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포2동 마을이야기: 함께 걷는 망포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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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 및 인사
발간사, 주민자치회장 이준원 • 5
인사말, 망포2동장 신용남 • 6
망포2동 마을 소개
마을소개 • 8
행복한 마을 사람들 이야기
황누리-딸이 가족에게 준 선물 • 16 김미리-괜찮아! 가족이 있잖아! • 26 이영화-식물이 전해준 마음 • 36 김승우-축구, 신뢰를 쌓는 일 • 44 김점임-'엄마'라는 이름의 힘 • 52 천명호, 송기연-장인 정신의 대물림 • 62 강선미-마을의 행복 공방 • 72
발간사
《망포2동 마을이야기》의 실물이 드디어 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즐거운 소식을 주민분들과 나눌 수 있어 정말 뿌듯합니다. 《망 포2동 마을이야기》에는 인간의 희노애락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족이 소중한 이유’, ‘가족 간의 돈독한 관계’가 유독 돋보입니다. 이 책자에 실린 에세이, 인터뷰 등이 ‘가족’이라는 소재로 요약되기 때문입니다. 글 한 편, 한 편을 정독하며 가족의 의미에 대해 반추해보게 되었습니다. 주민 여러분에게 ‘가족’은 어떠한 존재로 다가오나요? ‘망포2동’이라는 마을이 하나의 대가족로 거듭나길 꿈꾸는 심정 으로 《망포2동 마을이야기》를 주민분들께 적극 추천합니다! 이 번에 발간되는 동네 책자가 주민들끼리 더 자주 소통하고 교류 하는 데 동기를 부여하길 바라면서 글을 마칩니다.
망포2동 주민자치회장 이준원
인사말
《망포2동 마을이야기》로 인사드립니다. 《망포2동 마을이야기》를 접하실 주민 여러분의 반응이 어떠할지 궁금합니다. 아마 책자를 펼치는 순간, ‘이런 사람이 우리 동네에 살고 있었어?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 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짐작해 봅니다. 《망포2동 마을이야기》가 나온 덕분에 마을 분들을 소개하고 싶다는 마음을 조금 덜 수 있었습니다. 바쁘 게 살다 보면 동네에 어떤 분께서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계신지 듣 기 느끼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 분께 조심스레 《망포2동 마 을이야기》을 드립니다. 함께 삶을 나누는 화목한 망포2동이 되길 바랍니다. 인터뷰에 응해 삶의 지혜를 나눠주신 망포2동 주민들께 감사드 립니다. 또한 《망포2동 마을이야기》를 읽으시는 분들께도 감사 드립니다.
망포2동장 신용남
망포2동 소개
망포동( 網浦洞 )은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의 최남단에 위치한다.
망포2동의 아파트
망포동은 현재 망포1동, 망포2동, 영통2동을 포괄한다. 망포동 은 2003년 2월 10일 매탄3동이 나뉘면서 ‘태장동’( 台章洞 )이라 는 명칭으로 먼저 불렸다. 2017년 12월 26일 영통구에 영통3동 이 신설되면서, 태장동의 관할지 내 일부 지역이 영통2동에 편입 되었다. 2019년 4월 15일, 태장동이 영통로와 태장로 일부를 기 준으로 망포1, 2동으로 행정구역상 분할되면서 현재에 이르렀
다. 2012년 12월 1일에 분당선 노선에 속하는 ‘망포역’이 개통 되어 이를 이용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태장’은 舊 화성군 태안읍 동부 지역을 가리키는 말 인데, 1914년 태촌면과 장주면이 통합되면서 태장면이 된 것이 다. 1963년 옛 화성군 ‘태’장면과 ‘안’용면이 ‘태안’면으로 통합 되면서 태장이라는 명칭이 사라졌다가, 다시 행정동 명칭으로 부 활했다. 그러나 2019년 이후로 망포동으로 나뉘면서 태장은 역 사의 유물이 되었다. 이 때문에 태장마루도서관 옆에 있었던 태 장동 주민센터는 이를 반영하여 그 이름을 수정하였다. 한편, ‘망포’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중엽 이 지역에 방죽을 쌓았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방죽머리, 망개, 망포 등으로 불리
다가 지금의 ‘망포’로 굳어졌다. 과거 바닷물이 흘러들어온 시기 에는 포구가 있었으며, 땅을 파면 개흙이 나오는 곳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일대에서 오래 거주한 사람이나 수원 토박이들은 주로 ‘망포 리’라 부른다. 또 영통과 가까운 까닭에 ‘ 新 영통’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수원에 편입될 당시, 망포동은 외곽의 논밭 지역에 불과 하였으나, 2000년대, 2010년대를 걸쳐 동네 개발이 활발히 진 행되었다. 따라서 현재 망포동은 영통구 안에서 신축 고급 아파 트가 꽤 많은 축에 속한다고 평가된다. 망포2동은 약 3만 3400명의 주민이 사는 동네이다(2023년 7월 주민등록기준). 이 동네의 대표 시설로 학교 5곳(태장초등학교
덕영대로
망포초등학교, 글빛초등학교, 잠원중학교, 망포고등학교)과 도 서관 2곳(태장마루도서관, 망포글빛도서관) 등이 있다. 태장초 등학교를 제외한 망포2동에 위치한 학교와 도서관은 신축 아파 트가 생기면서 비슷한 시기에 건립되었다. 2000년대 후반에서 2010년대 초반까지, 잠원중학교(2007년 3월), 망포고등학교 (2008년 3월), 태장마루도서관(2011년 8월)이 차례로 지어졌 다. 2019년부터 현재까지 망포초등학교(2019년 3월), 글빛초 등학교(2023년 3월), 망포글빛도서관(2019년 4월)이 세워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태장초등학교는 무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녔다. 1919년 11월 24일 ‘태장공립보통학교’로 인가됐다. 1921년 4월말, 4년제 학교로 지정되어 개교했다. 약 20년 뒤인 1941년에 ‘태장공립초등 학교’로 개명했다. 1982년쯤 병설유치원을 열었으며, 90년대 중반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수원시에 학교가 편입됐다. 2005년, ‘망포 동 371번지’로 학교를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망포2동에서는 작년 6월 이불 빨래 봉사를 진행하여 거동이 불편 한 주민들의 위생과 건강을 책임진 바 있다. 올해 4월, 어린이 보 행 안전 캠페인을 통해 등, 하교간 교통사고에 쉽게 노출되는 어 린 학생들의 안전을 보호하고자 관심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최근 8월 삼계탕, 배추겉절이, 밑반찬이 담긴 ‘사랑의 복달임 꾸
러미’를 홀몸 어르신들에게 전달하여 폭염에도 노인 분들이 건강 히 지내시도록 그 방법을 도모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망포2동은 소외된 이웃, 어린아이 등 약자의 삶을 살뜰히 돌본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망포글빛도서관과 글빛커피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열심히 사랑합니다. -황누라-
딸이 가족에게 준 선물
쌍둥이가 찾아왔다 “쌍둥이래.” 남편에게 말했다. “아, 농담하지 마. 놀랐네.” 4월 1일이었다. 남편의 반응도 이해됐다. 만우절이라 보 인 반응인데도 나는 섭섭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둘째를 낳을 계획을 세우기는 했다. 한 명은 너무 적었다. 다들 하나만 낳거 나, 혹은 결혼 자체도 하지 않는 사회에 쌍둥이가 들어섰다. 처음부터 쌍둥이라는 걸 깨닫지는 못했다. 분명 병원
에서 한 명이라고 했다. 열흘 뒤 다시 병원을 갔을 때 의사 선 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였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쌍둥이네요. 한 명이 가려서 잘 안 보
병원에서 돌아와 남편에게 바로 사실을 알렸다. 남편 은 농담하지 말라고 했지만 이내 눈치를 살폈다. 부부에게 가 장 중요한 덕목은 믿음, 정직이 아닌 '눈치'일 수 있다. 남편은 아내 말이 사실임을 금방 깨달았다.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짧은 정적에 아마 남편은 얼마나 많은 것을 고민했을 까? 남편의 의중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아마 쌍둥이 소식에 기뻐하려는 찰나, 가족이 5명이 될 거라는 중압감이 기쁨을 밀 어내지 않았을까? 경제적인 부분을 가장 많이 고민했을 거라 짐작한다. 대부분 남편은 아이가 낳자마자 아빠가 되기보다, 아이가 커가면서 같이 아빠가 된다고 한다. 아빠 역할을 하며 진짜 아빠가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거짓말하 지 마.’라니… 쌍둥이가 아니었으면 같이 기뻐했을까? 아이의 이름도 짓기 전에 중압감을 느끼다니 섭섭했다. 남편은 당시 를 이렇게 회상했다.
