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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부림동

이북 원문에서 글자만 옮긴 전체 텍스트입니다. 표·그림·사진과 원래 모양은 이북에서 확인하세요.

2쪽

일러두기 1. 표준어와 외래어 표기법을 우선했으며, 구술자 고유의 표현을 최대한 살리고 대담자의 입장을 반영해 구어체와 관용어로 표기한 부분도 많습니다.

2. 책, 영화, 음악 등 모든 종류의 창작물 제목은 < >로 묶었습니다. 3. 이 책의 수록 사진은 박태호 사진작가의 작품을 중심으로 각 필진이 직접 촬영하거나 과천시청, 과천문화원, 인터뷰이 등에게 제공받은 사진을 활용 했습니다. 각 사진에 출처를 표시할 수 없어 앞서 이를 밝힙니다.

4쪽

과천시민이 부림동에서 보고, 듣고, 찾고, 느낀 모든 것

004 발간사 006 축사

012 참여자 소개 022 부림탐구생활 058 기획 설문조사 ‘부자부자’ 070 플러스 인터뷰 ① 황정애 부림동장

010 프롤로그 : 사라질, 그러나 사라지지 않을….

5쪽

072 이웃과 벗이 되는 공간

158 인생네컷 : 과천인 4인 구술사 풍요의 마을을 기억하며 ‘건축가 지광명’ 산제사를 아시나요? ‘토박이 김시환’ 삼대가 함께하는 과천살이 ‘부부 이남교, 이하순’ 나의 두 동네 이야기 ‘어르신 유화실’ 132 플러스 인터뷰 ② 재건축 앞둔 9단지 상가 과천갈비사장 188 한눈에 보는 부림동

074 부림별곡 090 과천 토박이 대학생의 양재천 생생리포트 112 굿바이, 팔구단지

138 부림 산책 ① 과천 엄마의 특별한 공간과 시간 150 부림 산책 ② 진정한 쉼을 누리는 대공원나들길

190 편집후기

6쪽

발간사

함께 만드는 미래를 위한 첫걸음

2024년 옛 읍내리 마을 조사 사업의 결과물로 부림동의 역사와 문 화, 그리고 주민들의 삶을 기록한 마을지 <여기, 부림동>을 발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부림동>은 우리의 지난 시간과 기억을 모은 소중한 결실이며, 부림동의 미래를 향한 작은 다짐이기도 합 니다. 마을지에 담긴 글과 사진, 이야기 속에는 부림동을 사랑하는 주민들의 애정과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부림동은 과천시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중요한 마을입니다. 부 림(富林)이란 고려 성종 때 붙여진 과주군의 별칭으로, 조선 정조 임금이 들러 과천현의 관아에 손수 쓴 부림헌(富林軒) 현판을 하 사했을 만큼 과천의 풍요로운 자연과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을 담은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후 시대의 흐름 속 에서 부림동은 수많은 변화를 겪어 왔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지 역 주민들의 따뜻한 마음과 끈끈한 연대가 있었습니다.

이번 마을지는 바로 그 소통과 협력의 가치를 잘 담아내고자 했습 니다. 각 세대와 계층의 목소리를 담고, 부림동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보며, 우리 공동체가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를 되돌아보았습 니다. 또한, 마을의 미래를 더욱 밝게 만들어 가기 위한 방향도 고 민하며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부림동의 역사를 더욱 풍 성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7쪽

마을지 발간은 단순히 과거를 기록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갈 미래를 위한 첫걸음입니다. 이 책이 각 가정의 서가에, 마을 회관의 책상 위에, 혹은 주민 여러분의 마음 속에 오래도 록 남아 부림동의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이번 마을지 발간을 위해 수고해주신 필진 여러분, 인터뷰에 응해주신 주민 여러분과 직원,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무엇 보다 마을지를 발간할 수 있도록 후원과 격려를 보내주신 신계용 과 천시장님과 과천시의회 하영주 의장님 및 의원님들, 인터뷰와 필요한 자료들을 흔쾌히 협조해주신 부림동장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 니다.

2024년 12월

과천문화원장 이 정 달

8쪽

축사

부림동 마을지, 정체성 다지는 소중한 자산!

안녕하십니까, 과천시장 신계용입니다. 우리 부림동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주민들의 삶의 이야기를 담은 여기, 부림동 마을지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번 마을지 발간은 부림동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하고, 미래 세대 에게 우리 지역의 소중한 유산을 전달하는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 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과 추억이 담긴 이야 기들은 재건축을 거치며 변해가는 부림동의 정체성과 공동체 의 식을 더욱 굳건히 하는 소중한 자산이 될 것입니다.

부림동은 과천의 중심지로서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간직하고 있으 며, 현대적 발전과 함께 조화롭게 성장해 온 우리 과천의 자랑스러 운 동네입니다. 이번 마을지를 통해 부림동 주민들이 자부심을 느 끼고, 더욱 활기찬 마을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 니다.

9쪽

마을지 발간을 위해 수고해주신 과천문화원과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신 주민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앞으로도 부림동 이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살기 좋은 마을로 더욱 발전해 나가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24년 12월

과천시장 신 계 용

10쪽

과천시 면적의 2%가 채 안되는 동네 33개 통의 1만 4천여 명이 사는 마을 작지만 강한 여기, 부림동!

12쪽

프롤로그

지도로 보는 부림동

: 사라질, 그러나 사라지지 않을 …

과천문화원은 지난 2023년부터 ‘시민 주도로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마을조사서’를 발간하고 있습니다. 올해에는 예로부터 ‘읍내리’라고 불렸던 동네 중 하나인 부림동을 탐구했습니다. 20대부터 70대까지 나이는 물론 삶의 궤적은 전혀 다르지만 과천시에 살고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같은 시민 아키비스트 9명이 참여했습니다. 부림동을 보고, 듣고, 찾고, 느낀 다채로운 이야기를 찾았습니다. 특히 재건축으로 곧 사라질 풍경 속 사람들의 기억이 아쉬워, 이를 영원한 추억으로 기록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과천시에서 작은 면적에 인구밀도 높은 마을로 꼽히는 부림동. 그만큼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과 삶이 가득한 동네 이야기 산책길로 초대합니다.

과천동

관문동

부림동

중앙동

별양동

원문동

문원동

갈현동

주암동

막계동

13쪽

과천조은 어린이집

튼튼어린이집

양재천

<2024년 부림동 주민센터 관내도 참조>

부림3길 어린이놀이터

과천갈비

과천주공 9단지 아파트

과천주공 8단지 아파트

8단지 유치원상가

남서울상가

과천시가족여성센터

2 1 농협

부림동 주민센터

대공원나들길 세븐일레븐

파리바게뜨

관문초등학교

4호선

과천시립 아람어린이집

과천센트럴파크 푸르지오써밋아파트

14쪽

류설아 _ 총괄 기획

15년가량 취재기자로 일하며 한국기자상 수상과 책 발간이라는 두가지 목표를 이룬 후 프리랜서를 선언. 조직은 싫고 공동체는 좋아서 사람과 글이 있는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활동. 평범한 사람들의 구술 기록하며 눈물짓고 시민과 협업하며 미소 짓는 감동적 순간에 중독, 매번 도망치고 싶은 마감 압박을 새까맣게 까먹고 오늘도 생각하고 쓰고야 마는 글쟁이.

15쪽

과천에 이사온지 29년차로 준 토박이다. 30대부터 지금까지 사진촬영 활동으로 과천 단체들 행사 기록과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수상경력을 쌓았고 과천에서 사진작가 협회를 창설했다. 과천시 지부장을 역임하고 동아리를 가르치며 많은 작가를 배출했다. 과천 어르신들의 장수사진을 700여 명 무료로 촬영하고 액자에 담아 증정했고, 지금도 계속 추진 중이다. 표창 경력은 과천 시장상 및 국회의원 표창과, 도지사 표창, 효행 봉사부문 과천 시민 대상 등 그외 다수 수상했다. 앞으로의 계획은 2020년에 했던 개인전을 다시 해보는 것이다.

박태호 _ 사진

16쪽

전직 웹툰작가. 과천시 sns기자 및 낙서예술가로 어르신들과 활동 및 강의를 하고 있다. 강사로 일하다가 최근 다시 작가로 되돌가기위해 창작력을 증진중이다. 과천의 복덩이로 과천에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노력중이다.

강지혜 _ 표지 디자인, 내지 삽화

17쪽

궁금증이 발동하면 끝을 보는 성향인데 부림동과 관문동 사이의 궁금한 이야기는 30여 년 동안 묵혀두었다. 올해, 무더위가 시작되는 여름 초입에서 나는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로 했다. 행정동과 법정동으로 분류되는 부림동과 관문동 이야기는 올 여름 만큼이나 진땀나게 했지만 마무리하는 기쁨도 주었다. 이것이 30여 년 걸릴 일인가도 싶지만 그래도 마음속 묻어두었던 궁금증을 동료들과 함께 과천문화원에서 해결하고 마침표를 찍어서 기쁘다. 이 기쁨을 모두와 공유하고 싶다.

김소화 _ 부림탐구생활

18쪽

이남교 _ 기획 설문조사 ‘부자부자’, 인생네컷 인터뷰

부림동에서 40년 넘게 살고 있어 과천을 제2의 고향이라고 하는 사람. 날마다 이른 아침에 양재천을 산책하는 재미로 사는 사람. 과천문화원 경험공유학교, 과천시장애인복지관 시민옹호인, 부림동 주민참여예산위원 등으로 활동하는 사람. 과천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 손자들과 함께 바쁘게, 부지런히 살고 있는 사람.

19쪽

임용훈 _ 부림별곡, 인생네컷 인터뷰

백세시대, 와유(臥遊)의 공간을 찾아서 …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면 보이나니 …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20쪽

최이룸 _ 토박이 대학생의 양재천 생생리포트, 설문조사 지원

2008년부터 과천에서 자라며 학창시절을 모두 이곳에서 보냈습니다. 현재는 대학에 다니며 과천의 한 카페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재수 시절, 서울에서 과천으로 넘어오는 순간 깨끗한 공기가 느껴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초록의 나무들과 함께했던 소중한 기억들을 간직하며, 주변이 어떻게 변해도 제 마음속 과천은 항상 변치 않을 것입니다. 과천은 저에게 특별한 고향입니다.

21쪽

살고 싶은 도시 1위 과천으로 이사와 아이와 함께 다양한 경험을하고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가려 노력하다보니 이제는 곳곳에 스며있는 추억때문에 더욱 소중해진 나의도시 과천. 푸르름 가득한 과천에서 꽃과 식물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되었다. 그 관심이 일이 되었고 이제는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아름다운 환경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일상을 보내고있는 나의 과천 이야기를 추억해보며 동시에 앞으로의 성장을 스스로 기대해본다.

조연민 _ 과천 엄마의 특별한 공간과 시간, 인생네컷 인터뷰

22쪽

‘아이들은 이런곳에서 키우고 싶다!’는 남편의 의견을 따라 직장도 가깝고 친정도 가깝던 분당에서 연고없던 여기 과천으로 이사왔다. 낯설기만 하던 이곳의 ‘한적함과 느림’에 스며들어가며 결국 안정적이던 직장생활도 마감하고 ‘아내와 엄마’로 살아간지 직장생 어느덧 20년이 흘렀다. 남편과 두아들, 어느덧 고양이 아들 하나까지 남자 투성이 가족의 분주함에서 고양이 이제 탈출해보려고 다시 바깥 세상으로 슬며시 이제 나서보는 중이다. 나서보 나

강보영 _ 굿바이, 팔구단지

23쪽

조은빈 _ 플러스 인터뷰, 부림산책

과천에 5살짜리 꼬맹이가 이사 와 크고 자라 24살의 미대생이 되었다. 과천은 나에게 첫 기억이고 나고자란 내 고향이다. 내 고향에 대하여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에 참여한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24쪽

부림탐구생활

글•김소화

부림동이 관문동인가? 관문동을 부림동이라고도 부르나?

과천에 이사 와서 한동안 헛갈린 동네 이름이다. 예전에 지인의 집이 부림동 주택가 끝자락에 있었다. 당시 신축하는 공원이 있었는데 이름이 관문체육공원이라고 했다. ‘부림동에 있는데 왜 관문체육공원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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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RIM DONG BURIM-DONG

물으니 모인 사람 중에 ‘여기가 원래 관문동이었다’고 대답했다. 헛갈림의 시작은 그때부터였다. 얼마 뒤 나는 이사를 하게 되어 공인중개사를 찾았다. 그곳에서 관문동 관련한 법정동, 행정동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뭐지? 또다시 궁금증이 발동했지만, 급한 일 처리에 그냥 묻고 지나갔다. 그리고 26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여기, 부림동>에 참여하면서 비로소 설레는 마음으로 부림동을 탐구했다.

26쪽

부림동 이름은 누가 지었을까?

부림동 주민센터 홈페이지 이름의 유래에서 ‘부림(富林) 이란 고려 성종 때에 과주군의 별칭으로 붙인 이름인데, 조선의 정조 임금이 이곳에 들럿을 때 과천현의 관아에 손수 부림헌(富林軒)이란 현판을 써 주기도 했다.’ 라고 소 개한다. 아마도 고려 성종 때 별칭으로 붙인 이름이 조선 후기 때까지도 불리고 있었나보다. 세월이 흘러 1982년 6 월 10일 경기도 조례 제1256호에 의해 관문리(官門里)일 부를 갈라서 과천의 옛 이름을 따서 부림동(富林洞)이라 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부림동이란 이름은 고려 성 종(981년~997년)때 별칭으로 붙여진 것인데 조선 후기를 거쳐 지금까지 1040여 년을 부르고 있는 현재형이다. 와~ 천년이라니! 그렇다면 부림동에 대적할 만한 고지명(古地名)이 있을 까? 후보 지명이 몇 개 있다. 1번 후보는 경주이다. 신라는 천 년 왕국이다. 우리는 신라의 수도를 경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당시는 계림이라 불렀고 신라가 멸망한 후 경주라 는 명칭으로 바뀌었으니 경주는 예선 탈락되겠다. 2번 후 보는 백제 부여다. 부여에 관해서는 잠깐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왕 538년에 사비천도가 있었다. 지금의 부 여로 당시에는 사비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신라 경 덕왕 10년(750년) 지명을 백제 시절 소부리(사비의 다른 이름)에서 ‘부여군’으로 개칭, 이후 오늘날까지 이 명칭이 쓰이고 있다. 그때를 기점으로 계산하면 1,274년 역사로 부여는 통과! 마지막 3번 후보는 경기도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경기도 는 2017년에 천년도시로 등극했다. 그래서 경기도도 통 과! 내가 아는 선에서 정리해 보니 천년 지명을 간직한 곳 은 부여, 경기도, 부림동 세 곳이다. 후에 내가 몰랐던 천 년고도를 알게 될 수도 있겠지만 늘어나는 수만큼 오랜 역사를 간직한 부림동에 관한 자부심도 커질 것이다.

(네이버 위키백과 참조)

28쪽

그런데 고려 성종은 왜 부림(富林)이라고 불렀 그런데 나의 이런 주장에 대해 경기학연구소에 을까? 한자의 뜻은 재물이 많고 넉넉한 사람들 서 풍수와 지명의 관계를 강의하고 있는 한웅 이 모인 곳 정도로 해석된다. 역사적으로 과천 씨는 다른 주장을 내놓는다. 지명중에 ‘부’라는 은 예부터 물이 귀해 논농사가 활발하지 못했 명칭이 들어가는 곳은 말과 연관이 있단다. 과 다. 그렇다고 상공업이 활발한 곳도 아니었다. 천시 부림(富林)과 용마골, 부여(扶餘)군 백마 그런데 왜 부림이라 칭했을까? 과천을 일컫는 강, 부천(富川)시와 거마산, 부산(釜山)시와 천 지명 중 율목(栗木)이란 말이 있다. 과천에 밤 마산, 창녕군 부곡(釜谷)면과 장마면, 창원 부 나무가 많이 있어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여기 림(富林)동과 용마산을 예시로 든다. 부에 해당 서 밤나무의 어원을 살펴보자. 박상진교수 저 되는 한자가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어 조 서 <우리 나무이름 사전>에서 ‘먹을 것이 부 금 애매하나 다만 예부터 말과 관계된 곳에 사 족하던 시절, 밤톨은 밥으로 먹던 중요한 먹을 람이 모였고, 그로인해 경제적 효과도 있었을 거리였다. 밥이 달리는 ‘밥나무’가 밤나무가 된 테니 부자마을이라는 궁극적 의미는 상통하는 것으로 짐작된다’라고 기술했다. 밤은 단순한 것도 같다. 간식거리가 아니라 귀중한 식량자원으로서 우 리 선조들은 끔찍하게 아꼈던 것이다. 아! 그렇 다면 밥에 상응하는 밤이 많이 있으니 부림이 라 부른 것은 아닐까?

29쪽

안양 동편마을 입구의 부림말 비석

실례로 2022년 과천시 ‘광창마을’이 옛 지명을 이쯤 되면 한웅 씨의 의견으로 기우는 분위기 찾았는데 한자 표기가 빛 광(光), 창성할 창(昌) 지만 명확한 역사적 자료가 없으므로 그의 주 에서 넓을 광(廣), 곳집 창(倉)으로 변경되었다. 장은 전설 따라 삼천리로 마무리한다. 여기는 광창마을 송 씨 집성촌으로 원로들의 부림동 지명으로 다시 돌아가서 전국적으로 부 증언에 따르면 광창마을은 논농사가 활성화해 림동이란 지명이 몇 개나 될까? 당시 과천에서 가장 부유한 곳이었고, 말의 먹 포털사이트를 검색해 보았더니 세 곳이 검색되 이를 보관하는 큰 창고가 있어서 광창이라고 었다. 첫 곳은 과천 부림동이다. 두 번째는 안 하였다는데 실제로 광창마을 인근에 양재역, 양시 부림동, 마지막 한 곳은 창원시 부림동이 인덕원역 등 역참이 있어 신빙성이 매우 높다. 다. 세 곳 모두 같은 한자를 쓰고 있다.

31쪽

과천과 안양은 지금은 행정구역 개편으로 다른 시가 되었지만, 대한제국 시절까지 안양은 옛 과천 현에 속해있었다. 두 지역은 실지로 한 지 역이었고 때문에 많은 문화를 공유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안양 동안구 부림동은 1993. 01. 15. 관양2동 관할 지역 중 평촌택지개발지구를 부 림동으로 분동(안양시조례 제1245호)되었다. 안양 부림동행정복지센터 홈페이지에서 지명 유래를 찾았더니 ‘부림동은 예로부터 산림이 울창했을 뿐만 아니라 인근 다른 마을보다 부 자가 많이 산다고 하여 부림(富林)말이라 칭했 다고 소개한다. 결론적으로 과천, 안양은 2~30 년 사이에 부림동이란 행정동이 생겼다. 왜일 까? 그것은 아마도 과천 관아에는 부림헌 현판 이 남아있고, 안양 동편마을 근처에 옛 부림말 터임을 알리는 비석이 말해주듯 오랜 세월 동 안 부림(富林)이란 의미가 계속 존재했고 그 맥 이 이어져 행정동으로 다시 태어난 것 같다. 이런 생각에 다다르자 갑자기 지역민으로서 뿌 듯한 마음이 솟구친다. 마지막으로 창원 부림동은 이제 법정동으로 행 정동인 오동동에서 관할하고 있다. 창원 부림 동의 명칭 유래에 대해 디지털창원문화대전에 서는 부림동의 옛 마을인 쑥걸이에 숲이 조성 되어 있어 ‘부림’이라는 지명이 생성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소개한다. 마을 숲은 들판의 강풍 이나 물길의 범람을 막아 마을을 자연재해로부 터 지켜줄 수 있다. 또 땔감에 의존하던 시절에 주민들의 삶에 큰 도움이 된다. 역시나 부림이 란 동네 이름이 괜히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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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동민의 나이테가 새겨진 곳은 어디?

