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동 마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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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행정기관의 지원과 지역주민, 지역단체의 관심과 협력 속에서 평동 주민 자치회가 새로운 출발을 알렸습니다. 출범 이후 줄곧 저와 주민자치위원 모두는 주민자 치회로서 ‘ 역할 ’ 에 대해 깊이 고민했습니다. 그 결과 중 하나가 바로 이 책입니다.
우리 평동은 마을마다 고유의 이름이 있고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지역주민이 잘 알지 못했던 평동만의 이야기를 알게 된다면 그리고 평동이 가진 지명의 의미와 전통문화를 바로 알게 된다면 마을에 대한 애정과 자긍심이 더 커질 거라 생각합 니다. 그렇게 평동이 오랜 시간 품어온 이야기를 지키고 싶고, 더 널리 알리고 싶어 시작한 이 사업에 막중한 책임감마저 갖게 되었습니다.
마을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예전 자료를 찾고 기억을 더듬는 일은 생각보다 더뎠습니다. 하지만 그 어렵고 힘든 시간이 나에겐 어린 시절 나를 기억하고, 호기롭던 청년 시절을 되돌아보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지역 곳곳에서 묵묵히 봉사를 실천하는 선 · 후배와의 만남은 지역에 대한 애정을 더욱 깊게 만들어 줬습니다.
이 작은 책에 고향사 모든 걸 다 담을 수는 없지만, 평동에서 나고 자란 모든 이에게 그 시절 추억을 소환하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평동을 바로 알리는 계기가 되길 바라 봅니다.
주민과 함께 일궈낸 이 결실이 지역의 일꾼을 뜻하는 모든 이에게 이정표가 되고, 선배와 후배의 연결고리가 되어 정이 넘치는 평동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요즘은 혼밥, 혼술, 혼라이프 같은 신조어처럼 혼자 즐기며 살아가는 삶이 일상화되고 있습니다. 자녀 교육 혹은 직장 때문에 이사를 자주 다니다 보면 이웃과의 정을 나눌 시간이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주변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거나 웃음을 나누지 못하고 관계가 얇아지는 외로운 시대를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흔히 평동을 전통문화와 첨단산업이 공존하는 동네라고 말합니다. 나서부터 평동에서 줄곧 살아오며 마을의 전통을 기억하는 주민들도 계시고, 새로이 평동에 터전을 잡는 분들도 계십니다. 같은 공간에 살지만 함께 시간을 나누지 못하는 이들에게 평동을 친근 하게 소개하고픈 마음에서 「평동 마을이야기」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평동은 많은 역사와 전통이 있고 보석 같은 사람들의 숨겨져 있는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마을 지명의 유래를 찾아보고, 옛 모습도 담았습니다. 전통문화를 기억하고 보존하기 위해 힘쓰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살핌과 나눔의 생활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내 보았습니다.
이 책으로 평동의 과거와 현재를 잇고, 지역사회 구성원 모두가 촘촘한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더 따뜻하고 환한 마을이 되길 희망합니다.
평동 마을이야기를 발간하기까지 자료 조사는 물론 인터뷰까지 마다하지 않고 애쓰신 평동 주민자치회 위원들과 모든 관계자분께 감사인사를 전합니다.
평동 마을이야기
수원에서 인구가 가장 작은동네,평리동 48 글러브 낀 소년단 52 황구지천 오목내 56 우물 혹은 뒷말 60 05 통구모퉁이, 새터,비구재 64 동보연와,영신연와 68 궤열차 수인선이야기 72
발간사
다시 찾은 옛 땅을 만나다
평동사람들
옛이야기로 배우는 역사
전.화성시교육장 임택명 21 평동통장협의회 25통장 전갑태 24 전.주민자치위원장 송만석 27 10여년간 노숙인봉사 이희남 30
고색동 줄다리기 36 고색농협 협동조합 40 선경직물 44
CONTENTS
평리동 48 글러브를 낀 소년단 52 오목내 56 뒷말 이야기 60 통구모퉁이, 새터,비구재 64 동보연와,영신연와 68 수인선이야기 72
수원을 동서로 가로 지르는 경부선 철도의 서쪽지역 일찌기 수원의 먹거리를 책임지던 너른 벌판과 우리나라 근대화의 상징인 산업시설등이 산재하던 수원의 마지막 남은 녹색허파. 삼국시대 당성으로 향하던 길가에 작은 마을로 기록이 남아있는 오래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평동을 소개합니다. 다시찾은 오래된 땅, 고색벌
전국적으로 교동 평동등의 지명은 셀 수 없을 만큼 흔한 많은 지명이다. 그러나 결단코 고색이라는 지명은 아직까지는 전국에서 유일한, 본적이 없는 지명이다. 이 고색이라는 마을의 지명의 유래는 이 지역이 아주 오래전에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 골들이 가까이 있어 어느핸가 큰 밀물이 들이 닥쳐 주민들이 살던 마을이 사라져 버렸는 데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물이 먼 바다로 밀려가 다시 주민들이 살던 마을로 돌아 와 살게되어 마을의 이름이 옛고(古)자에 찾을 색(索)자를 써서 다시 찾은 마을로 불렀 다고 한다. 가까이 있는 야목과 소래포구와의 거리를 생각하면 합리적인 지명의 유래에 대한 설명
서수원의 보물
인듯하기도 하고 또 고색동의 유명한 진흙밭이 뻘성분의 찰진 그것이라는 사실을 생각 하면 더욱 더 고색이라는 지명이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허허벌판 가운데 우뚝 서있는 검은 연기를 뿜어내던 두개의 까마득히 높은 굴뚝
지금은 고인이 된 고색초등학교 29회 졸업생인 만화가 조창호 화백이 그린 수원의 전설 이라는 단행본에 고색동의 유명한 진흙밭을 빗대어 고색동은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나 막신 없이는 못산다는 재미있는 일화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그 유명한 고색동의 찰진 진흙을 이용해 일찌기 동보연와, 영신연와라는 벽돌공장이 세 워져 매일 수천장의 빨간벽돌을 생산해 내고 고층빌딩이 없던 당시 거대한 두 연와공장 의 굴뚝은 서수원 사람들의 삶의 현장과 희노애락의 무대가 되기도 했고 아이들에게는 더 할나위없는 놀이터와 굴뚝의 높이 만큼 큰 꿈을 꾸게 만드는 상상의 무대이기도 하였다.
그 고색동이 품은 보물같은 이야기들을 들여다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해 진다. 여전한 가을 들판의 귀뚜라미 소리와 아침 이슬 머금은 풀밭, 끊어질듯 이어지는 사람냄 새 나는 골목과 그 골목마다 숨어있는 오래된 이야기.
그래서 우리는 평동에 산다.
수원의 몇 안되는 농경문화 유산. 고색동민속줄다리기는 멀지않은 과거. 우리네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척박한 환경을 개척하며 얻은 수확물에 대한 감사와 흥겨움 마을 단위로 다양한 힘겨루기를 통해 면면히 흐르는 전투민족의 기상을 엿볼 수 있는 마을축제
한번은 장년이 또 한번은 부녀자, 그러나 마지막은 부녀자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알면서도 져주는 즐거운 주작. 고색동줄다리기
농한기 농촌의 청장년들은 할 일이 별로 없다. 그 주체할 수 없는 무료함과 에너지의 발 산처가 바로 줄다리기 같은 정월 대보름 민속놀이였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엄청나게 많은 새끼줄들을 엮어 커다란 하나의 암줄과 숫줄을 만드 는 공동체의 노동과 몇일을 지신 밟기 놀이를 통해 분위기를 업시키며 바쁜 농사일에 잠시 잊은 풍물가락을 다시 두드리는 신명과 주체 할 수 없는 흥의 한마당 그리고 성 안 팍의 다양한 풍물패들을 한 자리에 모아 서로 자웅을 겨뤄 보며 마을대항전 성격의 전투 적인 경연이 흐들어진 잔치를 벌이는 것이 고색동 민속줄다리기의 정체성이었다.
축제가 있는 마을
우리 마을은 면면히 이어진 특별한 축제가 있다.
아래층에 누가 사는지 윗집에 애가 몇인지 도통 모르고 살아가는 단절의 시대. 우리 고색동에는 아직도 정월대보름이면 온 마을이 들섞인다. 빨강 파랑 노랑의 색동문 양의 농악패가 몇날 몇일을 길놀이와 지신밟기로 마을축제의 서막을 알리고 가게마다 골목마다 돌아다니며 막걸리를 길에 뿌리며 풍년과 건강을 빌어주며 마을공동체의 건 재함을 자랑한다. 대보름 줄다리기 당일 농자천하지대본의 깃발을 앞세우고 이제는 수인전철역 고색역의 광장을 이용해 동과 서를 나누고 청년과 장년 남과 여를 나눠 곱게 단장한 신랑 신부를 줄위에 세우고 서로 얼르고 희롱하다 신랑,신부가 마침내 하나되는 그 순간. 줄다리기의 시작을 알리는 징소리가 커다랗게 퍼져나가며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온 동민들이 달려들어 풍년과 건강 그리고 국태민안의 바램을 담아 건곤일척의 힘싸움 을 벌이고 장엄한 한 바탕의 힘자랑이 끝나면 승자도 패자도 없이 하나되어 농악장단에 맞춰 너나없이 원없이 흥에 겨워 들썩이다 액운과 후회 그리고 과거를 담은 거대한 볏집 을 태우는 달집 태우기로 축제의 마지막까지 불사른다.
