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장동 마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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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국원회의원》
안녕하세요. 국회의원 김승원입니다. 파장동 마을이야기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파장동은 제 고향이자, 어린시절 추억이 깃든 정든 마을입니다. 장안구 국회의원으로서 제 삶의 뿌리와도 같은 파장동을 위해 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큰 영광이자 축복입니다. 아울러 파장동 마을만들기 책자가 마을 주민들의 소소하고 진정 성 있는 이야기가 담긴 소식지가 되길 진심으로 응원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마을이야기 책자 발간을 축하드립니다.
《오세수철원특례시의원》
안녕하세요. 수원특례시의회 의원 오세철입니다. 파장동 마을이야기 책자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파장동은 역사와 전통이 깃든 마을입니다. 정조대왕의 숨결이 살 아숨쉬는 지지대고개와 노송지대, 광교산의 정기를 고스란히 품 고 있는 파장동을 지역구로 둔 의원으로서 무한한 자부심을 느낍 니다. 파장동 지역구 주민들의 일꾼으로서 주민들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이겠습니다. 생생한 마을 소식과 주민들의 진솔함이 담긴
마을이야기 책자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현경파환장동지역구의원》
주민여러분, 안녕하세요. 파장동 지역구 의원 현경환입니다. 마을소식지를 통해 주민분들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수원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서울로 이사를 갔지만 이곳 수원 파 장동에 다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수원으로 돌아오게 된 것을 필연이라 생각하며, 이를 감사하고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 파장동에서는 주민분들이 서로 배우고 협력하며 다양한 활동들을 운영하고 있는데요. 저 또한 주민총회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주민분들의 의견과 애로사항을 청취하고, 해결될 수 있 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주민 여러분들의 활력과 열정으로 파동 이 더욱 빛나고 번영하기를 바라며, 언제나 주민들의 곁에서 열
심히 뛰는 든든한 시의원이 되겠습니다.
Chapter 1 인사
추천사 2 김승원 국회의원 3 오세철 수원특례시의원 4 현경환 지역구의원
발간사 및 인사말 8 설정수 주민자치회장 9 정진숙 파장동장
12 파장동 지도 14 파장동의 역사
26 정혜숙, 허재윤 32 길남주 38 김하은 44 심우현 48 이건례 52 전채창 60 설정수 66 이학순
차례
Chapter 2 파장동 마을 소개
Chapter 3 파장동의 사람들
발간사
《설정파수장동주민자치회장》
《파장동 마을이야기》 발간이라는 기쁜 소식을 주민 여러분께 전 해드릴 수 있어서 매우 기쁩니다. 이 책자는 파장동을 사랑하는 주민들의 열망이 모여서 제작되었습니다. 주민분들이 《파장동 마을이야기라는 영화의 감독입니다. 파장동에 살면서 쌓은 추억 들이 책자에 단단히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책자의 어느 곳을 더 듬더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삶을 이어가시는 주민분들 의 열기가 강력히 느껴집니다. 저는 파장동에 정착한 지 어느덧 38년이 되었습니다. 마을 일을 돕고 어려운 주민분들에게 봉사하면서 이 동네에 남다른 애정을 품게 되었습니다. 특히 최근 코로나 사태로 전국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졌음에도 주민들이 십시일반 힘을 합했기에 코로나로 인한 파장동의 피해를 최소화했다고 생 각합니다. 마을에 대한 애정을 품고서 행복한 마을을 만드는 데 헌신한 분들을 《파장동 마을이야기》에서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인사말
《정진파숙장동동장》
파장동과 이목동 마을 사람들의 진정한 이야기를 담은 책자 발 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Chapter 1 인사
오늘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오늘의 나와 이웃, 마을을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먼 훗날 파장동·이목동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를, 단 한사람이라 도 읽어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다하였다고 봅니 다. 겸손한 이웃의 이야기를 담아, 많은 사람이 머물게 하고 마음 깊은 이웃의 이야기를 담아, 많은 사람이 감동 받을 수 있게 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이웃의 이야기를 담아, 그 향기에 우리 마을이 아름다워졌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억하고, 그리워할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좋 은 마을 파장동·이목동과 함께 하겠습니다.
파마장을지동도
파장119 안전센터
노송공원
노송지구대
경기도 행정역사관
경기도 기록관
파장초등학교
수일초등학교
파장동 행정복지센터
수일중학교
파장동의역사
파장동은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북단에 위치한 행정동이다. 《 파 장 법정동으로 파장동, 이목동을 관할한다. 현재 면적은 8.63 ㎢이동개 며, 인구는 약 2만 5천 명이다(2023년 7월 주민등록 기준). 경수 요 산업도로, 노송로, 영동고속도로(북수원IC) 등이 깔려 있어 수원 》 북부 교통의 요충지로 불린다. 동네 남쪽에는 빌라, 단독주택이
밀집해 있다. 노송지대(지지대 고개, 지지대비), 효행공원(효행 기념관, 프랑스군 참전기념비) 등이 유명하다. 경기연구원, 인재 개발원, 경기복지재단, 중부지방국세청, 공무원교육원 등의 관공 서가 파장동에 있다.
파장동 광교산 입구
조선시대 파장동은 광주부 일용면에 속했다가, 1789년에 수《파장 원부로 편입되었다. 1789년(정조 13년) 9월, 수원부의 읍치( 邑동명역칭治 )를 팔달산 동쪽 기슭으로 옮기고, 팔달산 주변 지역을 남부와 사 유 북부로 나누었다. 이때 북부 14개 동 가운데 하나인 ‘파동( )’ 琶洞 및 래 이 지금의 파장동에 해당한다. 1899년 발간된 《수원군읍지》에도 》 ‘파동’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후에 파동은 ‘파장동( 芭長洞 )’으로
그 명칭이 변했다(수원부 일용면 소속). 1914년 4월 1일, 일제에 의해 수원군의 동리 명칭과 구역이 변경되어, 미륵동, 일림동, 파장동을 통합시켜 ‘파장리’라 하여 일형면에 통합시켰다. 1931년에 수원면을 읍으로 승격시켰으며, 1936년 10월 1일 일형면과 의왕면이 통합하여 파장리는 일왕면 에 소속됐다. 해방 후인 1949년 8월 15일 수원읍이 ‘수원시’로 승격되자, 이 지역은 화성군 일왕면 파장리로 개편됐다. 이후 1963년 1월 1일 자 법률 제1175호로 화성군 일왕면에서 수원시로 편입되었다. 이 때 이목리, 율전리, 천천리, 정자리 등이 ‘-동( 洞 )’으로 바뀌었다. 1972년 정자동과 합쳐 파정동( 芭亭洞 )이 되었다. 1983년 10월 1일, 수원시 조례 제1139호에 따라, 파정동이 파 장동과 정자동으로 분리되었다. 파장동은 이목동, 율전동, 천천 동 등을 관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0년 1월 1일 수원시 조례 제1607호에 따라, 율천동(율전동 천천동) 지역이 파장동에서 떨 어져 나갔다. 1992년 8월 11일에는 수원시 조례 제1816호에 따라, 송죽동 일부가 파장동으로 편입됐다. 앞서 살펴봤듯, 파장동의 옛 명칭은 ‘파동’이다. 파동은 정조
가 이 지역에 ‘파초’를 많이 심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이 때문에 파장굴, 파장 골이라 칭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파동에서 ‘파장동’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는 데, 정확한 배경은 밝혀지지 않았다. ‘어른’이란 뜻을 더하기 위해 ‘장( 長 )’을 추가했다는 추정만 가능하다.
