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개론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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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우리는 왜 한국문학을 이야기하는가 … 3
2. 한국문학의 영역 … 7
3. 한국문학의 갈래 … 24
4. 언어·문체와 율격 … 141
5. 문학비평 … 174
6. 문학작품의 유통과 서책 … 194
7. 한국문학의 위상 … 216
1. 우리는 왜 한국문학을 이야기하는가
우리는 왜 한국문학을 읽고, 이야기하며, 연구하는가? 물음을 던지고 받는 이가 모두 이 땅에 살고 있는 한국인인 한 이 질문은 무의미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이 물음은 무의미하다. 우 리가 의식하든 않든 한국문학이 과거로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읽고 이야기하며 정밀 하게 이해한다는 일은 굳이 까닭을 묻기 이전에 하나의 주체적 필연 성으로 우리에게 부과되는 과업이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를 사는 한국인으로서 우리는 이 자연스러운 대답이 그 원칙적 타당성만큼 자명하게 받아들여지는지 확신하기 어 려운 때가 더러 있음을 느낀다. 단적으로 말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종류의 물음에 명시적으로나 묵시적으로 마주치는 경우를 상정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왜 굳이 <한국(韓國)>문학을 중요한 관심사로 삼는가? 그 것은 수많은 개별문학 중에서 어떤 하나를 이해하는 것과 대등한 선 택의 평면 위에 놓인 한 가지 일인가, 혹은 각별한 의의를 지니는 과 제인가? 우리는 왜 굳이 한국<문학(文學)>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가? 문학 은 많은 부분이 상상적 체험과 정서적 감응력에 의존하는데, 그렇다 면 우리에게 더 긴절한 요청은 객관적 실체로서의 역사와 그 이념, 사상에 대한 이해에 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 아닌가? 격심한 모순과 갈등으로 이어진 우리의 과거를 해석하고 현재를 조명하는 데 있어서 문학을 읽고 논하는 일은 역사학, 사회학, 정치학 등의 다 른 인문 · 사회과학만큼의 값이 있는가? 한국문학의 전체적 윤곽을 살피고자 발걸음을 떼어 놓으려는 단계 에서 두 가지 물음에 대해 완전한 답을 제시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둘째 물음은 단순한 사변적(思辨的) 성찰의 과제에 그치지 않고 문학
을 읽고 논하는 우리의 실천에 의하여 그 답이 완성될 수 있는 성질 의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제약에도 불구하고 위의 물음들에 대한 적극적 응답의 전망이 서지 않으면 한국문학의 온당한 이해를 위한 시야가 명료하게 설정되기 어렵다. 무엇을 이해한다는 행위는 언제나 주체의 위치와 시각에 관한 자각적 인식을 필요로 한다. 이 땅의 역사와 문화의 아들인 한국인이 한국문학을 진지한 관심 사로 삼는다는 것은 대등한 평면에 병렬되어 있는 여러 문학 중에서 어떤 일부에 흥미를 느끼는 일과는 원천적으로 구별된다. 논리상으로 가정한 초월적 시각에서 본다면 한국문학은 물론 중국문학, 일본문 학, 영문학, 프랑스문학, 칠레문학…… 등과 마찬가지로 지구상에 존 재하는 수많은 개별문학(個別文學)의 하나일 따름이다. 이들은 모두 문학이라는 커다란 덩어리의 한 부분이자 분신(分身)이므로 사람들은 그 어느 것을 통해서도 문학의 일반적 이해에로 나아갈 수 있다. 그 러나 모든 사람은 추상적인 일반개념으로서의 <사람>으로 존재하지 않고 일정한 언어, 역사, 문화에 의한 집단 속의 <나>와 <우리>로 존재한다. 이것은 곧 우리가 특정한 문학적 환경 속에서 이 세상과 대면하며 모국어를 통해 자신의 체험, 생각, 감정과 세계의 형상(形 象)을 그려내도록 조건 지어짐을 뜻한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이 제약은 일종의 감옥처럼 보인다. 어 머니의 속삭임과 자장가, 할머니의 옛이야기, 마을의 전설과 민요, 종교적 세계관의 원형을 내포한 신화(神話)와 경전(經典), 욕설, 은어 (隱語), 금기어(禁忌語), 속담, 커 가면서 얻는 갖가지 사회 · 문화적 체험, 예로부터 지금까지의 갖가지 고전(古典)과 숱한 작품들, 문학 · 예술에 관한 이런저런 설명과 다툼 … 이런 수많은 것들이 사람으 로 하여금 특정한 모국어 문학의 상속자가 되게 하며, 그를 그 속에 얽어 넣는다. 우리가 외국의 언어와 문학을 힘써 알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갇혀 있음>의 편견이나 무지를 넘어서 더 넓은 안목으 로 세계를 보고 스스로를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함이다. 그런 뜻에서 외국문학을 다양하게, 깊이 이해하는 일의 중요성은 거듭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타자(他者)를 앎으로써 나의 한정된 세계를 확장한다는 것 은 내가 나의 근거로부터 떠나 타자의 영역에로 이주(移住)해 가는 것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너무나도 자명한 말이지만 타자를 향해 개 방되고 확장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나와 내 세계가 있어야 하며, 이에 대한 주체적인 인식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우리는 위에 말한 모국어 문학이 한갓 감옥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주체의 주체됨을 떠받치고 다른 여러 문학의 능동적인 이해에로 나아가게 하는 토대이기도 함을 확인하게 된다. 문학 일반의 문제를 심층적으 로 탐구하는 데 있어서 각자의 모국어 문학이 가장 근본적인 바탕이 자 그 성과를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귀착점이 된다는 논리도 이로써 명백하다고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한국(韓國)>문학의 이 해를 단순한 선택의 지평 너머에 있는 과제로 받아들이게 하는 까닭 이다. 문학을 읽고 논하는 일이 실재(實在)로서의 역사와 그 이념, 사상 의 탐구에 필적할 만한 것인가라는 물음은 일단 플라톤의 시인추방 론이나 묵자(墨子)의 비악론(非樂論)과 같은 이성주의적(理性主義的), 실용주의적 시각으로부터의 회의를 머리에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위 의 물음이 우리에게 좀더 절실한 무게로 다가오는 직접적인 까닭은 우리의 가까운 선조들이 살았던 근대사의 가열(苛烈)함과 우리 자신 이 살고 있는 이 시대의 현실적 고뇌 때문이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지난 몇 세기 동안의 역사에서 정의(正義)의 원리가 너무나도 손쉽게 그리고 자주 부정되는 것을 체험했다. 또한 우리는 현실의 급 박한 움직임에 곧바로 대응하지 못하는 모든 가치에 대해 여러 차례 절망하고는 했다. 오늘날의 상황도 이로부터 예외는 아니다. 문제로 가득 찬 시대 속에서 그 실제적 효용이 확실치 않아 보이는 문학보 다 현실 역사의 얽힘을 파헤치고 사상적 모색의 맥락을 드러내는 일이좀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러나 이 회의(懷疑)는 내포한 동기의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문학
과 인간 모두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부터 출발한 것이기에 그대로 받 아들여질 수 없다. 문학은 현실에 실제로 있었거나 있는 특정 사실을 액면 그대로 모사(模寫)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실적(事實的)인 것과 거리를 가지지만, 바로 이 거리를 통해서 낱낱의 사실을 감싸 안으며 넘어서는 형상적(形象的) 인식(認識)에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염상섭(廉想涉)의 소설 「만세전(萬歲前, 원제 「묘지」, 1922)」에 등장 하는 주인공 이인화나 그의 가족들은 1910년대 말의 우리 사회 어딘 가에 있었던 특정 가문의 구성원에 정확히 부합하지 않지만 당대적 삶의 여러 양상이 긴밀하게 통합된 갈등구조를 통하여 오히려 어떤 보고서나 사료(史料)보다 절실하게 이 시대의 음울한 현실성과 내면 적 고뇌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논리적 사유나 개념으로 포 착하기 어려운 삶의 부피를 온전하게 살리면서 추상화되지 않은 진 실의 인식에로 나아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해의 절차가 조금 더 멀고 가까운 차이는 있더라도, 7세기 말의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에 대해서도, 15세기의 금오신화(金鰲新 話)에 대해서도, 그리고 조선 후기의 「춘향전(春香傳)」이나 청구야 담(靑邱野談)에 대해서도 우리는 마찬가지 해명의 의의를 말할 수 있다. 문학은 객관적 경험의 영역이나 이 세계와 인간존재에 관한 탐 구의 문제를 떠나서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형상적 체험의 전체성을 통해 그것들에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문학을 읽고 논하는 일은 그 자체가 과거와 오늘의 삶에 대한 적극적 인식을 추구하는 한 방식이자, 이 세계에 대해 실천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행위로서의 몫을 가진다. 이것이 우리에게 한국<문학(文學)>의 이해가 다른 영역 의 인문 · 사회적 탐구와 더불어 절실한 과제로 주어지는 이유이다.
2. 한국문학(韓國文學)의 영역(領域)
한국문학(韓國文學)의 범위(範圍)
한국문학의 전체적 윤곽과 특성을 파악하고자 할 때 무엇보다 앞 서는 과제는 그 시간적⋅공간적 범위를 획정하는 일이다. 우리는 편 의상 <한국>문학이라는 포괄적 용어로써 아득한 선사시대(先史時代)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우리문학 전체를 지칭하고 있지만, 수천 년의 역사 과정에서 우리 민족이 생활한 공간은 확장과 수축, 분열과 통합의 동적인 변화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므로 통시대적 개 념으로서의 한국문학은 이를 적절하게 포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와 아울러 우리는 19세기 이전의 사회⋅문화적 계층구조에 따라 표 현 언어와 전승 방식을 달리하면서 존재하였던 몇 갈래의 문학, 즉 구비문학(口碑文學)⋅국문문학(國文文學)⋅한문문학(漢文文學)이 어떻 게 한국문학의 범위에 포괄되는지, 그리고 이들 영역의 특성과 상호 관계는 어떠한지에 대하여도 기본적인 이해를 갖출 필요가 있다. 위의 두 가지 중 첫 번째 과제에 대하여는 심각한 논쟁의 여지가 없다. 삼국시대 초기 이전의 우리문학을 획정하는 지리적⋅문화적 경 계라든가 해외에 사는 한인(韓人)들의 문학을 어떻게 보는가 등의 문 제가 남기는 하나, 한국문학은 기본적으로 <한민족이 각 시대의 역 사적 생활공간에서 이루어 온 문학의 총체>라고 규정할 수 있기 때 문이다. 인종⋅언어⋅문화상으로 다양한 종족들이 혼합된 다민족국가 (多民族國家)의 경우와 달리 한국문학사의 흐름은 곧 민족사의 전개 과정과 일치한다. 선사시대로부터 고대국가 성립기까지에 해당하는
우리문학의 초기 단계는 중앙아시아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동진(東 進), 남하(南下)하여 한반도 및 만주일대에 정착한 제 부족이 통합되 면서 점차 종족문학으로부터 민족문학에로 나아간 형성기라 할 수 있으며, 그 이후의 한국문학은 고구려(高句麗)⋅백제(百濟)⋅신라(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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羅)의 삼국시대를 거쳐, 신라⋅발해(渤海)가 병립한 남북국시대, 고려 (高麗)시대, 조선(朝鮮)시대, 현대의 역사공간에 터를 두고 전개되었 다. 각 시대마다 많든 적든 존재하였고 또 지금도 찾아볼 수 있는 재 외 한족(韓族) 및 한인들의 문학은 문학의 영역이 단순한 지리적 개 념이 아니라 문화적 개념이라는 점에서 또한 한국문학의 주변적 부 분으로 포괄하여 마땅하다. 이에 비하여 표현 언어와 전승 방식에 따라 구별되는 문학영역을 우리문학의 전체 범위 속에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는 단순치 않은 문 화사적 검토를 필요로 한다. 구비문학⋅국문문학⋅한문문학이라는 세 가지 존재 양태 가운데서 구비문학과 한문문학이 그 논의의 대상이 된다.
구비문학(口碑文學)
이 중에서 구비문학은 그것이 한국문학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이 자 명함에도 불구하고 구비전승이라는 존재 방식이 문학으로서의 요건 과 상치되지 않는가라는 이의에 간혹 부딪친 적이 있다. 이러한 입장 을 지닌 논자들은 <문학(文學)> 및 "literature"라는 말이 어원적으로 <문자> 또는 <문자로 기록된 것>이라는 의미를 가졌었다는 점을 강 조하면서 기록성을 문학의 본질적 조건으로 보아 구비문학을 문학의
1) 여기에서 말하는 민족문학이란 물론 중세적 신분질서의 재편성과 더불어 대두하는 근대적 민족문학과는 구별해야 할 <시원적(始原的) 민족문학(民族文學)>이다.
범위(또는 중심영역)에서 제외하려 했다. 이에 의하면 한민족의 생활 사에서 형성⋅전승된 일체의 구비물(口碑物)은 비록 문학과 관련이 있으되 아직 문학의 고유한 영역에 들어오지 못한 <문학 이전의 언 어체(言語體)>이거나 준문학(準文學)일 따름이라 한다. 문학을 <기록 된 언어예술품>으로 규정하는 것이 어느 시대에도 통용될 수 있는 보편타당성을 가진다면 구비문학은 확실히 문학이 아니며, <구비(口 碑) oral>라는 말과 <문학 literature>이라는 말은 함께 연결될 수 없는 모순개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매우 편협하고도 그릇된 것이다. 음성언어 와 문자언어가 모두 언어이듯이 문학은 기록되든 않든 간에 언어를 매개로 한 예술로서 성립하며, 바로 그런 까닭으로 해서 언어적인 존 재인 인류의 오랜 생활사 동안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 만약 기록문 학만을 문학이라고 한다면 문자문명 이전의 인류에게는 문학이 없었 다고 할 것이며, 문자의 발달 이후에도 이를 능숙하게 쓸 만한 여유 를 누리지 못했던 고대⋅중세 사회의 대다수 하층민들이나 아직 문 자를 지니지 못한 여러 종족들 역시 문학의 세계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주장은 문학 이 사람의 보편적 욕구와 필요에 근거한 예술임을 부정하는 오류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인류 역사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구비전승에 힘입어 발전해온 문학사의 광대한 영역과 유산을 부당하게 축소하여 버리는 현재 중심주의의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문학의 전승 방식이 그 성격과 작용에 중대한 차이를 일으킨다는 점을 소홀히 할 수 없다. 구비문학과 기록문학의 차이는 기록성 여부라는 외형상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문학행위 전체의 양 상에 커다란 변이를 초래한다. 아울러 구비문학은 전승 방식의 속성 으로 인해 역사적 실체를 온전히 파악하기 어려우며, 우리가 손에 쥘 수 있는 것이란 옛 문헌에 여기저기 화석화(化石化)되어 흐트러져 있
는 자료 혹은 오랜 시간을 거쳐 오늘날까지 잔존한 이야기와 노래들 일 따름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해서 구비문학 이 진지한 문학일 수 없다든가, 기록문학 이해의 보조적 자료 정도로 취급되어 족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뒤에서 더 논하겠지만, 구비문학 은 우리문학뿐 아니라 모든 문학의 역사적 전체상을 온전하게 해명 하는 데 필수적인 의의를 가지는 중요한 영역이다.
한문문학(漢文文學) 배제론(排除論)의 문제
한문문학의 경우에는 한문이라는 표현수단으로 인하여 그 문화적 귀속의 문제가 심각하게 거듭 논의되었다. 이에 관한 여러 견해 가운 데서 한문문학의 한국문학 귀속을 부인하는 논자들은 한문이 중국에 서 온 글이라는 점을 결정적인 논거로 삼았다. 즉 <한국문학이란 한 국인의 사상⋅감정⋅경험을 한국어로서 표현한 문학>인 바, 중국으로 부터 온 글과 양식에 의하여 이루어진 문학을 우리문학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일찍이 1910년대부터 형성되 어 1920년대 말 무렵에 뚜렷하게 정식화(定式化)되고(이광수, 「조선 문학의 개념」, 1929), 1950년대까지의 우리문학 인식에 커다란 영향 력을 발휘하였다. 이러한 관점의 타당성 여부를 따지기 이전에 우리는 그 시대적 배 경과 동기를 일단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조선 왕조의 지배 질서와 긴밀하게 맺어져 있던 한학(漢學)과 유가적(儒家的) 이 념이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시대적 격류 앞에서 대응의 길을 찾지 못하고 무력하게 붕괴되고 만 데 대한 비판적 의식의 소산이다. 아울 러 식민지화의 질곡 속에서 스스로의 문화적 자존(自尊)과 개별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의식은 국어문학만이 진정한 우리문학으로서의 자 격을 가진다는 대전제를 절실하게 요구하였다. 한문으로 된 문학이
더 고상하고 진지한 문학이라는 낡은 통념은 이와 같은 역사적 전환 에 의해 타파되고 우리문학의 참다운 실체는 국문문학이어야 한다는 명제가 당연한 것으로 정립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역사적 의의를 인정하더라도 우리의 문화와 문 학사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볼 때 한문문학을 한 국문학의 영역으로부터 배제하는 것은 지나치게 편협한 명분주의적 (名分主義的) 태도이다. 문학에 있어서 언어의 문제가 제1의적인 중 요성을 가진다고 해도 그것은 각 시대에 있어서의 문화적 조건과 관 련하여 파악되어야 하며, 또한 한문은 일부 극단론자들이 말하듯이 단순히 <중국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19세기까지의 동아시아 세계, 즉 한문문화권에서 한문이 차지하였던 바 보편문어(普遍文語)로서의 위치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문은 물론 중국에서 나온 것이지만, 살아있는 생활언 어로서의 중국어에 곧바로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한문(漢文)>이라 는 말 자체가 시사하듯이 그것은 선진(先秦)시대로부터 한대(漢代)까 지의 기간에 문장언어로서의 전형이 성립된 고전문언문(古典文言文) 이다. 그런 점에서 한문은 중세 유럽의 라틴어나 아랍문화권의 고전 아랍어와 동일한 성격을 가지는 보편문어의 일종이다. 이처럼 일찍이 중국의 생활언어와 분리된 고전문어로서의 한문은 우리나라와 일본⋅베트남 등에로 전파되어 개별 민족어와 공존하면 서 해당 사회 상층부의 문화 속에 정착하였다. 이 중에서도 우리나라 는 고려 초에서 조선조 말에 이르기까지의 문치주의적(文治主義的) 기풍과 관료제에 따라 지배계급-지식층이 특히 한문에 능숙하여, 역 사 서술 및 행정은 물론 개인적 기록과 문학행위를 이로써 영위하였 다. 이와 같은 현상은 베트남과 일본에서도 비슷하였으며, 단지 사회 구조적 양상에 따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그 결과로 이루어 진 한문문학은 이들 각 민족이 한문이라는 보편문어를 통하여 한편
으로서는 동아시아 문화권의 문화적 자산을 흡수하면서 한편으로는 각자의 경험과 사고를 표현한 것으로서, 단순히 그 문자체계의 근원 만을 기준으로 삼아 타자(他者)의 것이라고 배제할 수는 없다. 보편 문어로 된 문학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달 수 있는 유럽 각국의 라틴어 문학에 비하여 동아시아 제민족의 한문문학은 세속적⋅개인적인 성 향이 훨씬 강하였던 까닭에 민족적 개별성을 더 풍부하게 발전시켰 다는 점도 여기에 참고할 만하다. 장황하게 논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지만, 유럽에서는 각국의 라틴 어 문학을 로마 문학이나 이탈리아 문학에 귀속시켜야 한다고는 보 지 않는다. 라틴어로 씌어졌다 해도 그것이 자국인에 의하여 자국의 역사적 경험과 문화의 일부를 형성한 것인 한 타자의 것이라 제외되 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과 우리가 다른 점은 로마 제국 의 영광이 이미 사라져서 오늘의 이탈리아와 동일시될 수 없는 데 비해 중국은 동아시아 지역에 커다란 세력으로 현존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근대 이전의 한문문화를 이 지역의 보편문화라는 시각에서 보기보다 현재의 문화적⋅정치적 국경에 결 부시켜 이해하는 방향으로 이끌리기 쉽다. 그러나 근대 국민국가 형 성 이전의 문화적 사실을 그 이후의 지리적 경계에 의해 일률적으로 구획하는 것은 온당한 논법이 아니다. 한문문학을 일률적으로 한국문학의 영역에서 배제할 때 야기되는 또 하나의 난점은 19세기까지의 문학 유산 중 상당 부분이 버려질 뿐 아니라 우리문학의 전개 양상과 내부적 관련의 전체상(全體像)을 온전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남아 있는 문헌자료의 양이 반 드시 문학사의 실상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방대한 양으로 현존 하는 한문문학 자료들은 그것이 창작⋅향수된 시대의 문학적 실상의 중요한 한 부분임에 틀림없다. 한국문학을 향유한 계층 역시 우리 역 사의 전체적 연관 속에서 생겨나고 활동한 객관적 실체인 한, 그들의
문학은 우리 문화와 문학의 여러 층위 사이에서 진행된 갈등⋅교섭 ⋅전이(轉移) 등의 역동적 양상을 구명하는 데에 긴요한 일부분이 된 다. 16세기의 강호시가(江湖詩歌)를 이해하는 데에 그 창작 주체인 사대부들의 한시(漢詩)와 성리학적(性理學的) 세계관을 중요한 관련 사항으로 검토해야 한다든가, 조선 후기 서사문학의 발달 양상을 해 명하는 작업에 야담(野談)⋅전(傳)⋅한문소설류의 다채로운 작용을 소 홀히 여길 수 없다는 등의 사례에서 이 점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한문문학(漢文文學) 포용론(包容論)의 시각(視角)
우리문학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한문문학의 포용에 대해 상 당한 신축성을 두는 절충적 입장이 나타나게 된 것은 이런 점에서 불가피한 일이었다. 대체로 1940, 50년대에 부각된 이 입장은 한국 문학의 범위를 획정하는 기본 전제에서 <우리말과 글로 된 문학>을 중심으로 삼되, 일부 한문문학을 그 주변영역으로 인정함으로써 위의 난점들을 완화하려 하였다. 그 결과 국어문학을 지칭하는 개념인 <진정한 국문학> <순국문학(純國文學)> <좁은 의미의 국문학>과 이 의 주변에 속하는 영역인 <준국문학(準國文學)> <더 큰 국문학> <넓 은 의미의 국문학> 등을 구분하여 한국문학의 영역 구성을 이원적으 로 파악하는 논리가 출현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절충안을 취한다 하더라도 한문문학을 얼마만큼 우리문학의 범위에 포용하는가는 논자에 따라 적잖은 차이가 있었다. 예컨대 조윤제(趙潤濟, 국문학사, 1949)는 국문문학을 <순국문학> 으로 한문문학은 <큰 국문학의 일부>로 하되, 설화와 소설만은 비록 한문으로 되었더라도 국문학의 흐름을 고려하여 순국문학에 포함시 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았다. 이병기(李秉岐)⋅백철(白鐵)은 한문문 학을 내용적 특성에 따라 취사(取捨)하여 국문학사의 보충자료로서
이용해야 한다는 절충안을 제시하고, 공저(共著) 국문학전사(國文學 全史)(1957)에 한국 한문학사를 별도의 부록으로 삼았다. 장덕순(張 德順, 국문학통론, 1960)은 더 포용적인 입장을 취하여, 훈민정음 창제 이전의 문학은 차자표기(借字表記, 향찰)에 의한 것이건 한문에 의한 것이건 모두 국문학으로 처리하고, 훈민정음 창제 이후의 문학 은 국문문학만을 국문학으로 우선 규정하되 한문문학 중 <국문학적 가치>가 있는 것은 <보다 큰 국문학>의 범위에 귀속시킬 수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은 절충안은 국어문학만이 한국문학이라는 완강한 규정에 비하여 여러 가지 이점을 가지고 있으나, 절충의 기준과 타당성에 관 한 문제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지는 못하다. 우선 우리는 한문 문학 중에서 <국문학적 가치>가 있는 갈래(양식) 혹은 작품들을 가려 내는 기준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위에서 단적으로 보 았듯이 이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는 일정하지 않으며, 하나하나 의 기준 안에서도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구분상의 난점이 발견된 다. 예컨대 한문문학 중에서 설화⋅소설류만을 한국문학의 범주에 포 함시키는 것은 19세기까지의 국문시가(國文詩歌) 역시 사대부층의 한 문문학적 교양 및 한시의 세계와 상당한 관련을 맺어 왔다는 점에서 불균형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훈민정음 창제(1446) 이전과 이후의 한문문학을 자격상으로 구별해야 한다는 주장은 원칙론적으로 이해 할 만하나, 한글 창제 이후에도 사대부층의 문자생활과 문학 활동에 서 한문의 압도를 수정할 만한 사회⋅문화적 조건의 변혁이 없었다 는 점을 생각하면 이 구분도 역사의 실상에 따른 것이기보다는 규범 적 분할의 논리에 속한다. 인문적(人文的) 현상에 관한 모든 연구행 위가 가치평가적 속성을 가진다는 명제는 참이라 해도, <국문학적 가치>란 해당 작품들을 일단 연구대상으로 인정한 위에서 이루어지 는 해석⋅평가의 결과이지 그것을 전제로 대상 영역에의 귀속을 가
늠할 수는 없다는 점도 위의 견해들에 공통된 문제점이다. 이해의 대상으로 삼기 전에는 가치를 파악할 수 없고, 가치를 인 정하기 전에는 대상으로 포용할 수 없다는 인식론상의 순환논리를 어떻게 해결한다 해도 남게 되는 또 하나의 문제는 <국문학적 가치> 가 있는 부분을 가려낸 나머지의 한문문학을 과연 한국문학의 영역 에서 제외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이 경우에도 앞서 지적한 바 의 난점, 즉 우리 역사에서 생성된 여러 층위의 문학 사이의 다면적 관련과 전체상을 온전하게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은 기본적으로 존속 한다. 국문학적 가치가 희박한 부분을 가려낸다 해도 그것이 문학사 의 당대적 맥락 속에서 일정한 의미⋅기능을 가지고 다른 문학행위 와 상보적 혹은 대립적으로 존재하였던 것인 한, 이를 도외시하고는 그 밖의 영역에 대한 올바른 이해도 제약될 수밖에 없다. 손쉬운 예 로 박지원(朴趾源)의 경우를 들어 본다면, 「허생전(許生傳)」 「호질(虎 叱)」 「양반전(兩班傳)」 등의 작품세계는 그의 문학의식을 담은 비평 적 저작이나 열하일기(熱河日記)등과 떼어놓고는 깊이 있게 해명 하기 어려우며, 이들 전체는 또한 18세기의 유학(儒學) 사상과 정통 한문문학이 당면하였던 내부적 갈등의 얽힘에 비추어짐으로써 그 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귀결은 19세기 말까지 의 우리 역사공간 안에서 이루어진 한문문학을 그 귀속 자격에 관한 한 아무런 차등 없이 한국문학의 범위에 포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 입장은 앞서 검토한 절충안이 국문학 연구의 진전에 따라 여러 가지 난점을 드러내게 된 1950년대 말 이후 본격적으로 제출되 어 1970년대 이래로 보다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구체적 연구 성과를 통해 그 의의를 입증하고 있다.
한국문학(韓國文學)의 총체(總體)
이와 같은 관점에서 파악할 때 한국문학이란 <한민족(韓民族)의 경험⋅사고⋅상상이 역사상의 각 단계마다의 생활방식과 문화적 조 건에 상응하는 표현 언어를 통하여 형상적(形象的)으로 창조된 문학 의 전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한국문학은 우리 민족에 의해 면면히 이어져 온 문학적 창조와 그 나눔의 시간적⋅공간적 총 체이므로, 수천 년에 걸치는 역사단계에서 각 시대마다 다양하게 나 타난 표현방식(구비전승, 차자표기, 한문, 한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모두를 우리는 한국문학의 영역 안에 포괄하고자 하는 것이다. 앞 서 논의된 여러 난점들은 이에 이르러 해소된다. 이에 따라 우리는 현재와 과거의 문학을 그 전폭에 걸쳐 이해의 대상으로 삼게 될 뿐 아니라 한국문학의 역사적 발전⋅변모 과정에서 여러 층위의 문학 사이에 일어난 상호교섭과 갈등을 임시방편적인 예외논리에 의존하 지 않고 온전하게 다룰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문화의 전체상 을 충실하게 파악하는 데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국문학의 범위에 포함되는 여러 영역을 도형화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제영역(諸領域)의 상관관계와 의의(意義)
한국문학의 영역을 구비문학⋅한문문학⋅국문문학의 총합으로 볼 때 뒤따르는 과제는 이들 각 영역의 특징과 역사적 상관관계에 대한
거시적인 이해이다. 이들 세 영역은 표현⋅전승 방식과 사회적 배경 의 차이에 따른 개별성을 지니는 한편, 우리 문화의 전체 구조 안에 서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계속하면서 각 시대마다의 역사적 조건에 따라 그 역할을 달리해 왔다. 이를 살피기 위해 우리는 구비문학⋅국 문문학⋅한문문학의 전개 양상에 따라 우리 문학사를 다음과 같이 여섯 단계로 나눌 수 있다.
대.
장한 시대.
i) 구비문학만이 있던 시대. ii) 구비문학이 문학의 대부분을 차지하되, 한문의 전래에 의해 일부 구비문학이 문자로 기록되고 한문문학이 부분적으로 출현한 시
iii) 구비문학과 병행하여 향가(鄕歌)와 같은 차자표기(借字表記) 문 학(文學)이 형성⋅발달하고, 제한된 사회계층에서 한문문학이 성
iv) 문인⋅지식층의 한문 사용이 보편화되어, 사회 상층의 한문문학 과 하층의 구비문학이 병존한 시대. v) 한글이 창제되어 한문문학⋅국문문학⋅구비문학이 사회계층적 구 조와 긴밀한 관련을 맺으면서 공존한 시대. vi) 신분제적 사회체제의 붕괴로 인해 한문문학이 존재 기반을 상실 하고, 인쇄문화의 발달에 따라 구비문학의 의의도 크게 약화되면 서 국문문학이 한국문학의 거의 전 영역으로 확대된 시대.
구비문학은 위의 여섯 단계 중에서 i)의 시대로부터 v)의 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존재하였던, 우리문학의 근원이자 기층(基層)이다. 모든 나라의 문학이 그러하듯이 우리문학은 구비문학만이 있던 시대로부 터 출발하여 구비문학과 기록문학이 공존하는 단계로 발전했으며, 이 과정에서 구비문학은 그 자체의 변모․발달과 더불어 기록문학에 소재 ⋅양식⋅상상력을 제공하는 원초적 자산으로 작용하였다. 우리말의
심원한 깊이와 아름다움을 통해 신라인들의 서정을 탁월하게 노래한 향가도 구비문학에 근원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 소설의 중요 부분인 판소리계 소설은 구비서사시(口碑敍事詩)인 판소리에서 왔고, 판소리 는 이보다 더 원초적인 형태의 구비문학과 예술에 발생론적인 관계 를 맺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지속적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구비문학의 문학사 적 비중이 항상 동일하였던 것은 아니다. 아직 문자문화가 존재하지 않았던 선사시대(先史時代)로부터 뒤의 시기로 갈수록 그 역할이 축 소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세이거니와, 이를 좀 더 명료하게 나누어 말한다면 i), ii), iii)의 시기에 있어서의 구비문학과 iv), v) 단계에 있 어서의 그것을 구별하여 볼 수 있다. 이 중 앞의 단계에서는 구비문 학이 전사회적(全社會的) 기반을 지닌 문학형태였던 데 비해, 뒤의 단계에 들어서는 문인⋅지식층의 한문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사회 상 층부의 한문문학이 발달하고 구비문학은 평민층 및 그 이하의 하층 민 세계를 주된 영역으로 하게 되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한 차이 이다. 대체로 보아 고대(古代)에 해당하는 전자의 시기에는 구비문학 이 사회기층을 망라한 포괄성을 지녔으나, 고려 초기 이래의 중세사 회에서는 신분질서에 따른 문학의 이원화(二元化)에 의해 구비문학의 계층적 하강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물론 고려 초기 이후의 문인⋅ 지식층도 구비문학으로부터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옛 이야기와 노래를 통해 이 세계에 눈뜨고, 성년이 된 이후에도 절실한 감흥을 노래하는 데에는 고유의 국어문학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되었 다. 그러나 전반적인 양상을 보건대는, 문자문화를 누릴 수 있었던 지배적 계층은 보다 많이 한문문학에 의존하고 하층민들은 거의 완 전히 구비문학에 의하여 문학적 욕구를 충족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역사적 요인에 따라 구비문학이 지니게 된 특성을 우리 는 민족문학적 기층성(基層性)과 민중성(民衆性)의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민족문학적 기층성이란 어떤 민족문학에서 지속적 혹은 재귀적(再 歸的)으로 나타나는 형상적(形象的) 사고(思考)의 원형, 주제, 표현 양식, 모티프, 리듬 등의 특질을 총칭하는 것으로서, 우리의 구비문 학은 먼 상고시대로부터 iii)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한문문화의 유입에 도 불구하고 한국문학의 주류(主流)로 계속되는 동안 이의 원초적 바 탕을 형성하였다. 이와 같은 특질은 고려, 조선 시대에 이르러 문인 ⋅지식층의 한문문학이 발달하면서 좀 더 뚜렷해지게 되었다. 즉 상 류의 문인층이 동아시아 문화권의 공통문어(共通文語)인 한문을 문학 언어로 사용하면서 흔히 초민족적 보편주의의 이념과 미의식을 지향 한 데 비하여, 대다수 민중들은 민족어와 토착양식에 의한 구비문학 으로 고유한 생활경험⋅사고⋅미의식을 표현함으로써 민족문학적 기 층성을 보다 선명하게 유지하고 발전시켰던 것이다. 아울러 중세 지 배계층의 한문문학이 현실의 생활체험과는 상당한 거리를 둔 관념세 계와 미의식의 추구에 기울고는 하였던 데 비하여, 구비문학은 직접 적인 노동과 생활의 지평에서 고투(苦鬪)하는 사람들의 문학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나날의 삶에 밀착된 현실성⋅민중성을 가질 수 있었 다. 문화는 상이한 것들 사이의 교섭과 보편적 이상의 추구라는 동인 (動因)에 의해서도 그 폭과 깊이를 더해 가는 것이므로 우리는 한문 문학의 가치도 정당하게 평가해야 하지만, 구비문학의 이 두 속성은 한국문학의 저류를 파악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특질이 아닐 수 없다. 고대국가(古代國家) 성립기를 전후하여 한문이 전래된 이후 소수의 지식층에 의해 창작되던 한문문학은 신라(新羅)⋅발해(渤海)가 병립한 남북국 시대(8~10세기 초)에 이르러 상당히 발전된 수준에 이르렀으 나 그 사회적 기반과 범위는 아직 지배계층 전반에 걸칠 만큼 넓지 는 않았다. 참고할 만한 자료가 다소 남아 있는 신라의 경우를 보면
육두품(六頭品) 출신의 문인⋅학자들과 당(唐) 유학생들이 한문문학의 담당계층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한문문학은 고려의 건 국 이후 유교 이념에 입각한 문치주의(文治主義) 사회가 형성되고 관 료제가 발달하면서 본격적인 확산⋅심화를 보게 되었다. 호족(豪族) 연합정권의 성격을 지니고 출발한 고려 왕조는 중앙 집권적 관료제 를 통해 국가체제를 재정비하고자 하는 뜻에서 과거제를 시행하는 등 한학적 교양을 중시하였다. 이에 따라 신라 이래의 차자문학(借字 文學, 향가)은 쇠퇴하고 지배층의 세계에서는 한문문학이 보편화되었 다. 이와 같은 추세는 양반관료국가(兩班官僚國家)인 조선 왕조에 와 서 더욱 심화되어, 한문문학은 사대부층의 필수적 교양으로 굳건히 자리 잡고 수많은 작가와 탁월한 작품이 나왔다. 한문문학은 이처럼 지배계급인 문인⋅사대부층에 의하여 향유된 데다가 표현 언어인 한문의 특성으로 인해 일반적으로 매우 강한 폐 쇄성을 지녔다. 아울러 유학을 중심으로 한 천하의식(天下意識) 아래 요(堯)⋅순(舜)⋅공맹(孔孟)의 도(道)를 이상으로 삼는 중세적 보편주 의와 문학상의 중화적(中華的) 전범(典範)에 대한 지향성이 여기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사실로 인해 한국 한문문학의 역사적 발전과 개별문학적 주체성이 부정될 것은 아니다. 한문문화 유산에 대해 무조건적인 부정의 태도를 가진 이들이 생각하는 바와 달리 우리의 한문문학은 중국문학과 긴밀한 관련을 가지면서도 각 시대마다의 문학담당층과 사상적 추이에 따라 다채로운 변모, 분화, 갈등, 발전을 보여 왔다. 한자의 음가(音價)를 중국음과는 다른 국어 음운으로 정착시키고 한국한문의 독특한 독법(讀法)을 활용한 등의 기본적 사항은 물론이거니와 양식⋅주제⋅소재 등의 선택과 그 구현 에서 우리의 선인(先人)들은 의식적이든 아니든 자신이 살고 있는 세 계의 여러 문제와 스스로의 주체를 표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17세기 이후에는 <조선시(朝鮮詩)> <조선풍(朝鮮風)> <이언(俚
諺)> 등의 개념으로 선명하게 집약되는 문학적 개별성에의 자각이 활발하게 나타났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와 아울러 우리가 합당하게 평가해야 할 한문문학의 의의는 그 것이 우리문학의 폭을 넓히고 정치(精緻)한 심미적 의식과 풍부한 사 유의 세계를 이루는 데 적잖이 기여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여 보편 문어 문학이자 지배층의 문학이었던 한문문학은 고유어로 된 기층문 학(基層文學)과 공존 혹은 대립하면서 후자의 즉생활적(卽生活的) 구 체성(具體性)과 개별문학적(個別文學的) 구심력(求心力)에 대해 상보 적 의의를 가지는 초월성 및 보편지향적 원심력(遠心力)으로 작용하 였던 것이다. 이러한 성향이 극단화될 경우에는 물론 공허한 귀족취 미와 몰주체적인 중화주의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문학의 전체적 구조 안에서 한문문학이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한국문학적 개 별성을 형성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고유어 문학의 바탕에 새로운 자산들을 덧보탬으로써 그 영역을 확충하고 내용을 다채롭게 하는 기능을 발휘하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문문학은 국어문학이자 기록문학이라는 점에서 구비문학과 한문 문학 사이의 중간적 위치에 있으며, 실제로 이들 영역과의 다양한 관 련 속에서 발달하여 왔다. 향찰로 기록된 최초의 국문문학인 향가는 구비문학의 바탕 위에서 출발하여 10구체 향가라는 격조 높은 서정 시 양식을 낳았다. 그러나 고려조에 와서 향찰이 쇠퇴한 이후 국문문 학이 본격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토대는 조선 세종(世宗) 때의 훈민 정음 창제(1446)를 기다려야 했다. 한글 창제라는 문학사적 전환점 이후의 국문문학은 관변문학(官邊文學) 및 국가적인 편찬⋅번역사업 으로부터 시작하여 우선 사대부층 남성과 부녀들에게로 확산되었다. 대체로 조선 전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의 국문학은 먼저 시가 부문에 서 발달하였고, 후대의 산문문학이 성장하게 될 문체적 바탕이 마련 되었다. 이러한 축적 위에서 17세기 중엽 이후 여항가객(閭巷歌客)들
의 등장, 소설⋅야담을 포함한 산문문학의 다양한 전개, 상업적 출판 의 융성, 시정문화(市井文化)의 발달 등 여러 현상들이 서로 연관을 맺으며 전개됨에 따라 국문문학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매우 풍성한 단계에 이르렀다. 특히 중세 사회 해체기에 해당하는 이 시대의 문화 상황 속에서 국문문학은 중세적 문인취미에 대조되는 현실주의와 세 속적 지향을 근간으로 삼아 근대적 삶의 인식에로 나아가는 커다란 진전을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역사적 격변 이후 한문문학이 존재기반을 상실하고 구비문학 또한 그 역할이 쇠 퇴함에 따라 국문문학은 한국문학의 거의 전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 다. 이와 같은 발전과정에서 국문문학은 구비문학을 모태로 하고 한문 문학으로부터의 기여를 흡수하였을 뿐 아니라, 그 담당층에 있어서도 사대부 문인으로부터 하층의 천민(賤民)에까지 이르는 다양성을 보여 준다. 창작, 전파, 향수에 관여한 계층의 다양성은 당연히 그것이 다 루는 경험의 영역을 풍부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포괄성은 국문문학 이 중세적 신분제와 이원적(二元的) 문화구조의 틀을 넘어 보다 넓은 공감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적 요소로 되었다. 그런 뜻에서 국문문학은 구비문학⋅한문문학과 더불어 한국문학의 범위를 구성하 는 한 영역이면서, 우리 문학사의 시간적 연속 안에서 이들을 포용하 여 민족문학의 통일적 지평을 형성하여 나아간 중심적 부분이라 말 할 수 있다. 19세기 말을 경계로 하여 그 이전의 국문문학을 구비문학⋅한문문 학과 함께 고전문학이라 하고, 그 이후의 국문문학을 현대문학이라 부르는 구분도 관습적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러나 고전문학과 현 대문학의 구별은 연구의 편의를 위한 시대적 분할의 결과일 뿐, 이들 이 서로 단절된 별개의 영역을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우리 문학 이해에서는 오히려 이와 같은 편의적 양분법에 따른 인식의 왜
곡을 극복하는 일이 절실한 과제로 대두되어 있다.
문학(文學)과 갈래
2. 한국문학(韓國文學)의 갈래
특정한 개별문학의 전반적 윤곽을 파악하고 보다 구체화된 이해에 로 나아가는 지침을 얻고자 할 때 해당문학을 이루고 있는 갈래(장 르)들의 종류와 주요 특징을 개관하는 방법이 많이 쓰인다. 이것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전통적 방법이어서 케케묵은 것이라는 느낌을 주기까지 하지만, 여전히 상당한 미덕을 가지고 있다. 우리도 일단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한국문학의 갈래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러나 전통적 방법의 이점을 살린다고 해서 그 문제성과 편견까 지를 되풀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특히 갈래를 문학 이해의 실상으로부터 동떨어진 교과서적 분류로 화석화(化石化)시키거나, 실 험실의 진열장에 가지런히 배열된 약품처럼 순일(純一)한 질료들의 군집(群集)으로 여기는 접근 방법은 깊이 반성되어야 한다. 이를 위 해 우리는 한국문학의 갈래들을 개관하기 전에 갈래의 일반이론에 대한 약간의 검토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은 하나하나의 개별 작품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 다. 엄밀하게 따져볼 때 이 주장은 정확하지 않다. 한 편의 문학작품 은 진공 속에 홀로 떠 있는 객체가 아니다. 그것은 일정한 언어⋅문 학의 지평 안에서 여러 가지 문학적 관습과 기대를 매개로 하여 작 자와 독자 사이에, 그리고 앞 시대와 동시대의 수많은 작품들 사이에 숨 쉬고 있는 의미체(意味體)이다. 우리가 어떤 작품을 이해한다는 것은 텍스트의 액면적 의미만을 아는 데에 그치지 않고, 해당 작품을
둘러싼 문학상의 관습과 기대를 참조하면서 그것을 인간 경험의 어 떤 모습으로 살려내는 일에 해당한다. 예컨대 <어져 내 일이여 그릴 줄을 모르던가>라고 시작되는 한 작품을 처음 대할 때 우리는 그와 비슷한 형태, 어법(語法), 구조를 지닌 다른 작품들의 경험을 의식적 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떠올리고 작품의 흐름 속에서 무엇인가를 예 상하거나 되돌아가 짚어 보면서 구체적인 이해를 형성한다. 그러한 참조의 근거가 전혀 없다면 우리의 작품 이해는 대개 아주 더디며 불확실한 것이 된다. 이 점은 작자의 창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자신이 속한 문학 세계의 관습과 방법을 습득하고 때로는 변용하면서 경험⋅상상 을 작품화한다. 그리고 그 소산인 작품은 다시 기존의 관습⋅규준에 작용하는 새로운 인소(因素)가 된다. 이처럼 작가⋅작품⋅독자를 매개하면서 인간 경험의 예술적 형상 화를 인도하는 여러 층위의 관습들이 일정한 연관을 갖추고 다수의 작품에 공통적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그것을 갈래(장르)라고 부른다. 갈래란 일정한 군집의 작품들이 공유하는 문학적 관습의 체계이며, 개별 작품의 존재를 지탱하는 초개인적(超個人的) 준거(準據)의 모형 이다. 미시적(微視的)으로 관찰할 때 모든 문학 작품은 어느 하나도 같지 않다는 점에서 개성적이지만, 그 개성이 일정한 문학 행위의 장 (場) 속에 실현되기 위하여는 기존의 양식 및 관습과 어떤 방식으로 든 관련을 맺지 않을 수 없다. 일체의 관습화된 제약을 거부하는 실 험적 예술조차도 그것이 신선한 충격을 주기 위하여는 부정할 관습 이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출현과 발전이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 들여질 경우 실험적 예술 행위 자체가 새로운 양식을 형성하게 된다. 그런 뜻에서 모든 문학⋅예술 작품은 초개인적 관습과 개체적 체험 ⋅욕구의 결합에 의한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문학 이해에서 갈래가 이처럼 중요하다 해도 그것을 엄격
히 구획된 분류상자 혹은 견고하게 닫혀있는 방들처럼 여기는 것은 옳지 못하다. 문학상의 갈래들 사이에는 때때로 귀속이 불분명한 작 품들이 있다. 또한 하나의 갈래 안에 포괄되는 작품이라 해도 해당 갈래의 속성에 완전하게 부합하지 않는 예가 종종 발견된다. 시조, 판소리, 몽유록(夢遊錄), 소네트, 희랍 비극 등과 같은 역사적⋅관습 적 갈래들은 어떤 선험적 원리에 의하여 본래부터 그렇게 있었던 것 이 아니다. 그것은 문학 행위의 시공(時空) 속에서 언젠가 형성되어 혹은 길고 혹은 짧은 기간 동안 존속하다가 어떤 시기에 이르러 붕 괴하거나 다른 것으로 변모하는 역사적 산물일 따름이다. 갈래란 일정 범위의 작품들을 완전무결하게 귀일시키는 특성⋅원 리의 조직체라기보다, <친족적(親族的) 유사성(類似性)>을 지닌 다수 의 작품에서 추출되는 범례적(範例的) 일반형(一般型)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대와 문화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개별 작품은 그것 이 속한 갈래의 범례적 일반형에 충실히 부합하기도 하고 다소 어긋 나거나 심하게 변형되기도 한다. 비록 후자의 경우라 해도 일반형으 로서의 갈래는 그 어긋남이나 변형의 정도 및 방식을 파악하는 데 긴요한 참조의 틀이 된다는 점에서 완전히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또 한 어떤 갈래들은 여러 층위의 관습들을 엄격하게 준수하도록 강요 하는 데 비하여, 비교적 단순한 요건을 충족하는 것으로 족한 느슨한 갈래도 있다. 갈래는 이성적 규칙의 산물이기에 불변하는 본질적 규 범을 지닌다고 믿었던 시대가 있는가 하면, 모든 갈래는 인위적 추상 화의 산물일 뿐 창조적 개성과는 무관하다는 주장이 환영받은 시대 도 있다. 각국 문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어떤 시기에는 갈래들의 안정 적 균형이 오래도록 유지되다가, 어떤 시기에는 신구(新舊) 갈래들의 변화와 부침(浮沈)이 아주 심하기도 하였음을 알게 된다. 문학의 갈 래에 대한 설명은 가능한 한 간명하면서도 이러한 편차와 역사적 동 태(動態)를 포괄할 만한 유연성을 갖추는 것이 바람직하다.
작은 갈래와 큰 갈래
이처럼 역사적 실체로서 존재하였거나 현존하는 갈래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동서양의 학자들은 오랜 옛날부터 모든 관습적 갈래들 을 적절하게 포괄할 수 있는 몇몇 상위(上位)의 범주 즉 큰 갈래(장 르류)를 설정하고자 노력해 왔다. 그 내용은 실로 다양하여 2분법, 3 분법, 4분법, 5분법, 7분법 등 여러 가지 분류체계를 볼 수 있으며, 큰 갈래들의 변별적(辨別的) 자질과 속성에 관하여도 다단한 이설들 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자리에서 갈래 이론의 근본 문제를 깊이 파고들기보다 한국문학의 전체적 윤곽을 개관하고자 하는 터이 므로, 근래에 비교적 널리 통용되기 시작한 4분법 체계를 택하여 그 구체적 적용을 위한 주요 사항만을 간략히 논하기로 한다. 4분법 갈래론이란 문학작품의 형성원리 및 존재방식을 크게 네 개 의 특성 또는 범주로 나누고, 이로써 다양한 역사적 갈래(작은 갈래) 들의 속성 및 상호관계를 설명하려는 이론이다. 네 개의 큰 갈래는 논자에 따라 달리 설정될 수 있으나, 서정(적인 것), 서사(적인 것), 희곡(적인 것)의 전통적 3분법에 의론(議論)⋅기술류(記述類)를 제4의 큰 갈래로 추가하는 조동일(趙東一) 교수의 구도(構圖)를 채용하기로 한다. 이와 같은 4분법은 동아시아 문학의 역사적 전체상을 포괄하 는 갈래 이론의 구성에 특히 긴요하다. 문학의 상상성, 허구성을 중 시하는 서구 근대문학 이론에서 널리 통용되는 3분법 갈래론으로 우 리의 문학 전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은 실제적 설명능력의 한계가 명백하다. 한국⋅중국⋅일본⋅베트남 등 한문문화권에서는 전통적으 로 직접적인 자기표현의 문학과 기술⋅의론의 언어행위가 당당한 문 학으로-심지어는 허구적인 문학보다 더 진지한 문학으로-여겨졌기 때문이다. 19세기 이전의 문집(文集) 대부분을 채우고 있는 시(詩)⋅ 문(文)이라든가 각종 기록문학류가 그 단적인 예이다. 교훈적⋅이념
적 전달이 주가 되는 의론류와 사실 기록 및 경험의 서술이 주가 되 는 기술류를 모두 포괄하는 이 영역을 어떻게 명명(命名)할 것인가에 관하여는 아직 만족스러운 결론이 없으나, 우리는 일단 위의 4분법 갈래론을 제창한 조동일 교수의 용어를 취하여 이를 <교술>(적인 것) 이라 부르기로 한다. 그러나 이처럼 4분법의 입장을 취한다 해서 갈래 이론상의 여러 논의가 매듭지어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문제는 여기서부터 본격화 한다. 그것을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물음으로 집약할 수 있다.
념인가?
i) 서정(적인 것), 서사(적인 것), 희곡(적인 것). 교술(적인 것) 등의 큰 갈래는 일정한 원리⋅요건에 따라 서로간의 경계선이 확연히 구분되는 범주적(範疇的) 개념인가, 혹은 일종의 이념형(理念型) 으로서 그들 사이의 중간적 위치를 인정하는 좌표적(座標的) 개
ii) 위의 둘 중 어떤 입장을 택하든, 큰 갈래들은 역사와 문화의 차 이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렇게 있는 실재(實在)인가, 혹은 문학의 다양한 작은 갈래들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따라서 다른 것으 로 대치될 수 있는) 개념의 장치인가?
