며 그들이 조국을 떠나 여기까지 올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고향에 남겨진 부모님과 처자식들은 자 신이 돈을 벌어올 것을 학수고대하고 있는데, 자신은 정작 여기에 억류 되어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2연에 가 서는 설령 비준되어 부두에 올라 미국 땅에 들어갈지언정 언제 돈을 가 득 벌어 당산으로 상징되는 조국으로 돌아갈까 기약할 날이 없음을 한탄 한다. 집을 떠나면 고생하여 비천해지며 전쟁에 나간 병사처럼 자신도 결코 집으로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죽음을 암시하고 있다.
천사도에서 생활하는 것도 부자유스러운데, 감옥에 갇힌 처량한 신세가 되었네. 불평은 배에 가득 차서 시에 쓰며, 분노를 지탱하며 술을 빌어 가볍게 하네.7)
이 시(60)는 미국에 입국하려는 화인들이 억류 장소에 갇혀 부자유스 러운 생활을 알려 주고 있다. 불평과 분노를 삭이며 시를 쓰고 술을 빌어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고 있는 화인들의 신분적 처지와 곤경을 표현하고
7) “日處埃侖不自由, /蕭然身世混監囚. /牢騷滿腹憑詩寫, /塊壘撑胸借酒浮.” [美]麥禮謙 林小琴 楊 碧芳 編著, 榮立宇 譯, 『枕底無花夢不香-天使島中國移民的詩歌與歷史』, 杭州, 浙江文藝出版
社, 2019, p. 79.
있다. 이 시는 고전시의 7언 형식을 빌어 미국 이민자들의 정체성을 표 현해 주고 있다. 다음은 이 시집의 마지막 부분에 실려 있는 시(135)로, 구류소의 화장실 벽에서 발견된 것이다.
목조건물 집에 구류된 지 몇십일 기재된 관례에 따라 끌려 들어갔네. 애석하게도 영웅에게 무술도 쓸모없으니 조상의 채찍 소리만 들을 뿐이네. 이제부터 이 건물과 멀리 떨어지게 되면, 여러분 고향 친구 모두 함께 기뻐하리오. 그 사이는 모두 서양식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옥을 깎아 만들었어도 새장처럼 변해 버렸네.8)
화인들이 아메리카 드림이라는 꿈을 꾸며 금광을 찾아 고국을 떠나 왔지만, 막상 그들이 겪은 것은 입국 심사 때 받은 억압받는 민족의 설움 과 차별이었을 것이다. 남성들은 변발이 잘리거나 여성들은 모욕을 받고 자살하기도 하였다. 그들이 이 입국 구류소를 통과해 샌프란시스코에 입 국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겪어야 할 고통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러한 화인들의 삶을 반영하고 있는 이 천사도 시들은 미국 화인 디아스포라 시문학의 초창기를 개척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문학사 발굴 및 새로운 연구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시
8) “木屋拘留幾十天, /所因墨例致牽連. /可惜英雄無用武, /只聽音來策祖鞭. /從今遠別此樓中, /各位鄕君衆歡同. /莫道其間皆西式, /設成玉砌變如籠.” [美]麥禮謙 林小琴 楊碧芳 編著, 榮
立宇 譯, 『枕底無花夢不香-天使島中國移民的詩歌與歷史』, 杭州, 浙江文藝出版社, 2019, p.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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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이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천사도 시를 통해 화인 노동자들이 미국에 입국할 때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들은 미국 사회 속에서 배화법안으로 인해 아무런 법적 보장도 받을 수 없는 철저 한 주변인 신분이었다. 다행히 이러한 배화법안은 1943년에 폐지되어 화인 노동자가 법률로 보호를 받으며 화인문학 단체가 결성되며 화인문
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9)
9) 1943년에는 중국인 이민 금지법인 배화법안이 폐지되어 다시 중국인에게 이민 문호를 개방했으며, 1946년에는 필리핀 독립을 인정하며 필리핀인과 인도인에 대한 이민 금지도 해제되었고, 1952년에 는 매캐런-월터 법이란 새로운 이민법 제정으로 한국인과 일본인에 대한 이민 금지도 해제되었다. 이 로써 1850년 중국인 이민이 시작된 이래 거의 100년 만에 아시아인이 미국 시민이 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게 되었다. 장태한, 『아시안 아메리칸-백인도 흑인도 아닌 사람들의 역사』, 서울, 책세상, 2004, p. 123.
천사도 시(1)
水景如苔千里曲, 陸路無涯路步難. 平風到埠心如是, 安樂誰知住木樓.
바다 경치가 이끼처럼 천 리에 굽어 있는데, 육지의 길은 끝이 없고 길은 걷기 어렵네. 산들바람이 부두까지 부는데 내 마음도 그러하거늘, 안락하게 목조 건물에 머무는 그를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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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도 시(3)
生平卄載始謀生, 家計逼我歷風塵. 無情歲月偏負我, 可惜光陰易邁人.
나이 이십에 살길을 찾기 시작했는데, 집 안은 내게 이 풍진 세상 겪도록 내몰았네. 무정한 세월은 나를 저버리는지, 애석하게도 시간은 사람을 쉽게 내쫓네.
천사도 시(8)
國民不爲甘爲牛, 意至美洲作營謀. 洋樓高聳無緣住, 誰知棲所是監牢?
국민은 기꺼이 소가 되려고 하지 않았으나, 일부러 미주로 가서 책략을 도모하였네. 우뚝 솟은 서양 건물에 살길이 없으니, 누가 거처하는 곳이 감옥인 줄 알았겠는가?
아시아문예•69
천사도 시(20)
離鄕飄流到美洲; 月缺重圓數輪流. 家人切望音信寄; 鴻雁難逢恨悠悠.
고향 떠나 미주까지 떠나갔네; 달이 이지러지고 다시 둥글고 며칠인지 세어보네. 집안 사람들은 편지 부쳐 소식 전해오길 간절히 바라는데; 기러기는 아득함을 한스러워하며 만나기 어렵네.
천사도 시(27)
悶處埃崙尋睡鄕, 前途渺渺總神傷. 眼看故國危變亂, 一葉飄零倍感長.
우울한 엔젤 섬에 머물며 꿈속 고향을 찾으니, 앞길이 캄캄하니 언제나 기분이 상하네. 고국이 위태롭고 어지럽게 변하는 것을 눈으로 보니, 낙엽 한 잎 떨어져도 더 길게 느껴지네.
아시아문예•71
천사도 시(34)
埃崙此地爲仙島, 山野原來是監牢. 旣望張網焉投入? 祗爲囊空莫奈何.
엔젤섬 이 땅이 신선의 섬이라지만, 산과 들이 원래는 감옥이었네. 그물 펴서 왜 던져넣었는지 본 적 있는가? 단지 빈털터리일 뿐 어찌할 도리가 없네.
천사도 시(54)
我爲家貧來美境; 誰知命蹇困監牢. 音信莫達空思想; 消息無聞孰可憐..
우리 집이 가난해서 미국으로 왔는데; 누가 감옥에 갇힐 운명임을 알았겠는가. 편지가 도착하지 않아 헛된 생각만 가득하네; 소식을 듣지 못했으니 누가 나를 동정하겠는가.
역 | 박남용
1968년 충북 옥천 출생, 용인시 모현읍 거주. 중국현대시 전공 문학박사. 저서로 『중국현대시의 세계』, 『한중 현대문학 비교연구』, 시집으로 『소래 포구에서』, 역서로 『낙인』, 『빅토리아 항을 지나며』(공역), 『문학@타이완』(공역) 등이 있음.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미네르바 교양대학 조교수.
아시아문예•73
마음 에너지 방정식
제갈정웅
아인슈타인의 E=mc² 은 우주의 근본적인 법칙을 수학적으로 표 현한 위대한 업적이다. 이 방정식에서 영감을 얻어, 인간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증폭시키는 방법을 수학적 모델로 표현하고자 ‘마음 에너 지 방정식’을 제안한다. 즉, E=감사(mind) X 호기심(curiosity) X 도전(challenge)이라는 방정식을 통해, 감사, 호기심, 도전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인간의 마음 에너지를 증폭시키는 핵심 요소임을 강 조하고자 한다. 아인슈타인이 제시한 이 간단한 방정식 E=mc²가 얼마나 대단한 일 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마음 에너지 방정식을 이해 하는데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데이비드 보더니스 같은 미래학자 는 세상을 이 방정식이 있기 이전과 이후로 나누었다고 할 정도로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05년에 무명 과학자였던 아인슈타인이 특 수 상대성 이론 논문 속에 처음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후 이 방정식이 세계를 뒤흔들었고 인류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세상의 작동 원리를 밝히는 데 뉴턴의 물리학을 버리고 자신이 고안 한 상대성 원리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아인슈타인의 생각이 변혁적이 었던 것은 에너지와 물질이 서로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의 형 태로 변형될 수 있다는 점을 처음으로 밝혀냈기 때문이다. 이 생각은 우 선 원자력 발전소를 인류에게 선물하여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원자폭탄을 탄생시켜 제 2차 세계 대전을 일찍 끝내게 했 다. 그리고 태양이 어떻게 계속 뜨거운 열을 생산하고 있는지를 밝혀냈 으며 불랙 홀이 어떻게 포식자가 되어 우주를 삼키는 지도 알게 했다. 이러한 업적 외에도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우 리나라의 핵 개발이 큰 이슈가 되게 하고 있다. 결국 이 방정식은 에너지와 질량이 같은 것이면서 다른 모습을 보이 고 있음을 알려준 것이다. 잘 알고 있지만 이 방정식을 조금 더 세밀히 살펴보면 E는 에너지를 의미하며 에너지가 물질 속에 숨어 있던 것을 찾아낸 것이다. m은 물질의 질량(mass)이다. 신이 우주 속에 풀어 놓은 에너지의 원 천이 물질인 것을 발견한 것이다. 방대한 에너지 원을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찾아낸 것이다. 여기에 A.L. 라부아지에의 질량은 생성되 거나 소멸되지 않고 형태만 변한다는 질량 보존의 법칙(Law of conservation of mass)이 작동한다. C는 빛의 속도로 빠르다는 뜻의 라틴어 세레리타스(celeritas)의 첫 글자이다. c²는 질량이 단순히 압축된 에너지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 라 질량이 방정식의 등호를 건너가면 얼마나 크게 확대되는지를 보여준 다. 지금까지 마음 에너지 방정식을 이해하는데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영감을 준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아시아문예•75
감사를 연구해 보면 우리가 비범해지는 유일한 방법은 매사에 감사 하는 것이다. 래리 센 (Larry Senn)박사는 감사하는 마음은 무드 엘리 베이터의 가장 에너지가 높은 긍정적인 감정이라 했다. 감사하는 마음 은 끊임없이 최고를 유지하는 마음 상태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언제나 최고가 되려는 경향을 내포하고 있다. 데일 카네기는 자기 관리론에서 “감사는 교양 있는 사람이 할수있는 자기수행의 결실”이라고 했다. 그리고 월러스 워틀스는 “감사하는 마음이 에너지의 근원과 우리를 더 밀접하게 연결시킨다. 감사가 우리의 온 마음을 우주의 창조적 에너 지와 더 긴밀하게 조화시킨다.”고 했다. 이러한 긍정적인 감사의 마음 밭에 호기심(curiosity)이라는 씨앗을 계속 심을 수 있어야 에너지가 높아진다. 시인 사무엘 울만은 청춘이라 는 시에서 나이 들어서도 에너지 넘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린아이 와 같은 경이로움에 대한 호기심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호기심과 함께 도전(challenge) 정신이 있어야 높은 에너지 를 지속적으로 발생시킬 수 있다. 호기심으로 심은 씨앗을 더 높은 경지 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는 도전이 필요하다. 도전이 없으면 현상에 만 족하게 된다. 현상에 만족하면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뒤로 처지 게 된다. 새로운 목표를 정하고 지속적으로 도전하는 것이야 말로 높은 에너지를 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마음 에너지 방정식은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세계에 대한 법칙으로 C 를 호기심이나 도전으로 마음 에너지를 계속 유지하게 하는 방정식이 다. 그런데 이를 대체할 것을 찾아낸다면 양자물리학(Quantum Physics)은 새로운 세계를 열 것이라 생각한다.
각 요소의 상호작용에 따라 마음 에너지는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또한, 양자물리학의 비 국소성과 같은 현상은 마음과 물질 사이의 상호 작용을 설명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며, 이는 마음 에너지 방정식 의 미래 연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
제갈정웅
강릉 출생. 경영학 박사. 시문학 시 등단. 한국문협. 국제펜한국본부. 현대시협. 대림대학교 총장 역임. (현)감사나눔신문 이사. 감사나눔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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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모니 효(HYO)와 경제공동체 행복
― 성경적 효복사상과 경제발전의 상관성 ―
김시우
Ⅰ. 들어가며 Ⅱ. 성경적 효와 하모니 효 운동 Ⅲ. 성경적 효복 사상
*앞의 내용은 이전 호를 참조바랍니다.
효(HYO, 孝)는 삼통이다. 효는 종교와 종파를 포괄하는 통교(通敎)적인 가치이다. 효는 시대와 공간을 아우르는 통시(通時)적인 문화이다. 효는 이념과 사상을 뛰어넘는 통념(通念)적인 정신이다. 효가 살아야 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지켜내고, 지역간 · 계층간 · 세대간 갈등을 불식시키며, 종교적 이념적 위화감을 화해와 평화로 용해해낼 수 있는 힘은 효 정신 밖에 없다.
효가 살면 나라가 산다. 효가 살면 모두가 산다. 본고에서는, 비교효학과 효의 통교적 관점에서 세계 종교인 중 가장 다수가 경전으로 믿고 있는 성경적 효의 관점에서 현대 효(HYO)의 가치와 의의를 살펴본다.
Ⅳ. 하모니 효와 경제공동체 행복의 상관성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3에서 부모 공경 계명을 ‘약속 있는 첫 계 명’으로 기록하여 이방인들이 그동안 인간적 관점에서 중시해 온 부 모에 대한 공경의 효를 그대로 인정한다. 그는 또한 출애굽기 20:12 와 신명기 5:16에 있는 땅의 축복을 언급하면서 가나안이라는 지명을 배제함으로써 이방인 크리스천을 배려한 것을 분명히 한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계명은 『신‧구약성서』 전체를 통해서 강조되고 있는 계명이요 이 계명에 대해서는 약속이 분명히 들어있 다. 부모 공경 계명은 신자든 불신자든 모든 피조물인 인간이 지켜야 할 계명이다. 그리고 그 계명을 순종하여 지킨 자 혹은 효행을 하고 효 행을 교육, 장려 한 자에게 약속한 복, 다시 말하면 잘되고 땅에서 장 수하는 복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피조물인 태 양의 빛을 신자나 불신자 모두에게 골고루 나누어주는 것과 같다. 그 래서 옛 동양의 금언에 효자 집안에서 효자 나고, 충신은 효자 가문에 서 구한다1)는 말도 효를 하면 본인뿐만 아니라 가문이 복을 받아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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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이어 간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효를 하면 왜 복을 받게 되는가? 하나님이 부모 공경하는 자와 축 복의 계약을 맺은 것이다. 하나님은 미쁘시다(誠). 따라서 그의 약속은 반드시 실현된다. 그의 미쁘신 약속을 믿는 자에게는 반드시 응답하 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리하면 성경에 약속된 축복이 개인과 가 정과 공동체 위에 임할 것이다. 좋은 효는 ‘입신행도 양명어후세 이현 부모 효지종야’이며 바람직한 효는 인격적으로 또한 물질적으로도 성 공하는 효이다. 신명기 28장의 복이 임하는 내용에도 일치한다. 성경 적 경제는 땀 흘리는 경제로서 ‘사람(勞使 모두를)을 살리는’ 민생(民 生)경제이다. 성경은 말한다.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무슨 일을 하든지 主(하나님)께 하듯2) 최선 을 다하고 부지런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엿새 동안에 맡은 일을 힘써 일을 행해 야 한다.3) 주를 경외함으로 땀 흘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경제적으로 향상 될 수 있다. 스스로 복을 짓고 스스로 복을 가져오는 것이다. 하 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자, 효의 정신이 살아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부모님의 소 원을 깨달아 부지런하며 땀의 보람, 눈물의 가치, 피의 은혜를 안다. 그 결과, 학교생활, 직장생활, 사회생활 등에 최선을 다한다. 성실히
1) 『後漢書』 “求忠臣必於孝子之門” 2) 골로새서 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3) 출애굽기 20:8-9 “8.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 나”(십계명의 제4계명 중에서), 창세기 3 : 17“(여호와 하나님이)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 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 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 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게으르고 불성실한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학 교 공부도, 직장생활도, 경제활동에서도 잘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또한 효하는 사람, 효자는 책임감이 있고, 예의가 바르고, 도의를 지키며 남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사람이다. 부모에 대한 책임과 의무 를 아는 사람은 낭비하거나, 사치하지 않는다. 그 결과, 효자가 많은 가정, 직장과 사회는 경제가 더욱 번창 성장한다.4) 효자는 스포츠 분 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기업 공동체에서도 효자 직원이 많은 회 사는 효자상품을 많이 생산하여 결국 기업체는 잘되고 기업 수명이 장 수 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효를 하면 가정공동체가 화목하고, 회사 등 경제공동체에서도 노사가 하모니 화합하고 단결하여 회사의 목표 를 향하여 매진하게 되니 회사가 흥왕5)하게 된다. 결국 효하는 자에 게 복을 약속한 성경의 말씀대로, 개인과 가정, 기업과 경제공동체, 나 아가 국가 공동체도 잘되고 복을 누리고 장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하에서는 기업과 경제공동체를 수십 년 전에 창 업하여 孝와 道義, 事業報國의 정신으로 장기간 효자상품을 많이 생산 하여 기업이 번창하고 확장되어 세계적으로 연인원 수백만, 수천만 명의 생명과 건강 유지에 기여한 한국의 대표적 기업의 효 정신과 실 천 그리고 효복과의 상관성을 규명해 보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과 현대그룹의 창업주 정 주영 회장의 사례를 중심으로 효를 하면 경제공동체 즉 기업이 복을 받는 것을 실증사례로 제시한다. 한국 경제발전의 두 거목은 호암 이병철과 아산 정주영이다. 효와
4) 최성규 총장, 온라인 강의(2020.3.23.) 교안 『성경의 효(HYO)』, 28. 5) 『明心寶鑑』 「治家篇」 “子孝雙親樂 家和萬事成”, … 여기에서 유추하여 “互孝勞使樂 社和萬事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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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발전의 상관성을 고찰, 입증하기 위해서는 한국이 낳은 경제계의 글로벌 거물인 두 경제인의 경제관과 기업활동의 저변에 효 정신과 실 천이 있었는지? 그리고 효 사상이 그들의 경제발전에 어떻게 작용하 여 상관성이 있는지를 고찰하고 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등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경제인을 사례로 든다는 것은 논란 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경제공동체와 관련 인간을 평가하 는 데는 경제 사회 문화 등에 영향을 끼친 功(공로)과 過(허물)를 종합 적으로 분석하여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버리는 생각으로 타산지석 혹 은 반면교사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의의가 있다. 1910년생으로 경남 의령의 농촌에서 태어난 이병철은 세계 굴지 의 대기업을 일구었다. 삼성의 이병철은 분명 타고난 천재 경영가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1915년 강원도 산골 통천에서 태어난 정주영은 그 누구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엄청난 도전정신과 창조력이 있었다. 두 분은 국내외에서 존경받고 있는 한국 경제의 기둥이요 견인차이 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라는 속담이 있는데 두 분은 우리나라와 지구촌에 수많은 기업과 경 제, 부와 명성도 남기고 떠났다. 각 기업체에서 근무하는 수십만 명의 종업원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노부모, 어린 자식들을 포함한 가족 수 백만 명의 의식주와 경제문제 해결과 세계 인류에게 문명의 이기와 윤 택한 문화생활, 의료혜택 등을 주고 크게 기여하고 있다. 결국 기업과 경제공동체를 잘 경영하여 창의적 제품과 효자상품을 많이 생산 판매 하여 그 수익금으로 소속 직원들과 소비자의 생명과 건강 유지 존속 에 크게 기여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현대적 큰 효, 제7효 이웃 사랑 과 인류 봉사에 기여한 성취라 할 수 있다.
한국과 같은 부존자원이 결여된 소국으로써 2차 세계대전 후 독립 한 신생 소국으로서 불과 70여 년 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발전 국으 로 도약한 바탕에는 경제계의 두 거인인 이병철과 정주영의 공로가 크 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병철 회장과 정주영 회장 두 분의 공통점은 시골 농촌에서 태어 나 어릴 때 가정에서 조부모나 부모로부터 효에 관한 가정교육을 받 고, 자수성가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6)를 하여 한국 과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아온 온 경제계의 큰 효자 혹은 혁명가’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성취 이면에 어떠한 효 정신과 사상과 실천이 있었는 지? 효학의 관점에서 좀 더 고찰해 보고자 한다. 『明心寶鑑』의 ‘가화만 사성家和萬事成(興)’의 입증 혹은 효감동천孝感動天7)의 天理와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규명하는 작업은 효문화 선양에 필요하고, 최근 효 의식이 희박해져 가는 세태에 효 실천을 장려하려는데 孝學徒로써 중 요한 과업이다. 1. 삼성 이병철 회장의 효행상 제정 및 효행장려 사업8)
호암 이병철은 1975.1.8. 삼성문화재단에서 전국 단위의 효행상을 제정하고 시행하였다. 이는 기업인으로서 쉽지 않은 결단을 내린 것이 었으니, 그의 의식을 지배해온 『논어』의 仁孝일치 사상의 발로이며, 효 의 중요성을 일깨워 효 문화를 앙양하기 위한 선비적 통찰이었다.
6) 『孝經』 「開宗明義章」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 終也” 7) 孝感動天: 中國 湖北城 孝感市 中央에 位置한 孝子董永 等의 孝公園의 懸板에 孝感動天 文字 記錄되 고 있다. 8) 이병철, 『호암자전(삼성 창업자 호암 이병철 자서전)』 (서울: ㈜ 나남, 2014), 278-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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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재벌 회사로써 그 바쁜 기업의 활동 시간을 절약하여 매년 전국 각도에서 숨은 효행자를 한 사람씩 추천받아 포상하는 것이니 45년째 효행상 제도를 중단 없이 실시해 오며 한국 사회의 효문화 앙양에 크 게 기여하였다. 우리나라 전통사회에서 ‘효’는 가장 소중한 가치였다. 시대는 이미 달라지고 사람들의 가치관도 많이 바뀌었지만, 어버이를 孝敬하는 자식의 마음에는 고금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효’가 바탕이 된 가정은 건강하다. 그 건강한 가정이 단위가 되어 구성하는 사회 또 한 건전하다. 인간의 본성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효도야말로, 시대의 고금을 초월한 영원한 인간의 질서이고 규범이라고 확신한다. 이병철 회장은 기회 있을 때마다 특히 효(孝)와 도의(道義)를 강조하였다. “효는 물질 만능 시대를 지키는 등불이다. 인간의 본성에서 자연스 럽게 우러나오는 효행이야말로 낡은 것도, 새로운 것도 아니며, 사람 과 함께 있는 변함없는 질서이며 법도이다. 시대가 갈수록 모든 인간 이 한결같이 갈망해 마지않는 것은 더 많은 물질도, 더 많은 편리도 아
니며 바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고귀한 정신의 보존이다.”9)
“사회가 발전하려면 도의가 바로 서야 한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 를 막론하고 그 바탕이 도의의 반석 위에 있지 않고 발전을 도모한 예 는 일찍이 찾아볼 수 없다. 바로 그 도의의 원천은 물질도 권위도 아닌 인간 존엄에서 비롯된다. 인간 존엄의 근간은 인간 상호 간의 존경과 신뢰와 화목에 있다. 효의 본질인 어버이를 섬기고, 봉양하며, 공경하 는 것이 어색한 일일 수 없으며, 형제가 친애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일일 수 없으며, 또한 가정에 화목과 신뢰가 넘치는 것이 번거로운 일
9) 이병철의 연설문 : 1976.6. 삼성문화재단 효행상 시상 치사 중 일부.
일 수 없다”.10)
“도의는 사람이 숨 쉬는 공기와 같다. 가정의 도의는 곧 천륜의 시초 이며, 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 행복의 궁극적 목적이기도 하다. 실 로 효제, 자애를 중심으로 하는 건실한 가정 없이는 건실한 사회도, 번 영된 경제도, 튼튼한 국가 안보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도의나 도덕 은 마치 신선한 공기와 같은 것으로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가 능 근거인 동시에 특히 사회가 격동하고, 세도인심(世道人心)의 퇴폐가 문제시되는 시기일수록 더욱 그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가정이 바로 서야 국가도 바로 선다. 도의나 도덕은 사회를 지탱하 는 근간이며 인간관계를 원활히 유지하는 법도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가능 근거인 동시에 사회를 평화롭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 道義 가운데도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효라고 하겠다. 효는 萬德의 근원이며 최고 절대의 덕목이다. 가정의 화목이 없고 사회 의 평화가 없는데 어떻게 나라의 정치와 경제가 안정적 발전을 기할 수 있겠는가? 이제 우리 모두는 우리 사회의 이 같은 도덕적 퇴폐에 대해 깊은 반성을 해야 할 시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천륜과 인륜의 시초가 되며 원점이기도 한 가정에서부터 도의의 싹을 키워가야 할 시점에 온 것이다. 실로 효도와 자애를 기본으로 하는 건실한 가정이 없이는 건
실한 사회도, 번영된 국가도 존립할 수 없는 것이다”11)
호암의 어록에 나타난 효심과 효행의 범위는 가족 혹은 가문의 이기 주의를 넘어 나라 사랑의 효와 세계 인류에게 봉사로 확장되는 대효 즉 현대적 광의의 효를 강조하고 실천하고 있다. 그와 관련된 어록을 인
10) 이병철의 연설문 : 1979.1.30. 삼성문화재단 효행상 시상 치사 중 일부. 11) 이병철의 연설문 : 1980.1. 삼성문화재단 효행상 시상 치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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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하면, “나라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나라 사랑 국민 사랑). “나라 가 만사의 기본이다. 모든 것은 나라가 기본이다. 나라가 잘되어야 기
업도 잘되고 국민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12)
2.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의 孝弟사상과 효행 장려
한국 경제의 대재벌 그룹 중 삼성그룹과 쌍벽을 이루는 현대그룹 의 창업주 아산 ‘아산峨山’은 鄭周永의 호이다. ‘아산’13) 鄭周永의 생애 를 관통하는 정신은 孝心과 孝의 실천이었다. 정주영의 제도권 교육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다. 정주영의 祖 父는 동네 서당의 훈장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다양한 古典을 접할 수 있었다. 書堂에서의 공부가 후일 자신의 지식 밑천의 큰 부분이 되 었다고 토로한다. 어린 시절 서당 교육에서 동양고전 읽기 특히 유 학에 대한 공부와 이해가 자신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얘 기한다. 정주영은 유년 시절 회고하기를, ‘小學校(초등학교)에 입학 전 3年 동안 조부의 서당에서 『千字文』으로 시작해서 『童蒙先習』, 『明心寶鑑』, 『小學』, 『論語』 등을 종아리를 맞아가며 학습했다’고 회고 한다.14) 이러한 학습과정에서 자연히 효도에 관한 교육을 체득 한 것으로 짐작된다. 소 시절부터, 그의 부친이 어린 정주영에게 자주 들려주시던 말씀 “너는 宗孫이다. 위로는 祖上들 제사를 받들어야 하고 아래로는 동생
12) 이병철의 연설문 : 1981.1.1. 신년사에서.13) T. B. Maston, Biblical Ethics, 고재식 역, 『성서윤리』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5). 41. 13) 호의 유래는 그가 태어난 고향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峨山里에서 따왔으니, 그의 고향 사랑과 부모 선조 들을 생각하는 孝心이 얼마나 특심한 지를 유추할 수 있다. 14) 김진수(현대인재개발원장 역임). 『經營의 神 鄭周永 VS 松下』(서울 : 북오션, 2017), 304.