생동하는 주민들의 축제가 남아있는 마을에는, 신명과 흥이 넘쳐 흐른다.
수인선, 협궤열차, 사청나무, 통구모퉁이 동보연와, 영신연와, 뒷벌, 건너말, 안동네 오목내, 새동네, 중보뜰, 대보뜰 … 모든 사라져 가는것들에게는 진한 향기가 있다.
말에는 그리고 단어에는 생명이 있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말들을 대할때면 아련한 아픔이 함께한다. 한때는 우리와 함께 했던 그러나 이제는 없어져 버린 우리 마음속 빈자리가 생각나서 일지도 모르겠다.
미칠듯이 느린 그리고 말도 안되게 좁은 수인선 협궤열차는 한때 고색동 주민들에게는 시간을 알려주는 자명종이자 무상으로 이용 가능한 교통수단 혹은 철부지 아이들에게 는 더 없이 훌륭한 놀이터 였다.
지금은 벚꽃명소가 된 고색동과 오목천동을 구분하는 황구지천을 가로지르는 100칸철 교가 있었다. 누구도 정확하게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모두 100칸 다리라고 부르 는 그 철교는 고색동 큰말 아이들에게는 성인식의 장소였다. 아래가 내려다 보이는 아찔 한 침목을 100여개쯤 아무렇지 않게 건너야 또래 집단으로 인정을 받고 당당히 한 몫으
이야기가 있는 동네
로 한자리를 차지하는 그런 통과의례 같은 의식을 큰말 아이들은 암묵적으로 성대하게 치루곤했다.
안경을 쓴 겁이 많은 친구가 100칸 다리에 도전을 할때 하필 수인선이 지나가는 시간이 었나보다. 대경실색한 그 친구는 그만 다리가 얼어붙어 철교 가운데 주저 앉아 버렸고 우리는 큰일이 날것을 생각하고 몇은 도망치고 몇은 용감하게 수인선을 세우려고 노력 해보았다.
다행히 멋진 정복의 철도원 아저씨는 기차를 세우고 철교 한가운데 까지 걸어가 조심조 심 그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걸어 나왔고 그 애 얼굴에 두려움 대신 희미하게 미소가 번 지던 찰라 호되게 꿀밤과 함께 엄청난 꾸지람을 들었던 추억이 있다.
지금은 불가능한 이런 에피소드가 가득했던 추억의 수인선은 이제 인터넷속 흑백사진 몇장과 우리 기억속에만 남아있다.
단지 수인선뿐이랴. 이제는 사라진 마을 곳곳의 이름들과 그 시절 우리와 함께 했던 장 소들을 떠올리며 기억하려고 하는것은 단지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향수 혹은 변화에 대한 거부감만이 아닌 그 시절 가난하지만 따뜻했고 배고팠지만 늘 함께했던 삭풍속에 피난처였던 볕이드는 따스한 담벼락같은 존재였던 마을에 대한 근원적인 그리움 때문 일것이다.
"오목천동에서 태어나 고색초등학교를 졸업(2회) 하고, 43년 여간 교직생활을 하며 말단 교사부터 교육장에 이 르기까지 교육 발전을 위해 이바지 해 온 임택명 전 화성 시교육장을 만나 우리가 지녀야 할 나라사랑 의식과 교육 의 중요함을 들어봤다."
열정으로 아로새긴 43년여 교직생활
임 전 교육장은 1938년 수원 오목천(梧木川) 마을에서 태어나 1959년 교단에 처음 섰 다. 평교사로서 아이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교육의 중요성과 소중함을 절실 히 느꼈다고 한다. ‘서툰 의사는 한 번에 사람을 해치지만 서툰 교사는 한 번에 수많은 사람들을 해친다’는 것을 되새기며 열의를 갖고 아이들 교육에 임했다. 이런 열정으로 중학교 입학 시험 때는 단 한 명의 낙오자 없이 전원 합격시키는 성과도 얻었다.
가정이 바로 서야 교육이 바로 선다
“가정은 인생의 근본이 되는 인성과 지혜를 선물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 애정을 배우고 희생과 용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 에 가정의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문제 가 생긴다고 한다. 애국심을 고취해 나라가 위태로울 때 앞장서서 지킬 수 있는 용기를 배우는 것도, 국경일에 국기를 달고 애국가를 부르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배우는 것 도 가정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가정교육의 중요성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하 다고 이야기 했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현실은 이런 이상과 너무 많이 동떨어져있다고 개탄했다. “인생을 생존경쟁의 현장에서 허둥대며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 은 아닌지, 유치원 시절부터 가혹할 정도로 학습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닌지, 어릴 때부터 이기적이고 비협조적인 인간이 되는 데 일조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 교 후 집에 돌아오면 맞벌이에 바쁜 부모 때문에 반겨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 우리의 현 실이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고 맞벌이 부부가 늘어난 것을 원인으로 꼽고 있지
만 중요한 것은 그에 따른 부작용을 인지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치국(治國)의 근본은 제가(齊家)에 있다고 했습니다. 사회의 기본 단위는 가정입니다. 하나하나의 가정이 튼튼히 설 때 나라가 튼튼히 서고, 모든 가정이 허약할 때 그 사회는 허약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대화 단절, 현대인이 풀어야 할 과제
반평생을 교육에 헌신한 임 전 교육장은 이런 것들이 가정교육을 통해 개선되어야 할 과 제라고 생각하며, 가족 구성원의 사회참여로 인한 대화 단절이 현대인이 누리고 있는 문 명의 이기와 함께 또 다른 심각한 병폐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깨닫는 일이 시급하다고 밝 혔다. 임 전 교육장이 정식으로 교단을 떠난지 꽤 오래 됐다. 그러나 끊임없이 사회 활동을 하 며 대한노인회 권선구지회 노인대학 학장도 역임하고, 모교인 고색초교 발전을 위한 노 력도 펼치고 있다. 특히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발맞춰 노인분들이 건강하고 건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평생교육의 중요성을 알리고 저변을 확대 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이제 여든인 임 전 교육장의 교육열정은 아직도 청춘이다.
전갑태
평동통장협의회 25통장
"우리동네 30년 봉사의 달인 의소대·방범대·통친회 등 마을 일꾼 자처 어려운 이웃 돌보며 더불어사는 삶 실천 공로인정 국무총리상, 새마을 기념장 영예"
나만 잘 살면 무슨 재미야?
가끔 보는 TV프로그램중에 ‘생활의 달인’이라는 방송이 있다.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면서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고 신속한 일처리로 한마디로 달인이 되었다는 사람 을 찾아가 소개하고 검증하는 프로그램이다. 참 다양한 직업이 존재하는구나 하는 생각 과 자신이 하는 일에 얼마나 시간과 노력과 투자해야 저 정도가 될까 하는 감탄을 하게 된다. 지난 6월, 일찌감치 다가온 무더위가 연일 최고 기온을 갈아 치울 때 반가운 사람을 만 났다. 마을이야기 책자를 만든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많이 했던 말은 ‘그 사람 인 터뷰 해야지.’라는 조언(?)이다. 평동지역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 어디서든 나타나 는, 아니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아도 미리 알아서 구석구석 살피고 있는 사람, 바로 전갑태 통장이다.
인터뷰 시간이 오전 9시였다.
“아침은 드셨어요?” 인사를 건네니 “아 그럼, 새벽 5시쯤 일어나 아침 먹고, 마누라 하고 감자밭하고 고추밭 다녀왔지, 물도 주고, 30일 감자 수확을 하기로 해서 살펴봤지. 올해 워낙 가물어 감자가 알이 작년 만큼 굵지 않아” 궁금증이 또 생긴다. “사모님은 통장님이 이렇게 몇십년 동안 마을일에 앞장 서는 것에 대해 어떤 말씀 하세요?” “예전에는 잔소리도 많이 했지. 이불 줄테니까 나가라고, 아예 동에가서 먹고 자라고, 거기서 살라고 하기도 했어(웃음). 집에서 필요할 때 늘 마을일을 하고 있으니까 불만도 많았겠지. 지금은 나이들고 내가 잘해. 오늘도 같이 밭에 가서 물주고, 풀 뽑고 왔어.” “이 지역 토박이시죠?” “그럼, 고색초등학교 10회 졸업생이야. 지금 오목천동 농협 근처가 원래 태어난 곳인
데 지금은 남광아파트 근처 주택, 25통에 살고 있지.” 1986년 4월에 처음 통장에 첫발을 내 딛고 지금까지 37년을 한결같이 마을일에 슈퍼맨 처럼 짠 하고 나타나는 전갑태 통장님이다. 공로를 인정받아 2016년에는 국무총리상, 2017년에는 30주년 새마을기념장을 받기도 했다. 한마디로 봉사의 달인이란 말도 아깝 지 않다. 그동안 의용소방대 40년, 방범대장 15년, 통장협의회장 15년, 권선구 새마을 협의회장 15년, 구대표 통장 15년 등 뭐든 이분 앞에서 10년 이하의 봉사는 명함도 내 놓지 못한다.