해우재 박물관 해우재 박물관은 세계 화장실 문화를 선도한다. 문화체육관광부 '관광 으뜸 명소'로 선정되었다. 해우재는 세계에 단 하나만 존재하는 변기 모 양 박물관이다. 현재 리모델링을 통해 ‘화장실문화 전시관 해우재’로 재탄 생했다. 해우재 박물관은 청결한 화장실 문화를 선도해 2002년 이후 한국 의 화장실 문화가 크게 변했다고 평가한다. KBS는 물론 독일 등 세계 각국
의 방송국에서 취재를 해갔다. 현재 화장실에 대한 전시뿐만 아니라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남녀노소 참여할 수 있다.
해우재 박물관
노송지대
된 소나무, 즉 노송( 老松 )들이 울창한 이 길은 1790년경 조선 제
노송지대는 1973년 7월 10일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됐다. 오래
22대 왕 정조의 지시로 조성됐다. 소나무들은 지지대비( 遲遲臺
걸쳐 늘어서 있다.
효행공원
)가 있는 지지대 고개 정상에서 현 경수대로를 따라 약5㎞에碑
정조의 깊은 효심을 기리기 위해 1993년 조성된 공원이다. 정
조는 아버지를 모신 융릉을 자주 참배하러 다녔다. 융릉에 갈 때
는 능이 빤히 보이지만 가는 길이 멀어 더디다고 한탄했다고 한
다. 반면 참배하고 돌아올 때는 고개만 넘으면 더 이상 능이 보이
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에 발걸음을 차마 못 뗐다고 전해진다. 그
는 이름이 붙었다.
수일초등학교
래서 ‘더디다’는 의미의 지( 遲 )를 두 번 써서 ‘지지대 고개’라
효행공원 안에는 프랑스군 참전비, 무궁화 터널, 어린이 생 태미술체험관, 효행기념관, 정조대왕 동상이 있다. 또 5km에 걸친 아름다운 숲길을 거닐기에 좋다. 포도밭, 딸기농원 등도 보여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광교산으로 연결되는 등산로가 있으며, 산책로와 쉼터가 있어 시민들이 자주 찾는 공간이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에 있는 공립초등학교이다. 2004년 1월 5일 설립 인가를 받아 2004년 3월 2일 656명으로 개교 및 병설유치원을 개원하였다. 2005년 2월 16일 제1회 졸 업생 51명을 배출하였다. 교훈은 ‘따뜻한 마음, 올바른 행동
알찬 실력’이며, 교목은 느티나무, 교화는 복숭아꽃이다. 경기도 《 교 육 수원시 장안구 수일로 85에 있다. 시 설 》 파장초등학교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에 있는 공립초등학교이다. 1937 년 5월 4일 개교하였으며,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두 교실이 사라졌다. 1960년 1월 1일 행정구역 변경으로 수원시에 편입되었다. 1981년 3월 1일 병설유치원을 설립하였다. 1988년 10 월 5일 자연보호 우수학교로 내무부장관상을, 1989년 11월 3일 저 축 우수학교로 한국은행총재상을 받았다. 1992년 12월 2일 학교보 건환경 우수학교 및 1993년 12월 20일 근검, 협동 생활화교육 우수 학교로 교육부장관상을 수상하였다. 1997년 10월 20일 다목적교실 (체육관)을, 1998년 6월 30일 급식소 및 식당을 준공하였다. 교훈 은 ‘성실’이며, 교목은 향나무, 교화는 장미이다. 파장초등학교에
노송지구
서는 배구부를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있다.
수일중학교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에 있는 공립중학교이다. 1983년 1월 2일 24학급 설립을 인가받아 동년 3월 1일 개교하 였다. 1986년 2월 13일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2001년 8월 22일 교육환경 개선사업을 완료하였다. 교훈은 '성실, 협 동, 봉사'이며 교목은 향나무, 교화는 장미이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수일로 103에 있다.
광교산, 약수암
정혜숙, 허재윤 길남주 김하은 심우현 이건례 전채창 설정수 이학순
정혜숙 허재윤 가톨릭사회복음화국
“가서 너희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10.37)라는 말씀이 봉사 활동할 때마다 생각납니다. ”
‘사랑의 도시락’이란? 사정이 어려운 분들을 위해서 도시
사랑의 도시락을 기획하고 실행하며 있었던 일들 락을 만들어 전달해 드리는 봉사예 한창 코로나가 심해지는 시기에, 많 요. 저희는 천주교에 소속되어서 봉 은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보 사하고 있는 거지만, 신자이고 아니 이니까 사회를 위해서 천주교가 기 고와는 상관 없이 지역 사회에 도움 여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고민 이 필요하신 분들에게 도시락을 드 하게 됐어요.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식 립니다. 지금은 동사무소에서도 지 사라는 생각에 도시락 봉사를 떠올 원하는 봉사라서, 민과 관이 함께하 렸어요. 신부님들도 다들 좋아하셔 는 중입니다.
서 봉사단을 조직하게 되었어요. 몇
전달할 도시락
번의 회의를 거치면서, 어떤 도시락
잘 진행될 수 있었어요. 지금은 도시 을 만들 건지, 어떤 가방에 담아서 전 락 봉사에 참여하는 모든 분이 큰 보 달할 건지 등등 세부적인 거까지 모 람을 느끼면서 일을 하세요. 특히 통 두 정한 뒤에 동사무소에 가서 이야 장님들이 직접 도시락을 전달하는 기했죠. 저희만으로는 도시락 전달 역할을 하다 보니까 도시락을 받는 이 어려워서, 동사무소와 통장들의 분들에게 직접적으로 감사 인사나 도움이 필요했어요. 천주교에서 하 칭찬을 듣는 것도 주로 통장님들이 는 봉사를 돕는다고 하니까 이것도 시거든요. 처음 걱정과는 다르게 다 통장의 역할이 맞는가에 대해서 고 들 뿌듯한 마음으로 봉사하고 계시 민하셨던 거 같아요. 설득의 과정을 는 게 저희에게도 느껴져요. 거치면서 이 봉사가 종교와 관계 없 이 지역을 위한 일이라는 것에 다들
각자의 위치에서 보람을 느끼다 동의를 해주셔서 지금처럼 봉사가 통장님들이 도시락을 전달하면서 동
도시락 포장
시에 도움이 필요한 분들이 더 없나
락 얘기를 하시는 노인분들의 대화 확인하는 역할도 하고 계세요. 도시 를 들은 적이 있대요. 그 도시락이 정 락 드리면서 안부 한 번 더 묻고, 어 말 맛있는데, 너도 그거 받냐고 서로 디 불편한 곳은 없으신지 한번더확 에게 물으시는 걸 보면서 정말 뿌듯 인하시는 거죠. 하루하루 잘 계시는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지 확인이 필요한 분들이 많아서, 일 주일에 한 번도 사실은 부족하다고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봉사 활동 느껴져요. 항상 걱정되곤 합니다. 실 사랑의 도시락 사업은 실무팀이 따 제로도 도시락을 드리러 갔다가 쓰 로 존재해서, 봉사 진행에 다양한 도 러진 노인분을 발견해서 목숨을 구 움을 드리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봉
한 적도 있기 때문에 통장님들이 더 사자분들이 여러 조직으로 되어 있 욱 열심히 다니시면서 동네를 구석 고, 여러 조직이 참여합니다. 그러다 구석 살펴주세요.