위의 두 가지 물음에 대해 우리는 모두 후자의 입장을 취하기로 한다. 즉 큰 갈래의 체계는 다양한 역사적 갈래들을 파악하기 위해 구성된 개념틀로서, 우리는 이러저러한 큰 갈래들의 전형적⋅중심적 속성을 집약할 수 있지만 실제의 역사적 갈래들은 이들 중 어떤 하 나에 충실히 부합하기도 하고 다소 벗어나기도 하며, 때로는 큰 갈래 들 사이의 중간적 위치 어딘가에 놓일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의 원론적 논의는 부득이 제한될 수밖에 없으나 우리는 이 입장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큰 갈래는 그 초시대적, 범문화적(汎文化的) 실재성을 믿는
논자들이 주장하듯이 어떤 시대 어느 문학에나 통용되는 보편적 범 주 혹은 완전한 체계일 수 없다. 인문적(人文的) 현상에 관한 모든 이론 모형이 그러하듯이 큰 갈래의 본질과 체계에 대한 이해는 일차 적으로는 특정한 세계관과 문학적 태도를 반영하고, 이차적으로는 갈 래론자의 관심 및 연구 동기가 투사된 전략적 가설의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그것은 이러한 문화 근거 및 연구자의 관심에 가까운 차원에 서 더 높은 효용을 발휘하며, 그로부터 멀어질수록 설명능력이 박약 해지는 것이 불가피하다. 물론 큰 갈래의 종류와 성질에 관한 모든 이론들이 똑같은 정도의 효용과 타당성을 가진다고 할 수 없다. 그러 나 수천 년의 문학이론⋅비평사를 통해 숱한 갈래론이 등장하고 또 현존하는 데에는 큰 갈래 구분 자체의 역사성이라는 근본 요인이 깔 려 있는 것이다. 둘째 큰 갈래의 실재성을 가정하는 보편실재론자(普遍實在論者)들 은 그것이 서로 준별되는 범주적 개별성을 띤다고 보는 경우가 많은 데, 이와 같은 논리는 결국 일정한 정태적(情態的) 구도를 획정하고 역사적 갈래들을 각기의 큰 갈래 안에서만 단선적(單線的)으로 계열 화하는 편향을 유도한다. 즉 서정은 서정 갈래 안에서, 서사는 서사 갈래 안에서……와 같은 식으로 역사적 갈래들이 전이와 변모를 파 악하는 데 빠지기 쉬운 것이다. 살아 움직이는 문학 현상들의 역동적 ⋅입체적인 관련과 상호간의 넘나듦은 이에 따라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다. 가령 서사와 교술을 준별되는 성질의 배타적 범주로 볼 경 우, 사실담(事實談)이 일화(逸話)가 되고 다시 전설로 화하거나 소설 로 전이되는 일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설명하기란 어렵다. 또 우리 문학의 서사민요나 영문학의 발라드 ballad 중 상당수 작품들처럼 서사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되 그 이야기가 갈등의 전개에 관한 서사 적 흥미보다는 서정적 주제 내지 정조(情操)의 조성에 기여하는 사례 나, 이와 다른 방식으로 두 가지 큰 갈래의 성격이 공존하는 혼합 갈
래들을 예외논리로써 처리해야 하는 것도 문제이다. 큰 갈래를 범주 적 실재로 간주하는 한 이러한 난점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날 길 은 없다. 이와 같은 논거에서 우리는 큰 갈래를 역사적 갈래들의 이해를 위 한 좌표적 개념틀로서만 받아들이고자 한다. 따라서 용어에 있어서도 서정⋅서사⋅희곡⋅교술 같이 불변(不變)의 범주성(範疇性)을 전제하 는 명사류 대신 서정적⋅서사적⋅희곡적⋅교술적 갈래들이라는 관형 어적(冠形語的) 구분을 택한다. 이 경우 하나하나의 큰 갈래 개념은 어떤 경계선이나 벽에 의해 닫혀 있는 방이 아니라 열려 있는 공간 속의 위치를 가늠케 하는 준거로서의 점이며, 역사적 갈래들은 이들 사이의 각이(各異)한 위상(位相)에 존재하는 것이라 본다. 그것은 특 정한 큰 갈래의 좌표점에 밀착하기도 하고, 다소 떨어진 영역에까지 연장되기도 하며, 때로는 점과 점의 사이에서 아메바처럼 운동하는 수도 있다. 썩 내키는 방법은 아니지만 설명의 편의를 위해 이를 도 형화하면 다음과 같다.
네 개의 꼭짓점으로 이루어진 큰 갈래의 좌표 공간 위에 역사적 갈래들이 존재하며,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발생⋅확장⋅수축⋅전이⋅쇠 퇴의 운동을 계속한다. 이 경우의 역사적 갈래들은 순일한 하나의 점 이 아니라 일정한 연장(延長)과 부피를 가진 입체로서, 그 범위 안에 서도 어떤 큰 갈래의 좌표점에 가까운 부분과 상대적으로 먼 부분이 있을 수 있다. 또한 어떤 역사적 갈래는 개별 작품들의 규범 이탈이
나 변형을 잘 허용하지 않는 응집성이 강한 데 비해, 갈래 형성의 요 건이 매우 느슨하기 때문에 둘 또는 그 이상의 좌표점 사이에 완만 하게 펼쳐져 있는 역사적 갈래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가전(假傳) 같 은 것이 전자의 예라면, 한국문학 갈래론에서 커다란 말썽거리로 남 아 있는 가사(歌辭)라든가 한문문학의 사(辭)⋅부(賦) 따위는 후자의 본보기라고 할 만하다. 이처럼 큰 갈래를 폐쇄적 범주가 아닌, 연속 공간 위의 좌표점으 로 볼 경우 역사적 갈래들을 수형적(樹形的) 분류 체계에 따라 그 중 어느 하나에 귀속시키는 것이 그다지 손쉬운 일도 바람직한 일도 아 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설명의 편의를 위 해 대다수의 역사적 갈래들을 그 주요 속성 내지 경향에 따라 서정 적 갈래들, 서사적 갈래들, 희곡적 갈래들, 교술적 갈래들 하는 식으 로 일단 구분해 보지 않을 수 없으나, 이러한 편의적 구분조차도 용 이하지 않은 중간적⋅혼합적 갈래들의 경우에는 무리한 분류를 강제 하기보다 그 다면적 연관을 존중하는 접근방법이 필요하다. 또한 어 떤 큰 갈래의 친족 범위 안에 나열한 역사적 갈래들 중에서 부분적 으로 다른 큰 갈래에 근접하는 속성이나 작품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점도 유의되어야 할 것이다. 위의 사항들을 염두에 두고 한국문학의 갈래들을 주요 속성, 혹은 지배적 경향에 따른 큰 갈래 구분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i) 서정적(抒情的) 갈래들 : 고대가요(古代歌謠), 향가(鄕歌), 고려속 요(高麗俗謠), 시조(時調), 사설시조(辭說時調), 잡가(雜歌), 서정 민요(抒情民謠), 대다수의 한시(漢詩), 신체시(新體詩), 대부분의 현대시(現代詩) ii) 서사적(敍事的) 갈래들 : 신화(神話), 서사시(敍事詩), 전설(傳 說), 민담(民譚), 서사민요(敍事民謠), 서사무가(敍事巫歌), 판소리, 고전소설(古典小說), 신소설(新小說), 현대소설(現代小說)
고대가요(古代歌謠)
iii) 희곡적(戱曲的) 갈래들 : 탈춤, 꼭두각시놀음, 창극(唱劇), 신파 극(新派劇), 현대극(現代劇) iv) 교술적(敎述的) 갈래들 : 악장(樂章), 창가(唱歌), 수필(隨筆), 서 간(書簡), 일기(日記), 기행(紀行), 한문문학의 문류(文類, 서(序)⋅ 기(記)⋅발(跋)⋅논(論)⋅책(策)⋅명(銘)⋅행장(行狀)…… 등) v) 중간⋅혼합적 갈래들 : 경기체가(景幾體歌), 가사(歌辭), 가전(假 傳), 몽유록(夢遊錄), 야담(野談)
(1) 서정적(抒情的) 갈래
문학의 발생에 있어 서정시가 먼저인가 서사시가 먼저인가는 실증 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물음이지만, 한민족의 선조가 되는 여러 종 족들이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 일대에 정착한 시대에는 이미 다채로운 서정가요들이 발달해 있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이 시기의 가요들은 수렵⋅채취⋅농경에 관련된 주술(呪術)⋅원망(願望)이나 종 교적 기능을 지닌 것이 선행하였을 터이나, 천지자연과 초월적 존재 에 대한 예찬⋅환호⋅감탄⋅청원⋅기구(祈求)⋅고백 등의 제의적(祭 儀的) 서정(抒情)과 더불어 사람살이의 여러 소망과 체험에서 우러나 오는 서정가요 또한 존재하였던 것 같다.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보이는 여러 기록 중 다음의 대목들은 제의적(祭儀的) 맥락과 연관이 깊은 고대가요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부여(扶餘)에서는 은력(殷曆)으로 정월에 하늘에 제사하고 나라 안이 크게 모여서 여러 날 동안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었다. 이를 영고(迎鼓) 라 했다. 밤낮없이 길에 사람들이 가득 차서 늙은이, 어린이 할것없이 모두 노래하여, 연일 그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마한(馬韓)에서는 늘 오월(五月)에 씨뿌리기를 마치면 귀신에 제사하 는데, 사람들이 무리 지어 노래하고 춤추며 술 마시어 밤낮을 쉬지 않 았다. 그 춤은 수십 명이 어울려 서로 따르며 땅을 디뎌 몸을 굽혔다 폈다 하고, 손과 발이 서로 응했다.
반면에 같은 문헌의 다음 구절들을 통해서는 반드시 제의적인 행 사의 기회가 아니더라도 고대인들이 노래하기를 즐겨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의 맥락으로 보아 이들 고대가요에서는 서정적 시가가 주
타는 것을 좋아했다.
요 부분을 차지하지 않았을까 한다.
고구려(高句麗) 사람들은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을 좋아해서 나라 안 촌락의 남녀가 밤마다 무리지어 모여서 노래하고 즐겼다.
이 나라(진한, 辰韓)의 풍속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 마시고 거문고
이 시기의 시가 중 한역(漢譯)되어 전하는 「구지가(龜旨歌)」는 분 명한 주가(呪歌)로서 제의적 행위의 일부분이지만, 「공후인(箜篌引)」 은 작품의 내용과 부대설화(附帶說話)를 액면대로 해석할 때 절실한 비탄을 담은 서정시로 볼 수 있다. 고구려의 둘째 임금인 유리왕(瑠 璃王)이 노래했다는 「황조가(黃鳥歌)」는 다음에 보듯이 간결하면서도 직절한 표현력을 갖춘 서정시다.
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
가벼이 나니는 꾀꼬리여 암수가 어우러져 정답구나. 내 몸의 외로움 생각노니 그 뉘와 더불어 돌아갈거나.
작품의 짜임은 극히 단순하나 완벽한 대칭 구조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짝을 이루어 즐거운 꾀꼬리와 홀로 있는 사내, 나니는 가벼움 과 외로운 심사의 무거움, 그리고 마지막 구절 뒤의 쓸쓸한 여운 … 이런 여러 요소들이 서로 대립하고 중첩되면서 그리움의 노래 다운 간절함과 생각의 깊이를 보여준다. 이 노래가 실린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는 유리왕이 사랑하는 여인(치희, 雉姬)을 잃고 돌아오는 길에 나무 밑 에서 쉬다가 꾀꼬리들을 보고 느끼어 이렇게 노래했다(乃感而歌 曰……)고 했다. 이 문맥에서의 <가왈(歌曰)>이 반드시 창작까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한 「황조가」는 당시 민간에서 널리 불리던 서정 가요의 하나였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 고대가요는 모두 사언(四言) 사구(四句)의 한시형(漢詩形)으로 번역되어 전해진다. 성립시기와 출전(出典)을 달리하는 작품들이 이 처럼 동일한 형태를 가진다는 것은 한역자(漢譯者)가 중국 고대가요 인 시경(詩經)소재 작품들의 형태를 참조한 때문일 터이나, 이와 아울러 당시의 우리 고대가요가 지녔던 정형(定型)이 4구로써 한 작 품 혹은 가절(歌節)을 만들었던 것을 반영하는 사실이 아닌가라고도 생각해봄 직하다. 신라 향가(鄕歌) 중의 4구체 작품들이 민요적 특성 을 짙게 보이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이 추측은 매우 신빙성이 높다.
향가(鄕歌)
<향가(鄕歌)>라는 명칭은 <향악(鄕樂)> <향어(鄕語)> 등의 비슷한 용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 시가 및 범패(梵唄)와 달리 자국어(自 國語)로 된 시가를 가리키는 신라 시대의 용어였다. 이 부류에 속하 는 작품들은 한자의 훈(訓)과 음(音)을 빌려 우리말을 적는 향찰(鄕 札)에 의해 기록되어 전하기 때문에 향찰 표기라는 요건이 향가 일반 에 필수적인 것처럼 여기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삼국유가(三國遺 事)의 향가 관계 기록을 살펴보면 다수의 작품들이 기록을 동반하지 않은 상태로 창작되어 가창⋅전승되다가 나중에 기록되기도 하였음 을 알 수 있다. 향가는 이처럼 구비문학적 성격을 띤 작품에서부터 개인작의 세련 된 창작시가에까지 걸쳐 있을 뿐 아니라, 형태와 내용 또한 단일하지 않다. 따라서 그것을 통일적 관습 및 원리를 지닌 단일한 갈래라고는 볼 수 없다. 연구자들 가운데는 향가라는 이름의 단일성에 이끌린 나 머지 향찰로 표기된 작품들 모두를 하나의 갈래에 속하는 것처럼 다 룬 예가 있지만, 향가라는 이름의 당대적 의미는 당시(唐詩), 범패(梵 唄)에 대응되는 자국어 시가의 총칭으로 보아야 한다. 신라인들은 향 가라는 범칭(汎稱)과 더불어 도솔가(兜率歌), 사뇌가(詞腦歌), 사내(思 內), 시뇌(詩腦), 차사사뇌격(嗟辭詞腦格), 덕사내(德思內), 석남사내 (石南思內) 등의 세분된 명칭을 사용했다. 현전 자료의 부족으로 인 해 구체적인 해명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으나 문학상의 갈래로서 개 별성을 가지는 것은 바로 이것들(혹은 적어도 그 일부)이 아닌가 짐 작된다. 향가가 하나의 단일한 갈래가 아니라 여러 층위의 작품군 및 시가 양식의 범칭이라는 점은 무엇보다도 그 형태상의 다양성에서 나타난 다. 현재 남아 있는 향가는 삼국유사에 실린 14수와 균여전(均如
傳)소재의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11수를 합한 25수인 바(예종 의 「도이장가」를 넣으면 26수), 이들 중 「서동요(薯童謠)」 「풍요(風 謠)」 「헌화가(獻花歌)」 도솔가(兜率歌)는 4구체이며, 「모죽지랑가(慕 竹旨郞歌)」 「처용가(處容歌)」는 8구체, 그리고 혜성가(彗星歌)」 「찬기 파랑가(讚耆婆郞歌)」 「제망매가(祭亡妹歌)」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등 나머지 19수는 10구체이다. 이와 같은 형태적 다양성은 구수의 많고 적음에 그치지 않고 시상(詩想)의 전개 구조에 있어서의 차이까 지를 동반하는 것이다. 특히 10구체 향가는 작품 전체가 세 토막 (4/4/2행)으로 나뉘면서 마지막 2행(낙구, 후구, 격구)의 머리 부분에 정서적 고양(高揚)을 집약하는 감탄사가 오도록 양식화되어 있어서 4 구체, 8구체와는 전혀 다른 시적 구도를 보인다. 이와 같은 사실에 주목한 대다수의 학자들은 향가가 단순 소박한 민요적 시형인 4구체로부터 발전하여 8구체를 형성하고 다시 완성형 이랄 수 있는 10구체에 도달한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추론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4구체, 8구체가 각 기 다음 단계의 양식에 대체되어 소멸하지 않고 공존하면서 창작되 었다는 사실도 주의해야 한다. 현전하는 4구체 향가 중 월명사(月明 師)의 「도솔가(兜率歌)」는 경덕왕(景德王) 19년(760)에 지어졌으며, 8 구체는 고려 예종(睿宗)의 「도이장가」(悼二將歌, 12세기 초)에까지 존속하였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입증한다. 따라서 현존 향가의 세 가지 형태는 그들 사이에 발생론적인 연관이 있으면서도 각기의 양식적 개별성과 의의를 지녔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내용상으로도 향가 작품들의 성격은 단일하지 않다. 10구체 향가 는 모두 개인작의 서정시이지만 「풍요(風謠)」는 분명히 민요이며, 「 처용가(處容歌)」는 무가(巫歌)로 이해되고, 「헌화가(獻花歌)」는 민요 와 무가의 사이에서 해석의 가능성이 거론된 바 있다. 이로써 보건대 향가는 성격이 단일하지 않은 여러 종류의 시가의
총칭이며, 그 발전과정은 대체로 4구체 형태의 민요적 내용으로부터 구조의 확장과 개인적 서정의 심화가 이루어지면서 10구체 향가의 정형이 출현하여 선행 양식들과 공존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향가의 발달, 분화의 역사는 민요⋅무가 같은 구비문학으로 부터 개인 창작의 서정시 양식이 확립되는 데까지 이르는 중요한 문 학사적 변화를 내포한다고 하겠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향가 전체를 하나의 갈래처럼 가정하여 그 속성이나 작자층을 전칭적(全稱的)으로 규정하려는 접근은 바람직하 지 못하다. 가령 현존 작품의 작가들을 신분적으로 분류하여 향가가 신라시대의 국민문학이었다고 주장한다든가 혹은 그 반대로 귀족층 의 시가양식이었다고 논쟁하는 것은 서로 다른 계열의 작품군들에 대해 무리한 일반화를 서두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점에 유의하 여 현존 작품들을 살펴보면 향가는 적어도 두 부류 즉 민요이거나 민요적 속성이 짙은 4구체류와, 작가가 뚜렷하며 세련된 개인적 서 정을 담은 10구체류로 나누어 문학담당층을 논하는 것이 옳을 듯하 다. 전자는 하층민까지를 포함한 광범한 분포 영역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되고, 후자는 거의가 화랑(花郞)⋅승려(僧侶) 등 상층의 신분에 속하는 이들에 의해 창작되었다. 그러므로 향가 전체는 귀족문학이 아니지만, 10구체 향가는 당대의 귀족⋅지배층의 정신세계를 반영하 는 시가 양식이라 말할 수 있다. 10구체 향가는 전편이 세 토막으로 구성되어, 앞의 네 구에서 시 상을 일으키고 다음 네 구에서 이를 심화 혹은 전이시킨 뒤 <아야 (阿也)>[타심(打心), 성상인(城上人)]라는 감탄사에 이어지는 낙구(落 句)에서 이를 서정적으로 완결하는 견고한 짜임을 지니고 있다. 그 본보기를 겸하여 월명사(月明師)의 「제망매가(祭亡妹歌)」를 보 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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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讚耆婆郞歌)」 「원왕생가(願往生歌)」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등 의 맑고도 깊은 서정과 기원을 담은 명작들이 창작되었다. 여기에 불 교적 세계관이 직접 간접으로 중요한 작용을 끼쳤다. 향가를 가리켜 <그 뜻이 매우 높다>(其意深高)라든가 <시어가 맑고 구절이 아름답 다>(詞淸句麗)라고 당시 사람들이 평가한 것은 주로 10체 향가의 이
고려속요(高麗俗謠)
와 같은 서정적 세련과 드높은 격조를 지적한 것이다.
고려의 건국 이후 한문학이 발달하면서 향가가 쇠퇴하자 국문시가 는 다시 구비전승의 영역으로 돌아갔다. 때문에 한시(漢詩)를 제외한 이 시기의 시가는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으며, 한글창제 이후의 몇몇 문헌에 정착된 소량의 자료만이 그 편모를 보여줄 뿐이다. 그러한 작 품 가운데서 경기체가(景幾體歌)를 제외한 국문시가들을 보통 고려속 요라 하며, 학자에 따라서는 이를 고속가(古俗歌)⋅장가(長歌)⋅별곡 (別曲) 등으로 지칭한 예도 있다. 고려속요란 이처럼 현전하는 고려가요 중 경기체가 이외의 국문시 가에 대한 편의적 지칭이기 때문에 그것이 단일한 시가 양식으로서 의 공통 원리와 속성을 가진다고 섣불리 가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뿐 만 아니라 좀 더 자세히 따진다면 그 모두가 <속요(俗謠)> 즉 민속가 요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속요라는 용어도 반드시 적절한 것이라고는 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들 작품에 대해 이미 고려속요라는 이름이 널 리 쓰이고 있고 민간가요적 성격이나 기원을 가진 노래가 적지 않다 는 점에서 일단 이 용어를 받아들이면서 전반적 윤곽을 살펴보기로 한다. 고려속요를 다루는 데 있어 무엇보다 먼저 유의할 점은 악부체(樂 府體) 역가(譯歌)를 제외한 현전 작품 대부분이 악학궤범(樂學軌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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士戀)」 「월정화(月精花)」 「탐라요(耽羅謠)」 등의 민요도 있다. 이 작 품들은 남녀 간이나 부모․자식 사이의 사랑을 노래하기도 하고, 어지 러운 세태를 원망⋅풍자한다든가 농민들의 생활을 그리는 등 다양한 내용을 지녔다. 이런 민요의 일부가 악공(樂工), 관기(官妓) 등에 의 해 궁중으로 유입되어 그대로 존속하거나 혹은 개편⋅윤색되었기 때 문에 고려속요는 궁중 악가라는 전승상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민요적 속성을 많이 지니게 된 것이다. 아래의 「상저가(相杵歌)」는 간결⋅소 박한 언어와 밝은 분위기 및 경쾌한 여음으로 보아 방아 찧을 때 불 린 노동요였던 듯하다.
듥긔동 방해나 디히 히얘 게우즌 바비나 지 히얘 아바님 어머님 받고 히야해 남거시든 내 머고리 히야해 히야해
한편 민요적 기원의 작품들 중 상당수는 궁중 악곡으로 정착되는 과정에서 많은 개작이 가해져서 본래적 성격을 상실한 것도 있다. 충 혜왕(忠惠王) 시대 등 고려 후기 왕실의 유락적(遊樂的) 풍조 속에서 지어진 「후전진작(後殿眞勺)」이라든가, 「쌍화점(雙花店)」 「만전춘(滿 殿春)」 등의 부류가 그것이다. 이와 같은 개작에는 물론 궁중 연악 (宴樂)의 악곡에 가사를 맞추기 위한 산삭(刪削)과 가절(歌節)의 첨가 ⋅병합 등의 방법이 작용하였으며, 그 밖에 민요의 속성과는 다른 방 향의 내용적 변개도 또한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이런 부류의 작품들은 민요적 기원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하더라도 순수 한 민요로는 볼 수 없다. 개인 창작가요로는 쇠퇴기 향가인 「도이장가」(悼二將歌, 예종)와 향가의 잔존형이라 추정되는 「정과정곡」(鄭瓜亭曲, 정서) 등이 현전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작품들은 고려사(高麗史)「악지(樂志)」와 「 열전(列傳)」에 제목, 작자, 창작동기에 관한 간단한 기록만으로 알려 져 있다. 「청산별곡(靑山別曲)」은 일반적으로 민요적 기원에서 유래 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나 귀족 혹은 문인층에 속하는 인물의 창작으 로 보는 학자도 있다. 이들 창작가요 역시 음악을 동반한 악가로서, 그 주제는 군주를 송도(頌禱)한 것과 귀족층의 풍류를 노래한 것으로 대별된다. 이처럼 형태, 기원, 작자층, 성격을 각기 달리하는 작품들을 고려 속요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총칭하여 온 관습은 다분히 편의적인 것 일 뿐, 그들 사이에서 갈래상의 통일성을 확인한 결과는 아니다. 희 곡적 짜임과 무가의 성격을 지닌 「처용가(處容歌)」나, 「성황반(城隍 飯)」 「삼성대왕(三城大王)」 「대국(大國)」 등의 무가를 제외하고 보면 고려속요 전반이 서정시의 부류에 들지만, 서정의 표현 방식과 성격 그리고 그 바탕에 놓인 체험의 특질은 이들을 몇 개의 상이한 군집 들로 나누어 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아울러 현전하는 작품들이 고 려시대의 가요 전반을 고르게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궁중악에 선택 적으로 흡수되고 적잖이 윤색⋅개작⋅편집되기도 한 악가(樂歌)인 한, 이를 절대시하여 고려시대 시가에 남녀 간의 애정에 대한 관심이 나 유락적(遊樂的)⋅염세적 성향이 압도적인 듯이 강조하는 것은 온 당하지 못하다.
시조(時調)
시조(時調, 평시조)는 우리문학의 전통적 양식 가운데서 가장 오랫 동안 많은 사람들에 의해 창작⋅가창되고 다수의 작품이 현전하는 갈래이다. 3장 6구 12음보로 이루어진 간결한 형식, 절제된 언어, 시 상의 흐름을 알맞게 통제하면서도 개별적인 변이를 소화해 내는 서
정구조, 담백⋅온아한 미의식…… 이와 같은 특질이 시조로 하여금 오랫동안 생명력 있는 시형식으로 존속하도록 하였다. 그것은 단일한 정형구조를 지닌 시가 갈래로서는 10구체 향가 이후 가장 잘 정비되 고 또 광범한 창작기반을 가졌던 서정시 양식이다. 시조의 정형적 틀은 네 개의 소리마디(음보, 音步)가 결합하여 한 행을 이루고 그것이 세 번 중첩되어 한 수를 이루는, <4음보격 3행 시의 구조>로 일단 규정할 수 있다. 시조 율격의 기본 단위가 되는 소리마디 가운데서 출현 빈도와 음절수의 평균치로 보아 기준이 되 는 4음절 음보를 평음보(平音步)라 하고, 그보다 작은 음보를 소음보 (小音步), 큰 음보를 과음보(過音步, 과음절 음보)라 한다면, 시조의 일반적 율격 형태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괄호 안에 표시된 것은 해당 . 위치에서 적지 않은 출현 빈도를 보이는 허용형)
소(평) 평 소(평) 평 소(평) 평 소(평) 평소과평 소(평)
노래 / 삼긴 사 / 시름도 / 하도 할샤 // 닐러 / 다 못 닐러 / 불러나 / 푸돗가 // 진실(眞實)로 / 플릴 거시면은 / 나도 불러 / 보리라 // <신흠(申欽)>
이와 같은 율격 구조에서 초(初)⋅중장(中章)은 <소(평)-평-소(평)- 평>의 비교적 규칙적인 흐름을 유지함으로써 각 장(章)의 뒤에 무엇 인가가 이어질 것을 예상케 하는 율격적(律格的) 개방성(開放性)을 띤다. 반면에 종장은 이 평명한 연속성을 차단하여 호흡을 비대칭적 (非對稱的)으로 긴장시켰다가 풀어줌으로써 작품을 완결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특히 종장의 전반부가 지닌 <소음보-과음보>의 불균형
한 구조는 여기에 시적 긴장이 모이도록 하는 효과를 발휘하고, 후반 부는 여기에 이어지는 이완의 흐름을 형성하여 한 수를 마무리하도 록 정형화되어 있다. 아울러 종장의 서두에 흔히 감탄사 또는 감탄적 의미를 내포한 말들이 자주 온다든가, 종결부는 대개 <~노라, ~로다, ~놋다> 등의 감탄형이나 <~하리라, ~어(아)라> 등의 의지형⋅명령형 을 사용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주체의 정서적 태도를 집약하는 구문 의 특성을 지닌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시조가 3장의 간결한 짜임 만으로도 구조적 안정성을 유지하면서 서정적 고양(高揚)과 완결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형식 원리에 힘입은 바 크다. 이처럼 정형화된 양식이 완성된 시기는 대체로 고려 말 경으로 추 정되어 왔으나, 그 기원에 대하여는 의견이 일정하지 않다. 10구체 향가의 삼분절(三分節) 구조에서 시조가 비롯하였으리라는 설, 「만전 춘별사(滿殿春別詞)」에서 보는 바 4음보격 3행시의 형태에서 시조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는 설, 그리고 고려 후기의 민요 (특히 모노래와 같 로부터 시조가 나왔으리라는 설 등이 그 중 대표적인 은 부류의 민요) 것이다.
하지만 시조의 발생 시기는 고려 말엽이라 해도 그것이 본격적으 로 융성하게 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위에 지적한 바 와 같이 간결⋅담백하게 절제된 시조의 언어와 형식은 사대부층의 미의식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그들은 한시(漢詩)만으로는 제대로 표 현할 수 없는 내면의 감흥과 정취를 이에 담아 단아한 기품으로 노 래하였다. 이황(李滉)의 「도산십이곡발(陶山十二曲跋)」에서 말한 바, 한시는 읊조릴 수는 있으되 노래할 수는 없어서 (可詠而不可歌)
절실한 감흥을 표현하려면 우리말로 엮어진 시가를 빌려야만 한다고 밝힌 사실을 보더라도 국문시가에 대한 그들의 일정한 긍정적 인식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사대부층을 중심으로 발달한 조선 전기(前期)의 시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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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어옹(漁翁)- 때로는 산옹(山翁)인 수도 있다
- 은 물론 고기잡이로 생애를 잇는 어부가 아니다. 그것은 세속의 명리 (名利)와 갈등으로부터 초탈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살아가는 처사적(處士的) 삶의 전형이다. 빈 배에 싣고 돌아오는 달빛과 <외로 운 솔>은 그들이 추구한 바 의식의 청정(淸淨)함을 선명하게 드러내 주며, <추강(秋江)> <가는 눈 뿌린 길> <설월(雪月)> <송창(松窓)>은 혼탁한 현실로부터 격리된 자족적(自足的) 공간의 구성물들이다. 사대부층이 주요 담당층이었던 조선 전기 시조의 흐름은 17세기 후반 이후 여항가객들의 활동이 커지고 시조창이 널리 보편화되는 등 창작⋅수용에 관여하는 계층의 확산과 중심이동 현상이 나타나면 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전까지 가곡(歌曲)이라는 전아한 고 전적 창법으로 불리던 시조가 이 시기에 와서는 좀 더 평이하며 대 중적인 친화력을 가진 <시조(時調)> (時節歌調, 당대에 새로이 유행하게 창법으로도 불리게 되고, 김천택(金天澤)⋅김수장 된 가조라는 의미) (金壽長) 등 중인층 가객에 의해 청구영언(靑丘永言, 1728), 해동
가요(海東歌謠, 1차 편찬 1755) 등 많은 가집(歌集)이 엮어지게 된 사실이 그 단적인 징표이다. 이들 가객과 중간층의 시조 애호자들은 사대부들과 달리 시조를 <시여(詩餘)>가 아닌 절실한 자기표현의 양 식으로 받아들였으며, 더 나아가서는 경험과 감정을 표현하는 진실성 에서 그것이 한시보다 더 가치 있다는 인식에까지 도달하였다. 이와 같은 흐름에 병행하여 시조의 제재와 주제 또한 크게 다양화되어 사 대부 시조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나타났는가 하면, 유명⋅무명의 작 자들에 의해 평민적 생활체험과 감정⋅의식이 새로운 관심사로 부각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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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를 보면 대개의 경우 종장은 평시조와 비슷한 틀을 유지하되 초⋅ 중장 혹은 그 중 어느 일부가 4음보 율격의 정제된 구조에서 현저하 게 이탈하여 장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논자에 따라서는 이들을 엇 시조와 사설시조로, 혹은 중형시조(中型時調)와 장형시조(長型時調)로 구분하려 한 예도 있다. 그러나 엇시조(중형시조)와 사설시조(장형시 조) 사이의 형태적 차이를 어떻게 구분한다 하더라도 그들 사이의 국 부적 변별성보다는 평시조와의 전체적 대비에서 드러나는 형태 및 내용상의 차이가 뚜렷하고도 중요하다는 점에서 근간에는 이들을 한 데 묶어 사설시조(장형시조, 장시조)라 규정하는 관점이 널리 받아들 여지고 있다. 이와 다른 또 하나의 견해는, 비록 소수의 학자들의 주장이지만, 사설시조가 시조의 파격⋅변형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조선 중기 이전부터 존속해 온 민간가요의 영역으로부터 나왔으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들은 사설시조라는 이름 대신 <만횡청(蔓橫淸)>이 라는 용어를 제안하였다. 그리고 이 부류의 작품들은 평시조와 달리 하층민들의 가요로부터 전이되어 주로 평민층의 생활체험과 의식을 표현하는 별도의 시가로서 18세기 초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형성되 었을 터인바, 그것이 사설시조라 불린 것은 시조창의 곡조⋅장단을 채용한 음악상의 요인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와 같은 쟁점의 귀추는 앞으로 더 연구되어야 할 터이지만, 사 설시조가 평시조의 균정된 틀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통해 평민적 익 살, 풍자와 분방한 체험을 표현함으로써 조선 후기 문학사의 새로운 국면에 중요한 한 몫을 했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전아한 기품과 관조적 심미성을 존중하는 사대부 시조와 달리 거칠 면서도 활기에 찬 삶의 역동성을 담고 있다. 사설시조를 지배하는 원 리는 웃음의 미학이라 할 수 있겠는데, 현실의 모순에 대한 날카로운 반어(反語), 중세적 고정관념을 거리낌 없이 추락시키는 풍자, 고달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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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또한 마찬가지의 비판적인 재해석을 필요로 한다. 다만 이러한 재 해석과 평가의 과정에서도 사설시조가 조선후기라는 시대의 상황 속 에서 종래의 관습화된 미의식과 규범적 세계상으로부터 벗어난 인간 의 모습, 욕망, 갈등을 시의 세계 안에 이끌어 들이고 갖가지 추한 것과 비천한 것들까지도 적극적으로 다룸으로써 새로운 문제의 지평
서정민요(抒情民謠)
을 열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할 것이다.
민요는 어떤 단일한 갈래로 규정할 수 없는, 일반 민중의 생활 속 에서 전승되는 모든 구비시가(口碑詩歌)의 총칭이다. 그것은 판소리, 무가(巫歌), 잡가(雜歌) 등과 달리 비전문적인 가요이기에 누구나 쉽 사리 익히고 노래할 수 있으며, 생활 현장의 여러 요구와 체험에 직 결되어 있어서 내용⋅형태⋅기능이 극히 다양하다. 또한 민요는 문학 사의 전 기간에 걸쳐 존속하면서 다단한 변화를 겪었고, 때로는 그 일부가 보다 정련된 음악 또는 문학 양식으로 전환되거나 새로운 창 작 시가의 모태가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여러 양상을 덮어둔채 민요라는 전칭(全稱) 개념으로 그 갈래 문제를 단안할 수는 없다. 기록 시가문학의 갈래 속성이 양식마다 다양하듯이 민요 또한 기능⋅성격에 따라 서정적인 부류와 서사적인 부류를 구분할 수 있 으며, 이 밖에 일정한 사실⋅기억⋅지식 따위를 노래하는 (따라서 교술 민요도 있다. 적이라 할 수 있는) 그러나 이처럼 다양한 가운데서도 서정적인 유형 및 성격의 민요
가 많다는 점은 확인하기에 어렵지 않다. 이런 종류의 민요를 편의상 의 범칭으로서 서정민요라 하고, 그것이 우리 민요의 전체적 윤곽 안 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특징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민요는 기능적 특성에 따라 기능요(機能謠)와 비기능요(非機能謠)
로 나뉘고, 기능요는 노래를 수반하는 기능의 종류에 따라 노동요, 의식요(儀式謠), 유희요로 구분된다. 이 중에서 서정적인 노래가 대부 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우선 비기능요를 들 수 있다. 비기능요는 특정 한 일과 관련이 없이 흥이 나면 언제 어디서나 부르는 노래이므로 내용 및 형태상의 제약이 별로 없으며, 대개는 음악적으로나 문학적 으로 기능요보다 더 다듬어져 있다. 그 주제는 삶의 여러 국면에서 자주 부딪치는 문제들에 대한 소망, 괴로움, 슬픔, 기쁨 등이 주류를 이룬다. 이러한 주제적 특징과 형태상의 상대적 간결성이 비기능요로 하여금 보다 많이 서정적 경향을 띠도록 한다. 정선(旌善), 밀양(密 陽) 등 여러 지역에 각기 다르게 전승되는 「아리랑」이나 「도라지타령
아리랑 아라리요
」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날만 넘겨 주게 가을철인지 봄철인지 나는 몰랐더니 뒷동산 해와 저 별이 나를 알궈 주네 아울애기 뱃사공아 내 좀 건네주시우 싸리꽃 씀바귀 다 쏟아집니다. <「정선(旌善) 아리랑」, 강원도(江原道) 명주군 사천면>
기능요 가운데서는 노동요에서 서정민요가 더 많이 발견되지만, 의식요에도 서정민요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사람의 죽음에 관련 된 의식요(「상여소리」 「달구질노래」 등)에는 구성지고 슬픈 가락에 실려 불리는 서정민요들이 많이 보인다. 다만 이들 기능요의 경우에 는 「모노래」 「보리타작 노래」 「놋다리밟기 노래」…… 등 하나하나의 종류가 일률적으로 서정적이거나 서사적인 속성을 띠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과 노래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모심기를 하면서 부르는 농업노동요인 「모노래」는 4음
보격 2행의 단위로 노래가 이어지는데, 그 내용은 농민들의 생활 경 험에 관련된 서정적 토막의 연쇄가 될 수도 있고 상당한 줄거리를 가진 서사적 노래가 되는 예도 있다. 「대문놀이」 「군사놀이」 등 어린 이들의 놀이에 많이 불리는 유희요는 대개 특정한 약속의 틀에 따라 진행되며, 서정적인 노래가 흔하지 않다. 민요는 또한 가창 방식에 따라 선후창(先後唱), 교환창(交換唱), 일 인창(一人唱) 또는 제창(齊唱)으로 나뉜다. 이 중에서 1인창 방식의 민요는 단형(短形)일 경우 대개 서정적인 부류에 속한다. 선후창과 교환창 민요는 여러 성격의 노래들이 섞여 있어서 작품에 따라 가릴 수밖에 없으나, 서정적 노래든 서사적 노래든 간에 선후창 쪽이 즉흥 성과 개인적 창의를 더 많이 허용한다는 점에 유의할 만하다. 선창자 (들)와 후창자(들)가 의미 있는 가사를 번갈아 부르는 교환창에 비해 선후창에서는 한 사람의 선창자가 의미 있는 가절(歌節)을 부르고 후 창자(들)는 반복적인 후렴으로 이를 받기 때문에 더 많은 창의성과 변화가 허용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서정적 방향의 선후창 민요는 표현의 다양화와 개인성 발휘에 좀 더 큰 여유를 가진다고 할 수 있 다. 선후창 민요로서 가장 잘 알려진 유형인 「강강수월래」와 「쾌지나 칭칭나네」가 좋은 본보기이다. 다음에 선후창, 교환창의 서정민요를 각각 하나씩 예로 들어 둔다. 노래 한 토막이 2행으로 된 「모내기 노래」에서는 첫 줄을 한 패가 부르고 이를 받아서 다른 한 패가 뒷줄을 부르는데, 때로는 패를 나
뒷동산에 할매꽃은
누지 않고 부르는 수도 있다.
어어루 상사디야
어어루 상사디야 늙으나 젊으나 꼬부라졌네
뒷동산에 고목나무
어어루 상사디야
어어루 상사디야 내 속캉 같이 또 다 썩었네 어어루 상사디야 <「논매기 노래」, 경남(慶南) 거창군(居昌郡)>
방실방실 윗는 님을 못다 보고 해가 지네 걱정 말고 한탄 마소 새는 날에 다시 보세
물 밑에 고기 중에 잉어 고기 지맛일레 나무 끝에 실과 중에 청실배가 지맛일레
수건 수건 반포수건 님 떠주는 반포수건 수건 귀가 떨어지면 님의 정도 떨어지네
잠 못 잘세 잠 못 잘세 궁디 시레 잠 못 잘세 덮어주소 덮어주소 한산 소매로 덮어주소 <「모내기 노래」, 경북(慶北) 영양군(英陽郡)>
내용 및 언어적 측면에서 본 서정민요의 특징은 일반 민중들의 생 활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경험과 느낌을 진솔한 언어로써 표현 한 점에 있다. 때로는 구슬프고 비통하게, 때로는 익살스럽거나 활기 차게 자신들의 삶에 직결된 문제들을 노래한다는 것은 물론 다른 민 족의 민요에서도 널리 발견될 수 있는 보편적 특징일 것이다. 그러나 완강한 신분질서와 토지지배(土地支配)의 굴레 아래 어려운 생활사를 겪어야 했던 우리 평민들의 노래에서는 이러한 명암(明暗)의 대비가 좀 더 뚜렷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시(漢詩)
한시 역시 민요와 마찬가지로 <한문으로 써진 시>의 범칭일 뿐 그 자체가 단일한 문학상의 갈래는 아니다. 한시에는 상당한 서사적 줄 거리를 갖춘 작품이나 역사적 사실을 읊은 영사시(詠史詩)도 있으며, 때로는 시의 형태를 빌린 의론(議論)⋅기술류(記術類)도 있기 때문이 다. 사(辭)⋅부(賦)⋅사(詞) 등을 일단 제외하더라도, 한시에는 고시 (古詩), 절구(絶句), 율시(律詩), 배율(俳律), 악부(樂府) 등의 여러 양 식이 있다. 또 이들 중에서도 배율(俳律), 악부(樂府) 같이 비교적 장 형에 속하는 양식은 작품에 따라 갈래 성격이 반드시 서정적인 것에 만 국한되지 않는 예도 보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한시가 문인 지식층의 자기표현 문학으로서 서정적 경향을 주로 띠 었다는 점을 고려하여 여기에서는 일단 서정적 주류만을 대상으로 해서 살피기로 한다. 우리나라에서 한시가 지어지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고대가요의 한 역(漢譯)이 이루어진 시대까지 소급될 터이나, 활발한 창작은 신라의 육두품(六頭品) 문인(文人)처럼 한학(漢學)에 소양이 깊은 지식 계층 이 대두하면서부터였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뒤 고려를 거쳐 조선 조 말기에 이르기까지 한시는 귀족, 양반층의 필수적 교양인 동시에 자기표현의 서정양식으로서 널리 자리 잡게 되었다. 문인⋅사대부들 에게 있어서 한시의 창작은 신분적 위신의 확인 및 계층 내적 교유 에 불가결한 수단이었으며, 내면적 차원에서는 우주⋅자연⋅인생의 갖가지 국면에서 느낀 바를 응축된 언어로써 표출하는 문학양식이 되었다. 익숙하게 쓸 수 있기까지 오랜 학습과 수련을 요하는 한문의 어려움, 난삽한 전고(典故)⋅인유(引喩), 그리고 까다로운 격률(格律) 등의 제한은 한시 창작에 있어서 고도의 자기규율과 절제를 요구하 는 한편 이를 소화하고 넘어서는 시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게끔 하는
요인이 되었다. 여기에 임제(林悌, 1549~1587)의 오언율시(五言律 詩) 한 편을 보기로 한다.
曉起焚香坐(효기분향좌) 새벽에 일어나 향 사르고 앉아 中庸讀數巡(중용독수순) 중용(中庸)을 몇 차례 읽는다. 自知章句陋(자지장구루) 장구(章句)의 누추함을 알게 되면서, 始覺性靈眞(시각성영진) 비로소 성령(性靈)의 참됨을 깨닫는다. 月靜潭心影(월정담심영) 달빛은 고즈넉이 연못에 어리고 梅回雪裡春(매회설리춘) 매화 다시 피어 눈 속에 봄이로다. 看看足生意(간간족생의) 볼수록 가슴 속에 맑은 뜻이 넉넉하거니, 都只在吾身(도지재오신) 모든 것이 오직 내게 달려 있구나.
양식상의 구분으로 보면 대체로 율시(律詩), 절구(絶句)와 같은 근 체시(近體詩)가 고시(古詩)보다 더 많이 창작되었으나, 성률의 제약이 적은 고시의 창작 비율이 중국 문학의 경우보다는 더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에서도 그다지 성행하지 못한 배율(俳律)은 우리 한시 에서 더욱 드물었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든 한국 한시는 음성언어로 서의 중국어와 일찍 분리된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히고 또 우리 나름 의 독특한 영시법(詠詩法)에 의해 음영되었다. 시의 주제와 미의식에 있어서는 한문문학 일반이 지닌 중국적 전 례(典例) 지향이 작용하여, 도연명(陶淵明), 이백(李白), 두보(杜甫), 백락천(白樂天), 소동파(蘇東坡), 황정견(黃庭堅), 매요신(梅堯臣) 등 중국의 이름난 시인들이 숭상되었다. 다만 이들을 포함한 중국시에 대한 경사(傾斜)와 그것의 수용은 우리 한시사의 주요 단계 혹은 국 면에 따라 그 성향을 달리했다. 학당(學唐), 학송(學宋) 등의 대립⋅ 교체라든가 동일한 시인에 대한 시대마다의 상이한 이해는 바로 이 에 따른 결과이다. 이처럼 중국문학과의 연관을 맺으면서 그 수용과 자기화의 지평을 넓히고 각 시대 및 시인마다의 개성을 이루어 나간
양상이 어떠하였던가를 밝히는 데에 한시 연구의 크나큰 과제가 열 려 있다. 아울러 한시 역시 그 창작 주체의 귀속성으로 인해 의식적 이든 무의식적이든 민족적 개별성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마침내 중국 적 성률(聲律)⋅전범(典範)에의 집착으로부터 탈피하여 우리의 역사, 문화와 현실 경험을 좀 더 자각적으로 표현하는 <조선시(朝鮮詩)>(정 약용), <조선풍(朝鮮風)>(박지원), <이언(俚諺)>(이옥)의 지향에로까지 발전한 바 있다. 한편 17세기 중엽 이후 중인층의 사회적 성장과 병 행하여 시문학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한시가 사대부 이외의 평민층에까지 수용된 점도 여러 모로 흥미로운 사실이다. 다음에 드는 두 가지 작품 예는 조선조 후기 한시의 다채로운 변 모 양상을 일부분이나마 살피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정약용 (丁若鏞)의 시는 그가 유배 중이던 1809년에 참혹한 흉년과 학정(虐 政)으로 고통을 겪는 농민들의 모습을 그린 <전간기사(田間紀事)> 연 작의 일부분으로서, 시경체(詩經體)의 간결한 언어 속에 현실의 모순 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적 인식을 담고 있다. 이옥(李鈺)의 시는 이와 다른 각도에서 중세적 규범에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 시정의 세계에 살아가는 이들의 생활상을 포착하는 신선함을 보여준다.
采蒿采蒿(채호채호) 다북쑥을 캐네, 다북쑥을 캐네. 匪蒿伊菣(비호이긴) 다북쑥이 아니라 제비쑥이네. 藜莧其萎(여현기위) 명아주 비름나물 다 시들었고 慈姑不孕(자고불잉) 소귀나물 떡잎은 그대로 말랐네. 芻槱其焦(추유기초) 풀, 나무 다 타고 水泉其盡(수천기진) 샘물까지 말랐네. 田無田靑(전무전청) 논가엔 우렁이마저 없어지고 海無蠯蜃(해무비신) 바다에도 조개, 소라 사라져 버렸네. 君子不察(군자불찰) 높은 분네 실제로 살피진 않고
(……)
曰饑曰饉(왈기왈근) 흉년이다, 기근이다 말만 앞세워 秋之旣殞(추지기운) 이번 가을 넘기기 어려운 판에 春將賑兮(춘장진혜) 내년 봄 가서야 구휼(救恤)한다네. 夫壻旣流(부서기류) 유랑 걸식 떠난 남편 誰其殣兮(수기근혜) 그 누가 묻어주리? 鳴呼蒼天(명호창천) 오호라 하늘이여, 曷其不憗(갈기불憗) 어찌 이리 무정한고? <정약용, 「전간기사(田間紀事)」 ; ‘채호(采蒿)’, 송재소 역>
巡邏今散未(巡邏今散未) 순라 도는 일이 하마 지금쯤 끝났을까? 郞歸月落時(郞歸月落時) 서방님은 달 떨어질 무렵에야 돌아오는데 先睡必生怒(先睡必生怒) 먼저 자면 영락없이 성을 낼 테고 不寐亦有疑(不寐亦有疑) 안 자고 있으면 또한 의심할 게라.
早恨無子久(早恨無子久) 일찍이는 오래도록 아들 없음을 한탄했더니 無子反善事(無子反善事) 이제 보니 아들 없는 게 오히려 좋았을 것을. 子若渠父肖(子若渠父肖) 아들 녀석이라고 어찌 아비를 꼭 닮아서 殘年又此淚(殘年又此淚) 남은 생애가 또 이 모양으로 눈물뿐이라네 <이옥(李鈺), 「이언(俚諺)」>
한국 한시의 역사적 흐름과 주요 시인, 유파에 대한 온전한 해명 은 대부분이 앞으로의 과제로 남아 있다. 이들이 선명하게 밝혀짐에 따라 한시는 단순히 외래 양식에 의존한 음풍영월(吟風詠月)로 여겨 지던 상태를 벗어나 그 나름의 제약 속에서도 다양한 성취를 거두면 서 우리 시문학의 세계를 확대하는 데 기여한 값진 유산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허두가(虛頭歌)
판소리 창자(唱者)들은 「춘향가」 「심청가」 등의 판소리 한 마당을 소리하기 전에 목청을 풀고 소리판의 분위기를 가다듬기 위해 허두 가라는 것을 부른다. 허두가는 또 단가(短歌)라고도 하는데, 시조의 이칭인 단가와 구별하기 위해서 문학상의 술어로는 보통 판소리 단 가라 일컫는다. 판소리는 무척 넓고 다양한 음역(音域), 발성법과 장 단의 변화를 구사하기 때문에 곧바로 본 마당을 창하는 것은 창자에 게 무리한 부담이 될 뿐 아니라 청중을 소리판에 자연스레 동화시키 는 데에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허두가의 분위기가 대체로 유장(悠長) 할 뿐 아니라 음악적 특징에서도 중모리 장단에 평우조(平羽調) 즉 중간 속도의 순탄한 선율로 되어 있음은 그런 점에서 자연스러운 일 이다. 허두가는 대략 40~50편 정도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 가운에서 「 만고강산(萬古江山)」 「진국명산(鎭國名山)」 「죽장망혜(竹杖芒鞋)」 「불 수빈(不須嚬)」 「강상풍월(江上風月)」 편시춘(片時春)」 등 20여 종이 오늘날까지 불린다. 이들 작품의 내용은 순수하게 서정적인 것도 있 고, 고사(故事)를 잡박하게 열거하여 읊조리면서 인생을 담론하는 것 도 있으며, 화려한 장식적 언어로 천하의 기문(奇聞)⋅장관(壯觀)을 노래한 것도 있다. 따라서 그 성격을 일률적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개의 허두가는 고금의 사적(史跡)을 읊조리며 삶의 덧없음 을 한탄한다든가, 수려한 자연풍광(自然風光) 속에 노니는 즐거움을 그리는 등 서정적 성격이 짙다. 판소리가 서사적 내용에 바탕을 둔 창악(唱樂)인 만큼 그에 앞서 불리는 노래가 짧은 규모 속에서 서정 적 감흥을 돋우는 것은 연행(演行)의 상보적(相補的) 구성으로 보아 서도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언어와 수사에 있어서는 거의 모든 허두가가 한문 성어(成語)와 전
고(典故)를 많이 채용하여 다분히 의고적(擬古的)인 유장함을 느끼게 하나, 이에 담긴 실질은 대체로 관습화된 감회의 수준에 머무른 것이 어서 시적 가치를 높이 평가할 만한 작품은 많지 않다. 허두가의 흥 취는 우수한 창자의 가창에 힘입어서야 제대로 살아나게 된다. 여기 에 비교적 짧고, 난삽한 한문투가 적은 작품인 「만고강산(萬古江山)」 의 전문을 참고로 들어 둔다.
