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연구소]e저널 <도시와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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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사람
와
2021 autumn
Urban & Human
반갑습니다.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장 권응상입니다. 본 연구소는 지역 사회와 함께 하는 인문교육연구소로 거듭나고자 <인문교육지원센터>를 신설하고, 여러 지역 인문 단체와 협약을 통한 인문학 강의 콘텐츠 개발, 전문가 초청 강연 및 지역 도서관 특강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본 연구소는 그간 집적된 연구 및 교육 성과를 공유하고자 e-저널 <도시와 사람>을 발간합니다. 매년 3월과 9월, 새 학기에 발간되는 <도시와 사람>을 통해 동아시아 및 도시 인문학의 대학과 지역사회의 환류를 이루고자 합니다.
지난 3월 창간호에 이어 이번 <도시의 사람> 9월호에는 다양한 문화와 역사의 지층이 켜켜이 쌓인 페루의 도시 쿠 스코 기행과, 일본의 문화와 문학에 영향을 끼친 겐페이 전투와 요시쓰네 이야기를 통해 남미와 일본의 역사와 문화 를 살펴봅니다. 그리고 <교수신문>과 <딴지일보>에 연재 중인 공동연구원 교수님들의 ‘거리의 대학’과 ‘홍콩의 진실 에 대하여’를 공유하고, 대학 - 지역의 연계 방안과 홍콩의 역사·문화적 정체성 등을 함께 고민해봅니다.
이밖에도 연구소에서 개발 및 운영하는 교과목 <기차와 도시의 탄생>, <지역 문화의 이해>과 ‘트랜스-로컬 시네마 포럼’의 운영 사례, 지역 도서관과의 협업을 통한 지역 시민인문강좌 사례, 그리고 학술협약을 맺은 제주대학교 탐라 문화연구원과 공동개최한 2021년 국제학술대회 등의 성과를 공유함으로써 동아시아 인문교육 혁신과 연구 성과의 대학 및 지역사회로의 환류, 지역 인문교육 생태계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앞으로도 본 연구소의 연구와 활동 에 많은 관심과 성원을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21년 9월 1일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장 권응상
2021 autumn
CONTENTS
02 소개말/인사말 03 목차 04 권응상의 도시기행 _ 페루 쿠스코 10 허영은의 일본 이야기 _ 겐페이전투 비운의 명장 요시쓰네 15 양진오의 '거리의 대학' _ 지학협력, 가르치지 말고 먼저 배워야 한다 18 류영하의 '홍콩의 진실에 대하여' 1 _ 우리는 아편전쟁의 진실을 모른다 26 도시인문학 수업사례 1 _ 기차와 도시의 탄생 28 도시인문학 수업사례 2 _ 지역문화의 이해 30 시네마 기행 _ 트랜스-로컬 시네마 포럼 34 국제학술대회 _ “길 위의 경계인 : 환대의 부재와 떠도는 영혼” 36 2021년 상반기 지역 & 시민인문강좌 37 인문과학연구소 2021년도 2학기 행사 안내
도시 와 사람
발행일┃2021년 9월 1일 발행인┃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장 권응상 발행기관┃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경북 경산시 진량읍 대구대로 201 인문대학 교수연구동 인문과학연구소(3103호) Tel. 053) 850-5821 Fax. 053) 850-5824 http://ihs.daegu.ac.kr
권응상의 도시기행
페루 쿠스코
(Peru Cuzco)
나의 남미 여행 꿈은 잉카제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마추픽추 유적으로 대표되는 잉카제국의 신비는 어 릴 적 ‘어깨동무’나 ‘소년중앙’ 같은 어린이 잡지에서 처음 접한 듯하다. 그 기억이 제법 견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나보다. 나 이 들면서 점점 버킷 리스트 앞머리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남미 여행은 간단치 않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 대륙인데다가 모든 것이 정반대이다. 남반구에다 시차도 12시간이니 정확히 한반도와 대척점에 있는 지역인 것이다. 직항도 없어서 가는 시간만 도 이틀이 걸린다. 그러니 안 가거나 못 가는 사람은 있어도 여행 기간이 며칠에 그치는 사람은 드물다. 결론적으로 많은 시간 이 필요하고 비용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더 늦으면 체력적으로도 쉽지 않을 것 같아 큰 용기를 냈다. 어느 봄날 마침내 남미의 가을 속으로 떠났다. 인천을 출발하여 도쿄와 휴스턴을 거쳐 이틀 만에 페루의 수도 리마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1시간 30 분을 더 비행하여 쿠스코에 도착했다.
안데스산맥 해발 3,399m에 자리 잡은 쿠스코는 내 가슴을 뭉클하게 찔렀다. 희박한 산소 때문인지 마침내 왔다는 감격 때 문인지 모르겠다. 아니 잉카제국의 비극 때문이리라. 어디에선가 ‘엘 콘도르 파사(El Condor Pasa)’의 선율이 말타(Malta: 팬파이프의 일종)에 실려 나왔다. 눈이 시린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접시 같은 분지에 정갈하게 담겨있는 도시의 첫인상은 그렇 게 사랑에 빠진 소년의 가슴처럼 속절없이 쿵쾅거리게 했다.
