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질고 착한 사람들이 사는 권선1동 마을이야기 Vol.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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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1동 축사
고려 말 한림학사 이고 선생의 이웃 사랑 정신이 살아 숨쉬는 《 어질고 착한 사람들이 사는 권선1동 마을 이야기 》 책자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권선1동 주민들의 생생한 삶의 모습을 담아낸 《 어질고 착한 사람들이 사는 권선1동 마을이야기 》 가 주민들 간의 소통과 만남의 매개체가 되어 선( 善 )을 권( 勸 )하는 마을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데 큰 역할을 담당해 주시길 기원합니다. 책자 발간을 위해 애써주신 권선1동 단체원 분들과 관계 공무원, 그리고 책의 주인공인 권선1동 주민분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이 책자가 이웃에게 알찬 소식과 따스한 사랑을 전하는 희망의 메신저가 되길 바랍니다.
마을은 우리들의 가치와 문화가 함께 어우러지는 소중한 공동체입니다. 《 어질고 착한 사람들이 사는 권선1동 마을 이야기 》 가 함께 사는 동네의 다양한 이야기를 공유하고, 소중한 정보를 전달하는 창구로써 역할을 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동네 주민들이 더욱 가까워지고 연결되며
수원특례시의회 부의장 이재식
소통과 협력의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우리 동네가 더 활기찬, 함께하는 공동체로 나아가길 기대합니다. 첫 발간을 시작으로 앞으로도 마을이야기를 전해주는 소통 창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경기도의회 의원 이애형
권선1동의 어질고 착한 마을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을 담는 《 어질고 착한 사람들이 사는 권선1동 마을이야기 》 제작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책자 만들기 사업은 권선1동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해 남기고, 마을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을 전하기 위해 추진하는 사업으로 권선1 동 주민들로 구성된 추진단이 직접 자료를 수집하고 주민들을 인터뷰하여 ss 책자를 발간하게 되었다고하니 매우 뜻깊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수원특례시의회 예결특위 부위원장 김은경
차례
1 발간 및 인사
문명순, 권선1동 동장
2 우리 동네 지도
권선1동 마을 소개
김종묵 유영준/유형준 34 김재규 김미자 김이철
5 부록
마을 행사 사진 관내 정보
이상대, 권선1동 주민자치회장
3 어질고 착한 사람들이 사는 우리마을 권선1동
이고 선생과 선을 권하는 이고 축제
4 어질고 착한 권선1동 사람들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이야기
권숙희
예금자
김성귀
김정숙
김기천
권선1동 발간사
《 어질고 착한 사람들이 사는 권선1동 마을이야기 》 를 발간합니다.
권선1동은 착한 사람들의 정겨운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아파트도 많지만, 그보다 주택이 많아 이웃 간 소통이 활발합니다. 마을의 거리를 걷다보면 문이 반쯤 열린 집이 있습니다. 그 사이로 오손 도손 사는 모습이 보입니다. 서로 인사하는 모습에서 마을 주민들의 정겹고 착한 마음을 확인합니다. 가구거리, 권선시장, 수원농수산물도매시장 등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도 행복한 웃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 어질고 착한 사람들이 사는 권선1동 마을이야기 》 에 선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권선1동 마을이야기에 고려시대 한림학자였던 이고 선생님의 선을 행하며 살라는 정신을 담았습니다. 이고 선생님의 정신을 따라, 선을 권하는 마을이라고 해 권선이라 명명했습니다. 이고 선생님의 생가터도 현재 권 선1동에 있습니다. 마을 이름처럼 마을 사람들도 선하게 살려고 노력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같은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마음을 나눌 수 있습니다. 이고 선생님의
문중과도 ‘선하게 살자’는 동일한 정신을 공유하고 있기에 소통이 잘 됩니다. 함께 이고 선생님의 선함이라는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 하고 있습니다. 《 어질고 착한 사람들이 사는 권선1동 마을이야기 》 속의 이야기도 이고 선생님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 정신적인 측면을 감당하 길 소망합니다.
책을 통해 젊은 친구들도 '함께 선하게 살기' 위한 봉사활동에 참여 했으면 좋겠습니다. 코로나 이전 마을 체육회를 주관했을 때는 젊은 친구들이 여러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모든 행동에 제약을 받자, 봉사할 친구들이 많이 떠났습니다. 책을 통해 젊은 분이 더 많이 참여했으 면 하는 바람입니다.
책을 낼 수 있도록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문명순 동장님, 박경숙 팀장님, 김가린 주무관님께서 애써주셨습니다. 이외에도 주민자 치회 모든 분들과 편집위원님들께도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이상대, 권선1동 주민자치회장
동장 인사말
“어질고 착한 권선1동 사람들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기를 희망합니다.”
《 어질고 착한 사람들이 사는 권선1동 마을이야기 》 발행으로 인사를 드립니다. 2014년 ‘권선1동 마을이야기 vol. 1 고래논’을 발행한지 10년 가까이 지났습니다. 권선1동 마을이야기 두 번째 버전을 발간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권선1동은 2만 5천여 명의 인구수 대비 2~30대 청년층의 인구분포도가 38%로 높으며 1인 가구 비율 또한 58%로 타 동에 비해 높은 편입니다. 또한 최근 3년간 노인인구 증가율 20.8%, 기초생활보장 가구 수 증가율 60%로 취약계층 비율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마을입니다.
주요시설로는 수원농수산물도매시장, 가구거리, 권선종합시장, 수원 올림픽공원 등이 있지만 1970년대 토지구획정리 사업을 마쳐 시민 휴식 공간이나 여가 공간, 주차 공간 등의 확충이 필요한 지역입니다.
勸善 )’의 정신 권선1동은 주민, 행정복지센터, 봉사자들이 힘을 합쳐 ‘권선( 을 구현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이 지면을 빌려 권선의 의미와 유래를 勸善 )’은 고려말 학자 이고( ) 선생의 소개할 수 있어 기쁩니다. ‘권선(
李臯
勸善懲惡 )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후학 양성 정신과 권선징악(
권선1동 주민들은 이웃 사이의 활발한 소통을 지속하면서 서로 따스한 勸善 )’의 의미를 되새깁니다. 현 마음과 사랑을 나누는 데 힘쓰며 ‘권선( 대 사회에 이르러 이웃 간의 정이 사라지고 점점 각박해지고 있습니다. 하 지만 권선1동은 세태를 거슬러 정감 있는 마을, 어질고 착한 마을, 이 웃 간 사랑이 넘치는 마을이 되고자 오늘도 분주히 움직입니다.
먼저 돕고, 공경하고, 서로 보듬으며 마음을 나누니 권선1동은 어질고 勸善 )’의 의미를 실천 착한 사람이 함께 사는 동네가 되었습니다. ‘권선( 하고자 솔선수범한 권선1동 주민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책을 만드는데 고생하신 권선1동 마을이야기 책자 추진단, 주민자치회 위원분들, 행정복지센터의 팀장님과 주무관님, 그리고 인터뷰에 응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앞으로도 우리 마을이 ‘어질고 착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아름다운 마을 권선1동’이 되기를 바랍니다.