만고강산 유람할 제 삼신산(三神山)이 어디메뇨, 일봉래(一蓬萊) 이 방장(二方丈)과 삼영주(三瀛洲) 이 아니냐. 죽장(竹杖) 짚고 풍월(風月) 실어 봉래산을 구경하고, 경포(鏡浦) 동령(東嶺)의 월명(明月)을 구경하 고, 청간정(淸澗亭) 낙산사(洛山寺)와 총석정(叢石亭)을 구경하고, 단발 령을 얼른 넘어 봉래산을 올라서서 천봉만학(千峯萬壑) 부용(芙蓉)들은 하늘 위에 솟아 있고, 백절폭포(百折瀑布) 급한 물은 은하수를 기울인 듯 선경(仙境)일시가 분명하구나. 때마침 모춘(暮春)이라, 붉은 꽃 푸른 잎과 나는 나비 우는 새는 춘광춘색(春光春色)을 자랑한다. 봉래산 좋 은 경치 지척에 던져두고 못 본 지가 몇 날인가. 다행히 오늘날에 만 고강산을 유람하여 이곳을 당도하니 옛일이 새로워라. 어화 세상 벗님 네야, 상전벽해(桑田碧海) 웃들 마소. 엽진화락(葉盡花落) 없을손가. 서 산에 걸린 해는 양류사(楊柳絲)로 잡아매고 동령(東嶺)에 걸린 달은 계
잡가(雜歌)
수(桂樹)야 머물러라. 한없이 놀고 가자.
잡가란 조선 후기의 시정(市井)에서 직업적⋅반직업적 소리꾼들에 의해 가창된 유락적(遊樂的) 노래들이다. 음악적 측면에서 본 잡가는 십이가사(十二歌詞)에 비해 훨씬 통속적이며 일반 민요보다는 선율과 창법이 세련되어 유흥적 화려함을 짙게 띤 가요류로 규정할 수 있다. 이처럼 악곡상의 특징으로 잡가를 구분할 경우 여기에는 잡가류의
창법에 따라 불리는 일부의 시조, 민요까지도 포함되나, 문학적 갈래 로서의 잡가에는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가요들만이 해당된다고 보는 것이 무난하다. 잡가는 다양한 악곡으로 가창되었기 때문에 율격 및 전체적 시형 (詩形)의 구속력이 매우 느슨하며, 따라서 일정한 정형을 집약하기 어렵다. 잡가에는 때때로 4음보 율격이 보이기도 하나 규칙적 4음보 격이 작품 전체를 일관하는 예는 드물다. 아울러 대개는 가사와 같은 연속체 대신에 일정한 가절(歌節) 단위가 병렬되는 구성을 보인다든 가, 일부 작품에서는 가절 사이에 후렴구가 끼어드는 점도 특징적 현 상이다. 잡가는 시조, 한시의 구절들을 끌어다 쓰기도 하고, 민요, 십 이가사, 판소리창 등을 적잖이 전용(轉用)하였으나 그 어느 것에도 기울지 않으면서 말 그대로 박잡(駁雜)한 흡수력과 형태적 다양성을 보인다. 규칙적인 율격에 매이지 않는 준가사체(準歌辭體)⋅타령체의 작품이 있는가 하면, 여러 가절로 나뉘되 때때로 「매화사(梅花詞)」 「 백구사(白鳩詞)」처럼 가절 사이의 유기적 연결이 불분명하다든가, 갖 가지 후렴⋅조흥구(助興句)가 일정한 유형적 원리 없이 쓰이기도 하 는 등의 현상에서 이 점이 뚜렷하다. 잡가가 이처럼 다양한 요소들을 흡수하면서 문학적 형태면에서 잡 박한 혼합성을 띠게 된 것은 그것이 사계(四契)축이나 삼패(三牌) 같 은 비교적 하층의 소리꾼들에 의해 시정 놀이판의 여러 청중들을 상 대로 한 유락적 가요로 불린 데에 주요 원인이 있지 않은가 한다. 시 정의 여러 유흥적 공간에서 대중들을 상대로 한 취흥(醉興)⋅유락(遊 樂)의 기능을 다하고자 할 때,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음악적, 문학 적 요소들을 두루 흡수하여 그들의 흥미에 적응한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터이다. 그런 점에서 잡가는 본래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가요 유형이 아니라 대체로 18세기 무렵부터 발달한 대중적 혼합가요라고 보아야
할 듯하다. 민요적 원천을 변용⋅개작한 유락적 가요의 기원은 일부 고려속요나 그 이전의 시기에까지도 소급되겠지만, 잡가 가창자들이 어느 정도 직업화한 예능인으로서 독립하고 또 이들의 노래를 즐기 는 시정적 유락의 공간이 발달한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부터이기 때문이다. 잡가의 내용은 애정, 삶의 무상함, 취락(醉樂), 자연의 아름다움과 풍류, 세상살이의 애환(哀歡), 익살⋅희언(戱言) 등 다채로우나 전체 적으로 보아 세속적⋅쾌락주의적 지향이 두드러진다. 「수심가(愁心 歌)」 「황계사(黃鷄詞)」 「육자배기」 「날개타령」 「영산가(咏山歌)」 「유 산가(遊山歌)」 「뒷산타령」 「맹꽁이타령」 등 대다수의 잡가는 철저히 현세적인 관점에서 삶의 여러 욕망과 그 성취, 지연, 좌절에 따른 감 흥과 비애를 노래하며, 비록 덧없는 것일망정 이 세상 안의 삶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을 가장 확실한 가치로 받아들인다. 물, 산, 나무, 꽃, 새와 같은 자연 현상 또한 잡가에서는 우주적 질서의 표현이나 처사적(處士的) 관조의 대상으로 인식되기보다는 유한한 시간 속에 머물러 있는 감각적 사실 내지 일락(逸樂)의 대상으로 형상화된 예가 많다. 이 점은 잡가가 사대부적 미의식과 품격을 지닌 시가류로부터 준별되는 동시에 생활 현장의 절실한 경험에 근거한 민요와도 또 다 른, 시정의 유락가요라는 데에 기인하는 특질이다. 다음의 「선유가(船遊歌)」는 잡가의 다채로운 형태와 주제 중 한 부 분을 보여줄 따름이나, 이를 통해서도 위에 설명한 바의 대략을 짐작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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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神話)
(2) 서사적(敍事的) 갈래
신화(神話)는 그 전승집단의 성원(成員)들에게 진실하고도 신성하 다고 믿어지는 이야기이다. 신화는 일상적 경험의 합리성을 넘어서 존재했었거나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신 혹은 신적인 존재의 위업(威 業)을 다루거나 자연 및 사회 현상의 근원을 설명하는 이야기로서, 특정한 종족이나 역사집단에 의해 신성시된다는 기본 속성을 가진다. 그것은 일상적 경험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초자연적이며, 일회 적 사실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 항구적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전 범적(典範的)이고, 종족의 공동체적 기억과 이상을 표현한다는 점에 서 집단적이다. 근원과 생활양식이 다른 종족들은 서로 다른 신화를 가지기 마련인데, 이들 종족이 교섭, 정복, 연합 등의 과정을 거쳐 보다 큰 규모의 고대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신화 또한 소멸⋅통 합⋅확대 등의 작용을 겪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나라 신화에 있어서의 이러한 변동이 일단락되기까지의 신화 시대는 고구려⋅백제⋅신라가 고대국가로서 자리를 잡은 1세기경까 지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 뒤에도 신화는 계속 전승되었 고 얼마간의 변모를 겪기도 하였을 터이나, 이는 일단 신화시대의 일 과 구별해야 할 것이다. 현전하는 한국 신화 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인 단군(檀君), 주몽(朱蒙), 혁거세(赫居世), 탈해(脫解), 알지(閼智), 수로 (首露) 등의 건국시조신화(建國始祖神話)는 바로 이 시대의 산물로서 문헌에 정착된 것이며, 왕건(王建)을 중심으로 한 시조신화가 고려 건국기에 다시 형성되었다. 한편 건국에 관련된 신화 외에는 탐라(耽 羅, 제주) 삼성(三姓)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 같은 씨족시조신화도 있 으며, 자연부락 단위로 모셔지는 부락신에 관한 신화, 무속(巫俗) 신
앙과 결부되어 전승되는 무속신화도 찾아볼 수 있다. 한 가지 궁금한 일은 이들 가운데 우주⋅천지의 기원에 관한 신화가 일부 민담화(民 譚化)된 잔존 형태를 제외하고는 없다는 점이다. 이에 관한 해명이 아직 미흡한 대로 추정해 본다면, 우리 민족이 중앙아시아 일대로부 터 동북아시아와 한반도로 이주하여 오는 단계에서 이미 창세신화(創 世神話)의 단계를 경과하고 그 잔류 전승이 문헌에 정착되지 못한 때문이 아닌가 한다. 건국시조신화를 중심으로 본 한국 신화의 특징은 천손하강형(天孫 下降型)으로 요약되며, 지리적 이동의 경우에는 서(西)에서 동(東)으 로, 북(北)에서 남(南)으로의 방향이 공통적으로 보인다. 예컨대 천제 (天帝)의 아들인 환웅(桓雄)은 <자주 천하에 뜻을 두어 사람 세상을 바란 끝에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려> 지상에 내려와 웅녀(熊女)에게 서 단군(檀君)을 낳았으며, 천손(天孫)인 주몽(朱蒙)은 척박하고 갈등 에 찬 부여(扶餘)로부터 남하(南下)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혁거 세(赫居世)와 수로(首露) 역시 하늘로부터의 힘에 의해 탄생하고 왕 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렸다. 이들 중 군사적인 영웅으로서의 웅장한 활약상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 동명왕(東明王)신화를 삼국유사(三 國遺事)로부터의 번역으로 전재한다.
국사(國史)「고구려본기(高麗本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고구려의 시조는 동명성제(東明聖帝)로서 그의 성은 고(高)씨, 이름 은 주몽(朱蒙)이었다. 고주몽의 탄생과 고구려 건국의 내력은 이러하 다. 북부여(北扶餘)의 왕 해부루(解夫婁)는 그의 재상 아란불의 꿈에서 받은 천제(天帝)의 명령에 따라 그의 나라를 동부여로 옮겼다. 뒤에 부 루왕이 죽고 금와(金蛙) 태자가 임금이 되었다. 금와가 왕위에 오른 뒤, 어느 날 그는 태백산 남쪽에 있는 우발수 (優渤水)를 지나다가 아리따운 한 젊은 여인을 만났다. 금와왕은 그녀
에게 다가가 웬 여자냐고 물었다. 왕의 물음에 여인은 다음과 같이 고 백했다. “나는 본시 물의 신 하백(河伯)의 딸입니다. 이름은 유화(柳花)라고 해요. 어느 화창한 날 동생들과 함께 나들이를 갔더랬지요. 그때 풍채 가 늠름한 한 남자를 만났어요. 그는 자기가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 漱)라고 말했어요. 그는 나를 꾀어 웅신산 아래의 압록강 가에 있는 어 떤 집 속으로 데리고 들어갔어요. 거기서 그는 나를 사통(私通)하고, 그리고는 훌쩍 떠나가고 영영 돌아오지 않고 있어요. 부모님은 나를 여간 꾸짖지 않았어요. 중매도 거치지 않고 함부로 낯선 사내에게 몸 을 맡겼다고요. 그래서 나를 이곳에다 귀양 보낸 것이랍니다.” 여인 유화의 고백을 듣고 금와왕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그 유화를 데리고 가서 으슥한 방 속에 가두어 두었다. 그랬더니 신기하 게도 그 으슥한 방 속으로 햇빛이 들어와 유화의 몸을 비추기 시작했 다. 유화가 몸을 움직여 그 햇빛을 피하노라니 또 따라와 그녀의 몸을 비추곤 했다. 그러더니 유화는 마침내 잉태하게 되었고, 닷 되들이 크 기만 한 알 하나를 낳았다. 금와왕은 사람이 알을 낳은 것이 꺼림칙하여 그 알을 내다 버리기 로 했다. 처음에는 개와 돼지들에게 그 알을 던져 주어 보았다. 그랬더 니 그들은 통 알을 먹으려 들지 않았다. 말과 소들이 다니는 길바닥에 다 내다 버려 보았다. 말과 소들도 그 알을 밟지 않고 곁으로 피해 갔 다. 다시 들판에다 가져다 버렸다. 이번에는 새와 짐승들이 내려와 그 알을 날개랑 몸으로 덮어주는 것이었다. 왕은 하는 수 없이 그 알을 도로 가져다 깨뜨려 버리려 했다. 그러 나 알은 또 깨뜨려지지도 않았다. 마침내 그 알을 어미 유화에게 되돌 려 주었다. 유화는 알을 포근히 감싸서 따뜻한 곳에다 보호했다. 그 알에서 껍질을 깨고 한 아기가 태어났다. 골격이며, 외모부터가 영명해 보이고 기특했다. 나이 겨우 일곱 살에 그 아이는 여느 아이들 과는 달리 여간 숙성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 힘으로 활이랑 화살을 만 들어 곧잘 쏘아댔는데 그것이 또 백발백중이었다. 그때 동부여국에선 활 잘 쏘는 사람을 가리켜 주몽이라 불렀다. 그래서 그 아이의 이름을
주몽이라 지었다. 금와왕에겐 일곱 왕자가 있었다. 그들은 항상 주몽과 함께 활쏘기며 말타기며 사냥질 등 놀이를 같이 다녔다. 일곱 왕자 중에 그 누구도 주몽의 재주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주몽을 시기해 오던 태자 대소(帶
꾼으로 있게 했다.
素)는 드디어 왕에게 아뢰었다. “주몽은 본시 인간의 정기로 태어난 놈이 아닙니다. 만약 일찍 그를 없애버리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합니다.” 금와왕은 태자 대소의 말대로는 따르지 않았다. 왕은 주몽을 말먹이
주몽은 앞으로 필경 일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라 예감하고서, 그 일 어날 일에 대비하여 말의 품종의 좋고 나쁨을 식별해 두었다. 그래서 품종이 썩 뛰어난 놈을 골라 일부러 먹이를 적게 주어 여위게 만들었 다. 그리고 미련한 놈은 잘 먹여 살찌게 해두었다. 아니나 다를까, 왕 은 살찐 말을 골라 자기가 타고 여윈 놈은 주몽에게 주었다. 태자 대소 등 여러 왕자들과 금와왕의 여러 신하들은 장차 주몽을 해치기로 모의했다. 그 낌새를 알아챈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은 몰래 주몽에게 말했다. “이 나라 왕궁의 사람들이 장차 너를 해치려 하는구나. 너만 한 재 략으로 어디 간들 뜻을 못 이루랴. 곧 이곳을 벗어나 화를 면하도록 해라.” 그때 주몽에겐 오이(烏伊) 등 세 사람의 충실한 부하이자 믿음직스 러운 벗이 있었다. 주몽은 곧 이들 세 사람과 함께 동부여 땅을 탈출 해 나왔다. 일부러 여위게 먹임으로써 자기 차지가 되게 했던 그 준마 를 타고서 … 대소 태자 등 여러 왕자들과 금와왕의 여러 신하들은 주몽의 탈출 을 알아채고 곧 뒤따라 말을 달려 추격해 왔다. 주몽 일행은 엄수(淹水)에 다다랐다. 앞을 가로막은 검푸른 강물을 건널 길이 묘연했다. 추격자들은 점점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주몽 은 강물을 향해 호소하였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자 물의 신 하백(河伯)의 외손이다. 오늘 화(禍)
를 피해 도망해 오는 길, 쫓는 자들은 바로 뒤에 닥치고 있는데 어쩌 면 좋으랴?” 주몽의 호소가 있자마자 문득 물결 위로 무수한 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스스로의 몸들을 이어 순식간에 다리를 이룩했다. 주몽 일행은 그 고기와 자라들의 다리 위를 달려 강을 건넜다. 주몽 일행이 맞은 편 강 언덕에 닿자 그 고기와 자라들은 물속으로 흩어져 가고 다리는 풀려 버렸다. 주몽 일행을 추격하던 무리들은 마 침내 그 물을 건너지 못했다. 주몽 일행은 졸본주(卒本州, 현토군 부근임)에 이르러 그곳을 도읍 으로 정했다. 미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일단 비류수(沸流水) 언저 리에 초막을 짓고 머물러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이에 따라서 주몽은 그의 성을 고씨로 했다. 이때 주몽의 나이는 열두 살(역주 : 삼국사기에는 22세라 했다). 그가 즉위하여 왕이라 일컬은 것은 중국 하(漢)나라의 효원제(孝元帝) 12년(B.C.37)의 일이었다. <이동환 역>
주몽(朱蒙)⋅탈해(脫解)⋅궁예(弓裔)⋅작제건(作帝建) 등에 관한 건 국시조신화는 서사무가(敍事巫歌)로 전승되는 무조신화(巫祖神話)와 더불어 <영웅의 일생>이라 지칭되는 유형적 서사구조를 가진다. 조 동일(趙東一)⋅김열규(金烈圭) 교수의 연구에 따라 이를 살펴보면, i) 고귀한 혈통을 지니고, ii) 비정상적으로 태어나, iii) 비범한 자질을 가졌으나, iv) 기아(棄兒)⋅고난 등을 겪으며, v) 구출⋅양육자를 만 나 살아나고, vi) 다시 위기를 극복하여, xii) 투쟁의 승리와 영광을 차지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와 같은 서사구조는 고난의 심각성보 다는 그 극복의 가능성을 중시하며 현세에서의 성취를 강조하는 낙 관주의적 세계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서사 유형 은 조선 후기의 영웅소설(英雄小說)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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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연으로 그리되었노라는 이야기가 그 내용을 이룬다. 이들은 때 때로 민담과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으나, 대상이 되는 사물의 지 역성, 개별성이 강할 경우에는 대개 전설이라 보아 틀림없다. 아직도 농어촌 곳곳에 남아 있는 지명(地名), 지형(地形) 전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역사적 전설은 전설 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으로, 실제의 역사적 사실과 인물에 관한 이야기가 민중들의 기억과 구술 (口述) 행위를 거치는 동안 윤색⋅변형됨으로써 생겨나고 또 변모한 다. 따라서 그것은 실제의 역사적 사실과는 많든 적든 어긋나기 마련 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전설의 허황함 때문이라고만 여 길 것이 아니라 설화 속의 인물 및 사건을 인식하는 민중들의 상상 적 사고와 가치의식이 반영된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적 전설은 민간 의식에서 발생하고 전승되는 일종의 구비역사(口 碑歷史)이다. 역사적 전설은 국가적, 지방적 위난(危難)이나 사건이 있던 시기 이후에 특히 많이 생겨났으며, 이들 속에는 저명한 실제 영웅들과 더불어 미천한 신분의 평민층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다. 임 진록(壬辰錄)같은 고전소설은 그러한 이야기들이 후대에 결집되어 이루어진 작품이다. 현지 조사를 나가 보면 아직도 많은 지방에서 임 진왜란, 동학농민전쟁 등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파생된 전설들을 채집 할 수 있으며, 사회적으로 깊은 상처를 지닌 전설들은 제보자(提報 者)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으려 하는 예도 있다. 신앙적 전설은 민간신앙을 기초로 한 종교적 이야기로서, 순수하 게 종교적인 것에서부터 미륵(彌勒) 화생(化生), 정도령(鄭道令) 도래 (到來) 등과 같이 당대 질서의 모순⋅고통을 타파하고 새 세계를 이 룩한다는 존재의 출현에 관한 전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특히 후 자의 전설들은 신라 말기, 고려 말, 조선 후기 등 사회적 불안이 고 조된 시기에 많이 나타나서, 민중 봉기의 신앙적 기반 내지 유인(誘
因)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전설이 대체로 일정한 지역성을 띤다는 점은 이미 지적한 바이지 만 그 중에서도 어떤 것들은 지역적 국한성을 넘어 비슷한 유형의 이야기가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예컨대 미천한 농 부의 자식으로 태어난 아기장수(將帥)가 탁월한 힘과 지혜에도 불구 하고 비극적인 죽음으로 좌절한다는 「아기장수(將帥) 전설」은 내용을 약간씩 달리하는 유화(類話)들이 우리나라 여러 지방에서 두루 발견 된다. 이것은 곧 평민영웅의 가능성과 신분적 질곡 사이의 심각한 갈 등이 한국 중세사회 전반의 심각한 문제로서 잠재하였던 사실을 반 영하는 현상이라 할 것이다. 강원도(江原道) 춘성군(春城郡) 덕받제라 는 곳에 전해지는 아기장수 전설 하나를 여기에 소개한다.
장씨네 들어오신 담에 박씨네가 인제 들어왔잖어요. 들어와가주구선 우리 박씨네가 젤 어딜 들어와 계시냐 하면 저 구멍동이라는데 있잖어 요. 여기 지도 보며는 구멍동 있죠. 근데 참 하루 인제 애기를 뱃는데요. 게깐 이거 내가 삭갈렸어(이야 기 순서가 헷갈렸다는 뜻). 이제 부모가 돌아가셨어 그래서 인제 산자 릴 못 잡구서 인제 임시 이렇게 아무데나 묻어놓구 있는데 하루는 중 이 와서 저 자구 가자 그래요. 그래 자라 그래니깐 봐도 벌써 상제가 다르잖어요.
“그래 난 상제다.”
그래서
시구 있다.”구 그래니깐, “그러냐”구.
자.”
“아, 쥔양반 상제가 아니냐?”구.
“어버지 어떻게 산자리나 바루 구해썼느냐?”
“못 살다 보니깐 산자리두 구해 못 씨구 이렇게 아무데나 그냥 모
“그럼 내가 산을 한 자리 본 게 있으니깐 내일 상제님들이 거길 가
이거예요. 게 참 밥을 싸가지구 일찍아니 떠나자구 그래선 밥을 싸 가지구 가는데, 어디냐 하면 지금 그 동면 번개터지. 저 덕밭제 동면이 야 거기가.
서
“알었다.”
“박치관 : 시방은 홍천군이야.” 아 그전엔 동면 덕밭젭니다. 그 동면 덕밭제라는 델 가더니 턱 지관이 하는 말이, “여기다 산을 쓰슈.” 이말야. 게 보니까 참 앞에 장군석이 서이가 돌이 서 있어유. 그래
구 말야. 그래서 와가지군, 참 중들은 간 담에 신체를 모셔다 거기 다 썼어요. 썼는데, 그 후루 참 태기가 있어가주구서 언낼 뜩 났는데, 이 언네 어머니가 밤에 한 밤중된예 보면 언네가 땀이 촉촉히 난단 얘 기야, 이상허게. 이것두…… 사흘째 그렇게 땀이 나거던. 게 하룻저녁 엔 아주 새우면서 이걸 봤어. 이게 왜 이렇게 땀이 나나 하구 보니깐, 이 새빨구뎅이 어린애가 바시시 일어나더니 문을 열구 나가더란 얘기 예요. “조사자 : 예, 갓난애가요.” 예, 갓난언애가. 나가더니 고 앞에 가래낭기 커다만게 하나 있는데 훌쩍 날아 올라가더니, 가래낭구에 인 제 오르락 내리며 인제 재줄 허는 기야. 재주를 디려 허더니 내려오더 니, 들어와선 어머니 품속에 딱 들어오넌데 맨져보니 그 때 땀이 나더
“큰 일 났습니다.” “왜 그러니?”
“쥑여야 된다.”
란 얘기야. 게선 시아부지한테 얘길 한거야.
“저 인제 한 나달 된게 저렇게 가래남글 뚸넘어가서 밤이면 재주를 부리구 그러니 이 어떡헙니까?”
이거지. 그럼 잘못되면 역적이구 잘 됨 충신이니까 이거 안 된단 얘 기야. 그러니까 팥섬을 막 지질러 놓니까 참 들썩들썩하더니, 이놈을 쥑였어요. 아주 지지눌러 가지고 쥑였는데, 사흘만에 아 중이 찾어온 거야. 찾아오더니, “이 집이 아기 낳으니 아기 내놔라.”
“아, 안 낳다.” 구 그래니깐
“빨리 내놔라.” 이거야.
적 얘길 했어.
그래니깐
이거거든. 아 그래선
“아, 그런 애기 없다.”구.
“이거 내가 데루구 갈테니깐 내놔라.” 그래서 그런 일 없대니깐 절대 꼭 났이니깐 내노라구. 그래선 노골
“이거 잘못 되면 우리 역적으루 몰려서 우리 박씨네가 죽을거 같어 서 이걸 지지눌러서 쥑였다”구. 그래니깐 아 자기 복장을 막 디려 치더래요. 분하다구 말야. “이걸 내가 데려다 꼭 키워야 되는데 어쩐 말이냐?”
“앞으루 둘이 또 날테니깐 이거는 꼭 날 뒀다 다과.” 게군 중은 가더란 얘기야. 그런데 기 이튿날 아 으앙 소리가 나더니 용마가 하나 와가주구선 마당에서 말야 네 무릎을 꿇곤 볶아치더래요. 그래더니 훌쩍 건너가서 그 근너 가서 엎드려 죽어서, 거기서 인제 배 낭기 하나 올라왔거던요. 그래 지끔두 거길 <용의배나무꼴>이라구 그 럽니다. 여기 올라가면, 구멍동 가면 예, 용의배나무꼴이 있어요. 게 거기가 용이 엎드려 죽었는데 거기서 배남기 하나 올라왔어요. 그래 용의배나무꼴이예요. 게 우리 박씨네가 장사 또 둘 난다는 바람에 이 걸 못나게 하느냐구, 아주 저 처녀 총각 죽은 놈에 뫼를 파다간, 송장 을 파다간 앞 뒤다 콱 눌러썼어요. 게선 꼼짝을 못하죠. <서대석 채록>
몇몇 인물 전설들은 한두 토막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특정 인물 을 중심으로 한 많은 이야기들의 군집을 형성하는 흥미로운 사례도 볼 수 있다. 임경업(林慶業),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 봉이(鳳伊) 김
선달(金先達), 동해안 지역의 김선달이라 할 수 있는 방학중이 등에 관한 이야기들이 좋은 예이다. 전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지만 조선 후기에 와서 시정문화(市井 文化)가 발달하면서 더욱 활발하게 유통되고, 야담류(野談類)로 기록 ⋅윤색되거나 소설에 편입되어 이 시기의 기록 서사문학 발달에 크 게 기여하였다.
민담(民譚)
민담은 이야기하는 이나 듣는 이가 모두 신성하다고 여기지 않으 며 참이라고 전제할 필요도 없는, 그래서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 말이지……>라는 식으로 시작하는 흥밋거리의 이야기이 다. 민담의 주인공은 일상적 범인(凡人) 혹은 그 이하의 인물이되, 갖 가지 난관에 부딪혀도 다행스러운 계기와 도움을 통해 이를 극복하 고 행복한 결말에 도달한다. 민담의 세계에 불가능이란 없다. 그것은 동화적인 천진성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는 이야기로서, 어떤 고난도 넘어설 수 있고 또 넘어서야 한다는 민중들의 낙관적 상상력의 표현 이다. 민담은 전설과 달리 구체적인 증거물을 가지지 않으며, 지역적 제 한성을 띠지도 않는다. 민담류의 이야기 중 어떤 것은 종족적⋅문화 적 울타리를 넘어 전 세계를 널리 여행하기까지 한다. 그렇다고 해서 유사한 내용의 민담이 반드시 하나의 근원으로부터 전파되었다고 보 아야 할 것인가는 의문이지만, 인류의 공통적인 욕구와 흥미가 민담 에 가장 또렷하게 유형화되어 나타난다는 것은 분명하다. 대부분의 민담은 등장인물 설정과 사건 구조에서 반복이나 대립이 선명하게 도형화(圖型化)된 기하학적 구조를 가지는데, 이와 같은 특성 또한 그것의 강력한 전파력에 긴밀한 관련이 있다. 민담 구조의 단순성과
체계성은 전승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인간 경험의 다면적 얽힘을 명료하게 집약하는 구실을 하기도 한다. 민담의 분류는 기준을 세우기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달라질 수 있으 나, 여기에서는 동물담(動物譚), 본격담(本格譚), 소화(笑話)의 3분법 에 따라 간략한 윤곽을 소개하면서 한국 민담의 사례에 대해 언급하 고자 한다. 동물담은 말 그대로 동물에 관한 이야기, 혹은 동물이 주된 행위 자로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이를 다시 동물유래담, 본격동물담, 동물 우화로 나눈다. 이 가운데서 문학적으로 보다 흥미로운 것은 위의 두 가지이다. 특히 동물을 의인화(擬人化)하여 인간 세계의 갈등을 표현 한 본격동물담 중 일부는 민담으로 머무르지 않고 조선 후기의 일부 소설에까지 차용되었다. 「토끼전(傳)」 「서대주전(鼠大州傳)」 「장끼전 (傳)」 등이 이런 부류의 소설이다. 본격담은 인물의 특성과 사건 해결 방식에 따라 현실담과 공상담 으로 나뉜다. 현실담은 어느 정도 경험적 현실성을 띤 이야기인데 비 해, 공상담은 초현실적인 인물과 사건으로 이루어진 이야기이다. 아 래의 자료는 세계적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는 「천 냥짜리 점(點)」 유 형의 이야기인데, 공상담류 중에서도 예언담(豫言譚, 점복담)의 부류 에 속한다. 얼핏 보기에 이상하기 짝이 없는 가르침들의 의미가 드러 나는 과정에 이야기의 묘미가 담겨 있다.
전에 내외가 살았는데 안에서는 베를 짜고 남자는 장에 가 양식을 팔아왔다. 용한 점쟁이가 장에서 법석치는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나도 쳐 봤으면 좋겠는데, 점을 치면 복채가 비싸서 쌀을 못 사 집에도 못 가게 되었지만 점을 쳤다. 점괘가 “마음이 위태롭거든 목적지까지 가 지 말고 되나오라. 무섭거든 춤추라. 반가워하거든 살살 기라.” 그 남 자가 집에를 못 가고 어디를 가는가 하면 도망을 가는데 큰 강이 앞을 막아 배를 타게 되었는데 사람이 몯아야 가는데 기다리다가 사람이 차
서 떠났다. 바람 불고 날이 꾸무럭해지고 돌개바람이 불어 배가 뒤집 힐 듯했다. 점괘 때문에 “아이 무서워 못 가겠다. 돌아가자.”고 야단을 했더니, “정말 못 가겠느냐?” “아 그래도 나는 안 간다.” 할 수 없이 도로 갖다 주고 배가 중간쯤 가다가 돌개바람이 불어 휘떡 뒤집혀 그 는 점쟁이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 길로 산골길로 가다 보니 집도 없고 첩첩 산중에 초입부터 해골이 쓰러 문드러져 되나오자니…… 들 어갈수록 해골이 널렸다. 첫 번에 뭐가 똥그란 게 또굴또굴 굴러 와서 장따구를 쳐다봉께, 키가 구십 척도 더 큰 것이, 눈은 화등잔같이 큰 것이 춤을 췄다. 그래서 <무서우면 춤을 추라>는 점괘를 생각하고 같 이 덩실덩실 춤을 추었더니 차차 차차 작아져서 사람만 하게 되어, 보 고 웃으며 “나는 소원이 다 풀렸다. 당신 때문에 원이 풀렸다. 나는 마 초귀신이나 하도 천상에서 죄를 많이 져서 구천 상제님께서 네놈 얼굴 보고 춤추는 놈 있으면 죄 풀리리라 하고 말한 다음에 춤추는 사람이 없어 한이더니 당신 때문에 원 풀었으니 당신의 소원이 무에든지 들어 주겠다.” “부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 동삼밭을 가리켜 줄 께……”하고 “고개 고개 넘어 양지쪽 꼭대기 바위가 삐딱한 데 동삼밭 이 있을 것이다.” 해서 말대로 찾아가 뽑으니 무 같은 동삼이 한정 없 이 나왔다. 하도 좋아 한 망태기 가지고 집에 갔다. 마누라가 반가워했 다. 또 <반가워하거든 살살 기라>는 점괘 생각에 살살 기었더니 마루 밑에 시퍼런 칼을 든 괴한이 있었다. 그 사이에 다른 남자를 데리고 살려고 했던 것이다. “아하 나 죽일라고…… 내 이 집도 내 아내도 자 식도 다 줄테니 나와라.” 나오니 그 사람은 다 버리고 동삼을 팔아 서 울에 와서 잘 살았다. <조희웅 채록>
소화(笑話)는 다른 나라의 경우에 비해 우리 민담에서 훨씬 다채롭 고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듯하다. 과장담(誇張譚), 치우담(痴愚譚), 사기담(詐欺譚), 모방담(模倣譚), 경쟁담(競爭譚)으로 세분되는 소화의 하위분류 가운데서도 특히 골계적 성격이 강한 앞의 세 가지가 한국
민담의 특징적 면모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하지 않은가 한다. 방귀 잘 뀌는 며느리, 구두쇠 자린고비, 바보 사위, 실수하는 사돈 등 우리에 게 아직도 친숙한 평민적 민담으로부터 고금소총(古今笑叢)류의 골 계담(滑稽譚)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어리석음, 변덕스러움, 건망증, 실 수 등 갖가지 결함에 관련된 소화들은 상당히 많은 분량에 달한다. 이들 소화가 대체로 차가운 풍자의 공격성보다는 해학적 관용의 분 위기를 띤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한국인의 전통적 생활감각과 인간관
서사무가(敍事巫歌)
의 한 단면을 짐작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문학에 고대(古代) 서사시(敍事詩)가 존재하였는가라는 의문에 관하여는 현전하는 작품상의 확증이 미흡한 대로 긍정적인 추론이 제시된 바 있다. 즉 단군(檀君), 주몽(朱蒙) 등 건국 영웅의 신화는 산문으로 한역(漢譯)되어 전해지고 있으나, 그것이 고대의 국가적 제 전(祭典)에서 실연(實演)된 모습은 <제의(祭儀)의 구비적(口碑的) 상관 물(相關物)> 즉 서사시 형태였으리라는 것이다. 특히 동명왕(東明王) 전승의 경우에는 신이한 능력을 지닌 천손(天孫) 주몽(朱蒙)이 온갖 시련과 위난(危難)을 물리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까지의 이야기가 한편의 웅대한 건국서사시로서 부족함이 없다. 고구려인들은 건국 영 웅이자 수호신인 주몽과 생산신으로 추앙된 그의 어머니 유화(柳花) 부인을 섬기는 제전을 정기적으로 거행하였는데, 건국신화는 이들 제 의에서 집단의 신성한 내력을 회고하며 공동체적 믿음을 굳건히 하 는 서사시로 구송(口誦)되었을 것이다. 서사무가는 이러한 고대적 제전의 전통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라 진 뒤 무속(巫俗) 신앙을 기반으로 하여 전승된 무속신화(巫俗神話) 이자 서사시이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서사무가가 오랜 동안의 역사
과정에서 얼마만한 변모를 거쳤는가는 아직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단군, 주몽, 혁거세 등의 국조신화(國祖神話)는 고대국가 형성 이전에 여러 부족들 사이에서 전승되던 무속신화 중 우세한 집단의 것이 국가의 조상신 신화로 이입된 듯하고, 갖가지 신들의 내력을 서 술하는 서사무가는 그 자체가 한민족의 원초적 우주관⋅인간관의 표 현으로서 중요할 뿐 아니라 한국 서사문학의 역사적 줄기를 파악하 는 데에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의의를 지닌다. 무가에는 서사무가 외에 일정한 주인공이나 사건 구조 없이 무속 적 세계상과 종교적 사실을 평면적으로 기술⋅전달하는 전술무가(傳 述巫歌)도 있고, 소망⋅축원⋅탄식 등을 주 내용으로 한 서정무가(抒 情巫歌)도 있어서 굿의 전체 구조 안에서 기능을 분담한다. 그러나 문학적인 측면에서는 이들에 비해 서사무가가 훨씬 중요하게 취급된 다. 서사무가는 일정한 주인공의 행적을 노래와 말을 섞어가며 창한다 는 점에서 서사시의 일종이지만, 신의 내력을 서술하는 것이라는 점 에서는 무조신화(巫祖神話, 본풀이)이다. 무당의 굿에서는 진행하는 거리마다 주관하는 신이 다른데, 그를 굿판에 부르고 그 신성한 능력 을 밝히기 위한 것인 까닭에 서사무가를 청배무가(請拜巫歌)라고도 한다. 따라서 그것은 무당에 의해 무의(巫儀)에서만 연창되는 전승 제한과 신성성⋅주술성을 기본 속성으로 하나, 후대에 첨가된 민간연 희적 속성 즉 놀이로서의 기능도 지닌다. 후자의 특징은 특히 동해안 및 중부 이남 지역에 분포된 세습무(世襲巫)의 굿에서 많이 나타나 며, 굿의 종류로 보아서는 부락 단위의 풍농(豊農)굿, 풍어(豊漁)굿 등 축제적 성격의 굿에 현저하다. 무당은 장고, 꽹과리, 징, 날나리 등의 악기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 와 말을 섞어 가며 서사무가를 창하는데, 그 분위기와 내용이 반드시 엄숙한 것으로 일관하지만은 않는다. 여기에는 굿의 세속적 연희성과
더불어 무속적 세계관과 신관(神觀)의 특징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무속적 사고에서는 선계(仙界), 불계(佛界)나 저승이 사람이 살고 있 는 세계의 수평적 연장 저편에 존재하며, 신⋅귀신⋅잡귀 등의 존재 들도 보통 사람과 비슷한 감정 및 욕망을 지닌 것으로 인식된다. 따 라서 서사무가의 주인공이 겪는 고난과 그 해결 방식은 현실적 경험 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면서도 세부적 전개 양상은 매우 인간적이 다. 그리고 여기에 때때로 세속적 삶의 면모를 반영하는 삽화와 재담 이 첨가됨으로써 익살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하는 것이다. 서사무가 가운데서도 가장 잘 알려진 유형인 「바리공주(公主)」(바 리데기, 오기풀이)의 골격만을 여기에 소개한다. 바리공주는 오구굿 의 여러 거리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무신(巫神)으로서, 이승과 저 승 사이의 길을 열어 망자(亡者)의 혼령을 편안하게 인도하는 힘을 지닌다고 한다. 무가 「바리공주」는 그녀가 어떻게 해서 이러한 신이
든다.
않으려 한다.
되었는가를 밝히는 본풀이이다.
① 어떤 왕국(나라 이름은 이본에 따라 다름)의 왕이 차례로 일곱 공주를 낳는다. ② 아들을 얻지 못하여 상심한 왕은 일곱째 딸을 내버리게 한다. ③ 버릴 때마다 새, 짐승 따위가 아기를 보호하여, 마침내 멀리 가 져다 버리도록 한다. ④ 버려진 아기 즉 바리공주는 석가세존(釋迦世尊) 혹은 다른 초자 연적 힘의 도움으로 양육된다. ⑤ 왕(혹은 왕과 왕비)은 하늘이 내신 아기를 버린 죄로 죽을 병이
⑥ 점을 쳐 보니 이 병은 저승의 약물을 길어다 먹어야 낫는다고
⑦ 여섯 공주 중 아무도 부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저승길을 가지
로 돌아온다.
왕을 살린다.
된다.
⑧ 마지막 희망인 일곱째 공주를 찾아 데려온다. ⑨ 바리공주는 자신을 버렸던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저승으 로 구약(求藥) 여행을 떠난다. ⑩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하여 저승에 도달하고, 약물을 구하는 데 필요한 과제를 감당해낸다. 그 한 예로서, 서울 지역의 전승에서 는 바리공주가 무장승을 만나 물 삼 년 길어주고 불삼년때주고 나무 삼 년 해주고 또 그와 결혼해서 일곱 아들을 낳는다. ⑪ 오랜 인고를 견딘 끝에 바리공주는 저승의 약물을 얻어 이승으
⑫ 와보니 왕은 이미 죽어서 상여를 내가는 중이다. ⑬ 바리공주는 저승의 약물과 그 밖의 신비로운 물건들을 써서 부
⑭ 마침내 바리공주는 이승과 저승의 길을 인도하는 무신(巫神)이
서사무가는 개인과 집단의 평안⋅번영을 기원하는 재수굿이나 혹 은 억울하게 죽은 이의 혼령을 저승으로 보내는 오구굿(진오귀굿) 등 의 여러 제의를 통해 평민사회의 종교적⋅연희적 요구를 충족하였을 뿐 아니라, 판소리⋅고전소설의 발생 내지 발달에도 적지 않은 영향 을 미쳤고, 민요류의 노래들과도 활발한 교섭을 주고받았다. 고대신 화에서부터 비롯된 <영웅의 일생>이라는 구조는 서사무가의 매개를 통해 영웅소설의 형성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추정되며, 판소 리는 음악적 특성과 구연(口演) 방식에서 서사무가와의 친연성(親緣
판소리
性)을 뚜렷이 지녀서 흥미로운 고찰의 과제가 되고 있다.
서사무가가 주술성⋅신성성을 지닌 무속서사시(巫俗敍事詩)인 데
비하여, 판소리는 고도한 음악적 표현력을 바탕으로 삼고 익살과 재 담을 풍부하게 섞어가며 지상적(地上的) 차원의 사람살이를 노래하는 세속적 구비서사시이다. 판소리는 문학적 요소인 사설⋅재담과 더불 어 다채로운 음악과 현장 연출을 필요로 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그 연행성(演行性)을 중시하여 연극이라 하는 이도 있으나, 판소리 전체 를 지배하는 원리는 서사적인 것이며 연극적 요소는 이에 부수되는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판소리에 있어서 창자(唱者)의 발림(몸짓), 장 면화(場面化)의 경향, 그리고 창자가 작중인물에로 자주 전환되는 일 등은 물론 연극적 속성의 표현으로 이해될 만하다. 원각사(圓覺社) 시대에 판소리가 활발하게 창극화(唱劇化)한 것도 이러한 내재적 성 향에 힘입어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인창의 예술인 판소리 자 체는 기본적으로 서사자의 서술에 의거하여 작품의 전체적 흐름이 엮어지며, 연극적인 표현 요소들이 서사성을 대체할 만큼 우월하다고 는 해석하기 어렵다. 판소리의 기원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호남 지방의 단골무(丹骨巫)들이 부르는 서사무가 또는 그 굿에서 유래하였으리라 는 추정이 가장 유력하다. 전라도 지방의 서사무가는 장편 구비서사 시의 형식, 창⋅아니리를 섞어 부르는 구연 방법, 음악적 장단⋅선율 구조, 창법 등 많은 부분에서 판소리와의 친근성을 보인다. 아울러 역대 판소리 창자 대다수가 이 지방의 무가(巫家) 출신이었다는 사실 또한 주목할 점이다. 이러한 기원적 연관 위에서 성립한 판소리가 서사무가와 전혀 달 리 일상적 삶의 문제를 다루는 예술로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17세기 말엽 혹은 18세기 초의 일로 추정된다. 물론 초기 단계의 판 소리는 내용과 표현이 모두 소박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세속화된 직 업적 연희로서 성공하기 위해 창자들은 다채로운 레퍼토리와 풍부한 내용 및 음악적 탁월성을 갖추기에 힘써야 했고, 그 결과 18세기 중
엽의 판소리는 매우 높은 수준의 창악적(唱樂的) 서사시로 발전하였 다. 판소리의 창자들은 창을 엮어냄에 있어서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하 기보다는 전래하여 오던 설화를 근간으로 하여 그것을 다채롭게 윤 색⋅개작하는 방향을 택하였다. 이렇게 해서 일단 성립한 작품들은 창자들의 사승(師承) 및 교류에 따라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승 되면서 부분적인 개작⋅확장과 세련 즉 <더늠>의 형성에 의해 매우 다채로운 내용과 음악적 표현을 축적하였다. 그 결과로 이루어진 판 소리 레퍼토리가 열두 마당에 이르렀음을 19세기 초의 문헌인 관우 희(觀優戱, 송만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열두 마당 중에서 현재까지 창으로 전해지는 「춘향가(春香歌)」 「흥 보가(興甫歌)」 「심청가(沈淸歌)」 「수궁가(水宮歌, 토끼타령, 토별가)」 「적벽가(赤壁歌)」를 전승 오가(五歌)라 한다. 실전된 일곱 마당 가운 데 「배비장(裵裨將)타령」 「가루지기타령」 「옹고집전(雍固執傳)」 「장 끼전」 「강릉매화(江陵梅花)타령」 「무숙이타령(왈짜타령)」은 사설본(辭 說本) 혹은 소설화된 축약본이 남아 있으나, 「가짜신선(神仙)타령」은 단편적인 문헌기록을 통해 그 존재 사실과 내용의 윤곽만을 알 수 있을 따름이다.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 정노식)에는 「가짜신선타령 」 대신 「숙영낭자전(淑英娘子傳)」이 열두 마당의 하나로 열거되어 있 으나, 이를 지지할 만한 증거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열두 마당의 전승이 이처럼 줄어들게 된 것은 평민적 기반 위에서 발달하여 온 판소리가 18세기 말 이후 양반⋅부호층의 청중을 획득 하면서 그들의 기호(嗜好)를 강하게 의식한 때문이다. 실전(失傳)된 일곱 마당이 평민적 해학과 풍자에 철저하였던 데 비하여 전승 5가 가 평민적 현실주의와 중세적 가치의식이 공존하는 양면성을 보이는 점도 여기에 기인하는 현상이다. 판소리 창자들은 전승적 이야기의 골격을 근간으로 삼되 그 중에
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을 확장⋅부연하는 방식으로 사설과 음악을 발전시켜 나아갔기 때문에 판소리는 이야기 전체의 흥미나 감동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판소리 및 판소리계 소설에서 앞뒤의 내용이 잘 맞지 않거나, 때로는 뚜렷하게 모순되기까지 하는 일이 흔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판소리는 그 나름의 독특한 서사적 구성 원 리를 가지고 있다. 창과 아니리, 비장(悲壯)과 골계(滑稽)를 엇섞어 배치하여 청중들을 작중현실에 몰입시켰다가 해방하는 방식이 그것 이다. 판소리가 청중을 자유자재로 울렸다가 웃겼다가 한다는 예로부 터의 말은 바로 이러한 정서적 긴장과 이완(弛緩)의 반복을 지적한 것이다. 판소리 사설은 운문과 산문이 혼합되어 있을 뿐 아니라 여러 계층 의 청중들을 상대로 하여 적층적(積層的)으로 발달한 까닭에 언어의 층위가 매우 다채롭다. 그 속에는 전아(典雅)한 한문(漢文) 취미의 대 목이 있는가 하면 극도로 익살스럽고 노골적인 욕설⋅속어가 들어 있으며, 무당의 고사나 굿거리 가락이 유식한 한시구와 나란히 나오 기도 한다. 이 밖에 민요, 무가, 잡가, 사설시조, 선소리, 십이가사(十 二歌詞) 등 각종 민간가요가 판소리 속에 많이 삽입되었다. 아울러 판소리 문체의 특징적 현상으로서 <언어 층위(層位)의 분 리>라는 경향성을 지적할 수 있다. 언어 층위의 분리란 등장인물의 신분⋅성격⋅분위기와 서술자의 태도에 따라 말의 종류가 판이하게 바뀌는 현상으로서, 판소리에서는 작중상황에 따라 음악상의 장단(長 短), 조(調)가 다채롭게 엮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체 면에서도 이 러한 변이가 나타난다. 예컨대 존귀하고 품위 있는 인물이 등장하는 대목에서는 음률이 우아할 뿐 아니라 사설 역시 장중⋅엄숙한 언어 로 엮어진다. 반면에 신분이 낮거나 비속한 인물 및 풍자적 대상이 등장할 때, 그리고 반드시 부정적인 인물은 아니더라도 희극적 시각 에서 조명될 때 그 대목은 소박하고 발랄한 평민적 속어로 처리된다.
다음의 두 보기 가운데서 앞의 것은 심청가(沈淸歌)」 중 심청이 집 떠나는 대목이며, 뒤의 것은 놀보가 양식 얻으러 간 흥보를 때려 내쫓는 흥보가(興甫歌)」의 한 대목이다.
【아니리】 그때여 동네 사람들이 모도 달려들어 심봉사의 손을 꽉 붙들어 놓으니, 심봉사, 옮도 뛰도 못허고 그대로 딸을 잃어 버리는듸, 【중몰이】 “못 가지야, 못 가지야, 날 버리고 못 가지야. 아이고, 이 놈의 신세 보소. 마누라도 죽고 자식까지 마저 잃네.” 엎더져서 기절을 하니 동네 사람들은 심봉사를 붙들고. 그때여 심청이는 선인들을 따라 를 간다. 끌리난 치맛자락 거듬거듬이 걷어 안고, 흐트러진 머리채는 두 귀 밑에 와 늘었구나. 비와 같이 흐르난 눈물, 옷깃에 모두 다 사무 친다. 엎더지며 자빠지며 천방지축 따러간다. 건넌말 바라를 보며, “이 진사 댁 작은 아가, 작년 오월 단오날에 앵도 따고 노던 일을 니 가 행여 잊었느냐? 너희들은 팔자 좋아 부모 모시고 잘 있거라. 나는 오날 우리 부친 이별허고 죽으러 가는 길이로다.” 동네 남녀노소 없이 눈이 붓게 모도 울어, 하나님이 아신 배라. 백일은 어디 가고 음운이 자욱헌데, 청산도 찡그난 듯, 간수는 오열허여, 휘늘어져 곱던 꽃이 이 울고저 빛을 잃고, 요요한 버들가지 졸듯이 늘였구나. 춘조난 슬피 울 어 백반제송허는 중에, “묻노라, 저 꾀꼬리, 어느 뉘를 이별허고 환우 성을 게서 울고, 뜻밖의 두견이 소리, 피를 내여 운다마는, 야월공산 어디 두고 진정제성 단장성은 네 아무리 붙여귀라 가지 우에 앉어 운 다마는 값을 받고 팔린 몸이 어느 년 어느 때나 돌아오리?” 바람에 날 린 꽃이 얼굴에 와 부딪치니, 꽃을 쥐어 손에 들고, “약도춘풍불행의면 하인취송으 낙화내라. 한 무제 수양 공주 매화장에 있건마는 죽으러 가는 몸이 수원수구를 어이하리?” 한 걸음에 눈물을 짓고, 두 걸음에 한숨 쉬어, 울며불며 끌리어 강두로만 나려간다. <한애순 창본>
【잦은몰이】 놀보놈 거동 봐라. 지리산 몽둥이를 눈 우에 번 추여들
고, “네 이놈, 흥보놈아! 니 내 말을 들어 봐라. 쌀말이나 주자 헌들, 남대청 큰 두지으 가득가득이 쌓였으니 너 주자고 두지 헐며, 볏말이 나 주자 헌들, 천록방 가리노적 다물다물이 쌓였으니 너 주자고 노적 헐며, 돈냥이나 주자 헌들, 옥당방 용목궤에 관을 지어서 넣었으니 너 주자고 관돈 헐며, 싸라기나 주자 헌들, 황계 백계 수십 마리가 주루루 루루 벌여 있고, 찌경이나 주자 헌들, 궂인 방 우리간에 떼도야지가 들 었으며, 식은 밥이나 주자 헌들, 새끼 암캐 두고 너 주자고 개 굶기랴? 잘살기 내 복이요 못살기 네 팔자라, 굶고 벗고 내 아느냐?” 강새암의 계집 치듯, 담에 걸친 구렁이 치듯, 여름날 번개 치듯, 냅더 철퍽 후닥 딱! “아이고, 형님. 박 터졌소!” 냅더 후닥딱! “아이고, 형님 다리 부러 졌소! 아이고, 형님 나 다시는 안 오리다. 다시는 안 도랄 터이오니 살 려 주오, 살려 주오. 제발 덕분으 살려 주오.” 흥보가 몽둥이를 피하노 라고 이리 닫고 저리 닫고, 대문을 걸어 잠갔으니 나갈 듸도 없고, 【아니리】 어찌 다급해 놨던지 안으로 쫓겨서 막 들어가던가 보더라. 그때에 놀보 마누라가 부엌에서 밥을 채리다가 가만히 들으니 밖에서 웬 사람 쥑이는 소리가 나지. 들어 본즉 저의 시아재 흥보가 매를 맞 거늘, 필연 매 맞고는 안으로 들어올 줄을 짐작하고, 밥 채리던 주벅을 들고 포수 고라니 목잡듯 중문에 와서 딱 잡고 섰을 적에, 흥보가 울 며 들어오것다. “아이고, 아짐씨, 형수씨, 사람 좀 살리시오.” <박봉술 창본>
판소리에 투영된 사회의식은 판소리사(史)의 전개 과정에 따라 일 정하지만은 않았으나, 그 창자들이 중세적 신분질서에서 가장 낮은 지위에 속하는 천민이며 18세기 말까지는 평민층 청중들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었으므로 평민적 세계관과 미의식이 주류를 이루는 것은 자 연스러운 결과이다. 판소리에서 중세적 관념과 가치는 대체로 희극적 조롱의 대상이며, 평민적 경험에 기반한 세속적 현실주의가 삶의 근 본 전망을 이룬다. 다만 이와 같은 성격은 그 자체가 진행 과정에 놓 여 있던 것인 데다가, 19세기 초기 이래 양반 청중의 영향력이 개입
하면서 일부 약화되기도 하였다. 판소리가 지닌 양면성(兩面性) 내지 이원성(二元性)은 바로 이 점에 기인하는 특질이다. 그러나 실전된 일곱 마당까지를 포함하여 생각할 때 판소리 전반의 사회의식과 세 계관이 근본적으로 탈중세적(脫中世的) 현실주의의 지향을 가지고 있 다는 점은 의심할 바 없다. 판소리는 독서물로 정착⋅유통되면서 판소리계 소설이라는 독자적 유형을 형성하고, 조선 후기 소설에 있어서의 평민적 사실주의의 발 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서사민요(敍事民謠)
일정한 인물과 사건구조를 갖추어 노래하는 민요를 서사민요라 부 른다. 서정민요가 대개 응축된 간결함을 지니는 데 비해 서사민요는 이보다 길이가 길고, 일정한 사건으로 표현되는 갈등과 그 해결을 주 요 관심사로 삼는다. 서사민요는 아직까지 널리 수집⋅정리되지 못한 상태에 있는데, 경북(慶北) 지방을 대상 지역으로 삼은 한 연구(조동일, 서사민요 연 구, 1970)에 의하면 여성의 길쌈노동요로서 불리는 경우가 가장 많 다. 길쌈하는 일은 완만한 동작으로 오랫동안 계속하는 노동이므로 비교적 단순한 가락으로 읊조리는 길고 재미있는 내용의 서사민요가 적합하다. 이밖에 주로 남성들이 부르는 「범벅타령」 「상투 잡고 해산 하는 노래」 등의 희극적 서사민요나 판소리, 무가 등에서 전환된 서 사민요도 채집 사례가 알려져 있다. 길쌈노동요로 불리는 서사민요는 노래하는 이들이 여성인 만큼 가 정생활 속의 갈등⋅고난을 노래한 것이 주종을 이루고, 남녀 간의 애 정을 다룬 것들도 더러 보인다. 서사민요는 일반 평민들의 생활 속에서 불리는 비전문적 노래이기
때문에 서사무가, 판소리 같은 전문적 구비서사시나 설화, 소설 등의 산문 서사문학에 비해 내용 및 표현이 단순하다. 그러나 현실 생활에 바탕을 둔 체험적 직접성은 서사민요가 좀 더 뚜렷하다고 하겠다. 특 히 길쌈노동요류의 서사민요는 중세적 규범과 가족관계 속에서 고통 스러운 삶을 살았던 여성들의 체험을 전형화한 작품들로서 주목할 만하다. 다음의 「시집살이 노래」에서 그 한 예를 본다.
