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중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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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변화
기다림의 추억
자유시장
김명신 자유시장번영회장
시장에서 하루를 보냈다.
90년대 자유시장 앞 ‘시계탑’은 학생들과 젊은 사람들에게 약속의 장소였다. 휴대폰으로 서로의 위치를 알리며 만나는 요즘과는 달랐던 시절. 시계탑 앞에는 언제나 기다리는 사람, 달려오는 사람, 반갑게 마주하는 사람, 그리고 기다리다 지친 사람까지 언제나 북적했다. 때로는 모르는 사람과 너무 가까이 서 있느라 민망할 만큼.
그렇게 만난 사람들은 멀리가지 않고 자유시장 건물 안으로 향했다. 지하에서 분식을 먹거나, 2층으로 올라가 쇼핑을 즐기거나, 근처 오락실과 카페로 몰려갔다. 시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1987년 지어진 자유시장은 전통시장이면서도 실내 공간에서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편의성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모았다. 한국전쟁 이후 시장이 형성되면서 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장이 발달해 온 자리. 과거 미군들을 통해 유통되어 수입품을 판매하던 ‘양키시장’으로도 유명했던 곳이다. 사람들에 떠밀려 다니던 90년대 황금기는 이제 그리운 시절이 되었지만 시장의 생기는 여전하다. 438개 점포가 운영되고 있는 자유시장은 원주 전통시장 중 가장 큰 규모다. 지하 식당가는 지금도 점심시간이면 사람들로 북적인다. 돈까스, 떡볶이, 순대국밥 등 맛집들은 끊임없이 올라오는 리뷰가 그
김명신 자유시장번영회장
맛을 증명한다. 마루에 앉아 손만두와 칼국수 면을 빚는 풍경도 지하 식당가의 매력이다. 현장에서 손님에게 판매도하고 인근 식당으로 납품도 한다. 1층은 수선집이 가장 많다. 숙련된 기술자들이 많은 골목이다. 이불가게, 잡화점, 그리고 ‘양키시장’의 명맥을 이어온 수입품 가게들도 만나볼 수 있다. 2층은 지금도 옷가게들이 주를 이룬다.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곳, 전통시장의 인심으로 넉넉해지는 곳. 우리가 여전히 그곳을 애정 하는 이유다.
道來美
도래미시장
다시 오고 싶은
이동기 도래미시장상인회 부회장
시장 ‘만두골목’으로 알려진 곳. 어느 계절이고 늘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지만 특히 겨울에는 점심시간 마다 사람들이 줄을 선다. 가게 입구에 들어서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육수 냄비의 김이 찬바람 맞은 몸을 녹인다. 만두, 칼국수, 옹심이까지 취향대로 주문하면
도매시장이다.
과거 상인들이 자연스럽게 모이기 시작하면서 시장이 형성됐다. 그러다 1975년 ‘농수산물 도매시장’이라는 이름으로 공판장이 설립됐다. 50여년 역사다. 평원로와 문화의거리 사이로 75개 점포가 운영 중이다. 얼마 전까지 ‘중앙시민전통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해 오다 다른 시장들과 선별력을 두고자 시장 이름을 새로이 공모했다. 1등 당선작이 된 ‘도래미시장’은 길 도(道), 올 래(來), 아름다울 미(美)를 써서 ‘아름다운 미래로 가는 시장’이라는 뜻을 담았다. 사람들은 ‘만두골목’은 알아도 시장 이름은 잘 알지 못했는데 이제는 도래미시장의 인지도가 생겨가고 있다.
시장의 인심까지 한 그릇 가득이다. 한두 집 건너 전집에는 노릇하게 부쳐낸 각종 전들이 고소한 냄새로 발목을 잡는다. 김, 튀각, 족발, 젓갈까지 아무래도 먹거리가 눈에 띄지만 사실 이곳 도래미시장은 제품군이 매우 다양한
만두 사진
알려져 있다.
있다.
이동기 도래미시장상인회 부회장
도래미시장은 과거부터 도매시장으로 활발했다. 많은 가게들이 새벽 4시부터 장사를 시작하고, 낮보다 새벽에서 오전이 분주하다. 원주를 비롯해 강원도와 가까운 충청도 지역 소매점들에서 물건을 하러 온다. 생필품 등 일반잡화, 야채, 식품, 소금, 건어물 등 강원 영서권역에서 취급 품목이 가장 다양하다고
역사가 긴 만큼 2대, 3대까지 대를 잇는 가게들도 여럿이다. 덕분에 상인들은 요즘 손님들의 소비 트랜드에 맞춰 가고자 노력한다. 판로확대를 위해 상인들을 중심으로 2년 전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온라인 판매사업, 제사상 차림 주문 판매 등을 함께하고, 시장 내에 무인카페 ‘도래미정원’도 운영한다. 도래미정원은 최근 소규모 전시도 자주 열리고, 시장을 찾는 손님과 상인들 누구나 편히 쉬어간다. 상인들은 많은 사람들이 꼭 다시 오는 시장이 되기를 염원하고
‘미로시장’
윤보현 미로중앙시장
원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중앙시장이 ‘미로시장’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0년 전이다. 1950년부터 시장이 형성되어 긴 세월 중앙동을 원주의 중심지로 이끌어 온 중앙시장은 2000년대에 접어들며 침체되어 갔다. 원주에도 대형마트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온라인 쇼핑몰의 등장은 무서운 속도로 우리들이 소비문화를 바꿔갔다. 그래도 시장을 찾는 사람들은 꾸준했지만 1층보다 발길이 닿기 어려운 중앙시장 2층은 한낮에도 밤처럼 어둑해져 갔다. 오랜 시간 거주해 온 가정집 몇 곳, 그리고 단지 몇 점포가 자리를 지킬 뿐, 다른 공간은 시간이 멈춘 채 방치됐다.