쿠스코는 한때 백만 명이 살았던 옛 타완틴수요(Tawantinsuyo), 즉 ‘잉카제국’의 수도였다. 유럽인들이 잉카제국이라 부 르는 타완틴수요는 15세기 중엽에서 16세기 초에는 안데스를 중심으로 현재의 에콰도르, 볼리비아, 칠레 북부까지 지배하는 광대한 제국이었다. 태양신을 숭배했던 이 제국의 왕을 ‘잉카’라고 불렀는데, 유럽인들이 이 용어를 그대로 제국의 이름으로
사크사이와만에서 조망한 쿠스코 전경 도시와 사람 2021 autumn
아르마스 광장 전경. 왼쪽이 쿠스코 대성당, 오른쪽이 라 콤파니아 데 헤수스 교회
사용했던 것이다. 쿠스코는 원주민 언어인 케추아어로 ‘세계의 배꼽’이라는 뜻이다. 잉카인들은 하늘은 독수리, 땅은 퓨마, 땅 속은 뱀이 지배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세계관에 따라 쿠스코는 도시 전체가 퓨마 모양을 하고 있다. 문자와 종이가 없었던 이 제국은 구전으로 그 역사가 전해온다. 잉카의 신화에 의하면 티티카카 호수에서 태어난 만코 카팍과 그의 누이 마마 오클로가 1200년 경 쿠스코를 세웠다. 쿠스코가 타완틴수요라는 제국의 수도로 성장하고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438년 만코 카팍의 18대 손인 파차쿠티 왕 때부터이다. 그는 사피와 툴루마요 강에 수로를 만들고, 그들이 신성시했던 퓨마의 형상을 따 라 지금의 모습을 만들어나갔던 것이다.
쿠스코의 건물들은 잉카의 뼈에 스페인 정복자의 살이 붙어 있다. 16세기 중반 스페인의 침략자 피사로가 이 찬란했던 제 국을 멸망시키고 300년 넘게 식민통치를 했다. 그러나 잉카의 뼈대는 없애지 못했다. 식민 통치자들은 잉카제국의 궁전과 신 전 자리에 유럽풍의 궁전과 종교 건축물을 세웠다. 쿠스코 대성당, 라 콤파니아 데 헤수스 교회, 산토 도밍고 교회 등이 스페인이 붙인 살이라면 비라코 차(Viracocha) 신전, 와이나 카팍(Huayna Capac) 궁전, 코리칸차(Qorikancha) 신전 등은 그 살을 지 탱하는 잉카의 뼈이다. 살은 겉모양이어서 눈으로 볼 수 있지만 뼈는 그 안에 숨어 있어서 자세히 찾아 보고 느껴야 한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만든 스페인 풍의 이 도시가 여느 스페인 도시와 같지 않은 이유 는 바로 이 잉카의 뼈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아르마스 광장의 쿠스코 대성당
쿠스코의 배꼽 같은 아르마스 광장에서부터 여정 을 시작했다. 이 광장은 도시의 중심지이자 쿠스코 를 상징하는 대표적 볼거리가 몰려 있다. 광장을 들 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축물이 잉카 시대의 비라코차 신전 자리에 세워진 대성당이다. 1650년 에 발생한 대지진을 거치면서 건축 기간이 100년이 나 걸렸다는 이 성당은 잉카의 흔적을 없애고 식민 시대를 여는 상징이었다. 스페인의 톨레도 대성당이 나 세비야 대성당에 견줄 수는 없지만 제단을 만드 는 데만 은 300톤을 쏟아 부었다고 하니 잉카를 지 우려는 정복자들의 대역사였던 셈이다. 또 이 성당 안에 소장되어 있는 마르코스 사파타의 ‘최후의 만 찬’ 성화에는 이교도를 향한 전도의 집념과 놀라운 순발력을 볼 수 있다. 식탁 위의 만찬에 이곳의 전통 음식 ‘쿠이(쥐처럼 생 긴 기니피그의 일종)’를 그려 넣었다. 대성당과 함께 기역자로 광장을 만들어주고 있는 고풍스러운 건축물은 라 콤파니아 데 헤수스 교회이다. 역시 잉카 11대 황제 와이나 카팍의 궁전을 부수고 그 위에 세웠다. 좌우 대칭을 이루는 우아한 종탑과 섬세 한 외벽 부조가 눈을 사로잡았다. 바로 옆에 자리한 대성당의 위세에도 나름의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남동쪽으로 비교적 큰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쿠스코에서 가장 번화한 엘솔 거리를 만난다. 이곳에 있는 산토 도밍고 교회도 태양의 신전 코리칸차를 부수고 세운 스페인의 살이다. ‘코리’는 케추아어로 ‘황금’, ‘칸차’는 ‘울타리’를 뜻 하니 ‘황금 울타리’이다. 이름처럼 잉카제국 시대에는 벽에 폭 20센티 이상의 황금 띠가 둘려있었고, 문과 지붕 등에도 금이 덮 여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때의 화려한 모습이 사라졌지만 당시 스페인이 남긴 자료에 따르면 신전 전체가 눈부신 황금빛이
었다. 식민 지배자들은 이 궁전을 가득 채우고 있던 황금 장식을 모두 떼어 스페인으로 가져갔는데, 갑 자기 유입된 황금 때문에 유럽에 인플레가 왔을 정 도로 엄청난 양이었단다. 이 신전을 부수고 남은 뼈 대 위에 세워진 산토도밍고 교회는 1650년에 일어 난 쿠스코 대지진 때 모두 무너졌다. 다시 증축했지 만 그 교회 역시 1950년 때 대파되었다. 그렇지만 그 뼈대인 석벽만은 뒤틀림 하나 없었다고 한다. 그 래서 이 교회는 거꾸로 잉카인의 뛰어난 석조 건축 술을 대변하는 건축물이 되고 있다.
