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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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에서 자랐지만 사후세계를 믿지는 않았던 그에겐 오히려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비현실적인 상황에 놓인 힐데베르트는 이것이 죽음으로 비롯된 인과관계가 아닌 자각몽에 가까운 꿈으로 치부하는 것이 좀 더 현실 성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내렸다. 다만 꿈에서의 그는 육체의 소실로 인한 어떠한 결핍증 세를 겪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육체가 없었기에 물리적 인 힘을 가할 수 없었고 그로 인해 물체를 잡을 수 없었 으며 폐가 비었기에 공명할 수 없어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온도조차 느낄 수 없었기에 계절을 잃은 힐데베르트는 알 수 없는 시간 속을 표류했다. 영혼이 된 힐데베르트는 원하면 벽을 뚫을 수 있었고 하염없이 아래로 추락하여 땅 밑 어둠 속으로 파묻힐 수 도 있었다. 한참을 육체가 있을 시절엔 겪어보지 못했던
일들을 저질러보던 힐데베르트는 문득 제 사람들이 생각 이 났다. 죽기 전 그가 눈에 담았던 자들. 거기까지 생각했을 무렵, 갑작스레 그들을 만나봐야겠다 는 거대한 충동이 온 몸을 휘감았다. 그들을 찾는 것은 그 리 어렵지 않았다. 흐르는 발길을 따라 가다보면 쉬이 만 날 수 있었기에.
아미. 저 정말로 죽었나요? 그녀를 만나자마자 힐데베르트가 가장 먼저 묻고 싶은 말이었다.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손이 없었기에 힐데베르 트는 그녀의 주변을 한참 맴돌다가 떠나는 것으로 대신하 였다. 힐데베르트가 다음으로 찾아간 사람은 예현이었다. 변함 없이 창백한 얼굴, 그리고 그 아래로 단정하게 다물린 정 장 차림. 평소와 같은 차림새였지만 힐데베르트는 왠지 그 것이 상복 같다고 느꼈다. 슬픔을 참아내는 아이의 곁을 한동안 맴돌던 힐데베르트는 이어서 리카르도, 카이로스, 배저의 시작부터 함께 했던 동기들, 연이 닿았던 수많은 사람들을 찾아가 한참을 그들 곁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이 제 다음 목적지를 잃은 힐데베르트는 잠시 고민을 한다. 최윤. 망설이는 제 모습에 힐데베르트는 괜스레 웃음이 났다.
왜냐면 자신이 지금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에. 힐데베르트는 최윤을 사랑한다. 그랬기에 그가 자신의 상실에 있어 여타 다른 인간들처 럼 슬퍼하기를 바랐다. 하여, 두려웠던 것이다.
제 상실이 그에게는 큰 일이 아니었을까봐.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힐데베르트는 자신의 이기심 또 한 깨닫는다. 그를 사랑하고 존중했다면 그의 본질적인 모 든 것 또한 이해해야 했기에. 그리하여 영혼이 된 힐데베르트는 최윤을 찾아갔다.
내심 죽은 자신을 살리겠답시고 매드 사이언티스트 같 은 연구라도 하지는 않을까 싶었는데 그의 일상은 생전의 힐데베르트가 지켜봤던 것과 별 반 다를 게 없었다. 정해 진 시간에 일어나고 규칙적인 식사, 운동, 업무의 루틴. 그를 떠나고 싶지 않았던 힐데베르트는 제법 오랜 시간을 들여 그의 곁에 머물렀다.
영혼이 된 힐데베르트는 처음으로 상실감을 느꼈다. 머 지않아 그 틈사이로 자신의 영혼은 서서히 흩어질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한 번만이라도 다시 보고 싶었던 힐데 베르트의 바람이 만들어낸 마지막 소원이었다.
【wishːpromise】
오전 x시. 최윤은 알람 없이 잠에서 깨어난다. 이어서 일렬로 행 해지는 아침준비. 누운 채로 짧게 모닝브리핑 확인을 끝낸 최윤은 자고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단정한 머리칼을 한 채로 거울 앞에 서서 양치를 시작했다. 이어지는 면도. 그 리고…, … 힐데베르트는 잘 개어진 잠옷 앞에 웅크려 앉았다. 어
차피 다시 입을 옷은 적당히 던져놔도 될 텐데 여전히 참 강박적인 사람이었다. 문 너머로 들려오는 물줄기 소리를 들으며 힐데베르트는 잠시 상념에 빠진다. 단숨에 문을 열 고 그를 놀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 저 왔습니다. 제가 죽은 줄 아셨을 텐데 깜짝 놀라 셨죠?
쏴아아아. 계속되는 물소리에 힐데는 몸을 곧추세워 그가 들어간 욕실문을 빤히 바라봤다.