특별함을 가진 전통시장
그런 시장 2층 계단을 다시 오른 사람들은
지역의 예술인들이었다. 그들의 시선은 달랐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저 ‘낡은 것’이었지만 그들은 ‘역사와 흔적’을 찾아냈다. 당시 40년의 역사를 담은 건물에는 시장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했다. 가게 주인도 버려둔 점포, 어둠이 이어진 골목에 거미줄을 걷어내고 먼지를 털었다. 등을 매달고 작품을 걸고, 공연과 전시가 펼쳐졌다. 2013년 ‘예술로 연주하는 중앙시장’사업을 시작으로 다양한 작업을 전개한 예술인들로 인해 멈춰있던 중앙시장 2층의 시간이 다시 흘렀다. 그전과는 완전히 다른 시대의 시작이었다. 뒤이어 예술인들의 시도에 공감한 청년
윤보현 미로중앙시장
창업자들이 등장했고, 때마침 기나긴 침체를 딛고 일어선 중앙시장번영회는 시장 활성화를 위한 지원사업에 도전했다. ‘전통시장 청년상인 창업 지원사업’과 ‘문화관광형사업’이 연이어 선정되면서 사업단이 자리를 잡고 뛰었다. 청년
멈추지 않기를 바라본다.
창업이 줄을 잇고, 시장 환경을 개선하고, 문화를 더해갔다. 청년들은 카페, 수제간식, 인테리어 소품 공방, 공예, 주점 등 다양한 점포를 열었다.
오래 된 구조를 그대로 살려내면서 지금의 감성을 담아낸 인테리어는 시장의 모습을 탈바꿈했다. 골목을 밝히며 재미난 공간을 연출했고,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킨 상인들과 어울리며 전에 없던 새로운 중앙시장의 모습을 만들었다.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아름다운(美) 골목, 가·나·다·라 네 개 동이 골목으로 이어져 한 번 들어서면 길을 찾기 어려운 중앙시장 2층이 ‘미로시장’이 되었다. 새롭게 변한 시장의 모습에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색 시장을 보기위해 전국에서 찾아왔다.
하지만 앞으로 창창할 것 만 같던 미로시장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지긋한 화재가 또 일어났고, 몇몇 점포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으로 상처를 입어야 했다. 이어, 지원 사업이 종료 되면서 사업단 활동이 마감하자 꾸준하던 프리마켓과 문화 행사들도 점차 줄어갔다. 그래도 상인들은 대부분 꾸준히 시장을 이끌어 왔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이내 문을 닫은 가게들이 생겨났다. 그럼에도 여전히 매력적인 미로시장에서 상인들은 10년 전과 같은 생동감을 다시 만들어 내기위해 노력한다. 노후한 시설의 불편과 안전문제가 개선되어 지기를, 끝없이 요구되는 변화에 상인들이 지치지 않고 자리를 지켜주기를. 특별함을 가진 우리의 전통시장, 미로시장의 시간이 다시
문화의거리
중앙로
박영수 문화의 거리 상인회
중앙로 문화의거리가 지금처럼 차 없는 거리의 모습으로 변화된 지 15년이 되어간다. 원주에 오래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과거 중앙로의 풍경이 더 생생할지 도 모르겠다. 시내버스가 다니고 나무가 우거졌던 거리. 좁은 길에 항상 사람들과 차가 뒤섞여 복잡한 거리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앙동 일대 공동화 현상과 소비문화의 변화로 시장은
지정됐다.
침체기를 맞았다. 지역사회는 다양한 상권 활성화 방안을 모색했고, 민간에서 ‘중앙로를 차 없는 거리로 조성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찬반 여론이 대립하기도 했다. 지자체가 의견수렴과 조사·연구의 과정을 거쳐 2006년 사업을 확정했다. 약 5년간의 과정을 거쳐 2008년 연말 1구간이 조성되고 이듬해 문화의거리로
거리의 모습이 확 바뀌었다. 지중화 공사로 나무와 뒤엉켜 건물을 가리고 있던 전신주가 사라지고 건물의 간판들도 정비됐다. 도로와 인도의 경계를 허물고 바닥을 정비하고 나니 좁기만 하던 길이 시원하게 트였다. 차는 사라지고 사람이 걷기 좋은 길, 한층 밝고 깨끗한 거리가 됐다. 연차별로 2구간, 3구간을 조성해 지금의 문화의거리가 완성됐다.