들 거느려 나가야 하지 않겠니?”를 기억하고, 아산은 부친의 말씀을 늘 가슴에 품었다. 가난한 농부의 長子라는 운명을 피하지 않았다. 그 는 선친의 이러한 유지를 늘 마음에 품고, 家長으로써 밥상머리 교육 을 실천하였으며 가족의 행복을 위해 땀 흘려 일했으며, 대가족15) 의 가장으로서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무엇 보다 가정을 중시하고 ‘존경 받는 가장’이 아산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자 삶의 원동력이었다. 성장하며 효제사상을 마음에 새기고 효 행을 중시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아울러 효행 장려의 전국화를 위해 아산 효행상 제도를 설립하여 30여년 전국에서 효행자를 선정 시상해 오고 있다. 아산효행대상제도는 1989년 정주영 아산재단 설립자의 뜻 에 따라 어려운 이웃을 위해 헌신하거나 효행을 실천한 개인이나 단체 를 찾아 격려하자는 뜻에서 제정됐고, 남다른 효행을 실천한 사람들, 이웃 사랑에 앞장선 사람들, 이들을 거울삼아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 이 아산이 효행상 제도를 만든 이유가 된다. 1989년 제정된 아산상은 효행자에서 부터 봉사단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사람 들에게 수여 됐다. 정주영은 강조한다. “효(孝)란 가정에서는 화목이지만, 사회로 확
산되면 공경과 봉사정신이 되고, 국가로 확산되면 충(忠)이 된다”.16)
특히 ‘밥상머리 가정교육’과 “계지술사(繼志述事)의 효를 실천한 것으로 평가받는 정주영은 말한다. “나의 일생의 소망은 ‘바다만큼 농 지를 소유하는 것이라고 하신 아버님 말씀’이 나의 잠재의식 속에 남
15) 정주영의 가족은 兄弟가 7남매(6남1녀), 직계자녀로 슬하에 11남매(8남3녀)를 두어 대가족을 구성한다 (namu.wiki).16) 약 2:10-11 참조 16) 정주영의 연설문 : 1993년 아산 효행대상 시상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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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 분이 이루지 못한 소망을 이뤄드리고 싶어 바다를 막아 농토를
만들었다”.17)
그는 부친의 말씀을 마음속에 담았고, 부친의 성실성과 근면성을 닮기 위해 일평생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장손으로서 선조들의 뜻을 자손들에게 전수하기 위해, 새벽 5시에 자녀들과 아침 밥상을 함께 하 기 위해, 소위 정주영표 ‘밥床머리 가정교육’을 실천한바, 선친에 대한 양지(養志)의 孝가 자손 대대로 이어져 가고 있다. 정주영家의 ‘밥상머리 교육’은 언론에도 자주 보도되었고, 유명하 다. 정주영 전 명예회장은 새벽 5시에 ‘일근천하 무난사一勤天下 無難 事(한결같이 부지런하면 천하에 어려움이 없는 법이다)’라는 족자가 걸린 서울 종로구 청운동의 자택에서 온 가족과 아침 식사를 했는데, 그 시절 장손인 정몽구 부회장에게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밥상머리 교육은 나도 아버지한테 전수 받았어. 너의 증조할아버 지께선 함께 아침을 먹으면서 남을 배려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늘 말씀하셨지. 자기를 낮추면서 남을 높일 줄 아는 사람이 되는 방법을 생각나는 대로 들려주곤 하셨어.” 현대가의 이 같은 家風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아산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타계했지만, 그의 경영 철학은 계승되고 있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2세와 3세는 강한 집념과 도전정신 그리고 위 기 상황에서 강한 결단력으로 한국 경제를 이끌고 있다. 정주영 회장의 3世인 정의선 현대차그룹 현재의 부회장이 선대 조부와 부친의 뜻을 받 들어 養志의 孝를 실천하고 있다. 덕분에 현대家의 엄격한 교육을 받은
17) 정주영의 연설문 : 1984년 서산 간척사업 현장에서.
現代車그룹의 3世 정의선 부회장은 비슷한 연령의 재벌 2~4世들 사이
에서 가장 존경받는 經營者 중 한 명이라고 전해진다.18)
3. 효의 효능으로 범죄의 사회적 비용 절감 및 경제공동체 이윤 증대
효는 도덕의 근본임으로 효를 가르치면 인간의 人性이 바르게 되어 결과적으로 그 사회의 도덕과 윤리가 바르게 됨은 순리이다. 그리고 효 즉 자기의 생명의 근원인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은 윤리의 근원임으로 개인이, 가정과 기업, 사회공동체가 생명을 중시 여겨 사 회 범죄가 감소하게 된다. 가정과 사회, 기업에서 부모 어른 스승 경 영자를 공경하고, 가족 및 사원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경천애 인하는 광의의 효HYO가 살아서 작동하면, 그 사회와 기업 공동체는 안정이 되고, 부강하게 된다. 최근에 각국에서 개인이기주의 범람, 물 질문명의 발달로 공동체 의식이 약화되고 효의식이 감퇴되는 것과 때 를 같이하여 여러 가지 사회 병리적 현상들이 대두되고 있다. 최근 야 기되고 있는, 각종 사회적 범죄들, 절도, 강도, 사기, 살인, 자살, 강 간, 성폭력, 공직자의 부정부패, 기업의 기밀누설 등이 예방되거나 방지하는 첩경은 윤리와 도덕의 근본인 효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함으로 각종 범죄로 야기되는 개인적, 가정적, 사회적, 기업적, 국 가적 직‧간접 비용을 축소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좋은 순기능을 가 진 효를 어찌 장려, 교육, 선양하지 않으랴. “무릇 효는 덕의 근본이요, 교육이 효에서 시작된다.19)”는 것을 가정과 국가에서 명심하고 실천 해야 할 것이다.
18) 메트로신문사(2015.11.25. 08:19) “정주영 명예회장 탄생 100주년 2·3世 아산 경영 철학 물려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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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언론에 보도된20),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보고서(2011.02. 21)에 의하면, 한국에서 발생하는 각종 범죄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연 간 158조 원(2008년 기준)에 달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해당 연 도 국내총생산(GDP)의 약 16.2%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범죄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라 함은 보안ㆍ방범ㆍ보험 등에 소요되는 예방비용, 실 제 범죄로 발생하는 재산 및 신체적ㆍ정신적 피해를 의미하는 결과 비 용, 수사기관ㆍ교정기관 운영비 등의 대응 비용을 모두 합한 개념이다. 2008년 한국의 전체 국가 예산이 약 300조 정도 되는데 “범죄로 인한 사회적 비용, 연간 158조 원”이라는 것은 국가 예산 전체의 약 1/2이 되는 엄청남 금액인데, 이러한 귀한 국민과 국가의 소중한 재 정이 범죄 때문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으로 소진된다는 것은 엄청 난 가정적, 국가적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만약 효교육을 잘하여 청소 년들과 국민들이 바른 인성을 가지고 도덕적인 생활을 함으로써 비행 이나 범죄행위를 하지 않도록 육성한다면 158조의 절반(약 80조) 정 도가 절약 가능하고, 그 절약된 금전을 국민의 복리와 사회복지, 기업 의 연구 기술 개발비나 실업자 채용, 영업 활성화에 투자한다면 국민 의 경제생활과 기업의 경제발전에 엄청난 이윤 극대의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禮記』 「祭義篇」 『禮記』 「祭義篇」21)에 “其次不辱”이라 하 여, 효도를 잘하는 사람은 자기의 부모와 가문에 욕되게 하는 비행이나 범죄를 저지르지 않게 하여 오히려 ‘입신행도 하여 양명어 후세 이현부
19) 『孝經』「開宗明義章」 “子曰 夫孝 德之本也 敎之所由生也”. 20) 한국일보(2011.02.21)
모’를 함으로 범죄를 크게 감소시킬 수가 있는 것이니, 가정과 기업, 사 회에서 사전에 효인성교육을 통해 犯意를 약화시키고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 지혜로운 최선의 방책이 될 것이다. 현대 사회는 ‘도덕이 자본’이고, 효하면 금전 손실을 예방하고 경제 발전에 기여한다는 사실을 개인도, 가정과 기업, 국가도 자각하고 효 교육과 장려에 큰 관심과 실천궁행해야 한다. 教育의 教字가 簡体 字로 破字 하면 효도 孝+칠攵 字의 合成語이다. 즉 교육의 字意는
백행의 근본인 효를 가르치는데서 시작된다는 의미이다. 모든 교육에 서 기초가 되는 효를 먼저 우선적으로 가르쳐야 다른 교육이 제대로 결 실을 보게 된다. 그래서 성현들은 효는 백행지본이요, 백행지수라 하 였고, 성경에서도 효는 먼저 가르쳐야 할 것22)이라고 강조했다.
Ⅴ. 나가는 말
효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 주신 인류와 우주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 아 버지 사랑의 명령이다. 그리고 성경적 효는 성경을 하나님 아버지의 말 씀으로 인식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도덕법인 십계명에 내포되어 있는 도덕적, 윤리적 계명 을 지킴으로 죄를 멀리하고 오히려 각자에게 주어진 직무를 주께 경외하
21) “曾子曰 孝有三 大孝尊親 其次不辱 其下能養”. 22) 디모데전서 5장 4절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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듯, 부모님께 효를 하듯 근면 성실하게 살면 잘되고 장수하는 복을 누리 게 된다. 이것은 동양의 효 사상에서도 강조하듯이 효는 천리요, 백행지본, 백 행지원이며 인효일치(仁孝一致), 효감동천으로 효를 장려하고 있으니, 고등종교에서는 효복에 관한 한 통교적 같은 맥락을 유지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피조물인 모든 인류는 효를 실천하고 가르치고 장려하면 상응 하는 효복을 받아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는 소위 웰빙(wellbeing)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21세기 지구촌에 편만한 자본주의 시장경제 시대, 4차 산업혁명 시 대, 최첨단과학과 5G, AI 시대에 대두되고 있는 윤리적 폐단과 사회 병리적 문제점들, 과도한 경쟁으로 인한 빈부격차, 각종 범죄, 세대, 지역, 인종, 이념 간의 갈등 등이 심각하다. 이를 해소하는 방안으로 물 질 가치와 정신 가치를 균형 있게 챙기는 균형 교육과 균형 경영을 지 향하는 하모니 문화가 필요하다. 현대 자본주의의 핵심인 물질과 경제 를 챙기는 물질적 가치관, 이에 대응하는 名分과 정신을 챙기는 정신 가치관의 정립으로 물질과 정신의 하모니, 경제와 문화의 하모니, 과 학과 인문의 하모니, 인간과 자연의 하모니로 균형 잡힌 미래 행복 전 략, 하모니 효HYO 사상이 자본주의적 병폐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 일찍이 세계적인 역사학자 아널드 J. 토인비 박사가 말하기를 “한국 의 가족제도가 인류를 위해 가장 훌륭한 제도이며 … 한국의 효 사상은 인류를 위해서 위대한 사상이다 … 한국에서 장차 인류문명에 크게 기여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효사상일 것이다”라고 했다.23) 이제,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인류의 최고 성현들께서 수천 년
간 역설해 온 효에 관한 지혜와 교훈을 법고창신(法古創)의 관점에서 수 용, 연구, 재해석하여 생활에 적용하는 것은 인류문화 향상을 위해 그 의의가 지대하다. 위에서 고찰한 대로, 효와 경제는 상관성이 많다. 만물의 영장인 인 간은 건전한 정신과 마음 위에 건강한 육체와 하모니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라는 선조들의 금언은 현재도 유효하다. 따라서 하모니 효HYO 정신의 바탕 위에 효행의 생 활화를 개인과 가정, 기업과 공동체에 적용하면 개인과 공동체도, 경 제와 문화도, 사회와 국가도 잘되고 장수 할 수 있다. 성경에서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는” 복이 약속된 첫 계명인 효 계명 은 인류 행복을 위한 창조주의 축복이요 보너스이다. 성경적 효는 창세 기 1장 28절24)에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주신 문화명령을 받들어 이행하는 것이며, 특별히 십계명 두 돌 판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기록25)하여 주신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효 문화명령을 실천하 는 것이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인간들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행복한 삶의 비결이요 은총이 된다. 그러므로 信者든 不信者든 경천애
23) Arnold. J. Toynbee, “부디 그 위대한 효 사상과 경로사상, 그리고 가족제도를 영원히, 보존할 뿐만 아 니라 서양에 와서 가르쳐 주십시오. 나도 효 사상 보급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어요 … ”라고 눈물을 글썽이며 간곡히 호소하였다.(출처: 조선일보1975.10.24(금), 5, 서울신문1990.4.14.(토), 9 : 1973년 9 월 영국 자택을 방문한 전 일간신문 논설위원이며 전)국회의원 임덕규 회장(현 Diplomacy 발행인 겸 회장)과의 대담 기사). 24) 창세기 1: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
라”. 25) 신명기 4:13 “여호와께서 그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로 지키라 명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 출애굽기 24: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 서 거기 있으라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그 외 출 애굽기 31:18; 32:15,16; 신명기5:22 등에도 같은 내용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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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의 정신 위에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부모를 공경함으로, 성경7효 즉 하모니 효(HYO)를 실천하여 하모니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데 함께 매진해야 할 것이다. 효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늘을 감동시키고 인류공동체를 행복 하게 하는 효복이 약속된 인류 최선의 정신 문화유산이다. 오늘의 세대 들이 이를 복원하여 지키고 후세에게 전수해야 할 사명이 있다. 이러한 효복사상은 인간이 부모로부터 태어나는 한 과거와 현재, 미래에도 유 효하고, 정신생활, 도덕 생활과 경제생활에서도 유익하고 적용이 가능 하다. 따라서 개인의 경제발전과 기업번창을 영속적으로 유지 계승하 려면, 부모님이나 기업의 경영층, 사회지도층과 정부 당국자가 효 (HYO)에 솔선수범, 효 정신을 교육하고 효 실천을 강조 장려해야 한다. 요컨대, 효를 하면 가정이 화목하고, 가족이 행복하다. 효가 살면 사 회가 안정되고 학교 교육이 활성화된다. 효를 실천하면, 개인 성취, 기업 번창, 사회안정, 국가융성으로 국민이 행복해진다. 그러므로 효와 경제 는 상관성과 상보성이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결국 효(HYO)를 하면 개인 행복, 가정 행복, 경제공동체 행복, 국가 행복, 인류 행복으로 연결되어진다. 복은 개인이 받지만, 행복은 공동체 의 건강에 달려 있다. 하모니 효는 공동체 건강과 행복의 에너지이다. 효(HYO)는 하모니이다. 효를 하면 먼저 가정이 화목하고 가족이 행복하다. 나아가 가정의 확장인 직장, 기업에서 효를 실천하면 직장 가족 간, 노사 간에 공감과 화합으로 생산성이 향상되고, 이윤이 증대 되어 노사가 행복해진다. 하모니 HYO가 살면 가정 행복, 4행복) 경제공동체도 행복하고, 국 민도 행복해진다.
효를 하면 인류가 행복해진다.26)
21세기 하모니 효HYO가 희망이다.
26) 최성규 총장, 온라인 강의(2020.3.23.) 교안 『성경의 효(HYO)』, 30.
성산효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효학박사.
김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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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종합 । 아리랑
한강의 뜻과 식민사관 논점 연구
Studies on the meaning of Hangang River and the Japanese Colonial views of History
Ⅰ. 서 론
조용호( 趙容晧)
한강이나 아리수의 뜻에 대한 객관적 자료는 아직 없다. 연구된 내 용도 거의 없다. 한강(漢江)은 ‘한(漢)이라는 강(江)’이지만 한(漢)의 뜻 을 정확히 모르고, 아리수(阿利水)는 ‘아리(阿利)라는 수(水)’이지만 아 리(阿利)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한다. 또한 한강은 고어 한가람에 서 유래한다는 발상이 있으나, 유사한 사용례는 고문헌에 없다. 그러한 이유로 한강은 뜻 모르는 강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근대 개화기에 이르러 조선과 주변 북방지역 역사 및 언 어 등을 전공한 일군의 일본인 학자들이 출현하여 해독을 시도하였는 데, 이름하여 일본인 식민사관 학자의 등장이 그것이다. 그들이 제기한 나름대로의 체계화된 논문과 학설은 방대한 지식 축적을 바탕으로 하 는 놀랄만한 실력과 정교한 수준에 있었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비평한 논고가 없었으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모르는 사이에 각종 자료에 침투
되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자리 잡게 되었고, 한강과 아리수의 뜻으로 통 용되는 현실이 되었다. 이제 식민사관 학자들이 제기한 주장이 타당한 것인지에 대한 검증과 판단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한강은 수도 서울을 가로지르며 서해로 흘러가는 호수처럼 고요하 고 은하수처럼 푸른 물줄기이다. 강원도 태백산맥에서 발원하는 본류 의 길이는 514㎞이며, 압록강·두만강·낙동강에 이어 네 번째이다. 한강(漢江)이 흐르는 주변에는 유구한 역사 속에 백제의 한성(漢城)· 한산(漢山)·하남(河南), 고구려의 북한산군(北漢山郡), 신라의 한주(漢 州)·한양군(漢陽群), 고려의 한양부(漢陽府)·한강(漢江) 등이 형성되었 다. 조선 건국 후 천도를 통해 한양(漢陽), 한성(漢城), 경성(京城, 1876), 서울(SEOUL, 1913) 등으로 변모하고 있다. 한강의 명칭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특정 지역이나 나라별로 세분화 되고 다양해졌다. 가장 이른 기록인 한서 지리지에는 한반도의 중앙을 허리띠[帶]처럼 흐르는 물이라는 뜻에서 대수(帶水)라 하였다. 삼국(三國) 시대 고구려 광개토왕릉비에는 아리수(阿利水)로 기록되 었고, 백제는 욱리하(郁理河)를 비롯하여 한수(漢水)·하(河) 등 명칭이 있고, 신라는 상류 지역을 니하(泥河), 하류를 왕봉하(王逢河)라 하고, 한산하(漢山河)·북독(北瀆)이라고도 하였다. 한산은 한산주(漢山州)를 말하며, 경기도 광주 지역이다. 독(瀆)은 바다로 유입되는 물줄기를 뜻 하며, 북독은 신라의 북쪽에 있는 강물을 뜻한다. 고려(高麗) 시대에는 열수(洌水)라고도 불렸다. 관련 있는 지명으로 열양(洌陽)이 있는데, 서울을 달리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그 외에 한수 (漢水)·한강(漢江)·한강수(漢江水) 등이 있고, 한양(漢陽)·한성(漢城) 등 관련 지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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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 시대에는 서울의 강이라는 뜻으로 경강(京江)으로도 불렸 고, 외국 자료에는 서울강(Seoul River)으로 번역되어 전한다. 한강 북 쪽의 땅은 한양(漢陽)이라 하며, 조선 개국과 함께 수도로 정해져 정치· 경제·역사·문화 등 중심을 이루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강의 물결은 홍수가 많은 계절에는 역동하는 황토색이지만, 평소 에는 잔잔하여 푸른 호수와 같은 느낌을 주므로, 동편은 동호(東湖)·동 강으로 불리며 동호대교·강동 등의 지명을 남겼고, 서편은 서강(西江) 으로 불리며 서강대교·강서 등이 되었고, 수운 물류의 중심이었던 용산 일대는 비교적 남쪽이어서 남호(南湖)라 불리며 한남동·한강진·한남대 교 등을 남겼다. 강물과 일정한 거리에는 북한산(北漢山)·북한산성(北漢山城)·남한산 (南漢山)·남한산성(南漢山城)·한천(漢川) 등이 있고, 임진강과 합류하는 하류 인근에는 한탄강(漢灘江)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한강의 정확한 뜻을 모른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은 관련기관의 홈페이지에서도 다르지 않다. 한과 아리는 순우리말로 크 다는 뜻이므로, 한강과 아리수는 큰 강이라는 뜻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또 다른 고어인 한가람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만일 한강의 뜻이 큰 강이라면 근거가 되는 자료가 있을 것이다. 객관 적인 고찰 없이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조선의 역사와 고지명, 강 이름 등에 대한 연구는 개화기에 시작되었다. 그중에는 일군의 일본인 식민사관 학자들이 관 련되어 있는데, 한강의 명칭 연구에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초기에 조선사 연구를 진행한 일본 학자로는 시라토리 쿠라키치(白 鳥庫吉),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이 있고, 내국인으로는 대동여지도의
김정호, 조선상고사의 신채호, 이은상 등이 있다. 한강 관련 논점은 세 가지 측면에서 고려할 수 있다. 한강의 뜻, 고 어 아리수의 뜻, 한가람 연원 등이 그것이다. 본고는 식민사관 학자들을 포함하여 다양하게 제기된 논점에 대한 분석을 통해 한강의 뜻을 검증하고자 한다. 한강에 대하여 한(漢)이 내 포하는 다양한 의미 해석과 함께 아리수의 뜻을 규명함으로써 한강에 대한 위상 제고는 물론 민족적 자부심을 고양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어 : 한강(漢江) 시라토리 쿠라키치(白鳥庫吉) 이마니시 류(今 西龍) 김정호 대한문(大漢門) 엄리대수(奄利大水)
Ⅱ. 식민사관 학계의 선행연구 한강(漢江)은 ‘한(漢)의 강(江)’이라는 뜻이지만, ‘한(漢)’이 무엇을 뜻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한강의 뜻에 대해서는 인터넷이나 관련 기 관의 홈페이지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확산되고 있는데, 한(漢)은 한자 로 표현된 음차(音借)로서 ‘크다’는 뜻의 우리말이라든가, 고구려 고어 인 아리수는 ‘큰 강’의 뜻이라든가, 한강은 고어 ‘한가람’에서 유래했다 는 것 등이 그러하다. 그런데 문제는 제기된 내용에 대해 적확성 여부를 알지 못하는 상태 에서 사실인 것처럼 확정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한강이나 아리수가 ‘큰 강’이라는 관점은 어떠한 자료와 논거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 나타난 기록이나 주장에 대 한 검토를 통해 학술적 타당성 여부를 파악하게 된다. 근대 사학의 개화기에 동북아 고어와 조선 역사에 대하여 탁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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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을 남긴 일군의 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성취한 학술적 체계는 이 후 식민주의 사관으로 분류되는데, 그러한 내용은 학술적으로 비평하 거나 고증된 바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확정되어온 상황이다.
2.1 시라토리 쿠라키치(白鳥庫吉)의 「조선 고대 지명고」
고대 상고사 등 오래된 기록에 나오는 지명이나 국가명 등에 대한 해석이나 위치에 대한 관점은 실로 다양하다. 압록강(鴨綠江)의 경우 10여 개 이상의 서로 다른 명칭이 있고, 아리수의 뜻에 대해서도 몇 개 의 이견이 존재한다. 압록강이 아리수로 불렸다는 주장도 있고, 아리수 라 하여도 다른 강 이름에 사용되기도 하였고, 한강을 통칭하여 아리수 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압록강의 뜻에 대해서는 압록(鴨綠)이라는 이름 그 자체에 포함된 한자의 의미로 파악하는 경우도 있고, 압록이라는 글자가 다른 의미에 서 변형된 것이므로 한자로서의 뜻이 의미가 없다는 주장도 있으며, 경 우에 따라서는 여진이나 만주족 언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는 관점 도 있고, 고구려 언어라는 견해도 있다. 국내의 기록에서도 서로 다른 입장이 존재한다. 『대동지지(大東地 志)』에서는 음차(音借)한 것으로 생각하여‘큰 것[大]을 이르기를[曰] 한 (漢)’이라 한다고 기술하고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 覽)』에서는 글자 그대로 번역하여 압록을‘청둥오리 머리처럼 푸른 물’ 이란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나의 명칭에 대하여 서로 다른 입장이 오래전부터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동양사학자 또는 조선사학자로서 식민주의 사 학(植民主義 史學)이라 통칭되기도 하며, 조선 사학의 성립에 영향력을
행사한 일본인 관학자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그 최선봉으로서 일본과 한국을 비롯하여 아시아 전역에 걸쳐 다양한 고어와 외국어를 바탕으 로 능력을 발휘하며 역사·민속·신화·전설·언어·종교·고고학 등에 대한 광범위한 학술적 성과를 이룬 동경제대 교수 시라토리 쿠라키치(白鳥 庫吉, しらとり くらきち, 1865~1912)와 동경제대에서 본격적으로 조선역사를 전공하고 조선에 들어와 낙랑 점제현(秥蟬縣) 비 발견을 비 롯하여 백제사·신라사·조선사 등을 연구한 경도제대 교수 이마니시(今 西龍, いまにし りゅう、1875~1932) 등이 있는데, 가히 시대를 뛰어 넘는 연구능력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놀라운 것은 청일전쟁이 발생한 다음해인 1895년, 시라토리(白鳥 庫吉)는 동북아시아 역사에 대한 연구를 이미 진행하여 「조선 고대 지 명고(朝鮮古代地名考)」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압록강 엄리대수(鴨綠江 奄利大水)에 대하여도 논하였다. 그 당시에 이미 견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대단한 위치에 올라서 있었던 것이다.