사람인 것 같아.”
“그래도 속마음이 바로 튀어나왔으니 나는 참 진실한
우리는 함께 쌍둥이를 낳고자 준비했다.
열심히 일하고 싶어서 나는 간부는 아니지만 관리직에 있었다. 열심히 일해 서 관리직이라는 보상을 받았다는 생각에 회사 생활에 만족했 다. 하지만 관리직과 일에 대한 열정 때문에 쌍둥이라는 사실 이 부담됐다. 일에 대한 열정은 쌍둥이 임신 앞에서도 고개를 들었다. ‘열심히 일하며 지금까지 달려왔는데 쌍둥이를 임신 했다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자.’ 커리어를 유지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회사는 암묵 적으로 여자를 고용하기를 꺼린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 면 회사를 나간다는 사회적 인식이 회사에도 지배적이었다. 예전 진급 심사가 떠올랐다. “일이 급한데 아이가 아프면 어떻게 할 건가요?” 요즘은 이런 질문은 하지 않는다. 당시에 저 질문을 받 았을 때 굉장히 불쾌했다. 보란 듯이 열심히 해서 여자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니, 나는 회사에서 여자보다 ‘일할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아예 임신 티를 내지 않기로 결심했다. 내 의도와 달리 몸은 티를 내기 시작했다. 쌍둥이는 한
명과 달랐다. 무게도 무게지만, 호르몬의 영향이 가장 무서웠 다. 아침에 세수하는데 갑자기 세면대가 붉게 물들었다. 코끝 에서 똑 하고 피 한 방울이 떨어져 물 사이로 퍼졌다. 평소 같 았으면 코피를 보고 뿌듯함을 느꼈을 수 있다. 열심히 일한 나 에게 내려온 훈장으로 여겼을 것이다. 쌍둥이 임신을 한 이후, 첫날은 피곤했나 생각했지만, 거의 매일 빠지지 않고 코피가 났다. 호르몬 때문이었다. 호르몬이 급변하는데 회사에서도 티를 안 내려고 더 열심히 일한 게 독이었다. 입덧도 상당히 심 했고, 잠도 거의 못 잤다. 나는 그야말로 오기로 버텼다. 평소보다 과잉으로 일을 열심히 했다. 티를 내기 싫었 으니까. 쌍둥이라 배가 감당을 못할 정도로 불렀고 거동이 힘 들었지만, 회사에서만큼은 날아다녔다. 주변에서 오히려 괜찮 냐고 물을 정도였다. 쉬엄쉬엄하라고 들었지만, 어디 회사가 쉬엄쉬엄 일할 수 있는 곳인가? 출산 때가 왔을 때도 휴가를 쓰지 않았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180도 몸도 마음도 변했 다. 인류의 진화를 역행하는 기분이었다. 입식 생활을 하는 회 사, 좌식 생활을 하는 출퇴근 시간, 와식 생활을 하는 집. 남편 이 집안일을 맡아서 해줬다.
막내가 준 선물 작은 아이가 약하게 태어났다. 약 18개월 정도 지났을 때 소아청소년과 선생님이 큰 병원으로 옮겨보는 게 어떠냐고 물어보셨다. 무슨 말인지 단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머리가 하 얗게 변했다. 큰 병원이라니. “아무래도 아이의 신체 발달이 느린 듯합니다. 한 번 정밀검사를 받아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이가 쌍둥이지만 유달리 작기는 했다. 어리니까 그 러겠지 생각했지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쌍둥이는 원 래 하나가 작게 태어난다고 들었다. 그리고 튼튼하게 자란다 고 하니 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한 나 자신을 자책 했다. 아이의 아픔을 애써 회피했나? 임신 기간 동안 너무 일 을 많이 했나? 열심히 일한 게 악영향을 끼쳤나? 너무 늦은 나 이에 임신을 했나? 양부모 다 아무 문제가 없는데 왜 이런 시 련이 닥쳤을까? 죄책감이 뻗어 나갔다. 대학병원에서 전문적인 검사를 다 진행했다. 원인 미 상의 발달 지연이었다. 원인을 알면 정확하게 부족한 영양소 를 채워주든가, 아니면 수술하면 됐다. 하지만 원인 미상이라 니. 오히려 아이에게 더 미안한 마음이 커졌다. 의사와 상담 후 재활 치료를 선택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육아와 일을 돌아봤다. 남편과 내가 맞벌이하는 상황 에서 온전히 아이에게 사랑을 쏟기는 쉽지 않았다. 둘 다 일을 마치고 들어오면 몸은 녹초가 되었고, 아이들을 돌보는 데 필 요한 에너지는 한없이 부족했다. 잘 놀아주지 못하는 대신 장 난감을 아이에게 쥐어줬다. 아이가 원해서 사준 장난감이지 만, 아이에게 미안한 내 마음을 가리기 위한 장막에 더 가까웠 다. 재활치료는 육아와 일 사이에서 아이를 선택하게 했다. 아
는 가족에 대한 생각을 바꿨다.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에게 꾸준한 관심과 사랑이 필요했다. 대단한 결심을 하지 않았다. 결단과 치열한 고민보다
‘하늘이 일만 생각하던 사람에게 엄마로서 역할을 할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로 했다. 아이 앞에서 슬픈 얼굴 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와 함께할 시간이 더 생겼다고 생각 했다. 재활치료 가는 날이 즐거운 데이트 날로 바뀌었다. “엄마랑 같이 갈 수 있어서 너무 좋아.” 막내는 처음에 병원을 싫어했다. 병원을 좋아하는 아 이가 있을까? 게다가 어른도 힘들다는 재활치료를 해야 하니 아이는 더 싫어했다. 내가 아이에게 온전히 시간을 쏟기 시작 한 이후, 아이는 웃으며 병원에 다닌다. 아이가 한 말은, 내가
하고 싶은 말과 같았다. 아이의 입에서 내 마음이 들리니 울컥 했다. 병원에 다녀오며 아이를 꼭 껴안아 주었다. 상황이 변한 것은 없다. 여전히 아이의 아픔에 마음이 미어진다. 하지만 아이가 조금씩 좋아지고 있고, 나 또한 가족 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남편과 나는 천 천히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며 느긋하게 아이를 기다려 주기로 했다. 커리어가 끊겨서 조바심이 나지도 않고, 지금 불안하지 도 않다. 주어진 생활에 감사하며 가족에게 더 사랑을 표현할 뿐이다. 여전히 일과 가족 사이에서 조금 망설이기도 한다. 일 로 얻는 성취와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 모두 내게 소중하다. 관리직에 오르면서 자존감이 향상되었듯이, 가족은 곁에서 지 금의 나에게 행복을 선사한다. 내 삶은 크게 두 방향으로 나뉘었다. 한 극단에 빠지면 다른 쪽을 포기해야 하는 걸까? 딸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어 떤 명언 하나가 떠올랐다.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두 번째 소중한 것을 희생시켜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가장 소중한 가족이 있다고 해서 일을 그만두지도 않았고, 일 을 하느라 가족을 포기하지도 않을 생각이다. 완벽한 조화를 이루기는 어렵다. 다만 가족을 제쳐두고, 성취만 추구하려 했
던 과거 나의 태도를 돌아보게 되었다. 가족은 각자 험한 세상을 잘 살아가도록 언제나 서로 에게 용기와 격려를 불어넣는 존재이다. 요즘 나도 남편, 두 딸 이 곁에 있어 참 든든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지금 누리는 행복의 가치’를 우리 가족에게 일깨워준 막내에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fin
가족이 있어서 설 수 있었어요. -김미리-
삶의 모순
괜찮아! 가족이 있잖아!