“ 매년 감자를 수확하여 이웃돕기에 나서 … "
400평인데 10kg박스 180개 정도를 수확하고 있지, 우리동이 매주 통장들을 비롯해 다 른 단체들이 반찬을 만들어 봉사하는데 지원을 해주고, 개인적으로 원하는 사람들한테 1박스 1만원씩 팔기도 해. 평동지역이 특히 어려운 이웃이 많아. 반찬을 해주면 독거 노 인을 비롯한 어르신들이 좋아하지.
평동에 큰 행사중 하나도 해마다 실시하는 김장 담그기다. 배추 1500포기와 무를 심어 주민들과 함께 김장을 담가 관내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주고 있다. 배추 모종에서 수확해 담그기까지 새마을협의회원을 이끌고 있는 긍정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사실 봉사정신과 마을에 대한 애정이 없이는 하기 힘든 일이야. 요새 젊은 통장들 보 면 서로 바쁘니까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와 동네 일을 해야하는데…” 1947년 5월생이니 칠순이 넘은 나이, 앞으로 좋은 후계자를 키워 물려주고 싶다고, 가 족들이 모두 건강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얘기하면서 인터뷰를 마무리 했다.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알지 못하고, 관심이 없는 개인주의, 이기주의 시대에 살고 있기에 동네의 어 려운곳, 취약한 곳에 애정의 손길, 눈길을 돌리는 30년 배테랑의 전갑태 통장님이 더 빛 이 난다. 주민등록 사실조사와 몇가지 정도가 통장의 일이라 생각했던 시선을 부끄럽게 만든다. 마을을 함께, 같이, 가치 있게 바꾸어 가고 살아가려는 그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 다. ‘나만 잘살면 무슨 재미야’ 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오랫동안 귓가에서 들릴 것 같다.
송만석
전.평동주민자치위원장
"외지인을 배척하는 토박이 중심 문화를 타파하고, 타지에서 이사 온 주민들을 끌어 안기위해 노력. 특히 향우회를 만들도록 유도하고, 이를 인정하며 마을일에 함께 동참시켜 정주의식을 갖도록 해야 … "
사랑의 119 사업 물심양면 지원
장맛비가 추적추적 계속 내리다가 모처럼 맑게 개인 7월의 아침, 평동행정복지센터에서 평동 발전을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펼치고 있는 전.송만석 주민자치위원장을 만나봤다.
평동에서는 2005년부터 관내 홀몸노인 등 소외계층에 반찬을 배달하는 ‘ 사랑의 119 ’ 사업 일환으로 매주 화요일마다 관내 단체가 순차적으로 참여하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 다. 평동행정복지센터 2층에 있는 식당에서 평동 단체가 순차적으로 돌아가며 음식을 만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배달을 한다 매주 화요일이면 저소득층 및 독거노인 등 50여 가구에 배달할 반찬을 만들기 위한 ‘ 사 랑의 음식 만들기 ’ 가 말 그대로 행복 나눔 실천이다. 이 나눔사업은 2005년에 처음 시작되었으며, 마을 여러 단체들이 협력하여 현재까지 지속하며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특히, 이 나눔사업이 활성화 될 수 있는 것은 송만석 전.주민자치위원장의 관심과 지원 이 큰 힘이 되었다. 반찬 나눔을 위한 다양한 노력은 물론 지난 2006년 송 위원장이 중 심이 돼 바자회를 열어 반찬을 원활하게 배달 할 수 있는 승합차를 구입해 이 사업이 자 리잡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전에는 마을금고에서 지원해준 낡은 차로 움직였는데 잦은 고장으로 인해 배달에 차질을 빚어왔었다. 더구나 점차 반찬 배달이 필요한 가구 수가 늘어나는데 때맞춘 지원이 되었다.
토박이 중심문화 접고 유입인구 끌어안다
송 위원장은 젊은 시절부터 개인사업을 하면서도 틈나는 대로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활 동을 펼쳐왔다. 다른 봉사의 달인(?)들과 남다른 점은 주민들이 ‘ 화합 ’ 해 정주의식을 갖
게해야 한다고 늘 강조해 왔다는 점이다. 외지인을 배척하는 토박이 중심 문화를 타파하 고, 타지에서 이사 온 주민들을 끌어안기 위해 노력해왔다. 특히 향우회를 만들도록 유 도하고, 이를 인정하며 마을일에 함께 동참시켜 정주의식을 갖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여러 단체에서 활동해 오며 바쁜 지역 봉사자였던 그는 더 많은 사람들과 접 하게 되고 더 바빠지게 되면서 가정을 돌볼 틈이 없게 됨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더구나 복달임이나 각종 모임을 집에서 여는 ‘용감한 가장’이었다. 가정보다는 지역일 돌보 기에 훨씬 많은 정성을 기울이는 인물 뒤에는 언제나 훌륭한 내조가 뒷받침 된다. “가정도 잘 돌보지 못하는데 마음껏 사회 활동할 수 있도록 이해해주고 집에 찾아온 손 님들을 정성껏 대접하며, 가족같이 대해준 집사람에게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그동안 집사람이 자신의 가장 큰 버팀목이었다고 감사해 했다.
견실한 후배 양성은 곧 지역발전 주춧돌
송 위원장이 요즘 가장 정성 들이는 일은 자신과 같은 후배 봉사자들을 양성하는 것이 다. 각종 단체나 모임을 운영할 때 독단적인 결정 보다는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고, 소통 과 권한 분배를 잘 하는 인물로 정평이 나 있는 그는 지역일도 젊은 지역일꾼이 함께 맡 아 같이 이끌고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어느 단체건 지속가능한 발전은 그 안의 구성원이 얼마나 많은 역량을 갖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기 때 문에 능력 있는 후배들이 제 때 지역 일을 할 수 있는 주변 환경을 만들고 있다며 평동지 역 발전을 위한 견실한 후배 양성과 함께 같이 이끌고 발전하는 문화를 정착시키고자 노 력하겠다고 밝혔다.
10여년간 노숙인 봉사
이희남
“사랑의 가위손” 노숙인 머릿결 희망을 다듬어..,' 이발하는 동안 노숙인들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간의 정을 느낄 수 있어 감사해 …
고향으로의 귀향과 지역사회 활동
고색동 태산아파트 앞 골목에 70년대 이발소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장소가 있었다. 이제는 그 흔적을 찾을수 없지만 그곳은 노숙인의 머릿결을 다듬던 이희남씨의 추억이 가득한 곳이었다. 우리는 아련한 과거를 회상하며 나이들고 정감어린 이발사 ‘이희남’ 씨를 만났다. 이희남씨는 고색동 토박이로 젊은 시절 타지에서 잠시 지내다 고향으로 돌아와 이발 소를 운영 했었다. 그는 현재도 운영되고 있는 자율방범대의 원년멤버라고 할 수 있다. 1995년 경 자율방범대로 활동했다. 지금과는 달리 지자체나 관련 기관의 지원이 전혀 없는 가운데 자율방범대로 활동한다는 것은 자신의 재능기부이며, 순수한 봉사의 개념 이었다. 고향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노숙인 덕분에 오히려 행복한 삶을 살다
올해 78살인 그는 고향에 대한 애정으로 고색동에서 마을의 일들을 도맡아 하면서 살아 왔다. 그는 이발소를 33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운영했었다. 생업을 하면서 고색동이라 는 지역적 한계를 넘어 수원시의 노숙자들을 위한 봉사를 펼쳐왔다. 10년 동안 매달 두 번씩 팔달산에 위치해 있는 한국청년회의소(JC)에서 노숙인들을 위 해 이발봉사를 했었다. 오랜시간 한결같이 봉사를 실천해온 그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 “비록 내가 나이 들고 힘은 없어도 사회적으로 힘든 사람들을 내가 가지고 있는 이발 기술로 도와줄 수 있다는 것에 보람을 느꼈다.”며 “이발하는 동안 노숙인들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 간의 정을 느낄 수 있어 감사했다는 대답을 하며 오히려 노 숙인 덕분에 행복한 삶이 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희남 씨는 특히, 어려운 시기일수록 도움이 필요한 곳이 많다며 관계기관과 독지가들 의 지원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여전한 평동에 대한 이웃에 대한 애정이 넘쳐
인터뷰하는 동안 불현 듯 과거에 대한 향수를 그리워하곤 했던 그는 올해 59년 경력의 마침표를 찍었다.
고색동에서만 이발소를 33년간 운영하며 이발로 자식들을 키워냈다 젊은 나이에는 마 을과 지역을 위해 봉사를 하였고, 10여년간 노숙인을 위해 가위를 들었다. 그런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그는 “이제는 쉬어도 되겠지. 이발로 한 평생을 살았고, 생업을 위해 일하기도 했으니, 하지만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그게 마을이든 사회적 약 자든 무언가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이 있다면 계속할 생각이다.”라는 말을 하며 따뜻하 고 정감어린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살아있는 농경문화의 화석
고색동 줄다리기
고색동 산업3단지 앞 중보들 공원은 인근 지역 주민들이 산책, 운동으로 자주 찾고 있 다. 나무와 꽃, 정자, 의자 등은 물론이고, 각종 행사가 열리는 무대도 마련되어 있어 주 민들에게 건강뿐 아니라 가끔 지역 축제를 맛보는 즐거움도 선사한다.
