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개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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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가의 개념 범주
향가 ( 鄕歌 ) 의 개념
1) ①‘鄕’= 시골 , 향토 / 중국한시 漢詩 에대한우리노래의통칭
(1) 서정적 갈래 : 향가
( )
② 신라중기이후고려초기까지차자 ( 借字 ) 표기로이루어진국문시가의범칭
. ③ 특정갈래의명칭이아니라다양한형식과내용을포괄하는우리노래의총칭이면서상층과하층이 두루소통할수있는문화적통로
④ 4 구체와같은민요형식에서부터불교적발원 그리고격조높은서정성을구현한 구체에이르기 까지그양식적편폭이다양함 .
향가의 형식
2) ① 4 구체 / 8 구체 / 10 구체 .②3구( 三句 )와6명( 六名 ): 한시의 언 五言 자 七字 에대응 균여전 均如傳 기존의통설 : 3 구 (10 구체향가의 장구조 명 구체향가의 절구조 - ③ ‘ 차사 ( 嗟辭 )’ 와 ‘ 사뇌격 ( 詞腦格 )’ 차사 : 10 구체향가의 행앞에놓이는감탄사 후대의시가 詩歌 에도지속적인영향 - 사뇌격 : ‘ 사뇌 ’ 의격 . ‘ 사뇌 ’ 의의미는 시 東 혹은 시나위 무가의일종 라는설이유력함 -
⑤ 10 구체향가는 구~구구~구구~ 구의세부분으로시상이정리된다 특히마지막에위치 한 9 구와 10 구를낙구 落句 라부르며 구의맨앞에감탄사가위치하는특징이있다 세번째부분
← ‘ 배경설화 를 고려하여 파악해야 함
향가의 성격
3) ① 정치성 : < 안민가 > - “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君君臣臣民民 살자는정치적선언
5 ( ), 7()(3)/6 (10
6 ).
()‘[ ]’ ‘[④4 구체향가들이현재의상황을직서적으로전달하는방식으로시상이전개되고있는데반하여 구체향가들은현재의상황을비유를통해은유적으로전달하고 , 그것에대한시적자아의감상이 제 9 구와제 10 구에서정리되는안정된모습을보인다 또그내용에서도 구체향가가민요나동요의 . 정착으로현실위주의일차원적내용을담고있다면 , 10 구체향가는종교적염원이나화랑에대한 찬양 , 추모 , 유교적정치이념등으로다양화되며개인적서정시로서정제된모습을보이고있다
14,58,9 10 ( )
, 9 의첫머리에감탄사가위치하는것은시조의 3 장첫구에 어즈버 아희야 등의감탄사가위치하는 것과유사하며 , 시상이세부분으로정리된다는점또한비슷하다고할수있다
‘ , ’
’
[
]”
). ( )
]’
, 10
② 종교성 : < 풍요 >, < 원왕생가 우적가 보현십원가 -
초자연적신비주의의성취 : 후대의시가에는없는향가의특수성 혜성퇴치 잣나무부활 태양의변 고퇴치 , 역병퇴치 충신의유령현현
④ 서정성 [ 사랑 ]: < 서동요 >, < 헌화가 > - 남녀간의이별과사랑고백 ⑤ 서정성 [ 죽음 ]: < 모죽지랑가 제망매가 찬기파랑가 고인에대한애틋한정서의표현
향가 관련 기록들
삼국사기
1) ① “ 왕이전부터 角干魏弘 과좋게지내더니 이때에이르러는항상 入內 하여 用事 케하고이내그에
삼국유사
2) ① “ 第五居烈郞 第六實處郞 第七寶同郞 등세 花郞 의무리가 楓岳 에놀려고하였을때 彗星 이 , 心大星 을범하였다 . 郞徒 들이의아하여여행을중지하려고하였다 이때에 融天師 가 鄕歌 를지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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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앙에귀의하리라는결심 ( 공덕 , 왕생 , 선릉 , 화엄신앙의완성
).