鴨綠江 奄利大水 現今の鴨綠江も亦同樣の名稱にて稍々その訛れるものならむ. 鴨綠江
は支那の現音ヤルーなれども, 朝鮮にては之をアムルクと呼ぶ. 朝鮮に て鴨をアムと音するは漢音アブの轉じたるなるべし.『杜氏通典』及 び『唐書』には馬訾水の水淸潔にして鴨頭の如くなるを以て鴨綠江 と名づくと解せられたれども, 是れ畢竟鴨綠なる文字の上に戱れたる 解釋にして取るに足らず. 思ふにアムルクはアムール(黑龍江)の如く大 水の義なるべし. 大水大河をアムリ,アムクなどと稱へしことは朝鮮の 史上に正しく證據あり. 『北書』 卷九四高句麗傳に 〔…〕と見ゆ. 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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の奄利大水は『北書』の淹滯水に 同じ. 『論衡』『後漢書』には掩淲 に作る. 『魏略』には施掩水とあれども之は掩施水の轉倒ならむ. さ て『論衡』 『後漢書』の掩淲の掩 『北書』の 淹滯水の淹, 及び碑文 の奄利の奄は何れも同音にしてアムとひゞき鴨綠の鴨と同音なり. 按 ずるにアムリ, アムク, アムルク等は彼の地方の方言にて大水の義なれ ば, 其の文字は種々に書きたりしを, 特に鴨綠の二字を朝鮮北界の大
水に負はせしは, 水色にゆかれる文字を撰びしなるべし.【白鳥庫吉, 〈鴨綠江 奄利大水〉,「朝鮮古代地名考」,『史學雜誌』 第六編第一 ○·一一號, 第七編第一號,東京帝國大學史學會,明治二十八年十月 二十 九年一月(1895年). p.37~68.】
동북아 만주지역 일대에는 아리와 유사한 명칭의 강들이 존재하는 데, 글자는 다르지만 모두 아리수와 유사한 이름이라는 것이다. 광개토 왕릉비에서 주몽이 엄리대수(奄利 大水)를 건너는 구절을 통해 엄리(奄 利)와 유사한 북방의 지명은 큰물이라는 뜻의 대수(大水)라는 개념으로 해석하고 있다. 당시에 사용되던 언어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똑같은 논 리를 아리수(阿利水)에 적용하면 아리는 큰물이 아니라 그냥 물이 되는 문제가 있다. 동일한 명칭이 그냥 물과 큰물로 동시에 같이 사용되는 것 은 잘못이다. 나아가 아리의 뜻을 크다고 해석하면 아리수는 큰 강이라 는 뜻이 되고, 한강도 따라서 큰 강이 된다. 이는 또 다른 모순을 포함 하게 되는데, 문제는 이러한 논지들이 다른 형태로 전달되며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2.2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백제도읍 한성고」 이마니시(今西龍)는 시라토리(白鳥庫吉)의 견해를 정설이라고 뒷받 침하고 있다. 정설(定說)이란 학술적으로 이미 충분한 결론에 도달하여 확정(確定)되었거나 인정(認定)된 설(說)이라는 뜻인데, 시라토리의 설 을 확정적으로 확인해준 것이다.
百濟國都漢山考 阿利水は大水の義なり. 白鳥博士の朝鮮古代地名考の中, 鴨綠江奄利 大水の條(史學雜誌第六編 第十一號)に定說あり. こゝに阿利水とある は漢水卽ち帶水ならざるべからず. 帶水は漢書地理志によれば含資に 出づ. 含資は魏略によれば, 王莽の時辰韓の廉斯鏀が樂浪に降らんと して, 先づ到達せる地なるを以て, 漢水の上流ならざるべからず. 帶水 は漢水なり. 帶水は泰水なり大水なり. 大水を漢水といふは大城を漢 山といふが如し. そは兎に角に廣開土王代に當る阿莘王の時の漢城を 北漢城とせば, 阿利水を渡るの語終に解すべからず. 此水は敵地に臨 むか若しくは敵地にありて敵城に近からざるべからず.【今西龍遺著, 「百濟國都漢山考」(『史學雜誌』第二十三編第一號,明治四十五年一 月( 1912 年) 發表) , 『百濟史硏究』, 東京: 圖書刊行會, 昭和 45(1970).p.269~282】
시라토리(白鳥庫吉)가 아리수를 대수(大水)라 하였으므로 논리적으 로 동일한 체계를 만들게 된다. 지리적으로 대수(帶水)는 한수(漢水)의 옛 이름이고, 대수(帶水)는 ‘크다’는 뜻의 태수(泰水)이며 또 대수(大水)가 된 다는 생각이다. 나아가 대수(大水)가 한수(漢水)와 같으므로 대성(大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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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漢山)이라는 뜻이 되는 체계이다. 조선에에 사용되는 음차의 개념 을 활용하여 유사한 발음을 가진 대(帶), 태(泰) 대(大)를 같은 발음으로 보고, 다시 대(大)와 한(漢)을 같은 뜻으로 본 것이다. 그러니까 조선 고 어 연구에서 유사한 발음의 어휘를 같은 것이라 생각하는 관점이 이러 한 상황에서 생겨난 것이며 일본인이라는 외국인의 관점에서 이루어진 발상인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사 관련 학자들은 이 논리를 의심 없이 그대로 사용하게 된다. 그러한 결과가 이어지면서 아리수와 한강을 ‘큰 물’이라는 뜻으 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식민주의 사관을 성립시킨 관학자들의 논리가 지금까지 이어지며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이에 대해 지금까지 특별한 반박이나 크게 달라진 대응 논리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식민사관의 선구적인 학자들이 연구한 내용이 방대하 고 쌓아올린 학문적 역량이 너무나 깊어서 감히 대응할 논리를 만들지 못하였을 수도 있다. 설령 반박한다고 하더라도 한강의 뜻에 대한 확실 한 대안 없이 하는 비평 자체가 큰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고민할 것은 그러한 논리의 결론으로써 길다거나 크다는 뜻을 아리수나 한강에 대입해보아야 한다. 제기된 주장들은 압록강이 나 아리수의 뜻 그 자체만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그 뜻을 주변 관련 내 용에 대입해 보면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Ⅲ. 국내의 기록과 연구
내국인 학자에 의한 기록과 고어 연구가 있었다. 초기의 기록은 『대 동지지』부터 시작되어, 1930년대의 신채호, 1950년대의 이은상 등으 로 이어지며 진행되어져 왔다. 대동지지의 기록은 특수한 경우에 적용
되는 상황을 일반화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3.3 김정호 『대동지지(大東地志)』 한강의 뜻에 대한 내용으로 고산자(古山子) 김정호의 『대동지지』 <경도(京都)·경기도(京畿道)>편에 나타나고 있다.1)
○ 漢江 東國方言稱 大曰漢 稱言大江也 距城南十里 百濟時 稱漢山河 會 江原十四邑 忠淸十二邑 京畿十六邑之水 環京都西流 入于海
○ 한강 우리나라 방언에 크다를 한이라고 하니 큰강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뜻이다. 도성과 남쪽으로 10리 떨어져 있다. 강원도 10읍, 충청도 12읍, 경기 16읍의 물과 만나서 경도를 두르고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
어간다.2)
동국방언인 우리말에서 큰 것을 한(漢)이라 하니, 한강(漢江)은 대강 (大江)으로 큰 강의 뜻이라는 것이다. ‘한’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으므 로 크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압록강·두만강·낙동강 다음 순으로 네 번째 길이에 해당하는 한강을 크다고 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 또한 지류에 해당하는 남한강·북한강까지 크다 하고, 소지류인 한천 (漢川)까지 ‘큰 내’라는 뜻이 되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큰 강이라면
2) 이상태 역, 감정호, 『대동지지(大東地志)』
1) 『대동지지(大東地志)』는 고종 1년(1864)에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편찬한 지리지이 다.『동국여지승람』의 오류를 정정하고 보완하여 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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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긴 압록강이나 중국의 장강이 되어야 한다. 더구나 유사한 개념으로서 한양(漢陽)은 ‘한강의 북쪽에 있는 땅’이 라는 한문 불변의 뜻이 있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한’을 우리말 음차라 고 하여 대양(大陽) 즉, 큰 땅이라고 하면 엉뚱한 해석이 된다. 그러한 측면에서 지금까지 제시된 주장들은 일반화할 수 없는 문제 점을 갖고 있다. 즉 압록강 엄리대수에서 엄리(奄利)를 대수(大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는 있겠지만, 엄리라는 의미가 아리수와 한강에 적용 될 경우 압록강·두만강·낙동강 다음인 한강을 크다고 하면, 모든 강이 크다는 뜻이 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나아가 지류에 해당하는 남한강·북한강은 물론이고, 소지류인 한천 (漢川)까지 ‘큰 내’라는 뜻이 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한문 규칙이 있는 『설문해자』에 의하면 큰 강을 뜻하는 대강[大江 東去]은 압록강이나 두 만강에는 해당되지 않으며, 오직 장강에만 적용된다. 특히 한(漢)이라는 글자는 한수(漢水)나 한강(漢江)에 사용되는 것은 물론 같은 개념으로서의 한양(漢陽)에도 적용되어, 명백하게 ‘한(漢)강 의 북쪽에 있는 땅[陽]’이라는 한문의 기본이며 불변의 뜻이 있는데, 그 것을 무시하고 ‘한’을 우리말 음차라 하여 대양(大陽) 즉, 큰 땅이라는 뜻이라고 하면 엉뚱한 해석이 되고 만다. 한강(漢江), 한수(漢水)의 본질 적인 의미를 바탕으로 해석하여야 하는 것이다. 나아가 역사적으로 존재하던 한주(漢州), 한양군(漢陽郡), 한양부( 漢陽府), 한양(漢陽), 한성(漢城), 북한산, 북한산성), 남한산, 남한산 성, 한남, 한강진, 한남동, 한남대교 등도 모두 크다는 뜻으로 해석해 야 한다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 된다. 한(漢)이나 아리를 크다는 뜻으로 만 해석한 것은 자명한 잘못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한(漢)이라는 글자
에는 크다는 뜻 이전에 한문의 본질적인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한강 이전 형태로서의 아리를 모 르기 때문에 그러한 명칭을 사용한 아리수도 뜻을 모르고 있다. 고어로 서의 아리수는 무슨 뜻일까? 강 이름을 포함한 지역명은 고대 상고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2.4 신채호 『조선상고사』 아리수에 대한 초기의 연구는 단재 신채호의 논지에서 나타나고 있 다. 『조선 상고사』에 견해가 있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우리 고어에 오리를 ‘아리’라 하고 江을 ‘라’라 한 바, 鴨綠江·大同江·豆滿 江·漢江·洛東江과 吉林省의 松花江, 奉天省의 遼河, 永平府의 灤河 등은 吏讀文字로 쓴 古名을 찾으면 阿禮江·阿利水·郁利河·烏列河·列水·武列 河·鴨子河라 하였나니, 阿禮·阿利·烏列·武列의 ‘列’은 모두 ‘아리’의 音 譯이며, 鴨子는 ‘아리’의 意譯이요, 江·河·水는 모두 ‘라’의 意譯이니, 위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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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江의 江濱에서 발생한 고로 『三國志』에도 “句麗作國 依大水而居”라 했다.3)
상고사 측면에서 ‘아리’는 오리의 고어이고, 강(江)·하(河)·수(水)는 고어 ‘라’를 의역한 것이라 하였다. 또한 북방에 있는 강 이름 표기는 서 로 다르지만, 발음은 모두 아리 형태로 하였으며, 이것은 오리를 뜻하 는 압자(鴨子)의 의역으로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압록강을 비롯한 북방의 강은 아리수와 유사한 형태로 발음 되며, 이는 오리수의 음역이고, 한자로는 압자수(鴨子水)로 의역되므로 우리말로는 오리물 또는 오리강이라는 뜻이 된다. 이와 같이 북방의 강이 아리수로 발음된 것을 알아낸 것은 중요하 다. 왜냐하면 한강 유역에도 위례, 욱리 등 아리와 비슷한 발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학술적 성과에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다. 아 리수의 뜻과는 별도로 강의 위치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第一步에 廣開土境好太王碑에 鴨綠江을 ‘阿利水’라 함은 압록의 名이 ‘아 리’, 곧, ‘阿利’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 第二步에 『遼史』의 遼 興宗이 ‘ 鴨子河’를 混同江이라 改名한 것을 보고 ‘鴨子’가 곧 ‘아리’인 즉, 混同江- 즉 松花江-이 古代의 北鴨綠江인가의 假說을 얻었고 …4)
3)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이만열 주석, 『주석 조선상고사』, 형설출판사, 1983. 7. 25. 총론은 1924년 완성, 『조선사 연구초』(1930)를 발간하고, 1931년부터 조선일보에 연재. 내용에 불완전 한 측면이 있어 비판과 갈채를 동시에 받았다. 4) 신채호, 위의 책, 67쪽.
광개토왕릉비에 있는 아리수(阿利水)라는 구절을 예로 들고 있는데, 아리수를 압록강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국사편찬위원회의 판단은 이 와 다르다.
국사편찬위원회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以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 殘不服義,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 阿利水, 遣刾迫城. ▨▨侵穴, ▨便圍城, 而殘主困逼, 獻▨男女生口一千 人, 細布千匹, 跪王自誓, 從今以後, 永爲奴客. [영락] 6년 병신(396)에 왕이 몸소 … 군사를 이끌고 [백]잔국([百]殘國)을 토벌하였다. [백]잔이 의(義)에 복종하지 않고 감히 [도성에서] 나와 싸웠 다. 왕이 위엄을 갖추고 크게 화를 내 아리수(阿利水)를 건너 군대를 보내 [도]성을 압박하였다. [고구려의 군사가] … 중심을 공격하고, … 나누어 성 을 포위하니, [백]잔의 군주는 곤란하고 급박해졌다. 남녀 생구(生口) 1천 명·세포(細布) 1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무릎 꿇고 스스로 이제부터 영원 히 [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신채호의 인식과 달리, 아리수는 압록강이 아니 라 한강(漢江)이라 한다. 아리수로 발음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장소가 한 강이다. 아마도 시차가 있었기 때문에 잘못 이해된 것으로 보인다. 광 개토왕릉비에 나오는 아리수는 압록강(鴨綠江)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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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이은상 『노산문선(鷺山文選)』 이은상은 아리수를 긴 강이라는 뜻의 장강(長江)으로 이해하고 있다.5) 오리의 고어가 아리이고 큰 강이 강빈(江濱)에서 발생하였다는 신채호 의 주장을 이어받은 결과인데, 길다는 의미로 이해하였다.
나는 鴨綠江이 長江이란 뜻이라 한 丹齋의 말을 諾다 한다. 朝鮮 古語에 길단 말을 「아리」라 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이 「아리」란 것을 吏頭로 적을 때에 그 音을 取하여 阿利水, 郁里河, 烏列白, 句麗河 등으로 적힌 것 과 鴨子河, 鴨綠江으로 쓰인 것이 畢竟은 同一한 「아리」임에 틀림없을 것을 말함이 어느 程度까지 可한 것을 안다. 勿論 이 「아리」란 이름도 여러 곳에 분리되었던 것이니, 松花江, 遼河, 灤河, 漢江, 洛東江 等과 함 께 다 아울러 「긴강」이란 뜻으로 불린 것이다. 또한 鴨綠江이란 이름만 도 李相國集의 「熊心山下 鴨綠水」와 遼史의 「鴨子河」를 據하여 松 花江을 鴨綠江이라 하였던 것과 三國遺事의 「遼河一名鴨綠」이란 것을
據하여, 遼河를 鴨綠江이라고 부르든 것임도 알 것이니 … 6)
중요한 것은 아리수가 압록강이 아니라 한강(漢江)이라는 점이다. 이은상은 아리수를 가장 긴 강인 압록강으로 파악했기 때문에 ‘아리’를 길다는 뜻으로 오해하여 아리수를 긴 강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한강 을 긴 강이라 하는 것은 자명하게 틀렸다.
5) 이은상(李殷相, 1903~1982) 시조 시인. 호는 노산(鷺山). 6) 李殷相, 『鷺山文選』, 永昌書館, 1958. 42~43쪽.
2.6 조용호 『아리랑 원형연구』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아리를 해독하고 한강과 연결하였다. 원시 언어 연구를 통해 본질적 언어로서의 아리는 고구려어 푸른이라는 뜻 을 갖는 형용사로 해독하였다. 아리랑의 원형은 ‘아리 이랑’이며, 만경 창파 ‘푸른 물결’이라는 뜻이 된다고 하였다.
아리랑 고개는 어디에 있을까? 한민족이라면 누구나 알고 싶어 하지만 고 산준령 산길 넘어가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아리랑 노래 원형이 고려시 대 문학에 나타나는 원곡(元曲) 구조인 것에 주목하면, 연철표기 형태의 아리랑 고개는 분철표기로 ‘아리랑 곡애’가 된다. 여기서 고개의 원형이 ‘곡애’가 되면 ‘아리랑’이라는 표기에 변화가 일어나 ‘아리 이랑 곡애’로 바뀐다. ‘이랑’을 ‘곡애’라는 한자로 토를 달아준 까닭이 다. 또한 <구 아리랑>에 “아리랑 창파만경”이라는 가사가 있는데, ‘아리’를 한자로 표현하면 창파(滄波)이고, ‘푸른’이라는 뜻이 된다. ‘이랑’은 한자로 ‘곡애(谷涯)’가 되고, 우리말로는 ‘물결’이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아리랑 고개’의 원형인 ‘아리 이랑 곡애’는 ‘푸른 물결’이라는 뜻이 되며, 이런 이유 로 ‘푸른 물결’을 뜻하는 ‘아리랑 고개’는 처음부터 땅 위에 존재할 수가 없 었다.7)
한(漢)에는 몇 가지 뜻이 있지만 우리말로 크다는 뜻이 아니라, 한자 로서 은하수를 뜻하는 은한(銀漢)의 본질적 의미가 있다고 풀이한다. 즉 한(漢)이란 은하수가 푸른 하늘에 올려져 있는 한국의 정서적 상황을 나
7) 조용호, 『아리랑 원형연구』, 학고방, 2011. 314~3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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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내며 ‘푸른’이라는 형용사로서의 뜻을 가진다고 하였다. 따라서 아리 수와 한강은 모두 ‘푸른 물’이라는 뜻이 된다.
Ⅳ. 한(漢)의 본질적 의미와 대한문(大漢門) 한강을 지칭하는 한(漢)이라는 글자는 몇 가지 다른 형태로 나타난 다. 한강의 뜻은 순수 우리말 고어 한가람에서 유래했다거나, 경우에 따 라서는 한강 발원지 평창 우통수(于筒水) 기록에서 한강을 한수(漢水)가 아닌 한수(韓水)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고, 유사한 이름인 한탄강(漢灘 江)이나 한산하(漢山河) 등에 사용되기도 한다. 한강 관련 지명으로 표현되는 한(漢)은 백제의 한성·한산, 고구려의 북한산군, 통일신라의 한주(漢州)·한산주(漢山州)·한양군(漢陽郡)를 비 롯하여, 고려시대 한강(漢江)·한양부(漢陽府), 조선 개국 후 1392년 한 양(漢陽)으로 도읍을 옮긴다든가, 한양부를 한성부로 변경하거나, 지도 에 나오는 남한산(南漢山), 청한산(靑漢山) 등 다양하다.
4.1 한가람의 문헌상 부존재 한강의 뜻과 관련하여, 우리말 고어 한가람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 도 고증 없이 널리 유포되어 사실인 것 같은 착각을 주고 있다.
서울특별시 한강공원
한강의 이름은 본래 우리말의 큰 물줄기를 의미하는 ‘한가람’에서 유래되 었다고 한다. ‘한’은 ‘크다, 넓다, 길다, 가득하다’의 의미이며, ‘가람’은 ‘크 고 넓은 강’이라는 강의 옛이름이다. 그러므로 한강은 크고 넓으며 가득한 물이 흘러가는 강이라는 뜻이다.
환경부 한강유역환경청
한강(漢江)은 본래 우리말의 “한가람”에서 비롯된 말로 “한”은 “크다·넓 다·길다”는 의미이며, “가람”은 강의 고어(古語)로 크고 넓은 강이란 뜻으 로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경강(京江)이라고도 불 렀으며 외국의 문헌에는 “서울강(Seoul River)”이라는 기록도 있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한강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우리말에서 ‘큰 물줄기’를 의미하는 ‘한가람’에 서 비롯하였다. ‘한’이란, 큰, 정확한, 한창인, 같은을 뜻하는 접두사이며, 가람은 강의 옛 말이다. 즉 ‘큰 강’이라는 뜻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강의 명칭에 ‘漢’이라는 글자를 쓴 것은 중국 문화를 도입한 이후의 일이 다. ‘아리’, 즉 ‘알’은 고대에 크다거나 신성하다는 의미로 쓰였으며, ‘한’도 이와 비슷한 뜻이다.
한(漢)은 ‘크다, 넓다, 길다’는 뜻으로 확장되고, 가람은 강의 고어이 므로 한가람은 ‘크고 넓고 긴 강’을 뜻한다고 해석되고 있다. 주요 홈페 이지나 인터넷 등에 있어서 공인된 내용처럼 소개되고 있다. 경우에 따 라서는 아리는 ‘알’이라는 뜻이며 신성한 것이라는 주장까지 덧붙여진 다. 관련 내용은 어떠한 학술적 타당성을 가질까? 우선 중세어로 표기할 경우 한가람은 틀린 표기이며, 정확한 표현은 한ᄀᆞᄅᆞᆷ 형태가 된다. 그런데 고문헌 용례를 보면 한문이 아니라 대부분 한글로 표기되어 나온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자료에 있는 까닭이다.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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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한ᄀᆞᄅᆞᆷ이라는 하나의 단어 형태가 아니라 ‘한’과 ‘가람’이 따로 분리 되어 사용된다.
한 비 사ᄋᆞ리로ᄃᆡ(大雨三日)8) 한아비 者大父也 <頤齊25:34> 한믈 半句ᄋᆞᆯ 한믈 어더 이쇼ᄆᆞᆯ 아도다 <字會下35> (큰 믈) 한비 한비ᄅᆞᆯ ᄂᆞ리와 <月一39> (큰 비, 장마) 한게 한게 이셔(在衆) <法화六61> (大衆)
‘한’이 한자로서 사용되고 있는지 여부는 불명하지만 한글로서의 ‘한’은 크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많다는 개념 으로도 이해된다. 그 외에 유사한 의미도 가능하다. 또한 강의 고어에 대한 사용례도 문헌에 나타난다. 가장 이른 기록 은 세종 29년(1447) 간행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이다.
ᄀᆞᄅᆞ매 ᄇᆡ 업거늘(河無舟矣) <龍歌20> ᄀᆞᄅᆞ미며 바ᄅᆞ리며 <石十九13> ᄀᆞᄅᆞᆷ 밧 기오(江外) <杜초七17> ᄀᆞᄅᆞᆷ 강(江) <字會上4> ᄀᆞᄅᆞᆷ 하(河) <石千3> ᄀᆞᄅᆞᆷ 호(湖) <字會上4> 강(江)은 중세어로 ᄀᆞᄅᆞᆷ, ᄀᆞᄅᆞ매, ᄀᆞᄅᆞᆯ 형태로 있지만 경우에 따라 하
8) <龍歌67>조선 세종 27년(1445)에 정인지, 안지, 권제 등이 지어 세종 29년(1447)에 간행한 악장 의 하나. 훈민정음으로 쓴 최초의 작품, 사적(事跡)의 기술에 앞서 우리말 노래를 먼저 싣고 그에 대한 한역시를 뒤에 붙였다.
(河), 호(湖) 등에도 쓰이고 있어 구별이 애매한 점도 있다. 여기에도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첫째, ᄀᆞᄅᆞᆷ의 사용례가 시기적으로 용비어천가가 만들어졌을 때의 중세어(1447) 이상으로 올라가기 어렵고, 한강이 한ᄀᆞᄅᆞᆷ에서 유래하는 지의 여부를 떠나 한ᄀᆞᄅᆞᆷ 형태나 명칭이 문헌에 없고, 그러한 단어도 사 용된 적이 없다. 더구나 크다는 뜻의 한(漢)이라는 글자로 표기한 문헌 이 거의 안 보이고 있다. 즉 한ᄀᆞᄅᆞᆷ이라는 하나의 단어 형태로 쓰이면서 한강을 지칭하는 사용례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한강이 한ᄀᆞᄅᆞᆷ에서 유래한다는 주장은 학술적 근거가 없는 것이며, 단지 ‘한’에 ‘큰’이라는 뜻이 있고, ᄀᆞᄅᆞᆷ은 강의 고어라는 점에 착안하여 만들어낸 조어일 가능성을 부정하기 어렵다. 둘째, 한강(漢江)이라는 단어는 이미 고려시대 문헌에 나오면서 출 현시기가 한ᄀᆞᄅᆞᆷ보다 앞서고 있다.
고려시대 漢江(한강) 이규보(李奎報)9), 한시 「한강(漢江)」 이곡(李穀)10), 扁舟一扣漢江枻 「송한양정참군(送漢陽鄭參軍)」
조선시대 漢江(한강)
9) 이규보(李奎報, 1168~1241). 고려 중기의 문신 문인. 저서에 『동국이상국집』 『백운소설』 등 이 있다.