부림동과 얽힌 추억을 떠올리면 함께 연상되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 부림어린이집과 대공원나들길이다. 그 중 부림어린이집은 1997년쯤 과 천으로 이사 온 친한 언니와 관계 있다. 언니는 한 아이를 둔 직장맘이었 는데 과천에 이사 와서 둘째를 낳았다. 갓난아기는 친할머니가 키워주 시다가 사정상 4세 무렵부터 어린이집을 다녔다. 그곳이 부림어린이집 이다. 시립이고 최근에 개소한 곳답게 시설도 깨끗해서 학부모에게 인 기가 많았다. 특히 건물 설계상 지하인 듯 지하 아닌 그런 구조였는데 앞 의 넓은 장소를 놀이터 전용으로 사용할 수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나는 언니의 퇴근이 늦어지거나 그 밖의 일이 있을 때 하원을 도와주곤 했다. 우리 애들에게 ○○ 데리러 가자고 할 때면 큰애는 킥보드에 올라타고 작은 애는 세발자전거에 올라타며 항상 신나 했다. 엄마와의 외출도 좋 고 또래를 만나 놀 수 있다는 기쁨이 아이들을 흥겹게 한 것이다. ○○를 만나러 가던 플라타너스 길 위에는 나의 귀엽고 작은 두 아이의 해맑은 웃음과 오후 햇살이 어우러져 나무 잎사귀가 유난히도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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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어린이집이 이사 나간 자리에 2016년 12월 하면 좋을 것 같다. 과천문화원에서는 2023년 27일 부림동 마을돌봄나눔터가 개소했다. 마을 과천의 역사를 담은 중앙동 에코박물관 프로그 돌봄나눔터는 맞벌이 가정 등 방과 후 홀로 있 램으로 부림어린이집 어린이들과 만남을 가졌 는 초등 자녀의 돌봄 공백을 해소하기 위해 지 다. 사진 속의 강사가 나다. 역 중심의 양육 친화적 돌봄을 하는 곳이다. 같 저 수업을 진행할 때 유독 열심히 했던 것은 내 은 해 7월 3단지에 1호점이 개소한 데 이어 2호 앞에 있는 아이들이 그때 그 시절에 내가 만났 점으로 개소했다. 2024년 기준 모집인원은 30 던 부림어린이집 아이 같은 느낌이 들어서 더 명이고 이용기간은 당해년도 3월 ~ 이듬해 2월 정이 간 것 같다. 까지 1년이다. 연말 12월경에 시청 홈페이지에 그렇다고 오해는 마시라~ 모집공고가 올라오니 이용을 원하는 분은 참고 난 어디서나 항상 열심인 강사이므로^^

36쪽

아이를 키우면서 과천대공원이 바로 집 인근에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 었다. 과천시민은 서울대공원 연간회원증 할인을 받았다. 지금도 그런 혜택이 있는지 모르겠다. 큰애가 세 살 무렵부터 매년 연간회원증을 끊었다. 어린이집에서 하원 한 아이들을 자전거나 유모차 등 연령대에 맞게 태워 거의 매일 다녔던 것 같다. 서울랜드 내에는 외부 도시락을 먹을 수 있는 장소도 있어서 동 네 엄마들과 도시락을 싸서 고만고만한 아이들과 갔는데 그때 먹었던 도시락은 학창 시절에 먹던 도시락보다 더 꿀맛이었다. 사진이라도 많 이 찍어두었으면 좋았으련만 핸드폰이 상용화되지 않던 시절이었고 어 린 아이들을 돌보아야 했기 때문에 카메라까지 챙길 여유가 없었다. 흔 한 말로 남는 건 사진뿐이라지만 다행인 것은 나에겐 사진 몇 장보다 뜨 거운 추억이 생생히 남아있어서 위로 아닌 위로가 된다. 대공원 나들길은 이름도 예쁘다. 나들길을 따라 만나는 8단지의 어느 동 은 강원도 어딘가에 있는 콘도 같았다. 서울의 복잡한 곳에서 살다가 과 천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나는 과천이 달력 화보 속에서 보았던 외국 의 어느 도시 같았다. 1995년도 그때만 해도 과천은 정말 타 도시와 차별 화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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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원 나들길은 그때나 지금이나 많은 시민이 이용한 다. 나들길에서 만나는 조형물들은 2010년에 설치되었 다. 부림동 주민들이 정성 들여 관리를 해주고 있어 항상 봐도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다. 애써 주시는 부림동 주 민들께 지면에서나마 감사인사를 드린다. 조형물 사이로 오가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추억을 쌓아가고 있을 것이 다. 50이 넘은 나는 앞으로 어떤 추억을 담을까? 그 생각을 하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추억은 무슨 …. 나는 살 좀 빼보려고 다닌다. 붙으라는 돈은 안 붙고 맨 지방만 붙는다. 비만이 돼 가는 내 몸을 보니 웃음이 순식 간에 탄식으로 바뀐다. 나도 한땐 날씬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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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의 비보숲은 언제 사라졌을까?

과천의 지질은 북부 화강암지대다. 그래서 과천의 토 양은 화강암이 풍화되어 생성된 갈색 삼림토이고 삼림 토에서 잘 자라는 나무가 바로 참나무 과다. 참나무 과 의 대표 수종으로 신갈나무, 굴참나무, 갈참나무, 상수 리나무, 밤나무 등이다. 이중 과천에는 밤나무가 많다. 과천시에서 해마다 밤줍기 행사가 가능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밤나무를 비롯한 다양한 나무들이 관악산이 며 청계산이며 우면산에 있었을 테고 동네 어귀에는 과천동 입구에서 볼 수 있듯이 느티나무가 정자수로 있었다. 이런 모습은 우리네 산천의 모습과 별반 다름 없다. 그런데 과천에는 특별한 숲이 있었다. 바로 부림 동에 있었다.

풍수적인 결점을 보완하는 법을 비보법이라고 한다. 우 리나라의 산줄기는 북쪽은 높고 남쪽은 낮아 햇볕을 잘 받으면서도 양옆의 산줄기들이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 주지만 부족한 부분도 있는데, 우리 조상들은 이것을 보 완하기 위해 마을숲을 조성하였다. 한국의 전통 취락에 서는 이처럼 숲을 통한 수구비보가 가장 일반적 형태였 다. 수구란 국내(局內)의 명당수(明堂水)가 합쳐 밖으로 흘러 나가는 곳이다. 한자로 물수(水), 입구(口)자를 쓰 는데 쉽게 표현하자면 물이 빠지는 구멍을 말한다. 풍 수 용어로서 수구는 명당을 둘러싸고 있던 물(水)이 역 할을 다하고 최종적으로 흘러 나가는 곳이면서 바람이 드나드는 곳이다. 풍수에서 수구는 오므라져 있어 물이 나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야 좋은 땅이라고 본다. 만 일 수구가 벌어져 마을 가운데로 물이 빠져나가는 모습 이 보이면 그 열려 있는 가운데로 동네의 기운이 빠져나 가 재물이 모이지 않고 재앙이 따른다고 본다. 또 큰 인 물이 안 나온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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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선조들은 풍수적 환경이 부족한 지형, 즉 동네의 앞부분이 막혀 있지 않고 트여 있으면 인위적으로 변형함으로써 생활환경을 개선하려 하였다. 조상들은 수구를 막기 위해 보통 나무를 심었다. 그 나무로 가장 적당한 나무가 느티나무라고 생각했다. 마을 입구에 느티나무가 정자수 로 많이 심겨있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지 형 조건상 이곳이 공허할 경우 조산(造山) 등의 수단을 써서 비보하는 것 을 수구비보라고 한다.

과천학연구소의 서동원 박사는 <과천읍지>에 기록된 수구수(水口藪) 는 숲을 조성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한다. 과천의 수구수는 과천 관아(현 재 온온사 및 과천초등학교)를 보호하기 위해 조성한 비보 숲이었다고 설명한다. 양재천 너머 현재의 8, 9단지 쪽의 지형은 과거 논밭이었는데 과천 관아 의 위치에서 보면 북동쪽 양재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물이 보이지 않게 하고, 반대로 양재 방향에서 들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조성한 숲이라 고 한다. 그리고 18세기 후반 작성된 <해동지도>의 과천현 도엽에도 수 구수(水口藪)라는 명칭의 비보숲이 뚜렷이 표기되어 있어 당시까지도 비보숲이 읍치의 중요한 풍수적 경관으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 단다. 이는 1872년 지방지도에도 표기되어 있으며, 1967년도 항측 사진 에도 선명하게 나타나 있어 육안으로 쉽게 확인이 된다. 서동원 박사와 인터뷰 끝에 풍수지리가 너무 어렵고 복잡하다고 했더니 다음과 같이 정리를 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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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1872년 지방지도

그림2] 1967년 항측사진

“과천의 비보숲은 1658년에 읍치 동쪽 1리에 조성되었으며 읍치의 득수를 조절하고 보완하는 풍수적 기능을 하였다.” 1699년 작성된 <과천현신수읍지>에서는 비보숲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현 동쪽 1리에 있다. 길이가 30여 보(步)이고 폭이 20여 보이다. 무술 연간에 현감 심추(沈樞, 1658∼1659)가 과천 관아를 위해 물 빠지는 곳을 막고 처음 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게 하였다.

- <과천시지> 1권 p186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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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보(裨補)는 우리 생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주택의 담장을 생각해 보자. 일반적으로 담장은 내 땅의 경계를 표현한다. 그러나 담장은 외부 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차단하여 내부의 따뜻한 온기를 보호하고, 밖 에서 보이는 내부의 모습을 차단하는 역할을 더 많이 하고 있다. 이렇듯 비보는 빈 곳은 막아주고 모자란 곳을 보완하여 조화된 자연에서 이상 적 생활을 꿈꾸었던 우리 선조들의 생활 방법이었다. 비보는 과거에만 적용하였던 것은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에서는 언제 어디에서나 필요한 것이다.”

요약된 이야기도 어렵긴 마찬가지지만 8, 9단지 앞을 지나게 되면 왠지 감사한 마음이 든다. 비보숲의 역할을 8, 9단지가 해주는 것 같은 생각 이 들어서다. 그런데 1967년에도 관측된 그 비보숲은 어디로 사라진 것 일까? 해답일지모를 이야기를 우연찮게 알게 되었다. 과천에서 200여 년째 거 주 중인 향교집 김세환 사장님의 구술을 통해서다.

“1967년 항측사진’에 수구수로 표시된 지역은 야트막한 야산이었고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큰 나무는 없었고 향나무, 회화목 등 키 작은 나무들과 주민들이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한 나무들이 식재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시절을 추정하니 대략 1960년 초에서 70년대 초반 사이로 당시 한국 사회의 여러 정황상 비보로 조성된 나무들이 생계를 위해 많이 베었을 것이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 1970년대 말 과천 신도시 개발이 진행되면서 비보숲의 흔적이 모두 사라지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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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문체육공원의 소재지는 어떤 동일까?

나는 관문체육공원을 당연히 부림동으로 알았다. 부림동 주택단지 골목 끝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어서 그렇게 생각했다. 나 말고도 부림동으로 알고 계신 분이 많을 것 같다. 그런데 알고 보니 지번 주소가 관문동 3인 관문동이 다. 과천 신도시 개발 전에 관문체육공원 자리는 관문리 였다. 과천 관아의 문이 있어 관문골로 불려 왔는데 1986 년 시 승격에 따라 관문리가 관문동으로 변경되었다. 관 문동으로 되면서 변화를 겪었다. 땅의 일부가 부림동으로 분류되었고 행정동이 아닌 법정 동이 되었다. 편의시설이 부족하니 사람의 왕래가 줄고 여기에 도로명 주소가 일반화되면서 중앙로로 불리고 재 건축 이후 전입 세대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관문동은 체육 공원 입구에 세워진 비석의 문구처럼 마음의 동네가 돼가 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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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에 오래 살았던 나도 부림동에 대해 원고 넓은 잔디밭, 다양한 나무 류, 초본 류가 식재되 를 쓰기 시작했을 때 가장 놀라웠던 것이 관문 어 있고 무엇보다 넓은 주차 시설을 완비하고 체육공원이 관문동이라는 사실이었다. 한때는 접근성도 좋아 시민의 사랑을 받는 공원이 되 과천 관문이었는데 지금은 사람들 시선 외곽에 었다. 관문체육공원으로 인해 관문동이 더 빛 있는 것 같아 짠한 마음도 든다. 그러나 관문동 을 발했다면 너무 오버일까? 은 거듭 변화하면서 오히려 부림동 주민, 더 나 관문체육공원은 말 그대로 체육공원이다. 아가 과천시민들을 품에 안았다. 어떻게 품에 2001년 9월 13일 개장한 관문체육공원은 축구 안았을까? 관문체육공원이 생겼기 때문이다.

장, 농구장, 다목적(풋살)구장, 테니스장, 배구 공원이 위치한 이 터는 원래 개발제한구역이었 장, 배드민턴장, 게이트볼 장, 체력단련장 및 발 다. 무질서한 비닐하우스 등으로 주변 환경이 지압장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어 건강과 즐거 매우 열악했다. 남태령을 넘어 과천의 초입에 움을 챙길 수 있는 곳이다. 해당하는 장소인데 거주 주민의 복지나 도시 이미지 차원에서도 개선이 필요한 상황이었 다. 다행히 1999년도 주거환경개선과 경관 향 상을 위해 드디어 공원 조성 사업이 추진되었 다. 당시 사업비로 매우 큰 돈(161억 6천여만 원)이 투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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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청계초교 운동회에 참석한 우리 아들

개장 이듬해인 2002년에는 청계초 등학교 운동회가 관문체육공원에서 열렸다. 아이들이 넓은 운동장에서 신나게 뛰놀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 다. 그 시절 2학년 아동들과 우리 아 들이 무용 꼭두각시 놀음을 했던 사 진이 남아 있어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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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문체육공원 내에는 또 어린이 교통공원과 어 어린이 교통공원에서는 매년 상하반기에 전문 린이공원이 있다. 어린이 교통공원은 2010년에 강사의 지도하에 어린이 교통안전교실을 운영 조성되었다. 어린이들이 교통안전에 대해 관 하고 있다. 특히 가족 단위 교육은 주말에 진행 심 갖고 안전한 생활 습관을 형성할 수 있도록 되어 부모와 자녀가 함께 참여할 수 있어서 큰 실제 도로 시설을 축소하여 만든 체험장이다. 호응을 받고 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조 차선과 횡단보도뿐 아니라 버스정류장, 신호등 성된 교통공원은 놀이와 교육을 함께 할수있이 설치되어 있고 아이들이 일상에서 접할 수 는 공간이다. 있는 출발과 멈춤을 배울 수 있도록 곳곳에 교 통안전에 관한 표지판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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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문체육공원의 또 다른 매력은 조형물이 있는 테마공원이라 는 것이다. 모두 14점이 있다. 거주의 질을 높이는 데 공공미 술의 영향력은 크다. 공원을 거닐면서 감상하는 아름다운 조 형물은 산책의 기쁨을 두 배로 높인다. 조각품의 대다수는 2008년 1회 과천국제조각심포지움 출품작으로 독일, 일본, 네 덜란드, 한국 등 다양한 국적의 작가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조형물 - 노래하는 아이

작품명 노래하는 아이는 중국 남녕시 상징물이다. 과천시는 중국 남녕시와 2005년에 친선결연을 맺었는데 그것 을 기념해 세운 것 같다. 참고로 현재 과천시와 국제교류도시 는 중국 남녕시, 일본 시라하마정, 미국 벌링턴시, 이탈리아 페사로시, 필리핀 마라캇시로 총 5개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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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물 - 소가 된 게으름뱅이 소가 된 게으름뱅이 조형물은 당시 국토해양부가 추진 중인 ‘살고 싶은 도시 만들기’ 사업에 과천시의 ‘테마가 있는 양재천 산책로 만들기’가 선정됨에 따라 설치됐다.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현명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이 곧 행복이라는 교훈성을 부각시킨 ‘소가 된 게으름뱅이’라는 전래동화 이야기를 통해 주민들에게 테마가 있는 문화적 쉼터를 제공하고자 국비 지 원금 1억 5천만원과 시비 1억 9천만원을 들여 조성되었다. 당시 사업을 진행했던 관계자와 조형물 관련 선정 배경 이야 기를 들었다. 소가 된 게으름뱅이는 ‘조선 광해군 때 유몽인 선생이 과천 남태령의 옛 이름 여우고개를 배경으로 간교한 여우가 우매한 사람을 현혹해 소로 둔갑시킨다는 내용의 <어우야담>에 나오는 이야기로 과천의 설화여서 시민들에 게 알리고자 했고, 또 전국적으로 소가 된 게으름뱅이 조형물 이 없다는 것을 확인해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교훈을 주고 자 선정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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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며 아름다운 조형물로 이야기를 만나는 관문체육공원. <소가 된 게으름뱅이>는 과천 남태령을 배경으로 여우가 우매한 사람을 현혹해 소로 둔갑시킨다는 내용은 <어우야담>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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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례에서 발견한 벽화

몇 해 전 삼남길의 끝인 삼례를 방문하게 되었다. 삼남길의 시작이 과천 이기에 그 끝이 궁금해서 찾게 되었는데 고산 전통시장 담벼락에서 소 가 된 게으름뱅이 벽화를 보았다. 저 전래동화는 과천이 배경인데 왜 삼례에 있는지 의아했다. 그때는 그러 고만 지나쳤는데 이번 원고를 쓰며 기억이 나서 완주 문화원에 문의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고산, 삼례 지역이 예부터 지금까지 농사를 많이 짓고 소도 많이 키운단다. 그래서 소 관련 전래동화 중 교훈적인 내용이기 때문 에 벽화로 그린 것이라고 한다. 옛날 설화에는 소와 여우 이야기가 많다. 농경사회였던 시절이어서 자연스럽게 단골 소재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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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44일 관문 제2실내체육관 조성 부지에서 건립 기공식이 열렸 다. 계획하고 기공식이 열리기까지 8년이 걸렸다. 총 311억 5천5백만 원의 사업비를 투입해 연면적 5,430㎥, 지하 1층 ~ 지 상 3층 규모로 2026년 상반기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1층에는 25미터 6개 라인, 유아풀 등을 갖춘 수영장을, 2층에는 헬스장, 체력인증센터, 강 의실, 3층에는 다목적체육관, 암벽등반장이 들어설 예정이다. 관문 제 2 실내체육관 건립으로 더 많은 시민이 다양한 체육활동을 일상에서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

과천시 제2실내체육관 시삽식

관문 제2실내체육관 조감도(과천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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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을 흐르는데 왜 양재천이라 부를까?

부림동 앞으로 양재천이 흐른다. 천변을 따라 자전거 길과 도보가 잘 조성돼 있 어서 가볍게 산책하기에 참 좋다. 천변을 따라 걸으면서 계절마다 자태를 뽐내는 식생을 관찰 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양재천은 과천시와 서울 남부를 흐르는 하천으 로 유로 총연장은 18.5km로, 과천시 구간은 15.5㎞이다. 갈현동의 관악산 남동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별양동 근처에서 북동쪽으로 흘러 선 바위 앞에서 막계천과 만난다. 그 뒤 계속 북동 쪽으로 흘러 주암동을 지나 서울 탄천으로 흐르 는 도시형 하천이다. 그런데 과천을 흐르고 있는데 이름이 왜 양재천 일까? 그 이유를 <과천시지>에서 찾아본다.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니 ‘양재천이란 이름은 옛 날 과천현에 속했던 양재동에 양재천이 관류하 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옛 이름을 살펴보면 <동국여지승람>에는 공 수천(公需川), <대동여지도>에는 상류는 공수 천(公須川), 하류는 학탄(鶴灘, 학여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공수천은 관악산에서 발원한 홍 촌천이 세곡천과 합쳐져 동쪽으로 흐르다가 배 랭이천과 만나 다시 북쪽으로 흐르고, 이후 관 문천과 합쳐 흐르다가 막계천과 만나는 곳까지 를 이르는 것으로 양재천의 상류라고 설명한다. 내용이 선뜻 와닿지는 않지만, 지금 양재동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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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천이 흘렀고 과천 수자원 공사 위치에서 발원한 홍촌천이 쭉 흘러 양재천과 만나게 되 는데 양재천과 만나기 직전까지는 ‘공수천’이라 고 불렀다는 이야기 같다. 여기서 공수천이란 이름이 낯설어 찾아 봤다. 고려시대 공수전(公 須田)이라고 관청의 경비로 사용하기 위해 나 누어 지급한 토지가 있었다. 따라서 공수천이 란 공적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공수전 인근 을 흐르는 하천이란 의미가 아닌지. 믿거나 말 거나 전설 따라 삼천리다. 살기 좋은 도시하면 과천, 과천하면 살기 좋은 도시로 정평이 나 있다. 저층 낡은 아파트가 있 을 때도,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도 살기 좋은 도 시로 선정되는 것을 보면 1등으로 꼽히는 배경 이 주거환경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어렵게 생 각하지 않아도 좋은 점이 막 생각나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곳이 우리 과천이지만 나는 그중 에서 양재천을 으뜸으로 친다. 지구온난화로 해마다 심각해지는 여름 무더위, 그리고 도시 열섬 현상을 이 양재천의 환경과 식생이 허파 역할을 하며 해결해 주기 때문이다. 과천에 양 재천이 있다는 것은 자연이 우리 도시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고 그 선물을 소중하게 보호해 야 하는 것은 곧 우리를 보호하는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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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이자 곧 끝인 부림과 관문

관문체육공원 안에는 등나무 터널이 있다. 6월에는 장미넝쿨이 있고 늦여름에 가면 어름열매도 볼 수 있다. 터널의 풍경과 끝은 항상 다르다. 계절마다 다른 풍경이 있기 때문이다. 터널에는 입구와 끝이 있다. 그러나 굳이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나눌 필요가 없다.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부림동과 관문동은 다른 동네이다. 그러나 이 둘은 다르지 않다. 이것은 마치 터널처럼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부림동의 글을 마치면서 묵었던 숙제 하나를 마저 끝낸 것 같아 홀가분하다. 미흡한 것도 있고 오류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나 스스로에게 칭찬해 주고 싶다. 이해가 안 되는 책을 읽고 또 읽고, 문화원 쫓아다니며 원로들께 질문하고 의문을 제기했던 지난 여름은 참으로 뜨겁고 무더웠다. 그래서 그런가? 처서가 지나 살짝 부는 이 바람이 나는 몹시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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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동 소재 유일한 학교, 관문초등학교 하굣길. 담벼락의 형형색색 이미지와 그 위를 살포시 덮는 식물 이파리들이 길 따라 걸었을 아이와 엄마들의 정겨운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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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동 사람들이자신있게 뽑은 부림동의 7대자랑거리

부림동에 사는 통장, 주민자치위원, 동사무소를 방문한 민원인 등 133명을 대상으로 2024년 8월 ‘부림동의 7대 장점’ 선정을 위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부림동 사람들이 자신있게 뽑은 부림동의 일곱 가지 자랑거리가 나왔다.

2 서울대공원, 현대미술관이 가까워서 산책하기에 좋다.

3 관문체육공원이 가까워서 운동하기에 좋다.

5 중앙공원과 교육도서관이 바로 길 건너에 있어서 좋다.

1 지하철역과 시내버스 정류장이 가까워서 대중교통 이용시 편리하다.

4 과천농협과 하나로마트가 있어서 은행업무와 장보기가 편리하다.

6 과천문화원, 노인복지관과 장애인복지관이 가까이에 있어서 좋다.

7 양재천에서 잉어, 청둥오리, 왜가리 등을 자주 볼 수 있어서 좋다.