③ 주술성 : < 혜성가 >, < 원가 >, < 도솔가 >, < 처용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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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러나배경설화가소개하는다양한맥락의현실적성취에도불구하고 , 향가텍스트의내적본질자 체는 ‘ 서정성 ’ 에있음 . 따라서향가를배경설화의삽입가요로보지않고 한국서정시의원류로자리 , 매김하는것임 .
, . 부르매 怪星 이곧없어지고 日本兵 이물러가서도리어경사가되었다 .”
② “ 景德王十九年庚子四月一日 에해둘이나란히나타나열흘동안이나없어지지않았다 日官 이 아뢰기를 緣僧 을 청 하여 散花功德 을지으면재앙을물리치리라하였다 . 이에 朝元殿 에 깨끗 한 壇 을설하고 靑陽樓 에 行幸 하여 緣僧 을기다 렸 다 . 때에 月明師 가 阡陌 남 쪽길 을가 므 로왕이 使者 를보내불러 壇 을열고 祈禱文 을지으라하였다 . 月明 이아뢰기를 僧 은 國仙徒 에속하여 단지鄕歌를 알뿐 이요 梵聲 에는 익숙 치 못 하다고하였다 . 왕이이르되 이미 緣僧 연 승 으로 뽑혔 으니 鄕,“歌( 향가 ) 라도좋다 고하였다 .”
.” ③ 신라사 람 이 鄕歌 를 崇尙 한자 많 았으니대개 詩頌 과같은 類 다 . 그러 므 로왕왕 능 히 天地鬼神 을 감동시 킴 이한두가지가아니었다 .
.”
( )
④ 왕이가로되내가들으니 師 의 耆婆郞 을찬미한 詞腦歌 가그 뜻 이매우높다하니과연그러하 냐 . 대답하되그러 합 니다 . 그러면나를위하여 安民歌 를지으라하였다 忠談 이곧명을 받 들어노래를 . 지어 바 치니왕이아름다이여 겨 王師 를 封 대 忠談 이 再拜 하고 굳 이사양하며 받 지아니하였다 .
균여전
3) ① “ 夫詞腦世人戱樂之具 세상사 람 들이 즐 기는도구
향가의 역사적 전개 양상 ( 음영은 종 문학교과서 수록 작품
왕명 ( 연대 )
진평왕 (579~631)
세 선덕왕 (632~646) 기 문무왕 (661~680)
효소왕 (692~701)
성덕왕 (702~736)
세
기 경덕왕
찬기파랑가 >, 충담사 화랑 기파랑의 고매한 인품을 추모한 노래 (742~764) <
원성왕 9 (785~799)
헌강왕 (875~885)
세
기
광종 (949~975)
이
예종 (1105~1122)
후
”
작품명 및 작자
배경설화
침범한 왜구와 큰별을 범한 혜성을 물리친 축사의 노래
< 혜성가 >, 융천사
서동이 선화공주를 취하려고 아이들을 시 통일전쟁의 켜 부른 동요
< 서동요 >, 서동
양지가 영묘사 불상을 만들 때 성 안 사람 들이 흙을 운반하며 부른 노래
< 풍요 >, 미상
진리를 깨달아 극락왕생하기를 바라는 불 교 신앙의 노래
원왕생가 >, 광덕 <
모죽지랑가 >, 득오 득오가 죽지랑을 사모하여 지음 <
소를 몰고 가던 노인이 수로 부인에게 꽃 을 바치며 부른 노래
헌화가 >, 노인 <
왕의 식언을 원망하며 잣나무에 써서 붙인 노래
원가 >, 신충 <
죽은 누이의 재를 올리며 명복을 빈 추도 의 노래
제망매가 >, 월명사 <
두 개의 해가 나타난 괴변을 물리치기 위 해 지은 ‘ 산화가 ’
도솔가 >, 월명사 <
안민가 >, 충담사 치세안민의 노래를 왕명을 받아 지음 <
분황사 관음보살에게 아들의 눈을 뜨게 해 주기를 빈 기도의 노래
도천수관음가 >, 희명 <
영재가 대현령에서 도적을 만나 부른 설도 ( 說道 ) 의 노래
우적가 >, 영재 <