문명순, 권선1동 동장
➑
장교둑어린이공원
효원로
➋
권선초등학교
중앙어린이공원 Kt남수원지사
권선동우체국
수원중앙병원
경수대로
권선1동 행정복지센터
➊
장대산어린이공원
권선파출소
남부119구조대
➐
150호(무지개)
➌
세곡어린이공원
권선종합시장
권선종합상가
수원올림픽공원
수원시청역
88 상인회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
세곡초등학교
수원농수산물 도매시장
보호수 은행나무
수원가구거리
유통로 상인회
➍
용화출어린이공원
➏
효정초등학교
효정어린이공원
우리 동네 지도
동수원로
경기도 재난안전본부
➎
솔밭어린이공원
어질고 착한 사람들이 사는 우리 마을 권선1동
권선1동 마을 소개
권선1동은 경기도 수원시에 위치한 동 수원부 장주면에 속했습니다. 《화성지》 네입니다. 영통구의 매탄지구와 함께 에 권선리 또는 적사리라고 표기 했 개발된 동네이며, 현재 약 2만 5천명 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수원군 태장 의 주민이 살고 있습니다. 동쪽엔 아 면 권선리였습니다. 1949년 8월 15일 파트, 서쪽엔 주택과 빌라가 어우러 에 수원읍이 수원시가 되었을 때, 화 져 있습니다.
성군 태장면으로 편제되었다가, 1963 권선1동은 유서가 깊습니다. 원래는 년 수원시로 편입되었습니다. 1972년
에 합동 하여 곡선동 소속이 되었지
을 추구합니다.
만, 1995년에 권선동으로 분동 되었고, 2003년에 곡선동에서 권선2동으로 수원올림픽공원 분리되며, 기존의 권선동은 권선1동으 88올림픽 개최를 기념해 1987년에 조 로 개칭하였습니다.
성한 공원입니다. 약 40년 가까이 된 한림학사였던 이고 선생은 마을사람 공원으로 당시에 심었던 소나무가 크 들에게 '자신과 이웃에게 항상 선한 마 게 자라 울창한 숲길을 자랑합니다. 16 음으로 살아라'라고 일렀습니다. 그의 개의 조형물을 설치해 조각공원이라 높은 인품과 가르침은 많은 백성들을 는 별명도 있습니다. 주민들의 건강증 감화했습니다. 이고 선생이 선함을 권 진을 위한 체육시설로 배드민턴장, 족 한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권선'이라 부 구장, 테니스장이 있어 수원의 시민이 르게 된 것을 이어 받아 '권선'을 지명 자주 이용합니다. 반려동물과도 자유 으로 택했습니다. ‘어질고 착한 사람들’ 롭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놀이공간이 이 모인 마을, 권선1동은 주민들의 삶 마련되어 있어 누구나 편하게 찾는 장 의 질과 행복을 위해 지속 가능한 발전 소입니다.
수원올림픽공원
- 나무들이 올곧고 빽빽하게 있어서 걸 수원농수산물도매시장 을 때마다 숨통이 트여요. ( 50대 이**) 직판장으로 하루 9천명에 가까운 시민 - 반려동물이랑 자유롭게 뛰어 놀면서 들이 이용합니다. 도매시장이다 보니 산책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20대 시중보다 저렴한 가격에 물품을 구매 김**)
할 수 있습니다. 품목에 따라 과일, 채
넉넉해 많은 사람들이 찾습니다. 대부
분 시민들은 대게, 꽃게, 회 등 제철 수
산물을 즐기기 위해 자주 방문합니다.
- 집 근처에 있어서 도매시장을 자주 찾
같아요. (60대 이**)
-수산물, 과일, 채소 한번에 해결 가능해
서 좋아요. (30대 오**)
권선시장
시장은 정부의 지원으로 새롭게 단장
있습니다. 상인들이 오랜시간 동안 자
느낄 수 있습니다.
-갈 때마다 따듯한 정으로 맞이해 주는
보게 돼요. (40대 유**)
소, 수산 등으로 나뉩니다. 주차 시설도
는 편이에요. 개인 마트랑 비교했을 때
항상 1만 원 더 저렴하게 과일을 샀던 것
생긴지 36년 된 재래시장입니다. 권선
했습니다. 2014년에 아케이드 공사를
해 날씨와 상관없이 쾌적한 장을 볼 수
리를 지키고 있어 시장의 따듯한 정을
상인분들의 인심 때문에 장은 꼭 여기서
가구거리 경기남부 최대의 규모를 자랑합니다. 권선1동 가구거리처럼 도심 한복판에 가구로 특화된 거리는 흔히 볼 수 없습 니다. 수원의 대표 가구거리라고 불리 고 있습니다. 웬만한 대형 가구 메이커 들부터 저렴한 가구 매장까지 입점해, 소비자들의 기호와 니즈에 맞게 모든 가구가 준비되어 있다는 장점을 가졌 습니다.
수원시 가구연합회에서는 가구거리 활 용화출 어린이 공원 성화를 위해 해마다 ‘수원 가구거리 대 권선1동 주택가 사이에 용화출 어린 축제’를 열고 있습니다. 가구 경매 이 이 공원이 있습니다. 주택 사이에 위 벤트, 가구 관련 체험 프로그램, 다채 치해 접근성이 높아 주민들이 자주 로운 공연 등의 행사를 진행합니다. 가 찾습니다. 나무와 꽃들이 잘 가꿔져 구거리 홍보를 하는 자리지만, 무엇보 있어 주민들의 눈을 즐겁게 합니다. 특 다 사람과 사람 간의 화합을 볼수있히 봄이나 여름에는 꽃구경을 하러 방 습니다. 다채롭습니다.
문하는 주민들이 있을 정도로 꽃들이
지정번호 : 경기-수원-2 수 종 : 은행나무 수 령 : 570년 수 고 : 15.7m 흉고둘레 : 4.5m 지정일자 : 1982.10.15.
관리자: 수원시청
보호수 유래
잡고 있다.
보호수 은행나무, 압각수
소재지: 수원시 권선구 권선동 1134-1번지
이 은행나무는 고려시대 한림학사 이고 선생이 70세 때 집터에 심었다고 전해지며, 권선(勸善)의 뜻을 품어 보호수로서 자리
이고 선생과 선을 권하는 이고 선생 축제
이고 선생(1341~1420)은 공민왕 시절 에 문과에 급제해 한림학사를 지냈습 니다. 태조는 선생의 능력을 높이 사 조선을 건국한 후 나설 것을 요청했습 니다. 잠깐 관직에 오르기는 했지만 선 생은 고려에 대한 충의를 저버릴 수 없 었습니다. 하직한 후에 지금의 수원으 로 내려와 기거했습니다. 이고 선생은 자신의 호를 망천 이라 15.7m, 둘레는 4.5m 로 수령을 약 570
忘川
고 지었습니다. 망천은 모든 것을 잊겠 년 정도로 추정합니다. 은행잎이 오리 다는 뜻입니다. 가끔 조대 에서 낚시를 하셨다고 합니다. 이고 선생은 자신의 집터에 은행나무 습니다.
現 권선초등학교 근처
발을 닮았다고 해 압각수라는 이름이 붙었고 수원시의 보호수로 지정되었
한 그루를 심었습니다. 처음 심으신 은 권선1동에는 서당이 있었습니다. 압각 행나무는 죽었지만, 후계목이 자랐습 수 밑에 금주사라는 학식이 높은 분이 니다. 지금 권선동을 상징하는 나무 압 사셨습니다. 금주사께서는 권선동에 각수가 되었습니다. 압각수는 높이는 서당을 만들어 후학을 키우는데 노력
하셨습니다.
이고 선생과 이고 축제
의 문중께서 제사를 지냅니다. 문중께 권선1동은 ‘어질고 착한 마을 사랑나눔 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콘서트’ 마을 축제를 2018년부터 ‘선 “조선 초 고려시대 한림학사였던 이고 을 권하는 이고선생 축제’로 개최하고 선생은 조선이 건국할 때 이성계가 내 있습니다. 2023년 9월 15일에 개최되 리는 벼슬을 마다하고 수원에 정착했 는 축제는 이고 선생 생가터에 있는 압 다. 그는 모든 업무를 마다하고 마을 각수에서 고유제를 지냅니다. 주민들 사람들에게 선함을 권했다고 해서 '권 은 플리마켓도 엽니다. 사용했지만 깨 선동'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이곳 보호 끗한 책과 옷을 가져와 나눔을 합니다. 수로 지정된 은행나무가 있는 곳이 이 이외에도 노래 자랑, 경품 추첨, 먹거 고 선생 집터라고 한다. 은행나무가 지 리 장터, 다양한 체험활동도 할 수 있 금까지 잘 자라는 이유는 아마도 이고 습니다. 행사에서 가장 중요한 고유제는 풍물 닐까 생각한다. 단의 행진으로 시작합니다. 풍물단이
하는 이고선생을 아세요?’)