박영수 문화의거리상인회 사업단장은 앞으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문화의거리를 꿈꾼다. “그동안 다양한 사업 추진을 통해 주차장을 조성하고, 환경개선을 해오고 있다. 문화의거리는 전통시장과 상가의 성격을 동시에 가진 곳이다. 걷기 좋은 거리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상인들은 깔끔하게 가게를 관리하고,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또한, 예술인들이 거리로 들어와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임대료를 낮춰가는 건물주들의 배려도 필요하다. 그동안의 부재로 사업 추진에 어려움이 되어왔던 문화의거리 관련 조례를 재정하기위해 상인들과 지역 시의원이 함께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 거리가 이름에 걸맞게 문화와 예술이 함께하는, 상권이 다시 살아나는 거리가 되기를 염원한다.”
문화의거리상인회는 이 거리를 단순히 시장 상가의 기능을 넘어 문화와 예술이 있는 거리로 만들어가고자 꾸준히 노력했다. 다양한 공연과 전시, 문화행사를 접목하며 거리를 변화시켜갔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길에 찾아와 머물고 즐기다 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고민한다. 여름밤의 축제인 문화의거리 치맥축제는 올해로 7회를 맞으며 원주 대표 지역축제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문화의거리 280여곳 상점의 상인들과 지역사회가 함께 노력한 결과다.
박영수 문화의 거리 상인회
시장 이야기
브라더미싱
재단사의 추억
과거 원주의 중앙동은 양복점과 양장점이 한 집 건너 한 집 있을 정도로 많았다. 기성복이 나오기 전이라 대부분 옷을 맞춰 입던 시절이었다. 옷을 맞춰 입으니 당연히 수선집도 함께 있었고, 양재학원도 덩달아 잘되던 때였다. 주상복합 건물로 들어선 자유상가 1층에는 70~80%가 수선집일 정도로 절정기였다. 그곳에서 평생을 재봉기와 함께 한 사람이 있다. 그들의 삶과 애환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토끼 판 돈 들고 찾아온 원주 올해로 57년. 이창화 브라더미싱 대표가 미싱과 함께해 온 시간이다. 1966년 11월 29일 진부에서 토끼를 잡아 판 돈 4,000원을 들고 무작정 원주에 왔다. 먹고
살아가기 위해 중앙시장에서 재봉에 손을 댔다.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 청계천까지 가서 3년 동안 독학을 했다. 그때의 중앙시장은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사람들로 넘쳐났다. 비지밥과 보리밥, 쌀밥을 20~30원에 팔았다. 배고프던 시절, 쌀밥 대신 양이 많은 비지밥을 사서 먹었다. 농협 앞 창성미싱에서 직원으로 일했다. 당시에도 자유시장이라고 불리던 곳은 미제로 넘쳐났다. 영화 <국제시장>과 분위기가 거의 흡사한 소위 양키 시장이 인기를 끌었다. 처음에 일하던 곳은 창성미싱이었고 1966년 12월 26일 중앙미싱으로 가게 이름이 바뀌었고, 그 후 지금의 브라더미싱으로 다시 한번 가게 이름이 변했다. 농협 앞 도로 건너편에 건물이 들어서면서 잠시 자유상가 옆쪽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원래 이 자리는 미공사였다. 군인들 명찰을 오바로크 해주고 관련 물건을 팔던 곳이었다. 원주가 군사도시로 명성을 날리던 때였다. 군인극장 주변으로 특히 양복점과 양장점, 수선집이 많았다. 군인들이 거리를 주름잡고 군인극장 옆에는 군인백화점도 자리했다. 전축, TV 등 가전제품을 싸게 구입할 수 있어 군인 가족의 쇼핑 장소로 유명세를 탔다.
그때는 양복점과 양장점이 수두룩했다. 양복점과 양장점이 사라지면서 그곳에서 일하던 기술자들이 수선집으로 돌아섰다. 양재학원도 있었다. ‘뉴스타일 양재학원’이 분수대오거리 쪽에 있었다. 당시 차부라고 불리던 버스터미널 근처였다. 그 집 아들이 <피노키오> 양장점을 차렸는데 그곳에서 이영희 씨가 일했다.
그리고 이창화 대표를 만나 1973년 결혼했다. 당시에는 혼수품으로 재봉기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1966년 원주에 처음 왔을 때 미싱 가게가 11곳 있었다. 면 단위에는 미싱 한 대 있을까 말까 하던 때다. 재봉기가 귀했던 시절에는 중앙동에서 원주 어디든 자전거로 배달했다. 그때는 문막 가는 길이 비포장도로였는데 아침 먹고 자전거로 배달 가면 종일 걸렸다. 단순하게 배달만 하고 오는 것이 아니라, 사용법까지 알려줘야 했다. 주인만 보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웃집에서도 구경을 오곤 했다.
공장은 없어도 늘어나는 수선집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양복점과 양장점이 호황이었다. 당시에는 모든 옷을 맞춰 입어야 했고, 수선도 해야 했기 때문에 밤새워 일하는 것이 흔했다. 물량이 워낙 많았다. 그때 대한민국 경제가 살아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일거리가 넘쳤다.
늘었다.
가내공업이었다.
작동하기도 어렵지 않다.