시집가든 사흘 만에 호망자리 둘러 미고 밭매로야 가라칸다 머슴들아 머슴들아 밭매로야 가자시라 마당겉이 굳은 밫을 미겉이도 지슴 밫을 남산겉이 넓은 밫을 한골 매고 두골 매고 삼시골로 거듭 매고 저임때가 되였구나 머슴들아 머슴들아 점심 묵을 집에 가자 집이라고 들어오니 시아버지 하는 말이 번개겉이 뛰나오메 그게라상 일이라고 저임 찾어 벌어 오나 쪼바리 겉은 시어마님 쪼불시가 기나오메 고게라상 일이라고 점심 찾어 벌어 오나 흔들흔들 맞동세는 실렁실렁 나오메야 고게라상 일이라고 저임 찾어 버러 오나 기가 차고 매가 차여 (녹음기 고장으로 몇 구절 탈락) 삼년 묵은 버리밥을 식기굽에 문체 주고 장을 조꼼 달라 하니 삼년 묵은 등게장을 종지 굽에 문체 주고 몽당숟가락 던제 주니 밥그럭을 가주고야 장방 우에 얹어 놓고 농문으로 열어치고 우리 아배 떠온 처매 우리 어매 눈공 처매 한 폭 따여 꼬깔 짓고 두 폭 따여 행전 짓고 시 폭 따여 바랑 짓고 오랑망태 둘러 미고 시금시금 시어마님 나는 가네 시금시금 시어마님 시집살이 몬해가주 나는 가네 나는 가네 가그덩 가고 말그덩 말고 새 상방에 가 가주고 서방군아 서방군아
시집살이 할 수 없어 나는 가네 나는 가네 가지 마오 가지 마오 내 말 듣고 가지 마오 어야든동 가지 마소 그 시어른 맹 사는가 그 동세가 맹 사는가 내 말 듣고 가지 마소 손톱 밑에 흘 안 옇고 발톱 밑에 흘 안 옇고 앉아 가주 글만 아든 저 선보가 손톱 밑에 흘로 옇고 두 발로 당두거리며 기가 차게 눈물로 지 우나 할 수 없이 떠나가네 동해사 절로 가여 한 대문을 열어치고 두 대문을 열어치니 늙은 중캉 젊은 중캉 동미중캉 앉었구나 동미중아 벚이중아 이내 말쌈 들어 바라 내 머리를 깎어 도고 정들어를 나여 두고 머리 깍다 윈말이고 잠말 말고 깎어 도고 동미중아 머리 깎어 친정곧에 시주 가자 이내 머리 깎어 도고 한 귀때기 깎고 나니 눈물이 진동하고 두 귀때기 깎고 나니 팔월이라 원두밭에 돌수백이 되였구나 바랑망태 짊어지고 친구중아 벚이중아 친정곧에 시주가자 친정곧을 시주가자 친정에 삽지끝에 들어서여 시주 왔소 동양 왔소 이 댁에 시주 왔소 어마시가 하는 말이 문을 열고 내바더 보메 삽직껄에 저 대사는 우리 딸이 건성하다 요보시오 그 말 마소 동서남북 다 댕기도 같은 사람 만석 해소 사랑문을 열어 놓고 아부지가 하는 말이 삽작 밲에 저 대사는 우리 딸이 건성하다 요보시오 그 말 마소 동서사방 다 댕기도 같은 사람 만석 해소 시누부 올캐 하는 말이 삽잭 밲에 저 중으는 시누부 건성하다 요보시오 그 말 마소 동서사방 다 댕기먼 같은 사람 만석 해소 마리 밑에 있던야 청삽살이 훌쩍훌쩍 뛰나오메 꽁지 설설 흔들메야 치매꼬리 물고 뛰고 땡게시니 개가 그카이 보고 기가 차여 흩어져여 개를 안고
대성양을 눈물지우니 그 가운데 알어채리고 어마시가 두 걸음을 뛰나와야 행전 벗어 집어치고 바랑 벗어 집어치고 꼬깔 벗어 집어치고 야야 야야 이 웬일고 이게 무신 모양이고 큰방을 들이가자 이게 무신 웬 말이고 정들은 어따 두고 니 일신이 이래 된노 <경북 영천군, 조동일 채록>
다만 여기서 한 가지 덧붙여 두어야 할 사항은 서사민요가 일정한 인물과 사건구조를 지닌 점에서 서사적 갈래의 하나로 분류되기는 하나, 그 서사성(敍事性)은 때때로 서정적인 것의 경계선에 근접하거 나 걸치는 주변성을 띠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런 현상은 발라드 (ballad)와 같은 서구문학 양식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서사적 표현 양식이 사건구조의 전개에 주된 관심을 두기보다 작품 전반에 특정 한 분위기와 정서를 조성하는 장치로 기능하는 경우에 특히 두드러 지게 나타난다. 길쌈노동요 중 「베틀노래」 같은 것은 상당히 긴 분량 과 줄거리를 가지고 있어서 서사성의 역할이 지배적이라 하겠지만, 이보다 짧은 대다수의 시집살이요(謠)나, 「진주낭군(晋州郞君)」 노래 따위는 비록 서사민요라 해도 서사적 골격의 도움 위에서 여성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주정적(主情的)으로 집약하는 주변적 서사성을 띤다 고 보아야 할 듯하다.
고전소설(古典小說)
대체로 19세기 말까지의 우리 소설을 고전소설이라 총칭한다. 물 론 이때의 <고전(古典)>이라는 어휘는 <불변(不變)하는 보편적 가치 를 인정받는 서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일정 시기 이전의 과거적 유
산을 총괄하기 위한 편의상의 지칭이다. 고전소설은 또 고소설(古小 說)이라 불리기도 하며, 고대소설, 구소설 등의 용어가 쓰인 적도 있 다. 어떤 학자들은 고전소설 전반을 전기소설(傳奇小說)이라 지칭하 기도 하는데, 기이한 일을 전술(傳述)한다는 전기(傳奇)의 본래적 개 념이 우리 고전소설 모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으므로 이 이름은 적절하지 못하다. 한국 고전소설이 언제, 어떤 기원으로부터 발생하였는가에 대하여 는 아직까지 만족할 만한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김시습(金 時習, 1435~1493)의 「금오신화(金鰲新話)」가 그 초기적 성취의 뚜 렷한 결정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 작품이 출현한 15 세기 말은 중세적 사회질서와 문화의 틀이 아직 완강하던 시대였으 나, 이념과 현실의 모순 속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었던 김시습은 현세 적 삶의 욕망과 그 좌절 및 고통의 문제를 전기적(傳奇的) 수법의 이 야기들로 엮어내어, 분열된 세계 안의 갈등을 다루는 소설의 지평을 개척하였다. 17세기 초에는 이보다 전기적 성격이 적은 대신 당대의 사회적 모순이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어진 국문소설 「홍길동전(洪吉 童傳)」이 허균(許筠, 1569~1618)에 의해 창작되어 본격적인 소설
2)
의 시대를 열었다. 그리하여 17세기부터는 소설의 창작이 활발해짐 과 함께 상당한 규모의 독자층이 형성되었으며, 18⋅19 세기는 소설 의 시대라 불릴 만큼 소설의 질적인 다양화와 양적인 팽창이 이룩되 는 한편 방각본(坊刻本) 소설 같은 상업적 출판과 세책업(貰冊業)이 성행하였다. 고전소설 작품의 수효가 얼마나 되는가는 많은 자료의 일실로 인 해 분명하게 말하기 어려우나 최근까지 수집된 작품이 약 600종을
2) 허균이 창작한 「홍길동전」이 분명히 국문소설이었는가에 대하여는 회 의적인 견해를 가진 이도 있다. 그 실상이 어떠하든 현존하는 「홍길동전 」 이본들은 허균의 원작 그대로가 아니며 후대의 전승 과정에서 여러 단계의 윤색⋅첨가⋅개작이 가해진 결과이다.
넘으며, 새로운 자료가 발굴될 여지는 아직도 많다. 아울러 한 소설 에 여러 이본(異本)이 있는 경우가 상례인 데다가 이본간의 차이가 커서 이들을 별도의 작품으로 간주해야 할 경우도 흔하다. 고전소설 을 구성⋅인물형⋅주제⋅문체 등의 여러 요소에 따라 친근성이 높은 것들끼리 묶어 보면 영웅소설(英雄小說), 환몽소설(幻夢小說), 역사군 담소설(歷史軍談小說), 판소리계 소설, 가문소설(家門小說), 한문소설 (漢文小說) 등으로 대별할 수 있다. 영웅소설은 「홍길동전」에서 초기적 형태가 성립한 이후 다른 유형 들보다 앞서 발달하여 17세기부터 창작되고 18⋅19세기에도 많은 독 자층의 애호 아래 성행한 소설 유형이다. 그 유형적 구조를 간추리 면, i) 예사롭지 않게 출생하고 비범한 자질을 갖춘 고귀한 신분의 주인공이, ii) 뜻밖의 재난으로 위기에 부딪혔다가, iii) 구출(救出)⋅ 양육자(養育者)의 도움을 얻어 이를 모면하고, iv) 힘과 지혜를 기른 뒤 마침내 세상에 다시 나아가, v) 악의 세력을 무찌르고 영광을 쟁 취한다는 것으로 집약할 수 있다. 이러한 유형구조에 걸맞게 주인공 들은 모두가 탁월한 재자(才子)⋅가인(佳人)이며, 작품의 전체적 분위 기와 문체는 장중⋅엄숙한 흐름을 유지한다. 이 유형의 작품 중 상당수는 주인공의 군사적 활약상을 주요 내용 으로 하기 때문에 군담소설(軍談小說, 혹은 창작군담소설)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영웅소설의 유형구조를 지닌 작품들 중에는 군담(軍 談)이 전혀 없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도 있기 때문에, 군담소 설이 거의 다 영웅소설이기는 해도 영웅소설이 곧 군담소설인 것은 아니다. 또한 영웅소설 중의 상당수 작품들은 천상계(天上界)와 지상 계(地上界)라는 이원적 공간을 설정하고 주인공이 어떤 잘못으로 인 해 천상계로부터 지상계로 내쫓김을 당한다는 화소(話素)를 가지고 있어서 이들을 적강소설(謫降小說)이라 지칭하기도 하나, 모든 영웅 소설이 다 적강소설은 아니다. 다만 화려하고 다채로운 군담과 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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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지속적으로 창작되었다. 그 대체적 구조는 i) 초월적 세계에서 세 속의 삶을 동경하던 주인공이, ii) 꿈을 통해 이 세상에 새로운 인물 로 태어나 파란 많은 영웅적 생애를 누리고, iii) 다시 꿈을 깨어 세 속의 세계를 떠나게 된다는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짜임은 「조신몽(調信夢)」 「남가기(南柯記)」 등 한국과 중국의 옛 설화⋅전기 (傳奇)에 보이는 환몽담(幻夢譚)에서 비롯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유형에 속하는 소설들도 작품마다 상당한 차이가 있음은 물론 이다. 예컨대 「구운몽」이 환몽구조의 장치를 통해 유가적(儒家的) 세 속주의와 불교적 무상관(無常觀)을 교묘하게 결합시킨 데 비하여, 19 세기의 걸작 「옥루몽(玉樓夢)」은 보다 사실적(寫實的) 방향으로 발전 하여 현세적 욕망에 대한 관심을 강하게 드러내었다. 이들 작품에서 환몽 부분에 해당하는 세속적 삶의 이야기는 영웅소설의 유형적 특 질에 근접하는 경우가 많으나, 이를 둘러싼 환몽구조의 작용에 의해 주제상의 변이가 나타난다는 점이 환몽소설을 영웅소설과는 별도의 작은 유형으로 보게 하는 까닭이다. 역사군담소설로 불리는 「임경업전(林慶業傳)」 「박씨전(朴氏傳)」 「 임진록(壬辰錄)」 등은 초인적 능력을 가진 영웅들의 군사적 활약상을 담은 데서 군담소설(창작군담소설)류와 비슷하다 할 수 있으며, 두 부류의 작품들 사이에는 실제로 문체와 사건 처리 방식의 영향 관계 가 발견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들을 별도의 종류로 보는 것은 임진 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는 실제의 전쟁을 배경으로 삼아 역사적 인물들을 등장시킨 작품들인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성을 띤다고는 해도 이 작품들은 사실담 그대로이기보다는 두 차례의 치 열한 전란 이후 민간에서 전승되어 오던 설화적 이야기들을 바탕으 로 엮어진 허구적 내용이 압도적이다. 영웅소설의 주인공들이 일반적 으로 가문의 영예와 개인적 공명(功名)을 추구하는 인물인 데 비해 역사군담소설의 인물들은 잔학한 외적과 간교한 지배층 모두에 맞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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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취하거나 일화 중심적인 단형성(短形性, 한문단편)을 띤 데 비하 여, 낙선재(樂善齋)에서 다수가 발견된 장편소설들은 여러 가문의 인 물들이 등장하고 몇 대에 걸친 갈등과 영욕(榮辱)의 부침(浮沈)이 복 잡하게 얽히어 전개되는 내용이 많기 때문에 가문소설(家門小說) 혹 은 대작소설(大作小說)이라 불린다. 「천수석(泉水石)」 「낙천등운(落泉 登雲)」 「보은기우록(報恩奇遇錄)」 「현씨양웅쌍린기(玄氏兩雄雙麟記)」 등 일부 연구된 작품 외에 다량의 자료들이 아직 정리되는 도중에 있다. 이들은 18세기 말, 19세기 초 무렵에 발달하기 시작하여 서울 의 세책가(貰冊家)를 매개체로 삼아 궁중의 여인들에게 많이 읽혔던 것으로 보인다. 작품의 길이는 무척 길어서 30, 40책을 초과하는 것 이 흔하며, 「명주보월빙(明珠寶月聘)」이라는 삼부작 소설은 필사본으 로 무려 235책에 달한다. 이 계열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가 권력, 부(富), 애정을 추구하는 세속적 인간형으로서, 신분은 귀족 일지라도 거창한 이념에 헌신하거나 신이(神異)한 능력을 발휘하는 영웅상과는 거리가 멀다. 고전소설은 소수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작자가 밝혀져 있지 않은 데, 그 까닭은 소설 창작이 자랑할 만한 일로 여겨지지 못했던 데다 가 그것을 독자적인 창조행위로 존중하는 의식이 아직 희박하였던 때문인 듯하다. 여러 가지 증거로 보건대는 몰락 양반 및 평민 출신 의 식자층(識者層)에서 나온 작가가 처음에는 개인적인 흥미에 의해, 나중에는 상업적인 보급자와 관련을 맺으면서 소설을 썼던 것 같다. 일단 이루어진 작품은 유통되는 과정에서 자주 윤색⋅개작되어 수많 은 이본이 파생되었다. 독자는 양반층의 부녀자들이 많았고, 중인(中 人)과 평민층에는 남성 독자들도 상당히 있었다. 이들 사이의 소설 유통을 매개한 보급자로는 전기수(傳奇叟), 세책가(貰冊家), 방각본 (坊刻本) 출판(出版)이 특히 주목되는데, 4장에서 이를 상세히 다루기 로 한다.
탈춤
(3) 희곡적(戱曲的) 갈래
현존하는 약간의 문헌 기록에 의하건대 우리나라의 고대(古代) 연 극(演劇)과 연희문화(演戱文化)는 자생적(自生的) 바탕 위에 서역(西 域) 및 중국으로부터의 영향을 흡수하면서 상당히 활발하게 전개되었 던 것으로 보인다. 최치원(崔致遠, 857~?)의 「향악잡영(鄕樂雜詠)」에 보이는 오기(五伎)라든가, 중국인들이 지칭한 고려기(高麗伎), 그리고 일본의 예능(藝能) 문화 형성에 중요한 작용을 미친 고려악(高麗樂), 기악(伎樂)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유교의 엄격한 규범이 전사회적 통제력을 발휘하게 됨에 따라 연극의 발전은 크게 제약받았고, 조선 초기 이후에는 예전의 전승마저도 향촌 사회의 유교적 정비 과정에 서 적잖이 약화되었다. 연희의 다양한 성장을 가능케 하는 상업의 발 달과 시정문화의 형성이 뒤늦었던 점도 이에 작용한 또 하나의 요인 이다. 이러한 어려운 조건 속에서나마 존속⋅발달한 각종 연희와 연 극은 행동적 공연예술을 천시하는 중세적 편견 때문에 문헌 기록으 로 정리되지 못했으며, 19세기 말 이래의 사회⋅문화적 격변기를 거 치면서 많이 유실(流失)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서 생명을 이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전통 연극의 가 장 중요한 유산으로 탈춤을 들 수 있다. 탈춤은 가면을 쓰고 하는 연 극이기에 가면극(假面劇)이라고도 불리며, 지방에 따라 산대(山臺)놀 이, 탈놀이, 별신(別神)굿놀이, 덧뵈기, 들놀음 등의 전래적인 명칭이 쓰인다. 탈춤이라는 용어도 본래는 황해도 지방의 탈놀이를 가리키던 용어였다. 민간전승을 통해 이어지는 연극이기 때문에 탈춤에는 문자 화된 대본이라는 의미의 희곡이 없으나, 구비전승적 차원의 텍스트와 연행문법(演行文法)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므로 이를 희곡의 차원에
서 다루기로 한다. 이제까지 알려진 탈춤을 연극적 발달 정도에 따라 나누면 대략 세 부류로 구분된다. 그 첫째는 북청사자(北靑獅子)놀음, 강릉관노(江陵 官奴)탈놀이, 하회별신(河回別神)굿놀이처럼 특정 지역에서 부락제(部 落祭)의 일부로 놀아진 비교적 단순한 탈놀이이다. 둘째는 경남 해안 지방 및 낙동강 유역의 여러 곳에 분포된, 좀 더 발달한 탈놀음들이 다. 이들은 전승 지역에 따라 낙동강 동쪽인 동래(東萊), 수영(水營), 부산진(釜山鎭) 등지의 것들을 들놀음(野遊, 야류)이라 하고, 낙동강 서쪽인 통영(統營), 고성(固城), 진주(晋州), 가산(駕山) 등지의 것을 오광대(五廣大)라 한다. 셋째 부류는 서울 근교 및 인접 지역의 양주 별산대(楊州別山臺)놀이, 송파산대(松坡山臺)놀이 등 산대놀이와 황해 도 일대의 봉산(鳳山)탈춤, 강령(康翎)탈춤 등 해서(海西)탈춤으로서, 내용과 규모가 가장 풍부한 종류라 할 수 있다. 첫째 부류의 탈춤이 부락제와의 관련을 강하게 지닌 데 비해 들놀 음⋅오광대는 도시적 성격을 띤 행정(行政)⋅교역지(交易地)의 특성 이 다소 나타나며, 산대놀이⋅해서탈춤은 상업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 어지던 지역을 근거지로 발달하여 농촌 지역의 탈춤보다 다채로운 내용과 화려함을 지니고 있다. 지금 전하지는 않으나 애오개[兒峴], 녹번(碌磻), 사직(社稷)골, 구파발, 퇴계원, 가믄돌, 노들[鷺梁津], 의 정부(議政府) 등에 산대놀이패들이 있었다 하며, 황해도에서는 앞서 든 곳들 외에 황주(黃州), 안악(安岳), 재령(載寧), 송화(松禾), 기린 (麒麟), 서흥(瑞興), 평산(平山), 옹진(甕津) 등에서 탈춤을 놀았다고 한다. 이 밖에 떠돌이 놀이패에 의한 탈놀이도 많았던 것으로 보이는 데, 그 가운데서 남사당패의 덧뵈기가 전하여진다. 농촌 지역의 탈춤은 정월 대보름이나 오월 단오날 같은 때에 연례 적인 공동 행사로서 공연되었으며, 도시적 성격을 띤 중부⋅해서 지 역의 탈춤은 이 밖의 특별한 기회에도 행하여졌다. 연기자는 마을 사
람 중에서 익숙한 이들이 맡았고, 봉산 등 일부 지역에서는 하급 이 속(吏屬)들이 담당하였으며, 도시화된 지역일수록 조선조 말기에 가 까워지면서는 어느 정도 전문화된 놀이꾼들이 노는 예가 많았던 듯 하다. 탈춤이 벌어지는 공간은 특정한 장치가 필요 없이 여러 사람이 둘 러앉고 설 만한 넓은 마당이면 족하다. 곳곳에 횃불을 밝히고 관중들 이 빙 둘러 앉거나 선 원형의 평면 공간에서 어두워질 무렵부터 새 벽까지 탈놀이와 뒤풀이가 진행되었다. 지방에 따라 나무, 박, 종이 등 여러 소재로 만들어진 가면들은 희극적으로 과장된 형상으로, 대 개가 고정형이다. 그러나 탈꾼의 역동적인 춤사위와 불빛의 작용 및 보는 각도에 따라 가면은 다양한 표정 효과를 만들어 낸다. 탈춤의 전체적 진행은 상호간의 관련이 느슨한 여러 개의 마당[科 場]들로 구성되어, 각 마당마다 뚜렷한 전형과 행동 방식 및 춤사위 를 지닌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극중 행동은 사실주의(寫實主義) 연극에서와 달리 시간적⋅공간적 비례 관계의 제약을 거의 받지 않 으며, 일상적 수준의 그럴싸함을 넘어서서 갈등을 선명하고도 빠르게 전개해 나가는 데 집중된다. 극중 인물이 관중과 악사(樂士)에게 말 을 걸거나 후자들 쪽에서 때때로 작중상황에 끼어듦으로써 극적 환 상을 차단하고 놀이판 전체가 하나로 어우러지게 하는 점도 중요한 특징이다. 대사는 말과 노래가 섞여 있고, 무언극(無言劇)처럼 몸짓과 춤이 의미 전달의 주요 수단이 되는 부분도 있다. 강릉관노탈놀이는 전체가 무언극이며, 해서 탈춤과 산대놀이에 등장하는 노장(老丈)이 라든가 들놀음의 문둥이는 몸짓과 춤만으로 심적(心的)인 움직임을 표현한다. 춤의 동작은 인물에 따라 유형화되어 있으며, 지방에 따른 차이도 적지 않다. 평민들 스스로가 놀고 즐긴 놀이인 까닭에 탈춤은 언어에 있어서 도 일상적 구어(口語)를 기조로 하고 때때로 관용적인 한문구를 차용
하며 신랄한 비어(卑語)와 재담을 거리낌 없이 구사한다. 선명한 비 유, 극적 갈등을 강조하는 생략⋅반복⋅과장, 그리고 의표를 찌르는 기상(奇想) 등은 탈춤의 역동적인 몸짓 언어와 함께 평민문화의 발랄 한 힘을 잘 보여준다. 이름은 달라도 대부분의 탈춤에 공통적으로 들 어 있는 양반 마당(말뚝이 마당)의 한 대목을 참고로 들어 본다.
삼형제를 인도하여 등장)
말뚝이 : (벙거지를 쓰고 채찍을 들었다.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양반
양반 삼형제 : (말뚝이 뒤를 따라 굿거리에 맞추어 점잔을 피우나 어색하게 춤을 추며 등장. 양반 삼형제 맏이는 샌님(生員), 둘째는 서 방님(書房), 끝은 도련님(道令)이다. 샌님과 서방님은 흰 창옷에 관을 썼다. 도련님은 남색 쾌자에 복건을 썼다. 샌님과 서방님은 언청이며- 샌님은 언청이 두 줄, 서방님은 한 줄이다.-부채와 장죽을 가지고, 도 련님은 입이 삐뚤어졌고 부채만 가졌다. 도련님은 일체 대사는 없으며 형들과 동작을 같이 하면서 형들의 면상을 부채로 때리며 방정맞게 군 다.) 말뚝이 : (중앙쯤 나와서) 쉬이. (음악과 춤 멈춘다.) 양반 나오신다 아! 양반이라고 하니까 노론(老論), 소론(小論), 호조(戶曹), 병조(兵曹), 옥당(玉堂)을 다 지내고 삼정승(三政丞), 육판서(六判書)를 다 지낸 퇴 로재상(退老宰相)으로 계신 양반인 줄 아지 마시오. 개잘량이라는 양자 에 개다리소반이라는 반자 쓰는 양반이 나오신단 말이오. 양반들 : 야아, 이놈 뭐야아! 말뚝이 : 아, 이 양반들 어찌 듣는지 모르갔소. 노론, 소론, 호조, 병조, 옥당을 다 지내고 삼정승, 육판서를 다 지내고 퇴로재상으로 계 신 이생원네 삼형제분이 나오신다고 그리하였소. 양반들 : (합창) 이생원이라네. (굿거리장단으로 모두 춤을 춘다. 도 령은 때때로 형들의 면상을 치며 논다. 끝까지 그런 행동을 한다.) 말뚝이 : 쉬이. (반주 그친다.) 여보, 구경하시는 양반들, 말씀 좀 들 어보시오. 짤따란 곰방대로 잡숫지 말고 저 연죽전(煙竹廛)으로 가서
돈이 없으면 내게 기별이래도 해서 양칠간죽(洋漆竿竹), 자문죽(紫紋 竹)을 한발 가옷씩 되는 것을 사다가 육무깍지 희자죽(喜子竹), 오동수 복(梧桐壽福) 연변죽을 사다가 이리저리 맞추어 가지고 저 재령(載寧)
양반들 : 머야아!
다.)
나무리 거이 낚시 걸듯 죽 걸어놓고 잡수시오.
말뚝이 : 아, 이 양반들 어찌 듣소. 양반 나오시는데 담배와 훤화(喧 譁)를 금하라고 그리하였소. 양반들 : (합창) 훤화를 금하였다네. (굿거리 곡으로 모두 춤을 춘
말뚝이 : 쉬이. (춤과 반주 그친다.) 여보, 악공들 말씀 들으시오. 오 음육률(五音六律) 다 버리고 저 버드나무 홀뚜기 뽑아다 불고 바가지 장단 좀 쳐 주오. 양반들 : 야아, 이놈 뭐야! 말뚝이 : 아 이 양반 어찌 듣소. 용두, 해금(奚琴), 북, 장고, 피리, 젓대 한 가락도 뽑지 말고 건건드러지게 치라고 그리하였소. 양반들 : (합창) 건건드러지게 치라네. (굿거리 곡으로 춤.) <봉산 탈춤, 이두현 채록>
탈춤의 내용은 지역별 유형에 따라 부분적인 차이가 있다. 그 가 운데 대체로 공통적인 부분으로 양반들과 하인 말뚝이 사이의 갈등 을 다루는 마당(양반 마당), 곤궁함과 난리로 인해 헤어졌던 할미⋅ 영감이 젊은 첩을 사이에 두고 싸우는 마당(할미 마당, 미얄 마당), 계율과 욕망 사이에서 방황하는 수도승 노장(老丈)과 시정(市井)의 건달 취발이 사이의 싸움이 벌어지는 마당(산대놀이⋅해서 탈춤의 노 장 마당)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을 포함한 모든 탈춤의 갈등은 희극 적 구도 안에서 신랄한 재담을 통해 급격한 대립⋅반전(反轉)을 거듭 하며 진행된다. 마당과 마당 사이 및 한마당 안의 작은 부분들 사이 에는 춤과 음악이 끼어들어 흥을 돋우고 내용을 새로운 국면으로 전 환시키는 등의 구실을 한다. 단적으로 말하여 탈춤은 봉건적 사회관
계와 관념의 허위성을 신랄하게 조롱하면서 평민들의 생활에 내재한 역동성을 발랄한 재담, 다양한 춤사위, 그리고 경쾌한 민속음악으로 엮어낸 대동(大同)놀음의 연극적 표현 양식이다. 이들 탈춤은 조선 후기에 들어 상업이 발달하고 시정문화가 확대 되면서 더욱 활발하게 연희되어, 농촌 중심의 탈춤에서 도시적인 연 극에로까지 나아갔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전승되는 그 유산은 마당극
꼭두각시놀음
운동과 같은 새로운 창조의 바탕으로도 주목되고 있다.
꼭두각시놀음은 남사당패 혹은 굿중패라 불리는 떠돌이 놀이패가 놀아 온 인형극이다. 이 밖에 인형극의 범주에 넣을 만한 것으로 망 석중놀이, 장난감 인형놀이, 발탈 등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재대 로 전하지 않는다. 남사당패는 남성들로만 구성된 떠돌이 놀이패로서 봄부터 가을까 지 전국 곳곳의 농어촌 마을을 돌아다니며 풍물(농악놀이), 버나(대접 돌리기), 살판(몸재주 곡예),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음), 덜미(꼭두 각시놀음)의 여섯 가지 놀이를 벌이고는 하였다. 이 가운데서 버나, 살판, 어름은 곡예와 함께 재담이 들어 있어서 약간의 연극성을 띠고 있고, 덧뵈기와 꼭두각시놀음은 본격적인 민속극이다. 탈춤과 마찬가지로 꼭두각시놀음 역시 놀이판의 선택에 특별한 제 한을 받지 않으나, 인형을 놀리는 포장막(덜미 포장)의 열린 면 앞쪽 으로 관중이 모여 앉는다는 점은 당연한 차이이다. 덜미 포장은 가로 세로 각 3미터 정도의 네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무대면(舞臺面)이 되는 쪽만 1.2미터 정도의 높이 위에 인형이 나와서 놀도록 가로 2.5미터, 세로 0.7미터 정도를 남기어 사방을 모두 포장으로 둘러친 공중무대이다. 대잡이(주조종자)와 대잡이손(조수)이 이 안에 들어가
서 인형을 움직이며 등장인물의 말을 한다. 악사(樂士)와 산받이(받는 소리꾼)는 포장 밖의 적당한 자리에 무 대면을 마주하고 앉아 반주를 하며 놀이의 진행을 돕는다. 놀이는 밤 에 이루어지므로 관솔불 따위를 무대면 양옆에서 비추어 인형이 나 오는 공간을 밝게 한다. 인형들은 상반신만 올라와 관중을 향한 평면 상에서 움직인다. 인형의 동작 부분은 거의 양팔뿐이어서 이를 올렸 다 내렸다 하며 상반신을 흔드는 동작을 하는데, 상좌(上佐)만은 포 대 괴뢰여서 목⋅양손⋅허리까지 움직여 재미나는 몸짓과 춤을 보여 준다. 꼭두각시놀음의 극적 진행은 등장인물끼리의 대사 외에 인형과 산 받이 사이의 대화에도 많이 의존한다. 산받이는 관중석 쪽에 위치하 여 마을 사람의 자격으로 작중인물에게 말을 걸거나 대답함으로써 극의 진행을 용이하게 하고, 인형극의 공간을 관중석에로 개방함으로 써 입체화시키는 중요한 존재이다. 약 40개에 달하는 인물⋅동물 중 에서는 박첨지가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한다. 그는 산받이와의 대화를 통해 극의 상황이나 진행을 해설하고 예고한다. 이 인형극을 박첨지 놀음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처럼 극중 현실에 대해 밖으로부터의 개입이 이루어지는 것은 탈춤에도 있는 현상이지만, 꼭 두각시놀음의 경우에는 그것을 긴요한 연극적 장치로 훨씬 두드러지 게 활용한다. 아래에 인용하는 대목은 평안감사 마당, 매사냥 거리의 일부분으 로서 박첨지와 산받이의 대화가 극적 진행의 중추적 기능을 맡고 있 다.
박첨지 : 아하 여보게 큰일 났네. 산받이 : 뭐가 또 큰일이여. 박첨지 : 평안감사께서 거동하신다네.
잡아 들여라.
산받이 : 왜 그려.
박첨지 : 그러세.
가봐라.
홍동지 : 예이. 평안감사 : 사령. 사령 : 네이.
산받이 : 거 참 큰일이구나. (박첨지 퇴장, 평안감사 등장) 평안감사 : 박가야 망가야. 박첨지 : 아 여보게 누가 날 찾나. 산받이 : 평안감사께서 찾네. 박첨지 : (가까이 가서) 네 대령했습니다. 평안감사 : 네가 박가냐. 박첨지 : 네 박간지 망간지 됩니다. 평안감사 : 너 박가거든 듣거라, 길 치도를 어느 놈이 했느냐? 썩
박첨지 : 예이. 여보게 큰일 났네.
박첨지 : 길 치도한 놈 잡아들이라니 큰일 났네. 산받이 : 아 잡아들여야지. 거 내게 매끼게.
산받이 : 야 진둥아. 홍동지 : (안에서) 밥 먹는다. 산받이 : 밥이고 뭐고 홍재 났다. 빨리 오너라. 홍동지 : (뒤통수부터 나온다) 왜 그려. 산받이 : 이놈아 거꾸로 나왔다. 홍동지 : (돌아서며) 어쩐지 앞이 캄캄하더라. 그래 왜 불렀나. 산받이 : 너 길 치도 잘했다고 평안감사께서 상금을 준단다. 빨리
홍동지 : 그래 가봐야지. (가까이 가서) 네 대령했습니다. 평안감사 : 네가 길 닦은 놈이냐.
평안감사 : 너 저놈 엎어놓고 볼기를 때려라. 너 이놈 길 치도를 어 떻게 했길래 말 다리가 죄다 부러졌느냐? (사령이 볼기를 때리려 대든다)
아온다)
홍동지 : 네 네 잘못했습니다. 그저 그저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평안감사 : 이번만은 그럼 용서하겠다. 썩 물러가거라. (홍동지 방구를 뀌며 들어가고 평안감사 퇴장하는 듯했다가 다시 돌
<심우성 채록>
작품 내용은 두 마당 일곱 거리로 구성되어 있다. 네 거리로 이루 어진 박첨지 마당에서는 박첨지의 일가붙이들이 등장해서 거리별로 여러 가지 희극적 갈등을 보여준다. 세 거리로 이루어진 평안감사 마 당은 포악 방탕한 평안감사를 풍자하고 골계적인 수법으로 희롱하는 내용이 중심을 이룬다. 이 두 마당 모두에서 긴요한 역할을 하는 인 물이 박첨지의 조카인 홍동지(洪同知)이다. 벌거벗은 붉은 몸에 성기 (性器)가 우뚝하게 달려있는 홍동지는 물색없이 놀아나는 뒷절 상좌 중과 괴물 이시미를 물리치며 평안감사를 여지없이 욕보인다. 그는 탈춤의 말뚝이와 취발이를 합쳐 놓은 듯한 인물로서, 평민층의 소박 한 활기와 놀이패의 파괴적 골계성을 아울러 갖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박첨지 마당의 셋째 대목인 꼭두각시 거리는 탈춤에서 두루 보 이는 할미 마당(미얄 과장)과 내용이 비슷하여 흥미롭다. 이런 내용 외에 직업적 놀이패의 예능답게 꿩 잡고 절을 짓는 등의 곡예적인 거리가 첨가되어 재미를 더해 준다. 꼭두각시놀음의 기원은 아직 확실하게 구명되지 않았으나 <꼭두> 라는 말이 몽고⋅중국⋅일본에서도 유사하게 쓰이는 등의 몇몇 증거 로 보아 인형극이 대륙으로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으리라는 추정이 있다. 작품이 지닌 불교적 요소 및 남사당패 와 불교 사원(寺院) 사이의 관계를 보면, 조선 초기의 사원(寺院) 혁 파(革罷)에 따라 축출된 재승(才僧) 집단이 종래의 사원 연희를 세속 화시키면서 이러한 민간연희가 널리 유포되었으리라는 설도 주목할
만하다. 꼭두각시놀음만이 남은 우리나라의 인형극은 중국⋅일본에서 처럼 섬세한 기술과 다채로운 내용을 갖추는 데는 미치지 못했으나
창극(唱劇)
그 대신 평민적인 소박함과 활력이 돋보인다.
판소리 전체를 지배하는 원리는 서사적인 것이지만 연행예술(演行 藝術)로서의 발전 과정에서 극적인 표현 요소가 점차 발달하였다. 이 러한 내부적 요인이 사회 상황의 변화에 의해 결정적으로 확대됨으 로써 1900년대에 새로운 무대예술인 창극이 등장했다. 단적으로 말 하여 창극이란 1인창으로 불리던 판소리가 다수 창자들의 배역(配役) 분담과 행동적 실연(實演)에 의해 무대에 올려 지면서 판소리와는 별 도의 예술로 파생된 창악(唱樂) 연극이다. 창극 형성의 결정적 계기는 갖가지 민속악의 명창들이 결집된 연 희 단체인 협률사(協律社, 1902~1906)와 원각사(圓覺社, 1908~ 1909)에 의해 마련되었다. 이들은 새로이 갖추어진 근대적 무대를 통하여 다수의 청중들 앞에서 판소리, 경(京)⋅서도(西道) 소리 등을 연창함으로써 커다란 호응을 얻자 1903년에는 「춘향전」을 1904년에 는 「심청가」를 창극화하였다. 당시의 창극이 어떤 형태였는가는 구체 적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자세히 알기 어려우나, 전통적인 1인창의 판소리 형태로부터 벗어난 배역 분담과 이에 상응하는 무대 표현 및 연기가 있었던 것으로 확실시된다. 이러한 변화는 판소리의 고유한 표현 원리와 음악성을 일부 희생 또는 변형하는 것이므로 그 자체가 기존의 판소리를 대체하는 발전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그러나 종래 의 판소리가 지녔던 제약을 넘어서서 새로운 예술 영역을 개척한 점 은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전래되던 판소리 작품 중 몇몇을 창극화하여 상당한 호응을 얻자
이들은 당대의 사실로부터 재료를 취한 신작 「최병도타령」(1908)을 창극으로 공연하였다. 이 작품은 당시 혼탁한 상황에서 강원감사(江 原監司)가 최병도(두)라는 이를 무고하게 옥사시키고 재물을 탈취한 실화를 창극화한 것으로서, 관중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받았다. 현존 하는 신소설 「은세계(銀世界)」의 전반부는 이 창극으로부터의 전이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와 같은 성공은 창극이 당대의 관중들에게 절실한 문제를 다루었다는 요인과 함께 입체화된 무대 표현과 판소 리 창이 결합된 새로운 예술 양식의 호소력에도 힘입은 바 크다고 하겠다. 「최병도타령」의 성공 이후 원각사에서는 이와 비슷한 소재를 택하 여 창작 창극을 상연하고자 했던 것이 분명하나 그 자세한 경과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러한 시도가 뚜렷한 결 실을 거둘 만한 여유도 없이 일제에 의해 창극 단체가 해산되고 (1909) 신파극(新派劇)이 1910년대 이래의 대중 연극을 독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후 지방 각지를 전전하던 창악인들은 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 東伯)⋅정창렬(鄭貞烈)⋅김창룡(金昌龍)⋅한성준(韓成俊)⋅김연수(金演 洙)⋅박녹주(朴綠珠)⋅김소희(金素姬) 등이 중심이 되어 1933년에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를 조직하고 전통적인 판소리 레 퍼토리의 창극화와 신작 창극 상연에 힘썼다. 하지만 이들이 자처한 바 국극(國劇)은 흥행상의 성공과는 별도로 발전적 창극으로서의 성 과는 빈약하였다. 그들은 전승 판소리 외에 「유충렬전(劉忠烈傳)」 「 장화홍련전(薔花紅蓮傳)」 등의 고전소설을 창극화하고 「마의태자(麻 衣太子)」 「황진이(黃眞伊)」 등 사극류(史劇類)와 「재봉춘(再逢春)」 「 빈부(貧富)」 등의 신작 창극까지 시도하였으나, 그 전반적인 성격은 상업주의를 바탕으로 감상(感傷)과 복고(復古) 취미(趣味)에 영합하는 수준을 넘지 못하였다. 해방(解放) 이후에는 이들로부터 파생된 여성
국극단(女性國劇團)이 성행하여 1960년대 초까지 존속하면서 값싼 감상주의(感傷主義)를 팔다가 영화의 세력에 밀려 소멸하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창극의 과제와 가능성은 1910년대의 원각사 (圓覺社) 해체 이래 아직까지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 있다 할 것이다.
악장(樂章)
(4) 교술적(敎述的) 갈래
역대의 왕조들은 개국(開國)의 위업을 찬양하고 제왕(帝王)의 덕을 기리며 천하의 태평을 구가하는 의식악(儀式樂) 및 연악(宴樂)을 필 요로 하였다. 이와 같은 궁중 악곡에 실리어 가창 혹은 음영된 시가 를 악장(樂章)이라 한다. 그러한 넓은 의미의 악장은 고대국가 성립 기부터 있었을 터이나 온전한 모습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신라 유리 왕(儒理王)이 어진 정치를 베풀어서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편안하여 지자 지었다는 「도솔가」(兜率歌, B.C.58)가 아마도 그런 것 중의 하 나가 아닐까 짐작된다. 고려시대에는 전통음악인 향악(鄕樂)과 중국 계 음악인 당악(唐樂)이 궁중악으로 함께 사용되었으며, 다수의 악장 이 창작되는 한편 민간가요의 궁중연악화(宮中宴樂化) 현상도 활발하 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조선 초기의 구악(舊樂) 정 리 과정에서 가사가 제거 혹은 개작되어 자세한 모습을 알기 어렵다. 따라서 오늘날 일반적으로 말하는 좁은 의미의 악장은 조선 왕조의 창업과 번영을 송축하기 위하여 15세기에 주로 만들어진 궁중 악가 (樂歌)를 뜻한다. 악장의 기본 속성이 왕조의 존엄성을 예찬하고 숭고한 정치 이상 을 펴는 것이었던 데다가 유교에서는 예악(禮樂)의 교화적 기능을 특
히 중시하였기 때문에 조선조의 악장은 전반적으로 강렬한 이념성⋅ 교훈성을 보인다. 그것은 국가적인 기억과 지향을 노래하는 것이기에 개인적 서정과는 다른 공식성을 바탕으로 개국의 역사적⋅도덕적 필 연성과 왕조의 무궁한 번영을 예찬하는 찬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 이다. 이 점에서 악장은 교술적(敎述的)인 시가의 일종으로 파악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목적 및 기능상의 이러한 단일성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 서도 악장이 문학상의 독자적 갈래로서의 실체를 지니는가는 의문시 될 만하다. 현존하는 조선조의 악장류 작품들을 보건대 그 표현 언어 와 형태 및 규모가 너무나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악장에는 순전한 한 시로 된 것과 함께 「수보록」(受寶籙, 四言), 「납씨가」(納氏歌, 五言), 「정동방곡」(靖東方曲, 六言), 「문덕곡」(文德曲, 七言) 등 여러 가지 한시 형태에 국문으로 토를 단 것이 있는가 하면, 「신도가(新都歌)」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처럼 우리말의 표현력을 잘 구사한 국문시 가도 있다. 또한 「상대별곡(霜臺別曲)」 「화산별곡(華山別曲)」은 경기 체가(景幾體歌)의 형식을 빌렸으며, 「신도가」는 일정한 율격 유형을 찾기 어려운 7개의 시행 사이에 <아으 다롱디리>라는 고려가요류의 여음(餘音)을 넣은 단형가요의 형태를 취했다. 「용비어천가」 및 그 불교적 파생형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은 이들과 전혀 달리 대구로 이루어진 연이 길게 중첩되는 장편 찬가이다. 이처럼 다채로운 언어와 형태를 지닌 작품들이 하나의 갈래를 이 룬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악장의 경우에는 이러한 형태적⋅구조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작품들이 공유하는 기 능적 특수성의 지배가 예외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의 특 이한 갈래로 인정하는 관행이 통용되고 있으며, 우리도 이를 받아들 이고자 한다. 내용상으로 볼 때 조선조의 악장들은 천명론(天命論)과 유교적 덕
치주의의 이념으로 왕조 건국의 필연성을 강조하면서 개국(開國) 시 조(始祖)들을 일종의 문화적⋅도덕적 영웅으로 예찬하는 성향을 보여 준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군사적인 힘으로써 건국의 기틀을 마련한 무인(武人)이었던만큼 「납씨가(納氏歌)」 「궁수분(窮獸奔)」 「정 동방곡(靖東方曲)」 등 이른바 무덕곡류(武德曲類)가 있는 것은 당연 한 일이지만, 「문덕곡(文德曲)」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등 보다 중 요한 작품들이 유교적 정치 이상에 합당한 덕성과 지혜를 갖춘 군주 의 모습을 부각시키는 데 힘썼다. 「용비어천가」는 이러한 지향을 가 장 숭고한 모습으로 구현한 대작으로서, 목조(穆祖)⋅익조(翼祖)⋅도 조(度祖)⋅환조(桓祖)⋅태조(太祖)⋅태종(太宗)에 이르는 건국 초기의 사적(史跡)이 15세기 국어의 섬세한 표현력을 바탕으로 인상 깊게 점 묘(點描)되어 있다. 그런 뜻에서 이들 악장은 정도전(鄭道傳), 권근 (權近), 정인지(鄭麟趾) 등으로 대표되는 조선 초기 집권사대부층이 수많은 사실과 전설화된 기억에 유가적 이념을 투영하여 만들어 낸 정치 이상의 찬가라 하겠다. 악장의 창작은 조선조 초기로 일단락되고, 그 이후에는 극히 드물 게밖에 작품이 추가되지 않았다. 국가적 전례(奠禮)에 쓰이는 악가(樂 歌)는 여러 의식(儀式) 요소와 더불어 고정되어 있는 것이어서 새로 운 노래가 지속적으로 만들어질 필요가 없었고, 일단 숭고한 모습으 로 정립된 개국의 사적(史跡)과 이념은 왕조의 체제가 유지되는 한 불변하는 것으로 믿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악장의 특이한 성격 이 다시 한 번 확인된다. 한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은 나머지 작품들과 달리 석가 (釋迦)의 생애를 노래한 장편 찬가 내지 불교서사시(佛敎敍事詩)인 까닭으로 왕조의 영광을 노래한 악장에는 넣을 수 없는 것이지만, 찬 가로서의 공통 자질과 「용비어천가」와의 유사성을 고려하여 악장류 시가의 하나로 다루어진다.