10) 이곡(李穀, 1298~1351) 고려 말기의 학자.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 충숙왕 복위 2년 (1333)에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한 후, 원제(元帝)에게 건의하여 고려에서의 처녀 징발을 중
지시켰다. 충렬ㆍ충선ㆍ충숙왕의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죽부인을 의인화한 가전체 작품 < 죽부인전>이 『동문선』에 전한다. 저서에 『가정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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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동(洪逸童), 「任子深邀我遊漢江招剛中用洪武正韻」 서거정, 華山揷立玉芙蓉 漢江染出金葡萄 「목멱상화」 정도전(鄭道傳), 알○ 漢江水한강슈여 뒤흔 삼각산이여「新都歌」 변계량(卞季良), 華山南 漢水北 朝鮮勝地(千年勝地)「華山別曲」 김상헌(金尙憲),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정철(鄭澈), 이믈이 우러녜어 한강여흘 되다ᄒᆞ면
한강 관련 기록은 고려시대에 있는데 반해, 그 고어라고 주장하는 ᄀᆞᄅᆞᆷ 형태는 빨라야 조선시대에 나타난다. 한ᄀᆞᄅᆞᆷ이라는 단어는 고려 시대 기록에 없는 것은 물론 신채호가 주장하는 고어 ‘라’에는 더욱 못 미친다. 그렇다면 한강의 고어가 한ᄀᆞᄅᆞᆷ이라는 주장은 시차적으로 잘 못된 것이 된다. 한강이 한ᄀᆞᄅᆞᆷ에서 왔다는 주장은 학술적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한강의 고어로 생각하는 한ᄀᆞᄅᆞᆷ 형태는 각종 문헌은 물론이고 어떤 기록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각각 독립적인 의미로서의 ‘한’과 ‘ᄀᆞᄅᆞᆷ’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와는 달리 한자로서 한(漢)이 뜻하는 바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 석이 가능한 여지가 있다. 즉 1)중국의 한수 또는 한강(漢水 即漢江. 長 江最大的支流,源出陕西,流至湖北武漢入長江)이라는 뜻이 있고, 2)중 국의 다수를 차지하는 종족 개념으로서의 한족(漢族)이 있다. 또한 3)은 하수를 뜻하는 은한(銀漢), 천하(天河), 은하(銀河) 등으로 사용되며, 4) 한수가 지나는 도시 한중(漢中, 地名,在陕西,因漢水而得名)을 나타내 기도 한다. 추가적으로 5)성년 남자(成年男人, 老漢, 好漢)를 표현하거 나, 6)중국 고대의 한나라(漢 朝代名, 公元前 206~公元25年 劉邦所建
建都長安, 史稱西漢或前漢;公元25~220年, 劉秀重建, 建都洛陽, 史稱 東漢或後漢) 등이 있다. 따라서 본질적 개념으로서의 한(漢)에 어떠한 뜻이 있는지를 파악하 고 적용해야 할 것이다.
4.2 대한문(大漢門)에 나타나는 한국인의 인식
한(漢)이라는 글자에 대하여 이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어떤 인식 을 가지고 있었을까? 한(漢)이라는 글자와 결합되는 지명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백 제가 강변에 정착하면서 만들어진 한성(漢城)·한산(漢山)·하남(河南) 위례성을 비롯하여, 이후에 강 유역 을 차지한 고구려의 북한산군(北漢 山群), 나제동맹으로 고구려를 몰아내고 강 유역을 차지한 후 신라가 설 치한 한주(漢州)·한산주(漢山州)·한양군(漢陽郡)를 비롯하여, 고려시대 한강(漢江)·한양부(漢陽府), 조선 개국 후 1392년 한양(漢陽)으로 도읍 을 옮기고, 한양부를 한성부로 변경하고, 지며으로서의 남한산(南漢 山)·북한산(北漢山)·청한산(靑漢山) 등 다양하다. 한편 김정호는 『대동지지』에서 대왈한[漢江 東國方言稱 大曰漢 稱言 大江也]라고 하였다. 우리말에서 큰 것(大)을 말하기를(曰) 한(漢)이라 하니, 한강(漢江)은 대강(大江)으로 큰 강의 뜻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 식은 후에 시라토리(白鳥庫吉)이나 이마니시(今西龍)에 이어져 지금까 지 한강은 큰 강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한(漢)이 대(大)라는 인식은
대한문(大漢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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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맞는 것일까? 그런데 조선시대 궁궐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大漢門)의 경우는 한( 漢)이 뜻하는 것과 식민사관 학자 등이 주장하는 내용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즉 대한문이라는 글자만 보아도 대(大)가 한(漢)이 되거나 한( 漢)이 대(大)가 될 수 없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대한문은 대대문이(大大 門)이나 한한문(漢漢門)이 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대한문(大漢門) 한대문(漢大門)
대대문(大大門) 한한문(漢漢門)
일반 집도 아닌 임금이 사는 궁궐의 이름을 서로 다른 글자를 연속 하여 사용하며 아무렇게나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를 통해 모든 경 우에 대(大)가 한(漢)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 한(漢)의 의미를 알기 위해 서 대한문이라는 명칭이 성립되는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자. 덕수궁은 조선의 궁궐로서 경운궁으로 불리다가,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머물게 되면서 장수를 기원하는 뜻의 덕수 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11) 원래는 성종 임금의 형 월산대군 집이었는데, 임진왜란을 겪으며 피 신 갔던 선조가 돌아오고 궁궐이 모두 불에 타는 바람에 임시 거처로 사 용하게 되었고, 선조 26년(1593)부터 궁궐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나 중에 근처의 집들도 포함되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위 3년 (1611)에 경운궁이라 고쳐 부르고 1615년 창경궁으로 옮길 때까지 왕
11) 덕수궁(德壽宮, Deoksugung palace),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 참조.
궁으로 사용하였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1623년에 물러나면서 인조는 즉조당과 석 어당만을 남기고 나머지 건물들을 옛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없애버렸 다. 그 뒤로 고종이 러시아 공관에 머물다 옮겨오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 용되었는데, 그 때부터 비로소 궁궐다운 건물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에 있었던 대화재로 대부분 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지고 서 양식 석조전 등이 지어지게 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일어난 변화 중의 하나는 정문이 바뀐 것이다. 원래 정문은 인화문이었는데, 새로 지으면 서 1906년 동쪽에 있던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大 漢門)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자 이름을 바꾼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만들어져 유행하게 되었다. 우선 안(安)자를 갓 쓴 여자라는 의미로 이해하여, 일제 밀정 역할을 하던 특정인이 서양 모자를 쓰고 궁궐을 제집 드나들 듯 하는 모습이 재수 없어서 바 꾸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또한 안(安)자에 대하여 신분 제도적 입장에서 남녀평등을 원하지 않아서 바꾸었다는 생 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였다. “대안문은 대한문으로 개칭하였다. 이 문은 경운궁의 정문이다 이때 전비서승 유 시만이란 사람은 겸암 유운룡의 사손으로, 그는 유운룡의 비결을 얻어 300년이나 된 묘소를 이장한다고 하면서 또 허위첨서를 조작하여 남모
대한문(大漢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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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게 옛 광내에다 묻어놓았다가 그것을 파내어 은밀히 고종에게 바치 었다. 그 첨서를 대충 말한다면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고치고, 안동의 신 양면으로 천도를 하면 국운이 연장된다고 하였다. 고증은 이 말에 현혹 되어 꿈에 그런 징조가 있었다고 말하고, 즉시 그 대안문의 이름을 바 꾸고 또 많은 금전을 유시만에게 주어 행궁을 지으라고 하였다. 이에 유 시만은 그 돈을 자루에 담아 가지고 와 졸부가 되었으나 고종은 그것을 불문에 부쳤다”(『매천야록』제5권, 1906,「대안문의 개칭」). 또한 일본인이 대한문을 출입할 때에 놈 한(漢)이란 글자를 인용하 여, 고종을 큰 도둑놈 대한(大漢)으로 불렀다는 설도 있었다. 그리고 조선사를 전공한 경성제대 교수 오다 쇼고(小田省悟)는 『덕 수궁사(德壽宮史)』(1938)에서 중국 한(漢)나라를 숭상하는 사대주의를 뜻한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중국에서 탈피하고자 대한제국을 선포했는 데(1897. 10. 12), 중국을 의식해서 한(漢)을 사용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와 같이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개칭한 이유에 대해서는 갖가지 억 측이 있었다. 그러던 중 2007년 문화재청이 궁궐의 현판을 조사하면서, 대한문 수리과정에서 이름을 대한문으로 고치는 과정을 기록한 『경운 궁중건도감의괘』 중 <대한문 상량문>을 찾게 되었다. 그중에는 한(漢) 의 뜻과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大漢門上樑文 漢都奠萬億之基 門號特揭 … 就 中和法殿乃立大漢正門備 皐門應門之規塗勤丹頀取 霄漢雲漢之義德合皥蒼紅 … 한양 도읍을 만억(萬億)의 터에 정하였으니, 문호를 높이 달았다… 마침내
법전(法殿)인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셔서 이에 대한정문(大漢正門)을 세우셨다 … 고문(皐門)과 응문(應門)의 규모를 갖추어 부지런히 단청하 고, 소한(霄漢, 하늘)과 운한(雲漢, 은하수)의 뜻을 취하니 덕(德)이 호창( 皥蒼, 하늘)에 합한다.
대한문 상량문
상량문을 보면 그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한양(漢陽)이 창대해진 다는 뜻으로 대한(大漢)이라는 이름을 쓴 것이다. 이로써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생각하던 한(漢)의 의미를 알게 된다. 한(漢)은 우리말 음차로서 의 크다는 한(漢)이 아니다. 한(漢)은 땅 위를 흐르는 한강과 북쪽에 있는 땅 한양을 뜻하고, 하늘의 은한(銀漢), 즉 은하수를 뜻하며, 그것이 다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흐르는 푸른 강물의 색깔을 이르는 말이 되고 있다. 푸른 물 한수(漢水), 한강(漢江)이 흐르는 강 북쪽의 땅 한양이 영원 한 수도가 되어 창대해지기를 바라는 민족적 소망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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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결론 유라시아 대륙의 극동에 위치한 한반도의 중앙부를 가로지르는 물줄 기는 유사 이래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어 왔다. 한서 지리지에 기록된 대 수(帶水)를 비롯하여, 삼국시대 백제와 관련된 한(漢)·한수(漢水)·하(河)· 수(水)·한수(寒水)·욱리하(郁理河), 고구려의 아리수(阿利水), 신라의 한산 하(漢山河)·북독(北瀆), 고려의 열수(洌水)·한강(漢江)·한강수(漢江水), 조 선의 경강(京江) 등 다양하게 불리다가 점차 한강(漢江)으로 정착되며 통 일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강(漢江)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정치·경제·사회·역사·문화·정신 세계·콘텐츠 등 다방면에 걸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언제 부터인지 강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게 되었다. 그런데 근대의 개화기에 이르러 조선과 주변 북방지역 연구에 지식 을 축적한 일군의 식민사관 학자들이 한강과 아리수 등을 포함하는 고 지명에 대한 해독을 시도하였다. 시라토리 쿠라키치(白鳥庫吉, 1895) 동경제대 교수는 광개토왕릉 비에 나오는 엄리대수(奄利 大水)를 힌트로 하여 엄리(奄利)와 유사한 북방계 발음이 대수(大水)를 뜻한다고 생각하여 논리 체계를 세웠다. 그러나 문제는 동일한 논리를 아리수(阿利水)에 적용하면 아리(阿利) 수(水)가 되어 아리가 큰물이 아닌 그냥 물이 되고 만다. 똑같은 명칭이 물과 큰물 두 개로 되어 서로 달라지는 모순이 생긴다. 이마니시 류(今西龍, 1912) 교토제대 교수는 시라토리의 견해를 정 설(定說)이라고 뒷받침하였다. 하나의 설을 확정시켜준 것이다. 시라토 리가 아리수를 대수(大水)라 하였으므로 논리적으로 동일한 체계를 성 립시켰다. 즉 지리적으로 대수(帶水)는 한수(漢水)의 옛 이름이고, 대수
(帶水)는 유사 발음으로 크다는 뜻의 태수(泰水)이며 또 대수(大水)와 같 다고 하였다. 조선 고어 연구에서 유사한 발음의 어휘를 같은 뜻으로 판 단하는 논점이 이러한 상황에서 생겨난 것이며 일본인이라는 외국인의 관점에서 이루어진 발상인 것을 알 수 있다. 나아가 김정호의 『대동지지』 기록에서 대수(大水)가 한수(漢水)와 같으므로 대성(大城)은 한산(漢山)이라는 논리 체계를 세우게 되지만, 시라토리가 제기한 견해와 동일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관련 학자들은 이 논리를 의심 없이 그대로 사용하게 되고, 그러한 결과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즉 주요 기관 의 홈페이지에서 그렇게 인용하고 있다. 아리수와 한강이 큰 강의 뜻이 라는 것을 때로는 명시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식민사관 학자들이 구축 한 해석과 논리를 검증 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결과에 대해 지금까지 특별한 비평이나 대응 논리는 없었다. 식민사관 학자들이 만든 것을 몰랐을 수 있고, 연구한 내용이 방대하고 쌓아올린 학문적 역량이 너무나 깊어서 감히 대응할 논리를 만들지 못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설령 반박한다 하더라도 한강의 뜻에 대한 대안 이 없다면 비평 자체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라토리(白鳥庫吉), 이마니시(今西龍), 김정호 등의 관점은 공통적인 문제점을 갖고 있다. 압록강 엄리대수(奄利大水)에서 엄리(奄 利)를 대수(大水)라는 뜻으로 해석하였지만, 엄리(奄利)라는 의미가 아 리수·한강에 적용될 경우 모든 강은 크다는 뜻이 되는 잘못이 있다. 또 한 지류에 해당하는 남한강·북한강은 물론이고, 작은 개울인 한천(漢川) 까지도 ‘큰 내’라는 뜻이 되어 현실과 반대되는 모순이 일어난다. 한문 의 생성 원리와 규칙을 설명한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큰 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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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하는 대강[大江東去]은 원칙적으로 압록강이나 두만강에는 해당되지 않으며, 오직 장강(長江)에만 적용된다. 특히 한(漢)이라는 글자는 한수(漢水)나 한강(漢江)에 사용되는 것은 물론 같은 개념으로서의 한양(漢陽)에도 적용되어, 명백하게 ‘한(漢)강 의 북쪽에 있는 땅[陽]’이라는 한문의 기본이며 불변의 뜻이 있는데, 그 것을 무시하고 ‘한’을 우리말 음차라 하여 대양(大陽) 즉, 큰 땅이라는 뜻이라고 하면 엉뚱한 해석이 되고 만다. 한강(漢江)·한수(漢水)의 본질 적인 의미를 바탕으로 해석해야 한다. 더구나 역사 속 지명인 한주(漢州)·한양군(漢陽郡)·한양부(漢陽府)· 한양(漢陽)·한성(漢城)·북한산(北漢山)·북한산성(北漢山城)·남한산(南漢 山)·남한산성(南漢山城)·한남(漢南)·한강진(漢江鎭)·한남동(漢南洞)·한 남대교(漢南大橋) 등에 적용하여 모두 크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면 참으로 이상한 뜻이 된다. 한(漢)이나 ‘아리’를 크다는 뜻으로 모든 경우 에 적용하면 자명한 잘못이 된다. 그러한 측면에서 한(漢)이라는 글자는 본래의 뜻에서 변화하면서 여 러 가지 다른 의미를 파생하고 있다. 우선, 1)중국의 한수 또는 한강(漢水 即漢江. 長江最大的支流,源出 陕西,流至湖北武漢入長江)이라는 가장 본질적인 뜻이 있다. 관련하여, 한수 지역에 살고 있던 종족으로서, 2)중국의 다수를 차지하는 종족 개 념으로서의 한족(漢族)이 있다. 그리고, 3)은하수를 뜻하는 은한(銀漢)· 천하(天河)·은하(銀河) 등으로 사용된다. 또한, 4)한수가 흘러 지나가는 도시인 한중(漢中, 地名,在陕西,因漢水而得名)을 나타내기도 한다. 추가적으로, 5)성년 남자(成年男人, 老漢, 好漢)를 표현하거나, 6)중국 고대의 한나라(漢 朝代名, 公元前 206~公元25年 劉邦所建, 建都長安
史稱西漢或前漢;公元25~220年, 劉秀重建, 建都洛陽, 史稱東漢或後漢) 를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본질적 개념으로서의 한(漢)이 어떠한 뜻이 있는지를 파악함 과 동시에 상황에 땨라 다양하게 변화하는 또 다른 개념을 찾아내고 적 용해야 할 것이다. 즉 중국에서 쓰이는 한(漢)의 개념이 아닌 다른 지역 인 한반도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새롭게 변화된 개념에 대하여 고찰해야 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한(漢)이라는 글자와 결합 되는 지명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백제가 강변에 정착하면서 만들어진 한성(漢城)·한산(漢 山)·하남(河南) 위례성을 비롯하여, 이후에 강 유역을 차지한 고구려의 북한산군(北漢山群), 나제동맹으로 고구려를 몰아내고 강 유역을 차지 한 신라가 설치한 한주(漢州)·한산주(漢山州)·한양군(漢陽郡), 고려시대 한강(漢江)·한양부(漢陽府), 조선 개국후 한양(漢陽)으로 천도하고, 한양 부를 한성부로 변경하고, 지명으로서의 남한산(南漢山)·북한산(北漢 山)·청한산(靑漢山) 등 다양하다. 한편 김정호는 『대동지지』에서 대왈한[漢江 東國方言稱 大曰漢 稱言 大江也]라 하였다. 우리말에 큰 것(大)을 말하기를(曰) 한(漢)이라 하니, 한강(漢江)은 대강(大江)이며 큰 강의 뜻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후에 시라토리(白鳥庫吉), 이마니시(今西龍) 등에 연결되며 한강은 큰 강이라는 뜻으로 지금까지 쓰이고 있다. 그렇다면 한(漢)이 대(大)라는 인식이 맞는 것인지에 대한 검증이 필 요하다. 우선 조선시대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大漢門)의 경우 한(漢)이 뜻하는 바가 식민사관 학자 등이 주장하는 내용과 다르다. 즉 대한문이 라는 글자만 보아도 대(大)가 한(漢)이 되거나 한(漢)이 대(大)가 될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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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은 명백하다. 대한문은 대대문이(大大門)이나 한한문(漢漢門)이 되 면 안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상량문 기록에는 그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한양(漢陽) 이 창대해진다는 뜻으로 대한(大漢)이라는 이름을 쓴 것이다. 이로써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생각하던 한(漢)의 의미를 알게 된다. 한(漢) 은 우리말 음차로서의 크다는 한(漢)이 아니다. 한(漢)은 땅 위를 흐르 는 한강과 북쪽에 있는 땅 한양을 뜻하고, 하늘의 은한(銀漢), 즉 은하 수를 뜻하며, 그것이 다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흐르는 푸른 강물 의 색깔을 이르는 말이 되고 있다. 푸른 물 한수(漢水), 한강(漢江)이 흐 르는 강 북쪽의 땅 한양이 영원한 수도가 되어 창대해지기를 바라는 민 족적 소망을 담고 있다. 또한 한강이 고어 한가람에서 유래하였다는 발상이 있으나, 이는 고증 없이 유포되어 사실인 듯 착각을 주고 있을 뿐이다. 즉 가람의 사 용례가 용비어천가 제작 당시의 중세어(1447) 이전으로 올라가기 어 렵고, 한강이 한가람에서 유래하는지 여부를 떠나 그러한 형태나 명칭 이 문헌에 없으며, 유사한 단어가 사용된 경우도 없다. 더구나 크다는 뜻의 한(漢)이라는 글자로 표기된 문헌이 없다. 한가람이라는 하나의 단어 형태로 한강을 지칭하는 사용례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강이 한가람에서 유래한다는 주장은 학술적 근거가 없 는 것이며, 단지 ‘한’에 ‘큰’이라는 뜻이 있고, 가람은 강의 고어라는 점 에 착안하여 만들어낸 그럴듯한 조어라 할 수 있다. 한강의 본질적 의미를 규명하는 차원에서 조용호(趙容晧)는 2002 년 이래 『아리[蒼波] 이랑[萬頃] 연구』·『아리랑 원형연구』 등을 중심으 로 ‘아리’는 고구려어로 ‘푸른’이라는 뜻의 형용사라는 연구결과를 제
시하였다. 따라서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아리수’는 ‘푸른 물’로 해독 되고, 고대 북방계 압록수·두만강·청천강 등은 모두 같은 뜻이 된다. 나 아가 대수(帶水)는 한반도의 허리띠와 같은 형태이면서 땅 위의 은하수 같은 푸른 물이 된다. 한수(漢水)는 본질적으로 대륙의 황야를 흐르는 황토색 물줄기라는 의미가 되므로, 하늘에 있는 은색의 별 무리는 은한(銀漢)·은하(銀河)가 된다. 그러나 한국적 관점에서는 주변 전체를 나타내는 푸른색이므로 한수나 한강은 푸른 물이라는 뜻이 된다. 땅 위의 은하수가 강으로 표 현되면 은한강(銀漢江)이고, 줄여서 한강(漢江)이 되며, 또 흘러가는 한 강수(漢江水)가 된다. 한강(漢江)은 한국인의 사고와 정서에 기반하여 독자적으로 개념화 된 은한(銀漢)의 푸른 물줄기이다. 하늘의 은하수처럼 ‘푸른 물’이라는 뜻이 된다. 한양(漢陽)과 한성(漢城)은 푸른 물이 지나는 도시이며, 서울 은 은하수를 도심에 머금은 ‘파란 물결의 은하수 도시’가 된다. 유사한 이름의 한탄강(漢灘江)은 ‘푸른 물과 모래톱이 어우러진 물줄기’라는 뜻이 된다. 지금까지, 아리수는 삼국시대 한강을 일컫던 옛 이름으로서 크다는 순우리말 아리와 물을 뜻하는 한자어 수(水)가 결합된 것이라 알려져 있 었고, 한강의 한(漢)은 순우리말로 크다는 뜻이므로 한강은 큰 강, 아리 수는 큰 물이라는 뜻이라 하였으나, 객관적 기록이 아닌 식민사관 학자 들이 주장한 내용에 해당하고 있다. 또한 한강이 한가람에서 유래한다 는 발상도 있으나, 이는 고증 없이 유포된 잘못된 주장이다. 한강이나 아리수의 뜻은 어떤 기록에 근거하며, 누구의 주장인지에 대하여 살펴야 했으나 그렇지 못하였다. 이제 그 실체를 검증하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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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고, 잘못 도출된 결과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한강이나 아리수는 큰 물이라는 뜻이 아니다. 한강은 푸른 물이라는 뜻이고 아리수도 푸른 물이라는 뜻이 된다. 고독과 묵언의 20년 세월 속에서 한민족 역사의 강 물줄기, 아리수 와 한강을 ‘푸른 물’이라는 뜻으로 해독하게 되었다.
조용호
문학박사(文學博士).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아리랑 원형연구』, 『아리랑의 비밀화(話)원』, 『아리랑 영웅(英雄)』 『아리랑 연구사(硏究史)』 등 저자(著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韓國民族文化大百科事典) 집필진. 숭실대학교 연구기획위원장. 민요학회 임원. 모바일 반도체 정보통신그룹 본사부사장. 한국지사장. 아시아문예 시 등단. 아송문학회원.
예술종합 । 숲문화와 힐링
가로경관 『담장』에 대한 소고(小考)
시작하면서 …
김상범
담은 집이나 일정한 공간의 둘레를 막기 위하여 축조한 건조물이다. 담 을 쌓는 까닭은 밖으로부터 안을 보호하고 공간을 성격에 따라 나누기 위해서이다. 집터 둘레를 막아 안과 밖을 구분 짓고 집안에서도 담을 두 어 공간들의 성격을 나누었다. 담은 성읍국가 시대부터 있었는데 고려시 대에는 화초담에 대한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담은 축조 방법, 재료, 장 식 등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상류층이나 궁궐에서는 벽돌 담, 화초담 같은 인공적인 담을 축조했고 무늬들은 창호의 창살 짜임새 나 가구의 장식 무늬와 같게 하여 통일성을 준다.
