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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의 아름다운 이야기 - 양지마을 어르신들의 생애구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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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쪽

양지마을 어르신들의 생애구술사

철원군 근남면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 마을주민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육단리

2쪽

내 생의 아름다운 이야기

양지마을 어르신들의 생애구술사

발행일발행처

2023. 10. 철원군청 건설도시과

제작총괄

기획진행

자문감수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함복희

기록자

구술자

디자인

남상호

양지마을 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 사무국장 지문규 팀 장 남상호 팀 장 정의현

강원대학교 교육인문협력학과 BK21 교육연구단 교육연구단장 유강하 연구교수 이한나

강원대학교 교육인문협력학과 BK21 교육연구단 고혜진, 이소정, 조성미, 양송이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근남면 양지마을 주민 김정희, 김숙희, 박재서, 박승관, 임순이, 최광숙

6쪽

이야기 시작에 앞서

Prologue

양지마을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하면서 마을의 변천사를 아카이브로 구축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던 도중 강원대학교 교육인문협력학과 BK21 교육연구단과 협업하면서 생애 구술사를 집필하게 되었습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한 지역의 변천사를 겪은 마을주민들이야말로 아카이브의 시작점이라 생각하여 양지마을에 오랜 시간 동안 자리를 지켜온 마을주민 여섯 분을 선정하여 진행하였습니다. 구술자분들이 철원군 근남면에서 경험했던 내 생에 기억이 남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시간순으로 기록하였으며 이 책을 읽을 독자분들은 하나의 이야기를

읽는다는 생각으로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7쪽

양지마을은 6.25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 상점과 식당 및 숙박업을 중심으로 크게 번성했던 지역으로 마을의 경제적 호황이 최고였으나, 위수지역 완화로 인한 상권 축소 및 인구 유출로 마을이 한껏 위축 되었습니다. 2021년부터 마을을 살리기 위한 도시재생 계획 수립과 실행으로 마을에 활력이 생기고 미래가 기대되는 양지마을의 변신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힘이 된 양지마을 어르신들의 삶과 애환은 지금의 양지마을이 존재하는데 큰 거름이 되었고, 양지마을 어르신들의 마을 지키기는 한 말씀 한 말씀이 우리의 가슴을 찡하게 합니다.

한 분 한 분의 이야기는 양지마을의 살아있는 역사이고 소중하게 간직해 온 삶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우리 아버님, 어머님들의 향기이며, 어릴 적 고향의 모습과 아득한 기억 속 삶의 이야기를 통해 가슴에 품어온 추억을 이번 가을에나마 되살릴 수 있어 행복했고 양지마을이 쨍한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50년, 100년 후 양지마을의 미래가 어르신들의 기운을 받아 더욱 행복한 향기가 끊이지 않는 마을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지문규

양지마을 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 사무국장

8쪽

뜨거웠던 지난 여름, 강원대학교 교육인문협력학과 대학원생들이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육단리(六丹里)를 찾아, 오랜 세월 동안 마을을 지키고 살아오신 여섯 어르신의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겼습니다. 목소리에서 문자로 옮겨진 책 속에는 여섯 분 어르신들의 살아있는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도시재생’이나 ‘지역재생’의 진정한 성공 여부는 물리적 변화와 개선에 앞서, 삶이 보여주는 생기와 다채 로움을 발견하는 데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나이를 입는 동안, 건물도 거리도 세월에 풍화되어 가지만 어르신들의 마음 만큼은 여전히 윤기가 납니다. 이 책은 어르신들의 기억과 마음이 만들어낸 살아있는 마을의 역사입니다.

육단리(六丹里)라는 마을의 이름은, 여섯 어르신들을 만나기 위해 기다렸던 이름이 아닌가 싶습니다. 변함없이 순수한 마음을 단심(丹心 )이라고들 합니다. 오랜 세월, 한결같이 마을을 지켜오신 여섯(六) 어르신들의 변함없는 마음(丹)이 만들어낸 마을(里) 이야기, 그 고운

이야기의 향연 속으로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강원대학교 교육인문협력학과 BK21 교육연구단장

유강하

10쪽

김정희

이소정

1장 | 나는 약집 손녀딸이야 2장 | 근남식당 이야기 3장 | 취미도 겸하는, 능력 있는 회장

김숙희

조성미

1장 | 항상 내 옆에는 2장 | 중앙식당 이야기 3장 | 내 꿈은

박재서

편

고혜진

1장 | 나는 지금도 감자를 안 먹어

3장 | 난 이상하게 농사가 좋더라고

이야기 순서

Story Contents

2장 | 그냥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어, 참하고 예쁘더라고

4장 | 우리 육단리(六丹里)가 얼마나 예쁜 이름이냐면

11쪽

박승관

양송이

1장 | 나의 청춘을 떠올리며 2장 | 농사꾼으로 거듭나다

임순이

최광숙

편 1장 | 내게도 꿈이 있었지 2장 | 삶의 고비를 넘고 넘어 3장 | 내 삶의 원동력, 베풂 4장 | 소중하고 찬란한 나의 인생

3장 | 함께 살아가는 터전, 양지마을

고혜진,이소정

1장 | 원래 철원 사람은 아니었어요 2장 | 농사도 짓고, 자식 농사도 짓고 3장 | 봉사가 무슨 목표가 있나, 그냥 하는 거지 4장 | 육단리(六丹里) 그리고 사람들이 좋아

조성미,양송이

제목을 입력하세요

13쪽

첫번째 이야기 | 김정희

날보고 약국집 손녀딸인데 이런 촌으로 시집 왔다고.

지금으로 말하면 통일촌이야. 통일촌에서 태어났어. 내가 약집 손녀딸이야. 그 아저씨가 그랬어.

14쪽

지금 옛날에는 거기가 어디지? 지금으로 말하면 통일촌이야. 통일촌에서 태어났어, 옛날에. 그때가 언제야? 사삼년생이면. 생일은 8 월 21일. 나 학교 안 다녔어. 그, 내가 약집 손녀 딸이야. 김치상 씨라고 할아버지가, 그러니까 증조 할아버지지? 이제 거기를 느릅실이라고 그랬어, 옛날에. 그 통일촌을 유곡리라고 그랬어. 근데 거기서 이렇게 침쟁이 하셨어. 그리고 김육경 씨가 이제 우리 할아버지고. 그 할아버지 는 피난 나와 가지고 와수리서도 침쟁이 하셨어. 여기 유신상회 아저씨가 있는데, 그 아저씨가 그랬어. 날 보고 약국집 손녀딸인데 이런 촌으로 시집 왔다고. (웃음)

15쪽

태어날 때 태몽은 못 들었어. 이름은 곧을 정자, 기집 희자. 정자가 돌림자여. 정자, 정옥이, 그렇게. 그리고 남자 동생 집안에는 ‘수’자 돌림. 다 사춘(사촌)은 수석이, 수식이, 수복이, 뭐 이렇게 나가는 걸로 하더라. 내 이름은 누가 지었는지 잘 못 들었는데. 할아버지가 졌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어. 부모님은 농사했어. 작은아들이야, 아버지가. 큰아버지는 좀 날렵하고 아주 빨라. 근데 우리 아부지는 순하고 착해.

우리는 딸이 넷, 아들이 셋. 일곱이야. 근데 오빠 하나 돌아가시고 나는 두 번째. 오빠는 피난 나가서 어렸을 때 잃어버렸어. 그랬는데 이제 피난 나갔다가 들어왔잖아. 들어와서 김화에 구호주택을 지어줬어, 나라에서. 입주시키느냐고. 김화, 거기서 살았는데, 거기서 그냥 내가 첫 번째니까 애기 업고, 애기 봐줘야지. 그리고 거기서 좀 어려웠지, 옛날에. 어렵게 살다가. 근데 그냥 시집을 또 일찍 왔어. 일찍 와서 아들 둘, 딸 하나. 셋 낳고.

<딸이 그려준 그림>

16쪽

시집을 열아홉에 가서 열심히 살았어

가만히 있어, 아들이 육이년생인데. 그러면 고거 1년 있다가 낳았으니까 61년도에 왔나 봐. 그럼 빼봐야지? 그때 열아홉 됐나? (웃음) 연애 이런 거 모르고 주위에서 … 결혼 전에 남편은 아예 못 보고 시집갔어. (웃음) 같은 철원, 김화에서 이제 요리 왔어. 건너 건너 아는 사람인지도 몰라. 어떻게 살았는지, 살았어. 집에서 밥도 잘 안 하고 애만 보다가 왔는데, 시어머니, 시아부지, 시누가 하나 있고. 시누님 둘은 이제 출가하시고 어르신이고. 그리고 이제 시누 한 분하고 같이 몇 식수(식구수)야. 그러면 셋, 다섯 식구나? 다섯 식구인데 이제 밥.

물동이를 져오다가 밥을 해 먹었어. 저쪽 개울 건너가서

17쪽

물동이를 여오는데. 물동이 이는 이 바가지를 엎어놓으면 흔들흔들. 그러면 일일이 물이 흘러. 그러더니 그다음에는 요만침 또 우물을 그 다음에 두레박 우물을 파줬어. 그래서 두레박 우물을 파서 또 거기서 지어 먹다가 조금 생활이 좀 나아지니까. 그다음에 집 안에다가 우물을 팠어. 물 기르는 거 한 2, 3년 했을걸? 그러다가 이렇게 야금야금해서 집으로 들어와서 인자 살았지.

빨래는 개울 나가서 했어. 저어기 샘물에 가서 빨래 빠니까 그때 고무장갑 안 끼었어. 겨울에도 응, 고무장갑 안 꼈는데. 그냥 큰 애를 낳는데, 고무장갑이 없어. 그러니까 이제 뜨거운 물에다가 이렇게 담궈가지고 나가. 집에서 조금 주물러 가지고. 뜨거운 물에 주물러 가지고 가서 헹구는 거야. 손이 시렵지. 빨리 얼른 들와가지고. 손이 얼어서 더운물에 녹이고 이제 그렇게. 겨울에 빨래 추워서 잘 안 말랐어. 빨랫줄 바깥에 매 놓고 있어. 비가 오면 빨래 걷어야지. 나무도 젖잖아. 그럼 나무 들여놔야지. 그런데 지금은 엄청 편안하잖아.

18쪽

몸조리 없이 일도 하고, 효부상도 탔어

애기 낳은 후에 바로 일을 했어. 큰 애 낳았을 때는 이제 괜찮아서. 그렇게 빨래 해나가서 하다가 하고. 애기 낳고 일주일 좀 넘었나 봐. 그때는 안 아픈 것 같더라고. 그러니까 그때가 동짓달이니까 조금 오래 있었나 보다, 조금은. 이제 몸조리를 해놓는 끝에 동짓달에 생일이니까.

그리고 이제 7월달에 애 하나 낳았는데, 그때는 몸조리를 못했어. 7 월달에 어른들이 일 다녀 밭으로. 밭 내려가면 나와서 일해야지, 조금 있다 보면 어른들 점심밥 해야지. 또 소도 키워. 개 있지, 개. 여물 끓여야지. 소여물 끓여야 되고. 그냥 그때는 7월달은 풀을 먹으니까 여물은 안 끓이는데. 이제 가을 잡아 들면 여물 끓이고 또 여물 쓸어야 돼. 이렇게 쓸어야 돼. 그런 거 해서 뜬 물이 모자라잖아. 그럼 맹물 가마에다가 부어야 돼. 그거 처음에 동이로 날라다가 낸중에(나중에)

19쪽

지게로 날라. 물지게로. 근데 문지방이 아주 넓고. 이게 문지방에 엎어 이렇게. 돌 넣고 이렇게. 그리 츨떡츨떡 하면서. (웃음) 밥 먹고 설거지하믄 물 퍼다 붓는게 일이야.

셋째는 이제 할머니 아플 때 낳았지. 아플 때 낳아서 그냥 그게 방에서 울어, 못 나와서. 그 내비러 뒀어. 일이 많으니까. 여물 끓여야지, 뭐 그냥 하니까는. 그전에는 또 어르신네들이 광목으로 중의적삼을 입었어. 그러니까 밭에 나가면 흙이 묻으니까 삶아야 돼, 또 빨아다가. 삶고, 이제 그렇게 하니까. 방안에서 혼자 뒤집어서 혼자 겨나와. 혼자 막 기어 나와서 그냥 업어줬어. (웃음) 어떤 때는 저희끼리 둘이 이렇게 밥을 부뚜막에서 먹고, 또 그릇도 부셔놓고, 그럴 때가 있어. 이제 우리가 밥을 이고 저 고개 너머 벌판에 가. 농사할 때 이렇게 이고 가야 돼. 새참 뭐, 요 똬리를 이렇게 이고 가면 욜로 골통이 조금 나와. 계속 눌려서. (웃음)

시어머니 모시면서 저 강원도지사 그거 효부상도 타고 했어. 나중에 부모님들, 시부모님들 돌아가시고, 지금 시누님들 두 분만 계셔. 손에 시부 두 분 있는데 그분들이 이렇게 참 차가 여기 친정에 못 오더라고. 이렇게 조카들이 이렇게 댇고(데리고) 와야지나 왔다 가. 여기 육단리 근처 마현리에 한 분 사셔. 우리 영감이 독자고 형제가 없어서, 혼자 잘 다니고 있어. 나는 친정 식구는 많아도. 그러니까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어. 그냥 뭐 내가 그냥 사는데 바쁘고. 아프지 않고 그냥 잘 돌아다니니까.

20쪽

나는 보리밥이 싫어

전쟁 때, 그때 학교 안 댕기다가 피난 나갔다 들어와서 학교 댕겼어. 김화에서, 학교 댕기다가… . 보리밥. 나는 보리밥이 싫어. 미끌미끌하고. 피난 나와서, 그때 엄마는 옘병이라고 그랬어. 옘병을 엄마는 앓았는데, 그 수원 성냥공장이라고 그러더라고. 그 성냥공장으로 피난을 나갔는데, 이제 엄마가 아파. 병이 나서. 그랬는데 이제 동생하고 나하고 둘이 저기 뭐야. (나라에서) 그 우유죽을 끓여준다고. 우유죽을 끓여줘서. 그 우유죽 타 먹으러, 이제 뭔 그릇인지도 몰라. 뭘 들고 댕겼겠지. 그래서 그거를 타다가 먹고 살았어. 그랬는데 엄마가 103살에 돌아가셨는데, 몇 년도에 가셨냐면 한 4, 5년 되나? 그랬는데 엄마가 만나면 그래. “너네들 그때 뭘 먹고 살았니?”그래. 엄마가 그러시더라고.

다른 사람이 뭘 먹었는지는 생각이 안 나는데, 하여튼 간에 보리밥이 싫어. 반찬이 뭐 있어. 소금 찍어 먹고, 새우젓 먹고, 새우젓. (웃음)

21쪽

엉터리로 컸겠지. 그때는 학교 급식도 없었어. 그냥 책가방 여기다 국어, 산수. 책 싸 가지고 갔다가 이제 돌아와서 집에서 먹고. 저 감자, 밀 있잖아. 밀을 심어서 볶아. 엄마가. 그걸 갈아. 이렇게 갈아 가지고 그 감자 삶고, 밀 갈은 거를

<좌: 김정희님(본인) | 중: 김정희님의 어머니>

이렇게 봉울봉울. 거기다가 감자 위에다가 집어넣어. 그렇게 해서 익혀 갖고 먹는 거야. 그러니까는 밀밥이 볶았으니까 이제 고소는 하지. 그러니까 아주 감자, 밀밥, 보리밥 아주 다 싫은 거지. 하도 먹어서. 목만 맥히구. 옛날에는 밀밥 먹고 그래. 감자 쪄먹고, 옥수수 쪄서 저녁 끼니하고.

근데 더 무서운 거 있잖아. 우리는 애들이 많잖아. 감자를 이만치 까. 쟤네는 식구가 없어. 감자를 요만치 까. 그러면 이렇게 이제 서넛이 앉아가지고 감자를 막 까. 이 놋숟갈을 돌에다가 이렇게 긁어. 날이 서라고, 날카롭게. 감자를 막 해. 부지런히 죄 쫓아 깔라고 막 가는 거야. 여기 하얗게 감자가루 튀는 거야. (웃음) 그렇게 하면서. 그때는 이 하얀 감자 아니고, 또 보라색 나는 감자 눈이 더 깊어. 눈이 쑥쑥 더 들어가니까 숟갈로 거기를 이렇게 파내야 돼. 그 감자가 녹말 물이 튀어서 얼굴, 앞치마랑 다 허옇게 돼. 감자를 까야 또 저녁 먹고 그러느냐고. 아침에 섞어 먹고, 밀밥 먹고, 보리밥 먹고, 나갈 때. 그렇게 또 어떻게, 그다음에 조금씩 나아졌나 봐. 그래서 인제 쌀도 생기고, 응,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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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통에도 군인 덕에 학교 다녔어

군인 선생님이야. 선생님도 군인이야. 그냥 국어, 산수. 뭐, 그냥 음악하고 그렇게. 조금씩 와서 가르쳐주다가 가더라고. 그러다가 이제 학교를 지으면서 선생님들이 온 거지. 그전에는 이렇게 그냥 자리 깔고 앉아서. 친구들하고는 공기. 공기하고 고무줄놀이. 돌, 조그만 거로. 그때 옷도 한복 같은 건 명절이나 돼야, 인조 치마 같은 거 그런 걸로 억지로 한 벌씩 해 입고. 그러니까 뭐, 쓰봉 같은 거 입었겠지 뭐. 그때는 배급 타서 이불 오고, 옷도 오잖아.

우리는 학교까지 2km는 안 되고, 고 학포리 왜 저기. 여기 철원에 계속 살았는데, 나는 김화에서만 졸업했는데, 김화초등학교에서 졸업했어. 그때 전쟁통이라서 자세히는 몰라. 아무것도 모르고, 막 그냥 동생만 업어주고 그러다가. 전쟁이 났다고, 뭐 전쟁이 나도 무서운지 안 무서운지도 몰라. 그냥 끌려 댕기다가 피난 나갔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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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이고. 앞에서 누구 다치고 하는 건 못 봤어. 주변에 부잣집은 그때 우리 김화에 살 때 상점 하는 친구가 하나 있었어. 그래서 걔가 그냥 뭐 사탕도 날라다 주고 그러더라고. 날라다 주고, 같이 숙제도 하고 그랬지.

24쪽

내가 말꾼들 대접도 해드렸지

옛날에 간식? 간식은 뭐가 있었나? 간식이 잘 없는 것 같은데. 간식을 못 먹은 것 같으지? 그냥 밥만 먹는 거지 밥만. 그 저기 반찬도 감자, 고춧가루 넣고, 간장 넣고 이제 이렇게 감자볶음이라고 그러나? 그냥 되직하게 짓는 거 하고. 된장. 지금은 고추를 된장에 넣어도 맛이 없는데, 그때는 왜 된장에다 고추를 집어넣어. 그걸 꺼내서 된장 바글바글 그 고추. 그렇게들 먹고 그랬는데. 강된장처럼 그 고추를 이제 그 된장에다 끓여. 그리고 그전에 우리 집에, 저기 뭐야. 할아버지 말꾼들이 많이 와. 화투 쳐. 국수 내기도 하고 그랬어. 화투 치믄, 그 막걸리 사다가들 먹고, 국수 삶아 먹고 그러믄 그걸 내가 국수를 다 삶아주고. 웬중에 김칫국물이 없는 거야. 김칫국물에다가 국수를 말아 드려야 되잖아. 막걸리 잡수믄 술 안주가 뭐 있어. 매일 그 고추만 갖다 드려. 그럼 그런 것들을 잡숫고들, 그렇게 놀았어. 말꾼들 많이, 우리 집에 남자 말꾼들이 많이 와 놀았어. (웃음) 그거 있잖아, 그 동치미 무. 국물을 국수해 먹으면 무. 그거 쭉쭉 찌개에다 넣고 하나씩들 먹고.

25쪽

근데 지금은 맛이 없어. 그때 맛이 없어. 자식한테 간식은 만들어준 것도 없고. 그거, 고구마 쪄주고, 뭐 감자 쪄주는 게 일이지 뭘. 옥수수 그러고 남은 거.

27쪽

2장 | 근남식당 이야기

군인이 없어지는 거야. 폐업 신고를 하라고. 늦게 했어요. 늦게, 아까워서. 그다음에 점점 빈집만 생기고 그러니까.

28쪽

식당이랑 목축을 동시에 하면서 바쁜 나날이었지

여기서 농사짓다가. 여기 이제 그전에 있던 집이여. 할아버지 친구분이 그쪽에 있는데, 이쪽에 와서 장사를 하라고 그러는 거야. 그쪽에 와서. 장사를 하라니까는 논이 삼천 평이 있었어. 삼천 평이 있었는데 글쎄, 그 논하고 그 식당 집하고 바꿨어. 지금 그 집 팔고 이 집 지으러 왔는데, 그런 논 못 사, 인전(이제), 집 팔아서. 그때는 논 값이 싼 거야. 집값도 그때는 2700이라고 그랬나? 그랬는데 영감님 때문에 손해는 난 거고. 나고 나서도 몰랐네. (웃음)

처음에 글쎄 여기서 농사를 짓는데, 거기 있는 친구분이 와서 식당을 해봐라, 식당이 엄청 잘 되고 좋다고 그러는 거야. 근데 아무것도 안

29쪽

해봐서 난 안 간다고 그랬어. 못 간다고. 그랬더니 그 저기 요리사를 두면, 그때는 있다 가라고 그러나 뭐 주방장이래나. 그렇게 하면서 또 우리 친척이더라고 거기 있는 사람이. 그러니까 그냥 걱정하지 말고 와서 이렇게 다 하면 된다고 그러더니. 다 하기는 뭐 다 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아니 그냥 세상에 나가서 밥 먹고 그러는 게 낫지. 거기 가서 사람한테 시달리지, 바쁘다고 뭐 술 먹으면 또 안 나오지. 그러면 이제 하다 보니까 낸중에 내가 하게 생겼어. 서빙하고 계산하고 그런 거 했지. 처음에는 주방장이 있으니까.

또 젖소를 키웠어. 그때 그 식당 가기 전에 우리가 저 건너가면 거기 터가 조금 있었어. 그래서 젖소를 또 저기 마현리 사는 분이 있는데, 그분이 그 전에 교통이 안 좋고 눈 오고 미끄러울 때 우리 집에서 주무시고 다녔거든? 그랬는데 그 젖소를 키우는 분이야, 마현리에서. 경운기 끌고 댕기는, 차도 없을 때 사려 이제. 하더니 우리 집에 와서 주무셨는데 젖소가 괜찮다고 젖소 팔으니까. 젖소를 사서 네 마리를 사서 키웠어. 키웠는데 이제 거기 네 마리가 새끼 낳고 이렇게 해서 한 열댓 마리 늘어났어. 늘어나면서 저 유방염이 생겨. 그러면 주사도 맞아야 되고, 약도 입을 안 벌리는 걸 억지로 벌려서 약도 먹여야 되고, 그 유방염 된 젖은 짜서 버려야 돼. 그때는 냉장고 없으니까는 그냥 이렇게 짜가지고 저기 이렇게, 그때 그 우리 축사 옆에 샘물이 있어.

30쪽

그 샘물에다가 우유통을 거기다 담가놔. 차갑게 담가놓는데 하루 한 번씩 우유 차가 오잖아. 오면 그 사람들이 이렇게 봐서 쉬었으면 버리는 거야. 망가지지. 냉장고가 없으니까. 그다음에 또 냉각기라고, 또 냉각기라는 걸 이제 사 놔야 젖을 안 망가뜨리지. 그리고 소도 새끼 낳을 때만 한우는 저절로 혼자 힘을 써서 놨는데 얘네들은 못 낳아. 잡아당기는 거. 들었어, 얘기? 잡아당겨. 이 발목을 묶어서. 또 거꾸로 나오는 소도 있어. 그래가지고 다리가 나오는 수도 있으믄 수의사 불러야 하고. 그것도 너무너무 힘들어, 소 키우는 것도. 아무 데도 못 가고 하루 종일 붙은 게, 누가 친정에 초상이 나도 못 가. 어떻게 저녁에 밥 먹여야지, 젖 짜야지. 젖만 안 짜면 큰일 나는데. 그렇게 힘들더라고. 그런데 그러면서 거기 식당을 보고, 식당을 하면서 해. 아니 젖소를 키우면서 식당을 했나 봐. 이 두 부자가 이제 와. 이제 젖소 있는 데서 왔다가. 이제 저녁이면 들어오잖아. 냄새가 나, 그 소. 암만 옷을 갈아입어도, 순댓국 장사 아줌마 버스 타면 순대국 냄새나듯이, 이거 다 닦아도 소 노랑내가 나. 그러면 식당에 들어오면, 냄새나면 오지 말라고, 절리 나가라고. 이제 밥을 줘서 내보내고들 그랬어. 그랬는데 그 소를 그렇게 키우는데, 그냥 소를 이제 다 아침에 먹여서 내보내면 물로다 청소를 다 싹 해놔, 내가. 싹 해놓고 다 내보내서 놀다가 저녁때 제자리로 들어가 놓으면 제자리 다 찾아 들어가. 그래서 이제 맥여주고서 젖 짜, 내가. 다 젖을 죄 짜놓고 죄 하고. 그러면 저게

31쪽

여기서 아침에 새벽에 가서 밥 주고, 또 왔다가 저녁때 또 가서 또 밥 주고 왔다가 청소하고 아주 그래. 그렇게 하다가 식당을 그렇게 맡으니까는 소를 못 키우겠어.

소를 몇 년을 키웠는지 모르겠는데, 그다음에 거기서 똥을 그렇게 많이, 비가 오면 흘러내리니까 그 동네 사람들이 싫어하지. 그래서 이제 그다음에 소를 그만 키웠어. 소를 이제 다 팔고, 그만 키우고 식당 일만 하는데. 그때는 이렇게 뭐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막 주고 했는데. 군인들 밥 그냥 마음대로 먹어도 되고. 쌀농사 진다고. 그러니까 마음대로 먹어도 되고. 또 농사짓다 왔다고 순진하다고. 둘 26포대 대장 박영택 대대장이라는 분이 있는데, 아들도 학교 대학 댕기고 한다고 밀어준다고. 그 아주 이 방을 트래, 회식을 한다고. 그래서 방을 텄어. 그래서 그 대장이 회식을 다 밀어줬어. 그러니까 너무 힘들어, 그것도. 너무 힘들어 아주. 아줌마도 있고, 저기 뭐야, 짜장 빼는 그 삼촌도, 장신의 삼촌도 있고 이제 그렇지. 설거지하고. 중식을 하다가, 그다음에, 그 부대 만남의 날이라는 거 들어 보셨나, 몰라? 만남의 날, 부모님들 여기 오늘 이렇게 주말이면 해서 군인들 가족들 많이 와서 하면 고기 이렇게 주물럭 만들어 놨다가 팔고, 이제 삼겹살 팔고. 막 짜장도 하고 그렇게 볶았어, 아주. 대성산에 건물을 지었는지, 또 일꾼 밥도 새벽이면 해. 밥을 싸줘, 또. 가주구(그래가지고) 그냥 난 바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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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벌었는지, 안 벌었는지도 몰라. 아주 그렇게 볶아다가, 또 영감도 95년도에 가고 하니까. 어떻게 살았는지, 아주 정신없이 살았어.

<좌: 양식 조리기능사 | 우: 한식 조리기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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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시기가 왔는데, 너무 아까워서 폐업 신고를 늦게 했어

식당은 80. 88년돈가, 89년돈가. 그렇게 해가지고 그 다음에 내가 부녀회장을 맡으니까, 이제 점점 집을 비우고 나가고 아주발(아주머니) 하나 두고 나가잖아. 그러니까 이제 그전에는 저 근남 식당 가면 밥도 많이 주고 군인들 밥 많이 먹을 때 밥도 많이 주고 하니까 “그 집 가요” 했는데. 이제 부녀회장을 맡으면서, 리 회장 맡을 때는 괜찮은데, 이제 면회장 맡을 때부터 일이 많아지고. “그 집 가면 저 아줌마가 없을 걸요?” 진짜 이렇게 되는 거야. 군인도 점점 위수 지역을 벗어나면서 뜸해지는 거야, 군인이 없어지는 거야. 면회장 할 때면 언제쯤 될까? 한 2000년. 2000년 더 넘어서지? (철원 위수 지역 해제 2005년) 자꾸 줄어들더라고. 그러니까 하면서 이제 밥도 많이 해놓으면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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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지지. 반찬도 많이 해놓으면 망가지고. 그러니까 이제 올 때마다 조금씩 해야 되는데, 사람이 자꾸 적어지고 하니까 아무래도 그렇더라고.

그래서 군인들도 아예 없으니까 그다음에 접어서. 이제 뭐야, 이렇게 신고하라고. 장사 안 하는 사람은 이제 신고해야지. 폐업 신고를 하라 하더라고. 폐업은 지금이 몇 년이지? 22년이지? 아마 2014년도 그때. 늦게 했어. 아까워서. 가만히 있다가 군에서 이제 얘기하길래. 20년 넘게 지나갔나? (웃음)

그래도 어떻게, 그렇게 어렵게 지나갔어. 그런데 군인들 외상값을 이제 다, 중사, 하사가 밥 먹고 여기다 적어놔. 장부책에다가. 쭉 적어놓고, 한 달 되면 돈 줘. 그땐 할아버지도 없고 나 혼자 장사를 하는데, 내가 언제 돈 받으러 어디로 쫓아가. 못 가지. 그때는 전화 같은 건 또 연락 안 하잖아. 그 장부책 그냥 다 집어치우고. 나중에 갚으러 오는 사람도 없었어. 근데 지나가다가 찾아오는 사람이 있어. 그때는 그렇게 갔다가 이제 한 번씩 와주는 사람도 있어. 나중에 커서 애들 데리고 와보는 사람도 있고. 또 가족끼리도 이제 지나가다가 잘 있냐고 와보기도 하고. 기억에 남는 손님은 글쎄. 다 잊어버렸어. 근데 어떤 분이 와서 밥을 드셨잖아. 드시고 다음에 와서 그때 ‘그걸’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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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때 ‘그거’가 뭔지 몰라. (웃음)

반찬이나 음식은 뭐 된장. 하여튼 간에 저기 소 내장 갖고 뭐 저기 내장탕? 내년부터 내장탕 그거 했는데, 그게 잘 나가더라고. 그게 잘 나갔는데, 그게 어떻게 해가지고 그 재료가 안 돼. 못 대준다고 하더라고. 어떻게 했는지. 그게 수입이 중단됐는지. 그래서 그거 내장탕 잘 나가다가 그때 그만두고. 그게 없어졌어. 그다음에는 찌개, 김치찌개, 된장찌개. 뭐 되는 대로 낸중에는 중식을 하다가, 그다음에 이제 주방장 때문에 힘들어. 그래서 그 일을, 중식을 안 하고, 내가 삼겹살로 혼자 하는 거지. 아줌마 하나 두고. 그래서 이제 삼겹살하고 찌개도 해서 팔고.

가장 자신 있었던 요리는 김치찌개. 그게 제일 쉽잖아, 된장하고. 제일 잘 나갈 때 하루 매출은 기억 잘 안 나는데. 모르겠어. 힘들어. 그냥 피곤하고 힘드니까. 내일 아침 준비도 해놔야 하고, 국도 이렇게 막 해놔야 되고, 쌀도 씻어 놔야 되고, 뭐 이렇게 찌갯거리랑 뭐랑 다 해놨다가, 반찬거리를 해놓고 자야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얼른 불을 때서 막 싸주지. 그러니까 아주 그게 힘들어서 그냥 막 쓰러졌다가 일어나고. 돈 관리는 내가 하지 뭐. 그냥 저기다 놔. 얼마인지 기억 안 나. 그때는 뭐 하여튼 간에 또 두면, 또 물건 사고, 또 물건 사고, 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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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지 뭐. 막 살았어. 참지를 않아서 내가. 뎀비나 봐, 내가. 부딪혀보는 거지. 근데 재미있는 건 그거네. 선거하는 사람들 와서 이거 팔아주는 거 그런 거 있었잖아. 선거하면 왜 후보가 나오잖아. 막 먹으라고 가서, 그런 거 있었어. (웃음)

그래서 그걸로다가 혼자 그렇게 하다가 이제 자꾸 군인이 줄어드니까. 이제 나가는, 돌아댕기고 뭐 하니까. 식당에 그렇게 저절로 슬슬 다들 어려운 시기가 돌아오더라고. 가게가 하나씩 자꾸 줄어드는 거야. 줄어드는데 어떻게, 어떤 힘으로 막을 수는 없잖아. 군인들은 없어 지고. 뭐 이렇게 피시방도 있고. 여기 피시방 2층에 있었고. 다방도 많고, 만남의 날 민박. 민박도 막 이렇게 번창하다가, 다방도 많았는데 빈집만 남았어. 그렇게 자꾸 군인들이 없어지고 위수 지역을 벗어나고 하니까는 그다음에 점점 빈집만 생기고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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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집이 생기고, 내 식당은 마음 정리하며 추억이 됐지

빈집 생겨서 보기 싫으니까 도시재생사업을 주러 오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거기다 집을 팔았지. 그 97년에 수해 났을 때. 96년인가? 수해 났을 때, 이제 집도 고치고 했는데 그, 우애가(위에가) 슬라브 (슬레 이트). 슬라브(슬레이트) 지붕으로 개량을 했는데, 그 슬라브 (슬레 이트)에 빗물이 이 벽을 타고 적셔 자꾸. 올해 한 해는 요만침, 그다음 에는 이만침. 이러면서 계속 이제 벽이 망가지는 거야. 근데 그 위에다 뚜껑을 올리려면 정부에서 돈도 보조해준대. 농촌주택이라고 개량 사업이 있었는데, 식당은 폐업 신고를 하고 수리할 곳이 너무 많아서 나는 집 개량을 안 했어. 그렇게 그냥 식당에 드나들면서 계속 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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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 뒷방이 있어. 방이 집에 있어. 그래서 그 뒷방에서 살림하고 사는데, 밥은 여기 부엌에서, 여기서 해갖고. 겨울이면 추워. 그 방에 들어가려면 또 방도 지나가야 되고, 그러니까 이제 춥고. 그러면 물이 또 대문 내에서 이렇게 문지방 밑으로 이렇게 호스로 들어왔는데, 이게 자꾸 얼어. 쉽게 얼어서 물을 졸졸 흘리다가도 어떻게 하면 깜빡 잊어버려가지고. 그러면 또 기술자 부르면 여기 깨 갖고 이렇게 해서 또 집 나오는 호스가 있더라고. 그걸로 이렇게 해서 녹여주면, 아주 창피하기도 하고, 애도 쓰고. 그래서 이 수리를 할 곳이 너무 많아서, 어떡하고 사나 이러는데. 마침 도시재생에서 뭐 집을 산다고 그러잖아. 그래서 난 식당을 아예 팔고 저쪽에다 20평짜리 집을 하나 짓고 가야지 그랬어.

그 터미널도 영종 버스 그게 이제 다 거기도 이제 손님이 없으니까, 버스가 없어진 거야, 안 들어오는 거야, 여기. 지나가는 시내버스만 들고. 그러니까 이제 폐허가 된 거잖아, 다. 장사들 폐업 신고 내고, 이제 그렇게 붙어 있는 사람들은 있고. 수리하기도 힘들었는데, 그때 종점도 (도시재생으로) 다 나라가 사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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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 군 위수 해제되는 다른 지역들 있잖아요. 위수 지역 해제를 앞둔 지역 상인분들께 먼저 경험하신 분으로서 조언 같은 것 해드릴 수 있을까요?

그러게. 그거 뭐라고 해 드려야 돼. 말하기 힘드네. 다 오는 거를 막을 수가 없지. 그러니까 천천히 마음 정리를 가볍게 가져야지, 뭐. 괜히 안다 해도 소용이 없고. 그렇잖아. 내가 스스로 정리를 해야지, 뭐. 뭐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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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 취미도 겸하는, 능력있는 회장

부녀회장을 해보라고 그러더라고. 낸중에는 적십자회장까지 하래. 7년을 했어. 한복 입고, 부채춤하고 공연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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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도 겸하는, 능력 있는 회장

내가 그걸(식당 폐업) 이긴 건, 저기 저거잖아. 농사를, 논이 있어서, 쌀을 갖다 우리 동생이, 남동생이 있어. 저 김화에. 그 동생이 농사를 지어서 쌀을 갖다줘. 그러니까 먹는 거는 이제 신경을 안 쓰는 거야. 그러니까 이제 채소 먹고 그냥, 여기 밭에서 갖다 먹고 하니까는. 뭐 그냥 손님이 없어도 할 수 없지 뭐. 밥만 먹고 살면 되지 뭐. 그냥 이렇게 돌아댕기고 이거 아냐. (웃음) 잘 이겨냈지. 다른 데다 정신을 팔고 살았으니까. (웃음) 그러니까 그런 데를 돌아다닌 거야. 나 막 살았어. 누가 쫓아낼 사람 없다고, 그냥 댕기면서 살았어.

노인회장은 2017년도에 시작. 계속 하고 있어. 5년째. 다른 사람들이 하라고 그래서 한거지. 하다 보니까 어떻게 그래. 17년, 그거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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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정에 그 저거지. 할머니들 모여서 콩깍지. 콩깍지가 왜, 노래 있어. 노랜 못하고 이렇게 체조하는 거. 그래가지고 그런 거, 저 군에 나가서 발표회하고, 응. 거 엄마들 한 열댓 명씩. 공연했어. 의상도 이게, 여기 사진이 있나 모르겠네. 한복 사진은, 한복은 우리 부채춤 해. 여기 저 복지회관에. 요기 회관에 선생님 와. 여기 강원 어르신 한마당 축제에 갔어. 강원도 모든 어르신 다 왔어. 축제에 가서 이렇게 하는 거야. 우린 여기 어디 있을 거야. 얼굴 잘 안 보이지.