잉카인의 석조 건축술을 가장 실증적으로 보여주 는 것이 이른바 ‘12각 돌’이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멀지 않은 아툰 루미요크 거리는 석벽으로 둘러싸인 거리이다. 이곳에는 종이 한 장 끼울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다는 12각 돌이 있다. 엄청난 크기의 바위를 모양대로 깎다 보니 12개의 모서리가 생겼고, 그 모 양에 맞게 다른 돌을 정교하게 끼워놓았다. 12각 돌 을 통해 잉카인의 기술과 미학을 제대로 느낄 수 있
산 페드로 시장
잉카인들의 석조 기술과 미의식을 보여주는 12각 돌
포석이 깔린 길과 석벽이 만드는 쿠스코의 골목
산 페드로 시장 담벼락에 난전을 연 원주민 여인들
었다. 아울러 정복자에게 정복당하지 않는 잉카인의 정신 같았다. 이런 석조 벽이 만들어내는 골목의 풍경이야말로 이곳이 잉 카의 도시일 수밖에 없는 잉카의 ‘느낌’이다. 이처럼 쿠스코의 골목길은 잉카의 뼈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좀 더 잉카를 느끼고 싶다면 원주민들을 만날 수 있는 시장으로 가보는 것도 좋다. 쿠스코에서 가장 큰 산 페드로 시장은 아 르마스 광장에서도 그다지 멀지 않다. 야채와 과일, 공예품, 각종 음식, 식당들이 늘어선 건물 안도 볼만하지만 세를 얻지 못한 가난한 원주민 상인들이 만드는 난전이 더욱 흥미롭다. 직접 기른 야채나 나물, 꽃 등을 파는 익숙한 모습에서부터 앞서 언급 한 ‘최후의 만찬’에서 튀어나온 듯한 ‘쿠이’ 통구이나 소의 심장으로 만든 꼬치 안티쿠초, 치차 같은 각종 전통 음료, 동물 껍질 을 튀긴 정체불명의 간식까지, 기괴하고 이색적인 장면들로 지루할 틈이 없다. 자기 덩치 만한 큰 보따리를 짊어진 원주민들과 그 보따리를 풀어서 만든 이러한 난전들은 고단한 잉카인들의 삶을 상징한다. 하지만 구리빛 피부의 작은 체구에 반짝이는 눈 빛을 가진 그들의 인상은 쿠스코의 석벽처럼 단단하고 굴하지 않는 모습이다.
잉카의 대표적 유적지 마추픽추가 아니더라도 스페인의 살이 붙어 있지 않은 쿠스코 근교의 남겨진 잉카 유적들, 즉 온전한
잉카제국의 요새로 추정되는 사크사이와만 유적지. 이곳에서 매년 태양의 축제 ‘인티라이미’가 열린다. 도시와 사람 2021 autumn
잉카시대 계단식 농경지인 파사크 유적지
잉카의 ‘뼈’들을 보게 되면 잉카제국의 위엄을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잉카의 요새로 추정되는 사크사이와만이 대표적인 데, 이곳은 쿠스코의 전경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이곳의 석벽을 뜯어 쿠스코 중심가의 성당이나 관공서 등을 짓는 데 사용했는데, 다행히 큰 돌들은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큰 것은 9미터 높이에 350톤에 달한 다고 하니 옮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매년 6월 24일 이곳에서는 브라질의 리우 카니발, 볼리비아의 오르로 축제와 함께 남 미의 3대 축제로 꼽히는 태양의 축제 ‘인티라이미’가 열린다. 그 외 길흉을 점치는 신전 켄코, 붉은 요새 푸카푸카라, 성스러운 샘이 있는 탐보 마차이, 계단식 농경지 피사크 등도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는 잉카 유적지이다. 통합입장권을 구입하면 이러 한 유적지와 쿠스코 시내의 6개 박물관을 입장할 수 있다.
여행 작가 손미나는 <페루, 내 영혼에 바람이 분다> (예담, 2015)라는 페루 여행서에서 “일생에 한 번쯤은 / 페루 땅에 발을 딛고 / 쿠스코의 파란 하늘을 / 바라보아야 한다 / 그 푸르름을 / 다시 한번 내 두 눈에 / 담을 수만 있다면 / 그럴 수만 있다 면” 이라는 말로 페루 여정을 시작한다. 나 역시 ‘다시 한번 내 두 눈에 담을 수 있다면’ 좋겠다.