이 대표는 강원도 전체는 물론이고 충북과 경기도 일부까지 거래처를 확장했다. 재봉기가 있는 곳이면 모두 거래처였다. 그렇게 호황이던 시절도 끝나고 양복점과 양장점에도 불황이 닥쳤다. 1990년대 기성복의 등장으로 서서히 쇠퇴해갔고, 양복점과 양장점에서 일하던 기술자들도 수선집으로 눈을 돌렸다. 기술이 있었으니 창업도 가능했다. 외국으로 돈을 벌러 가는 사람들도
이창화 대표는 눈이 어두워지고 안 보일 때까지 일을 계속할 생각이다. 자신을 믿고 있는 거래처를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분들이 거래할 때 자신을 쳐다보고 거래했기 때문에 돈이 생겼다고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미싱하는 곳이 많았어도 이창화 대표가 살아남은 이유는 오로지 기술이었다. 여기에 신뢰를 더했다. 원주에도 일부 봉제공장이 있었다. 본사는 모두 서울에 있었지만, 하청 업체가 우산동 쪽에 몰려 있었다. 가방공장과 인형공장 등이 있었는데 대부분
세월은 흘렀어도 수선집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공장은 모두 중국 쪽으로 옮기고 있지만, 수선은 역시 국내에서 해야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싱은 가정주부들이 취미로도 많이 이용한다. 젊은 주부들은 집에서 놀지를 않고 뭐든 배우려고 하는데 그중 가장 인기있는 것 중 하나가 미싱이다. 요즘은 미싱기도 좋아져서
원주의 명동, 과거 중앙동으로 귀환을 꿈꾸다
이 대표는 중앙동의 오래된 건물로 금성호텔을 꼽았다. 1966년 원주에 왔을 때 이미 있던 것으로 기억했다.
“금성호텔은 고위 군 간부들이 잠을 자던 곳이었어요. 거기다 평원동 쪽은 부촌이었거든요. 서울에 가면 명동이 대표적인 번화가잖아요. 원주는 중앙동이 대표적인 번화가였죠. 과거의 중앙동은 밤이고 낮이고 사람들로 북적였거든요. 주점과 호프집, 먹자골목에 사람들이
이창화(74) 브라더미싱 원주점 대표 · 아내 이영희 님 이봉자(62) 전 봉수선 대표
넘쳐났어요. 이 거리가 예전처럼 다시 한번
상추 아줌마와 돼지 분식
원주 민속풍물시장 오일장의 오래된 이야기
원주 풍물시장에 가면 특별한 사람 2명을 만날 수 있다. 풍물시장이 생겼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 많고 따뜻한, 이제는 아흔을 바라보는 아줌마 같은 할머니 두 분이다. 오일장이 서는 풍물시장은 이른 아침부터 들썩인다. 과거처럼 외지에서 들어오는 장돌뱅이가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이곳을 찾는 외지인이 많다. 풍물시장에 작은 가게를 가진 상인들도 가장 바쁜 날이다. 오늘도 평소처럼 밥을 준비하고 싱싱한 채소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는 두 분. 30여 년이 넘도록 한 자리를 지킨 연배 비슷한 두 할머니의 이야기다.
오일장의 스타 상추 아줌마 풍물시장 장날은 아침부터 사람들로 북적인다. 상추 아줌마로 불리는 장옥룡(86) 할머니가 펼쳐 놓은 야채 가게(제천상회)는 새벽 5시부터 시작됐다. 난전처럼 펼쳐진 바닥에는 배추며 호박, 무 등이 가득하다. 장 할머니를 찾아가자 주위 상인들이 ‘풍물시장 스타’라며 치켜 세운다. 풍물시장이 생길 때부터 지금까지 함께 해 온 산 증인이기 때문이다. 풍물시장은 장 할머니에게 은인이나 다름없다. 일찍 남편을 먼저 보내고 3남매를 키울 수 있도록 해준 고마운 존재가 바로 이곳이다. 집에서 살림만 하던 장 할머니는 남편을 일찍 여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상추를 조금씩 뜯어다 중앙시장에서도 팔았다. 그때부터 상추 아줌마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러다 1989년 지금의 풍물시장이 들어서면서 이곳에 자리를 폈다. 벌써 30년도 넘게 이 자리를 지켰다. 아이들 잘 키우고 밥은 먹고 살았다.
“그때 만 해도 매일 장이 설 때였어요. 얼마나 장사가 잘됐는지 몰라. 상인들도 엄청나서 자리가 없을 정도였으니까. 자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엄청나게 애를 썼지. 그때 비하면 지금은 수입도 10분의 1로 줄어들었지. 지금은 장돌뱅이들도 많이 안 와. 그때처럼 잘 되면 얼마나 좋겠어. 5일에 한 번씩 장이 서는 걸로는 어림도 없는 얘기지 뭐.”
풍물시장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 앞쪽에는 키 작은 집들이 즐비했다. 지금은 건물이 제법 들어섰지만, 당시에는 대부분 허름한 집이 많았다. 풍물시장 역시 아무것도 없이 가게마다
샷시 두짝만 있었다. 그래도 사람들로 넘쳐났다. 살만하던 시절이었다. 풍물시장이 생기고 나서 건물들도 하나 둘 생겨나 지금의 형태를 갖췄다. 매일 서던 장에서 5일 장으로 바뀌면서 수입은 반에 반 토막이 났다.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무슨 대책이 필요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요. 여기서 많은 사람이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데 5일에 한 번 장사가 반짝한다고 되겠어요? 안타까울 뿐이에요.”