조사 및 분석•이남교, 최이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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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역과 시내버스 정류장이 가까워서 대중교통 이용시 편리하다

우리 동네는 지하철 4호선 과천역과 시내버스, 공항버스, 마을버스 정류장이 가까이에 있어서 대중교통 이용시 매우 편리한 장점이 있다. 그래서 과천에서 유일한 초역세권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매일 출퇴근하는 직장인과 학생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상당한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점이 우리 동네의 가장 큰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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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공원, 현대미술관이 가까워서 산책하기에 좋다

과천시민들이 이용하는 산책로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산책로가 바로 우리 동네를 가로지른 대공원나들길부터 서울대공원과 현대미술관을 돌아서 오는 산책로이다. 특히, 최근에 새로 단장한 대공원나들길의 실개천은 무더운 한여름 시민들에게 시원함을 선사해 주었다. 과천에서 으뜸가는 산책로가 가장 가까운데에 있다는 것은 우리 동네 또 하나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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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문체육공원이 가까워서 운동하기에 좋다

과천에서 가장 큰 관문체육공원이 우리 동네와 인접해 있어서 게으른 사람도 운동하기에 좋은 조건이라 할 수 있다. 휴일 이른 아침에 드넓은 축구장을 둘러싼 트랙(track)에서 수십명이 달리거나 걷는 모습은 너무나도 보기 좋은 모습이다. 실내체육관에서도 매일 탁구 등 운동하는 시민들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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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농협과 하나로마트가 있어서 은행업무와 장보기가 편리하다

과천농협 본점이 우리 동네에 있어서 모든 은행업무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어서 편리한 점이 많다. 또한 하나로마트에서 비교적 싸고 신선한 농산물과 다른 물건들도 살 수 있어서 좋다. 특히 최근에 리모델공사를 하여 매장과 주차장을 새롭게 단장하여 더없이 편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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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공원과 교육도서관이 바로 길 건너에 있어서 좋다

우리 동네를 끼고 있는 별양로 건너에 있는 중앙공원과 경기과천교육도서관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어서 좋다. 최근에 새로 생긴 맨발로 걷는 길을 이용할 수도 있고, 도서관을 자주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우리 동네의 또 하나의 자랑거리이다. 중앙공원에는 농구장과 각종 운동기구들이 있고 군데군데 벤치들이 있어서 이웃들과 함께 만나거나 혼자서 책을 읽거나 명상을 하기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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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문화원, 노인복지관과 장애인복지관이 가까이에 있어서 좋다

우리 동네는 과천문화원, 노인복지관과 장애인복지관이 가장 가까이에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걸어서도 갈 수 있을 정도여서 이용하는데 더없이 편리하다. 이들 기관들이 지리적으로 가까이에 있어서 보다 쉽게, 자주 이용할 수 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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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천에서 잉어, 청둥오리, 왜가리 등을 자주 볼 수 있어서 좋다

우리 동네는 양재천이 흐르고 있어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산책하거나 자전거를 탈 수 있어서 좋다. 특히, 양재천에서 살고 있는 잉어 등 물고기들과 청둥오리, 왜가리 그리고 철따라 피고 지는 여러 가지 꽃들을 관찰하다 보면 자연학습이 저절로 되어서 많은 어린이들이 가족들과 함께 오기도 한다. 양재천을 산책하다 보면 박새와 까치소리, 매미소리와 풀벌레소리 등 자연의 소리를 사시사철 들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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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뒷이야기

1위와 2위는 성별, 나이별, 거주기간별 등에 상관없이 동일했다. 다만 3위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여성, 60대 이상과 30년 이상 거주한 주민은 ‘관문체육공 원이 가까워서 운동하기에 좋다’ 보다 ‘과천농 협과 하나로마트가 있어서 은행 업무와 장보 기가 편리하다’를 더 선호하는 것으로 집계됐 다. 이 같은 입장차를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분 석하면 앞으로 더 살기 좋은 동네로 나아가는 지름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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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어린이를 지키기 위한 의무를 수행하는 곳 아이들은 차별없이 충분히 놀고 쉬고 배우며 성장하는 곳 그렇게 어른이 돼 돌아와 동네 어린이를 돌보는 아름다운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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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스 인터뷰 ①

천혜의 외형 조건과 소프트 행정력이 이룬 최고 동네!

글•대담 류설아

‘부림동이 과천시에서 단연 제일 좋은 동네’라 말하는 황정애 부림동장을 만났다. <여기, 부림동>의 시민 아키비스트 팀이 주민 대상 설문조사를 시작할 때 두 팔 걷어붙이고 도운 수장다운 자부심이다. 다음은 일문일답.

부림동을 소개해달라.

실제로 부림동 문화교육센터가 유명하다.

면적은 과천시(35.87㎢)의 1%를 살짝 넘는 0.37㎢ 로 작다. 하지만 거주지 중심으로 33개 통에 1만 4 천여 명이 살아 인구밀도가 높은 편이다. 지난 1월 인사 발령받고 부림동을 깊이 보면서 부림동이야 말로 과천시에서 가장 천혜의 조건을 갖췄고 부림 동 주민이 진짜 행복하리라 생각했다.

1999년 말에 준공한 주민센터가 좋은 위치에 있어 주민 접근도가 좋다. 같은 건물 2층에서 문화교육 센터를 운영해 주민들이 물리적으로 배움의 기회 를 쉽게 가질 수 있다. 실제로 호응이 높아 다른 곳 에서 20~30여 개 진행하는 강의가 부림동에서는 두 배 이상인 48개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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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비결을 꼽는다면 앞선 ‘부자부자’의 모든 조사 항목이 그 순위를 정하기 어려울 정도의 부림동 장점이다. 대공 원나들길과 서울대공원, 청계산, 안양천 등 산 책과 운동이 가능한 자연적인 것뿐만 아니라 최단 거리에 있는 지하철역이 있는 편리한 교 통이 그 예다. 주민센터와 도서관, 공원, 문화 교육센터 등 공공 인프라도 모두 좋은 위치에 있다. 특히 최근 열린 과천시민 체육축전에서 우리 동 주민이 1등 격인 응원상을 받고 당시 준비한 음식에 대해 호평 일색이었다. 이러한 것이야말로 동네에 대한 자부심이고 주민의 프 라이드라고 생각한다. 외적인 조건도 좋지만, 주민과 행정의 세심한 노력이 만나 제일 좋은 동네가 됐다고 자부한다.

그럼에도 고민 중인 숙제는 무엇인가. 정서적 문제다. 재건축을 앞둔 8, 9단지 주민이 이 주할 예정이고 새로운 아파트 단지와 오래된 주택 단지가 어우러진 동이다. 급격한 변화 속에 주민의 동네에 대한 자부심과 이웃 간 끈끈한 따뜻함이 자 칫 해체되지 않도록, 정서적 갈등을 겪지 않을 방 안을 깊이 고민 중이다. 변화 속에 각자 처한 상황 이 다른 주민 간 배려와 정신이 필요한데, 서로 감 정 상하지 않고 조화롭게 녹여낼지 숙제다.

<여기, 부림동> 제작팀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동네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시민이 찾아 보여주 는, 좋은 의도와 기획이 돋보이는 책이다. 세월이 흘러 100년 후, 그 누구도 기억 못 하는 부림동의 옛 모습을 그리워하는 이에게 추억을 가져다주고 미래 시점에서 발전상을 고민할 때 반추하는 디딤 돌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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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과 벗이 되는 공간

과천시 최대 규모 문화교육센터

글•류설아

부림동문화교육센터(이하 센터)는 과천시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며 이웃과 벗이 되는 공간 으로 자리매김했다.

센터는 다른 동에 비해 두 배 이상인 48개 다양 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700여 명 수강생이 참 여해 과천시에서 가장 큰 규모로 운영 중이다. 인기 강좌는 7~8세 아이들이 과천시 방방곡곡 을 체험하는 ‘도토리숲속학교’를 비롯해 5개 반 으로 증설할 정도로 높은 인기를 자랑하는 탁 구, 동양화부터 서양화까지 5개의 세부 장르를 나눠 각각 운영하는 미술, 부림동 대표 무대 공 연을 도맡을 정도의 열정과 실력이 돋보이는 성악과 가곡 등이다.

2024년에는 주민의 요청 사항과 설문조사를 기 반으로 낭독 수업, 가요 교실, 초급 일본어, 시 사영어토론 등의 일반강좌와 어린이 탁구, 초 등 생활체육 등 아동 강좌를 신규 개설했다. 무 엇보다 센터 수강생은 부림동 대표 마을 축제 ‘끼나눔 콘서트’를 올해로 여섯 번째 개최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마을 공동체의 발전을 이 끌고 있다.

76쪽

부림별곡

富林別曲, 과천의 천년 수호마을

글•임용훈

천년 설화가 시작되는 곳

서울에서 남태령 고개를 넘어서면 관문사거리를 지나 좌측으로는 서울대공원이 위치한 과천벌, 우측으로는 과천시 부림동과 만나게 된다. 이곳은 사계절 모두 빼어 난 풍광을 자랑하지만, 특히 부림동 외곽도로의 경우 봄 벚꽃과 가을 단풍들로 화려하게 치장할 때면 통행하는 과객들의 시선을 그림동화 속의 주인공으로 만들어내는 마법의 길이 되기도 한다. 또한 이곳은 수천 년 동안 내 려오는 수많은 과천의 전래 설화와 역사, 문화예술의 뿌 리가 굳건하게 배양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77쪽

새로운 왕조가 개국 되었던 1392년에서부터 일 그것은 온양행궁, 화성행궁, 능행 등 남행을 위 제에 의해 국가의 주권이 피탈된 1910년까지 하여 반드시 거쳐야 할 코스였기 때문이었고, 500여 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 그 조선 그러한 이유로 조선 군왕들의 행행에 있어서 의 27명 국왕 중에서 기록만으로도 14명이 넘 과천에서의 유숙과 주정(숙박) 등은 필수 불가 는 임금들이 이 길을 거쳐 삼남 지방을 행차하 결한 노정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대표적인 였으며, 국왕의 행차는 새로운 전설과 역사. 문 사례로는 안질과 습창의 치료를 위해 온천욕을 화를 창출하는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옛 과천 특히 좋아했던 현종의 경우 대왕대비, 왕대비, 현 권역 중에서 가장 풍요롭고 여유 있었던 토 중전 등 삼전 모두가 과천행궁에서 유숙을 한 양의 이곳 부림동은 현재에도 물론 인위적, 지 기록이 있으며, 과천을 허브기지로 판단하고, 형적으로 풍요로운 동네로 정평이 나 있다. 부 과천길을 꾸준하게 치도하였으며, 왕실 가족의 림별곡은 이곳 부림(富林)동 동명과 떼려야 뗄 온천행을 위해 과천의 관아와 객사, 행궁을 대 수 없는 각별한 인연을 가진 국왕의 이야기부 대적으로 보수 및 개축을 하였다. 물론 현종 이 터 문을 열고자 한다.

전에도 태조를 위시하여 세종, 세조 등은 유달 조선시대에 임금이 대궐 밖으로 행차하는 것을 리 온천행을 좋아했었기에 과천을 경유했다는 행행(行幸-거둥길)이라 칭하고, 임금이 도성 밖 직접적인 기록이 보이지 않을 뿐 최소한 과천 으로 행차하는 경우 임시로 거처하는 곳을 행 에서 주정했을 개연성은 매우 클 것으로 보인 궁(行宮)이라고 한다.

다. 또한 성종과 연산군은 사냥 (강무, 타위 등) 대표적인 행궁으로는 온천 치료를 하던 온양행 을 아주 즐겨 했었고, 인조의 경우 급박한 공주 궁과국가의 환난 시에 피난처였던 강화행궁, 로의 몽진 중에서도 과천지역과 인연을 쌓기도 남한산성행궁, 북한산성행궁이 있으며, 사냥, 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과천지역에서 사 능행, 온행 때 이용하던 온양행궁, 과천행궁, 시 냥 또는 능행, 온천행을 한 여러 기록으로 보아 흥행궁, 화성행궁 등이 있었다. 그중 이곳 과천 규모가 크지는 않았더라도 과천에 행궁에 준하 행궁은 타 행궁에 비하여 역사적으로, 시간적 는 시설물들이 상당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으로 매우 중요한 허브기지라고 할 수 있었다.

夕次果川縣。 名衙軒曰富林軒, 內舍曰穩穩舍, 御筆。 <해제> 저녁에 과천현(果川縣)에 머물렀다. 아헌(衙軒)을 부림헌(富林軒)이라고 이름 짓고, 내사(內舍)를 온온사(穩穩舍)라고 이름지었는데, 어필(御筆)로 현판(懸板)을 썼다.

- 정조실록 29권, 정조 14년 2월 11일 임술 4번째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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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경우 재위 24년 동안 66회에 이르는 행행을 거행하 였는데, 단순한 횟수로 보면 영조(영조는 약 80회) 다음으 로 많은 횟수이다. 그러나 두 왕의 재위 기간을 고려한다 면 정조의 행차 수가 절대적 우위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 다. 이렇듯 정조는 능행을 통해서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효과와 함께 사대부와 백성들 의 사기를 북돋우고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는 데 주력했음 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축은 단연코 현륭원 능행이었고 과천거동길은 허브기지로서 그 가치가 배가되었던 것이 다. 위에서 언급한 능행차 기록은 정조 임금 능행 편년 중 2차 원행으로써, 원행은 1790년 2월 8일에서 12일 동안에 이루어졌는데, 2월 11일에 수원에서 문무과 별시를 거행 하여 수원, 과천, 광주 사람들 5명을 선발한 바 있다. 특히 창덕궁으로 환궁하는 도중에 과천행궁에서 주정하며 동 헌을 부림헌(富林軒), 내아를 온온사(穩穩舍)라 칭하고 직 접 글을 써서 편액을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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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어필 “온온사”

영조 임금과 그의 외동아들 사도세자,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 임금에 관한 이야기는 소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최 소 1~2번 정도는 들어봤음직한 유명한 역사 실화이다. 뒤 주에 갇혀 죽은 비운의 왕자… 이것이 사도세자를 축약적 으로 표현한 역사적 사실이라 하겠다. 세계적으로도 유례 없는 엽기적 사건인지라 세계사적 측면에서도 귀추가 주 목되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사도세자의 이름은 선(愃)이 며, 1735년 1월 창경궁 집복헌에서 영조와 후궁 영빈(暎 嬪)의 아들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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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효장세자가 세상을 떠난 후 원자의 탄생 이런 일련의 과정을 당시 10살이었던 정조가 을 모두 고대하던 시기여서 영조를 비롯한 궁 너무도 생생하게 목격하였으니 아버지 죽음에 궐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대한 트라우마는 비록 조선의 군왕이 되었다 그러나 사도세자가 장성하면서 아들과 아버지 하더라도 엄청나게 괴롭혔을 것이다. 그것은 영조와의 골 깊은 불신의 벽은 점차 풀 수 없는 정조 임금이 즉위 24년 동안에 무려 15회에 걸 지경에 이르게 되어 마침내 ‘임오화변’이라는 친 현륭원 능행을 보더라도 명확하게 알 수 있 조선왕조 초유의 엽기적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 다. 특히 혜경궁 홍씨의 환갑 잔치를 수원 화성 는데, 이는 1762년 7월 4일 사도세자가 노론과 에서 성대하게 치른 ‘8일간의 원행을묘’는 8일 부왕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8일 뒤 사망에 동안 뒤주에서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한 생부 이르게 된 사건을 말한다. 그 뜨거운 땡볕의 7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 임금의 다각도의 치밀한 월 폭염 속에서 창경궁 휘령전에서 뒤주에 가 전략으로 볼 수도 있겠고, 더 나아가 아버지에 두어 물 한 방울, 쌀 한 톨 주지 않은 채 굶겨 죽 대한 복권의 의지까지 읽어볼 수 있는 대대적 게 한 것이다.

인 행사였다. 부림동의 동명은 어디에서 기원했을까? 그렇 다. 1790년 2월, 정조 임금의 현륭원 능행에서 창덕궁으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과천현에서 주 정을 하게 되는데 이때 지금의 부림동명의 원 조가 된 부림헌이라는 현판을 받게 된다. 군주 가 직접 어필로 써서 과천현의 동헌 건물들의 당호를 내린 것이다.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고 재위 기간 중 총 7차례 과천을 경유한 정조 임 금의 과천에 대한 관심도가 남달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부림동에서 양재천을 건너면 바로 코 앞이 과천초등학교이다. 과천 초등학교에서 관악산 방향으로 50미터 위의 언 덕에 온온사라는 한옥문화유산건물이 있으며, 그 가운데 정청 안에 ‘부림헌’이라고 쓰여진 정 조 임금의 어필이 오늘도 위풍당당하게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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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한 점으로 보는 양재천

7단지부터 관문체육공원까지의 부림동에서의 양재천 구 간은 부림동 뚝방길과 양재천의 도보길, 자전거 전용도로 와 함께 자연스럽게 이어져 그 옆으로 양재천이 도도하게 흘러가고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공수 천(公需川),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상류는 공수 천(公須川), 하류는 학탄(鶴灘, 학여울)으로 기록되어 있 다. 양재천(良才川)은 과천의 관악산과 청계산에 그 수원 지를 두고 있으며 과천시 대부분의 물을 모아 시가지 중 앙을 통과해서 과천동의 한내를 거쳐 선바위 앞에서 막계 천(莫溪川)과 합류, 강남을 통과한 후 탄천(炭川)과 합쳐 져서 청담동에서 한강으로 들어가는 내이다. 관악산과 청 계산 기슭 사이를 흐르는 이 내는 과천의 단 하나밖에 없 는 물줄기로서 과천 시민에게 다양한 볼거리와 힐링의 공 간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양재천이란 이름은 지금의 양재역(良才驛) 터를 지나고 있기 때문이고, 구한 말에는 과천 향토사학자인 우산 신종묵 선생이 그의 저서 <우산시고>에서 양재천을 경계로 과천을 두 권역으로 나누어보기도 하였는데 중국의 천하절경인 복건성 무이 산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모방하여 과천을 한계구곡 (寒溪九曲)과 청계구곡(淸溪九曲)으로 구분하여 그 아름 다움과 깊은 뜻을 노래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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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창의도> - 출처 : 세전서화첩 -

참고로 양재천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 조선시대의 관아나 감영 부근을 지나는 내를 覽)>에 공수천(公需川), <대동여지도(大東輿 모두 공수천이라 불렀기에 과천만의 특징을 가 地圖)>에 상류는 공수천(公須川), 하류는 학탄 진 이름은 아니라는 이유로 하천 이름 개명에 (鶴灘, 학여울)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지 대한 동력을 잃은 바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부 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쯤에는 양재천이라는 이 림동을 완만하게 끼고 지금도 도도히 흐르는 름 대신 공수천이라는 이름으로 대체하자는 주 양재천에 대한 부림동 주민들의 애정은 남다르 장이 있기도 했었는데, 통상 공수천이라 함은 다고 할 수 있다.

83쪽

<과천창의도(果川倡義圖)>는 1636년 12월 16 휴가 전국을 돌며 조상들의 업적과 무훈 등을 일 과천현감 김염조( 金念祖 1589~1652, 안동 모으고, 이와 관련된 시. 서. 화들을 소장하는 풍산 김씨)가 침략해오는 청나라 군사를 막기 과정에서 약간의 과장 등은 있을 수 있었겠으 위해 병사들을 모집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나, 사실무근의 장면들을 그려 넣어 침소봉대 가운데 중심 전각에 위엄있는 자세를 잡고 있 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되어 진다. 당 는 이가 과천현감이고 중심전각은 당시의 과천 시 국가를 위해서 조경(趙絅)과 함께 죽음을 맹 관아였다. 다양한 깃발과 창들을 비롯한 각종 세하고 의병을 일으킨 바, 그 구구절절한 격문 무기, 무장한 군인들도 보이고 전각 뒤로 좌측 (檄文)은 다음과 같다. 은 관악산 호현(지금의 남태령)과 오른쪽으로 는 우면산 등이 보인다. 화면 아래로는 관아를 “현감으로서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격문 상징하는 홍살문이 보이고 바로 그 앞에는 지 을 띄우는 바이다. 국운이 불행하여 오랑캐가 금의 부림동 앞의 양재천이 그려져 있다. 특기 음흉한 마음을 갖고 감히 우리 왕조를 업신여 할 것은 1636년 당시 양재천은 내의 깊이와 폭 겨 영토를 점거하였다. 이로써 서울·개성·평양 이 어느 정도 되었기에 배를 젓는 사공까지 등 이 텅 비워지고 종묘가 파천되어 산성으로 들 장한다는 것이다. 이 그림은 풍산김씨 오미동 어가 있는데 호종하는 관료와 군사들이 추워도 파의 <세전서화첩>으로서 안동시 풍산읍 오 입을 옷이 없고 배가 고파도 먹을 양식이 없다. 미동에서 500여 년 전 세거해 온 풍산김씨 문중 우리 임금께서 밤낮으로 하는 걱정이 온 나라 에서 전해내려온 서화첩이다. <세전서화첩> 에 가득 차 있는데, 누구인들 잠시라도 잊을 수 은 풍산김씨 오미동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있겠는가? 3백년이나 내려온 종사(宗社)가 풀 2000년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되었는데, 이 서 속에 파묻히고 3천리나 되는 강산이 오랑캐에 화첩은 후대에 귀감이 될 만한 조상의 위업을 게 넘어간다면 살아도 갈 곳이 없고 죽어도 부 널리 알리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끄럽지 않겠는가? 오직 우리 고을 백성만은 당 물론 이 그림이 당시 실경으로 과천과 양재천 당한 충성심과 열렬한 의기를 더욱 분발하여 의 산수를 그린 것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모두 힘써주기 바란다.” 1840~1850년에 걸쳐서 풍산김씨 자손인 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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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의 수호천사, 부림동

과천을 동서로 감싸고 있는 관악산과 청계산은 조선의 한 양으로부터 한강 남쪽에 위치한 대표적인 산이었다. 특히 예부터 관악산은 남성적이고, 풍수적으로 화기(火氣)를 띠고 있는 산으로 생각하였다. 그렇기에 한양에서의 관악 산은 화기(火氣)를 뿜고 있는 산이자 역세(逆勢)의 산으로 서 경계 대상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런 인식이 저변에 깔 리다 보니 관악산의 화기를 누른다는 것은 국태민안의 근 본이라고까지 생각했고, 화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다양한 수단들을 동원했었다. 예컨대 경복궁 앞에는 수신을 상징 하는 해치를 두 마리 세워서 관악산을 감시한다거나, 숭 례문 현판을 세로로 세우고 그 앞에 연못을 파서 설치도 하였고, 심지어는 관악산 꼭대기에 우물을 파서 구리로 용을 제작하여 넣거나, 아홉 개의 화재막이 부적을 넣은 물단지를 묻어 화기를 막는 등의 방편들을 총동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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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C 해동지도> - 네이버 참조 - 도판 해설 : 지도 좌측 상부는 한강이 흐르고, 지금의 관악. 동작구 일대가 보인다. 바로 그 아래 과천현 관아와 객사가 위치. 지도 우측은 청계산과 양재역참이고, 그 옆은 광주목과의 경계를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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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몇백 년이 지난 2008년 어느날 토지보상에 불만을 품은 노인 한 명의 방화에 의해 숭례문은 거의 전소되다시피 했으 니 말이다. 이 일련의 사태가 관악산의 화기 때 문이라고 하기에는 관악산이 너무 억울하기도 할 것이다. 이 대목에서 과천 사람들에게 관악 산은 좌청룡. 우백호를 이루는 진산으로서 그 정신적 버팀목의 산이기도 하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반면 청계산은 산세가 유순하고 흙 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녹음이 짙은 산으로 과천 사람들에게는 어머니, 이모 등과 같은 포 근함을 주는 산이기도 하다.