<예전 모습을 회상하며 각색한 글입니다>
지역주민들과 인근 산업단지 직원들의 건강과 문화행사를 책임지는 이곳 한쪽에서는 운동 중인 주민들을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긴 천막 아래로 한눈에 봐도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바닥에 앉아 누런 볏짚으로 새끼줄을 꼬아 길게 만들고 있 었다. 만들어진 새끼줄은 한쪽에 쌓아 놓고 몇 명의 어르신들은 계속 볏짚 한 움큼씩 쥐 어 양손을 비비며 연신 새끼줄을 길게 뽑아 내고 있었다.
오래전 용인에서 농사를 짓고 계시던 외할아버지댁에 가을에 방문하면 할아버지는 마 당 한켠에서 가을 추수를 하고 남은 볏짚을 꼬아 줄을 만드셨다. 그것으로 무엇을 했는 지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농사를 짓는데 도구 같은 것을 만들거나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만들었을 것이란 짐작이 든다.
지금은 민속촌에나 있을 법한 일들이 최첨단 디지털 시대에 고색동 공원에서 이루어 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운동을 하러 나온 주민들도 다들 발걸음을 멈추고 구경을 하거 나 성급한 사람들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고색동 줄다리기에 사용할 줄을 새로 만들고 있어요. 다 들 아시다시피 우리 동네에 서는 일년에 한번 정월 대보 름을 앞두고 줄다리기를 함 께 즐기잖아요. 그때 사용 할 줄을 새로 만들고 있는 겁 니다.” -고색큰말어르신-
그제서야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고색동을 비롯한 인근 주민이면 모두 다 알고 있 는 줄다리기 행사는 수원시 향토 유적 제 9호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이제는 수원시에 서도 알아주는 전통있는 의식이다. 그동안 사용되던 줄은 2009년에 만들었던 줄이었 는데 이번에 그 줄을 해체한 후 태워버리고 다시 제작한다고 했다. 2013년에 집중호우 로 줄보관 창고의 줄도 침수가 되었는데 그 당시 지역주민들간의 의견의 불일치로 새 로 만들지 못하고 보수를 해서 한동안 사용해 왔다가 이제야 다시 만들게 되었다.
길이 3m, 둘레 1m의 굵고 긴 줄 다리기의 줄은 젊은 장정 몇 백명 이 함께 들어야 할 정도로 무게가 나간다. 그러니 새로 만드는 작업 도 만만치 않았으리라. 20일 정 도의 제작기간을 두고, 인근 논 에서 구입한 볏짚으로 꼬아 작업 을 하고 있었다. 다른 때는 추수 가 끝나고 남은 볏짚은 사료용으 로 사용되는데 특별히 인근의 논
에서 구입한 볏짚으로 지어진 줄은 더 튼튼하고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마음 이 가득 담겨 있을것이다. 지역의 노인회, 영농조합의 70대 이상 어르신들은 소싯적 볏 짚 꼬기의 추억도 이야기 하시며 고색동 줄다리기의 유래를 오래전 누군가의 할아버지 에게 들었다는 이야기도 해주며 정성들여 줄을 꼬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민속전통줄다리기의 유래는 사실 문헌이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등 몇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정조가 수원화성 축조 당시에 성안 사람들과 성밖 사람들로 나누어 서로 줄을 당기어 대결을 했다는 이야기와 고색동이 아주 오래 전 수백년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곳 인근이 바다였다는 설이 있다. 그래서 이곳에서 육지로 나가려면 줄로 연결해 배를 끌어 당겼을 것이라는, 교통수단의 도구로 사용하 는 데로 유래 했다는 말이 있다.
이번에는 아이들이 사용할 수 있는 줄도 만들어졌다. 그동안 무겁고 굵어 초등학생을 비롯한 어린이 들이 사용하는데 무리였는데 고색동 줄다리기가 앞으로도 계승 발전되 어 져야 할 전통이니 아이들도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반영되었다. 고색초등 학교 4~6학년에서 지원한 백여명의 아이들이 참가해 줄다리기 행사를 하는데 아이들 은 그동안 어른들이 하는 줄다리기를 구경만 하다가 직접 참여하고, 줄다리기 의미를 한번 더 마음에 새기는 자리가 될것이다. 이번에 만들어진 줄은 다른 지역에도 빌려 주 어 고색동 줄다리기 행사와 의미, 취지 등을 널리 알리고, 전통문화 계승의 중요성 등을 배우는 체험학습으로 자리잡기를 바란다.
1953년 농업생산력 증진 목적 설립 쌀로 현물출자, 정미소 구심점 활동
대한민국 최초농협 고색농업 협동조합
고색 농업협동조합이 대한민국 최초의 농협이라는 사실 알고 있나요?
얼마전 중보들공원 산책을 하다가 공원끝자락에 위치한 고색향토문화전시관에 들어가 보았다. 그곳 전시관에는 고색동의 오래전 모습에서 지금의 마을주민들의 모습까지 사 진과 설명, 자료 등이 가득했다. 코잡이 놀이, 도당굿, 고색농악, 협궤열차 등의 자료를 둘러 보던 중 눈길을 사로잡는 전시물을 보게 되었다. 1953년 고색리 농업협동조합이 대한민국 최초의 농협으로 대법원 등기 제1호로 현금 및 현물 출자 구좌를 받아 기록한 조합원들의 명부였다. 우리 동네가 농협의 시발점이고 모태였다는 사실은 흥미롭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했다. 고색동의 넓은 뜰은 예로부터 땅이 좋아 농사도 잘되고, 쌀의 품질도 좋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때문에 농업인들의 협동조합도 이곳에서 최초로 시작 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보았다.
협동조합은 경제적으로 약소한 처지에 있는 소비자, 농어민, 중소기업자 등이 각자의 생활이나 사업의 개선을 위하여 만든 협력 조직을 말한다. 그중 농업협동조합(農業協同組合)은 농업 생산성의 증진과 농가 소득 증대를 통한 농 민의 경제적ㆍ사회적 지위 향상을 목적으로 전국적으로 조직된 농가 생산업자의 협동 조직체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농협의 정확한 명칭은 농업협동조합인 것이다.
고색큰말 협동조합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욕심이 생겨 김진배 전.영농조합장을 찾아갔 다. 오래전 농협이야기를 들어보고, 갖고 계신 자료도 함께 나누어 보자고 부탁을 드리 고, 고색 큰말 경로당을 방문했다.
“1953년 북한에서 내려온 양봉식 초대회장을 주축으로 농업협동조합을 만들었지. 그
게 우리나라 최초의 농협이야. 그 당시 돈이 어딨어, 쌀 한 말, 두 말을 출자금으로 내고 조합원으로 들어왔고, 지금 9438구좌에 133명의 조합원들이 있지. 160구좌가 최고이 고, 대부분 아버지와 할아버지때부터 참여한 거야”
19대 이영성 조합장의 뒤를 이어 2007년부터 조합장 일을 맡으신 김진배 어르신을 만 나러 가보니 경로당의 어르신들이 다들 모여 있었다. 처음 설립할 당시는 경기도 화성 군 안용면 고색리가 주소였다고 한다. 지금같은 형태가 아니고 정미소에 구심점을 두 고 활동하였다고 한다. 아버지때부터 이곳에 살아 고색동 토박이라는 김진배 어르신은 낡은 책 두권을 내어 놓았다. 한권에는 조합원들의 명부, 출자 구좌, 각종 서류가 손으 로 작성되기도 하고, 각종 중요 문서들이 붙여 있기도 했다. 또 한권은 중요서류철-계
약서 및 약속 이라고 적혀 있었다.
몇십년의 시간이 흘러 두꺼 운 겉장의 귀퉁이는 상처 가 나있고, 속지도 구겨지 고, 빛바랜 곳도 있었다. 하 지만 대한민국 최초, 농업 인들의 위상, 자부심 등이 책에서 느껴지는 듯했다.
실제로 한 어르신은 마을이야기 책자를 만들때 ‘고색농업협동조합, 한국최초의 농협, 고색영농조합’이란 단어를 꼭 넣어달라는 신신당부를 하셨고, 지역주민들도 이런 역 사적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고, 더 시간이 지나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기를 바란 다고 말씀 하셨다.
물론 어른신들은 지금은 농사를 짓지는 않는다. 산업단지가 들어서는 곳에 있던 정미 소의 땅이 수용이 된 후로는 큰말 경로당이 유일하게 갖고 있는 법인 재산이라고 한다. 정부법안에 의해 72년 수원단위농협과 명의 합병을 하였다. 그리고 73년 강석은 조합 장을 선출하고, 주사무소와 정미소를 수원농협에 합병하지 않고 개인명의로 등기이전 하였고, 95년에는 ‘고색큰말영농조합’으로 명칭을 변경을 하고 현재까지 이르렀다.
‘처음’이란 단어가 주는 의미는 크다. 첫 농협이 우리 지역에서 만들어지고, 퍼져나 가 농협 발상지라는 역사적 사실에 괜히 가슴이 뭉클해 지고, 프라이드가 번진다. 시간 이 아쉽고 많이 짧았다. 농협에 대한 이야기, 오래전 농업인들이 협동조합을 만든 이야 기들이 더 듣고 싶을때 다시 한번 찾아가야겠다.