장 할머니가 펼쳐 놓은 채소는 새벽시장에서 구한다. 호박이며 배추, 무 등 다양하다. 장이 서야 나오지만, 새벽시장은 매일 나간다. 필요한 것을 미리미리 구해놓는다. 장날 팔다 남은 채소는 단골식당에 저렴하게 팔고 있다. 오래된 나름대로의 방식이다. 호박은 한 개에 천 원, 가지는 두 개에 천 원, 배추도 팔고, 무도 팔고, 감자도 팔았다. 처음에 함께했던 사람들은 지금 그의 단골이다. 오며 가며 쉬었다 가고 물건도 사준다. 참으로 고마운 인연이 아닐 수 없다.
23년째 2,000원짜리 백반 – 돼지 분식 한쪽으로 길게 늘어선 가게들이 즐비하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가게라야 2~3평이 고작이다. 그곳에 술집이며 찻집, 음식점이 들어서 있다. 평소에는 희미하게 켜져 있는 형광등조차 쓸쓸해 보일 정도로 왕래하는 사람이 드물다. 그 중간쯤 23년째 2,000원짜리 백반을 팔고 있는 돼지 분식이
자리 잡고 있다. 가게 주인 현금순(87) 할머니는 장날이면 새벽 5시 풍물시장에 도착한다. 단구동이 집인 현 할머니는 버스가 없어 가끔은 택시를 탄다. 과거에는 매일 장날이어서 돼지 분식의 풍경도 장날답게 붐볐다. 떡 팔던 할머니들이 많아 단골도 꽤 있었다. 할머니들이 다른 곳으로 가면서 단골도 뚝 떨어졌다. 지금은 장날이라도 사람들이 드물다. 단골들만 가끔씩 찾고 있다. 돼지 분식 메뉴는 3가지다. 비빔밥과 보리밥, 백반. 돈이 될까 싶어 1,000원짜리 커피도 팔지만 영 시원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반의 반찬은 무려 일곱가지다. 콩자반과 김치, 콩나물 등 반찬과 계절에 따라 장국, 미역국, 오이냉국을 내놓는다. 든든한 한 끼를 먹을 수 있다. 장날만 문을 여는 것도 돈을 벌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매일 장이라도 열리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 현 할머니가 이 자리에서 장사를 시작한 지는 꽤 오래됐다. 처음엔 야식을 팔았다. 야식을 팔게 되니 자연스럽게 술도 팔았다. 그런데 몸이 아프기 시작했고 그것이 신병이란 걸 알게 됐다. 절에서 생활도 해봤지만 좀처럼 낫지를 않았다. 그때 축복처럼 다가온 것이 하느님이었다.
하느님을 알게 되면서 술장사를 접고 밥만 팔았다. 2,000원씩 받겠다는 것도 그때 하느님과 한 약속이었다. 하느님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어 지금까지 그때 약속한 금액 그대로 받는다. 너무 저렴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식자재도 저렴한 것을 사용해야 했다. 저렴하지만 될 수 있으면 신선한 재료를 이용하려고 애쓴다.
“평생 좋은 일을 해 본 적이 없어. 남은 인생 선한 일 한다고 생각하고 음식을 팔고 있지. 처음에는 장사가 제법 됐지. 오일장이 되면서 영 장사가 안돼. 그렇다고 하느님과 한 약속이 있으니 음식값을 올려 받을 수도 없어. 그저 좋은 일 하는 셈 치고 장사하는 거지. 23년 전에는 식당에서 제일 비싼 음식이 4,000원이었고, 제일 싼 메뉴가 3,000원 받았어. 그래도 그때는 2,000원 받아도 돈을 벌었어. 사람이 많았으니까.”
현 할머니가 힘들지만 2,000원씩 받고 문을 여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하느님의 좋은 말을 전해주고 싶어서다. 자신이 힘들었을 때 하느님이 힘이 되었듯이 다른 누군가 삶이 힘들 때 한 번쯤 찾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서다. 현 할머니는 이제 곧 점심시간이 다가온다며 테이블에 수저와 컵을 놓는다. 혹시라도 손님이 몰려들면 손이 모자랄까 걱정해서다. 초여름 해가 느릿느릿 넘어갈 즈음 두 할머니도 장사를 끝낼 준비를 한다. 과거의
명양복점
미로시장 가동, 매일 문 여는 ‘명양복점’
명까지 넷이 일을 했다. 양복점을 하면서 사남매를 길렀다.