풍수가들의 의견에서도 지리적으로도 진산인 관악산과 그 땅의 맥은 과천지역에 한랭한 북 서풍을 막고 사람들을 품어 안는다고 한다. 또 한 청계산과 그 땅의 맥은 과천 지역의 훈풍을 흩어지지 않게 보관하는 역할을 맡는다고 주장 한다. 그 사이사이 산자락에 과천의 자연 마을 들은 아늑하게 자리 잡았고, 부림동 역시 그 중 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지금까지 위치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완벽한 풍수의 땅 은 거의 없는 것이 또한 자연의 법칙이랄까. 풍수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고려. 조선조에서 부터 관악산에서 우면산으로 이어지는 고개가 오목하게 파인 관계로 남태령을 통해서 북서풍

범람한 부림동의 양재천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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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며, 이 바람은 양재로 이어진 과천벌(관문 동 포함)과 부림동 끝의 상하벌의 바람과 합쳐 져 과천의 보금자리들로 닥친다고 한다. 이러 한 풍수적 결점을 막기 위하여 우리네 조상들 은 비보림을 조성해 이를 막는 지혜를 발휘했 으니 각종 고지도에 나오는 수구수(水口藪)들 이 바로 그것이었다. 인조림(人造林)으로 산의 역할을 대신하게 한 것이다. 비범한 예방책을 실천에 옮겼던 부림동 조상들의 지혜가 아닌가 싶다.

<과천현신수읍지(果川縣新修邑誌)>(1699)에 도 수구수가 소개돼 있다. ‘현 동쪽 1리에 있다. 길이가 30여 보이고 폭이 20여 보이다. 무술 년 간에 현감 심추(沈樞, 1658·1659 재위)가 과천 관아를 위해 물 빠지는 곳을 막고 처음 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게 하였다’는 기록이다. 그 사실 을 증명하듯이 <해동지도>(18세기)의 과천현 지도에도 수구수(水口藪)라는 명칭의 비보 숲 이 뚜렷이 표기되어 있다. 당시까지도 비보 숲 은 과천 고을의 중요한 풍수적 경관요소로 현 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름 장마철이 되면 양재천은 잊지 않 고 범람한다. 심할 때는 배부른 다리까지 잠가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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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인구과밀을 방지하자는 큰 축에서 1978년 신도시 로서의 계획이 잡힌 곳이 바로 과천이었다. 당시 과천은 전기의 보급조차도 그렇게 원활하지 않았던 시골이나 다 름없는 곳이었건만 이후 1980년대 초에 도시의 근간이 완 공되었고, 1986년에는 시흥에서 분리· 독립하여 시로 승격 되었다. 엄격히 말하자면 1914년 일제 강점기하에서 500 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과천이 타의에 의해 해체되었다 가 비로소 원위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곳 부림동은 1982년 6월 10일 경기도 조례 제1256호에 의해 관문리(官門里) 일부를 분리해서 과천의 옛 이름을 따서 부림동(富林洞)이라고 하였다. (부림동 자치센터의 소개 글 참조) 당시는 현재의 관문체육공원부터 7단지 구 역까지의 부림동 구역과 8단지의 동쪽 끝부분의 상하벌 등 두 개의 큰 권역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현재는 상하벌 (또는 상어들)이라는 명칭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동네 의 각 명칭이 잊혀지듯 8단지와 9단지의 모습도 재건축으 로 크게 변모하게 될 것이다. 8단지에 있는 길고 높은 다 목적 난방 굴뚝도 사라질 것이고, 지하상가의 ‘집밥식당’, ‘옷수선집’ 등도 30층이 넘는 고층 아파트들로 대체될 예정 이다. 그러나 항구한 역사 속에서 그 진가를 발휘해 왔던 부림동은 단독주택단지들과 공동주택들이 조화를 이루 며 살아갈 것이고 전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과천시의 중 심으로 굳건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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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 토박이 대학생의 양재천 생생리포트

새롭게 태어나 생명을 되살리는 길

글•최이룸

과천 시민이라면 누구나 양재천을 알 만큼, 양 수질을 개선하였다. 학여울역 부근은 자연형 재천은 과천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양재천은 생태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 양재천 상류에는 서울 서초구와 강남구를 가로지르는 하천으로, 수질정화시설이 설치되어 하루 3만2천 톤의 물 관악산과 청계산에서 발원하여 과천을 거쳐 한 을 정화하고 있다. 이로 인해 양재천의 수질은 강으로 흘러든다. 하천 연장은 15.5km로, 한때 5급수에서 2급수로 향상되었으며, 누치, 버들 개발과 오염으로 인해 ‘죽음의 하천’, ‘오염의 대 치 등 20여 종의 어류가 서식하고 있다. 양재천 명사’로 전락하여 물고기마저 사라지게 되었으 의 복원은 단순한 수질 개선을 넘어 생태게 전 나, 복원 작업을 통해 시민들에게 되돌아온 생 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양재천 주변에는 150 명의 하천으로 바뀌었다.

여 종의 식물과 두루미, 청둥오리, 원앙새 등 양재천의 복원 역사는 1995년으로 거슬러 올라 300여 종의 동물이 다시 찾아오게 되었다. 이는 간다. 당시 양재천은 심각한 오염 상태에 있었 양재천이 자연형 생태하천으로 변모했음을 의 고, 하천 복원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강남 미한다. 구와 서초구는 오수관로 정비와 함께 콘크리트 제방을 허물고, 습지식물을 심는 등 친환경적 인 복원 기법을 도입하였다. 특히 강바닥의 자 갈과 부딪혀 오염물질이 가라앉고, 자갈 표면 의 미생물이 이를 분해하는 방식으로 하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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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마이크로프트사 코파일럿(copilot)에 “주변의 녹지와 주변의 도심 구조가 조화를 이루는 과천의 양재천 모습을 이미지로 생성해줘”라고 입력해 AI를 통해 탄생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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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바람길 선사

도시 지역이 주변의 농촌 지역보다 기온이 높아 지는 현상을 ‘열섬현상’이라고 한다. 이는 주로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덮인 도로와 건물들로 인해 발생하며, 인공적인 열원과 건물들이 열을 흡수하고 방출하는 과정에서 기온이 상승하게 된다. 이러한 열섬현상은 도시의 생활환경을 악화시키고, 에너지 소비를 증가시키며, 건강에 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에 대한 해결책 중 하나로 떠오른 것이 바로 ‘바람길’이다.

바람길이란 도시 내에서 자연적으로 형성되거 나 인위적으로 조성된 공기 흐름의 경로를 말 한다. 바람길은 도심의 공기를 순환시키고, 열 을 효과적으로 배출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도 시의 열섬현상을 완화하고 쾌적한 도시 환경을 조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양재천은 열 섬현상을 막는 중요한 바람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양재천의 바람길이 열섬현상을 막는 방 법은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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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양재천은 하천 주변의 온도를 낮추는 역할을 한다. 물은 햇빛을 흡수하고 밤에는 서서히 방출하여 주변 온도를 조절하 며, 하천 주변의 식물들은 증산작용을 통해 열을 흡수하고 수분을 증 발시켜 온도를 더욱 낮추는 데 기여한다.

둘째, 양재천의 바람길은 도시의 공기를 순환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 다. 하천 주변의 개방된 공간은 뜨거운 공기를 외부로 배출하고 시원 한 공기를 유입시켜 도시 전체의 기온을 낮추며, 조성된 녹지와 공원 이 바람길을 강화하여 열섬 현상을 효과적으로 줄이는 데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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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양재천의 바람길은 공기 질 개선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오 염된 공기가 바람길을 통해 배출되고 깨끗한 공기가 유입되어 대기 중의 오염물질 농도가 낮아지며, 이는 시민들의 건강에 긍정적인 영 향을 미치고 쾌적한 도시 환경을 조성하는 데 기여한다.

양재천의 바람길이 열섬현상을 막는 구체적인 사례로는 하천 주변 의 녹지 조성과 물길 복원이 있다. 양재천 주변에 다양한 나무와 식 물을 심어 녹지를 조성하였고, 이는 바람길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 고 있다. 또한, 양재천의 물길 복원을 통해 하천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여, 공기의 흐름도 개선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양재천을 중심으로 한 바람길을 형성하고, 도심의 열섬현상을 효과적으로 완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양재천의 바람길은 단순히 하천 주변의 온도를 낮추는 것을 넘어, 도시 전체의 기후와 환경을 개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바람길의 효과는 시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 시키고, 건강을 보호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앞으로도 양재천과 같은 도심 하천의 복원과 바람길 조성을 통해 더 많은 도시들이 열섬 현상을 완화하고, 쾌적한 도시 환경을 조성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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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처럼 만나는 조류 가이드

양재천을 산책하다보면 하얗고 다리가 얇은 새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이 새가 뭔지 몰랐지만 한 번 알고 난 후부터는 볼 때마다 친숙한 느낌을 받았다. 바로 ‘왜가리(Ardea cinerea)’이다. 친구들과 그 새에 대해 얘기할 적이면 “아~ 그 머리에 꽁지있는 새?”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자주 본다. 그렇다면 왜가리는 아닌데 비슷하게 생긴 새를 본 적도 있을 것이다. ‘쇠백로(Egretta garzetta)’이다. 왜가리는 몸통이 회색이고 부리 색이 연회색인 반면에 쇠백로는 몸통이 하얗고 부리가 검정색이다. 쇠백로에 비해 왜가리가 좀 더 큰 것도 특징이다. 또, 왜가리의 머리에는 길고 가느다란 검은색 깃털이 있는데 이 깃털은 왜가리의 후두부에서 뒤로 뻗어 있어 쉽게 눈에 띈다. 성조(어른 새)에게서 더 잘 보이며, 번식기가 되면 더욱 두드러지는 특징도 있다. 쇠백로 머리 뒤에도 긴 깃털이 있는데 길고 가느다란 형태로, 흰색이며 우아한 모양을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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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을 따라 조금 더 걷다보면 물 속에 머리를 쳐박고 먹이를 사냥하고 있는 ‘청둥오리(Anas platyrhynchos)’도 목격할 수 있다. 청둥오리는 비교적 큰 몸집을 가지고 있으며, 수컷은 머리가 녹색이고 몸은 회색빛을 띠며, 암컷은 갈색의 깃털을 가지고 있다. 수면을 유영하거나 물가에서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특히 봄철에는 청둥오리의 새끼들이 어미를 따라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어 매우 귀엽다.

청둥오리 옆에 또 다른 오리가 있는데, 그냥 보기에는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바로 ‘흰뺨검둥오리(Anas zonorhyncha)’이다. 수컷과 암컷이 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데 몸은 전반적으로 갈색이며, 얼굴에 흰색 뺨 무늬가 있다. 부리는 검고 끝부분은 노란색이다. 청둥오리는 더 높은 ‘퀘퀘’ 소리를 내는 반면, 흰뺨검둥오리는 더 부드럽고 낮은 소리를 낸다는 차이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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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천을 즐기는 방식은 다양하다. 걷거나, 뛰거나, 자전거를 탄다. 그 중 으뜸은 멈춰 서서 바라보는 것이다. 멈추지 않는 시간과 공간이 그 순간 오롯이 개인의 것으로 저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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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더 특별한 어류 가이드

누치 _ 국립수산과학원

버들치 _ 경상북도 해양수산 민물고기연구센터

양재천을 산책한다면 새뿐만 아니라 물고기들이 물 속에서 헤엄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양재천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어류 중 하나는 ‘잉어 (Cyprinus rubrofuscus)’이다. 잉어는 크고 강인한 어류로, 물속에서 헤엄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양재천에서 또 다른 흔한 어류는 ‘붕어(Carassius)’ 이다. 붕어는 크기가 작고 둥근 몸을 가지고 있으며, 주로 물속의 식물과 작은 곤충을 먹는다. 붕어는 민 첩하게 움직이며 물속에서 빠르게 헤엄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어린 붕어들이 물속에서 서로를 쫓 아다니는 모습은 흥미롭다. 양재천에서는 ‘누치(Hemibarbus labeo)’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누치는 몸집이 크고 힘이 강하며, 주 로 물속의 작은 생물과 식물을 먹는다. 양재천의 깊 은 물속에서 누치가 천천히 움직이며 먹이를 찾는 모 습을 관찰한 적이 있다. 그들의 움직임은 매우 우아 하며, 물속에서의 존재감이 크다. 한 번은 누치가 물 위로 살짝 떠오르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 모습이 매 우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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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천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어류는 ‘버들치 (Rhynchocypris oxycephalus)’이다. 버들치는 작 고 날렵한 몸을 가지고 있으며, 주로 물속의 작은 곤 충과 식물을 먹는다. 이들은 물속에서 매우 빠르게 움직이며, 무리를 지어 다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 다. 마치 물속에서 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양재 천에서 서식하는 어류들은 하천의 생태계를 풍부하 게 만들며, 우리에게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태계의 중 요성을 일깨워준다. 우리는 이러한 자연을 보호하고 보존하는 데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붕어

붕어 _ 국립수산과학원 _ 국립수산과학원

잉어

과천 양재천, 물고기 우점종의 변화 2009년~2015년까지 과천 양재천을 꾸준히 관찰해 온 임용훈 과천학연구소 부회장에 따르면, 당시 흔히 볼 수 있던 송사리(Oryzias latipes)와 피라미(Zacco platypus) 같은 물고기들이 2024년 현재는 거의 사라 졌다. 이 물고기들은 모기와 같은 해충의 알을 먹으며 자연적으로 해충을 조절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농약 사용과 환경 변화로 인해 이제는 이곳에서 더 이 상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1급수에서 서식하는 버들치 (Rhynchocypris oxycephalus)와 갈겨니 (Nipponocypris temminckii)가 현재 과천 양재천에 서 우점종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2009년~2013년 까지는 버들치가 우점종이었지만, 지금은 갈겨니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러한 변화는 과천 지역의 수질과 생태계가 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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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천 따라 흘러흘러 전해 내려오는 잉어 이야기

옛날 양재천이라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마을에 한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소년은 하루는 양재천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큰 잉어 한 마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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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어는 마치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듯 소년을 바라보았고, 소년은 그 잉어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소년은 매일같이 양재천을 찾아와 그 잉어에게 먹이를 주고,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소년과 잉어는 서로 깊은 유대감을 쌓아갔습니다. 잉어는 소년이 힘들거나 슬플 때마다 마치 위로해주듯 물속에서 장난을 치며 소년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어느 날, 마을에 큰 가뭄이 찾아왔습니다. 양재천의 물이 점점 줄어들면서 잉어가 살기 어려운 환경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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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걱정이 되어 잉어를 더 깊은 강으로 옮기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정성스럽게 잉어를 잡아 큰 항아리에 담고, 먼 길을 걸어 강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가는 도중, 소년은 지치고 힘들어 잠시 쉬어가기로 했습니다. 그 사이 항아리에서 잉어가 뛰쳐나가 도망가 버렸습니다. 소년은 잉어를 잃어버린 슬픔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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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잉어가 이제 강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달래야 했습니다. 몇 년이 지나, 소년은 어른이 되어 다시 그 강을 찾아갔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그곳에서 예전보다 훨씬 더 커진 잉어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잉어는 마치 소년을 알아보는 듯 물 위로 뛰어올랐고, 소년은 그 모습을 보며 깊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잉어는 소년의 보살핌 덕분에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고, 소년은 잉어를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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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을 수놓는 식물 가이드

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양재천의 식물들은 우리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한다. 양재천 주변을 산책하면서 계절별로 볼 수 있는 식물들을 관찰하는 것도 생태계를 이해하는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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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여름

양재천의 봄은 ‘벚꽃( Prunus campanulata)’으로 시작한다.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벚꽃이 만개하여 하천을 따라 벚꽃길이 형성된다. 벚꽃이 피어있는 동안 양재천을 산책하면 마치 분홍빛 터널을 걷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벚꽃은 짧은 시간 동안만 피어있기 때문에 이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개나리(Forsythia koreana)’는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황금빛 꽃을 피운다. 양재천의 둑과 주변 공원에서 쉽게 볼 수 있으며, 개나리의 밝은 노란색 꽃은 봄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이다. 개나리 꽃은 작고 연약해 보이지만 매우 강인하여 한 번 피면 오래도록 유지된다. 5월이 되면 양재천에서 ‘살갈퀴(Vicia sativa)’를 볼 수 있다. 살갈퀴는 연한 분홍색 꽃을 피우는 식물로, 주로 하천의 습지나 물가에서 자란다. 살갈퀴의 꽃은 작고 섬세하며, 여러 송이가 모여 핀다. 이 식물은 수분이 많은 환경을 좋아하며, 양재천의 습한 지역에서 자주 발견된다. 살갈퀴의 꽃말은 “수줍음”으로, 그 모습이 부끄러워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양재천의 여름을 대표하는 식물은 ‘연꽃(Nelumbo nucifera)’이다. 6월부터 8월까지 연못과 하천의 잔잔한 물 위에서 연꽃이 아름답게 피어난다. 연꽃은 그 크기와 화려한 색상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연꽃은 주로 하얀색과 분홍색이 많으며, 그 꽃잎은 물 위에서 은은하게 빛난다.

‘갈대(Phragmites australis)’는 여름철 양재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식물이다. 하천의 습지나 물가에서 무성하게 자라며, 그 길고 휘어진 잎과 줄기는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아름답다. 갈대는 여름 내내 푸른 빛을 띄다가 가을이 되면 황금빛으로 변한다. ‘부들(Typha orientalis)’은 여름철 양재천의 물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식물이다. 긴 줄기와 두꺼운 잎을 가지고 있으며, 끝부분에 독특한 모양의 꽃이 피어난다. 부들은 주로 하천의 얕은 물속에서 자라며, 물속 생태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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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겨울

가을이 되면 양재천 주변의 ‘단풍나무(Acer palmatum)’들이 아름답게 물든다. 단풍나무의 잎은 빨간색, 주황색, 노란색 등 다양한 색으로 변하며, 양재천을 따라 형형색색의 단풍길이 만들어진다. 단풍나무의 화려한 색상은 가을의 풍경을 한층 더 아름답게 만든다. ‘억새(Miscanthus)’는 가을철 양재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식물이다. 길고 은빛으로 빛나는 억새는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 억새는 주로 하천의 습지나 물가에서 자라며, 가을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밭은 양재천의 가을을 대표하는 풍경 중 하나이다.

‘수크령(Pennisetum alopecuroides)’은 벼목 화본과의 여러해살이풀로, 길갱이라고도 한다. 양지쪽 길가에서 흔히 자란다. 수크령은 길고 가는 잎을 가지고 있으며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꽃이 핍니다. 꽃은 원통 모양으로 자라는 털이 많은 꽃이삭 형태로, 그 모습이 여우 꼬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학명인 alopecuroides가 붙였다. 9월부터 10월까지 양재천 주변에서 ‘코스모스(Cosmos bipinnatus)’를 볼 수 있다. 양재천의 둑이나 공원에서 쉽게 볼 수 있으며, 그 밝고 화사한 색상은 가을 풍경을 한층 더 아름답게 한다.

겨울이 되면 양재천 주변의 ‘소나무(Pinus densiflora)’가 그 푸르름을 유지한다. 소나무는 사계절 내내 푸른 잎을 가지고 있어, 겨울철에도 푸른 숲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겨울철 양재천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식물은 ‘동백나무(Camellia japonica)’이다. 동백나무는 겨울에 붉은 꽃을 피우며, 그 강렬한 색상은 차가운 겨울 풍경 속에서도 따뜻한 느낌을 준다. 동백나무는 양재천의 공원이나 숲 속에서 자주 볼 수 있으며, 겨울철에도 아름다운 꽃을 감상할 수 있다.

양재천은 사계절 내내 다양한 식물들로 가득 차 있어, 도심 속에서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다. 이러한 식물들은 양재천의 생태계를 풍부하게 만들며, 우리에게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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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계를 위협하는 유해식물의 정체

양재천은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이지만, 그 안에는 생태계를 위협하는 유해 식물들도 존재한다. 유해식물은 토종 식물의 성장을 방해하고 생태계의 균형을 깨뜨릴 수 자라며, 그 덩굴이 주변 식물들을 덮어버려 햇 있다. 대표적인 유해식물로는 가시박, 환삼덩 빛을 차단하고 영양분을 빼앗는다. 단풍잎 돼 굴, 단풍잎 돼지풀이 있다 이들이 왜 유해한지, 지풀의 덩굴은 수로를 막아 물의 흐름을 방해 양재천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 하고, 이는 하천의 수질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 고자 한다. 이처럼 유해식물들은 양재천 생태계에 부정적 인 영향을 미친다. 유해식물들은 토종 식물들 ‘가시박(Sicyos angulatus)’은 주로 물가와 습지에 의 성장을 억제해 생태계 다양성을 감소시키 서 잘 자라며, 그 덩굴이 주변 식물들을 덮어버 고, 수로를 막아 하천의 산소 공급을 줄여 어류 려 햇빛을 차단하고 영양분을 빼앗는다. 가시 와 수생식물의 생존을 위협하며, 사람에게 알레 박이 번식하면 토종 식물들의 성장이 어려워지 르기 등 건강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양 며, 이는 생태계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또한, 가 재천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유해 시박의 덩굴은 수로를 막아 물의 흐름을 방해 식물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대처하는 것이 하고, 이는 하천의 수질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 중요하다.앞으로도 양재천의 다양한 식물들을 보호하고 보존하는 데 힘써, 더 많은 사람이 이 ‘환삼덩굴(Humulus japonicus)’은 다른 식물들을 아름다운 자연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덮어버려 생태계를 위협한다. 특히 햇빛을 차 단하고, 주변 식물들의 광합성을 방해하여 성장 을 억제한다. 또한, 환삼덩굴은 피부에 닿으면 가려움증과 같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수 있어, 사람들에게도 해롭다. ‘단풍잎 돼지풀 (Ambrosia trifida)’은 빠르게 번식하며 특히 꽃가 루가 사람들에게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유발하 기도 한다. 이 식물은 주로 물가와 습지에서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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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아파트 건물과 그 사이 나무들은 사라질테지 그 모든 것을 덮은 높고 푸른 하늘만큼은 기억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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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팔구단지

아이를 낳고 처음 과천이란 곳에 이사온 20년 전만해도 과천은 마치 유럽 어느 나라의 작은 도시 같았다. 그다지 큰 건물도 많지 않았고 5층짜리 저층 주공아파트들은 낡았지만 옹기종기 어찌나 정겨워보였는지….