나는 있는 힘껏 점프해 물속으로 돌진했다. 신호보다 먼저 뛰어들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 누구보다 빠르게 출발하 려면, 버저 소리를 기민하게 알아듣는 두 귀와 밤낮으로 단련 된 두 다리까지 갖춰야 했다. 순조로운 출발. 이제부터 본 게임 이 시작되었다. 실전을 마주하기까지 얼마나 준비하고 고통을 참아냈던가. 갈고닦은 실력을 증명할 차례였다. 마지막 남은 10m. 좀 더 힘을 내려 애썼다. 고지가 코앞에 있으니, 숨이 차 오르더라도 최대한 힘을 짜내어봤다. 터치 패드에 손끝이 닿
는 순간 나는 직감했다. ‘1등이다!’ 내가 제일 먼저 골인 지점에 들어왔다. 수영모와 안경을 벗고 주먹을 위로 내질렀다. 나는 5살 때부터 수영을 시작했다. 국가대표 딸을 양성 해 내려는 부모님의 원대한 꿈 혹은 계획 때문이 아니었다. 그 저 물에서 노는 일이 재미있었다. 당시 수영 강습을 받으러 다 니시던 엄마를 졸졸 따라서 수영장에 몇 번 들락날락한 뒤로 수영의 매력에 꽂히기 시작했다. 5살 때는 유아체능단에 다니 다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2년 정도 수영 학원에 등록 하면서 수영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수영 선수로서의 삶은 아마 선수 등록을 마친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시작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훈련이 힘들다’라는 불평이 사치일 정도로 고됐고, 코치님들은 엄근진(엄격한, 근엄 한, 진지한) 스타일이었다. 훈련에 매일 참여하는 바람에, 동료 선수 말고는 반 활동은 물론이고 학급 친구들과 마주치기도 힘 들었다. 수영에 재능이 있었던 터라 각종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 을 거뒀다. 다니던 학교 정문에 내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가 걸리 기도 했고, 때론 교장 선생님 앞에 서서 사진도 몇 장 찍기도 했 다. 사진을 찍으러 조회대로 나가는 순간, 모든 학생이 나를 보 니 신기했다. 가족들은 나를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중학교 2학년 때 위기가 갑자기 닥쳐왔다. 대다수 운
동선수가 흔히들 겪는 슬럼프가 내게도 찾아올 줄 몰랐다. 어 느 날 코치님이 나를 불렀다. “어깨가 좀 덜컥거리는 거 같은데?” 사실 체감할 정도의 덜컥거림은 아니었다. 조금 불편 한 정도. 하지만 1년간 정체된 기록을 깨고 싶은 마음이 들었 다. 문제가 있다면 빨리 해결해 더 좋은 기록을 보유한 선수가 되고 싶었다. 접영과 자유형이 주 종목이었다. 두 종목을 잘 소 화해 내기 위해서 남들과 다르게 유독 솟아있는 ‘승모근’을 부 수는 치료를 약 한 달간 받아야 했다. 더 좋은 성적을 기대했지만, 치료로 인해 어깨를 한동
김미리 선수 외, 경기도장애인체육대화 우승, 경기도장애인체육회 제공
안 못 쓰는 바람에 결국 수영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성장하 는 선수에게 한 달의 휴식은 엄청난 공백이다. 운동선수에게 적정한 수준 이상의 휴식은 치명적이었다. 삶의 모순이었다. 주변 사람들마저 수영 선수가 아닌 다른 길을 택해보라고 조 심스레 내게 권유했다.
목적의 상실 ‘평범한 청소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한 방향으로 달려온 삶에 여러 갈래의 길이 드러나기 시작했 다.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길이 이어질까 봐 겁이 났다. 모 든 것이 낯설었다.
“어? 떡볶이?”
“미리야 오늘 떡볶이 먹으러 갈래?”
“응 근처에 진짜 맛있는 데 있대.” 이런 게 행복한 삶인가? 명확한 목적의 상실에 삶의 소 소한 행복이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돌리면 학교 친구들, 선생 님, 그리고 묵묵하게 곁을 지켜주시는 부모님과 가족. 갈래로 된 길은 운동장이나 수영장이 아닌 교실, 분식집으로 나를 이 끌었다. 혹독한 훈련에서 해방되니 살도 좀 쪘다. 소소한 행복 사이로 목적 없는 세계가 보였다. 이제 알아서 목적을 찾아야
한다.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막막한 마음을 억누르고자 놀러 다니기만 했다. 미래는 아득하다 못해 캄캄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강물보다 더 두렵게 다가왔다. 삼촌에게서 연락이 왔다. “미술학원에 다니며 미대 입 시 준비해 보지 않을래?” 화가였던 삼촌은 어릴 때부터 내 실 력을 눈여겨보셨다고 나를 설득했다. 미술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수영을 워낙 잘하니 따로 말씀하지 않았다고 하 셨다. 전혀 다른 분야였고,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밑바닥 부터 시작했다. 수동적이긴 하지만 목적이 주어진 데 안도했 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지향점을 길잡이로 삼아야 하는 지 명확했다. 목적은 다시 나를 이끌었다.
자유와 부자유 사이에서 대학에 들어갔지만, 틀에 박힌 생활의 연속에 싫증을 느껴 학교를 나와버렸다. 학교와 멀어졌지만 후회는 남지 않 았다. 목적을 상실할 거라면 자유를 택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 각했다. 마음을 털어버리니 딱히 불안하지 않았다. 하루는 클라이밍 체험을 하기로 했다. 당시 안전장치 가 하나 풀려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벽을 타고 올라가다가 갑자기….
‘쿵~!’
8명이 주는 힘 병실 침대였다. 의사는 나에게 ‘하반신 마비’라는 진단 을 내렸다. 나는 기나긴 수술을 받았다. 의사 말로는 수술은 계 획대로 잘 끝났다고 했다. 그러나 당장 걸을 수 없으니, 가족들 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가족의 기대를 받던 수영선 수에서, 가족을 의지하지 않으면 생활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 었다. 가족에게 미안했다. 부모님께서 날 어떻게 생각하실까? 아버지는 가족들 앞에서 눈물을 감추지 못하셨다. 딸 의 하반신 마비 소식에, 가슴속에 큰 무엇이 툭 떨어졌다고 하 셨다. 내게 그동안 아버지는 빈틈없고 엄격하신 분이었다. 그 렇게 알고 있던 괴로워하며 눈물을 흘리셨다고 하니, 내 입장 에서는 미안함 반, 고마움 반이었다. 문득 내가 아버지에 대해 오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사랑 표현법 을 잘 헤아리지 못했나. 슬픔을 잠시 추스른 아버지는 앞으로 가족들이 나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하셨다. 가족들은 나를 더 신경쓰기 시작했다. 내가 들지 못할 무거운 물건을 들려고 하면, 언니들이 뛰어와 바로 거들어줬다. 하반신 마비에서 가장 큰 문제는 대소변이었다. 전혀 느껴지지
않으니 화장실에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가족들의 사랑 덕 분인가? 점점 감각이 돌아와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의 사 선생님께서 이런 예후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회복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고 하셨고, 가족들도 함께 기뻐했다. 특히 아버지 께서 제일 기뻐하셨다. 그만큼 다행스러운 소식이었다. 회복이 빨랐던 데에는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고 꾸준 히 재활치료를 받았다는 점이 한몫했다고 본다. 하지만 가족 들의 사려 깊은 마음, 정성, 사랑 등이 없었다면 아무리 물리적 으로 노력해도 회복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을 다독여 준 가족으로 인해 마음을 편히 먹을 수 있었다. 삶은 수없이 많은 갈래길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중 하 나를 택했다. 오르막길도 있었지만, 내리막길도 있었다. 하지 만 가족은 어디에 있든지 나를 붙잡아줬다. 올라갈 때는 잘 보 이지 않았지만, 내려와 보니 그제야 보였다. 가족이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fin
식물이 우울증도 극복하게 도와주고 사람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줬습니다. -이영화-
식물이 전해준 마음
갑자기 찾아온 가족의 위기 시련은 해일처럼 한꺼번에 내게 몰려왔다. ‘엎친 데 덮 친 격’이란 말이 어울릴 법하게 쉴 틈 없이 고난이 날 휘감았 다. 짧은 시간에 나를 쓸고 지나간 고난을 세어보았다. 부모님 께서 암에 걸리셨다. 그리고 며칠 뒤에 남편이 중요한 이야기 가 있다고 말했다. 하노이에서 근무를 한동안 하게 되었다고 했다. 의지할 곳이 필요한데 하노이라니. 그리고 얼마 뒤 아들 이 말했다. “엄마 나 미국에 연구원으로 가게 되었어.”