창가(唱歌)
창가란 주로 3음보격(종래의 지칭으로는 7․5조, 8․5조, 8․6조 등)의 시행으로 되어 서양식 악곡에 맞추어 불린 개화(開化)⋅애국계몽기 (愛國啓蒙期)의 노래들을 가리킨다. 창가는 근대적 초⋅중등교육이 행하여지기 시작한 1890년대 중엽 부터 나타났다. 1896년 11월의 독립문(獨立門) 정초식(定礎式)에서 불린 윤치호(尹致昊) 작사의 「애국가」가 그 한 예이다. <셩신손 오 년은 우리 황실이요 / 산슈 고려 동반도 우리 본국일셰 (후 렴)무궁화 쳔리 화려강산 / 죠션 사람 죠션으로 기리 보존셰>라 는 그 가사는 《독립신문》의 애국가류와 맥락이 닿아 있으면서 한편 으로는 이후의 본격적인 창가 형태 및 주제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후 창가는 189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숫자로 늘어난 학교들 중 상당수가 서양식 악곡에 의한 음악 과목을 설정함에 따라 널리 확산되었다. 아울러 최남선(崔南善) 같은 이들이 새로운 이념, 욕구의 고취에 창가가 효과적임을 착안하여 《소년(少 年)》 《청춘(靑春)》 등의 계몽적 잡지를 통해 다수의 작품을 발표함으 로써 창가는 이 시대의 중요한 대중계몽 수단의 하나가 되었다. 그는 새로운 시대의 희망과 이상을 예찬하는 단형 창가 외에 「경부(京釜) 텰도 노래」 「세계일주가(世界一周歌)」 등의 풍물지적(風物誌的) 장편 을 통해 지식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서의 창가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들 창가 가운데는 일반적인 서정시의 부류에 드는 것도 더러 있 으나, 전반적인 경향은 문명개화의 시대적 필연성을 역설하고 신교육 을 예찬하며 소년, 청년들의 진취적 기상을 고무하는 계몽주의에 치 중하였다. 따라서 1910년대 초 무렵까지를 두고 말한다면 창가의 지 배적인 속성은 교술적(敎述的)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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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경(景) 안에서 첫 번째의 감탄적 포괄까지의 부분을 전절 (前節), 그 이하의 부분-즉 엽(葉)에 해당하는 부분-을 후절(後節)이 라 한다. 대체로 정형화(定型化)된 <위 ……잇고>를 제외한 부분의 율격을 보면 전절에서는 3음보격이, 후절에서는 4음보격이 쓰였다. 그러나 16세기에 와서는 명사 혹은 한문 단형구만의 배열 관습이 무 너지면서 율격 구조도 크게 흐트러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심각한 변형을 일으키기 이전의 경기체가가 보여주는 바처럼 완강 한 형식 제약 속에서 일정한 사물⋅사실들을 나열하고 정형화된 감 탄구로 집약하는 시적 구조는 그 성격이 보통의 서정시와 현저하게 다르다. 서정시가 대체로 특정한 상황 속에서의 체험, 생각, 느낌, 소 망을 일련의 유기적(有機的) 형상(形象)으로 드러내는 데 비하여, 경 기체가는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 행위, 관념들을 순차적으로 나 열하고 종합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경기체가 는 작품외적 세계의 사실들을 작품 안에 옮겨 놓아 이루어진 교술(敎 述) 시가의 일종이라는 견해가 유력한 설로서 제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의 일면적 타당성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경기 체가가 객관적 현실계의 사물, 행위와 관념을 병렬적으로 늘어놓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위 ○○ 경(景) 긔 엇더니잇고>와 같은 구절들을 통해 그것들 모두를 아우르는 정서적 감격에로 나아간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기체가에 있어서 사물, 경험의 나열과 집약은 외부적 사실의 정보를 확인하거나 전달하는 일보다는 작자의 주관성에 의해 선택⋅재구성된 폐쇄적 세계를 드높은 조화의 경관(景 觀)으로 제시하여 그 담당층의 삶과 지향하는 가치의 탁월함을 감격 적으로 드높이는 데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경기체가 는 단순히 사실기술적이거나 관념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상당한 정도로 주정적(主情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경기체가는 사실⋅
이념의 차원과 주정적(主情的) 심미화(審美化)의 차원이 특이한 방식 으로 결합된 시가이며, 갈래 분포상의 위치를 말한다면 서정의 영역 과 사실적⋅이념적 진술의 영역이 인접하는 중간지대에 놓인 갈래라 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분포 안에서도 작가 및 작품에 따라 어느 한쪽으로의 경향성이 더하거나 덜하여지는 운동성이 작용하였 음은 물론이다. 경기체가의 성립을 가능케 했던 창작⋅향수층은 고려 후기의 신흥 사대부층(新興士大夫層) 문인들로 알려져 있다. 「한림별곡」을 지은 제유(諸儒)들과 「죽계별곡(竹溪別曲)」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지은 안축(安軸, 1287~1348)이 이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주로 한 시문(漢詩文)을 통하여 문학 생활을 영위하였으나, 그것만으로 충족 되지 않은 표현 욕구를 위해 간간이 경기체가를 이용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서 「상대별곡(霜臺別曲)」 「연형 제곡(宴兄弟曲)」 「오륜가(五倫歌)」 등의 악장류(樂章類) 작품이 건국 초기에 창작되고, 16세기에는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의 「도동 곡(道東曲)」, 「엄연곡(儼然曲)」, 「육현가(六賢歌)」 등 성리학의 이념을 담은 작품들과 권호문(權好文, 1532~1587)의 「독락팔곡(獨樂八曲)」 처럼 처사적(處士的) 삶의 지향을 노래한 작품이 나타났다. 한편 조 선 초기에는 몇몇 승려들에 의해 불찬(佛讚)이나 불교의 이치를 노래 한 경기체가가 창작되기도 하였다. 기화(己和, 1376~1433)의 「미타 찬(彌陀讚)」 「안양찬(安養讚)」 「미타경찬(彌陀經讚)」, 세종 무렵의 승 려인 의상(義相)의 「서방가(西方歌)」, 세조 때의 승려인 지은(知訔)의 「기우목동가(騎牛牧童歌)」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 작품은 경기 체가의 틀을 빌려 불교적 관념을 노래하는 데 치중하여 사대부들의 작품보다 더 난삽하고 폐쇄적인 성격을 면치 못하였다. 조선 전기가 지나면서 경기체가는 현저하게 쇠퇴하여 다시는 활력 을 얻지 못하고 19세기까지 간신히 명맥을 잇는 데 그쳤다. 이와 같
은 침체는 그것의 본질에 내재한 폐쇄성의 당연한 귀결이다. 경기체 가는 형태상으로만이 아니라 수용되는 체험의 성격 및 처리 방식에 서조차 완강한 규범의 틀을 강요함으로써 스스로의 가능성을 엄격히 제한한 폐쇄적 양식이었으며, 이는 곧 그 향수 집단의 이념과 미의식 이 지닌 폐쇄성과 조응(照應)한다. 그런 가운데서 이황(李滉)이 「도산 십이곡발(陶山十二曲跋)」에서 말한 바와 같이 경기체가의 자기도취적 감격과 자긍(自肯)에 대한 비판까지 등장하게 될 때 그 제한된 생명
가사(歌辭)
력조차 유지하기 어려움은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가사는 운문 문학의 일종이면서도 극히 다양한 내용들을 폭넓게 수용하는 점에서 일반적인 서정시와 판이한 갈래이다. 가사라고 불리 는 것들 가운데에는 서정성이 강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실제적 사실 과 체험을 기술하는 데 치중한 것도 있고, 이념⋅교훈을 널리 펴기 위한 노래가 있는가 하면 허구적인 짜임을 제대로 갖추어 일정한 사 건을 이야기해 나아가는 작품도 있다. 가사를 이루는 양식적 요건은 극히 단순하여 4음보 율격의 장편 연속체(連續體) 시가는 모두 그 범위에 포함될 수 있다. 다만 일부 민요에서 가사와 비슷한 것들이 발견되고, 잡가(雜歌)의 일부와 십이 가사(十二歌詞)⋅허두가(虛頭歌) 등도 가사와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 가 많은데, 학자에 따라서는 뒤의 세 가지를 가창가사(歌唱歌辭)라 하고 일반적인 가사를 음영가사(吟詠歌辭)라 하여 모두 가사의 범주 에 속하는 것으로 처리하기도 한다. 4음보격 연속체의 율문(律文)이라는 형태적 요건 이외에는 주제⋅ 소재⋅표현방식⋅규모⋅구성 등에 관한 특별한 제약이 없기 때문에 가사 작품들의 내용과 성격이 다채로운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이로
인해 가사의 갈래 특징과 귀속성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를 놓고 많 은 논란이 거듭되었다. 가사는 시가와 문필(文筆)의 중간적 형태라는 견해(조윤제), 율문으로 된 수필이라는 견해(이능우), 가사를 주관적 ⋅서정적 작품군과 객관적⋅서사적 작품군으로 나누어 각기 서정문 학과 서사문학에 따로 귀속시켜야 한다는 견해(장덕순), 가사는 율문 으로 된 교술문학(敎述文學)의 일종이라는 견해(조동일) 등이 그것이 다. 여기에는 개별 작품들과 양식의 검증만으로 매듭지어질 수 없는 갈래이론상의 근본적 쟁점까지 얽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자리에 서 장황한 논의를 피하고, 가사 작품들의 다양한 성향에 주목하여 그 것을 여러 종류의 경험⋅사고 및 표현 욕구에 대하여 폭넓게 열려 있는 혼합갈래의 일종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상춘곡(賞春曲)」 「사미 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같은 서정적 작품들이 「연행 가(燕行歌)」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등의 체험기술적 기행가사(紀 行歌辭)와 공존하는가 하면, 「노처녀가」(老處女歌, 삼설기수록), 「 거사가(居士歌)」 같은 서사적 작품과 「권선지로가(勸善指路歌)」 「천 주공경가(天主恭敬歌)」 「도수사(道修辭)」 등의 이념적⋅교훈적 작품 이 공존하는 갈래를 어떤 하나의 범주 혹은 자질에 귀속시키기보다 는 그 개방성을 인정하는 시각에서 파악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 이다. 이러한 개방성과 아울러 작품 규모에 있어서도 아무런 제약을 두 지 않는 너그러운 확장성은 가사로 하여금 시조와 상보적인 관계를 형성하여 활발하게 창작⋅보급되게끔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가 사는 시조처럼 간결하게 짜인 서정시의 응축성과 맞겨룰 수 없는 이 완된 양식이었으나, 유장(悠長)한 감흥⋅생각을 읊조리고 복잡한 경 험을 서술한다든가 이념적 설득을 달성하는 데에는 단형시가 감당하 지 못하는 요긴한 효용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양식이 언제 이루어졌는가에 관하여는 고려 말 발생설과
조선 초기 발생설이 양립하여 있다. 전자의 문헌적 근거는 고려 말의 승려 나옹화상(懶翁和尙) 혜근(惠勤, 1320~1376)이 지었다는 「서왕 가(西往歌)」이다. 이를 의문시하는 논자들은 지금까지 수집된 증거로 보아 18세기 간행의 미타참절요(彌陀懺節要, 1741)에 수록된 것이 「서왕가」의 최고본(最古本)인 만큼 가사가 고려 말에 온전한 모습을 갖추어 발생하였다는 설을 이로써 확증하기에는 미흡하다고 본다. 그 러나 정극인(丁克仁, 1041~1481)의 만년작(晩年作)인 「상춘곡(賞春 曲)」이 그보다 앞서는 가사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점 에서 고려 말 발생설은 아직 가설로서의 의의가 인정된다. 다만 14 세기에 가사양식이 성립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널리 성행하게 된 것은 조선조에 들어와서의 일이므로 가사는 기본적으로 조선시대의 시가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가사의 역사적 흐름은 시조와 마찬가지로 17세기 중엽을 경계로 한 조선 전기, 후기와 개화⋅애국계몽기의 세 시기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조선 전기의 가사는 주로 양반층에 의해 창작되었다. 송순(宋純, 1493~1582), 정철(鄭澈, 1536~1593), 박인로(朴仁老, 1561~ 1642), 조우인(曺友仁, 1561~1625) 등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 은 한편으로는 한시와 시조를 통해 응축된 서정의 표현을 추구하면 서 다른 한편으로는 가사의 유연한 포용력을 빌려 여러 가지 생활 체험과 흥취 및 신념을 보다 자유로이 노래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특 히 두드러진 흐름을 이룬 것이 이른바 강호시가(江湖詩歌)의 범주에 드는 작품들로서, 혼탁한 세속의 갈등으로부터 물러나 자연을 벗 삼 고 심성을 닦으며 살아가는 유자(儒者)의 모습이 다양한 개인적 변형 을 통해 표출되었다. 이 부류에 속하는 가사들은 작자의 체험적 생활 상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단순히 사실만을 기술하는 데 머무르지 않 고 조화로운 세계질서 속에서 물아(物我)의 합일을 추구하는 드높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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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이 강했던 데 비해, 부녀자들과 평민층은 그러한 규범에 별로 구애 받지 않은 까닭에 이러한 인접성 내지 부분적 중첩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불교가사를 통해 조선 전기 이래로 오랫동안 종교적 감화의 수단으로 요긴하게 쓰여 온 종교가사 또한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 작품량이 더욱 늘어나고 다양해졌다. 승려와 일반 신도들에 의해 지 어진 각종 불교가사는 물론, 18세기 말엽의 「천주공경가」(天主恭敬 歌, 이벽), 「십계명가」(十戒命歌, 정약전)를 비롯한 천주가사(天主歌 辭), 19세기 중엽의 「용담유사」(龍潭遺詞, 최제우, 1824~1864)와 같 은 동학가사(東學歌辭) 등이 그것이다. 이들 종교가사들은 평이한 언 어로써 종교적 가르침과 신념을 표현하여 신자들 사이에 광범하게 구송⋅전파됨으로써 해당 종교의 민중적 기반을 확대하는 데더크게 기여하였다. 이상의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조선 후기의 가사는 담당계층의 확산 ⋅다양화와 종류의 분화를 겪으면서 갈래 속성의 포용력도 더욱 넓 어졌음을 알 수 있다. 견문⋅체험의 상세한 서술, 특정한 사회상황의 집약적 제시, 허구적 서사에로의 발전, 일부 애정가사류의 서정성 심 화, 그리고 종교가사류의 강한 이념⋅교훈성 등 작품 계열과 유형에 따른 다면적(多面的) 발전은 이 시기의 각이(各異)한 문학적 욕구가 가사라는 갈래의 너그러운 확장성을 최대한으로 실현한 결과라고 할 것이다. 개화⋅애국계몽기의 가사는 이념적⋅사회적 격동기의 요구로 인해 위의 다양성이 후퇴하고 형태상의 커다란 변화와 함께 교술적 속성 이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물론 이 시기(및 그 이후)에도 전통적인 가사는 부분적으로 존속하여, 1920년대의 「신의관창의가 (申議官倡義歌)」 같은 작품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가사사 (歌辭史)의 셋째 단계에 해당하는 이 시대에서 주목할 것은 《독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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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적 유학(儒學) 지식인들에 의해 창작된 것으로 믿어진다. 1910년의 국권 상실에 의해 더 이상의 작품이 나올 수 없을 때까지 발표된 수 량은 약 700편으로서, 가사는 이에 이르러 가장 격렬한 비판의식과 이념의 양식으로 그 역사적 변모의 마지막 단계를 마무리 지었다.
가전(假傳)
가전은 고려 중기 이후 일부 문인들에 의해 이따금씩 창작된 특수 한 한 갈래로서, 가전체(假傳體) 혹은 의인전기체(擬人傳記體)라고도 불린다. 이 부류의 작품들은 어떤 사물을 역사적 인물처럼 의인화시 켜서 그 가계(家系)와 생애 및 개인적 성품, 공과(功過)를 기록하는 전기(傳記)의 형식을 빌렸기 때문에 실전(實傳)에 상대되는 가전(假 傳) 또는 의인전기체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형식의 근원을 더 듬어 보면 당(唐)의 문인인 한유(韓愈)의 「모영전(毛穎傳)」이나 설총 (薛聰, 8세기)의 「화왕계(花王戒)」 등에서 유래를 구할 수 있다. 의인 화의 수법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가전의 형성에는 전래의 우화적(寓話 的) 구전설화(口傳說話)도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여겨지기도 한 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 기원적 상관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동물우화는 여러 동물 간의 사건이 주 내용을 이루는 데 비해 가전 은 한 사물의 내력, 속성, 가치에 대한 관심이 주가 된다는 점에서 양식적 지향이 현저히 다르다. 고려 후기에 가전이 발달하게 된 까닭은 그 창작 계층인 사대부들 의 사상적 특질 때문이라는 설명이 정설화(定說化)되어 있다. 즉 이 시기의 사대부들은 종래의 구귀족(舊貴族)들과 달리 세계와 인간 생 활을 구성하는 실제적 사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것들을 합리적 으로 이해하려 하였던바, 이에 따라 사물과 관념을 긴밀하게 통합하 여 파악하는 양식인 가전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구체
적 사물과 경험을 중시하되 그것들을 철저한 이념적 해석으로써 걸 러내려 하는 점에서 가전은 교술적(敎述的)이며, 그것을 사실에 관한 단순한 지식 혹은 이념으로 전달하지 않고 어떤 인물의 구체화된 생 애로 서술한다는 점에서 서사적이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가전을 서 사적 갈래와 교술적 갈래의 사이에 위치하여 두 가지 성격을 특이하 게 통합한 중간갈래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한 예로서 임춘(林椿)이 지 은 「국순전(麴醇傳)」의 줄거리를 보면 다음과 같다.
국순(麴醇)의 자(字)는 자후(子厚)이며 그 조상은 농서(隴西) 사람이 었다. 그의 90대조(代祖)인 모(牟)는 후직(后稷)을 도와서 백성들을 먹 여 살림에 공이 컸다. 모(牟)는 후에 공을 세워 중산후(中山侯)에 봉하 여지고 식읍(食邑) 일만호(一萬戶)를 받아 성을 국씨(麴氏)라 하였다. 순(醇)은 사람됨이 넓고 깊으며 기개가 만경파수(萬頃波水)와 같았 다. 게다가 맑으면서도 청(淸)하지 않았고, 흔들어도 탁(濁)하지 않았 다. 그는 늘 섭법사(葉法師)를 찾아 이야기로 날을 새웠는데,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거꾸러지는 것이 예사였다. 드디어 이름이 널리 알려져 국처사(麴處士)라고 불리었다. 공경(公卿), 대부(大夫), 신선(神 仙), 방사(方士)로부터 이적(夷狄)과 외국인들까지 그 향기로운 이름을 마시는 자는 모두 이를 부러워하여 기리었다. 어느 때이건 큰 모임에 순(醇)이 참석하지 않으면 모두가 쓸쓸해 할 만큼 그는 만인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태위(太尉) 산도(山濤)는 사람 보는 눈이 있어 말하기를 천하 (天下) 창생(蒼生)을 그르치는 자는 이 사람밖에 없다 하여 청주종사 (淸州從事)로 물리치고 말았다. 뒤에 다시 평원독우(平原督郵)가 된 순 (醇)이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한탄하자, 상(相)을 잘 보는 이가 있어 말 하기를, <그대는 붉은 기운이 얼굴에 있어서 반드시 귀한 자리에 오를 터이니 마땅히 좋은 값을 기다리라>라고 하였다. 순(醇)은 진(陳) 후주 (後主) 때에 크게 쓰이었으나, 나라를 어지럽혔다 하여 내침을 당하고 폭병(暴病)으로 죽고 말았다.
손이 번성하였다.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족제(族弟) 청(淸)이 그 뒤를 이어 다시 자
위의 요약에 선명히 드러나 있듯이 「국순전」이 이야기한 것은 술 의 역사이다. 작자는 술의 내력, 성질, 효능, 폐단, 그리고 그에 대한 세론(世論)과 후일담을 관념화하여 정리한 뼈대 위에 의인전기(擬人 傳記)라는 서술 형태를 부여하였다. 이처럼 관념의 틀이 선행하고 그 에 상응하는 형상이 작위적으로 부여된다는 점에서 가전은 일종의 알레고리 곧 우언(寓言)이며, 특히 윤리적 사물관과 가치의식이 짙게 투영된 우언이라 할 수 있다. 실재하는 사물의 성질, 효능에 대한 도 덕적 평가가 주제와 방법 양면을 지배하는 점에서 가전은 교술적인 갈래에 근접한다. 그러나 이러한 속성에도 불구하고 가전은 의인화된 전기가 지니는 서사적 형상력에 힘입어 단순한 사실 기술이나 관념 전달 이상의 형 상력을 발휘한다. 「국순전」의 경우 국순은 비록 의인화된 존재이기는 하나 그 나름의 덕성과 결함을 지니고 행동하는 인물이며, 개인적 욕 망의 성취와 좌절에 희비를 맛보며 성쇠를 겪는다. 따라서 이 인물의 생애를 그린 이야기에서 독자는 술에 관한 평면화된 진술이나 윤리 적 평가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비록 가공적일망정 하나의 삶의 이야 기를 읽는 것이다. 이 점은 돈을 의인화한 「공방전」(孔方傳, 임춘)이나 거북을 의인화 한 「청강사자현부전」(淸江使者玄夫傳, 이규보), 대를 의인화한 「죽부 인전」(竹夫人傳, 이곡), 종이를 의인화한 「저생전」(楮生傳, 이첨), 지 팡이를 의인화한 「정시자전」(丁侍者傳, 식영암) 등에서도 동일하다. 이규보가 술을 의인화하여 지은 「국선생전(麴先生傳)」이 「국순전」과 는 상당히 다른 사건구조와 인물형을 설정하였다는 점도 가전을 순 전한 교술적 갈래로서보다는 그 나름의 형상적 범례성(範例性)을 지
닌 삶의 이야기로 해석해야 온당하게 이해될 수 있다. 가전을 교술과 서사의 사이에 놓인 중간영역에서 파악함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조선조에 와서는 가전의 창작이 쇠퇴한 대신 의인화된 서술의 방 법을 본기체(本紀體) 형식에 확대 적용한 작품들이 띄엄띄엄 출현하 였다. 임제(林悌, 1549~1587)의 「수성지(愁城誌)」와 「화사(花史)」, 김우옹(金宇顒, 1540~1603)의 「천군전(天君傳)」, 황중윤(黃中允, 1577~1648)의 「천군기(天君紀)」, 정기화(鄭琦和, 1786~1840)의 「천 군본기(天君本紀)」 등이 그것이다. 이들 작품은, 식물 세계를 의인화 한 「화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람의 마음을 의인화한 것으로서, 이 로 인해 심성가전(心性假傳)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이처럼 긴 생명을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전과 그 확대 형인 「수성지」 계열의 양식은 소수의 사대부 문인들 사이에서만 창 작⋅향유되는 국한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이들 작품이 극 히 난삽한 전고(典故)와 소수 문인들끼리의 현학적(衒學的) 기상(奇 想)에 많이 의존하였을 뿐 아니라, 현실 체험과 유리된 가공성과 고
몽유록(夢遊錄)
답적 관념을 추구하는 데 골몰하였기 때문이다.
몽유록은 몽유(夢遊) 구조를 기본 골격으로 하는 양식으로, 15세기 중엽부터 출현하여 조선조 전 기간에 걸쳐 사대부 문인들에 의해 간 헐적으로 창작되었다. 몽유 구조란 얼핏 보기에 「구운몽(九雲夢)」 등 환몽소설(幻夢小說)의 기본 구조와 비슷하게 여겨질 수 있으나 그 속 성은 크게 다르다. 환몽구조에서는 주인공이 꿈을 통해 새로운 인물 로 태어나 파란 많은 일대기(一代記)를 거친 뒤 죽음으로써 다시 원 래의 자아로 되돌아오는 이야기가 3인칭의 전지적(全知的) 관찰자에
의해 서술된다. 반면에 몽유록에서는 서술자가 꿈꾸기 이전의 자신의 동일성과 의식을 유지한 채 꿈속의 세계로 나아가 일련의 일들을 겪 은 뒤 본래의 현실로 귀환하여 그 체험 내용을 스스로 서술한다. 아 울러 환몽소설의 꿈 부분은 그 전체가 유기적인 사건의 연쇄로 엮어 진 한 인물의 일생담이지만, 몽유록의 몽유 부분은 서술자가 다수의 인물들을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거나 그들의 모임에 참석하여 견문(見 聞)한 내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도 중요한 차이이다. 이러한 구조적 특성은 몽유록이 설화나 소설류의 사건중심적 진행 과 달리 가상적 꿈의 공간에서 여러 인물들과의 만남을 통해 어떤 이념이나 의식을 표출하는 데 관심을 두는 점과 호응한다. 예컨대 심 의(沈義, 1475~?)의 「대관재몽유록(大觀齋夢遊錄)」에서 서술자-작자 는 꿈의 세계를 빌려 최치원(崔致遠)이 천자의 자리에 앉고, 을지문 덕(乙支文德), 이규보(李奎報), 정도전(鄭道傳), 김종직(金宗直) 등의 역사적 인물들이 각기의 재능에 따라 관직을 차지하는 이상적 봉건 관료사회를 구성하고, 그 자신도 이곳에서 뜻을 이루게 된다는 이념 적 환상을 그렸다. 임제(林悌, 1549~1587)의 「원생몽유록(元生夢遊 錄)」은 비분(悲憤)에 찬 선비인 원자허(元子虛)가 꿈속에서 단종(端 宗), 사육신(死六臣) 등에 견주어지는 인물들을 만나 술을 마시고 노 래를 지어 부르며 비분강개하다가 깨었다는 내용으로서, 세조(世祖) 의 왕위 찬탈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비판의식을 표현한 것이다. 「금화사몽유록(金華寺夢遊錄)」 「사수몽유록(泗水夢遊錄)」 「달천몽유 록(達天夢遊錄)」 「피생몽유록(皮生夢遊錄)」 「강도몽유록(江都夢遊錄)」 등의 작품들 역시 몽유자(서술자)가 유명 무명의 역사적 인물들과 나 누는 이야기가 작품의 주요 내용이 된다는 점은 대체로 같다. 이러한 구조 원리와 내용상의 특징으로 인해 몽유록의 갈래 속성 에 관하여는 교술문학설과 서사문학설이 대립하여 있다. 즉 몽유록이 몽유설화나 소설과는 달리 작품 밖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념⋅주
장⋅평가를 전달하는 데 주력한다는 점을 중시할 경우 교술갈래의 일종으로 파악되고, 몽유담을 객관적 사실과 작가의 주관적 의지 사 이의 대립⋅갈등에서 나온 허구적 형상으로 이해하는 데 치중할 경 우 그 서사적 속성이 좀 더 중시되는 것이다. 큰 갈래의 배타적(排他 的) 범주성(範疇性)을 부인하는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이견들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몽유록의 복합적 성격을 서로 다른 시각 에서 조명한 결과로 이해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서사와 교술의 중간 영역에 놓인 갈래라 보는 것이 온당하리라 생각한다. 몽유록의 기원은 금오신화(金鰲新話)중의 「남염부주지(南炎浮州 志)」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및 이와 비슷한 전기적(傳奇的) 몽유 담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선행단계로부터 본격적인 몽 유록이 형성⋅발전된 데에는 사대부적 이상과 현실 사이의 모순이 심화된 조선조 중엽 이래의 상황이 주요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모 순된 현실에 처하여 자신의 이념가치를 굳게 지키고자 하면서도 그 것을 실현할 만한 현실적 방도를 찾지 못하였던 사대부 문인들은 몽 유 세계라는 가상적 공간을 통해 역사상의 인물들과 만나 현실에의 울분을 토로하고 소망스러운 질서를 구성해 보는 특이한 환상의 양 식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몽유록은 현실비판의 우울한 분위기가 지배적인 작품들( 「원생몽유록」 「달천몽유록」 「피생몽유록」
)과 낙관적 이 념의 허구화된 충족에 치중한 작품들( 「대관재몽유록」 「사수몽유록」 「금 )의 두 계열로 나뉘는데, 전자가 비장하고 준열한 윤리의 화사몽유록」 식을 띠는 데 비하여 후자는 환상을 통해 일시적 만족을 추구하는
희필(戱筆)의 성격이 짙다. 어느 쪽의 경우든 몽유록은 현실과 이념가치 사이의 팽팽한 긴장 을 바탕으로 존립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중세적 질서 자체가 무너지 던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 의의는 쇠퇴하고, 「천궁몽유록(天宮夢遊 錄)」 「몽결초한송」(夢決楚漢訟, 諸馬武傳) 같은 소설적 변이형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들 작품에 채용된 몽유록적 요소는 본래의 성격 에서 이탈하여 소설적 흥미를 장식하는 정도에 그쳤다. 개화기에 와 서는 「꿈하늘」(신채호), 「몽견제갈량」(夢見諸葛亮, 유원표) 같은 작품 이 이념적 표출의 양식으로서 몽유록의 유산을 빌렸으며, 현대 작가 로는 최인훈이 관념소설적 표현에 몽유록의 수법을 활용한 예가 있 다.
야담(野談)
야담은 주로 한문으로 기록된, 비교적 짤막한 길이의 잡다한 이야 기들의 총칭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면 야담의 성격과 양식적 원리가 무엇인지 분명치 않다는 아쉬움이 남지만, 그런 정도의 느슨한 윤곽 을 그어 말할 수밖에 없을 만큼 다양한 내용, 성격의 이야기들이 뒤 섞이어 매우 방만한 군집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곧 야담의 특성이다. 그 가운데에는 실제 인물의 생애에서 있었던 일을 평면적으로 전달 하는 사실담(事實談)도 있으며, 역사적 사건이나 일화에 약간의 윤색 이 가해진 이야기가 보이는가 하면, 등장인물의 실재성 여부가 어떻 든 비상하게 날카로운 구성과 전형화(典型化)를 통해 사회적 갈등이 나 세태의 일면을 묘파한 작품도 있다. 다시 말하여 야담의 한 끝에 는 실재했던 삶에 관한 사실적(事實的) 진술이, 다른 한쪽 끝에는 한 시대의 사회상을 집약하여 생생하게 드러내는 허구적 형상으로서의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포괄하는 영역이 넓게 펼쳐져 있기 때문에 야담은 작품에 따라 순전한 사실담이기도 하고 잘 짜인 허구적 서사이기도 하며 혹 은 그 사이의 다양한 층위에서 운동 중인 중간적 산문문학이기도 하 다. 그런 뜻에서 야담은 그 포괄 영역이 서사와 교술 사이에 완만하 게 펼쳐져 있는 혼합갈래라 규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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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의 야담집과 인물 위주의 편서인 대동기문(大東奇聞)도 주목할 만하며, 대동야승(大東野乘)패림(稗林)과 같은 거질(巨秩)의 총 서 가운데에도 야담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 이들 야담의 기록⋅개작⋅편집을 담당한 인물들은 주로 사대부층 에서 나왔으며, 일부 야담집은 중인층의 손에서 이루어지기도 하였 다. 그러나 담담계층의 이러한 국한성에도 불구하고 야담은 정통 한 문문학과 달리 당대 사회의 갖가지 모순과 갈등 및 여러 계층에 걸 친 인물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그럴 수 있었던 요인으로 는 야담의 상당부분이 민간에 떠도는 이야기들에 바탕을 둔 것이라 는 점과 그 작자층이 당시의 변환기적 사회상을 체험하면서 중세적 질서에 대해 비판 혹은 회의(懷疑)의 시각을 지녔다는 점이 주목된 다. 야담에 자주 등장하는 문제들을 간추려 보면, 부(富)의 축적, 사람 의 본능적 욕구, 세속적 이해관계, 낡은 신분질서의 붕괴, 주인-노비 (奴婢) 사이의 갈등, 도적과 사기꾼들, 시정인들의 생활상, 특이한 삶 을 살아간 기인(奇人)⋅일사(逸士)들, 세태에 대한 풍자와 해학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런 내용들은 중세 사회 해체기에 있어서의 다양한 현실 체험이 야담의 주요 관심사로 포용된 결과이다. 한문소설의 범 주에서 주목되어 온 박지원(朴趾源)의 「허생전(許生傳)」 「호질(虎叱)」 등과 이옥(李鈺), 김려(金鑢) 등의 전(傳)들도 이러한 야담류의 바탕 에 힘입은 바 있으리라 생각된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덧붙여 둘 것은 야담이 조선 후기 문학의 역 동성에 참획하는 활력을 지녔다는 점은 분명하다 해도, 전반적으로 사대부적(혹은 중인적)인 인식의 제약이 충분히 극복되어 있지는 못 하다는 사실이다. 야담들의 말미에 덧붙여져 있는 기록자의 평결(評 結)이 유가적 윤리의식에 매인 예가 많다는 점은 놓아두고라도, 민간 의 기문⋅일사와 설화적 전승을 개작하는 과정에서 사대부적 지향이
내용 자체의 성격을 변질시킨 사례도 적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포함하여 야담의 다양한 모습과 특질 및 역사적 의의를 밝 히기 위하여는 아직도 많은 부분이 심층적 논의를 기다리는 과제로 남아 있다. 야담의 다양한 속성을 예시하는 뜻에서 다음에 두 편의 자료를 인 용한다. 앞의 것은 어우야담중의 한 토막으로서, 단편적인 사실담 의 부류에 속한다. 반면에 어수신화(禦睡新話)에 실린 뒤의 작품은 한 몰락양반 일가가 신분 의식과 빈궁의 틈바구니에서 겪는 고통과 비극적 결단을 예리한 구도로 그려낸 단형 서사문학의 명편이라 할 만하다.
홍연이 말했다.
익성군이 말했다.
익성군(益城君) 홍성민(洪聖民)이 일찍이 홍연(洪淵)과 더불어 왜적 을 막을 방법을 논하였다.
“왜적이 아직 육지에 오르기 전이라면 배로써 제어할 여지가 있다. 상륙한 뒤라면 우리나라는 결코 지탱할 수가 없을 것이다.”
“육지에 오른 적은 물을 떠난 고기 같아 막기가 오히려 쉬울 것이 다. 그대의 말은 어째서 그렇게 다른가?” “아니다. 그건 크게 옳지 않다.” 무릇 세상의 일은 시험해 본 연후라야 알 수 있는 것이니, 임진란에 이르러 우리나라는 혹시 해전에서는 승리하였으나 육전에 이르러서는 이긴 것을 보기가 드물다. 홍연의 관점은 적을 바로 본 것이니, 그가 유신(儒臣)이긴 하지만 평시라면 참장(參將)으로 천거할 만한 사람이다. <이민수 역>
소의문(昭義門, 서소문) 밖의 홍생원은 홀아비로 두 딸과 함께 살았 다.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어서 항상 훈조막(燻造幕)-관청에 공납(貢
納)하는 메주를 만들던 곳-의 역부(役夫)들이 있는 곳으로 와서 밥을 빌었다. 역부들은 저마다 한술 밥을 덜어서 주었고, 홍생원은 겨자 잎
지거리를 해댔다.
사귀에 싸들고 가서 두 딸을 먹이었다. 어느 날 홍생원이 또 밥을 빌러 왔을 때 훈조막 역부가 취중에 욕
“홍생원은 도대체 훈조막 부군당(府君堂)-각 관아(官衙)에서 신령을 모시던 곳-이오? 우리들 상전 나으리요? 무슨 까닭에 날마다 와서 밥 을 내라 해요?” 홍생원은 눈물이 글썽해져 돌아섰다. 그리고 자기 집안으로 들어간 후 5, 6일이 지나도록 삽짝이 닫힌 채로 있었다. 한 역부가 삽짝을 밀치고 들어가서 보니 홍생원과 어린 두 딸이 정 신을 못 가누고 누웠는데 눈물만 주르르 흘릴 뿐이었다. 그 역부는 가 련한 마음으로 급히 나와서 죽을 쑤어가지고 갔다. 홍생원은 13세 된 큰딸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얘들아, 이 죽을 먹겠니? 우리 세 사람이 간신히 주림을 참는 데 엿새 동안의 공부가 있었다. 이제 죽음이 가까웠다. 전공(前功)이 가석 하지 않느냐? 지금 이 죽 한 그릇을 받아먹고, 저이가 계속 가져다
“자자, 자자.”
준다면 좋겠지만 내일부터 매일 치욕을 어찌 다 당하겠느냐?” 홍생원이 말하는 동안에 다섯 살 된 막내딸이 죽 냄새를 맡고 일어 나려고 머리를 들었다. 큰딸이 동생을 따독따독하여 눕히면서
하고 달래는 것이었다. 이튿날 역부들이 다시 가 보았을 때는 모두 죽은 다음이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직 접 목격하였던 훈조막 역부들의 그 때 심경은 어떠했을까? 심하도다, 가난이여! 나의 집에 있어서도 가난이 지극히 서글픈 일 이지만 여기 홍생원에 비한다면야 슬퍼할 것이 있겠는가. <이우성⋅임형택 역>
3. 언어(言語)⋅문체(文體)와 율격(律格)
문학은 언어를 매재로 하는 예술이다. 따라서 작가와 작품의 이해 를 위해서는 물론 한 민족의 문학 전반을 해명하는 데에도 그 언어 적 측면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가 긴요하다. 그러나 우리문학에서는 이에 관한 연구가 전반적으로 부진한 상태에 있으며, 특히 산문 문체 에 관한 연구 성과는 극히 미비한 형편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문체론(文體論)이 문학 연구와 언어학의 양면에 걸쳐 고도 한 방법적 준비와 광범한 작업의 수고를 필요로 하는 어려운 분야이 면서도 그 어느 쪽에서도 중심적인 연구 영역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는 점이 가장 큰 문제인 듯하다. 1960년대에 작품의 내부적 구조와 언어분석을 중시하는 접근 방법이 강조되면서 이 부문의 상당한 진 전이 이루어지는 듯하였으나, 이렇다 할 분석적 이해의 성과를 거두 지 못한 채 그러한 관심이 시들어 버리고 만 것도 아쉬운 일이다. 이처럼 문체론 전반에 관한 연구가 부족하고 문체사(文體史)의 흐 름이 불분명한 상황에서는 특정 작가와 작품에 관한 문체론적 논의 도 연구자의 자의적인 도식에 의거하여 캄캄한 어둠 속의 어느 한 부분을 비추어 보는 이상이 되기 어렵다. 문체(style)라는 용어를 대 할 때 우리는 흔히 특정한 개인의 개성적 문체를 먼저 생각하지만, 그러한 개인적 문체는 보다 넓은 범위의 사회집단⋅계층의 언어에 근거해 있는 것이다. 또 일정한 사회단위의 언어⋅문체는 그 시대 전 반의 언어적 지평 안에 존재하고, 한 시대의 언어⋅문체는 그 언어 공동체가 거쳐 온 언어 생활사의 역동적 과정 속에 놓여 있는 것임 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연관의 맥락을 소홀히 한 채 몇
몇 작가의 문체적 개별성만을 찾기에 골몰한다든가, 신문학(新文學) 초기 소설에 있어서의 과거 시제 사용이나 3인칭 대명사 <그>의 도 입 같은 부분적 사실들을 갑작스러운 사건처럼 떼어내어 강조하는 데 열중하는 일은 현명하지 못하다. 이와 같은 문제들은 적잖은 이론적 모색과 작업이 쌓이고 종합되 어야 극복될 터이지만 이 자리에서 우리는 그간의 연구 성과를 간추 리고 약간의 가설적 견해를 덧붙이면서 장차 엄밀하게 검증 혹은 심 화되어야 할 사항들을 거론해 보기로 한다. 의존할 만한 성과가 비교 적 많이 축적된 율격론 분야와 달리 문체에 관한 내용은 앞으로의 진전에 따라 그 일부가 어설픈 설명이었던 것으로 밝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검토의 필요성을 좀 더 뚜렷이 하고 논의의 실마리를 마련하는 데 보탬이 된다면 이 역시 아주 쓸모없는 일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1) 국어의 특질(特質)과 문체사적(文體史的) 윤곽
국어의 역사적 흐름과 주요 특질
한국어의 계통에 관하여는 알타이어족설(語族說)이 꽤 오랫동안 유 력한 가설의 지위를 차지하여 왔으나 아직까지 확실한 증명은 부족 한 상태에 있으며, 그 입증 가능성에 회의적인 견해들도 적잖이 보인 다. 그러나 아득한 선사시대에 있어서의 기원이 어떠하든 고대국가 형성기 무렵의 한반도 및 만주 일대에는 아주 가까운 친족관계를 가 진 언어군(言語群)이 존재하였다. 이들은 종족⋅부족 간의 통합이나 정복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보다 적은 수의 언어들로 정비되어 나아 갔다. 그 결과 부여계(扶餘系)의 고구려어(高句麗語), 한계(韓系)의 신
라어(新羅語)⋅백제어(百濟語)⋅가락어(駕洛語)가 정립되고, 가락어(駕 洛語)는 정치적 병합과 함께 신라어에 흡수되었다. 이 가운데서 신라 어와 백제어 사이에는 동일 언어의 방언적(方言的) 분화형 정도의 차 이가 있었고, 고구려어는 이들에 대해 조금 더 큰 거리를 지녔던 것 으로 추정된다. 7세기 후반에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고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 일 부와 백제 땅을 차지하게 됨에 따라 고대 한국어의 다기한 분포 양 상은 신라어를 중심으로 백제어와 고구려어가 흡수되는 방향으로 재 편성되었다. 이것이 한국어 형성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첫 번째의 역사적 전기(轉機)이다. 신라와 함께 남북으로 병립한 발해(渤海, 799~926)에서는 고구려어가 중심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멸 망 이후의 영토가 고려에 의해 회복되지 못함으로써 발해어는 우리 언어사의 흐름으로부터 대부분 일실되었다. 10세기 전반의 고려(高麗) 건국(918)과 후삼국 통일(936)은 국어사 의 흐름에 또 한 차례의 뚜렷한 구획을 지으면서 중세 한국어의 바 탕을 결정하였다. 고려는 신라의 문물을 많이 계승하여 언어적으로 고려어는 신라어의 직접적 연속이라 할 수 있으나, 신라어가 경주 지 방을 중심으로 하였던 데 비하여 고려어는 개경(開京)을 중심한 한반 도 중부지역의 언어를 직접적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14세기 말 의 조선(朝鮮) 건국(1392)과 더불어 언어의 중심은 다시 서울로 옮겨 졌으나, 이 지리적 변화는 언어변천사적으로 그다지 큰 의미를 가지 지는 않는다. 이렇게 보건대 우리의 현대국어는 고려 초기에 성립한 중세국어가 약 10세기 동안의 지속적 변화를 거쳐 오늘날의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간의 역사적 변화와 우리말이 지닌 일반적 특질은 당연히 문학 적 표현 및 문체상의 특질에 직접⋅간접의 여러 관련을 맺고 있을 터이나, 이에 대한 본격적 연구는 아직 숙제로 남아 있다. 따라서 우
리는 여기에서 국어의 몇몇 특징이 문체론적 시각에서 어떻게 주목 될 수 있는가를 단편적으로 언급해 두는 데 그치고자 한다. 국어의 특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언어형태상으로 교 착어(膠着語)에 속한다는 점이다. 교착어는 어근(語根)과 접사( 어미⋅ )와의 결합에 의하여 문법적 기능을 나타내는 언어로서, 우리가 조사 익히 아는 바처럼 동사⋅형용사의 다양한 어미변화(語尾變化, 활용)
와 어미류(語尾類)에 첨가되는 조사(助詞)의 변이(곡용)를 통해 의미 를 전달한다. 이러한 언어에서 어미와 조사의 활용 방법이 다채롭게 발달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 결과 같은 낱말과 어순(語順)을 가진 문장이라 해도 어미⋅조사가 일으키는 표현상의 편차에 따라 의미의 무게와 빛깔이 달라지게 된다. 엄격한 사회적 계서(階序) 관념과 더 불어 발달한 존비법(尊卑法)이라든가, 지역에 따른 방언(方言) 차(差) 등 우리말의 특질 중 많은 부분이 이에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문 체의 시대적 변천이나 계층⋅집단에 따른 분화 및 개인적 특성을 밝 히는 데에도 어미⋅조사의 구사 방식이 어떤 의미 깊은 연관을 지니 고 있으리라는 것은 단순한 가정 이상의 개연성(蓋然性)을 띤다. 통사구조상(統辭構造上)으로는 정상적인 구문에서 서술어가 문장의 맨 끝에 놓이며, 목적어⋅보어(補語)는 그것들을 지배하는 동사의 앞 에, 수식어는 피수식어의 앞에 온다는 점이 국어의 특징이다. 국어에 서는 아무리 길고 복잡한 문장 또는 절(節)이라 해도 그 마지막 부분 에 서술어가 나타나기까지 온갖 부속성분과 수식어가 선행하는 것은 물론, 양보⋅조건⋅원인⋅지속⋅대립⋅나열…… 등 갖가지 접속관계 의 구문이 먼저 출현한 다음에야 종결형의 서술어가 제시되는 것이 다. 하나의 문장이 주어-서술어의 기본적 구성관계를 내보임으로써 의미상의 뼈대를 완성한다고 본다면, 국어 구문구조의 특성은 최후의 서술어가 나타나기까지 그 문(文)의 의미 방향을 불확정 상태로 유보 하게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나는 당신을 기다리……>까지의
부분만으로는 이 문장이 어떤 의미로 귀착할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 이하의 부분은 <……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로 이 어질 수 있고, <……기 때문에 오늘 이처럼 ……>으로 나아갈 수도 있으며, <……지 않습니다.>로 단호하게 매듭지어질 수도 있기 때문 이다. 아울러 <수식어+피수식어>의 통상적 어순이 복잡한 보문구조 (補文構造)를 내포하는 경우에도 <내가 어제 그에게 빌려주려다가 깜 빡 잊었던 책>과 같이 의미상의 중심인 피수식어가 가장 뒤에 놓임 으로써 판단의 부분적인 유예 현상이 불가피한 것도 비슷한 점이다. 문(文)의 의미란 발화상황(發話狀況)과 문맥이 함께 작용하여 산출되 는 것이므로 위의 구문상 특성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여 언어심리 내지 사고방식 일반의 문제로까지 곧바로 비약시키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비슷한 구문구조를 가진 여러 언어와 더불어 이들 특징의 작 용 방식과 시대적⋅개인적 변이를 면밀히 살펴보는 일은 우리의 언 어생활 일반과 문체론적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밖에 어휘재(語彙材)의 분포 및 조어법(造語法)에 관련하여 유 의할 만한 역사적 특징으로서 관념어와 생활어가 퍽 오랫동안 중층 적(重層的)으로 발달하여 온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반드시 그런 것 만은 아니지만 추상적 개념⋅용어와 공적(公的) 제도에 관한 술어들 및 이들의 성질⋅작용⋅관계를 나타내는 어휘성분들은 한자어를 많 이 사용하고, 구체적 경험⋅감각⋅느낌의 표현이나 일상생활과 평민 적 생산⋅노동에 관련된 의사소통 영역에서는 고유어의 어휘재와 조 어력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였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어 휘재의 이 이원화(二元化) 경향은 우리말의 본래적 자질 때문이 아니 라 중세의 사회⋅문화적 조건에 따라 점진적으로 심화되었던 것이므 로 그 자체가 다시 변화되어 갈 수밖에 없는 역사성을 띤다는 사실 도 유의해야 한다. 이러한 중층화 현상이 부분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
백제⋅신라가 고대국가로서의 체제를 정비하면서 행정상의 필요에 의해 한학(漢學)을 수용하고 또 불교의 전파에 따라 그 교학(敎學)이 성립하게 된 무렵부터인 듯하다. 국가의 장전(章典)⋅문서(文書) 및 역사가 한문으로 기록되고 불가(佛家)의 교학 또한 한역(漢譯) 경전 (經典)에 바탕을 두고 우주의 원리, 인간 본성, 해탈의 도리 등의 문 제를 다룸에 따라 공적 언어와 관념적 언어의 영역이 한자어와 한문 적 표현을 많이 흡수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추이였다. 그러나 고려 건국 초기까지의 우리말에서 어휘재와 표현 방식의 중층화 현상은 아직 뚜렷하지 않았고, 고유어의 영역이 훨씬 넓었던 것 같다. 고려 초의 작품인 균여대사(均如大師, 923~973)의 「보현십원가(普賢十願 歌)」를 포함한 현존 향가를 보면 한자어를 별로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섬세하고도 심원한 사유(思惟)의 세계까지를 탁월하게 표현해 낸 점 이 단적인 증거가 된다. 어휘재의 중층적 발달은 고려 초기 이후에 본격화되어 조선조 말 까지 지속되었다. 약 10세기에 달하는 이 기간은 사회신분구조와 마 찬가지로 문자생활에 있어서도 이원적 병립관계가 지속되어, 귀족⋅ 양반층은 한문으로 공적인 문서와 역사기록을 관리하고 학문적 저술 과 문학은 물론 그 밖의 문자생활도 거의 이에 의존하였다. 이에 따 라 공적인 사회관계를 표시하는 어휘들과 추상적 개념 및 논리관계 를 다루는 말들이 한문에서 전용(轉用)되거나 그 조어방법에 따라 창 출되었다. 특히 우리 전통문화의 종교적⋅사상적 저류로서 중요한 역 할을 담당한 불교와 유학(儒學)의 전적(典籍)들이 여기에 커다란 작 용을 끼쳤다. 한편 국어의 고유한 언어재는 생활언어의 차원에서 양 적인 확대와 질적인 세련을 지속하여 나아갔다. 국어의 특징을 말할 때 감각언어⋅묘사언어가 풍부하고 섬세하다는 점을 흔히 거론하는 데, 구체언어(具體言語)라 총칭할 수 있는 이들 어휘재와 표현력의 발달은 생활언어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또 다른 발전의 단적인 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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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닌 폭과 깊이에 일차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므로 위의 문장언어들이 보여주는 장중함과 간결⋅섬세한 표현력 및 고도한 균형은 물론 한 글 창제 당시까지 다듬어져 온 국어의 높이를 전제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처럼 문장언어화하면서 말의 올과 결이 가다듬어지고 표현의 힘을 증진하였으리라는 것도 당연한 추론이다. 그렇게 볼 때 중세 국어문장의 응축된 균형을 탁월하게 구현한 「용비어천가」⋅「월 인천강지곡」 등의 창작문장은 물론, 각종 번역서의 의의 또한 중요하 다. 번역이란 단순한 말바꿈의 기계적 작업이 아니라 하나의 언어로 진술된 사유체계와 경험을 다른 종류의 언어로 포착하는 창조적 재 현의 작업이다. 15세기의 각종 언해(諺解)는 바로 이러한 과제에 당 면하여, 이질적 언어로 표현된 갖가지 경험과 사고 및 시적 형상을 우리말의 세계 안에서 정밀하고도 아름답게 소화할 수 있는가를 검 증한 최초의 작업이었다. 그 결과는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서, 국어문 장의 표현력이 탁월함을 입증함과 아울러 이질적인 언어재에 대한 수용의 유연성을 확대하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이렇게 해서 초기적 바탕을 마련한 중세 국어문체는 <내간체(內簡 體)>라 불리는 좀 더 평이하고도 구체적인 체험기술적 문체로 이어 지면서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위에 언급한 관찬서(官撰書)의 대부 분이 내용상으로는 초개인적인 전범성(典範性)⋅공식성(公式性)을 지 향하면서 그 문체 또한 생활상의 실감이 희박한 장중함에 치우친 예 가 많았던 데 비하여, 내간체는 문체의 진전을 이와 전혀 다른 방향 으로 이끌었다. 내간체의 성립 및 발달 과정에 관하여는 아직 세밀한 연구가 없으 나,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이르는 무렵에는 그 초기적인 바탕 이 형성되었으리라 추정된다. 훈민정음 반포 이후 각종 관찬서적에 의해 한글이 보급되기는 하였어도 당대의 사대부 남성들은 예전과 별 다름 없이 한문에 의해 공적⋅일상적 문자생활과 문학 활동을 영
위하였다. 한편 일반 평민층에서는 아직까지 문자생활의 필요를 크게 느낄 만큼 사회경제적 성장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가운데서 한글은 중인층(中人層)에 의해 실무상의 보조적 수단 으로 쓰이는 한편, 궁중과 사가(士家) 및 일부 중인층의 부녀자들에 게 요긴한 기록⋅표현과 교육의 수단이 되었다. 당시의 통념은 여성 들에게 초보적인 수준 이상의 한문 능력이나 학식이 필요하지 않다 고 여겼으므로 소수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지체 있는 집안 의 대다수 여성들도 한글을 익혀 이로써 일상사(日常事)를 기록하고 친족들 사이의 소식을 전하는 등 구체적 생활체험에 직결된 문자생 활을 영위하였던 것이다. 성종(成宗)의 어머니인 소혜왕후(昭惠王后) 가 부녀 훈육에 필요한 내용을 여러 책에서 뽑아 언해한 「내훈(內訓) 」이 1475년에 이루어진 것을 보면 사가(士家) 여성들의 기초적 교육 과 교양 습득에 한글의 해득이 전제되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내간체(內簡體)>란 바로 이러한 사실에 주목한 근대의 학자들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여성 친족 간의 사적(私的)인 서신에 만 이 문체가 쓰였던 것은 아니며, 가족 간의 편지에서 한쪽이 남성 ( 아버지, 아들 등
)이고 다른 쪽이 여성일 경우도 적잖이 쓰였다. 또한 이 문체는 주로 여성들에 의한 개인생활의 기록, 일기, 기행, 잡록, 회고록, 전기 등 한글로 된 모든 산문에 두루 쓰였다. 그런 뜻에서 내간체란 남성 위주의 우리 중세문화 속에서 주로 여성들을 통해 국 어의 표현력이 다듬어지면서 발달하기는 하였으되 일부 남성들도 익 히어 쓴 문체로서, 근본적으로는 용도의 범위나 사용자층의 성적(性 的) 차이에 따라 구별되기보다 일상적 체험과 생각⋅느낌을 진솔하게 기록하는 순수국어문체의 범칭(汎稱)이다. 사대부인 안민학(安敏學)이 라는 이가 선조(宣祖) 8년(1596)에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국문으로 제문을 지어 관 속에 넣었던 글의 한 대목을 보면 이 문체가 얼마만 큼 소박하고 절실하면서도 함축성이 풍부한가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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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 그것대로의 흐름을 지속하면서 내간체의 직접⋅간접적인 영향 을 받아 그 일부는 보다 자연스러운 국어문장으로 다듬어져 갔던 것 으로 보인다. 이러한 전반적 동향을 좀 더 확실하게 해명하기 위해서 는 광범한 자료의 검증에 바탕을 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조선 후기의 한글 보급과 국문문체 발달에는 소설의 활발한 창작 ⋅유통도 중요한 몫을 하였다. 대부분이 한글로 기록된 고전소설은 17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성행하여, 개인적으로 책을 빌려 본다든가 전사(轉寫)하는 일은 물론 이를 팔거나 대여해 주는 것을 업으로 삼 는 이들도 나타났다. 그 종류는 방물장수처럼 부녀자들에게 필요한 신변용품류를 취급하는 떠돌이 장사치들이 이야기책 즉 소설을 빌려 주거나 파는 경우와, 도회지에 일정한 거소를 두고 다량의 소설책을 준비하여 빌려주는 세책가(貰冊家)의 경우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 들의 활동은 소설의 창작⋅개작(改作)과 독자층의 확대에 크게 기여 하면서 국어 문체의 발달에도 촉진제가 되었다. 이러한 기반에 힘입 어 18세기부터 이루어진 방각본(坊刻本) 소설 출판 역시 한글 해독층 을 더 넓히고, 박진한 묘사와 흥미로운 서술에 적합한 소설 문체를 증진시켰다. 이들 국문소설의 문체적 바탕도 내간체가 기본이 되었으며, 한문 역어체와 평민적 속어체(俗語體)가 소설 유형에 따라 부수적 요소로 흡수되었다. 종래의 학자들 중에서는 한문성어(漢文成語), 고사(故事) 라든가 <차시(此時) 최공(崔公)이 웃어 가로되……> 같은 관용적 구 절이 자주 보이면 이를 곧 역어체 문장의 소설이라 단정한 예가 있 었으나, 이는 부분적 사실에 이끌린 인상론일 뿐 번역⋅번안물을 제 외하고는 국문소설에서 역어체가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경우가 흔치 않다. 이는 소설이 국어 문장으로서의 자연스러운 호흡과 표현 및 구 문상의 친근감을 지니지 못할 경우 독자들로부터 환영받을 수 없었 던 데 기인하는 당연한 현상이다.