부림동의 대부분이라 할 수 있는 7, 8, 9단지 주공아파트 중 저층 9단지와 7단지 사이 홀로 키 크게 서 있던 8단지 집 베란다에서 내려다보이는 주황색 지붕들과 초록으로 울창한 나무들의 풍경이 꽤 멋졌다.

어느덧 세월이 흐르며 이곳 과천도 깔끔하고 세련된 옷으로 갈아입은 재건축 신축 아파트로 하나둘 바뀌어 가고 이제 여기 팔구단지(통합 재건축으로 89단지로 불리게 됨) 주공아파트도 그 새 옷을 갈아입을 계획이 진행되어 이 울창한 나무들과 40여 년의 세월 동안 세대를 반복하며 이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을 추억의 장소들도 누군가의 사진첩 속에만 남게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글•강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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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더께에 낡아 더 애틋하게 다가오는 8, 9단지 이곳저곳 한바퀴를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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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단지 정문 경비초소와 학교 앞 정자

경비초소 앞 갈래길에서 오른쪽으로 걷다 보 면 테니스장이 보이고 부림동 아이들 대부분 이 다니게 되는 관문초등학교가 있다. 관문초 등학교 정문 바로 앞에 있는 정자는 낮엔 방과 후 쏟아져 나온 아이들과 엄마와의 ‘만남의 광 장’이 되어주고, 해질 녘엔 할머니들이 부채질 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긴 세월 아이들과 할머니들의 다양한 이야기 보 따리가 모이고 쌓인 곳이다.

8단지 입구에 들어서면 ‘별양로 180’이 크게 쓰여 있는 이곳이 눈에 띈다. 신축 아파트들의 위풍당당한 전문경비업체 초소와는 달리 아담하고 소박한 오두막집이 다. 그곳에는 언제나 정겹고 연세 지긋한 아 저씨들이 앉아 계신다. 입주하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얼굴과 사연들이 경비초소 에서 근무하는 그분들을 거쳐 갔을 것이다. 주민들의 만능 해결사로서 40여 년 오랜 세 월을 함께한 곳이다.

큰아이가 처음 학교에 입학한 초보 학부모 시절 끝나는 시간에 맞춰 마중 나가 그 정자에서 기다리며 엄마들도 신입생 못지않게 설레고 긴장된 마음으로 담임 선생님 이야기, 방과 후 함께 놀 친구들과의 약속 등을 열심히 주고받던 생각이 난다. 나의 그 이야기들도 이곳에서 풀어지고 모였던 이야기 보따 리 안에 함께 들어가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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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단지 남서울 상가의 수선집

8단지의 남서울 상가 지하에 가면 24년간 구석 한편을 지켜온 수선집이 있다. 항상 부드러운 목소리와 미소로 손님을 맞이해주시고 이 세상 모든 수선을 다 해낼 수 있다고 큰소리 치는 법 도 없으시다. 그저 맡겨진 작업을 능력 안에서 최대한 해보겠다고, 겸손하지만 신뢰가 가는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뛰어노느라 항상 무릎 부터 구멍이 나버리는 아이의 바지 수선을 맡 겨오다가 그 아이가 중학생이 되어 교복 명찰 을 달기 위해 갖고 갔을 때 “그 꼬맹이가 벌써 중학생이 되었어요?”하며 놀라워하셨는데 그 아이는 벌써 또 시간을 지나 성인이 되어있다. 처음엔 장사가 목적이 아닌 혼자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서 작은 ‘공방’처럼 마련했지만, 계획 과는 달리 갑자기 교복 수선일이 너무 밀려 들 어와서 수입이 생기고 자연스럽게 수선이 주업 이 되어버렸다고 말씀하신다. “사실 난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라며.

이제 재건축이 시작되고 이 공간을 떠나고 나면 좀 더 자유롭게 하고 싶던 것들로 시간을 채우 고 싶어 틈틈이 그림을 배우고 있다고 수줍게 웃으셨다. 작업실에 걸려있는 그림을 보니 이 미 꿈을 향해 한걸음 옮기고 계신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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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에스 놀이터 _ 일명 83놀이터

803동 옆이자 남서울상가의 대표적 입점업체였던 ‘GS마트’와 가까운 놀이터였던 관계로 ‘지에스 놀이터’와 ‘83놀이터’, 아이들에게 이 두 가지 명칭으로 불린다. 이곳은 ‘관문초등학교’와 가까운 놀이터이기도 해서 부림동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놀이터로 꼽을 수 있다. 학교가 끝날 시간이면 벤치에 엄마들 세대만 대략 2~3년(아이들이 학교 끝나고 놀이터에서 조금이라도 꼭 놀고 집에 가야 하는 나이) 주기로 바뀌며 매년 보초서는 엄마부대가 앉아 있고 다양한 연령의, 인구밀도 높은 놀이터라 할 수 있다. 이곳에 가면 남자, 여자 아이들의 유행 놀잇감을 한눈에 알 수 있는데 십여 년 전까지는 남자아이들은 모두 유희왕 카드나 각종 게임카드, 딱지 등을 상자에 넣어 들고 다니며 맞교환 거래도 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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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놀이터의 끄트머리 모래놀이장을 지나고 나면 809동 진입로에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곳은 8단지 여자아이들의 작은 소꿉놀이 명소이다. 지나쳐 갈 때마다 여자아이들이 열심히 풀을 뽑아 다지고 있거나 이미 한바탕 살림하고 떠나간 흔적들이 남아있어서 내 어린 시절의 향수에 미소 짓게 된다. 그렇게 열심히 살림하던 아이들도 어느새 커서 더 이상 이곳에 관심이 없어져도 여지없이 그 후배들이 세대를 이어 이곳에 모여들어 같은 놀이를 하는 재밌는 장소이다. 그 북적이던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갔을 저녁때 지나가다 보면 그 벤치에는 주인 잃은 가방, 겉옷, 줄넘기들이 처량하게 놓여있었다.

122쪽

놀이터는 존재 그 자체로 마법 같다. 아이들이 떠나고 홀로 남은 놀이터의 풍경은 쓸쓸하지만, 아이들이 남긴 흔적들은 언제나 미소를 선물한다.

124쪽

모래놀이터와 등나무 초록색 벤치

809동을 벗어나 8단지 사잇길을 조금만 걷다 보면 길게 늘어선 모래 놀이터가 나타난다. 이 놀이터는 바닥이 모두 모래로 깔려 있어서 인기 없는 놀이터 이지만 알고 보면 가장 실속파 아이들에게 조용히 애용되는 놀이터이다. 지에스 놀이터의 혈기 왕성 한 단체놀이가 즐겁지 않거나 조용히 놀고 싶은 아 이들은 이곳에서 경쟁이 치열하지 않은 그네와 미 끄럼틀을 독차지하며 말하자면 ‘프라이빗 놀이터’ 를 유유히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다만 놀이를 마친 후 꼭 신발 한 번 벗어 털고 집에 들어가지 않으면 엄마한테 한마디 들을 수 있는 것이 주의사항이다. 그 옆에는 여지없이 사람들의 휴식을 담당하던 초 록색 벤치들이 길게 놓여있다. 초록색 페인트 냄새 를 풍기며 반짝반짝 윤이 나던 벤치가 이제는 손때 묻고 벗겨 진채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곳을 지나 조금 더 9단지를 향해 걸어가 보자. 걷 다 보면 8단지와 9단지가 이어지는 내리막 오솔길 이 나타난다. 오랜 세월을 자랑하듯 마치 울창한 숲속의 오솔길같이 되어버린 이 길은 살짝 경사가 져 있어 자전거를 배운 지 얼마 안 된 아이들에겐 작은 도전과 모험의 구간이 되어준다. 그곳을 처음 자전거로 타고 내려갔던 아이가 성취감에 들떠 무 용담처럼 자랑하던 목소리가 귀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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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단지

이곳은 과천에 흔하게 있던 5층짜리 주공아파트 중 10단지와 함께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곳이다. 한 때는 쓰레기를 모아두던 곳, 처음 분양받았던 그대 로 모습인 듯 샷시도 하지 않은 집, 밖에 걸어 놓은 빨래까지 추억의 한 장면으로 담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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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 놀이터

_ 9단지 놀이터

이 놀이터는 9단지의 대표적 놀이터이다. 이 놀이 터 한쪽으론 팔각정이 있고 그 주변에 도토리나 무 가 심겨있어 가을이면 아이들이 도토리를 줍기도 해서 도토리 놀이터로 불린다.

지금은 다르겠지만 2010년대엔 초등학교를 입학 하고 한껏 아이들의 학교 적응 돕기에 최선을 다하 고 싶은 엄마들의 열정으로 1학년은 매달 생일인 아이들을 모아서 반 아이 모두와 생일파티를 해주 기도 했는데, 이 놀이터에 있는 팔각정이 꽤 넓어 서 생일파티 장소로 절찬리에 활용되었다. 정자에 음식을 잔뜩 차려놓으면 아이들은 먹다가 달려 나 가 놀고, 놀다 힘들면 정자로 와서 먹고 또 달려 나 가는, 말하자면 지금의 키즈카페 비슷한 것 아닌가 싶다.

이곳의 또 다른 특징은 8, 9단지 통틀어 유일하게 뺑뺑이가 있어서 그네, 미끄럼틀이 성에 차지 않는 활동성 좋은 개구쟁이 아이들이 모여드는 박진감 넘치는 놀이터라는 것이다.

오랜 세월을 살아왔을 도토리나무를 타고 사르륵 오르내리던 청설모도, 그 청설모를 반짝이는 눈으 로 신기하게 쳐다보던 아이들의 모습도 이젠 추억 의 한 장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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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 자전거 가게

상가와 도토리 동산을 따라 아파트 단지를 크게 한바퀴 돌게 되면 양재천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 양재천을 끼고 자리 잡은 자전거 가게. 작은 도시라 자전거로도 충분히 학원, 학교, 마트를 갈 수 있고 바로 옆에 양재천을 끼고 있다 보니 언제나 자전거를 사러 온 아이들과 부모님, 바람을 넣거나 수리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부림동 주민 대부분의 자전거가 이 아저씨의 손을 거치지 않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이가 처음 두발자전거를 사던 날, 주인아저씨께서 자전거 뒤를 잡아주시며 중심 잡고 타는 법을 가르쳐 주시던 생각이 난다.

“어허허 무슨 사진을 찍기까지~.” 멋쩍어 하시면서도 선글라스를 고쳐 쓰시고 항상 그래왔듯 열심히 자전거가 필요한 아이에게 설명해 주시는 아저씨의 모습이 왠지 뭉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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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단지 마상가 부림 이발관

건강원, 부동산, 세탁소, 미용실, 가장 넓게 자 리하고 있던 마트까지 왕성하던 시절이 무색하 게 이젠 그 안이 낡고 어두워졌지만 여전히 그 곳을 지키고 있는 가게들이 정겹다. 상가의 아담한 터널길을 지나고 나면 옛 정취 가득한 부림 이발관이 있다. 이곳에서 35년간 변함없이 수많은 사람의 이발을 담당해 온 아 저씨의 섬세한 손에서는 장인의 정신이 느껴진 다. 35년간의 추억을 좀 들려달라는 부탁에 잠 시지만 마치 35년 전, 지금보다 훨씬 혈기 왕성 한 젊은이였을 그 시절로 돌아간 듯 반짝이는 눈으로 열심히 설명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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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대화 끝에 이내 아저씨는 아쉬워하 는 표정으로 당부했다.

“옛날엔 입구가 길가에 있지 않고 상가 안쪽으 로 있었어요. 상가 뒷문도 없었는데 여기 상가 사람들이 다 같이 힘을 모아서 직접 입구 증축 공사도 하고 뒷문도 만들어서 지금같이 훨씬 편하게 된 거예요. 어휴, 그 공사할 때 얼마나 고생했나 몰라요! 근데 뭐 이젠 다 지나간 일들이지…. 아이고! 그나저나 좋은 일 하십니다! 구석구석 잘 좀 남겨주세요~!”

이제 곧 다 사라지고 새로운 시간이 시작될, 동 네 사람들 모두의 마음속 사진첩에만 남을, 이 곳을 기억하고 싶은 아저씨의 마음을 담은 응 원으로 동네 한바퀴 산책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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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으로 추억하는 9단지 대표 음식점 ‘과천갈비’

글•대담 조은빈

과천시 별양로 180일원 (부림동 41번지 일원) 면적 138,828.0㎡를 대상으로 진행하는 ‘주공 8, 9단지 재건축’. 이로 인해 사라지는 것은 놀이터와 아파트만이 아니다. 많은 주민이 애용한 상가 역시 새로운 탄생이 예정돼 있다. 이에 두고두고 기억날 9단지 상가 속 과천갈비 고경아 사장님과 추억을 곱씹어봤다. 기억 속에 남을 그 달콤 담백했던 고기맛이 아쉬움 탓인지 본래 음식과 다르게 왠지 쌉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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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빈(이하 조)

안녕하세요, 사장님. 바쁜 시간대에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과천갈비 고경아 사장

아닙니다. 시작할까요?

가게 소개 먼저 부탁드릴게요.

가게 이름은 ‘과천갈비’라고 합니다. 부림동 9단지 상가 2층에서 영업하고 있어요. 손님들이 ‘동네에 숨어 있는 고깃집’,‘추억의 맛집’이라고 말씀해 주세요. ‘내 가족이 먹을 수 있는 음식만 제공하겠다’는 마음으 로 지금의 식당을 시작하게 됐어요. 그래서 특징이라면 가스불이 아니라 참숯에 고기를 구워 은은한 향이 갈비에 베도록 했어요. 또 진한 국물맛을 자랑하는, 그래서 손님들이 국문 한 방울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싹 다 드시는 갈비탕도 대표 메뉴에요. 그냥 한결같은 맛에 예전부터 단골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저도 과천에 살면서 사장님의 갈빗집을 많이 들어 본 거 같아요. 부림동에서 언제부터 영업을 하신 건가요? 부림동에서 영업을 하시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여기 가게 자리는 오래됐는데 제가 맡아서 한 것은 과천에 사는 분 지인 소개로 이 가게를 받아 지금까지 3 년 가량 운영하고 있어요. 코로나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과천 갈비로 상호를 바꿔서 시작했죠.

그럼 그전에는 어디서 음식점을 하셨어요?

원래 과천 시내에서 약 7년 음식점을 했어요. 2020년 코로나19때문에 정리했고 한 1년 쉬었다거 지인에 게 이 가게를 소개받아 다시 시작했죠.

과천에서 10년 넘게 음식점을 운영하시는 거네요. 영업 중이신 거네요. 부림동에서 음식점을 다시 시작하시면서 메뉴를 고깃집으로 정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코로나19가 터지고 잠시 장사를 쉬고 있는데 시내에서 장사할 때 손님분들이 하시는 말씀이 떠오르더 라고요. 식사 위주 식당이 많아 맛집이 너무 없다는 소리였어요. 진짜 돼지갈비, 옛날 돼지갈비처럼 갈비 다운 갈비를 먹었을 수 있는 그런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숯을 이 용한 고깃집을 하자고 결심했어요. 참숯도 종류가 여러가지인데 좋은 참숯을 쓰면 그 숯향이 또 다르거 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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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이 가게에 정말 많아요. 이렇게 손님들이 과천 갈비를 찾는 사장님만의 비결이 따로 있을까요? 저희는 양념돼지갈비 같은 경우 설탕을 일반 식당 쓰는 거보다 조금 적은 양을 넣고 과일을 주로 많이 갈아서 넣어요. 은은하게 향도 있고 과일의 단맛도 나는 양념이에요. 삼겹살 같은 경우도 바 로 참숯에다가 구우니까 일반적인 판에서 굽는 거랑 또 다르게 삼겹살 자체에도 참숯 향이 올라 오니까 손님들이 돼지갈비나 삼겹살을 많이 선호하세요. 식사류 중 갈비탕은 서울에서도 일부러 손님들이 오세요. 저희 갈비탕 만들 때 국물도 기름 다 싹 걷어내 만들거든요. 모든 음식을 저희가 직접 자체적으로 만들어요. 하다못해 뭐 소스 같은 거도 그렇고 다 여기서 직접 만드니까 손님들 이 아시는 분들은 맛이 다르다 그러시고 꾸준히 찾아오시는 경우가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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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하나 손 안 가는 요리가 없네요. 사장님이 영업하면서 기억에 남는 손님이나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이거는 뭐 조금 슬프다고도 해야 되나. 여기는 오래된 집이다 보니까 경로당에 어르신들이 많이 오세요. 근데 이 가게가 2층이니까 계단 올라오기 힘드신데, 어떤 분들은 정말 네 발로 올라오시 시도 해요. 그렇게라도 음식 드시겠다 그러시면 저는 막 고마우면서도 되게 안타깝기도 해요. 그중 부부로 오시는 어르신들이 계셨어요. 어머님은 약간 치매가 있으시고 아버님도 그때 암 수 술을 하셨다 그러셨어요. 그렇다보니 갈비탕이나 된장찌개 정도 드시고 가시는데 올해 봄부터 건 강이 좀 안 좋으셔서 여기까지 오기가 너무 힘들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아버님 제가 한 그릇이라도 배달을 해드릴 테니까 드시고 싶으신 게 있으면 전화하세요’라고 했어요. 우리는 배 달을 안 하는 식당이거든요. 그래도 전화를 주세요. 그러면 제가 해드릴게요. 그랬어요. 제가 사실 홀로 사시는 어르신 집, 거동이 힘드신 분들. 몇 집을 그렇게 해드리거든요. 8단지 9단지 부림동 몇집이 계셔요. 그 어르신도 그랬는데 병원에 한 번 입원 하시고 전화를 하셨더라고요. 다른 음식 은 못 먹겠는데 여기 냉면이 너무 먹고 싶다고 그러셔서 물냉면 한 그릇을 해서 갖다드렸죠. 찾아 갔더니 침대에 누워계시더라고요. 빨리 건강 찾아서 기력 회복하고, 드시고 싶은 게 있으면 한 그 릇도 상관없으니까 꼭 전화해서 말씀하세요. 제가 갖다드릴게요. 그랬어요. 그렇게 이제 몇 번 배 달을 했죠. 제가 그 어르신 댁에는 된장찌개도 해드리고 그랬는데 한 달 동안 연락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우리 직원한테 ‘그 아버님이 한 달 동안 연락이 없으시네. 병원에 다시 입원했나?’ 그 러는데 손님이 식사하고 결제하면서 ‘그 어르신을 아세요’라고 묻는 거에요. 알고보니 돌아가신 지 한 달이 됐다는 거예요. 그 손님이 어르신의 큰 아드님과 작은 아드님이더라고요. 생전에 한 그 릇도 배달해줘서 그걸로 기운차렸다고 말씀하셨대요. 장례 치르고 감사했다고 인사차 들렀다면 서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 쳐다보고 울었던 기억이 나요. 얼마 되지 않은 이야기에요. 다음날 어머 님 모시고 왔더라고요. 돈 많이 벌어도 좋지만,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정을 많이 나눠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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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 기억에 오래 남겠어요. 그럼 지금 사장님도 부림동에 거주 중이신 건가요?

여기 안 살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 외할머니 외갓집이 과천이 었어요. 저는 고향이 서울이에요. 서울에는 논밭 들판 이런 게 없었잖아요. 과천 외할머니네 집에 오면 지금은 막 아파트 가 들어왔지만 옛날에는 저수지에 들판이 엄청 많았거든요. 어린 마음에 그게 너무 좋았던 거예요. 그러니까 방학만 하면 할머니네 와서 살았어요. 여기서 사귄 친구들도 있고 개인적 으론 추억이 많아요. 도움을 많이 받았던 곳이에요. 어릴 때 알았던 사람들도 여기서 또 만날 수 있고. 고향은 아니지만 고향 사람 만나는 것처럼 반갑게 볼 수도 있고요.

그런 정겨운 가게가 없어진다는 게 정말 아쉽네요. 부림동 주 공 8, 9단지가 곧 재건축에 들어간다고 들었어요. 사장님의 추후 영업계획은 어떻게 되세요?

이주가 내년(2025년) 봄 즈음이에요. 이주를 곧 시작한다 뭐 이런 얘기는 들리는데 아직 확정된 건 없나보더라고요. 일단 은 여기 다 떠날 때까지 저희가 끝까지,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켜야하지 않나 생각 중이에요. 저희집에 오시는 손님들은 너무 안타깝대요. 이게 없어지는 게 너무 안타깝다고 사장님 어디 다른 데 가서라도 다시 오픈하세요. 지금 이런 상황이에 요. 손님들이 인정하는 맛집이 사라지고 역사도 추억도 없어 지는 게 조금 안타까운데, 아직 결정된 부분은 없어요. 일단 이주 다하는 마지막까지 남아있으려고요.

과천에서 다시 뵐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과천에 바라는 점이 있으신가요?