한꺼번에 이 모든 일이 덮쳐왔다. 가족이 함께 단단하 게 뭉쳐있었는데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나는 딸을 보살펴 야 하기 때문에 남편이나, 아들을 따라갈 수도 없었다. 누구에 게 관심을 먼저 기울여야 할지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차분한 태도를 지니기 어려웠다. 갈피를 못 잡고 눈앞에 닥친 일들을 헤쳐 나가다 보니 정신이 없었다. 병원에 가서 부모님을 간호했고, 아들 결혼식 에 참석했고, 베트남으로 떠나 남편을 내조했다. 힘든 내색, 불 평, 불만을 드러내는 일 전부 사치일 뿐이었다. 몸과 마음은 나 날이 닳아갔다. 아마도 나를 돌보지는 못했던 것 같다. 갑자기 주변이 핑핑 돌고 속이 메스꺼웠다.
집을 가득 메운 제라늄
‘최고혈압 170, 최저혈압 105, 맥박 90’
꽃으로 이겨낸 우울증 이름 있는 병원 몇 군데를 찾아가 봤다. 기존에 앓던 당 뇨 말고는 특별한 문제가 없다는 결과를 들었다. ‘아니, 이게 꾀병이라고? 말도 안 돼.’ 정말 아픈데, 밥 한술도 뜨기 어려운 데, 한걸음조차 내딛는 게 힘겨운데, 이 상태를 알아주는 의사 가 없었다는 사실이 절망적이었다. 나는 이석증 검사를 받으러 병원에 갔다. 달팽이관에 문제가 없다면 이렇게 어지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간호 사는 내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너무 힘들어 눈물이 났다. “이석증 아니십니다.” “네? 이렇게 힘든데 이석증이 아니라고요” “네, 이석증이면 흔들어도 안 힘들어합니다.” 이석증(어지럼증)이 아니라는 진단을 내린 간호사의 말을 들은 뒤, 난 단골 내과에 방문했다. 그 의사는 요즘 스트 레스나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냐고 내게 물었다. 한마디로 내
한 거야.’
증상은 마음이 아파서 생겼다는 말이다. ‘그래, 내 마음이 병들 만하지. 큰일들을 겪었으니 당연
우울증 진단과 함께, 나는 우울증 치료제에 관한 설명 을 들었다. 우울증 약은 한 번 먹으면 계속 먹어야 한다고 했
다. 우울증을 이겨내는 방법은 두 가지인 듯했다. 하나는 약을 먹거나 하나는 의지로 이겨내거나. 난 약 먹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가 아니니까 스스로의 의지로 이겨내 보자고 다짐했다. 그동안 마음을 방치했으니, 마음에 쉼을 허락하고 마음을 살 뜰히 돌보면 되지 않을까 판단했다. 마음 회복 1단계. 식물을 키워보기로 했다. 다육이 화분 150~200개 정도 집 안에 들여놓았다. 정신을 쏟을 곳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치유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식물만큼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것이 있을까? 내 손길로 직접 다육이를 만지고, 다육이와 교감 했다. 날마다 다육이와 소통하는 일에 몰입했더니 외로움이 점 점 사라졌다. 반려 식물을 통해 우울증이 호전되고 있었다. 마음 회복 2단계. 나는 다음으로 ‘제라늄’을 수집하기로 했다. 원래 나는 잎사귀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를 싫어했는데, 유럽제 제라늄 은 그렇지 않다고 아는 동생이 추천해 줬다. 꽃망울만 시들기 에 베란다에 떨어지지 않는 장점도 있었다. 다만 제라늄은 구 하기 힘든 꽃이라서 보통 제라늄끼리 교환하거나 분양받는다 고 했다. 제라늄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가까운 동 탄부터 경북 영천, 전남 순천까지 제라늄을 얻어내기 위해 여
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렇게 내 열정으로 구하고 키운 제라 늄은 3~4월에 잠깐 만발했다. 바깥은 아직 쌀쌀한데 집 안은 온통 총천연색 꽃으로 수놓은 정원이었다. 짧은 시간이더라도 정말 뿌듯했다. 꽃밭을 카메라에 담고, 네이버 밴드에 공유했 다. 나 말고도 밴드에 정원을 가꾸는 분들이 참 많았다. 꽃에 빠 진 뒤로는 어지럼증, 우울증이 어느새 내 몸에서 빠져나갔다.
식물로 위로와 치유를 받다 집에 조성해 놓은 제라늄 정원은 밖에서도 눈에 띄었 다. 제라늄 정원을 보고 싶어 하는 이웃들도 집을 자주 방문했 다. 나는 원래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좋아한다. 그래서 마을에서 반찬 나누기 봉사도 제법 했다. 무언가를 나누는 행 위는 내 마음을 밝게 했다. 집에 온 사람들도 그냥 보낼 수 없 었다. 내가 키우는 식물을 구경하면서 커피도 마시고 맛난 요 리도 나눠 먹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시대에 이웃 간에 대화가 꽃처럼 피어났다. 종종 방문객들에게 다육이, 제라늄 등을 나눠줬다. 어 렵게 모은 식물이지만, 나누면서 느끼는 기쁨이 컸다. 식물을 잘 키우는 팁도 전수해 줬다. “식물과 지속적으로 교감하며, 식물이 언제 배고파하
고 아파하는지 그 상태를 알아차리는 연습을 해야 해.” 뻔한 소리라고 무슨 노하우냐고 볼멘소리를 듣기는 했 다. 하지만 다른 방도는 없다. 이렇게 나도 식물을 통해 치유를 받았으니까. 식물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우울증을 날려주었 고, 어떤 일에 몰두하게 했으며, 사람들과 나누는 기쁨까지 선 사했다. 봉사활동에 더욱 기쁘게 참여할 수 있었다. 봉사는 식 물을 키우기 전부터 시작했다. 자녀들이 중고등학교에 들어가 면서부터 참여했다. 당시엔 전업주부로서 사회와 동네에 기여 할 방법을 강구하다가 봉사활동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하 지만 한 번의 위기를 이겨낸 후, 식물에 쏟는 다정한 마음, 사 랑을 주변 사람들에게도 있는 힘껏 표현해야겠다고 굳게 다 짐했다. 그 결심의 하나로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나는 마스크 1,300장을 제작하여 파출소, 병원 등 동네 곳곳에 보급했다. 아들 내외가 살고 있는 미국에 방문했을 때도 식물에 게 배운 사랑을 전했다. 미국에 마스크가 모자라는 상황이었 다. 아들이 살고 있는 동네 주변에 마스크가 없는 사람이 꽤 있 었다. 나는 옆집의 미국인에게 내가 만든 천 마스크를 나눠줬 다. 미국인은 이래도 괜찮냐고 물었지만, 식물을 키우며 얻은 교훈을 실천하고 싶었다. 언어가 달라도 돕는 마음. 여전히 아
들 내외를 방문할 때 그 미국인은 나를 반겨준다. 식물에 관심을 갖고 식물을 보듬으면서 내 마음도 상당 부분 치유되었다. 식물에 관심을 쏟고 타인에게 사랑을 나누면 서 나의 삶은 더 나아졌다. 우울증을 앓기 전보다 행복하다. 삶 의 행복은 관계 사이에서 피어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fin
나눔을 실천하고 계신 이영화님
사람과 사람 사이 신뢰가 중요합니다. -김승우-
축구, 신뢰를 쌓는 일
야! 거기서! 축구를 마치고 귀가하는 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검은 물체가 하나 휙 지나갔다. 자세히 보니 누군가 뛰어가고 있었다. 잔뜩 움츠린 자세로 무언가에 쫓기듯. 감이 왔다. 잡아 야 한다. 차에서 내려 달렸다. 저녁에 펼쳐진 추격전이다. 골목 과 골목 사이를 뛰고 넘어 다녔다. 다년간 축구로 단련된 폐가 이럴 때 보답할 줄 몰랐다. 나는 도망자의 목덜미를 잡아 팔을 뒤로 꺾었다. “아저씨! 그 사람 좀 잘 잡고 있어요.”