가로를 공간적으로 한정하는 담장 디자인
보행자의 쾌적성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인 가로를 공간적으로 한정 하는 담장 디자인은 특히 학교, 아파트, 공공기관 등은 넓은 토지를 차지 하기 때문에 담장 길이가 도시 가로와 보행자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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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담을 쌓는 까닭은 밖으로부터 안을 보호하고 침입을 막기 위하여, 안 이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그리고 공간을 서로 다른 성격으로 나누기 위해 서이다. 조선시대의 주택에서 사당(祠堂)을 건축하고 주위에 담을 쌓는 것은 담 안의 공간을 신성화하여 제사 공간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또, 행랑 마당이나 사랑 마당 등에 쌓은 담은 이들 두 공간 사이에 위계질서 를 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궁궐의 담
담을 언제부터 쌓았는지는 확실히 밝히기 어려우나, 대체로 성읍국가 시대를 상한선으로 하고 있다. 지배 집단과 피지배집단 간에 주거의 차 이가 생기면서, 신분에 따른 위엄을 유지하기 위하여 담과 같은 구조물 이 필요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이나 『삼국 지(三國志)』 「위지 동이전」 변진조(弁辰條)에 보면 변한과 진한의 성곽에 관하여 언급한 바가 있는데, 이때의 성곽은 바로 담이다. 고구려의 분묘건축인 용강 대총 전실 남벽 누각도(前室南壁樓閣圖)를 보면, 벽화의 아래 중앙에 누각으로 보이는 우진각지붕의 건물이 있다. 그 뒤로 또 다른 전각의 지붕들이 보이며, 그 전각들의 양옆으로 기와지 붕을 한 건축물이 줄지어 그려져 있는데, 그것이 ‘ㄱ’자로 꺾인 담이다. 그 담은 수키와와 암키와로 지붕을 만들었는데, 조선시대의 주택이나 궁 궐의 담과 같은 것이다. 또, 안학궁지(安鶴宮址)에서도 궁의 전각을 중심 으로 사방에 성곽을 둘러쌓고 거기에 남문 · 동문 · 서문 · 북문을 건축하 였는데, 그 성곽은 바로 궁궐의 담이다. 백제 또한 공주 산성 · 사비성(泗沘城) 등의 유적으로 보아 궁궐에 담 이 건축되었을 것이다. 또 금강사지(金剛寺址) ·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
등의 절터에서 중문(中門) 밖 남문 좌우로 담이 있었을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신라와 통일신라시대에 건축된 담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옥사조(屋 舍條)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그에 의하면 담 높이가 6두품은 8척을, 5 두품은 7척을, 4두품 이하 일반 백성은 6척을 넘지 못한다고 하였다. 또 한, 진골 이하에서는 양동(梁棟)을 설치하지 못하고 석회를 바르지 못한 다고 규제하고 있다. 이때의 양동에 관해서는 사찰의 회랑(廻廊)과 같은 것이라는 설도 있고, 기와지붕 밑에 수평으로 둥근 나무를 일정한 간격 으로 가로지른 것이라는 설도 있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뚜렷한 문헌이나 유물이 없으나, 송도의 유적에서 궁벽토장(宮壁土墻)의 흔적이나, 소격전(昭格殿)의 장벽(墻壁)을 발견하 였다는 사실로 고려시대의 담건축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고려사』 「열 전(列傳)」에 기와와 자갈로써 담을 쌓고 화초(花草)무늬를 만들었다는 기 록으로 미루어 화초담이 고려시대에 이미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의 담
우리가 지금도 찾아볼 수 있는 조선시대의 담을 축조 방법 · 재료 · 장 식 등과 같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생울[生垣] : 농촌주택이나 산간지방의 주택에서 널리 이용하는 데, 집터의 주위에 나무를 심어 그 나무 자체가 하나의 울타리 구실을 하 게 하는 것이다. 나무로는 가시나무 · 탱자나무 · 개나리 등을 쓴다. ② 울 : 울타리라고도 하며, 한자어로는 이락(籬落) · 파리(巴籬) · 번리 (藩籬) · 바자울[笆子籬] 등이라고 한다. 재료는 나뭇가지 · 풀대 · 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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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 수수깡 등 여러 가지이며, 이들을 짜서 만든다. ③ 판장(板墻) : 나무 기둥을 일정한 간격으로 세우고 기둥과 기둥 사이 의 위 · 중간 · 아래 세 곳에 가로로 인방(引枋)을 보낸 다음 인방에 널빤 지를 붙여 만든 담으로, 서울이나 지방의 서민주택에 쓰인다. ④ 돌담[石墻] : 농촌이나 어촌주택에 많이 쓰이는데, 크고 작은 막 돌들을 허튼층쌓기로 쌓고 그 윗면에 초가지붕을 하거나, 그대로 놓아둔 것이다. 그러나 같은 돌담이라도 서울의 중상류주택 · 궁궐과 기타 사찰 · 문묘 등의 건축에서는 사고석[四塊石]이라 부르는 네모반듯한 돌들 을 바른층쌓기로 쌓은 담이다. 그것을 ‘사고석담’이라 하고 윗면에는 기 와지붕을 한다. 또, 궁궐에서는 지붕 밑에 둥근 보[樑]를 보내어 양동 을 설치한다. ⑤ 토담[土墻] : 진흙 · 지푸라기 · 석회를 섞어서 쌓은 담으로 중간 중간에 잔돌들을 넣는다. 이와 같은 담은 농촌주택에 널리 쓰이는데, 윗 면에는 초가지붕이나 기와지붕을 한다. 경상북도 안동 하회마을에서는 널빤지로 틀을 만들고 그사이에 진흙 · 돌 · 지푸라기 · 석회 등을 섞어서 굳힌 다음 판장을 떼어내어 담을 만든다. 이를 ‘판담’이라 부르며 널빤지 로 만든 ‘판장’과는 다른 것이다. ⑥ 벽돌담[甓墻] : 벽돌을 쌓아 만든 담으로 중상류 주택과 궁궐에서 널리 쓰였다. 벽돌로는 검은 회색 벽돌과 붉은 벽돌이 있다. 주택에서는 검은 회색 벽돌을 쓰고, 궁궐에서는 붉은 벽돌도 쓴다. 윗면에는 암키와 와 수키와로 지붕을 만들고, 처마에는 막새기와를 쓰거나 수키와에 아귀 토를 물리기도 한다. ⑦ 영롱담[玲瓏墻] : 벽돌로 쌓은 담이지만 중간에 벽돌을 빼내어 구 멍이 나게 한 담을 말하며, 보통 ‘十’자형이나 반달 모양으로 구멍을 낸다.
⑧ 화초담[花草墻] : 담벽에 꽃이나 그밖에 여러가지 장식 무늬를 만 든 담으로 ‘화문담[花文墻]’이라고도 한다. 무늬는 주로 길상문자(吉祥 文字)로 수복(壽福) · 강녕(康寧) · 부귀(富貴) · 다남(多男) · 만수(萬壽) · 쌍 희[囍]등을 새겨넣고, 또 상서로운 동물로 사슴 · 학 등을 새겨 넣는다. 또한, 식물무늬로는 소나무 · 대나무 · 난초 · 국화 등을, 자연물로는 해·달·산· 바위 · 폭포 등을 그려 넣는다. 그리고 기하학적인 무늬로 구갑( 龜甲)무늬 · 완자무늬 · 번개무늬[電文] · 바자무늬 등을 새겨 넣었으며, 또 십장생무늬[十長生文]전체를 넣기도 한다. 십장생무늬는 해·산·물·돌· 구름 · 소나무 · 학 · 불로초 · 거북 · 사슴 등을 주제로 한 것이다. 경복궁 자경전(慈慶殿)의 바깥담에는 번개무늬 · 바자무늬 등을 주제로 한 아름다운 화초담이 있다. 안뜰 후정(後庭)에는 십장생무늬를 새겨 넣은 화초담이 있는데, 사실 이것은 자경전의 굴뚝과 담을 함께 쌓은 특수한 예 가 된다. 또한, 담은 집에서뿐 아니라 성이나 능 · 묘에도 쌓았다. 성에 쌓 는 담으로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몸을 보호하고 공격하기 위한 것으로 성첩(성가퀴)과 여장(女墻) 등이 있다. 능 · 묘에 쌓는 담으로는 곡 담[曲墻]이라 하여 능 · 묘의 양옆과 뒤쪽을 낮게 둘러쌓는 것이 있다.
우리나라 담의 두드러진 특색
우선 담을 쌓고 생활하는 건축주의 신분에 따라 재료와 축조 방법이 달 라진다는 것이다. 즉, 서민층에서는 울타리 · 돌담과 같은 자연적인 모습 의 담을 축조한다. 중상류 주택이나 궁궐에서는 사고석담장 · 벽돌담 · 화 초담과 같은 인공이 많이 드는 담을 축조한다. 담의 높이도 서민주택에 비하여 상류 주택으로 갈수록 높아진다. 또 담 윗면에 만드는 지붕도 서 민층 담장의 경우 몸채가 초가지붕이면 초가지붕으로, 상류 주택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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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지붕이면 담의 지붕도 기와지붕을 이룬다. 또한, 서민주택의 담은 집터의 경계에 안과 밖을 구별하는 기능으로 쌓 는 성격이 강하다. 반면에 상류 주택이나 궁궐에서는 외부에 대한 방어 적인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담이 경사지에 건축될 때는 담의 윗면과 지붕이 경사면을 따라 나란히 축조되는 것이 아니라, 단(段)을 만들며 축 조되는 것이 특색으로 율동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주고 있다. 다음으로 는, 담이 건축공간의 성격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점이다. 담은 행랑채와 더불어 집터의 둘레를 막아 안과 밖의 공간 성격을 구 분 짓고, 다시 안에서도 담을 건축하여 집으로서 형성되는 크고 작은 공 간들이 각기 자기 나름대로의 성격을 이루도록 한다. 주택에서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만든 담은 사랑 마당과 안마당이라는 두 개의 공간을 형성 한다. 그중 하나는 남성적인 공간이 되고 다른 하나는 여성적인 공간이 되게 한다. 또, 행랑채와 본채 사이에 쌓은 담은, 하나는 행랑 마당으로 서 하(下)의 공간이 되고 다른 것은 상(上)의 공간이 되게 한다. 또, 궁궐에서는 크고 작은 여러 개의 담들을 둘러쌓음으로써 이들 담 들로 나누어지는 여러 개의 크고 작은 공간들은 제각기 독특한 성격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건축공간에 적극적 공간과 소극적 공간의 교차 반 복을 이룬다. 주택의 안채에 있어 안방 · 대청들은 그 하나하나가 의도적 인 적극적 공간들이다. 그들이 모여 보다 큰 안채라고 하는 적극적 공간 이 되고, 그 둘레에 무한하게 펼쳐진 소극적 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그 러나 그곳에 담을 쌓음으로써 담 안의 공간은 보다 큰 적극적인 공간이 된다. 또 그 밖으로 소극적 공간이 둘러싸이며, 다시 담에 의하여 그것이 적극적 공간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담은 그 장식구성에 있어 주제의 반복과 변화를 이룬다. 즉, 담에 장식
한 무늬들은 창호의 창살 짜임새나 주택 내의 가구의 장식 무늬로도 쓰 이기 때문에 주제의 반복에서 오는 통일성을 손쉽게 이룬다. 또한, 담은 정원 공간의 구성에 있어서 중요한 시각적 요소가 되며, 이 는 수직 요소로서 공간에 미치게 된다. 즉, 굴뚝이나 정원의 괴석대와 돌 확 등의 수직 요소들이나 석상과 석지 등의 수평 요소들을 한 공간 안의 것으로 서로 관련시켜주는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이다. 그 담에 교창(交 窓)이나 살창을 달아 공간과 공간을 서로 연속되게 하여주고, 두 공간이 상호관입(相互貫入)되게 하여주는 것도 중요한 특색이 된다. 즉, 건축공 간을 인공적인 공간에서 자연적인 공간으로 확대, 융합되게 해주는 것이 다. 서울 안국동 윤보선(尹潽善) 가옥이나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 리의 독락당(獨樂堂)이 대표적인 예이다.
가로를 공간적으로 한정하는 담장 디자인 특히 학교, 아파트, 공공기관 등은 넓은 토지를 차지하기 때문에 담장 길이가 도시 가로와 보행자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같은 덕수궁 담 장인데 보행자에게 배타적인 담장(좌)과 보행자에게 우호적인 담장(우) 으로 성격이 구별된다. 화초박스(우)는 돌담의 지루함과 딱딱함을 줄이 는 역할로 보행자의 쾌적성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이다(그림 1).
그림 1. 보행자에게 배타적인 담장(좌)과 보행자에게 우호적인 담장(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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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담장문화가 발달 되어왔다. 서민들의 초가집, 사대부들의 한옥, 관가와 궁궐은 모두가 담장으로 둘러싸여 영역 경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고 프라이버시를 보호하 는 공통의 기능을 수행하지만, 담장의 차폐 정도는 초가집부터 한옥, 궁 궐에 이를수록 높아지고 견고해진다. 이러한 폐쇄적 담장문화는 해방 후 도시구조가 서구화됨과 동시에 서구의 개방적 담장문화 영향을 받으면 서 점차적으로 차폐성이 낮아지고 있다.
그림 2. 낙안읍성의 민가 담장
우리나라 도시에서는 전통적으로 건물을 둘러싸는 담장이 필수적 요 소이다(그림. 2) 담장의 높이는 차폐 정도를 결정하는데 이는 민가, 사대 부집, 관아, 궁궐에 이를수록 높아지고 견고해진다. 주거지 골목에서의 높은 담장은 골목 경관을 답답하고 폐쇄적으로 만들어 쾌적한 보행환경 을 만들기 어렵고 주민간의 소통도 더욱 어려워진다. 근래에는 골목길의 답답함을 해소하고자 신도시 주택에서 담장 높이를 제한하거나 투시성 담장을 권장하는 시책을 펴고 있다. 더 나아가 담장 허물기 사업을 통해 동네 골목길의 주차 문제까지 해결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데 이는 바람직 한 노력이라 할 수 있다. 독일, 미국 등 서구에서는 전정(前庭)을 시각적으로 개방하여 골목길의
녹시율이 높아지고 친근한 경관이 형성된다. 이들 나라에서는 일반적으 로 주차장이 전정에 있으며, 전정보다 넓은 후정에 프라이버시가 있는 잔디밭, 연못 혹은 수영장이 있는 정원을 만드는 것이 보통이다. 전정을 개방하는 정도에는 차이가 보인다. 독일의 경우 대부분 철제 펜스로 외 부인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으나, 미국의 경우에는 완전히 개방하는 것이 보통이다. 독일 베를린 교외의 주택담장(그림. 3) 주택들은 철제 투시형 담장이 주를 이루고 있다. 철제 담장이 아예 없이 완전히 개방된 경우, 반 대로 생울타리로 완전히 차폐하여 볼 수 없도록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의 경우 투시형 철제 펜스로 되어있다.
그림 3. 독일 베를린 교외의 주택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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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주택 후면에 프라이버시가 있는 후정을 조성(좌), 담장 없이 완전 개방(우)
미국 블랙스버그 교외의 주택(그림. 4) 도로에 면하는 곳은 담장 없이 완전하게 개방하였고(우), 주택 후면에 프라이버시가 있는 후정을 조성 하였다(좌). 참조 독일과 마찬가지로 정원을 시각적으로 개방하고 있으 며, 그 정도가 훨씬 높다. 미국 시애틀 교외의 주택_ 펜스 없이 마당이 완 전 개방 되어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관공서, 학교, 아파트 등의 담장 을 개방하거나, 녹화하여 가로경관을 향상시키고 보행자의 쾌적성을 높 이고 있음은 바람직한 일이다. 이들 공공기관은 가로에 접하는 길이가 길어 가로경관에 미치는 영향이 크므로 단순한 개방이 아니라 적극적으 로 보행자를 배려하는 시설을 설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길이가 길어 가로경관에 미치는 영향이 크므로 단순한 개방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보 행자를 배려하는 시설을 설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보행자에게 배타적인 아파트 담장(좌)_ 담장을 일부 구간 후퇴하고 벤 치를 놓아 보행자가 쉬어갈 수 있게 배려하면 어떨까? 벤치가 없어서 차 량 진입 방지용 볼라드에서 쉬고 있는 노인(우) (그림. 5)대지에 여유가 있다면 서울대 미술관과 서초구청사의 벽천과 같이 담장을 후퇴하여 쉴 수 있는 시설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담장을 만들 때 배타적으로 내부만 생각하지 않고 가로경관과 보행자의 편의를 배려한다면 친근하고 살기 좋은 도시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림 5. 보행자에게 배타적인 아파트 담장(좌), 벤치 없이 차량 진입 방지용 볼라드에서 쉬 고 있는 노인(우)
맺으면서 … 보행환경의 변화가 커뮤니티 의식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행환 경의 질이 커뮤니티 의식에 미치는 영향을 실증적으로 주택가의 담장을 허물고 개별 필지를 주차 공간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주차 정책을 기반으 로 주차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보행환경을 개선하여 커뮤니티를 활 성화가 요구된다. 담장을 단순히 개방하는 것을 넘어 친 보행자 시설을 설치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중의 하나가 보행 약자를 배려하는 것이다. 즉 길다란 담장을 따라가다가 잠시라도 쉬었다 갈 수 있도록 벤치나 간 이 의자를 설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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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최근 관공서, 학교, 아파트 등의 담장을 개방하거나, 녹화하여 가로경관을 향상시키고 보행자의 쾌적성을 높이고 있음은 바 람직한 일이다. 이들 공공기관은 가로에 접하는 길이가 길어 가로경관에 미치는 영향이 크므로 단순한 개방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보행자를 배려 하는 시설을 설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담장을 개방하여 이웃과 소통하 는 아름다운 골목길과 보행 약자를 배려하는 벤치가 있는 따뜻한 담장을 보고 싶다.
김상범
나주대학교 토목조경학과 교수(산학협력단장) 고려대 조경학석사, 경희대 조경학박사(환경조경디자인) IFLA(세계조경대전)작품출품, 한국지역사회발전학회 학술상 국토부 중앙기술심의위원, 조달청 기술평가위원 서울시/한국산업인력공단 국가기술자격 정책심의위원(기술사 외) 고용노동부 NCS개발위원 및 평가위원장 한국녹지환경디자인학회장, 한국조경학회 부회장, 한국전통조경학회부회장
문학 । 신작시
솜구름
공혜주
포근포근 하얀 솜구름 햇빛 세례 은빛 단장
바람 사공 맞아들여 두둥실 두리둥실 떠 있다
푸른 하늘 수놓으며 욕심 버린 유랑의 길.
공혜주
아시아문예•141
칠엽수
효암 송용재
머나먼 이국땅 유럽에서 시집온 칠엽수 마로니에 오늘도 빌딩 앞 거리를 지키고 있다.
20세기 여명이 밝아오듯 덕수궁 뒤뜰에 자리 잡고 갖은 풍랑 다 견디고 있다
일곱 가닥 활짝 펼친 우산처럼 오가는 길손의 더위를 식혀주고 단풍 잎새 떨구고 겨울 준비한다.
효암 송용재
땅별 이야기
장정화
마음에 땅별이 떴나요? 소식 없던 초록 선인장에서 일년만에 빨간 꽃이 어여쁘게 피었다구요
땅에도 별들이 살아요 잘 모른 채 잊고 살다가 감동이 일렁이며 반짝거리죠.
땅별이 날아가서 하늘에 콕 박히기도 해요. 잊지 말고 세기로 해요 누가 많이 세는지 내 안에 땅별을.
장정화
아시아문예•143
소복소복 함박눈이
조희숙
캐럴송이 퍼지는 밤 산타할아버지를 만난 손주 휘둥그레 뒷걸음질 치네
-가은아 동생과 사이좋게 놀고
유치원도 잘 다녀서 기쁘다
미미도 인형집에 산단다
털목도리 굴뚝 속에 묻어두고 산타를 기다리네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선물 주머니 다 비우고 나니 트리 꼭대기 별 손을 흔드네
-엎드려 절하세, 구세주 났네!
함박눈이 소복소복 내리고 있네.
조희숙
마지막 여행
최시영
새벽 안갯속 굽이굽이 산허리를 돌아 어머니와 운구차 여행이다 이승의 끝 목적지로 미끄러지듯 날개를 단 듯 스며드는 차가운 공기 속 어머니는 자꾸만 저편으로 가신다 이 길이라도 끝이 없었으면 무엇하나 붙잡을 수 없는 슬픔은 안개로 피어올라 차창을 가르고 새벽 문으로 붉은 태양이 떠 올라도 이제 어머니는 무심한 척 모르는 척 영원히 눈을 감고 있겠지 마지막 이별을 마주한 채
아시아문예•145
김실아! 한마디 말씀도 없이 구름 위를 사뿐히 올라앉아 접었던 날개를 펼쳐 그렇게 그렇게 …
최시영
동강에서 보낸 하루
강종원
어느 문학단체에서 초가을 무렵 갑작스레 정선 동강으로 1박 2일 여행을 가자고 했다. 이미 그곳을 다녀온 한 남자분이 추천하는 곳이라 며 가볼 만한 곳이라고 권했다. 그곳에는 산도 강도 자연 그대로의 정 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많은 회원이 곧 마음을 열게 되었고 이내 주말이 되자 이른 시간부터 일찍 출발하게 되었다.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정선 길 따라 구불구불 위태로운 동강 길을 우리는 마음껏 달렸 다. 얼마나 지났을까?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듯 동강에 산과 들은 푸른 색으로 시작되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산골 중의 산골이다. 아직은 구 월이라지만 리프팅을 즐기는 사람들도 보였다. 목적지는 정선 동강의 가장 외진 오지마을인 연포분교와 거북이 마을이란 곳이었다. 미리 이 곳을 서너 번 다녀왔다던 그는 가도 가도 또 가고 싶어지고 생각만 해 도 흥분되는 곳이라고 했다. 그곳은 정선군 신동읍을 지나쳐야 했다. 우 리 일행은 몇 대의 차를 이용하는 터였다. 오지마을 초입부터 양쪽으로 피어있는 무궁화꽃들이 길가에 펼쳐졌다. 참으로 별천지였다. 우리를 환영하는 듯 나란히 길을 안내하는 듯 분홍빛으로 활짝 피었다. 우리는 환호와 함께 창문을 열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이곳저곳 꼬불꼬불한
아시아문예•147
산기슭을 지나치며 차에서 내렸다 탔다를 반복했다. 강원도 두메산골 여행을 하는 것이 처음이었다. 동강 오지마을로 가는 길은 몇 차례씩 구 불구불하고 좁은 가파른 산기슭을 조심스럽게 지나쳐야 했다. 우리는 계곡을 따라 굽이굽이 휘어진 산길을 넘어갔다. 까마득한 산길이라 골 짜기들의 지명은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많은 산길을 가다 보니 자그마 한 터널도 나왔다. 사실 이곳은 자동차가 지나가는 터널은 아니었다. 정 선군 남면 일대 상수도 도수관의 유지관리를 위한 시설물이 설치된 터 널이다. 겨울철까지는 자동차가 통행하도록 개방하지만, 여름철에는 폐쇄한다는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이상하게 생긴 터널은 폭도 상당히 비좁고 어둡기만 하다. 칠흑같이 어둡고 끝도 보이지 않는다. 겨우 소 형차 한 대만 들어갈 수 있는데 그대로 꽉 끼일 것만 같다. 찬 공기를 안 고 무시무시한 고성리 터널을 빠져나가야 한다. 긴 터널을 들어가자 이 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긴 터널에 들어간 것만 같았다. 일방통행으로 반 대편에서 차가 들어온다면 빠져나오기도 힘들다. 해도 없고 불빛조차 도 없다. 터널은 끔찍한 상태였다. 불안하고 궁금하게 만들었다. 마치 위험한 사건 현장을 취재하는 듯 우리는 온몸에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나는 휴대전화를 꼭 쥔 채 긴장했다. 손에 눅진한 진땀이 뱄다. 시커먼 좁은 구멍에서 빠져나오자 환한 세상이 열렸다. 까마득한 지난 과거 속 에서 빠져나온 듯한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산속에서 그러려니 하며 산 속 흐름에 흠뻑 빠져들고 있었다. 벌써 몇 시간이 지났다. 그때 어디선가 골짜기에서 물이 철철 넘치는 소리가 들렸다. 와! 이런 곳은 처음이야. 직접 와 보다니. 역시 여행은 직접 체험해 봐야 한다니까요.
나는 한마디 던졌다. 이런 오지를 오다니, 야호! 누군가 차창 밖으 로 환호하며 마음속에 답답함을 토해냈다. 환하게 미소를 머금던 그는 동강의 가파른 골짜기를 따라 한참을 운전했다. 두메산골에 정말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몇 킬로는 더 흘러들어온 것 같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 몇몇 농가들이 오지의 삶을 지키고 있었 다. 폐허로 버려진 집도 보였다. 그는 산골 마을에 가정집이 보이는 곳 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 일행은 북적이며 차에서 내렸다. 마을 앞 으로 멀리 보이는 민둥산 정상을 바라보았다. 구불구불한 능선 따라 시 선이 이어졌다. 마치 남녀가 마주 보며 머리를 맞대고 누워있는 듯한 자 태를 뽐내고 있다. 그 앞으로 유유히 동강이 흐르고 있다. 이곳은 예전 에는 삼십 가구 정도의 많은 농가가 살았다고 했다. 지금은 학교도 폐 교가 되었고, 마을은 조용하다. 일 년 내내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어 오지로 벼려졌던 곳이었는데 최근에는 그 절경이 알려지면서 외진 사 람들이 찾아든다고 한다. 이곳에 살던 아이들은 어디로 떠났는지 학교 모습은 무성한 풀이 자란 운동장과 고목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연포 분교’가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우리는 이동했다. 이 분교는 1969년에 설립되어 30년 후인 1999년에 폐교되었다고 한다. 30년 동안 졸업생 이 169명이라고 하니 1년에 약 5~6명 정도 배출한 셈이다. 우리는 이 학교 운동장에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늠름한 앞 산이 ‘백운산’이란 이름을 가진 산이었다. 동강 물이 굽이굽이 흐르는 산과 민박도 몇 개 있었지만 우리는 ‘가정마을’이란 곳의 강물이 보이 는 곳에 머물기로 한 것이다. 마을 앞 강물은 초록빛을 띠고 반짝반짝 눈이 부셨다. 그야말로 꽃피는 산골이다. 현재 사는 집들은 7~8가구 정 도로 민박을 직접 집에서 하고 있었다. 거북이 마을이란 곳도 있지만
아시아문예•149
더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강가에서 많은 다슬기를 잡자고 몇몇 여인네들은 난리가 났다. 밥을 먹자마자 강물이 있는 곳으로 모두 모여들었다. 강변 모래밭에 다슬기 가 시커멓게 깔려있다. 이곳 다슬기는 일반 다슬기보다 더 뚱뚱하고 크 기도 훨씬 컸다. 우리는 엎드린 채로 그냥 물속을 훑어댔다. 정말 너무 큰 다슬기라 신기하기만 했다. 강물이 깊어서인가? 이곳의 모래가 정말 부드러웠다. 간혹 보트를 타고 유유히 지나가는 젊은이들도 보였다. 정 말 여유롭게 느껴졌다. 발아래 모래와 흐르는 동강의 물과 바람 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독차지했던 모래밭 위에다 자리를 잡 았다. 몇몇 남자들은 견지낚시 몇 개를 펼쳐놓고 있었다. 어느새 백사 장에는 장작으로 모닥불을 펴 놓고 둥그렇게 모여 앉아 촛불을 밝혔다. 하트 모양의 캠프파이어가 시작되었다. 강물도 산도 조용하여 적막하 기만 했다. 여기까지 찾아오기까지 불편하고 또 변변한 슈퍼 하나 없는 이곳은 오지다운 풍경 그 자체로 바라보기만 해도 아름답기만 했다. 밤 하늘은 무수한 별들이 떠 있었고 중년 부부가 산등성이를 타고 나란히 누워있는 모습처럼 능선이 그려졌다. 나는 밤하늘의 별 무리를 바라보 며 행복을 꿈꾸고 있었다. 지금은 까마득한 지난날이지만, 어린 시절 굽 이굽이 오소길을 걸어 다녔던 옛 생각도 떠오른다. 세월은 흘러갔고 어 디서 살고 있는지 소식조차 모르는 고향 친구들도 떠오른다. 밤은 한층 더 깊어만 갔다. 낚시를 시작한 남자 회원들은 물가 앞에 서 낚시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캔맥주와 오징어를 먹으며 즐기고 있다. 그런 가운데 기타를 들고 온 한 시인이 노래를 부르며 분위기를 새롭게 만들어준다. 자연을 벗 삼아 노래하기 시작한 시간은 얼마 동안 계속되 었다. 일어나서 춤도 추는 회원들도 보였다. 부족한 게 하나도 없는 새
로운 세상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간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 모두 가 하나가 되어 흥분하고 즐거워한다. 진지한 듯한 캠프파이어는 화려 했다. 회원들은 마음을 열고 여기저기서 노래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는 조용히 낚시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여 전히 홀로 앉아 있었다. 천연 물고기라 잡아도 되는지는 모르겠다며 일 단 밤이라 잘 안 보인다고도 했다. 그가 작고 이쁜 물고기를 잡았다고 자랑하며 보여주었다. 신기했다. 나도 옆에 앉아서 입질을 시작했다. 그러고는 마냥 기다렸다. 낚시는 TV에서만 보았지 직접 앉아서 입질을 기다려보는 것은 처음이다. 어떻게 하는 줄도 몰랐으나 그가 하나씩 알 려주었다. 그는 낚시하는 내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는 듯했다. 그러 면서 많은 생각을 하는 듯이 보였다. 그는 사뭇 진정한 낚시하는 시인 의 모습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나도 입질을 느끼자 잡아당겼다. 믿지 못할 만큼 신기했다. 물고기가 잡힌 것이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취미로 낚시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사실 다시 사랑을 시 작한다면 낚시하는 사람을 만나 진정한 사랑을 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나는 순간 마구 소리쳤다. 야호~!!~~낚시가 이런 것이구나. 물고기를 한 마리 잡고 나자 나는 어찌할 바 몰랐다. 소리치는 나의 가슴은 화려 하고 달콤함이 솟구쳐 올랐다. 나는 이대로 낚시하는 사람을 한없이 사 랑하고 싶어졌다. 이곳은 소문대로 정말 멋진 곳이었다. 그날 이후 나 는 우연히 TV 채널을 돌리다가 ‘도시 어부’라는 예능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바로 낚시하는 연예인들의 장면이었다. 그 분위기 마치 내가 함 께하는 듯 설레고 떨렸다. 나는 한 번도 관심조차 없었던 낚시프로그램에 푹 빠져들었다. 도대체 낚시가 뭐길래. 그토록 심심하고 무료해 보였던 낚시인들의 세계가 이해되고 가깝게 느껴졌다.