40년 전 운영을 시작했다. 중앙시장 건물은 원래 이렇게 가게마다 벽이 있는 형태가 아니라 백화점처럼 넓은 공간에 점포를 두는 구조로 지어졌다. 이 양복점은 점포 칸수로 두 칸인데 평수로는 네 평 반이다. 이 자리는 과거에 한 동을 한 사람이 소유하고 농 가게(가구점)를 운영 하다가 지금 문화의 거리 밑으로 당시에 가구골목이 형성되면서 옮겨갔다. 그 후 이 자리가 비어 1층에 가게 하던 사람들이 칸을 막아 창고로 사용했다. 그러다 양복하는 사람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대부분 외부 양복판매점에서 위탁받아 양복을 만드는 하청 공장들이었다. 나 역시 공장으로 시작해서 나중에 양복점을 운영했다. 이곳에 양복공장이 11곳 있었다. 시간이 흘러 불경기가 되고 거의 없어져 지금은 두 집 있다. 여기 와 가게를 운영한 지 7년 반 만에 화재가 났고, 모두 불에 탔다. 어느 식당에서 불이 처음 발화해 시장 전체에 번졌다. 건물을 다시 축조하고, 상인들이 가게를 다시 꾸릴 때 화재 예방을 위한 시설을 갖춰야 허가를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래서 벽을 쌓고, 알루미늄 샤시를 시공해 번듯한 모양의 점포를 갖추게 됐다. 전에 장사가 잘 될 때는 안사람과 기술자 두
지금은 사람들이 양복이나 한복을 맞춰 입는 일이 거의 없다. 상황에 맞게 예의를 갖춰 옷을 입어야 하는데 잘못된 부분이 많다. 결혼식장, 장례식장에 가보면 예의를 갖춰 복장을 한 사람들을 찾기 어렵다. 양복을 맞추러 오는 손님들은 이게 거의
없지만 매일 가게 문을 연다. 집에 멍하니 있는 게 아니라 출근할 곳이 있다는 게 좋은 일이다. 나와서 신문, 방송보고 컴퓨터도 하고 그런다. 내가 매일 나와 있는 것을 아니까 볼일이 있는 사람들은 연락도 없이 그냥 가게로 찾아온다. 컴퓨터는 모르고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아 책을 사다 독학으로 배웠다. 필요한 기능만 사용하는 정도다. 스마트폰도 사용하고 있다. 형편이 허락되지 않아 학교도 많이 못 다니고 다른 사람 권유에 의해 양복기술을 배우기 시작해 갖은 고생을 했다. 지금 와서 보니 그래도 나이 먹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나에게 주는 즐거움이다. 지금까지 누구의 도움 없이 내가 벌어서 생활하고 있다.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계속 가게 문을 열 생각이다.
1970년, 도래미시장이 과거
않던 기억이 있다.
원주 김치만두
만두 골목의 시작, 3대를 이어가는 ‘원주김치만두’
농수산물도매시장이었던 시절 할머니께서 시장 골목에 사시면서 만둣국 장사를 시작하셨다. 형편이 어려워 뭐라도 해서 팔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만두를 빚어 집 앞에서 장사를 시작하신 것이다. 고기가 비싸 고기 없이 배추를 다져서 만두소를 만드셨다. 저렴한 가격에도 인심이 좋으셔서 손님들이 많아졌고, ‘김치만두’가게라고 소문이 났다. 어려서부터 할머니 만두를 먹고 자랐는데 그때도 맵지 않고 질리지
부모님께서 할머니에게 만두를 배워 장사를 하신 지는 30년이 되셨고, 지금도 도래미시장 가게와 행구동 2호점 일을 함께 하신다. 부모님께서 과거에 돌아다니시면서 별별 장사를 하시고, 사기도 당하시고 고생을 많이 하셨다. 그러다 할머니 가게 바로 옆 자리에서 만두를 배우며 장사를 시작하셨다. 가게 안쪽에 커튼 하나 치고 살림하시면서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셨다.
만두골목이 되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장애가 있으셔서 처음에는 어려움도 많으셨다. 몸이 힘든 것 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사람들의 편견이었다. 그때는 대놓고 그런 말들을 하던 때라 많은 설움을 견디셨다. 그래도 맛있다고 찾아주시는 손님들이 많았다. 가게가 좁아 테이블이 3개 밖에 없었는데, 식사 하시는 손님 뒤에 다음 손님들이 앉아 기다리시고, 합석도 많았다. 지금 떠올리면 좁은 가게 방에 다닥다닥 줄을 지어 앉아
기다리시던 손님들 모습이 진풍경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만두가게들이 늘어 지금의
할머니, 그리고 부모님 뒤를 이어 가게 일을 시작한지는 16년이 됐다. 그때는 스물네 살 철없는 마음에 시장에서 일 배우는 게 창피하기도 했고, 내 시간 없이 고되기만 한 가게 일이 너무나 힘들었다. 그래도 이른 나이에 아내를 만나 아이도 낳고 가장이 된 덕분에 책임감을 갖고 가업을 번창 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혼자 힘으로는 부족해 아내에게 부탁해 함께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부모님께서 단계적으로 철저하게 일을 가르쳐주셨다. 운영은 늘 부모님께 배운 대로 해 나가려고 한다. 다만, 긴 세월 고생하신 부모님께서 이제는 조금 쉬엄쉬엄 하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예전에 시장은 매일 복닥복닥했다. 아침과 저녁으로 가게 앞에 삼삼오오 모여 불 피우고 차도 마시고, 양미리도 구워먹곤 하셨다. 상인 분들도 그때는 다 젊으셔서 더 활기가 넘쳤다. 인심 좋고 정 많은 시장의 모습을 지켜갔으면, 상인 분들도 모두 건강하셨으면 한다.