우유 배달 아저씨가 헉헉대며 따라오고 있었다. 달려온 아저씨는 도망자의 얼굴에 냅다 주먹을 날렸다. 어? 도망치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었나?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자초지종도 모 른 채 일이 벌어졌다. 쩔그렁 소리와 함께 도망자가 숨기고 있던 흉기가 떨어졌다. 갑자기 뒷덜미가 시큰했다. 흉기를 든 강도였 구나. 후에 경찰이 오고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내가 제압한 사람 이 강도짓을 하다가 도주 중이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아찔했 다. 내가 찔릴 수도 있었던 상황 아닌가?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어요. 축하합니다.”
나와 우유 아저씨는 경찰들에게 강도를 인계했다. 며칠 뒤 전화가 울렸다. “김승우 님이시죠? 경찰서입니다. 의인상에 추천되셨
상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다. 더욱이 나는 의인상을 받을 만한 사람도 아니다. 단지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직감과 축구로 단련된 체력으로 이룬 일이었다. 오히려 흉기에 찔리 지 않아 가슴을 쓸어내린 일 때문에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 다. 경찰서로 찾아가 포상금 50만 원과 표창장을 받았다.
축구는 신뢰를 얻는 일 강원도에서 나고 자랐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았다. 군 복 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열의에 차 있던 나는 돈을 벌어야겠 다고 생각했다. 대부분 군대를 다녀온 사람의 포부가 비슷하 지 않을까? 고향 선배는 부산에 있는 부품 공장에 취업하면 어 떠냐고 물었다. 부산에서 일한다는 생각에 얼른 대답했다. “가겠습니다.” 옥수수를 팔아 여비로 챙긴 돈은 편도 차비와 약간의 돈 얼마. 부푼 꿈을 안고 부산에 도착했다. 이제부터 내가 생활 할 곳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었다. 바로 회사 면접을 봤다. 이런저런 질의에 응답한 후 나는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불합 격은 생각지도 않았는데. 군대 제대 후 너무 열의가 넘첬던 걸 까? 여관방에 누워 사회인의 첫 쓴맛을 삼켰다. 그때 형님에게 연락이 왔다. “승우야 아직 기회는 있다. 과장님이 부산 축구 동호회 회장님인데 1명 모자라니 너 데리고 오란다. 축구할 수 있지?”
이를 꽉 물었다.
기회는 언제 올지 모른다. 축구가 기회를 줄지 몰랐다.
나는 축구화를 빌려 신었다. 내 발보다 훨씬 신발이 컸 기 때문에 아무리 끈을 조여도 헐거웠다. 헐거운 신발로 걷기
는 쉽다. 그런데 축구의 경우는 달랐다. 발 곳곳에 심한 마찰이 가해져 피로가 금방 쌓였고, 뛸 때도 엉거주춤 뛰어야 하니 힘 은 배로 들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다시 그렇게 뛰 라고 하면 뛰지 못할 것 같다. 하늘이 노랗게 보일 때까지 뛰었 다. 축구는 다시 오지 않을 면접이라고 생각했다. 과장님은 축구를 마친 후 이력서를 가져오라고 하셨 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과장님께서는 나의 축구 실력을 보 신 것보다 열정을 보셨다고 들었다. 축구를 일종의 놀이로 생 각하고 설렁설렁 뛸 수도 있었다. 그보다 면접 실패에 마음을
망포동친선축구대회
빼앗겨 무슨 축구냐고 돈을 빌려 짐을 쌀 수도 있었다. 기회는 전혀 생각지 않은 곳에서 왔다. 열심히 축구하는 모습이 성실 한 모습으로 비쳤고, 회사에 나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 었다. 결국 나는 회사에 합격했고, 기술을 배워 수원에 회사를 차릴 수 있었다. 내 삶의 초석을 축구가 닦아 주었다.
축구는 신뢰를 쌓아가는 일 베트남 호찌민에 회사를 차렸을 때였다. 비록 현지 사 람들과 언어가 통하지 않았지만, 표정, 손짓, 몸짓 등으로 의사 소통이 충분히 가능했다.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신뢰를 쌓는 일이다. 언어의 차이로 인한 소통의 부재는 분명 신뢰의 문제로 이어질 게 뻔했다. 경영자로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신 뢰를 쌓을 수 있을까? 축구를 시작했다. 몸을 부딪치는 것만큼 서로를 알아가기 좋은 것도 없으니까. IMF는 갑자기 찾아왔다. 모든 회사가 도산하거나 현지 에서 철수를 결정했다. 베트남에 있던 거래처도 마찬가지였 다. 거래가 끊기기 시작했고, 회사는 수금이 어려워졌다. 직원 들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어떻게 그들의 생계를 책임 져야 할까? 여태 열심히 일해준 직원들에게 미안했다. 어쩌면 월급이 밀릴 수도 있다. 직원들도 사정을 아는지 나에게 말했
다. 회사를 지키자고. 직원들이 다른 때보다 열심히 일해준 덕 택에 1년의 고비를 잘 넘길 수 있었다. 나는 축구 덕분에 사람과 사업을 배웠다. 신뢰가 가장 중요했다. 처음 보는 회사의 과장님과 축구하며 신뢰를 쌓아 입사할 수 있었고, 축구로 쌓은 신뢰 덕분에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축구를 잘했기 때문이라고? 아니다. 신뢰다. 다른 것 으로 신뢰를 쌓을 수도 있다. 신뢰는 함께 거짓 없이 활동할 때 생긴다. 축구는 서로 정직하게 몸과 몸을 부딪치는 운동 아닌 가? 신뢰가 쌓일 수밖에 없다. 새로운 직원을 뽑을 때도, 인사 를 평가할 때도, 신뢰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어떤 직원에게는 축구를 잘하느냐고 물어봤지만, 사실 속내는 서로 신뢰를 쌓 을 수 있는 좋은 매개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축구의 힘은 신뢰’는 신념으로 80~90년대에 나는 수원시 축구협회 이사, 부회장, 회장 등 주는 대로 다 맡 았다. 2002년, 우만동에서 영통으로 이사를 왔다. 곧바로 나는 영통축구연합회를 꾸려서 팀 20개를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지인의 소개를 받아 망포 체육진흥회 부회장이 되었다. 동네 주민의 건강을 증진시키고, 친목 도모를 통해 상호 간 벽을 허 물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여러 직책을 맡고 적극 헌신하겠다 고 매번 다짐했다.