보니 조직간 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가끔 어르신들이 도시락 위에 쪽지 필요한 부분을 파악해 실질적인 지 를 붙여서 감사 인사를 전하실 때가 원을 하는 역할 등을 수행합니다. 행 있어요. 저희는 그분들을 찾아 뵙진 정적인 부분과 비용 문제 해결도 포 못하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런 쪽 함하고 있고요. 도시락을 만드는데 지를 볼 때 정말 큰 보람을 느껴요.
에서도 조리팀, 설거지팀이 따로 있 저희뿐만 아니라 다양한 천주교인들 어요. 그 외에도 배달팀 등으로 나누 이 참여하고 있는 봉사라서, 자신이 어져 있을 만큼 많은 분이 함께 애써 살고 있는 지역을 돕는 것도 아닌데 주고 계시기 때문에 그만큼 체계적 열심히 하시는 분들도 많아요. 그래 인 관리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판단 도 열심히 한 만큼 좋은 이야기가 널 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재료비, 메 리 퍼졌어요. 봉사자분 중에 한 분은 뉴, 소통 등 모든 부분을 평가해서 매 동네 세탁소에 갔다가 사랑의 도시 주 차트를 만들어요. 그걸 3년 동안
해왔답니다. 이만큼 조직적인 시스
봉사는 나를 위한 일 템을 갖춘 건 경기도 내에서 많지 않 사랑의 도시락뿐만 아니라 모든 봉 은 것 같아요.
봉사는 없어도 나누는 일
사를 시작할 때는, 타인을 위해서 내 가 일을 해야겠다거나 타인을 위해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처음엔 사실 예산이 적어서 도시락 그들에게 사랑을 주려고 하지만 결 봉사를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싶은 국 봉사를 하다 보면 봉사자가 사랑 마음이 컸어요. 그런데 신부님께서 을 돌려받게 되더라고요. 남을 위하 그러시더라고요. 뜻만 있으면 이루 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봉사를 어진다.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도 하는 나까지 행복해져서 우리 모두 우러 온다고요. 돈 걱정 하지 말고 시 를 위한 행위가 되는 게 봉사인 거 같 작해 보자는 말씀을 하셨어요. 정말 아요. 어떤 날은 몸이 힘들어서 쉬고 로 일단 봉사를 시작하고 나니까 많 싶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와의 은 분들이 다양한 도움을 주러 오셨 약속이기 때문에 봉사를 하러 나가 어요. 후원 물품도 많이 오고, 어떤 면, 집에 돌아오는 길엔 아주 홀가분 분들은 자기가 식당을 하고 있다면 힙니다. 아픈 것도 낫더라고요. 그만 서 식자재나 반찬을 정기적으로 보 큼 봉사를 하며 얻는 게 참 많아요. 내주시기도 해요. 사랑의 도시락 봉 사를 하며 배운 건, 가진 게 많아서 봉사를 하는 게 아니라 봉사를 하고 자 한다면 가진 게 없어도 할 수 있다 는 거예요. 좋은 일을 하면 주변에서 자연스럽게 도와주시더라고요. 그러 면서 좋은 사람들이 모이고 그 힘으 로 봉사가 지속될 수 있는 거 같아요.
길남주 얼씨구절씨구 사장
“봉사로 몸이 힘들 때가 있긴 하지만, 좋아서 하는 일이라 큰 어려움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집수리 봉사를 하게 된 계기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맞아서 한사랑길봉사단은 평범한 주민 7명 봉사단을 만들게 됐어요. 기술자들 이 모여서 결성한 봉사단이에요. 벌 은 있었지만, 자금은 없었기 때문에 써 8년 정도 봉사를 이어오고 있습 초반에는 어려웠습니다. 저희는 집 니다. 주로 집을 수리하러 다니는 봉 을 수리하면 리모델링처럼 느껴질 사를 합니다. 저는 2009년에 파장 만큼 집을 손보거든요. 돈이 꽤 들어 동에 왔는데, 식당을 운영하기 위해 가죠. 도구나 재료를 사는 것도 다 돈 서였어요. 식당을 하다 보니까 다양 이니까요. 그래서 처음엔 제가 사비 한 손님들을 만나요. 그중에서 수리 를 내놨어요. 어차피 좋은 일 하기로 기술이 있는 분들이 와서 밥을 먹다 한 거, 제대로 해보려고요. 가 봉사 이야기를 나누게 됐어요. 저 도 원래 봉사를 하고 있었고, 그분들
봉사단을 운영하면서 있었던 일들 도 본격적으로 봉사를 하려고 생각 다들 봉사를 해보면 보람을 느끼죠.
그런 분들이 사람들을 더 데리고 오 았지만 결국 시간이 약이라고 다 이 면서 봉사단도 커지고, 봉사도 계속 겨냈어요. 삶의 지혜도 많이 얻었고 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사실 봉사단 요. 의외로 봉사 때문에 주변의 시샘 을 운영하면서 마음 아픈 일도 많았 이나 모함을 겪기도 해요. 그런데 모 어요. 어디를 가든 리더 역할을 하고 든 걸 넓게 보고, 멀리 보려고 하니까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리더 남들의 그런 태도에 더는 상처받지 가 이미 있는 단체임에도 불구하고 않게 되더라고요. 중요한 건 내가 좋 본인이 리더를 하고 싶어서 봉사하 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고, 진정 는 사람들을 빼가고 자기 봉사단체 으로 내가 보람을 느끼니까 어려움 를 차리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런 일 도 헤쳐 나갈 힘을 얻었어요. 좋은 분 이 생기니까 힘들고, 상처도 많이 받 들이 훨씬 많기도 하고요.