권응상 교수┃ 대구대학교 중국어중국학과
허영은의 일본 이야기
겐페이전투 비운의 명장 요시쓰네
일본 국기의 흰색과 붉은 색
일본에서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 31일 저녁에 [홍백 노래대전
(紅白歌合戦) ]을 연다. 남자 가수들은 흰 색, 여자 가수 들은 붉은 색을 상징하는 두 팀으로 나뉘어 노래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관습이 있다. 일본의 국기인 일장기도 마찬가지로 붉은 색과 흰색의 두 가지 색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외에도 일본에서는 운동회를 비롯한 다양한 시합에서 청백전이 아닌 홍백전을 벌인다. 일본을 대표하는 색이 흰색과 붉은 색이 된 이유 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무사들 간의 최대 싸움이 (源平合戦) 에서 유래한다고 보는 것이 었던 겐페이전투
가장 유력하다. <그림 1>
겐페이전투(1180년~1185년)는 조정을 장악하던 헤이시(平氏)와 지방세력인 겐지(源氏)의 두 무사가문 이 일본 각 지역에서 벌인 내전으로 겐지측의 승리로 끝 난다. 이 전투의 결과로 가와치 겐지의 수장이었던 미나
<그림 1> 헤이시(平氏)와 겐지(源氏)의 깃발
모토노 요리토모는 일본 최초의 무사정권인 가마쿠라 막부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된다. 이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이는 요리토모의 이복동생인 요시쓰네였다. 그러나 그는 전쟁이 끝난 후 모반을 꾀했다는 이유로 대역 죄인으로 몰려 비참한 최후 를 맞는다. 겐페이전투 최대의 격전지였던 단노우라해전에서 헤이시 군사들을 섬멸한 요시쓰네는 형이 있는 가마쿠라로 돌 아오고자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센다이의 히라이즈미까지 쫓긴 끝에 자결로 생을 마치게 된다. 겐페이전투 최고 의 영웅이었으나 그 공을 보답 받지 못한 요시쓰네의 삶을 통해 권력다툼이 치열했던 일본 중세 사회를 들여다보기로 한다.
우시마루, 샤나왕 요시쓰네
요시쓰네는 그의 비극적 삶으로 인해 수많은 전설과 설화, TV 드라마와 연극의 주인공이 된 인물로 일본인들에게 가장 인기 (義経記) 』를 위시한 『헤이케이야기』 『겐페이 성쇠기』 등 다양한 역사서에 활약상이 있는 무사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기케이키 기록되어 있고, [요시쓰네의 천 그루 벚꽃]이나 [간진쵸]와 같은 가부키, 인형극 등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요시쓰네가 태어났던 당시는 ‘헤이시가 아닌 자는 사람도 아니다’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로 헤이시의 권력이 막강하 던 시절이었다. 헤이시의 수장이었던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일개 지방 관료에 불과하던 그의 아버지가 궁중 암살사건에서 공 을 세워 상황인 도바인의 비호로 상류 귀족의 일원이 되면서 정권의 전면에 등장한 인물이다. 정권을 잡은 그는 반대파를 잔 인하게 숙청하는 등 혹정을 펼쳐 많은 이의 원한을 사게 된다. 요시쓰네의 아버지는 헤이지의 난에서 기요모리에게 패배하여 애첩인 도키와와 세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교토를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다이라 가문에 잡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요모리의 앞에 출두한다. 이때 요시쓰네는 두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절세미인이었던 어머니 도키와고젠이 기요모리의 첩
이 되는 조건으로 세 아들의 목숨을 살려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결국 도키와는 기요모리의 집에 살게 되는데, 그와의 사이 에서 딸도 하나 낳았다.
요시쓰네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기요모리는 그를 강제로 교토의 구라마데라로 출가를 시켰다. 어린 나이에 출가한 우시와 카마루(요시쓰네의 아명, 다른 아명으로는 샤나왕이 있음)는 열한 살이 되던 해에 자신이 원수의 손에 키워졌다는 출생의 비밀 을 알고 그때부터 헤이시 타도를 꿈꾸며 무예를 갈고 닦았다. 교토의 북쪽 교토대학 부근에 오사카에서 교토까지 연결된 게한 (京阪電鉄) 데마치야나기역 전철 (出町柳駅) 이 있다. 이곳은 에이잔 전철
(叡山電鉄) 의 출발점이기도 한데, 이 전차를 타고 종 점에서 내리면 구라마데라에 갈 수 있다. 그리고 이 구라마데라에서 산길로 물의 신사로 유명한 기후네신사로 가는 길이 있는 데, 바닥에 나무뿌리가 이리저리 엉킨 채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 기괴하고 독특한 풍경을 연출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어린 우시 와카마루는 헤이케 타도의 일념으로 훈련에 매진했다고 한다. 여기서 잠시 요시쓰네가 헤이시 타도를 이루기까지 그의 곁을 지켰던 벵케이와 시즈카고젠 두 사람을 소개하도록 한다.
벵케이와의 만남과 가부키 [간진쵸]
벵케이(弁慶)는 전설적인 괴력을 가진 장사이다. 그는 어머니 뱃속에 18개월 동안 있었고, 태어날 당시 머리카락이 어깨를 덮을 정도로 자라 있었으며 어금니와 앞니까지 나 있는 상태로 이미 두세 살 아이의 몸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이 아이가 도깨비의 아이라고 해서 죽이려고 했지만 숙모가 아이를 맡아 키우며 오니와카(鬼若)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 (五条) 다리에서 밤마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결투를 벌였다. 다. 벵케이는 1,000 개의 칼을 모으고자 결심을 하고 교토의 고죠
사람들로부터 완력으로 999 자루의 칼을 빼앗고 마지막 칼을 노리고 있던 차에 고죠 다리에서 피리를 불며 지나가는 요시쓰 네를 만난다. 힘으로는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던 벵케이는 요시쓰네에게 칼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으나 다리 난간을 가 볍게 뛰어오르는 요시쓰네에게 당하는 신세가 된다. 요 시쓰네에게 항복한 벵케이는 그의 충실한 부하가 되어 맹활약하게 된다.