윤. 둘 사이를 가로막은 것은 고작 얇은 욕실문 뿐이건만 힐데베르트는 그가 몹시도 보고 싶었다. 힐데베르트는 최윤을 사랑한다. 그리고 최윤은, …
욕실에서 나온 최윤은 이어 주방으로 내려가 익숙하게 캡슐 커피를 뽑았다. 오늘은 출근 안 하십니까? 영 외출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그의 모습에 힐데베르트는 맞은편 의 자에 앉아 그를 관찰하는 것을 택한다. 커피 냄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걸로 봐서 저 정말로 죽은 게 맞나봅니다, 윤. 영혼이 된 힐데베르트는 고개를 괴는 행위를 하며 최윤 을 마저 바라보았다. 흠집 하나 없는 패드의 화면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그는 볼일이 끝났는지 마시던 컵을 들고
일어나 설거지를 하려다가 주방을 울리는 벨소리에 동작 을 중단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아직 집이지. 그래. 늘 하던 걸로 해.” 최윤을 바라보던 힐데베르트는 잠시 상념에 빠진다. 윤. 그래도 다행이네요. 제가 소리는 들을 수 있어서요. 만
질 수도 부를 수조차 없는데 소리마저 듣지 못한다면 정 말 괴로웠을 거 같거든요. 익숙한 낮은 목소리가 기억을 뚫고 파도처럼 밀려들어 온다. 그가 한 번이라도 더 자신의 이름을 불러줬으면 했 다. 자신은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었기에.
부서지는 포말에서는 짠 맛이 났다. 죽었어도 울 수는 있네. 묵묵히 눈물을 떨구며 힐데베 르트는 지금의 상황이 제게 제법 불합리하지 않나 생각했 다. 간단히 설거지를 마친 최윤은 발걸음을 옮겨 제 방으로 다시 올라갔으나 힐데베르트는 이번엔 그를 따라가지 않 았다. 쇼룸처럼 깔끔한 그레이톤 주방과 어울리지 않는 물건 하나. 차마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윤! 이거 어떠십니까?」 「구려.」 활짝 웃는 얼굴로 진열장에서 패키지 박스 하나를 꺼내 든 힐데베르트를 향해 최윤은 딱 잘라 말했다. 그러나 힐
데베르트는 개의치 않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캐릭터 키링인데 귀엽지 않습니까? 마 침 4개가 세트인데 저랑 윤이랑 아미, 예현 이렇게 넷이 서 나눠가집시다. 우정템 같은 거죠.」 전 이거 진짜 마음에 드는데요. 단호한 그의 마지막 말에 다른 데로 고개를 돌렸던 최 윤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사고 싶으면 사던가.」 「아싸. 솔직히 거절하실 줄 알았습니다.」 바구니에 키링 세트를 담은 힐데베르트는 이번엔 옆 칸 진열대 앞에 서서 한참을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뭐하 냐? 최윤이 가게를 한 바퀴 돌 동안 여전히 그 앞에 머물 러있던 힐데베르트는 머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음……, 이건 윤이랑 나눠 갖고 싶어서요.」 「커플템이냐?」 「으악. 으악, 윤!」
「내가 틀린 말 했냐. 여럿이서 나눠가지면 우정템이고 둘이서만 나눠가지면 커플템이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게 커플템은 … 」 「힐데베르트.」 그 순간, 묘하게 내려앉은 그의 목소리에 힐데베르트는 감히 어떠한 것을 직감했다.
예민해진 오감이 상대방을 향한다. 그리고 그 오감과 마주하는 검은 눈동자. 이어서 힐데베르트가 꿈속에서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 최윤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우리 사귈까.」 쇼윈도우 너머의 보도블럭에 연회색 점들이 하나둘씩 늘어간다. 차양을 때리는 희미한 빗방울 소리. 오늘 일기예보에서 비가 온다고 했던가. 분명 아침까지 만 해도 맑음이었던 거 같은데. 예측할 수 없는 날씨에 바깥 공기가 서서히 젖어간다. 「힐데.」 부연설명 없이 성큼 다가온 커다란 손이 힐데베르트의 뺨을 문지르며 무언가를 훔쳐갔다. 아. 내가 울었나? 바구니를 쥐고 있던 손이 새하얗게 질렸다가 이내 풀어
졌다. 어느새 비어버린 손가락 사이로 이번엔 다른 것이 들어온다. 「……진짜 무드 없습니다, 윤.」 「뭘 바래.」 힐데베르트는 제 손에 끼워진 작은 것을 내려다보며 배 시시 웃었다.
윤.
「……그럼 이제 커플템 맞네요.」
영혼이 된 힐데베르트는 소리 내어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휩싸였다. 당장이라도 계단을 달려 올라가 그의 방문을 열고 종종 그랬던 것처럼 그의 등에 얼굴을 파묻으며 있는 힘껏 끌어안고 싶어졌다. 힐데베르트는 최윤을 여전히 사랑했다. 그리고 최윤은. 힐데베르트를 기억하고 있었기에.
생(生)을 잃은 심장이 무두질 당하듯 요동친다.
어느새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거실로 다시 내려온 최윤 은 곧장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힐데베르트는 조용히 그 의 뒤를 따랐다. 주차장에 대어진 자동차에 올라타고 나
서야 힐데베르트는 최윤이 여전히 예의 그 키링을 차키에 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피씩 웃었다. 별로라고 질색하시더니 사실은 마음에 드셨던 거죠.