집을 수리하며 마음을 수리하다 움을 드리지 못하는 거에 죄송한 마 쓰레기가 정말 많이 쌓여있던 집이 음도 남곤 했죠. 집을 치우고 수리하 특히 기억에 남아요. 쓰레기를 버리 면서 마음까지 치료가 된 분들도 많 기 위해서 트럭이 9대 정도가 필요 이 계세요. 이전에는 바깥 활동을 아 했던 집이 있었어요. 그런 분들은 사 예 안 하시던 분이었는데 쌓였던 쓰 실 마음의 병이 있어서 집을 제대로 레기가 정리되고 집이 깨끗해지니까 관리하지 못하면서 쓰레기가 쌓이 성격까지 밝아진 분들이 있어요. 지 는 거예요. 집 안이 곰팡이로 뒤덮여 금도 동네에서 만나면 먼저 반갑게 도 창문을 조금도 못 여는 분도 계셨 인사해 주시고, 정말 밝게 살아가세 어요. 마음의 병이 심하신 분들은 집 요. 그런 모습을 볼때또큰 보람을 을 치워드리긴 해도, 정신적인 치료 느끼죠. 가 따로 필요하다 보니까 완벽한 도
헌 집에서 새로운 집으로
일과 봉사 중에서 우선순위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보니까 일과 봉사의 균형을 맞추는 게 참 힘들더 라고요. 그래서 점심 장사 끝나고 저 녁 장사를 하기 전까지의 시간을 활 용해서 봉사를 다니기도 하고, 급한 일이 있으면 아르바이트생을 구해 서 가게를 맡기고 저는 봉사를 하러 가기도 해요. 봉사는 대체가 안 되니 까요. 아침에는 되도록 일찍 일어나 서 10시 전까지 동네를 돌아다니면 서 집수리 답사도 하고, 어르신들 안 부도 확인해요. 그리고 10시에는 가 게를 열러 가죠. 몸이 힘들 때가 있긴 하지만, 좋아서 하는 일이라 큰 어려 움 없이 계속 이런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감사한 분들
요. 한 번은 제가 갓 태어난 아기를 돌보게 된 일이 있었는데, 어려움이 봉사단원들뿐만 아니라 많은 동네 많았어요. 갑자기 아기를 돌보려니 분이 도와주시기 때문에 봉사가 이 필요한 것들도 많았고요. 그때 빵집 어지고 있어요. 어르신 한 분은 파지
사장님께서 흔쾌히 50만 원이나 기 를 주워 모으셔서 그걸 판 값으로 생 부를 해주셔서 아이를 걱정 없이 돌 활하시는 분인데, 제가 못 가는 곳까 봤던 기억이 나요. 이렇게 많은 분의 지 가서 반찬을 전달해 주시기도 해 도움이 있기 때문에 살기 좋은 동네
않을까요?
에 가까워질 수 있는 거 같아요. 여전 히 도움이 필요한 이웃은 많지만 그 래도 계속해서 노력하다 보면 언젠 가는 모두가 살기 좋은 동네가 되지
김하은 용인대학교 경찰행정학과 3학년
“지역 발전과 치안 유지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특히 여성, 청소년 범죄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 범죄를 해결하고 싶어요.”
꿈을 위해 노력하다 어렸을 때부터 경찰이 되고 싶었어 다닐 수 있게 되었죠. 요. 중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놀 고 싶은 마음이 큰 어린애였지만, 친 구들도 입시 공부를 시작하면서 저 얼씨구절씨구 사장님
썼어요. 덕분에 일도 배우고 학원도
감사한 분들
도 정신을 차리게 되더라고요. 경찰 얼씨구절씨구 사장님께는 감사한 마 이라는 꿈이 있는데 그냥 시간을 보 음이 정말 커요. 제 사정을 듣고 흔 내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학원에 다 쾌히 저를 받아주셨고, 처음 아르바 니려고 했어요. 혼자서 하는 공부는 이트하는 거라 아무것도 몰랐던 저 한계가 있어서요. 그런데 우리 집 형 에게 정말 사소한 것까지 하나하나
편이 좋지 못한데, 학원비가 굉장히 친절하게 알려주셨어요. 어렸던 만 비싸더라고요. 부모님이 고생하시면 큼 실수도 많이 했고, 처음엔 제 몫을 서 4남매를 키우고 계시는데 저한테 못 했는데도 항상 저를 도와주셨어 만 돈을 많이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 요. 가게에서 일한 2년 동안 일뿐만 니까 제가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 아니라 인생에 도움이 되는 많은 것 하게 됐어요. 학원비를 내고 싶어서 들을 배운 덕분에 지금은 어디를 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죠. 사실 중학 서 무슨 일을 하든, 칭찬을 들으면서 생을 채용해 주는 곳은 거의 없기 때
살아요. 사장님이 제 사정을 아시니 문에, 직접 가게에 찾아가서 말로 제 까 저를 장학재단에 추천을 해주셔 상황을 설명해 드리고 싶어서 무작 서 장학금도 받고, 재단에서 주는 상 정 식당에 찾아갔어요. 다행히 얼씨 도 받았을 수 있었어요. 여전히 저를 구절씨구 사장님이 저를 받아주셔서
많이 챙겨주셔서 감사해요. 사장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일주일에 이 이 아니었다면 저의 학창 시절이 힘 틀 일을 하면서 하루 일급은 부모님 들었을 거 같아요. 께 드리고, 하루 일급은 저를 위해서
태권도 관장님
범죄자를 잡는 진짜 경찰이 되고 싶 제가 남동생이 두 명 있는 데 둘 다 다는 꿈이 더 뚜렷해지는 계기가 된
을 데리러 가느라고 태권도장에 자
태권도장에 다녔어요. 제가 동생들 거 같아요.
주 드나들었는데, 태권도를 배우고 선생님들 싶어 하는 제 눈빛을 관장님이 보 학원 원장님께서도 사실 학원비를 신 거죠. 관장님께서 너무 아무렇지 많이 깎아주셨어요. 덕분에 학원에 도 않게, 동생이 둘이나 다니니까 너 다니면서 성적을 올릴 수 있었고, 학는돈안 내도 된다면서 태권도를 배 교 선생님들께서도 정말 많은 응원 워보지 않겠냐고 물어봐 주시더라고 을 해주셨기 때문에 제가 사춘기 때 요. 저는 너무 좋았죠. 관장님이 부모 도 엇나가지 않고 자랄 수 있었던 거
로 태권도를 배우게 됐어요. 나중에 는 돈을 낼 수 있게 되어서 돈을 내긴
님께도 연락을 해주셔서 저도 그 뒤 같아요.
앞으로의 포부 했지만 처음 몇 년은 정말로 돈을 받 제가 사실 공부를 못하는 편이었기 지 않고 저를 가르쳐주셨어요. 정말 때문에 용인대학교 경찰행정학과에 감사했죠.
경찰관분들
붙은 거 자체가 저에겐 기적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경찰을 꿈꾸긴 했지 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마음이 흔들 제가 초, 중, 고등학교를 전부 파장동 렸던 적이 있어요. 내가 너무 경찰만 에서 다녔는데 학창 시절에 몰래카 을 생각하고 살아온 거 아닐까? 다른 메라범 검거에 3번 정도 도움이 된
직업에 대해서도 고민을 해봐야 하 적 있어요. 그때 우리 학교 전담 경찰 지 않을까? 무엇보다 경찰이 되는 게 관분께서 제 이야기를 좋게 해주셔 쉬운 일이 절대 아닌데, 내가 그걸 할 서 경찰청에서 상을 받기도 했어요.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컸죠. 생각
을 정리하려고 경찰이 되고 싶은 이
고, 자신이 잘하는 게 뭔지를 객관적 유를 적기 시작했어요. 근데 그 이유 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생기려면 타인 를 쓰고 나니까 오히려 결심이 서더 의 의견도 들어봐야 해요. 생각보다 라고요. 이제 3학년인 만큼 경찰공무 세상엔 좋은 사람들이 많아요. 도움 원 시험 준비에 집중하려고 해요. 대 을 청하면, 충분히 도움을 받을 수 있 학에도 붙었듯이 시험에도 합격해 는 문제일 수 있으니 다양한 사람들 서, 지역 발전과 치안 유지를 위해 일 과 소통하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순경으로 근무하다가 가능하다면 수사과에서
도와주신 분들에게 도 일을 해보고 싶어요. 특히 여성, 많은 분이 도와주신 덕분에 제가 경
청소년 범죄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 찰이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 범죄 해결에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었던 거 같아요. 여전히 꿈을 향해 달 려가는 과정 중에 있지만 언젠가 꿈 꿈을 이루는 게 막막하게만 느껴지 을 이루어서 받은 만큼 보답하며 사 는 학생들에게 어렸을 때의 저와 같은 고민을 하고 니다. 있을 아이들이 많을 거 같아요. 형편 이 어렵거나 다양한 이유로 꿈을 이 루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 때는, 혼 자 고민에 빠지기보다 주변 사람들 과 고민을 나누는 게 도움이 된다고 말하고 싶어요. 남들과 이야기하면 서 자신을 더욱 객관적으로 볼수있게 돼요. 난 안 될 거야. 포기하는 게 맞을 거야. 이런 생각에 휩싸이지 말
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
심우현 북수원시장 상인회장
“가게보다 상인회일을 먼저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을 해요. 봉사하려고 마음 먹었으니까요.”