겐페이전쟁이 끝난 후 요리토모가 요시쓰네를 체포하 기 위해 전국의 주요 관문의 경비를 강화시켰을 때 벵 케이는 지모와 괴력으로 요시쓰네를 교토에서 탈출시킨 다. 가가국(지금의 이시카와현) 아타케 관문에서 도가시 노스케에게 심문을 받았을 때 벵케이는 자신들은 나라의 동대사 재건을 위한 시주를 청하러 각지를 돌고 있는 행 각승이라고 속인다. 그러나 도가시노스케가 계속 의심을 하자 들고 있던 금강 지팡이로 요시쓰네를 마구 두들겨
<그림 2> 가부키 [간진쵸]
팼다. 도가시는 행려승이 요시쓰네인 것을 간파했지만, 벵케이의 주군을 위하는 충심을 헤아려 모르는 척 통과시켜 요시쓰네 일행은 무사히 관문을 넘을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주군을 향한 충성이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려, 가부키 18번 (勧進帳) ]로 구성되어 오늘날까지 인기를 끌고 있다. <그림 2> 중 하나인 [간진쵸
시즈카고젠과 [요시쓰네의 천 그루 벚꽃]
요시쓰네의 애첩이었던 시즈카고젠은 춤과 노래를 하는 시라뵤시(白拍子)였다. 그녀는 요시쓰네가 형이 보낸 자객에게 피 습 당했을 당시 기지를 발휘해 그를 구해낸 인물이다. 그 후 두 사람은 형의 공격을 피해 나라의 요시노산으로 도망을 갔으나
시즈카는 요시노산의 승려에게 붙잡혀 가마쿠라로 호송된다. 가마쿠라에서 요리토모는 동생 요시쓰네의 소재를 밝히라고 시 즈카를 혹독하게 심문하지만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 그러던 중 요리토모의 처 호조 마사코는 시즈카가 춤 의 명수라는 것을 듣고, 가마쿠라의 쓰루오카하치만궁에서 춤을 추라고 명한다. 이때 시즈카는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며 조 용히 춤을 춘다.
그분 모습을 / 오늘도 그리워하네
시즈야 시즈하며 / 늘 이름 불러주시던 / 판관님(요시쓰네)이 옛날처럼 호령하는 / 세상이 다시 와 줬으면
요시노산 봉우리에 / 하얗게 쌓인 눈 헤치며 / 산 속 깊이 사라진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권세를 누리던 요리토모 앞에서 시즈카고젠이 담담하게 요시쓰네를 그리워하는 노래를 부 르자 요리토모는 격노한다. 다행히 아내인 마사코가 “제가 시즈카고젠이라도 그런 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라고 해서 시즈 카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역사서 『아즈마카가미(吾妻鏡)』에서는 시즈카가 춤을 추는 이 장면에 대해 “실로 이 장면은 장관 으로, 대들보의 먼지도 감동시킬 정도로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이들을 감동시켰다.”라 절찬하고 있다. 시즈카고젠은 이때 요 시쓰네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는데, 요리토모는 여자아이라면 살려두겠 지만 남자아이면 죽이겠다고 한다. 시즈카는 남자아이를 낳았고 결국 아이 는 가마쿠라의 유이가하마 바다에 던져졌다. 그 후 시즈카는 교토로 돌아 갈 수 있게 되었는데, 시즈카를 불쌍히 여긴 마사코는 그녀에게 많은 보물 을 주었다고 한다. 이후 시즈카고젠의 행방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다. 가부키 [요시쓰네의 천 그루 벚꽃]은 시즈카고
무대 전체에 벚꽃이 화려하게 떨어지는 모습이 장관이다. 그림에서 시즈카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원수 앞에서 춤을 추는 비련의 주인공 시즈카 고젠의 애절한 심정을 잘 표현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겐페이전쟁의 마지막 전투 단노우라해전
요시쓰네와 시즈카고젠이 요리토모를 피해 숨어 있었던 요시노산은 벚 꽃으로 유명한 곳이다. 천 그루 이상의 벚꽃이 봄이 되면 온 산을 뒤덮는
젠과 요시쓰네의 사랑 이야기를 주축으로 구성된 연극인데, 마지막 장면에
고젠을 연기하는 배우는 다마사부로로, 그는 일본 최고의 온나가타(女形, 가부키에서 여자 역할을 하는 배우)이다. [요시쓰네의 천 그루 벚꽃]에서는
<그림 3> 가부키 [요시쓰네의 천 그루 벚꽃] 중 시즈 카고젠의 춤
요시쓰네는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지만, 가장 큰 활약을 했던 것은 단노우라해전이다. 다이라 가문의 수장인 다이라노 기 요모리는 천황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외손자를 천황으로 옹립하는 등 전횡을 휘둘러 헤이시에 대한 반감은 최고조에 달한다. 이런 헤이시에 대항하기 위해 상황인 고시라카와인과 겐지 세력들은 합심해서 총공세를 펼쳤다. 결국 헤이시는 교토에서 쫓 겨나 남쪽으로 남쪽으로 밀리다가 결국 마지막으로 시모노세키의 단노우라까지 가게 된다. 단노우라 바다는 물살이 세기로 유명한 곳이다. 헤이시의 수군은 해류를 이용한 해전에 강한 군대로 처음에는 헤이시쪽이 우세했지만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요시쓰네가 전투에서 금기로 되어 있는 조타수를 공격하는 비겁한 방법을 사용하여 전세가 겐지에게 유리하게 되었다. 기요
모리의 아내인 도키코는 황실의 보물인 삼종의 신기 (거울, 옥, 칼)를 품에 안고 안토쿠천황과 함께 바다 에 몸을 던졌다. 후에 거울과 옥은 바다에서 건졌지 만 칼은 끝까지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천 황 즉위식에서 가장 중요한 의례가 삼종의 신기를 다 음 천황에게 전하는 행사이다. 삼종의 신기 중 칼은 겐페이전투에서 잃어버려 아마도 다른 칼로 대체되 었으리라고 추정하고 있다.