대답 없는 운전사는 조용히 차를 몰고 차고를 빠져나갔
건가? 근데 어딜 가기에 정장을 입어?
이내 힐데베르트는 최윤을 관찰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더 보고 싶었기에.
그저 그 뿐이었다.
어느 날 힐데베르트 탈레브의 생체신호가 돌연 멈추었 다.
전날. 힐데베르트와 최윤은 각자 부산스러웠던 하루를 보내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늦은 저녁을 함께 했다. 서로 오늘 은 뭘 했는지 최근 코어 밖의 동향은 어떠한지, 그리고 일렬의 바쁜 것들이 한차례 지나간다면…, 「윤. 휴가 아직 안 쓰셨죠?」 컵을 기울이던 최윤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왜. 같이 쓰게?」 「그렇죠.」 우물우물. 입 안에 음식을 밀어 넣으며 힐데베르트는 담백하게 말 했다. 「같이 여행가고 싶습니다.」
그는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말을 이었다. 제 딴 엔 벌써 이곳저곳 알아본 모양인지 휴양지로 보이는 곳들 의 사진이 액정 위를 스쳐지나갔다. 「아. 거창한건 아니고요. 요새 워낙 바쁘지 않았습니까? 그냥 쉬러 가고 싶다는 거죠.」 같이요.
힐데베르트 탈레브의 삶엔 어느새 최윤이 들어차 있었 다. 「물론 바쁘시면 어쩔 수 없지만요.」 「봐봐.」 식탁 위에 컵을 내려놓은 최윤은 힐데베르트 쪽으로 상 체를 살짝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그의 행동에 힐데베르 트는 눈을 크게 휘며 배시시 웃었다. 접힌 눈매 사이로 금안이 반짝인다. 2세기 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매시를 사랑으로 채 우고자 하는 존재. 최윤은 그런 힐데베르트를 사랑했다. 선천적으로 결핍된 감정은 여타 다른 인간들과 본질을 달리했지만 최윤은 스스로 이것을 사랑이라 명명했다. 적막한 감정의 호수 속에 이따금씩 들이쳤던 존재들. 그 중에서도 힐데베르트 탈레브는 유독 궤도를 달리했 다. 끝을 알 수 없는 생에서 늘 새로움을 줬던 존재.
그랬기에 최윤은 그것을 감히 사랑이라 이름 짓기로 하 였다. 「아, 근데 윤은 거의 다 가보신 곳 아닙니까?」 「그렇지.」 손바닥 위에 괴어진 고개가 천천히 기울어진다. 「그래도 너랑은 안 가봤지.」
그림자를 드리우며 아래를 향해 내리깔려있던 하얀 속 눈썹이 몇차례 나풀거리다가 크게 뜨였다. 최윤은 마치 재밌는 것을 본 사람처럼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으엑. 구린 멘트. 윤, 저니까 봐드리는 겁니다.」 질색한 표정을 내비치는 힐데베르트의 반응에 최윤은 별다른 대꾸 없이 큭큭 웃었다. 「진심으로 어디 가서 그런 멘트 날리지 마십쇼….」 「내가 다른 사람한테 왜 하는데.」 「 … 」 대답 없이 움직이는 힐데베르트의 엄지가 액정 스크롤 을 빠르게 내렸다. 지금 제대로 보기는 하는 건가. 「힐데.」 맞은편을 향해 손을 뻗은 최윤은 어느새 붉어진 상대방 의 귓바퀴를 느리고, 뭉근한 손길로 천천히 쓸어 만졌다. 아래로 고정된 금안이 자신을 담았으면 했기에 몇 번이고
더 상대방을 매만졌다. 힐데베르트. 날 봐. 어둠이 힐데베르트를 덮쳤다. 마치 그를 집어삼키는 것 처럼 탐욕을 감추지 않고 빠르고. 아주 깊게. 빈 잔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식탁 위로 엎어진다. 최윤은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지금 제
앞의 존재를 집어삼켜 그 갈증을 해소하고 싶었다. 이 또한 사랑이라면. 최윤은 입을 열어 그대로 힐데베르트를 물어 삼킨다. 마치 포식자와 피식자마냥 힐데베르트는 그런 최윤에게 천천히 먹혀갔다.
새벽. 최윤은 기묘한 감각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오전 3 시 10분. 일어나기엔 아직 애매한 시간이었다. 휴대폰 화 면을 뒤집은 최윤은 잠시 몸을 뒤척였다. 침대 옆자리가 허전했다.
【윤】
오후 11시 48분 【내일 일찍 오실 겁니까?】 힐데베르트 오후 11시 49분
【같이 아침 먹어요】 【아 근데 진짜 졸립니다 … 】 【정말 잘게요】 【내일 봐요, 윤】
힐데베르트 오후 11시 52분
자고 가라고 할 걸 그랬나.