아시아문예•151
어느덧 세월이 흘러 지난날을 생각한다. 내 인생에서 지울 수 없는 달콤함이랄까. 지금은 어찌 변했을까. 그 분교와 능선이 눈앞에 아른 거린다.
강종원
보릿고개
최선화
요즘 인기 트로트 가수 진성의 보릿고개를 남녀노소 여러 계층에서 애창하고 있어서 듣는 이들이 보릿고개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보릿고개 세대가 아니면 그 자세한 실상을 모르겠기에 자세히 짚어 보려고 한다. 보릿고개는 지난해 가을에 수확한 양식이 바닥이 나고 보리는 채 여 물지도 않은 5∼6월(음력 4∼5월) 농가의 식량 사정이 매우 어려웠던 고 비를 말하는 것으로 춘궁기(春窮期) 또는 맥령기(麥嶺期)라고도 한다. 요 즘에는 경제성장과 함께 농가소득도 늘어나고 식량의 자급자족이 이루 어져 보릿고개라는 말이 실감이 나지 않으나 일제 강점기는 물론 그 훨 씬 이전 아주 오래전부터, 그리고 8·15 광복 이후 1960년대 초까지만 하 더라도 연례행사처럼 겪었던 농민의 빈곤성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한자어로 맥령(麥嶺)이라고도 하는 이 보릿고개는 가을 추수 때 걷 은 수확물 중 소작료, 장리 빚, 세금, 각종 비용 등을 지급하고 난 뒤 나 머지 식량으로 초여름에 보리가 수확될 때까지 버티기에는 그 양이 절 대 부족했다. 따라서 이때는 풀뿌리와 나무껍질 등으로 끼니를 잇고 다 시 장리쌀과 빚 등으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으며 굶어 죽는 사람도 있었
아시아문예•153
는데 이때 식량이 궁핍한 농민을 춘궁민(春窮民) 또는 춘곤민(春困民)이 라고도 했다. 그리고 추수기 전 즉, 벼가 익기 전에 다시 식량이 떨어지 는 피고개(稗嶺)가 있었는데 이때에 식량이 떨어진 농민을 추궁민(秋窮 民 ) 또는 추곤민(秋困民)이라고도 했다. 이 보릿고개를 넘기 위해 영세농이나 소작농 등 영세민들은 장리쌀 (長利쌀)을 얻어 연명하였는데 이 장리쌀은 가을에 원곡(빌린 쌀)과 함 께 50%의 이곡(利穀 : 이자로 내는 곡식)을 더해 갚는 것이 관례였지만 간혹 악덕 고리 업자는 원곡의 100%를 이곡으로 받는 경우도 있어서 빈익빈(貧益貧) 부익부(富益富)의 악순환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었다. 인기 트로트 가수 진성의 보릿고개 노래는 가수 진성이 직접 겪은 것을 가사에 나타낸 것으로 보릿고개의 실상을 자세히는 표현하지 못 했지만 나는 보릿고개를 직접 겪은 보릿고개 세대로 보릿고개의 실상 을 더 자세히 되돌아보고자 한다. 나의 할아버지는 한학자셨는데 보리쌀 서 말(24kg)을 가지고 분가 (分家)하신 후 서당 훈장으로 가계(家計)를 보태셨고 아버지는 소작농으 로 6남매를 기르셨는데 나는 아들 넷 중의 막내이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밤낮을 가리지 않는 길쌈과 양잠으로 가계를 보 태셨지만, 가을 곡식이 여물기 전이나 보릿고개를 넘겨야 하는 어려움 은 연례행사(?)일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의 서당 훈장 생활도 일제 말 기에는 제약을 받아 문을 닫게 되어 열 식구의 대가족인 가정형편은 더 욱 나빠지게 되어 가을에는 벼와 수수, 조를 풋바심(곡식이 익기도 전에 수확해서 양식을 마련하는 일)을 해야 했고 봄이면 보리나 밀을 풋바심 하고도 모자라서 산나물이나 칡뿌리 등으로 식량을 보충해야 했다. 아버지가 아침 일찍 지게에 괭이와 벽체(땅을 파는 연장)를 지고 어
디론가 가시는 날 저녁때면 늘 칡뿌리를 한 짐 캐서 지고 오셨고 이 칡 뿌리를 식구들이 모두 나서서 밤늦도록 짓이겨 물에 헹구어 앙금을 앉 혀 얻은 녹말로 칡개떡이나 칡범벅을 만들어 끼니를 대신해야 했고 할 아버지가 날마다 뜯어 오시는 산나물로 나물죽을 쑤어 먹었는데 이 나 물죽은 매일 저녁 끼니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 할아버지가 산나물을 뜯으러 가시는 길에는 내가 항상 따라나섰는 데 하루는 내가 뜯어 온 산나물로 죽을 쑤었는데 맛이 써서 먹을 수가 없었다. 내가 두릅으로 알고 뜯은 것이 두릅이 아니라 두릅과 비슷한 소 태나무 순과 물푸레나무 순이였지만 이것을 어머니가 자세히 보지 않 으시고 죽을 쑤셨는데 이 소태나무 순이나 물푸레나무 순은 쓰기로 소 문난 것이었다. 요즘 같으면 먹지 않고 그냥 버렸겠지만, 그때는 버릴 수가 없었다. 그 죽에 들어간 소량의 쌀이 아까워서 써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죽으로 끼니를 대신하는 때가 많은 만큼 나는 어린 마음에 죽을 싫 어하고 잘 먹지 않았다. 이럴 때면 할머니가 내 몫의 죽을 가지고 사는 형편이 좋은 이웃집에 가서 밥으로 바꿔 오시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때 는 미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못난 짓이었고 할머니의 막 내 손자 사랑이 각별하셨음을 잊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일제 말기에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보통학교에 입학, 3학년 때 광복을 맞았다. 학교가 가까우니까 도시락을 가지고 다닌 적이 없으 며 또 점심 도시락을 가지고 다닐 형편도 아니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집 에 와서 찬밥이나 죽 남은 것이 있으면 먹었지만, 찬장을 뒤져보아 먹 을 것이 없을 때는 물 한 대접을 떠가지고 장독대에 가서 고추장이나 된 장 한 숟갈을 떠서 물에 풀고 장독대 주변에 탐스럽게 자라고 있는 맨
아시아문예•155
드라미 잎을 한 움큼 따서 함께 먹는 것으로 점심을 때운 적이 많았다. 아침에는 보리밥이나 조밥, 저녁에는 김치죽이나 나물죽, 콩 탕이나 콩죽, 팥죽과 시래기죽이 주식이었지만 간혹 저녁에 보리밥을 먹을 때 도 있었는데 아버지가 품앗이나 남의 삯일을 하고 저녁밥을 잡수시고 오시면 아버지 몫으로 두었던 밥을 다음 날 아침에 먹으려면 쉬어서 먹 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럴 때는 어머니가 쉰밥을 물에 여러 번 씻어 헹구어 잡수시거나 간혹 막걸리가 있으면 막걸리에 말아서 잡수 셨는데 어머니가 그것이 좋아서 잡수신 것이 아니라 쉰밥을 버리기가 아까워서 잡수신 것을 나이가 더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감자가 다 크고 여물어 수확하기 전에 감자 싹 밑을 파보아 호두 크 기 정도로 자란 것이 있으면 캐 먹는 것은 예사였고 감자가 수확된 뒤 에는 주로 감자범벅(감자에 약간의 밀가루를 섞어 쪄서 먹는 음식)이나 옥수수를 쪄서 열무김치를 반찬으로 먹었는데 이것이 여름철의 대표적 인 끼니였다. 특히 콩물에 밀가루 국수를 말아 먹는 콩국수는 별미였고 덥고 배고플 때 시원한 콩물을 한 대접 마시고 나면 바로 포만감을 느 낄 수 있어서 온 세상이 내 것인 듯 쾌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자주 먹을 수는 없었다. 감자를 캘 때 호미 끝에 찍히거나 벌레가 먹고 병든 감자는 쉽게 썩 어버리게 되는데 이런 감자를 모아 독에 담고 물을 부어 썩인 다음 껍 질을 걸러내고 녹말이 가라앉으면 여러 번 물갈이해서 그 녹말을 먹거 리로 썼는데 감자 썩는 특유의 냄새가 남아 있었지만, 범벅이나 개떡을 만들어 달게 먹어야 했다. 감자를 썩이는 철이면 감자 썩는 냄새가 온 동네를 오염시켰지만 탓할 수가 없었다. 일제 말기에는 농민의 식량을 공출이란 명목으로 수탈하고 가끔 콩
깻묵(콩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 대두박, 가축 사료나 거름으로 썼음) 을 배급으로 조금씩 나누어 주었는데 이것도 달게 먹어야 했다. 할머니가 광복 전해인 1944년 여름에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아침· 저녁 곡상식(돌아가신 분의 궤 연에 아침·저녁으로 곡을 하면서 음식을 올리는 것)을 올리셨는데 진지(웃어른에게 올리는 밥의 높임말)를 올리 지 못하고 죽을 올릴 때는 더욱 설게 우시던 것을 보며 어린 나이였지 만 가슴이 아팠다. 식량 대용으로 가장 많이 쓰이던 것이 칡뿌리나 산나물 등이었지만 둥굴레와 무릇(물구지), 메(메꽃과에 속하는 다년생 만초의 뿌리)와 쑥, 송기(소나무의 어린 가지의 껍질을 벗기고 나무줄기에 붙은 연한 속껍 질) 등을 초근목피(草根木皮)라고 했는데 이 초근목피는 가난한 사람들 에게는 고마운 존재였다. 보리가 익기 전에 우선 풋바심으로 어려운 보릿고개를 넘는 데 도움 이 되었지만, 보리가 제대로 익었을 때 미처 수확하기 전에 장마가 여 러 날 계속되면 잘 익은 밀이나 보리에 싹이 났는데 이럴 때는 크게 기 대를 했던 밀·보리 농사를 망치게 되어 어려운 농민들의 식량 사정이 더 욱 어렵게 되었지만, 하늘을 원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반석죽(朝飯夕粥)이란 말이 있다. 아침에는 밥을 먹고 저녁에는 죽을 먹을 수밖에 없는 어려운 형편을 이르는 말이지만 매년 보릿고개 를 힘겹게 넘어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아침에는 밥을 먹고 저녁 에 죽이라도 꼬박꼬박 먹을 수 있는 것이 희망 사항이기도 했다. 이 지긋지긋한 보릿고개의 어려움도 6·25 한국전쟁에 따른 우방국 들의 경제적 지원에 이어 5·16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혁명공 약 6개 항 중 네 번째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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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 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라고 한 공약에 따라 강력하게 추진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병행된 공업 입국과 중 농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과감한 식량 도입, 다수확 품종개발, 비료와 농약의 원활한 공급, 혼·분식 장려 등 여러 가지 민생정책이 성과를 거 두어 1960년대 중반부터는 단군 건국 이래 5,300여 년이나 지속된 높 고도 어려웠던 보릿고개는 서서히 낮아지고 부지런하면 굶지 않는 시 대로 자연스럽게 전환되었다. 보릿고개 세대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보릿고개를 없애준 위대한 인물 로 평가하는 반면 보릿고개 세대가 아니라서 보릿고개 참상을 모르는 세 대들은 독재자로만 알고 있다. 거기에 더해서 박정희가 아니었어도 보릿 고개를 없애줄 인물은 많았었다고 한다. 이런 평가는 어느 사건이나 중 요한 과정이 지나간 다음에 쉽게 할 수 있는 말장난일 뿐이다. 공과 과는 함께 엄정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즉 공이 있다고 해서 과를 배제해서도 안 되고 과가 있다고 해서 공을 배제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가난만은 후대에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는 의지로 일부 세력의 반대를 묵살해 가면서 추진한 여러 가지 과감한 정책이 아 니었다면 그 높고도 어려웠던 보릿고개는 지금까지도 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보릿고개를 없애준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은 높 이 평가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최선화
문학 । 신작동화
지호의 꿈
송원윤수자
지호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유치원에 가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날씨는 아주 따뜻하고 기분 좋은 날입니다. 한발씩 나비처럼 팔랑 이며 밖을 나서는데 조그만 소리로 누가 부르고 있었어요. “지호야~ 지호야 여기 좀 봐~”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거려 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여기야 여기네 발밑을 내려다봐!” 십원짜리 동전이 나를 부르네요. “뭐야? 십원짜리 너가 나 불렀어?” 지호는 볼멘소리로 귀찮아하며 내려다봤어요. 조그만 십원짜리 동전이 발밑에서 부르고 있네요. “에이,너야? 아주 작아서 눈에 띄지도 않네,쓸모도 없는 것이. ” “여기 있으니까 사람들이 나를 밟고 다녀서 너무 아파.” “뭐야,아프다고? 그래 그래, 아팠겠다. 얼굴에 흙이 많이 묻었네. 내 가 구해 줄께.” 십원짜리 동전에는 더러운 것도 묻고 상처도 나 있었어요. 지호는 얼른 주어서 주머니 속에 넣고 유치원에 갔습니다.
아시아문예•159
집에 돌아오는 길에 주머니에 십원짜리는 울먹이며 또 부르네요. 아침에 주워 넣은 십원짜리 동전을 깜박 잊고 있었네요. “지호야 구해줘서 고마운데 컴컴해서 너무 답답해!” “아 그렇구나, 깜박했어. 너가 내 주머니에 있다는 것을, 미안! 그런데 너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사람들은 나를 아무데나 버려!” “그래 맞아! 엄마 화장대에 던져있는 것도 봤어. 십원짜리 너는 너무 작고 아무것도 살수기 없어! 쓸모가 없잖아.” “그렇지만 꼭 필요할 때도 있을꺼야. 내가 들어갈 예쁜 집 하나 만 들어 줘!” “네가 살집을 만들어 달라고? 알았어 너랑 나랑 같이 볼 수 있게 속이 다 보이는 예쁜 프라스틱 저금통으로 집을 만들어 줄께!!” 그때부터 땅에 떨어져 있거나 형 책상 위에도 있는 십원짜리를 열 심히 주워서 예쁜 저금통에 넣었어요. 그런데 아주 작은 십원짜리 저 금통은 아무리 넣어도 불어나지 않고 밑에서만 노네요. 십원짜리만 심 심하지 않게 친구만 만들어 줬나 봐요. “에이,괜히 신경만 썼잖아! 이제 나는 십원짜리 모으지 않을꺼야! 아무리 모아도 연필 한 개도 사지 못하잖아!” 지호는 포기하려고 마음먹었어요. 그때 어디서 코를 훌쩍이는 소리 가 들려서 가만히 들으니 노란 플라스틱 저금통에서 십원짜리가 울고 있었어요. “왜 또 그러는데,친구 만들어 줬잖아” “그래그래,그것도 고마운데 엄마 아빠도 만들어 주면 안 될까?”
“네가 엄마 아빠가 어딨어?” “내 엄마 아빠는 100원짜리 500원짜리 동전이야.” “아~ 그렇구나. 100원짜리 500원짜리도 동전들이지!” 그런데 100원짜리나 500원짜리 동전은 아무 때나 엄마나 아빠가 주시지 않는데~ 한참 생각해도 쉽게 구하지 못할 것 같아 고민하고 있다가 좋은 생 각이 떠올랐어요. 그래,아침에 아빠 구두를 닦아 드리고 엄마 심부름할 때마다 100원 씩만 달라고 해 봐야지, 용기를 내서 말씀드렸어요. “엄마 나 이제부터 심부름 잘 할께요~ 그때마다 100원씩만 주시면 안 될까요.” “어머머, 우리 지호가 아주 좋은 생각을 다 하고 기특해라! 알았어!” “아빠! 아빠는 아침마다 구두 닦아 드릴께 500원씩만 주세요.” “요 녀석 봐라, 그래? 고맙구나! 성실한 수고비는 줘야지! 허 허허,” 지호는 그다음 날부터 엄마 심부름도 잘하고 아빠 구두도 잘 닦아 드리고 받은 돈으로 십원짜리 여러 개에게 엄마 아빠를 만들어 주다 보 니 예쁜 저금통의 배가 너무 뚱뚱해졌어요. 십원짜리 동전은 이제 들 어갈 수가 없어졌어요. “어쩌지? 뚱뚱해져서 더는 들어가지 못하는데.” “호호호 뭐가 걱정이야? 뚱뚱하도록 많이 모았으니 어디에 써야 좋 을지 생각해 봐.” “꽤 많이 모였으니 장난감을 살까? 아니지,몇 달을 모아 장난감은 아니지.” 어디에 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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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생각이 나지 않아서 고민하면서 엄마, 아빠 께 선물 해드릴 정도의 돈도 아니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고 있 는데 십원짜리가 옆에서 가만 보고 있다가 “나를 가지고 좋은 일에 쓴다면 얼마나 좋겠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다면 말이야.” “좋은 일? 그래! 그거 참 좋은 생각이야. 근데 어떤 일이 가장 좋을까?” “가만히 생각해 봐. 크리스마스도 얼마 남지 않았잖아,” 지호는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며 생각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요.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큰 사거리에서 구세군 아저씨가 불우이웃 돕자며 종을 치고 계시던 것이 생각 났어요. 나도 노력해서 모은 돈을 좋은 곳에 쓰고 싶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그동안 함께 정들었던 예쁜 저금통과 이별하는 것은 아쉽지만 좋은 일 하려면 어쩔 수 없다 생각 했어요. 저녁에 아빠가 회사에서 돌아오시고 우리 식구들은 식탁에서 저녁 을 먹으며 오늘도 하루 동안의 이야기 하시며 즐겁게 식사를 마쳤습니 다. 아빠 엄마 차를 마시고 계실 때 저금통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엄마 아빠 그동안 도와주셔서 돼지 저금통이 배가 불러서 이제 안 들 어가요. 그래서 생각했는데 불우이웃돕기 하려고 하는데 괜찮겠지요?” “어머, 우리 지호가 기특한 생각을 다 할 줄 알고 정말 많이 컷네,.” 엄마는 내게 와서 저를 꼭 안아 주셨어요. 숨이 막혀서 혼났지요. “지호야, 어떻게 그런 좋은 생각을 하게 됐어? 우리 지호는 정말 훌 륭한 어린이구나.” 아빠는 크게 웃으시며 엄지척하시면서 윙크를 해 주셨어요. 힌트를 준 저금 통장에게 고마워서 한번 쓰다듬어 주고 미안한 마음도 들었고
엄마 아빠의 칭찬에 뛸 듯이 기쁘기도 했어요. 내일을 생각하니 잠도 제대로 잘 것 같지 않아요. 침대에 누워도 왜 그리 기분이 좋은지 이불 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습니다. 다른 날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출근 준비하시는 아빠께 미리 인사 도 하고 엄마의 주방일 끝나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엄마는 내 손을 꼭 잡고 밖으로 나갔어요. 마침 구세군 아저씨가 나와 계셔서 그리로 다가가서 성금 통에 돼지 저금통을 넣고 돌아 서는데 갑자기 박수 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이웃 분들이 웃으시며 큰 박수를 보내고 계셨어요. 장하다 장해하시고 구세 군 아저씨는 웃으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데 쑥스럽기는 해도 데 하늘만큼 기분이 좋았습니다. 엄마는 아빠가 퇴근해서 들어오시니까 “여보여보~ 글쎄 내가 지호 때문에 동네 스타가 되었어요. ㅎㅎㅎ” “글쎄 많은 사람들한테 박수를 받으며 훌륭한 아들 둬서 좋겠다며 칭찬받았어요.” 아빠는 엄지척을 해주시며 크게 칭찬을 해주셨어요. 앞으로 더욱더 저축도 잘하려고 예쁜 저금통을 준비하면서 많은 것을 알게 해준 십원 자리에게 감사했습니다.
윤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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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신작소설
장씨
김광한
경기도 부천시가 아직 시로 승격되기 전 부천군으로 남아 있을 때, 윤영숙이란 서른다섯 살 된 여자가 살고 있었다. 한 번 결혼에 실패하고 그 나이에 자식도 없이 홀몸으로 살면서 자 신을 내팽개치고 다른 여자를 얻어간 남편에게 복수라도 하듯, 돈 생기 는 일에는 몸 파는 것 빼놓고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돈 욕심이 대단 한 여자였다. 그래서인지 이혼 당한 지 5년 후에는 상당히 많은 돈을 저축해 부천 이 시로 승격됐을 때 시내 중심가에 조그만 빌딩 한 채와 넓은 주택, 그 리고 헐값에 사들인 땅이 꽤 많이 올라 주위 사람들로부터 예비 재벌이 란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와 접촉을 가진 사람들은 그녀를 윤 여사 대신 통뼈마담 이라고 호칭했다. 얼굴이 남자처럼 말상인 데다가 태어날 때부터 뼈가 남달리 굵어 어 쩌다 악수라도 할라치면 손아귀의 악력이 대단해 그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었고 키도 구척장신인 데다가 목소리마저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는지 괄괄해 남자로 태어났으면 한 가닥 할 인물이었다. 아무튼, 이런 통뼈마담인지라 세상 살아나가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특히 돈 긁어모으는 데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시장의 노점상인들에게 일수놀이를 한다거나 그 자신이 직접 다방 의 가 오 마담, 술집 주인, 화장품 외판사원, 보험 외판사원, 고리대금, 경찰 정보원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는데 최근에는 안면이 넓어진 것을 무 기로 틈틈이 중매쟁이 노릇도 해 짭짤하게 부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그녀가 소지한 수첩엔 꽤 많은 신랑 신부 후보감들이 빽빽이 기재돼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한번 결혼에 실패한 손때 탄 남녀들이었다. 워낙 많은 중매를 했고 또 성사도 많이 시켰기 때문에 부천시의 통 뼈 마담은 널리 소문이 나 있었다. 이런 통뼈마담에게 어느 날 우리들이 추천한 홀아비 장기수 씨가 등 장했다. 장기수는 일찍 장가를 들어 그 나이에 벌써 시집갈 연만한 딸 을 두고 있었는데 어쩌다가 조강지처와 이혼을 해 낭인 생활을 하던 참 이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 태어나 부친이 모 교회의 장로이고 모친 이 권사였는데 어쩌다 그만은 돌연변이로 태어났는지 부모의 좋은 혈 통을 따르지 않고 주색잡기는 물론 못된 짓이라면 골라서 하는 문제아 로 성장했다. 학교 다닐 때는 책가방을 내팽개친 채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산으로 끌고 가서 다리를 부러뜨려 무기정학을 받거나 시험지를 보여 달라고 공갈 협박을 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주의를 받기도 하고, 그 시절 악명 높았던 종삼 뒷골목을 버젓이 고등학교 모자를 쓴 채 어슬렁거리다가 훈육주임한테 들켜 풍기문란으로 무기정학을 받은 적도 있었다. 또한,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집안에서는 한 가족처럼 지내던 식모를 꼬여 임신을 시켜 꽤 많은 돈을 주고 내보내게 한 적도 있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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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가 대단한 작자였다. 이런 장기수를 그대로 방치해 둘 수가 없어서였는지 하느님은 그에 게 놀라운 손재주를 부여해 주었다. 장 씨는 원래 엔지니어 출신으로 전자계통에서 내로라하는 기술자 였다. 라디오 조립은 물론 흑백 TV 시절 청계천이나 세운상가에서 부 속품을 사다가 집에서 TV를 조립 판매할 정도로 그 실력이 대단했다. 그의 손이 한번 가면 용케도 고장 난 라디오에서 소리가 나오고 망가져 고물 장수에게나 줄 TV에서 화면이 재생되는 것이었다. 이 손재주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엔 제법 큰 규모의 전자회사 에 책임자로 일하게 되었는데 그 일하는 솜씨가 공대 출신 뺨칠 정도로 대단해 경영자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생활 형편도 펴지고 가장으로서 과거의 나쁜 습관을 버려 사는 맛을 알게 될 즈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대우 좋고 급료도 괜찮은 회사에 사 표를 내고 집구석에 틀어박혀 어떤 발명(?)에 열을 올렸는데 일반인들 은 납득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글쎄, 천재가 하는 일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싶지만, 현실과 너무 동 떨어진 일이라서 옆 사람이 보기에 의구심이 생길 정도였다. ‘전천후 만능안경’ 즉, 이 안경은 남자가 끼고 있으면 지나가는 여자의 알몸뿐 아니라 조금 더 조작하면 마치 투시경처럼 사람의 내장 상태가 화면에 나타나 의학적으로도 상당히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어 이것이 발명되면 노벨 상은 물론이고 세계적인 거부가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장 씨는 퇴직금을 받아서 청계천에 나가 각종 고물 기계를 사다가 후미진 골방에다 연구실을 차렸다.