아내를 범한 역신을 용서하여 감복시켰다 는 주술적 무가
처용가 >, 처용 <
보현십원가 >, 균여 <
도이장가 >, 예종 신숭겸과 김락을 추모하기 위해 지음 <
)
역사적 배경
시작기
통일신라 문화의 형성기
전제왕권 실현기
정치적 격동기
독서삼품과 설치
賓貢諸子 귀국
전제왕권 실현기
향가의 잔영
개별 작품 자료
혜성가
1)
第五(제5) 居烈郞(거열랑), 第六(제6) 實處郞(실처랑)【혹은 突處郞(돌처랑)이라고 씀】, 第七(제7) 寶同郞(보동랑) 등 세 花郞(화랑)의 무리가 楓岳(풍악)에 놀려고 하였을 때, 彗星(혜성)이 心大星(심대 성) 을 범하였다. 郞徒(낭도)들이 의아하여 여행을 중지하려고 하였다. 이때에 融天師(융천사)가 鄕歌(향 가)를 지어 부르매 怪星(괴성)이 곧 없어지고 日本兵(일본병)이 물러가서 도리어 경사가 되었다. 大王(대 왕)이 기뻐하여 낭도들을 풍악에 놀러 보냈다. 그 鄕歌(향가)에 「 옛날 東海(동해)가의 乾達婆(건달파)가 놀던 城(성)을 바라보고 倭軍(왜군)이 왔다고 봉화를 살르게 한 東海邊(동해변)이 있도다. 三花郞(3화랑) 의 오름을 보옵심을 듣고 달도 빨리 그 빛을 나타내므로 길을 쓰는 별을 바라보고 彗星(혜성)이라 말한 사람이 있다. 後句(후구) 아아 달이 아래에 떠갔도다. 어이유 무슨 彗星(혜성)이 있을고 」.
1)
서동요
2)
第三十代 武王의 이름은 璋이다 . 그 모친이 과부가 되어 서울 南池 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연못의 용과 교통하여 장을 낳고 兒名을 서동이라 하였는데 그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 항상 마를 캐어 팔아서 생활하였으므로 , 국인이 이에 의하여 이름을 지었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서울로 가서 마를 가지고 동내 아이들을 먹이니 아이들이 친해서 따르게 되었다 . 이에 동요를 지어 여러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였는데 그 노래에 “ 선화공주님은 善化公主主隱 남 그스기 얼어 (
)/ 두고 ( 他密只嫁良置古 )/ 서동 방으로 ( 薯童房乙 )/ 밤에 몰래 안겨 간다 ( 夜矣卯乙抱遣去如 ). ” 라 하였다 . 동요가 서 울에 퍼져 대궐에까지 알려지니 백관이 임금에게 극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보내게 하였는데 장차 떠나 려 할 때 왕후가 순금 一斗를 노자로 주었다 . 공주가 귀양처로 갈 때 서동이 도중에서 나와 맞이하며 侍衛하 고 가고자 하였다 .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 지는 모르나 우연히 믿고 기뻐하여 따라가며 潛通하였다 그 후에야 .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가 맞은 것을 알았다 . ( 후략 )
풍요
3)