【저 졸려서 먼저 자겠습니다 … 】 【(이불 덮고 자는 이모티콘)】
【보고 적당히 가도 될 거 같은데】 오후 11시 49분
【그래】 오후 11시 52분 1
바로 잠든 것인지 메시지는 확인되어 있지 않았다. 부스럭…. 잘 세탁된 침구가 옅은 햇볕냄새를 풍기며 깊은 주름을 만들었다. 휴대폰을 쥔 채 최윤은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힐데베르트 탈레브. 이례적으로 포탈에서 떨어진 자. 정확히는 대마법사에 의해 포탈에서 뱉어진 자. 다른 세계에서 왔으며, 지구의 일부 생명체들에게 불완전한 영생을 준 자. 어쩌면 인류가 자발적으로는 평생 도달하지 못할 영역을 안겨준 자들. 최윤은 손을 들어 가만히 제 손등을 바라보았다. 창문 을 타고 넘어온 달빛에 비산된 살갗이 창백하게 빛났다. 그들에게 받아낸 것은 불로불사의 영생은 아니었다. 다만 아주 오래 살 수 있었을 뿐. 최윤은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래 살게 된 덕 분에 그의 남은 생을 통째로 붙들어 두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최윤은 제 스스로가 힐데베르트의 소유를 원함을 인지
하고 있었다. 그의 사랑은 제가 힐데베르트를 잠식하길 바랐다.
【ːpromise】
「윤!」 망각을 쉬이 하지 못하는 머리는 그의 모습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마치 어제 본 것 마냥 생생하게 그려지는 모습. 최윤은 힐데베르트 탈레브를 사랑했다. 그랬기에 그는 더더욱 망각을 원하지 않았다. 기억하고 자 하는 대상은 더 이상 현존하지 않았기에 그는 스스로 기억을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잊을 테니 까.
인간의 신체는 짧은 수명에 익숙해져 있었다. 오랜 삶 을 망각 없이 살 수 있도록 진화되지도 않았다. 최신식 설비를 갖춘 기계도 오작동을 거치면 많은 것이 소실된 다. 오랜 시간동안 전원이 들어오지 않으면 때때로 회로 기판이 고장 나기도 한다. 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었다.
최윤은 언제부턴가 힐데베르트의 목소리가 기억나질 않 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은 망각 없이 살 수 있도록 진화되지 않았다.
그랬기에 최윤은 온전한 기억을 원하면서도 일부러 힐 데베르트가 담긴 기록을 뒤져보지 않았다. 제 친우와 친 동생이 종종 웹에 남은 힐데베르트의 영상을 돌려볼 때에 도 그는 외면했다. 떠난 자는 보내주는 게 맞으니까.
최윤은 낯선 감각을 느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힐데 베르트 탈레브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불완전한 기억일 지라도. 희석된 감정의 늪 속에서 자신은 기어이 그를 생각할 거라고.
「윤. 사랑합니다.」 「나도.」 「킥킥…, 얼마나 좋아하시는데요?」 힐데베르트의 물음에 최윤은 한참동안 그를 굽어보다 답했다.
「영원히.」
누군가에게 감정의 영속성을 묻는다면 대체로 불완전하 다고 답할 것이다. 인간은 살아생전 수많은 것들을 접하 고 마음을 주며 또한 쉽게 질려한다. 때론 멀어진 것에 그리움을 느끼거나 영원히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고통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사회적 교감과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은 그 러한 결속에 따른 감정을 더욱 강렬하게 느꼈다.
「……!」 「…, … 」 힐데베르트 탈레브가 죽었다. 최윤은 지독한 두통을 느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었으나 사람들은 종종 관계에 있
어 영원을 갈구한다. 최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주변 사람들을 보며 그 감정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어쩌 면 그것은 제가 맘에 들은 물건에 애착을 가지는 것과 비 슷하지 않을까. 오래전 아미가 하수구에서 길 잃은 토끼를 주워와 기른 적이 있었다. 다만 애석하게도 처음부터 병이 든 모양이
었는지 토끼는 일주일을 채 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토끼가 죽은 날 아미는 집이 떠내려갈 정도로 울음을 터뜨렸다.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옆에서 아미의 등을 토 닥이던 예현의 눈에도 작은 물기가 비칠 정도였다. 그러나 아미는 토끼를 다시 기르자고 조르지 않았다. 그저 때때로 토끼를 묻은 작은 무덤을 찾아가 살필 뿐이 었다. 「오빠 바보! 난 그 토끼가 좋았던 거라공 … 」 언젠가 코가 빨개질 정도로 울고 있던 아미에게 새로운 토끼 입양을 권유했을 때, 아미는 작은 주먹으로 최윤을 한참동안 때렸다. 「아야.」 「오빠 바보바보! 흐아앙, 포슬이 보고 싶어어엉 … 」 퍽퍽. 몇 차례 둔탁한 소리와 함께 또 다시 아미의 울 음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잠시 예의 눈길 로 최윤을 차갑게 바라보던 예현은 이내 아미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며 말했다. 「우리 포슬이한테 자주 가자. 포슬이도 분명히 아미가 보고 싶을 거야.」 「죽었는데 어떻…, 아야.」 아미의 주먹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옆구리를 강하게 내리치는 손길에 최윤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예현은 아미의 슬픔이 희석될 때까지 토끼무덤 에 함께 가주었다. 「예현 오빠! 이것 봐봥, 요즘 뜨는 채널인데 우리 포슬 이랑 완전 똑같이 생겼다. 그칭?!」 「진짜네. 어떻게 얼룩무늬까지 똑같지?」
「사람 말도 잘 알아듣고 무지무지 귀여웡~」 패드 화면을 내리던 최윤은 잠시 눈을 흘겨 아미와 예 현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상실의 슬픔을 지웠다 하여 토끼를 그리워하지 않게 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 슬픔이 세월 속에서 조금씩 희석됐을 뿐. 잘 된 일이다. 최윤은 토끼의 죽음에 별다른 슬픔을 느끼진 않았지만 제 여동생이 괴로워하는 건 싫었으니까.