선생이 보살펴주고 계시기 때문이 아
(김윤지, e수원뉴스, ‘우리 동네 선을 권
” 고유제 시작 전부터 권선1동 일대를 돌 이고 선생은 여전히 권선1동의 상징입 아다니며 고유제를 알립니다. 풍물패 니다. 뿐만 아니라 수원의 정신을 대변 의 소리를 듣고 골목으로 사람들이 몰 합니다. 주민 모두 ‘선을 행하라.’는 이 려나오면, 압각수 밑에서 이고 선생님 고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릅니다.
어질고 착한 권선1동 사람들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이야기
부동산 중개업을 하다가 주변의 소개로 가구 판매자가 되었다. 권선1동에 거주한 지 약 40년 되었고, 10년 째 2대 가구 거리 회장을 맡고 있다.
가구거리에 자리잡기
‘나랑 직업이 안 맞나?’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동안 고민을 했습니다. 알고 지내던 가구 사업하는 분들께서 조언해주셨 습니다. "가구를 팔아보는 게 어때?" 조언을 듣고 가구쟁이 로 업을 바꿨습니다. 가구거리 초대 회장이셨던 복진덕 회장님이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저보다 한 20년은 더 가구 장사를 하신 분이세요. 남문 가구 시장에서 일하시다 권선1 동으로 넘어오셨지요. 회장님과 가구 거리에 사람들을 모으 려고 노력했죠. 회장님께서 저에게 가구인들을 소개해 주시 면, 저는 권선1동으로 유치했습니다. 그때 권선1동은 막
새로운 도시로 개발되는 중이었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니 가구거리 창업주 모임이라고 칭해도 괜찮을 것 같네요.
가구연합회 2대 가구 장사가 제일 신경 쓰이죠. 매출을 높이기 위해 여러 회장의 고민
교류 그리고 봉사 김장봉사
드려요.
행사를 합니다. 그 중 하나가 ‘수원 가구거리 대축제’예요. 시의 도움을 받아서 1년에 두 번씩 축제를 진행합니다. 축제 의 가장 큰 묘미는 ‘자선경매장’인데요. 점포마다 가구를 하나씩 가져와 경매를 벌여요. 100만 원 정도 되는 가구를 경매에 부칩니다. 1만 원부터 시작하면 대부분 10만 원 정도에 팔아요. 모은 경매금은 주변 불우이웃이나 장학금으 로 해마다 기증하고 있어요. 수원시 어린이 단체, 어린이집 연합회 장학금 등으로 주로 기증했어요.
해마다 11월이면 주민들과 김장을 해요. 김장철이잖아요. 다 함께 모여 김장하고 동네의 어려운 분들께 직접 가져다
김장할 때도 뿌듯하지만 배달갈 때 특히 뿌듯합니다. 김치 를 받을 때 주민들의 표정이나 상기된 목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뭉클해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뭐 이런 걸 다 … .”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울립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미소는 거울같아 서, 그분의 웃음이 제 얼굴에 비칩니다. 그러면 저도 더
환하게 웃게 됩니다. 남을 위해서 봉사했지만, 결국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었어요.
노인 병원 제가 방위협의회 활동도 하는데, 1년에 한 번씩 노인 병원에 방문해요. 노인분들을 위한 음식도 만들고, 노래도 불러 드려요. 작은 행동입니다. 뭐 대단한 일인가 합니다. 하지만 이 작은 행동으로 누군가가 함박웃음을 짓는다면 또 이야 기가 달라지겠죠. 미미한 움직임에서 나오는 거대한 보람은 그 어떤 것과도 감히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억에 남는 사람 가구거리 경관 조성을 도와주신 김은주 팀장 이 기억납니다. 밤에 가구거리에 와 보셨나요? 2m 이상 되 는 나무들 밑에 달린 커다란 호박등에 불이 들어옵니다. 호박등에서 떨어지는 빛 덕분에 가구거리의 낮과 밤의 풍경 은 아주 다릅니다 김은주 팀장님께서 이런 거 하나하나 손 봐주셨습니다. 분명 본인도 하실 일이 많았을텐데 말이죠. 팀장님 덕분에 저희 가구거리가 아름다워졌습니다. 자진해 서 도와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권선1동의 화합을 위해 저도 솔선수범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現 수원시자치분권 과장
앞으로의 포부 가구인들을 위해 10년, 동네 주민들을 위해서도 봉사하며 꾸준히 노력해 왔습니다. 이젠 이 동네에서 절 모르는 사람 이 별로 없을 거예요. 단체모임에서도, 자치위원장이나 행
사를 진행하는 분들도 저를 다 알아보죠. 권선1동의 보안관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제가 동네에 애정을 많이 쏟고 있어요. 앞으로도 계속 쏟고 싶고요. 저도 동네를 위해 열심히 살고 있지만, 저보다 더 동네를 사랑하고 아끼는 분들이 많 은 것 같아요. ‘참 복 받은 동네다.’라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이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주민들이 함께 모이고 마음을 공유할 수 있는 자리가 많았으면 좋겠어요. 옛날엔 아파트 주민들의 화합을 위해 반상회 같은 걸 열곤 했잖아요? 요즘 엔 잘 안 하는 분위기더라고요. 전 이런 모임들도 활발해야 생각해요. 참여율을 더 높이기 위해선 꾸준히 노출 시키고, 자리를 만들면 어떨까요? 아마 더 화목하고 화기애애한 권선1동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대건설기계부품’ 대표.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끈끈한 정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함께 모여 소통하자는 마음에 회사 건물을 ‘사랑방’처럼 만들어 마을과 소통한다.
사업을 어떻게 군생활 때 알고 지내던 중대장님의 추천서로 군포에 있는 일궜는지 ‘현대양행’에 들어갔어요. 프랑스에서 넘어 온 포크레인을 조립했습니다. 공장이 군포에서 창원으로 내려가게 되면서, 사우디로 파견도 나갔어요. 그때 리비아, 파푸아뉴기니, 이란 등에게 우리나라 장비 영업을 엄청 했죠. 어느정도 성과도 가져왔고요. 어느 날, 현대양행이 한전으로 넘어가고, 또 삼성중공업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때 수원 지점장을 맡고 있 었는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하나.’ 저는 학벌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고, 학벌 좋은 후배들은 계속 올라오고 있었거든요. 고민하다 차린 게 정비 공장입니다. 유형준 형님의 차고를 빌려 시작했죠. 한 15년 뒤였나, 현대중공업에서 후발대로 포크레인을 만들겠다는 거예요. 그때 현대중공업과 손을 잡고 우리나라에서 열 번째로 대리점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포크레인이 흔하지만, 당시엔 다들 신기하게 쳐다봤
화목함이란
어요. 이게 무슨 차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고, 이게 얼마나 귀한거냐면서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들에게 물려주었어요. 취미 생활하면서 전보다 여유롭게 하루를 즐기며 살고 있습니다. 가끔 동네에서 도와달라고 요청하면 도와드리고, 봉사하면서요.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시나요? 무슨 일이 있어야 안부를 묻는 것이 아닌, 아무 일 없어도 전화로 ‘잘 지내냐.’ 한 마디 건네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 통의 전화로 듣는 사람의 하루가 달라지거든요. 저는 실제로 회사 건물을 ‘사랑방’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위층에는 직원들이 퇴근 후에 놀고 먹고 할 수 있는 방을
서 실제로 키우고 있습니다.