현재 망포2동 체육진흥회 회장으로서 나는 초대 회장 의 뜻을 이어받아 해마다 친선 축구대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하 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망포FC’이외에 다른 팀들은 대한축구 협회에 등록되지 않아 제대로 된 경기를 치를 수가 없는데, 그 기회를 제공하려 노력해 왔다. 올해까지 벌써 12회째 대회를 열었다. 축구를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나도 확실히 모르겠다. 그럼에도 축구를 통해 신뢰를 쌓을 수 있다는 내 믿음은 변치 않을 것이다. 나이 들어 공을 못 차는 순간까지.
fin
안성맞춤컵 전국 50,60 축구대회 우승
엄마가 되고 가족의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김점임-
'엄마'라는 이름의 힘
종손 집에 들어온 가톨릭 신앙을 가진 며느리 내게 가족은 어떤 의미일까? 가족은 내 삶에 활력과 행 복을 더해주는 원천이다. 평일엔 비록 회사 일에 대부분 시간 을 쏟긴 해도, 주말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데 집중하는 남편. 키울 땐 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게 활력과 행복을 주는 네 딸. 매일 웃음과 행복을 주는, 둘째가 낳은 귀한 손주들까지. 가족 한 명, 한 명을 떠올리다 보면 가 슴이 벅차오르고 하느님께 감사를 고백한다. 남편은 5대째 종손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나와 다르게
가톨릭과 거리가 있는 유교 집안이었다. 가족과 가족이 만나 서 하는 게 결혼이라 했던가? 문화가 너무 달랐다. 시집을 온 나는 명절에 시댁 식구의 식사, 잠자리 등을 책임져야 했다. 이 불과 옷을 빨래하고, 엄청난 양의 음식을 장만하기도 했다. 요 즘은 많이 사라졌겠지만, 몇십 년 전만 해도 가족들이 모이면 며칠을 자고 가기도 했다. 육체적으로 힘들긴 했지만, 가족이 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나를 제일 막막하게 만들었다.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남편은 아들을 꼭 낳기를 원 했다. 그와 달리 가톨릭을 믿었던 나는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 없이 잘 키우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종손으로서 남편이 막중한 책임감을 지니고 있다는 사 실을 결혼 초에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 우리는 먼저 연년생 첫째, 둘째 딸을 낳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남편은 아들을 낳아 야 한다고 자주 말했다. 그런데 육아와 출산 준비를 병행하는 게 말처럼 쉬운가? 연년생 두 딸을 키우다 보니 나는 힘이 들 었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남편이 퇴근한 줄도 모르고 아이와 같이 잠든 적이 더러 있었다. 애를 갖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 다. 하지만 종손으로서 남편은 아들을 낳고 싶어 했다. “이제는 부모님께 아들을 보여드려야 할 때가 된 것 같아.”
둘째 출산 후 4년 정도가 지난 뒤, 남편은 조심스레 내 게 말했다. 시부모님이 따로 말씀이 없으셨지만, 아들이 종손 의 의무를 지키길 내심 바라셨던 듯했다. 남편도 종손의 압박 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쉽사리 남편을 비난할 순 없었다. ‘그래, 남편도 남편만의 입장이 있으니.’라고, 생각하며 셋째를 낳기로 결심했다. 당시 안양에 살던 나는 서울에 있는 한의원으로 찾아 갔다. 출산에 효험이 있다는 한약을 지어 먹었다. 덕분에 임신 에 성공했지만, 또다시 ‘딸’이라는 게 문제였다. 셋째 출산 당 일, 신생아 딸을 보자마자 남편은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셋째는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당일에 퇴원해야 했 다. 아들이 아니라서 갑갑한 남편의 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사 람의 힘으로 될 일은 아니었다. 남편은 셋째 이름을 중성적으로 지었다. 아들을 정말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담긴 것 같았다. 남 편의 바람과 달리, 난 더 이상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없다고 판단 했다. 더 낳으면 경제적인 문제도 생길 게 뻔했다. 4년이 흐른 후 아들에 대한 기대를 접은 남편은 정관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임신 사실을 확인했다. 수술 후 일어난 일이어 서 남편도 나도 무척 당황했다. 의사는 몇십만분의 일의 확률 로 이런 경우가 있다고 했다. 우리는 신이 주신 선물로 생각하
고, 넷째를 낳기로 결정했다. 넷째도 딸이었다. 1990년대 정부 에서는 ‘하나 낳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가 붙어 있을 정도로 저출산을 강조했었다. 딸이 넷인 까닭에 어딜 갈 때마다 우리 가족은 주변의 시선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남들의 시선을 어 떻게든 피해 보고자, 지하철 칸에 남편과 내가 두 아이씩 데리 고 나눠 타는 방법을 강구한 적도 있었다. 잠시 서로 떨어져 있 어도 딸 넷을 둔 집안이라는 사실은 금방 들통났다. 가족은 가 족인가 보다.
대가족 8명과 함께 다시 시작된 나의 사회생활 결혼 때문에 상경한 서울은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 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서울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분주하고 고단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나와 남편은 네 번이나 전셋집 을 전전하면서 정착할 곳을 찾아다녔다. ‘고작 4명 누일 공간 이 없어서 이렇게 헤맬 줄이야 … ’ 산본의 주공아파트에 당첨받 아 입주했을 때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6명으로 가족 구성원 이 늘어 방 3개가 딸린, 텃밭으로 농사까지 지을 수 있는 새 아 파트로 이사했다. 내 방이 생겼다고 좋아하는 아이들의 기쁨 도 잠시였다. 입주 후 한 달이 지났을 때였다. 시부모님께서 우리 집
내게 가족은 어떤 의미일까? 가족은 내 삶에 활력과 행복을 더해주는 원천이다.
지성공원
에 들어오시겠다고 하셨다. 난감했다. 일단 첫째, 둘째가 고등 학생이어서 공부에 방해가 되어선 안 되었고, 시부모님이 머 무르실 마땅한 방도 없었다. 남편은 부모님까지 더해 여덟 식 구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결국 나도 힘을 합하여 맞벌이를 시작하기로 했다. 나는 손으로 하는 일을 좋아해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여성회관에서 제과·제빵을 배웠다. 빵과 과자를 만들어 애들 에게 먹이고, 주변에 선물로 나누기도 하였다. 덕분에 제과·제 빵 기능사 자격증을 딸 수 있었다. 음식을 만드는 것도 좋아했 다. 책을 참고하여 요리를 연습하면서, 한식, 양식 기능사 자격 증도 딸 수 있었다. 요리 자격증을 준비하면서 딸들에게 음식 을 만들어 주니 정말 좋아했다. 요리 자격증 덕분에 과천에 소 재한 공무원 연수원에 조리사로 취직할 수 있었다. 숙박하는 연수생들에게 아침 식사부터 저녁 식사까지 준비해 줘야 했다. 가족을 위한다고 시작한 일이지만 가족을 볼 수 있는 날이 점점 줄어들었다. 과천까지 일찍 출근해 늦게 퇴근하는 일상이 반복되어 체중이 4~5kg나 빠졌다. 가족들이 나를 볼 때마다 무척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가족을 위하 는 일이 맞나? 가족을 위한다고 하는데, 가족이 되려 나를 걱 정하기 시작했다.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이후 학교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낮부터 8시간 동 안 근무하면서 전보다는 힘이 덜 들었지만, 2년 계약이 끝나면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비정규직을 2년 넘게 채용하려면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해 줘야 하기 때문이다. 새 직장에 들어 가면서 나는 더 공부하여 자격을 갖추기로 생각하고 늦은 나 이에 야간대학에 다니기로 결심했다. 직장에서 원하는 인재로 성장하고 스스로 경쟁력을 갖춰야 잘 뽑히겠다고 생각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장안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서 수업을 들었다. 2년 계약이 끝날 즈음 나는 학교와 계약을 연장할 수 있었다. 이후 정년 60세까지 꽉 채우고 퇴직했다. 가족에 대한 책임은 내 삶을 이끌었다. 가족의 의무와 개인의 성취를 별개 로 보는 경우가 더러 있다지만, 가족을 위한 삶이 나의 성장으 로 이끌었다.