연안상회
새벽을 여는 곳, 건어물 전문 ‘연안상회’
일을 하게 되어 지금은 형님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
너무 힘들고, 친구들처럼 놀러 다니고 싶고 그랬다. 그래도
하다. 시장 상인회장을 맡은 후로는 고민이 늘었다. 시장이 지금의
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상인들의 협력과 실천이
은퇴를 앞두고 계신 어르신들과의 세대교체가 자연스럽게
큰 공을 세우신 분들이다.
되고, 중앙동이 언제나 활기 넘치는 마을이기를 소망한다.
지금 자유시장 옆 골목인 순댓국 골목에서 태어났다. 당시 부모님께서 장사하시면서 그 골목에 가정집을 두셨다. 이 길에서 나고 자라고, 부모님 가게를 물려받아 운영한지 30년이 됐다. 그래도 우리 시장에서는 아직도 막내다. 부모님은 1970년부터 지금의 건어물 전문 연안상회를 운영하셨다. 부모님은 언제나 새벽 4시면 일어나 장사를 시작하셨고, 가게는 늘 바빴기 때문에 가게 일을 돕는 것은 당연했다. 군대 다녀와 철이 좀 들고나니 부모님께서 고생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마침 장사에도 재미를 느껴 자연스럽게 부모님께 배우며 가게
20대 초반에 가게 일을 시작 할 때는 새벽에 일어나는 것부터
돌이켜보면 일이 바쁘니까 고민할 겨를도 없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던 것 같다. 부모님께서 다 갖춰놓으신 운영 방식을 물려받았을 뿐이다. 부모님 댁이 근처에 있어 지금도 어머니께서 매일새벽 밥을 지어주시면 아버지께서 챙겨다 주신다. 부모님께서 손을 놓으신 지 20년이 됐지만 여전히 부모님 그늘에 있는 것 같다. 잘 키워주시고, 다 이뤄놓으신 가게까지 물려주신 게 감사하기만
모습에 안주하지 않고 젊은 사람들이 편하게 찾아오는 시장이
중요하다. 다행이도 어려서부터 자랐던 시장이라 상인 분들께서 협조를 잘 해주신다. 수익을 창출하는 시장이 되도록 하기위해 다양한 시도와 노력을 하고 있다. 그래야 젊은 상인들이 유입되어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 시장의 자산인 만두골목 역시 잘 이어가야 한다. 맛을 지켜온 만두 가게 사장님들이 우리 시장을 알리는 데
현재 도래미시장, 자유시장, 중앙시장 3개 시장 회장들이 모여 통합상인회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는 나눠진 시장이 아니라 하나라고 이야기 한다. 아이디어도 공유하고, 상인들이 함께 노력해야 할 것들을 의논한다. 3개 시장만 해도 900개 점포 이상이다. 우리 시장들 모두가 잘
엄마네 돈까스
있다.
찾아주시면 감사하겠다.
돈까스 골목 ‘엄마돈까스’
올해로 가게를 운영한 지 8년 차에 접어들었다. 아마도 이 돈까스 골목에서 우리 가게가 연차가 가장 짧은 것 같다. 맛있는 집들이 이렇게 많은 골목에서 자리를 잡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처음에는 작은 평수로 시작했다. 가게가 작아 점심시간에 못 드시고 되돌아가는 손님들이 많았다. 올해 초 바로 옆집에 찻집을 운영해 오신 형님과 가게를 합쳐 확장 오픈했다. 다행이 많은 손님이 찾아주시고, 덕분에 남편과 형님과 함께 즐겁게 일하고
우리 아이들 밥 해주는 마음으로 장사하려고 ‘엄마네돈까스’라는 상호를 지었다. 조미료를 쓰지 않고 음식을 하고 있다. 남편 역시 고집스러울 정도로 정성을 다한다. 남편이 새벽
5시부터 나와 생등심을 두드려 돈까스 고기를 준비한다. 생돈까스라 기름도 자주 갈아야 하고, 소스도 다 직접 만들어 일이 많다. 그래도 손님들께서 정성을 알아주시는지 정말 맛있다고 해주신다. 어떨 땐 장사가 힘들어 지치기도 하지만 손님들 만나며 보람을 느낀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니까 언제나 활기 있고 참 재밌다. 가게를 찾아주시는 손님들도 좋은 분들이 많다. 얼마 전 단골손님 한 분은 “믿고 먹을 수 있는 가게가 있어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남겨주셔서 큰 힘이 됐다. 우리 가게에 마음 착한 손님들만 오시는 것 같다. 시장 상인 분들이 모두 코로나19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제는 많이 회복되어 손님들이 다시 찾아주신다. 거의 2년이 넘는 긴 시간이 지났는데도 잊지 않고 다시 와주시는 게 참 감사하다. 힘든 시기를 극복한 만큼 앞으로 시장이 더욱 활성화 되었으면 한다. 우리 시장 모든 가게가 더불어 잘 되었으면 좋겠다. 나 혼자 잘 되는 게 아니라 함께 잘 되어야 이 시장이 오래간다. 경제적으로는 어려운 시기인데 푸짐한 인심이 있는 시장으로 많은 손님이
애지
2층 사랑방, 의류점 ‘애지’
장사를 처음 시작할 때 아이 낳고 4개월 쯤 됐을 때였다. 어린 아기를 데리고 나와 아무것도 모르고 장사에 뛰어들었다. 가게에서 젖 먹이고, 손님이 오시면 다른 손님이 애기를 봐주시고 그러면서 일했다. 어느 날은 정신없이 손님 받고 보니 애가 없어졌다.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한참 시장 2층을 뛰어다니며 아이를 찾다가 중앙파출소에서 데리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데려왔다. 아이가 시장을 혼자 기어 다니는 것을 누군가 파출소에 데려다 준 것이다. 그 짧은 시간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지금도 그때 기억이 생생하다. 애기 돌잔치도 여기 가게에서 치렀다. 어느덧 36년 전 일이다. 지금 생각하면 겁 없이 젊었다. 그때를 떠올리면 어떻게 살았나 싶고, 다시 하라면 못할 것 같다. 손님들이 도와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자유시장 2층은 초창기에도 옷 가게들이 많았다. 원목가구점도 있고, 다방도 있었는데 차차 다른 업종은 없어지고 대부분 의류, 패션잡화점 중심이 됐다. 90년대까지 장사가 정말 잘 됐다. 그때 원주에 이렇게 한 곳에 옷가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은 여기 말고는 없었다.