글로벌기업 SK그룹의 산파 서수원사람들의 자랑이었던
선경직물
평동행정복지센터 앞에 있던 멋진 한옥한채 SK그룹의 창립자인 고.최종건회장의 생가라는 사실을 아시나요?
평동 어르신들이 기억하는 SK그룹의 모기업인 선경직물의 창립자 최종건, 최종현 형재는 덩치가 크고 식성이 좋던 우람 한 청년들이었다고 한다.
전쟁의 폐허만 남은 대한민국 근대화의 시기를 일찌기 열어 제낀것은 우리 평동에 있는 선경직물이었다. 공전의 히트상 품 닭표원단을 구하기 위해 평동에 있는 선경직물의 출하장 은 늘 트럭들이 즐비하였고 외국에서 국가 원수가 방문하면 단골로 들리던 산업시찰의 현장이 선경직물 이기도 했었다.
선경직물은 한때 500여명이 넘는 직원을 자랑하며 수원의 지역경제를 책임지는 우량 향토 기업이었으며 특히 서수원에 거주하는 직원들을 우선 채용하여 평동 집집마다 선 경 직원이 하나씩은 꼭있는 지역과 뗄레야 땔수없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말 그대 로 서수원의 자랑이었던 기업이다. 월급날이면 지역의 음식점과 상점들은 선경직물 직
원들로 즐거운 비명을 질렀 고 전국 곳곳에서 올라온 여 성노동자들이 평동지역 곳 곳에 하숙과 자취를 하며 어 렸웠던 시절 평동사람들에 게 귀한 생활비를 벌게 해주 는 평동을 활력과 청춘으로 물들이는 활력소이기도 했 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번영의 뒤안길에는 평동을 가득채우던 그 당시 산업역군들의 땀 과 노력이 있었다. 생계를 책임지고 동생들의 학비를 대주던 억세고 희망찬 선경직물 500여 여성노동자들의 헌신은 나중에 SK가 거대글로벌 기업으로 대한민국 4대 대기 업의 하나로 당당히 자리잡아 우리나라의 경제를 이끌어가는 주역이 되는 밑걸음으로 남아있다.
노동집약적 2차산업의 쇠퇴라는 시대의 흐름에 밀려 평동 선경직물은 생산시설을 중 국으로 옮기고 명맥만을 유지하다 2010년중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일부 뜻있 는 지역주민들이 대한민국 근대화의 상징이자 서수원 주민들의 근대문화 유산으로의 가치를 들어 보존노력을 하였으나 대부분 사라져버리고 지금은 공원에 미니어처로 그 당시 건물들을 재현해놓은 흔적만이 남아있어 아쉬움을 더하고 있다.
평동의 골목골목을 청 춘으로 물들이던 파란 작업복의 청춘남녀들이 이제는 황혼의 노인이 되는 세월동안 선경직 물을 지켜온 평동은 여 전히 따뜻하게 그 자리 를 지키고 있다.
일제강점기 비행장 건설돼 주민이 수원시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동네
평리동
평동, 고색동, 오목천동 그리고 평리동, 이 4개의 법정동이 모여 평동이라는 행정동으 로 불린다. 고색동이나 오목천동에 이사온지 얼마되지 않는 주민들은 이런 얘기를 하 면 “평리동? 그런 동네도 있어?” 하고 고개를 갸우뚱 거릴때도 있다.
고색동 산업단지가 들어서고, 중보들공원이 만들어 지면서 평리동은 심리적으로 멀어 진 동네가 되었던 걸까. 인구가 수원에서 제일 적은 동네라고 하는데 그래서 일까?
어쨌든 우리 지역이지만, 우리 마을인데도 주민들에게 잘 불리워지지 않는 평리동을 이번에는 실컷 불러보려고 한다.
평리동 지명에 대한 역사를 찾아 보았다. 원래 평동과 평리동은 수원군 안용면 시절 같 은 평리였으나, 1936년 평동 지역이 먼저 수원읍에 편입되어 대평정(大坪町)이 되었 고, 해방 이후 평동으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평리의 나머지가 1963년 수원시에 편입되 어 평리동이 되었다.
크고 작은 공장들이 세워진 산업 단지를 지나 평리동에 들어섰다. 서호천을 만났다. 한때는 수량이 많고 물이 얼마나 깨끗했는지를 회상하는, 40년 전에 이곳으로 시집을 왔다는 어르신은 “시집 을 화서 서호천 물로 배추를 절이
기도 하고, 빨래는 기본으로 하는 거였고, 애들도 어른도 자주 애용하는 물가였어”라 고 한다.
한때는 몇십가구 였다.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던 평화로운 마 을이었다.
제10전투비행단이 주둔하고 있는 비행장 옆 평리동 그러다가 일제시대 전투비행장이 들어섰다. 수원시 권선구 장지동, 평리동 일대에 위치 한 수원비행장은 원래는 일제 강점기에 건설된 비행장이다. 해방 이후 기존의 활주로 를 두 배 가까이로 확장하여 한국전쟁 시기에는 미군 공군의 출격기지로 사용되었다.
특히 수원 비행장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마자 1950년 6월 29일 오후 맥아더 장군이 한국 땅에 첫발을 내딛은 곳이다. 수원에 도착한 맥아더는 이승만 대통령의 환영을 받 은 후 수원 농업시험장에 위치한 임시지휘소로 이동해 작전회의를 주재하고, 영등포로 이동하여 한강방어선을 시찰하였으며 인천상륙작전 등 여러 작전을 구상하였다.
수원비행장은 ‘ 공군 ’ 하면 떠오르는 영화 ‘ 빨간 마후라 ’ 의 촬영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지금은 대한민국 10전투비행단이 주둔 하고 있다.
평리동은 제10전투비행단과 논밭밖에 없다. 아니, 전투비행단이 평리동의 대다수를 차 지하고 있다. 비행장이 들어서면서 수십가구가 근처로 이전을 했다. 오목천동, 고색동, 평동 등으로 이전을 당했다. “그때는 나라에서 하는 일이라 어쩔수 없었지. 땅 팔고, 소도 팔고 그랬어. 멀리 이사는 안가고 근처에 다들 자릴 잡았다고 하더라구. 몇 년전까 지는 그사람들 모임도 있었는데 지금은 아마 친목회도 없어졌다는 소릴 들었어.”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서 일까. 평리동 근처를 걷고, 동네 안쪽을 돌아다녀 만난 어르신 들중에서 그때를 기억하고, 회상하며 이야기를 전해 줄 이는 만나지 못했다.
비행장을 연결해 주는 평리교 옆에는 삼남길이라는 표지판이 있어서 다리를 건너봤다. 비행장 옆 담장에는 사람의 손길을 담은 텃밭이 나타났다. ‘국방부’라 적힌 노란색 작은 표지판이 바닥에 군데군데 표시되어 있었다. 담장과 그 위의 철사망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아래로 배추, 무, 파 등의 채소는 잘도 자라고 있었다. 누구라도 만나면 이야 기를 건네고 싶었는데 오늘따라 인적이 없다. 다만 비행기가 뜨면서 귀를 찢을 듯한 소
음을 낼 뿐이었다.
요즘은 한창 비행장 이전문제로 수원시와 화성시가 갈등을 겪고 있다. 시대적 요구이 고 사명이라는 입장이 강하다. 각종 혐오시설과 기피시설이 들어서고 있는 이 지역 주 민들이 활짝 웃고, 동네 구석구석 사람들로 넘쳐나는 날이 언젠가는 다시 오겠지. 가느 다란 물줄기에서 물고기가 살고 있는지 먹이를 찾던 백로 한쌍이 푸드득 평리동 하늘 을 날아올랐다.
빛바랜 사진이 들려주는 고색리이야기
글러브를 낀 소년단
사진 몇장이 우리 손에 들어 왔다. 빛이 바래 누렇게 변한 흑백 사진이었다. 열 살을 갓 넘은 소년에서 제법 청년들의 모 습까지 보였다. 몇십년전의 사진인데 사진속의 주인공들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그때 의 우리 마을 주민의 이야기와 마을의 일상들은 어땠는지 너무도 궁금했다. 고색큰말 경로당에 들어가니 최인석 노인회장님을 비롯한 어르신들이 우릴 반긴다. 사진을 펼 쳐 놓으니 너도 나도 그때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일제시대 사진이네. 이건 해방되기 바로 전 1944년 6월 고색동 소년단 들이 모여서 찍은 사진이네. 그때 우 리 동네에 사진사가 한명 살고 있었 어. 그래서 가끔 우리 동네 사람들을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지. 그 양반이 있었기에 지금 그나마 사진이 몇장 남아 있는 거야.”
36년생인 최인석 노인회장님이 제일 막내였다고 사진 설명을 해주신다. 모두 윗옷을 입지 않고 바지만 입은 채였고, 까까머리에, 옆사람 어깨에 팔을 얹기도 하고, 팔짱을 끼기도 한 모습이다.