다 군에서 노인지회 사무실에서 받쳐주는 거야. 아니, 어제, 강원도에 가도 이 부채춤은 안 해. 어제, 그저께 갔었는데 안 해 체조 그런. 연습 많이 했어. 하여튼 간에 이제 그 봄에. 저기 그게 3, 4월 쯤 봄. 그러니까 그때 한 4월서부터 했나? 4월서부터 해서 4, 5, 6, 7, 8. 8 하고, 그때 9월달에, 가만있어. 그래가지고 행사. 그렇게 연습을 해갖고 그때 강원도 걸리 갔나? 절리 갔나? 행사 여기 있는 데로 나갔어. 지금 노인네 거기. 글리도 가고. 또 한 번은 여기 어디 또 적혀 있을 거야. 그 하계. 그렇게 이제 다니고 노인의 날 하고. 계속 그렇게 한 세 번. 태봉제도 나갔어. 태봉제도 나가서 했고. 태봉제, 그것도 몇 년인지 잘 모르겠네, 그치? 하여튼 이거 코로나 생기기 전에. 전 해에(2019년도 추정). 그리고 이제 코로나 때문에 쉬었어. 그래서 아무것도 못 하고 쉬었다가 올해는 23일. 8월 23일에 했나? 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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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도마도, 파프리카 축제. 요 개울에서, 철원에서 했어. 근데 그 날짜를 잘 모르겠네, 내가. 여기 사곡(근남면 사곡리) 동네 개울에서. 그래서 거기서 하고. 그다음에 또, 달 수도 모르겠네. 그다음에 저 신수리. 신수리에서 밑에 거기. 거기서 또 무슨 마을에 무슨 축제야. 거기 가 신수리 가서도 하고. 그리고 그다음에는 이 교회에서 해달라고 그랬는데 코로나 때문에 못 갔어. 근데 계속 연습은 하고 있어.

<강원 어르신 한마당 축제에서 부채춤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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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면허도 따고, 장구도 배우면서 돈 버는 일이 늘어났지

내가 차 보험 들러 와수리 갔더니, 아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1995년도에 할아버지가 돌아갔거든? 그러니까 할아버지 차를 내가 가져야 되겠는데, 운전면허를 따러 갔었지. 그때 그러면서 1996년인가 거기 수해가 났어, 여기. 수해 났을 때 집에 물이 찬 거야. 물이 차서 이제 집수리를 해. 그럴 때 이제 운전학원에 간 거야 내가. 가가지고 그래도 두 번 만에 했어. 그래서 이제 운전을 하니까는 이제 여러 가지 일하기가 쉬운 거야. 어디 나가고, 장구 배우러 다녔지. 그래서 장구 인제 차가 없을 때 장굴 배왔나? 그러니까 이걸 와수리 가서 또 앵겨 타는 거야. 지포리 가는걸. 그 지포리서 타고 와수리 가서 또 오고 그러지. 그래서 그렇게 장구를 배우고, 이제 행사 때면 나가고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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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이제 하는데, 사물은 제대로, 그냥 삼채 이채만 치면 되더라고. 노랫가락 같은 것도 잘 안 치고. 그래서 그렇게 저렇게 쉬웠는데. 그다음에 여기 김화 농협 거기서 사물팀을 하나 장만해. 그래서 그 사물팀에 들어가갖고, 여기 동네 세 사람인데 그건 내가 싣고 댕기거든. 지포리 싣고 댕기고, 어디 싣고 댕기고, 엄청 행사장 싣구 댕기고 막이래.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식당을 그만두면서 이제 돈을 벌러 나가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거기 따라다니기가 좀 힘이 들잖아. 그러니까 저 다 농사꾼이니까, 일을 하니까 저녁에 연습을 해. 저녁에 가만히 생각하니까, 아 장구를 배우면 고래 다 외워야 돼. 쿵따따 쿵따따 쿵 하면서. 쿵쿵따 어쩌구 외워야 되거든. 그러니까 “ 우리 그거 하지 말고, 우리 힘든데 그냥 북으로 다 하자.” 했어. 북은 그냥 쿵, 이렇게 쿵쿵쿵, 이렇게 작게 하고, 그냥 한 번씩 우에(위에) 쳐주고 하면 되느니까. 그래, 우리 이제 쉬운 걸로 하자, 그래도 마침 거기 북 치는 사람이 없어. 다 장구들만 배우면서, 그래서 그걸 하는데. 그걸 한 3년 쫓아다니니까 이제 일이, 내가 돈 버는 일이 점점 많아져. 처음에는 어쩌다 어쩌다 가는데, 이거는 날마다 이제 누가요, “뭐 해줘, 사람 좀 셋 데리고 와요, 다섯 좀 데리고 와요.” 막 이렇게 하는 거야. 그럼 저 차에다가 싣고 가는 거야.

48쪽

그렇게 하면 이제 또 농협에서 통신비라고 그래서, 통신비도 주고 해. 그러니까 오늘 일하면 여기 사진이 막 들어있는 게 거기다 보내주는 거야, 오늘 이런 일을 했다고. 그러면 이제 통신비를 주거든. 그러니까 그 사진도 찍어주고, 교수가 메시지 온 거 이것도 찍어서 보내주고. 막 아주, 사진 보내고 찍고, 글자도 조금 써서 보내주고 그래. 그런데 요새 는 3일도 안 나가. 우리 이제 부채춤을 해야 되니까. 거기 매달려야 되는데, 이 3월까지 나는 내가 맡은 걸 해야지. 남이 맡은 사물을 힘들게 나가. 그래서 사물은 요새 안 나가. 나이가 많고 힘들고 하니까 조금 쉬었어. 그래도 연습해놓으니깐 2022년 12월 노동당사에서 사물놀이 발표했고, 2023년 1월에도 보름날 나와서 북 치라 해서 노인회 3명이 가서 북 쳤지. 2023년 2월 3일에 짚신밟기 행사도 가서 북 쳤어.

<봉사활동으로 사물놀이를 알려주시며 장구를 치시는 모습>

50쪽

부녀회장을 했는데, 적십자회장도 하면서 봉사 많이 다녔어

내가 80 얼마야. 80 몇 년도 돼 가지고 날 보고 또 저거 부녀회장을 해 보라는 거야. 부녀회장을 해 보라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부녀회장을 또 부녀회원도 아닌게, 못 한다 그러니까, 못 하는 게 아니라고. 우리가 다 있으니까 하라고 그러는 거야, 또 회원이 한 댓 사람이 와서. 그래서 거쪽에서 부녀회장을 했어. 그래서 했더니 또 낸중에는 적십자 회장까지 하래. 그래서 목욕 봉사, 뭐 그냥 봉사, 막 나가, 회장이니까. 군에서 부르면 군에 가서 하고, 이 동네는 또 목욕 봉사 댕기고 막. 그냥 뭐 여러 가지 지시 내리는 대로 쫓아서 막 했는데, 이제 7년을 했어. 부녀회장을 7년하고, 적십자 회장을 7년을 함께 겸해가지고. 면회장을 이제 또 하게 된 거야. 그거 면회장을 이제 또 6년을 했어요.

51쪽

그러니까 돌아댕긴 게 얼마야. (웃음)

앞으로도 이렇게 우리 노인정에 이렇게 건강을 위해서 건강 체조 요가 같은 거 군에서 해주는 대로 다 받을라고. 그래서 그 받아가지고 우리 재밌게 잘 이런 것도 하고 있어. 근데 이제 앞으로 노인회장을 더 해야 되나? (웃음) 배우고 싶은 거는 이제는 별로 없고. 저기 곰백 사는, 같이 일하는 사람이 그 기탈 배우자고. 기타를 배우자고 그래. 근데 그때 인제 배워서 뭘 하겠나, 그 생각이 들어. 기타값이 비싸다는데. 뭐 거기 그거는 벌써 부녀회장 전에 적십자회장 할 때 기타 배울라고 했는데 못 했어.

<리회장 단체 사진, 맨 뒤 보라색 옷 입으신 분이 김정희님>

52쪽

<근남 부녀회 평가상 수상 사진>

<다문화 가족 결혼식 도우미 활동(육단2리 부녀회 리 회장 재직 중에)>

53쪽

<대한적십자사 봉사활동 사진>

<대한적십자가 봉사활동 중 ‘명절 음식 나누기’ 사진>

54쪽

노인회에서 고추도 대신 말려줘

노인정을 또 수리를 해가지고 이제 메주를 못 했고. 그래서 고추 말리 는 기계도 공동으로 하나 사놨거든. 그래서 거기서 고추를 또 말려줘, 우리 노인회가. 무료로 해주는 건 아니고, 간단하게 전기세만 받고 대신 말려줘. 기계를 비워놓거나 그냥 두기도 그러니까 전기세만 받아서 노인네들 것 좀 말려주면 좋지. 전적으로 많이 하는 사람은 자기네가 기계 두고 있잖아. 기계 사 갖고 있잖아. 근데 할머니들은 조금 심어가지고 못 말려. 탄저병 와서 썩어. 걱정하잖아. 탄저병이 문제여, 고추가 문제가 아니라. 못 먹어. 망가져. 아주 홀딱 망가져.

55쪽

그리고 우리 정송자 총무님이 계셔. 그분이 아주 수고가 많으셔. 우리 고추 말리는 거. 고추 말리기 전에 손질을 해줘야 해. 총무님이 이 고추 손질을 많이 도와주셔. 저울로 무게 재는 것도 해주고, 전체적으로 도와주셔. 수고가 아주 많지.

57쪽

두번째 이야기 | 김숙희

올 때는 그냥 몇 년만 살고 갈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못 가게 됐어. 정들었지. 이제 여기가 고향이지.

58쪽

내가 말을 잘하는지는 몰라. 변호사 손녀니까 내가. 우리 아버지가 큰아들이 아닌데도 우리 할아버지는 우리 아버지를 좋아해 가지고, 우리 아버지하고 살았어. 근데 우리 아버지가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 돌아가시고 내가 열두 살 때까지인가 열세 살 때까지 할아버지하고 살았나 봐. 큰 집에서. 할아버지가 우리하고 살면서 내가 학교 다닐 적에 나를 꼭 데리고 다니시고 그러셨는데, 정확하게 아는 건 우리 할아버지가 변호사였다는 거. 또 우리 아버지의 외삼촌은 판사였어. 그랬는데 우리 아버지가 너무 일찍 돌아가시다 보니까 이제 형제간들도 그렇고 다 아무도 못 만나잖아. 내가 너무 어렸었기 때문에 나 사는 데에 바쁜 거야. 어려서 내 살기에 바빠서 힘들었었지.

59쪽

그런데 항상 내 옆에는 나를 돕는 분이 계셨어. 어려서도. 그 뭐 양어머니처럼 보살펴주는 좋은 분도 계시고. 시집가기 전에도 계속 보살피는 분이 계셨고. 그렇게 친엄마 이상으로 나를 보살피는 분들이 많았어. 계속 한 고비 넘어가면은 또 다른 분이 나를 그렇게 돕고. 공주에 있을 땐 우리 동서들이 그렇게 나를 정성껏 도와주더니, 또 여기( 철원) 를 오니까는 저 우리 올케( 임순이) 가 또 그렇게 그냥 친정엄마처럼 보살펴주고.

60쪽

아버지와 사각모자

인자하셨어, 우리 아버지가. 한 번도 화낸 적도 없고 “(부드러운 말투로) 아, 이놈의 자식이.” 이렇게 하면 그게 제일 많이 화난 소리야 그게. 밥 먹는데도 예뻐서 또 만지고, 반찬 놔주고, 그냥 그렇게 사랑이 많으셨어요. 사람들이 나는 아버지를 닮았고, 우리 동생은 엄마를 닮았다고 누가 그러더라고. 동생도 아직 신철원에 살어.

내가 주부대학에 가서 사각모자를 썼는데 며칠을 울었어.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아버지의 한을 푸는 거 같아서. 우리 아버지는 내가 어린데도 “아, 우리 희야가 사각모자 쓰고 들어오는 게 눈에 훤하다.”고

61쪽

맨날 그러셨어. 그렇게 쬐끄맸는데. 이제 어른 돼서 생각하니까는 그때가 초등학교 1학년, 2학년, 몇 학년 밖에 안 됐는데 사각모자 쓰고 들어오는 게 무슨…. 그게 돌아가시려고 그랬던 거 같애. 주부대학 뒤로는 뭐 많이 썼지. 신학대학 다니면서도 또 쓰고 뭐 계속 몇 번 썼지 사각모자를. 그렇지만은 그때 주부대학에서 처음 썼을 때, 그렇게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나고 그냥 생각만 하면 자꾸 눈물이 나고 그렇더라고.

62쪽

전쟁으로 헤어진 가족

6 留25 때 피난 가면서 우리 엄마, 아버지는 헤어졌고, 헤어져서는 두 살 된 동생은 엄마가 데리고 가고, 네 살 된 나는 우리 아버지가 데리고 가고. 그래서 우리 아버지하고 살게 된 거예요. 그래서 할아버지하고 같이 이렇게 살았는데 우리 작은아버지는, 부산에 있는 부대에 연대장이었어. 우리 작은아버지가 사냥을 잘해서 그때는 호랑이도 잡았어. 내가 여덟 살, 아홉 살 때 그 연대장실 앞에 호랑이를 이렇게 놔둔 것도 봤었어. 우리 작은아버지가 또 명사수거든. 그러는데 이제 작은아버지 가족이 다 미국으로 들어가 버렸어. 그 딸을 케어하기 위해서. 그런데 내가 너무 어리니까 서로 연락이 안 돼 버린 거지. 전화도 없지 그때는. 그러니까는 그냥 그렇게 헤어져 버리고 말은 거야. 그런데다가 이제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연락하기 더 어려워진 거지.

64쪽

그리웠던 형제

이산가족 찾기 하는 거 거의 끝날 무렵에, 그러니까 우리가 철원에 88 년도에 왔으니까 한 85년이나 86년 그때 동생을 찾았을까? 동생이 성이 바뀐 거를 몰랐어 내가. 나라에서 컴퓨터로도 찾아주고 했는데, 이경자로 성이랑 이름이 바뀐 거야. 나는 원래 이름이 김석희야. ‘석’자 돌림이야, 우리가. 나는 지금도 어려서 동네에서 “석희야.” 이렇게 불렀기 때문에, 석희 이름이 더 친근감이 있어. 그런데 아버지가 인자 그 석희라고 하면 남자 이름 같다 그러니까 호적에 숙희로 올린 거야 ‘ 맑을 숙(淑)’, ‘계집 희(姬)’로 해서 올렸어. 그리고 우리 동생은 석재야. 근데 이름을 이경자로 호적을 바꿨으니까 못 찾잖아. 그리고 나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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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살 줄었고. 우리 동생이 토끼띠인데, 근데 걔가 용띠인 줄 알고 사는 거야. 얘가 이제 나를 찾고서, 자기가 토끼띠였다는 걸 안 거지. 그러니까 찾을 길이 없었지. 당시에 이산가족 찾기를 텔레비에서 맨날 하니까, 동생이 언니 얼굴 한 번만 보는 게 소원이니까 한 번 찾아 봐달라고 그랬나봐요. 알고 보니 동생 키워준 어머니가 우리 어렸을 때 속초에 조금 살았더라고요. 이제 거기에 가서 알게 돼서 찾았지. 나 네 살 때, 동생 두 살 때, 그때 속초에서 살았더라고 조금.

동생은 딱 만나니까는 동생인 줄 알겠더라고. 얼굴이 많이 닮았어 나하고. 근데 우리 동생이 더 이뻐. 내가 지금 이제 목소리가 좀 시끄러워지기는 했어도, 전화로 하면은 목소리가 똑같아서 오해받은 적도 있어. 손님들도 전화하면은 그렇게, 동생인 줄 아는 사람이 있고 또 언닌 줄 아는 사람이 있고 또 그래. 그렇게 많이 닮았더라고. 그러니까 알겠잖아. 그래서는 어쨌거나 그리웠던 형제잖아. 그러니까 그 동생으로 인해서 여기 강원도로 오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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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여기가 고향이지

이제 이산가족을 찾았으니까 우리 동생이 여기 이사 오는 거를 원을 하는 거야 오랫동안. 우리 고향은 공주잖아. 고향이니까는, 가족회의를 해서 그 이모가 이렇게 오기를 원하는데 어떡하면 좋겠냐 그랬더니, 지금 철원군청에 있는 아들이 “어머니, 그냥 그동안에 같이 못 살아봤으니까 옆에서 살고, 거기 한번 떠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이러더라고. 그래서 이제 만장일치로 합의를 보고 여기 이사를 온 거야. 아마 우리 이사 오고 나서 공주에서 버스도 몇 대 왔다 갔을 거야. 여기 동네 사람들이 처음 봤대. 이사 왔다고 저렇게 오는 사람은. 그냥 올 때도 우리 동서랑 뭐 다 찾아왔었어, 여기를. 와서 김일성이한테 데려다주러 가는 거 같다고. 그땐 여기가 다 비포장이었거든. 전부 비포장이여가지고 막 신수리 그쪽으로 오는 길은, 일동, 이동 길은 더 아주 엉망진창이어서, 농도 막 다 닿고. 옛날에는 이삿짐센터가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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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럼 그렇게 섬세하게를 못해 가지고 항아리도 깨지고 막 그랬어. 우리가 옛날에는 차가 ‘포니 투’였어. 옛날 차가 잠곡리 가면은 거기가 얼음이 봄까지 안 녹아. 거기가 길이 비포장인데요. 거기를 들어 가려면은 밑에가 다 닿아 가지고 들럭들럭해. 그렇게 길이 나빴어, 여기 전부. 여기 들어오는 길도 다 비포장이었어. 그러니까 차 가지고도 살살살살 다녔어야 됐지.

올 때는 그냥 몇 년만 살고 갈 생각이었는데. 왔는데 이렇게 못 가게 됐어. 정들었지. 이제 여기가 고향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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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 중앙식당

나 1등 하는 거는 겁나니까는 중간만 할래요. 그냥 중앙식당 할게요. 그러고 그때부터 중앙식당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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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식당

우리가 철원에 1988년도에 이사를 왔어요. 34년 됐나 보다 그러니까. 우리 식당 이름 바꾼지도 20년, 30년도 넘었네. 우리 동생이 식당을 하고 있었어요. ‘용좌식당’. 제가 교회를 다녀요. 그런데 교회 목사님이 부흥회를 하는데, 식당 이름을 중앙식당이나 제일식당으로 하는 게 어떻냐고 그래. 제일 식당도 괜찮고 중앙식당도 괜찮은데, “ 아이, 나 1등 하는 거는 겁나니까는 중간만 할래요. 그냥 중앙식당 할게요.”그러고 그때부터 중앙식당을 했어. 중앙식당 한 지가 한 30년 가까이 됐을걸.

식당을, 이사 온 날부터 했어. 그때는 여기가 손님이 엄청 많았어, 진짜요. 지금이랑은 다른 정도가 아니야. 지금은 뭐 손님이 1% 밖에 없다고 봐야지 맞아. 그 정도로 많았어, 손님이. 이 사람들이 와서 잘 데가 없어서 집집마다 방만 있으면 다 민박을 주는 거야. 손님이 와서 이 홀(현 중앙식당 홀)에서 잘 정도로. 우리는 저 방에서 자고 여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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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게 다 손님 방이었었거든. 이 방에서도 자고 여기, 여기 깔고 잘 정도로 그렇게 손님이 많았어요. 그때는 뭐 갈비, 등심, 중화 요리서부터 메뉴라고 생긴 건 다 있었어. 중화요리 요리사도 있고.

그래가지고서는 토요일 일요일 날은 우리 아들, 딸은 어디 가서 놀러 가본 적이 없어. 토요일 일요일이 더 바쁘잖아. 군인들 때문에. 학교만 끝나면은 바쁘게 오는 거야 인제 집 걱정돼서. 딸도 그렇고 아들도 그렇고 학교만 끝나면 와. 그리고 우리 딸은 또 놀러 가는 거 좋아하는데, 못 가잖아? 그러면 자기가 꼭 가야 될 실정일 땐 또 친구들을 보내 대신(웃음).

우리 집에 군인들이 오면은 이제 자주 오는 애들 맨날 오잖아요. 그러면은 온다고 뭐 저기 뭐야 “이모, 저 김치전 좀 해줘요.” 그러면 김치전도 해주고 걔네들이 좋아하는 거 뭐 “떡볶이 해주세요.” 하면 떡볶이도 해놔. 걔네들 올 때는. 그러고 공병대대 걔네들은 자주 나오거든, 또 많이 오고. 그러면 걔네들 좋아하는 거 튀김도 해주고. 집에서 먹는 거, 김치볶음 좋아하니까 김치볶음. 뭐 하여간 김치를 1500~2000 포기 그렇게 담았으니까 그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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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수 지역 해제

IMF 나고 위수 지역이 없어졌어. 그전에는 초소가 이 위에도 있고 여기도 있었어. 군인들이 바깥에를 못 나갔어. 지금은 뭐 휴가도 자주 가지만, 그전에는 못 나가니까 면회를 많이 오던 시절이잖아. 그럼 면회 오면은 다 이 안에만 있어야 되는 거야. 그러니까는 집집마다 식당이 많았지. 여기 김정희 씨네도 옛날 식당했거든. ‘근남식당’. 식당도 많고, 여관도 많고, 다방도 많고 그냥 전부 다 여기 안에서 해결을 해야 되니까. 그랬는데 이제 위수 지역이 없어지면서 와수리로 나가잖아. 그러니까는 볼거리 많은 데로 젊은 애들이 나가지. 여기서 밥을 먹나? 안 먹지. 그리고 지금은 평일에도 차로 태워다 줘서 군인들이

와수리에서 밥들 먹어요. 지금은 너무 좋은 세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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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여기는 손님이 없을 수밖에 없는 거야. 위수 지역 해제 후에는 손님이 너무 없어졌지. 힘이 든다 해도 수입이 있는 거와 없는 거는 많은 차이가 있더라고요. 그렇잖아. 그 수입이 있으면 바쁜데도, 바빠서 하기 힘들어 이러면서도, 사실은 힘들지 않은 거야. 손님이 많으니까 신나 가지고 힘들다고 생각 안 하고 그냥 ‘뭐를 해줄까, 아무개가 참 뭘 좋아하던데’ 막 이래지잖아. 근데 손님이 줄면 생활의 균형이 깨지는 거지 뭐 어쨌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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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뜻한 밥 한 그릇

그래도 그냥 꾸준하게 저기(장사)를 했는데, 그러다가 그냥 이제 식당을 무료 급식만 하고 한참 안 했어요. 왜냐하면 그때는 우리 집에 손님들이 많잖아. 그 사람들이 대놓고 우리 집에 들어오면서 하는 말이, “이 늙은이들이 그냥 와 갖고 이런다.” 하면서 노인들이 무료 급식 먹으니까는 기분 나빠하는 거야. 점심 먹으러 왔는데 그러는 거야. 근데 애들 아빠가 고지식하시거든. 어떻게 젊은 애가 어르신들 밥 잡수 시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냐고. 이 식당을 때려치워 버려야 되겠다고 그러시는 거야. 그래서 설마 그렇게 하나 했더니 진짜 그만 두자고 하더라고.

근데 나는 그 사이 사이에 여기 식당 하면서도 뭐 요양원이니, 양로원, 노인대학, 이런 데 봉사를 다녔었거든. 그래서는 아이, 그냥 그러면 무료 급식만 하자. 이제 다니기는 마음 편하잖아. 점심만 해서 주고서. 이제 내 시간이 많잖아. 오전에도 갈 수 있고 오후에도 갈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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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러자고 그래서 몇 년 장사를 안 했어요. 무료 급식만 해주고.

우리 집 무료 급식은 아무리 많이 와도 준다고 소문이 나서, 여기서 약장사를 하면은 막 팔십 명씩 백 명씩 막 그렇게 오는 거야. 군청에서 재료비는 15인분 주는데. 그래도 나는 막 그게 신나고 좋았어요. 그래서 ‘언제 내가 대접하겠나, 이렇게 많이. 약장사 할 때나 해주지’ 하고서는 그냥 신나 가지고 해주는 거야. 그러면 또 옆에 있는 사람들도 덩달아서 와서 또 도와주고 같이 해주고 그래.

그러는데, 이제 적십자에서 20년 되던 해에 무료 급식이 다른 단체로 넘어갔대. 군청으로 우리 아들이 회의하러 갔는데 그랬다 하더라고. 아들이 “어머니, 그래도 어머니 안 하면은 섭섭하시죠?” 그래서 나는 “아니.” 그랬지. 근데 아들이 “우리 집은 그냥 한다고 그랬어요. 군청 하고 재료비 상관없이 그냥 우리는 그냥 하기로 했어요.” 그러더라고. 그래서 지금도 계속 하지. 대여섯 명씩 그냥 몇 명씩이라도.

면사무소 오면 또 오셔. 오시면 여기 차려져 있으니까 잡수시면 되니까. 그냥 부담 없이 와서 잡수시라고. 그렇게 지금도 그런 거를 놓지 못하는 거는 건강하니까. 그냥 몸이 전체적으로 좀 부자연스러운 것은 있지만, ‘이만하면 그래도 내가 운동 삼아 할 수 있는 일이다’ 할 때 해야지 조금 더 있으면 마음은 아무리 하고 싶어도, 마음이 굴뚝 같아도 못 하는 거잖아. 근데 또 재미있어 또. 그 나름대로 보람도 있고 고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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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이 그전에는 저쪽 상, 이쪽 상, 이렇게 양쪽으로 해서 꽉 차게 오거든. 근데 노인 양반들이 잡수시고 나서 오래 지나니까 그래. 자기가(본인이) 내 엉덩이에 살이 좀 붙었대. 그리고 아들, 딸, 가족들에게 먹은 밥보다 이 집에서 먹은 밥이 훨씬 많다고. 우리 집에서 매일 먹으니까. 그리고 뭐 아침에도 지나가다 오면 드리지 뭐. 저녁에도 우리 밥 먹을 때 오면 드리지. 시도 때도 없이 아무 때고 드렸지.

그러면, 내가 ‘동네 어르신들 건강이 챙겨지는구나’ 생각하지. 뜨뜻한 밥 한 그릇 주는 게 그렇지. 노인분들이 집에서 혼자 먹으면은 그냥 어떤 때는 밥 먹기 싫어서 새우젓 넣고 물 말아서 새우젓하고만 먹을 때도 있다고 그러시더라고. 그리고 매일 안 빠지고 한참 오다가 안 오시는 분이 있잖아. 그래도 빠지다가 오다가 하는 분은 ‘별일 없구나’하는데, 안 빠지는 데 빠지면은 내가 가지, 가정 방문을. 혹시 병났으면 어떻게 해. 아프시면. 그러니까 내가 쫓아가보지. 그러면은 어디를 갔는데, “아이고, 이렇게 올 줄 알았으면, 내가 미리 얘기할걸.” 그러시는 분도 있고. 어떤 때는 진짜 아파서 계시는 분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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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주신 지혜, 박리다매

여기서 뷔페를 2014년도서부터 했으니까, 그 전 6년. 6년 정도 식당을 안 한 것 같아. 그러다가는 인자 장사를 하기는 해야 되겠는데, 어떻게 해야 되나. 그래, 이제 서울이고 어디고 갔다 오다가 보면 뷔페 집에를 가서 먹어보기도 하고, 그전에 인자 하던 장단이 있으니까 뷔페를 시작하게 됐지.

뷔페 하기 전부터 여기 등산 오시는 분들, 그런 분들이 어디서 알고 전화를 하는지 우리 집에 밥을 시켜요. 그러면은 뭐 한 40명, 차 두 대 오면 뭐 70~80명 이렇게 되잖아. 그러면은 내가 저 끝에 상에다가 뷔페로 차려놓고 그 사람들을 뷔페식으로 해서 주는 거야. 관광 오는 그 사람들한테.

그리고 그 마현리 사는 농사짓는 사람들이 밥 먹을 데가 없다는 거야. 여기 마현리. 여기서 십 분 정도 가면 되나?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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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해달라고 했어. 일하는 사람들, 농사 일하는 사람들 한 30~40명 이렇게 일하면 해달라고 맞춰. 그러면 이제 그럴 때는 뭐 콩나물 잡채 그런 것도 해서 주고 그랬지. 이러면서 여기 식당 좀 하라고 하고 주변 사람들이 하도 원을 해서 ‘사람들이 이렇게 식당을 하라고 했었는데 다시 해보자. 뷔페로 해주는 게 좋을 것 같으니 그래, 뷔페 집을 몇 집 가보자.’ 했지.

그랬더니 가서 보니까는 6,000원짜리가 있고 7,000원짜리가 있더라고. 몇 군데 가보니까 7,000원짜리도 보면은 생각처럼 그렇게 많이 먹을 게 있는 거는 아니야. 가지 수는 많아도. 서울에서 들어 오면서 가격을 얼마로 정할까 생각했지.

우리 아버지는 나 열두 살 되던 해에 1월 10일 날 돌아가셨어. 그랬는데도 평생 써도 다 못 쓸 지혜를 다 담아주고 돌아가셨어. 많은 얘기를 해주고 돌아가셨는데, 한번은 박리다매 얘기를 하셨는데, 어렸을 때 얘기라 그런 것들은 안 잊어버려지더라고. 그래서 아들 보고 “외할아버지가 이익을 많이 남기는 사람은 성공을 못한다 하더라. 이익을 조금 남기는 사람이 성공한다 하더라. 그러니까는 우리 그냥 5,000원짜리 하자.” 그랬지. 아들도 좋다고 그래서 5,000원짜리 이제 뷔페를 한 거야.

그러면서 출장 뷔페를 같이 했지. 그랬더니 출장 뷔페가 막 생각 외로 엄청 많이 들어오는 거야. 체육대회, 동네 회의, 동송지역, 철원지역 뿐이 아니라 파주, 동두천, 포천, 뭐 그런데 학교 같은 데서도 졸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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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 행사, 운동회 할 때, 뭐 체육대회 할 때, 각 학교마다 체육회마다 그냥 전부 우리 집에서 시켜. 그러니까는 맨날 새벽부터 바빴어. 그래서 아들은 매일 출장 가고, 나는 집에서 사람들 데리고 준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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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 불청객이 찾아오다

그랬는데, 이 코로나가 딱 온 거야. 이 출장 뷔페로 (식당을) 유지를 하는 건데 어떡하느냐고, 어떡하느냐고 그냥 그랬는데, 나도 또 “얘 어떡하니?” 이 말을 안 하는 성격이고, 우리 아들도 “어머니 손님 없어서 어떡해요?”를 안 하는 성격이야 둘 다. 안 해봤어, 지금까지. 그러는데 이제 우리 아들이 하는 말이 “어머니, 이제 어머니도 힘드시고 그냥 출장 뷔페 하지 말까요?” 그러더라고. 출장 뷔페는 음식을 다 새벽에 해야 되니까. 먼 데, 동두천 저런 데 갈 때는 막 일찍 출발해야 되잖아. 걷기 행사 이런 거 할 때는 1000명, 1800명, 2000 명 그렇게 들어와요. 그러고 또 부대에 주는 도시락도 50개 싸야 되고.

그렇게 했는데 코로나 오기 얼마 전부터 이 출장 뷔페를 못 했어. 돼지 병, 오리 이런 것 때문에 이제 군에서 자제를 시키고 못 하게 했어. 모이는 거 이런 거를. 전염성 있는 거니까 못하게 해서. 워낙에 출장 뷔페가 잘 됐었기 때문에 지금은 (예전) 장사하는 백 분의 일도 안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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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거지. 그래도 그냥 아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냥 뭐 밥 먹으면 사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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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식 요리의 비결

나는 내가 먹고 싶은 거 있으면은 해 먹거나 찾아다니는 성격이에요. 왜냐하면은 우리가 또 요리를 하니까. 어떤 사람은 식당에 가면은 그 집 음식 맛이 있다, 없다 그러잖아. 근데 나는 그중에서 한 가지는 배울 게 있다고 생각해. 말하자면은 ‘아, 나는 간장에다 했는데 고추장에다 하니까 더 깔끔하구나’ 그런 게 있잖아. 그래서 뭐든지 한 가지라도 배워오려고 노력해.

그리고 내가 아무거나 잘 먹어. 못 먹는 것도 없고 싫어하는 것도 없어.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뭘 못 먹으면은 그게 영양하고 상관이 없는 거라면 모르지만은, 상관이 있는 거면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 사람이 잘 먹게 만들어. 여기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이거는 맛이 있다, 없다.’ 그런 거 못하게 해. 이것도 뭐 때문에 먹어야 되고, 이것도 뭐 때문에 먹어야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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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전에는 내가 들풀을 많이 뜯었어요. 그러면은 신명자씨라고 그 양반은 나한테 무슨 풀을 그렇게 다 뜯느냐는 거야. 그런 걸 어떻게 다 알고 그렇게 다 뜯어 먹었느냐 그래. 나는 자연식품, 건강 그런 거에 관심이 있어. 왜냐하면은 옛날에 어려웠잖아요. 어려우니까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거에서 영양을 찾아야 되잖아. 그러니까는 냉이를 뜯어가지고, 냉이 죽 쓰고, 삶아서 무치고, 국 끓이고 겉절이 하고. 우리 큰아들이 이천에 사는데 그 애가 그러더라고. 냉이 겉절이를 어디 가서 먹어볼래도 없대. 그래서 오면은 내가 냉이 겉절이를 해준다니까는. 냉이 겉절이, 시금치 겉절이 뭐 별거 다 하는 거예요.

돈 주고 사지 않는 걸로 하려고 하다가 보니까 사실은 그런 건데, 이제 나중에 보니까 그게 다 건강식이더라고. 사람들은 그런 거를 어떻게 알고 그렇게 옛날부터 먹었냐고 그러는데 사실은 처음엔 알고 먹은 건 아니고, 기왕이면 나물도 골고루 색깔별로 뜯어다가 먹고, 그래서 하게 된 건데 그런 것들이 살면서 다 도움이 된 것 같애.

내가 철원 군 대표로 요리대회에 나가서 1등도 했어요. 철원에서 쌀 요리 대회를 해서 거기서 1등 해 가지고, 이제 강원도 대회에 나갔지. 철원 쌀 만두. 쌀을 빻아서 쑥을 넣어서 하고, 하얗게 하고 파랗게 하고. 흰 것만 하면 좀 밋밋하니까. 색깔 예쁜 쑥이 또 영양가가 좋은 거니까.

애들 과자도 없으면은 감자 캐면 감자 해 가지고 말려서 풀 발라서 감자도 말리고 깻잎도 말리고 산초도 말리고 다 말려. 안 말리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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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 그렇게 해서 그냥 볶아서 주는 거야. 그걸 그렇게 해서는 설탕 조금만 뿌려서 주면 그게 그냥 별식이 되잖아. 그전에 맨날 그렇게 해서 줬지. 돈 주는 거는 안 했어. 애들 키우고 다 가르치고 해야 되니까는 그런 거를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돈 안 드는 거는 뭐 좋다 하면은 다 해.

그러니 반찬 하면서도 건강식 그런 거에 관심이 많아. 여기 면사무소 직원도 매일 와서 먹겠다고 가면서 그러더라고. 여기 와서 먹고 가면은

맛이 있었든 없었든지 간에 일단 소화가 잘 된대.

<철원군 대표로 참가한 강원도 요리대회 | 사진 중 연두색 한복이 김숙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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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 내 꿈은

내가 하고 싶은 게 뭐냐고 하면은, 이 봉사를 전염시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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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함께 시작한 봉사 인생

원래 내가 전화도 잘 안 하고 말주변도 없고 그래요. 일만 열심히 해. 몸소 보여주고 봉사하는 것을, 전염시키는 것을 좋아해요. 내가. 그것만 잘해. 사연들이 많은 감염자가 있어서 이렇게 잘 할 수 있는 거지 뭐. 안 그러면 못하지. 나보다 더 열심히 해주시는 분도 많고 도와주시는 분이 많아서 이렇게 할 수 있는 거지.

봉사는 우리 아들 아기 때부터 한 것 같아. 우리 아들이 어렸을 때 저희는 공주 살았거든요. 그때는 큰 도로서부터 샛길까지 코스모스를 내가 다 심었어. 우리 아들은 비가 오는데도 놔주고 나는 심고. 봉사는 아들이랑 거의 계속 같이 했지.

내가 여기 근남면 근남봉사회를 만들었어요. 원래 없었는데 무료 급식을 하기 위해서. 그거를 이십 년 전에 만들었는데, 만들고 하는 동안에 아들이 계속 같이 다니면서 뭐든지 다 도와주고 다 해주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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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보니까 아들이 ‘봉사를 해야 된다’ 이런 게 아니라 그냥 저절로 하게 된 것 같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막내아들이 적십자도 했는데, 어떻게 하다가 보니까 적십자 군 협의회 회장이 되고, 또 장애인 복지관에서 제가 사물을 가르쳤거든요. 장애인들에게 사물이랑 춤이랑 이런 걸 다 가르쳤어. 내가 이제 그만두고 나중에 보니까는, 또 우리 아들이 이어서 악기도 가르치고 그런 거를 하더라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이어져서 하니까 그런 것도 다 감사하더라고. 만약 아들이 저 싫다고 하고 딴짓하면은 그건 억지로 할 수 없는 일이잖아. 그런데 그냥 자연스럽게, 하라고 하면 나보다 더 잘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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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를 위한 배움의 길

내가 지금은 이제 힘드니까 안 해드리는데, 스포츠 마사지 1급 자격증 도 땄어. 요양원 같은 데 가면은 해주려고. 여기 우리 이사 왔을 때는 그런 봉사를 하다가 보니까는, 청소년하고 또 대화를 해야 할 때도 있고, 케어해야 될 게 비단 노인들만 있는 게 아니더라고. 아기들도 있고. 지금은 봉사단체가 많아져서 그렇게 봉사를 꼭 다니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됐어.