언덕을 넘으며 미처 줄이지 못한 속력 탓에 차체가 요 동치며 크게 흔들렸다. 생각에 빠져있던 최윤은 갓길에 차를 세웠다. 잠시간의 침묵을 비집고 한숨과 함께 흘러 나오는 낮은 목소리. “힐데.”
갑작스런 최윤의 부름에 힐데베르트는 순간적으로 답할 뻔했다. 아니, 대답하고 싶었다. 제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가 지독할 정도로 그리웠기 에. 윤. 부르셨어요? 저 왜요? 힐데베르트는 끈질기게 그에게 붙어 묻고 싶었다. 소리 없는 입모양이 몇 차례 문장을 만들어냈다. 윤. 혹시……, 혹시요. 제 생각…. 하셨어요? 고개를 기울인 힐데베르트는 대답을 갈구하는 양 최윤 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힐데베르트는 다시금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 았다. 최윤은 그가 살아생전 보지 못했던 얼굴을 하고 있 었다. 윤.
힐데베르트는 가만히 손을 뻗어 최윤의 얼굴을 어루만 지는 행위를 했다. 어쩌죠. 같이 있는데 보고 싶어요. 윤도 제가 보고 싶 으세요? 소리 없는 울음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물자국 조차 남기지 않는 슬픔이 힐데베르트의 턱을 타고 하염없
이 흘러내렸다. 슬픔은 보이지 않을 뿐, 그곳에 존재하였다. 가만히 그의 뺨을 어루만지던 힐데베르트는 확신했다. 최윤은 자신을 사랑한다. 어쩌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최윤은 저를 사랑한다 했던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한 때 찰나에 불과할 수 있었던 감정은 희석되지 않은 채 여 전히 그곳에 존재했다.
힐데베르트는 최윤이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죽었지만 최윤은 살아있었기에.
녹아내린 감정은 멈추는 법을 모르는 양 끊임없이 흘러 넘쳤다. 힐데베르트는 눈물에 푹 젖은 두 눈을 조용히 감 았다.
【wishː】
다시 시동이 걸린 외제차는 한참을 가다가 외곽의 어느 건물에서 멈추었다. 잠시 정차하려는 듯, 시동은 켜둔 채 로 최윤은 차 밖으로 몸을 뺐다. 틱. 틱. 적막한 차체 어딘가에서 희미한 메트로놈 소리가 났다.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소리. 뭘까. 윤은 이런 거 거슬려 할 텐데. 고개를 돌려 차 내를 살펴봤지만 근원지는 찾을 수 없었다. 힐데베르트는 메트로놈(정확히는 메트로놈인지조차 몰 랐다)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선 최윤이 사라진 가게를 바 라보려다가 문득 시선을 고정시켰다. 차키에 매달린 우스꽝스러운 키링에서 세월이 느껴졌 다. 힐데베르트는 그제야 계절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변함없는 최윤의 얼굴. 그리고 볼품사나울 정도로 낡아버린 키링. 소실로 인해 멈춰버린 건 본인뿐이었음을 깨닫는다. 힐 데베르트는 눈동자를 굴려 네비게이션이 띄워져 있는 디
스플레이를 바라보았다. 벌컥. 그 순간 차문이 열리며 최윤이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힐데베르트는 운전석에 앉는 최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 다. 뻗어진 제 손을 가벼이 통과하는 최윤의 팔. 힐데베르트의 시간은 그 날 그 순간에 멈춰있었다. 그리고 최윤은 수도 없이 많은 시간을 거쳐 왔음을….
손잡고 싶어요. 힐데베르트는 조심스레 그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생경 한 닿음이 기억의 파편 속에서 떠올랐다. 마지막 날. 힐데베르트는 평소처럼 그의 곁에서 몸을 뉘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이렇게 그리워하게 될 줄 알 았으면 좀 더 그의 곁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 순간 최윤의 상체가 기울어지면서 무언가가 조수석 에 놓였다. … 노란 튤립 꽃다발. 제 몸…, 제 무릎 위에 놓인 커다란 튤립 꽃다발. 마치 선물을 받은 것 마냥 힐데베르트는 한동안 그 꽃 다발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언젠가 제가 최윤에게 건 네주었던 꽃.