삼거리 통구모퉁이 뒷산이 배경이다. 지금은 연안아파트가 지어진 그 자리라고 했다. 소 년단이라고 이름 지었지만 특별한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서로 운동을 하기도 하고, 공 터를 삽으로 파고, 일구어 콩을 심는 등 농사일을 했다. 학교를 다니는 사람, 진학을 포 기한 청년들이 모여 어른을 돕기도 하고, 자체적으로 마을을 위한 일을 찾아하기도 했 다고 했다. 돋보기를 쓰고, 사진을 뚫어져라 보면서 이름을 한명씩 불러보기 시작했다. “박봉수, 강석명 형님, 박종원, 박종오, 최봉근, 민찬식, 장석주, 정재화, 민춘식, 정재 화 형도 여기 있네. 가만 있어봐. 이 선배가 누구더라. 건너말 박씨였는데…. 박재선, 박 종구, 이광순, 백순돈… 대부분 이젠 천당에 갔어. 거기서 잘 살고 있겠지, 살아있는 이 는 아흔살을 진작에 넘었지” 어르신들이 유쾌한 농담도 반쯤 섞어 주셨다. 그때 일제시 대와 6,25 한국전쟁시절이던 때는 동네에서 놀다가도 공습경보 발령하고 비행기가 많 이 뜨면 굴을 파놓은 곳에 숨어서 있다가 나오기도 했다. 일제시대에 솔방울을 따다 주 기도 하고, 평리동에 전투비행장이 들어설때는 돌을 나르고, 나무를 옮기기도 했다.
또 다른 사진을 펼쳤다.
“이 사진은 솔대여. 양쪽에 솔대가 있 었어. 바다가 있었을때 등대식으로 표식 을 해주기도 했지, 이건 성당 바로 앞에 사청나무가 있었지. 나무에 과녁을 만들 어 활을 쏘기도 했어. 어느해인가 나무 가 벽락을 맞아서 쓰러진적도 있어. 그 나무들 모두 땔감이 되었어. 겨울에 춥 긴 하고 어떻게 전쟁을 겪으로면서 땔감 이 된거여”
사청나무 바로 앞에서 찍은 사진 뒤쪽으로는 동보와 영신연와 굴뚝이 보인다. 동네사 람들이 많이 다니면서 돈을 벌었던 곳이다. 고색동 흙이 좋아서 이곳의 연와는 인기가 높아 일하기도 바빴다는 말도 전해들었다.
1847년 2월 19일 고색리 권투선수권 대회기념(고색리 회당앞) 사진도 있다. 해방되고 나 서 회당(야학당)을 지었다. 배움에 목말랐던 청년들이 더 어린 소년을 가르치고 서로 배웠 다. 그리고 동네마다 권투를 즐겨했는데 몇 개의 마을이 모여 권투시합도 했다. 길죽한 자 루에 모래를 넣고, 양말에 솜을 넣어 권투장갑을 대신했다. 열댓명 중에 가운데 우승컵을 손에 쥐고 찍은 이요한 어르신이 구락부(오늘날 동호회, 모임)의 짱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수인선이 지하화 되었지만 그 자리가 예전 수인선 고색역 자리기도 했다. 그때 는지금과 달리 손으로 철로를 변경하던 시절이었다. 역무원과 함께 찍은 사진은 인천 까지 이어진 기차역 바로 앞의 모습을 보여준다. 십대초반 기차가 지나갈 때 손수 연장 을 들로 철로를 교체하는 모습이 멋져보였다고 한다.
최인석 어르신의 이야기는 화수분처럼 끝이 없었다.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 본인, 아들과 손자까지 이곳에서 태어난 토박이 라고 했다. 고색동이 좋고, 사람들은 더 좋다는, 사람들이 협력하고, 좋은 전통을 오래오래 지켜나갔으면 한다는 바람이 꼭 이 루어지길 기대해 본다.
산 좋고 물 맑고 인심 좋은 오래전 질그릇 만들던 ‘즘터마을’로 불려 오동나무 많은 곳·오목한 지형 설도 공존
오목내
수원시 전체로 볼 때 가장 남서쪽인 오목천동은 예전부터 산 좋고, 물이 맑은데다가 인 심까지 좋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본래 수원군 용복면의 지역으로서 오목내가 되어 오 목천리라 했는데, 일제 때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고사촌을 병합하여 안룡면에 편입하 였다가 1963년 수원시에 편입되어 오목천동이 되었다. 이곳이 토박이인 사람이나 오래전부터 살고 있는 어르신들은 오목천동이란 말보단 곳 집말, 온정마을 이렇게 부르고 또 ‘오목내’라는 말이 익숙하다고 했다. 오목내 북쪽, 즉 뒤쪽에 있는 마을은 뒷물, 뒷말이고, 오목내 동남쪽 물가의 마을로 고금산 북쪽은 고 사촌이라 스스로 마을을 소개한다. 이외에도 가림리, 건너말, 작은말, 삼거리로도 불리 기도 한다.
“예전엔 즘토 마을이라고 했지. 저쪽 영조 아파트 근처에 토기를 만들었어. 그 터는 지 금 없어지고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질그릇을 만들던 큰 가마가 있었지. 우리 영감이 이 곳 토박이인데 어릴적 이맘쯤 추운 겨울이면 친구들과 놀다가 즘터에서 가마에서 금방 구워져 나오는 질그릇에 손을 대고 있으면 따뜻했다고 언젠가 얘기한 적이 있었어.”
오목천동 경로당을 방문했다. 추운 날씨에 어르신들은 삼삼오오 모여 십원내기 고스톱을 치고 있었고, 몇 몇의 어르신은 낯선 우리들을 반겨 줬다.
“오목내는 오동나무가 황구지천을 따라 많아서 그렇게 불리어졌다는 사람도 있고, 이 동네가 오목했다고 해서 그런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어른들도 있 었지. 여기 앞에 황구지천을 기준으로 오목천동과 고색동으로 나뉘는데 지금은 아니지 만 그때는 물이 얼마나 깨끗했는지 낚시하는 사람들도 많았어.”
질그릇 굽던 터가 있던 곳은 지금은 유치원이 들어서있다
‘오목내’라는 토박이 땅이름은 서쪽 가까이 칠보산이, 서쪽 머리 용화출 고개의 산 자락이 아늑하게 울타리를 쳐서 부근의 장지동과 권선동, 대황교동과 함께 삼태기 바 닥의 형국을 이루었다. 이러한 오목한 지형에 내가 흘러 그 내의 이름의 ‘오목내’가 되고, 그 냇가에 자리한 마을 이름까지 덩달아 같은 이름으로 되었다는 유래에 무게가 실린다.
큰 길가를 건너 오면 지금은 공원으로 조 성되었지만 아파트가 지어지기 전까지는 오목천동 낚시터였던 자리가 나왔다. 걸 어가다가 만나 노인은 오목낚시터를 기억 하셨다.
“이곳 낚시터의 물은 농사용으로 쓰였 어. 마을사람들이 전부 농사를 지었잖아. 해마다 모내기할 때 물을 빼서 논에 물 을 대기도 했거든. 아주 중요한 농수였지. 평상시에는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 어. 외지에서도 많이 와서 낚시를 하더라 구…”
농사용으로 물을 대던 오목천동 낚시터 자리는 이제 오목호수공원으로 조성됐다.
조금 더 안쪽으로 걸어가면 임목 육종연구소가 나오고, 이성벌이 나온다. 뒷물 앞의 들, 오목천동 166-1번지 일대는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논을 많이 경작했다고 해 이성벌이 라고 불렸다는 이야기도 이번 취재의 성과다.
발전,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사라진 것들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는 어르신들을 만나 오 래전 마을이야기를 듣는 시간은 귀하다. 그 이야기들을 고평뜰에 고스란히 옮겨 마을 의 역사와 뿌리를 남기는 일 또한 중요한 일이다. 평동의 어떤 옛 지명과 유래가 우릴 기다리고 있을지…. 개발이란 이름으로 더 파헤쳐 지기 전에, 어르신들의 기억이 더 사라지기 전에 앞으로도 마을의 역사를 담아낼 것이 다.
“옛날 뙤우물에서 나온 물로 온 동네 사람이 먹고 살았지”
뒷말 이야기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자신의 동네를 알고 있다 고 한다면 어디까지 알고 있어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인구수, 면적, 편의시설, 교 통, 학교 등의 정보를 알고 있다면 마을에 대해 애정이 있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하루가 다르게 세워지는 몇십층의 고층아파트들은 어려운 영어 이름을 내세운다. 발음 하기도 어렵고, 뜻도 잘 이해 안 되는 영어브랜드의 아파트는 각 마을의 문화, 역사, 전 통을 대변하지 않는다. 아니 동네의 옛 것 따위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서수원 지역의 낙후 된 동네, 경제성장과 개발이 더디게 이루어 지고, 비행기 소음과 기 피시설이 들어서 있는 곳, 수인선이 지나는 평동은 평동, 평리동, 고색동, 오목천동 4개 의 법정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지역의 예전 모습은 어떠했는지, 각 동네 구석마다 어 떤 이야기가 숨어 있는지 궁금해졌고 각종 문헌을 찾아 봤지만 알쏭달쏭한 유래, 정확 하지 않은 옛 지명, 이제는 흔적만 남아있는 장소 등에 관한 자료가 아주 조금 남아 있 을 뿐이었다.