시모노세키에는 단노우라해전을 기리는 기념물들 이 있다. <그림 4>에 보이는 동상은 배 사이를 몸을 날려 8척의 배를 넘나드는 요시쓰네의 모습(왼쪽)
<그림 4> 시모노세키 모스소공원의 요시쓰네와 도모모리동상
과 오른쪽은 마지막까지 용맹하게 싸우다 닻을 온몸에 감고 바다 속으로 뛰어든 다이라씨의 장수 도모모리의 모습을 형상화 한 동상이다. 결국 헤이시의 마지막 장수와 병사들은 이 단노우라해전에서 모두 전사했고, 이들은 시모노세키 앞바다가 보이 는 아카마신궁에 모셔졌다.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헤이시는 멸망하게 되고 겐지는 가마쿠라에 막부를 설립하여 새로운 시대 가 열리게 된다.
히라이즈미(平泉)에서의 최후
단노우라해전으로 헤이시를 타도한 요시쓰네는 형 요리토모가 있는 가마쿠라로 개선하려 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도, 또 일반 백성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게 된 요시쓰네에게 위협을 느낀 요리토모는 요시쓰네가 가마쿠라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 에 요시쓰네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간토에 불만을 품은 자가 있거든 요시쓰네에게로 오라”는 말을 하고, 이 이야기를 전해들 은 요리토모는 요시쓰네의 영지를 몰수하고 요시쓰네의 저택을 습격한다. 이에 요시쓰네는 요리토모를 타도하기로 결심하고 추종 세력을 규합하려 했으나 요시쓰네에게 찬동하는 세력은 적었다. 게다가 요시쓰네에게 요리토모를 추토하라는 선지를 내 주었던 고시라카와 법황이 이번에는 요리토모에게 요시쓰네 추토의 명령을 내리면서 요시쓰네는 점점 더 궁지에 빠지게 된다.
전국 각지에 요시쓰네 추토 명령이 떨어지자 요시쓰네는 히라이즈미의 후지와라 가문을 찾아간다. 히라이즈미 지역의 후지 와라노 히데히라는 요리토모의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경계하여 요시쓰네를 쇼군으로 세워 가마쿠라에 대항하려 했지만 1187 년 지병으로 숨을 거둔다. 히데히라는 죽기 전에 그의 아들에게 요시쓰네의 지시를 따르라는 유언을 남긴다. 하지만 요리토모 의 집요한 공격에 못이긴 아들 야스히라는 가마쿠라의 압박에 굴복해 요시쓰네가 기거하던 고로모가와노타치를 습격했다. 포 위당한 요시쓰네는 일체의 저항을 하지 않고 부인과 당시 네 살이었던 딸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때 그의 나이 31 세였다. 요시쓰네의 가신이었던 벵케이는 온몸에 화살을 맞으면서도 끝까지 요시쓰네를 지키다 선 채로 죽었다는 전설도 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전횡을 휘두르던 헤이시를 타도하고 형이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도록 도왔던 영웅 요시쓰네가 비참
무성한 풀은 / 병사들이 꿈꿨던 / 영화의 흔적
한 최후를 맞이했던 히라이즈미에서 유명한 하이쿠 시인 바쇼가 읊은 구가 있다.
바쇼는 “도성은 함락됐어도 산하는 남아있고, 옛 성에 봄이 오니 풀이 무성하네”라고 하며 이 시를 남겼다. 바쇼는 요시쓰네
를 지키기 위해 싸운 가신들의 허망함, 또 한때는 지역을 호령했으나 새로운 세력인 요리토모에게 무참하게 짓밟힌 후지와라 가문의 영고성쇠를 생각하며 히라이즈미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요시쓰네가 죽은 후 그의 목은 술에 담아 가마쿠라로 보내졌고, 요시쓰네의 목이 틀림없음이 확인되었다. 요리토모는 요시 쓰네를 숨겨주었던 후지와라의 근거지를 모두 부수고 동북지역까지 자신의 통치하에 두어 전국의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요시쓰네 칭기즈칸설
(判官贔屓) ’는 약자나 시합에서 진 사람들을 동정하고 응원하는 감정을 말한다. 이는 비극적 영웅이었
일본어의 ‘호간비이키 던 구로한간(九郎判官, 요시쓰네의 직책) 요시쓰네의 이야기에서 나온 관용어이다. 그리고 요시쓰네의 쓸쓸한 마지막이 안타 까웠던 일본인들은 요시쓰네가 죽은 것이 아니라 홋카이도를 거쳐 중국으로 건너가 칭기즈 칸이 되었다는 전설을 확산시킨다.