힐데베르트는 천천히 상체를 숙여 꽃에 얼굴을 묻었다. 틱. 톡. 틱. 톡. 주행소리 너머로 다시금 메트로놈 소리가 들려오기 시 작했다. 외제차는 매끄럽게 외곽으로, 더 외곽으로 계속 나아갔
그의 사랑이 이렇게나 버거워 질 줄 알았더라면 그 때 그를 거절했을 것이다. 노란 튤립을 끌어안은 힐데베르트 는 상념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만약에 제가 그 때 윤을 거절했다면. 애당초 우리가 시작을 하지 않았더라면. 힐데베르트는 창문 쪽으로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사실 답은 알고 있었다. 그가 거절했어도 최윤은 그를 사랑했을 것이다. 틱. 톡. 틱. 톡. 힐데베르트는 침묵 속에서 그제야 소리의 근원지를 깨
달았다.
외제차는 외곽의 어느 공터에서 멈추었다. 청보리가 물결치는 계절. 바람이 거세게 불며 최윤의
옷자락을 뒤흔들었다. “오빠!” “윤.” 저 멀리서 달려오는 아이 둘. 힐데베르트는 묵묵히 그들을 눈으로 쫓았다. “일찍 왔네.” “간밤에 꿈에서 힐데가 나왔엉.” 어느새 최윤의 곁에 달라붙은 아미는 조잘조잘 말을 꺼 내기 시작했다. “힐데가 내가 보고 싶다며 엉엉 울지 뭐양. 그래서 나 도 힐데가 너무 보고 싶다고 끌어안고 울었어.” “걘 내 꿈엔 나오지도 않던데.” 내부로 들어서자 타일 바닥과 구둣발이 맞부딪치는 소 리가 났다. 엇갈리는 발자국 소리가 조용한 건물 내부를 울렸다. “오빠가 힐데를 너무 괴롭혔던 거 아니양?”
그건 맞는 말이죠, 아미. 힐데베르트는 빙글 웃으며 그들 주변을 맴돌았다. “안녕하세요.” 관리실 앞을 지나며 예현은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이윽고 셋은 계단을 올라 익숙하게 기둥 두 개 끼고 돌았다. 건물의 중앙계단은 통창으로 되어있어 외부가 훤
히 보이고 있었다. 청보리가 하염없이 물결치는 들판. 힐데베르트는 잠시 그곳에 머물며 바깥 풍경을 눈에 담 았다. 그들을 놓치기 전에 힐데베르트는 다시금 몸을 움직였 다. 셋은 얼마 지나지 않아 걸음을 멈추었다. 최윤이 들고 있던 꽃다발이 바닥에 놓인다. 힐데베르트는 멀찍이 서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힐뎅 잘 지냈어?” 네, 아미.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아미는 그동안 뭐하 고 지내셨나요? 저번에 같이 했던 게임, 신작 많이 나왔 겠죠? 어디까지 했어요? 어려워서 보스는 항상 제가 도와 드렸었는데. 아. 지금 즈음이면 아미도 실력이 많이 늘었 으려나. 다음에 같이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쉽네요. “넌 왜 내 꿈에 안 나오냐?” 윤. 저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거든요. 마음 같
아선 정말 매일매일 윤의 꿈속으로 찾아가고 싶다고요. 힐데베르트는 불퉁한 표정으로 최윤의 뒷통수를 바라보 았다. 그리고 예현은… 말없이 유리 귀퉁이를 가만히 쓸어내 리고 있었다. 예현. 내 대자.
너를 좀 더 돌봤어야 했는데 이렇게 또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돼서 미안해. … 그들에게 다가간 힐데베르트는 셋의 얼굴을 찬찬히 관 찰하였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그
얼굴들을 하염없이 눈에 담았다. 그들을 바라보는 금안이 부드럽게 휜다.
쏴아아 … 창 너머에서 무수히 많은 청보리가 바람에 나부끼며 연 신 거대한 물결을 만들어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힐데베르 트는 그 속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틱. ……이제는 가야만 했다.
죽은 자의 소원엔 유효기간이 있었기에.
【소원ː】
「너 오늘 나랑 어디 좀 가자.」 「어딜요?」 「같이 가보면 알아.」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최윤은 막무가내로 그에 게 통보했다. 그러니까 어딜 가자는 건데. 힐데베르트는 불퉁한 표정을 지으며 최윤을 바라보았다. 뭔데? 그냥 말해주면 되잖아. 「밥 먹고 바로 나간다.」
「저 이미 같이 나가는 걸로 되어있는 겁니까?」 힐데베르트의 반문에 최윤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 알았다고요! 나갑니다. 나가요. 최윤은 그제야 비죽 웃으며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 다.