가족은 서로에게 힘을 주는 원천 집 근처 행정복지센터에서 운영하는 작은 도서관에 교 사 출신인 시아버님이 관리를 맡으시게 되었다. 학교 공부가 끝나면 초등학생인 셋째 딸과 유치원생인 넷째 딸은 작은 도 서관에서 숙제와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시아버님은 아
이들 관리뿐만 아니라 ‘한문’까지 가르쳐주시며 한문 급수 시 험에 합격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덕분에 나는 어린 딸을 두 고도 마음 편히 일하고 귀가할 수 있었다. 시부모님께서 육아 등 우리의 손길이 미치기 어려운 부분에 도움을 많이 주셨다. 이에 힘입어 우리 부부는 근검절 약하여 저축한 돈과 대출을 통해 방 4개를 갖춘 45평짜리 집 을 구했다. 이사 간 집에서 시부모님, 부부, 네 딸, 이렇게 8명 이 한동안 오순도순 모여 행복하게 살았다. 네 딸들은 맞벌이하는 부모와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3 대가 사는 대가족에서 서로 사이좋게 잘 지냈다. 사회에서 열 심히 살아가는 가족들을 향해 응원과 박수를 보낸다. 5년 전 손자를 돌보기 위해 가족이 함께 공원과 도서관 이 인접해 있는 수원 망포동으로 이사 와서 지금까지 평화롭 게 살아가고 있다.
fin
아들에게 가업을 물려주는 일은 정신을 물려주는 일입니다. -천명호, 송기연-
장인 정신의 대물림
수백 개의 도장, 수만 개의 길 (천명호) 길을 만드는 일은 어려웠다. 도장도 하나하나 길을 내 야 했다. 길을 잘 내야 다른 사람의 앞길도 잘 닦일 거라 생각 했다. 도장은 중요한 계약을 할 때, 꼭 필요했다. 지금은 사인 으로 대체되었지만, 아직은 사인보다 도장이 중요하다. 중요 한 순간을 함께 보내야 하는 도장을 아무렇게나 만들 수는 없 다. 두 손의 근육이 다소 뻣뻣해졌지만, 도장을 파내는 열정은 쉽게 사그러지지 않았다. 도장을 잘 안 쓴다고 하지만, 여전히 다양한 사람들이 나를 찾는다.
누군가의 이름, 어떤 회사의 명칭이 잘 새겨진 도장은 그 사람 혹은 회사의 앞길을 평탄하게 만들어 준다고 믿었다. 미신에 왜 이리 집착하냐며 유난을 떤다고 볼 수도 있다. 주변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는 힘이 인 감도장에 있다는 마음으로 진지하게 일에 임했다. 인감도장을 파러 오는 사람들을 향해 “아무리 가족이라도 빚보증을 서주면 절대 안 된다.” “내 집 마련의 꿈에 부푼 나머지, 부동산을 계약할 때 중요한 사항을 간과하면 안 된다. 등기부등본, 집주인, 계약서 조항 등을 꼼꼼히 살피고 신중히 도장을 찍어야 한다.” 라고 진심을 담아 충고했다. 내가 공들여 만든 도장으 로 그의 인생을, 정성을 다해 가꾸기를 바랐다. 자개함 등에 담 아 도장을 건네줄 때, 도장 주인의 인생이 더욱 아름답고 빛나 기를 기대하고 기도했다. 파릇파릇한 젊음의 시기엔 나는 인쇄, 도장, 상패 만드 는 일 등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 당시에는 장사가 꽤 잘 됐다. 먹고 사는 데 지장도 없었고, 아들도 키웠으니까. 가게도 확장 했다. 주로 경기도 교육청에서 의뢰하는 일을 맡았다. 주변에 새 학교가 많이 세워지던 1997년 봄이었다. 학교장 직인, 교육 청장 직인 등이 필요해 꽤 많은 사람이 도장포를 찾아줬다. 아
마 학교마다 도장 9~10개 정도를 의뢰했던 것 같다. 일거리가 많이 들어와 신나는 마음에 명절, 휴일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도장을 파냈다. 일주일 치 일거리를 하루만에 끝내는 기염을 토한 적도 있었다. 깔끔하고 반듯하게 도장을 만들어 거래처 에 공급한 덕분에 입소문을 타기도 했다. 당시엔 도장 제작에 손이 정말로 많이 갔다. 일거리가 늘어날수록 쉴 틈 없이 손을 움직여야 했다. 그 때문에 종종 병 원에 들락날락했다. 병원마저도 시간이 부족해 가끔씩 방문했 다. 손끝에 굳은살이 단단히 배겨도, 손가락을 못 움직일 정도 로 그 마디가 몹시 아려와도, 난 도장을 원하는 손님들을 바라보 며 능히 이겨낼 수 있었다. 진통제를 먹어가며 모든 아픔을 잠
장인 정신으로 깎은 도장
시 잊어보거나 꿋꿋이 참아냈다. 아픔보다 섬세히 도장을 파내 는 일에 더욱 집중했다. 매번 심혈을 기울여 작업했다. 내 일에 임하는 자세만큼은 외골수와 같았다. 도장을 팔 때, 오른쪽 엄지 로 칼을 지지하고 길을 파야 한다. 오른쪽 손에 힘이 너무 들어 가 어느 순간부터는 떨리는 게 멈추지 않았다. 젊었을 때는 괜찮 았지만, 지금은 몇 번이나 수술했지만 손이 떨리는 걸 막을 길이
아들에게 물려준 가업, 가족사진
없다. 그렇지만 나는 도장 파는 일을 사랑했다.
아들에게 쥐여준 칼 꽤 오랜 세월 일에 몰두한 탓에 내 건강을 돌보지 못했 다. 일을 지속하다가는 내 몸이 더 안 좋아질지도 몰랐다. 아들 에게 도장포 일을 물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꽤나 괜찮은 직업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아들에게도 자신이 계획하는 길이 분명히 있기에 쉽사리 도장포를 물려받으라고 강요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아내도 부모라면 아들의 꿈을 최대한 지지하 고 응원해 주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나로선 반박이 불가능했다. 우연히 어떤 계기를 통해 아들에게 내 일을 전수할 기 회가 생겼다. 아들이 다니던 직장은 평소 회식 자리를 자주 가 졌다. 당연히 아들은 상사 혹은 동료가 권하는 술을 마실 수밖 에 없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술을 잘 못 마시는 아들은 회식 후 집에 돌아와서 속을 게워 냈다. 술 때문에 고생하고도 아들은 다음날 회사에 출근해야 하는 악순환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술이 약했던 아들은 결과적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말았다. “아들, 아버지 일 좀 배워보지 않을래?” 기회를 보다가, 나는 퇴직 후 쉬고 있던 아들에게 도장 포 일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내 제안을 들은 아들은 며칠만 시 간을 달라고 말했다. “아버지, 언제부터 가게에서 일을 배우면 될까요?”
고민 끝에 아들은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들이 거절하 면 어떡할까 노심초사하던 차에 기대하던 답변을 들은 셈이었다. 아들은 곧잘 일을 배웠다. 나처럼 열성적으로 도장 제 작에 임하는 듯 보여서 내심 뿌듯하고 대견스러웠다. 무엇보 다 건축공학과를 졸업한 아들은 ‘캐드(CAD)’라는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도장 도안을 만들 줄 알았다. 탁월한 능력이라고 생 각했다. 신기술이 도입되니까 도장을 만드는 시간을 단축하면 서 의뢰인의 요구사항도 하나하나 반영하는 게 가능했다.