근데 그때는, 새마을이고 적십자고 아무 데서도 봉사 오는 사람이 없었어. 그런 데가 없었어. 단체가 있어도 그런 거 할 줄은 몰랐어, 새마을, 부녀회도. 이 동네도 부녀회가 없었는데 여기 지도자랑 사람들이 와서 나보고 부녀회 만들어 달라 해서 내가 부녀회 만들어 가지고 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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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은 저 잠곡리, 마현리 이런 데에 할머니들이 왜, 손주 혼자 키우고 있는 사람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있으면은 내가 찾아가서 보살피기도 하고. 간식 같은 거, 예를 들어서 아기 간식으로 주라고 라면도 사다 주고 과자도 사다 주고. 또 연탄 때잖아. 연탄 아궁이가 부서지면은, 우리 이종 오빠가 옆에 살아. 그 오빠의 올케가 아주 진짜 동역자였어. 같이 다니면서 힘든 거, 어려운 거, 설거지 다 해주고. 다 도와주고. 노인네들 집집마다 다니면서 그렇게 다 보살펴줬어. 그러니까 내가 혼자서 못한다니까.

이게 그렇게 적극적으로 돕는 이가 있어서 가는 거야. 어떤 때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 낯이 나고 그 양반 낯이 안 날 때가 있으면은 내가 속상해. 사실은 그 노력은 그분이 더 하신 거 같은데. 그분이 그런 걸 바라는 사람이면 하지도 않지. 그렇게 일을 할 수 있도록 옆에서 주변에서 도와줘 자꾸. 하나님이 자꾸 그런 사람들을 붙여주시는 것 같아. 내가 혼자 못하니까.

주부대학은 92년도 농협에서 1기로 했어. 내가 학생회장이었거든. 하려고 그런 게 아니고 이상하게 안 하려고 그래도 하게 되더라고 희한하게. ‘솔로몬의 재판’이라는 뮤지컬이 있는데 내가 여기서 그거를 배워서 전국적으로 써먹었어. 무슨 큰 행사 갈 때마다 가서 공연을 했어. 여기 노인대학에서도 학생들 가르쳐 가지고 하고, 저기 뭐 행사 때마다 다 가르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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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농촌지도소가 지금은 농업기술센터라고 하지. 그 지도소에서 이제 교육을 오잖아요. 그 교육을 오는 선생님들한테 내가 여기 군에서 우리한테 사물놀이 좀 가르치고 주부들이 할 수 있는, 농촌 주부들을 위해서 하는 그런 거를 좀 해볼 생각이 없냐 그랬더니 가서 허락을 받았다고 하더라고. 이제 우리를 가르치겠다고 해보자고 했는데, 가르치는 선생님이 없는 거야.

그래서 그때는 강포리 초등학교에 가서 거기 사물놀이반 선생님들 한테 배우다가, 춘천에 있는 사회문화연구소 선생님이 계신데, 신경주 선생님이라고. 그분이 철원 동송에 와서 가르쳤지. 그래 옛날이지 뭐. 그때는 나하고, 지금은 이제 나이 드셔서 잘 못 다니시는 분이 있어. 그분하고 나하고 둘이 동송으로 연습을 하러 다녔었어.

그때 태봉제에 처음으로 우리 사물놀이가 가서 했지. 철원군 축제에. 그때는 군청 농업기술센터 직원들하고 같이 해서 그 사람들도 북이랑 장구 배워 가지고 같이 하고 그러는데, 내가 여기에 있을 때는 그냥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막상 악기를 들고 서면은 엄청 신바람이 나. 딴 사람이 돼. 한번은 내일 모레가 행사인데, 오늘이 마지막 연습인데 징 칠 사람이 없어 가지고 “선생님 징 칠 사람은 누가 징을 쳐요?” 이러니까 선생님이 나 한 번 따라와 보래. 나보고 징을 주면서 그 선생님 뒤로 한번 따라가 봤더니, 그거는 이제 박자만 알면 치는 거더라고.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하고 같이 일본에서 공부하신 분이 국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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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거를 하는 학원 원장님이셔. 근데 그 집에서 나를 삼박자 사박자 하면서 굿거리, 뭐 양산도 이런 박자를 가르쳐줬어. 근데 그거는 안 잊어버려지더라고. 말하자면은 이제 그냥 ‘덩기다 덩 다다다’ 이렇게 하잖아, 배울 때 이렇게 배워요. 근데 그 아버지는 ‘덩기다 덩 다다다’만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합다닥 합 다르르르’ 이렇게도 가르치고 ‘덩기닥’도 가르치고 ‘하나아, 두울, 세엣, 넷’ 이렇게 가르치는 거야. 그 ‘하나, 둘, 셋, 넷’ 박자로 하니까 그건 평생 안 잊어버리잖아. 노인대학에서도 그때 생각을 해서, 내가 ‘주부대학 좋은 걸 어떡합니까’로 개사를 해서 강원도로 그때 또 출전했었어. 주부대학생들이 출전해 가지고 그때도 상 탔지.

장구 난타, 북 난타, 뭐 이런 거. 이런 거 애들 가르치는 거, 어른 가르치는 거 이런 걸 다 자격증을 땄어. 그래서 이렇게 배워서, 배웠으니까 이렇게 다 다니면서 이렇게 가르쳤지. 군부대도 다니면서 가르쳤어. 군부대 체육대회에 나가는 사람들. 밤에 불 켜놓고. 부대 연병장에 가면은 막 트럭으로 불을 쫙 켜놓고. 차마다 시동 걸어놓고 사물놀이 가르치는 거야. 노력을 했지, 뭐. 그만큼 배우려고. 내가 알아야 가르치고 하니까. 그래서는 이제 정식 강사로도 다녔어요. 초등학교 중학교 뭐 이런 데. 퓨전으로 난타 장구, 난타 북, 그런 거 해서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서, ‘독도는 우리 땅’ 난타, 북 난타 가르쳐서 축제에 내보내고 그런 거를 했었어요. 장사 안 하는 동안은 매일 북 치고, 장구치고 다녔지. 북 치고, 장구 치고, 또 춤도 추고. ‘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거 엄청 많이 다니면서 했어. 행사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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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 재능 기부를 꾸준히 실천 해오신 김숙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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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십자 봉사활동

이거는 왜 했느냐 하면은, 그때도 사물놀이 하러 갔어요. 군청으로. 불우이웃돕기. 이제 가게마다 다니는 거야. 그러면은 우리 근남 사물놀이가 가서 공연을 해줘.

그러는데 홍광문 씨라고, 그분이 농협 사무실 있는 데로 회장님 이리 좀 와보라고 그러더라고, 쉬는 시간에. 그래서 갔더니 사실은 무료 급식을 해야 되는데, 김화, 근남, 서면 세 군데 다 찾아봐도 할 데가 없다는 거야. 해준다는 사람도 없고, 할 수도 없고. 그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노인들에게 밥을 해줘야 되는 거니까. 그게 쉬운 문제는 아니잖아요. 회장님한테 밖에 부탁할 데가 없는데 어떡하면 좋겠냐고 그러는데, 또 우리 아저씨한테도 의논을 해봐야지. 나는 100% 의논을 해서 하지 내 마음대로는 또 못하는 성격이야.

그래서 이제 의논을 했더니 그러면은 뭐 당신 다니면서 안 하고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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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봉사하면 될 거 아니냐고 그래. 그래서 “아, 그러네.” 그랬지. 그 뒤로 다니긴 똑같이 다녔지만(웃음). 그러니까는 이 양반은 ‘아, 이제 안 다니고 여기서 집에서 그냥 하면 되는구나.’ 생각을 하고 하라고 한 거야.

그래서 전화를 했지. 하라고 승낙이 떨어졌다고. 그런데 적십자를 만들어야 된대. 적십자 회원이 있어야 된대. 그래서는 급하게 여기저기 연락을 해 가지고, 회원 모집을 해서 이제 하게 된 거지.

근남봉사회 봉사회원들은 30명 정도 돼. 근남봉사회가 일을 많이 하는데 요양원, 목욕 봉사, 반찬 봉사. 그전에는 반찬 해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반찬을 좀 해달라 하더라고. 이 인원이 한 20~30명 될 때도 있고, 10명 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뭐 사연이 생기면은 몇 가정 밖에 없을 때도 있고 그러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내가 반찬을 만들어 주면은 그 복지관에서 와서 갖다줬어.

처음에 해줄 때는 철원군 전체를 다 해줬어. 이쪽에 몇 가정, 여기 몇 가정 이렇게 해줬는데. 이제 나중에는 동송 지역은 거기 누가 또 봉사해 줄 사람이 있어서 거기서 떼어주고, 또 저기 신철원 사람은 거기 떼어주고, 김화 쪽 떼어주고.

근데 또 다른 데에다가 어떻게 넘겨주고 싶은 생각도 있는데, 김장이랑 그런 걸 다른 데서 할 데가 없어. 우리 집에서 하면은 내가 미리 준비를 다 해놓잖아. 봉사하는 사람들은 그날 와서 하지 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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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는 못하잖아. 내가 속까지 싹 해놓지. 그럼 많이 할 때는 400포기, 500포기 조금 할 때가 300포기, 하여간 최소한 아무리 적게 해도 300 포기 이상은 해야 되거든요. 속이랑 그런 거는 뭐 여럿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냥 내가 하면, 올케가 와서 도와주고, 앞집에서도 도와주고. 주변 사람을 내가 가만히 안 둬. 그런데도 또 안 부르면 섭섭해서 수도 없이 와, 우리 집은. 왔다 가고, 왔다 가고, 또 오고, 또 오고 그래. 그리고 절일 때나 속 넣을 때 봉사원들이 많이 오셔서 함께 봉사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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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모내기

이렇게 봉사를 하면서 제일 보람이 있었던 일은, 다 보람이 있고 다 좋은 일이었었지만은 여기는 곡창지대잖아요. 그러는데 언젠가는 비가 안 왔어, 그 해에 비가 하나도 안 와서 모를 아무도 못 심는 거야.

그래서 내가 이제 연대에 가서 연대장님을 만났어. 그래서 연대장님 보고 이렇게 비가 안 와서 이러는데 무슨 대안이 없겠느냐 그랬더니 하루 고민해 보자고 그러시더니 하루가 아니라 그날 저녁에 우리 집에 오셨어요. 오시더니 자기가 물차를 다 동원한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때는 화장실을 펐잖아, 푸세식. 부대에서 분뇨차를 동원해 가지고서는, 군인들과 함께 냇물에서 물을 받아다가 논에 물을 댔어요. 코로나 유행 전에는 대민 지원이라는 게 있어요. 그 농사짓는 데 군인들이 와서 모도 심어주고 뭐 밭에 뭐 일할 거 있으면은, 농가에서 몇 명 신청하면 이렇게 나와서 농사일 도와주고 그랬어. 옛날에는 그게 컸지. 나와서 도와주는 게 엄청 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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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이랑 우리 봉사 회원들 다 나가서, 매일 점심, 저녁 밥 해다 대고, 논에다가 물 부으면서 모 심으면서, 그렇게 해서는 다 심고서, 맨 마지막에 현재 한금석 의장님 댁그뒤산 밑에 있는 논을 마지막으로 심었어요.

아주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 그랬는데도, 그때는 뭐 우리 아들, 우리 아저씨, 뭐 온 동네 사람 다 나섰지 뭐. 다 나서 가지고서는 그거를 그렇게 해 갖고 다 심었어. 그러는데 그냥 이원승 연대장님도 일요일 날도 안 가셔 집에. 아,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그냥 매일 새벽부터 우리 집에 하루에 한두 번씩 매일 출근하시고. 새벽에 날만 새면은 가는 거야 그냥. 물 다 받아놨다가.

모 심는 거는 시기가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는 막 빨리 심으려고 어떤 때는 국수도 삶아 가지고 가고. 어떤 때는 아무거고 그냥 있는 대로. 군인들이랑 다 먹여야 되니까는, 몇십 명씩 되잖아. 그러니까는 농민들은 뭐 날마다 다 신났었어, 그때는. 힘들면서도 신났어. 모가 심어지니까 신바람 나서 너무 좋았지. 그 연대장님한테 너무 고마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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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 때 모심기 봉사활동 | 좌측: 군 연대장, 중앙: 김숙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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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에서 중요한 것

코로나 때 노인 양반들이 장에 갈라 하면은, 장에 모시고 가야지. 병원 가려면, 병원 모시고 가야지. 또 목욕 간다 하면 목욕탕 모시고 가야지. 그래 그것도 되게 보면 감사하더라고. 코로나 안 걸린 게 얼마나 감사해. 안 그러면은 하고 싶어도 못해.

근데 어떤 때는 금방 갔다 왔는데 또 가자고 하는 사람이 있잖아. 그럴 때는 또 가야지 뭐. 그러면은 누구는 막 뭐라고 그래. 금방 갔다 왔는데 그냥 내일 간다고 하지. 뭐 다음에 간다고 갈 때 전화한다고 하지. 뭐 금방 갔다 또 가냐고 막 뭐라 해.

그런데 가자고 말하는 사람은 생각 없이 하는 것 같아도, 말하기 미안해서 간신히 하는 거거든. 우리가 해보면 그렇잖아. 우리가 누구한테 뭐 부탁할려면 어렵게 말하게 되지, 뭐 그냥 하나. 그냥 뭐 생각 없이 하지는 않지 다 어른인데. 그러니까 갈 수밖에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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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도 봉사 받는 사람의 입장이 많이 중요한 것 같더라고. 이 사람 저 사람 성격이 다르듯이, 받고 싶어 하는 마음도, 이 마음 가진 사람 저 마음 가진 사람 다 다르잖아요. 그 마음을 우리가 다 몰라. 이제 많이 만나다 보면, 어우, 이 사람 진짜 원하는 건 이건데, 여기서만 헤맬 때도 있어. 이걸 원하는지 알고. 그래서 마음을 주고받는 거, 진찰하는 거, 그 사람이 나를 신뢰하게 하는 거 그게 중요한 것 같아. 그러면은 이미 나를 탁 믿어버리고 난 뒤에는 내가 이만큼 (작게) 했는데 그 사람 마음에는 내가 이만큼 (크게) 해준 것 같은 거야.

그 전에 저 위에 집에 불이 났대. 어려운 집인데 다 타버렸어. 그래서 내가 이불도 갖다 주고 뭐 쌀도 갖다 주고 했지. 지금은 적십자에서 그 적십자 용품이 딱 나와요. 그때는 적십자 그런 것도 없잖아, 옛날에는. 봉사하는 사람도 없었다니깐. 나만 막 열심히 다니면서 손주 키우는 사람, 혼자 사는 사람 이런 사람 보살피고 다녔지. 그래서는 나는 그냥 이것저것 다 이렇게 해서 갖다 주고서는 준 걸로 끝이라고 그랬잖아. 오랜 세월이 지나서 잊어버렸어. 그때 우리 집에 와서 내가 여기 뒤에 방에서 살으라 그랬어, 그 집 들어갈 동안에. 그랬더니 자기네 친척이 그 주변에 살아서 거기서 있기로 했다고 그러더라고. 근데 난 그 사람 얼굴이 기억도 안 나. 이웃 동넨데도 잘 못 보니까 얼굴도 기억이 안 나는데, 그 양반은 내 얘기를 지금도 한 대. 불났는데 제일 먼저 와서 제일 필요한 걸로, 그렇게 필요한 것만 어떻게 그렇게 알고서는 해서 준비해서 갖다 주고서, 또 자기네 집에 와서 살으라고 하고 그랬다고. 그 소리를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고.

106쪽

그래서 나는 봉사하고 잊어버렸지만, 받는 사람이 감사하게 생각하는 거, 그것처럼 서로 통하면 도와주는 것도 신나고 받는 것도 신나고 서로 신나는 거 같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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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를 전염시키는 게 내 꿈이야

나는 하고 싶은 게 뭐냐고 하면은 이 봉사를 전염시키는 거예요. 진짜 이 봉사에 전염된 사람, 감염자들이 더 큰 일을 많이 해요. 내가 하면 하나지만 그 사람들이 또 전염시켜봐. 나는 그거를 원하지. 내가 뭘 많이 할 수 없어. 아무리 한다고 그래도 한계가 있잖아.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 그렇게 많겠어. 이제 봉사하다가 보면은 봉사회원 중에, “아우, 회장님 이거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하는 좋은 제안도 나오잖아요. 요양원에 이렇게 다녀보면은 꼭 힘들기만 한 거는 아니야. 거기에 가서 장애인들한테도 배울 점이 많아. 다른 사람들은 봉사를 가면 내가 노래를 부르고 오는 걸 봉사라고 생각을 하더라고. 난 그렇게 생각을 안 해.

인자 몇 명이 가잖아요. 그러면 이제 파트별로 딱 시켜. 요양원 사람들은 우리가 많이 하는 거 원하지 않아. 한 번 가고 두 번 가면은 다 그 사람들 특기를 알아. ‘이 사람 노래 부르는 거 좋아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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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춤추는 거 좋아하는구나. 이 사람은 안아줘야지 좋아하는구나’ 그걸 다 알잖아.

그러면 이제 다 맡겨. 그러고서는 한 사람이 앞에 가서 노래 부르면 한 번 정도만 부르지. 많이 부르면 두 곡 불러. 그리고서는 그 사람들이 부르게 해. 장구도 가지고 가면 장구 치는 할머니 있어. 그럼 “할머니가 장구 안쳐주면 난 노래 못 불러.” 그러면 “내가 그렇게 장구를 잘 쳐?” “아유, 대한민국 다 다녀봤지만 할머니밖에 없어. 할머니처럼 이렇게 잘 치는 사람 처음 봤어.” 이러면 나 죽을지 살지 모르고 막 우리 올 때만 기다려, 장구 칠라고. 그러면은 사실은 봉사하기가 힘도 안 들어 그 사람들이 다 하는디. 뭐 내가 했어? 그 사람들이 다 하잖아.

이웃사랑 회원 중에서 정복실이라고 있었어요. 그 양반이 어랑 타령 이런 걸 잘 불러. 그 봉사원이 그걸 잘 하는데 요양원에 갔는데 거기 할머니 한 사람이 이 노래를 잘 부르는 거야. 치매 환자가. 그 ‘ 어랑타령’ 이런 거는 혼자 부르면 재미가 없어. 주거니 받거니가 돼야지.

그러는데 그냥 하루 종일 들어도 안 지루할 정도로. 그 옛날 구전으로 내려오는 구슬프면서 또 어떤 때는 신나고 또 오묘하면서 기가 막힌 그 구절 구절들이, 아 사람 마음을 녹인다니까 둘이서. 그 환자하고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 그러니까 이 양반도 그 양반이 잘하니까 신나서 잘하고, 둘 다. 가는 데마다 이 봉사원하고 통하는 사람이 있고 저 봉사하고 통하는 사람이 있더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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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아니었으면 이제 봉사하러 계속 다녔을지 모르는데 코로나가 있고, 우리 회원들 데리러 막 이집 저집 돌아다녀서 데리고 갔다가 또 데려다 주고 이래야 되잖아. 그리고 또 식당을 다시 또 이렇게 하고 있고. 그래서 그렇게 다니는 거는 하지 말아야 되겠다 싶어. 그래도 노인대학이 있으니까 노인대학 하고, 또 장애인 돌보는 거 하고, 그러니까 힘닿는 데까지는 해야지. 너무 힘들면은 하나 줄이고.

누가 노인대학을 저기 김숙희 회장님이 맨날 밥도 해주고 다 강사 섭외니 뭐 전부 다 이렇게 해주니까 그렇지, 그렇게 안 하면은 못할 것 같다고, 아무래도 하기 힘들 것 같다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아니야 근데 못할 거 같아도, 이 사람이 안 하면 또 저 사람이 해. 잘하는 사람 또 생겨.”

그러니까 자꾸 전염시키잖아. 나는 그래. 내가 봉사하는 것보다 전염시키는 걸 더 좋아한다니까.

<장애인 복지관 풍물 교실에서 수업하는 모습 | 노란조끼를 입은 김숙희님>

111쪽

<2018 철원군 으뜸봉사단체 선정>

<2020 대한적십자 포장증(최고명예장) 수여>

112쪽

<2019 강원도 자원봉사명장 선정>

<2012 철원군민상 봉사상 수상>

113쪽

세번째 이야기 | 박재서

그때 뭐 먹을 게 있나. 밀을 그냥 맷돌에 갈아서 감자하고 강낭콩을 넣는 거야. 아휴, 얼마나 까칠한지. 깔깔해서 이게 목에서 안 넘어가. 그래서 내가 지금도 감자를 안 먹어.

114쪽

우리 아버님 고향은, 지금은 이제 거기가 북한 땅이지. 오성산(五聖山) 이라고 있어. 그 밑에 좌월이라는 동네가 있었는데, 거기서 사셨다가 1950년에 6 䞻25전쟁이 나가지고 피난을 가면서 경기도 수원까지 가셨대. 전쟁 중에도 남으로 북으로 엎치락뒤치락했을 거 아니야. 그러다 미군이 들어오고 우리 남한 쪽이 더 세지면서 북진(北進)이 되니까, 그때 여기 전방에 살던 사람들이 자기 고향을 다시 찾아간 거지. 우리는 고향을 못 갔어. 이제는 북한이니까. 여기서 한 4km가 넘을 거야. 그렇게 고향으로 못 가고, 여기서 머물게 된 거지, 이 동네에서.

그리고 나는 저쪽 김화읍에 청양이라고 있어. 전쟁 막 끝나고 1954 년에 청양리(淸陽里)에서 태어났어. 아버지가 고생 많이 하셨지. 여기를 왔다 갔다 하시면서 집을 지어놓고, 이제 가족이 다 이쪽으로 온 거야. 지금까지 철원에 쭉 살았어.

116쪽

나는 영해 박씨야

우리가 영해 박씨(寧海朴氏)야. 강원도 삼척 밑에 울진 좀 못 가서 영해라고 있어. 영해 박씨는 본관이 경상북도 영해이고, 우리 시조는 박제상( 朴堤上) . 내 이름은 실을 재( 載) , 서녘 서( 西) . ‘ 재’ 자가 돌림자야. 우리 형님은 동(東)이고, 나는 아우니까 서(西).

근데 지금은 여기가 영해 박씨 집성촌이라, 사곡리(沙谷里), 마현리( 馬峴里) 이쪽에 영해 박씨들이 많이 살아. 김화읍이 영해 박씨가 최고 많이 살고. 그러니까 여기 사는 박씨는 거의 다, 99%는 영해 박씨야. 몇 집 빼놓고는. 몇 집은 밀양 박씨(密陽朴氏). 근데 이제 둘 다 박씨이다 보니, 밀양 박씨는 자기네들이 원조라고 그러고, 우리 영해 박씨는 우리가 원조라고 그러는 거지. 근데 밀양 박씨는 워낙 많아, 인구가 많아. 그러니까 영해 박씨는 수가 적으니 싸움에 밀리는 거야(웃음).

117쪽

영해 박씨 중에서도 파(派)가 네 파가 있어. 거기서도 우리는 수가 제일 적은 집이야. 나머지 세 파는 여기에서 예전부터 살았어가지고 윗터고 뭐고 다 있어. ‘윗터’가 뭐냐면, 조상들이 물려준 터라는데, 내가 아니고 종중으로 물려주고 하는 땅을 윗터라고 그러잖아.

그런데 우리 파는 오성산(五聖山) 밑에 살았었대. 거기서 나왔기 때문에 여기서는 우리 윗터가 하나도 없는 거지. 그러니까 영해 박씨 중에서는 저 네 파 중에서 우리가 최고 가난한 파라고 그랬다더라고. 지금은 뭐 다 비슷하게 살지.

118쪽

엄하지만, 덕망 높으셨던 나의 아버지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엄하셨냐 하면, 우리는 크면서 아버지 계실 적엔 싸우지도 못했어(웃음). 그래도 우리 아버님은 없이 사셨어도, 참 덕망(德望) 높으신 분이셨어. 마을에서 사람들한테 우리 아버님은 훈장 어르신 같은, 그런 어른이었어.

옛날에도 왜, 시골에도 일은 생기고 사람 간에도 싸움은 나잖아. 안 좋은 일 있거나 다른 사람하고 싸움이 나거나, 또 부부 싸움하는 사람들 있으면 우리 동네에서 다 우리 아버지를 찾아와서 붙들고 하소연하고 그랬어. 그럼 해결이 됐으니까. 싸움도 말려달라고 하고, 시비 붙으면 그걸 가려달라고도 하고.

그러니까 나도 이제 무지하게 엄하게 컸지. 우리 집사람하고 결혼하고 나서도 아버님 계실 적엔 부부간에 큰소리로 다투지도 못했어. 그때는 어른들이 다 엄하셨으니까.

120쪽

나는 지금도 감자를 안 먹어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어. 큰 누님, 큰 형, 작은 누나, 나, 그다음에 남동생 이렇게. 전쟁 통에 피난 가서는 남에 집에서 도움받고 그랬지. 우리가 집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니까. 뭐 먹을 게 있나.

그러니까 남의 일을 해주고 그렇게 살았던 거지. 그래가지고 철원에 돌아와서는 그때 뭐 여기가 우리 고향이 아니니까 네 땅, 내 땅, 이런 답이 없잖아. 내 땅이 없잖아. 그러니까 남의 땅을 빌려서 빌려서 농사짓고 그랬지. 고생 엄청 했지. 그전에도 거의 뭐가 없던 때라서 그냥 다 나무 캐가지고 뭘 해가지고. 다 먹은 거야. 땅들을 돌도 다 골라내고, 그럼 그때 뭐 포클레인이 있어 뭐 있어. 사람이지, 사람. 근데 소도 없더랬어. 소만 있어도 부자거든, 옛날에. 우리 어렸을 때는 황소 한 마리 팔면, 그때는 논 한자리씩 샀다고. 옛날에는 소가 진짜 재산이었지.

121쪽

그때는 쌀은 농사를 못 짓고, 이쪽엔 보리도 안 심었어. 여기는 밀을 심었어. 그때 뭐 먹을 게 있나. 그걸 그냥 맷돌에 갈아서 감자하고 강낭콩을 넣는 거야. 아휴, 얼마나 까칠한지. 깔깔해서 이게 목에서 안 넘어가. 그래서 내가 지금도 감자를, 감자를 안 먹어. 그런 거 먹고 컸지, 다.

장난감 같은 게 어딨어. 전부 다 농사짓는 사람들이니까 뭐 낳자마자 그냥 아기를 데리고 와서 옆에다 두고, 일하러 오는 거야. 와 가지고 뭐 갓난 아기들을 저기 마차 밑에다 응달을 해놓고, 거기서 애를 놀게 하고 그랬지. 애가 조금 크면 막 기어 댕기잖아. 그럼 기어 댕기는 애들은 막 뭐를 막 집어먹잖아. 입에 다 넣고. 흙이고 뭐고 막 집어먹는 거지. 그래서 그냥 묶어놓는 거야, 못 돌아다니게. 멀리 못 가게. 다들 그렇게 컸지.

그때 이불이 있어, 뭐 있어. 군인들 있는 전방 지역이니까 그땐 군인들이 이제 그 중사, 상사 그렇지? 이런 사람들이 전부 다 영예 거주(榮譽軍人:‘상이군인’의 북한어. 군 복무기간 중에 부상을 입어 제대한 상이군인)라 해가지고, 민간인들 집에 셋방으로 살고 그랬어. 그때는 헌 모포 같은 그런 것도 얼마나 귀해? 군인들이 그거라도 하나 갖다주면 그걸 깔아놓고 애들이 놀고 그랬지.

122쪽

학교는 군인들이 지어 줬지

그때는 여기 학교가 없었어. 잠곡리에는 있었지. 잠곡리가 여기보다 사람이 먼저 살았어. 원래는 잠곡국민학교랑 마현국민학교도 있었어. 지금은 사람이 줄어드니 모두 근남초등학교로 통합됐지. 근남 초등학교는 56년에 생겼어. 그때는 국민학교지. 그때는 학교라고 해도 군인들이 천막을 쳐 줬어. 그렇게 학교를 다니면서 군인들이 조금씩 학교를 지어 줬다고, 나무로다가.

급식은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먹었나 봐. 4학년 때부터 주긴 주는데, 그래도 조금이었지. 그나마도 조금 먹고사는 사람은 안 주는 거야. 다들 힘드니 진짜 가난한 사람들만 줬지. 그것도 귀하니까.

가난한 사람들은 뭘 줬냐면 우유를 줬어 우유. 분유를 쪄가지고 그걸 나눠주는 거야 이제. 그것도 아주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사람만.

123쪽

그다음에 한 1년 있으니까 옥수숫가루로 죽을 쑤어주더라고. 그래서 먹을 게 아예 없는 사람들은 그걸로 끼니를 먹고, 우리는 점심때 그냥 집에 와서 밥 먹고 그랬지. 육단 3리니까 당시 우리 학교에서 한 2km 돼. 거길 걸어서 학교를 다녔어.

<김화중학교 졸업식 사진>

이 사진은 내가 김화중학교 졸업하던 날 사진인데, 우리 어머님하고 찍었어. 왼쪽에 계신 분이 우리 어머님이야. 옆에 있는 분은 우리 이모님하고, 이모님의 딸이야. 이종사촌이지. 이제는 김화중학교 옆에 김화고등학교도 있어. 그건 한참 나중에 생긴 거야.

124쪽

옛날에는 사진기 가진 집이 어디 있어. 장에 나가면 사진사가 있잖아. 그 사람들이 저렇게 학교 졸업식이면 학교로 찾아와서 사진 찍어 주고, 나중에 사진관으로 찾아가서 돈 내고 현상한 사진 받고 그랬지. 이게 아마 그때 사진값이 너무 비싸니까 그래서 이 사진을 조그맣게 뺐을 거라고. 크면 비싸니까.

126쪽

철원에는 통일촌이 많아

마현국민학교는 사라호 태풍(1959년)이라고 우리나라에서 최고 큰 태풍 났을 때, 울진에 피해가 컸어. 그때 거기 피해 입은 한 동네 사람들을 이쪽 전방으로 이주를 시킨 거야, 정부에서. 이제 여기가 전방이고 수복지역이니까 그때는 땅 주인이나 이자 개념이 없지 뭐. 그래서 그 사람들한테 땅을 얼마큼씩 떼어주고, 개간해 먹고살라고 한 거지. 태풍으로도 다 집이고 뭐 다 잃었으니까. 그래서 마현 1리라고 이제 거기를 민촌(民村)이라 그래. 거기는 그렇게 생긴 동네야.

거기가 또 1968년에 1 䞻21사태라고, 북한에서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있었잖아. 김신조라고, 지금 귀순해서 목사 되신 분. 그때 예비군 생기고 할 때, 철원에는 전방에 통일촌(統一村)이 많이 생겼어. 여기가 최북단에 있는 지역이니 국가에서 전략적으로 사람들을 이주시켜서 마을을 조성한 거지.

127쪽

전방에 통일촌이 대한민국에 한두 군데가 아니야. 그게 뭐냐 하면, 1 䞻21사태 때 북한에서 무장공비들이 넘어오면서 예비군이 생겼잖아. 나라가 긴급할 때는, 군인 숫자가 모자라니까 예비군을 동원시켜야 하니까. 그러니 예비군들을 철원에 통일촌이라는 동네를 만들어 가지고, 정부에서 집 다 지어주고 농토를 나눠주고 여기 와서 살아라 하고 신청을 받은 거지. 그렇게 생긴 동네가 이제 있어. 재건촌(再建村 )이라고, 그 동네는 정부에서 집이랑 땅을 나눠주면서 군사분계선 인접한 데다가 식량도 증산하고 땅도 개간하고 그러려고 만든 거지. 그렇게 해서 생겨서 늦게 생기는 바람에 그때 마현분교가 생겼어. 근데 지금은 이제 철원 인구가 줄어드니 학생이 없으니까 잠곡초등학교도 없어지고, 마현분교도 없어지고, 근남초등학교만 남았지.

129쪽

2장 | 그냥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어, 참하고 예쁘더라고

우리 집사람은 참 고마운 사람이야. 그 참하고 고운 사람이 농사짓는 사람을 만나서 나를 믿고 여기까지 와 줬잖아. 항상 고맙지.

130쪽

군대에서 8가지 업무를 했어

나는 대전 삼광구 사령부에서 군 생활을 했어. 그때는 후방에 사는 사람들은 전방에서 군 생활을 하고, 전방에 사는 사람들은 후방에서 군생활을 했어. 그래서 나는 후방에서 했는데, 그때 내가 글씨를 잘 쓴다고 서무계를 주더라고. 그 당시에 전방에는 거의 인원이 차. 근데 후방에는 숫자를 못 다 채워. 그러니까 한 3분의 2 정도밖에 못 채웠다고. 그러니까 나는 그때 서무계 거기서 보안계, 교육계, 군수. 이사종. 뭐 여덟 가지 업무를 봤어. 일이 너무 많은데, 아침에 앉아서 기본 서류만 쓰는데 한나절이 걸리더라고 한나절. 매일 이렇게 했지. 매일.

그때 우리가 월급을 아마 몇천 원을 받았을 거야. 뭐 그때는 크게 쓸 것도 없지만, 그 돈 가지고 그냥 저녁때 PX 가서 뭐 빵 같은 거 한두 개

사 먹고 그러면서 그걸로 한 달 썼어, 그 돈을 가지고.

131쪽

<같은 사무실 전우들과>

가운데 서 있는 게 나고, 앞에 앉은 둘은 하사였어. 장기 하사랑 단기 하사.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사람들끼리니까 친분이 있었지. 그날 사무실에 있다가 기념하려고 같이 찍었던 기억이 나네.

우리 부대는 인원이 적어가지고, 내가 일을 여러 개를 했다고 했잖아? 군인 계급이 상사, 중사 이런 사람들이 있고 우리 부대 대장은 중령이고. 근데 사람이 많이 없고, 우리 부대도 다른 부대랑 실무적인 통화를 해야 하고, 다른 부대에 나눠주는 일들을 총괄하려니 일손이 부족하잖아. 그래서 기밀한 내용이나 보안 같은 업무 연락은 그분이 하시고, 행정적인 연락 같은 것들은 이제 우리가 해야 했어. 그때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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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계니까 관외 통화 같은 건 내가 했지. 그때 내가 일반 병사인데 다른 부대 중사, 상사하고 통화를 하고 그랬어.

그때만 해도 우리가 다 못 먹었으니까 일단 다 가난했잖아, 다. 특히 농촌 사람들 가난했어. 근데 군인들이 젊은 사람들이니 밥을 무척 먹는 거지. 그 식기에, 군대식 밥으로 그걸 하나 수북하게 담으면 아마 지금 저 대접으로 한두 대접 들어갈 거야. 그걸 다 먹는다고 세 끼를. 밥은 잘 나왔어. 그땐 반찬이 뭐 시원치 않았지.

우리가 부대에서 그 대전 부대 총 지역의 메뉴판을 짰어. 군대 메뉴표를 한 달에 한 번씩. 영양사도 없고, 이제 오늘 아침, 저녁, 내일 아침, 저녁 이렇게 한 달 치를 짜가지고 2군 중부 이남 부대 전부 다 그걸 주는 거야. 그럼 거기서 그대로 급식을 하는 거야, 그거를. 그러니까 우리 부대에서 부식도 받아가지고 다른 대전 시내에 있는 부대들로 보급도 해주고 그랬어. 우리 부대 내에 두부 공장, 콩나물 공장, 고춧가루 공장, 생선 공장, 빵공장 이런 게 있었어.

아침에 빵 굽는 날은 이야. 참. 냄새가 미치겠더라고. 그래도 내가 있던 부대에선 먹을 건 잘 먹었어. 거기서 떡을 만드는 거야. 설탕을 넣어서 호떡을 만들어 줬어. 그래 내가 졸병 때는 배가 고프니 우리 사무실에서 한 300m 떨어진 빵 공장에 가는 거야. 아침에 사무실로 안 가고 거길 먼저 가는 거야. 거기 가서 그걸 가지고 사무실에 가져다

두면 거기 직원들이 다 같이 그걸 먹고 그랬지.

134쪽

졸병 때는 다 살이 쪄

그때는, 막내 고생한다고 먹을 거라도 생기면 조금 더 주고 그런 정이 있었어. 그러니까 군대 있을 때는 졸병 때는, 아마 지금도 그럴 거야. 졸병 때는 다 살이 쪄(웃음). 왜 살이 찌냐 하면, 졸병들은 선임들이 시키는 걸 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뭘 모르니까. 그러니까 다른 건 신경을 안 쓰는 거야. 그냥 뭐 하라는 대로 하면 되니까.

그때 우리는 군대 생활을 33개월 했어. 지금의 두 배지. 그렇게 입대하고 한 15개월 이상 군 생활을 하면, 얼굴이 좀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살이 좀 그때부터 빠지는 거지. 이제 자기도 막내가 아니니 신경 써야 할 게 많아지잖아. 그러니까 디테일하게 이것저것 관리 해야지, 또 우리 고참들을 신경 써야 되니까 몸들이 고단하니 나중에는 정상 체중으로 돌아와.