釋(석) 良志(양지)는 그 祖考(조고)와 鄕邑(향읍)이 未詳(미상)하고 오직 善德王朝(선덕왕조)에 事蹟 (사적)을 나타냈다. 錫杖(석장) 위에 한 布袋(포대)를 걸어두면 석장이 저절로 날아 施主(시주)의 집에 가서 흔들리며 소리를 내었다. 그 집에서 알고 齋費(재비)를 넣되 포대가 차면 날아 돌아왔다. 그러므로 그가 있던 곳을 錫杖寺(석장사)라고 하였다. 그의 헤아릴 수 없는 신이함이 모두 이와 같았다. 일방 잡예 에도 통하여 신묘함이 비길 바 없었으며 또한 筆札(필찰)을 잘하여 靈廟寺(영묘사)의 丈六三尊(장륙삼 존), 天王像(천왕상), 殿塔(전탑)의 기와와 天王寺塔(천왕사탑) 밑의 八部神將(팔부신장)과 法林寺(법림 사)의 主佛三尊(주불삼존), 左右金剛神等(좌우금강신등)이 모두 그의 만든 것이다. (또 그는) 靈廟寺(영 묘사)와 法林寺(법림사)의 懸板(현판)을 썼으며 또 일찍이 磚(전:벽돌)을 彫刻(조각)하여 한 작은 塔 (탑)을 만들고 거기에 三千佛(3천불)을 새겨 그 塔(탑)을 寺中(사중)에 安置(안치)하고 致敬(치경)하였 다. 그가 靈廟寺(영묘사)의 丈六像(장륙상)을 만들 때에 入定(입정)에서 正受(정수)의 態度(태도)로 揉式 (유식)을 삼았으므로 城中(성중)의 士女(사녀)가 다투어 진흙을 날랐다. 民謠(민요)에 『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서럽더라 서럽도다 이몸이여 功德(공덕) 닦으러 온다 』하여 지금도 鄕人(향인)들이 방아를 찧을 때 에 그렇게 부르니, 대개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후략)
1) 이십팔수(二十八宿)의 중심이 되는 별. 지금의 전갈자리.
원왕생가
4)
文武王代에 沙門 廣德과 嚴莊이란 두 사람이 서로 친하여 밤낮으로 약속하되 먼저 安養으로 돌아가는 자는 모름지기 ( 서로 ) 알리자고 하였다 . 광덕은 분황사 西里에 은거하여 신 삼는 것을 업으로 하며 처자를 데리고 살았다 . 엄장은 남악에 암자를 짓고 거기에 거하여 林木을 베어 화전을 하였다 어느날 日影은 붉은 빛을 띠()고 松陰은 고요히 저물었는데 , 창밖에 소리가 나며 말하기를 나는 이미 서쪽으로 가니 그대는 잘 있다가 속,“히 나를 따라오라 .” 하였다 . 장이 문을 열고 나가보니 雲外에 天樂 소리가 나고 광명은 땅에 뻗쳤다 다음날에 . 莊이 廣德의 거소를 방문하였더니 과연 德이 죽었다 . 이에 그 처와 함께 유해를 거두어 蒿里를 만들고 나서 그 처에게 이르되 , “ 남편이 죽었으니 같이 삶이 어떠하냐 .” 하매 그 처가 좋다하여 드디어 유숙하였다 . 밤에 잘 때 남녀의 정을 통하려 하니 그가 부끄러이 여기며 말하되 , “ 師가 서방정토를 구함은 나무에 올라 고기를 구하 는 격이라고 할 수 있다 .” 하였다 . 엄장이 驚怪하여 물어 가로되 광덕이 이미 그랬거늘 난들 어찌 아니 되겠느 , “ 냐 ?” 처가 말하되 廣德이 나와 여년이나 동거하였으되 아직 하룻저녁도 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거늘 하물며 , “ 더러운 짓을 하였으랴 . 다만 每夜에 端身正坐하여 큰 소리로 阿彌 陁 佛의 이름을 외우고 혹은 관을 지어 觀 16 이 이미 숙달하여 명월이 창에 비치면 그 빛에 加趺하였다 . 그 정성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서방정토로 가지 않고자 한들 어디로 가리요 . 대개 천리를 가는 자는 그 첫걸음으로써 규정할 수 있나니 지금 師의 觀은 동으 로 간다 할지언정 서으로는 갈 수 없다 .” 하였다 . ( 중략 ) 덕이 일찍이 노래를 지어 이르되 , “ 달아 , 이제 서방까지 가려시려는가 ? 무량수전에 뉘우침 오래됨을 힘써 사뢰주소서 . 맹서 깊으신 존전을 우러러 두 손을 모두어 , 원 왕생 원왕생 그리는 사람이 있다고 사뢰소서 . 아아 . 이 몸을 남겨 두고 사십팔대원을 이루실까 .”