「설마 여길 가자고 하셨던 건 아니죠?」 「맞는데.」
최윤이 데려간 곳은 다름 아닌 유명 캐릭터 콜라보샵이 었다. 왜? 힐데는 가장 먼저 의문이 들었다. 윤은 이런 거 싫어하 지 않았나? 그러나 따져 묻기엔 힐데베르트는 콜라보샵의 오픈을 한참 전부터 기다려왔기 때문에 얌전히 구경하기 를 택하였다. 「와. 실물 대박.」 언제 툴툴거렸냐는 듯 힐데베르트는 어느새 분주히 콜 라보샵 내부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윤은 그런 힐데베르트를 느릿하게 지켜보았다. 힐데베르트. 최윤은 소리 없이 그의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렸다. 「윤도 이 게임 같이 하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이거 진 짜 재밌거든요? 괜히 1위인게 아니라니까요.」 진열장에 거의 빨려 들어가듯 고개를 들이 밀은 힐데베
르트는 퍽 신난 얼굴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무언가를 깨 달은 듯, 갑작스레 윤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거 예약제인데 윤 … 」 힐데베르트의 금안이 도르륵 굴러갔다. 「설마 서버를 해킹하신 건 아니죠?」 「넌 내가 우습지.」
「악! 아니아니, 윤이 티켓팅 하는 모습이 상상이 안 돼 서 말입니다.」 때리지도 않았건만 힐데베르트는 괜한 엄살을 부리며 몸을 뒤로 내뺐다. 이어서 몇 개의 진열대를 지나던 힐데 베르트는 걸음을 멈추었다. 「윤! 이거 어떠십니까?」 「구려.」 일단은 데려오긴 했지만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최윤의 시선에서 끔찍할 정도로 미감이 구렸기에. 최윤은 다시 한 번 힐데베르트의 취향을 의심했다. 하여 간 렉시크 누들인지 뭔지를 좋아할 때부터 알아봤어. 저 놈 취향 한 번 특이해. 「요즘 유행하는 캐릭터 키링인데 귀엽지 않습니까? 마 침 4개가 세트인데 저랑 윤이랑 아미, 예현 이렇게 넷이 서 나눠가집시다. 우정템 같은 거죠.」 이거 완전 답정 아니냐? 최윤은 눈동자를 도륵 굴려 힐
데베르트를 바라보았다. 「사고 싶으면 사던가.」 「아싸. 솔직히 거절하실 줄 알았습니다.」 좋댄다. 실실 웃는 힐데베르트를 뒤로 하고 최윤은 콜라보샵 내 부를 천천히 돌았다. 아미가 가자고 조르지 않는 이상 본
인은 평생 발 디딜 일도 없을 것 같은 곳이었다. 요즘은 이런 게 유행인가? 샵을 한 바퀴 돌고 돌아온 최윤은 미 간을 찌푸린 채 고민에 빠진 힐데베르트와 다시금 마주하 였다. 「뭐하냐?」 최윤의 말에 힐데베르트는 퍽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뒷 목을 긁었다. 「음……, 이건 윤이랑 나눠 갖고 싶어서요.」 「커플템이냐?」 「으악. 으악, 윤!」 삽시간에 빨개진 힐데베르트의 귀 끝을 보며, 최윤은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내가 틀린 말 했냐. 여럿이서 나눠가지면 우정템이고 둘이서만 나눠가지면 커플템이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게 커플템은 … 」 「힐데베르트.」
일순간 흔들리는 금안이 그의 시선에 들어왔다. 답지 않게 수없이 고민했던 말. 그러나 이제는 내뱉어야 했다. 왜냐면 최윤은. 최윤은 힐데베르트 탈레브를 갈구하고 열망했기에.
「우리 사귈까.」
그리하여 그는, 힐데베르트를 온전히 갖기를 소원하였다.
【최윤ː힐데베르트】
「힐데베르트?」 탁. 테이블 위에 플라스틱 잔이 놓이는 소리와 함께 주 변 공기의 흐름이 미세하게 바뀌었다. 고개를 숙인 채 속 으로 간절하게 기도를 올리고 있었던 힐데베르트는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힐데베르트 탈레브 맞나?」 「예, 예.」 낮고 고저 없는 목소리.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차가 운 인상의, 무기질을 연상시키는 남자. 「이번에 새로 들어오게 된 힐데베르트 탈레브입니다. 편하게 힐데라고 불러주십시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 다.」 「너 내 이름은 아냐?」 「예. 최 윤 선배님….」 「그냥 윤이라고 불러.」 깜빡임 없는 검은 눈동자가 제 몸을 훑자 힐데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것이 힐데베르트 탈레브와 최윤의 첫 만남이었다.
“ … ”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이던 힐데베르트는 팔을 올려 얇은 체인을 품 안에서 끌어냈다. 짤랑. 달빛에 반사되어 옅게 흩어지는 금빛 물체.
이어서 뒷목으로 손을 뻗어 체인을 풀어낸 힐데베르트 는 그 안에 걸려있던 금빛 반지를 꺼내 조심스레 제 손가 락에 끼웠다.
인간은 때론 약속에 대한 증거를 원했다. 넓게 가서는 사회적 의미로, 좁게는 아주 개인적인 의미로. 힐데베르트는 최윤이 직접 제 손에 반지를 끼워주던 그 날을 떠올리며 느릿하게 입술에 반지를 대었다. 체온에 데워진 반지가 따스했다.
힐데베르트는 종종 꿈을 꾸었다.
최윤이 저를 원하는 꿈. 때론 그 반대의 꿈을.
그러나 꿈은 늘 끝에 도달하지 못하고 끝이 났다.