모목천동은 화성시와의 경계에 있다. 그중에서도 이제 옛 모습은 많이 사라지고 있는 추세의 온정마을이다.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던 오목천호수 낚시터 자리에는 서희스타 힐스 아파트가 들어서고, 공원이 조성되어 깔끔하고 깨끗한 얼굴로 주민들을 맞이 하 고 있다.
공원을 끼고 지나치면 국립산림과학원 산림유전자원부, 수원시농업기술센터, 수원여 자대학이 나오고, 그 뒤편으로는 온정마을 있다.
뒷말 어감 좋지 않아 온정마을로
온정마을 경로당(온정로30번길 53, 지번은 오목천동 35-5)에 어르신들 을 만나기 위해 찾아 가니 막 점심을 준비하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권숙희, 공순덕, 정신자, 강덕자, 이명자 할머님이 심심풀이 고스톱을 치시다가 낯선 손님을 반갑게 맞이했다.
온정마을에 68년째 살고 있다는 어르신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 전에는 뙤우물이 있다고 해서 ‘뙤우물마을’이라 불렀지. 그러다가 뙤움물, 뙷 말, 됫말, 뒷물이라고도 불렀는데 한 공무원이 이사를 와서는 뒷말, 뒷물이란 어감이 좋지 않다고 하면서 온정 마을이라는 이름을 붙인거야” 온정(溫井)마을은 따듯한 물이 솟는 우물이 있는 마을 이란 뜻인 듯하다. 마을이름 유래에 대한 궁금증이 풀렸다. 우물이 아주 깊고 수량이 넉 넉해서 마을 사람들이 그 우물물을 사용했고, 얼마 뒤 바로 위에 또 다른 우물을 팠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늦게 팠던 우물만 남아 있고, 다른 우물이나 주변은 시멘트로 덮었 다고 한다.
매년 음력7월 초하루 우물고사 지내
또 다른 할머님의 말씀이 이어진다. “지 금도 매년 음력 7월 초하루에는 우물고 사를 지내. 우물터만 남아 있지만 일년에 한번 우물 뚜껑을 열어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고사를 지내는 거지, 그 덕분인지 우리 마을은 예전부터 나쁜 일 도 별로 없고, 사고도 없었어.” 가르쳐 준 대로 길 건너 왼쪽으로 가보니 큰 판 자로 덮혀 있는 우물이 있었다.
깊고 깨끗했던 우물, 그 옆의 큰 향나무 몇 그루, 시원한 정자에서 뜨거운 태양을 피하 고, 동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우물가는 사라지고, 이제는 사람의 손길, 발길이 머무르 지 않아, 먼지만 가득한 정자 ‘화담정(和談亭)’의 간판 한쪽이 떨어져 바람에 삐걱거 릴 뿐이었다.
한 지역에 오래 거주한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은 역사이고, 유래이다. 그 어떤 역사학자 보다 정확하고, 풍부한 이야기꺼리들이 술술 나온다. 동네 골목마다 어르신들의, 어르신들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들려주던 이야기들을 들으러 다
음엔 어디쯤으로 가볼까. 벌써부터 행복한 고민이다.
고색동 초입에서 옛 지명을 만나다
통구모퉁이 새터 비구재
평동에서 고색동으로 넘어가면 오른쪽으로 바로 통구모퉁이가 보인다.
고색동 토박이 어르신들은 이 작은 골목이 시작되는, 승용차 한 대 정도 간신히 지나가 는 길을 통구모퉁이라고 불렀다. 예전에 통구(절구통으로 짐작)를 만드는 곳이 모퉁이 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렇게 불리었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통구모퉁이를 지나 골목으로 쭉 들어오 면 비구재가 나온다. 고색동 7-42번지 근처인데, 이것 또한 ‘거북이 등처럼 비탈진 언덕’이란 뜻에서 그렇게 불리 워진 모양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 곳이 전부 농대산이었다고 한다. 고색파 출소 맞은 편, 중앙스포츠랜드 넘어 상 우아파트가 있는 언덕, 연안아파트를 지 나는 길의, 산이라고 부르기에는 낮고 작은 언덕이었다. 지금은 공구상가와 여러 건물 들이 세워져 있지만 이곳에서 태어나 자라난 어르신들은 넓은 언덕, 재, 고개라고 불리 던 밭이었다고 전한다.
통구모퉁이, 이 골목으로 들어가면 비구재라 불리던 곳 이 나온다
몇가지 알고 싶은 옛 지명을 따라 가다보니 어르신들의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발을 멈추고 귀를 쫑긋하게 되었다. 평리동 전투비행장이 들어서면서 그곳에 살던 수십가구 가 이전하게 되었는데 이쪽 동네로 많은 가구들이 이전을 했다고 한다. 연안아파트를 지나 언덕을 오르면 새터경로당이 나오는데 새터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가 거기에 있었 다. 새로운 마을, 새롭게 터를 이루어 사는 곳이라는 뜻의 새말, 새터라고 아직까지 이 곳을 부르고 있는 까닭이다. 그 시절, 아마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 행해진 계획된 이전 도시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비록 살던 곳이 비행장이 들어서면서 강제 이전을 당 하지만 이웃들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다시 함께 모여 살고 싶어하는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박재선 어르신이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이곳에 곰 사육장이 있었는데 알고 있나? 서울대가 이전을 하면서 서울사람이 내려 와서 곰을 키웠지. 우리나라 사람들 곰의 웅담(쓸개) 좋아하니까 그거 팔려고 키운거 지. 90년대에도 주말이면 서울에서 크고 좋은 차들이 많이 내려와서 웅담(쓸개)먹겠다
고 … 타조, 거위, 사슴도 키웠는데 아이 들이 무슨 동물농장 처럼 구경오고 그랬 지.”
고색동 최초의 아파트 연안아파트가 87 년에 입주를 시작하고, 십년도 더 지난 시간까지 아이들이 놀러오고, 먹이를 주 던 추억을 얘기한다.
왼쪽은 새말, 새터 오른쪽은 공구단지이고 그 끝에는 곰을 키우던 사육장이 있었다
오래전 그시절 누구나 어려웠던 그때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일제시대를 겪고, 해 방을 맞이하고, 근현대사의 굴곡진 역사를 이곳에서 맞이하던 모습은 어땠는지 궁금했 었다. 해방을 맞이한 기쁨도 잠시, 한국전쟁(6.25전쟁)이 일어나고 중국군이 가세하면 서 유엔군은 남부까지 후퇴하게 되었는데 이때의 우리 동네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우리 동네도 청년들의 사상이 갈라져 북한으로 월북을 한 젊은 사람들도 많이 있었 지, 그리고 월북했다고 나머지 가족들은 힘든 일을 당하기도 했어. 1.4후퇴 그때 우리 가족도 남쪽으로 피신을 했었지, 아버지가 우리 어린 형제들을 데리고 마차에 쌀과 옷 가지 등을 싣고, 피난을 갔었다가 다시 고색동으로 돌아왔어. 집에 와보니 폭격을 당해 망가져 마당 한쪽에 방 하나를 만들어 살기도 했었어.”
고향이 그리워 피난을 내려갔다가 다시 돌아와 새롭게 터전을 일구고, 살아가던 그때 를 더듬는 어르신의 모습이 아련해 보였다. 그 당시 이 지역에서도 이산가족이 많이 생 겼다고 하는데 몇십년만에 월북한 형이 살아있고, 남한의 형제들을 만나고 싶다는 연 락을 적십자로부터 받아서 금강산에서 만난 가족도 있다고 한다. 죽은 줄로만 알고 제 사까지 모시고 있었는데 50년도 더 지나 머리가 하얀 백발의 형제들이 만나는 기분은 어땠을까. 평동, 고색동, 오목천동에도 몇 명이나 이런 사연이 있다니 놀랍기만 했다.
통구모퉁이, 비구재에서 시작한 옛 길 이야기
새터, 새말을 지나, 이산가족 이야기까지 듣고 나서야 일단 숨을 돌렸다. 교과서나 TV 에서만 흥미롭게 때로는 안타깝게 여겼던 일들이 우리 지역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제서라도 알게 된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렇게 생생한 증언들을 들려주시는 박
재선 어르신을 비롯한 많은 지역의 어른들이 새해에도 건강하셔서 우리에게 더 많은 스토리텔링을 해주길 바랄뿐이다.
진흙 토질로 연와공장 설립에 최적지 벽돌 굽는 연기·재로 주민 얼굴 까매 사라진 것들에 대한 그리움 ‘연와’
동보연와 영신연와
예전 연와공장 터
시간이 지나보면 오래전 그 당시에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을 지금에서야 발견하게 될 때가 있다. 늘 보던 것들, 그 자리에 오랜 시간 지키고 있어서 아무 감정이 없었던, 낡고 빛이 바래 치워져야 할 대상이었던 것들이 가끔 그리워 질 때가 있다. 당시에는 사라지 는 것이 마땅했던, 반짝이는 새로운 것들에게 방해가 되었던 것들은 때론 향수라는 이 름으로 다가와 좀더 애정하지 못했던, 의미를 부여하지 못했던 일을 후회하게 만들기 도 한다.