모죽지랑가
5)
제32대 효소왕 때에 竹曼郞의 무리 중에 得烏 級干이 있어 風流黃卷에 이름이 올라 날마다 출근하더니 한 열흘동안 보이지 아니하였다. 郞이 그 母를 불러 아들이 어디 있는가를 물으니 그 母가 말하되 幢典 牟梁(部) 益宣阿干이 내 아 들을 부산성 倉直으로 임명하였으므로 급히 달려 가느라고 낭에게 고하지도 못하였노라 하였다. 낭이 가로되 네 아들이 만일 私事로 갔다면 찾아볼 필요가 없지만 公事로 갔다니 응당 가서 대접하리라 하고, 舌餠 한 합과 술 한 병을 가지고 左人을 거느리고 가며 낭의 무리 137인도 위의를 갖추고 따라갔다. 부산성에 이르러 문직에게 득오실이 어디 있는가고 물으니, 가로되 지금 益宣의 밭에서 例에 따라 부역하고 있다고 하였다. 낭이 밭으로 찾아가 가지고 간 酒餠을 먹이고 익선에게 휴가를 얻어 같이 돌아가도록 청하였으나 익선이 굳게 거부하여 허락치 아니하였다. 이때 使吏 侃珍이 推火郡 能節의 租 30석을 거두어 성 중으로 수송하다가, 낭이 士를 중히 여기는 風을 아름답게 여기고 익선의 暗塞不通함을 더러히 여겨, 가지고 가던 30석을 익선에게 주고 요청하였으나 그래도 허락치 아니하므로, 또 珍節 舍知의 騎馬鞍具를 주니, 그제야 허락하였다. (중략) 처음에 述宗公이 朔州都督使가 되어 임소로 가게 되었는데, 당시 삼한에 병란이 있어 기병 3천으로써 호송하였다. 일행이 죽지령에 이르니 한 거사가 그 고갯길을 닦고 있었다. 공이 보고 탄미하였고 거사도 또한 공의 위세가 매우 당당한 것을 좋게 여겨 서로 마음에 감동되었다. 공이 임소에 간지 한 달이 되어서 꿈에 거사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부부가 꼭 같은 꿈을 꾸었다. 더욱 괴상히 여겨 이튿날 사람을 보내어 거사의 안부를 물으니, 그 지방 사람이 가로되 거사가 죽은 지 며칠되었다 하였다. 使者가 돌아와 거사의 죽음을 고하매 날짜를 따져보 니 그의 죽음이 바로 꿈꾸던 날이었다. 공이 말하기를 아마 거사가 우리집에 태어날 것이라 하고 다시 군사를 보내어 嶺上北峰에 장사지내고 돌로 미륵을 만들어 무덤앞에 세웠다. 아내는 과연 꿈꾼 날로부터 태기가 있더니 아이를 낳으매 이름을 죽지라 하였다. (그 아이가) 자라서 출사하여 庾信公과 더불어 副帥가 되어 삼한을 통일하고 眞德·太宗·文武·神 文의 4대에 걸쳐 대신이 되어 나라를 안정케 하였다. 처음에 得烏谷이 낭을 사모하여 노래를 지어가로되, “간 봄 못 오 리매/ 못 계시어 우는 이 시름/ 전각을 밝히시던 모습/ 해가 갈수록 헐어가도다/ 눈돌림 없이 저를/ 만나 보기 어찌 이루 리/ 낭이여, 그릴 마음의 모습/ 갈 길 다복구렁에 잘 밤 있으리.” 라 하였다.