내간체의 자산을 바탕으로 하되 한문역어체를 부분적으로 흡수한 작품들은 영웅소설(英雄小說)⋅환몽소설(幻夢小說)⋅가문소설(家門小 說) 등 사회신분적 위치가 상대적으로 높은 독자층이 많았던 유형의 소설들이다. 이들은 작중사건과 분위기를 장중하게 한다든가 화려한 문체로 꾸미기 위해 다채로운 한문구와 전고(典故) 및 문어적(文語 的) 투식어(套式語)를 활용하고는 하였다. 반면에 낮은 신분의 독자 층을 보다 많이 보유하였던 평민소설류 작품들은 일상적 구어(口語) ⋅속어(俗語)를 흡수하여 순수한 내간체의 단아(端雅)함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문체에로 나아갔다. 특히 판소리계 소설들은 창과 소설로부 터 전이된 평민적 재담⋅욕설⋅곁말 따위와 질박한 활력이 넘치는 일상어를 다채롭게 구사한 대목이 많다. 다만 판소리 사설과 판소리 계 소설은 작중 상황에 따라 언어의 층위를 다양하게 바꾸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그 전체를 특정한 종류의 문체에 귀속시키기는 어렵다. 이 밖에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하였던 불교가사(佛敎歌辭)와 아울러 대중적 전교(傳敎)의 수단으로 각각 18세기와 19세기의 후반에 등장 한 천주가사(天主歌辭)와 동학가사(東學歌辭) 또한 비록 소박한 수준 이기는 하나 종교적 사고와 설득에까지 국어문장의 표현영역을 넓히 며 이를 대중적으로 보급하는 데 기여하였다. 아울러 19세기 말에 출현한 기독교 성서(聖書) 번역 및 각종 교리서(敎理書)의 보급 역시 문체사적으로 기여한 바 있으리라 추정된다.
전환기(轉換期)의 문체(文體)와 그 이후
19세기 말에서 1910년대에 이르는 기간의 국어 문체는 이처럼 조 선 후기에 이미 광범하게 형성되어 온 국문해독층과 문체사적 진전 을 바탕으로 하여 성립한 것이다. 중세적 신분질서의 결정적 붕괴라
는 내부적 변화와 함께 밖으로부터의 위협이 절실하게 박두해 온 이 시기에 있어서 대중을 상대로 한 지식⋅경험의 전달과 이념적 호소 는 더 이상 한문에 의존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개화⋅애국계 몽기의 문체는 한편으로는 앞 시대의 성취를 흡수하면서, 다른 한편 으로는 구체적 사실⋅체험⋅정서를 표현하는 데 치중하였던 종래의 경향으로부터 벗어나, 시대의 이념과 공적인 문제들을 널리 포용하는 설득⋅논쟁의 언어에까지 확산되었다. 이 시기의 국어 문체는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유길준(兪 吉濬)의 서유견문(西遊見聞, 1895)을 본보기로 하는 국한혼용(國漢 混用)의 고답적 문체와 《독닙신문》이 채택하였던 평이한 일상어 문 체가 그것이다. 전자는 15, 16세기의 한문역어체 문장으로부터 유래 한 문체로서, 한학적 소양을 갖춘 지식인층에 의하여 혹은 그러한 범 위의 독자들을 기본적 소통 대상으로 의식한 글에서 주로 사용되었 다. 계몽적 이념, 지식을 담은 서적들과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 月報)》 《서북학회보(西北學會報)》 《태극학보(太極學報)》 등 전국 각 지의 개명(開明)한 유학자⋅지식인층이 발행한 학회보류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嗚呼(오호)라 禽獸之患(금수지환)이 旣除(기제)에 人類之競爭(인류지 경쟁)이 生焉(생언)하니 中古(중고) 以降(이항)으로 智力角鬪(지력각투) 가 日趨劇烈(일추극렬)타가 現時代(현시대)에 至(지)하야는 五洋(오양) 이 大開(대개)하고 六洲(육주) 相通(상통)하야 五色人種(오색인종)이 迭 相競逐(질상경축)할새 智識(지식)이 開明(개명)하고 勢力(세력)이 膨脹 (팽창)한 者(자)는 優等人種(우등인종)이라 稱(칭)하고 智識(지식)이 闇 昧(암매)하고 勢力(세력)이 縮小(축소)한 者(자)는 劣等人種(열등인종)이 라 謂(위)하는데 優等人種(우등인종)이 劣等人種(열등인종)을 對(대)하 야 目之以野蠻(목지이야만)하며 認之以犧牲(인지이희생)하야 驅逐(구축) 과 宰殺(재살)을 惟意所欲(유의소욕)에 略無顧忌(약무고기)라. 所以(소
이)로 劣等人種(열등인종)은 生存(생존)을 不得(부득)하야 漸就衰滅(점 취쇠멸)하니 如非洲之黑奴(여비주지흑노)와 米洲之紅番(미주지홍번)이 是也(시야)라. 豈不悲哉(기불비재)며 豈不慘哉(개불참재)아. 現今時代( 현금시대)는 劣等人種(열등인종)이 優等人種(우등인종)에게 被逐(피축) 함은 上古時代(상고시대)에 禽獸(금수)가 人種(인종)에게 被逐(피축)함 과 如(여)하니 故(고)로 曰(왈) 生存競爭(생존경쟁)은 天演(천연)이오 優 勝劣敗(우승열패)는 公例(공예)라 함이라. <박은식, 「교육이 불흥(不興)이면 생존(生存)을 부득(不得), 1906>
한편 후자는 내간체의 흐름을 이어 발달한 조선 후기의 순국문문 체를 바탕삼은 것으로, 교양과 신분의 차이에 관계없이 광범한 독자 층을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의도가 더 강한 지면에서부터 먼저 사용 되었다. 신소설류가 이 문체로 되어 있는 것은 조선 후기의 국문 소 설과 가집(歌集) 이래로 이미 확립된 전통이기에 당연하다 하겠으나, 1896년에 창간된 《독닙신문》이 이를 택한 것은 문체사적으로 눈여겨 볼 만하다. 《독닙신문》과 그 제작자들의 이념이 당대의 역사적 상황 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는 물론 여기에서 거론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우선 당대의 사회적 사실과 이념의 문제들을 일상어 수준의 순국문문체로서 수용하고자 한 시도를 중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 은 15세기 이래 꾸준히 다듬어지고 성장해 온 국문문체와 그 사용자 층의 이러한 시도를 당연한 진전으로서 요구하고 또 소화할 만큼 성 장하여 있었음을 말해 주는 증거이기도 하지 않을까? 개화⋅애국계몽기의 문체사적 흐름은 위의 두 유형이 공존하는 가 운데 전반적으로 보아 한문역어체의 고답적인 문장이 점유 비율 면 에서 축소되고 질적으로는 보다 자연스러운 국어의 구문구조와 표현 에 가깝게 변모해 가는 양상을 보여준다. 서유견문(西遊見聞)을 그 보다 10년 정도 뒤에 나오기 시작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4~1910)의 기사 및 논설과 비교해 보면 쉽사리 알 수 있다. 이
점은 신채호(申采浩) 같은 한 인물의 저술을 연대순으로 놓고 읽어 볼 때 더욱 명료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추세는 1910년대에 더욱 뚜 렷하게 진전되어, 1910년대 말 경에 와서는 「기미독립선언문(己未獨 立宣言文)」처럼 의식적으로 장중한 문장을 쓰고자 하는 경우 이외에 는 순국문문체가 훨씬 자연스러운 일반형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런 변환기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1900년대 후기로부터 1910년대 동안 최남선(崔南善)⋅이광수(李光洙)가 담당한 선구적 역할은 종래 에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강조되어 온 감이 있으나 국문문체의 근대 적 전환을 뚜렷하게 하는 데 적잖이 기여한 점은 역시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소년(少年)》(1908), 《붉은 저고리》(1912), 《새별》(1913), 《아이들 보이》(1913), 《청춘(靑春)》(1914) 등 주로 낮은 연령층의 독 자를 대상으로 한 잡지와 기타 출판물을 통해 최남선은 이른바 시문 체(時文體)의 영역을 확대함으로써 한문역어체 문장으로부터 순국문 문체로의 전이를 촉진하였다. 그는 잡지 《새별》에서 <신문장(新文章) 건립운동(建立運動)>을 표방하여 매호마다 「읽어지」라는 난을 두고 새로운 문장의 모범을 제시했으며, 《청춘(靑春)》에서는 현상문예 응 모 난을 마련하고 <순수한 시문체(時文體)>로 쓸 것을 요청적 기준의
야 합내다
하나로 삼아 이광수와 함께 신문장 운동을 전개하였다.
아모라도 배화야 합내다 그런대 우리는 더욱 배화야 하며 더 배화
이제 우리는 다른 아모것보다도 더욱 배홈에서 못합니다 엇더케 말 하면 배홈 한아가 못하야 다 못하다 하오리다 우리의 배홈도 컷섯지마는 다른이 배홈에 더 나아감이 잇으며 우리 의 배호던 것도 조핫지마는 남의 배호는 것에 더 조흔것이 잇으니 이 는 얼마 아닌 동안 허고 아니함으로서 생긴 틀님이외다 우리들이 칩시다 배홈이 남만 못한 것을 치며 오늘에 가장 밧 븐 일이 배홈임을 치며 아울너 배홈에도 잘할 만함을 칩시다 우리
속에 가득한 배홈을 잘한 만흔 힘을 집어냅시다 <《청춘》 창간호 머리말, 1914>
다만 이들의 역할은 조선 후기 이래의 문체사적 흐름과 당대의 시 대적 요청을 명료하게 집약한 데서 가능했고 또 중요한 것이므로, 그 것을 갑작스럽게 출현할 개인적 창의의 소산인 듯이 과장하는 태도 는 지양되어야 마땅하다. 1920년대의 국어문체는 위에서 대강 요약해 본 문체사의 귀결인 동시에 오늘날까지의 현대국어 문체와 직접적으로 잇닿아 있는 출발 점이다. 한문역어체 문장의 영향력이 결정적으로 퇴조하고 고유한 국 문문체( 여기에는 한자를 섞어 쓴 현대국어 문장도 포함된다
)로써 일상적 기록과 문학 창작은 물론 기사(記事), 논설, 논증, 철학적 사변(思辨) 등 일체의 문자화된 언어행위가 이루어지는 국면이 이 무렵에 본격 화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이 새로운 국면은 오랜 기간에 걸친 문체사 의 성취 위에서 또한 우리가 만만치 않은 과제들에 당면해 있음을 인식하도록 요구하였다. 복잡하게 얽힌 경험, 감정, 느낌, 주장, 논 리, 사변(思辨)을 합당하고도 효과적인 문체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그 에 상응하는 언어재(言語財)와 소통규율 및 양식의 체계-끊임없이 살 아 움직이면서도 언어행위자들을 효율적인 이해의 지평에서 맺어 줄 만한 신뢰성을 지닌 사회⋅문화적 구조물로서의 체계-가 필요하다. 언어와 문체란 단순히 일정한 음운과 낱말들의 문법적 연결로 완성 되지 않고 이러한 소통의 구조 속에서 진정한 힘과 의미를 얻는다. 바로 그런 점에서 1920년대 이래의 우리 문체는 근대 국어문체의 공 동적 자산 위에서 새로운 경험, 사고, 감정 등을 어떻게 정확하고도 깊이 있게 드러내며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는가라는 역사적 과제에 직면하였던 것이다. 문학창작, 학문, 사실보고, 대중설득 등 언어행위 의 종류에 따른 문체의 분화와 개인적 문체의 개성이라는 것도 이와
같은 공동과제의 바탕 위에 함께 놓여 있는 것이며, 그 성과 역시 궁 극적으로는 여기에 되돌려지지 않을 수 없다.
(2) 한국(韓國) 시가(詩歌)의 율격(律格)
설명모형(說明模型)의 모색
시가는 산문보다 훨씬 두드러지게 정련된 소리의 질서를 활용한 다. 일정한 언어집단이 지닌 시적 전통과 원리를 파악하는 데는 이러 한 운율적 특성의 해명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 시가에 대한 근대적 연구가 시작된 이래 많은 학자들이 운율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특히 운율구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율격(律格) 원리를 밝히기에 힘썼던 것은 그런 점에서 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 과정에서 등장한 설명 모형은 퍽 다양해서 자수율론(字數律論, 음수율론), 강약률론(强 弱律論), 고저율론(高低律論), 장단율론(長短律論), 음보율론(音步律 論)이 차례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들 중 앞의 네 가지 설명 모형은 한국시가의 율격을 해명하기에 부적절함이 비판되고, ’70년대 이래로 는 음보율론의 타당성이 점차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그 이론적⋅실제 적 심화가 모색되고 있다. 여기에서 위의 여러 이론들을 낱낱이 따지 기란 지나치게 번거로운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중 가장 먼저 출 현해서 오랫동안 편의적으로 통용되어 온 자수율론의 한계를 요점적 으로 검증한 다음 음보율 이론의 시각에서 우리 시가의 율격 유형과
3)
원리 및 주요 형태를 살피고자 한다.
3) 이 자리의 논의에서 우리는 <운율(韻律) rhythm>과 <율격(律格) meter>이라는 두 용어를 구별하여 쓰기로 한다. 운율이란 <시에 있 어서 소리의 자질, 구성, 효과에 관한 일체의 현상>을 총칭하는 것으
글자 수를 헤아려서 우리 시가의 율격(律格) 정형(定型)과 원리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1920년대 후반에 나타난 이래 상당기간 동안 애 용되어 왔으나,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검증해 볼 때 그 설명력의 한 계는 쉽사리 드러난다. 이 방법의 적용 대상으로 즐겨 채택되었던 시 조의 정형 문제가 좋은 본보기이다. 자수율론자들이 말하는바 시조의 정형 내지 기준형을 음절수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3 4 4(3) 4 3 4 4(3) 43543
그러나 이렇게 구성된 음절수의 틀에 꼭 들어맞는 정형은 극히 적 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각각의 마디에 제시된 기준치가 실제 작 품과 부합하는 확률이 80% 정도로 높다 하더라도 이들이 모두 일치
할 가능성은 (80/100) 로서, 그 결과는 7%에 불과하다. 자수율론자 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제시한 실현 빈도에 따라 계산하면 위의 정형에 일치하는 평시조는 각각 대상 작품의 5%와 4%에 불과할 수 밖에 없음이 수학적으로 입증된다. 이처럼 실제의 작품과 자수율론
4)
의 <정형(定型)>이라는 것이 제대로 들어맞지 않을 때, 우리 시가가
로서, 율격을 비롯하여 운(韻)<자음운(子音韻)·모음운(母音韻)·두운(頭 韻)·요운(腰韻)·각운(脚韻)>, 음상(音相), 음성상징(音聲象徵) 등과 시행 의 배열·분단·결합 방식·소리의 암시성 등을 다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 용한다. 이들의 결합 양상, 의미, 효과를 전반적으로 다루는 연구 영 역을 운율론이라 한다. 이에 비해, 율격이란 <일정한 선형적(線型的) 구조를 갖추고 반복 지속되는 소리의 질서>로서, 운이나 음상, 음성상 징 등과는 달리 규칙제약적(規則制約的)인 속성을 띤다. 율격론은 이 와 같은 선형적 질서의 바탕에 놓여 있는 틀이 무엇이며, 그것은 어 떤 규칙을 거쳐 실현되고 또 변형되는가를 구명하는 연구 부문이다. 4)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증은 “김흥규, 「한국 시가 율격의 이론 Ⅰ 」, 민족문화연구13,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78, pp.100~103.” 참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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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성을 율격 형성의 기본요소로 보는 음보율론에 의해 우리 시가 의 율격을 설명해야 할 필요성이 확인된다.
율격(律格) 유형론(類型論)
음보율의 특징을 좀 더 명료하게 비교 이해하기 위하여 세계 여러 나라 시가의 율격 유형 분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래 도형 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각기 다른 언어에 근거한 여러
5)
시가들의 율격형은 크게 음량율격(音量律格)과 운소율격(韻素律格)의 두 갈래로 나뉜다.
음량율격이란 음량 배분의 규칙성이 율격 형성의 결정요인이 되는 율격이며, 운소율격은 일정한 상가음운(上加音韻, 운소, supra-segmental phoneme) 배열의 규칙성에 의존하는 율격이다. 후자의 경우 율격 형성에 관여하는 상가음운이 무엇인가에 따라 강
5) 율격유형을 분류하는 이 틀은 J. Lotz, 'Metric Typology', T.A. Sebeok ed., Style in Language(New York, London: M. I. T. Press and John Wiley, 1960)에서 제시한 바를 참조하되 몇 가지 근본적인 수정을 가한 것이다. 로츠는 음보율을 따로 설정하지 않았고 음량율격과 운소율격을 각각 단순율격, 복합율격으로 설명한 바 있다. 위의 분류로 써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율격들을 다 포괄할 수 있는지는 확인하기 어 려우나, 우리 시가의 율격유형과 원리를 다른 나라 문학의 경우와 비교 하여 설명하는 데는 일단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약률(强弱律, dynamic meter), 성조율(聲調律, tanal meter), 장단 율(長短律, durational meter)이 다시 구분된다. 먼저 영시(英詩)의 경우를 보면 다음과 같다.
Shĕ Wálks ∣ ĭn beáu ∣ tў, líke ∣ thĕ níght Ŏf clóud ∣ lĕss clímes ∣ ănd stár ∣ rў skíes; <Lord Byron, 'She Walks in Beauty'>
이것은 약강 4보격(iambic tetrameter)이라 불리는, 영시의 표준 적인 율격에 의한 시행이다. 설명의 편의를 위해 붙인 율독(律讀) 표 지가 선명하게 나타내듯이 이들 시행에서는 약음절( ̆표 부분)과 강음 절(ʹ표 부분)의 규칙적 연쇄에 의해 리듬이 형성된다. 영시 율격론에 서는 이러한 규칙성을 설명하기 위한 가설적 개념으로서 하나의 강 음절을 중심으로 하나 또는 두 개의 약음절이 결합된 단위를 <foot> 라 부른다. 그러나 영시의 율격에서 보다 우선적인 자질은 강약이며 <foot>는 그에 따라 종속적으로 결정된다. 바로 이 때문에 예스페르 센과 최근의 생성율격론자(生成律格論者)들은 영시에 있어서의 <foot>의 실재성을 부인하였다. 그런 점에서 영시의 율격은 강약 음 절 배분의 규칙성을 율격형성 원리로 삼는 운소율격에 속한다. 중국시(中國詩)는 이와 달리 성조(聲調)를 율격형성 자질로 삼는다. 평성(平聲)과 측성(仄聲)이 그것이다. 전통적 4성( 평⋅상⋅거⋅입성
) 구 분에서는 평성(平聲)이 율격상의 평성이고 상성(上聲)⋅거성(去聲)⋅ 입성(入聲)이 측성(仄聲)이다. 현대의 구분 방법으로는 1성(입성 제 외)이 평성(平聲)이고, 2, 3, 4성과 모든 입성(入聲)이 측성(仄聲)이 된다. 다음의 작품은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 「춘망(春望)」의 전반 부로서, 측성(仄聲)으로 시작하여(仄起式) 평측이 일정한 방식에 따라 교체됨으로써 소리의 선형적(線型的) 질서를 이루는 현상을 볼 수 있
國破山河在(국파산하재) : 仄仄平平仄 城春草木深(성춘초목심) : 平平仄仄平 感時花濺淚(감시화천루) : 仄平平仄仄 恨別鳥驚心(한별조경심) : 仄仄仄平平
한 시가의 율격이 어떤 형태와 원리를 지니게 되는가는 이처럼 해 당 언어의 자질에 근본적으로 의존한다. 강약, 고저, 장단 등으로써 우리 시가의 율격원리를 설명하려는 노력들이 한때의 시도에 그치고 만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시가의 율격은 음량율격의 범주에서 설명되어야 하며, 그 가운데서도 음절수의 규칙성에 제약되 는 프랑스시나 일본시(日本詩)와 달리 음보율(音步律)의 유형에 속하 는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일본의 대표적 정형시인 와카(和歌)는 5·7·5·7·7의 31음절로, 하이쿠(俳句)는 5·7·5의 17음절로 짜이며, 이 로부터의 이탈은 곧 변격 혹은 파격으로 간주된다. 앞서 본 우리 시 가의 특징을 이와 비교해 보면 음보율이라는 별도의 범주를 설정해 야 할 필요성은 명백하다. 로츠가 소개한 우랄어 계(系)의 율격 가운 데에 역시 음보율의 일종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앞 으로 검토해 보아야 할 과업이다.
한국(韓國) 시가(詩歌)와 음보율(音步律)
음보율이라는 이름에서 <음보(音步)>라는 용어 자체는 영시 등의 서구시 율격론으로부터 차용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문시될 수 있다. 그러나 음보 또는 소리마디라는 실질을 개념화하게 된 계기는 <foot>라는 말과 관련이 있다 하더라도, 음보 자체는 우리 시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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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리랑」>
정상적인 언어감각을 지닌 한국인들에게 위의 시행들은 /와 로 구분된 마디의 연쇄로 읽힌다. 여기에 /표로 구획된 소리마디가 곧 음보로서, 한국시가 율격의 기본 구성단위가 된다. 음보의 크기는 대 체로 2음절에서 5음절 정도이며, 3음절과 4음절로 된 음보가 가장 많다. 음보의 크기에 따라 출현 빈도가 평균치를 기준으로 하여 4음 절 음보를 평음보(平音步), 3음절이나 그 이하의 음보를 소음보(小音 步), 5음절이나 그 이상의 음보를 과음보(過音步, 과음절 음보)라 구 분하기도 한다. 율격의 기층단위인 음보가 아무 제한 없이 커지거나 지나치게 작아질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음량 분포의 영역이 한정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음보의 크기나 그 배열 체계를 지배하는 절대수치(絶對數値)의 규격은 한국 시가에 존재하지 않는다. 예 ①의 경우 제2, 3, 4행의 첫 음보가 모두 2음절 이지만 그 율격상의 무게는 3, 4음절 음보와 대등하다. <누항(陋巷) / 깁푼 곳의>는 2 / 4음절의 연쇄여서 음절수의 배분이 불균형한 듯 이 보여도, 이것을 <누항(陋巷) 깁 / 푼 곳의>로 율독(律讀)할 수는 없다. 우리 시가에 있어서 율격상의 분절은 통사적으로-혹은 최소한 도 형태소상으로-끊기지 않는 곳에 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은 예 ②에서도 마찬가지로서, 모든 음보는 일정한 율격 모형에 맞게 통 사적(統辭的) 경계(境界)가 적절히 배치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음절수가 반드시 같지 않은 음보들의 율격적 등가성(等價 性)-심리적⋅감각적으로 인정되는 등장성(等長性)-은 작은 음보들의 끝소리를 연장하거나 좀 더 큰 쉼을 덧붙임으로써 보장된다. 또 과음 절(過音節) 음보의 경우는 호흡이 약간 빨라지기도 한다. 예 ②에서 <어디로 / 가야만 / 좋을까 보냐>라는 시행을 음미해 보면 이를 확
인하게 된다. 한국 시가 율격의 세부적 특질을 밝히기 위해서는 물론 훨씬 더 자세한 논의가 필요하나, 이상의 개략적인 관찰만으로도 우리는 그것 이 음량율격(音量律格)의 계열 가운데서도 소리마디의 규칙성을 율격 형성원리로 삼는 음보율에 속함을 결론지을 수 있다.
주요(主要) 율격(律格) 형태(形態)
음보율의 원리 위에서 한국 시가가 기본으로 삼는 율격 형태로는 2음보격, 4음보격, 3음보격 세 가지가 있다. 이들은 각기 2개, 4개, 3개의 음보가 하나의 시행(詩行)을 이루어 거듭되는 구조를 가진다. 2음보격은 두 개의 음보로써 한 행을 구성해야 한다는 요건으로 인해 표현상의 제약이 많아 그다지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다. 빠른 동 작에 수반하여 불리는 노동요(勞動謠)에서 이 율격 형태가 더러 발견 된다.
응해야 응해야 잘도 한다 응해야 이 보리를 응해야 뚜디리고 응해야 어른들을 응해야 봉양할까 응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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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율독에서 제3음보의 뒤에 Ø으로 표시된 것은 시행의 끝에 따르는 호흡상의 여백이다. 이로 인해 3음보격은 대칭적으로 꽉 짜 인 4음보격과 달리 행의 끝에 보다 큰 정서적 환기(喚起)의 공간을 두게 된다. 선율적인 서정민요에 3음보격이 많다든가, 김소월(金素 月), 김영랑(金永郞) 같은 현대시인들이 이를 자주 활용하였다는 점 은 바로 여기에 까닭이 있는 듯하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4음보격 이 안정된 걸음의 율격이라면 3음보격은 비대칭적(非對稱的)인 구조 를 호흡상의 여백과 정서적 환기⋅암시로써 보완하면서 움직여 나아 가는 무용의 율격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른바 7·5조란 바로 이 3음보격의 일종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기의 창가(唱歌)에서 이 율격이 많이 쓰였고, 창가는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양식 악곡의 노래였기 때문에, 7·5조가 일본식 율조의 영향 으로 생겨난 것이 아닌가 하는 설이 한때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우 리 시가의 율격 형태를 찬찬히 살피지 않은 데서 나온 착오이다. 5·7·5(하이쿠, 俳句) 혹은 5·7·5·7·7(와카, 和歌)로 행 단위의 음절수 가 고정된 일본 시가 율격과 달리, 이른바 7·5조는 3·4·5 혹은 4·3·5 의 세 마디로 구성되는 방식이 우리의 전통적 3음보격과 다름이 없 다. 순수한 민요에서도 마찬가지 음절배분 방식에 의한 시행들이 적 잖이 발견된다. 그것이 19세기 말 이후 성행하게 된 데에는 물론 창 가라는 양식의 보급이 시대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하지만 한 문화 집단의 언어와 시적 전통에 뿌리를 둔 율격형태가 이질적인 율격형 으로 갑자기 바뀔 수는 없으며, 이른바 7·5조나 그 유사형인 8·5조, 6·5조라는 것들은 모두 3음보격이라는 점이 재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14세기 이전의 율격(律格) 문제
조선조 시대 및 그 이후의 시가를 주 자료로 하여 정리한 위의 기
본적 율격 형태들이 그 앞의 시대 동안 어떤 양상을 지녔는가는 아 직 선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 점은 고려 초기 이전의 단계에서 특 히 심하여, 우리말로 된 텍스트가 현전하지 않는 상고(上古) 시가와 고구려⋅백제 가요는 물론이고, 향가(鄕歌)의 경우에도 3음보격이 우 세하다는 설과 4음보격의 흔적이 더 강하다는 설이 공존하는 형편이 다. 지금까지의 향가 해독이 율격적 분석의 착실한 토대가 될 만한가 에도 의문이 남아 있는 형편이고 보면 이 시대의 우리시가 율격에 관한 이해는 조심스럽고도 참을성 있는 접근을 필요로 한다고 하겠 다. 15세기 국어는 확실한 성조(聲調) 체계를 갖추고 있다가 16세기 이후에 그것이 붕괴되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15세기 이전의 한국 시가가 혹시 성조율(聲調律)을 지니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가정도 연 구해 보아야 할 과제이다. 고려 시대 시가의 율격은 3음보격이 지배적이라는 설이 일반화되 어 있다. 악학궤범(樂學軌範)악장가사(樂章歌詞)시용향악보(時 用鄕樂譜)등의 문헌에 실린 고려가요를 보면 확실히 그러하다. 4음 보격은 경기체가(景幾體歌)의 후절(後節) 부분과 「만전춘별사(滿殿春 別詞)」에 보이는 정도여서, 고려 후기에 새로이 형성되기 시작한 형 태가 아닌가 하는 추론도 있었다. 그러나 현존하는 고려가요 작품이 매우 적을 뿐 아니라 그 모두가 궁중연악(宮中宴樂)에 실려 가창된 것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위의 설이 반드시 타당한가에 대해 상당 한 유보가 필요한 듯이 보인다. 세 종류의 악서(樂書)에 실려 있는 고려가요에서 3음보격이 지배적인 것은 앞서 지적한 바처럼 선율적 으로 발달한 민요와 창곡(唱曲)에 3음보격이 많이 쓰인 결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4음보격이 고려 후기에 와서야 출현했다고 한 다면 그 이전의 시가들은 3음보격에만 의존하였겠는가라는 의문도 이러한 이견을 다시금 주목하게 하는 요인이다. 아직 단정을 서두르 기는 어려우나, 고려시대의 율격 역시 형태별 분포 비율은 후대의 양
상과 다르더라도 2, 3, 4음보격의 기본형을 다 갖추고 있었으리라 볼 수는 없는 것일까?
전통적(傳統的) 율격(律格)과 현대시(現代詩)
이제까지 우리는 전통적 시가를 주요 대상으로 삼아 율격의 문제 를 논하였으나, 현대시라고 해서 이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1910년대 중엽부터 활발하게 나타난 근대 자유시는 물론 전통적 시 형(詩形)과 율격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표현 형태와 개성적 리듬을 추구하였다. 하지만 시적 표현의 깊이에 부합하는 소리의 질 서는 종래의 율격을 적절히 계승⋅변형⋅재창조함에 의하여 훌륭하 게 달성되기도 하였다. 그런 사례는 여러 시인들의 작품에서도 두루 발견되지만 특히 김소월(金素月), 김영랑(金永郞), 박목월(朴木月), 박 두진(朴斗鎭), 서정주(徐廷柱)의 시에서 자주 나타나며, 근간에는 신 경림(申庚林)의 시집 농무(農舞)이후 여러 젊은 시인들이 좀 더 의식적으로 전통적 율격의 활용에 눈을 돌리고 있다. 다음의 작품들 은 율독(律讀) 표지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3음보격을 채용하되 행 구 분을 다양하게 하여 쉼의 배분과 호흡의 흐름에 변화를 줌으로써 의
꽃이 피네
꽃이 피네
산(山)에 / 산(山)에 /
미구조를 훌륭하게 살려낸 예이다.
산에는 / 꽃 피네 /
갈 봄 / 여름 없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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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 뜻에서 그것은 수많은 현대인들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활용 해 왔고 또 앞으로도 시적 창조의 작업 속에 다양한 방식으로 통합 할 자산의 한 부분이라 할 것이다.
5. 문학비평(文學批評)
이해(理解)의 전제(前提)
문학에 관한 일체의 사유(思惟)과 논의(論議)를 총괄하여 문학비평 이라 규정할 때, 그것은 의식의 대상이 되는 문학행위 및 작품보다 시간적으로 뒤에 위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학이 원초 적인 수준의 감정 표현이나 집단 체험의 무의식적 표출이라는 수준 을 넘어 어느 정도의 자각적 요소를 지니게 되면서부터는 비평적 의 식이 창작과 수용의 불가결한 구성부분이 된다. 의식을 동반하지 않 는 실천이 있을 수 없듯이, 문학행위가 있는 곳에 그에 관한 의식 곧 비평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이다. 따라서 한 민 족의 문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작품을 중심으로 한 문학행위의 역 사적 전체상과 아울러 그 역동적(力動的) 정향(定向)을 반영하고 또 촉진하였던 비평의 실질을 해명하는데서 온전하여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문학의 여러 영역 중에서 비평 부문은 연 구의 진전이 부진한 편이며, 특히 19세기까지의 고전비평(古典批評) 이 더욱 그러하다. 물론 여기에는 그럴 만한 외적 요인의 제약이 있 었다. 대체로 보아 11세기 이전 즉 고려전기(高麗前期)까지의 비평 자료는 몇몇 단편(斷片)들만이 산발적으로 발견될 뿐이어서 당대의 문학의식을 충실히 파악하기에 미흡하며, 그 이후의 문헌들도 한문문 학에 관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문 제의 원인이 그로써 다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20세기 초를 전후한 시기의 문화적 격변을 체험하면서 충분한 비판적 조명의 기회를 거 치지도 못한 채 19세기까지의 사상 및 이념 체계에 대한 전면적 부 정의 시각이 압도하게 된 사실도 이에 중요한 관련이 있다. 식민지 지배의 문화 구조 속에서 타자중심적(他者中心的)인 외향화로 기울었
던 문학 동향은 이를 좀더 강화하면서 고전비평의 정당한 이해를 크 게 제약하였다. 이와 같은 의식의 편향은 우리 문학비평의 전체적 인식에 적지 않 은 왜곡을 초래하였고, 현대비평을 완전히 동떨어진 두 영역인 듯이 여기는 통념은 바로 그 산물이다. 아울러, 고전비평은 중국 문학비평 의 그늘 속에 있는 것으로, 현대비평은 서구 문학이론의 압도적인 영 향에 의지하여 발전할 수 있었던 것으로 가정하는 이식(移植)·영향(影 響) 사관(史觀)이 그 가운데서도 특히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 물론 우리의 문학비평이 20세기 초를 고비로 하여 심각한 갈등과 변모를 겪었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고전비평과 현대비평이 각기 동아시아 문학사상의 전통과 근대 서구의 문학론에 긴밀한 연 관을 가진다는 점도 마땅히 인정하여 그 관련상과 의미를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거대한 역사적 충격과 자기변혁의 체험을 거친 문학 에서 그에 상응하는 비평적 변모가 발견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각 시대마다의 대외적 교류와 접촉을 통해 비평의 시야가 전위(轉位) 혹은 확대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이 모든 사항에도 불구하고 문학비평이 한 역사집단의 문학행위를 지탱하는 의식의 표 현인 한, 거기에 자기동일성의 맥락이 존재하지 않는다든가 외래적 영향을 선택․흡수하는 주체의 요구와 논리가 소홀히 되어도 좋다는 논법은 있을 수 없다. 거듭 말하거니와 문학에 관한 사유와 논의의 총체로서의 비평은 모든 문학행위의 본질적 일부이며, 바로 그러한 시각에서 한국 문학 비평의 역사적 실체가 면밀하게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당위적 요청이 우리의 문학사상, 문학이론, 실제비평에 관한 연구성과로서 충실히 구현되려면 아직도 많은 부분작업과 재체 계화의 모색이 필요하다. 그러한 과제를 앞에 둔 국면에서 한국 문학 비평의 윤곽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분명히 무리한 일이다. 그러나 이 를 염두에 둔 잠정적 약도(略圖)로서 지금까지의 성과를 토대로 한국 문학비평의 역사적 전개 양상을 간략히 살피는 일은 그것대로의 작
은 효용을 가지리라 생각한다.
고대(古代)의 언어(言語)·문학(文學) 의식(意識)
우리 문학사의 초기 단계에 있어서의 문학의식이 어떠하였는가는 자료의 결핍으로 인해 알기 어려우나, 현전하는 고대가요(古代歌謠) 와 관련 설화에 의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그 윤곽을 더듬어 볼 수 있 다. 현전 작품 중 가장 오랜 시가인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와 「황 조가(黃鳥歌)」는 이미 서정시로서의 성격이 뚜렷한데, 여기에 딸린 기록들은 노래가 지어진 동기와 정황을 설명하는 가운데 시가(詩歌) 의 정서적 표현 기능에 대한 원초적 이해가 당시에 이미 형성되어 있음을 알려 준다. 즉, 남편을 잃은 여인이 애끊는 심정을 노래하고 이를 전해 들은 여인이 다시 그것을 음률에 실어 가창하였다든가, 사 랑하는 여인을 잃은 사나이(瑠璃王)가 가누기 어려운 쓸쓸함을 노래 로 읊조렸다는 이야기 속에 시가를 내면적 정서의 표출로 이해하는 관점이 아직 선명히 논리화되지 않은 대로 엿보인다. 한편, 「구지가 (龜旨歌)」와 그에 딸린 설화는 노래의 주술적(呪術的) 기능에 대한 믿음을 주요 인소로 포함하고 있어서, 고대인들이 주술적 제의(祭儀) 와 관련하여 시가의 신비적 힘을 믿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들 고대 시가는 모두 전설적 색채를 띤 것으로서 작품 내용상의 연대가 그 바탕에 깔린 시기관(詩歌觀)의 존재 시기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 만, 위에 언급한 정도의 원초적 문학인식은 대체로 고대국가 성립기 무렵에는 형성되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신라의 향가(鄕歌)에 이르러 우리문학은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다 양한 갈래를 갖추었고, 이에 관한 인식도 여러 방향으로 분화되었음 을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단편적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그 중에 서도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은 시가가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킬 만 한 힘을 가진다는 믿음에 관련된 자료들이다. 순정공(純貞公)이 해룡 (海龍)에게 부인을 빼앗기자 사람들을 모아 「해가(海歌)」를 부름으로
써 수로부인(水路夫人)을 되찾았다는 이야기는 노래의 문면부터가 「 구지가(龜旨歌)」의 경우를 연상케 하거니와, 융천사(融天師)가 지어 혜성(彗星)과 일본병(日本兵)을 물리쳤다는 「혜성가(彗星歌)」, 잣나무 가 시들도록 하는 공력(恐力)을 나타내어 효성왕(孝成王)을 뉘우치게 한 신충(信忠)의 「원가(怨歌)」, 역신(疫神)의 침입을 물리친 「차용가 ([處容歌」, 그리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었다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 소하여 자연의 변화를 일으킨 왕거인(王居仁) 이야기 등을 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이들 노래와 부대설화(附帶說話)는 모두 시가의 신비 로운 힘에 관한 것으로서 그 바탕에는 노래로써 표현된 강렬한 소망, 분노, 情志가 초자연적 감응의 힘을 발휘한다는 의식이 깔려 있다. 이와 같은 유형의 자료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것은 삼국유사가 신이(神異)한 일사(逸事)들을 많이 수록한 데에 기인하는 것으로, 당 시의 문학의식을 파악하는 데에는 시의 사회․정치적 효용 및 정서적 표달(表達) 기능에 관한 인식 또한 발달해 있었음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라의 제 3대 유리왕(儒理王)이 어진 정치를 펴서 민속이 歎 康해졌으므로 지었다는 [兜率歌]와 景德王이 德治의 이상을 담은 노 래로 忠談師에게 짓게 한 [安民歌]는 사회․정치적 이념의 표현과 효 용성을 중시하는 시가관 또한 이 시기에 공존하였음을 말해 준다. 한 편, [황조가]와 [공무도하가]에서 보였던 시의 정서적 표현 기능에 대 한 인식은 [祭亡妹歌] 기록의 경우처럼 내면의 고뇌와 종교적 발원이 결합되어 심원한 초자연적 감응력을 발휘하는 이야기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사람의 마음에 담긴 절실한 체험과 욕구가 언어로써 표출되 지 않을 수 없다는 필연성의 인식은 {삼국유사} 景文王 대목의 頭匠 이야기와 같은 상징적 설화를 낳았다. 한편, 한문의 사용 범위가 넓어지고 한문문학이 이루어지면서는 이에 관한 비평도 싹텄으리라 보인다. 특히 신라 下代에 이르러 六 頭品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漢學이 발달하면서 문학의식도 높은 수준 에 이르렀던 것 같다. 薛聰의 [花王戒]에 보이는 바, 寓言을 통해 王 者의 도리를 밝히고자 하는 작법 속에는 문자행위 내지 문학행위를
도덕적․정치적 이념과 결부시켜 파악하는 의식이 내재해 있다. 崔致 遠(857 ~ ?)은 <詩篇으로써 性을 기르는 자료를 삼고, 書卷으로써 몸을 세우는 근본을 삼는다><以詩篇爲養性之資, 以書卷爲立身之本> 라고 하여 심성의 도야와 수신에서 문학적 수련의 의의를 찾는 가치 론의 자취를 보여준다. 이로써 볼 때 이 시기의 문학론은 한문문학의 성취를 바탕으로 儒家的인 문학의식을 소화하면서 보다 정비된 논리 화의 단계로 나아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高麗時代의 批評
高麗가 건국되면서 우리문학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漢文文學의 융성이다. 신라 시대의 骨品制를 절폐한 고려 왕조는 중앙집권적 정 치 체계의 수립을 위한 방편으로 科擧制를 택하였고, 이에 따라 한 문문학이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당시의 과거는 詩․賦․頌․策을 과목으 로 하여 문학적 교양을 평가하는 制述業과 書․易․詩․春秋를 과목으로 하여 경학의 이해를 측정하는 明經業으로 나뉘어 있었던바, 이 중에 서도 제술업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따라서 詩文의 능력은 관 료로서의 입신과 처세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신라 말기까지 六頭品 을 중심으로 한 소수 지식층의 범위에서 성장해 온 한문문학은 이에 이르러 완전히 귀족․지배층의 문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문학론이 곧바로 한문문학에로만 집중되어 갔 던 것은 아니다. 均如(923~973)의 동시대인으로 [普賢十願歌]를 漢 譯한 崔行歸는 그 譯歌序에서 한시와 향가가 언어․형식에서는 전혀 다르지만 그 시적 깊이의 오묘함은 우열을 나눌 수 없이 대등한 가 치를 지닌다고 하여, 민족어로 된 시가에의 자긍을 명료하게 논술하 였다. 一然(1206~1289)은 향가의 심원한 호소력과 아름다움을 예찬 하여 詩․頌에 견주었다. 이와 같은 의식의 맥락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문학론이 한문문학에 치중되었다는 사실과 이에 따라 동아시아의 중 세적 보편문화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비평적 인식의 심화가 추구되었
다는 점은 물론 그것대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한문문학의 융성은 당연히 이에 상응하는 비평적 의식과 논의의 발달을 동반하였을 터이나 고려 前期의 문집과 비평 문헌은 전해지 는 것이 드물어서 소상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金富軾(1075~ 1151)의 경우로 미루어 본다면 옛 성현이 남긴 경전을 존중하며 典 實한 古文을 통해 儒家의 도리를 示顯하는 문학이야말로 최상의 가 치를 지닌다는 이념이 점차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않았던가 한 다. 앞서 언급한 최치원의 명제부터가 唐代 古文運動 이래 문학론의 유가적 이념성에 상당히 근접한 흔적을 보이지만, 김부식의 시대에는 그러한 방향으로의 진행이 좀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이 시기 의 문학의식은 騈文類의 장식적․審美的 문학을 배척하고 구문을 숭 상하여 유가이념에 부응할 것을 표방하면서도 이를 뒷받침하는 사상 적 토대는 아직 철저하지 못했다. 그가 말한 고문은 이념의 준거이기 보다는 문장의 典範이었다. 시풍이나 정치적 입장에서 김부식과 대립 적이었던 鄭知常(?~1135)은 또 다른 종류의 문학적 지향과 의식을 가지지 않았을까 추정되나, 아쉽게도 논의할 만한 자료가 보이지 않 는다. 이처럼 가치론상으로는 尙古的 典範性을 중시하면서도 文辭의 華 美만을 아울러 추구하던 문학의식은 武臣亂(1170)을 고비로 하여 새 로운 전환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 중에서도 우선적으로 주목할 현 상은 문인풍의 교양과 취미에 바탕하여 시․문의 세련을 중시하던 문 신 귀족들이 물러나고 문인․관료 사회의 인적 구성이 훨씬 다양해지 면서 문학적 기풍 또한 다변화하게 된 점이다. 문학적 교양과 재능이 곧 관인으로서의 입신에 직결되어 있던 중 세 사회에 있어서 한정된 수의 門閥 귀족이 권력을 장악한 상태란 곧 문학적 취향을 둘러싼 의견․논리의 분화가 현저하게 제약될 수밖 에 없음을 뜻한다. 문인 관료 사회에서 文權 이란 정치권력과 별개 의 것이 아니어서, 이에 대한 도전이나 현저한 이탈은 당사자의 사회 적 입지에 명백히 불리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볼 때 武臣執
權期에는 문벌 귀족 세력의 쇠퇴 혹은 몰락과 함께 새로운 士人層이 다수 등장함으로써 문학상의 지배적 권위가 약화되고 서로 다른 문 학의식 및 논리가 여기저기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었던 것 이다. 고려 후기의 비평이 전기에 비해 훨씬 풍부하다는 사실은 단순 히 문헌 전승 때문만이 아니라 이러한 배경적 요인에도 깊은 관련이 있는 듯하다. 고려 후기 비평의 활기는 다수의 문집을 통하여는 물론 문인 사회 의 활발한 작품론을 바탕으로 출현한 여러 종류의 詩話集 형태로도 표현되었다. {破閑集} {補閑集} {櫟翁稗說} 등의 시화집은 시 작품의 창작, 修辭, 品格, 가치 등에 관한 실제 비평적 의론과 일화들을 모 은 것으로서, 당시의 비평적 안목과 취미가 어떠하였는가를 파악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고려 후기 비평의 내용은 무척 다채로우나, 그 가운데서 다음의 두 가지 관심사 중의 어느 한편 또는 이들의 복합적 관련을 문제로 삼는 문학론들이 특히 주목된다. 그 하나는 시 창작에 있어서의 수사 적 방법에 관한 논의이며, 다른 하나는 전통적 관습․ 典例와 개인의 창조적 자발성의 관계의 몫이다. 전자에 대한 비평은 用事․琢句․對偶․ 聲律․比喩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여 어떻게 하면 섬세하고도 탁월한 언어를 구사하여 뛰어난 시를 쓸 수 있는가, 그리고 작품의 심미적 가치는 어떤 품격과 수사적 자질을 통하여 가늠될 수 있는가를 밝히 는 데 주력하였다. 후자에 관한 논의는 수사적 彫琢이 극단화되는 경향에 대한 비판적 인식으로부터 촉발되어, 시의 근원적 가치를 좌 우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심각한 성찰의 과제로 부각되었다. <用事>와 <新意>를 둘러싼 논란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 대표적 쟁론 이다. 李仁老(1152~1220)와 李奎報(1168~1241)를 각기 중심적 논자로 하는 用事論․新意論의 대립이란 물론 그들 사이의 차이를 銳角化하 여 집약한 결과이다. 즉, 시에 있어서의 새로운 意境의 필요성을 전 자가 부정하였다든가, 원숙한 언어적 세련과 조탁의 의의를 후자가
소홀히 여겼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상당한 정도의 공통 부분을 인 정하면서도 이들의 지향이 내포한 차이는 중시되지 않을 수 없다. 典 故이 능숙한 운용과 언어적 세련을 중시한 이인로류의 시론이 보다 회고적․보수적인 성향을 띤 데 비하여, <氣는 天에 근본한 것이나, 배워서 얻을 수 없다>(氣本乎天, 不何學得)고 주장하면서 시의식의 창출을 역설한 이규보의 비평은 고려 후기 新進士人層의 새로운 시 의식을 촉구하는 논리로서의 성격을 뚜렷이 지니고 잇기 때문이다. 수사적 세련에 선행하는 주체적 근거의 강조는 이규보와 같은 때의 인물인 林椿에게서도 발견된다. 崔滋(1188~1260)는 이규보의 입장 을 수용하여 비교적 온건한 절충론을 제시하였으나, 氣․意에 관한 논 의 속에 性情이 개념을 도입하여 후일의 性理學的 문학론에 이어지 는 실마리를 보였다. 고려 말에 와서는 性理學의 수용이 문학비평에도 파급되어 道學的 문학론이 출현하였다. 李齊賢(1287~1367)은 고문을 문장의 전법인 동시에 <性命道德>의 표현으로 파악하고, 문학은 인륜이 도를 추구 하는 방편으로서 존재 의의를 가진다고 했다. 이러한 관점은 성리학 이 널리 뿌리내림과 함께 점차 확대․정제되어, 李穡(1328~1396) 및 그 門下의 인물들에 이어짐으로써 고려 말, 조선 초기 문학론의 근 간으로 자리잡았다.