깜빡. 힐데베르트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꿈은 무의식의 투영이다. 힐데베르트는 언제부턴가 제 가 최윤을 사적인 의미로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 다. 힐데베르트는 그것이 이루어 질 수 없는 꿈이라고 생각 했다. 그는 관계의 상실들을 기억했다. 애당초 상실을 떠
나 이루어 질 수 없는 관계라고 믿었다.
힐데베르트 탈레브는 최윤을 사랑한다. 그러나 최윤은…, …
애당초 모든 감정은 인과관계를 갖지 않는다. 제가 최윤을 사랑한다고 해서 최윤 또한 자신을 사랑해 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시작조차 하지 않았던 관계를 향한 감정들은 자 꾸만 흘러넘쳐 끊임없이 제 주변을 적셨다. 힐데베르트는
어느새 늪이 되어버린 그곳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종내 인정하기로 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자신은 그를 계속 사랑할 지도 모른다고.
접을 수 없었던 감정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어지러운 호흡 사이로 수차례 숨이 얽힌다. 가빠오는 숨을 몰아쉬며 힐데베르트는 상대방의 어깨를 밀어냈지만 그 손길을 부드럽게 감싸 쥔 최윤은 힐데베르 트를 쉬이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 … 」 「…! … 」 덜컹. 결국 덫에서 벗어나는 것을 포기한 힐데베르트는 그의 옷자락을 끌어당기며 함께 뛰어드는 것을 택했다. 「…헉 … 」 찰나에 트인 숨 사이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가 이내 다 시 집어삼켜진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 사이로 짙은 열락이 일었다. 끝을 알 수 없는 깊고 어두운 구덩이. 힐데베르트는 그 안으로 하염없이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귀에서 이명이 울린다.
그것은 위험신호에 가까웠다. 「힐데.」 「 … 」 떨리는 눈을 감은 힐데베르트는 묵묵히 그 어둠을 맞이 하였다. 어둠치고는 퍽 따스했기에. 「힐데베르트.」
귓가에 울려 퍼지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열락 속으로 던 져진 그의 의식을 불러 세운다. 눈꺼풀에 닿았다가 떨어 지는 부드러운 감촉. 힐데베르트는 제가 또 울고 있었음 을 깨달았다. 검은 눈동자 위로 힐데베르트의 모습이 비쳤다.
어두웠기에 그 무엇보다도 선명하게 자신을 담고 있는 눈동자. 흔들림 없는 시선은 끊길 줄 모르고 하염없이 힐 데베르트를 담고 있었다.
짤랑. 품에 걸린 목걸이가 흔들리며 소리를 냈다. 시야에서 꺾인 상대방의 고개가 얇은 체인 위에서 한참 을 머무른다. 급소를 물린 초식동물마냥 힐데베르트는 꼼 짝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
은 힐데베르트 본인이 자처한 일이었다. 힐데베르트 또한 최윤과 얽히기를 갈망했기에.
그것은 오랜 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자라】 최윤 오후 11시 26분
【(춤 추는 이모티콘)】 오후 11시 26분
바로 날아오는 답장에 힐데베르트는 픽 웃으며 돌아누 웠다.
【그렇게 뜯어먹더니만】 【(사악하게 웃는 이모티콘)】
최윤 오후 11시 26분
【(빤히 쳐다보는 이모티콘)】
최윤 오후 11시 27분
【윤 … 저 배고픈거 같습니다..】 오후 11시 26분
【아, 진짜!】
【솔직히 반대 아닙니까?】 오후 11시 27분
윤과 닮아서 선물해준 이모티콘인데 진짜 닮아도 너무 닮았어. 힐데베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바로 뉘었다.
【윤. 저 부탁이 있는데요】
【저희 놀러가기로 한 곳에 렉시크 누들 분점이 있는데 거기서 지역한정 특별메뉴를 판다고 하더라고요. 제발 한 번만 먹으면 안
【너 진심이냐?】 최윤 오후 11시 29분
【한정이라 언제 없어질 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울면서 싹싹 비는 이모티콘)】
될까요?】 오후 11시 28분
【진짜진짜 진짜 딱 한 번 만요】
오후 11시 29분
1이 사라지고 한참이 지나도 답장이 돌아오지 않았으나 힐데베르트는 픽 웃었다.
어차피 윤은
【내가 진짜 딱 한 번만 봐준다】 오후 11시 42분 최윤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을 테니까. 힐데베르트는 히죽 웃으며 이불 속에 몸을 깊게 묻었 다. 포근한 감각에 서서히 잠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깜빡. 힐데베르트는 밀려오는 졸음 속에서 엄지를 움직여 손
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느릿하게 문질렀다. 서서히 흩어지는 의식 속에서 안온한 감각이 밀려왔다. 힐데베르트는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려 최 윤에게 몇 차례 더 메시지를 보냈다.
【 … 】 【 … 】 【 … 】
【아 근데 진짜 졸립니다 … 】 【정말 잘게요】
【내일 봐요, 윤】 오후 11시 52분
틱. 밀려오는 수마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휴대폰 액정 화면을 끄자 침실로 서서히 밤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힐데베르트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가 나오는 꿈을 꾸며.
-fin-
블랙배저 2차 창작 최윤x힐데베르트
소원
@ip_ha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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