헌화가
6)
성덕왕 때에 純貞公이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도중 바닷가에서 晝食을 하고 있었는데 곁에 石峰이 있어 병풍과 같이 바다를 둘렀다 . 높이가 千丈이나 되고 그 위에는 躑躅 花가 만개해 있었다 공의 부인 水路가 , 보고 좌우에게 , “ 누가 저 꽃을 꺾어오겠느냐 하니 從者들이 대답하되 인적이 이르지 못하는 곳이라 하여 ” , 모두 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 곁에 한 늙은이가 암소를 끌고 지나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꽃을 꺾어주며 가사를 지어 함께 바쳤는데 , 그 늙은이는 어떠한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중략 노인의 獻花歌에는 자줏 .()빛 바위가에 / 잡고 있는 암소 놓게 하시고 / 날 아니 부끄리시면 /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 고 하였다 .
원가
7)
효성왕이 잠저시에 賢士 信忠과 더불어 궁정 잣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었는데 , 어느날 신충에게 이르기를 他 日에 내가 만일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인이 될 것이다 ” 라고 하매 신충이 일어나 절하였다 두어 달 , 후에 왕이 즉위하여 공신에게 상을 주되 신충을 잊고 차례에 넣지 아니하였다 . 충이 원망하여 노래를 지어 잣 나무에 붙였더니 , 나무가 홀연 말라 버렸다 왕이 이상히 여기어 사람을 시켜 조사케 하였던바 노래를 얻어 바 .
, “
, “
, 쳤다 . 왕이 大驚하여 가로되 , “ 萬事를 장악함에 각궁을 잊을뻔 하였다 .” 하고 그를 불러 작록을 주니 , 栢樹가 다 시 소생하였다 . 그 노래에 이르기를 , “ 질 좋은 잣은 가을에도 말라 떨어지지 아니하며 너를 중히 여겨 가겠다 하신 것과는 달리 낯이 변해 버리신 겨울이여 / 달이 비치고 잠잠한 못에 지나는 물결에 대한 모래로다 모습이 야 바라보지만 , 세상 모든 것 여의어 버린 처지여 하였는데 뒷 구는 없어졌다 이로써 총애가 孝成王 景德王에 ” 이르기까지 두터웠다 .
제망매가
8)
월명이 또 일찍이 亡妹를 위하여 齋를 올리고 향가를 지어 제사할 새 , 홀연히 광풍이 일어 紙錢을 날려 西쪽 으로 없어졌다 . 그 향가에 하였으되 , “ 생사의 길은 이에 있으매 머뭇거리고 나는 간다 말도 못다 이르고 가나 닛고 / 어느 가을 이른 아침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온져 아아 미타찰에서 만/날나도 닦아 기다리겠노라 ”. 월명이 항상 사천왕사에 있어 저笛를잘 불었다 일찍이 달밝은 밤에 저를 불[]며 문앞 큰길을 지나니 달이 가기를 멈추었다 . 이로 인하여 그 길을 月明里라 하였다 법사도 또한 이로써 이 . 름이 나타났다 .
도솔가
9)
경덕왕 19 년 경자 월 일에 해 둘이 나란히 나타나 열흘동안이나 없어지지 않았다 일관이 아뢰기를 緣僧을
4 1 청하여 散花功德을 지으면 재앙을 물리치리라 하였다 . 이에 朝元殿에 깨끗한 壇을 설하고 靑陽樓에 行幸하여 연승을 기다렸다 . 때에 월명사가 阡陌 남쪽 길을 가므로 왕이 使者를 보내 불러 壇을 열고 祈禱文을 지으라 하였다 . 월명이 아뢰기를 僧은 國仙徒에 속하여 단지 향가를 알뿐이요 梵聲에는 익숙치 못하다고 하였다 . 왕 이 이르되 , “ 이미 緣僧으로 뽑혔으니 鄕歌라도 좋다 .” 고 하였다 . 이에 월명은 兜率歌를 지어 바쳤다 . 그 가사 에 , “ 오늘 여기 산화가를 부르니 뿌려지는 꽃이여 너는 / 고운 마음의 명을 받들어 미륵좌주를 뫼셔라 .” . 그 시를 해석하면 이렇다 . “ 龍樓에서 오늘 散花歌를 불러 靑雲에 一片花를 보내니 殷重한 곧은 마음이 시킴 , 이니 멀리 兜率의 大仙家를 맞이하노라 .” 하였다 .