내가 첫 휴가를 한 10개월 만에 왔나 그랬는데, 동네 사람들이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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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 이상철(좌측)과 함께>

못 알아보는 거야(웃음). 얼굴이 동그래져서.

<훈련소 동기 이선우(좌측)와 함께>

이야, 이거 진짜 내가 이등병일 때 사진이네(웃음). 얼굴 둥그런 거 봐. 좌측에 있는 사람은 내가 처음 군대 갔을 때 내 사수였어. 이상철이라고, 청주 사람이었지. 내가 조수. 좋은 사람이었는데, 나를 너무 부려먹었지(웃음).

왼쪽에 친구는 이선우라고, 인제 사람이었어. 이 친구가 훈련소에서

136쪽

동기였는데, 그때 바로 내 옆에서 나하고 같이 잤거든. 그래서 이 친구를 내가 찾다 찾다 못 찾았어. 그러다 지금으로부터 한 3 ~ 4년 됐나. 결국 찾았어. 인제군 농업기술센터 소장을 하더라고. 작년에 퇴임했지. 그래서 우리 아들 결혼식 때도 오고 그랬어. 다시 친하게 지내는 거야. 계속.

<병장시절 (1970년대)>

<2022년 현재 모습>

이건 병장 시절이야. 여름이었지. 사람이 졸병 때 하고는 확실히 다르네. 약간 위엄도 좀 있어진 것 같고(웃음).

그때 우리 부대에는, 부대 내에 전속 사진사가 있었어. 그 사람도 군인이지. 그 사람이 우리를 찍어 준 거지. 그래서 이렇게 사진도 있는 거지. 참, 고맙지.

138쪽

그때는 군인들을 위해 주고 그랬지

위수지역 (衛戍地域)이라고 해서, 군인들은 자기 부대 관내를 못 벗어난단 말이야. 그 지역을 지켜야 되니까 군인들이 외출이나 외박을 해도 그 지역을 벗어나면 안 되거든. 그러니 우리는 여기 고향을 올 수가 없잖아. 근데 33개월은 너무 길거든. 그러니 군인들이 몰래 갔지, 그때는. 대전시에 나가 놓고 거기서 서울로 가는 거지, 기차 타고서.

한번은 그런 적이 있었어. 그때가 추석 날인가 봐. 군인들이 위수지역을 벗어나면 안 되는데 자꾸 벗어나고 그러니 헌병들이 돌아다녔거든. 휴가 때 집에 왔다가 다시 부대로 돌아가야 하잖아. 그때 당시에 헌병들이 서울 서부역에는 헌병들이 없었어. 그러니까 군인들은 서부역으로 다니는 거지. 헌병들 피해서. 가끔씩 몰래 나오잖아. 다른 데로 가면 걸린단 말이야.

아마 추석 다음 날인가 봐. 휴가 나왔다가 부대로 복귀하려고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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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하는데, 아니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표를 못끊는 거야. 매진이야. 근데 나는 부대를 들어가야 되잖아. 제시간에 못 들어가면 나는 꼼짝없이 탈영이 되니까. 겁이 나더라고. 그때 당시엔 버스고 기차고, 사람이 많아서 표 없는 사람도 그냥 막 밀고 들어가면 그렇게 운행하고 그랬어. 검사하는 사람들이 슬쩍 봐주기도 하고.

근데 나는 그냥은 또 못 타겠더라고. 얼굴이 두껍지가 못해. 그러니 표를 사야 되잖아. 그래서 역무원 말고 그 옆에서 취소된 표를 파는 그런 사람들한테라도 사려니까 표 값을 3배를 달라는 거야. 그거라도 사고 싶었는데 못 사지. 군인이 돈이 어디 있어. 근데 또 탈영을 할 수는 없잖아. 그래서 일단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기차를 탔어.

그때 표 없는 사람들은 내려서 개찰구 옆 화물칸 쪽에 돌아 나가는 데가 있었어. 그런 데로 도망을 가는 거지. 그래서 나처럼 표 못 산 군인하고 나하고 그렇게 내려서 화물칸 쪽으로 몰래 돌아 나가는데, 군인들이니까 눈에 딱 띄지.

군인들이면 잘 뛰잖아? 난 좀 못 뛰는데, 큰일이 난 거지. 그 당시 대전역이 있고, 서대전역이 있었어. 우리는 서대전역 바로 거기서 그대로 숨어 있다가 도망가려 하는데, 그때 하필 광장 옆에 포장마차가 하나 있었거든. 그날 하필 대전역 직원들이 거기 가서 술을 먹다가 옆에 와서 덮치니 뭐 나는 꼼짝 못하고 붙잡혔지. 그 사람들이 겁을 주면서 너 부대장님한테 얘기를 하겠다고 하고, 나는 뭐 겁도 나고 도망도 못 치겠고, 그냥 끌려 들어가야지. 막 이제 질질 끌고 들어가는 거야,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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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 사무실로.

근데 그때 어떤 사람이 막는 거야. 그 포장마차에서 술 먹던 아저씨 몇 분이 계셨거든. 그 사람이 민간인인데

“여보시오, 거 군인 아저씨를 왜 멱살을 잡고 그러나.” 그러더라고. 그러니 직원들이 “아니, 이놈들, 여기서 차비도 안 내고 도망가는 거요, 지금. 우리가 도망가는 놈 잡았다고!” 하지. 그러니까 그 사람이 그러더라고. “여보셔. 군인이 그럴 수도 있지 말이야. 군인들이 무슨 돈이 있겠어? 우선 애들 그냥 풀어줘, 풀어줘. 빨리 부대에 들어가야 되잖아. 부대 안 들어가면 탈영병 되는데, 나라 지키는 사람들을. 빨리 풀어줘요. 내가 차비 낼 테니까.”

아휴, 너무 고맙더라고. 몇 번이고 감사하다고 절을 하고 부대로 돌아갔지. 그 뒤로 돈 없이는 기차를 절대 못 타겠더라고. 물론 그래서는 안 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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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어. 참하고 예쁘더라고

우리 때는 연애가 하기 힘들었어. 그때만 해도 중매가 한창이었으니까. 그때 내가 선을 14번인가 봤나. 어른들이 사람을 만나보라고 하니 그땐 거역할 수가 없잖아. 근데 난 또 결혼하기는 싫더라고. 그때는 스물 얼마만 해도 결혼하라고 중매가 들어온다고. 여자들은 20대 초반.

나는 좀 늦게 갔어. 스물여덟인가 아홉. 가까운 데 사람은 안 만나고 싶어서 피하다가 마지막에 이제 우리 집사람을 만난 거지. 우리 집사람은 안산 사는데, 서울서 선을 봤거든. 아, 처음 봤는데, 사람이 참 괜찮은 것 같더라고. 난 그냥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어. 참하고 예쁘더라고. 근데 우리 장인어른이 또 사람이 그렇게 좋으셨어, 사람이. 예전에는 선을 볼 때 가족 어른들이 같이 보고 그랬어. 우리는 형님들하고 같이 갔고, 거기는 또 장인어른하고 같이 왔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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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집사람이 마음에 들었는데, 그때 또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얘기가 잘 통하잖아. 어른들끼리도 서로 좋으셨던가 봐. 또 장인어른이 술을 또 좋아했어. 그래서 그날 약주를 하셨는데, 술 취한 모습을 보고 내가 반했지. 사람이 무지 괜찮아. 이야, 참 사람이 좋아. 집사람도 마음에 들고, 어른들도 사람들이 좋더라고. 그래서 홀딱 내가 반했지.

그때가 사실 농촌은 정말 바쁜 때야. 3월 말에서 4월 초에 못자리하고 막 그럴 때란 말이야. 사람이 진짜 너무 마음에 드는데, 거기서 또 만나기도 힘들잖아. 안산서 여기까지. 그때만 해도 차가 있으나 뭐 있어. 버스 타고 와야 되는데, 그때만 해도 서울에 시외버스 터미널이 마장동에 있었어.

거기 가서 또 안양 가서 안양에서 또 안산까지 가는 차를 갈아타기를 세 번 갈아타야 해. 그래서 안산까지 내가 보러 갔지. 지금 안산에 공단이 엄청 크잖아. 그때만 해도 안산에 공단은 조그맣게 있었어. 그때 막 발전하기 시작하더라고. 그리고 이제 그 앞에 안산 시청 부지라고 판막에다 써 붙었던 게 기억이 나. 그리고 그 시청 앞에 고대 안산병원이 있어. 엄청 커. 그것도. 그러고는 다 허허벌판이야. 거기 다 논이었어.

우리 장인어른이 당시 거기서 어촌 계장을 하시더라고. 내가 우리 집사람을 만나러 거기를 갔는데, 하루는 우리 장인어른이 동네 사람한테 배를 두 대를 빌리시더라고. 조그만 배, 통통배를. 그러고는 배 두 대 가지고 바다로 한 삼십 분 나가더라고. 난 타라고 하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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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탔는데, 가니까 무인도야. 그 무인도에 굴이 얼마나 많은지, 아주 죄다 굴이야, 굴밭이야, 다. 굴도 따는 시기가 따로 있었는데, 마침 그때가 굴 따는 시기였던가 봐. 우리 장인어른이 멀리서 사위 왔다고 그걸 먹게 해 주려고 배를 빌리셨던 거지. 그냥 살아 있는 굴을, 그걸 따 먹는 거야. 이야, 참, 엄청 싱싱하더라고.

그렇게 연애는 길게 안 하고, 결혼을 했어. 따뜻한 봄에. 그때가 시골에 한창 바쁠 때거든, 못자리 준비하고. 근데 결혼을 일찍 해야겠더라고.

으로 대접을 했지.

여기가 서울 태극예식장이야. 아직도 기억나. 돈암동이야. 시골에서는 결혼을 하면, 무조건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올라가 축하해 주고 그랬어. 그때는 결혼식하고 하객들 먹는 음식 중에는 갈비탕이 최고였거든. 우리도 갈비탕

<당시 결혼사진>

우리 집사람은 참 고마운 사람이야. 그 참하고 고운 사람이 농사짓는 사람을 만나서 나를 믿고 여기까지 와 줬잖아. 여태 같이 농사 지으며 늘 도움을 많이 줬지. 항상 고맙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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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 난 이상하게 농사가 좋더라고

남들이 나를 보고 그래. 나는 농사꾼은 아니라는 거야. 그냥 무슨 공무원이나 그런 스타일이지, 농사꾼이 아니래. 근데 난 이상하게 처음부터 농사가 좋더라고. 나한테 맞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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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상하게 농사가 좋더라고

남들이 나를 보고 그래, 나는 농사꾼은 아니라는 거야. 그냥 무슨 공무원이나 그런 스타일이지, 농사꾼이 아니래. 근데 난 이상하게, 처음부터 농사가 좋더라고. 나한테 맞더라고.

우리 젊었을 때는, 젊은 사람이 좀 일을 잘 하거나, 똑똑하면 농협 같은 데서 찾아와서 그 사람을 데려갔어. 요즘처럼 말하면 스카 우트하는 거지. 인재들을. 내가 막 군에서 제대할 때, 나더러 농협에서 오라고 하더라고. 거기서 농협 직원으로 써 주겠다고. 근데 난 거절했어. 그때 내가 했던 말이 뭐였냐면, 한 5년을 농사 지어 보고, 시원치 않으면 그때 공무원을 하든 직장에 들어가든 하겠다는 거였어.

여기 우리 동네에 지금은 하우스가 엄청 많잖아. 이제는 시설 재배들을 하니까. 근데 철원군, 여기 이 지역에서는 아마 내가 하우스를 거의 처음 했을 거야. 그때 하우스를 이렇게 설치해가지고, 처음에 뭐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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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 오이도 심어 보고, 토마토도 심어 보고 별걸 다했어. 나는 뭐 이렇게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때만 해도 뭐 젊어서 그랬는지, 물불을 안 가렸어. 하고 싶은 건 무조건 해 봤어. 해 보는 거지 뭐. 그전에 내가 안 해봤어도 해야 돼, 그걸. 그래서 나는 남들이 안 해본 걸 내가 좀 많이 해 봤어. 성공은 못 했어도.

파프리카 농장하기 전에도 참 여러 가지를 도전했어. 꽃도 여러 가지 했었고. 토마토, 오이, 더덕, 오미자. 난 농사가 참 좋더라고. 난 이게 맞아. 백합을 하다가 그만두고 파프리카를 시작했어. 그때만 해도 철원에서 파프리카를 재배하는 농가가 여긴 없었고, 하우스 재배하는 농가는 고추, 오이, 토마토 이런 걸 했었어. 난 남들이 안해본걸 재미있어하니까 파프리카를 해 본 건데, 처음에는 돈을 무척 벌었어. 희귀하니까.

그때는 파프리카가 한 박스에 5kg에 보통 7-8만 원 받고, 잘 되면 10 만 원 씩 받았어. 초창기에는 그렇게 비싸게 팔리더라고. 과일이나 이런 것도 특이하고, 사람들이 잘 안 하는 걸 먼저 시작하는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잖아. 그런데 지금은 파프리카도 흔해졌고, 재배하는 농가가 많아지니까 가격이 뚝 떨어졌어. 한 박스에 2-3천 원 할 때도 있어. 선진국들은 농업을 중요하게 여기잖아. 국가에서 시스템으로 관리하고, 농작물들은 최저 하한가 기준이 있거나 하니까 농업이 안정적으로 유지가 돼. 우리나라도 좀 국가가 나서 주면 좋을 것 같아. 농작물 재배하는 농가들은 한 박스에 만 원이라든지 이렇게 최저하한가를 기준으로 정해주면, 큰돈은 못 벌어도 적어도 기본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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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정도는 지킬 수 있잖아. 그럼 농가에서 앞으로도 농사를 계속할 수 있는 거고, 그렇게 안정적인 테두리가 있어야 농업이 유지되지. 결과적으로 보면 농가가 안정적으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어야 국가적으로도 안정적으로 그 나라에서 재배된 농산물들을 소비할 수 있잖아.

그런데 대한민국은 아직 농민들을 위한 제도는 조금 부족한 것 같아. 그러니 일 년 농사 열심히 지어서 수확할 때 인건비도 안 나오게 생긴 농가에서 그냥 밭을 통째로 갈아엎어버리고 그러는 거지. 그게 걱정이야. 농사짓는 사람들을 보호해 주질 않으면 누가 농사를 짓겠어. 나중에는 다 수입해서 먹어야 할 텐데.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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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안 해 본 것들이 재밌더라고

나는 남들이 안 해본 걸 내가 해보는 게 좋아. 그게 되게 재미 있더라고.

꽃도 여러 가지 심었지. 과꽃, 백합, 글라디올러스 그것도 해 보고. 글라디올러스는 이만큼 해서 쭉 올라 피잖아? 그게 꽃이 무척 이뻐. 근데 해 보니까 그건 꽃이 너무 무거워. 그게 무거워가지고, 조금 하다가 농가들이 다 포기하더라고. 워낙 무거우니까. 그걸 시장에 갖다 팔라고 하면 무거우니까 너무 힘이 들거든.

그때는 농협에서 물건을 받았지만, 하우스가 얼마 안 되니까 토마토나 오이나 이런 것만 했지, 꽃은 안 했어. 그러니 그건 양재동에를 가야 됐어. 그러니 우리가 글라디올러스를 싣고 가는 거야, 그거를. 하루 종일 작업해가지고. 그때 여기 글라디올러스 하는 집이 세 농가가 있었어. 그래서 세 농가가 이틀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저녁때까지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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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지고 밤에 양재동에 갔다 오면, 뭐 새벽 3시, 4시에 오는 거야, 여기를. 그때만 해도 도로 같은 게 잘 돼 있었겠어? 그냥 전부 다 2 차선이었지, 4차선이 아니고. 그러니까 힘들었어, 차로 다니기가.

그러다가 그만두고, 백합을 키웠어. 기본 백합이 하얀 백합이고, 나는 오리엔탈 백합이라고, 향기가 좀 덜 나는 품종으로 몇 년 했어. 그 오리엔탈 백합을 일본 사람들이 아주 좋아해. 그래서 그걸 일본으로 수출을 했지. 그 계기가 어떻게 됐냐 하면, 내가 백합에 관심이 있으니까 또 같은 일 하는 사람들을 알게 되더라고. 그때 화천에서 백합 농가가 세 농가가 있었는데, 당시엔 강원도에서 백합 농가들을 보조를 해 줬어. 백합이라는 꽃은 알뿌리 식물이거든. 그때 백합을 키우려면 네덜란드에서 수입을 해야 했어. 근데 그 당시에 백합 한 뿌리에 500 원을 받았어. 대략 500원에서 왔다 갔다 하는데, 당시 강원도에서 백합을 키우는 사람들한테 50%를 지원해 줬으니까 한 뿌리에 250원을 도에서 지원해 준거지.

근데 그 당시에 화천에서 그 꽃 하는 친구랑 연결이 되어서 만나서 얘기를 하다 보니까 강원도에 강릉인가 어디서 백합을 못 싣고 다시 반납을 했다는 거야. 농가가 수량을 줄이면서 반납을 하게 된 거지. 그래서 내가 강원도청을 찾아간 거야. 그 농업 담당자를 찾아가서 우리가 백합에 관심 있어서 심어 보려고 그러는데, 백합을 재배할 방법이 없냐고 물었더니 아 거기도 양이 남았으니까 그걸 또 다 주더라고, 그걸. 그래서 잠곡리 한 집하고, 나하고 두 집에서 처음에 5 만 개를 가져왔어. 2만 5천 개씩 갖다가 처음 시작하게 된 거지.

152쪽

그렇게 시작을 해서 나중에 한 10만 개 이렇게까지 심어서 재배량을 늘리면서 심다가 2014년쯤인가. 엔화가 뚝 떨어진 거야, 지금 같이. 1900에 1930원까지 올라가다가 900에 930원으로 뚝 떨어진 거야, 이게.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엔화가 떨어지면 환율 때문에 당연히 피해를 입지. 기껏 농사 지었는데, 가만히 앉아서 그냥 돈 까지는 걸 지켜봐야 하니. 팔아보지도 못하고 반값으로 가격이 뚝 떨어진 거야. 그러니까 적자잖아. 게다가 구근은 네덜란드에서 수입을 해야 하니 그쪽 환율도 신경 써야 하고. 그래서 그 해에 백합은 이제 그만하게 됐어. 그러고 나서 이제 오이를 심었지. 한쪽에는 토마토 심고.

지금이야 농업을 전문적으로 배워서 하기도 하고, 국가에서도 전문 농업인을 양성하려고 교육도 시켜주지만, 그때 뭘 배워서 농사지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우리가 부딪히면서 그렇게 배우면서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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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에서는 바이러스가 제일 무서워

화훼를 오래 했다고 했었잖아. 꽃이 힘든 게 뭐냐 하면, 파프리카도 그렇지만, 최고 힘든 게 병이야. 바이러스.

내가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짓고, 또 하늘이 도와서 날씨가 좋고 그래도 이 바이러스가 한번 나타나잖아? 이건 무서운 게, 약이 없는 거야. 그냥 다 죽어 버려. 일 년 농사가. 뭐 일반적인 병충해 같은 거는 약으로 될 수 있는데, 바이러스는 사람이나 농작물이나 맥을 못 춰. 코로나도 그렇잖아. 지금이야 마스크도 쓰고, 국가에서 보조도 해 주고 그렇지만 아직도 난리잖아.

꽃도 그래. 바이러스엔 장사 없어. 특히 백합. 바이러스가 조금 생겼다면 방법이 없어. 그냥 다 버려야 해. 그래서 수출용으로 꽃 재배하는 사람들이 힘든 게 뭐냐 하면, 조금씩 재배해서는 여기서 먹고 살 수가 없어. 소량으로는. 우리나라에서는 판매하고 수익을 내지를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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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우리도 맨 처음에는 이제 꽃만 잘 키워 놓으면 되는 줄 알았단 말이야. 근데 그게 아니잖아. 꽃을 잘 키웠으면 팔아야 하잖아. 또 그때 당시엔 우리나라에서 구근을 살 수도 없었어. 그러니까 구근은 해외에서 수입을 해 와야 하고.

우리도 그래서 업자를 어떻게 수소문해가지고, 백합 구근을 수입을 했어. 농사를 내가 짓지만, 혼자서는 할 수가 없어. 해외에서 들여오고, 또 지역으로 이동하려면 백합은 컨테이너를 이용해야 하는데 이게 운송비가 비싸거든. 그러니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끼리는 몇 명씩 협력을 해야 해. 같이 나눠서 공동으로 비용을 내고, 같은 컨테이너로 구근을 운반하는 거지.

그렇게 고생을 해서 잘 키워도 바이러스가 돌면 그냥 다 버려야 하고, 그 바이러스가 종자에서부터 있을 때도 있어. 이건 다 클 때까지 알지도 못하고 그냥 당하는 거야. 자식같이 키운 것들을 그냥 다. 버려야지. 또 파프리카는 해충만 생겨도 골치가 아픈데, 이 해충이 자기가 매개체가 돼서 여기저기 바이러스를 옮기기도 해. 또 어떤 놈은 월동을 하기 때문에 다음 해까지도 영향을 미쳐. 무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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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농작물이 단단하고 맛있는 이유는

나는 지금 파프리카를 하지만, 사람들이 철원에서 난 파프리카, 토마토 이런 것들을 최고로 쳐 주는 데는 이유가 있어.

여기가 우리 남한에서는 최고 전방 지역이잖아. 제일 북쪽에 있는. 우리 철원에는 해발고도 1000m 넘는 산이 3개나 있어. 화천하고 근남면에 걸쳐 있는 대성산(大成山), 북한 지역에 걸쳐 있는 오성산(五 聖山), 화천군하고 철원군에 걸쳐 있는 적근산(赤根山, 赤斤山) 이렇게. 오성산은 북한 지역 산이고 적근산, 대성산은 우리 남한에 있고.

이렇게 높은 산이 세 군데가 있으니까 철원은 기류(氣流)의 영향을 많이 받는 거지. 기류라는 건 온도나 지형의 영향을 많이 받잖아. 공기 온도가 올라가면 가벼워지니 낮에는 산으로 올라가, 높은 데로. 그러다 밤이 되면 반대로 온도가 낮아지니까 공기는 산 아래로 내려오지. 차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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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철원 지역에서 나는 농산물들이 다른 지역에서 나는 것보다 과가 단단하고 당도가 높아. 일교차도 크고, 아래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온도는 낮으니까 농작물들이 더 늦게 자라거든. 천천히 단단하게. 그러니 과도 단단하고, 또 다른 지역 농작물에 비해 금방 상하지 않으니까 상품가치가 높지.

철원은 파프리카나 토마토가 자라기 딱 좋은 온도야.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는 녀석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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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다롭지만 꽃이 예쁜 녀석, 파프리카

파프리카도 꽃이 피어. 이게 고추과에 속하잖아. 그래서 꽃도 고추 꽃 같은데, 더 크지. 하얗고 아주 예뻐. 파프리카는 모종이 비싼 편이야. 씨가 한 알에 500원 정도 들고, 또 모종으로 기르는 데 드는 비용까지 따지면 모종 하나에 1000원 정도 들거든. 무게로 따지면 파프리카 씨앗이 금보다 비싸. 키우기는 까다롭고, 모종은 비싸지만, 꽃이 참 예쁘고 열매는 맛있지.

파프리카에 비타민C가 많다고 하잖아. 파프리카도 요즘은 알록달록 다양해졌어. 나도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봤는데, 색깔마다 조금씩 특징이 다르긴 하더라고. 파프리카는 아직 완전히 익기 전에 녹색인 거야. 엽록소가 분해되면서 여러 가지 색이 나오는 거지. 파프리카는 맨 처음에는 다 초록이야. 여기서 노랑, 빨강, 주황 이렇게 색깔이 변하는데, 수량이 중요해. 주황색 파프리카는 열매가 덜 달려. 그러니까 농가들이 잘 안 심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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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색 있잖아. 주황색 파프리카. 이게 이쁘기도 하고, 또 먹으면 단맛도 나고 해서 인기가 좋아. 그래서 그런지 그건 좀 값이 더 나가. 근데 가격이 높은 대신에 이게 재배하는 입장에서는 문제가 있어. 주황색 파프리카는 수량이 적은 거야, 수량이. 그러니 상품성을 따졌을 때, 같은 기간에 같은 노력을 해도 열매가 적게 달리니 문제가 되지.

노란색 파프리카는 과일 맛도 난다고 하고. 또 이제는 보라색도 나왔다고 하는데, 좀 더 단단하고 신기한데, 아직 시장성이 크게 없나 보더라구.

파프리카는 노지에다 심으면 그 환경에서는 좀 살기가 힘들어. 아무 데서나 키우기에는 까다로워서 하우스에서 재배하는 거야. 병충해에 취약하기도 하고. 또 온도에 좀 예민해서 일찍 심어야 해. 내가 올해 3 월 15일에 심었는데, 파프리카는 씨를 심는 게 아니고 모종으로 길러서 심어. 그러니까 육묘장에서 모종을 60일 길러서 3월 15일에 심은 거지.

근데 가을엔 날씨가 추우면 잘 안 익어. 그럼 위에를 못 크게 줄기를 다 잘라버려야 해. 안 그러면 계속 계속 크니까. 온도가 안 맞으면 계속 크니까 온도를 맞춰 줘야 되는 거야. 우리는 양액 재배(養液栽培)라고, 토양이 아니라 배지 재배(培地栽培)를 하고 있어. 수경재배라고도 하고. 내가 비료를 섞어서 배합을 해서 주는 거지.

농사는 하늘도 좀 도와줘야 잘 돼. 특히 오이나 파프리카는 한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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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리고 비 오면 열매가 다 떨어져. 너무 습하거나 해를 못 보면 안 돼. 상당히 까다롭고 그래서 어려운 점이 있지. 파프리카 양액 재배는 인공적으로 비료를 주니까 좀 덜한데, 오이 같은 거는 해를 안 보면 큰일 나. 농작물은 해가 진짜 중요해. 그러니까 비 많이 오고 그러면 오이 값이 쑥 올라가는 거지, 진짜 보급이 안 되니까.

올해도 장마가 길었잖아. 지금 저기에 달린 게 원래는 하나 반 정도 더 커야 돼. 올해 비가 많이 오고 흐리고 그랬어서 과도 작은 거야.

<파프리카 수경재배 하우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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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육단리(六丹里)가 얼마나 예쁜 이름이냐면, 6단이라는 말에 유래가 있어. 한문으로다가 여섯 육(六)자에다가 붉은 단(丹)자야. 그러니까 그거를 해석하면, 붉은 단풍이 있는 데가 여섯이라는 거지.

육단리에는 소(沼)라는 게 있어. 그게 계절마다 참 아름답거든. 가을에 붉게 단풍이 들면, 그게 물 위에 이렇게 예쁘게 비춰서, 그 아름다운 붉은 단풍이 보이는 물이 여섯 개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야. 경소, 가마소, 소위, 강철소, 합소, 북소 이렇게 여섯. 그게 거의 다 절벽 밑에 있어.

소(沼)라는 게 그렇잖아. 물이 이렇게 휘돌아가면서 물살이 돌아 주면, 그 주변 지형이 물살에 부딪히고 깎이면서 생기잖아. 그러니까 큰 바위들이 깎이고, 바람에 또 부서지면서 아름다워지는 거지. 그 주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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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나무들이 많아. 그게 물에 비치는 모습이 계절마다 바뀌고, 아침저녁으로 무척 아름답거든. 특히 가을에 ‘단풍 들면, 물이 붉게 물든다’그래서 육단리인 거지. 빛이 다 물에 비쳐서.

근데 육단리의 유래를, 지명 조사하는 사람들이나 외지 사람들은 정확히 잘 모르니까 ‘엿다니’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도 있더라구. 엿다니가 뭐야. 그건 아니지.

속상하더라고. 이런 예쁜 이름을 가진 동네가 별로 없을 거야, 아마. 의미가 이렇게 예쁜데, 여섯 개라서 엿다니라고 하니까 괜히 마음이 안 좋더라고. 이게 오해잖아. 이렇게 아름다운 이름을 제대로 불러 줘야지. 우리 육단리(六丹里)가 얼마나 예쁜 이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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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마을에 공동 정화조 생기다

우리 가족 사는 데가 양지마을이라고 그래. 그러니까 양지마을이 무슨 뜻이냐. 이제 해가 잘 들어서 겨울에 눈이 쌓이지 않아. 눈이 암만 와도 하루면 날아가 버려 없어. 그래서 양지마을이라고 그래.

옛날에 왜 작은 집을 초가삼간(草家三間)이라고들 부르고 그랬잖아. 그 초가삼간이 뭐냐 하면, 그때 사람들 대개가 옛날에는 일자로 집을 짓거나 기역 자로 지었거든. 일자집이면 부엌, 안방, 그 위에 방이 있었어. 그게 3칸이야. 그래서 초가로 지은 삼간이라고 해서 초가삼간이라고 했어.

그리고 기역 자로 짓는 집은 부엌, 안방이 붙어 있고 ‘ㄱ’모양에서 오른쪽에 따로 떨어지게 짓는 그 옆에를 사랑방이라고 그래, 사랑방. 사랑방이라고 옆에 있는 걸 또 어떤 사람들은 그냥 줄여서 ‘ 사랑’이라고그랬지. 다들 그렇게 초가삼간에 살다가, 1970년대 새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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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때 그 초가를 다 걷어 버리고,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량을 했어. 대대적으로. 그렇게 다들 슬레이트 집에서 살다가 1990년대에 요즘 모양으로 바뀐 거야.

내가 1991, 92, 93, 94년도에 우리 양지마을 이장(里長)을 하면서 그때 농촌주택이라고 정부에서 보조를 줬어. ‘농촌 주택 개량사업’이라고, 정부에서 집 수리하거나 새로 지을 때 돈을 지원해 준 거지. 근데 정부에서 집집마다 다 해 줄 수는 없으니까 동네에서 한 집, 이런 식으로 주는 거야. 그때 천만 원인가 융자를 해 준 거 같아, 천만 원. 그럼 거기 조금 보태면 집 지었으니까, 옛날에는. 그리고 그 천만 원은 7년 거치고, 13년 갚고 총 20년까지 갚은 거야. 그런데 동네에 집 지을 사람이 많으면 방법이 있나. 제비뽑기야, 제비뽑기. 최고 공평하지. 뭐 있는 집, 없는 집 따지고 이런 거 없이 그래야 이웃끼리 서로 안 불편하고.

그러다가 철원군에서, 한 동네에서 20채 정도 주택 개량을 같이 하면은, 공동 정화조를 만들 수 있게 그런 부지 시설을 해주면, 한 동네에 지원금을 다 주겠다고 하는 거야. 정부에서는 주택 개량 사업을 한 동네에 하나씩 하니, 가시적으로 눈에 확 띄게 효과가 안 나잖아, 이게. 그래가지고 이제 내가 우리 동네에 그 사업을 가져와야겠다고 생각을 했지. 그게 1993년도인가 94년도일 거야.

근데 그 좋은 사업을 우리 동네만 지원한 건 아닐 거 아니야. 그때 우리 앞 동네하고 경쟁이 붙은 거야. 그때 앞 동네는 그 공동 정화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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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부지가 마땅한 데가 없더라고. 근데 우리 동네는 마을 아래쪽에, 하천 부지 쪽에 밭이 있었는데, 원래는 옛날에 밭도 해먹고 그러던 데가 장마 몇 번 겪으면서 그게 이제 밭이 없어진 거야. 조그마한 것들이 있었는데. 그러니까 이제는 오히려 그게 하천 부지가 되는 거야. 써먹지도 않는 거.

그래서 우리 마을이 그때 선정이 돼서, 요기 동네에 집을 지을 사람이 열네 집이 있더라고. 그 열네 집을 우리가 확보를 해가지고 그때 그 사업으로 집을 지은 거야. 공사하면서 공동 정화조를 설치할 부지가 어디냐고 해서 여기다 그랬더니, 찾아보니까 거기 우리 박 씨네 집안 밭이 하나 있는 거야, 종중 땅이 있더라고 거기에. 그렇게 생각지도 못하게 써먹지도 못하던 그 땅도 군에서 사 준다니까 얼마나 좋아. 운도 좋았지(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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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단리에 도로를 내다

내가 우리 양지마을에서 이장하면서 가장 뿌듯했던 일이 뭐냐면, 신흥 막국수 쪽에 우회 도로 있지. 그걸 내가 건의해서 낸 거야. 가드레일 높게 지은 것도. 원래는 거기에 길이 없었는데, 1993년도부터 내가 추진했던 일이고, 완공은 1995년도에 됐어. 그게.

지금도 국회의원들이 동네 주민들하고 의논도 하고 의견도 내고 그러잖아. 그때 당시 철원에서 국회의원 하던 사람이 이용삼이라고, 우리 후배였어.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그 양반이 국회의원 할 때, 그때 이장들도 모여서 의견도 내고 하잖아. 그때 내가 도로를 내 달라고 건의를 했어.

한번 우리 동네에 와서 여기를 좀 보라고 했지. 그 앞에 어린아이들 다니는 초등학교가 있는데, 길이 제대로 안 되어 있으니 사고 위험도 많고 얼마나 위험해. 또 그 앞은 개울이라서 여름에 장마라도 오면 홍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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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서 다리 위로 물이 넘치고 그랬어. 주민들이 너무 위험하잖아. 그러니까 이 부근을 아예 정리해서 길을 내자. 그렇게 신흥 막국수 앞에 도로가 생겼어. 너무 기뻤지.

그런데, 1996년에 7월에 사흘 동안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아주 대규모 수해(水害)가 있었어. 뉴스에도 나오고 그럴 정도로 피해가 너무 컸어. 우리 양지마을은 어느 정도였냐면, 신흥 막국수 앞에 개울이 흐르잖아. 그게 다 넘쳐서 다리가 끊어졌어. 그러니까 홍수에 다리가 막히고, 비가 워낙 많이 왔으니까 산사태도 여기저기 나고, 난리였어. 그러는 바람에, 지금 면사무소 지나 육단 3리 가는 길 있잖아. 물이 거기까지 넘은 거야. 그러니 거기보다 지대가 낮은 데는 그냥 물이 다 차오르더라고.

우리 동네에도 물이 다 들어차는 거야. 우리 집이 지대가 조금 높아, 다른 집들보다. 근데도 우리 마당까지 순식간에 물이 들어왔어. 이야, 정말 나도 여태까지 살면서 물이 그렇게 무섭다는 거를 그때 알았어.

당시에 우리 아랫집이 우리 집안에 큰집이거든. 근데 급하게 막 피하느라 다들 난리 치는데, 안 보이는 거야, 우리 형수님이. 그래서 걱정이 돼서 가 봤더니, 집에서, 막 물이 들어오는데 소가 걱정되니 거기 계신 거지. 하나는 먼저 끌어내고, 하나가 못 나오는 거야. 소도 무서우니.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서 형수님을 우리 집에다 모셔왔는데, 자꾸 집으로 가시겠다는 거야. 그래서 왜 그러시냐 물었더니, 장판 밑에 돈이며 귀중한 것들이 있으니 걱정이 되시는 거지. 근데 그새 또 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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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거야. 그래서 여기 계시라고 하고 다시 큰집에 가는데, 막 허리까지 그냥 물에 잠기는 거야. 그래서 비가 많이 오면 사태가 나는구나 싶더라고. 그냥 물 내려오면 흙도 뭐 힘없이 후르륵 꺼지니까. 그래서 물이 무섭다는 거지.

어찌어찌 큰집에 갔는데, 벌써 그새 물이 차 있더라고. 옛날에는 장판이며 벽지며, 그냥 풀도 붙이고 본드로도 붙이고 그랬잖아. 그게 빗물이 확 들어차니까 장판이 물을 먹어서 바닥에 붙어 있지를 못하고 그냥 붕 뜨더라고. 그래서 얼른 돈이며 뭐 그런 거 챙겨서 다시 집에 와서 젖은 돈 방바닥에 널어서 말리고 그랬어. 그때 사람 사는 집들 침수가 많이 됐어. 사망자도 수십 명에, 실종도 되고, 난리가 났었어. 당시 철원 지역에 피해액이 1000억이 넘었어.

그전에 도로 정비해서 새로 생겼을 때, 가드레일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어. 그런데 1996년에 저렇게 수해 때문에 물이 넘쳐서 주민들이 너무 위험했잖아. 사람만 다친 게 아니라 큰 바위도 떠내려갈 정도였고. 그때 정부에서 사태가 너무 심각하니까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어. 근데 피해 지역이 워낙 정도가 심하고 범위도 넓으니까 군청에서 그걸 한꺼번에 파악하기도 힘들잖아. 그래서 그때 나중에 홍수가 나도 마을로 물 못 들어오게, 새로 난 도로에 가드레일 옹벽을 높게 올려달라고 건의해서 지금 거기 높게 쳐 있는 거야. 그 덕분에 1999 년에도 수해가 크게 있었는데, 우리 동네는 피해가 없었어.

수해 때문에 위험을 방지하려고 꽤 높게 지었더니 이제는 개울이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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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더라고. 그래서 주민들이 가드레일을 조금 낮췄으면 좋겠다고 건의했는데, 그건 받아들여지지 않더라고. 아무래도 큰일이 났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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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의 눈에 비친 위수지역 해제

위수지역(衛戍地域)이라고, 부대가 그 일대 지역을 안전하게 잘 유지하려고 장기간 머무르면서 관할하고 경비하는 지역이 있었어. 군인들은 비상시에 바로 소집할 수 있어야 하니까 외출이나 외박을 해도 그 위수지역을 벗어나면 안 되고. 그러다 보니 군인들하고 그 일대 지역 상가나 주민들하고 밀접한 관련이 있었지. 군인들이 휴가나 외출을 나와서 여기서만 생활하니까 경제적으로도 연관되어 있고, 또 우리처럼 농사짓는 사람들은 같은 지역에 사니까 친근하기도 했고.