연와이야기
진흙과 모래를 차지게 반죽하여 틀에 박아서 600~1,100도에 구워 만들거나, 시멘트와 모래를 버무려 틀에 박아 낸 네모진 건축재료, 표준길이는 길이 190mm, 너비 90mm, 두께 57mm이다. 벽, 담 등을 쌓아 올리는데 쓰이는 것 … 바로 연와(煉瓦)다. 벽돌로 순 화해서 부르기도 한다.
이번달에는 ‘연와’에 대한 이야기다. 영신연와, 동보연와에 대한 이야기는 비단 토
박이가 아니더라도 지역주민들이 많이 알고 있 을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고색중학교 옆, 태산아파트 뒤쪽에 가마터가 남아있었다. 현 대화 산업화 자동화로 더 이상 이해타산이 맞 지 않아 90년도 초부터는 더 이상 벽돌을 만들 지 않았는데, 가마터와 굴뚝이 남아있어, 낡고 방치된 것들이 아파트 주민들의 오랜 민원으로 철거가 되었다. 그뒤로 중고자동차의 주차장과 권선구 새마을협의회의 사랑의 감자밭으로 쓰 이기도 하였다.
일제시대 때부터 있었던 연와공장이 이곳에 자리잡은 배경에는 고색동의 진흙과 관계 가 깊다고 한다. 자신의 부모님이 벽돌공장에서 일하고 사택에서 살았다는 토박이는 “일본사람들이 다 알아보고 여기다가 연와 공장을 세운 것이지. 이곳 진흙은 오래전 부터 유명했다고 해. 비가 오면 고색동엔 사람들이 진흙 때문에 질척거려, 걷기가 힘들 어 가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해. 벌판지역인데 특징이 토질은 돌이 없고, 진흙과 황토로 이루어지고 찰져서, 그 찰진 진흙을 이용한 벽돌공장이 세워진 거지” 라는 말을 들려 준다. 그때 생겨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있는데 고색동 진흙이 많아 고색 살던 여자 가 시집을 가면 3년이 지나야 신발에 묻은 흙이 떨어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부모가 연와 공장에 다니는 아이들은 때론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벽돌로 굽 기 직전의 진흙은 아이들이 갖고 놀기에도 좋고, 초등학교 교과시간에 준비물로 가져 갈때도 인기짱이었다고 한다. 특별한 장난감이 없던 그 시절에 찰흙이 무엇보다고 훌 륭한 놀이감이 되었으리라. 그리고 그걸 조금 얻기 위해 눈을 반짝였을 아이들을 생각 하면 웃음이 난다.
이곳의 도로명은 공동우물길이었다. 연와공장 사택에서 살던 사람들이 공동으로 길러 먹던 큰 우물에서 유래된것 같다. 동네에서 오랫동안 살고있다는 주민을 만났다.“옛 날부터 이곳을 까막골이라고 부르기도 했어. 두 개의 큰 공장에서 계속 벽돌을 구워내 니 연기와 재로 이곳사람들의 얼굴을 까맸어. 그리고 주변 밭을 파보면 지금도 까만 흙 이 나오기도 해.”
얼굴이 까매지는 줄도 모르고 진흙을 가지고 놀던 그 시절 아이들이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것처럼 시간이 멈춘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계속 돌아보며 옹기종기 모여 있 는, 한때는 명성이 자자했을 가마터, 굴뚝, 사택 자리를 더듬어 눈에 담아 두었다.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나면 이곳 또한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변하겠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뜨거운 태양의 온도보다 결코 낮지 않은 여름이다.
1937년 탄생… 서민 운송하며 뒷이야기 많아 역 가까워지면 요금 내지 않으려고 뛰어내려 트럭과 부딪쳐 넘어졌다는 웃지 못할 얘기도
수인선 이야기
1937년 일제강점기에 생겨나 민족의 애환을 싣고 수원과 인천을 오가던 열차,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후 온갖 물자를 수탈하기 위해 수인선을 이용했고, 60년 가까이 서민들의 발 노릇을 하다가 1995년 이용객이 적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수인선 협 궤열차. 해방 후 국유화 되어 계속 운영되었으나 1970년대부터 시도 때도 없이, 다양 한 노선을 누비며 달리는 시외버스와 시내버스가 널리 등장했기 때문에 경제성이 없다 는 이유로 운행을 중단했다.
'협궤열차'라는 말은 일반적인 철도 레일사이의 간격(궤간)보다 훨씬 좁은 선로를 달리 는 기차를 말한다. 일반적인 광궤철도의 궤간이 1.435m(우리나리 표준)인데 반해 수인 선 협궤열차는 그것의 절반밖에 안되는 0.762m의 선로를 달렸다. 수인선 개통 당시의 정류장 역명은 수원, 고색, 오목, 어천, 야목, 빈정, 일리, 성두, 원곡, 신길, 군자, 소래, 논현, 남동, 문학, 송도, 인천항이었다.
동네 토박이 어르신들, 아니 40대에도 수인선 협궤열차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 삼삼오오 모여있는 곳에 ‘수인선‘이란 단어를 던지면 수많은 추억꺼리들이 나온다.
“오십여년 전 엄마 손을 잡고 인천에 게를 잡으러 자주 다녔어. 수인선 열차를 타고 돌 아오는 길, 기차표를 끊지 않아 고색역 근처에 왔을때 속도를 줄이면, 열차에서 뛰어내 리기도 했지” 돈도 돈이지만 그때는 하나의 재미고 놀이였다는 말도 했다. 아마 역무
원은 다 알고 있었겠지.
“인천가는 길에 언덕이 있는데 열차가 멈춰 서 올라가지 못할때는 손님이 내려서 밀 어야 고개를 넘었던 일도 있었어”
“어릴적엔 백다리라고 불렀어. 황구지천 위의 철길에는 나무받침목이 백개라고 해 서… 어떤 나무받침목은 오래되고 낡아서 떨어져 나간 곳도 있었는데 처음에 건널 때 는 바닥을 쳐다보면 얼마나 무섭던지”
“머리에 큰 광주리를 이고, 생선을 팔러 다니는 생선장수도 있었어. 집집마다 다니며 대문을 슬쩍 넘어 들어오며 마루에 광주리를 내려 놓으면 엄마가 생선, 꽃게, 맛조개를 사기도 했어”
“황구지천 위의 철길을 걷다가 저쪽에서 수인선 열차가 달려오면 철길과 받치고 있던 돌기둥 사이의 아래 공간으로 쏙 들어갔어. 그리고 열차가 지나가면 다시 위로 올라오 곤 했어”
“건널목에서 트럭하고 부딪쳤는데 수인선 협궤열차가 넘어졌다고 하더라구”
“열차가 얼마나 진동이 심했다구. 가뜩이나 좁은 객차인데 심하게 흔들리는 구간에서 는 앞사람의 무릎과 닿을 정도 였다니까”
고색동에서 영신중학교까지 철길을 따라 걸어다니며 친구와 수인선 협궤열차를 마주 칠 때 누가 먼저 피하나 내기를 했다는 기억, 어릴적 칠길 근처에서 냉이를 캐면서 열차 가 올까봐 귀를 철길에 가만히 대어 보기도 하고, 석탄을 가득 싣고 가는 열차에서 떨어 진 석탄을 주어다가 집에서 때기도 했다는 추억… 이런 것들은 모두 수인선 협궤열차 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들어도 들어도 끝이 없이 나오는 열차에 대한 추억들, 그리움은 켜켜히 쌓여 꺼내고 꺼 내도 재밌기만 하다. 어릴적 할머니에게 옛날이야기를 들을 때면 이야기가 끝날 때 마 다 ‘또해주세요’라는 말을 했는데 그때의 심정이라고 할까.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속에서도 수인선 협궤열차에 대해 적혀 있다.
"협궤열차 타봤어?" 그녀가 느닷없이 물었다. 나는 무슨 물음인가 하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 "그걸 한번 타보고 싶어서. 요전번에도 트럭하고 부딪쳐서 넘어졌다면서?" 류는 흰 이를 드러내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열차가 그런 식으로 넘어지는 것이 어쩌다 없지 않았다. 그 말을 듣자 나는 불현듯 역으로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끈 일었다. 그것은 욕망에 가까웠다.…
소설가 윤후명의 수인선을 무대로 한 <협궤열차>(1992년작)라는 소설의 한 부분이다. 또 박경리의 <토지>에도 수인선 협궤열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소래의 아낙들이 갓 잡은 싱싱한 수산물과 젓갈, 인근 농촌에서 가꾼 채소들을 열차에 싣고 올라 수원으로 돌아오는 길, 젓갈을 인 아낙들이 열차에 오르면 객차 안은 순식간에 갯내음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소래포구를 다녀온 어르신들이 저마다 꽃게, 대하, 생선, 조개 등을 한 상자씩 들 고 바다의 짠내도 같이 실려 왔으리라. 집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가족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주겠 다는 다짐이 더해져 열차는 또 기적소리를 내며 달렸으리라.
평동 마을이야기
엮은이
평동 주민자치회 평동 행정복지센터
편집 서동수, 서현경 디자인 서동수디자인연구소 발행일 2023년 8월 28일 펴낸곳 도서출판 디자인에스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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