하였다
찬기파랑가
10)
왕이 가로되 내가 들으니 師의 耆婆郞을 찬미한 詞腦歌가 그 뜻이 매우 높다 하니 果然 그러하냐 . 대답하되 그러합니다 . ( 중략 ) “ 열치매 나타난 달이 흰구름 좇아 떠 가는 것 아니야 새파란 내에 기랑의 모습이 있어라 / 이로 나리 조약에서 낭이 지니시던 마음의 끝을 좇누아져 / 아아 , 잣가지 높아 서리 못 누울 화판이여 ”
안민가
11)
왕이 御國한 지 24 년에 五嶽 三山의 신들이 간혹 현신하여 殿庭에서 왕을 모시더니 ,3월3 일에 왕이 歸正門 樓上에 납시어 좌우에 묻되 누가 능히 도중에서 한 榮服僧을 데려올 수 있겠느냐 하였다 . ( 중략 ) 다시 한 중이 衲衣를 입고 櫻筒을 지고 남쪽에서 오는지라 , 왕이 기뻐하여 樓上으로 영접하고 그의 통속을 보니 茶具가 담 겨 있었다 . 네가 누구냐고 물으니 忠談이라고 대답하였다 또 어디서 오느냐고 물으니 가로되 내가 매양 重 , .
. ( ) 三과 重九日에는 차를 다려서 南山 三花嶺의 彌勒世尊에게 드리는데 , 오늘도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하였다 ( 중략 ) 그러면 나를 위하여 安民歌를 지으라 하였다 . 忠談이 곧 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치니 왕이 아름다 이 여겨 王師를 封한대 忠談이 再拜하고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아니하였다 . 그의 安民歌에 가로되 , “ 君은 아비 요 臣은 사랑스런 어미시라 , 民을 어리석은 아이로 여기시면 民이 사랑하리라 , 구물구물 사는 뭇 창생 , 이를 먹여 다스릴지어다 .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갈소냐 하면 나라를 다스려 지리라 하고 후구에는 君답게 臣답 .” , 게 民답게 할찌면 , 나라가 태평하리이다 하였다 ” .
도천수관음가
12)
, “
景德王代(경덕왕대)에 漢岐里(한기리)에 사는 女子(여자) 希明(희명)의 兒孩(아해)가 난지 五年(5년)만에 갑자기 눈이 멀었다. 어떤날 그 어머니가 애를 안고 芬皇寺(분황사) 左殿(좌전) 北壁畫(북벽화)의 千手大悲(천 수대비) 앞에 가서 아이를 시켜 노래를 지어 빌었더니, 마침내 눈을 떴다. 그 노래에 가로되 『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두어서 千手觀音(천수관음) 앞에 빌어 삷아두나이다. 즈믄(千:천)손 즈믄눈을 가지셨사오니 하나를 내 어 하나를 덜어 둘없는 내오니 하나를랑 주시옵시라. 아아 나에게 주시옵시사. 나에게 주시면 慈悲(자비)가 클 것이로이다 』하였다. 讚(찬)하노니 『竹馬(죽마)·葱笙(총생)이 陌塵(맥진)에 놀더니 하루 아침에 두 눈이 멀었 도다. 大士(대사)가 慈眼(자안)을 돌리지 않았던들 헛되이 楊花(양화)를 보냄이 몇 春社(춘사) 런고』.
2) 立春後五戊日(입춘후5무일)을 春社(춘사)라 한다. 여기는 그저 ‘봄’, ‘해’란 뜻.