상인회장이 되고 달라진 것들 뒤로 상인회 일 때문에, 가게에 소홀 저는 현재 북수원시장의 상인회장을 해진 거 같아요. 두 가지 일을 한꺼번 맡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장사한 지 에 하는 게 생각보다 힘들더라고요. 는 벌써 22년 정도가 됐네요. 사장인 저와 직원이 1명 있는 정육점을 운영
봉사가 1순위가 된 삶 하고 있습니다. 사실 처음엔 상인회 가게 일과 상인회 일이 겹칠 때도 생 에 아무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8 기면서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년 전부터 시장 발전에 관심이 생기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면서 상인회에 들어가게 됐고, 임원 결국은 가게 문을 닫더라도 상인회 부터 출발했어요. 그 후에 전 회장님 일을 먼저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
께 승계받아서 지금 6년째 상인회장 었고, 지금까지도 마음이 바뀌지 않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내년 4월에 임 아서 그렇게 하고 있어요. 물론 가게 기가 끝나요. 사실 상인회장을 맡은 를 뒷순위로 두면서 거래처도 좀 많
상품을 준비하는 북수원시장 상인
이 끊어졌어요. 제가 제때제때 물건
더 줄었어요.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을 못 가져다드리게 됐으니까요. 하 은 대형 마트랑 백화점에 주로 가니 지만 봉사하려고 마음을 먹었고, 상 까요. 이제는 시장도 다양한 시도를 인회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으니까 해서 그런 분들의 눈을 돌릴 수 있게 이걸 맡은 동안에 시장이 발전되는 할 아이템을 만들어야 해요.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어요. 그 마음 북수원시장에 젊은 상인들이 생겼는 이 훨씬 커서 손해를 보더라도 상인 데, 지금 손님들의 기호에 맞춘 다양 회 일을 우선시합니다. 어차피 시장 한 음식을 팔고 맛도 좋다고 소문이 이 잘 돼야 제 위신도 살고요. 하하. 났어요. 어떤 가게는 오후 4시쯤이면 매진이 돼요. 젊은 상인들 덕분에 시 시장에 필요한 변화를 고민하다 장에 활기가 생긴 느낌이에요 나이 시장에도 변화가 필요해요. 젊은 상 를 떠나서 배워야 할 점은 배워야겠 인들의 의견도 잘 받아들여서 시장 죠. 모든 사장님의 가게를 활성화하 자체가 젊어져야 할 필요가 있죠. 시 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설도 현대화가 되어야 그만큼 많은 우선 메뉴 개발이 중요하겠죠. 그리 사람이 이용할 거 같아요. 예전에는 고 손님들에게 친절해야 하고, 위생 사실 동네에 공무원 연수 시설이 있 관념도 철저해야 합니다. 기본적인 었기 때문에 하숙이 유명한 곳이었
건데도 장사를 하다 보면 지키기 어 어요. 연수 시설이 다른 곳으로 옮겨 려워하시는 분들을 많이 봤어요. 하 지면서 하숙생들도 사라졌고, 하숙 지만 손님이 왕이라는 생각으로 함 생들의 몫만큼 장을 많이 보던 하숙 께 조금만 더 뛰었으면 좋겠어요. 집 주인들도 사라졌죠. 그리고 크고
개인적으로는 시장에 더 다양한 먹 작은 공장이 많았던 곳인데, 공장들 거리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도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 품목이 겹치는 가게들이 많은데, 좀 어오면서 시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더 새로운 메뉴나 물건이 들어와서
시장에 다양성이 강조되길 바라요.
상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
됐다는 얘길 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럴 때 보람을 느꼈는데, 좀 더 많은 상인분이 장사에 도움이 되는 지식 시장 상인으로서 가져야 하는 덕목 을 배웠으면 하는 마음이 큽니다. 내 을 다 같이 지킬 때 시장이 살아난다 년에 임기가 끝나면 상인회장을 계 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손님이 없는 속할 수 있을지, 아닐지는 잘 모르지 걸 손님 탓만 할 게 아니라, 스스로를 만 누가 회장을 맡든지 시장의 발전 돌아보고 가게를 점검할 필요가 있 을 위해서 다 같이 노력했으면 좋겠 어요. 저도 그런 상인분들을 돕기 위 습니다. 해서 더 노력하겠습니다. 상인분들 도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교육 프로 그램에 참여해 주셨으면 해요. 실제 로 전문 강사님에게 교육받으면서 고집을 버리고 진열과 포장을 처음 부터 다시 배우니까 장사에 도움이
북수원 시장 벽화
이건례 효숙 어머니
“어린 아이의 영혼에 머무른 딸에게 행복을 배웠어요. 나쁜 마음이 어디론가 빠져나가요.”