과천은 주거지역을 중심으로 오밀조밀 다 식당이잖아요. 식 사할 수 있는 식당은 너무 많아요. 포화 상태인데 좀 특별한 먹자골목이나 먹거리촌처럼 어느 한 지역이나 거리를 외식 타운으로 조성하면 괜찮을 것 같아요. ‘아 거기에 가면 거의 다 있다’는 생각으로 조금 거리가 있어도 그쪽으로 갈 수 있 게요. 가족끼리 만나 여유있게 외식할 수 있는 타운이요. 이 제는 인구가 워낙 많이 유입이 됐으니깐 그랬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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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 엄마’의 특별한 공간과 시간

글•조연민

기억을 소환시키는 다양한 연결고리들이 있다. 냄새, 분위기, 온도, 말투 등등. 이것들이 기억의 주파수와 맞는 순간 추억이 떠오르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배어 나오는 그런 경우가 있다. 교통공원 그곳에서 뛰어노 는 아이들의 활기찬 분위기, 한겨울이라 코가 시리지 만 펑펑 내린 함박눈 덕에 포근함이 느껴지는 온도, 아 이들의 신난 말투가 떠올라 마음이 따뜻해진다.

늘 북적이는 관문체육공원 부지 한쪽 끝에 어린이교 통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 주변 많은 사람들이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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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공원에 대해 ‘어머 거기 그런데가 있어?’라 너무 어린아이들이 있는 곳에서는 부딪칠까 위 는 반응을 보인다. 화려한 체육공원의 시설만 험해서 맘껏 뛰놀지 못하니 점점 옆으로 옆으 으로 시민들이 운동을 즐기기에 충분하기에 굳 로 놀이터를 이동해서 노는 것도 재밌는 모습 이 따로 찾아가지 않는 공간일 수도 있고 오히 이었다. 다른 이유로는 멀어질수록 어른들의 려 부림동에 살고 있는 어린이들이 즐기는 놀 시선에서 벗어난다는 것도 있었던 것 같다. 이 이터의 확장된 공간일 수도 있겠다. 이곳은 작 렇게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성장해 나가는 모습 은 놀이터와 교통 체험시설이 함께 있어 어린 을 보면서 과천에서 아이 키우길 잘했다는 생 이집 등 여러 유·아동 기관에서 교통 체험을 위 각이 절로 든다. 해 찾아오는 장소이다. 방과 후엔 주변에 사는 부림동 아이들이 놀러와서 자전거를 타기도 하 오랜만에 찾아간 교통공원은 한여름이라 사람 고 여름엔 물놀이 겨울엔 눈싸움을 즐기는 곳 이 없이 텅 비어있었고 지속되는 더위에 나뭇 이기도 하다.

잎마저 축 처진 상태였다. 나는 추억 속 장소를 천천히 걸어다니며 이곳이 내가 기억하고 있는 부림동 놀이터들은 일직선상에 쭉 있어서 89단 것보다 작고 언덕이 낮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지와 주택가를 걸어가면서 모든 놀이터를 만나 가 어린 시절 뛰놀던 동네에 추억놀이삼아 놀 볼 수 있다. 관문초등학교와 가장 가까워 항상 러 갔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었다. 옛날엔 북적이는 GS 놀이터부터 모래 놀이터, 9단지 내가 작았고, 몇 년 전엔 아이가 작았지…. 장소 놀이터, 뱅뱅이 놀이터를 지나 제일 끝에 교통 는 그대로인데 주인공 중심으로만 공간을 살펴 공원 놀이터가 있는 셈이다. 아이가 자라면서 서 그런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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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걸었던 똑같은 길은 개인의 시간을 만나 새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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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공간에서 각기 다른 인생의 순간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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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함께한 많은 추억거리가 있지만 이곳 과천 부림동에서 살던 시절 함박눈이 펑펑 오던 날, 세상 모든 소음이 커다란 털 뭉치 눈송 이에 묻혀 사라진 그날, 교통공원에서의 밤은 최고 아름다운 순간 으로 기억된다. 천천히 기억을 소환해 그때의 느낌으로 되돌아가 면 순간의 분위기 온도 포근함이 고스란히 느껴지고 이런 느낌은 시 한 편을 떠오르게 한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라는 김 춘수의 시이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비슷한 제목의 샤갈의 <나 의 마을>이라는 작품 또한 겹쳐서 연상된다. 시의 구절이 고스란 히 나의 추억 장면과 겹친다고 느끼는 것은 매우 주관적이긴 하지 만 그래도 그 시에 빗대어 나의 추억을 더욱 미화해 본다. 수천수만 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온 동네를 덮어 하얀 밤을 만들어 주었다.

함박눈을 뭉치고 눈밭에 굴려 눈사람을 만들고 낮은 경사로에서 썰 매를 타며 짧은 순간 즐거워하는 생기발랄한 아이들, 따뜻한 간식 을 챙겨 나와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는 엄마들 이 모든 것이 시한편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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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이

바르르 떤다.

삼월에 눈이 오면

열매들은

밤에 아낙네들은

아궁이에 지핀다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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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동에서 살면서 내가 이곳에서 계속 사는 이유가 뭘까…. 가끔 생각한다. 나는 연고가 없는 과천에 이사할 집을 알아보던 중 8단지 부림동에 아이 둘을 키우는 집에 방문한 적이 있다. 안주인은 과천은 가을이 최고이니 이곳에 살며 꼭 경험해 보면 좋겠다는 말을 전했다. 아이들 과의 추억이 너무 많아 떠나는 것이 아쉽다며 집을 둘러보는 내내 이 곳이 얼마나 좋은지 설명하기에 바빴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이전에 만났던 안주인과 똑같이 말하는 과 천 엄마가 되어있다. 유모차를 타고 다니던 아이는 킥보드에서 자전 거로 이동 수단을 바꿔 가며 이곳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가을의 청량 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알록달록 물들어가는 가을의 단풍과 함께. 과 천의 가을이 좋다는 낯선 이의 한마디에 나는 그 이유를 몇 년째 찾 고 좋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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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잎을 떨구고 바닥에 낙엽 쌓이는 속도만큼이나 빠 르게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이 온다. 베란다를 통해 보 이는 잎을 떨군 앙상한 나뭇가지는 이제 초록 생명이 다시 솟구칠 봄을 기다린다. 땅부터 시작해 저 높은 나 뭇가지 위까지 생명력 강한 봄의 초록 기운이 피어난 다. 그 절정의 시기에 벚꽃이 팡팡 터지며 피어나 화려 함을 뽐내고 한참을 꽃비를 흩날려주며 마음 설레게 한다. 부림동 곳곳에 심겨있는 벚나무들은 아파트 연식만큼 이나 오래되어 그 크기나 아름다움이 축제에서 보는 대공원 벚나무 못지않게 화려하다. 특히 8단지 입구에 심겨있는 벚나무는 꽃이 만개한 화려한 모습뿐 아니라 바람에 흩날리며 날아가는 꽃잎이 정말 인상적이다. 떨어진 잎들이 주변 바닥을 뒤덮으면 다시 분홍색 꽃 으로 땅에서 피어난 듯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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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면 나의 베란다 정원도 함께 개장되었다. 4층에 살고 있어서 벚꽃이 만개한 시기가 되면 베란다 한가득 눈앞 에 벚꽃 세상이 펼쳐진다. 괜히 의자를 끌어다 놓고 차 한 잔 마시 던 시간이 사진처럼 추억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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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쉼을 누리는 대공원나들길

글•조은빈

과천에 거주하는 시민이라면 대공원 나들길을 한 번쯤 돌아봤을 것이다. 대공원 나들길은 4호선 과천역 부림동주민센터에서 막계동까지 이어지는 약 0.7km의 테마길을 말한다. 과천역 3번 출구에서 나오면 골목 입구가 바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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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을 선물하는 길

우리의 바쁜 삶은 내가 살아가는 곳을 돌아보고, 환경과 교감할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매일 지나다니는 길, 마음만 먹으면 금방이라도 다가설 수 있는 대공원 나들길에서는 삶 속의 휴식, 호흡 같은 예술, 모두를 위한 조각 마을로 멋진 휴식의 시간을 가져보자는 의미로 조각공원심포지엄이 열렸다.

이후 야외조각작품을 설치했다. 대공원 초입부터 보이는 첫 조형물은 조용준 작가의 <ballon work>라는 작품이 다. 조형준 작가는 2005년 홍익대힉교 조소 전공 학사와 석사를 졸업하고 2006년 세종문화회관 2009년 A newcurrency in KOREA, 하이브 아트스페이스에서 단체전을 연 이력이 있는 작가이다. ballon work는 빨강 노랑 파랑의 풍선이 마치 살아 움직여 꿈틀거리는 듯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 조형물은 2010년 10월에 설치가 되 었으며 플라스틱과 아크릴릭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직업을 하였다.

조용준 작가의 조형물을 지나 대공원초입에 서 더 들어가보면 대공원 나들길 가운데 정원 에 나타나는 돼지 모양의 철제 조각이 하나가 보인다. 이송준 작가의 <물들다 돼지>는 이송 준 작가의 물들다 시리즈 중 세번째 작품이 다. 작가는 현대 사회의 산물인 스테인리스 식기를 이용, 지붕 없는 공장에서 찍어내는 또 다른 하나의 기성품을 만든다. 작업의 소 재로 사용되는 스테인리스 스틸은 재료 자체 가 가지는 사회적 의미로 고민의 영역을 확장 한다. 녹슬지 않기에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상품으로 생산되지만 이용가치가 유효 함에도 불구하고 버려지는 스테인리스 식기 들, 작가는 그것들을 수집한다. 사람들의 기 호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효율만을 위해 만 들어진 상품들은 꿈틀거리는 생명을 재현하 는 재료로 거듭나면서 자연을 수단으로 삼는 인간의 생산 활동 자체에 질문을 던진다. 대 공원 나들길에 설치된 돼지는 자세히 보면 스 테인리스 숟가락과 공기밥 뚜껑들을 겹겹이 이어 붙이는 용접 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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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보면 더 예쁜 식물과 호흡하는 길

대공원 나들길에는 조형물 이외에도 다양한 식물들이 의 생육환경은 모든 면에서 강한 장점을 가지고 있으 존재하고 있다. 과천시에서는 대공원 나들길에 있는 며, 특히 나무 그늘 밑에서 잘 자란다. 그러나 물이 있 다양한 식물들을 소개하는 표지판도 설치해 놓았다.

는 물가나 습한 곳은 아주 싫어한다. 겨울의 매서운 대표적으로 몇 가지 보자면 조팝나무가 있다. 조팝나 추위와 여름의 무더운 더위에도 강해 우리나라 전국 무는 어감이 이상하다. 이상한 어감 때문에 사람들에 어디서든 잘 적응하며 특히 음지에 강한 식물이다. 게 유머화 되기도 한다. 조팝나무는 꽃 모양이 조로 높이는 약 30cm이다. 꽃은 흰색이며 나뭇잎 위에 있 지은 밥인 조밥처럼 생겼다고 해서 조밥나무라고 불 다. 잎은 어긋나지만 4~6개가 층으로 모여 달린다. 렸다고 한다. 조팝나무의 꽃말은 노력, 단정한 사랑 을 의미한다. 길이는 1.5m~2m까지 자라며 산야에

층 간격은 2~4cm이고 짙은 녹색이다. 열매는 핵과 로 계란 모양이며 길이는 1.5cm이다. 일본이 원산지 서 자란다는 특징이 있다. 꽃이 피면 작은 흰꽃들이 이며 나무 그늘에서 자란다는 특징이 있다. 원줄기가 줄기를 따라 개나리마냥 다닥다닥 붙어서 잔뜩 핀다. 옆으로 벋으면서 끝이 곧추 서고 녹색이며 처음에는 조팝나무는 화경정화수종이라 오염에 강하고, 미세

잔털이 있으나 점차 없어진다. 높이 30cm 내외로 자 먼지의 저감효과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보통은 개화 라며. 잎은 어긋나지만 윗부분에 모여 달리고 달걀을 기간이 길고, 나무가 크지 않아서 꽃이 진 뒤 잎이 나 거꾸로 세운 듯한 모양이며 윗부분에 톱니가 있다. 올 때에는 반대편 차선의 빛을 차단하기 때문에 도로 잎 표면 맥 위에 잔 털이 있고 밑부분이 좁아져 잎자 옆에 많이 심는다. 또한 결혼식장에서도 장식하는 꽃

루가 된다. 꽃은 4∼5월에 피고 흰색이며 수상꽃차 으로 자주 쓰이곤 한다. 해열진통 효과도 있어서 한 례에 달린다. 암꽃은 꽃이삭 밑부분에 약간 달리고 약재로도 쓰인다. 상록수 과라서 겨울에도 다소 누렇 게 뜨긴 해도 일단 푸른 잎을 유지한다. 잎은 손톱보

수꽃은 윗부분에 많이 달린다. 꽃받침은 4개로 갈라 지고 꽃잎은 없다. 수술은 3∼5개이고 암술대는 2개 다도 작지만 월계수와 감나무 이상으로 굉장히 두껍 로 갈라져서 젖혀진다. 열매는 핵과로서 털이 없다는 고 반질거린다. 꽃 냄새는 굉장히 향긋해서 회양목 특징이 있다. 울타리를 꾸며 놓은 화단에 꽃이 만개하면 근처만 가 도 꿀처럼 달달한 꽃향기가 훅 끼치며 꽃이 귀한 때 인지라 벌도 상당히 많이 불러 모은다.

대공원나들길에 만개하는 수국의 꽃말은 냉정, 냉담 과 무정, 변덕, 심이다. 또 다른 의미로는 진실한 사 랑, 처녀의 꿈, 인내심이 강한 사랑이라는 꽃말도 존 재한다. 한국이나 일본의 문학작품이나 영화에서 초

대공원에 핀 수호초는 장미처럼 화려하지 않고, 백합 처럼 키가 크지 않고, 라일락처럼 향이 있진 않지만, 여름을 상징하는 꽃으로 자주 등장하고 특히 꽃피는 나즈막히 소담스럽게 피어있는 모습이 보면 볼수록 시절이 장마철과 겹치므로 비를 맞는 남색 수국꽃이 아름다움에 아름다움을 더 하는 예쁜 꽃이다. 수호초 서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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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여름꽃이라 으스스한 전설에도 키포인트로 자 주 등장한다. 꽃의 색으로 토양의 pH를 확인할 수 있 는데 pH6.0~6.5 정도의 토양에선 핑크색, pH4.5 정도의 산성토에선 푸른색을 띈다. 토양이 산성에서 점점 중성으로 올라갈수록, 보라색, 자주색, 옅은 자 주색, 분홍색으로 변한다. 품종에 따라서 색깔이 고 정되는 경우도 있다. 꽃피는 시기가 초여름의 장마철 과 겹치는데, 그 이유는 수국이 물을 엄청나게 먹어 대는 식물이기 때문이다. 초여름 끝에서 둥근 모양인 꽃차례를 이루어 꽃이 핀다. 꽃은 처음에 초록빛 띈 흰색으로 피지만 점차 파란색, 보라색으로 변하는데 토양의 성분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 꽃 하나하나는 작지만 여러 개가 모여서 피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크 고 탐스러운 꽃다발을 이루어, 노지 관상용은 물론 살내 소 품용으로도 쓰이거나 부케 등에도 애용된다. 꽃잎 부분만 작게 오려내어 가공해 하바리움 등에 쓰 는 편이다.

이 외에도 부림동에 있는 나들길은 다양한 식물생태 계로 구성되어 있다. 나들길을 걷다 보면 식물표지판 에 자세히 설명이 되어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대공원 나들길에서 산책한다면 상쾌한 공기와 함께 식물표 지판 하나하나 읽어보는 것을 추천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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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걸음마다 자연스럽게 즐길 수 있는, 부림동의 매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굴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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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의 마을을 기억하며

글•대담 임용훈

임용훈 (이하 임) : 안녕하세요? 선생님.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평소 사적 인 자리에서 호형호제하시는 분인지라 저만 매우 편합니다.(웃음).

지광명 (이하 지) : 별말씀을요. 덕분에 나와 아내는 평안한 세월을 보내고 있지요. 부림동에 오 랫동안 살았더니, 그것이 임용훈씨와 인터 뷰 거리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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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 예. 맞습니다. 그런데 지 선생님께서 과천에 오랜 세월 동안 거주하시면서 아주 다양한 분야에 족적을 남긴 것 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역사문화파트, 건축, 예술… 등등, 그래서 오늘 지 선생님의 일대기를 듣고자 요청드 리게 된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이곳 과천과는 어떻게 인 연을 맺으시게 되셨습니까? 지 : 저는 지금의 흑석동에 위치한 중앙대학교 건축학과를 70 년대에 졸업했어요. 과천문화원의 이정달 원장도 같은 대 학교를 졸업했지요. 이 원장님과도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 었고 마음이 맞아 함께 어울려 다녔죠. 제가 태어난 곳은 경 기도 하남인데, 학교 다니면서 당시 흑석동에서 과천까지 거리가 멀지 않았기에 이 원장님과는 대학 학창 생활 때 함 께 공부하며 생활하는 등 서로 공유하는 부분들이 있어서 만나면 항상 반가운 친구였습니다. 과천과의 인연은 그렇 게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던 것 같아요.

임 : 대학교 때의 친구가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이 참으로 아 름다운 인연인 것 같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도 과천과의 인연이 계속되었습니까? 지 : 대학 졸업 후에는 연희동에 있는 은사님의 건축사무실에서 일을 배우며 생활하다가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지요.

임 : 아, 그때 사모님을 만나게 되었군요? 지 : 당시 아내는 간호사였는데 독일로 건너가 일을 하였어요. 귀 국 후에 인사동에 있는 일요화가회라는 단체에 소속되어 그 곳에서 미술을 그리고 있었고, 천생연분이 되려니까 바로 그 일요화가회에서 만나 1979년에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설계 작품 위대한 한국인상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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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공원에서 부인과 두 아들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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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 사모님께서 독일에서 귀국하신 이후에 곧바 임 : 예? 어쩔 수 없이 세파에 끼어들게 되었다는 로 미술 분야에서 연이은 공부를 하셨다니, 향 학열이 대단하셨던 것 같아요. 지 : 향학열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아내의 경우 집 념과 고집이 대단했었지요. 하하하. 뭐라도 본인 이 한다면 꼭 해내려고 하는 그런 모습이 남편 입 장에서 볼 때 보기가 좋았어요. 과천에서 미술협 회에 가입하여 꾸준히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단 지 요즘 들어서서 체력적으로 다소 부담을 느끼 는 것 같아서 몇 해 쉬고 있습니다.

뜻인가요? 지 : 그렇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해요. 종로5가 에 있는 고려예식장에 결혼식 예약을 모두 마쳤 는데 10.26 사태, 연이은 12.12 사태 등 국가의 비상시로 인해 준 전시 사태로 전환되어 모든 사 회활동에 제약이 가해졌던 겁니다. 즉, 결혼식을 미뤄야 하는 일이 벌어진 거죠. 참으로 황당했습 니다. 청첩장부터 예식 준비, 신혼집 장만 등. 앞 이 캄캄하더군요. 그렇다고 아내와 무조건 과천 의 신혼집에서 동거하며 사는 것도 우스운 일이 고.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는데, 다행히 결혼식을 거행하는 것만은 허락을 해주었습니다. 대신 하 객들의 숫자를 엄격하게 세는 것 같았습니다.

임 : 다시 화단으로 컴백하실 날을 손꼽아 기대하 겠습니다. 지선생님께서 결혼하셨던 1979년 이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기록될 만한 엄청 난 일들이 발발했잖습니까? 지 : 맞아요. 임 선생님도 그 시절을 기억하고 계시는 임 : 무척 초조하셨겠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결혼 것 같네요. 그 시기 저의 경우 정치에 관심을 두 고, 사회활동 등을 할 때는 아니었어요. 저는 누

식을 올리시고, 신방을 꾸미셨다니 정말 행운 이셨겠네요. 구보다 더 열심히 그리고 평소에도 건축 설계와 지 : 네. 제 입장에서는 하느님의 보우하심이 있었다 조각 작품 등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고 자부하 니까요. 그런데 정치. 사회적 문제가 제 자신의 일과 직접적으로 결부될지는 꿈에도 몰랐지요. 임 :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사신다는 말씀이 마음 으로 와 닿습니다. 현재 교회를 다니시는지요? 지 : 예. 과천교회 신자입니다. 대학교 때에도 기회가 되면 과천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었지요.

고 믿고 있습니다. 매사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삽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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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설계한 부림동 신축빌라 앞에서 지광명 님과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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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 그럼 상당히 오랫동안 다니셨군요. 과천교회 임 : 지금 거주하시는 신축빌라는 선생님께서 직 라면 중앙동 11단지 부근에 있는 교회를 말씀 하시는 것이죠? 상당히 큰 교회인 것으로 알 고 있습니다만. 지 : 그렇습니다. 기록으로 볼 때 과천지역에서는 가 장 오래된 교회로 알고 있습니다. 1950년 겨울

접 설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 기억으로 신축하시기 전 옛날 집 텃밭에서 간단한 채소 와 꽃을 가꾸시고, 예쁜 담장까지도 손수 만들 어 설치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작품소 개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에 이 원장 집(지금은 국립과천과학관이 들어서 지 : 학교를 졸업한 후 연희동에 위치한 김영중 은사 있음) 사랑방에서 신자들 10여 명이 예배를 본 것이 그 시발점이라고 들었어요. 이 원장의 할아 버지부터 아버지, 작은아버지, 고모들까지 집안 어른들이 솔선해서 전도사님을 모셔 오기도 하 고 양재천 모래와 흙을 배합한 벽돌로 과천교회 를 건설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 다. 친구이기 전에 교회 신도로서도 귀감이 되는 집안이었고 그 부분에 좋은 느낌을 가졌지요. 이 후 과천이라는 곳이 더욱 친근해졌어요. 정말로 저의 인생에서 큰 변화가 생겼던 것이죠. 그래서 인지 과천교회에 다니면서 나름 봉사활동 등을 할 때면 마음이 절로 포근해지더라고요.