2)
우적가
13)
僧(승) 永才(영재)는 天性(천성)이 滑稽(활계)하여 財物(재물)에 매이지 않고 鄕歌(향가)를 잘하였다. 晩年 (만년)에 장차 南岳(남악)에 隱居(은거)하려고 하여 大峴嶺(대현령)에 이르렀을 때 도적 六十餘人(60여인)을 만났다. 〔賊(적)이〕 장차 加害(가해)코자 하매 才(재)는 그 칼날 앞에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고 和氣 (화기)롭게 對(대)하였다. 賊(적)이 이상히 생각하여 그 이름을 물으니 永才(영재)라고 대답하였다. 賊(적)이 平素(평소)에 그 이름을 들은지라 (그에게) 命(명)하여 노래를 짓게 하였다. 그 歌詞(가사)에 가로되 「 내 마 음에 모든 形骸(형해)를 모르려 하던 날 멀리 □□ 지나치고 이제란 숩〔藪(수)=寺(사)〕에 가고쇠다 오직 그 르친 破戒僧(파계승)을 두려워할 形骸(형해)에 또 돌아가노니, 이 칼을 지내고나면 좋은 날이 새리러니 아-오 」. 도적이 그 뜻에 感動(감동)하여 綾二端(능2단)을 주었다. 才(재)가 웃고 직 요맛 善(선)은 새집이 안되니다 謝禮(사례)하여 가로되 「財賄(재회)가 地獄(지옥)에 가는 根本(근본)임을 알어 장차 窮山(궁산)에 숨어 一生 (일생)을 보내려고 하거든 어찌 감히 이것을 받으리요」하고 땅에 던졌다. 도적이 또 그 말에 感動(감동)되어 모두 그 가졌던 칼과 창을 버리고 머리를 깎고 才(재)의 徒弟(도제)가 되어 같이 智異山(지리산)에 숨어 다시 世上(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才(재)의 나이 九十(90)이니 元聖大王(원성대왕) 때이었다. 讚(찬)하노니 「지팡 이 집고 산에 돌아가니 그 뜻은 더욱 깊은데 비단 구슬이 어찌 마음을 다스리랴. 綠林(녹림) 의 君子(군자)가 서로 膳物(선물)을 하였으나, 地獄(지옥)은 다름아닌 寸金(촌금)이 根因(근인)이다」.
처용가
14)
제 49 대 헌강대왕 대에 서울로부터 海內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連하고 草家는 하나도 없었으며 풍악과 노래
3)
, 가 길에서 끊이지 않고 풍우는 사철 순조로웠다 . 이에 대왕이 開雲浦에 出遊하였다가 장차 돌아올새 낮에 물 가에서 쉬었는데 홀연히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길을 잃을 정도였다 . 괴상히 여겨 좌우에 물으니 日官이 아 뢰기를 이것은 동해 용의 조화이므로 좋은 일을 행하여 풀 것이라 하였다 . 이에 當該官員에게 명하여 용을 위 하여 근처에 절을 세우도록 하였다 . 왕명이 이미 내리매 구름이 개이고 안개가 흩어졌다 그래서 개운포라 이 . 름지었다 . 동해 용이 기뻐하여 아들 일곱을 데리고 임금 앞에 나타나서 덕을 찬양하고 춤을 추며 음악을 연주 하였다 . 그 중 一子는 임금을 따라 서울에 와서 정사를 보좌하였는데 이름을 처용이라 하였다 왕이 미녀로써 . 아내를 삼게 하여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하고 또 급간의 직을 주었다 . 그의 아내가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역신이 흠모하여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그 집에 가서 몰래 동침하였다 . 처용이 밖으로부터 집에 돌아와 자리에 두 사 람이 누웠음을 보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물러나갔다 . 노래에 가로되 , “ 동경 밝은 달에 밤드리 노니다가 / 드러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네히러라 / 둘은 내 해이인데 둘은 누구 핸고 / 본디 내 해다마는 빼앗긴 것을 어찌 하라있고 ” 라 하였다 .
3) 山賊(산적)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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