효숙 어머니의 일과
운 겨울날에도 산책은 꼭 나가요. 여 저는 78살이고, 지금은 제 딸인 효숙 태까지 하루도 안 빠지고 매일 그래 이와 둘이 살고 있습니다. 저는 아침 왔어요. 효숙이가 어릴 때는 등산하 에 일어나면 우선 밥을 차려요. 둘이 러 다니기도 했고, 학교에 다니기 시 밥을 먹고 나면 제가 효숙이를 목욕 작한 뒤로는 매일 학교로 데려다주 시킵니다. 씻기고 옷을 입힌 뒤에 복 고 다시 데리고 오는 길을 함께 걸었 지관에 보내요. 그리고 효숙이가 복 죠. 주변에서는 매일 그렇게 산책하 지관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다시 목 는 게 힘들지 않냐고 묻는데, 저는 그 욕시키고 밥을 먹죠. 자기 전까지는 냥 즐거워요. 효숙이와 함께라면 뭐 티브이를 보거나 하면서 혼자 놀다 든 즐거운 마음이 돼요. 그리고 산책
가 잠에 들어요. 일과에서 가장 중요 하면서 효숙이 운동도 되고 저도 건 한 시간은 둘이 산책을 하는 시간이 강을 챙길 수 있어서 좋아요. 에요. 몹시 더운 여름날에도, 몹시 추
산책 중인 모녀
효숙이 소개
는 성격도 아니고, 먼저 다가가는 법 우리 효숙이는 복지관의 분위기 메 도 잘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효 이커라고 불려요. 주변 사람들에게 숙이랑 다니면서 저도 성격이 변했 인사도 정말 잘하고 항상 웃고 다니 어요. 효숙이의 존재가 제 삶의 의미 니까 보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져요. 예요. 원래는 효숙이가 혹시라도 다 지금 다니는 복지관 분들도 그렇게 칠까 봐 보호 시설 같은 곳에 보내지 말씀하시고, 동네 사람들도 그런 효 않고 저 혼자서라도 효숙이를 키우 숙이를 다 아세요. 워낙 성격이 순하 겠다고 도움의 손길을 받지 않았는 니까 아이들하고도 잘 어울리고, 사 데, 그러길 정말 잘한 거 같아요. 효 람을 좋아해서 여기저기에서 인기가 숙이와 살아서 행복을 느끼는 거 같 많아요. 복지관 친구들도 많고요. 아요. 아이에게 얻은 배움으로 저도
아이를 키우며 배운 것
달라져서, 이제는 이웃들하고도 잘 지내게 되었어요. 효숙이처럼 사람 제가 낳고, 기른 제 아이지만 지금도 들에게 먼저 다가가고, 누구든 웃으
요. 나쁜 마음이 전부 어딘가로 빠져 나가요. 효숙이가 착해서 저까지 착 한 엄마가 되는 기분이에요. 오히려
효숙이를 보고 있으면 행복을 느껴 면서 대하려고 해요.
고마운 분들 사실 고마운 분들은 너무 많아요. 파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에게서 많은 장동 주민들은 다 너무 착하셔서 도 걸 배웠어요. 효숙이 아빠. 그러니까 움을 받은 적도 참 많고요. 효숙이나 남편이 있을 때는 남편이 정말 많은 저를 무시하는 분들도 없었고, 여태 부분을 맡아서 해줬는데, 남편이 먼
까지 즐겁게 생활할 수 있었어요. 특 저 가고 나서는 저랑 효숙이 둘이 다 히 효숙이가 위험할 때 도와주신 분 해야 하니까 처음에는 막막했어요. 들에게 감사해요. 지금은 아니지만, 제가 원래 누구랑 편하게 이야기하 예전에는 효숙이가 바깥을 돌아다니
는 걸 좋아했어요. 그런데 집을 못 찾 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아오고, 무작정 움직여서 아이를 잃 어버릴 뻔한 적이 있어요. 문이 열려
딸에게 하고 싶은 말 있었는지도 몰랐고, 나갔는지도 몰 내 딸 효숙아. 우리 둘이 지금처럼 건 랐는데 아이가 없어져서 찾는 중에 강하게 오래 살자. 요즘 복지관도 전 집으로 전화가 걸려 왔어요. 어떤 버 보다 더 잘 다니고 여러 가지 면에서 스 기사님이셨는데, 효숙이가 버스 계속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고 를 타고 멀리까지 가서 지금 수원 비 마워. 우리 앞으로도 행복하게 살자. 행장에 있다고 알려주셨어요. 그 기 사랑해. 사님 덕분에 효숙이를 찾을 수 있었 어요. 성함도 듣지 못했는데 정말 고 마운 분이라 목소리가 기억에 남아 요. 여전히 너무 감사합니다. 기사님
전재창 길샘아동센터 대표
당당한 아이들이 되었으면 “ 해요. 자신을 감추고, 거짓된 삶을 살고, 속으로 남과 비교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
아동센터가 되기까지의 이야기 이 아니고 거의 매일 그러길래 제가 저는 원래 목사예요. 교회 일을 하고 내려가서 아이들 앞에 갔어요. 아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 아동 센터 같 들에게 물어봤죠. 왜 밖에 나와 있냐 은 걸 하려고 시작한 봉사는 아니었 고 하니까 집에 아무도 없다고 하더 어요. 예전에 살던 곳이 뒤에 초등학 라고요. 어른이 아무도 없대요. 부모 교가 있고 건물 3층에 교회가 있었 님께서 일 하러 가셔서 퇴근을 안 했 어요. 아이들 뛰노는 소리, 떠드는 소 다고요. 그럼 저녁은 먹었냐고 물으 리가 잘 들리는 위치였죠. 그런데 아 니까, 과자를 사 먹었다고 하더라고 이들이 다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있 요. 엄마가 출근하면서 천 원을 주고 어야 할 시간에도 몇 명이 모여서 떠 가신다고 했어요. 과자 하나 사 먹고
드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왜 늦은 밖에서 계속 놀고 있었던 거였죠. 제 시간에 집에도 안 가고 밖에 나와 있가배안 고프냐고 물으니까 그때 있 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두 번 었던 세 아이 모두 배가 고프다고 대
길샘아동센터 청소년들이 에버랜드에 가기 전 주의 사항을 듣고 있다.
에버랜드에서 식사
답했어요. 그래서 아이들을 데리고 를 얻어와서 여섯 대 정도를 설치했 올라와서 교회 한쪽에서 밥을 먹였 어요. 아이들이 정말 재밌게 놀고, 밥 어요. 그때가 2008년이에요. 그애도잘 먹는 걸 보니까 뿌듯했어요. 주 들이 와서 밥을 먹고 컴퓨터로 게임 말에도 나와서 놀고, 공부도 좀 하고 도 하고 타자 연습도 하면서 놀다 보 그러자고 했더니 좋아하더라고요. 니까 친구들을 데려오기 시작했어 그때쯤에는 부모님들을 만났어요. 요. 세 명이었던 아이들이 어느새 여 아이들이 이렇게 밖을 돌아다니면서 섯 명이 되고, 또 금방 아홉 명이 되 놀고, 밥도 제대로 못 먹는 걸 알았냐 고 그러더라고요. 아내가 컴퓨터를 고 물으니까 알고 있고, 마음도 아프 전공했는데 남들이 버린다는 컴퓨터 다고 하셨죠. 걱정도 되지만 아이들
을 보낼 데가 없었다고 그러더라고
시간을 보냈는데, 그분이 그러시더 요. 그래서 우리가 아이들을 돌보겠 라고요. 제도를 활용해야 아이들이 다고 했어요. 내가 교회 목사인데, 아 더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요. 그 무것도 줄 필요 없고 그냥 아이들을 래서 시설 인가를 받고 시에 센터 등 맡겨 주면 퇴근하고 올 때까지 우리 록을 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
년 정도를 아내와 둘이 아이들을 돌 봤어요. 그러다가 아이들이 더 자라
가 아이들을 봐주겠다고요. 그렇게 6 었어요.
가장 큰 보람 면서 필요한 게 많아지니까 다른 목 저는 제가 베이비붐 세대라 그런지 사님이 저희 사정을 알고 시설 인가 배곯으면서 자란 기억이 지금도 선 를 내라는 조언을 해주셨어요. 처음 명해요. 아내도 마찬가지이고요. 그 에 저는 그런 걸 굳이 해야 하나 싶어 래서 아이들이 굶지 않았으면 하는 서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상태로 마음이 가장 컸어요. 배고플 때의 그
가족같이 자란 청소년들
에버랜드에서 그림을 그리는 어린이
절박함과 비참함을 아니까요. 아이 몫이 있다는 걸 알게 돼요. 그 시간이 들을 돌보게 된 뒤로 음식을 주면서 지나면 스스로 먹는 양을 조절할 수 마음껏 먹고, 배고프면 더 먹으라고 있게 되는 거예요. 지금 당장 먹지 않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여러 노력이 으면 굶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 필요했지만, 지금 그 꿈을 이뤘기 때 나게 되는 거죠. 아이들이 그렇게 안 문에 보람이 커요. 먹을 게 항상 부족 정감을 찾을 때 가장 뿌듯해요. 했던 아이들은 이곳에 오면 처음에 혼자서 다 먹으려고 욕심을 부려요.