여성복은 젊은 사람들이나 나이든 사람 모두 여기로 쇼핑을 나왔다. 발 딛을 틈도 없이 사람들이 몰리던 시절이 있었다. 대부분의 가게들이 주인이 많이 바뀌었지만 개장할 때부터 함께 장사 해온 사람들도 많다. 서로 다 친하고 늘 힘이 된다. 지금은 시장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줄었다. 요즘은 특히 경기가 좋지 않아서 상인들이 많이들 힘들어 한다. 20대, 30대 젊은 사장들을 보면 내 젊은 시절이 생각난다. 열심히 하는 모습들 보면 너무나 예쁘다. 매출이 잘 나와야 힘이 날 텐데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요즘은 매일 아침 일어나 ‘사랑방에 놀러가야지’하는 마음으로 가게에 나온다. 장사는 잘 되지 않지만 일터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지금도 많은 분들이 가게를 찾아주셔서 가게에 혼자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 손님들과 정보도 공유하고, 재밌게 장사하고 매일 웃다가 돌아간다. 일을 할 수 있어 내 몸도 건강하고, 장사하면서 좋은 분들은 많이 만난 것이 최고의 재산이다.
달리
미로시장 라동, 페브릭공방 ‘달리’
곳이었으면 좋겠다.
중앙시장 2층 미로시장에서 페브릭 공방 ‘달리’를 운영하고 있다. 엄마와 아이가 함께 입는 옷을 만드는 공방으로 시작해 지금은 다양한 페브릭 의류와 소품을 만들고 클래스도 운영하고 있다. 2016년 미로시장 청년창업사업단에 선정되면서 시장에 가게를 열게 됐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 우울증을 이겨내기 위해 미싱을 배웠고, 중앙시장 2층이 월세가 저렴하다는 말만 듣고 무작정 왔다가 창업을 준비했다. 돌아보면 너무나 설레고 가슴 뛰던 시절이다. 창업을 하고 가장 기뻐해준 사람은 아이들이었다. 일하는 엄마가 멋있고 자랑스럽다고 얘기해주곤 한다. 지금 가게는 미로시장에서만 세 번째 이전한 자리다. 처음 나동에 점포를 얻어 2년 간 운영하다가 클래스를 운영하고 싶어 같은 나동에서 더 넓은 점포로 이전했다. 그리고는 9개월 만에 불이 났다. 2019년 1월 2일 오전이었다. 불이 난 것도 모르고 작업을 하다 마지막으로 탈출했고, 대출받아 꾸민 두 번째 가게를 몽땅 잃었다. 너무 절망적이었고 시장을 떠나야겠다는 생각도 수 없이 했다. 그래도 계속 중앙시장에 남아 있는 것은 이곳에는 ‘오래된 것’과 ‘지금의 것’의 공존에서 나오는 시너지가 있다. 그리고 언제나 사람이 북적이는 생동감이 있다. 화재 이후로 안전에 대한 불안감으로 로드점 점포를 알아보기도
했지만 막상 가보면 어쩐지 썰렁한 느낌이 들어 다시 마음을 접었다. 요즘 들어 시장을 찾는 사람이 많이 줄어 아쉬움이 크다. 처음 창업했을 때가 그립다. 문화관광형시장사업이 진행되면서 상인들, 그리고 많은 지역주민들과 함께 즐겁게 일했다. 체험거리, 행사, 즐길 거리가 넘쳤고 하루하루가 신났던 기억이 난다. 매일 가게에 나와 오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수많은 아이디어를 떠올려본다. 모든 상인 분들이 그러할 것이다. 나 혼자 잠깐 생각한 아이디어는 거기에 그치지만, 많은 상인들의 생각을 모으면 미로시장을 다시 활성화할 좋은 기획이 나올 거라 생각한다. 지자체에서도 전통시장을 위해 그러한 노력을 해주었으면 한다. 가족들이 중앙동 시장에 나와 체험하고, 떡볶이도 먹고, 차도 마시고, 장도 보고 돌아가는, 시장이 그런 즐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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