朝鮮前期의 批評
고려 말에 기본적 윤곽이 형성된 성리학적 문학관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은 朝鮮 왕조에 들어와서 더욱 심화되었다. 그 대표적 인물로 鄭道傳(? ~ 1398)을 들 수 있다. 이제현과 이색의 관점을 계승한 그는 문학을 <載道之器>로 보고, 詩書禮樂이 가르침에 충실 한 시 ․ 문을 가장 높은 이상으로 삼았다. 그에 의하면 사람은 나날 의 모든 일(處事接物)에 있어서 마땅히 그 道를 다해야 하는 바, 이 를 인식 ․ 실천할 수 있는 義理가 본래적으로 사람에게 갖추어져 있
다. 따라서 문학은 이에 충실함으로써 우주와 자연의 형이상학적 원 리와 인륜적 질서를 통합한 가치체계 속에서 문학의 당위적 지표를 파악하고자 하는 이론이다. 이와 같은 문학론이 지배적인 위치를 유지하던 한편에서는 詞章之 文의 의의를 중시하는 입장도 공존하였다. 道學과 함께 詞章도 소홀 히 할 수 없다는 權近(1352~1409)이 견해에도 이미 그러한 실마리 가 보이거니와, 왕조 건국 이후 사대부 사회가 집권 사대부층과 在 地 士林으로 분화되면서 전자 가운데서 사장 중시론이 좀더 뚜렷한 모습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물론 사장지문을 중시한 문인들 역시 儒 者였으므로 載道之文의 기본 이념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 나 문학의 형식적 측면과 典例 審美性을 중시하는 그들의 취향은 비 평의 실체적 관심에서 상이한 성향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러한 흐름을 대표할 만한 인물인 徐居正(1420~1488)은 20여 년 동안 文權을 잡으면서 당대의 文風을 주도하고 {東文選}을 편찬했 으며 본격적 시화집인 {東人詩話}를 저술하였다. 그는 道가 文에 선 행한다는 전통적 명제를 수용하면서도 문학은 經國의 盛業에 빛나는 文彩를 더하여 불후의 명성으로써 후세에 남기는 것이라고 보았다. 여기에는 文이 아니면 道가 드러내어질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典故의 능숙한 사용과 언어적 세련을 중요시한 수사론은 이러한 문 학관의 소산이다. 일반적으로 詞章派라 불리는 위의 조류가 관료적 문인들의 세계에 터를 두었던 반면에 재지 사림 쪽에서는 理氣․心性에 관한 성리학설 과 근본주의적 정치철학이 발달하면서 道學的 문학이론이 심화되었 다. 16세기 李滉(1501~1570)과 李珥(1536~1584)를 그 대표적 인 물로 꼽을 수 있다. 이들은 <載道之文> <道本文末>을 근본 명제로 삼는 점에서는 정도전 등 조선 초기의 논자들과 비슷하나, 문학의 의 의를 經世的인 것에서보다는 性情의 도야라는 내면적 효용의 측면에 서 강조한 점이 현저하게 다르다. 예컨대, 이황은 <문학을 어찌 소홀 히 할 수 있겠는가? 글을 배우는 것 또한 마음을 바르게 하기 위함
이다>라고 하였으며, 이이는 <시는 비록 공부하는 이가 즐겨할 만한 것은 아니나, 이로써 성정을 읊조리고 淸和함을 펼쳐 통하여 마음 속의 더러운 찌꺼기를 씻어낼 수 있으니, 또한 存心省察에 一助가 된다>고 했다. 이이의 [贈崔岦之序]는 이러한 문학의식의 이론적 구조를 가장 잘 선명하게 집약한 문장이다. 여기에서 그는 <無極太極--天地--心-- 氣--聲>이라는 발생론적 체계와 <有用之聲--美聲--實聲--善嗚>이 라는 가치론적 구분을 연결하여 우주 만물과 인간 존재에 대한 성리 학적 인식의 구도 속에서 문학의 속성과 지표를 밝히고자 했다. 위의 논리적 연쇄 끝에 있는 <善嗚> 즉 이상적인 문학은 우주적 생성․운 행의 근원인 無極太極이 사람의 心을 통하여 구현된 것이라 함이 그 요지이다. 이와 같은 문학의식은 당연히 심미적․사장파적 성향에 부정의 태 도를 띠었고, 平淡한 가운데서 맑고 드높은 심성이 함양을 추구하여 天人合一의 경지에 이르는 문학을 이상적인 것이라 여기는 비평론으 로 전개되었다. 그것은 中小 地主로서의 기반을 토대로 鄕里에 정착 한 재지 사대부층의 금욕적․내면주의적 미의식의 논리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6세기 비평의 주류가 이처럼 사림파 문학의 이론 구조를 정교하 게 구축하기에 이른 단계에서 그 규범의 틀을 벗어나는 새로운 비평 적 의식이 許筠(1569~1618)을 통해 제출되었다. 그는 시를 진실한 情의 표현이라 보아, 종래의 도학적 문학론자들이 주장한 바 <性情 之情>의 윤리적 표준과는 다른 길을 택하였으며, 시적 체험의 진정 성보다 외형적 수식에 치중하는 경향 또한 비판하였다. 아울러 그는 문장의 전범을 先秦․兩漢에서 구하는 尙古主義도 부정함으로써 조선 후기 문학비평에로 이어지는 새로운 관점을 열었다. 그의 [文說]과 [詩辨]은 모든 시대의 문학이 각기 그 시대마다의 개성과 특징을 가 지는 것이므로, 시인․작가는 어떤 기성의 전범에 예속되어 모방만을 일삼을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창조적 개성에 근거해야 한다는
이론을 폈다. 이러한 견해는 고려 중기의 이규보와 18세기의 朴趾源․ 李鈺을 잇는 맥락의 한가운데에 놓인다고 할 것이다.
朝鮮後期의 批評
조선 왕조의 중세적 질서가 심각한 모순에 당면한 17세기 이래의 문학비평에서는 종래의 지배적 흐름을 벗어난 反正統的 조류가 다양 하게 확산되었다. 그 전반적 내용은 아직 충분히 검증되어 있지 않지 만, 정통적 성리학으로부터 이탈한 外學에의 관심이 문학비평에 직접 간접으로 작용한 사실을 우선 주목할 만하다. 張維(1587~1638), 洪 萬宗(1643~1725)이 각각 陽明學과 道家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 서 脫程朱學的 문학의식을 보인 점이 그 본보기이다. 장유는 도학적 규준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문학의 심미적 가치를 존중하였으나, 사장파와는 달리 그것을 문학의 외형에서 구하지 않고 작품 자체의 내면적 가치와 아름다움에 주목하였다. 홍만종은 문학의 본질과 가치를 논하면서 윤리 규범이나 외형적 수식을 모두 넘어선 <天得>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그는 역대의 시화 중에서 순수한 시화 만을 집성하여 {詩話叢林}을 편찬함으로써 실제비평으로서의 시화가 정리되도록 했으며, 스스로도 {小華詩評}을 저술하여 우리 한시에 대 한 史的 서술과 비평을 전개하였다. 金萬重(1635~1720)은 홍만종과 더불어 국문문학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파악하여 사대부층 일각의 의 식 변화를 보여주었다. 특히, 한문을 빌어 쓴 詩․賦로 우리의 경험과 느낌을 표현한다는 것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내는 일과 마찬 가지라고 한 김만중의 견해는 오랜 동안 한문문학에 매몰되었던 사 대부적 태도에 반성을 촉구하면서 다음 단계의 국문문학 인식 발전 에 선구가 되었다. 한편 신분제의 동요와 함께 평민층의 문학 활동이 활발하여지자 시조집과 委巷人들의 한시집이 엮어지고 국문문학․市井文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전개된 점도 17세기 후반 이후 비평의 중요 현상이
다. 18세기 초에 {靑丘永言}(1728)을 엮어낸 金天澤, 이에 序跋을 쓴 鄭潤卿․磨獄老樵, {海東歌謠}의 편찬자인 金壽長(1690~?), 그리고 [大東風謠序]를 쓴 洪大容(1731~1783) 등은 시조를 風雅 즉 詩經에 다 비기면서, 민간의 진솔한 언어로 갖가지 경험․감정을 노래한 시조 야말로 본원적 진정성과 실감을 갖춘 문학이라고 보았다. 이와 같은 의식의 대두는 한문문학에 대하여 국문문학의 가치를, 상층문학에 대 하여 하층문학의 존재 의의를 천명한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사상 적 진전의 의미를 가진다. 또한 委巷人들의 시집 편찬 취지를 밝히 는 글들에서 洪世泰(1653~1725), 高時彦(1671~1734) 등 위항인 자 신과 일부 사대부 문인들에 의해서는 위항문학이 가식되지 아니한 성정과 체험의 진실한 표현으로서 학사․대부들의 그것보다 고귀하다 는 논리가 전개되었다. 도덕 규범에의 예속이나 수사적 세련보다 정 감의 자연스러운 발현을 중시한 이들의 문학관은 이 시기 문학사의 탈중세적 지향이 명료한 의식형태를 띠기 시작한 징표로 이해된다. 도학적 문학론이 요구하는 내면성에의 침잠이나 擬古的 문학관의 尙古主義로부터 벗어난 문학을 당대적 경험의 충실한 표현으로 재인 식하려는 노력은 진보적인 의식을 지닌 사대부 문인들에게서도 나타 났다. 그 중에서 특히 주목되는 인물이 朴趾源과 李鈺이다. 박지원 (1737~1783)은 문학의 형식과 실질 양면을 규제하는 古文의 초시대 적 典範性을 부인함으로써 변화, 현실성, 개성의 이념을 도입하였다. 그에 의하면 구문이란 옛적에 있어서의 일상적 언어(常語)를 기록한 것으로서, 참다운 문학의 길은 이미 화석화되어 버린 옛말과 경험을 답습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진정한 의미를 음미하면서 자신의 시대와 경험에 충실하는 데 있을 따름이다(楚亭集序, 綠天館集序). 아울러, 그는 중국적 典例에의 추종을 비판하고 우리대로의 풍토와 역사․문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시 즉 <朝鮮風>을 적극적으로 평가하였으며(嬰處 稿序), 개념적․直敍的인 언어의 한계를 넘어 현실의 복잡한 양상을 우회적으로 혹은 반어적으로 조명하는 소설의 가치에도 주목하였다. 李鈺(1760년대-1800년대)은 가히 혁명적이라할 만한 비평문인 [俚
諺引]에서 이러한 방향의 논리를 더욱 진전시켜, 하늘 아래 동일한 사물이 있을 수 없듯이 모든 시대와 지역은 각기의 절실한 요구에 따른 문학을 가지기 마련이라는 철저한 개별성의 선언으로써 중세적 보편과 尙古의 이념을 부정하였다. 그는 작품과 비평 양면을 통해 정통적 사대부문학의 가치관과 주제를 거부하고 市井의 세계에서 살 아가는 이들의 일상적 삶을 중시하였다. 세상 만물을 살피는 데는 사 람을 보는 것만한 일이 없으며 사람을 보는 데는 남녀의 정을 살피 는 것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다고 한 데서 그의 시각이 선명하게 드 러난다. 이처럼 한문문학의 오랜 관습과 禮敎主義의 통념을 타파하 고 새로운 문학세계의 당위적 근거를 제시한 그의 논리는 아마도 조 선 후기의 문학론이 나아간 반중세적 의식의 가장 날카로운 극점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經世的 實學者인 丁若鏞(1762-1836)은 이들과 또 다른 방향에서 조선 전기의 내면지향적 시의식을 극복하는 현실주의 시론을 추구하 였다. 그는 문학이 그보다 더 우월한 상위의 가치에 종속한다는 <載 道之文>의 기본 전제를 계승하였으되, 그 상위의 가치 즉 道에 관한 구체적 파악에서 지향을 달리하였다. 정약용이 파악한 道는 16세기 의 성리학자들이 생각한 바 存心養性의 내면지향적 가치보다 구체적 인 삶과 사회․정치적 차원에 있어서의 정의를 추구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傷時憤俗>하는 비판적 기능을 중심으로 하 여 시경을 해석하고 많은 사회시편을 썼으며, 문학이란 작자의 내면 에 갖추어진 진지한 志意가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드러나는 사 회적 言述의 산물이라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조선 후기 비평의 다양한 조류 속에는 이밖에도 더 밝혀져야 할 문제와 인물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 앞으로의 풍부한 성과가 기대된 다. 轉換期의 批評
조선 후기 비평의 추이는 문학․예술 전반의 흐름과 더불어 脫中世 的인 지향성을 뚜렷이 지닌 것이었으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일대 변화의 시대에 부응하여 새로운 문학 조류를 제어․인도 할 만큼의 통합성과 사회적 기반을 확보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 다. 이러한 상태에서 구질서의 급격한 붕괴와 서구 문학의 충격을 체 험하면서 문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구성이 모색되던 1900년대 이 래의 비평을 편의적으로 현대비평이라 통칭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현대비평은 극히 어려운 자기 갱신의 과제를 안고 굴곡이 극심한 역 사를 거쳐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끔 조건지어졌다고 하겠다. 더우기 식민지 지배하의 특장적 현상들 --- 지난날의 문화에 대한 자기 모 멸적 부정, 서구 문명에의 일방적 경사, 보편성․예술성과 현실성․역사 성에 관한 지향의 분열 등은 이 시대의 비평이 주체적 근거 위에서 문학․인간․사회의 유기적인 연관을 파악하고 논리화하는 데에 심각한 제약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국 현대비평의 진체적 흐름을 파악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이런 여러 문제들이 어떻게 갈등하고 결합되면서 남의 논리가 아닌 <나와 우리의 논리>로 진전되었는가를 해명하는 일이다. 서구 문학론의 수용 양상에 일방적으로 집착하여 현대비평의 주요 국면들을 설명하려 했던 소박한 발전론은 그런 뜻 에서도 이제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된다. 현대비평의 첫 단계는 愛國啓蒙期 혹은 開化期라 불리는 계몽적 이념의 시대이다. 이 시기에 출현한 신소설, 역사․전기류의 작가들과 진보적 儒學 지식인들은 당대의 상황적 요구에 부응하는 문학의 효 용을 역설하였다. 朴殷植의 {瑞土逢國誌} 서문 [論國運關文學], 申采 浩의 [天喜堂詩話], 李海朝의 {花의 血} 서문, 安國善의 {共進會} 후 기, 그리고 <<大韓每日申報>>의 논설(1908.11.18) 등 이 무렵의 대 표적 비평문장들 모두가 문학의 도덕적․사회적․정치적 효용성을 主旨 로 삼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들에 의하면 문학(특히 소설)은 비근하 고도 구체적인 경험에 호소함으로써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깨우 치는 데 무엇보다 큰 효과를 발휘한다. 따라서 이를 통해 인심을 맑
게 하고 풍속을 개량하며 사회․정치적 자각을 고무할 수 있다는 것이 다. 이러한 논리는 문학의 효용성을 중시한 유가적 관점이 역사 전환 기의 절실한 요구와 결합한 결과이다. 창가와 신체시에 관하여는 이 와 같은 논의가 별로 보이지 않으나, 그 바탕에 놓인 의식은 동일하 였으리라 추정된다. 1910년의 국권 상실 이후 日帝에 의해 문학의 이념성이 억압되면 서 위의 조류는 잠복하고 李光洙(1982-?)는 [文學이란 何오](1916)에 서 인간의 정신이 知․情․意라는 세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문학 은 이에서 정의 요구를 표현․충족하는 데 소임이 있다는 주정주의 이 론을 주창하였다. 전통적인 유교문화에 대해 격렬한 거부의 시각을 지닌 그는 19세기까지의 문학과 비평이 인간의 지(理智)만을 존중하 고 정을 낮게 봄으로써 잘못에 빠졌다고 하고, 유교적 도덕주의에 대 한 反命題로서 일종의 情緖的 生命主義를 새로운 문학의 지표로 설 정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개화기의 문학론의 도덕적․사회적 효용 지향은 부정되고, 대신 문학의 정서적 가치와 탈도덕적 자유 및 개성 이 중요한 것으로 부각되었다(1920년대 초기 이후에 와서 그가 보인 상이한 입장은 물론 이와 별도로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몇 편의 문학론을 쓴 申采浩(1880-1936)는 이와 상반되는 입장에서 문학의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고 당대의 문 학이 현실도피적 환각의 탐닉에 기울어지는 경향을 비판하였다. 이미 [天喜堂詩話](1909)에서 <東國詩界 革命>의 목표 아래 애국적 정치 의식과 강건한 시정신의 합일을 제창한 바도 있는 그는 [近今小說 著者의 注意] [浪客의 新年 漫筆] 등의 時評을 통해 예술주의의 문예 이든 인도주의의 문예이든 그 시대의 현실이 안고 있는 절실한 문제 로부터 떠나서는 존재의미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입장은 유가 문학관의 전통에 연결되어 있으면서 그것을 당대의 현실적 문제들과 통합함으로써 문학의 사회적 소임을 중시하는 비평으로 재구성한 것 이었다.
1920, 30년대의 批評
이와 같은 상이한 지향의 대립은 1920년대 초기의 낭만적․唯美的 문학관과 사회주의 비평 사이의 갈등으로 이월되었다. 이광수의 초기 논설에서 예비적 단계를 거친 주정주의적 문학관은 1920년대 초기의 문학운동을 거치면서 朴英熙, 黃錫禹, 金億,朴鍾和 등에 의해 낭만 적․唯美主義的 문학론으로 심화되었다. 그리고, 1920년대 중엽에 이 를 비판하며 등장한 新傾向派--카프 계열의 비평가들은 문학의 사회 성과 투쟁적 기능을 중시하였다. 초기에는 金基鎭․박영희에 의해, 1920년대 말 이후에는 林和 등에 의해 주도된 프로 문학비평은 이전의 문학을 부르조아적 사치와 허 위의식의 산물이라 비판하고, 모든 예술행위의 계급성을 전제로 하여 계급해방을 위한 문학의 소임을 비평적 관심의 핵심으로 삼았다. 한 편 이광수, 廉想涉, 김억 등은 각기 다른 입장에서 문학의 예술적 자 율성, 혹은 계급에 우선하는 민족의 일체성을 논거로 하여 이에 대응 하는 논리를 모색하였으며, 별 소득은 없었지만 梁柱東 등에 의해 절충론이 시도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 비평은 문학의 본질․기 능 및 평가 규준에 관한 논쟁을 겪음으로써 본격적인 현대비평으로 서의 문제의식에로 접근해 갔다. 그러나 당시의 비평 자체는 관념적 논리에 지배된 나머지, 대립의 양면에서 모두 문학 인식의 구체성이 부족한 도식주의나 인상주의에 빠진 예가 많았다. 김기진의 평론 [文藝時評](1926)을 도화선으로 하여 일어난 <내용 -형식 논쟁>은 이 시기의 가장 날카로운 비평적 쟁점과 갈등을 보여 준다. 이 논쟁에서 김기진은 문학이 관념(투쟁의식)만으로 성립할 수 없고, 마땅히 내용에 상응하는 예술적 육체를 갖추어야 한다는 입장 을 취했다. 반면에 박영희는 일정한 과도기에서는 내용과 의식이 형 식상의 고려로부터 독립하여 선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논쟁은 상황적 요인에 의해 후자의 정당성이 카프 안에서 공식화되는 것으 로 매듭지어졌으나 그 근본적 숙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1930년대의
창작방법론 논쟁,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논쟁 등으로 이월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이른바 <외부적 정세의 악화>와 함께 프로 비평의 흐름이 현저하게 쇠퇴되고, 朴龍喆․金煥泰․金文輯 등 문 학의 자율성․심미성과 내적 세련을 중시하는 비평가들의 활동이 확대 되었다. 이들의 관점은 1920년대 초기의 낭만적․유미적 문학론을 계 승하여 발전시킨 것이면서, 1920년대 중엽 이래의 프로 비평이 보여 온 이념적 도식주의에 대한 반작용의 의미를 띤 것이기도 했다. 그들 은 문학이 다른 어떤 것에도 예속되지 않는 자립적 정신활동의 산물 이며, 따라서 외재적 규준을 통해 문학에 목적성을 부과하고 그에 맞 추어 작품을 해석 평가하는 것은 비평의 마땅한 방법이 아니라고 보 았다. 그 대신 이들은 시인․작가의 개성, 창조의 신비, 정련된 언어, 그리고 감각적 경험의 아름다움 등을 중시하였다. 이 점에서 그들은 대체로 심미주의적 비평의 계열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특히 김환태)은 문학의 예술성에 대한 개인적 체험과 감응의 소중함 을 강조한 나머지 흔히 印象主義的 비평으로 기울어졌고, 가치평가 의 문제에 있어서는 프로 비평의 敎條的 객관주의 치우치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이들보다 조금 늦게 등장하여 1930년대 중엽부터 중요한 활동을 보인 崔載瑞, 金起林은 현대 영미비평의 경향을 소개․원용하면서 김 환태류의 주관주의적 경향과 프로 비평의 도식성을 극복하고자 했다. 특히 최재서는 문학을 사회적 리얼리티의 탐구이자 가치추구의 행위 라 보고 비평의 판단적 직능을 중시하여 문학의 예술적 가치와 사회 적․윤리적 가치를 통합하는 이론 구성을 모색하였다. 김기림은 시인 이자 시론가로서 활동하면서, 일반적 체계를 지향하는 이론보다는 모 더니즘․이미지즘 운동의 제창과 시에 관한 실제비평적 작업에 치중하 였다. 일제 지배세력에 의한 1930년대 초의 탄압으로 카프가 해산된 이 후에도 프로 문학의 기본 입장을 유지하던 임화․金南天 등은 1930년 대 중엽 이래 예전의 교조적 이념주의를 지양하는 비평 활동을 모색
하였다. 그 내용은 매우 다양하나 임화의 낭만주의․리얼리즘론, 新文 學史 연구 등과, 김남천의 장편소설론, 그리고 많은 작가․비평가 들 이 참여한 大衆化論爭이 특히 주목된다. 이들을 포괄한 1930년대 비 평의 상세한 내용을 구명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소대야 할 문제들이 많고, 그 일부는 활발한 논의에 불편이 따르는 형편이다. 그러나, 어 떤 입장에서 보든 이 시기가 한국 현대비평사에서 가장 다채로운 논 쟁과 모색의 연대였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광복(光復) 이후의 민족주의(民族主義) 논쟁(論爭)과 비평 (批評)
모든 논리가 日帝 군국주의의 폭력 아래 압살되었던 1940년대 전 반을 지나 光復을 맞이한 문학비평은 당시의 모든 사회․문화 영역이 그러하였듯이 치열한 이념적 갈등에 부딪혔다. 뿐만 아니라 비평은 그 자체의 논쟁적 속성으로 인하여 가장 날카로운 대립의 칼날이 되 었다. 이 시기의 가장 큰 비평적 쟁점은 해방된 조국의 터전에 절실히 요망되는 民族文學의 지표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있었다. 통념적 이해는 이에 대한 당시의 견해들을 우익(민족주의 진영)과 좌익(사회 주의 진영)의 두 갈래로 양분하나, 사태가 그렇게 단순하였던 것만은 아니다. 이른바 민족주의 진영의 논객들 가운데는 예술의 순수성․보 편성에 충실하는 것만이 민족문학의 길이라는 입장을 지닌 이들이 있었던 한편, 민족이 당면한 對內外的 모순의 극복을 위해 문학이 적극적인 현실의식과 통합의 전망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 논자들도 있었다. 사회주의 계열의 논자들 사이에서는 도 계급혁명과 민족혁명 의 관계, 우선순위의 해석과 민족문학의 담당 주체 파악 문제를 놓고 적어도 두 갈래 이상의 상이한 전망이 갈등하였다. 대립이 날카로우 면 날카로운 대로 그 지양을 통하여 보다 나은 결실을 기대함직하였 던 이 쟁론은 그러나 南北 분단이 固着되면서 정치․사회적 조건에
의하여 소멸되었다. 그 결과 우익 진영의 민족문학론에서는 문학의 순수성․보편성을 강조하는 주장이 정통의 자리를 차지했고, 들리는 바에 의하면 북한 쪽에서는 민족혁명과 포용적 민족문학의 우선적 필요성을 주장하던 논자들이 다른 정치적 동기와 함께 숙청되었다고 한다. 1950년대에는 이와 같은 외적 요인에 의한 비평 집단의 단순화와 6․25이후의 지적 황폐화로 인하여 일부 실제비평적 성과를 제외하고 는 뚜렷한 진전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에 비하여 1960년대는 4․ 19의 역사적 체험을 바탕으로 그간의 문화상황과 현실에 대한 반성 적 인식이 확대되면서 비평 또한 얼마간의 활기를 되찾게 된 시기라 할 수 있다. 英美 新批評의 수용과 더불어 형식주의적 비평이 등장 하고, 문학의 사회적 의미와 기능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떠오르면서 순수-참여 논쟁 등의 형태로 비평적 쟁점이 날카롭게 부각된 것을 특히 주목할 만하다. 1960년대 말 경에는 서구문학과 그 이론에의 편향에 대한 懷疑的 관점이 일어나고 전통의 정당한 인식․계승․극복 을 둘러싼 문학사적 논의가 계속됨으로써 문학비평의 주체적 定向에 관한 물음이 또 하나의 과제로 제출되었다. 1970년대의 비평은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 위에 사회․정치적 상황 의 긴장이 가중됨으로써 비평적 전제와 이론구조의 차이가 좀더 날 카롭게 부각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문학을 하나의 심미적 우주 내 지 닫혀진 체계로 보는가 혹은 현실공간을 향해 열려 있는 의미체로 보는가 하는 논란은 이미 훨씬 전부터 있어 온 것이었지만, 열려 있 는 의미체로서의 논란은 문학을 이해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시각의 차이가 나타났다. 70년대 문학비평의 주요 조류를 결집하고 움직이 는 데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던 두 계간지 <<創作과 批評>>과 <<文 學과 知性>>의 특징적인 성격은 바로 이 점에서 당대의 비평이 모색 하였던 바를 대표할 만하다. 小市民文學論, 市民文學論, 리얼리즘 논 쟁, 민족문학론, 민중문학론 등 광범한 진폭을 가진 이 시기의 주제 들과 그 밖의 많은 비평적 성취를 여기에 대강이나마 소개한다는 것
은 어려운 일이며, 또 굳이 어설픈 요약의 필요를 느끼지 않을 만큼 그 대부분의 문제는 우리가 속한 이 연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점은 1970년대에 있어서의 풍부한 비평적 활력과 성취는 평온한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극도의 현실적 긴장 속에서 문학과 사회 및 인간 존재의 있어야 할 모습을 해명하려는 실천적 모색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리고 그것은 우리가 속한 오늘의 연대에도 기본적으로 연속되는 책 무라 할 것이다.
6. 문학작품의 유통(流通)과 서책(書冊)
문학적 소통의 한편에는 창작자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수용자(受 用者)가 있다. 문학행위는 그 형태가 아무리 복잡하다 해도 이 둘 사 이에 작품이 전달되어야 성립한다. 작품의 전달 유통이란 우리가 평 소에 별로 관심두지 않는 사항이지만, 문학이 사람살이의 한 부분으 로 출현한 이래 그 물질적 사회적 형태를 다양하게 바꾸면서 문학의 성격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쳐 왔다. 이와 같은 중요성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한국문학의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문학작품의 유통과 상업적 출판이 급속하게 발달하기 시작한 시기인 조선 후기의 국문문학에 다소 큰 비중을 두어 그 전달구조의 주요 양상을 개관하고자 한다. 물론 여기에서 다루는 내용은 극히 소략하고도 불균형한 것일 수밖 에 없으나, 이를 통해 우리는 문학 현상의 사회적 토대와 구조를 파 악하고 작품 주변의 제반 연관사항들이 어떻게 문학내부의 자질과 결합하는가를 이해하는 데에 얼마간의 기본적 도움을 얻을 수 있으 리라 생각한다. 문학작품이 전달⋅유통⋅전승(傳承)되는 방식은 역사적으로 무척 다양하였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그것을 다음의 표와 같이 간략하게 정리해 볼 수 있다.
구비문학(口碑文學)의 구연(口演)⋅전승(傳承)
구연과 기억에 의하여 전승⋅유통되는 구비문학은 문학적 전달의 원초적 형태이다. 뿐만 아니라 기록문학의 발달 이후에도 기층적인 문학의 존재 방식으로서 그것이 오랫동안 광범한 분포를 유지하였음 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고대의 서사시(敍事詩), 주가(呪歌), 서정가 요, 고려속요, 각 시대의 수많은 민요와 설화, 잡가(雜歌), 무가(巫 歌), 판소리, 민속극(民俗劇) 등이 다 이에 속한다. 또한 향가(鄕歌) 가운데의 4구체는 구비시가(口碑詩歌) 형식이었거나, 적어도 그러한 부류의 작품들이 우세하였으리라 짐작된다. 시조와 가사는 기록 전승 과 구비 전승의 상호보완적 작용에 의하여 전달⋅유통되었다. 야담 (野談)은 성격이 극히 다양하여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으나 그 상당 부분이 시정에 떠돌던 이야기의 문헌정착 및 윤색⋅개작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이처럼 오랜 기간에 걸쳐 다채로운 양식들이 의존해 온 문학적 구 연의 여러 형태를 이 자리에서 자세히 설명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모든 구비문학에 공통되는 전승상의 기본 특징을 잠깐 언급해 두는 것은 쓸모가 없지 않을 듯하다. 우리는 그것을 현장성(現場性)⋅유동 성(流動性)의 두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구비문학은 음성언어의 형태로 성립하고 전달되므로 구연자-혹은 놀이꾼-와 그의 구연⋅놀이 행위를 보고 듣는 사람들이 한데 모인 현장 속에 존재한다. 다시 말하여 구비문학 작품은 구연하는 이의 입 에서 나오자마자 현장의 시간을 통과하여 사라지는 것이다. 구연자나 청중은 물론 다음 기회에 그것을 재생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구 연은 앞의 구연과 조금이라도 달라지게 마련이므로 엄밀하게 말해서 완전히 동일한 재생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차이를 일으키는 데는 작 품 내용만이 아니라 구연에 따르는 여러 상황적 요소가 작용한다. 구 연의 시간, 장소, 동기, 참석자들의 관계, 분위기, 구연자의 어조⋅표 정⋅몸짓, 듣는 이들의 반응 등이 그것이다. 기본적으로 같은 작품이 라 해도 이런 요소들이 달라짐에 따라 그 세부적 모습이 같을 수 없 으므로 현장성은 구비문학의 생명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기록에 의해 정착되지 않고 현장에서의 구연을 통해 끊임없이 의 식적⋅무의식적인 변형을 입기 때문에 구비문학은 불가피하게 유동 성을 띤다. 따라서 구비문학에서는 기록문학과 같은 의미의 단일한 작품 내지 원본이라는 개념이 성립하기 어렵다. 윤선도(尹善道)의 「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와 채만식(蔡萬植)의 「태평천하(太平天下)」는 엄밀히 검증된 텍스트를 놓고 이것이 바로 그 작품이라 할 수 있지 만, 「오누이 장사(壯士) 힘내기」 전설이라든가 「진주(晋州) 낭군」 같 은 민요는 서로 조금씩 다른 종류의 구연이 다 나름의 개별적 작품- 각편(各篇), version-이면서 동일 작품-유형(類型), type-의 변이형 으로 인정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야기꾼은 그의 개인적 취향이나 형 편에 따라 설화의 어떤 내용을 좀 더 실감나게 손질하여 구연할 수 있으며, 때로는 그 일부를 생략 혹은 변경한다. 모내기할 때 부르는
「모노래」는 전승적 가사를 이용하지만, 선창자(先唱者)의 재간과 그 때그때의 분위기에 따라 새로운 노래토막이 끼어들거나 일부가 즉흥 적으로 개작 또는 창작되는 일도 흔하다. 이와 같은 유동 과정이 오 래 계속되면서 구비문학에는 새로운 요소들이 적층(積層)되고, 완만 한 가운데서도 끊임없는 변화가 계속된다. 이러한 공통적 특성은 물론 모든 구비문학 양식에 똑같은 정도로 해당하는 것이 아니어서, 문학행위의 종류 및 담당층에 따라 적지 않 은 차이가 발견된다. 여기에서 구비전승을 비직업적 구연자에 의한 것과 직업적⋅전문적인 구연자에 의한 것으로 나누어 살펴야 할 필 요가 등장한다. 비직업적 구연자란 각자의 생업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생활상의 자 연스러운 계기에 따라 이야기와 노래를 주고받는 일반 민중들을 말 한다. 이들 가운데도 이야기나 노래에 특별한 재주가 있어서 남다른 대접을 받는 사람이 마을마다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들까지를 포 함하여 비직업적 구연자들은 노래⋅이야기 등의 구연 행위가 자신의 사회적 위치나 물질적 보상에 뚜렷하고도 지속적인 관련을 맺지 않 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대부분의 민요와 설화는 이들에 의 해 구연⋅유통되었다. 직업적 구연자란 특정한 구비문학의 구연이 그의 직업-또는 직업 적 행위의 중요부분-이거나, 반직업적(半職業的)으로 전문화된 일인 사람을 가리킨다. 굿을 하면서 무가(巫歌)를 부르는 무당, 판소리를 창하는 가객(歌客, 소리광대), 잡가를 부르는 삼패(三牌)⋅사계(四契) 축 같은 집단들이 전형적인 예이다. 풍부한 입담과 이야깃거리를 밑 천삼아 각지를 돌아다녔다는 이야기 장수도 여기에 속하고, 길거리에 서 대중을 상대로 소설책 읽는 것으로 생업을 삼은 전기수(傳奇叟)는 기록문학의 구연 전달이라는 독특한 위치에서 활동한 존재로 볼 수 있다. 고려속요를 궁중악가(宮中樂歌)로 전승하여 후일에 정착되게
한 당시의 악공(樂工)과 기녀(妓女)들도 전문적 구연자의 부류에 속 한다. 문헌적 증거는 없으나 고조선(古朝鮮)⋅부여(扶餘)⋅고구려(高 句麗) 등 고대국가의 시조신화(始祖神話)가 당시의 국가적 제전(祭典) 에서 불린 건국서사시였다면, 이를 가창한 인물도 특별한 직능을 부 여받고 이에 상응하는 수련을 거친 구연자였으리라 보아 마땅하다. 이러한 전문적 구연자들 역시 구비문학의 일반적 속성에 제약받음 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 정도와 방식은 구연 행위의 종류에 따라 크 게 다르다. 비직업적 구연자들의 경우에는 상황에 따른 구연상의 변 화에 의도적 요인 못지않게 기억의 부실이라든가 적절한 표현 언어 구사의 불충분 같은 소극적 요인이 많이 작용한다. 그러나 숙달된 전 문적 구연자들에게는 그러한 일이 극히 적다. 그 대신 그들은 자신의 기량을 돋보이게 한다든가 구연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고 청중의 반 응을 유도하기 위한 적극적 변이를 더 많이 추구한다. 하지만 여기에도 두 가지 상이한 방향이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구연 행위의 기능⋅성격에 따라 어떤 양식은 가능한 한 전승적 원형 에 충실할 것이 기대되는 반면에, 다른 양식에서는 상당한 정도로 융 통성 있는 변형 및 개작이 허용되는 사실이 그것이다. 역대 왕조의 궁중 의식(儀式) 및 연악(宴樂)에 쓰인 노래라든가 종 교적 제전에서 불린 주가(呪歌)는 전자의 부류에 속한다. 고대의 건 국서사시가 존재하였다면 그것 역시 이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들 은 당대의 구연자와 수용자 모두에게 재미나는 문학행위로서보다는 존엄한 이념⋅자취와 기원(祈願)의 표현으로 인식되었으며, 구연자는 독립적 예인(藝人)이 아니라 특정한 직능을 위임받은 존재이기 때문 에 전승의 원형을 함부로 바꾸지 못한다. 이런 종류의 구비문학에서 는 사회구조 자체의 커다란 변혁이 없는 한 전승의 변화는 전혀 없 거나 극히 완만하게 진행되는 것이 보통이다. 반면에 판소리 가객과 이야기 장수 같은 경우는 개인적 창의에 의
한 구연상의 변이가 얼마든지 가능하고, 그것이 남다른 우수함을 가 지기만 하면 적극적으로 평가된다. 그들이 구연하는 작품에는 신성한 원형이나 꼭 지켜야 할 공식적 규준이 있지 않다. 구연 행위에 대한 보상도 일정한 제도적 직능-사제(司祭), 궁중(宮中)의 악공(樂工) 등- 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청중의 수효와 평가 정도에 따라 유 동적이다. 따라서 이 부류의 전문적 구연자들은 보다 풍부한 기량과 문서(레퍼토리) 및 개성적 자질을 갖추기에 힘써야 했고, 그 결과 구 연 방법과 텍스트의 발달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서사무가(敍事巫 歌)의 경우에는 사정이 조금 복잡한데, 중부 지방 이남에 주로 분포 된 세습무(世襲巫)들을 중심으로 말한다면 원래는 전자의 관념에 입 각하여 구연하다가 조선 후기 무렵에 와서 차차 굿의 세속성(世俗性) ⋅연행성(演行性)이 확대되면서 후자에 더 가까워지는 현상이 나타났 다고 간추릴 수 있다. 이상에서 극히 간략하게 더듬어 본 정도만으로도 드러나듯이 문학 의 구비 전승, 유통이란 그 세부적 형태와 성격이 대체적인 짐작보다 훨씬 다양하다. 구비문학 자체의 이해를 위해서는 물론 구비문학과 기록문학 사이의 여러 관련 양상을 밝히는 데에도 이에 대한 고려가 긴요하다.
한문문학(漢文文學)⋅향찰문학(鄕札文學)의 유통(流通)
기록문학은 또 기록문학대로 서책(書冊)의 저술⋅편찬과 제작⋅보 급⋅유통에 관여하는 여러 사항이 이리저리 얽히어 다양한 양상을 보여준다. 사본(寫本)과 인본(印本)으로 대별되는 서책의 기본 형태 가운데서 선행한 것은 당연히 사본이었고, 문자사적(文字史的) 요인 으로 인해 국어문학보다는 한문문학이 먼저 기록에 의한 전달의 주 된 대상으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고대사회에 있어서 한문을 능숙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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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역사적 선집으로서, 총 154권 45책의 규모로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의 문집으로서 현재까지 전해지는 사본 (寫本)⋅인본(印本)의 수효를 어림잡으면 약 6000여 종이 된다고 하 는데, 문학작품의 교류와 보존에 대한 조선조 문인지식층의 관심이 어떠하였던가를 이로써도 짐작할 만하다. 문장과 학문을 숭상한 유교 국가의 문치주의적(文治主義的) 기풍 속에서 문학은 사대부(士大夫)의 필수적 교양이자 입신의 수단인 동 시에 후세에 길이 이름을 남기는 최상의 방편이기도 했다. 사대부들 은 동몽선습(童蒙先習)소학(小學)정도를 익히는 어린 나이부터 간단한 시문을 짓기 시작하여 평생토록 자신의 재능과 생활 형편이 허락하는 대로 한시와 각종 산문을 썼다. 이 과정에서 스승이나 친지 에게 글을 보내고 이를 품평, 수정, 정리하는 일이 일상사의 한 부분 으로 행해졌음은 물론이다. 이미 간행된 문집은 물론 생존 인물의 작 품도 이러한 교유의 다면적 얽힘을 통해 무척 빠르게 전파되었다. 문 집은 본인의 사후(死後)에나 간행되기 때문에 당시에는 직접적인 만 남이나 전문(傳聞)⋅서신 이외에는 별다른 작품 유통 방법이 없었다. 그런 시대에 생존 인물의 작품이 오래지 않아 널리 알려질 수 있다 는 것은 신기한 일처럼 보이지만, 사대부 문인 세계의 문학적 소통은 이런 일이 충분히 가능할 만큼 활발하였다. 이렇게 해서 축적된 개개 인의 작품은 본인이나 제자⋅후손들에 의해 문집으로 엮어지고, 형편 이 허락하기만 하면 인본(印本)으로 간행되었다.
국문문학(國文文學)의 사본(寫本) 유통(流通)과 세책업(貰冊業), 전기수(傳奇叟)
한편 훈민정음 창제(1446)에 의해 문자화의 기틀을 마련한 국문문 학은 조선 전기 동안에는 일부 관찬서적(官撰書籍)과 소수 문집에 삽
입된 것을 제외하고는 주로 사본으로써 유통되었다. 사본의 유통은 당연히 전사(轉寫)에 의한 서책의 증식을 수반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개인적 친분관계를 통한 대여(貸與)와 비직업적 전사(轉寫)만이 있었 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한글 해독층이 확대되고 옛이야 기, 흥미로운 실기(實記)⋅견문(見聞), 소설 등 보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유형의 문학이 발달하면서 국문문학의 전파⋅유 통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어느 정도 직업화된 낭독자와 세책행위자(貰冊行爲者)의 출현이 그것이다. 이들의 활동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17세기경부터의 일이 아닌가 한다. 직업적 낭독자라는 것도 마찬가지겠지만 일정한 대가를 받고 읽을 거리를 빌려주거나 파는 사람이 처음부터 그것을 전업(專業)으로 하 지 않았으리라는 점은 의심할 바 없다. 아마도 사가(士家)와 중인층 집안의 부녀자들에게 필요한 신변용품을 공급하던 방물장수 같은 이 들이 개인적인 부탁에 의하여 이야기책 등의 읽을거리를 구하여 주 다가 의도적으로 그럴 만한 작품을 전사하여 빌려주거나 팔기에 이 르렀을 것이다. 구수훈(具樹勳)의 이순록(二旬錄)에 의하면 18세기 초기 무렵에는 여장(女裝)을 한 상민(常民)이 양반 부녀자들에게 방 물장수 노릇을 하면서 패설(稗說, 소설)도 읽어 주다가 간음을 하기 까지 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한글을 해득하는 부녀자들은 남의 낭독 에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읽는 기회도 가졌을 터이므로 방물장수 등에게 책을 빌리거나 사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17세기 인물인 김 만중(金萬重, 1637~1692)은 유배를 당한 뒤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 해 「구운몽(九雲夢)」을 지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의 어머니 역시 이렇게 유통되는 이야기책을 통해 소설에 대한 어느 정도의 경험과 흥미를 가지고 있었으리라 보아야 할 것이다. 초기부터 상당 기간 동안 집집을 왕래하는 장사치들의 부수적 일 거리였던 세책업(貰冊業)은 도시적 생활공간의 형성과 독자층 증가에
힘입어 18세기 말 혹은 19세기의 어느 시기에 일정한 점포를 차린 세책가(貰冊家)로 발전하였다. 이 발전은 두 가지 중요한 의의를 가 진다. 첫째는 전업화(專業化)된 세책가에 의해 많은 작품들이 수집⋅ 보존⋅개작⋅유통될 수 있었다는 점이며, 둘째는 시정의 평민 특히 남성 독자들이 소설을 접할 기회가 확대됨으로써 그들의 관심에 부 합하는 부류의 작품들이 발달하는 데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점이다. 아울러 출입하는 독자를 지속적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세책가의 생리 는 뒤에 언급하는 바와 같이 방각본(坊刻本)과 대조적인 방향의 소설 유통과 발달에도 뚜렷한 작용을 가하였다. 1890년부터 1892년까지 우리나라에 머물렀던 프랑스 외교관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 의 한국서지(韓國書誌, Bibliographie Coréenne) 서설(序說) 중 다음 대목은, 비록 늦은 시기의 견문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세책가가 어떠하였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값나가는 책들을 주로 취급하는 서울 중심가의 서점에서만 책을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세책가(貰冊家)도 상당한 수가 있는바, 여기에는 특히 소설이나 창가책 같은 범속한 책들의 인본(印本) 또는 사본(寫本) 이 갖추어져 있고, 대개는 한글로 쓴 것들이다. 이런 집의 책은 서점에 서 팔고 있는 것보다도 더 잘 간직되고 또 종이도 더 좋은데다가 인쇄 한 경우가 많다. 책을 빌리는 값은 꽤 싸서 하루 한 권에 10분의 1, 2 문(文) 정도이며, 때로는 현금이나 물건을-이를테면 돈으로 몇 냥, 물 건으로 화로나 냄비 따위를-보증으로 받는 일도 있다. 이러한 장사가 서울엔 전에 아주 많았었으나 이젠 퍽 희귀해졌다고 한국 사람들이 내 게 말해줬는데, 시골에, 즉 송도(松都), 대구, 평양 같은 대도회(大都會) 에도 세책가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보지를 못했다. 이 직업은 이익은 박하지만 점잖은 일로 인정이 되어 있는 까닭에 영락(零落)한 양반들이 자진해서 택하는 생업이 되었다. <박상규 역>
위의 기록이 일부 시사하듯이 당시의 세책가에서는 소설 이외에 사본(寫本) 가집(歌集)과 가사(歌辭), 야담(野談), 실기(實記) 등 여타 의 문학작품도 함께 취급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있으나 아직까 지 확실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소설 낭독 역시 이른 단계에서는 방물장수 등의 세책(貰冊)과 병행 하여 이집 저집 오가거나, 잘 읽는다고 소문난 이가 때때로 불려 다 니는 형태가 주종을 이루다가 길거리에 판을 벌이는 직업적 낭독자 가 출현하였다. 이들은 전기수(傳奇叟)라고 불렸는데, 그 낭독의 재능 과 형태가 매우 특이하게 직업화되어 있었다. 18세기 중엽쯤의 일을 언급한 한 기록에 의하면 소설 낭독을 듣던 사나이가 작중 내용에 흥분한 나머지 낭독자를 칼로 찔러 죽였다고 하니, 소설의 절실한 호 소력과 아울러 낭독자의 재능도 탁월하였음을 알겠다. 조수삼(趙秀 三, 1762~1849)의 추재기이(秋齋記異)에 나오는 다음 기록은 따 로 설명할 필요 없이 전기수의 활동 양상을 생생히 보여준다. 이 이 야기 속의 청중들은 대개 시정에서 생활하는 평민 남성들이었을 것 이다.
전기수(傳奇叟)는 동대문 밖에서 사는데, 「숙향전(淑香傳)」 「소대성 전(蘇大成傳)」 「심청전(沈淸傳)」 「설인귀전(薛仁貴傳)」 같은 언과패설 (諺課稗說)을 구송(口誦)한다. 매달 초하루에는 첫째 다리 아래 자리 잡고, 이튿날은 둘째 다리 아래, 사흘째는 배오개(梨峴)에, 나흘째는 교 동(校洞) 어구에, 닷새째는 대사동(大寺洞) 어구에, 엿새째는 종루(鍾 樓) 앞에 하는 식으로 옮겨 앉는다. 읽는 것이 뛰어나서 구경꾼이 가득 모이는데, 가장 중요하고도 들을 만한 대목에 이르면 뚝 그치고 읽지 않는다. 그 다음 대목을 들으려면 다투어 돈을 던져야 하니, 이것이 돈 받는 방법이라 한다.
방각본(坊刻本) 출판(出版)의 성립(成立)
이처럼 사본의 세책, 판매와 낭독을 통해 소설 인구가 늘어나고 작품 또한 질적⋅양적인 발달을 이룩해 가는 과정에서 좀 더 진보된 유통 방식인 방간본(坊刊本) 소설이 나타났다. 방간본이란 민간 출판 업자가 영리를 목적으로 출판⋅판매하는 책으로서, 자본과 기술상의 문제 때문에 대개 목판(木板) 인쇄 방식을 썼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방각본(坊刻本)이라 불린다. 방각본의 주요 내용은 한학(漢學)⋅유학 (儒學)의 기본 서적-천자문(千字文)⋅옥편(玉篇)⋅동몽선습(童蒙先習) ⋅사략(史略)⋅통감(通鑑)⋅사서삼경(四書三經)⋅소학(小學)⋅운서(韻 書) 등, 실용서(實用書)-유서필지(儒胥必知)⋅사례편람(四禮便覽)⋅간 독(簡牘)⋅천기대요(天機大要) 등과 각종 의약서(醫藥書), 그리고 소 설로 3대분되는데, 이들 전체의 발달 배경을 간략히 설명한 뒤 소설 출판의 양상을 다루기로 한다. 방각본 출판의 성립 시기에 관하여는 고려 숙종(肅宗, 재위 109 5~1105) 때부터 있었다는 설, 조선조 중종(中宗, 재위 1506~1544) 때부터라는 설 등이 있으나, 이러한 기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본 격화는 임진왜란(壬辰倭亂)⋅병자호란(丙子胡亂)을 거친 17세기 초기 이후로 추정된다. 이 무렵 방각본 출판이 본격화된 데는 다음 세 가 지 조건이 작용하였다.
i) 서책에 대한 수요의 현저한 증가 ii) 민간 상업자본의 발달 iii) 공인(工人)들의, 관영수공업체제(官營手工業體制)로부터의 이탈
이 가운데서 i)의 조건은 신분제적 질서의 이완(弛緩)과 평민층의 사회경제적 성장이라는 배경 요인에 의해 근본 바탕이 형성되고,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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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 방각본 출판의 기술적 토대를 제공했다. 새로운 상품경제 체제 속 에서 공인들이 취할 수 있었던 선택 유형은 두 가지로 대별된다. 그 하나는 소규모의 자영수공업(自營手工業)을 경영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일정한 생산자본 아래서 보수를 받고 일하는 고공(雇工)이 되 는 것이다. 서적의 출판은 생산과정이 복잡하고 많은 인력⋅기능이 필요하며 투입된 비용의 회전 기간이 비교적 길기 때문에 방각본 출 판에 관련된 공인들은 대개 고공으로 활동하였으리라 추정된다. 이처럼 수요⋅자본⋅기술의 일정한 성숙 위에서 본격화된 방각본 출판은 전국적으로 여러 지역에서 이루어졌으나, 주요 출판지는 서울 ⋅전주(全州, 완산)⋅안성(安城)⋅태인(泰仁)⋅나주(羅州)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서 19세기까지 지속적으로 출판이 성행한 곳은 서울⋅전주⋅안성의 세 지역이다. 방각본 출판에 적합한 지역은 판목 (板木)과 용지의 공급이 원활하고 상업교역이 편리하며 독자의 수요 가 많은 곳이라야 하겠는데, 이들 출판지는 그런 점에서 유리한 점이 있었던 듯하다. 방각본의 품질은 물론 관판본(官版本), 서원판본(書院版本), 사가판 본(私家版本)에 비하여 떨어진다. 국가적 목적이라든가 불사(佛事)나 서원(書院), 가문의 영예를 위하여 만드는 책들은 많은 비용과 정선 된 기술⋅자재를 투입하지만, 방각본은 그렇게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 다. 이로 인해 방각본은 책의 크기-판형이 큰 책은 더 큰 판목과 많 은 용지를 필요로 하기에 책의 생산비를 높인다, 판각(板刻)의 정밀 도, 용지의 질 등에서 썩 장중하거나 우수하지 못한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주로 책의 외형에 관련된 미흡함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의 문학사에서 방각본이 담당한 역할은 막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종래에 소수의 지배층에 독점되다시피 했던 문자문화를 훨씬 넓은 영역에로 개방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는 한편, 독서 인구의 확대와 함께 탈중세적(脫中世的) 욕구와 의식의 확산에도 적잖이 기여하였다. 이
중에서 후자의 측면에 특히 중요한 몫을 담당한 종목이 소설 방각본 이다.