철원에 부대가 3사단, 15사단 그렇게 구성이 되어 있어. 우리 근남면 육단리는 3사단, 15사단에 속해 있었어. 그러니까 근남면에는 이제 15 사단, 3사단 이렇게 2개 사단이 있었으니, 여기서 근무하는 군인들은 근남면까지만 올 수 있었던 거지. 원래 15사단은 위수 지역이 이 근남면까지였고, 그전에는 서면까지는 못 갔어. 그러다 1990년대 초에 그 위수지역이 서면까지 확대된 거야. 그러니 이쪽에선 난리가 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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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에서 장사하는 숙박업체도 장사가 덜 되지, 음식점들도 군인들이 덜 오니까 손님이 확 줄어들고. 그전에는 여기 근남면에 음식점하고 여관이 많았었거든. 피시방도 있었고. 근데 위수지역이 확대되고 군인들이 다른 지역으로 가니 이쪽은 난리가 날 거 아니야. 상권이 죽는 거지.

그래서 그때 우리 동네 상가들이 모금을 해가지고 뭘 했었냐면, 요 밑에 와수리(瓦水里)라고 있어. 옛날에 전쟁 나면, 상대 쪽에서 전차나 탱크 못 넘어오게 시멘트를 쳐서 방어벽처럼 세워놨잖아. 이거를 탱크저지선이라고 해. 그 탱크저지선을 지키는 데가 있어야 하잖아. 헌병 초소. 그래서 우리 동네 상가에서 모금을 해가지고 그 헌병 초소를 지어줬어. 군인들 다 떠나갈까 봐 상생하는 방법을 찾았던 거지. 어차피 이 지역을 지켜 주는 군인들한테 좀 더 좋은 시설을 지어주는 거니 아까운 일도 아니었고. 지금은 없어. 지금 터는 있는데, 없어졌어.

또 크리스마스가 되면 그전부터 동네에서 부대에 위문을 가고 그랬어. 우리 동네를 지켜 주는 사람들이니 고맙기도 하고, 또 예전에는 수해 나고 눈 많이 오고 그러면 군인들이 민간인들 도와주고 그랬잖아. 그러니 크리스마스 돌아오면 동네 이장들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위문금을 걷었어. 뭐 고생하는 군인들 돼지도 잡아 주고, 과일이나 떡도 해다 주고 그랬었지. 옛날에는 그런 정이 있었지.

근데 2005년에 군부대 위수지역이 해제가 되면서 상권이 다 죽었어. 그때는 위수지역 확대가 아니라 이제 아예 풀린거지. 제한이.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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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단리가 원래는 면사무소도 있고, 초등학교도 있고, 음식점에 숙박업소에 여기가 상권 중심지역이었는데, 그냥 비어 버리더라고.

원래는 이쪽에 여관, 여인숙이 일곱 군데에서 열 군데가 됐었어. 근데 그거 다 없어졌지. 지금도 있어 있기는. 2개가 있는데, 나머지는 뭐. 사람이 안 오니 다 없어졌지. 또 상가들도 다 없어졌어. 옛날에 술집, 호프집이 있었고, 막걸리집이 무척 많았어. 그때는 군인들이 봉급을 현금으로 받던 시절이니 상권이 잘 돌아갔는데, 이제는 봉급이 다들 통장으로 들어가고. 카드를 쓰니 상권이 버티질 못하지. 예전에는 직업군인들도 여기 그냥 눌러 사는 사람들이 많았어. 지금은 뭐. 젊은 사람은 다 나가려고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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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가 북적북적해졌으면 좋겠어

동네가 휑 해졌지. 위수지역 해제되면서 타격을 많이 받았어. 자영업 하던 사람들은 손님이 없으니 이사들도 많이 가고. 어쨌든 또 다른 방향으로도 어차피 살아가긴 해야 되잖아.

남아 있는 입장에서는 속이 상하지. 동네가 잘 돌아가야 살아가는 맛이 나니까. 옛날에는 어느 집에 초상이 난다든가 또 결혼식을 한다든가, 환갑, 진갑 한다든가 그러면 그 마을 사람들이 다 참여를 했잖아. 여자들은 음식을 가서 도와주고, 남자들은 힘쓰는 일들 돕고. 잔치라도 하면 한 2박 3일을 음식 만들고 뭐 하느라 동네가 북적북적했을 텐데. 어린애들 뛰어놀고. 근데 뭐, 이제 다 없어졌지. 그리고 이제는 문화가 또 바뀌었으니까. 장례 문화도 바뀌고 그러니까 동네 사람끼리 끈끈한 정 같은 건 옛날만 못하지. 아쉽지.

옛날에는 우리 동네에 사람도 많이 살았고, 또 마을 사람끼리 모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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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민속놀이 같은 것도 하고 그런 거 많이했어. 내가 이장할 때, 철원에 없던 걸 만들었어. 음력 1월 15일 정월 대보름에 척사(擲柶 )대회를 열었어. 대단히 크게 했었어. 척사대회가 뭐냐면, ‘척(擲)’은 던지는 거고, ‘사(柶)’는 윷이야. 윷놀이지. 몇 년 하니까 규모가 점점 커가지고서 그냥 상품도 크게 만들어 가지고 행사를 아주 크게 했었어. 이게 사람이 모이니까 우리 동네 말고 딴 동네에서도 막 오고, 그때는 척사대회 규모가 엄청 컸어.

또 밤에 횃불로 달집태우기도 크게 했어. 달집이라고, 정월 대보름에 나뭇가지 더미를 모아놓고 달이 뜨면 거기 불을 붙이는 거야. 사람이 많으니까 그때는 초등학교를 빌려가지고 운동장에서 하고 그랬어. 낮에 청년들 다 모여서 차로다 그냥 몇 차 실어다가 하고 그랬지. 그랬는데, 지금 젊은 사람들이 없어지니까 의지도 없고 자꾸 규모가 작아지다가 이제는 코로나 때문에 못 하게 된 거야. 소규모로 조금씩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이제 없어진 격이지. 아마 코로나 끝나면 다시 시작할 수도 있어.

그래도 양지마을이 이제 도시 재생 사업을 하면서 동네가 아주 좀 환해졌어. 주인 없는 집들, 사람 안 사는 집들을 예산으로 사서 다 같이 공동으로 쓰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그러니 보기가 좋아졌어. 우리가 바라는 게 뭐 있나. 동네가 좀 다시 북적북적해졌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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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이야기 | 박승관

기분이 아주 황홀했어요. 아주 완전히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어요. 힘들지도 않았어요, 그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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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이야기

태어난 곳은 바로 밑에 옆에 동네 사곡1리예요. 지금 엄마하고 20살 차이 납니다. 부모님 둘 다 계시고요.

어릴 때 놀이는 주로 딱지치기하고 구슬치기도 하고, 그다음에 뭐 비석치기 뭐 그런 거 했었죠. 숨바꼭질도 하고, 밤에도 숨바꼭질 다 했어요. 그래서 이제 기분이 나쁘면 그냥 친구를 안 찾고 가고 막 들어가면 걔는 거기 숨어 있다가, 몇 시간씩 있다가 깜깜하면 집에 들어가서 혼나고 그랬지. (웃음) 옥수수 까리 가 있어요. 그냥 이렇게

1)

집집마다 이렇게 옥수수 까리하고 벼도 집 마당에다가 이렇게 크게 쌓아놨었어요. 거기서 썰매 타고 막 그러고 그렇게 놀았어요. 탑 같이 쌓아놨었는데, 거기 기어 올라가다 혼나고 그랬죠.

나 어렸을 때는 짜장면, 라면, 그때는 그런 게 최고였지. 옛날에 여기

1) ‘낟가리’의 방언. 낟알이 붙은 곡식 혹은 나무, 풀, 짚 따위를 쌓은 더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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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원이라고 친구네가 하는 짜장면집이 있었어요. 중고등학교 때는 와수리 쪽에서 친구들이랑 많이 보고. 와수리에서 상춘장에서 운동하고 나서 거기서 먹고 했어요.

제가 지금도 면 요리를 많이 좋아해요. 지금도 국수 종류는 많이 먹어요. 일할 때 어머니가 점심으로 국수를 많이 해주시죠. 여름철에는 거의 한 3일 간격으로 3일에 한 번씩은 국수를 먹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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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이야기

여기 이쪽은 시가지니까 여기 육단리 쪽으로는 시가지가 많이 번창했었고 술집이나 군부대 이런 게 많아서 이쪽은 와수리보다 더 번화했었어요. 옛날에는 그러다가 이제 많이 ( 상권이) 죽었지. 군부대가 이탈하면서 많이 죽고 그랬어요. 그때는 이 마을마다 다

많이 잡았어요.

텃세를 해서, 텃세가 심했어요. 그래서 마을 지나가는 걸 갖다 막 터치하고 그랬죠. 학교 댕기면서 우리가 이제 국민학교를 댕겼는데, 국민학교 때는 그렇게 너무 심한 건 없었는데 중고등학교 댕길 때는 와수리 쪽으로 갈 때 많이 걸어가고 그랬거든요. 그때는 거기서 선배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막 때리고 그래서 옛날에 그렇게 했었어. 군기를

<학창 시절의 박승관 님(맨 좌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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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지금 여기 근남초등학교에 새 건물이 없었고 옛날 구건물이 있었죠. 벌써 이게 두 번째 바꾼 거예요. 이쪽 건물도 리모델링하고 저쪽 건물은 체육관을 새로 건축하고, 옛날에 그 건물이 이렇게 있어요. 이게 지금 많이 증축된 거예요. 제가 근남초 다닐 때 학생 수는 400 명에서 500명 정도 됐어요. 지금은 학생 수가 100명도 안 돼요. 많이 줄었죠.

그리고 지금도 초등학교 동창들 모임을 아직까지 하고 있죠. 여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 이렇게 모임을 가지고 있고요. 여름에는 이제 (친구들이) 시골로 내려오고 겨울철에는 이제 서울로 가서 거기서 모이고 해요.

중고등학교는 김화중학교, 김화공고 나왔어요. 인문계는 따로 김화고가 있고 공고는 김화공고가 있고. 우리 때 이제 고등학교 올라갈 때 여자 학교가 이제 저 김화여고로 다 새로 생겼어요. 그때 1회가 되고 한 10년 지났나. 그렇게 시간이 지나니까 이제 인문계로 바뀌면서 이제 통합이 된 거야. 남녀 공학이 되면서 이제 인문계 고등학교 김화 고등학교로 바뀌었지 여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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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를 거머쥐다

국민학교 때부터 운동을 했었는데, 수영을 중학교까지 하고 육상은 고등학교 때까지 했어요. 육상 종목은 달리기하고 허들도 하고 삼단 뛰기 이런 걸 했어요. 수영은 여기 앞에 하천, 개울에서 했어요. 육상 대회도 많이 나갔었죠. 그러니까 고등학교 때는 3학년 때 도민체전 가서 사관왕도 했어요. 전국대회는 아쉽게 떨어졌어요. 전국대회는 보니까 그때는 1부 2부가 있었거든요. 여기 군마다. 그래서 우리 철원군은 2부로 있었는데 그게 거기서 이제 철원군이 2부 우승하면서 1부로 올라간 거예요. 그래서지금 계속 1부로 있는 거지. 지금은 후배들이 더 잘 뛰니까 우리 때보다 지금도 (선수들이) 많잖아요. 중고등학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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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미터 계주 끝나고 들어와서 이게 앞에 선수 역전시킨 거. 역전시켜갖고 1등한 거예요 이게. 150미터를 따라가갖고 이긴 거예요. 이 대회가 춘천에서 열렸어요. 기분이 아주 황홀했어요. 아주 완전히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어요. 힘들지도 않았어요, 그때는. 이게 앞에 사람이 보이는데 막 따라가서 이긴 거니까. 운동을 해서 대학교도 가려다가 포기했죠.

<도민체전에 참가하여 역전승을 이뤄낸 박승관 님(33번 선수)>

운동해서 대학을 가려고 하긴 했었는데, 운동이 별로 재미가 없었어요. 인천대에서 스카우트가 왔었어요. 근데 뭐 가기가 아주 질려 갖고. 10 년 동안 하니까 더 하고 싶지가 않더라. 그때 또 허리를 다쳐서 지금도 계속 허리가 아파요. 허들 때문에. 허들 하면 한쪽 발만 이게 계속 들으니까, 허리가 디스크에 걸렸어. 많이 쓰면 그게 노화가 되는 거야. 안 써야 되는데, 쓸 만큼 쓰고 말아야 하는데 운동 선수들이 다치는 일이 많아.

나는 수술도 안 했어요. 버티는 거지 그냥. 몇 년 전에 한 번 저거 척추 마취하고 시술을 한 번 했어요. 그전에는 한 3년마다 허리가 아파서 꼼짝도 못하고 3일 정도는 자리 잡을 때까지 목도 못 움직였어. 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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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도 못해. 서 있으면은 움직이는데 못 움직이니까 여기서 누워서 몸을 다 들어줘야 돼. 전신 마비되듯이 꼼짝도 못했어. 3일 동안. 3년 단위로 매번 계속 그러니까 저기 의정부 가서 마취시키고 시술하고 오니까 그다음 날 올 때는 엄청 아프더라고. 근데 그랬더니 자고 일어나니까 언제 아팠냐 싶고 하나도 안 아파. 그래서 10년 넘을 때까지 안 아프다가 작년서부터 조금 뻐근해지고 그래요. 운동을 하든지, 근육을 키우든 해야 되는데. 힘드니까 운동도 못하겠어.

<도민체전 승리 후 카퍼레이드를 나갔을 때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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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고향으로

친구들이 다 학교 졸업하고 그때 하사관. 기술 하사관들을 뽑아서 나도 신청했는데 그때는 또 신원 진술서를 받아요. 군대 가려고 그러면 신원을 확인해야 했어요. 그런데 그때, 그 전에 들으니까 막내 고모가 북으로 끌려갔대 6.25때. 그래가지고 그것 때문에 탈락이 돼 갖고 하사관을 못 갔어. 그러니까 고모가 북에 갔다는 것 때문에 신원 진술서 거기서 탈락이 된 거죠. 그때는 그런 문제가 예민했어요. 한 몇 년 지나니까 그런 게 없어졌지.

그거 어차피 떨어지고 그랬으니 뭐 그냥 여기 있다가 직장 생활하다가 조금 한 2년 정도. 2년 정도 일하고 직장생활 하다가 들어와서, 이제 89년도에 들어와서 가스 LPG 가스 판매소를 여기다 차려서 한 15년 했어요. 1989년부터 2004년 11월까지. 성남에도 있었어요.남에 전기 공사하는 데 있다가 한 8개월 있다가 여기 역곡, 부천 옆에 역곡 있잖아. 거기 있다가 그게 이제 회사가 안산으로 이사 가면서 안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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갔다가 89년도에 돌아온 거지. 친구가 먼저 실습 나간 친구가 있어서, 거기서 불러서 같이 있다가 같이 옮겨갔어요. 회사를 따라서.

일을 배우고 할 때 뭐 힘든 거는 그렇게 없어요. 지금은 이제 건물 짓기 전에 다 파놓잖아요. 그전에는 다 이 손으로 하고, 드릴도 없어서 직접 망치로 다 해갖고 배선도 손으로 다 묶고 그랬어요. 위험했죠. 가끔 하다가 손도 때리고 그랬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건 그 전에 택시도 그 LPG 택시 막 만들어져서 나오고 그럴 때였는데. 그때 아버지가 택시 할래, 가스 할래 그래서 돌아왔는데 가스를 하라고 그러셨죠. 가스 가게 판매점 하다가 이게 여기 마을이 제일 조그맣거든. 철원 소규모 지역마다 이렇게 따로따로 면 단위로 다 이렇게 하나씩 판매점이 있어요. 근데 처음에는 이렇게 분리시켜 놨는데 얘네들(다른 판매점)이 들어오는 거야. 그냥 이제 막 이쪽으로 근남 쪽으로 들어오고 서로 시끌시끌했죠. 저쪽에 신수리 쪽에 또 터널이 뚫리니까 그쪽에서 신수리도 같이 했어요, 잠곡 쪽은. 가스일 하면서 기억에 남는 건 크게 없는데, 근데 끝날 때 되니까 외상값 그런 것도 못 받고 그랬어요. 끝날 때 되니까 안 줘. 안 줘요. 떼어 먹힌 게 더 많아. 말만 하는 거지. 안 주는 걸 강제로 달라고 할 수도 없고. 그때가 90년대, 90년대 초반에 8천원이었어요. 지금은 4만 원 5만 원 해요. 많이 올랐어요. 정말 많이 올랐어. 요즘 계속 올라가더라고요. 지금 한 4만 원 거의 5만 원 돈 되는 거예요. 4만 원 돈 작년에 올랐을 때 4만 7천 원인데 또 이번에 또 올랐으니까 또 더 올라갔겠죠. 4만 9천 원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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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 시절 이야기

그다음에 93년도에 결혼했어요. 93년도 3월에 결혼했는데, 근데 사람이 희한하더라고. 애를 기다리니까 안 생겨요. 처음에. 어유 그러다가 그때 마음고생 많이 했죠. 집사람도 그렇고. 10년 동안 없었으니까. 만 10년 만에 애를 낳았으니까. 결혼을 스물아홉에 해서 서른아홉에 애를 낳은 거죠. 결혼은 선봐서, 그러니까 엄마하고 장모님하고 병원에 갔었어요. 두 분이 병원에서 만나 가지고 병원 동기예요. 두 분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거기서 이제 같이 만나 가지고 소개해 줘가지고 선보고 결혼한 거죠.

처음에 선봤을 때는, 옛날에는 말주변이 없어 가지고 말도 안 했어요. 내가 말주변이 전혀 없었어. 이게 사람들하고 대화하는 게 어느 정도 내가 틔어야지, 어느 정도 여유가 돼야 이제 말을 자꾸 하는데. 직장 생활할 때도 한 달 동안 옆에 사람하고 말 한마디도 안했으니까.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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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많이 유해진 거지. 근데 바뀌려고 그래도 안 되더라고. 강제로는 안 되고 자연적으로 되는. 자연적으로 해서 이게 같이 하다가 보니까 섞여서 (대화하고) 하니까 되더라고요. 우리 집사람은 말을 잘해. 나는 안 해. 나는 무뚝뚝한데 집사람은 아주 청산유수야. 선보고 나서 결혼을 두 달인가 석 달인가 돼서 바로 했죠. 그때 다 늦었으니까 빨리 하라고, 그러니까 빨리 한 거지. 결혼은 여기 철원 와수리에서 했어요.

신혼생활 하면서 기억에 남는 거는, 집사람이 할 줄 아는 게, 그때는 집사람이 직장생활하다가 시집을 와 가지고 (요리를) 하지 못해 갖고 맨날 한몇달일년 동안 김밥만 먹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질려서 김밥을 별로 안 좋아해 내가. 그때 집사람이 쌀 줄 아는 게 그거밖에 없었어요. 지금도 아주 김밥은 잘해요. (웃음) 김밥 싸면은 아주 엄청 많이 해요. 아는 사람들 다 노나 먹고 통이 커 가지고.

지금은 집사람이 요리를 잘하니까 지금 저기 군부대 조리원으로 들어가 일하고 있어요. 십 년 넘었어요. 근데 아이, 맛있다고 그러면 많이 해놔가지고 안 돼요. 나는 조금씩 조금씩 해서 먹는 걸 좋아하는데, 여기서 밥 먹으면 그냥 나 혼자 먹어야 되는데. 그걸 맛있다고 그러면 이만큼 끓여놔, 한 솥 끓여놔. 일주일 내내 먹어야 돼. 그럼 나중에 버리는 거야. 집사람이 손이 커서 반찬을 많이 해요. 쪼끔 하면 맛이 없다고 그래서.

192쪽

<젊은 시절의 사모님과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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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의 추억

우리 형제는 이남이에요. 제가 장남이고 밑으로 남동생 하나 여동생 하나 있어요. 지금은 막내만, 여동생만 철원에 와 있고 남동생은 지금 의정부에 있어요.

어렸을 때는 가족들하고 기와집에 살았는데 지금도 그 기와집에 계속 살고 있어요. 마루랑 대청 있고, 옛날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런 집이에요. 아이, 그거 이 비 오고 그러면 수리하는 게 옛날 집이라 게와

1)

가 없고 그래서 올라가서 진흙으로 반죽해서 이렇게 쳐서 게와를 이렇게 얹혀. 안 그러면 얹힌 게 잘못되면 물이 새로 들어오는 거야. 잘 해놔야 돼. 아버지가 손재주가 좋아서 잘하셨어요. 지게도 만들고. 아버지가 손재주가 좋아서 빗자루하고 소쿠리도 짚 같은 걸로 만들고 하셨죠.

1) ‘기와’의 방언. 지붕을 이는 데에 쓰기 위하여 흙을 굽거나 시멘트 따위를 굳혀서 만든 건축 자재를 뜻함.

195쪽

중고등학교 때 아버지하고 경운기 끌고 산에 가서 나무를 많이 했지. 저쪽, 다목리 가는 길에 수피령이라고 이쪽, 잠곡리까지 다녔어요. 정상까지는 안 가고 중간에 저 나무 잘라서 싣고 나왔죠. 나무하러 겨울철, 가을 이맘때 가는 거예요. 이맘때 추수 다 끝나고 나서. 잎이 떨어져야 되니까. 낙엽 지고 나서 올라가야지, 낙엽이 많으면 앞이 안 보여요.

좋은 나무 하는 사람은 그때 싸리나무가 비쌌어요. 다른 나무가 1,000원 1,500원 할 때 그거는 2,000원씩, 2,500원씩 하니까. 싸리나무 하면 (돈이) 남는 거죠. 옛날에 빗자루도 싸리나무로 만들고. 그전에 나무할 때도 싸리나무가 비쌌어요. 잘 타고 연기도 안 나고 해서 좋았죠.

196쪽

가스 일을 하다가 애를 이제 하나 낳고 연년생으로 또 낳았어요. 아들 낳고 연년생으로 낳다 보니까, 한 명 때는 유지가 그래도 그냥 거의 (수입이) 제로에서 왔다갔다 하는데 한 명 더 낳으니까 우유값 들어가고 그러다 보니까 그냥 적자야 적자. 그래갖고 또 그때 마침 또 누가 가스 한다는 사람이 있어서 넘겨 버렸어요. 그때 넘겨받은 사람이 지금 하고 있어요. 그 사람도 한다고 와갖고는 힘들지. 그것도 어느 정도 수입이 유지가 돼야 하는데 이제 마을 마트 같은 데는 저 탱크로리 같은 큰 차로 다 가스를 가져다 주고 그러니까. 지금은 가스를 통으로다가 안 하고 지금 저장 탱크 있잖아요. 500짜리 1000짜리가 그런 게 많이 오죠. 근데 내가 넘겨줬으니 잘 돼야 하는데 그런 부분은 좀 심란하고 그래요. (마음이) 안 좋죠. 잘 되면 좋은데 사업이 잘 안 되니까.

197쪽

<토마토 하우스를 운영 하시는 사진>

지금은 쌀농사랑 토마토 하우스 농사도 같이 하고 있어요. 토마토 농사는 요즘은 별로 안 바쁜데 봄부터 바쁘죠. 봄에 이제 외국인들이 아직 안 들어올 때가 바쁜데 그때는 뭐 우리가 조금씩 일을 하니까 되는데 그다음에 6월부터 7월, 8월까지 그때가 최고 바쁘죠. 토마토 수확을 6월 중후반부터 하니까 그때가 제일 많이 나와요.

토마토 농사는 거의 이쪽, 철원에는 다 그걸 주로 농사지으니까 하게 됐죠. 철원은 토마토, 파프리카, 고추 그런 거. 그런 걸 많이 하니까 여기서 나가는 게 한 90프로 가량이 가락동에서 나가요. 여름철에는 토마토랑 파프리카가 이제 강원도에서 나가는 것밖에 없어요. 파프리카는 전국적으로 있지만, 여기에 지금 철원 가락동 이쪽에서 그전에는 파프리카가 90% ~ 95% 나갔는데 지금 한 80% 정도 나가요.

198쪽

토마토 박사의 길

토마토가 점점 맛을 안 따지고 이제 저장을 오래 할 수 있는 걸로 농사를 짓다 보니까 유럽 종을 자꾸 섞거든. 유럽 종이 섞이니까 맛은 덜하고 이제 저장 기간이 오래 가는 거지 망가지지 않고.

나도 지금 유럽 종 섞인 토마토 농사를 하는데 근데 저건 유럽 종이 섞였는데도 동양계니까 그래도 맛은 좀 나아요. 지금 근데 값이 너무 비싸 씨앗 값이. 초장에 농사지을 때 8만 원에서 10만 원 그렇게 됐던 게 지금은 2-30만 원이에요. 한 봉지 천 알에. 적어도 씨 천 알에 30만 원이 넘어가지고. 거기다 또 뭐 육묘장에다 갖다 주고 키워달라고 그러고 거기에다 포기당 500원씩 주고 키워야 하죠. 하우스를 한 1,400평 하고, 동생 것까지 합하면 2,400평을 농사를 지으니까 힘들죠. 농사일이 점점 힘들어지니까 인력이 필요해서 노동자를 두 명 정도 써요. 토마토는 한참 나올 때, 딸 때만 바쁘고 가을철에는 안 바빠요.

199쪽

토마토 농사가 힘들어요. 매년 힘들죠. 토마토는 진짜 할수록 힘들어. 진짜로, 토마토가 병이 많아가지고. 바이러스 때문에. 없던 병이 계속, 계속 생기니까. 지금은 약도 안 들어요, 약도. 약 값은 배로 뛰었는데. 농산품값만 제자리예요. 다른 데서 사 먹는 사람은 비싸다고 그러는데 여기서 나갈 때는 별로 안 비싸고 중간 마진이 비싼 거죠. 중간에 값이 확 뛰니까 소비자가 사 먹으면 8만 원 9만 원에 사 먹는 거야.

딱 지금 가을철에 토마토 당도가 높아요. 그리고 또 가을철이 여름 작기 보다 가을에 수확량이 적어요. 그러니까 전반기 4월에서 5월에

1)

심은 게 이제 7월 달에 1차 작기가 끝나거든. 그때는 이게 한 백 박스 땄다 치면은 똑같은 평수에서 가을에는 오십 박스 밖에, 오십에서 육십 박스 밖에 안 나와요. 토마토가 양이 덜 나와요. 가을은 날씨 때문에 추워서 익지도 않고. 그래서 가격이 그만큼 올라가는 거예요. 여름철에 많이 땄는데, 여름에 100박스 따고 가을철에 50박스 땄는데도 가격 차이가 따블이 되니까 이게 더 (수익이) 많아 가을철 것이. 그래서 늦게 심잖아 거의 다.

가을에 수확하려면 7월달에 심어요. 6월 말이나, 6월달에서 6월 초 중반서부터 7월, 7월 중순까지. 그때 심어야 지금 따요. 4월에 한 번 심고 6월에 심고 하는데, 돈이 안 돼. 힘만 들고. 그냥 처음부터 토마토가 안 죽고 가면은 계속 줄을 내려야 되거든. 줄을 술 따버리고 줄 내리고 앉히고 해 갖고. 여기서 이만큼 나가면 줄이 하나 2m ~ 4m 까지 가을까지 가고 해요. 큰 거는 뭐. 저거, 사과만 한 것도 있어. 품종마다 달라요. 근데 너무 커도 맛이 별로야. 조그만 옛날 게 좋지.

1) 한 작물의 생육기간을 뜻함.

200쪽

옛날에 토마토 품종 중에 마이로꾸라는 게 있었어요. 일본 것. 마이로꾸 그게 당도가 제일 좋아. 근데 그게 자꾸 열과 가 나오면서 터지니까

1)

이제 여름철에 이게 술에 이렇게 올라가서 5단 달고 잘라, 머리 순을 쳐버린다고. 그러면 새순 받아갖고 또 올리게 돼. 근데 그때 위에 이게 4단 후반부터 5단까지가 터지는 게 많아요. 토마토가 쫙쫙 갈라져요. 열 받아서, 뜨거워서. 토마토 달리는 구간이 이렇게 아홉 칸에서 하나 달리거든. 이게 원래가 첫 마디서부터 올라가서 순이 아홉 단에서 하나로 달려요. 아홉 단에서 일 단서부터 달려요. 그래갖고 순이

이파리가 세 개에 하나씩 달리는 거야. 세 개마다 한 단씩.

1) 과일이 생리적인 원인, 병충해, 또는 외적(물리적)요인에 의해 갈라지는 것을 뜻함.

202쪽

매 순간 고비를 넘다

토마토 농사를 딴 걸로 바꾸긴 바꿔야 하는데. 파프리카도 한 4년 했었어요. 지금은 파프리카도 바이러스가 와서 못하고 어렵죠.

원래는 없다가 이제 점점 파프리카에 이제 바이러스가 많이 생겨서, 총체 바이러스를 잡아야 되는데, 못 잡으면 딸 때 익으면서 이제 점이 생겨요 파프리카는. 그럼 파괴시켜야 되는데, 그때는 이미 벌써 파프리카가 90일 100일 된 거거든요. 그때 되면 파괴시켜서 다 뽑아버려야 돼. 그러니까 돈 들어가고 품 들어가고 다 해갖고 석 달 동안. 한 주당 8-900원 돈을 쓰는데 바이러스가 생기면 다 버려야 하죠. 거기에다가 씨 값 줘야지, 그럼 천 원이 넘어. 그리고 거기다가 이제 품 넉 달 동안 들어가는 거 있잖아요. 작업하고 그것까지 하면 한 1,500원, 한 주당 2천 원 정도 날아가요. 그렇게 몇 번만 털썩하면 빚이 확 늘어가는 겁니다. 빚이 아주 독박 쓴다니까요. 농사 적자를 한 2년 그렇게 털썩하면 못 일어나요. 몇억씩 그냥 빚을 지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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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에 몇천만 원씩 빚을 지니까 못 버텨요.

요즘 가스비나 전기세가 많이 올라서 농가에서 걱정이 많죠. 저희는 10월 말 경에 (농사가) 끝나는데 다른 양액 재배하는 분들은 많이 타격을 받을 거 같아요. 그 사람들은 지금 2월 달에 지금 파종이 들어가는데 온도도 유지해야 하고. 그 전에 이제 겨울철에 소독도 해야 하고, 보온하면서 소독하고 그런 것 때문에 힘들죠. 거기 온풍기도 가동하고 하니까, 그 사람들은 기름값이고 전기세가 많이 다 올랐기 때문에 부담이 클 것 같아요.

여기 철원은 농장들도 많아요. 한우 키우는 사람들도 많아요. 한우도 있고 젖소도 있고 그러니까 다른 농가들도 많아요. 안 보여서 그렇지. 지금 이쪽에는, 냄새 나는 쪽에는 못 하게 하니까, 다 저 산 쪽에 다 붙어 있다고. 안 보이는 데에. 이쪽에 산 밑쪽에다가 성벽 지나서 와수 5리 저기 저 안쪽으로 농장들이 돼 있어요. 다 벌판에 있어. 냄새가 많이 나요. 비올라고 그러면 바람에서 농장 냄새 엄청 많이 나요.

205쪽

3장 | 함께 살아가는 터전, 양지마을

이걸 어떻게 끌어갈까 부담감은 많았지. 고민이 많았어요. 점점 힘들어지더라고요. 힘든 것도 있지만 마을이 발전되고, 더 잘 되면 좋겠어요.

206쪽

첫발을 떼다

처음에 도시재생 사업 시작할 때, 직접 국토부를 찾아 가서 발표를 했죠. 국토부에 5분 발표하고 질의응답 한 15분 하고 왔는데 여기서 시간이 하루 종일 걸리더라고. 그걸 하기 위해서 석태문 계장님하고 같이 가서 이일주 총무하고 같이 세 명이서 갔는데 대전 국토부까지 가는데 멀긴 멀더라고요. 국토부에서 질의응답 다 해갖고 잘 돼서 다행인데. 떨리고 그러는 것도 있더라고요. 내가 어디 가서 발표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런 큰 데 가서 하다 보니까 떨렸어요. 그때 강원도에서도 몇 팀 오고 그랬는데 두 팀인가 된 것 같아요. 거기서 (선정이) 되어 가지고 초기 사업 그거 받아 갖고 도시 재생 그게 됐어요. 선정이 됐을 때 이걸 어떻게 끌어갈까 부담감은 많았지. 여기서 사람들을 어떻게 끌어가야 되고, 관리도 해야 되고. 고민이 많았어요. 점차적으로 다 이제 기간이 갈수록 힘들어지더라고요. 그래도 힘든 것도 있지만 이제 많이 마을이 깨끗해지고 발전되고 주차장도 환하게 뚫리고 기숙사도 시작이 되고 그러니까 더 잘 되면 좋겠죠.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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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아는 것도 없었잖아, 저기 센터에서 같이 배워가는 입장인데. 처음에 우리가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했으니까 그걸 기초로 해서 다른 분들이 이어받아서 우리 마을이 더욱 발전할 수 있게 그런 식으로 잘 나아갔으면 좋겠어요.

<제726호 철원신문에 실린 사진>

208쪽

그 시절 군대 이야기

군대를 85년도에 갔죠. 의정부 옆에 송추. 부대가 송추에 있었어요. 그때는 군 복무 기간이 길었죠. 3년. 30개월 했어요. 30개월 하고 일주일 더 했어요. 보직은 발칸포. 발칸포 했어요.

비행기 잡는 거. 비행기를 못 잡고 그냥 앞에다가 쏘아가지고. 쏘아가지고 지나가면서 맞춘 거야. 나 군대 있을 때는 8천 원 받고 제대했는데. 지금은 백만 원으로 올리네요. 이백 만원까지 올리네요.

여기 동네에 당구장 세 개가 있었어. 여기 네 개, 네 갠가 세 갠가. 당구장은 위수 지역 해제하기 그 이전에 없어졌어. 군인들이 이제 많이 빠져나갔어요. 부대가 여기 탈영병, 그전에 한 명 탈영병이 생겼어요. 80년대, 80년 후반이다. 여기 이쪽 앞에 잣골에 탱크 중대가 하나 있었거든. 거기서 탈영병이 생겨서 서울에 가서 총 들고 막 저거 했으니까 한번 테레비 나왔었잖아. 90년 초반인가 80년대인가.

209쪽

테레비까지 나왔어요. 여기 사람을 인질로 잡아가지고 가서 그랬대요.

<군인 시절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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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세대의 아픔, 전쟁의 잔해

우리 아버지가 전쟁 얘기했던 거는 피란 다녔던 이야기를 들었었죠. 피란 많이 돌아다닌 거. 그거 포천서 이렇게 왔다가 저기 잠곡리 왔다가 이렇게 육단리, 육단 1리 있다가 왔죠.

전쟁 끝나고 동네에 예전에는 대남방송을 많이 틀었어요. 그때는 학교에서도 대남방송 틀고 그래서 그때 많이 시끄러웠어요. 아니 여기 북한에서도 틀고 남한에서도 틀고. 같이 틀어놓으니까 그때 되게 시끄러웠어요. 북한 방송도 들어오고. 여기서 틀면 북한까지 들리죠. 여기 가까운 데는 (북한까지) 600m인데.

할아버지가 6.25때, 큰할아버지가 여기 면장을 했었을 때 이야기예요. 면장이 아니고 면석(면 서기)이라고 해서 할아버지가 여기 왔다가 갔다가 하는데, 이제 할아버지는 몰래 숨어서 집에 오잖아 밤에. 밤에 왔다 가면 누가 옛날에는 쁘락치라고 있었어. 쁘락치가 신고를 해. 새벽에

211쪽

왔다 가는데도 신고를 해. 그걸 어떻게 보고 신고를 하는지. 6.25때 여기 전쟁 다 끝나고 이제 방범대라고 방첩대인가 그게 있었단 말이야 신고하는 게. 간첩이라고 몬단 말이에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면석(면 서기)에 있었으니까 왔다 가면 신고를 해. 누가 신고를 해갖고 우리 할아버지가 그래서 하도 고문 때문에 다리를 잘랐대 다리가 썩어가지고. 아주 걷지를 못했대. 옛날에는 여기가 북한 땅이었어요. 그러니까 저거 뭐야 휴전되기 전까지 여기가 북한 땅이었어요. 38선 전까지. 할아버지가 고생 많이 하셨지. 몰래 왔다 갔는데 그걸 어떻게 알고 신고를 하는지. 왔다 가면은 고문해서 가서 끌려가서 고문받고 그래서 다리를 절단했다고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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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마을의 유래

여기 마을에 관한 옛이야기는, 여기 육단리는 저 뭐야, 여섯 개 이파리 단풍잎 때문에 육단리라고 부른다고 들었어요. 단풍잎이 여섯 개잖아요. 일단 이게 여기 사곡리는 모래 사(沙)자 써서 사곡리고. 사곡리가 모래가 많아요. 그래서 이게 정상에서 보면 이 산 자체가 그 뱀이라고 그랬나 용이라고 그랬나 그런 형상을 갖고 있대요. 이게 옛날에 여기도 일제강점기때 여기다 댐을 막으려고 그랬던 거래요. 여기다 댐을 막았으면 여기 수몰되는 건데. 근데 뭐 어디 한쪽으로 물이 터져 나간다고 그래갖고 안 막았다고 그러더라고요.