운영의 어려움을 이겨내다 그런데 꾸짖지 않고 두면 자연스럽 아이들이 계속 자라면서 먹을 거뿐 게 내가 욕심부리지 않아도 항상 내 만 아니라, 다양한 교육 환경도 갖춰
야겠더라고요. 더 넓은 세상을 알려
요. 당당한 아이들이 되었으면 해요. 주고 싶고, 더 다양한 지식을 습득할 자신을 감추고, 거짓된 삶을 살고, 속 수 있게 돕고 싶은데 외부 활동은 전 으로 남과 비교만 하는 사람이 아니 부 다 돈이 드니까 처음엔 어려움이 라 나의 가난을 인정하고 그러면서 많았어요. 그땐 저와 아내가 덜 먹고, 도 스스로를 잘 알아서, 내가 잘 하 덜 쓰면 된다는 생각으로 버텼던 거 는 것이 뭔지 내 취향이 어떤지를 아 같아요. 그런데 점점 후원금이 들어 는 당당한 아이로요. 그래서 사회에 오더라고요. 이런 시설이 있다는 걸 나가서도 눈치 보지 않고, 기죽지 않 많은 분이 알게 되어서 여러 도움을 고 살아갔으면 해요. 길샘아동센터 받았어요. 돈뿐만 아니라 라면, 빵, 를 거치는 모든 아이의 미래가 행복
생기면서 운영의 어려움을 덜 수 있 었어요. 많은 분이 도와주신 덕분에
과자 등을 보내주시는 분들도 많이 하길 바랍니다.
받는 사람에서 주는 사람으로 지금까지 센터를 운영할 수 있는 거 아동들이 사회로 부터 받기만 해서 같아요.
꿈꾸는 미래 애들마다 성격도 다 다르고, 취향도
어쩌면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 거나 귄리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 래서 받은 만큼 주는 자로 살아야한 다는 교육과 봉사와 재능기부 등으 다르다 보니까 싸움도 자주 나요. 또 로 내것을 나누는 활동으로 나눔이 래 아이들이 모여 있으니까 어쩔 수 습관이 되도록 아동들과 함께 활동
이들에게 정서적인 버팀목 역할도
없긴 하지만 그런 싸움을 말리고, 아 을 합니다. 어려운 점은 출산율의 감소로 초등 하기 위해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교 학교 학생 수가 급감함에 따라 아동 육은 모두 선생님의 몫이니까 아이 센터의 입소 아동도 줄어들고 있습 들은 그저 즐겁게 자랐으면 좋겠어 니다. 센터가 필요한 아이들이 있거
받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든요. 아동의 교육은 유치윈과 저학 년때가 매우 중요한 시기이고 늦어 도 초등학교 고학년때까지 인성교육 과 사회활동을 통하여 좋은 습관을 길러야되는데 교육의 적기를 놓치는 안타까운 현실이 가슴이픔니다. 가 정도 아동센터에 대하여 인식이 부 족하여 시설이용의 혜택을 받지못하 고 있죠. 아이들이 마음 놓고 교육을
세일어린이공원
설정수 파장동 주민자치회장
주민자치회에서 하는 “ 봉사외에도 김장 봉사나, 민원 처리 등을 도왔습니다. 맡은 일을 하면서 살다 보니까 파장동이 제2의 고향이 되었어요. ”
제2의 고향이 된 파장동
를 맞았죠. 그때 뉴스에서 매일 공직 저는 첫 직장을 구하면서 파장동에 오 자들이 밤을 새워 일하는 모습, 병원 게 되었어요. 벌써 38년째 살고 있습 관계자들이 애쓰는 모습이 나왔어 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정신 없이 요. 그걸 보고 있자니 저도 가만히 있 살다가 파장동에 애정을 갖게 된 건 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20년 전쯤의 일입니다. 그때 동장님 요. 아주 대단한 도움이 되진 못하더 하고 제가 매일 같이 새벽에 등산하러 라도 그저 주민으로서 무언가 해야 다니게 됐는데, 그분의 권유로 동네일 겠다 싶었어요. 마침 제가 위원장이 을 돕게 되었어요. 아주 자연스럽게 었으니까 파장동 각 단체장님 10여 요. 그 후에 주민자치위원으로 활동하 명과 '이겨내자 코로나19비상대책위
면서 간사가 되었죠. 직책이 생기고, 원회'을 결성하기로 하고 바로 주민 일을 하다 보니까 동네에 애정이 생기 등 100여명으로 비대위 구성하여 방 더라고요. 좀 더 살기 좋은 곳이 되었 역 봉사 모임을 만들게 됐어요. 우리 으면 좋겠고 좀 더 많은 사람이 이곳 마을을 지키자는 마음을 갖고 시작 을 좋아했으면 하는 마음이 점점 커졌 했습니다. 주민들도 선뜻 그러자고 어요. 주민자치회에서 하는 봉사 외에 해준 덕분에 가능했어요. 도 김장 봉사나, 민원 처리 등을 돕고 있습니다. 맡은 일을 하면서 살다 보
앞장서서 실행에 옮기다 니까 언젠가부터 파장동이 제2의 고 그런데 막상 방역하려고 하니 준비할 향이 되었더라고요.
뉴스를 보며 느낀 것
게 너무나 많더라고요. 그만큼 돈도 많이 필요해 저를 비롯해 김충수, 홍 승훈, 이학순, 총 네 명이 사비 200만 처음엔 코로나가 무서운 줄도 몰랐 원을 들여 필요한 것을 샀어요. 제가 어요. 그런데 이게 전 세계적인 고통 먼저 돈을 내니까 그 후에는 다른 사 으로 번지면서 우리나라도 큰 위기 람들도 돈을 보태면서 봉사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어요. 동네의 사각지대까
봉사로 얻은 보람과 지혜 지 우리가 직접 다니면서 방역했어요. 확실히 방역 봉사를 하고 다니니까 그때만 해도 나라에서도 대응 시스템 주민들의 불안이 좀 줄더라고요. 그 이 갖춰져 있지 않았으니까, 주민들의 리고 저희를 보고 예방을 더욱 철저 불안감도 높았어요. 사각지대뿐만 아 히 하시는 분들도 많았고요. 결과가 니라 버스정류장, 재래시장, 유치원, 좋아서 다행이었어요. 코로나가 점 노인정까지 다니면서 소독했죠. 그러 차 장기화하면서 저희도 봉사를 오 다 보니까 구청장님도 저희의 활동에 래 할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관심을 두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지원 인원을 분산해서 로테이션을 짰죠. 도 많이 받게 되고 칭찬도 받으면서 다들 각자의 일이 있는 사람들이기 더욱 조직적으로 방역 봉사를 할 수 때문에 봉사에 모든 시간과 체력을 있게 되었어요. 그렇게 코로나가 좀 쓸 순 없는 터라 효율적인 방법이 필 잠잠해질 때까지 1년 반을 넘게 활동 요했어요. 그래서 한 번에 활동하는 했던 거 같아요.