도장 깎는 기계
흐르는 시간 속 변함없는 장인의 혼 (송기연) 작업 때문에 밤새우며 일하는 아들의 집념을 보는 순 간마다, 애 아빠의 장인 정신이 겹쳐 보여 슬며시 미소를 짓는 다. 요즘도 한결같은 모습으로 아들은 도장을 공들여 만들어 낸다. 장갑을 낀 손등으로 줄줄 흐르는 땀을 닦는 아들에게 나 는 슬쩍 수건을 건넨다. 요즘은 아들과 출근하고 있다. 계산서를 발행하거나, 문서를 정리하는 일을 돕고 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아 묵묵 히 일을 잘 해내고 있다.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볼 때 대견스럽기도 하지만 걱정도 된다. 처음에는 이 일이 힘 든 걸 알아 반대했으니까. 그래도 아들을 옆에서 지켜보면 술 을 게워 내던 그때보다는 덜 걱정된다. 모든 부모의 마음이 한 결같을 것이라 생각한다. 더 편하게 행복하게 일하면 했으면 하는 마음 말이다. 가능한 옆에서 아들을 지켜볼 생각이다. 일 을 하는 게 좋다고, 만년 총무라고 말하지만, 아들을 지켜보기 위한 이유도 있다. 애 아빠에게 물려받은 가업이 잘 정착돼 더 행복한 날을 맞이했으면 한다. 도장 대신 서명을 하는 시대에 도장을 파는 일은 어쩌 면 한물간 낡은 유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코로나19가 유 행한 전후로 생각보다 많은 도장포가 폐업하거나, 혹 살아남
더라도 근근이 입에 풀질만 하는 실정이다. 이렇듯 10~20년 전만 해도 종종 눈에 띄던 도장포는 계속 사라지고 있다. 시간 이 더 흐르면 판소리처럼 도장 제작 능력 자체가 무형문화재 로 지정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그런데도 최상품을 생산하 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이를 선보이고자 밤낮 가리지 않 는 정신은 애 아빠부터 시작해 아들로 이어진다. 증발하지 않 는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우리 아들처럼 곳곳에서 장인의 혼 을 불태우는 모든 이들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fin
작업 때문에 밤새우며 일하는 아들의 집념을 보는 순간마다, 애 아빠의 장인 정신이 겹쳐보여 슬며시 미소를 짓는다
행복함이 공방을 통해 퍼져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강선미-
마을의 행복 공방
마을의 공방을 차리게 된 이유 원래 직장을 다녔는데 거기서 흙으로 작업을 많이 했 습니다. 화분 원품을 만드는 일을 했어요. 원품은 흙으로 만들 어요. 일종의 디자인이죠. 사장님께서 관엽화분을 만들고 싶 다고 하시면 주문에 따라 만듭니다. 사각으로 혹은 원형으로. 디자인 요청에 따라 달라요. 5~6년 작업을 하니까 몸이 너무 아팠어요. 특히 손가락과 목이 너무 아팠습니다. 매일 이렇게 일하니 오래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때가 아마 딱 50 살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일을 그만두고 쉬었죠.
동네를 돌고 있는데, 세라믹 페인팅 가게를 하나 찾았 습니다. 그때 영감을 얻었습니다. 남편도 한번 가게를 차려보 라고 말했어요. 처음에는 “공방으로 꾸밀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원래 카페를 꾸밀 자리가 아니었어요. 어둡고 답답했죠. 하지 만 공간은 사람 손을 타면 달라집니다. 공방에 있는 선반도 다 맞춘 겁니다. 많은 분께서 도와주셨어요. 특히 목사님이신 저 의 조카분께서 도와주셨죠. 지금은 여기가 카페냐고 오는 사 람이 많아요. 꽃집이냐고 꽃 사러 오시는 분도 있고요. 꽃집도
손수 그리신 세라믹 페인팅
카페도 아니라, 공방이라고 말씀드리죠.
사람들이 들어오고 싶어 하는 공간인 듯합니다. 일단 저의 취향이 반영되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의도 가 한 가지 있는데, 공방에 들어오는 분들이 유쾌함을 느끼셨 으면 좋겠어요. 공간에서 얻는 힐링도 있잖아요. 집에서는 얻 기 어려운 힐링이요. 사실 더 예뻤죠. 여자의 로망이라는 게 있 잖아요. 그런 분위기를 낼 수 있도록 노력했어요.
공방도 여러 종류인데 어떤 종류의 공방을 운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세라믹 페인팅을 주로 다뤄요. 제가 학교에 다닐 때 안료 (물감)가 많이 없었어요. 대부분 유약으로 색을 냈죠. 테이핑해서 그림을 붙이고 색을 내는 것만 있었어요. 저는 외국책을 많이 봤 죠. 아주 섬세한 내용이 많아요. 포셀린(도자기)이라고 하죠. 비싸 고 까다로워서 전략을 달리했습니다. 시일이 오래 걸리는 포셀린 보다는 비교적 제작 기간이 짧고 사람들이 접하기 쉬운 지금의 스 타일을 선택했죠. 가끔 인스타그램에서 포셀린이라고 찾아오세 요. 포셀린은 아닙니다. 저희는 세라믹 페인팅입니다.
작업하면서 얻는 힐링도 있나요? 어떤 일에 집중하면 스스로 힐링이 되기도 합니다. 그 런데 작업할 때 집중할 필요가 있어요. 세라믹 페인팅이 까다 롭고 어려운가 봐요. 힘들어서 그냥 가신 분들도 있습니다. 잠 깐 힘든 단계를 넘어서면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저에게 배우 셔서 창업하신 분도 더러 계십니다. 아주 멀리서 오시는 분도 계세요. 서울의 목동이나, 김 포, 심지어 원주나 대전 같은 데서도요. 제가 써 놓은 블로그 글을 오시는 것 같아요. 멀리서 오시는 분께는 항상 이야기합 니다. 근처에 세라믹 페인팅 가게가 있으니 그리로 가시라고
다른 힐링도 있나요?
요. 멀리 있으면 왔다 갔다 하기 힘들잖아요.
공간에서 혹은 작업을 통해 누리는 힐링 말고
제가 10년 넘게 일을 하고 있다 보니 많은 분이 오세요. 오신 분 중 어떤 분들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십니다. 공방에 서 가르치다 보면 개인적인 소통을 하게 되잖아요. 그럴 때 저 는 많이 들어드리죠. 듣고 있으면 울고 가시는 분들도 많으세 요. 말씀하시면서 힐링을 받으시는 거죠. 하지만 관계를 깊이 갖지 못하는 분들도 계세요. 선생님과 학생 사이 일정 거리를
기를 하더라고요.
두시는 거죠. 사람마다 개인의 거리가 있잖아요.
더불어 살며 일하시는 듯합니다. 한번은 딸을 망포역에 내려준 적이 있는데 이런 이야
“엄마는 사람을 좋아하나 봐.” “엄마도 그냥 하는 거야.” 엘리베이터에서 매일 보는 주민에게 인사하며 지낼 수 있잖아요. 어느 날은 좀 더 정답게 인사할 수도 있고요. 여기는 시골 같아서 어르신들께서 밖에 나와 계시는 경우도 있어요. 어떤 날에는 어르신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드릴 수도 있고요. 어른들께 예의를 지키는 거죠. 공방에 오시는 분들과 마음을 나누듯이, 주민들끼리도 '함께'의 정신을 공유하면 좀 더 행복 한 마을이 되지 않을까요?
fin
정원같은 공방
태장마루도서관
망포고등학교
박지성축구센터
망포2동 마을 지도
태장파출소
망포2동행정복지센터
경기 수원시 영통구 영통로 143
경기 수원시 영통구 태장로54번길 10
망포초등학교
경기 수원시 영통구 동탄지성로 550-10
경기 수원시 영통구 태장로 46
글빛초등학교
경기 수원시 영통구 망포동 92-43
경기 수원시 영통구 태장로 25
태장초등학교
경기 수원시 영통구 태장로71번길 30
경기 수원시 영통구 동탄지성로 468
경기 수원시 영통구 반정로 216
글빛누리 공원
글빛초등학교
박지성 축구센터
동탄지성로
망포초등학교
지성공원
태장마루도서관 망포2동 행정복지센터
망포고등학교
방죽공원
태장초등학교
태장파출소
펴낸곳 망포2동 행정복지센터 기획, 편집 망포2동 주민자치회 삽화 김지현 디자인 마음 연결 제작 마음 연결 인쇄 팩토리B 주소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태장로54번길 10 행정복지센터 이 책은 저작권법에 의해 국내에서 보호받는 저작물입니다.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본문의 내용을 무단으로 복제하거나 다른 매체에 기록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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