임 : 과천교회의 산 역사를 들은 것 같습니다. 선생 님께서 당시 느꼈던 과천의 포근함을 대략 짐 작할 수 있겠네요. 그래서 결혼하신 후 과천으 로 오시게 된 이유 중 하나이시군요. 지 : 저의 경우 그때나, 지금이나 과천과의 관계가 너 무 좋아요. 80년도 초로 기억하는데, 당시 2단지 292동 501호(15평)를 일반분양 받았습니다. 너 무 기뻤지요. 그 후 이곳 부림동 지금 집은 2006 년에 구입하였고, 2018년에 새로 신축했습니다. 이 집에서 큰아들, 작은아들 모두 교육시켰고, 그 아이들은 과천교회는 아니고 서울 전농동 교회 를 다니다가 그곳에서 색시들을 만나서 결혼생 활을 하고 있으니, 부림동은 다시 한번 제게 풍요 의 마을인 셈이죠.

님의 건축사무소에 출퇴근하면서 일을 하게 되 었어요. 1978년에 과천청사 썬큰 광장의 조각분 수를 설계했고요, 1979년에는 서울대공원 분수 대(코끼리 광장) 공모작 ET를 제작 한 바 있습니 다. 대공원 분수대는 얼마 전 확장공사를 하면서 철거했습니다. 지금은 추억으로 사진으로만 소 장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1979년에는 공군에서 병역의 의무를 위해 복무를 한 바 있습니다. 건축 사무실에 근무 할 때 일반건축물 설계는 기본적 으로 배우고 다듬었고요, 제 은사님이 조형물, 예 술작품 등의 권역까지 담당하신 관계로 저도 일 반 건축물과 조형물도 다루게 되었지요. 나름 재 미도 있고 보람된 분야이기도 합니다. 1986년에 는 천안 독립기념관의 <위대한 한국인상>을 은 사님과 공동 제작하였고요, 1999년에는 군산 개 항 100주년 기념 <진포대첩비>를 제작한 바 있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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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 저희들이 알기에도 아주 익숙한 조형물들을 임 : 아, 그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었군요. 선생님 많이 설계하셨군요. 존경스럽습니다. 앞서 말 씀하시기를 사무실이 있던 서울 연희동까지

께서는 2010년도에 과천시 문화관광해설사 로서도 활동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출퇴근하셨다고 하셨는데 지금과 다른 교통 지 : 예. 평소 제가 교회에서도 청년, 청소년부 등에서 상황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겠네요. 지 : 그렇죠. 80년대 초 이곳 부림동에서 연희동까지 출퇴근하려면 녹록치 않았어요. 출퇴근 시 과천 에서 을지로, 을지로에서 신촌, 신촌에서 연희 동 사무실까지 3번 갈아타고 다녔지요. 거기에 남 태령 고개도 개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중교통 들의 연계도 호락호락하지 않았었습니다.

활동하기를 선호했습니다. 후학들에게 재미있고 알찬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고, 그러다보니 과 천시에서 문화관광해설사를 모집한다기에 3개 월 역사문화에 관련된 교육을 받고 문화관광해 설사로 활동을 하기도 했었지요. 약 5년 동안 하 다가 개인사업 등으로 인해 그만두게 되었습니 다. 현재의 과천이 인근 도시에 비하여 인구가 제 일 적은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 문화, 예술 등에 있어서는 그 범위와 깊이 등의 인프라 등은 타도 시가 따라 올 수 없지요. 온온사, 과천향교, 추사 박물관, 마애명문, 무동답교놀이, 세계유네스코 문화에 등재된 줄타기 등등.

임 : 80년대 과천이 그랬을 것 같아요. 7~80년대 과천 신도시 개발사진을 보면 썰렁하더라고 요~ 지 : 제가 대학 다닐 때와 비교해도 정말 상전벽해(桑 田碧海)라는 말이 딱 어울립니다. 흑석동에서 사 당까지 가는 데에 비만 오면 진흙밭이 되는 거예 임 : 네. 저도 동감하고 있습니다. 과천시의 유. 무형 요. 질척거려서 걸을 수가 있어야지요. 지금의 동 작역이 있는 이수는 사당동의 정금마을까지 강

문화유산, 예술 등 과천은 무한자원의 보고이자 천년신화의 도시라는 것을 자주 느낍니다. 물이 들어왔던 것으로 기억나는군요. 당시에 양 지 : 수천 년 동안 이어져온 삼남길, 여우고개이야기, 재동 말죽거리로 나갈 일이 있었는데 버스는 1 시간에 1대 있었으려나. 하여튼 무척 고생했던 생각이 납니다. 사당동에서 남태령고개를 걸어 서도 많이 다녔지요. 고개를 넘으면 지금의 서울 대공원, 과천과학관이 있는 큰 벌판이 기억에 새 롭습니다. 지금 부림동은 당시 과학관 일대와 경 임 : 아무쪼록 앞으로도 건강에 더욱 유의하시고, 마장, 환경사업소 등이 위치한 관문동 주민들이 이주한 것이 뿌리가 된 것이지요. 초창기 8~9단 지를 지으면서도 입주를 많이 한 것으로 알고 있

홍촌마애승용군 등 수많은 자료와 이야기들도 업그레이드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앞으로 의 시대를 아우르는 트랜드는 사람들을 위한 기 초인문학 여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사랑하는 부림동에서 항상 활기 차고 보람있는 생활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장시간 감사합니다. 습니다. 9단지와 과천 외곽도로 사이에 작은 동 지 : 아닙니다. 장시간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제가 산이 쭉 이어져 있었는데 흙이 양질의 빨간색이 었어요. 제 기억에는 그곳 흙으로 빨강색 벽돌을 만들기도 했었습니다.

오히려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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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기 다른 모양의 건물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부림동 주택단지 그 사이에 서서 바라보면 공유하고 배려하는 주민의 삶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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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제사를 아시나요?

과천 토박이 김시환(80)

글•대담 이남교

이남교(이하 이) : 이곳 부림동에서는 언제부터 사셨고, 그 당시의 가족상황과 어떻게 살으셨나요?

김시환(이하 김) : 저는 관악산 아래 지금의 과천초등학교 근처인 관문리에서 조상 대대로 살았습니다. 1983년경 과천에 정부종합청사가 들어올 무렵 아파트를 지으면서 이곳 부림동으로 집단 이주했습니다. 당시에 집사람과 열한 살과 네 살 된 아들 둘이 있었고, 산에 가서 나무도 해다 팔고, 주로 농사지으면서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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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 처음 이곳으로 이주할 당시와 지금을 비교할 때 경제 활동에 변화가 있었나요? 김 : 크게 변한 것은 없어요. 주로 농사를 지으면서 살 고 있습니다. 변화가 있다면 옛날에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팔았는데 요즈음엔 나무는 하러 가 지 않아요. 그리고 과천이 개발되면서 지금의 과이:이 동네에서 예전부터 내려왔던 풍습이 있으 학관과 대공원 쪽에 큰길이 새로 나고 차들이 많

요. 메기, 뱀장어, 피라미 등도 많아서 동네 사람 들이 잡아먹기도 했어요. 그리고 큰물이 난 뒤에 는 어디에서 오는지 미꾸라지도 많이 잡았고요. 옛날에는 진짜 좋았어요.

면 소개해 주세요. 이 다녔어요. 그런데 처음에는 신호등이 없었어 김 : 이 동네로 이사 와서는 3월과 10월에 1년에 두 요. 그래서 농사지으러 다니다가 교통사고로 죽 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요.

이 : 부림동으로 처음 이주할 당시에 몇 가구나 이 주하였고, 지금은 몇 가구가 살고 있는지요? 김 : 처음 이주할 때는 230개 정도의 집터가 분양되 었는데 그중 원주민은 60여 가구 됐어요. 그중에 서 지금은 10여 가구 정도만 살고 있어요. 택지 를 분양받고 집도 짓기 전에 팔아먹은 사람들도 많았어요.

차례씩 도장대에서 ‘도신’이라고 산 제사를 지냈 어요. 동네 사람들이 밤 10시에 횃불을 켜고 가 서 자정에 산제사를 지냈어요. 집마다 쌀을 걷어 서 떡도 하고, 목욕도 깨끗이 하고 노인들은 두루 마기도 갖춰 입고 정성껏 산제사를 지냈어요. 그 래야 관악산에서 산짐승들이 안 내려왔대요. 산 제사를 안 지내면 여우 같은 짐승들이 막 내려왔 었대요. 여우가 실제로 살았어요.

이 : 산제사를 지낼 때 여자들과 아이들도 같이 갔 었나요? 제사를 지내고 나서는 음식을 나눠 먹기도 했나요? 김 : 산제사는 남자 어른들 7, 8명 정도가 지냈어요. 제 사 지내고 나서는 밥은 비벼서 그 자리에서 먹고 떡과 과일 등은 지게에 지고 내려와서 다음 날 아 침에 동네 사람들을 모두 불러서 나눠 먹었어요.

이 : 이 동네에서 약 40년을 넘게 살고 계시는데 이 마을의 어떤 점이 제일 좋은가요? 김 : 우선 공기가 좋아요. 그리고 옛날부터 함께 살던 사람들이 형제간처럼 잘 지내고 있어요. 동네 사 람들이 다 모여서 생일 잔치도 하고, 제사 지내고 는 음식도 나눠 먹고, 설날에는 집마다 다니면서 세배도 하고 그랬어요. 동네 인심이 좋았어요. 언 이 : 제사를 언제까지 지냈나요? 제부턴가 그런 아름다운 풍습들이 사라지는 것김:이 동네로 이사 온 뒤에도 계속 지냈어요. 아마 이 너무나 아쉬워요. 이 : 양재천이 바로 가까이에서 흐르는데 옛날의 양재천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김 : 장마철에는 양재천 둑이 무너져서 여러 집들이 떠내려가기도 했어요. 양재천이 지금은 많이 넓 어지고 둑도 높아졌지만, 전에는 그렇지 않았어 요. 또 전에는 별양교 부근에 보가 있었어요. 수 심이 아주 깊어서 여름에는 목욕도 하고 그랬어

10년 정도는 계속해서 지냈던 것 같아요. 그 당 시 면장 하셨던 분이 산제사 지내던 곳에 있던 돌 부처를 밑으로 굴러버리고 집도 헐었는데 그 뒤 로 병이 들어서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아마 무허 가라고 위에서 시키니까 면장님이 총대를 메셨 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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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 여기 지하수는 언제 파셨어요? 그리고 지하수 자랑도 좀 해주세요. 김 : 우리가 이 동네로 이사 온 지 약 10년 후에 팠으 니까 한 30년 정도 되었어요. 5년 전쯤에는 밑에 모래를 채워서 엄청나게 크게 정수시설도 했어 이 : 이런 마을 행사를 할 때 마을 사람들은 얼마나 요. 정수시설을 한 뒤로는 물맛이 훨씬 더 좋아졌 어요. 생수로 많이 마셔도 배탈이 안 나요. 외부

언제부턴가는 과천문화원에서 정월대보름 행사 를 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우리 마을 앞 다리에서 다리밟기했어요.

모였나요? 준비할 때부터 동네가 시끌벅적했 겠어요? 사람들도 자동차로 와서 물을 많이 떠 가요. 깨끗 김 : 그럼요. 온 동네가 잔칫집 같았어요. 마을 행사할 하게 청소도 자주 하고 겨울에도 얼지 않도록 관 리하고 있어요.

때면 보통 7, 80명 정도가 모였었어요. 다리밟기 할 때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장구도 치고 춤도 추면서 홍촌마을까지 가고 했어요.

이 : 겨울철에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김 : 옛날에 노인들은 방앗간에 모여서 가마니도 짜 이 : 벼농사 외에 밭에서는 주로 무엇을 심었나요? 고 새끼도 꼬면서 지냈어요. 정월 보름 때는 어 른, 아이들 다 모여서 떡도 해놓고 고사도 지내고 요. 장구 치면서 부림교에서 다리밟기도 했어요.

김 : 콩, 고구마, 고추, 오이, 토마토 등 여러 가지 심 었어요. 이맘때면 참외, 수박, 토마토를 따서 서 울 염천교까지 가서 자기가 직접 팔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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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 산에서 나무도 해다가 서울에다 팔았다면서요? 나무해다 팔면 수익이 많이 났었나요? 김 : 소나무를 막 잘라다가 장작으로 만들어서 흑석동이나 용산까지 걸어 다니면서 팔았어요. 나무 팔아서 큰돈은 벌지 못하고 보리와 쌀 등으 로 바꿔오고 했지요. 고기는 귀해서 사다 먹을 생각도 못 했어요. 이 : 부림동에 처음 정착했을 때와 지금을 돌이켜보면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요? 김 : 생활은 무척 좋아졌어요. 많이 편해지기도 했고요. 그런데 인심은 점 점 안 좋아졌어요. 처음 정착했을 때는 동네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막 걸리도 마시고 인심이 아주 좋았어요. 생일에는 사람들을 불러서 먹 이고 그랬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보상받은 돈으로 하나둘 이 사를 많이 하였어요. 요즈음엔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어요.

이 : 앞으로 부림동에 바라는 변화는 무엇인가요? 김 : 이 동네는 처음에는 모두 2층 건물이었어요. 몇몇 사람들이 5층까지 새로 지을 수 있도록 시청에 요구하여 여러 집을 새로 지었어요. 그런 데 여기저기에 5층 건물이 들어서다 보니 동네가 산만해졌어요. 오 래전부터 이 동네 재개발사업을 추진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시와 한 전에서 수십억 원을 들여 지중화 사업도 하는 중이에요. 5층 건물 신 축이나 재개발을 하면 경제적으로 좋은 점만 있는 줄 알지만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한대요. 그래서 저는 재개발을 반대해요. 지금처럼 이층 집에서 사는 것이 제일 좋아요. 지금 이대로 조용히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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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가 함께하는 과천살이

부부 이남교, 이하순

글•대담 조연민

조연민(이하 조) : 안녕하세요. 이남교 선생님이 쓰신 내 기억 속의 과천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어요. 좀 더 말씀 듣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이남교(이하 이) : 저도 사실 어떤 내용을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여기, 부림동> 제작에 참여하면서 부림마을에 사시는 어르신 인터뷰를 했는데 열번도 더 만났어요. 정작 제 이야기는 무엇을 해야할 지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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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 아무래도 두 분(이남교씨와 그의 아내 이하순(71))이 함께 과천에 처음 와서 터를 잡으신 거니까 같이 이야기를 나 누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고향이 과천은 아닌거죠. 이 하순(이하 순) : 저는 전라북도 남원에서 태어났어요. 남원에서 학교 다닐때 원불교를 접했어요. 거기는 계단이 100계단이 있 어 가지고 남원 시내가 다 보여요. 고등학교 1학년 때인가 우 연히 갔는데 수녀로 보이는 코스모스 같은 교무님이 계셔서 다 니게 됐어요. 그런데 남편 집안도 거기를 다니고 계셨어요. 친정아버지가 날마다 새벽에 원불교가 있는 금암봉에 운동하 러 다니셨는데 거기에서 만난 청년이 마음에 들어 사주를 물어 보셨대요. 친정아버지 마음에도 들고 그 뒤에 저도 몰래 저와 의 궁합을 보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어요. 결혼 후 의정부와 서 울 홍은동 문화촌에서 3년 가량 살다가 이곳 과천으로 이사하 게 되었어요. 주택은행에 2만원씩 재형저축을 들었던 것이 분 양신청 3순위 자격이 되었었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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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 그때도 청약이라는 게 있었어요. 2만원씩요? 이 : 네. 특별 분양 케이스는 아니고 일반 분양으로 신 청을 해서 당첨이 됐습니다. 재형저축을 매월 2만 원씩 1년 가량 넣었어요. 월급이 7만 5천원 정도로 기억되는데 2만원씩 그렇게 넣었죠. 순 : 월급의 4분의 1가량을 저축한거지요.

조 : 어머님이 대단하신 것 같아요. 순 : 저는 안 대단하죠. 저는 된 줄도 몰랐어요. 저축 할 줄도 모르고, 친정에서 좀 잘 살고 편안하게 지내서 그런 것도 몰랐어요. 그런데 서울에서 큰 애와 작은 아이 낳아서 여기(과천) 와서 돌잔치 도 했어요. 그때 아주 땅이 질퍽질퍽했어요. 밖이 황토 흙밭이었어요.

조 : 그럼 과천에 어떻게 다니나요? 순 : 시내버스로 다녔어요. 불이 캄캄해서 성당 앞에 서 잘못 내리기도 하고 모르고 서울 한 번 가면 전화도 없었고 그때 참 어려웠죠. 아파트 계단 청 소도 우리가 하고 좋기는 좋은데 그런 게 있었어 요. 이사 올 때 그냥 신문 배달하는 사람들이 다 이삿짐을 올려주고 그때 엘리베이터도 당연히 없었잖아요. 옛날 단지 황토 흙바닥에 집도 5층 까지니까 청소도 우리가 하고 그때는 이제 반상 회라는 것도 있어서 집마다 반상회도 하고 또 풀 도 우리가 다 스스로 뽑고 했어요.

조 : 그래서 다들 집에 애정이 깊어요. 재건축되기 전에 사셨던 분들이 아파트에 대한 애정이 엄 청나게 크더라고요. 조합원분들이요. 순 : 그렇죠. 게다가 애들이 이제 여기에서 학교에 다녔 지요.

조 : 자원봉사도 오랫동안 하셨다고 들었어요. 순 : 애들이 어느 정도 커서 시간 여유가 조금 있을 때 였어요. 중·고등학교때 가장 친했던 친구가 구 세군양로원 원장으로 왔어요. 그 시절에는 젊으 니까 애들 데리고 친구 모임을 한 달에 한 번씩 돌아다녔는데 구세군에 가서도 모임을 가졌어 요. 구세군에서 하니까 이제 거기는 무료 양로원 이지. 부모도 애들도 없는 사람들이 많아요. 한 80분 넘게 계시고 직원도 많고. 친구가 원장이니 까 우리가 거기에서 뭘 시켜 먹곤 했어요. 우리 친정 어머니가 너무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친구한테 나는 여기 와서 뭐 좀 주방에서 돕고 싶 다. 아무것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밥은 풀 수 있 잖아. 밥만 푸면 누가 이제 또 반찬 놔주고. 그렇 게 거기를 다니기 시작했어요. 15~6년 정도, 매 주 주방봉사활동을 했었어요. 해마다 된장도 담 그고 바자회 준비도 했어요. 그렇게 열심히 자원 봉사를 했더니 경기도지사 표창장도 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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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 아들과 손자 이야기도 해주세요. 순 : 봉사하면서 살다 보니까 애들은 제대로 잘 컸어 요. 두 아이를 잘 키워서 제 나이 60이 될 때부터 손자를 보기 시작했어요. 며느리가 아들이랑 같 은 대학교에 다녔는데 술을 많이 먹고 새벽에 영 어학원을 빠지지 않고 나오는 모습에 괜찮다고 생각했나봐요. 지금 옆에 살아요. 며느리도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니까 아기를 봐주게 됐는 데 잘 크고 있어요.

조 : 그렇죠. 할머니가 봐주시니까요. 순 : 이분(남편)이 퇴직하고도 산하단체 임원으로 6년을 다녔어요. 남들은 보통 3년을 다니는데 오래 다닌 거죠.

조: 그럼 혼자 아이를 보셨어요? 순 : 처음에 애 볼 때는 그랬죠. 남편은 다른 데서도 직장을 더 다닐 수 있었어요. 근데 내가 혼자 못 보겠더라고요. 집은 5층이지 나는 또 아기도 안 봐보고 맨날 놀던 사람이라 힘들더라고. 놀이터 에 내려왔는데 업고 올라가지 않으면 아이가 집 에 안 들어가요. 너무 힘들어서 못 올라가요. 우 리는 4층에 살고 아들네는 옆 동 5층에 사는데 한 번씩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너무 힘든 거에요. 그렇게 기른 손녀가 벌써 5학년이에요. 관문초 5 학년이에요. 자기 아빠하고 동문이네요. 그리고 또 손자가 금년에 1학년 들어갔어요.

조 : 다같이 입주를 하셨어요? 순: 우리는 조합원이었고 아들네는 일반분양으로 들 어왔죠. 다른 아들 한 명은 지금 외국에 있고.

179쪽

조 : 얼굴에서 자식 농사 잘 끝낸 후의 편안함이 느 껴지세요. 순 : 편안해요. 며느리가 소통도 잘 되고요. (남편이) 어디를 가더라도 시간을 철저하게 지키는 분이 어서 존경스러운데, 코로나 시기에는 아침마다 며느리를 회사에 태워다 줬어요. 그때는 통근버 스 타는 사람이 별로 없었대요.

조 : 과천에서 손주까지 키우시고 두 분 건강만 하 시면 되겠어요. 순 : 과천에서 16평 좁은 집에서 애들 키우기가 쉽지 않았어요. 다행히 남자애만 둘이어서 오래 살 수 있었죠. 애들이 클수록 산본이나 분당이나 평촌 처럼 좀 더 넓은 곳으로 이사할까 생각했는데 이 사를 가려면 돈이 드니까 못 갔지요. 공무원 월급 뻔하고 관리비 내기도 힘들었어요. 어쩔 수 없이 눌러 있었는데 재건축을 해서 넓은 새집에서 살 게 됐어요. 지금은 친구들이 우리를 많이 부러워 해요.

조 : 삼대가 같이 사는 과천에서 지금처럼 건강하 게 사시면 좋겠어요. 인터뷰 해주셔서 감사합 니다.

180쪽

나의 두 동네 이야기 장군마을에서 가장 오래 거주한 어르신 유화실

글•대담 임용훈

유화실(이하 유) : 별말씀을요~ 나이가 들면서 기억마저 가물가물 멀어져가는데, 무슨 이야기거리가 있다고 찾으셨는지, 제가 민망스럽습니다.

임용훈(이하 임) : 안녕하세요? 바쁘신데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181쪽

임 : 별말씀을요. 지금 거주하시는 소단위 마을에 임 : 그럼 결혼 이후 계속 과천에서 거주하셨다는 오직 선생님 댁만 초창기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계시다는 말씀에 깜짝 놀랐습니다. 유 : 아하, 제가 이곳 장군마을에서 꿋꿋하게 살고 있 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그 부분은 맞습니 다. 마을이 형성되고 원년 분들은 모두 이주하시 고 저희집만 현재까지 그대로 거주하고 있지요.