마련했어요. 실제로 다같이 술도 마 시고, 노래도 부르고, 간혹 회의도 해요. 막차가 끊길 때를 대비해 숙직 실도 따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옥상 엔 동그란 테이블이 있어요. 날이 좋 으면 옥상에서 다같이 모여 수다도 떨고, 밥도 먹죠. 제가 동물과 식물 키우는 것도 무척 좋아해서 옥상에
모든 공간을 다 개방해 두는 편이에 요. 애초에 직원들이 계급 생각하지
않고 편하게 회사 다녔으면 하는 마음으로 만들었으니까요. 계급장이 있으면 아무리 관계가 편해져도 한계가 있더라고 요. 이 공간들로 인해 직원과 대표 사이, 또는 주민과 주민 사이가 더 두터워졌으면 해요.
교육, 봉사활동을 어렸을 때부터 봉사를 했어요. 당시엔 잘 못 느꼈는데 지금 많이 하는 이유 생각해 보면 참 자랑스러워요. 전 뭐 대단한 걸 한 건 아니 어도,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일에 의미를 둬요. 힘도 많이 들고, 고생도 했지만 후회는 절대 안 해요. 요즘 엔 보여주기 위해서 봉사하시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그런
걸 보면 안타까워요. 물론 그들의 봉사가 결코 나쁘다고 말 할 순 없지만, 진심으로 봉사하는 분들의 모습이 행여나 가려질까봐 가끔 걱정돼요.
기억에 남는 주민 이광재 주민이 기억나요. 노인의 날이었을 거예요. 이 분이
정다운 동네 만들기
민속촌 입장권을 몇 십 장 구매하신 거예요. 한두 장도 아니고 몇 십 장씩 구매해서 어려운 분들께 드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오로지 돕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바로 실행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아요. 얼마 전에는 경기도 효부상도 받으 셨어요. 중심도 잘 잡으시는 우직한 분이셔서 제가 많이 존경 해요. 지금까지도 만남을 이어가고 있고요. 유형준 형님도 기억에 남죠. 번영회 회장을 맡고 계시는데, 하루는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았다고 근처 매운탕집으로 동네 사람들을 불렀어요. 누구는 고기를, 누구는 소주를, 누구는 막걸리를 가져오죠. 같이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며 시간을 보내요. 유형준 형님이 동네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자리 를 자주 만드셨어요. 소통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자리를 주도해서 만드는 것. 이것도 진정한 봉사라고 생각해요.
근방에 있는 사람들을 죄다 모아서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옥상에서 닭도 먹고 맥주도 한 잔 해요. 옛날에 있던 일이나 요즘 사는 이야기 하면서 술잔을 기울여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가까운 사이가 되죠. 서로의 집도 놀러가고, 동네
이야기도 서슴없이 주고 받아요. 어느 집 자식이 결혼한다고 하면 각자 집에 있는 쌀을 가져다 주기도 해요. 여름 장마철 에는 미꾸라지나 송사리도 잡아서 다 함께 매운탕을 끓여 먹기도 합니다. 고추나 파를 수확하면 주변에 나누어도 주 고요. 작은 것일지라도 나누어 주고 도와주려는 마음이 전 부 깔려 있어요. 이웃 주민끼리 정이 쌓여 친구가 되는 건 시간 문제라는 걸 이때 느꼈습니다.
마음 나누는 방법 보여주려는 행동보다 숨어서 하는 선행이 필요한 것 같아 요. 조금만 더 살펴보고 이야기해 보잖아요? 주변에 생각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고 선생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공부도 가르쳐주셨잖아요. 저는 선생의 정신을 이어 받아야한다고 생각해요. 이 정신만 있으면 정다운 동네를 유지할 수 있는 건 물론이고, 관계도 더 소중 해지고 끈끈해 질 거라 생각합니다.
3년 동안 상인 회장을 하며 권선시장을 홍보했다. 약 10년 째 권선 시장에서 아내와 함께 ‘두부 사랑’을 운영 중이다.
‘두부 사랑’의 장사를 하기 전에 신문사에서 일했어요. 후에 《어린이 교육 탄생
상인 회장을 역임했을 때
신문》도 발행했습니다. 아이들이 체험학습 한 것을 바탕으로 글을 작성했죠. 코로나가 시작된 뒤로는 체험학습을 계속 할 수 없었어요. 결국 《어린이 교육 신문》까지 발행을 중단 했어요. 아내와 함께 600평 크기의 대형 뷔페를 운영한 적 도 있었는데, 모두 처분한 뒤 ‘두부 사랑’을 열었죠.
시장 개발에 힘을 썼어요. 지원을 받아 건물을 고치고, 시장 을 알릴 수 있는 행사도 진행했습니다. 권선시장은 족발이 유명하거든요. 족발을 통해 권선시장을 알려야겠다고 생각 했어요. 그렇게 진행한 게 ‘족발 가요제’예요. 3회나 진행 했습니다. 당시에 엄청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주셨어요. 동네 주민 외에도 타 지 분들에게까지 족발 과 권선시장을 알릴 수 있었죠. 《 새벽을 여는 사람들 》 이라는 제목으로 홍보 용 책자를 만들어 보 기도 했어요. 가게마 다 특색있는 상품들을 전시하고 촬영했어요. 사진을 책자에 전부
상인 회장을 그만둘 때
담아서 전시도 했습니다.
3년 동안 최선을 다해 아쉽다기보단 후련했어요. 제가 상 인 회장을 했을 때 불평불만을 가지고 있던 상인들은 없었 을 거라 생각해요. 상인 회장을 하려면 시간과 여유가 어 느 정도 있어야 해요. 책임감 있게 행동하고 움직여야 하잖 아요. 그러기 위해선 시간, 노력, 체력이 남들보다 배로 필요 하죠. 저 또한 3년 동안 시장 개발에 시간, 노력, 체력을 많 이 투자했어요. 아마 22개 전통시장 상인회장들은 전부 같 은 생각으로 임할 거예요.
사장님의 하루 아이들의 ‘두부 만들기’ 체험을 돕고 있어요. 오늘 같은 경우엔 새벽 2시에 시장으로 출근했습니다. 앞서 말한 아이 들의 체험을 위한 학습용 두부와 시장 판매용 두부를 같이
만들어요. 다 만들면 아내와 바톤터치를 합니다. 아내가 판매를 하는 동안 저는 집에서 잠시 쉬죠. 그리고 오후 서 너시 쯤 다시 시장으로 출근합니다. 미리 만들어야 할 것 들을 체크하고 준비해야 하거든요. 재료 준비가 필요한 날 엔 오늘처럼 일찍 나오고, 별로 없는 날엔 평소보다 늦게 출근 해요. 출근 시간이 그때그때마다 달라집니다. 명절 시즌에는 좀 바빠요. 1년 중 가장 큰 매출을 찍는 때 거든요. 이때는 출근, 퇴근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3일 동안 밤을 샌다고 생각하면 돼요. 코로나 때든 아니든 손님 들이 엄청 많거든요.
아내에게 전하고 두 딸 모두 근처에 살아요. 두 딸이 근처에 ‘두부 사랑’ 아이 싶은 말
파크점을 오픈했어요. 딸도 일 하다 보면 아이 볼 시간이 없으니, 가끔 제가 봐주기도 합니다. 두부 만들고, 손자 봐주 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요. 지금은 평안한 동네에서 아내 와 하루하루 함께 지낼 수 있다는 사실에 고마워요. 나이 먹고 재밌게 살면 또 얼마나 재밌게 살겠습니까. 함께 살아 주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합니다.