무슨 대단한 연구를 하는 것처럼 방 앞에는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붙이고 변소 갈때한번 얼굴을 비치는 것 외에는 24시간 그 방에서 나 오는 경우가 드물었다. 아내도 밤 시간 이외에는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다. 비밀이 새어 나 간다는 이유에서였다. 가끔 그의 얼굴을 보면 운동 부족 때문인지 영양 실조 때문인지 얼굴에 황달기가 역력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부인과 그의 부모들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처음엔 몸 걱정을 했지만, 세월이 갈수록 어쩐지 그 발명품이란 것이 잘 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보 몸 상하는데 쉬었다 하시구려.” 하고 부인이 얘기할라치면 “완성단계에 있어. 말 시키지 마라.” 하며 부인의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완성단계에 있 다는 발명품이 몇 달이 지나도 그 상태인 것 같아 “정말 발명이 될 것 같아요?” 하고 그의 선량한 아내가 조심스럽게 물어보면 그는 욕설부터 내 뱉 었다. “아니 이 x 년이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나!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해! 죽치고 아가리나 닥쳐!” 하며 주눅을 들여놓기도 했다. 하루는 그의 부친이 걱정되어 “얘야, 모든 일은 하느님이 주관하시는 거란다. 인간의 능력에는 한 계가 있는 법이야. 내가 보기엔 공연히 애만 쓰는 것 같은데 하느님께 열심히 간구해라. 고마우신 하느님께서 이를 도와주실 것이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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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들으니 그 발명품의 용도가 해괴망측한 것이던데 하느님이 그런 추잡한 용도에 쓰이는 물건을 발명하는데 협조를 해주실 것 같지 않다. 다른 방향으로 연구를 돌릴 생각은 없냐?” 하며 아침에 일찍 일어나 기도할 것을 종용했다. 그 발명품의 용도 가 자신의 신앙과 대치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들이 꼭 사탄의 꾀임에 빠져들어 간다고 생각했다. “기도요? 그건 아버지 같은 예수쟁이들이나 하는 일이에요. 과학자 들은 예수를 믿지 않아요. 괜히 천당이라는 걸 만들어 놓고 무식한 사 람들 겁이 나 주는 그런 것 절대 믿지 않아요. 인공위성이 달나라는 물 론 화성까지 갔다 오는 세상에 그게 어디 말이나 되는 수작이에요?” “수작이라니? 너 예수 믿지 않는 건 네 자유지만 그렇게 하느님 모 독하면 죄받는다.” “아니, 아버지 그만 웃기세요. 죄받다니요.” “이거 큰일 날 아이로군. 병 걸려도 중병에 걸렸군. 저걸 어떻게 회 개시키나?” 그래서 부모는 아들을 위해 철야기도를 하거나 능력 있는 목사를 모 셔다가 ‘사탄의 세력에 빠진 아들을 위해 기도를 드렸다. “주여! 마귀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지금 저 아이는 눈가 에 비늘이 덮여 있습니다. 비닐을 떼어 사물을 올바르게 보게 해 주십 시오.” 하고 목사와 그의 아버지는 함께 기도를 드렸으나 장 씨의 눈가에 덮인 비늘은 떨어지기는커녕 더욱 두터워질 뿐이었다. 오히려 장 씨는 그에 반발하여 더욱 거칠게 나왔다. 또한, 그는 자신의 연구(?)가 끝나면 이웃 포장 마차집 과부에게 달
려가 갖은 수작을 다 부리며 부모를 욕되게 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장 씨의 형편은 더 어려워졌다. 회사에 다닐 때는 그래도 월급이란 게 있어서 풍족하진 못하지만, 그런대로 가계는 꾸려 나갔는데, 퇴직한 지 6개월쯤 후에는 쌀마저 떨 어져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다가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자 밀가루를 사 다가 수제빗국을 끓여 먹었다. “발명왕 에디슨도 처음엔 다 이랬어. 발명은 아무나 하는 것인 줄 알 아? 집념이 강하고 시련을 이겨내는 강한 의지가 필요해.” 하며 수제비를 떠먹으면서도 기가 죽지 않았다. 그의 어린아이들은 그런 아버지가 원망스러워 말끔히 쳐다보다가 는 또 혼날까 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어느 날보다 못한 그의 아내가 영양실조로 얼굴이 누렇게 뜬 얼굴로 “여보, 이 무식한 것이 뭐 알겠어요. 그러나 이젠 지쳤어요. 허구한 날 남의 집에 가 돈이나 꾸고, 이젠 꿀 데도 없어요. 그 연구란 것 포기 하고 남들처럼 삽시다.” 하면 그는 방바닥에 놓여진 요강을 집어 던져 방바닥을 오줌 바다로 만들어 놓을 뿐이다. “이 무식한 것아! 세계적인 발명품이 한두 해에 이루어지면 누군들 발명 못 하냐, 이 여편네가 미쳤나?” 하며 아무 소리 못 하게 했다. 마침내 1년 6개월째 접어들자, 장 씨도 자신이 하는 일에 점차 회의 를 느끼기 시작했다. 발명품이 발명되지 않을 것 같은 조짐이 보이자 그 는 포기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의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새 출발을 제의했다. 그리고 친정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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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에게 찾아가 돈을 빌려 부천시에다 조그만 전파상을 차려주었다. 전파상은 그런대로 잘 운영이 되었다. 신흥주택가라서 일이 많았고 공장이 들어서자 그의 일손은 무척 딸렸다. 또 하청을 맡아 꽤 많은 돈을 만지게 되었다. 영양실조에 걸린 누런 얼굴이 제 색깔이 날 때쯤 호사다마란 말이 있듯이 이런 장씨 일가를 시기한 ‘사탄’이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 았다. 가끔씩 장 씨의 전파상에 찾아와 심한 농 짓거리를 하던 이웃 복덕 방 박씨가 장씨가 출장 간 사이에 그의 촌스럽고 순진한 부인을 집적거 렸던 것이다. “아줌마, 몇 살이오?” “그건 왜 물어요?” “아줌만 내가 보기에도 딱해요. 한창나이에 뭐 즐기는 것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처음엔 벼락 맞을 소리라고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곰곰이 생각하니 멋대가리 하나 없는 남자와 평생을 살 생각을 하면 자신의 신세가 결코 유복한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자주 찾아와 바람을 집어넣다 보니 카바레까지 진출하게끔 되었다. 장씨가 장기 출장에서 돌아오자 눈치를 채고 있던 종업원 아이가 그 사실을 장 씨에게 귀띔했다. “아저씨, 요즘 아줌마가 이상해요.” “이상하다니?” “아저씨 없는 사이에 가끔 외박했어요.”
“그야 인마, 친정에 갔다 왔겠지, 저런 늙은 할망구를 누가 건드리냐?” “늙었다니요. 아저씨 없는 사이에 월부 화장품을 얼마나 사들였는 지 아세요?” “월부 화장품?” “그래요.” “돼지주둥이에 루즈 바른다고 여우가 된다더냐?” “사람 일은 몰라요. 조심하세요,” “원 녀석도 별것 다 신경을 다 쓰는구나.” 장 씨는 일소에 붙였다. 그런데 가끔씩 찾아오는 박 씨를 대하는 아내의 눈초리 속에 색이 담겨져 있는 것 같이 느낀 건 보름이 지나서였다. 그래서 “박씨가 그래도 사람은 좋단 말이야. 옛날에 한 가닥 했다던데.” 하고 슬쩍 운을 떠보았다. 그랬더니 박 씨에 대해 언제 그렇게 알 았는지 “뭐 옛날에 시의원도 나갔다나 봐요. 사람이 서글서글한 게 이런 촌 동네에서 복덕방 하긴 아까운 사람 같아요.” “그래서 당신 맘에 들었어?” 장 씨의 말에 뼈가 들었다. “그런 게 아니고 … “ “그럼 뭐야!” 하며 이번에는 큰소리로 화를 냈다. “그 복덕방 새끼 자주 찾아오는 것 내가 모를 줄 알고, 너 이 X 년,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이걸로 아가리를 요절낼 줄 알아!” 하며 식칼을 들고 설치자 그의 부인은 억울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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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알아요! 천벌을 받을 소리 함부로 하는 게 아녜요” 하고 훌쩍훌쩍 울고 법석을 떨었지만 아무래도 그의 부인은 순진한 데다 초범(?)이었다. “우리 일하는 아이가 증인이야! 대질시켜줄까?” 그녀는 마침내 자백했다. “꼭 한 번이에요. 박씨가 어딜 가자고 해서 술을 잔뜩 먹여 놓 … “ 장 씨는 아무 말 없이 부천경찰서 형사계로 찾아가 부인과 박 씨를 간통죄로 고소했다. 그러잖아도 융통성 없는 구식 마누라가 보기 싫었는데 속으로 잘됐 다 싶은 장 씨는 유치장에서 잘못했다고 두 손 모아 비는 부인을 “이런 망종들은 실컷 콩밥을 먹여야 해,” 하며 합의를 거절했다. 장 씨는 부인이 결국 알몸으로 쫓겨나 6개월 형을 살게 됐을 때 마 지못해 합의를 해주었다. 그 후 장 씨는 전파상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합의금을 갖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계집질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장 씨의 두 딸은 이런 아버지가 보기 싫어 어머니에게 가버렸고 남 은 것은 장 씨뿐이었다. 장 씨는 틈틈이 술집 접대부를 불러들여 살림도 차려보았고 다방 아 가씨를 꾀어 들여 집안에 앉혀 보았으나 그동안 벌어 놓은 돈만 축낼 뿐 이었다.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식으로 뒤늦게 바람이 난 장 씨에겐 하루하루 가는 게 꿈결 같았다. 그러다가 6개월쯤 후에는 더 이상 쓸 돈이 없었다.
알거지가 된 것이다. 수중에 돈 한 푼 없이 빈털터리가 되자 그동안 살 섞으며 죽자사자했던 계집들도 이번엔 외상장부를 들고 찾아와 악 다구니를 쳤다. “장 씨, 그동안 마신 술값 어떻게 할 거요?” 장 사장님에서 장 씨로 호칭이 바뀐 것은 순식간이었다. “좀 봐줘.” “술값은 외상으로 치자, 아니 아이들 화대 값도 외상으로 할 거야! 이런 경우가 어디 있어?” 생각다 못한 장 씨는 갈아입을 옷 몇 가지만 가방에 챙겨 갖고 야반 도주를 했다. 그런 장씨가 가끔씩 우리 친구들 앞에 나타났는데 나타날 때마다 큰 소릴 쳤지만, 그의 초췌하고 꾀죄죄한 모습에서 그의 현재 형편을 측량 할 수 있었다. 그는 그동안 부산에서 부두 노동자를 비롯한 외항선원, 회사 경비 원, 노가다 인부 등 전자계통과는 전혀 무관한 육체노동을 하며 만고풍 상을 겪어서인지 이미 그의 머리는 반백이었다. 이런 장씨가 딱해서 친구들은 그를 마땅한 과부와 재혼시킬 것을 신 중히 논의, 마침 부천에 용한 중매쟁이가 있다는 걸 수소문했는데 그녀 가 윤 마담, 즉 통뼈마담이었다. 윤 마담은 디방으로 데리고 나온 장 씨를 마치 민완수사관처럼 아래 위를 훑어보며 예의 주시하더니 몇 마디 물었다. 장 씨는 그녀가 묻는 말에 더듬더듬 대꾸했다. 윤 마담이 쓰고 있는 안경알 속의 눈초리가 차갑고 매섭게 느껴졌기 때문에 잘못 거짓말이라도 하다가 발각되면 큰일 날 것 같은 생각이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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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던 것이다. “괜찮아.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차근차근 대답해. 자네의 일생이 걸 린 일이야. 나중 일은 생각지 마라 … ” “혼자되신 지는 얼마나 되는지요?” 장 씨는 그 말에 주눅이 들어 올려다보지도 못하고 “예, 예, 꽤 오래됐습니다.” 하며 겨우 모깃소리만 하게 대답했다.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십시오.” “한 오년 됐습니다.” “오 년이라? 그럼 그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다른 여자와 동거생활을 했는지 아니면 틈틈이 난잡한 짓을 했는지 그런 의미였다. “그냥 혼자 책도 읽고, 산에도 가고 그랬습니다.” “기간이 너무 긴데요.” 하며 윤 마담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음 질문을 했다. “이혼을 당했습니까? 이혼을 했습니까? 아니면 상처를 했습니까? 이혼을 당했으면 선생에게 하자가 있는 것이고, 이혼을 제의했으면 부 인에게 하자가 있는 법인데 좀 더 구체적이고 육하원칙대로 말씀해주 십시오. 그래야 성사가 됩니다.” 그 말의 뜻을 이해 못 하는지 장 씨는 머뭇머뭇했다. 그래서 우리가 대신 답변해 주었다. “예. 상처했지요. 부인이 암으로 세상을 떴거든요. 참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이 친구의 일생에 파도가 몰려온 것입니다. 운명이라면 운명이 겠지요.”
윤 마담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건 그렇고, 현재 직업은 뭡니까? 그것도 구체적으로, 또 재산상 태는요?” “예, 전자 제품의 하청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재산은 공장부지하고 이 것저것 합해서 약 3억 정도 될까요?” 이것도 우리가 대답해 주었다. “아, 그래요? 그 정도면 재산상태는 양호한 편이고, 그럼 어떤 상대 를 원하십니까?” “예. 그냥 빨래나 해주고 어린애 딸리지 않은 40줄의 과부라면, 그 런 사람이 있겠습니까?” “알아봐야지요. 40줄의 과부라? 퍽 순수한 편이시군요.” “예, 워낙 이 친구가 마음씨가 착해 놔서 … “ “호적은 깨끗하겠지요?” “예 물론입니다.” “가족관계는?” “현재 홀몸입니다.” “홀몸이라고 해놓고 부인 얻고 나서 하나둘 객꾼처럼 모여들면 손 해 배상 물어야 해요. 그런 사람들 그동안 많이 봤어요,” “염려 놓으십시오.” 그녀는 장씨가 답변하는 말을 신문기자처럼 노트에다 정성껏 적었 다. 그러면서도 장 씨의 몰골이 초라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 듯 열심히 곁눈질하며 흘겨보았다. 세탁소에서 빌린 양복이 너무 낡아 세탁을 했지만 소매가 헐어져 실 밥이 튀어나온 것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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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친구 너무 소탈해서 탈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공치사를 늘다 놓아도 윤 마담의 노련한 눈길을 피하 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재산상태는 정확하겠죠? 나중에 심부름 센터 직원들 시켜 확인해 볼 테니까 정확히 말씀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되어 장 씨의 재혼문제는 정식으로 윤 마담의 수첩에 올라 추진되었다. 장 씨와 윤 마담은 그 후 자주 만났다. 윤 마담과 만날 때마다 세탁 소 하는 친구는 장 씨에게 손님 옷을 빌려주었고 우린 그의 거사 비용 을 염출해 주었다. 윤 마담은 장 씨와 만날 때마다 한 사람씩 신부 후보라고 데리고 나 왔다. 어느 때는 스물이 조금 넘은, 비록 과거의 경력(?)이 좀 있지만, 살결 이 고운 젊은 여자를 데리고 나왔다. 장 씨는 저 여자라면‥하고 생각했으나 오직 그림의 떡이었다. 소개를 시키고 윤 마담은 그들에게 자유 시간을 주기 위해 자리를 피했는데 번번이 장 씨 쪽에서 딱지를 맞았다. 주로 서른 살 내외의 여자는 유흥가 쪽에서 잔뼈가 굵어 세상 물정 을 너무 잘 알아 장 씨와는 상대가 되질 않았다. 윤 마담은 젊은 여자와는 쉽게 성사되지 않을 것 같자 이번에는 “장 사장님, 아무래도 젊은 애들보다 산전수전 겪은 과수댁이 어떨 까요? 한 사람 마땅한 사람이 있긴 있는데 한 가지 아이가 한 명 딸려 서, 아이라야 친정에서 양육하면 될 거고.” 그래서 그것도 괜찮다 싶어 맞선을 보았다. 그랬더니 장 씨도 늙었
지만 늙어도 아주 완벽히 늙은, 시장바닥에서 고등어나 팔 뚱뚱한 50대 쯤의 여자를 데리고 나왔다. 모르긴 하지만 슬하에 손자까지 있을 성싶 은 늙은 여자였다. 장 씨는 윤 마담에게 싫은 표정으로 눈짓을 했다. 아무리 내가 늙었 기로서니 저런 저승길 앞장설 여자를 데려오다니 사람을 뭘로 아는가 싶어 화까지 났다. “장 선생님, 웬만하면 그냥 하세요. 장 선생 인생도 그렇고 그런 것 아닙니까? 헌신 문수만 맞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도 그렇지요. 윤 마담, 사람 너무 무시하시네요.” 그러던 어느 날, 정말 배필이 나타났다. 30 중반의 여자인데 장 씨도 호감이 가고 그 여자도 장 씨에게 호감을 피력했다. 이런 걸 천생연분이라고 하든가? “예, 마음에 듭니다. 추진하겠습니다.” 장 씨는 윤 마담에게 자신 있게 대답했다. 상대방도 윤 마담에게 “사람이 성실한 것 같아요. 나이가 좀 들었으나 가꾸면 되는 것 아녜 요. 오히려 젊은 사람보다 나은 것 같아요.” 하며 교제하다가 봐서 살림 차릴 것을 생각하는 듯했다. 윤 마담도 장 씨에게 “이번 일은 잘 성사가 될 것 같은데 장 선생, 나 시시한 여자 아닙니 다. 크게 놀아요. 얼마나 생각하십니까?” 하며 금전 문제를 넌지시 물어보았다. “예. 제가 섭섭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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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야겠지요.” 윤 마담의 한 장은 1백만 원을 생각하는 것에 반해 장 씨는 견해가 달랐다. 십만 원을 생각했다. 그것도 지금의 형편으로는 여러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사정을 해야 할 판이었다. “네 좋아요. 그러면 내일 저녁에 만나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그 이튿날 저녁, 장 씨에게 호감을 가졌다는 30대 중반의 과 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대신 윤 마담이 나타났다. “그 아이가 몸이 아파 못 나오겠다고 해서 대신 나왔어요, 아무래도 집에서 반대하는 것 같아요. 헤어질 때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간 것을 보니, 할 수 없어요. 사람이 하는 일, 본인이 싫다고 하면 … “ 하며 장 씨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장 선생, 그 여자가 마음에 들어요?” 장 씨는 그저 묵묵히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윤 마담도 장 씨에게 여러 명의 여자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문득 자 신의 처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자신은 중매만 했지 자기 일은 한 번도 스스로 처리해보지 못했다. 결국, 돈 몇 푼 때문에 남의 인생을 사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했 을 때 스스로의 인생이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윤 마담은 이제부터 중매만 할 것이 아니라 직접 부딪쳐 당사자(?) 끼리 해결한다는, 이제까지 없었던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 상대를 장 씨로 내심 생각하게 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장씨가 비록 머 리가 반백이고 체격도 별 볼 일 없지만, 그동안 만나본 결과 성격이 온 순하고 홀몸이며, 재산상태도 3억 정도 되니 자신의 재산을 축내려는
것 같지는 않았고, 체격으로 보아 자기 휘하에 잡고 놀 수 있지 않으냐 는 나름대로 철저한 계산을 해보았다. 그래서 장씨가 마음에 든다는 여자를 다른 핑계 삼아 따 돌렸던 것이다. 윤 마담은 장씨가 술을 마다치 않는다는 것을 알고 술집으로 데려가 가끔 함께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만취한 장 씨를 자기 집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자신이 먼저 수작을 붙였다. “장 선생님, 내가 중매쟁이 노릇을 한다지만 나도 외로운 사람이랍 니다. 사람이란 게 다 그렇지 않습니까?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나 중매 좀 서 주세요. 구전은 톡톡히 드릴게요.” 하며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촌닭처럼 앉아있는 장 씨의 손 을 잡았다. 그 손의 악력이 대단해 꼭 역도선수의 손 같았다. “윤 마담,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장 씨는 술 취한 와중에도 체면을 지키기 위해 슬그머니 손을 떼려 했으나 떼면 뗄수록 수갑처럼 꼭 죄어왔다. “장 선생님도 외로운 사람, 나도 외로운 사람, 외로운 사람끼리 만나 는 것도 작품이 될 수 있지 않습니까? 장 선생님.” 하며 짐짓 취한 것처럼 슬그머니 장 씨에게 몸을 기댔다. 그러다가 장 씨를 쓰러뜨렸다. “윤 마담, 이러시면 … 그러나 그것도 말뿐이었다 장 씨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괜히 돈도 없는 주제에 젊은 계집 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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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야 평생 고생문 닫히지 않을 것 같고, 또 몇 달 살다가 젊은 놈팡이 얻 어 고무신 바꿔 신을 것 같아, 윤 마담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윤 마담의 얼굴이 말상이고 섬찟하게 생겨 마음에 걸렸지만, 얼굴이 먹여 살리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또한, 뼈다귀가 굵어 가끔 부딪치는데(?) 좀 신경을 써야겠지만 이 여자와 함께 지내면 의식 주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장 씨는 “이렇게 여러모로 부족한 나를 그렇게 깊이 생각해 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나 저같이 못난 … “ 하고 슬쩍 빼보았다. “아니에요. 제가 그동안 너무 잘난 체했던 것 같아요. 사실 저 외로 운 여자예요. 겉으론 화통하고 뭐든지 혼자 해결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 아요. 장 선생님, 날 어떻게 해주세요.” 하며 윤 마담은 장 씨의 목을 잡고 매달렸다. 그 이튿날 새벽, 장씨가 깨어보니 곁에 반라의 윤 마담이 번듯하게 누워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날부터 윤 마담과 한 식구가 되었고 호칭 역시 ‘여보 당신’으로 자연스럽게 바뀌게 되었다. 윤 마담은 그것도 하느님이 뒤늦게 주신 귀한 남편이라고 장 씨를 극진히 대접했다, “여보, 괜찮다면 며칠 푹 쉬세요. 당신이 사장이니까 맘대로 해도 될 것 아녜요. 시장하시면 냉장고 열고 입에 맞는 것 꺼내 잡수세요. 나는 수금 할 게 있어서 나갔다가 좀 늦을 테니까요.” 그래서 며칠간 마음 놓고 푹 쉬었다. 장 씨는 자신의 처지가 발각될까 은근히 걱정되기도 했으나 에라 나
중에 삼수갑산 가더라도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냉장고에서 기름진 음 식과 양주를 꺼내 대낮부터 취했다. 무릉도원이 따로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이렇게 보내길 4일, 윤 마담이 어느 날 “여보, 당신 직장일 보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하고 직장에 나갈 생각을 않고 방구석에서 번 둥 빈둥빈둥 대는 장 씨에게 물었다. “총무한테 이야기해 놨어요. 일주일간 몸이 아파 쉰다고 … “ “회사를 남의 손에 맡기면 안 되는데 … “ 하며 윤 마담은 반신반의했다. 무슨 놈의 회사가 일주일씩 비워도 괜찮단 말인가, 그날, 일숫돈을 걷어 정오쯤 들어온 윤 마담은 대낮인데도 술에 취 해 팬티만 걸치고 대(大)자로 누워 있는 장씨가 문득 의심스러웠다. 장 씨의 신원조회 한번 해보지 않고 받아들인 자신이 너무 경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장 씨 친구들 말에 넘어가지 않았나? 3억 정도의 재산이라면 꼴이 왜 그 모양인가?’ 그래서 다시 한번 장 씨의 누워 있는 모습을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그동안 목욕탕에 가질 않아선지 손톱 끝에 까말 때가 박혀 있었고 양말 뒤꿈치가 드러나 보여 3억 정도의 재산가 같지 않았다. 누워 있는 장 씨의 입에선 고약한 냄새가 풍기고 품위 없이 침까지 질질 흘러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잠꼬대까지 나왔는데 듣기에 아주 민망한 상소리였다. “야, 이 x 년들! 내가 누군 줄 알아! 이래 봬도 왕년에 용산 짱구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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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집들이 사족을 못 썼어! 이것들이! 외상술 먹는다고 괄시야! 빨리 술 가져와!” 윤 마담은 그의 잠꼬대에 기겁했다. 거침없이 터져 나오는 상소리는 아무리 잠꼬대라지만 그의 전력을 의심케 했다. ‘외상술? 이래 봬도 왕년에 용산 짱구’ 아무래도 내가 잘못 봤지, 양말에 구멍 뚫린 것은 또 뭔가, 요즘 세상에 구멍 뚫린 양말 신고 다니는 사람도 있나?’ 하고 보니 의심 가는 부분이 한둘이 아녔다. 윤 마담은 혹시나 ‘이치가 혹시나 해서 장롱 깊숙이 숨겨둔 현금 뭉 치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로 있었다. 윤 마담은 누구도 믿지 못해 수금한 돈을 모조리 봉투에 넣어 모르 는 곳에 감춰두었던 것이다. 안심된 윤 마담이, 이번에는 장 씨의 주머니를 살그머니 뒤져 수첩 에 적힌 전화번호를 살펴보았다. 장씨 성을 가진 사람을 보아하니 친척 같아 보여 다이얼을 돌렸다. 장 씨의 부친 장 장로였다. “거기 장기수 씨 댁이지요?” 윤 마담은 장씨가 깰까 봐 목소리를 낮추어 조용조용 말했다. “그렇긴 하오만,”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요. 장기수 씨 잘 아는 사이입니까?” “그래요. 물어보시오.” “이혼은 했습니까?” “건 왜 묻소? 남이야 이혼을 했건 말았건, 그런데 거기가 어디요? 교 도소요?”