원래는 철원에 역도 있었어요. 철원역. 그게 다 6.25때 다 없어 졌습니다. 백마고지역까지밖에 없어요 지금. 그러니까 여기 김화 생창리 거기에 있었어요. 거기서 일로 해서 금강산에 올라가는 걸로. 철도는 거기 바닥에 깔려 있어요. 옛날 길이 아직 있어요. 승리전망대 가서 보면 이렇게 약간씩 보여요. 옛날 거니까 형태만 있는 거지.

213쪽

여기 양지마을 이름 유래는, 여기가 해가 많이 오래 가요 이쪽이. 저기가 음지마을이고 여기 해 많이 뜨는 데는 양지마을이라고 불러요. 전국적으로 다 똑같이 부르죠. 해가 오래 가니까 양지마을이고, 음지마을은 여기 세 시 넘어가면 응달이 져 갖고 (어둡고) 그래요. 이 산에서 다 가려져갖고 음지 마을이야. 저기 육단1리가 음지 마을이야. 여기 마을 안에 매월대 폭포 앞에는 경소. 소이가 많아요. 이게 소이라고 이렇게 웅덩이 있는 데가. 사곡 1리가 경소, 가마소, 여기가 소이. 가마소는 가마솥 같이 이렇게 샘이 올라서 그렇게 불러요.

그리고 여기가 옛날에는 전 씨네가 많았어요. ‘전, 신, 박’ 순이었어요.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전 씨가 제일 많고, 지금은 박 씨가 많고 전 씨하고 신 씨가 별로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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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공동체를 보살피다

지금 여기 육단리 이장 하게 된 거는, 여기 이사 온 후에 이제 30년 거의 돼가고 지금 29년 됐어요. 살다 보니까 여기 바로 와서 청년회 총무하고 청년회장도 하고 한 8년 됐고, 어쩌다 보니 이장까지 맡게 됐죠. 이장직은 2년씩 하는데, 원래 임기가 2년씩이고 연장할 수도 있고 해요. 근데 너무 너무 힘들어. 지금 도시재생 때문에. 머리가 아프고, 진짜 머리를 안 쓰다가 (쓰려니까) 쥐가 나 쥐가.

이장직을 2년은 거의 연장을 해줘요. 지난번에 나는 코로나 때문에 그냥 연장됐지 자동으로. 자동으로 연장돼서 지금 사회협동조합 이사장도 원래 3년이었는데 2년 전부터 임기를 2년으로 내렸어요. 그걸 이장 바뀐 사람이 저걸 같이 해야 되거든. 맡아서 해야 되니까. 원래 이장이 올해로 임기가 끝인데, 그렇게 되면 이제 이사장 하고 또 안 맞춰서 들어가잖아. 내 이제 그래서 다른 사람한테도 얘기를 했지 1 년만 더 하겠다. 내년까지 한번 해보려고 그러는데, 모르죠. 올해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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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를 해봐야 아는 거죠. 또 다른 사람이 한다고 그러면 한다는 사람을 시켜야지. 나 할 때도 투표했어요.

지금 마을이 다 50대 밑으로 없어요. 여기가 없어요. 가끔가다 한 40 대 한두 명 있지 거의 다 50대 후반. 다 밑으로 없어. 마을에서 내가 계속 막내야. 밑으로 한 네다섯 명밖에 없어.

지금 우리 사업하고 있는 거는, 2019년에 국토부에서 사업을 받아가지고 그거를 2020년에 여기 지역 상권 밖에 있는 분들부터 우선적으로 주택 개량하고 페인트칠하고 그런 노후 주택 개선 사업을 먼저 마을에서 실시했고요. 지금 이쪽에 또 한 20년 동안 있던 폐건물을 갖다가 철거시켜가지고 외국인 기숙사를 짓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노래방 자리하고 다 철거해서 기숙사 설립하고 있고요. 그다음에 이쪽 중앙식당 옆에, 그 건물도 한 15년 정도는 사용을 안 해서 다 철거시켰어요. 그리고 거기는 통행로가 없어서 철거시켜서 통행로로 좀 개량했고 그다음에 마을 학교 앞에 거기 주차장을 확보했어요. 마을 분들이 여기 사시다가 지금 다 떠나고 다른 데서 사시는데, 그러니까 땅을 판다고 그래갖고 그걸 구입해서 주차장 부지로 해서 지금 마을 옆에다가 주차장을 해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도시재생센터, 옆에 커피숍, 그리고 마을 도서관까지 다 옛날 소방대 자리를 리모델링 해서 지금 사용하고 있습니다.

공유주방은 아직 군청에서 지금은 우리한테 사업이 안 넘어왔기 때문에, 군에서 지금 시험 가동을 하고 있어요. 빨래방도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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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기술을 우리가 배워야 하고 그러기 때문에, 한 두 달 동안 시험 가동 기간을 두고 기한을 두고서 운영하기로 했어요. 아직 정식 가동은 안 하고 이제 우리가 하기 전에 임시 가동을 하고 있어요. 이제 어저께부터 시험 가동을 준비하고 있고 한 일주일 후나 뭐 그 빠르면 일주일이나 이 주 정도 있다가 (우리가) 시작할 거 같아요. 정식 오픈은 한 달 후에 한다는 거야. 그러니까 군에서 한 두 달 정도를 기간을 줬기 때문에 4월 1일 날, 아마 그쯤 되면 오픈할 거 같아요. 양지마을 도시재생센터 사회적 기업에서 맡아서 운영을 하는 거죠. 마을 중앙에 소공원은 옛날 터미널이 한 30년 동안 묶여 있었어요. 폐허가 돼갖고 다 무너지려고 그러니까 그걸 철거시키고 거기다 소공원을 조성해놓은 거죠.

지금 여기 미술 학원도 도시재생사업으로 소상공인 지원, 그런 취지로 하고. 지금은 뭐 겨울 난방비 때문에 휴업을 했더라고요. 그리고 지금 저쪽 만물상 자리 거기도 지금 영어 학원이 12월인가 1월인가 그때 오픈해가지고 이제 학생이나 유아들 모집하고 있고. 그 옆에가 지금 공터가 있어요. 옛날 중국성 건물이 하나 있거든. 옛날 건물이라 이제 철거시켜가지고, 거기 학원을 하게 되면 차도 주차해야 되니까 주차장을 만들려고 군청에서 10년 동안 무상 임대한 거예요. 그래가지고 그거를 활용하려고 마을 공동체에서 건물을 철거하고, 그 위에 언덕이 좀 있는데 작년에도 거기다 꽃을 해바라기를 심었어요. 우리 마을에서. 마을 들어오는 입구인데 미관상으로 조금 지저분하니까, 그거 철거시키고 주차장 만들고 거기다 꽃밭이랑 공원 조성을 하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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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재생사업 하면서 가장 노력을 많이 했던 거는 마을 환경 개선 사업이죠. 지금 많이 노후된 건물들도 많고 한데. 지금 어느 정도 일부는 이제 경관 개선이 좀 진행 중이에요. 여기 공원도 하고. 지금 여기 앞에도 로타리 사고가 한 번 났었어요. 도로가 좀 삼각형이다보니까 그래서, 이제 면에서 건의를 해가지고 로타리 저기 개선하고. 그래서 여기도 또 식당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한 15년, 20년 정도 방치가 돼 있어서 군에서 매입해서 조그맣게 이렇게 소공원을 조성할 것 같아요.

현재 진행 중인 사업은 지금 빨래방하고 기숙사. 나머지는 다 완공돼있어요. 앞으로 추진하고 싶은 건 마을에서 빨래방 사업이 이제 점차적으로 커지게 되면 저희가 공장까지도 가동할 수 있게끔 그런 방향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뭐 잘 되면 좋겠죠. 빨래방을 돌려서 거기서 이제 수익이 나오게 되면은 일자리도 창출되고 하니까. 아직 운영이 안 되고 있기 때문에 우선 그 두 가지를 집중하고, 나중에 공유주방도 사용하게 되면 사람들한테 조금씩 임대 같은 걸 주고 단체나 뭐 그런 데서 이용하게 되면 마을 입장에서 좋을 것 같아요.

마을 일을 하다 보니 농사를 잘 못해요. 일을 못해. 계속 회의를 한 달에 몇 번씩 하니까.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은 하다시피 하니까. 나 없다고 일이 안 돌아가진 않아요. 다 돌아가요. 다 돌아가는데 내년 끝나면 또 소방대장 또 해야 돼. 그래서 이제 1년만 더 하면 돼요. 다른 사람한테 넘기려면. 어느 정도 이제 저거 해놨으니까 밑에 사람들이 알아서 따라 더 잘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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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재생사업하면서 힘든 거는 좀 전에 말했다시피 이 사람들 호응하고 동원하는 게 힘들어요. 다 바쁘니까 사람들이 모이기가 힘들죠. 지금 임원들은 임원이라고 나오지만, 그 사람들도 자기 일 때려치면서 중간에 나오는 거지. 하우스 하다 말고 나오고 주말에 거의 2시 3시에 그때 회의가 있으니까 4시까지 이렇게 하니까. 한 달에 한 번씩 이렇게 하는 거야 그 사람들은 힘들지 나도 힘들고.

그래도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꼈던 게, 지금 여기 분들이 다 하우스 작업이 많아서 바빠요. 그 사람들이 다 한꺼번에 다 나올 수는 없죠. 근데 마을에서 꽃 심기나 그런 일할 때 많이 참여해 주고 그런 거. 마을에서 방송하고 그러면 많이 공동으로 같이 참여해 주시는 분들이 있고, 그분들한테 고맙죠. 서로 바쁜데도 짬 내서 나오시는 거니까.

<양지마을 도시재생사업 최종 선정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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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 발전에 이바지하여 받은 표창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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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해, 손을 맞잡고 이겨내다

의용소방대 일하면서 여기 수해 때 96년, 99년 수해 때 여기 지금 육단리 지역이 여기 수해 입었었거든. 그래서 이게 하천이 다 늘어난 거야. 그때 의용소방대에서 저 대장님이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어요. 다 수해가 입어 가지고 차들도 다 떠내려가 버렸어요. 지금 근남초등학교 앞으로도 통나무 이만한 것들이 그냥 막 쓸려가 버렸어요. 저기 앞에 여기 저 축대가 돌로다 쌓았던 거를 여기 옹벽 칠려고 비 오기 전에 제방을 다 제거했어요. 마을에 피해가 엄청났어요. 저 위에 세 집 정도가 다 완파됐어. 세 집 네 집인가 완파되고. 그리고 다리가 다 끊어졌었어, 이쪽이 다. 다리가 안 끊어졌으면 여기 싹 쓸고 나갔을 거야. 물이 여기 오다가 지금 사곡1리하고 그 사이에 있는 다리가 완전히 맥혔다가 끊어지면서 물이 그냥 쭉 빠진 거예요. 안 그랬으면 여기 다 잠겼어. 여기 한강 됐었어요. 여기 지금 물이 막 허리까지 찼었어. 우린 물이 조금 찼죠. 우리는 저 위에 조금 높으니까 물 들어와가지고 이제 조금만 들어왔죠. 가스 일할 때인데 방에는 물이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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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오고. 복숭아뼈 정도까지.

<의용소방대 활동을 하는 주민분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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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에게

마지막으로 우리 집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뚝뚝한 나하고 같이 여태껏 한 30년 살았는데 애들 잘 키우고 그래서 고맙고. 아플 때도 거기서 부모님들하고 같이 있으면서도 투정 안 한 것도 고맙고. 앞으로도 이렇게 어울려서 우리가 같이 이제 늙을 때까지 평생 함께 살았으면 좋을 것 같아요. 우리 아들하고 딸하고 같이 아프지 않고 끝까지 평생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늘 고맙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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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관 님의 단란한 가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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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번째 이야기 | 임순이

원래 철원 사람은 아니었어요. 농사도 짓고, 자식 농사도 짓고. 봉사가 무슨 목표가 있나, 그냥 하는 거지. 육단리, 그리고 사람들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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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끝나고 얼마 안 돼서 태어났어요

나는 1954년 9월 21일에 전라도 전주에서 태어났어요. 전쟁 끝나고 얼마 안 된 그 무렵에. 그런데다가 여섯 살에 어머니가 너무 일찍 돌아가신 거야. 나는 부모님이 안 계시니까, 여기저기 다니면서 고생을 참 많이 하고 살았지. 어휴. 두 분 다 돌아가신 건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계셔도, 어머니가 안 계시면은 그때나 지금이나 자녀들은 고생할 수밖에 없는 거야. 전쟁 겪고 나서 다 먹고살기가 어려웠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살다시피 했지.

위로 언니가 한 명 있어요. 우리 언니가 나랑 9살 차이가 나요. 그때 우리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니까는, 언니는 그 무렵에 공장으로 가고, 나는 어리니까 외갓집에 맡겨지고 그런 거지. 아버지가 우리를 돌보실 형편이 못 돼서 우리가 흩어져 떠돌아다니면서 눈칫밥을 먹고 산 거지. 어린 나를 외갓집에서 맡아서 키워주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외할머니랑 외숙모가 키워주셔서 참 감사한 일이지만, 그때는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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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눈치를 많이 보느라 콩쥐팥쥐에 나오는 콩쥐처럼 살았던 것 같아.

그때는 지금처럼 물이 잘 나오던 것도 아니고, 뜨거운 물이 구하기가 힘들던 시절이잖아요. 그러니 겨울에 빨래 같은 것도 엄청 힘들게 하고 그랬지. 외숙모 아기 낳으면, 나는 어린 게 그 아기 봐주고 그러면서 살았지. 빨래는 개울에 가서 해야지. 그때는 지금처럼 뜨신 물도 없어요. 그리고 물도 넉넉하지 않았고. 그래서 내가 항아리에다 물을 길어다가 부어놓고 또 가서 물을 떠다 나르고 그렇게 물을 채우고 그랬지. 나도 어리고 하니까 물통 한 통 지면은, 흔들고 오다가 보면 결국 집에 오면 남은 건 반 통밖에 안 돼. 그래가지고 여러 번 물을 날라서 큰 항아리에 하나 가득 채워놓으면은 가족들이 그 물을 같이 쓰고 그랬지. 나는 하루종일 그 물을 계속 왔다 갔다, 퍼다 놓는 거야. 어릴 때라 몸이 작으니 발 보폭도 작아서 한 열댓 번 이상 다녀서 항아리에다 하나 채워놓고 그랬어.

옛날에는 동네에 다 같이 쓰는 우물이 하나 있어서, 지게로 져다가 나르고 다들 그렇게 살았어. 아니면 또 개울에서 퍼다가 집에 채워두고 물을 쓰고 그랬지. 물 한 번 떠오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른이 가면은 뭐 한 5분, 10분 걸렸고 나처럼 애들이 다녀오면 한 20분씩은 걸리고 물은 적고 그랬었지 뭐. 그때는 다들 먹고살기도 힘들고 물도 한 번 쓰기가 힘들고 다들 그랬어요. 전쟁 직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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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니까 언니는 나이 차도 많고 크니까 무섭기만 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까 나한테 우리 언니가 안 계셨으면 어쩔 뻔했나 싶어. 혼자 외로운 데다가 언니가 나한텐 엄마 같고 너무 잘 챙겨주고, 내가 힘들 때면 항상 위로해 주고 나를 제일 위해줘. 너무 귀한 언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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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에 밥을 찍어 먹었어요, 그때는.

외갓집(전주)에서 한 11살 때까지 살다가, 이제 아버지가 오셔서 나더러 아버지랑 같이 살자고 그러는데, 어린 마음에 그동안 외갓집 에서 눈칫밥 먹고 살았으니까, ‘부모니까 더 편하겠지’ 생각했지. 아, 그런데 막상 아버지를 따라갔는데 아버지는 더 힘든 거야. 당시에 다들 먹고 살기도 힘든 데다가 아버지는 지금 표현으로 하면 무능하셨 으니까.

전주 외갓집에서 살다가 아버지가 날 데리러 오셔서 그때 아버지를 오랜만에 만나가지고 순창으로 간 거지. 고추장 유명한 그 순창. 아니, 근데 아버지가 날 데리고 간 데가 골짜기인 거야, 아주 산골짜기. 뭐 주변에도 아무것도 없어. 일단 아버지를 따라서 갔는데, 처음에 가서 보니까는 반찬이 아무것도 없고, 그 소금 있잖아요? 맨 소금. 거기다 그냥 밥만 먹는 거야. 그걸 어떻게 먹었느냐면, 소금을 이렇게 종이에다가 싸가지고 두고, 하얀 밥에다 그걸 찍어서 먹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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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랬냐하면 그때 밥이 넉넉하지가 않았어요. 그것도 하얀 밥도 아니고 보리밥이었지. 보리밭에서 떨어진 이삭들을 주워다가 밥을 해 먹은 거였으니까.

외갓집에서는 그래도 어머니도 없이 혼자 어린 게 눈칫밥은 먹었어도, 배는 항상 불렀단 말이야. 우리 외갓집은 일꾼들을 부리면서 살던 부자였거든. 엄마는 돌아가셨어도. 나는 그때, 어린 게 오갈 데 없어서 난감하던 걸 외갓집에서 거둬주고 키워주셨으니 그때 나를 안 버리고 거두어준 것만도 감사하게 생각해야지 싶어.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정말 너무 감사한 거지. 근데 그때는 내가 어렸고 서러운 마음이 커서 그랬는지 감사한 것도 잘 몰랐던 것 같아요. 내가 눈치가 보여서. 그때는 외갓집 식구들이 야속했거든. 근데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까, 그렇게 거둬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거야.

그때 당시에는 정말 다들 너무 먹고살기가 힘들어서 어떤 집이 있었냐면, 아기 낳으면은, 딸 낳으면은 식모살이 보내고, 아들 낳으면은 머슴살이 보내고 그러던 시절이었거든. 입 하나라도 줄이려고 다 남의 집에 보내는 거지. ‘너라도 부잣집 가서 배 곯지 말라’는 게 사실 말이 그렇지, 그냥 어린 자식을 식모살이 보내고 머슴살이 보낸 거잖아. 그 집에 가서 그 어린 게 어떻게 살았겠어. 아기 보라고 보내면은 거기서 죽어라고 아기 봐 주고, 일해 주고, 이제 그런 식으로 옛날에는 다 살았으니까. 그렇게 시키는 거 하면서 밥 얻어먹고 세월을 살았어요. 많이들. 다들 힘들었지.

232쪽

엄마 없는 애라고 괴롭히는 애들이 많았어요

먹고살기도 힘든 시절인데 엄마도 안 계시니, 뭐 학교나 제대로 다녔겠어요? 학교가 다 뭐야. 한창 바쁠 때는 일을 하고, 안 바쁘면 학교에 가고 그랬지. 그냥 일하다 보면, 바쁠 때는 일을 해야 되고, 안 바쁘면 학교를 가는 거지. 그러면 이제 창피하잖아. 뭐 그냥 한 열흘, 보름 안 가다가, 하루, 한 이틀을 학교 갔다가 오면은 나는 또 일을 해야 되고 하니까는 뭐 학교 수업 진도를 제대로 따라갈 수가 없잖아. 난 못 알아들으니. 그러니 알아듣지도 못하고 그런 식으로 그렇게 그냥 학교를 다녔네.

그때는 부모가 없이 사니까 그게 고생이었지. 엄마가 없다는 이유로 학교를 가면은 이유 없이 때리니까 애들이. 다 같이 힘든 시절이었는데, 아무리 다 힘들어도 이제 엄마가 없으니까 아무래도 꾀죄죄할 거 아니야. 엄마가 계시면은 이제 얼굴도 씻어주고, 옷이라도 깨끗이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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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닐 거고 한데, 그냥 혼자 생활하니까는 난 항상 꾀죄죄하니까 남 보기에도. 그러니까 항상 지금 따지면 내가 그때 왕따인 거야. 되게 서러웠지. 학교 갈 때도 그냥 이유 없이, 학교에서도 그렇고, 내가 오면은 그냥 부모 없다는, 엄마 없다는 이유로 나를 이유 없이 때리는 거야. 그러면 항상 맞아야 되고. 애들이 그냥 돌팔매로 이렇게 하면은, 도망가다 보면 항상 머리가 터져서 피가 나는 거야. 그렇게 그냥 맨날 피해 다니고 그런 식으로 살았지. 어떻게 견디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네.

지금 따지면 왕따지. 그래가지고 원래 다니는 길로 오지도 못하고, 항상 개울로 그렇게 그냥 돌아서, 빙빙 돌아서 맨날 그렇게 해서 혼자 집에 갔어. 학교 끝나면은 애들 다 간 뒤에 혼자 그렇게 오고 그러는데도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거야. 애들이. 못됐었지. 여럿이 때리니까는 아무리 강하게 해도 맞을 수밖에 없는 거야 맨날. 학교도 가기 싫었고.

어떤 사람들은 힘들었던 시절에 많이 먹었던 건 지겹다는데, 나는 그런 건 없고 그때는 정말 먹고살기 힘들어서 뭐라도 먹으면 좋았기 때문에 그냥 감자랑 밀가루 수제비 같은 것들이 기억나요. 그걸 정말 많이 먹었지. 어린 시절이 별로 즐거운 시절이 없고, 고생만 해서. 뭐든지 없어서 못 먹었으니까 질리고 지겹고 할 정도는 아니고, 옛날에 수제비를 많이 먹었잖아. 밀가루로. 아침에 수제비 먹고, 점심에 칼국수 먹고, 저녁에는 감자 쪄 먹고, 그런 식으로. 그렇게 했던 시절이 이제 있었는데, 지금은 뭐든지 배불리 먹고, 많으니까는. 살기 좋아졌지.

234쪽

그래서 나는 지금 내가 배 안 곯고 사니까, 우리 철원에 혼자 사는 어르신이나 어려운 분들 돕는 게 그냥 좋아요. 같이 나누고, 또 내가 낼 수 있는 건 내고 그럼 또 그분들이 기뻐하고 고마워하시니까. 서로 도울 수도 있고 그렇지. 우리 애 아버지도 옛날에 서울에서 가구일을 했었다고 했잖아. 그래서 자기가 수리를 좀 할 줄 아니까 혼자 사는 집이나 이웃들이 보일러나 가구 같은 걸 좀 고쳐달라고 도움을 요청하면 가서 고쳐주고 이런 일들을 해 주고 그랬어. 그렇게 사는 거지. 이웃이니까.

236쪽

결혼해서 여기까지 온 것도 사연이 많지요

우리 신랑하고는 중매를 해서 만났어요. 처음에 사람들 소개로 만났는데 듬직하고 참 잘생겼더라고. 다들 순이 신랑 미남이라고 멀리서도 칭찬하고 그랬어. 너 밥 안 굶기겠더라 이런 말도 어른들이 많이 하셨어. 체격도 좋고 건장했거든. 아주 믿음직하고 든든한 사람이었어.

우리는 여기 철원에서 결혼을 한 게 아니고, 철원 사람도 아니에요. 여기 눌러서 산 세월이 30년이 넘긴 했네. 우리는 둘 다 전라도 사람이니 중매도 그렇고 결혼도 전라도에서 한 거죠. 같은 지역에서 중매로 만나서 결혼한 거야. 거기서 이제 오랜 세월 살다가, 여기저기 이사를 한 20번 다녔어. 그러면서 서울에서 살다가 처음에는 철원에 3 개월만 살자 해서 철원으로 왔지. 우리가 원래는 가구 장사를 했는데, 그게 잘 안되고 망해서 여기 철원에서 3개월만 살다 가자 해갖고는

237쪽

오게 된 거였지.

여기 철원에는 우리 신랑 사촌 동생이 먼저 살았었어. 이종사촌 동생이. 그래갖고 우리도 좀 자기네를 도와주러 오라고 해서 철원으로 오게 된 거였지. 1983년도에 왔어. 동생네가 여기 살고 있으니 우리도 3개월만 여기 살자 하고 오게 됐던 게 어떻게 30년을 넘게 살았네. 그때 신랑 사촌 동생네가 식당을 했는데, 당시에는 여기 다 장사가 잘 됐었어요. 군 위수지역 해제 전에는 가게들이 장사가 잘 됐었지 여기가. 하여튼 그 사촌 동생네 식당이 엄청 바빠서 우리더러 와서 3개월만 도와달래서 우리도 그럼 3개월 주고 가자고 온 거였는데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어.

우리도 망해서 온 거였고, 정말 아무것도 없이 온 거였는데 그냥 바쁘게 살다 보니 자리 잡고 살게 된 거지. 처음에는 좀 적응하고 그러느라 힘들었지만, 이제 열심히 같이 힘내서 산거지, 정말 열심히. 나는 종교를 갖고 있어요. 기독교. 그렇기 때문에 그냥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위로가 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어디서든지 할 수 있고, 그렇게 살아왔어.

238쪽

그때는 산파가 뭐야, 소 키우는 아저씨가 받아주셨어요

결혼하고 서울에서 가구 장사를 하다가 망해서 우리 신랑 사촌 동생이 식당이 너무 바쁘니까 좀 도와달래서 아무것도 없이 철원에 왔는데, 뭐 여기 첫인상이 어땠는지 생각할 새도 없이 지나가더라고. 그때는 그냥 사는 것도 다 너무 힘이 들었으니까 뭐 좋다, 어떻다, 이렇게 보고 느끼고 할 시간이 별로 없었지.

그렇게 아무것도 없이 그냥 와가지고, 없는 살림에 아기도 생기고 정신이 없이 살았지. 우리 큰애가 아들이고 작은 애가 딸이에요. 큰 애는 가졌을 때도 태어날 때도 걔도 나도 고생을 많이 했었고, 7개월에 걔를 낳았으니 조산을 한 거지. 그 상태로 여길 온 거였고, 우리 둘째 딸아이를 여기 와서 낳은 거지. 83년생. 그때는 병원이 별로 없으니, 집에서 낳았어. 산파도 없었고. 그때는 산파가 뭐야, 소 키우는 아저씨가 받아주셨지.

239쪽

그때 집에서 갑자기 양수가 터져갖고 여기서 갑자기 낳게 된 거지. 그때 우리가 저 위에 마을에서 세를 살게 됐었는데, 갑자기 배가 아파가지고 애를 쓰고 있으니까는 정신이 없잖아. 집주인 아줌마한테 “ 아줌마, 갑자기 아기가 나오려고 그러니까 와서 좀 봐주세요.” 그랬더니, 주인아줌마는 자기는 그걸 받을 수가 없으니까, 할 줄 모르니까 그 위에 아저씨가 있다는 거야. 소 키우는 아저씨. 그 아저씨가 소를 많이 받아봤으니까는 태 자르는 거 그런 거를 더 잘 알 것이다 하는 거지. 주인아줌마가 싫어서가 아니라 아기를 받을 줄 진짜 모르니까. 그리고 병원에 갈 돈도 없고. 형편도 안 되고 그러니까 소 키우고 하시는 아저씨가 와가지고, 애는 내가 다 혼자 낳고, 아저씨가 태를 잘라주신 거야. 그래가지고 염려를 많이 했었는데, 그렇게 태어나서는 지금은 건강하게 잘 자라줬어. 너무 고맙지. 건강해서. 지금은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구리에서 살고 있어. 공부도 아주 잘했고.

요즘에는 산후조리원도 가고 그러잖아요. 그때는 그런 게 어디 있어. 병원 자체도 많지도 않고 다들 어려운 시절이었는걸. 게다가 위로 오빠도 있으니까 막 태어난 둘째만 돌볼 수도 없고 그냥 둘이 같이 컸지. 둘 다 어린 애니 뭐, 큰애가 작은 애를 밟고 올라가고 그러기도 하고, 또 둘이 젖도 같이 먹고 그렇게 컸지. 아기 낳아서 젖이 있으면 하나는 이쪽에 빨고, 이제 큰 애는 이쪽에 빨고, 양쪽에서 항상 그렇게 같이 먹고 그렇게 컸지.

요즘은 좋은 데서 아기들 영양도 잘 갖춰서 돌보고 그러지만 옛날엔 그런 것도 없었지. 몸 건강하게 커 준 것도 너무 고맙지.

240쪽

<임순이님의 자녀 사진 | 좌측이 따님, 우측이 아드님>

242쪽

늙은 호박이 많은데 거기 예에-쁜 애호박이 있더라고

나는 어머니가 어린 나이에 돌아가셔서 뭐 태몽이니 이런 건 들어보지도 못했어요. 여섯 살에 돌아가셨으니 엄마 없이 큰 거지. 나도 또 바쁘게 사느라 잊어버려서 큰아이 태몽은 기억이 잘 안 나고, 우리 막내 태어날 때 태몽은 기억이 나.

둘째가 딸아이인데, 그 애는 예쁜 애호박이 태몽이었어요. 밭에 늙은 호박이 참 많은데 거기 아주 예쁜 애호박이 하나 있어서 내가 그것만 딴 거야. 그게 참 예뻐서. 그게 우리 둘째 태몽이었어. 갑자기 서울에서 철원으로 오고, 병원에서 낳지도 못하고 어릴 때 배불리 먹지도 못했는데 그래도 건강하게 잘 살아주니까 그것도 참 감사하고 너무 고맙지.

우리 딸이 서른세 살까지 시집을 안 가는 거야. 그러니까는 내가

243쪽

걱정이잖아. 좋은 사람 만나서 잘 지내길 바라는 게 부모 마음이니까. 그런데 어느 날 친구의 소개로 소개팅을 했다고 하면서 사윗감을 데려온 거야. 근데 딸 가진 부모는 좋은 사람을 만나길 바라잖아. 쉽게 말하면은 뭐 신앙생활이 있는 사람, 군대 갔다 온 사람,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사람 이런 조건들이 마음에 있잖아. 그런데 그런 사람 만나기가 그렇게 쉽지가 않지. 그런 사윗감이 어디 있어. 내 마음에 쏙 드는 사위가. 근데 딸이 너무 잘 데려왔어, 그냥. 착하고 좋은 사람인 거야. 지금은 서로 잘하고 살고 있으니까는 그냥 다 고맙지. 지금 구리에서 살고 있어.

걔는 공부도 잘하고 야무졌어. 걔가 직업 고를 때 고민하던 게 생각이 나. 처음에는 선생님을 하겠다고 했는데, 선생님을 하다 보면은 자기 성격이 모질지 못하니까 애들한테 휘둘린다고 해서 그건 포기하고, 또 아나운서를 한다고 방송 관련 대학에 간다고 해서 고민을 많이 했지. 그러다가 간호사는 어떨지 고민을 했어. 처음에는 피 보면 무섭고 해서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힘든 사람을 도울 수도 있고, 또 직접적으로도 안정적이고 의미 있는 일이라는 판단을 했는지 결국엔 간호사가 됐지. 아무래도 몸이 다친 사람들을 케어해야 하기 때문에 저도 고생을 많이 하겠지. 그래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잘 지내고 있어서 기특하지. 시부모님도 워낙 좋으셔. 시부모님들이 굉장히 착하시고 애들을 다 키워주고, 임신했을 때도 잘 챙겨주고 배려해 주시고 하니 우리 딸은 시부모님들을 더 좋아해. 요즘에 그런 분들 만나기 힘든 시대인데 참 복받았지. 사위도 참 착하고 좋은 사람이고. 내 딸이지만 참 착해. 내 자식들은 착하게 잘 커 줬어. 늘 감사하지. 나도 더 착하게 살아야지.

244쪽

물에 젖은 피아노에 담긴 마음

우리 애들은 가족사진이 별로 없어. 애들 키우면서 여기서 수해를 몇 번 당해가지고 사진이 물에 다 떠내려가서 없어. 1996년도에 호우 기간에 철원에 피해가 엄청 컸어. 비가 정말 너무 오니까 하천이고 뭐고 물이 다 범람하면서 꼼짝없이 수해를 당했어. 또 1999년도에도 수해를 당해서 정말 피해가 너무 컸지. 그렇게 철원에서 두 번 수해를 당했어. 사진 챙길 정신이 어디 있어. 다 떠내려가고 난리였지.

그때 우리가 살던 집이 저 앞에 있었는데, 다른 집에 비해 지대가 낮았어. 그래서 우리집도 물에 잠겼는데, 어디까지 잠겼냐면 피아노를 예시로 하자면은 그 건반까지 찬 거야. 사람이 서 있다면 허리까지 물이 들어찬 거지. 보통 지대였는데도 이 앞에 차가 둥둥 떠내려갈 정도로 그렇게 그때 수해가 심했어. 강원도는 그렇게 비가 많이 안 오는데, 처음이야. 몇십 년 동안 처음이었어.

245쪽

그런데 철원 수해 때 보상을 별로 못 받았어. 얼마 안 나오기도 했고, 그때 당시 보상이 나오긴 했는데 몇 달 있다가 나왔지. 그때는 조금, 몇백만 원인가 120만 원인가가 나왔어. 근데 이 돈으로는 복구가 다 안 됐지. 그래서 그냥 식구들이, 친척이나 가족들이 저 후방에서 와서 도와주고. 또 군인들이 와서 좀 치워주고. 흙 같은 거, 그런 것도 치워주고 그래서 어찌저찌 살았어. 빗물에 쓸려가다가 집에 흙이 다 쌓였으니까.

피아노에 지금도 흙이 있다니까. 밑에 다져진 흙이 지금도 있어. 건반 딱 거기까지 밑으로 다 잠겼으니까. 아까 피아노를 예로 들었는데, 우리집에 피아노가 있어, 지금도. 딸이 피아노를 배웠었어. 그때 당시에는 그런 피아노를 치고 하는 게 그냥 되게 좋아 보이고 해서. 우리 애 아버지가 의정부에서 노동 일을 해가지고 피아노를 사갖고, 여기 이제 딱 사다 놨지. 그때 160만 원 줬다고 한 것 같아. 돈 액수로 치면 10배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에 비하면 그때는 정말 비싸고 귀한 악기였어 피아노가. 애아빠가 딸아이한테 준 제일 비싼 선물이고 그게 그 사람 사랑 표현 방식이었지.

실은 얼마 전에 우리 딸이 이제 자기는 타 컸고, 우리 집안이 다 기독교 집안이다 보니까 강릉에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선교 단체에 그 피아노를 좋은 마음으로 기부를 했었어. 강릉까지 가서 선교 단체에 좋은 마음으로 예배드릴 때 쓰라고. 그런데 그걸 나중에 애 아빠가 알고 난리가 난 거야. 그건 안 된다. 남한테 주면 안 된다고 반대를 해서 우리가 가서 다시 사정을 말하고 사과드리고 다시 가져왔어. 딸아이는

246쪽

좋은 마음으로 좋은 곳에서 쓰라고 준 거였는데, 애기 아빠 입장에서는 그게 너무 속상한 거지.

그때 우리가 정말 어렵게 살 때였는데, 피아노를 딸한테 사주고 싶어서 한 달 내내 열심히 일해서 그 비싼 걸 사 준 거였는데, 그걸 남한테 준다는 게 속상했겠지. 그 안에 애기 아빠가 우리 애들을 사랑하는 마음도 담겨 있고, 힘들던 시절 자식한테 좋은 걸 사 주고 싶어서 열심히 버티고 버티던 그 아버지의 마음이랑 또 그 사람 젊음이랑 추억 같은 것들이 담겨 있을 테니까. 그래서 수해를 두 번이나 당해서 피아노 다리 껍데기가 벗겨진 걸 아직도 집에 그대로 가지고 있어. 지금도 누르면 소리도 잘 나.

248쪽

하우스는 진짜 숨 쉴 시간도 부족해요

우리는 정말 열심히 살았지, 철원에서.

신랑 사촌 동생네 식당 일도 도와주다가 우리는 여인숙도 했었고, 한창 여인숙 잘 될 때는 사람이 많으니까 방이 없어서 애들 방까지도 내주고 우리는 부엌에서 자기도 하고 그랬지. 토마토 농사를 계속했어. 비닐하우스에서 토마토만 계속한 거지. 토마토 농사는 한 10년 했는데, 농사짓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하우스를 하다 보면, 이제 그것도 한 10 여 년 하다 보니까, 하우스를 시작하게 되면은 진짜 숨 쉴 시간도 없어. 계속 뭘 해 줘야 돼. 하루 지나면 커 버리니까 아침에 따야 하고 저녁에 따야 되고 새벽에 남아 가지고 또 따고 그랬어.

그러다가 우리 애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시고 나서는 많이 못 도와주니까 미안해하고, 또 몸이 불편하니까 고생을 많이 했지. 속상하기도 하고, 나도 몸도 힘들고 하니까. 항상 우리는 이리 뛰고

249쪽

저리 뛰고 하면서 참 열심히 살았어. 몸이 불편해도 좀 나를 계속 도와주려고 애를 쓰고 하는데도 예전같이 당신 마음대로 안 되니까 속상해하고 그러지.

토마토는 가격이 천차만별이야. 제일 값이 잘 나갈 때는 10kg 한 박스에 4만 5천 원도 하는데, 값이 잘 안 나올 때는 한 박스에 5천 원, 6천 원이야. 가격이 오르락내리락하면 농민들도 힘들지만 사 먹는 사람들도 힘들어. 중간에 물량이 적어서 가격이 뛰면 소비자들한테는 또 너무 비싸거든. 그게 문제 같아. 가격이 고정이 안 되고 왔다 갔다 하니까 소비자도 물가가 높게 느껴지고, 농사짓는 입장에서는 가격이 변동이 크니까 일정하지가 않은 것.

농사짓는 사람들도 안정적으로 농사에만 전념할 수 있고, 농산물 가격도 안정되면 소비자들도 안전하고 싱싱한 먹거리를 먹게 되면 서로 좋지 않을까 싶어.