2002년에 권선1동으로 이사 왔다. 현재 9년 차 28통 통장을 맡 고 있다. 매일 동네를 돌며 주민과 소통하고, 동네에 필요한 부 분들을 살펴본다.
봉사를 시작하며
남편이 수원으로 발령나면서 이사를 왔어요. 충분한 계획 후에 진행한 이사가 아니어서 모든 게 어색했어요. 초반엔 동네에서 따로 떨어져 사는 기분이었어요. 아파트 생활만 하다가 권선1동에서 주택 생활을 처음 했어 요. 지금 생각해보면 주택의 장점이 꽤 많았던 것 같아요. 일단 많은 이웃과 소통을 할 수 있었어요. 아파트는 보통 문 을 닫고 있잖아요. 살던 곳이 복도식 아파트여서 문을 열고 싶어도 못 열었어요. 복도에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는 게 신경 쓰였거든요. 근데 주택에 살면 현관문을 활짝 열어도 신경쓸 게 하나도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자연스럽게 서로의 얼굴을 익히고, “안녕하세요.” 한번더할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요. 이런 점에서 주택이 주 는 정겨움이 대단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이사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사무소에 갔을 때였어요. 탁 구 치는 사람들 사이로 새마을 부녀회가 보였습니다. 반찬 도 만들고, 주방 일도 하며 봉사를 하고 계셨어요. 아무래도 아이들을 돌보고 어머니를 모시면서 봉사를 하는 게 쉽진 않았어요. 셋 다 하기엔 시간이 마냥 여유롭진 않거 든요. 봉사를 하고 싶다고 원래 해야 하는 일들을 소홀히 하면 안 되잖아요. 엄청 부지런히 움직였어요. 경로잔치나 김장처럼 바쁘고 큰 행사가 있을 때에는 아이들과 어머니께 미리 일정을 공유했어요. 평소보다 몇 시간 더 일찍 일어나
통장의 하루 일과
기도 하면서 균형을 맞췄습니다.
시간, 요일 상관없이 수시로 동네를 돌아다녀요. 보수해야 할 곳이 있는지 살펴봐야 하거든요. 건물, 가로등, 놀이터 등 꼼꼼하게 살펴보고, 만나는 주민들과 소통도 해요. 오늘도 오전에 동네 한 바퀴 돌고 왔어요. 아무래도 주민들은 동네 관련 일에 대해서는 통장을 믿고 기다리잖아요. 그 마음에 보답하려면 책임감을 가지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통장을 하면서 통장을 다시 뽑을 시기가 되면 플래카드를 크게 걸어요. 기억에 남았던 일 동네 어르신들이 플래카드를 보더니 저에게 물어보더라고
통장하면서 힘들었던 적
요. “우리 통장님, 그만 두시는 거예요?”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건가요?” “왜 통장을 그만 둬.” 어르신께 다른 분들 에게도 기회를 주는 거라고 말씀 드렸더니, 손사래를 치는 거예요. “자네가 통장을 해야지.” 라면서요. 그 순간 만감이 교차했어 요. 동네를 위해서 열심히 일했던 걸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어 감사했거든요.
우리 동네에 유치원이 생겼을 때였어요. 유치원이 생기면 주변에 스쿨존을 만드는 게 법이잖아요. 여기서 문제가 생겼 죠. 스쿨존을 만드니 주변 주택 주민들의 주차 공간이 눈에 띄게 부족해졌어요. 주민들의 마음도 이해는 가지만, 스쿨존 을 만들어야 하는 건 법으로 지정되어 있잖아요. 양쪽 입장 전부 이해가 가는 상황이라 저도 난감했어요. 하필 스트레스 도 며칠 동안 지속돼서 몸이 많이 아팠거든요.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여유가 없었어요. 통장을 그만 두어야 하나, 고민까지 했어요. 그때 남편이 이런 말을 해 주었어요.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 앞서서 그런거야. 그만 둘 생각 보다는 잠시 쉬면서 마음을 여유롭게 잡아보는 건 어떨까?” 당시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지 조차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로 지쳐있을 때였어요. 남편이 이 말을 해줬을 때 무거 웠던 감정들이 싹 내려간 기분이었습니다. 아직도 그때 격려 해준 남편이 고마워요.
계속 봉사를 하는 봉사를 하다 보면 좋은 기억과 사람들도 많이 만날 수 있어요. 이유 반찬 배달 봉사를 할 때였어요. 제가 배달하러 간 분은 시각 장애를 가지고 계셨던 남성분이셨어요. 그 분이 처음엔 “감 사합니다. 잘 먹을 거예요.” 라고 한 마디 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는 저의 목소리만 듣고 알아보시는 거예요. 반기는 목소리로 제가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려 인사해 주세요. 반찬뿐만 아니라 행복까지 전달하는 기분이예요. 권선1동엔 다문화 가정이 꽤 있어요. 이 분들에게도 반찬 배달을 가면 엄청 고마워하세요. 이 분들과 함께 김장을 한 적도 있거든요? 혼자가 아닌 여럿이 함께 하는 분위기 속에 서 오는 기쁨이 묵직하게 느껴졌어요.
가족들의 자랑 남편은 아이들에게 제가 하는 봉사에 대해 ‘자랑스럽고 멋있는 행동’ 이라고 말해줬대요. 엄마가 봉사를 함으로써 누군가는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요. 아이들이 어렸을 땐 ‘봉사’에 대한 개념을 잘 모르잖아요. 저희 내외가 봉사를 꾸준히 보여주어서 그럴까요? 아이들 머릿속에 ‘봉사하는 마음’과 ‘겸손한 마음’이 어느 정도 베이스로 깔려 있어요. 아이들이 MT, 캠프, 학교 등 단체생활을 하고 와서 대화를 나눌 때 확연하게 느껴요. 아이들 사이에서 솔선수범한 모 습을 보였다든가, 주저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먼저 손을 내 민다든가, 앞장 서서 주변을 돕는다든가 등에서요.
1989년에 권선1동으로 이사 왔다. 서울에서 13개의 점포를 운영 하다가, 현재는 다 정리하고 권선1동에서 금은방을 하고 있다. 약 35년 째 금은방을 운영 중이다.
권선1동 주민의 제가 권선1동에 1980년대에 이사 왔어요. 솔직하게 주변 따듯한 정 사람들과 어색한 게 있었어요. 저희가 서울 사람들이고, 곧 떠날 것이라 생각하셨을 수도 있죠. 아내와 저는 혹여나 주변에서 어떤 따가운 소리가 들려와도 기본을 잃지 말자고 다짐했어요. 성실한 자세로 장사에 임하는 모습을 계속 보여 준다면 언젠가 우리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겠냐고요. 신기 하게도 그런 모습을 먼저 보이니 그분들이 나중엔 오히려 저희를 챙겨주더라고요. 집에서 뭐 만들면 먹어보라고 갖다 주고, 밭에서 캔 고구마나 감자도 바구니에 담아 주고, 마치 아들, 딸처럼 챙겨주는 것 같았습니다.
정착하실 때 크게 누군가에게 경제적으로, 물질적으로 도움을 받았다고 할 건 도와주신 분 없었습니다. 주민들 모두 지나가다가 저희 가게 한번 들려 주고, 물건 몇 개 팔아주고 그러셨죠. 장사하는 사람 입장으 로는 동네 주민들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장사라는 게 문 만 열어놓는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누군가 방문 을 하고, 구매를 해야 되잖아요. 동네 장사는 특히나 자주 마주치는 주민분들과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방문 하고 구매해주시는 거 자체에 그저 감사드리죠.