것인가요? 유 : 예. 그렇지요. 결혼 이후 과천을 떠나본 적이 없 었지요. 그런 연유로 앞서 언급된 장군마을이라 고 알려진 과천성당 부근의 마을도 그 생성부터 정착되어가기까지의 과정을 잘 알 수 있었던 것 입니다.

임 : 네. 일단 그 점만으로도 선생님께 많은 이야기 임 : 예. 그렇군요. 과천의 장군마을이라…. 저도 와 추억이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여쭙고 싶 은 것은, 선생님께서 이곳 과천과는 어떤 인연 이 있었을까요?

과천에서 이십 년 이상 거주하였는데 그 부근 을 지날 때마다 마을 이름부터 마을 진입로 부 근 입구에 이르기까지 사뭇 궁금했습니다. 유 : 저는 과천에서 출생만 하지 않았을 뿐 지금까지 유 : 그러셨어요? 사실 저희 구역은 궁금증을 유발할 과천에 거주하고 있기에 과천 토박이로 불려도 무방할 것 같아요. 부모님의 직장 관계상 아주 어 렸을 때는 서울 용산에서 살다가 초등학교 3학 년 때 과천초등학교로 전학 왔습니다. 그 후 과천 초등학교에서 5학년까지 생활하다가 다시 서울 로 이사를 가게 돼 아쉽게도 과천초등학교에서 졸업하지를 못하였고 용산에 있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지요.

임 : 아하,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유 : 예. 초등학교를 과천에서 다니게 되면서 당시 저 희 아버지께서 집도 과천에 마련하셨지요. 그런 관계로 저희가 용산으로 이주하였지만 방학 때 는 가끔 과천으로 와서 생활하기도 하였습니다. 청소년기 때에는 과천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보았 습니다. 나중의 일이지만 과천교회의 삶이 인연 이 되어 남편을 청소년 예배 시절에 만나게 되어 결혼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만한 마을은 아니었습니다. 마을이 개발되고 정 착된 이후 전역하신 군 장성 몇 분이 거주했던 것 이 외부인들이 인지하기에 알맞게(쉽고 편하게) 불려서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된 것 뿐이지요. 제가 살고 있는 이곳은 14가구가 사는 아주 작은 단위 의 소규모 마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쉽게 말씀드 리자면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당시 새마을사 업과 관련된 마지막 취락지구 정리사업의 일환 으로 만들어진 마을이지요.

182쪽

임 : 아, 그런 사연이 있는 마을이군요. 그러면 마을 형성 과정을 다 보 셨겠군요? 유 : 당시 마을개량사업의 추진위원장이셨던 김석찬 어르신이 저의 시아 버지셨던 관계로 여러모로 잡다한 부대상황 정도만 파악할 수 있었 습니다. 마을개량사업의 이해를 위하여 그 당시 동네 주거환경을 먼 저 말씀드리는 것이 순서일 것 같네요. 당시 양재천을 중심으로(경사 면 포함) 지금의 중앙동 방향과 부림동(그 당시는 관문동 권역으로 알고 있습니다) 방향에는 개량사업대상인 불량노후주택이 13채 있 었습니다. 구체적 위치를 말씀드리면 현재의 과천성당 권역에서 관 문공원 초입권역으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지금이야 과천성 당쪽에서 8~9단지 쪽을 바라보면 아파트와 다세대주택이 많이 있 지만 당시 부림동 쪽은 그냥 벌판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현재의 부림동은 들판, 밭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서울대공원으로 넘어가 는 통로이자 벌판인 상하벌 등이 있었지요.

임 : 아주 세세하고 구체적인 기억입니다. 저의 경우 부림동 다세대에 서도 약 4년을 거주했기에 선생님의 말씀이 너무 생생한 장면으 로 재가공되는 것 같습니다. 유 : 부족한 설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해에 도움이 되신다니 다행이십니 다. 일단 14세대가 개량사업대상으로 지정되자 78~79년도에 면사 무소에서 가구당 500만원의 건축 자재비를 지급하여 주었지요, 당시 지금의 과천성당부터 관문삼거리 초입까지의 경사면들은 1973~1978년까지 과천교회 이송상 장로님의 배밭과 김환 씨 소유 의 배밭이었습니다. 개량사업에 속도가 붙고 다각도로 지원이 이뤄 지다보니 이곳 땅들을 아주 저렴하게 불하받는 기회가 생기게 되더 라고요. 토지주들의 배려로 인하여 저렴한 가격으로 땅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183쪽

마을지원계획에 의거한 79년도 주택공사 초기, 가족들

새마을 사업 일환으로 진행 된 주택공사 완료 직전(1981년)

184쪽

임 : 저렴하다 하시면 구체적으로 여쭤보아도 될까요? 유 : 지금 과천의 아파트 가격과 비교하면 가히 엄청난 가격이었지요. 평당 4~5만원 정도 였습니다.

임 : 우와 ~ , 부러움의 놀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군요. 유 : 과수원이던 땅이 택지로 용도변경 되기까지도 예정된 계획지구였기에 때문에 큰 어 려움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공사는 79년부터 시작하여 81년까지 진행되었 고요, 81년 9월에 드디어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감격스러운 날이었습 니다. 물론 당시 14가구가 모두 비슷한 시기에 입주했었고, 마치 과천에 작은 마을 하 나가 형성되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임 : 너무 행복하셨겠습니다. 입주 이후부터 지금까지 마을의 변동사항은 어땠습니까? 유 : 상전벽해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변해도 너무 변했지요. 일단 건축물들이 벌써 40여 년이 넘었으니까 부분 리모델링부터 크고 작은 수리들이 동반되었고요, 인적 구성에 서 봤을 때 원년 이웃들 14가구 중 저희 집만 유일하게 이곳 장군마을에서 아직까지 거주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을 구성원들의 전출입이 자연 스럽게 있다 보니 그중에서 전역하신 군 장성들이 몇 분 이사오셔서 사신적이 있었지 요. 동사무소, 마트, 우편, 물류기사분들의 편의 때문에 입주한지 수년이 지나 이곳을 장군마을이라 부르게 된 것이죠. 지금은 그분들도 이주하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임 : 학창시절 때와 입주 초창기 마을 인프라는 어땠습니까? 유 : 제가 어렸을 때였던 6~70년대는 지금과 비교해서 많이 불편했지요. 가물거리기는한 데 홍촌마을쪽에 버스회사(종점)가 하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서울 방향(용산) 으로 가려면 그 버스를 타야 했는데, 97번 버스로 기억되네요. 장보러 갈 때는 버스를 이용해서 갔고요, 그 당시에는 서울쪽보다는 안양으로 주로 다녔었습니다. 결혼 이후 남편의 직장이 신대방동인지라 과천에서 버스를 타고 남태령을 넘어서 사당동 등지 에서 갈아타고 출퇴근했었습니다. 제가 이곳 장군마을에 입주했던 초기 과천초등학 교부터 중앙동 새술막(지금의 KT건물)있는 곳까지가 그나마 상가가(상가라 해도 약 국, 방앗간, 구 점포 등이 대부분) 몇 개 있는 번화한 곳이었음에도 식당이나, 마트, 교 통편 등이 그다지 원활하지는 않았었습니다. 지금이야 부림동의 공동주택들, 아파트 8단지, 9단지, 이곳 주변 10단지 등 많은 변화가 있었기에 지하철을 비롯해 간선, 지선 버스는 물론 이마트(구 킴스클럽)도 들어와 있고, 식당들, 의료기관, 카페들이 주변에 많이 생겨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입니다.

186쪽

임 : 이렇게 시간을 내주시어 소중한 말씀을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 립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한 시간 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임 : 예. 선생님 말씀을 경청하다보니 저도 약 20년 가까이 살았던 6 단지가 이제는 기억 한편에 겨우 흐릿하게 남아있는 것을 알 수 있네요. 참, 마을 이름이 장군마을이라고 부르면서 주변으로부터 혹여 불편했던 말들이나 편견은 없었는지요? 유 : 처음에는 이 마을이 장군마을로 불리는지도 몰랐어요. 나중에 지인 들로부터 전해 들은 것은 ‘경제력과 사회적 지도층 인사들이 주로 사 는 곳이 아니었는가’라는 말들을 들었을 때 웃음이 나왔지요. 지금까 지 말씀드린 바처럼 이곳은 주택개량사업구역이었지요. 이 마을은 과천성당을 가운데 두고 10단지와도 떨어져 있었고, 서울 방향은 관 문사거리 입구까지 주택이라고는 전무하다보니 굉장히 조용하고 엄 숙한 동네임은 분명했지요. 이후 예편하신 몇 분들의 이곳으로의 이 주와 그분들의 후광으로 동네 이름이 장군마을로 불려서 개인적으로 명예로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지금 과천에도 이곳 말고 도 장군마을로 불리는 곳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요.

임 : 예. 맞습니다. 선생님과 대화하니 마치 두 마을을 아우르는 시간 여행을 다녀온 듯한 느낌입니다. 그리고 이곳 마을에서 선생님의 삶 또한 아주 여유롭고 행복해보입니다. 유 : 그렇게 봐주시니 제가 더 감사합니다. 이젠 자녀들도 모두 건강하게 자리를 잘 잡고 살고 있고, 손자들도 바쁘게 공부하고 또 직장생활도 열심히 하는 것을 보니 만족하지요.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자라고 살아온 이곳 과천에 항상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188쪽

마을입구 앞의 과천성당과 카페

190쪽

한눈에 보는 부림동

한눈에 보는 부림동

주민등록인구(과천시 VS 부림동)

주민등록인구 2024. 10. 31. 기준 세대수

29,536

과천시

토지 지목별 현황 (㎡)

300 272,263.9

39,891.9 26,593.6 15,313.52,132.3 5,615.7

대지 도로 하천 학교용지수도용지 공원

등록외국인 읍면동별·연령별 현황 (2024. 9. 30. 기준)

여성

5,273

부림동

연령별 인구

41,423

39,909

과천시

“1982년 6월 10일 경기도 조례 제1256호에 의해 관문리(官門里) 일부를 갈라서 과천의 옛 이름을 따서 부림동(富林洞)이라고 하였다.” 부림동은 과천시 전체 면적의 0.01%에 불과하지 만, 거주 밀집 지역으로 1만4천여 명 이상이 산다. 2024년 10월 기준 0세 아기가 97명이고 최고령 어르신 한 분은 101세다. 작지만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부림동을 한 번에 펼쳐 보았다.

남성

총계

● 여자 / ● 남자

6,883 7,168

부림동

191쪽

5년간 인구증감 20

14,051

2024년 사업체수 및 종사자수 (개소, 명) ※ 제39회 과천통계연보 기준

사업체수 총계

남성대표자

산업별 현황 (개소)

건설업 15 / 사업시설 관리, 사업 지원 및 임대 서비스업 14 제조업 9 / 운수업 및 창고업 8 예술 스포츠 및 여가관련 서비스업 7 금융 및 보험업 3 / 전기 가스 증기 및 공기조절 공급업 1 공공행정 국방 및 사회보장 행정 1

14,892

15,002

14,659

2023년

2022년

2021년

여성대표자

여성

13,102

11,859

2020년

2019년

남성

종사자 총계

도매 정보 교육 부동 협회 및 전문 보건업 숙박 및 및 통신업 서비스업 산업 단체 수리 과학 및 및 사회 음식점업 소매업

및 기타 기술 복지 개인 서비수업 서비스업 서비스업

192쪽

봄꽃 꽃망울 터트리던 날, 서로 다른 결의 시민들이 부림동을 기록하는 아키비스트로 만났습니다. 여름과 가을, 그리고 겨울을 마주하기까지 함께 부림동을 들여다보고 썼습니다.

193쪽

과천문화원 지역문화연구팀 이선민 하는 10명의 필진들이 모였다. 어색하 책장에서 나와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지만 웃음이 끊이질 않았던 첫 회의부 수 있는 마을지를 만들겠다는 목표로 터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 반 만에 동 지난해 〈여기, 중앙동〉이 탄생했다. 발 네 한 바퀴를 다 도는 부림동의 소담한 간 이후 문화원에는 종종 이곳저곳에 면적에 새삼 놀랐던 순간, 저마다의 소 서 마을지를 접하고 찾아오는 시민들 재를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 이 있을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기 던 시간은 힘들지만 돌아보면 부림동 에 이번 부림동 마을지 역시 동네의 특 을 향한 애정이 샘솟는 순간이 아닐까 색과 흥미로운 이야기, 주민의 시선이 싶다. 잘 어우러진 책으로 엮어지는 과정을 동네 구석구석을 아이처럼 호기심 가 보면서 더욱 설레고 기대가 커져간다. 득한 시선으로 관찰하며 찾은 보물같 부림동은 과천에서도 작은 면적을 차 은 이야기가 가득한 부림동 마을지를 지하는 아기자기한 동네이지만 최근 통해 주민에게는 따뜻한 이웃의 이야 그 2/3가량을 차지하는 8,9단지의 재 기를 전하고 읽는 모든 이에게 소소하 건축을 필두로 크고 작은 변화가 진행 지만 특별한 부림동을 알릴 수 있길 바 되고 있어, 때마침 변해가고 사라지는 란다. 마을의 이야기를 알뜰살뜰 모아 것들에 대한 기록이 필요한 시점이다. 기획부터 편집까지 이끌어 주신 류설 부림동 마을지 제작을 위해 40년 이상 아 책임연구원님과 역사, 지리, 민담 거주한 부림동 토박이부터 이곳에서 등 지역 정보의 백과사전이 되어주신 신혼을 시작해 어느덧 대학생이 된 아 보조연구원 선생님들, 지역자원을 애 이를 둔 어머니, 오래된 무언가를 흥미 정을 담아 콘텐츠로 만들어주신 시민 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과천 MZ세대 아키비스트 여러분들께 감사드린다. 까지 저마다의 이유로 부림동을 사랑

류설아 총괄기획, 책임연구원 지난 2023년 <여기, 중앙동>에 이어 옛 읍내리 마을조사의 두 번째 프로젝 트로 부림동에 주목했다. 방식은 동일 했다. 시민이 주도하는 마을 조사가 제 1원칙이었다. 올해에는 20대부터 70 대까지 9명의 시민이 아키비스트로 참 여했다. 70대 참가자가 주민 대상 설 문조사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20대가 함께 팀원으로 참여해 실행한 ‘부자부 자’ 기획 설문조사처럼 유의미한 어울 림이 인상적이었다. 기존의 마을 조사

194쪽

서들이 대중성이 부족해 누구나 편안하고 쉽게 읽을 수 김소화 있는 대중서로 제작하자는 제2원칙은 시민 독자를 통 해 지켜졌음을 확인했다. 두 번째 마을 조사를 진행하 는 도중 심심치 않게 전해진 첫 번째 결과물에 대한 긍 정적 시민 반응은 우리의 작업 의욕을 재점화하기에 충 분했다.

궁금증이 발동하면 끝을 보는 성향인데 부림동과 관문 동 사이의 궁금한 이야기는 30여 년 동안 묵혀두었다. 올해, 무더위가 시작되는 여름 초입에서 나는 이 궁금증 을 해결하기로 했다. 행정동과 법정동으로 분류되는 부 림동과 관문동 이야기는 올여름만큼이나 진짬 나게 했 부림동은 흥미로운 동네다. 아주 작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만 마무리되는 기쁨도 주었다. 이것이 30여 년 걸릴 오랫 동안 이야기를 쌓아 온, 하지만 곧 상당 부분 재건 축으로 사라지고 새로움으로 가득찰 곳이다. 우리는 부

일인가도 싶지만 그래도 마음속 묻어두었던 궁금증을 동료들과 함께 과천문화원에서 해결하고 마침표를 찍 림동 길을 걸으며 이것에 꽂혔다. 지금 눈앞에 있지만 어서 기쁘다. 이 기쁨을 모두와 공유하고 싶다. 곧 사라질 것들. 이후 필자들은 부림동의 다양한 매력과 더불어 사라질 것을 듣고 적고 촬영했다. 사라지지만, 사라지지 않고 영원할 부림동의 기록이 애틋하다.

이남교 이름도 생소한 시민아키비스트로 선정되어 첫 회의를 앞두고는 걱정부터 앞섰다. 부림동에서만 40년 넘게 살 고 있었는데도 무슨 내용을 조사하고 기록해야 할까 막 막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어린시절부터 과천 에서 살아온 부림동 토박이 주민 김시환씨를 만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10여 차례 이상 만나서 오래된 이야 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또 하나 우리 동네 자랑거리를 조사, 정리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부림동 주민들이 뽑은 부림동 의 7대 장점을 설문조사하기로 했다. 부림동 통장, 주민 자치위원, 경로당 회원들과 동사무소를 찾아온 민원인 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그 설문조사 결과를 ‘부림동 사람들이 뽑은 우리동네 자랑거리’로 정리했다. 아쉬움은 조금 남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활동이었다.

195쪽

조연민 부림동의 사계로 나의 추억을 엮어보았다.

최이룸 초등학생 시절부터 과천에서 자라면서 양재천은 제 어 린 시절의 많은 추억이 깃든 특별한 장소였습니다. 이번 사진을 찾아보며 행복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마음이 마을지를 통해 그 소중한 기억과 현재의 모습을 공유할 따뜻해졌다. 재건축으로 진짜 추억속으로 사라질 내 동 수 있어 더욱 뜻깊었습니다. 자료를 수집하고 양재천을 네 부림동. 이곳에 담겨있는 우리 가족의 추억을 사진으 다시 둘러보며 예전과는 다른 새로운 시각으로 이곳을 로 더 많이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라볼 수 있었고, 이를 기록하는 과정이 제게 큰 의미 로 다가왔습니다. 양재천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더 많은 분들께 알리고 싶

부림동에 대한 다양한 글들이 모여 마을지라는 하나의 기록으로 남게되어 감사한 마음이다. 마을지 프로젝트를 통해 부림동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은 마음으로 시작하게 되었지만, 조사와 편집 과정에서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고 함께한 모든 분들에게 감사 다소 부족한 점이 있을 수도 있음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 시길 바랍니다. 그럼에도 이 마을지가 무사히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분들의 도움과 지원 덕분입니다.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양 재천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담아내고 싶습니다.

강보영 과천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터전인 부림동 8단지와 이 별할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에 익숙하던 구 석구석을 다시 한번 머리와 사진에 담아 두고 싶다는 생 각을 하고 있었다. 늦기전에 움직여야 한다는 마음과 달리 바쁜 일상속에 서 계속 미뤄지고 있던 무렵 마침 나의 동네 ‘부림동’을 소개 해야하는 기회가 찾아왔다. 많은 일들이 그렇듯 확 실한 계기가 생기고 나서야 미뤄두던 숙제를 착수하듯 길을 나섰고, 숙제가 그러하듯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시 작된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 저곳의 추억의 장소들과 그 곳을 지켜온 사라들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화단 하나까 지도 꼼꼼한 산책을 하듯 짚어보게 되면서 이 작업이 얼 마나 스스로에게 소중한 경험인지, 동네 한바퀴를 다 돌 고 났을 땐 나의 사진첩 뿐만 아니라 내 맘도 작별의 아 쉬움을 다 달랠만큼 꽉 차 있었다. 모쪼록 이 책에 실린 89단지의 구석구석이 이 공간을 함께 했던 부림동 동네 사람들에게도 공유된 추억의 기록이 되길 바라는 마음 이다.

함을 보낸다.

196쪽

임용훈

강지혜

박태호

약 25년동안 계속되는 과천에서의 생활에서 부림동에서의 5년간 생활이 참으 로 풍요로웠던것 같다. 피곤하고 복잡할때면 수시로 양재천을 걸으며 마음을 힐링하고 삶의 재충전이 용이로원던 그런 마을이다. 부림동은 … 뜨거운 햇볕을 뒤로하고 사랑스러운 부 림동을 담아봤다. 혹여 물고기가 올챙이로 보이지는 않을런지 …

조은빈 나의 어린시절 그리고 앞으로 살게 될 이곳을 기록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어서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아는 과천을 아키비스트 분들과 공유하기도 하고 내가 몰랐던 과천의 모습을 알게 되면서 나의 고향과도 같은 과천에 더 애 정이 생겼습니다. 사라지기도 하고 새로 생겨나는 것들에 대하여 추억하고 기 대하는 시간이 소중하고 즐거웠습니다. 앞으로의 과천이 과거의 추억을 발판 삼아 더욱 더 살기 좋은도시가 되기를 과천 시민으로서 기대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과천에 사는 복덩리 과복이입니다. 이번 과천 마을지 부림지에 참 여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입니다. 저번 중앙동 마을지를 했을때 많이 떨렸는데 이번 부림동은 더 잘해보아야지 했지만 여러가지 사건사고가 겹쳐 삽화작업만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부림동에 재미있는 사연이 많아 인터뷰도 준비하고 쓸 것들이 많았는데 이번 책에 실릴 수 없게 되어 안타깝습니다. 다음에 부림동 마 을지 2호가 나온다면 꼭 싣고 싶네요. 책을 제작하기 위해선 정말 부지런해야 하고 많은 분의 수고와 노력이 들어가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을지 제작에 함께 하신 분들께 정말 고생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과천에 좋은 스 토리를 담을 수 있게끔 노력하는 과복이 작가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림동을 촬영하며 여러 측면에서 살기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 용하고 공기도 쾌적하고 서울대공원과 체육시설의 접근성이 좋습니다. 국립과 학관, 서울랜드 등 아이들 키우기에는 최적의 동네입니다. 전철역도 가까운 위 치에 있어서 살기 좋은 곳이라 생각됩니다. 이번 작업에 참여해 동네의 구석구 석을 촬영하며 부림동의 매력을 사진 작품으로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어 기뻤 습니다.

198쪽

옛 읍내리 마을조사사업

발행인 발행일 발행처

주관

후원

ISBN 979-11-985706-2-8

이정달 2024년 12월 과천문화원-경기도 과천시 문원로 40-1 02-3679-1415 총괄기획·책임연구원 류설아 마을조사연구원 강보영 강지혜 김소화 박태호 이남교 임용훈 조연민 조은빈 최이룸 지 원 조성범 이선민 디자인·제작 (주)우리동네사람들

※ 이 책은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 제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지하며,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이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과천문화원을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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