요시쓰네 칭기스칸설이 나온 것은 에도시대이다. 청나라 건륭제의 문서 중에 “짐의 선조의 성은 미나모토(源), 이름은 요시 (義経) 라고 한다. 그 조상이 세이와 에서 왔기 때문에 국호를 청으로 한다”라고 적혀 있다. 그 후 메이지시대가 되면 쓰네
(清和) 서 영국에 유학했던 스에마쓰 겐초가 켐브리지대학 졸업논문으로 <대정복자 칭기즈칸은 일본의 영웅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와 (義経再興記) 』로 일본에서 출판되면서 붐을 이루기 시작한다. 다 동일 인물이다>라는 논문을 썼고, 이것이 『요시쓰네 재흥기
이쇼시대가 되자 미국 유학을 하고 목사가 된 오타니베 젠이치로가 홋카이도의 아이누인들이 신봉하는 문화의 신 오키쿠루미 가 실은 요시쓰네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만주, 몽골을 여행하며 조사를 했다. 그 결과 그는 요시쓰네가 칭 기즈칸임을 확신하여 1924년 『칭기즈칸은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이다』라는 책을 출판한다. 이 책이 요시쓰네에 대한 일본인 들의 동정과 애정으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요시쓰네=칭기스칸설은 민중들 사이에 확고히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그 이후 학 계에서 이 설은 철저히 부정되면서 현재 학술적으로는 수용되지 않는 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의 ‘호간비이키’는 여전한데, TV 드라마로 만들어진 [요시쓰네]나 가부키, 인형극의 인기가 그것을 증명한다.
겐지와 헤이시의 싸움의 역사를 기록한 [헤이케이야기]는 권력을 차지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욕망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대를 바꾸고자 고군분투했던 요시쓰네의 삶은 그의 쓸쓸한 죽음에도 불구 (判官様) ’이란 영웅의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요시쓰네의 이야기에서 지나 하고 여전히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우리의 한간님
고 보면 영원한 권력도 변치 않는 영화도 없다는 세상의 도리를 새삼 느끼게 된다. 이번 이야기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싸움
기원정사의 종소리는 / 제행무상의 울림이 있고 두 그루 사라나무 꽃은 / 성자필쇠의 이치를 알린다 교만한 자는 오래가지 못하여 / 단지 봄밤의 꿈과 같다
이 끊이지 않았던 무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헤이케이야기] 서문으로 마무리하도록 하겠다.
용맹한 자도 결국에는 망하니 / 오로지 바람 앞의 먼지와 같구나
허영은 교수┃ 대구대학교 일본어일본학과
양진오의 '거리의 대학'
지학협력, 가르치지 말고 먼저 배워야 한다
지학협력이 대학교육을 혁신하는 최선의 방안으로 거 론되고 있다. 지학협력을 한자로 쓰면 이렇다. 지학협력 (地學協力). 어떤 뜻인가? 지학협력은 표면적으로는 지 역과 대학의 협력을 뜻한다. 본질적으로는 지자체가 대 학혁신의 주체로 나서는 방안을 말한다. 지자체와 대학 의 운명 공동체적 관계를 고려하면 지학협력은 지역과 지역대학의 위기를 타개할 합리적 방안일 수있다. 그런 데 지학협력을 말하기에 앞서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최근 지방소멸을 예고하는 언론매체가 한둘이 아니 다. 언론매체마다 지방소멸을 시대의 대세처럼 거론한 다. 언론매체들은 또 이렇게 주장한다. 지학협력으로 지 방소멸을 막아야 한다고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 런데 여기에는 전제가 있다. 어떤 전제일까? 바로 지역 을 깊게 배워야 하는 전제가 요청된다. 대학 밖에서 그리 환영받질 못하는 교수들이 있다. 심하면 먹물이나 꼰대 로 불리기도 한다. 물론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왜 존 경받는 교수가 없을까? 대학 안팎에서 존경받는 교수가 더러 있겠다. 그분들을 제외하고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대학 밖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교수들은 누구일까? 일일 이 거론하기는 어렵지만 대개 이런 공통점이 있기는 하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독립영화관 오오극장
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가르치려 드는 교수들이 대개 환영받질 못하는 거 같다.
자 다시 지학협력을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지학협력이 불가피해 보이기는 한다. 특히 지역 학령인구의 감소, 청년세대의 수도권 유출 등 가중되는 위기에 직면한 지역대학으로서는 지학협력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런데 이럴수록 정도를 걸어 야 한다. 어떤 정도인가? 지학협력을 이끈 활동가들의 노고를 먼저 배워야 한다. 지학협력을 말하기 이전에 지역을 배워야 한 다는 거다. 달리 말하자면 지역대학보다 먼저 지학협력을 이끈 지역 활동가들의 노고를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이게 북성로대 학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배운 경험이다.