기억 남는 활동 자랑은 아니지만, 최근에 파출소에서 경찰 한 분이 찾아왔 어요. 저에게 은팔찌 20개 정도가 필요하다고 하는 거예요. 연세 많은 분들 중 노인성 치매에 걸리신 분들을 위한 것이
라고 하더군요. 자신의 집을 찾지 못해 파출소로 종종 찾아 오는 분들을 보고 직원들끼리 돈을 조금씩 모아 팔찌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대요. 당시 합해서 80만 원 정도 했던 것 같은데, 적은 돈이 아니잖아요. 그때 노인성 치매를 가지고 계신 할머니가 떠올랐어요. 제가 봉사할 때 종종 찾아뵙던 분이셨거든요. 저에게 한땀 한땀 실로 엮어 만든 바구니를 선물로 해주시기도 했어요. 우연히 동네에서 마주쳐서 반갑게 인사를 드렸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아예 못 알아 보시더라고요. 그게 생각나기 도 하고, 경찰과 직원들의 마음이 너무 따듯해서 보고만 있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경찰분께 기부하겠다고 말하면서 팔 찌를 그냥 만들어 드렸어요. 괜시리 뿌듯하기도 했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분 이름, 나이, 주소 등 정보 하나 없는데 생각나는 친구가 있습니다. 귀금속 장사를 하다 보면 연말이나 명절, 추석 이럴 때 의경이 두 명씩 짝지어 순찰을 돌아요. 하루는 그 분들에게 날도 추운데 들어와서 커피 한 잔 하라고 몇 번 말했어요.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고 의경 친구 한 명이 사복을 입고 저희 가게에 들 어온 거예요. 처음엔 못 알아봤는데, 그
친구가 그러더군요. “선생님, 저 기억 나시나요? 얼마 전에 제대했습니다.”
화목한
순찰할 때 중간중간 타주던 커피가 생각나 들렸다고 하는 거예요. 솔직히 저희가 대단한 걸 해준 게 아닌데, 그 친구의 가슴에 남았나봐요.
이미 모두가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위치
권선1동을 위해 에서 할 수 있는 선까지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다. 그래도 작은 소견을 덧붙이자면, 양지에 있는 사람보다 음지에 계신 사람이나 공간에 더 신경 쓰면 좋을 것 같아요. 생각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아요. 우리가 먼저 이 분들을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고 있다.
청년들을 돕는 쉐어 하우스에서 봉사를 하고 있다. 사회에 첫 발 을 딛는 청년들이 정착을 잘 할 수 있도록 엄마의 마음으로 돕
청년 쉐어하우스 작년 가을, 수원시에 자립을 준비하는 청년들을 위한 쉐어 하우스가 생겼어요. 돈 모으기도 쉽지 않은데 독립하는 건 더 어렵잖아요. 특히 보육원에서 자란 청년들에겐 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청년들이 사회에서 잘 걸어나갈 수 있도록 2년 동안 머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주고 있어요. 저는 한 달에 한 번씩 마지막 주 토요일에 쉐어하우스로 반찬을 만들어 배달하는 봉사를 하고 있어요. 청년들에게 필요한 식재료, 생필품 등을 가져다 주기도 합니다.
청년들을 도와준 서로 잘 모르는 사람들끼리 한 집에서 살려니까 아무래도 어 방법 색하죠. 처음엔 전화했을 때 잘 받지도 않았고, 묻는 질문에 대답도 두리뭉실하게 했어요. 자식 키우는 엄마 입장에서 보았을 때 다 올바르고 건강하게 자랐으면 좋겠거든요. 사회에 대한 정보나 지식도 이것저것 알려주고 싶었어요. 교회나 권선시장도 데리고 가는 등 계속 소통하려고 했죠. 이 이야기를 제 아들한테 했는데, 너무 강요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사회적응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문이 열려야 소 통이든 적응이든 즐겁게 할 수 있다고요. 생각해 보니까 맞 는 말이었죠. 친하지도 않은데 누군가가 자꾸 말 걸면 기분 이 그닥 좋지 않죠. 그 뒤로 소통하는 법을 살짝 바꿨습니다. “이거 해 보자.” 보단 “어떤 게 필요해?”로요. 하루는 쉐어 하우스에 거주하는 학생 한 명에게 “장 볼 때 사려고 하는데 필요한 게 있을까? 사갈께.” 라고 물어봤어요. 저의 물음에 학
생은 낯가리지 않고 오히려 이것저것 말하더라고요? 그 과정 에서 서로의 취향이나 생각도 알게 되면서 전보다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제는 제가 쌀을 건네주면서 “집에서 딴 상추 가져갈래?” 라고 했는데, 너무 좋다고 했어요.
내가 생각하는 부녀회 회원들의 나이대가 꽤 있는 편이에요. 젊은 분들이 봉사란
거의 없거든요. 가끔 회원들끼리 젊은 사람 뽑고 싶다는 이 야기도 합니다. 하지만 젊은 분들이 지원 자체를 많이 안 해 서 뽑고 싶어도 마음처럼 쉽지 않아요. 30대, 40대 분들도 대부분 가정 때문에 시간을 못 내는 경우도 많더라고요. 봉사를 하고 났을 때 느끼는 뿌듯함은 겪어봐야 아는 건데
가끔 아쉽긴 해요. 제가 봉사를 한다고 했을 때 엄청 대단한 걸 하진 않거든요. 보통 음식 관련 봉사를 하는데, 그렇다고 음식을 잘 만드는 것도 아니에요. 보통 재료를 다듬고 씻는다거나, 배식을 도 와주는 걸 많이 합니다. 생각해 보면 대단한 걸 하는 게 아니잖아요? 이 작은 봉사가 저를 뿌듯하게 해 주는 걸 넘어서 아이 교육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아이가 봉사하는 제 모습을 맨날 보면서 자라니까 가치관, 성격, 행동 등이 다 바르고 올곧아지는 게 보여요. 봉사하면서 느낀 다양한 경험들을 토대로 아이들에 게해줄수 있는 말들도 많아졌어요.
주민참여 예금자 인터뷰
권선경로당 회장
경로당은 저마다의 굴곡진 아름다움들이 모인 인생 의 집합소로 특출나지 않아도 가슴 한편을 따뜻하게 만드는 이야기들로 가득한 공간이다. 다가족에서 핵가족까지 변화를 겪으신 어른들의 생활 모습이 아 름답기도, 안쓰럽기도 했다.
- 주민참여단 조정옥
권선경로당에 어릴 적 화성시에서 바지락을 잡으며 자랐어요. 간척사업으 오시게 된 계기 로 바지락을 못 잡게 되면서 형편이 어려워졌죠. 수원으로 내려와 살면서 ‘남의 집 청소라도 할까.’ 하며 고민하고 있었고, 친정에선 저의 고민에 극구 반대했죠. 그래서 시청에 전화 를 했어요. 노인들을 위한 쉼터나 복지관이 없는지 물어 봤습니다. 시청에서 친절하게 복지관을 소개시켜주더라고요. 거기서 운동하며 시간을 보냈어요. 하루는 공원을 돌고 있었는데, 주변 할머니들이 그러더라고요. 근처에 경로당이 생긴다고요. 그러면서 저에게 회장을 해 보라고 추천했어요. 주변 주민들도 해 보라며 권유했어요. 그렇게 경로당 회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회원이 없으니 찾아가서 신청을 받기 시작했고, 회원들을 유치하며 노인정을 관리했죠
경로당 운영할 때 나라에서 처음엔 식기를 20세트 지원해 주셨는데, 인원이 힘들었던 기억 점점 많아지면서 수량이 부족해지더라고요. 리어카를 빌려서 부족한 걸 채우기 시작했어요. 제가 여자 회장이다 보니 무거운 짐 같은 건 번쩍 들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지나가는 분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게 힘들었어요.