250쪽

우리 손주들이 예뻐서 웃음이 나요, 오래 살아야 겠어

우리 큰 손주는 지금 초등학교 1학년이고 아들, 작은 손주는 손녀딸인데 내년에 학교 가고 그래. 만나도 그렇고 사진도 그렇고 얘들만 보면은 너무 귀엽고 즐거워. 우리 손자, 손녀를 보면 그냥 나는 이 애들이 귀엽고 바라만 봐도 참 좋아.

저번에는 웃으면서 할머니한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다음에 이제 억만장자가 돼 가지고 나를 한 달에 천만 원씩 용돈 준다고 약속을 했어. 어린애가 그걸 6살 때 나한테 약속을 하는 거야. 마음이 너무 예쁘잖아. 말이라도 너무 고맙지. 기특하고. 정말 너무 예뻐서 얘들만 보면 나는 웃음이 나요. 내가 오래 살아야겠어. 지금은 이제 학교 다니니까 그렇다지만, 6살에 그런 얘기를 하니까 너무 귀엽고 마음이

고마운 거야. 사진도 너무 귀엽죠? 예뻐 죽겠어. 보물이지.

251쪽

나는 다른 거 없어. 우리 가족이 이렇게 잘 지내온 것도 믿음 안에서 서로 위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니까 앞으로도 말씀 안에서 지혜롭고 건강하게 서로 사랑하며 잘 지내면 좋겠어. 사랑하는 우리 남편하고 큰아들, 둘째 딸 그리고 손주들하고 사위랑 사돈 어르신들도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지내자고 말하고 싶네. 잘 커 줘서 너무 고맙고 감사하고, 앞으로도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자고!

<임순이님의 손자(좌측), 손녀(우측)>

<음료를 나누어 먹는 손자와 손녀>

252쪽

만두 한 번 하면 6,000개는 빚었지

처음에 여기는 적십자가 없었어요. 그래서 철원군에서 연말에 기부하자는 행사를 하게 됐는데, 우리가 그때 사물놀이 하면서 집집마다 다 갔지. 김숙희 회장님 따라서, 회장님이 하자고 하면은 우리는 다 따라다녔어. 철원군 전체를 다니면서 공연도 하고 그랬어. 공연은 김숙희 회장님이 주로 많이 하고, 우리는 이제 따라다니고. 부채춤 같이 그런 활동을 많이 하는데, 회장님은 예술가로서 많이 다니시고, 또 가르치러 학교에 다니고 계시지. 그러면 이제 우리는 보조로 따라다니면서, 매니저처럼 같이 다녀서 활동했어. 봉사니까 돈 안 받고, 나도 기부하면서 이렇게 봉사하고. 또 여기 장애인복지관에도 근남면 적십자에서 해마다 이렇게 떡을 해서 주고 있어. 이런 봉사를 특별한 계기로 시작했다기보다는 그냥 좋아서. 같이 봉사하면 기분 좋고 기뻐서 하고 있어. 떡 같은 것도, 그냥 내 개인적으로 설날이나 추석처럼 명절 되면 동네에 계시는 분들, 경로당 분들 드리지.

253쪽

봉사하면서 제일 뿌듯하고 기억에 남았던 게 만두 6,000개 빚었을 때야. 옛날에 여기 철원에 큰 가뭄이 많이 왔었어요. 철원에 군부대가 많잖아. 그래서 철원 군부대의 지원을 받아서, 국수를 삶아서 간 적이 있어. 그리고 만두도 만들어서 군부대로 위문도 가고, 그렇게 서로 교감을 많이 했었어요. 그랬는데 지금은 군부대 위수지역 해제되고 나서부터 군인들이 숫자가 적어지고, 또 이동하고 하니까 이제 지금은 그렇게 안 해. 근데 옛날에는 여기 근남면 적십자에서 회원들이 다 모여서 만두를 막 6,000개 만들고 했지. 주변에 할머니들도 오셔서 도와주시고 직접 다 만들었어. 한 20여 명 모여서 공장처럼 만들었어. 하루는 반죽하고, 다음 날은 만두 속 재료 준비하고. 피도 다 하나하나 빚어서 했어. 반죽한 거를 기계로 돌려서 넓게 펴고, 주전자 뚜껑으로 동그랗게 본을 떠서 각자 앞으로 줘서 빚었지. 그때가 한 10년 전인 것 같아. 2010년 정도 그쯤에. 그다음 날 만두를 빚어서 군부대에 위문을 가는 거야. 그러면 그 많은 군부대 식구들, 막 3~400명이 다 만두를 끓여서 드렸지. 그때 재미있었어요, 아주. 윷놀이도 했었고, 사물놀이도 하고, 군부대 군인들하고 행사도 하고. 군부대와 교류가 엄청 많았어.

<만두 6,000개 빚던 날>

이 사진이 그때 만두 빚던 사진인데, 내가 어디 있는지는 잘 못 찾겠네.

254쪽

철원도 피해가 컸지만, 정선도 수해가 크게 났었어요

내가 남아 있는 사진이 많이 없는 게, 1996년도 호우 기간에 물이 범람하면서 수해를 당했어. 다른 집에 비해 지대가 낮았던 내 집이 물에 잠겼지. 차가 둥둥 떠내려갈 정도로 그때 수해가 심했고, 그때 사진들이 다 유실됐어. 이번 장마(2023.07.15.)에도 비가 너무 많이 왔잖아. 그래서 충북 청주에 미호강 제방이 터지면서 오송 지하차도에 물 들어차고, 사람들이 안타깝게 돌아가시고 그랬잖아. 그때처럼 철원도 이례적으로 수해가 너무 크게 나서 기사도 남아 있는데, 나도 거기에 나왔을 거야. 그 취재해가지고. 그리고 정선도 나중에 수해가 났어. 한 4~5년 후에 정선도 수해가 나서 거기로 봉사하러 갔었어. 똑같은 아픔이잖아. 철물점에 가서 닦아주고, 개인 집집마다 방문해서 청소해 주고. 내가 철원 때 겪은 것처럼 똑같은 아픔이니까, 정선으로 봉사하러 가서 많이 돕고, 청소하고 그랬어.

256쪽

그냥 하다 보니 6000시간이더라고

나는 내가 좋아서, 기뻐서 봉사하러 다녔잖아. 여러 사람이 다 단체로 많이들 봉사를 했지만, 20년 동안 김숙희 회장님 따라서 내가 적십자 봉사를 했어. 적십자가 없다가, 적십자가 생기고 처음에 김숙희 님이 회장을 하게 하시면서 봉사를 많이 다녔지. 김숙희 님이 최초로 적십자 회장님을 하게 되면서, 회장님이 주체로 뭐든지 하셨지. 그리고 김정희 노인부녀회 회장님도 지금 오랜 세월을 많이 봉사하셨고. 김숙희 회장님이 중앙식당을 운영하니까 또 무료 급식도 해주시고, 거기서 봉사를 주로 많이 했어. 나는 그 식당에서 요리 같은 주방 일 도와주고. 어르신들 식사하는 것도 돕고, 설거지도 하는 거야.

육단리 주민들도 함께 봉사하는데, 나는 식자재 그런 거 주로 많이 가져왔지. 우리가 농사를 지으니까. 식자재 그런 거를 연결도 해주고, 주로 내가 농사지은 거 거의 다 기부도 하고. 주로 배추, 열무, 파. 그런 거 농사지었으니까. 토마토 농사를 오랫동안 했어. 토마토, 파프리카

257쪽

그런 거 주로 많이 했고, 비닐하우스로 계속 농사짓고 있지. 다들 비닐하우스 1천 평, 2천 평, 3천 평 크게 하는데, 우리도 2천 평 농사짓고 있어.

아무튼 그렇게 봉사하다 보니까 20년이 지났더라고. 나는 내가 좋아서 늘 한 건데, 봉사한 지가 20년이 되니까, 적십자에서 표창장을 줬어. 근남면 적십자를 위해서 열심히 활동하신다 해서. 표창장에 6,000시간 적혀 있는데, 그 시간이 이제 20년 동안 봉사한 시간이야.

<적십자에서 수여한 자원봉사 6,000시간에 대한 표창장>

<적십자에서 수여한 20년 봉사에 대한 표창장>

258쪽

6,000시간, 20년 그 세월 동안 한 일들이 많아

적십자에서 철원군 캠페인 행사할 때 사물놀이도 했어. 이 캠페인이 ‘ 쓰레기를 줍고, 바르게 살자.’ 이런 거였어. 그때 사물놀이 했는데, 이때가 정확히 언젠지는 기억 안 나지만 여름이고, 고석정 그쪽인 것 같아. 다른 사람은 사물놀이복 입었는데, 나는 적십자 조끼만 입었지? 사물놀이 하시는 분들은 다 입어야 하는데, 갑자기 이걸 하게 된 것 같아. 그래서 사물놀이 하러 들어간 것 같은데, 사물놀이복은 못 입었어도 기분이 너무 좋았어. 합수제 때도 사물놀이를 했어. 합수제는 최북단 철원과 최남단 제주 물이 하나 되어서,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행사야. 풍년을 기원하는 것도 있고, 제주도 물을 떠다가 철원 물하고 섞어서 한탄강에 부으면서 평화를 상징하는 거지. 합수제 때 사물놀이 했는데, 나는 북 쳤어. 합수제를 진행한 곳이 승일교 쪽일 거야. 고석정 건너가기 직전에 승일교, 다리.

<철원군 캠페인 행사 때의 사물놀이>

259쪽

<합수제 사물놀이 행사>

<우측 북을 드신 분이 임순이님>

그리고 명절마다 나누기 행사를 해. 복지관에서 1년에 두 번씩 설, 추석 명절에 음식 나누기를 해. 전 같은 거를 부쳐서 한 50여 가구에 나눠드리지. 여기 철원군 장애인 복지관 거기에서 나눠주셔. 이 사진이 그 사진들인데, 벌써 10년 됐지. 새해 복 나누기 사진이 2013년 2월 7 일. 이때는 머리가 길었네. 맨날 머리를 길게 하고 다니다가, 자른 지가

<새해 복 나누기 행사 | 좌측 끝이 임순이님>

얼마 안 됐어. 네 명이서 찍은 사진이 와수리팀이야.

<새해 복 나누기 행사 근남면 팀 사진>

아무튼 이때 전 준비하고 그랬어. 보자기에 싸인 도시락 같은 게 전. 그리고 떡국떡도 썰어서 넣고, 전 넣고 그렇게 한 보따리씩 포장했어. 보따리들은 다 음식이고, 종이가방은 명절 선물 세트. 설이나 추석 명절 되면 이렇게 전을 했어. 동태전, 동그랑땡, 또 꼬지전. 야채도 튀겨서 큰 거 도시락으로 하나 포장해서 드렸지. 장애인분들이거나 혼자 계신

260쪽

분들은 이렇게 음식 만들고 하기가 어렵잖아요. 그러니까 장애인 복지관이랑 같이 해서 이걸 보내드리는 거지. 그럼 그분들은 우리가 드린 음식으로 명절을 보내시는 거야. 고마워하셔. 배달은 복지관에서. 우리는 가서 요리하고 포장하고, 이렇게 준비해서 드리면 그 복지관 에서 직원들이 배달 가야 할 집들을 방문해서 다 나눠줘. 한가위 때도 그렇게 비슷하게 똑같이 했어.

<적십자 봉사회원 모인 날, 좌측 파란 바지 입으신 분이 임순이님>

이때는 적십자 봉사 회원들 모인 날이야. 제일 왼쪽에 있는 사람이 나고. 철원군 내에서 원로회의 이런 거 모이게 되면, 임원들도 모이 잖아. 그때야. 이때 총무였는데, 오랜 세월 총무 많이 하고 그랬어.

261쪽

<환경 캠페인 쓰레기 줍기 활동>

<좌측 세 번째 파란 모자 쓰신 분이 임순이님>

이때는 근남면 청소하던 때야. 환경에 대한 캠페인으로 마을 거리에 있는 쓰레기 줍기 활동. 머리 묶고 파란 모자 쓴 사람이 나야. 육단리 마을 거리를 청소한 거고. 이때 지금은 안 보이는 가게들도 있지? 이때도 한 20년 됐을 거야. 요즘에도 이렇게 캠페인을 해. 그런데 지금은 노인 일자리로, 노인들이 환경미화 쪽으로 청소하고 그래.

이때는 태봉제 때 사진이야. 매년 10월 초에 철원군에서 태봉제 행사를 해. 철원이 옛 태봉국의 왕도거든. 이 고장의 전통을 오래도록 기리고, 국민들 화합을 도모하고, 풍년을 자축하자는 뜻에서 하는

같아.

행사야. 그래서 이때 근남면 적십자 팀이 가서 차 봉사를 한 거야. 커피 같은 거. 근남면에서 마실 것들 사가서, 거기서 물을 큰 통에 끓여 가지고 드시고 싶은 분들 그냥 드리 는 거지. 이 사진도 10~20년 된 것

<태봉제 음료 봉사, 뒷줄 우측 끝이 임순이님>

262쪽

<엿기름 소분하는 좌측 빨간 옷의 임순이님>

이때는 식혜 만들 때. 엿기름 조금씩 소분하는 사진이야. 1kg씩 덜어서. 식혜를 만들어서 노인분들 대접도 해드리고, 이렇게 포장한 엿기름이나 만든 식혜를 판매도 하고. 다들 머리에 비닐 쓰고 있지? 이건 엿기름 가루 날리는 것 때문에 썼어. 엿기름을 덜다 보면, 머리에 가루가 하얗게 쌓여. 그래서 비닐을 머리에 뒤집어 쓴 거고, 사진 보면 벌써 빨간 옷이 하얗게 됐네. 빨간 옷 입은 사람이 나야. 언젠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이런 수익금이랑 또 후원받는 거랑 해서 그 자금으로 봉사하고 그래.

263쪽

<가뭄날 뒤쪽 파란 모자 쓰시고 봉사하는 임순이님>

<농작물에 물을 뿌리는 사진>

<좌측 사단장님, 우측 임순이님>

<좌측에서 세 번째 파란 모자 쓰신 분이 임순이님>

이때는 철원군에 가뭄이 왔을 때야. 이때 날이 비가 너무 안 오니까 가물어서 군인들이 차로 물을 끌어다가 논에다 뿌리고 할 때야. 여기서 차나 커피 봉사하고, 국수도 삶아서 식사를 대접해 드리고. 같이 사진 찍은 군인은 사단장님이신 것 같아. 사단장님이 직접 오셨어. 파란 모자 쓴 사람이 나고. 아무튼 물을 그렇게 뿌리는데도 날이 너무 가물어서 물이 다 스며들고 말라버렸어.

264쪽

봉사할 때 공연이나 연극도 다니고 그랬어. 여러 봉사 단체가 많아. 그래서 그 단체 봉사원들이 모여서 행사를 하기도 했어. 이때가 그 행사 날의 밤이야.

<우측 파란 모자 쓰신 분이 임순이님>

<좌측 포졸 역할을 맡은 임순이님>

이 사진이 이제 각설이 타령한 것 같아. 파란 모자 쓴 사람이 나고. 이때가 언제인지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이때도 다 20년 넘은 것 같아. 각설이 타령이 무슨 내용이냐면, 솔로몬의 왕. 지혜로운 왕에 대한 내용이었어. 사물놀이 옷 입은 사람이 나야. 포졸 역할 같아.

<솔로몬의 왕 공연 중 착한 어머니역을 맡은 임순이님>

<파란 치마를 입으신 분이 임순이님>

이 공연도 솔로몬의 왕에 대한 공연이었어. 이때는 지혜롭고 착한 어머니 역을 맡아서, 파란 치마 입은 사람이 나야. 노오란 왕의 복장을 한 분은 김숙희 회장님. 솔로몬의 왕 내용이 아이를 반으로 자르겠다는

265쪽

그 이야기잖아. 나쁜 엄마가 아이를 데려가려 하니까, 왕이 아이를 정확히 반으로 잘라서 나눠줘라 했지. 그러니까 착한 진짜 엄마는 아이를 자르지 말라고 차라리 나쁜 엄마에게 줘서 키우게 하라고 했지. 이 말을 들은 왕은 ‘그렇게 말한 당신이 진짜 엄마다’ 했던 그런 내용으로 한 공연이야. 저 인형이 아기 역할 같아. 앞에 있는 투명한 함은 행운권 넣는 용도. 여기 오신 분들, 참가자들 해서 추첨해서 경품 드리려고 행운권 넣는 용도로 비치한 거야.

<경로잔치에서 공연하는 임순이님(우측 세 번째)>

이건 철원군에 계신 어르신들 모시고 경로잔치를 열었어. 철원군에서 5월 8일에 어버이 행사로 경로잔치 행사를 열었는데, 그때 우리가 특별 출연을 했지. 철원군에서 이러저러한 사유로 와서 공연을 해줬으면 좋겠다 하고 연락이 와요. 김숙희 회장님한테 연락이 오면 육단 교회에서 공연 연습을 해. 적십자 팀 말고도 개인으로 또 참여하실 수 있는 분 모집해서, ‘나도 하고 싶다’ 하는 분 계시면 같이 했지. 이 예쁜

266쪽

한복은 김숙희 회장님 통해서 구했지. 김숙희 회장님이 서울로 다니시면서, 이런 걸 많이 하셨어. 학교를 다니시면서 레크레이션 같은 자격증도 따고, 이렇게 응용을 많이 하셔. 그래서 이때 공연한 것도, 김숙희 회장님이 그렇게 응용하시는 걸 통해서, ‘독도는 우리 땅’처럼 그런 거 할 때 노래하면서 무용도 한 거야. 태극기도 들고. 이런 무용은 직접 짠 거야. 김숙희 회장님이 다 가르쳐주셔. 가르쳐 주시면 그 율동을 우리는 그대로 따라서 연습하지. 이때도 아마 20년 정도 됐을 거야.

268쪽

우리 육단교회가 노인 학교예요

우리 근남면 육단리에는 노인 학교가 있어. 우리 육단교회가 노인 학교예요. 노인대학을 한 지가 벌써 20년이 훨씬 넘고, 지금 거의 한 30년 됐을 거야. 노인대학을 처음 하게 된 게, 대전인가에 사시는 한 박사님이 있었어요. 그분이 오셔서 노인대학이란 게 있으니까, 노인대학 구성을 해서 진행하면 좋겠다 해서 전 목사님 계실 때 시작하게 됐지. 그렇게 계속 지금 목사님까지 계속 이어져 와서 했어. 지금 우리 목사님 오시고 노인대학이 계속 이어지니까, 마을 분들이 단체로 화목하게 잘 지내게 되는 그런 자리인 거지.

노인대학에서는 여러 프로그램을 해. 선생님들이 오셔서 같이 노래도 하고, 그림도 그려. 노인대학은 매주 목요일만 가. 오전 9시부터 12 시까지, 3시간 동안 진행해. 철원군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해주시는 선생님들을 여기로 보내주시고, 점심은 김숙희 회장님의 중앙식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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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제공을 해주셔. 지금까지도 무료로 제공을 해주셔. 그러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목요일마다 노인대학에 오셔서 노래하고, 재밌게 놀고, 또 같이 점심 먹고. 저기 마현리 같은 데서는 쉬러도 오시고, 다시 모셔다 드리고. 오시면서 볼일이 있으면 면사무소 볼일도 보시고. 겸사겸사 좋은 거지.

노인분들이 집에만 계시고, 계속 일만 하고 그러는데 노인대학에 오면 노래도 가르쳐 주고, 그림도 그리고, 만들기 활동도 하고 그러니까. 나는 그림을 잘 못 그리지만, 아주 잘 그리는 분도 계셔. 또 나와서 같이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니, 매주 그 시간이 기다려진다 하시고. 이렇게 활동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거지. 아무튼 지금은 방학이고, 곧 9월 첫 주에 개강하는데, 그때가 또 기다려진다 하시지. 아무튼 노인대학이 되게 잘 진행되는 것 같아. 오랜 세월 동안. 그래서 그렇게 긴 세월 동안 노인대학 다니시다가 연로하니까 많이들 돌아가시고, 또 새로 등록도 하시고. 그렇게 운영이 잘 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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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로잔치를 빛내는 숨은 기부자들이 있어요

매주 목요일 날이면 육단교회에서 모여서 노인대학을 진행하는데, 지금은 방학이야. 지금은 방학이지만 개학하면, 처음 3월에 개학 하면서 경로잔치를 해. 그러면 경로잔치도 이제 김숙희 회장님이 식당을 하시기 때문에, 거기서 음식을 제공해주셔. 나도 가서 음식을 같이 해주고. 거기에 이제 선물을 또 하나씩 드려. 수건을 드린다든가, 티슈를 드린다든가. 티슈 드리는 걸 할머니들이 참 좋아하셔. 내가 그걸 기부를 하는거야, 티슈를. 십 몇 년 동안 계속 경로잔치 때마다 그 선물을 기부하는 거야. 처음에는 150명까지 드리기도 했어. 지금은 상황에 맞춰서 진행하고 있고, 이렇게 선물을 드리는 것도 한 10여 년간 한 것 같아.

우리가 1년에 두 번씩 소풍도 가. 올해는 고석정 꽃 박람회에 갔어. 가서 1인당 5,000원 하는 깡통 열차도 있어. 트랙터 뒤에다 깡통 이어서 굽이굽이 덜컹덜컹하면서 한 바퀴 뺑 도는 기차. 5,000원 해서

271쪽

비싼 느낌인 것 같았는데, 막상 한 바퀴 도니까 재밌고 좋더라고. 한 바퀴 돌면 한 20분 걸려. 그래서 그것도 타고, 또 경치 좋은 데서는 사진도 찍으라고 한 10분 정도 휴식을 줘. 그러면 사진 찍고 싶은 사람들 찍어. 거기에 만화 캐릭터 같은 것도 만들어져서 놓여 있어. 나는 그때 찍은 사진이 없어. 일 때문에 바빠서 못 가.

김숙희 회장님이 또 과자랑 음료, 물 해서 여섯~일곱 종류를 봉지에 포장해. 여기저기서 후원받으셔서. 회장님이 모든 걸 다 주관하셔. 여러 가지 알아보시고, 후원받은 걸로 다과 준비해서 제공하고. 회장님이 여러 방면에서 힘쓰고 계셔. 후원해주는 고마운 분들도 계시고.

272쪽

여기는 동네 문화가 아주 잘 되어 있는 곳이었어요

옛날 시골 동네에서 누구 돌아가시면 동네 사람들 다 모여서 장례 도와주던 것처럼 철원도 그런 게 많았어. 동네에서 주민들이 다 모여서 밤을 새워가며 같이 국수 삶아 드리고. 밤에 그렇게 하고 부녀회에서 동태찌개도 만들고, 그런 게 되게 잘 되어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장례식장이 생겼으니까, 이제 돌아가시면 거기서 다 진행하니까. 장례식장은 여기 철원에 있어. 와수리에도 있어.

예전에는 동네에서 상여를 다 만들어서, 꽃을 만들어가지고 동네 사람들이 다 따라갔어. 그럼 산에 가서 땅 다지기를 해. 부녀회 회원 들도 돌아가면서 막 다지기를 했지. 장례식장이 편해지긴 했는데, 옛날처럼 다 같이 장례를 치르면서 도모하던 단합이 전에 비해서 좀 없어진 것 같아. 지금도 단합은 잘 되는데, 다만 옛날이랑 비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이런 게 좀 안타깝고 아쉬워.

273쪽

내가 철원에 정착하게 되면서, 철원이 변화하는 모습을 봤잖아. 지금 도시재생사업도 하고 있고. 그 변화를 많이 느껴요. 여기 육단리가 두 군부대의 경계 지역이에요. 그래서 항상 이곳이 개발이 안 되는 거예요. 경계 지역이다 보니까 소외가 좀 됐고, 옛날에는 여기가 장사도 잘되고, 유명한 자리였어요. 그런데 군 위수지역이 해제되면서 군인들이 많이 줄었잖아요. 그러다 보니 건물도 노후되고 하니까. 그런데 이렇게 도시재생사업으로 인해서 육단리가 이렇게 좋아지니까 다행이죠. 노후된 건물을 다 수리하고, 새로 짓고 해서 좋아지니까. 이렇게 좋게 바뀌고 있는 육단리 마을에서 주민들과 다 같이 화목하게 지내고 싶어요.

275쪽

여섯번째 이야기 | 최광숙

내게도 꿈이 있었지. 삶의 고비를 넘고 넘어. 내 삶의 원동력, 배풂. 소중하고 찬란한 나의 인생

276쪽

최 서방네 담뱃집 둘째 딸로 태어나

나는 철원 토박이는 아니에요. 태어난 건 1948년생인데. 내가 태어난 데가, 지금은 남양주시 수동면이지. 옛날에는 거기가 가평군 외서면 이었어요. 우리 집이 조상님 때부터 몇 대를 담뱃집을 한 거예요. 개울 하나 있고, 우리 쪽은 안마산이고 저쪽은 내마산이라고 불렀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가평 땅, 저쪽은 양평 땅인데 안마산 담뱃집 하면 사람들이 다 알았지 아주.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 그래서 그 안마산 담뱃집 하면 노인들은 다 알지. 전매청에서 나오는 담배 있잖아. 그거를 우리 할아버지 때부터 했지.

우리 친정아버지는 와세다대학교까지 나왔어요. 와세다대학교 법학과를 나왔는데, 8 留15 해방되면서 일본 법(학위)이 무슨 소용이 있냐고. 우리 친정아버지가 잘하는 거는 아코디언 키고 하모니카 부는 거, 그것밖에 잘하는 게 없었어요. 그러니까 아버지는 그냥 농사일이

277쪽

라는 것도 안 해보고, 일꾼들한테만 맡겨놓고 이렇게 하고 살았었지. 일꾼도 뭐 한 둘씩 이렇게 두고, 우리 집이 진짜 대농을 해서 그렇게 잘 살았죠. 어릴 때 어른들이 날 보고 말을 아주 잘한다고, 변호사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아이고 야, 최 서방네 담뱃집 둘째 딸은 변호사다.” 라고 사람들이 그랬어요.

<우리집 뒤뜰(1962)>

278쪽

세 살 먹은 갓난쟁이 때의 기억

6 留25 때 내가 세 살 먹은 갓난쟁이였지. 지금 생각나는 건 그때가 지금처럼 여름이었는데, 그 내가 깔았던 담요까지 생각이 나요. 담요 무늬까지 생각이 나. 색이 어땠는지도. 빨갛고 파랗고, 체크무늬가 가로세로로 된 겉면이 있었고, 안쪽은 국방색이었어요. 그 당시 우리 엄마가 인민군 쳐들어온다고, 폭격한다고 숨으라고 그러면, 넓은 부엌 구석에 우리 엄마가 딱 서 있던 생각이 나고. 인민군들이 와가지고 우리 솥에다가 막 음식 해서 먹던 생각이 나고 그래. 그리고 인민군 옷 색깔은 무슨 색깔이냐 하면 황토색이었어. 우리 집 뜰이 넓어서 방공 구뎅이(구덩이)가 무척 큰 게 두 개가 있었어요. 집이 조그마한 집은 구뎅이가 없지. 우리는 넓으니까 두 군데나 있었어. 근데 폭격을 하는데 내가 죽은 줄 알았대. 그래갖고 우리 할머니가 막 껌껌한 방공 구뎅이 가서 막 울고 그랬는데 얼마 만에 내가 깨어나더래. 알고 보니까 우리 할머니의 형님이 바로 내 뒤에 있었는데, 그 분이 폭격을 맞아 돌아가시고 나는 살았대. 우리 할머니가 그전에 그 얘기를 했었어.

280쪽

어린 시절의 추억

우리 집이 양주 땅에서 건너오면 첫 집이고, 가평 땅에서는 끝 집이었는데, 마당이 넓어서 연못도 있고 그랬어. 근처에 나보다 2년 선배인 언니가 있었는데,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고 해요. 그 언니 집은 우리 마당 옆에 있었어요. 그 언니 엄마는 농사를 조금 해서, 여름이면 나물, 가을이면 약초 같은 걸 캐고 해서 먹고 사는데, 그 엄마를 따라서 내가 산에 그렇게 많이 다닌 거야. 그 언니하고 같이. 그때 머리를 길게 길렀었거든. 그래서 그 언니가 와서 나 머리 땋아주고, 내가 가서 그 언니 머리 따주고 그랬지.

그때 친구들이랑은 뭐 특별한 놀이는 없었어요. 한껏 해야 고무줄. 고무줄도 ‘만세’하고 손을 머리 위로 들면 거기까지 다리가 올라가서 했었는데. 뛰는 것도 잘 뛰고. 달리기로 육상대회도 나가고 그랬어요. 그리고 그때 술래잡기, 공기, 사방치기 같은 거도 했지. 공기알 없으면 돌 주워서도 하고. 근데 공기알 5개로 하는 게 아니라 ‘빚공기 라고

1) ‘빛’, 혹은 ‘빗’일 수도 있음.

1)

281쪽

있었어. 공기알을 한 200~300개씩 해서 이만큼 놓고 뺑 둘러 앉아갖고 하던 거야. 공기알을 하나 위로 올리고 밑에 있는 공기알을 한 움큼 가져오면 그게 다 내 것이 되는 거야. 그 놀이가 참 재밌었어. 빚공기. 그거 갖고 빚공기라고 그랬었어. 그러니까 나중에 끝나면 제일 많이 따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왜 빚공기라고 그랬는지는 몰라. 이게 많이 따온다고 그래서 그걸 빚이라고 그랬는지. 그 뜻은 모르는데. 그걸 갖고 빚공기라고 그러더라고. 재밌었어요, 여럿이 모이면.

한번은 학교 다닐 때, 아침에 학교를 딱 갔는데 500원짜리가 이렇게 떨어져 있는 거야. 그때 그 당시에 500원이 무척 큰돈이었어. 그래서 이제 그걸 주워서 선생님한테 갖다 줬어요. 내 뒤에 애들 몇 명 있고. 그랬더니 그걸 임자를 찾았는데 우리 동네 구장님이에요. 그때는 이장님 하다가 이제 새로 이장님이 생기면 구장님이라고 불렀거든. 그게 구장님 돈이었던 거야. 하루는 운동회 날이 됐는데, 내가 돈을 주워서 임자를 찾아줬다고 얘기가 나오니까 우리 아버지가 신이 났어. 우리 아버지가 신이 나서 술값이 그날 엄청 나갔대. 하여튼 학교 다닐 때도 진짜 참 좋았어.

내가 학교 다닐 때 작문을 아주 잘했어요. 장문을 잘 쓰고, 우리 언니 친구 연애편지도 대신 써주고 그랬으니까. 우리 언니가 나랑 5살 차이 나는데, 내가 글을 잘 쓰니까 연애편지를 써달라고 그래서 써주고 그랬지. 초등학교 다닐 때 2학년서부터 웅변도 했어요. 지금도 생각나는 게 제목이 ‘보릿고개, 쌀고개’ 그거 하고. 또 하나는 제목은 기억이 안 나. 근데 “인류의 역사가 시작돼 오늘에 이르기까지 동서고

282쪽

금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건만, 진실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됩니까?” 그런 내용이 있었던 건 생각나. 2학년 때는 글씨도 간신히 알았잖아. 2학년 때는 그냥 나가기만 했고, 3학년, 4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대회에 나갔는데. 당시 수동면에 있는 학교들이 다 모여서 했어.

근데 마석에서 온 학생 하나가 껌을 가져온 거야. 그때 우리는 껌이라는 건 몰랐지. 옛날에는 나무를 많이 하니까, 꼭 여름에 한 번씩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서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요. 나무를 해서 잔뜩 싸놓지. 그게 여름에 나무하는 날이야. 나무하는 날은 우리 동네 아빠들, 애들이 다 모이는 거야. 다 모이면 ‘쫀득이’라고 파란 열매가 요만한 게 있어. 그거를 딱딱 씹으면, 자꾸 씹으면 껌마냥 쫀득쫀득해. 껌 같이 돼. 그럼 그거를 씹어 갖고 어떡하냐면, 크레용을 넣어서 색깔을 내. 그래갖고 씹으면 빨간 껌도 되고, 노란 껌도 되고 그랬지. 그런 시절이었는데 마석에서 온 애 하나가 진짜 껌을 먹다가 단물이 안 나오니까 씹다 버리는 거야. 그게 되게 아깝고, 우린 생전 못 먹어봤는데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 그 애는 시내에 사니까 글쎄 그렇게 하더라고. 우리는 껌 구경도 못 해 봤는데. 맨날 쫀득이껌, 쫀득이껌 그것만 알고.

그리고 학교 다닐 때 졸업식 때 송사, 답사 있잖아요. 송사는 내가 계속했고, 우리 6학년 졸업할 때도 답사를 읽는데, 우리 담임 선생님이 울다가 나가고 하셔서 졸업식 끝을 못 냈어. 그렇게 중학교 입학해서 조금 다니다가, 나 14살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1학기 다니는데 8월

283쪽

달에 엄마가 병으로다가 돌아가셔갖고. 그때부터 이제 엄마가 안 계신 거지. 엄마 나이가 서른아홉, 아버지가 마흔인데 6남매를 두고 돌아 가신 거야. 우리 언니가 19살, 내가 14살. 그 밑에 9살, 7살, 5살, 젖먹이 이렇게. 그러니 어떡해, 그래서 이제 중학교를 더 이상 못 다녔죠.

내가 예전부터 그랬지. 조금만 배웠으면, 조금만 더 배웠으면…. 나도 우리 엄마 안 돌아가셨으면 공부를 더 할 수 있었을 텐데. 엄마 돌아가시고 언니는 19살, 20살 먹어서 그때 한참 연애하고 시집가려고 벌써 준비할 때지. 누가 뭘 챙겨주는 사람이 있어야 나도 학교를 가는데. 할머니는 노인이라서 집안 살림하랴, 일꾼들 건사하랴 힘들고. 우리 친정아버지는 생전 논에 가서도 논 속에 한 번도 안 들어가고, 일을 하나도 몰랐어요. 그러고서 이제 뭐 한 19~20살 돼서, 그때서야 객지 생활을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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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꿈이 있었지

처음에 시골에 살다가 친척들이 서울에 있고 하니까, 서울로 가게 됐지. 그때 학교도 다니다 그만두고, 시골에 계속 있기는 싫고, 내 생각에는 서울로 나가서 내가 조금이라도 벌어서 동생들 뭐라도 사 줘야겠다, 그런 마음으로다가 갔던 거야. 그 당시에 우리 할아버지가 이문동에 제과점을 하셨어요. 그래서 내가 할아버지 도와드리면서 양재학원이라는 데 광고를 보고, 알아봐서 가서 기술을 배우고 그랬었지. 양재학원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서울 용두동에 있었어요.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학원이었어요. 양재학원에서 재단 기술을 배웠는데, 지금 생각나는 건 보레로(볼레로)라고 하는 옷을 만드는 걸 배웠었어요. 엄청 복잡했어. 그걸 조금 배우다가, 한 2년 배웠나, 그 정도 배우다가 말았지 뭐.

그러고 버스 안내양 일도 잠깐 했었지. 시골 살다가 서울 와서 뭐 할 게 없으니까, 한 2년 정도 안내양을 했어요. 근데 그때 일을 하는 게

285쪽

재밌더라고. 문화촌 가는 버스, 지금은 333번인데, 그때는 삼십몇 번인가 그랬어요. 문화촌이 부촌이니까, 사람들이 쫙 줄을 서서 버스를 타고 그랬죠.

지금은 옷들이 질이 좋아서 구겨지는 옷이 별로 없잖아요. 그런데 그때는 다 대려서(다려서) 입는데 안내양은 절대 앉아있지 못하게 했어요. 계속 서 있어야 돼. 그래서 버스 한 바퀴 돌고 사무실에 버스요금을 입금하러 들어가면은, 일단 뒤돌아보게 하고 옷부터 보는 거야. 옷이 구겨져 있으면 앉아있었다는 티가 나니까.

아무튼 그래도 재미있었고, 그때는 내가 이렇게 성격이 명랑하지가 않고 말수가 적었어. 그래서 사람들이 날 보고 별명을 할머니라고 불렀어. 사실은 그때도 꿈이 하나 있었어. 동네 버스 안내양을 하다가 고속버스 안내양도 해야 되겠다는 꿈. 그리고 또 고속버스 안내양을 하다가 나이가 차면 고속버스 기사를 한 번 해봐야 되겠다 생각을 했지. 그때는 여자 버스 기사라는 건 꿈도 못 꿨어. 근데도 그때 나는 고속버스 안내양을 하다가 고속버스 기사를 해봐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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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에 발을 내딛다

우리가 신혼 때는 안양시에 살았었어요. 그때 우리 집 양반이 건설회사 총무였어. 지금은 무슨 상무 이렇게 부르는데, 옛날에는 총무라고 불렀어요. 거기서 살다가 큰집의 형님 이 여기 철원에

1)

살았었어요. 내가 본적이 가평이잖아. 근데 이 양반도 결혼해서 보니까 가평군 사람이었어. 남편이 자기 형님이 여기(철원) 살기도 하고, 철원이 풀도 많고 하니까 목장을 하겠다, 이렇게 마음을 먹은 거지. 남편이 항상 목장을 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던 거예요. 안양에서 바쁘게 직장 생활하면서도 시간만 있으면 남의 목장에 가서 구경하고 그러더라고. 철원 올 때 안양에서 사람들이 우리가 좋다고, 떠나지 말라고 그랬어요. 그때 우리가 안양 관양동에 살았는데, 거기가 대한전선 들어오고 한창 발전할 때였어요. 복덕방 하는 이가 “이제 여기도 개발이 되니까 사모님은 관양중학교 앞에서 문방구하고, 총무님은 나랑 복덕방 하자. 가지 마.” 얼마나 그랬다고. 근데도 남편은

1) (기록자 해설) 남편의 형을 지칭함.