인원을 줄여봤죠. 3, 40명이 움직이
는 게 아니라 10명 정도만 나와서 일
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좋은 사람이 을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꾸준히 계 모인 동네에서 사는 게 참 다행이라 속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어 는 생각도 듭니다. 앞으로도 지역의 요. 여러 노력이 빛을 발해서 나중에 발전을 위해서 지금처럼 서로 도우
저희가 유명해졌더라고요.
는 방송국에서 취재를 나올 정도로 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파장동 주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 파장동 주민들은 내가 당장 살기가 어려워도 봉사를 하려는 분들이 많 아요. 주민자치활동을 하면서 그런 걸 느낄 수 있는 순간들이 많았는데, 어떤 봉사든지 따라와 주시는 분들 이 있기 때문에 좋은 일을 계속해서
방역 중인 마을 사람들
이학순 이학순 베이커리 대표
“사실 처음엔 빵이 아니라 라면이나 돈을 기부했었는데 이런 것보다는 내가 아주 신경써서 만든 정성을 기부하고 싶었습니다. ”
기능장이 되기까지
어야 하는 곳이었어요. 그런 곳에서 제빵 일을 한 지는 30년이 넘었어요. 일을 하다 보니까 기능장 시험에 많 처음에는 작은 제과점에서 일을 했 은 도움이 됐죠. 평소처럼 했을 뿐인 었는데, 점점 더 배우고 싶은 게 늘어 데 좋은 결과가 생겼어요. 하하. 나서 당시에도 유명한 곳이었던 김 영모 제과점으로 직장을 옮겼어요.
사업을 시작하다 기능장님 밑에서 배우면서 일하다 처음엔 자신감만 가지고 제 사업을 가 보니까 저도 남들보다 쉽게 기능 시작했어요. 많이 배웠고, 경험도 많 장이 된 거 같아요. 당시에는 직원이 이 쌓았으니까 거침없이 진행한 거 200명 가까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같아요. 가장 먼저 안양에 1호점을
곳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밸런타인데 개업했는데, 수익이 점점 늘었어요. 이나 화이트데이, 크리스마스 시즌 그래서 자연스럽게 2호점도 내게 됐 이면 고난도의 공예를 꾸준히 만들 죠. 근데 2호점도 잘됐어요. 저뿐만
아니라 아내도 함께 고생했는데 그 태 자체가 달라진 느낌이라고 할까 노력이 가게를 성장시킨 거 같아요. 요? 최근에는 베이커리 카페가 많이 그리고 시기도 좋았다고 생각해요. 생기기도 했고, 그 카페들이 모두 상 요즘이었으면 그렇게 해서 성공하기 향 평준화되어 있기 때문에 경쟁도
과점에서 몽블랑을 시작하고 그게 유명해졌기 때문에, 제 가게에서도
가 쉽지 않았을 거 같네요. 김영모 제 치열한 거 같아요.
사장님의 장사 철학 몽블랑이 잘 나가더라고요. 그렇게 장사 철학이라고 하기엔 조금 부끄 큰 어려움 없이 잘 되던 사업이 가장 러운데, 우리 베이커리 로고에도 강 힘들어진 게 요즘인 거 같아요. 오히 조된 거처럼 ‘L’이 제가 생각하는 중 려 코로나 때는 이렇게까지 힘들지 요한 가치인 거 같아요. 두 가지 의미 않았는데, 코로나 이후에 소비의 형 가 있는데, ‘Lucky’와 ‘Love’예요. 우
리 베이커리를 이용하시는 분들에게 만들어서 쓰고 있어요. 행운과 사랑이 전해졌으면 좋겠어 요. 그만큼 빵의 품질에도 신경을 쓰
‘재능 기부’를 하는 이유 고 있어요. 최근에는 건강한 빵을 위 사실 큰 제과점에서 일할 때부터 봉 해서 재료에 특히 신경을 많이 쓰는 사활동을 쭉 해왔어요. 제과 제빵 일 데, 중장년 고객이 많은 만큼 소화가 을 하다 보면 빵 관련해서 봉사할 기 쉬워서 속이 편하도록 이스트 사용 회가 많이 생기거든요. 당시 스승님 을 줄이고 유산균이 포함된 도우를 께서 워낙 봉사를 많이 하시던 분
이고, 특히 독거노인분들이나 아이 들었고, 스승님께 보고 배웠던 것들 들의 생활에 관심이 많으셨던 분이 이 생각나서 빵을 후원하기로 마음 라서 저도 그걸 많이 배운 거 같아 을 바꿨어요. 이곳으로 이사 온 뒤에 요. 그래서 혼자 사업을 시작한 뒤에 도 아내와 함께 동사무소에 찾아가 도 봉사 단체에 가입해서 꾸준히 재 서 기부를 시작했어요. 이전처럼 아 능 기부를 이어왔습니다. 가게 규모 동보호센터들에 한 달에 한 번 정기 도 커지고 사업이 안정되면서부터는 적으로 빵을 드리고 있고, 코로나 때 안양 아동보호센터 일곱 군데에 정 는 시청과 코로나 대책 본부에도 빵 기적으로 빵을 가져다드리기도 했어 을 가져다드렸어요. 봉사에는 정말 요. 사실 처음엔 빵이 아니라 라면이
다양한 형태가 있다는 것도 알리고 나 돈을 기부했었는데, 이런 것보다 싶어요. 저처럼 재능 기부를 할 수도 는 내가 잘하는, 내가 아주 신경 써서 있지만, 여건이 안 되시면 금전적인 만드는 정성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도움을 줄 수도 있고, 몸 쓰는 일이
필요한 곳도 많으니까, 몸만 가도 큰 는 분들도 꿈을 펼칠 수 있는 사회 도움이 되는 봉사도 많아요.
가 되기 위해서 제가 작게나마 역할 자랑 하나 해도 될까요? 제가 국내 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기뻐요. 사실 장애인 기능 경기대회 심사장을 맡 큰 목적이나 대의를 가지고 봉사하 고 있어요. 국내 기능장들이 주로 맡 는 게 아닌데, 막상 봉사하다 보면 느 아서 하는데, 국내에서 잘하는 사람 끼는 바가 너무 많아요. 제가 받은 은 들을 모아서 기능장들이 지도도 해 혜를 사회에 돌려드린다는 생각으로 요. 프랑스에서 4년에 한 번 장애인 봉사하고 있는데 오히려 하면 할수 기능 올림픽이 열리거든요. 이번에 록 그 마음이 더 커지는 느낌이에요. 우리나라에서 금메달 2개 은메달 1 개를 받아서 무려 종합우승을 했습 니다. 많이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너무 자랑스럽더라고요. 장애가 있
펴낸곳 파장동 행정복지센터 기획, 편집 파장동 주민자치회 디자인 마음 연결 제작 마음 연결 인쇄 팩토리B 주소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파장천로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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