경로당 운영할 때 집에 혼자 있으면 심심해요. 양로원에선 여러 사람들이랑 좋았던 점 이야기하며 웃을 수 있어서 좋아요. 주방에서 나물 다듬
다가도 한 번 빵 터져서 웃음을 나눌 때도 있어요. 마치 놀이터에 온 것 같기도 해요. 그리고 권선경로당은 시설도 깔끔하고 좋아요. 에어컨 같은 제품들도 잘 되어 있어요. 편안하게 쉬고 놀고 지낼 수 있죠. 서로 웃고 떠들며 행복을 나누는 건 참 좋지만, 요즘 병원에 입원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 거 보면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나도 얼마 안 남았구나.’하는 생각에 서글퍼지기도 해요. 하지만 이런 고민과 걱정도 여러 사람들과 나눌 수 있잖아요. 서로 공감도 해 주고, 격려도 해 줍니다. 아마 혼자였다면 더 외롭고 슬펐을 거예요.
6년차 회장의 경로당 회장을 맡은 지 벌써 6년이 되었어요. 회원들과 마음
오래오래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커서, 항상 제 능력과 건강이 언제까지 버텨줄지 걱정될 때가 있어요. 좋은 기억 과 추억을 남기기 위해서 노력해야죠. 행정복지센터와 구청 에서 가끔 출장을 나오세요. 치매 예방도 도와주고, 맷돌체조 도 함께 해 주셔서 틈틈이 참여합니다. 저의 건강을 유지하는 습관 중 하나라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경로당에 누가 오든 무조건 환영입니다. 따숩게 받아주고 싶어요. 행복한 하루를 만끽하셨으면 좋겠거든요. 다만 단란한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 다툼은 자제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손가락질하는 쎄한 분위기보다 서로 즐거 움을 나누는 분위기가 아무래도 더 좋잖아요.
경로당 바로 앞에 행정복지센터가 있어요. 만약 도움이 필요하거나, 궁금한 게 생기면 바로 행정복지센터로 쪼르르 뛰어가요. 행정복지센터 직원들은 전부 친절하세요. 별거 아닌 질문에도 늘 성심성의껏 답 해주고 알려주세요. 어쩌 면 이렇게 따듯한 분들이 주변에 계셔서 총무 없이 6년 동안 회장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우리 경로당 오시는 노인분들이 건강하고 젊어졌으면 합니다.
주민참여 김성귀 인터뷰
수원농수산물도매시장 채소중도매인
여태까지는 책속에서만 다른사람의 인생을 대신 느껴보는 경험을 했었는데, 실제로 어떤 이의 삶과 이야기를 쭉 들어보니 배울 점도 많고 많이 다른 생활에 새로움도 느꼈습니다. 인터뷰도 해보고 정말 진귀한 경험이었습니다.
- 주민참여단 김소희
권선동 하면 떠오르는게 뭐가 있을까? 내 기억 한편에 언제나 활기차게 돌아가는 농수산물 시장이 있다. 오늘은 수원농수산물도매시장에서 꾸준히 활동해오신 ‘김성귀’님의 선한 이야기를 알려보고자 한다.
먼저 인터뷰를 위해 찾은 약속 장소인 카페에서 김성귀님을 만났다. 이미 다른 곳에서도 인터뷰를 몇 차례 하신터라 그런지, 어떻게 이번 인터뷰를 이끌어갈까 고민하던 나보다 훨씬 여유롭고 위트 넘치는 인터뷰를 진행해주셨다.
만나서 차를 한잔 하면서 일상 이야기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든 다음 본격적인 인터뷰를 시작했다. 질문을 몇가지 만들어 갔었는데,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이야 기에 스르르 녹아들어, 그분의 근면성실함과 또 일하는 환경을 개선하려는 열정 적인 모습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29년 전, 몇 번의 개인 사업 실패 후 아버지가 4-50년 정도 해오신 채소 도매업을 배우면서 가업으로 물려받았다. 권선동으로 이사와 서 장사를 시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농수산물 채소 도매업을 시작하면서 경매를 진행하는 이야기. 그리고 하루 취침시간이 약 4-6시간정도 된다는 이야기.
수원농수산물도매시장에서 일하다보면 주로 밤 11시에 출근, 3-4시에 새벽경매, 5-6시 아침손님을 맞아 판매를 하고 퇴근하게되면 아침 8-9시 정도. 잠을 쪼개서 자면서도 2~3시에는 빠짐없이 운동을 하신다. 그것도 29년째. 남들과 다른 고된 생활을 29년이나 이어오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운동도 쉬지않고 하셨다.
이제는 의사도 운동을 줄이라고 할 정도. 인터뷰를 위해 내주신 시간이 정말 감사하다 느껴졌다. 젊은이인 내가 본받을 점이 많은 근면성실한 어른을 뵌 경험 이었다.
남들보다 적게 주무시며 일을 하시면서도, 권선동의 발전에 늘 관심이 많고 꾸준한 활동으로 시장상을 두 번이나 수상하는가 하면, 주변 지역사회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계시는 김성귀님. 수원농수산물도매시장이 조금 더 발전해서 모든 소비자와 농민들의 이익이 커지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계시다는 선한 마음과 열정을 많이 본받고 싶었다.
수원농수산물도매시장 수원시 권선구 세권로 243
주민참여 김정숙 인터뷰
동서부동산중개사무소
이번 인터뷰를 하면서 개발 전 권선동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어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께 감사드리며, 권선동의 지킴이로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 주민참여단 염영선
5월, 맑은 어느 날 권선동 터줏대감 70대 부부가 오랜 시간 운영해 온 동서부동산 중개사무소를 찾아갔다. 38년 동안 같은 장소에서 묵묵히 일해주신 두 분의 이야 기를 듣고 싶었다. 다행히 흔쾌히 응해주셔서 지나온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부부는 38년 전 과천에서 수원 권선동으로 이사오게 되었다. 그 당시 권선동의 모습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그때는 지금의 농수산물시장이 포도밭이었고 가구거리는 이차선 비포장도로 였어요. 생활기반시설이 없어서 애 많이 먹었어요. 시내 나가는 교통도 불편했어 요. 부동산중개사무소도 이곳 하나 밖에 없어서 거의 저희 부동산중개사무소에 서 계약을 하곤 했어요. 제 동생 내외도 이곳으로 와서 지물포도 운영하구요.” 부부는 당시에는 통신도 불편하여 계약하고자 연락하려면 500미터 정도 나가서 전화로 연락하곤 했고, 지금과는 달리 컴퓨터로 정보를 얻지 않고 직접 발로 뛰는 영업을 했다. 지금은 교통도 편리해지고 생활기반시설도 자리잡힌 권선동에 단골 손님들도 많이 생겨 오랜시간 권선동의 같은 자리에서 부동산중개사무소를 운영 해오고 있다.
38년 동안 부동산중개사무소를 운영해오며 부부에게 생생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부동산중개업을 하다 보면 진짜 생활이 어려운 분들도 있어요. 한번은 어떤 엄 마가 서울에서 이사오는데, 이삿날 애들 둘을 데리고 온 거예요. 원래는 애들이 없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해서 애들을 안 데리고 오려고 그랬는데 이삿날 애들이 엄마와 떨어지지 않겠다고 했나봐요. 엄마 따라간다고 그래가지고 도저히 안
데리고 올 수가 없었대요. 주인하고 같이 쓰는 방인데. 옛날 그 당시에 원룸이 없으니까 주인이 불을 떼줘야 난방이 되는 거예요. 보일러가 분리가 안 돼 있으 니까….” “이삿짐이 도착하니 주인이 사무실로 쫓아왔어요. 애들도 없고 혼자 산다더니 저 조그마한 방에 애 둘을 데리고 왔는데 어떡하냐고 하시면서 언짢아하셨어요. 주인에게 사정을 해서 겨우 살게 된 거예요.” 이유를 들어보니 이사 온 애기엄마는 남편과 이혼하고 남편의 카드빚을 혼자 갚느라 몇 년을 고생하며 생활이 어려웠다고 했다. 동서부동산 부부는 어려워하 는 애기 엄마에게 매달 생활비를 조금이나마 보조했다. 아이들은 잘 자라 결혼도 하고 좋은 곳에 취직했다. 지금까지도 부부와 가끔 안부를 전한다. 이렇게 부부 는 부동산중개사무소를 운영하며 선을 권하는 동네라는 뜻의 권선동 이름처럼 어려운 이웃들도 돕고 있었다. “부동산중개업도 사람과 사람의 연결이잖아요. 다른 영업은 팔면 되지만 중개업 은 지속적인 사람과의 연결이다 보니….”