287쪽

아, 자기는 가서 목장을 해야 된대. 그때는 새댁 때니까 뭘 알겠어요? 그냥 남편이 하자는 대로 했지.

그렇게 1977년도에 철원에 이사를 왔죠. 그때 젖소 6마리를 큰 차에다 사 가지고 들어왔어요. 그때 살림살이가 뭐 있나? 차에 살림 하나 싣고, 그 옆에다가 송아지 6마리 싣고 왔죠. 그리고 철원 들어와서, 우리가 벽돌을 직접 찍어서 우사를 짓고, 우사에다가 방 한 칸 들여갖고 처음에 큰집에서 조금 살았지. 젖소 키울 때 고생을 많이 했어요. 아유, 지금은 전부 외국에서 풀도 갖다 먹이고 이렇게 하지. 그때는 전부 산에서 갖다가 풀을 직접 베어서 소들한테 먹였어요. 아침 4시에 일어나서 착유하고, 그때는 기계도 없으니 손으로 다 했어요. 그래서 지금 손이 이렇게 넓적하잖아요. 하도 고생을 해서. 젊었을 때 내 손이 무척 예뻤었어. 아주 주름이 하나도 없었었어. 사람들이 손을 무척 탐냈지. 근데 지금 손이 이게 관절이 다 망가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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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가쁘게 살아온 나날들

처음에 젖소 6마리로 목장을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27마리까지도 키웠어요. 소 이름은 맹순이들, 이렇게 짓고. 내가 우유 짜놓으면 남편이 우유 짠 거를 싣고 나가고, 나는 우유 짜고 소먹이 주고. 그리고 우리 집 양반이 부대에서 짬밥 갖다가 소들 먹이고. 그렇게 1977 년도부터 1990년까지 목장을 계속했어요. 젖소 키울 적에 이렇게 쪼그리고 앉아서 젖 짜고 하니까 내 다리도 고생을 많이 했죠.

그리고 옥수수를 8일 동안 심기도 했어요. ‘안골’이라고 있었는데, 거기다가 옥수수를 심었어요. 소 두 마리를 데리고 8일 동안 옥수수를 심었으니 그게 땅이 얼마나 넓으냐고. 그 밭을 동네 사람 구해서 김매면은, 내가 사람들 다 밥해서 갖다 주고. 그리고 그 사람들 김맬 때 내가 앞에 다니면서 땅에 비료 줘야지. 그 당시에 우리 할아버지 (남편)는 축협 이사(理事) 일한다고 나갔다가 밤에나 늦게 돌아왔어. 나는 시간 되면 소들 밥 주고. 또 저녁에 가서 소젖 짜고, 아주 바빴어.

289쪽

그 당시엔 진짜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 지금 같으면 너무 힘들어서 못 살았죠.

<맹순이들(소)과 최광숙 어르신(1984.09)>

그래도 생각해보면, ‘내가 생각해도 잘못 살았다.’ 그런 생각은 안 들어요. 내가 바쁘고 힘드니까 우리 애들한테 잘 못 해준 거, 그것만 생각나지. 우리 애들 제대로 못 챙겨준 거. 특히 우리 딸한테 많이 미안하지. 그때는 옛날이니까 불을 때다가 밥을 해 먹었어. 그러면 이제 밥만 해놓고, 딸한테 “네가 도시락 싸 가지고 가.” 하면은, 딸이 혼자 도시락 싸 가지고 학교를 갔지. 갔다 오면은 딸한테 우유통을 닦으라고 시켰는데, 닦은 게 내 마음에 안 들 때가 있잖아. 그때 내가 딸한테 “ 다시 닦아라.” 이렇게 말로 좋게 하면 얼마나 좋아. 근데 내 스트레스가 워낙 크니까 애들한테 화가 간 거야. 다시 닦으라고 흙에다가 우유통을 디굴디굴(데굴데굴) 굴렸어. 그렇게 내가 애들을 잡은 거야. 아유, 우리 딸도 고생 무척 많이 했어.

290쪽

목장 그만두고 나서는, 사람도 둬 보고 다 해봐도 너무 일이 힘드니까, 소 말고 돼지도 키워보고 양계 군납도 해보고 했어요. 근데 1991년 5 월 1일에 닭 3,500마리가 떼죽음을 당했어요. 왜 죽었냐면 이 밑으로 공기가 통하는 구멍이 있는데, 밖에 바람이 부니까 밖에서 구멍을 비닐이 덮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공기가 안 통하니까 닭들이 질식해서 죽고, 사룟값만 나갔지.

<돼지 사진(1991.04)>

<닭 폐사 사진(1991.05)>

그리고 96년도에 철원에 수해가 크게 났었잖아요. 그때 우리 집이 개울 옆이라 물에 떠내려가 죽을 뻔했지. 하마터면 다 떠내려갈 뻔했어. 동네 길을 건너가는데 물이 차는 거야. 그때 한 새벽 5시, 6시쯤 됐는데, 모르고 계속 잤으면 큰일 날 뻔했지. 우리 동네 개울에서 물이 넘쳐서 버스 타는 길까지 물이 찼었으니까. 한 허벅지까지 물이 찼었어. 그리고 우리 동네에 어떤 다리가 있는데, 그 다리랑 둑이 다 무너져서 논이 다 허허벌판이 됐었어요. 하여튼 여지껏 난 수해 중에 그때가 피해가 제일 심했다고 사람들이 그랬었어. 96년도에 내가 썼던 가계부를 보면 거기 며칟날 그랬다는 게 자세히 나와 있지. 그 개울

옆에 열두 집이 쫙 있는데 집마다 물이 다 찼었어요.

292쪽

사람을 살리는 손

우리 할아버지(남편)가 2012년도에 뇌출혈로 쓰러져서 성모병원에서 한 달 동안 있다가 뇌를 수술했어. 나는 수술 끝나면 회복이 잘 될 줄 알았지. 그런데 수술 후에도 병원을 또 가야 된대. 어느 병원에 가야 하냐고 물어보니까 재활병원에 가야 된다는 거야. 그래갖고 의정부 호원동이라고 거기서 1년 8개월 동안을 재활치료를 하고 있었어요. 처음엔 말도 못 하고 사람도 몰라보고 그랬는데 거기서 운동하고 해서 간신히 좀 움직이고. 자꾸 걷기 시작했더니 걸어지더라고. 그래서 1년 8개월 만에 퇴원해서 겨우 집에 왔는데 처음엔 사람도 몰라보고 말도 잘 못하고, 말이 어눌했어요. 그래서 언어 치료를 하면서 성모병원에 가서 다섯 번이나 검사를 더 받았어요. 그래도 낫지를 않는 거야. 콧줄로 대체식을 먹을 정도였으니까. 밥을 못 먹는 거예요. 콧줄도 100 번은 더 뺐다 꼈다 했을 거야. 여기 코에다 끼어 놓으니 남편이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혼자 자꾸 쓱 빼고, 내가 이렇게 끼어 놓고 돌아앉으면 다시 쓱 빼고. 그래서 오죽하면 내가 남편 손까지 묶어놔 봤어요. 콧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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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못 빼게 하려고. 근데도 안 돼. 남편도 자기 정신이 없으니까, 답답하니 그냥 빼는 거야.

퇴원하고 계속 치료를 받으니까 많이 나아지셔서 말도 제대로 하고 걸음도 지팽이(지팡이) 짚고 다니고 그랬는데, 그때 노인들 다니는 센터에 남편도 계속 다녔을 때예요. 아침에 갔다 저녁에 모셔 오고 하는 센터가 있어요. 거기에 다니다가 남편이 2019년도에 코로나에 걸렸어요. 군에서 센터로 코로나 검사를 나온다고 그러더니, 이튿날 결과가 나온다고 해서 기다렸죠. 아주 초조해 죽겠다, 하면서. 처음 에는 코로나라는 것도 뭔지 몰랐지. 그 이튿날 연락이 오더니 할아버지 (남편)가 코로나 걸렸으니까 병원에 입원하셔야 된대. 그래서 병원을 어디로 가요? 그랬더니 자기들이 다 할 테니까 입원 준비를 하고 계시라고 하더라고. 그런데 남편이랑 나랑 같이 살고 하니까, 나까지 코로나에 걸린 거지.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는, 식사 시간 되면 바깥에서 “밥 왔어요.” 하고 알려줘요. 문을 열어서 보면 이런 비닐 봉다리(봉지)에다가 밥을 싸서 이름도 딱딱 붙여서 갖다 놓은 게 있어요. 그걸 문 열고 꺼내다 먹었어요. 그리고 하루에 두 번씩 혈압 재고. 혈압 재고 이런 것도 다 우리 손으로 재서 작성해야 돼요. 간호사가 전화하면 잰 수치를 불러주고. 간호사가 병실에 못 들어오니까. 하루에 두 번씩 그렇게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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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보통 코로나는 일주일이면 퇴원하는데, 우리 할아버지(남편)가 폐렴에 걸렸다고 퇴원을 못 했대. 그래서 춘천 한림대 성심병원에 입원해 계신다는 거야. 남편이랑 통화를 해야 하는데, 내가 그때 핸드폰이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 애들이 이제 핸드폰을 임시로 사다 줘서 겨우 전화를 했어요. 근데 남편이 다른 말은 하나도 못 해. 남편한테 “나 누구야?” 물어보면 어눌한 말투로 “마누라. 광숙이.” 이 말 정도만 해. 그리고 딴 사람이 전화를 해도 말이 제대로 안 통하는 거야. 사람이 아주 크게 아픈 거야.

그래갖고 나는 입원하고 11일 만에 퇴원했는데, 우리 할아버지 (남편)는 병원에 더 있다가 퇴원을 했어요. 퇴원해서 집에 왔는데, 사람이 시염(수염)도 못 깎았지. 이 시염(수염)이 여기까지 있는 게 바짝 말라갖고. 보건소에서 데리고 왔는데, 보건소 직원이 할아버지 (남편)를 이렇게 끌어안고서는 부축해서 같이 내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부축을 해도 남편 발이 떨어지지 않는 거야. 원체 사람이 기운이 쪽 빠져서. 그래서 보건소 직원이 겨우 발 하나, 나도 옆에서 발 하나 이렇게 옮기면서 간신히 집에 왔는데, 와서 보니까 입안이 다 헐었어. 뭐가 제일 하고 싶냐고 물었더니 이거(수염) 좀 어떻게 해보래. 그래서 거즈에 소독약을 묻혀서 그때부터 내가 치료를 다 했죠. 며칠을 내가 그렇게 간호하고서는 사흘 만인가, 닷새만인가 그때 겨우 미음을 한 숟갈 먹더라고. 그전까진 밥도 못 먹었어. 그다음서부터 (병세가) 점점 나아졌지. 근데 내가 면도를 해봤나? 할 줄을 모르니까 남편을 눕혀놓고 가위로 하루는 이쪽 깎고, 또 다음 날은 저쪽 깎고. 그렇게 한 보름 되니까 사람이 조금 나아지더라고. 일어나 앉아서 내가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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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걸면 대답도 하고 그래.

그다음서부터 코로나가 해제된 후로 사람들도 왔다 갔다 하고, 애들도 왔다 갔다 할 수 있게 됐죠. 근데 그때 여파로다가 남편이 건강이 많이 나빠졌지. 기력이 아주 다 빠졌지. 그래도 사람들이, 내가 이것저것 해먹이고 그렇게 하니까 그 양반이 그렇게 회복한 거라고, 딴 사람 같으면 벌써 무슨 일 났다 그러더라고. 이것저것 좋은 건 다 해먹이고 그렇게 하니까 회복이 된 거라고. 우리 시누가 둘인데 아주 날 보고 의사 선생님, 의사 선생님이다, 그래. 우리 남편이 나 덕분에 살아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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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마음으로 이끌어 나가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 봉사 생활에 손발을 들여놓게 됐어요. 처음에 89 년도에 부녀회장을 하게 됐죠. 동네에서 젊은 사람들이 부녀회장을 맡는데, 날 보고 좀 해보라고 사람들이 그런 거야. 나도 소질 없다, 그랬더니 한번 해보라고 계속 설득하더라고. 그래서 89년도 12월부터 부녀회장을 했어요. 우리 집 양반은 그때부터 개도 기르기 시작했지. 개도 한 500마리 됐었어요. 개를 키우면서 동시에 우리 남편이 축협 이사(理事)를 한 10년 동안 했지. 나중에 나한테 남편이 말을 하더라고. “내가 이렇게 10년 동안 마음대로 살았으니까 당신도 이제 당신이 하고 싶은 것 해라.” 그래갖고 내가 교육을 가거나 어딜 가거나 해도, 남편이 가지 말라거나 왜 가냐는 이런 소리를 한 번도 안 했어요. 그렇게 남편이 밀어줬어요. 내가 나갔다가 늦게 와도 아무 소리 안 하고. 그 대신 하룻밤 교육이나 수련회 같은 데, 무슨 전국대회 같은 곳을 가거나, 제주도까지 가고 그럴 때는 전전날부터 준비를 다 해놔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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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랬냐면 사람들이 나더러 “집구석은 저렇게 해놓고 나다닌다.”라고 할까 봐 신경을 썼죠. 항상 아주 철저하게 집안일을 다 해놓고 갔어요. 그래야 남한테 그런 소리는 안 듣겠지, 생각했어.

그렇게 하면서 동네 부녀회장으로 10년을 했는데, 부녀회장 하면서 면 총무도 6년 동안 겸직을 했어요. 그리고 면 총무를 6년 하고 나서, 면회장도 3년을 했죠. 3년 동안 면회장 하면서도 군 부회장까지 하고, 군 새마을 회의 같은 것도 다녀오고. 이런 걸 다 하면서 아주 재미있었어요. 봉사 생활이 참 재미있었어. 그러고나서 그때 내가 생활개선회에도 임원으로 있었는데, 거기서 생활개선회 회장을 6년을 하게 됐어요. 그러고 생활개선회 회장을 6년을 하고 물려줬는데, 그다음에 또 바르게 살기 위원회에서 “ 손 놓고 있으면 안 된다, 바르게살기 회장을 해라. ” 라고 하길래 바르게살기 위원회 회장도 5년을 했어요. 그때는 진짜 열심히 했어요. 청아리라고 목장 많은 데가 있었는데, 목장마다 들리면서 그 냄새 나는 데 가서, 비닐을 다 모아다가 기금을 만들고 그랬어요. 그렇게 하면서 제주도까지

<바르게살기 중앙회장 훈장과 표창장(2007)>

전국대회도 갔었고, 결국은 나한테 훈장을 주더라고요. 봉사 많이 했다고 훈장을 받았어요. 그때가 아마 2007년인가 됐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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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살아가는 기쁨

바르게살기 운동 활동할 때 기억에 남는 게 있어요. 저기 내대리에 양로원 같은 곳이 있었어요.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데가 있었는데, 거기에 목욕 봉사를 갔어요. 근데 거기 있는 어떤 양반이 당최 목욕을 안 한대요. 누가 와서 목욕을 도와주려고 해도 안 한대요. 그러니까 기관에서 날 보고, 한번 저분 좀 설득해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가서 왜 목욕을 안 하시느냐 물어봤더니 “나 여기 주머니에 돈이 있는데.” 그러더라고. 씻으러 가면 이 돈을 누가 훔쳐 간다고 생각을 하신 거야. 그래서 내가 “그러면 그 돈을 내가 맡아서 내 주머니에다 넣어놨다가, 목욕하신 다음에 내가 도로 드리면 안 될까? 그리고 목욕하시고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같이 갈까?” 그랬더니 목욕하겠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갖고 설득해서 목욕을 했어요. 그다음에 이제 날 보고 나가자는 거예요. 내가 돈을 돌려드리니까,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재요. 그런데 거기서 뭐 맛있는 거 먹을 데가 있나. “나랑 산책이나 한번 해요.” 그러고 팔짱 끼고서는 한 바퀴 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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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더니 거기 시설 부원장님이 놀라면서, “아니, 그렇게 목욕을 안 하는 분인데 어떻게 설득하셨어요?” 그러니까 되게 기분이 좋더 라고요. 그러면서 날 보고 그 양반이 “또 와, 또 와.” 그래서 “아유, 알았어. 내가 또 올게. 내가 언제 또 올게.” 하면서 손가락 걸고 약속까지 했지.

300쪽

음식으로 나누는 정(情)

요즘은 다방이 없잖아요. 옛날에 여기 다방이 4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다 없어졌지. 생각나는 이름은 명다방, 종점다방 그런 것들이 있었어요. 그때 부녀회에서 해마다 다방을 하나 빌려서 일일 찻집을 했어요. 일일 찻집을 하면 관계 기관 단체장들이 와서 다 도와주고 그랬지. 음식은 부녀회장들이 한 가지씩 해서 면사무소 직원들하고 같이 나누어 먹고 그랬었어. 하여튼 참 재미있었어. 고참들은 안에서 손님들한테 대접하고, 그리고 배달은 신참들이 했지, 한복을 입고. 비가 와도 우산을 써가면서 했어요. 그때 참 재밌었는데.

그리고 디저트 같은 것도 사 먹지 않고 우리가 감자떡을 손수 감자 가루로 해서 빚어갖고, 그 자리에서 쪄서 내놓고 했어요. 인기가 좋았어. 감자떡 반죽은 뜨거운 물로 해야 돼. 펄펄펄 끓는 물로. 처음에는 뜨거우니까, 주걱으로 반죽을 한 다음 어느 정도 식으면 그다음에 일회용 장갑 같은 걸 끼고 만들고. 팥은 통팥으로 해도 되는

301쪽

데, 일단은 팥을 삶아서 쪄야 돼. 단팥을 넣고 쪄서 반죽에 넣고 송편 빚듯이 빚은 다음에 막 누르면 돼. 사람들 사이에선 우스갯소리로 ‘ 감자떡 빚듯 했네.’라는 말도 있어. 그만큼 만들기 쉬웠지.

그리고 우리만 하는 게 아니고 마을 임원들, 말하자면 부회장, 총무 이런 사람들 다 오라 그래서 그 사람들이 거들어주고 했어요. 그렇게 며칠 동안 우리가 준비를 했지. 다방 티켓도 준비하고. 지금은 컴퓨터가 있지만, 그 당시에는 컴퓨터가 없었으니 면사무소에서 티켓을 인쇄해오면 티켓을 파는 거야. 차 마시러 오라고. 그러면 그게 운영 기금이 되는 거지. 그러면 그 사람들이 와서 차만 마시고 가는 게 아니라, 기부도 하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그때 수익이 한 150~200만 원, 어떨 때는 200만 원 넘을 때도 있고 그랬어요. 그럼 수익의 3분의 2는 면사무소에다가 불우이웃 돕기 기금으로 내놓는 거야. 나머지는 재룟값이지. 그래도 해마다 ‘아, 또 하자고, 또 하자고.’ 이렇게 사람들이 말하고 그랬지. 하기 싫다고 그러는 사람이 없었어. 참 재미있었어요.

옛날에 위수지역 해제하기 전에는 동네에 사람이 많았었어요. 근데 위수지역이 해제되고, 점점 해가 갈수록 사람이 서서히 줄었지. 동네가 발전하려면 사람이 자꾸 모여야 돼. 사람이 모여야 되고, 뭐가 생겨야 되고 그렇지. 지금은 여기 있던 농협도 다른 데로 이전하고, 우체국도 문을 닫아서 아쉬워.

302쪽

예전에 태봉제 를 하면, 각 읍면에서 돌아가면서 밥을 했어요. 우리

1)

면에서도 한 번 했는데 그때 뭐가 인기를 끌었냐면 ‘총떡’ 이라는 게 있었어요. 총떡은 메밀로 만드는 거야. 철원 모든 읍면이 다 모이는데, 그날은 우리 근남면만 다 만드는 거야. 너무 바빠갖고 그날은 밥도 못 먹었어. 그거 해낸다고 동네 친한 할머니들을 다 모시고 갔지. 낭중에(나중에) 맛있는 거 사드리고. 이거(총떡) 좀 빨리빨리 부쳐 달라고 사람들이 줄들을 서서 무지 바빴지. 힘들어도 그땐 진짜 재밌었어. 총떡 만들 때는 평창 메밀가루를 물에 풀어서 넣고, 양념을 뭘 하냐면은, 무를 썰어갖고서는 쪄. 무를 찌면 물이 생기니까는 물은 안 부어도 돼. 살짝만 쪄야 돼. 아주 살짝만. 멀렁멀렁하게 하면 안 되고. 그리고 물이 생겼으니까 식혀갖고 물기를 꼭 짠 다음에, 거기다가 돼지고기를 볶아 넣고 색색 가지 야채를 다져서 넣고서 빨갛게 무쳐요. 그리고 후라이팬에 동그랗게 전을 부치고, 소를 넣은 다음 김밥 싸듯이 말아. 그렇게 말아갖고서 쫙 썰어서 놔줘. 식으면 쫀득쫀득해. 그게 메밀전병이야. 그걸 ‘총떡’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한탄강댐 (건설) 반대 할 적에는, 그때 읍면별로 한탄강에 가서

2)

텐트 치고 할 때도, 당시 부면장님이 날 보고 “마현리 회장님, 감자떡은 언제 하는 거야?”하고 물어보고 그랬어요. 그래서 그때 감자떡하고 손두부를 해서 가지고 갔지. 이게 읍면별로 지도자들하고 회장들하고 가서 밤을 새는 거야. 말하자면 궐기 대회 하는 거지. 릴레이식으로 읍면별로 돌아가면서 하룻밤을 자고 봉사를 하는데, 기관 단체장들이 다 와서 위로해 주고 그러면, 우리가 음식을 해서 다 대접하고. 그 당시는 진짜 너무 재밌었어.

1) 10월 21일 군민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10월 초에 개최되는 철원 지역의 문화행사로, 향토문화의 계승, 발전과 풍년 농사를 자축하는 뜻을 담고 있다. (출처: 철원군 문화관광 홈페이지)

303쪽

장수식당이라고, 경로당마다 돌아다니면서 어르신들 식사 챙겨드리는 봉사도 했어요. 육단1리 경로당에서 장수식당을 운영했는데, 지역이 먼 사람들은 못 오잖아요. 그러니까 육단1리하고 육단2리만 노인들이 오는 거야. 그래서 우리가 철원군에다가 “우리가 힘이 들어도 10개 리를 다 다니면서 봉사하겠다.”하고 말을 했지. 그래서 우리가 밥하는 도구를 다 싸가지고 다니면서 봉사활동을 했어요. 지금은 경로당마다 밥 해 먹는 도구가 다 있지만 그때는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재료며 도구를 다 갖고 다니면서 10개 지역을 다 돌아다니면서 해드린 거예요. 노인분들이 좋아하시는 순 신토불이 음식을 해서 드리니까

<장수식당 활동사진(1992)>

아주 좋아하셨지. 그리고 우리 부녀회에서 독거노인분들 칠순 잔치도 해 드렸어요. 옷까지 다 해드리고.

<새마을부녀회 독거노인 칠순 잔치(1997. 03)>

또 기억에 남는 일이 참 많죠. 부녀회 사람들이랑 우리 집에서 김장해서 근남면 독거노인들한테 나눠드리고, 추석 때하고 명절 때 떡도 해드리고. 지금은 LA 갈비가 흔하지만 그땐 LA 갈비가 뭔지 모를

2) 1999년부터 2009년까지 강원도 철원 주민들이 주축이 되어 추진하였던 한탄강댐 건설 반대 운동은 강원도 철원, 경기도 포천, 연천 주민들이 한탄강의 자연 䞻역사䞻문화를 보호하고 주민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 으로 나선 운동이었다.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304쪽

때였는데, 포천에 일동면에 LA 갈비 공장이 있다는 거야. 그래서 거길 찾아가서 LA 갈비를 독거노인분들께 다 갖다 드리고. 떡도 면사무소에 가서 포장을 다 해서 집집마다 돌리고, 봉사를 아주 많이 했어요.

<부녀회 김장봉사(1993.11)>

<면부녀회 김장봉사(1994.11)>

그리고 승리부대에 위문 가서 떡국도 하고 만두도 빚어서 가고 그랬어요. 군대 초소마다 몇 명씩 인원을 나눠서 밥도 해주고. 그렇게

몇 년 동안 음식을 만들며 봉사를 했지요.

<부녀회 승리부대 방문(1992.01)>

306쪽

기록하고 그리는 게 좋아

가계부를 84년도부터 계속 쓰고 있는데, 만약에 어제 잊어버리고 기록을 안 했잖아요? 그러면은 깜빡하고 며칠 못 쓰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릴 때도 있어요. 가계부를 나중에 쓰려면 기억이 안 나요. 젊어서는 기억을 다 했는데. 기억이 안 나면은 어저께 것부터 순서를 거꾸로 들어가는 거야. 어저께부터 내가 뭐 했다, 뭐 했다 되짚어보면 다 차츰 생각이 나요. 그러니까 나 부녀회 할 적에 회비를 냈는지 기억이 안 나는 사람이 있으면, “가만히 있어 봐. 내가 가계부 보면 알아.” 그러면서 이제 가계부를 꺼내서 봐요. 그러면 해결이 딱 되니까 그게 좋더라고요. 너무 오래된 일도 가계부를 딱 펼쳐보면은 아니까.

그러니까 알토란 도 보면서 종이 연습지에다 거기서 부르는 대로

1)

쓰는 거야. 막 써서 이렇게 모아놨다가 한가할 때 정리하는데, 나중엔

1) 요리법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

307쪽

찾기가 힘들 것 같더라고. 그래서 ‘강된장’ 하면 거기다 내가 이렇게 표시해 놨지. 어느 프로그램인지, 요리사 이름은 누군지, 레시피 적고. 다 정리를 해놨어요. 그래서 몇 페이지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까지 다 표시해놓으니까는 탁 찾으면 몇 페이지에 나와요. 그렇게 기록하는 게 재미있어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가계부(1984)>

<2021년 요리법 기록장>

<1984년의 기록>

<지금까지 써오신 기록장들>

308쪽

그리고 작년 6월부터 그림도 배워서 그리고 있어요. 매주 금요일마다 선생님이 오셔서 가르쳐주는데, 아주 재밌어요. 지금 한 300장 정도 그려놨는데, 매일 그리진 않지만 어떤 때는 하루에 몇 장씩 그릴 때도 있어. 우리 딸이랑 며느리가 도화지도 한 240장짜리 사다 주고, 물감도 사다 주고. 남편 다니는 노인센터 센터장님도 스케치북 다섯 권 가져다주지. 딸도 응원해주고 하니까 그림 그리는 게 좋아. 내가 딸한테

집에 걸어놓으라고 그림 선물도 주고 하지.

309쪽

<최광숙 어르신이 그린 꽃>

310쪽

요리해서 나눠주는 게 재밌고 좋아

지금 취미는 장아찌랑 효소를 담아서 저장고에 보관해놓는 거예요. 장아찌가 가짓수로는 한 33가지인가 34가지가 있고, 병 개수로는 138 개던가 그래. 하여튼 고구마 줄거리(줄기), 질갱이(질경이), 머우대 (머위대) 다 담그지. 사람들이 나한테 이것저것 갖다주면서 장아찌 담그는 데 쓰라고 해. 나는 장아찌 담그는 게 그렇게 재밌어요. 담아서 사람들 주기도 하고. 올해도 벌써 미나리 효소 해놓고, 깻잎장아찌 담가놓고, 양파장아찌 해놓고, 아삭이고추 피클 해놓고 그랬지. 우리 며느리하고 딸은 엄마 힘든데 그만하라고 그러는데, 만드는 게 점점 힘이 들긴 해도 아직까지는 재밌어요. 싫거나 귀찮거나 그러지 않고, ‘ 힘이 들어도 잘 담가야지.’ 생각하면 힘이 나고 재밌어. 음식을 하면은 ‘아, 이건 누굴 줘야지, 이건 누굴 줘야겠다.’ 생각하면서 그릇을 갖다 쫙 놓고 나누기를 시작하는 거야. 그렇게 사람들한테 나누어주는 게 재밌고 좋아.

311쪽

<저장고의 장아찌, 효소 사진(2023.08)>

요리도 관심이 아주 많죠. 참치 양념 된장이라고, 된장이랑 참치 3 캔이랑 양파를 막 볶아서 만드는 게 있어요. 그걸 만들어서 사람들한테 줬더니, 다들 너무 맛있다고 그래서 내가 몇 집이나 해줬어. 내가 적어 놓은 레시피 중 해본 게 한 30~40가지 될 거예요. 웬만한 거는 내가 그전에 많이 만들어봤어. 백김치는 그 알토란에서 배운 게 아니고, 어디서 배웠는지도 모르겠어. 근데 그 백김치를 우리 며느리 친정 엄마가 먹어보더니, 이름을 지었는데 ‘궁궐김치’라고 이름을 짓더라고. 백김치가 너무 맛있다고.

그거랑 또 양배추 보쌈김치도 잘 만들어요. 옛날에 요리대회 나가서 양배추 보쌈김치 만들고 그랬어요.

312쪽

<요리대회에 출품한 양배추 보쌈김치 사진>

내가 누구 생일 때면 큰 통으로다가 6통씩 양배추 보쌈김치를 해드리거든. 우리 며느리 친정아버지 환갑 때 식당을 빌려서 잔치를 했는데, 식당에서도 난리가 났대요. 이게 도대체 무슨 김치냐고, 너무 맛있다고. 근데 그건 알토란에서 배운 게 아니거든. 어디서 배웠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처음에는 그냥 만들어보다가 자꾸자꾸 만들어 보니까 잘 만들게 됐지.

양배추 보쌈김치 만드는 과정은, 일단 양배추 꼭지를 파요. 그리고 판 데에 소금을 다 집어넣어. 만약에 6통을 절인다고 하면, 양은 스댕 다라(스테인레스 대야)에다가 다 앉혀놔요. 그다음에 양배추가 뜨지 않게 도마로 콱 지지르고(누르고). 그다음에 소금물을 풀어서 양배추가 잠기도록 부어. 그리고 하루 종일 재우고 나면은 잎이 하나씩 하나씩 떨어져. 잎 떼는 과정이 제일 힘들어. 과도로 끝에 이파리 쪽에서부터 떼어내면 잎이 빤빤해져. 그렇게 이틀 절여놓고서, 양배추를 싹 씻어서

313쪽

착착 엎어서 놔요. 그다음에 양념을 넣는데 무도 썰어 넣고 별것 다 넣지. 대추, 은행, 밤, 잣 같은 걸 다 넣는 거야. 그래갖고 전병 싸는 식으로 싸는 거야. 그리고 양배추를 쌀 때 거기다가 뭘 넣냐 하면 오이를 가늘게 썰어서 절여갖고 가운데다가 박아. 그러면 빨간 양념 속에 오이가 파랗게 보이잖아요. 그렇게 하면 아삭아삭하는 맛도 있고 좋아요. 명절 때, 추석 때, 이럴 때는 동네 아줌마들이 나도 좀 만들어 달라 그래. 그래갖고 많이 만들어줬어요. 우리 막내가 지금 47살인데, 그 애 유치원 다닐 때부터 계속 만든 거야. 애들 소풍 갈 때, 운동회할 때 만들어서 맨날 챙겨줬지. 소풍 갈 때면 벌써 사람들이 “용순 엄마, 양배추김치 해왔어요?” 하면서 너무 좋아하더라고.

내가 배추 물김치도 잘 만들어. 처음에 물김치는 무로만 만든다고 생각했지. 배추로는 하지 않았는데, ‘배추로 물김치를 한번 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우선 배추를 절여야 하는데, 이파리랑 줄기랑 같이 절이면 안 돼. 먼저 배추를 다 다듬어서 깨끗이 씻어갖고 차곡차곡 다라(대야)에 세워요. 큰 다라에다 세우면 밑에는 줄기만 쫙 있잖아. 그럼 이제 줄기 높이만큼 소금물을 부어. 그게 나중에 저녁때가 되면 다 절궈져(절여져). 그리고 무도 납작하게 썰어갖고, 소금하고 감미를 넣어. 감미라고 단 조미료가 있어. 설탕을 넣으면 김치가 끈끈해져서 안 돼. 그렇게 버무려갖고 놔둬. 그리고 무는 씻지 말고, 배추만 한 번 씻은 다음에 같이 버무리는 거야. 국물은 양파를 갈아서 면보 에다 짜서 넣고. 더 신경 써서 하려면, 안 넣어도 되지만 과일을

1)

갈아서 면보에 짜서 넣어. 배추를 씻어서 무하고 같이 다라에 놨잖아. 그럼 그 다라 위에다가 면보를 짜는 거야. 그럼 국물이 다 거기에 고이

1) 면포의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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잖아. 다 버무려갖고 한 20분 정도 있다가 국물을 먹어보면 무척 맛있어. 오죽하면 우리 딸이, “엄마, 물김치 특허 내요.” 그러더라고. 하여튼 맛본 사람들은 다른 데서 물김치 먹으면 내가 만든 것만 못하다고 다들 그래. 특히 김장배추로 하면 더 맛있어요. 내가 지금 아쉬운 게 뭐냐 하면, 한식 자격증을 못 딴 거야. 작년 겨울에 한식 자격증을 따려고 했는데, 못 땄어. 올겨울 농한기에는 내가 꼭 따보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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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하고 찬란했던 인생을 돌아보며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내 인생 살아온 이야기를 해보니까 영광이죠. 내가 맨날, “내가 좀 더 배웠으면 책을 10권은 냈다.”라고 말했거든. 누가 나한테 내 인생을 물어보고, 이렇게 신경 써준 적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영광이죠. 정말 영광이지. 내가 생각해도, 내가 살아온 삶을 보면 진짜 ‘나도 그냥 헛살지는 않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남들이 날 인정해주니 고맙지. 그래서 어딜 가나 사람들이 나한테 “이리 좀 와봐, 여기 놀다가 좀 얘기하고 가.” 이렇게 말해요. 여지껏 동네에서 나 싫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느낌은 못 느꼈어. 그리고 사람들이 모르는 게 있으면 용순 엄마한테 물어봐라, 그럴 때도 많아. 이 가을 되면 특히 더 해. 장아찌 어떻게 만드느냐, 뭐는 어떻게 하느냐고 사람들이 항상 물어보지.

앞으로는 더 이상 몸만 안 아프면 좋겠어요. 내가 지금 남편을 돌보고 있으니까. 노인들 몸이 올해 다르고, 내년 달라. 그런 게 이제 실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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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요. 내가 돌봐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 내 몸이 더 이상 아프지만 않으면 좋겠어.

사람이 어떻게 좋은 일만 있고 나쁜 일만 있겠어요. 좋은 일 있으면 나쁜 일도 있겠지. 그래도 살다 보니 좋은 점은, 내가 그래도 사람들한테 인정받고 산다는 거예요. 어디 가서 “저 사람 안 왔으면 좋겠어.”, 이 소리보다도 “그 사람 어디 갔는데 왜 이렇게 안 와.” 이렇게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건 좋죠. 지금도 사람들이 우리 동네 (전) 부녀회장님이 좋다고, 나를 아직도 회장님이라고 불러요.

지난달에 마을 행사를 했거든요. 행사를 하는데 거기 온 사람들이 나더러, “회장님. 우리가 모이면요, 회장님 얘기를 얼마나 많이 하는 줄 알아요?” 이러는 거야. 그래서 내가 “왜 나 숭(흉) 봤어?” 하고 물어 보니까, “아니요. 회장님이 당시에 그렇게 잘하셨다고 지금 전부들 그래요. 그 당시에 다른 회장님들도 다 잘했지만 마현리 회장님은 특별히 그렇게 잘했다고.” 그래서 내가 “아이고, 못했다는 것보다 낫네.” 그랬지. 지금도 보면 사람들이 나한테 “회장님, 역대 회장님.”하고 불러요. 내가 이렇게 봉사하고 살지 않았으면은 누가 날 보고 그래. ‘저 노인네, 저 늙은이’ 이렇게 하지. 회장님이라는 게 뭐 특별난 건 아니지만, 그렇게 불러주니 좋죠.

사람이 어떻게 장점만 있겠어요? 다 단점도 있고 그러니까, 뒤로는 숭(흉) 안 보고 욕 안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근데 내 숭(흉) 보는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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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는 이야기는 아직까지는 내 귀에는 안 들어왔어. 그러니까 ‘내가 그래도 사람답게 살았구나’, 생각을 하지. 그리고 내가 나이도 많고 그렇지마는, 지금도 실버 봉사단 같은 거, 이런 게 있으면 얼마든지 따라다니면서 봉사하면서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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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마치면서

Epilogue

이번 양지마을에서 생애구술을 기록하면서 좀 더 많은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점이 아쉬웠습니다. 다만, 이번 생애구술을 진행 하면서 느낀 점은 지역을 위해 정말 헌신하고, 누구보다 마을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몸소 보여주는 주민들이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도시 및 지역재생, 지역과 공동체에 관심이 있거나 종사하고 있는 분이라면 이 책을 읽고 사람냄새가 날 수 있는 지역을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 지, 동기부여가 됐으면 좋겠 습니다.

이야기를 마치면서 | Epilogue

324쪽

근남면 육단리에서

철원군 강원대

양지마을 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

가 만나 지역재생 일환으로 다양한 활동을 해온 마을 주민 6명을 선정하여 생애구술을 기록하였다

교육인문협력학과 BK21 교육연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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