“아닙니다.” “난 교도소인 줄 알았지. 교도소 말고 그놈이 갈 데가 없는데 … ” 윤 마담은 얼른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이제 완전히 그의 정체가 드 러난 셈이었다. “알고 보니 순 양아치 아냐?” 윤 마담은 자신의 판단이 틀려도 너무 틀렸다는 생각이 들어 분한 생각까지 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변한 줄도 모르는 장 씨의 잠꼬대는 계속됐다. “야, 이x 년아! 빨리 소주하고 오징어 한 마리 가져와. 윤 마담은 또 어디 갔어!” 윤 마담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젠 콧물까지 흘리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분한 생각이 앞서서 그를 흔들어 깨웠다. “여보 장 씨, 일어나요. 여기가 어딘 줄 알아요?” “어디긴 어디야, 내 집 안방이지.” 윤 마담의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그러다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는 듯이 악을 써댔다. “아니 이거 어디서 굴러온 말뼈다구야! 야 이 새끼야! 빨리 일어나지 못해!” 하면서 한 발로 그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그것도 모자라 한 손으로 그의 귀싸대기를 훔쳐 갈겼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장 씨는 며칠 후에 올 사태가 일찍 다가온 것을 직감했다. “내가 취했나? 남의 집에 들어온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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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부스스 일어나더니 미안하단 말 한마디 없이 쏜살같이 윤 마담 의 집을 빠져나갔다. 윤 마담은 세숫대야에 물을 퍼 담아 그를 향해 힘껏 뿌렸다. 윤 마담은 장 씨를 집 밖으로 쫓아 보내고 나서 장롱 깊숙이 숨겨두 었던 현금과 자기앞 수표를 꺼내 세어보았다. 2천만 원은 넘어 보였다. 요 몇 달 동안 이자에 이자가 새끼를 처벌어준 돈이었다. 일숫돈, 고 리대금으로 벌어들인 돈, 다방 임대료, 아직도 걷어 들일 돈이 산더미 처럼 쌓여 있었다. 윤 마담은 그 돈을 만져볼 때 산다는 것에 대한 강렬 한 의미를 느끼곤 했다. 남들이 느낄 수 없는 쾌감,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종잇조각에 불과한 것들을 꺼내 보면서 즐거움을 느꼈던 것이다. 그 종잇조각들이 축 날까 봐 그동안 남의 결혼식에도, 잔칫집에도, 값비싼 옷도, 친척들의 모임 에도 될 수 있으면 참석하지 않았던 것이다. 윤 마담은 그 돈을 세어보면서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텅 비고 웬일인지 허무감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외 로움이었다. 장 씨의 후줄그레한 뒷모습에서 석연치 못한 쓸쓸함을 느 꼈다. 얼마 안 있으면 나이 마흔, 그동안 이 돈을 벌기 위해 인색하고 지 독하단 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을 버린 전 남편에 대한 복수라도 하듯 악 착같이 살아왔던 것이다. 도둑 맞을까 봐 자동 경보장치를 설치하고 이자 돈을 늦게 갚으면 인정사정없이 차압딱지를 발송케 하고, 그렇게 해서 벌어들인 것은 돈 이었지만 가만히 생각하니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은 것 같았다. 잃은 것은 그녀의 인생이었다. 아무도 그녀의 주위에 없었다.
“이것이 뭐기에.” 그녀는 침을 발라 돈을 세다가 그만 그 돈을 땅바닥에 던져버렸다. “이것 말고 더 귀한 것이 있을 텐데, 그것이 무엇일까?” 그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자신의 삶을 풍족하게 해줄 수 있는 다른 무엇이 있을 것 같았다. 길거리에 榮 그리고 앉아 기타를 두들겨가면서 지나가는 행인들에 게 동전을 구걸하는 맹인 부부의 얼굴에도 기쁨이 넘쳐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기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고작 동냥 받는 몇천 원의 돈에서 기쁨을 찾는 것일까? 그리고 아침마다 들리는 청소원 아저씨의 밝은 얼굴, 좌판 아줌마의 피곤함에 젖은 얼굴에서 초조와 불안의 그림자보다 오히려 행복감이 엿보이는 건 웬일일까? 그런데 나는 왜 장롱 속에 수천만 원을 숨겨두고 행복은커녕 매일 초조와 불안에 떨며 전전긍긍하고 살아갈까? 그러다가 문득 조금 전 물벼락을 씌워 내쫓은 장 씨에게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 마담은 마음이 심란해서 그날은 하루 쉬기로 했다. 모처럼 극장 구경이나 갈까 하고 생각했다. 옛날 고등학교 시절 몰 래 들어가 보았던 남녀의 사랑에 얽힌 애정 영화를 구경하기로 했다. 그동안 살아가는데 너무 시간을 뺏겨 감정이 메말랐다는 생각이 들 었다. 중매하면서도 상대방의 기쁨을 생각하기에 앞서 중매 수수료에 신 경을 써왔던 자신의 마음이 너무 인색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는 옷을 주워 입고 바깥으로 나왔다. 그녀의 집 앞 골목이 끝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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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길에 요즘 새로 생긴 성당이 있었다. 매일 하루에 두 차례씩 보는 성당 건물이었지만 그날따라 새삼스럽 게 느껴졌다. 그녀는 극장을 가려다 말고 성당 뜨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미사 시간이었다. 여신도들의 머리에 뒤집어쓴 보자기가 산뜻해 보였다. 영성체하는 모습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었다. 전능하신 천주와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과연 생각과 말과 행위로 많은 죄를 지었으며 또한 나의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그들의 얼굴에는 자신이 미처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이 넘쳐흘렀다. ‘저 사람들 가운데 나처럼 돈을 숨겨 놓고 혼자 몰래 세어보며 즐거 움을 만끽하려는 사람이 있을까? 물론 있겠지.’ 그녀는 만약 내가 수중에 돈 한 푼이라도 없다면 나는 죽은 송장이 나 다른 바 없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에 죽자사자하고 돈을 모았다. 그런데 그녀의 가슴에 허무가 밀려온 것이다. 돈이 없어도 사람대접 받고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무엇이 있지 않을까, 그러자 그녀는 그 동안 자신은 남들에게 베푼 것이 너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자기 뒤집어쓴 여자들 틈에서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녀는 용기를 내어 성당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치 패잔병 같은 심정이 들었다.
사무장 옆에서 말을 주고받는 수녀에게 다가가, “수녀님 저도 이 성당에 나올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젊은 수녀의 얼굴은 깨끗했다. 자기처럼 돈 욕심이 없는, 아니 처음 부터 그럴 생각이 없는 딴 세상에서 온 천사와 같이 느껴졌다. 수녀의 얼굴과 자신의 얼굴을 비교해 보니 자신의 얼굴은 너무도 때가 묻어 있 는 것처럼 느껴졌다. 공해와 세속적 욕심의 때가 묻지 않은 젊은 수녀의 얼굴을 대할 때 자신이 살아온 지난날이 부끄러워졌다. 수녀는 윤 마담에게 “초 신자이신 모양인데 좋은 생각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늘 선생님 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주님이 선생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선생 님이 찾아오시는 것이 마땅하지요. 참 반갑습니다.” 하면서 그녀를 성당 뒤쪽의 수녀관으로 데려갔다 그녀는 마치 주인의 손에 끌려가는 한 마리의 소처럼 억지로 떼어지 지 않는 발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 속에서는 죄짓고 쫓겨 다 니다 자수한 범인의 심정처럼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앉으십시오.” 그녀가 의자에 앉자 수녀는 그녀를 위해 성호경을 긋고 그녀를 위해 간단한 기도를 했다. “전에 교회나 성당을 다녀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어릴 적 교회 성가대에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흥미 삼아 다녀본 것이죠” “가족관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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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몸입니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하셨겠습니다.” “그래서 남들에게 괄시받지 않기 위해 열심히 돈을 모았습니다. 돈이 제가 갖는 신앙이었습니다. 괄시받지 않고 사람 대접받으며 이 세상을 꾸 려 가자면 돈이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어느 정도 돈을 모았습니다만….” “잘하셨어요. 돈이 있어야지요. 그러나 이제부터 돈보다도 마음속 에 사랑을 쌓아가는 생활이 필요한 것 같아요. 선생님이 돈으로 인해서 잃어버린 것을 살아가면서 찾아야 해요. 남들과 원수진 것을 풀고, 용 서를 해주고 그럼으로써 선생님이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자면 자신이 가진 것으로 베풀어야 합니다.” 윤 마담은 수녀의 ‘베풀라’는 말에 “그럼 제가 가진 돈을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란 말입니까?” 하며 정색을 했다. ‘그게 어떤 돈인데, 마음이 심란해서 성당을 찾아왔는데 겨우 애써 번 돈을 게으름뱅이들에게 나눠 주란 말인가? 그래야만 보자기 쓴 사람 들과 어울리며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녀는 웃으면서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재물은 때로는 마음의 평 화를 깨뜨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남들에게 베풀어 줌으로써 더 많은 것 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목숨을 버리려는 자는 얻을 것이요, 목숨을 아 끼려는 자는 목숨을 잃을 것이란 성서의 말씀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갖 고 계시면서도 평화를 느낄 수 있을 만큼의 재물만 필요하다는 이야기 입니다.”
수녀관을 둘러보니 값나가는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값나가는 그 림도, 도자기도, 전자 제품도 없었다. 그러나 거기엔 이상하게도 마음 을 아늑하게 해주는 그 무엇이 있었다. 내용도 모르고 값나가는 그림을 사서 벽에다 붙여 놓고 그걸 들여다 보면 느끼던 즐거움, 그것은 어쩌면 가짜일 것 같았다. 그림을 감상하 며 진정한 즐거움을 느낀 것이 아니라 그림의 값을 견주어보며 쾌감을 느꼈다. 윤 마담은 이렇게 혼자 살아가면서도 그 안에서 행복을 느끼는 수녀 가 부러웠다. 그래서 물었다. “수녀님은 월급이 얼마나 되십니까?” “월급은 없습니다.” “그럼 생활하는데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가 내일 먹을 것을 걱정합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물며 하느님이 창조하신 사람에게 어려움을 주겠습니까? 선생님 절대 늦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저를 찾아오신 것 도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 말에 윤 마담은 그동안 가졌던 강퍅했던 마음이 점차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선생님 같은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미사에 참례한 사람들도 처음 엔 다 선생님 같았습니다. 자주 찾아오십시오.” 수녀의 말을 듣고 수녀관을 나온 윤 마담의 발걸음은 처음의 패잔병 같은 발걸음이 아니었다. 한결 발걸음에 가벼웠다. 평소에 경멸하던 장 님 악사부부도, 절름발이 불구자도, 모두가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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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후, 그녀는 마침내 교리 공부를 마치고 ‘기름 부음’을 받았다. 통뼈 마담이 아니라 ‘루시아’란 본명으로 새로 태어났다. 그녀가 이상스럽게 느꼈던 미사보를 쓰고 미사예식에 참례했고, 진 정 삶의 즐거움이 무엇인가를 느꼈다. “인생이란 돈이 전부가 아닙니다. 돈 말고 또 다른 무엇, 그것은 사 랑입니다. 자매님도 늦지 않았습니다. 닫았던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그리고 주님 앞에 기도하세요.” 그녀는 자신 있게 남들에게 말할 수 있게 됐다. 놀라운 변화였다.
김광한
1944년 서울 용산 출생. 중앙대 문과대 국문과 69년 졸업. 한국문인협회회원. 중앙대 문학상(2024년), 문예춘추 문학상(2019년)
K-맘(Mom)의 발상지 춘천 박사마을
송병훈
‘박사마을’하면 춘천 서면이다. 10개 마을 면 단위에서 박사가 220명,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도 유일하다. 사람들은 그 원인을 알고 싶어 한다. 삼 악산의 정기를 타서라고 말할 수 있다. 삼악산(三岳山)은 춘천시 서면에 있 는 용화봉(654m), 등선봉(632m), 청운봉(546m) 3개의 봉이 의암호수를 내려다보고 서 있다. 1973년 강원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됐고, 의암호를 가로질러 삼악산 정상까지 케이블카가 운행되고 있다. 의암댐 건 설 전에는 서면에서 시내로 가려면 배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서면 아 낙네들은 산나물을 광주리에 이고 두 개의 강을 건너 소양로 야시장에 내 다 팔아서 아이들 학비를 마련했다. “내 자식만큼은 시골 농부로 버려두지 않겠다”고 억척스레 뒷바라지한 어머니의 향학열이 박사마을을 탄생시킨 것이다. 어머니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표현은 헌신·봉사·사랑이며, 자식 사 랑의 표본이다. 이같이 K-맘(Mom)이라는 별호를 공표할만큼 지극한 정 성의 열매로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박사마을’의 발상지 로 춘천 서면이 탄생했다. 춘천시 서면은 평범한 농촌 마을이지만 ‘박사마을’로 불리는 특별한 곳 이다. 우리나라에서 면 단위 인구당 박사가 가장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1968년 송병덕 박사를 시작으로 현재 220명의 박사가 배출돼 국내는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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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다. 한승수 전 국무총리도 박사 마을이 배출한 인재 중의 한 사람이다. 서면이 박사마을로 널리 알려지면서 1999년 금산리 마을 입구에 ‘박사 마을 선양탑’이 기념물로 세워졌다. 최선화 전 박사마을선양탑 관리위원 장께서 애써주신 결과물이다. 선양탑에 새겨진 박사 수가 넘쳐나면서 별 도로 명판을 만들어 박사명단을 계속 올리고 있다. 경춘국도 서면 입구에 는 ‘봄날에 서면(봄날은 춘천을 말함)’이란 현수막을 걸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으면서 춘천의 명소가 되었다. 춘천 박사마을은 광주리에 산나물을 이고 내다 팔아온 어머니의 정성 으로 핀 꽃과 그 열매이다. 어머니의 뜨거운 정성의 결실은 면 단위에서 배 출된 박사 수로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기록을 세웠 다. 아들 송철규 문학박사(중문학 전공·1996년) 학위를 받은 다음 본인도 2015년 성산효대학원대학교에서 효학박사 학위를 받아 선양탑에 부자 이 름이 새겨졌다. 대한민국의 자랑거리로 명문화해서 소개하고픈 마음으로 대표적인 어 머니상을 찾아봤으나 어떤 어머니도 “나는 이렇게 자식을 공부시켰다”고 나서주시는 어머니가 한 분도 안 계신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어머니, ‘K- 맘(Mom)’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220명의 박사를 탄생시키고도 입을 꼭 다물고 계시는 춘천 서면 ‘박사마을’의 어머니 모든 분이 바로 K-맘의 대 표임이 분명하다. 모든 K-맘들께 고맙고, 감사하다.
島松 宋炳勳
아버지
문기명
아버지 하면 한걸음에 달려오시더니 이제는 소리쳐도 들어주시지 않는다
아프다면 곁을 떠나지 않으셨으며 걱정하는 기색엔 편지를 써 주셨다
찬바람이 울타리 흔드는 소리에도 문풍지 손보라는 말씀이 없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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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못해 더 이상은 힘들어 절망에 빠져드는 시간
무거운 발걸음 땅바닥에 주저앉는 절망 속에서도
안돼안돼 조금만 더 힘을 내 결승점을 넘 자.
다짐
재물을 쫓으면 돈이 되지만 사람을 쫓으면 사람이 없다
행복을 쫓으면 보이지 않고 행복의 실체는 마음에 있다
흙으로 돌아갈 남은 시간을 자신을 찾으려 다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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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
마음속에 옹이가 박혀있어 가슴이 아리고 쓰려오지만 치유의 연고를 찾기 힘들다
생이가 빠져나간 아픔 같은 통증이 온몸에 수며 들지만 휠체어에 앉아서 참아보련다
온산을 붉게 물들인 단풍처럼 세상이 변화하는 의미를 찾아 한들거리는 나뭇잎이 되어갔다.
겨울에 핀 꽃
작은 키에 왜소한 몸매 누구도 친구 돼주지 않았다
왜 자랑거리가 없을까 곁에 와주는 사람이 없다
눈길을 받지 못하는 것은 견뎌보라는 인내의 시험
봄 여름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어 꽃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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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삶의 여정은 때때로 벼랑 끝에 서 있는 듯했습니다. 리먼 브라더 스 사태가 일어났던 그 시절, 저는 아내와 8개월 된 아이와 함께 뉴욕에 서 유학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낮에는 학교에서 공부하며, 하교 후에는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습니다. 하지만 경제적 어려움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고, 결국 기초생활 수급 대상자라는 극단적인 상황 에 이르렀습니다. 그때는 죽음조차 생각할 만큼 힘든 날들이었지요. 그런 절망 속에서도 저는 “오늘 하루만 이겨보자”라는 마음으로 하 루하루를 버텼습니다. 작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매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려 애썼습니다. 그러던 중 기적 같은 일들이 차례로 일어나기 시 작했습니다. 저를 지탱해 준 것은 바로 그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한국 으로 돌아와서 몇 년을 가족과 일만 바라보다가 조금씩 여유가 생겨 아 름다운 시 한 편이 나에게 위로가 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 내가 받은 위로를, 시를 통해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번 사단법인 푸른 세상에서 발간하는 아시아문예 신인상을 받게 된 소 식을 받고 기쁘고 감사를 느꼈습니다. 먼저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심사위원과 모든 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특히 아내와 아이에게, 또 그간의 어려움을 함 께 견뎌준 이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문기명
미국 유학. “더 멘탈”(부자가되는 20가지 비밀).
등대
유선희
꽃마저 모두 떨어져 버린 외딴 벽을 스치는 바람 앙칼진 비명으로 떨고 있다
엄숙하고 절박한 호흡으로 스치는 바람결 어둠 속에서 껌벅이는 포구의 등대 불빛.
아시아문예•199
가로등
어둠과 함께 향기 없는 꽃 햇빛을 가려주려 애쓴 탓야 윈 줄기며 벌레 먹은 잎들
코 막힌 나방이 날아오른다 눈먼 박쥐도 가지에 눕는다 불은 밝히지만 향내는 없다
밤새 등줄기에 찌든 땀 내음 때 묻은 옷은 혼자 지껄인다 낮 밤 고개 든 향기 없는 꽃.
비
흙이 다문 입을 벌리도록 가을비가 설탕처럼 내린다
젖은 자동차 소음에 찌든 채 현수막 찌푸린 사연의 고백
길을 덮는 소리에 돌아 누어 고장 난 복사기처럼 무반응
무릎 관절도 빗소리에 놀래 걸음을 멈추라 돌아눕는 바람.
아시아문예•201
퇴근길
붉은 하늘이 걸려 있다 긴박했던 일터에서 풀려났다
신호등 앞에서 기다린다 멈추었다 일어나는 언어들
귓속을 기쁨으로 채워준다 조금은 비틀거리는 추억들
하루를 삼켜버린 시간들이 마음을 들뜨게 하는 퇴근길.
노인의 기도
어머님의 푸념 같은 하소연은 오랫동안 쌓여온 슬픔과 기쁨 용수철처럼 가득하게 쏟으신다
호박잎 같은 마음으로 기다린 자식들의 발걸음 같은 기쁨이 끝없는 용서로 자식을 감싸준다
주름살과 사랑 베푼 거친 손은 긴 세월을 살아내신 위대한 삶 한결같이 좋다 시는 오막살이 집
하얀 틀 이빨 미소 보여주시는 흰머리의 흔들리는 옛이야기는 외로움 기다림도 세월에 가두고 눈물로 두 손 잡은 자식들 기도.
아시아문예•203
당선 소식을 듣는 순간 마음이 찡했다. 또 다른 내면의 아름다운 세 상이 보이는 것 같았다. 10년 전 50이 넘어서면서 어느 날 반백 년 지 난 세월을 회상해 보니 여고 시절 문학소녀가 되어 시를 즐겨 읽고 쓰 던 그때가 행복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시 낭송을 접하게 되었 고 시를 읽고 쓰기 시작했다. 업무를 보면서 퇴근 후 틈틈이 자투리 시 간을 이용해서 산책길을 나서면 저절로 시를 흥얼거렸고 시어가 떠오 르면 습작을 해왔다. 지금에서야 시인의 꿈을 이루고 싶은 욕망이 꿈틀 거리어 투고를 했는데 당선이 되어서 너무 감격했다. 앞으로 순수한 서 정시를 쓰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시를 쓰고 싶다. 등단의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유선희
1961년 경북 고령출생. 현재 늘봄재가복지센터 센터장, 대구시 낭송협회 국장
시 심사평
영감의 신비성과 시적 작위(作爲)의 형상화
모름지기 미적 주권을 확립시키고 ‘내적 충만인 사유(思惟)의 시간’ 을 지닐 수 있는 인자(因子)는 또 하나의 놀라움에 적합하다. 이 같은 현 상에서 충직한 독자의 시선을 끌기에 족한 정신적 생산물을 통하여 오 랜 각고의 노력 끝에 한층 더 시적 해법은 자의적 은폐(隱蔽)가 아닌 화 해를 위한 타협의 언어(Logos)에 해당한다. 까닭에 「아시아문예」신인 상 시부분 응모의 심사평에서 비교적 단조로운 호흡으로, 시적 정조(情 調)를 삶의 동질성으로 일깨워준 문기명님의 시편 <아버지> 외 4편과 유선희님의 <등대> 외 4편을 놓고 ‘작가와 작품은 별개라’는 신비평의 이론에 걸맞게 객관적인 측면에서 엄격한 심의를 걸쳐 일체의 거부감 없이 당선작으로 각각 확정한다. 어디까지나 소소한 삶의 일상에서 ‘아버지 하면 한걸음에 달려오시 더니 이제는 소리쳐도 들어주시지 않는’ 이 같은 심적 정황에서 “아프 다면 곁을 떠나지 않으셨으며/걱정하는 기색엔 편지를 써 주셨다(아버 지)”의 보기에서나 시적 기법(craft)으로 청유형 어미를 동원하여 “무거 운 발걸음 땅바닥에/주저앉는 절망 속에서도//안 돼 안 돼 조금만 더/ 힘을 내 결승점을 넘자.(마라톤)”의 경우도 놀랍거니와 삶의 교시(敎示) 로 “재물을 쫓으면 돈이 되지만/사람을 쫓으면 사람이 없다(다짐)”라는 일면은 응축된 시적 형상화로 또 하나의 신선한 충격(衝擊)이다. 또 한편 비록 ‘통증이 온몸에 스며들지만’ “온산을 붉게 물들인 단 풍처럼/세상이 변화하는 의미를 찾아/한들거리는 나뭇잎이 되어갔
아시아문예•205
다.(나뭇잎)”의 일례나 ‘왜 자랑거리가 없을까’라는 반문 앞에서도 푸른 식물성 언어를 결(結) 곱게 직조(織造)하여 그 자신이 놀랍게도 지상에 갈 앉게 나직이 읊조린 “눈길을 받지 못하는 것은/겨울이 되어 꽃을 피 웠다.(겨울에 핀 꽃)”라는 시적 해법은 더없이 감동적이다. 무엇보다 직 면한 삶의 현상에서 저마다 사유의 인간은 흔적을 남기는 존재이기에 때로는 물안개 뒤 불투명한 기억의 흔적을 소통의 화소(話素)로 이처럼 빚어내고 있다. 그렇다. 그 자신의 창조적 행위로 기억과 대상을 인지 시키는 적절한 당위성은 시적 상상력과 맞물린 생명의 재해석에 해당 한다. 모처럼 엄숙주의(嚴肅主義)라는 삶의 시간대에서 그 자신의 ‘따뜻 한 감성과 언희(言戱)에 의한 경계 허물기’는 감정의 절제로 불필요한 여백의 틈새를 못내 허락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연유로 생생한 일탈의 정신에 서정성의 대상인 자연을 올 곧게 시의 종자로 예술적인 감응(感應)과 터치로 그 자신의 시편에 수 용한 따듯한 감성의 시적 행위는, 고독한 순례자의 창조적 정신 능력의 생산물로 해석된다. 차제에 ‘외딴 벽을 스치는 바람 앙칼진 비명으로 떨 고 있는’ 정황에서 화자(persona)인 유선희님이 그 나름으로 “엄숙하 고 절박한 호흡으로/스치는 바람결 어둠 속에서/껌벅이는 포구의 등대 불빛.(등대)”에서 확증하는 시적 해법인 원근조망법(遠近眺望法)도 물 론이거니와 또 다른 시편인 “밤새 등줄기에 찌든 땀 내음/때 묻은 옷은 혼자 지껄인다/낮 밤 고개 든 향기 없는 꽃(가로등)”은 묵언의 응시로 관망하지 않을 수 없다. 까닭에 ‘길을 덮는 소리에 돌아 누어 고장 난 복사기처럼 무반응’ 뒤에 “무릎 관절도 빗소리에 놀래/걸음을 멈추라 돌아눕는 바람.(비)”의 일면도 그렇거니와 “붉은 하늘이 걸려 있다/ 긴박했던 일터에서 풀려났다(퇴근길)”에서 새삼 확증되는 ‘멈추었다 일
어나는 언어들’의 긴장감은 못내 이채롭다. 모처럼 ‘이 지상의 위대한 이름! 어머니(老母)의 푸념이 묻어나는 悲壯感’에 ‘주름살과 사랑 베푼 거친 손은 긴 세월을 살아내신 위대한 삶’에 “흰 머리의 흔들리는 옛이 야기는/외로움 기다림도 세월에 가두고/눈물로 두 손 잡은 자식들 기도.(노인의 기도)”의 일면은 다정다감하다. 결론적으로 수동적인 사물과 능동적인 사물을 결합하는 시적 상상 력의 확장은 더없이 매혹적이기에 정신적 빈곤을 체득한 대다수 현대인 에게 미적 주권이 확립된 뜻깊고 정치(精緻)한 심성의 경위는 이채롭다. 모쪼록 잘 다듬어진 목관악기에서 쏟아내는 음계는 한층 맑은 음조를 쏟아내어 따뜻한 감성의 시적 감흥을 느낄 수 있기에 시적 치유의 가능 성을 열어주기에 거듭 두 시인의 명예로운 등단을 함께 축하한다.
<심사평: 엄창섭 본지고문, 이진모 편집주간>
아시아문예•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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