부부의 아들도 권선동에서 부동산중개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부부는 아들에 게 부동산중개업을 배워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권유했다고 한다. 아들은 부부의 뜻에 따라 지금 부동산중개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부부는 아들에게 부동산 중개업에 있어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38년동안 한 곳에서 묵묵히 부동산사무소를 운영해 온 부부에게 언제까지 부동산 을 하실 계획이신지 여쭤보았다. “나는 힘 닿는 데까지 부동산 일을 할 생각예요. 재미있고 사람들도 만나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부부가 오늘날까지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비결인 듯하다. 오늘도 부부는 동서부동산중개사무소에 출근하여 어김없이 그 자리를 지킨다.
주민참여 김기천 인터뷰
마을 토박이
김기천님과 어떻게 주민과 화합을 왜 해야 되는지 이야기 나누었다. 김기천님께서 인터뷰 후 하신 말 씀 중에 지금까지 별 탈없었던 것을 보면 권선1동이 좋은 곳이라고 하셨다. 나 역시 최고라고 생각한다.
- 주민참여단 박정숙
선생님은 권선동 교회 후문 쪽에 위치한 쌀가게와 세곡초등학교에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 선생님은 더운 날씨에 권선1동 행정복지센터까지 오셔서 이야기를 나눠주고 가셨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편안하고 가치있는 소통의 시간을 가 질 수 있었다.
김기천 선생님의 가족들의 뿌리를 돌아보면 선생님 가족은 조상 대대로 우리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라오셨다. 잠시 전역 후에 파주에 거주하시기도했지만 다시 권선1동으로 돌아와 마을을 지키고 계신다. 김선생님의 아버지는 6남매를 두셨다. 6•25 당시 피난을 가며 권선1동을 떠나기도 하셨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권선동으로 돌아오셨고 그 과정에 비행기가 폭발하는 바람에 아버지
권선1동에 처음 주민자치위원회
와 누이를 잃는 가슴 아픔 일을 겪으셨다.
現 주민자치회
가 생겼을 때 친구의 부탁으로 자치위원회 에 들어오셨다. 당시에는 타지 사람들이 주민자치위원회에 들어와 싸움도 잦고 의견이 안 맞아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기반을 다져 지금의 주민자치회가 세워질 수 있도록 봉사하셨다. 다양한 나이대의 마을 사람들이 모여 마을 운영하는 모습이 좋다고 하시며 지금의 흐름대로 꾸준히 좋게 흘렀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옛 권선동은 중간말, 아랫말, 건넛말로 불렸다고 한다. 그 당시에 권선동, 망포동, 매탄동은 화성에 속해있었지만 개발이 되면서 62년도 경에 수원시로 편입되었다. 때문에 김선생님은 국민학교는 망포에 위치한 태장초등학교로 나오셨지만 중학교
는 북중학교로 다니셨다. 권선동의 구역이 개발되면서 권선 1•2리로 불리게 되었고 이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권선1•2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화성에 속해있던 시절부터 수원시 권선1동이 된 이 시기까지 마을을 지켜보신 김기천 선생님께도 그 시간을 함께한 친구분들이 계신다.
지금은 매탄동, 곡선동 다양한 지역에 살고 계시지만 옛 시절부터 함께한 권선동 친구들과 지금도 연락을 취하고 있으며,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모임을 갖는다고 말씀하신다. 시간이 지나면서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수가 줄었다고 밝힌다.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선생님보다 두 살 위이고, 다른 두 사람은 한 살 위이다. 동갑내기나 나이가 적은 친구들도 있어 다양한 조합을 이루고 있다. 여덟 분이서 모이시는 날에는 종종 어릴 적 추억을 회상하기도 하고 실없지만 웃긴 얘기도 나누신다. 때때론 권선1동 보호수라 불리는 은행나무의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신다. 여덟 분은 여전히 어린 시절 친구들과 나눈 유대를 소중히 여기고 계신다.
보호수는 정말 크고 아름다운 나무였지만 마을이 개발되면서 은행나무의 구역이 좁아졌고 사람들이 가지를 쳐서 죽어가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주셨다. 수원에서 가장 좋은 나무라는 소리를 듣던 은행나무는 은행이 맺히면 사람들이 따서 동네잔치를 벌이기도 했었다. 그 나무에 그네도 매고 실도 달아서 어린시절에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건강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신다. 선생님은 사모님과 함께 보통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7시 30분에 외출하고 두 시간 정도 산책을 하시는 일상을 보내 신다. 10시 경에 집에 돌아오신다고 한다. 두 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시는
장소에 대한 질문에 선생님은 권선성당 근처에 자주 다닌다고 말한다. 권선동 성당과 인접한 개울에 ‘백년교’가 있다. 오랫동안 이 지역에서 중요한 다리였다. 선생님은 그 다리가 무성한 초록으로 둘러싸여 있던 날들을 회상하고 심지어 비가 무수히 쏟아지는 날에 휘청이던 다리의 모습을 기억하신다고 하셨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마을이 개발되면서 백년교는 넓어지고 튼튼해졌다고 말씀하신다.
현재 권선동에는 옛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장소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선생님께서 장다리라는 개울을 얘기해주셨다. 개울은 현재 권선1동 행정복지센터 길 건너편에 위치했다. 과거에 비가 올 때마다 하천이 범람하여 불편을 주었던 것을 기억하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로의 손상된 부분에 모래를 넣어 건널 수 있도록 했다고 말해주셨다. 선생님은 이 방법이 그 당시 사고를 예방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말해주셨다. 또한 마을에 위치한 작 은 다리들은 잦은 범람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통행이 불가능해졌다고 강조하셨다. 또한 장대산이라는 작은 산을 언급하셨다. 장대산은 산업도로 자리에 있었던 작은 야산이었다.
권선1동 이모저모
2023 . 1 설명절 이웃사랑 나눔
2023 . 3 새봄맞이 대청소
2023 . 2 정월대보름맞이 주민화합 한마당
2023 . 4 권선1동 안전지킴이
2023. 5. 권선1동 경로잔치
2023 . 7. 권선1동 주민총회
2023. 6. 주민자치회 푸드업사이클링 활동
2023 . 7. 권선1동 주민총회
권선1동 이웃사랑
2023 . 매월 통장협의회 반찬나눔
2023 . 2. 홀몸어르신 식생활 지원
2023 . 매월 새마을부녀회 사랑의 반찬나눔
2023 . 4. 자립준비 청년 부식 전달
2023 . 6 화정어린이집 백미후원 전달
2023 . 7 효사랑 콘서트
2023 . 7 찾아가는 여름철 건강지킴 교육
2023 . 8 선한이웃 현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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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 발행 2023년 8월 31일
펴낸곳 권선1동 행정복지센터 기획, 편집 권선1동 주민자치회 디자인 마음 연결 제작 마음 연결 인쇄 팩토리B 주소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권선1동 경수대로 352번길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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