방각본(坊刻本) 소설(小說)의 발달
방각본 소설은 18세기 초 무렵부터 출간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지 금까지 확인된 가장 이른 자료는 정규복(丁奎福) 교수 소장(所藏)의 을사본(乙巳本) 「구운몽」(九雲夢, 한문본)인데, 그 간기(刊記)에 <숭정 후(崇禎後) 재도을사(再度乙巳) 금성오문(金城午門) 신간(新刊)>이라 찍혀 있다. 이는 곧 위의 책이 1725년에 나주(羅州) 남문(南門) 부근 의 민간출판업소에서 나왔음을 말하는 것이다. 소설은 한학서와 실용 서보다는 늦게 방각본화하였을 터이므로 을사본 「구운몽」이 최초의 것이 아니라면 방각본 소설이 처음 출현한 시기는 17세기 말쯤에서 1725년 사이의 어느 때가 될 것이다. 한글소설 방각본은 이보다 늦게 나왔으리라 짐작되나, 그 시기가 언제쯤인가는 아직 불분명하다. 방각본에는 언제 어디서 간행되었는 가를 밝히는 간기(刊記)가 없는 것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특히 한글 소설들이 더욱 그러하다. 또 기록되어 있는 간기도 대개 <을사(乙 巳)> <병오(丙午)> <무신(戊申)> 등과 같이 육갑법(六甲法)으로 연대 를 나타냈기 때문에 절대 연대 판정이 60년 혹은 120년을 오르내릴 수 있다. 현존하는 한글소설 방각본 가운데 가장 이른 때의 것이 아 닌가 짐작되는 별춘향전(別春香傳, 병오판 열녀춘향수절가의 선행 본)과 삼설기(三說記, 무신십일월 유동 신간)의 간행 시기를 각각 1846(병오)년 직전과 1848(무신)년으로 내려잡아야 하는가에 대해 회 의적인 견해들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문본 방각본 소설이 18 세기 초(늦어도 1725년)에 나온 점을 고려하면 그보다 시장성이 못 하지 않은 일부 인기 종목의 한글소설이 적어도 반세기 이내에 나오
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한글소설 방각본은 18세기 초에서 중엽 사이의 어느 때에 성립했으리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소설을 비난한 「영처잡고(嬰 處雜稿)」라는 글 가운데 몇몇 시골 훈장들이 소설을 지어 판각해 가 지고는 책가게에 팔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역시 18세기에 방 각본 소설이 존재하였다는 증거가 된다. 이렇게 18세기에 발달하기 시작한 방각본 소설은 19세기에 와서 크게 성행하여 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20세기 초기 이후의 약 반세기 동안 수많은 자료가 일실된 때문에 그 수효를 정확하게 헤아릴 수는 없으나, 고소설판각본전집(古小說板刻本全集, 김동욱 편)으로 영인되어 있는 것만도 179종이나 되는 만큼, 출간된 방각본 소설의 총수는 이보다 훨씬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이들의 대부분은 한글소설이며, 서울(경판), 전주(완판), 안성(안성판)이 주요 출판지이 다. 경판은 대개 흘림체의 잔글씨를 썼고, 축약본(縮約本)이 많으며, 내용과 문장을 비교적 세련되게 다듬은 경향을 보인다. 완판은 읽기 쉬운 해서체(諧書體)의 글씨를 썼고 내용이 보다 풍부한 경우가 많 다. 안성판은 경판과 체재⋅내용이 비슷하여 그 아류적(亞流的) 성격 이 짙다. 방각본 소설의 독자층은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겠으나 사가 (士家)와 중인층의 부녀자 및 평민층 남성들이 주요 독자였으리라 믿 어진다. 이들은 물론 방각본을 사서 읽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 람으로부터 빌리거나 상호 교환하여 읽고 다시 필사하며 가까운 이 들이 모인 자리에서 낭독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작품의 유통에 관 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작품의 문면과 내용에 의식적⋅무의식적인 변 이가 가해져서 새로운 이본이 파생되고, 때로는 작품의 성격을 크게 바꿀 정도의 개작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방각본 소설은 그 자체가 처음에는 특정 사본의 판각에서 출발한 것이거니와, 방각본으로의 성
립 이후에도 사본 전승과의 다양한 연관을 형성하면서 새로운 판본 에로의 전이를 계속하였다. 「춘향전(春香傳)」 「홍길동전(洪吉童傳)」 「 심청전(沈淸傳)」 「조웅전(趙雄傳)」 등 인기 있는 작품들의 경우 각각 10여 종에서 7, 8종에 이르는 방각본과 대개 이보다 많은 수효의 사 본들이 공존하는 것도 여기에 원인이 있다. 한편 18, 19세기에는 소설 창작 및 개작에 종사하는 얼마간 전문 화된 작자들이 출현하였으며, 특히 방각본 출판과 세책업(貰冊業)이 현저하게 발달한 19세기에 그 활동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일부 특이한 창작 의욕을 가진 사대부들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몰락 양반과 중인층에서 나왔으리라 추정된다. 그들은 물론 오늘날의 소설가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당대에는 국문소설이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는 이야기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 창작이나 개작을 특정 작가의 독립적 예술행위로 보는 관념이 희박 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상인이 출판의 주체-판주(板主)-가 되는 방각본 소설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판주(板主) 혹은 세책가의 요청 에 따라 소설을 새로 짓거나 개작⋅윤색(潤色)⋅축약⋅부연하는 작자 들은 그들의 일에 따라 대가를 받는 직능인으로서의 성격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울러 양반 출신 작자의 경우에는 소설 창작이 자신 의 이름을 떳떳이 드러낼 만큼 명예로운 일이 아니라는 유교적 가치 의식에도 제약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독립된 작가로서의 자기인식 이 엷다 해도 소설의 창작⋅개작은 근본적으로 인물과 사건의 구조 속에 자신의 세계관을 투영하고 잠재적 독자층의 욕구를 반영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이들 작자층에 대한 연구는 여러 측면에서 좀 더 심화될 필요가 있다. 조선 후기 소설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면서 그들 나름의 작가적 성 장을 이룩해 나아간 직업적 작가층의 계보는 일부 신소설(新小說) 작 가에까지 이어지는 듯하다. 신소설 작가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소설
적 기량을 지닌 인물인 이해조(李海朝)가 구소설 즉 고전소설의 창작 경력에 기반을 둔 인물이라는 점이 그 단적인 증거이다. 소설을 보급함으로써 이윤을 얻는다는 점에서 방각본 출판업자와 세책가는 기본적으로 동일하지만 그 영업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소 설의 발달과 분화에 끼친 영향도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방각본 출판에서는 소수의 작품으로 많은 판매부수를 올리는 것이 단연코 유리하다. 즉 하나의 책으로 500부를 파는 것이 세 권의 책으로 합 계 500부를 파는 것보다 이윤이 높은 것이다. 따라서 방각본 출판업 자는 찍어내는 작품 수를 무작정 늘리기보다는 가능한 한 시장성이 좋은 작품의 집중적 출판을 즐겨하였다. 아울러 작품의 규모가 클 경 우에는 그만큼 책값이 비싸져서 광범한 독자들의 구매력에 맞추기 어려우므로 분량이 그다지 많지 않은 작품을 택하는 현상도 자연스 러운 추세이다. 이로 인해 방각본 소설 출판에서 규모가 큰 대작(大 作)은 회피되었으며, 일단 선택된 작품에도 종종 축약적(縮約的) 윤 색(潤色)이 가해지고는 하였다. 세책가는 이와 반대로 가능한 한 많은 작품을 가지고 있는 편이 유리하고, 한 작품의 규모가 큰 것도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소설을 빌려 보는 독자들은 하나를 읽고 나서 대개 새 작품을 찾는 법이니, 보유한 작품 수가 많을수록 좋다. 또 한 작품의 분량이 많아 서 여러 책으로 나뉘어 있으면 그만큼 세책료를 더 받을 수 있으니, 분량을 줄이기는커녕 오히려 더 재미나게 부연하여 늘리기라도 할 일이다. 따라서 세책가는 전래의 필사본이든 방각본이든 많은 작품을 모으기에 힘쓰지 않을 수 없었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작품의 창작이 나 기존 작품의 확장⋅개작이 적잖이 이루어진 듯하다. 현존하는 「춘 향전」 가운데 가장 길고 내용이 다채로운 남원고사(南原古詞, 전 4 책)는 바로 세책가에서 보유하였던 필사본이다. 작으면 수십 책, 크 면 백 수십 책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대작들인 낙선재본소설(樂善
齋本小說, 가문소설) 역시 서울 지방의 세책가를 통하여 궁인(宮人) 들의 읽을거리로 조달되었으리라는 추정이 유력하다.
근대적(近代的) 인쇄술(印刷術)과 문학유통(文學流通)
19세기 말에 도입된 근대적 인쇄 기술은 문학작품의 보급⋅유통에 도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다. 납 활자를 사용한 조판⋅인쇄는 공정 (工程)이 훨씬 빠르고 비용이 저렴하였기 때문에 목판 인쇄에 의한 방각본보다 여러모로 유리하였다. 아울러 이 시기에 와서는 전국적인 교통의 편의, 상업 유통의 발달, 그리고 독서층의 급격한 증가에 힘 입어 서적의 시장성도 뚜렷하게 확대되었다. 1900년대부터 숱하게 쏟아져 나온 이른바 <육전소설(六錢小說)>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조 건의 산물이다. 이들 가운데에는 종래의 방각본 소설 종목이 활자본 으로 전환된 것, 옥루몽(玉樓夢)처럼 분량이 많아 사본으로만 읽혀 오다가 새로이 활자화된 것, 고전소설의 새로운 윤색, 그리고 신소설 등 여러 종류가 섞여 있었다. 인쇄술의 발달로 인한 출판의 용이성과 각종 신문, 학회보(學會 報), 잡지의 출현은 이 밖의 전통적 문학양식에도 보다 넓은 전달의 지평을 열어줌과 동시에 당대가 요구하는 여러 종류의 새로운 문학 들이 출현하게끔 하는 통로가 되었다. 개화기의 이념과 현실의식을 담은 산문들, 사회비판적 가사(歌辭)와 시조(時調), 창가(唱歌), 신체 시(新體詩), 신소설(新小說), 역사(歷史)⋅전기류(傳記類) 등이 이에 힘입은 주요 종목들이다. 여기에는 물론 구질서의 붕괴에 따른 한문 의 퇴조와 국문 사용의 보편화라는 사회⋅문화적 요인이 크게 작용 하였지만, 기술적 진보에 의해 책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쉽사리 구득할 수 있는 물건으로 가까워진 점 또한 가벼이 생각할 수는 없 다.
문학의 전달⋅유통에 있어서 인쇄된 서적이 차지하는 역할은 이 시대 이래 오늘날까지 거의 절대적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물 론 인쇄문화의 광범한 보급 이후에도 구비문학은 존속하였고, 특히 20세기 전반의 험난한 역사 속에서 민중들의 뼈아픈 체험이 구전민 요와 이야기의 형태로 표출되어 그 나름의 의의를 발휘하기도 했다 는 점은 당연히 주목되어야 한다. 그러나 전통사회의 구조와 촌락공 동체 생활양식이 붕괴하고 글을 통한 전달이 보편화된 이후의 시대 에서 문학이 어떤 기술로든 복제(複製)된 책을 매개로 하여 유통된다 는 것은 불가피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늘날의 영상문명(影像文 明)이 더욱 발달함에 따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의 고즈넉한 독서행위 대신 보다 역동적⋅집단적인 체험의 양식을 통해 문학을 나누려는 시도가 어떤 결실을 맺음에 따라, 문학과 책 사이의 관계는 지금과 얼마만큼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에조차도 문학이 언어예술인 한 <읽는다>는 일은 여전히 문학의 중심 영역으 로 남을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된다. 20세기 초기 이래의 문학을 그 전달⋅유통의 방식과 관련하여 살 피면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더 절실한 사항은 그것이 내용상으로는 어떻든 일단은 책이라는 상품으로 다수의 독자들에게 판매된다는 점 이다. 표현이 다소 이상할지 모르지만 오늘날의 문학 서적은 정부 또 는 비영리 사회사업 기관의 출간물이 아닌 한 모두 방각본(坊刻本)이 다. 즉 출판업자가 일정한 수지(收支)의 예측 아래 생산하여 다수의 독자들에게 파는 상품인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많이 팔리 는 책은 출판자와 작자에게 보다 많은 대가를 돌려준다. 이 자체는 꼭 부정적으로 여길 필요가 없는 현상이다. 문제는 이러한 대가가 독 자에게 무엇을 준 결과인가에 달려 있다. 그것은 시인⋅작가가 끊임 없는 모색과 괴로운 창작행위를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에 절실 한 어떤 문제를 진정한 형상으로 그려낸 데 따른 것일 수도 있고, 이
와 반대로 값싼 위안과 기만을 솜씨 있게 엮어내서 널리 뿌리는 데 성공한 때문일 수도 있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문학작품의 전달⋅유통 구조가 단순히 문학 밖에 있는 사실이 아니라 문학 자체의 내부에 그 핏줄이 닿아 있는 요소임을 생각하게 된다.
7. 한국문학(韓國文學)의 위상(位相)
사람은 과거로부터 현재에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 위에서 미래를 내다보면서 살며,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다면적(多面的) 연관 속에서 인식하고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 한 개인 또는 역사집단이 필요로 하는 자기 이해는 이러한 시간적 공간적 연관의 전체에 대한 성찰에 근거함으로써만이 온당한 것으로 정립된다. 이러한 논법으로 말한다 면 오늘날의 한국문학 역시 아득한 옛날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 리 민족 成員들이 이루어 온 언어적 형상의 산물인 동시에, 혹은 가 깝고 혹은 먼 여러 문학과 더불어 다양한 관련을 맺음으로써 스스로 의 주체를 확대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자아 이외의 것을 모두 타자(他者)라 한다면 과 거의 문학은 오늘날의 문학에 대해서 타자이며, 외국문학은 또 한국 문학 전체에 대해서 타자이다. 그러나, 타자와 나와의 관련에 대한 성찰에 발딛지 않고는 참다운 자아의 인식도 성립할 수 없다. 그럼에 도 우리는 이 책 앞부분의 일부 내용을 제외하고는 이제까지 한국문 학의 여러 국면을 나누어 설명하는 데 치중하여 이 문제를 집중적으 로 다룰 기회를 마련하지 못했다. 따라서, 한국문학의 전체적 이해에 관련하여 근년까지 자주 거론된 바 있는 두 가지 중요한 문제를 여 기에 검토 정리함으로써 한국문학 이해의 현재적 전망을 점검하는 데 디딤돌을 삼고자 한다. 그 하나는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의 관련 양 상에 대한 접근 시각의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민족문학의 의미 및 세계문학과의 連帶라는 문제이다.
(1) 고전문학(古典文學)과 현대문학(現代文學)
대체로 19세기 말까지의 우리문학을 고전문학이라 하고, 그 이후 의 우리문학을 현대문학이라 부른다. 역사적 전체로서의 한국문학을 이처럼 양분하는 것은 엄밀한 검토에 따른 귀결이 아니라 해묵은 관 습일 뿐이지만, 그 관습적 통용가치는 아직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구분을 단순히 편의적인 조처로만 인정하는 한 별다른 문제 는 없을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관습이 정착되기까지의 시대를 지 배했던 이분법적(二分法的) 문학사관(文學史觀)을 생각하거나, 논리상 으로 비판된 뒤까지도 존속해온 관습적 사용이 우리 시야에 미치는 실질적 작용에 주목할 때, 우리는 그 바탕에 잠재한 분할논리의 함정 을 가벼이 여길 수 없다.
이분법적(二分法的) 사고(思考)의 극복(克服)
이것은 문학만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와 역사 전체를 파악하는 전 망의 문제에 속한다. 두말할 나위 없이 19세기 후반 이래의 약 1세 기 간은 우리 역사상 가장 심각한 사회․문화적 격변이 진행된 시기였 다. 이와 같은 진행 과정 가운데서도 가장 뚜렷한 전환적 계기를 구 명하고 그 앞뒤의 시대에 다른 이름을 붙여 구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어떤 시대구분도 그러하듯이 이러한 구획이 두 시대 사이의 연속성을 부인하는 단절론을 필수적 요소로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물처럼 이어져 흐르는 역사에 우리가 인위적인 선을 그어서 구획하는 것은 그 사이에 어떤 의미 깊은 질적․양적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지만, 이 차이는 동일한 집단이 이끌어 온 삶의 역사적 연속상 (連續相)을 토대로 하는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문학을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으로 양분하는 관습의 바탕에 놓 인 근본 위험은 바로 이와 같은 역사적 연관을 외면하고 모든 것을 부정 단절 비약으로 설명하려 했던 식민지 시대 이래의 편견에 있다. <우리는 선조(先祖)도 없는 사람, 부모도 없는 사람으로 금일(今日) 금시(今時)에 천상(天上)으로 오토(吾土)에 강림(降臨)한 신종족(新種
族)>으로 자임하며 새로운 문화 건설을 제창한 1910년대에 이광수 (李光洙)의 말이나, <현재 문화영역에 잇서서 우리들의 사고를 지배 하고 있는 것은 아모리 보아도 조선 전래의 것이 아니라 서양문화에 서 온 것>으로서 <이것은 今後도 계속될 것이며, 또 계속시켜야 할 것>이라는 1930년대 최재서(崔載瑞)의 발언에서 그러한 지적 풍토의 단면들이 역력히 나타난다. 이같은 시각에서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이 전혀 이질적인 두 개의 문학처럼 보이는 것은 자명한 귀결이다. 고전문학은 19세기 말, 20 세기 초의 사회문화적 격변에 의해 존재 기반을 상실하고 실효된 문 학이며, 현대문학은 그 황폐한 터전에서 서구 근대문학을 모형으로 하여 성립한 별개의 문학이라 여기는 태도가 위의 분할논리와 짝이 되어 상당 기간 동안 통용되었던 사실 또한 새삼스레 재론할 필요가 없다. 우리문학에 대한 극대적 연구가 출발한 이래 1950년대 말까지 이와 같은 분할논리가 지배적 도식으로 작용함으로써 고전문학과 현 대문학은 비록 한 그릇에 담겨 있으되 물과 기름처럼 이질적인 원천, 성격을 지닌 이복형제(異腹兄弟)로 취급되는 것이 상례였다. 이 시기 의 연구 성과를 집약한 대표적 문학사인 국문학전사(國文學全史) (이병기(李秉岐)·백철(白鐵), 1957)와 국문학사(國文學史)(조윤제(趙 潤濟), 1949). 개고(改稿) 및 현대문학 부분 증보(增補), 1963)가 고 전문학과 현대문학을 별개의 문학사처럼 나누어 기술하거나 단순히 시대순으로 접합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에 대한 반성의 움직임이 나타난 것은 뒤늦은 대로 당연한 진전이었다. 반성적 재정향의 실마리는 전통의 단절 계승 문제를 둘러싼 논쟁으로부터 준비되었다. 당시의 제3공화 국 정권이 사회경제적 지표로 내걸었던 <조국 근대화>의 구상은 급 속한 산업화를 최대 목표로 삼으면서 이에 긴요하지 않은 듯이 보이 는 전통적 가치와 문화에 대해 부정적인 흐름을 조성하였다. 예전에 도 간헐적으로 대두한 바 있던 전통 문제가 이러한 상황에 대응한 비판 논리의 성격을 띠고 본격화되었다. 그 내용은 여기에 간단히 요
약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지만, 논의의 대체적인 흐름은 과거의 문화 를 일률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잘못이며, 가치 있는 전통 유산을 현대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는 형태로 계승․재창조함이 바람직하다는 방향 으로 전개되었다. 국사학계를 중심으로 하여 활발하게 거론된 식민사 관(植民史觀) 극복 논의도 근대사 인식의 이분법적(二分法的) 통념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였다.
가시적(可視的) 연속성론(連續性論)의 문제
1960년대 말 이래 최근까지 증폭되어 온 <우리의 것>에 대한 열 정적 관심, 전통문화 예술의 발굴과 재평가 작업 등은 이러한 맥락에 서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과제가 구체화된 것이다. 국문학을 연구하 거나 비평 작업에 종사하는 이들 역시 이에 호응하여 종래의 일면적 태도를 지양하고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을 아울러 다루는 과제에 착안 하기에 힘썼으며, 더 나아가서는 두 영역 사이의 공통 특질을 추출하 고 역사적 연속성을 구체적으로 입증하는 일에 적지 않은 관심을 기 울이기에 이르렀다. 산발적으로 지속된 이들 작업의 내용을 대강 살펴보면, 개화기 이 래의 문학에서 전통적인 주제․소재․話素 구성 문체․수사․발상법․운율 등을 밝힘으로써 현대문학이 종래의 통념과 달리 많은 부분에서 고 전문학을 수용․계승하고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식민지적 문화의식 과 맹목적 근대화주의에 지배되어 현대문학의 새로움이나 외래성만 을 중시하던 오류에 대해 이러한 성과들이 값진 반성의 지평을 열어 놓았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런 방향의 탐색은 앞으로도 더 널리 치밀하게 진행되어 마땅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여러 요소들의 가시적(可視的) 연속성을 통해 고전문학과 현대문학 사이의 계승관계를 밝히는 것만으로 전통 논쟁 의 오랜 숙제가 해결되거나 우리 문화의 역사적 전체상이 제대로 파 악되리라고 믿는다면 그것 역시 또 하나의 작지 않은 오류일 수밖에
없다. 19세기 후반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우리 문학사는 치열한 갈등․ 변모의 충동과 함께 전개되어 왔으며, 단순한 계승의 논리만으로는 충족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자기개신(自己改新)의 과제를 압도적 인 짐으로 동반하였기 때문이다. 일정한 양식, 작가, 혹은 작품군(作 品群)에서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의 공통요소를 찾아냄으로써 전통단절 론의 허상이 지닌 맹점을 찌르는 일은 물론 가치 있는 과업이다. 그 러나 그것이 두 시대 영역 사이의 변환기적 문제들을 안이하게 덮어 버리는 방편이 된다면 이 또한 잘못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참으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과거와 현재, 고전 문학과 현대문학의 관계를 지속--단절, 수용--거부 등의 양자택일적 논법에 따라 파악하려는 접근 방법을 타파하고 일련의 역동적 전위 (轉位)과정으로 해명하는 시각이다. 사람이 자기자신 및 생활환경과 의 거듭되는 투쟁을 거쳐 새로운 삶의 단계로 나아갔을 때 그는 분 명히 예전의 자아의 연속이면서 그 초극이듯이, 한 집단의 변환기적 삶을 단절이냐 계승이냐라는 택일적 논리에 따라 규정하려는 시도는 역사적 추이의 실상에 어긋나는 것이다. 무생물이나 일방적 피조물 (被造物)이 아닌 주체의 문화를 해명하고자 하는 한, 그를 주체이게 끔 하는 근본 조건인 자기 동일적 연속성과 자기 초극적 역동성은 어느 하나도 부정할 수 없는 본질적 사항이다. 말의 선형성(線型性) 이 부과하는 제약 때문에 우리는 이 두 국면을 나누어서 말하고 있 으나 실제에 있어서 그것은 하나이다. 변화가 없는 지속이란 죽음이 며, 주체의 연속성에 근거하지 않은 변화란 거짓된 겉치장만의 교체 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전문학과 현대문학 사이의, 혹은 더 세분된 시 대 단위 사이의, 연속성을 특정한 요소의 가시적(可視的)·선형적(線型 的) 지속으로서만 설명하려는 관점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필요를 발견 한다. 물론 그러한 가시적 연속 또한 연속성의 일부분이며, 때로는 보다 깊은 차원의 연속성을 시사하는 증거일 수 있다. 하지만 문체· 운율·구성·화소(話素)․소재 등의 가시적 일치를 동반하지 않은 기저층
(基底層)의 연속성이 있을 수 있고, 주제나 태도가 전혀 상반되는 듯 이 보이는 사실들이 의미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경우도 희귀하지만 은 않다는 데에 주목해야 한다. 부정 혹은 초극을 위한 투쟁 또한 역 사적 연속의 한 형태이다. 극단적인 예처럼 보이겠지만, <신은 죽었 다> 라고 외친 니체의 철학은 기독교적유일신관( 唯一神觀)과 윤리의 식의 연장선에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며, 따라서 서구 문화의 기독교 적 흐름을 떠나서는 그것을 온당하게 파악 할 수 없다. 노신(魯迅)의 阿Q도 보들레르의 악(惡)의 꽃도 반드시 그 앞 시대의 문학에 어 떤 가시적 지속의 관계를 맺어서 자국 문학의 역사적 연속선상에 편 입되도록 허락되었던 것은 아니다.
문제적(問題的) 연속성(連續性)에의 시각(視角)
그러면 이런 경우까지를 포함하는 근원적 의미의 연속성이란 어떤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문제적(問題的) 연속성>이라 부를 수 있을 듯하다. 이를 좀더 풀어서 말한다면 <표면상의 일치나 유사성 여부 에 관계없이, 혹은 외관상의 뚜렷한 대립과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사 태의 심층속에서 역사적 삶의 문제들이 형성하는 연속성>이라 해도 좋다. 다시금 생각해 보면, 한 사람의 생애든 집단의 역사든 그것을 일 관된 흐름으로 묶는 중심 요인은 겉모습이나 부속물 따위이기보다는 주체의 선택에 의미를 부여하고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상황을 통합 하여 미래의 계기에로 나아가도록 하는 문제의 연쇄일 것이다. 우리 가 살고 있는 현재란 지나간 삶의 누적적․연쇄적 움직임이 이루어낸 산물인 동시에,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를 향하여 그로부터 역사가 움직여 나아가는 운동상(運動相)의 한 국면이다. 이러한 운동적 연쇄 속에서 역사집단이 스스로의 생존을 포기하여 주저앉지 않는 한 오 늘의 시대는 지난 세기와 같을 수 없고 미래의 국면은 또 오늘의 반 복일 수 없다. 변화, 갱신은 살아 있는 사회와 문화의 본질이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문화의 역사적 연속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은 한 시대가 다른 시대를 외형상으로 많이 닮았다는 점보다는 앞시대 가 지닌 운동량(運動量)이 당대의 객관적 조건과 상호적으로 작용한 결과 다음 시대의 성취와 문제를 다시금 결과하였다는 데에 있는 것 이다. 생물학적 친자관계(親子關係)는 혈액형이라든가 신체적 특징 등의 일치를 통해서만 입증될 터이지만, 인접한 시대 사이의 친자관 계 확인은 눈에 보이는 특질들의 재귀적(再歸的) 출현 못지 않게 자 기갱신과 초극의 모색 속에 담긴 문제적 연속성을 중요한 사항으로 밝혀야 한다. 고전문학과 현대문학 사이의 역사적 유대를 이처럼 문제적 연속이 라는 차원에 비중을 두어 파악할 때 우리는 전통의 단절과 계승, 부 정과 긍정이라는 도식적 택일논리의 함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우리의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은 그 표면적 차이를 과대해석한 논자들 이 생각하듯이 아무런 내재적 연속성 없이 그대로 단절되어 있지 않 을 뿐더러, 이를 부인하고자 하는 뜻에서 등장한 일련의 논의가 강조 한 바처럼 이러저러한 요소나 자질들의 단순한 지속으로서만 연관을 맺고 있는 것도 아니다. 끊임없는 자기확대와 초극의 운동으로 구현 되는 역사적 연속성은 종종 전통적 모티프나 양식 등의 부분적 잔존 이라는 징표를 남기지만 그러한 사항들까지도 근본적으로는 표현 형 식을 지배하는 문제적 연속성의 한 구성 부분인 것이다.
하나의 사례(事例)
여기에서 우리는 1930년대의 가장 <현대적>인 시인․작가였던 이상 (李箱, 1910-1937)을 한 예로서 생각해 봄직하다. 연작시 <오감도(烏 瞰圖)>와 <날개> <종생기(終生記)> 등의 소설을 통해 잘 알려진 이 인물만큼 전위적이요 혁신적인 문학상의 실험을 추구한 이는 우리 문학사에서 달리 찾아보기 어렵다.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신심리주 의, 자의식(自意識)의 탐구 등의 개념과 더불어 거론되는 그의 작품
세계는 확실히 서구문학의 현대적 사조와 상당한 연관을 맺고 있으 며, 이와 반대로 고전문학의 소재․모티프․형식․문체 등의 특질은 눈에 뜨이지 않는다 함이 상식적인 판단일 것이다. 金素月의 시에 깃들어 있는 민요적 가락이라든가 채만식(蔡萬植)의 <태평천하(太平天下)>가 지닌 판소리적 문체와 서술 방법 같은 가시적 연속성을 여기에서 확 인하려 하는 이는 없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상의 문학은 고전문학 과의 연속성 여부를 말하기 이전에 당대의 통념적 문학의식에서조차 충격적인 낯설음을 불러일으킨 이단적 산물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문학사의 진전 과정에서 갑작스럽게 출현한 하나의 돌발적 사실 인가? 그것은 단지 서구 현대문학의, 혹은 서구적 사조를 흡수한 일 본 전위문학의 영향에 의해 촉발되고 이상이라는 예외적 개인의 우 발적 충동만을 바탕으로 하여 나타난 이변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이상의 시와 소설 중 이제껏 주목된 바 없던 요소가 전통적 어법․수사․모티프와 비슷하다고 해서가 아니다. 그런 근접성이 설령 발견된다 해도 그것을 이유로 이상을 고전문학의 흐 름에 끌어다 붙이려 한다면 곤란한 착상이 아닐 수 없다. <오감도(烏 瞰圖)>는 분명히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어부사시사(漁父四詩 詞)>나 사설시조(辭說時調)와 다를 뿐 아니라 <진달래꽃> <나의 침실 (寢室)로>와도 비슷하지 않다. 다른 것 가운데서 같은 요소를 찾아내 보려는 것은 물론 칭찬할 만한 성실성이지만, 역사적 인식의 온당한 시각은 다른 것으로 인정하면서 그들 사이의 차이를 심층적 연관과 함께 해명하는, 즉 문제적 연속성의 차원에서 파악하는 것이어야 한 다. 이러한 시각에서 이상의 문학을 우리 문학사의 커다란 맥락 속에 놓고 다시금 해석할 때, 우리는 그것을 중세적 세계관․윤리의식의 붕 괴와 이를 대체하는 새로운 가치원리의 모색이 진행되던 근대사의 흐름 가운데서 가장 참담한 파멸과 부정의 극점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소설 <날개>의 서두에 <어느 시대에도 그 현대인은 절망한
다.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 때문에 또 절망한다>라는 잠언적(箴言 的) 명제를 썼다. 그 둘째 귀절이 암시하듯이 그의 문학은 중세적 질 곡을 넘어선 새로운 인간, 사회의 모색이라는 조선 후기 문학의 지향 이 스스로의 운동량에 의한 변환을 완성하지 못하고 식민지화의 굴 레에 속박되면서 붕괴된 세계질서를 대체할 만한 유기적 전망을 획 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출현한 절망적 삶의 초상이다. 생명력을 잃은 채 잔존하는 낡은 관습의 틀에 대한 혐오, 삶의 진정성으로부터 동떨 어진 교양․예의․형식 등 문명적 외관에 대한 냉소, 그리고 아무런 가 치원리도 조화로운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고립된 주관성만 을 학대하는 자아…… 그의 문학에 되풀이하여 등장하는 이들 모티 프는 단순한 전위문학적 기법 혹은 포즈가 아니다. 그것은 19세기까 지의 전사(前史)에서 현저하게 무너지고 20세기 전반에 와서 결정적 으로 와해된 도덕적 우주관의 폐허에 식민지 도시의 부패한 생존양 식만이 번성한 데서 나온 자기 해부의 역사적 산물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 검증이나 16세기 이래 20세기까지 이르는 우리 문학의 주제사적(主題史的) 변모 양상을 밝히는 일은 물론 별도의 논 의를 요하는 과제이다. 이 자리에서 중요한 것은 위의 해석적 가설이 반드시 액면대로 타 당한가 여부가 아니라, 그와 같은 접근을 통해 문학사의 동적인 추이 와 연속성이 새로이 조명될 필요가 절실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역사 적 연관이 파악되지 못하는 한 문학사는 기껏해야 꼼꼼하게 배열된 연대기(年代記) 혹은 단위별 시대사의 組合이 될 따름이다. 거듭 말 하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요청되는 것은 표면적 근사성의 유무에 치중하는 안목을 넘어 오늘의 문학이 있기까지 각 시대의 문학이 계 승·반발·변이·전환의 역사적 계기들을 통해 어떻게 맺어져 있는가를 밝히는 시각이다. 이와 같은 시야에서 보건대 고전문학과 현대문학 중 어느 한편에 대한 이해의 진전 없이는 다른 한편의 해명도 충실할 수 없음이 자 명하다. 고전문학의 다면적 움직임을 배경에 두지 않은 현대문학의
논의는 흔히 편벽된 현재중심론의 한계에 제약되며, 20세기 초기 이 래의 문학적 숙제들을 적어도 遠心的인 관심사로서 고려하지 않는 고전문학 연구는 과거적 사실에의 매몰을 면하기 어렵다. 그동안 자 주 거론된 바 있는 이 위험들을 제거하고 우리 문학의 동적인 전개 과정을 일관된 전체상으로 구명하는 데에 고전문학과 현대문학 사이 의 문제적 연속성의 탐구라는 시각은 유익한 전망을 얼어 줄수있을 것이다.
(2) 민족문학(民族文學)과 세계문학(世界文學)
한국문학의 현재적 위상(位相)을 논하고자 할 때 곧바로 당면하는 또 한가지 물음은 민족문학의 문제이다.우리 역사의 아득한 시원(始 源)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동안의 문학 전체를 염두에 두고 말할 때 민족문학은 그 중 얼마만큼을 포괄하는 것이며, 오늘날 우리가 지 향하는 민족문학은 그것과 어떤 관련을 가지는가? 우리의 민족문학 이 다른 나라의 문학과 맺어 온 역사적․현재적 관련은 어떻게 이해되 어야 마땅한가? 민족문학의 개별성은 문학 일반의 보편성 내지 세계 문학의 이념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우리의 민족문학 인식은 이런 문제들에 대한 균형된 전망을 필요로 한다.
민족문학(民族文學)의 개념(槪念)
민족문학 논의의 모든 국면에서 자주 논쟁의 혼선을 일으키는 기 본요인은 무엇보다도 민족문학 개념의 다의성(多義性)에 있다. 민족 과 민족주의의 이해만큼 다양한 민족문학 개념은 흔히 문제 자체의 의미에 대한 일치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소모적인 논쟁을 부추기소는 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민족문학의 개념 유형을 몇 가 지로 구분하고 그 차이와 상호관계를 검토할 필요를 느낀다.
우리문학의 경우를 파악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즉, 지난 시대에 있 어서나 현재의 상황이 다민족국가(多民族國家)인 경우를 일단 제외하 고) 민족문학의 의미층위를 나누어 보면 다음의 네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i) 포괄적 진칭개념(全稱槪念)으로서의 민족문학. 즉, 고대의 민족 형성기 이래 全역사과정에 걸쳐서 여러 계층․집단의 민족 구성원에 의해 이루어져 온 문학의 총체. ii) 민족적 특질, 개성을 지닌 문학, 언어·문체·소재·발상법·모티프· 미의식·주제 등의 여러 요소 중 상당 부분에서 민족적 개별성과 특질 을 보여주는 문학. iii) 근대적 의미의 민족사회 형성에 기반하여 발달·전개된 문학. 즉 대외적으로는 중세적 보편주의를 극복하고 안으로는 봉건적 신분 질서를 보다 평등한 사회관계로 재편성함으로써 형성된 민족사회의 자기표현인 문학, 혹은 그러한 지향성이 뚜렷이 성장한 문학. iv) 목표지향적 가치개념으로서의 민족문학. 식민지화, 민족의 분 단, 현실사회의 절박한 갈등 등 민족 현실과 그 성원들의 절실한 문 제에 부응하여 전민족적 가치를 구현하는 데 기여하는 문학.
이 가운데서 자주 쓰이는 민족문학의 개념은 대체로 i)과 iv)의 두 가지이다. 예컨대, 최치원(崔致遠, 857~?)과 이인로(李仁老, 1152~1220)의 문학을 우리 민족문학의 한 부분이라 할 때 우리는 민족사의 각 단 계에 있어서 그 시대의 사회문화적 조건에 상응하는 표현 언어, 문학 적 관습, 이념에 의해 이루어진 문학 모두를 민족문학이라 전제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오늘날의 시인·작가들은 마땅히 민족사의 현재적 과제에 부응하는 실천으로써 민족문학을 구현해야 한다고 할 경우의 민족문학은 자연적 귀속성이나 무의식적 특질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의식화된 지향 목표> 또는 그 성과로서의 문학을 가리킨다. 나머지 두 가지 개념형 가운데 ii)는 i)의 범주에 민족적 개별성의 표현이라
는 질적 기준을 도입한 것으로, 우리의 문학 유산 가운데서 민족적 전통의 변별에 중점을 두는 논의에서 가끔 사용된다. iii)의 개념은 민족을 단순한 종족적․문화적 단위로 보기보다 근대사회 형성기에 새 로이 부각되는 역사적 실체 즉 사회정치적 단위로 파악하는 시각에 기초한 것으로, v)의 목표지향적 민족문학 개념의 배경이 된다. 이들 네 가지 수준의 민족문학 개념은 자주 뒤섞어 쓰이고 또 그 러한 넘나듦을 허용할 만한 연관을 지닌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때로 는 무분별한 혼용이나 편의적인 의미전이에 따라 많은 오해가 생기 고는 한다. 그러므로 민족문학을 논할 경우 상대방이나 우리 자신이 어떤 의미의 민족문학을 초점으로 삼고 있으며 그것은 다른 층위의 민족문학 개념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명료히 하는 일이 생산적인 토론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 유의사항은 의미있는 토론에 요구되는 최소한의 전제 일뿐 그것만으로 민족문학 이해의 시야가 밝게 보장되지는 않는다. 위에 구별한 네 개념은 실제의 용례와 논리적 가능성에 따라 그처럼 구별되기는 해도 서로 무관한 별개의 영역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 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들의 의미 층위를 분별함과 동시에 그 포용 과 생성의 상호관계를 인식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해진다.
여러 개념층위(槪念層位)의 상관 관계
이런 각도에서 보면 민족사의 전과정에 걸쳐 이루어진 문학을 총 칭하는 개념으로서의 민족문학과 금세기의 현실상황 속에서 부분적 으로 성취되고 지속적으로 추구되어야 할 가치개념으로서의 민족문 학을 택일적 사항으로 놓아 어느 하나만을 바른 의미의 민족문학이 라 하는 것은 지나치게 성급한 태도이다. 공통된 언어, 자연환경, 문 화, 역사경험을 가진 집단으로서 민족이 창조하고 발전시켜 온 문학 의 토대에 힘입지 않고서는 오늘날의 민족적 상황에 부응하는 문학 이 이루어지기 어렵거니와, 가령 그러한 문학이 있다 해도 그것을 참
으로 민족적이라 할 수는 없을 터이다. 우리의 경우처럼 19세기 말 이래 외래문화의 격류에 부딪히면서 때로는 심각하게 자기 정체(正 體)의 위기를 체험하기까지 한 민족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민족 문학의 이념은 역사 현실의 긴절한 문제에 대한 헌신과 아울러 문화 적 자기 신원의 확인이라는 과제를 동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에 요약한 바 네 가지 민족문학 개념의 순차적 관계를 살핌으로 써 이 점이 좀더 확실하게 드러난다. 우선 i)과 ii)의 관계를 보면, 민 족적 특질을 지닌 문학이란 보다 넓은 귀속개념으로서의 포괄적 全 稱인 민족문학을 떠나서 성립할 수도 이해될 수도 없다. 민족적 특질 이란 문학에서든 다른 부문에서든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 해당 민족이 역사 과정에서 이룩하고 움직여 나아간 역동적 삶으로부터의 抽象이다. 따라서 그것은 미리 주어진 외적 준거에 따라 기계적으로 분류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일단 포괄적으로 설정한 민족문학의 전 체 범위 안에서 무엇이 그 주체의 주체됨에 더 긴요한 의의를 가졌 던가를 해석함에 따라 파악되어야 한다. 아울러, 이러한 해석의 결과 민족적 특질의 징표가 적다고 판단된 문학이라고 해서 그 의의가 반 드시 절하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문학 의 발전 과정도 씨족․부족․종족이 지닌 한계를 넘어 스스로의 범위를 확대하면서 보다 풍부한 표현 영역과 사상적․심미적 깊이를 획득해 나아가는 것이다. 한 시기에 있어서 낯설게 보이는 문학적 사실이 민 족문학의 특질을 새로운 지평에로 확대하는 데 유효한 因素로 작용 하는 예가 드물지 않음을 여기에 참조할 만하다. 불교문화의 수용이 라든가 신라말, 고려초에 있어서의 한문문학 성장 등은 이런 시각에 서 접근하지 않는 한 제대로 평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우리 문 학 전체의 발달 과정을 온당하게 규명할 수 없다. 중국 중심의 천하관(天下觀)이라는 중세적 보편주의와 봉건적 신분 체제가 무너져 가면서 등장하는 근대지향적 민족문학 역시 통시대적 (通時代的) 전칭으로서의 민족문학이나 그 주축을 이루는 특질 개념 으로서의 민족문학을 불가결한 전제로 하여 성립한다. 대타적(對他
的) 자아인식과 대내적 평등주의에의 지향을 내포하는 민족의식·민족 주의는 분명히 일정한 사회경제적 요인의 성숙과 함께 나타나게 되 는 역사적 이념이다. 하지만 그것을 가능케 하고 또 촉진하는 결속의 근거는 언어, 관습, 공동의 생활사 등 오랜 기간에 걸쳐 심화되어 온 동질성에서 준비된다. 인종적․언어적․문화적 동질집단이 곧 근대적 의미의 민족과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토대가 없이는 근대적 민족과 민족주의가 자연스럽게 성립하거나 사회 구성원들에게 정당 화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근대적 민족문학 역시 그 이전 단계의 민 족문학으로부터 언어·양식·소재·주제 등에 걸쳐 많은 유산을 이어받 아 그것을 새로운 경험의 연대 안에 통합, 발전시킴으로써 굳건한 역 사적 실체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논의가 여기까지 이르고 보면 오늘의 시대를 살면서 우리가 추구 하는 당위적 개념으로서의 민족문학 역시 위에 지적한 바의 연관 속 에 놓이는 것임을,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러한 연관을 바탕으로 해서 과거의 문학적 성취를 내재적인 자산으로 포용하고 이 시대의 현실 이 안고 있는 여러 문제에 진지하게 응답하고자 하는 역사적 실천의 첨단에 놓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호연관에 대한 원근법적 이해를 외면하고 오늘날의 요청적 민족문학 개념으로 과거의 문학 일체를 도식화하여 논단한다면 그것은 비역사적 현재중심주의의 착 오이다. 반대로, 민족 성원에 의해 씌어진 일체의 문학이나 민족적 특질을 지닌 문학이 곧 민족문학이므로 민족문학의 당면 과제에 대 한 의식적 定向의 관심은 불필요하다는 견해 또한 민족문학 전개의 역사성을 인식하지 못한 회고적 관념론의 오류를 벗어나지 못한다. 여기서 우리는 민족이라는 실체와 그것을 지칭하는 개념의 성립이 모두 어떤 일회적 계기에 의해 완성되지 않고 오랜 동안의 역사적 추이를 거쳐 성숙한 것임을 다시금 환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檀 君의 자손 배달 민족>이 면면히 이어 온 <반만년 유구한 역사>를 강 조하는 말들을 가끔 듣지만, 한민족의 대체적인 외연(外延)이 형성된 것은 고대사에 있어서 동북아시아 일대에의 이주․정착 시기와 생활단
위를 달리하는 여러 씨족, 부족들이 몇 개의 고대국가로 통합하는 시 기에 들어서였다. 일단 성립을 본 민족이라는 외연이 중세 체제의 점 진적인 붕괴와 더불어 새로운 역사적 의미를 띠는 실체로 부각되기 시작한 시기는 대체로 조선 후기 무렵이다. 그리고, 그 이후의 역사 과정에서 민족적 평등 및 일체성의 추구는 봉건적 유제(遺制)와 식민 지 지배세력에 대한 투쟁의 동력이 되었으며, 광복 이후 오늘날에 이 르는 기간에 있어서는 남북분단과 대내외적 모순의 극복을 위한 근 본 과제로 이어지고 있다. 간추려 보건대, 우리에게 있어서는 민족적 실체와 그에 대한 자각의 상승 과정이 곧 넉넉하고 균형된 삶을 향 한 역사 발전의 道程이었다. 민족문학이란 이 여러 단계에서 거두어 진 문학적 성취의 연속상(連續相)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유산인 동시에, 단순한 완결형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우리 자신의 실천에 따라 그 위에 다시 생성되어야 할 <열려 있는 과제>이다.
민족문학(民族文學)과 세계문학(世界文學) ; 두 가지 편견
그러면 이와 같은 내재적 연관으로 이루어진 민족문학이 인접문학 과 세계문학에 대하여 맺는 관련은 어떻게 볼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하려 할 때 우리는 두 가지 편견의 가능성이 가까이 있음을 느낀다. 그 하나는 우리 자신의 몫이 포함되지 않은 채 어딘 가 동떨어진 곳에서 마련된 <세계문학> <문학의 보편성>의 의심스러 운 권위에 예속되는 편견이며, 다른 하나는 <민족문학의 고유성․독자 성>에 집착함으로써 폐쇄적 자아중심주의에 빠지고 마는 편견이다. 이 가운데서 후자의 위험을 분별하여 극복해야 할 필요성은 비교 적 명백하다. 민족문학의 성장은 그 내부적 자산의 확대․심화와 함께 외래문학과의 교섭을 통해 가진 것을 서로 나누고 각자를 풍부하게 하는 일임을 우리는 우리문학의 오랜 역사에서 생생하게 보아 왔기 때문이다. 많은 부분이 아직 해명을 기다리는 과제로 남아 있기는 하 나 우리 고대문학이 중앙아시아로부터 동북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에
분포된 여러 민족들의 문학과 시원적(始源的) 기저(基底)를 공유하고 있으리라는 추정은 단순한 가설 이상의 개연성을 지닌다. 고대국가 성립기를 전후하여 한문이 전래되고 중국과의 교섭이 점차 확대된 이후로는 중국문학으로부터 여러가지 유익한 자극을 흡수하면서 민 족문학의 폭이 더 넓어졌으며, 불교 문화의 전래 또한 깊은 영향을 끼쳤다. 19세기 말 이후의 우리문학이 서구문학 경험을 통해 여러 층위에 걸쳐 커다란 변모를 겪었다는 점은 그동안 외래적 요인에만 치중하여 해석된 폐단이 있기는 해도 사실관계 자체는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70년대 이래로 제3세계 문학에 대한 관심이 꾸준 히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도 유의할 만하다. 새삼스러운 사족(蛇足)이겠지만 외국문학의 이러한 접촉과 수용은 받아들이는 쪽의 주체적 태세가 유지되는 한 민족문학의 독자성을 훼손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깊고 넉넉하게 하는 데 기여한다. 종족문 학의 폐쇄성으로부터 민족문학의 성립에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한 의 의를 띠는 발전이듯이, 한 민족문학이 다른 문학과의 교섭을 통해 자 신의 세계를 더욱 풍부하게 하면서 보다 넓은 공감의 영역을 이루는 것은 인류문화의 소망스러운 발전 방향이다. 이러한 시야를 확보하지 못한 채 폐쇄적 전통의 고유성만을 물신화(物神化)하여 떠받드는 것 은 살아 있는 민족문학의 전망이 아니다. 이에 비하여 허구화된 보편개념으로서의 <세계문학>을 비판적으로 다시 조명하고 민족문학의 정당한 자리를 인식한다는 것은 그다지 단순치 않은 문제로 보인다. 19세기 이전의 중화주의(中華主義)와 20 세기 초 이후의 서구문학 지향 그리고 식민지 시대에 널리 유포된 종속적 문화의식이 여기에 문제의 근원으로 개재한다. 이들의 편견에 의하면 <보편적인 것> <세계적인 것>은 우리가 사는 영역 밖의 무엇 이며, 이에 합치하는 길은 他者의 세계성이라는 척도를 추종하는 데 있다고 간주된다. 이것은 중세 동아시아에 있어서 중국인들이 품었던 중국중심적 천하의식(天下意識)과 근대 이후의 서구인들이 휘두른 유 럽중심적 보편주의라는 허구적 논리가 만들어 낸 착각이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 몰주체적(沒主體的) 세계주의가 자국 문화와 역사의 내재적 동력을 소홀히 한 채 맹목적 선진 지향에로 달려가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인류문화의 보편적 발전 방향이 전적으로 타자의 성취에 의해 가늠되고 세계문학의 드높은 표준이 또한 특정 문화권에 집중되어 있다면 그것을 추종함이 곧 선진에의 지름길일 터이기 때문이다. 열강(列强)의 식민지 지배와 함께 서구문화의 압도 를 체험한 제3세계 여러 나라에서 한동안 성행한 이 편견은 우리 문 학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그 자취가 아직 말끔히 씻어 지지 못했다. 식민지 해방 투쟁의 과정에서나 정치적 독립 이후의 새로운 문화 건설 단계에서 이러한 허구적 보편주의에 맞서기 위한 대응논리가 모색되는 것은 당연한 추이이다. 실제로 제3세계 여러 나라에서 그 러한 예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손쉬운 논법은 서구 중심적 보편주의와 세계문학 이념으로부터 자국의 역사와 문학을 예 외적․특수적 사실로 분리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즉, 서구 문화의 우 월성과 보편성을 부인할 수는 없으되 자국인들의 체험에 바탕한 고 유문화의 가치도 그 나름으로 소중하다는 시각에서 이를 특수한 자 질 내지 개성의 산물로 예외화하여 설명하거나 보호하려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특수성 논리의 한계는 자명하다. 종속적 문화의 식이 초래한 맹목적 선진주의와 자기부정에 대해 그것이 일정한 반 성적 재정향(再定向)의 의의를 발휘하는 점은 물론 마땅이 평가되어 야 한다. 하지만, 타자 중심의 <검증되지 아니한 보편성>을 그대로 승인한 채 그밖에 마련된 예외의 영역에서 자기 문화의 존재 의의를 찾는다는 것은 임시변통의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 보편성․세계성에 의 통로를 포기한 특수성의 강조가 흔히 고유문화 전통에 대한 감상 적(感傷的) 신비화에로 떨어지고는 한다는 점도 문제이다. 세계문학 과 민족문학의 관계를 보편--특수 논리로 설명하려는 논법은 결국 문학 일반에 대한 포괄적 전망 속에서 민족문학의 의미를 해명하지 못할 뿐더러, 그 역사적 발전상(發展相)의 객관화된 이해를 수립하는
데에도 결정적인 장애 요인을 안고 있는 것이다.
민족문학(民族文學)과 세계문학(世界文學)에의 전망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는 길은 세계문학을 한국문학, 중국문학, 영 국문학, 이집트문학, 타일랜드문학…… 등 모든 개별문학의 총체라고 봄으로써 열릴 수 있다. 마찬가지 논리로서 문학의 보편성은 모든 개 별문학적 자질들의 온당한 귀납에서 성립하고 또 정당화된다고 해야 한다. 이것은 갖가지 나무가 모여서 숲이 되고 여러 종족․인종들이 모여서 인류를 이룬다는 말처럼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상식론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진부한 상식의 재확인을 훨씬 넘어서는 느낌을 불 러 일으키는 것은 우리가 타자중심적(他者中心的)인 보편주의에 너무 도 낯익어 있었기 때문이다. 특정 문화권의 문학을 세계문학적 보편성의 척도로 삼는 편견은 문학을 그 바탕의 삶으로부터 분리하여 우열의 등급을 매길 수 있는 장식물 혹은 技術처럼 여기는 태도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만약 그런 태도가 옳다면 모든 <후진적> 문학은 마땅히 자신의 것보다 앞 선 문학을 열심히 뒤따르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문학은 그처 럼 손쉽게 대체하거나 이식할 수 없는 <삶의 형상적(形象的) 인식>이 자 <주체가 세계에 대하여 말을 건네고 듣는 행위의 한 방식>이다. 따라서 문학으로 표현되는 역사적 삶의 근거를 떠나 그 겉껍질만을 옮기는 일은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그런 뜻에서 모든 개별 문학 상호간의 가치는 상대적이라고 일단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상대화를 통해 세계문학을 모든 개별문학의 수평적 총합으 로 규정할 때 예전에 확실한 것처럼 보이던 보편의 허상은 사라진다. 문학의 보편성이 있다면 그것은 어딘가에서 만들어 독점적으로 공급 해 주는 기성품이 아니라 수많은 개별문학들의 성취로부터 추출, 종 합되어야 할 요청적 이상으로 존재할 따름이다. 이것은 과격한 原子 的 상대주의의 논리처럼 보이지만 왜곡된 보편주의의 환상을 넘어서
서 모든 개별문학이 저마다의 주체적 몫을 찾도록 하려면 필연적으 로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각성의 한 단계이다. 그러나, 이 한 단계만으로는 아직 충분치 않다. 하나하나의 개별문 학이 그 주체에게 제각기 소중하다 함은 당연한 이치지만, 그 소중함 의 의의는 자국문학의 범위에 국한될 수도 있고 이로부터 나아가 여 러 개별문학이 지닌 문제에 빛을 던지는 폭넓은 범례적(範例的) 성취 로 확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특정 시대의 민족문학을 구 성하는 여러 계층, 유형의 문학 가운데서 어떤 부분이 그 시대의 긴 절한 문제들을 보다 충실하게 표현함으로써 해당 민족문학을 이끌어 가는 의의를 발휘하는 점과 비슷하다. 예컨대 조선조 후기의 우리문 학에 있어서 가장 의의 깊은 부분은 평민문학의 발달이었으며, 한문 문학은 종래의 중세적 규범과 미의식으로부터 벗어나 이러한 역사적 추이에 부응함으로써 새로운 단계의 문학사적 진전에 합류할 수 있 었다는 점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할 때 우리가 위에서 개별문학적 상대성으로 해체, 평면 화한 세계문학의 질적인 의미는 역사상의 각 시대에 있어서 인류 문 화의 진보적 가치를 구현하는 데에 보다 크게 기여한 문학이 어떤 것이었으며 현재에는 또 어떠한가를 준거로 하여 새로이 입체화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세계문학의 이념은 모든 개별문학의 가치를 포 용하되 각시대의 세계사적 과제에 역동적으로 응답한 문학적 성취를 중심으로 파악되어야 하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금 생각해 보건대 시민사회의 성립․발전기를 배경으로 성숙한 서구 근대문학이 서구중 심주의의 허구를 벗겨내고도 세계문학적 의의를 잃지 않는 것은 그 것이 이 시대의 인류사적 단계에서 인간 개체의 자유와 존엄 그리고 새로운 사회적 연대를 향한 문학상의 성취로 값진 범례적(範例的) 가 치를 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성취는 서구가 세계를 자본 주의 시장과 식민영토로 지배하는 이익에 안주하면서 시민사회 성립 기의 이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기만하게 됨에 따라 지속적으로 확대되 지 못하고 오히려 서구 현대문학의 심각한 혼돈으로 전이(轉移)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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