대구 하루에서 진행된 대구 읽기 모임. 대구 읽기 모임은 대구의 근대를 공부하는 지역 연구자들의 학습 공동체이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대구 원도심에는 여러 유형의 사회적기업과 단체가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북성로대학 가 까이에 인문학 기반 예비사회적기업 대구 하루가 있다. 대구 원도심에 대구 하루만 있는 게 아니다. 독립영화 전용관 오오극 장이 있다. 대구 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에서 만든 희움위안부역사관도 있다. 지속 가능한 여행을 꿈꾸는 플라이 투게더가 있 다. 거론하자면 이들만 있는 게 아니다. 이들 외에도 대구 원도심에 진출한 사회적기업과 단체가 많다. 그런데 결론을 말하면 이렇다. 다들 힘들다. 대구여서 힘들고 2020년 대구를 기습한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힘들다. 아니 본래 이런 일이 힘든 거다. 왜 그리 힘이 들까?
대구 하루만 하더라도 그렇다. 인문학 기반 예비사회적기업으로 출발한 대구 하루(대표 박승주)는 일본어, 일본문화 북카페 로 특화된 공간이다. 식민지 시대 근대건축물을 리노베이션한 대구 하루의 외형과 내부 구조는 대단히 ‘모던’하다. 대구 하루 는 모던한 장소성을 배경으로 시민 인문학 강좌를 매년 기획, 운영해 왔다. 2020년 가을에는 와디즈 펀딩으로 ‘대구 원도심을 걷다’라는 주제의 인문학 강좌를 기획하기도 했다. 나는 ‘구상과 이중섭의 백 년 우정’이라는 제목의 강좌로 대구 하루가 기획 한 펀딩에 참여했다. 그런데 이 또한 사람이 하는 일이다. 강좌 기획과 홍보, 그 진행이 결코 쉬운 게 아니다.
그러면 나는 지학협력을 한답시고 대구 하루를 상대로 컨설팅을 해야 할까? 아니면 이런 저런 사업을 해보자고 사업 제안서 를 들이밀어야 할까? 그런 게 아닐 게다. 먼저 해야 하는 건 어려운 환경에서도 시민 인문학 강좌의 비전을 포기하지 않는 대구 하루를 인정하고 응원하는 거다. 지역대학의 인문학만 중요한 게 아니라는 열린 마음으로 대구 하루의 존재를 인정하고 응원 해야 한다는 말이다. 쉽게 말하면 이런 거다. 지학협력을 이끈 활동가들의 노고를 먼저 배워야 한다는 거다.
플라이 투게더의 내부 장면. 플라이 투게더를 방문한 학생들에게 건물의 특징을 서욱경 대표가 설명하고 있다.
이런 사례도 있었다. 북성로대학 인근에 플라이 투게더(대표 서욱경)가 있다. 공정여행을 추구하는 예비사회적기업이다. 코 로나19 때문에 2020년에 고생이 컸다. 그러면 플라이 투게더가 문을 닫아야 하나. 플라이 투게더가 문을 닫지 않았다. 활로 를 모색하고 있다. 코로나 때문에 예전처럼 모객하여 해외로 나갈 수는 없다. 대신 대구 원도심 골목 투어로 여행 방식을 변경 했다. 변경해도 그냥 변경한 게 아니다. 드로잉 투어 방식으로 변경한 거다. 죽으란 법은 없었다. 나는 어떻게 응원했을까? 플 라이 투게더 대표가 대구 원도심 골목을 여러 차례 답사했다. 그렇게 발품을 팔더니 골목 하나하나가 채색할 수 있는 밑그림으 로 탄생했다. 나는 펀딩 사이트에 탑재된 드로잉 키트를 샀다. 플라이 투게더 대표의 요청에 따라 홍보 촬영에 동행하기도 했 다. 말하자면 친구가 되어 주었다.
지역대학이 힘들다고 한다. 문 닫을 지역대학이 속출할 거라 한다. 그런데 지역대학보다 먼저 지학협력을 이끈 활동가들 에게 이런 말은 엄살로 들릴 수 있다. 정말 힘든 이들이 있다. 지친 이들이 있다. 이들에게 내가 뭘 가르칠 수 있을까? 인문학 은 이런 겁니다, 여행은 이런 겁니다. 우스운 얘기다. 난 지학협력의 활동가들에게 더 배워야 하는 거다. 그렇게 해서 먹물과 꼰대 티를 확실히 털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나는 지학협력을 나와 지역을 살리는 배움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양진오 교수┃ 대구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신문(2021. 5. 26)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류영하의 '홍콩의 진실에 대하여' 1
우리는 아편전쟁의 진실을 모른다
홍콩과 애국주의 역사학 ‘아편전쟁 담론’
홍콩섬은 19세기 중엽에 일어난 아편전쟁 이전까진 인구 8천 명 정도의 ‘애매한’ 어촌이었다. 중앙 정부의 통제권이 미치긴 했지만, 어민과 해적들이 공존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홍콩섬을 영국이 주목했다. 지금 동남아시아 지도나 세계지도를 놓 고 들여다보고 있으면, 홍콩섬과 주룽반도가 얼마 나 중요한 교통의 요지인지 바로 알 수 있다. 삼척 동자도 알 수 있을 만큼 분명하다.
우선 홍콩섬은 중국 대륙과 동남아시아를 연결 하는 관문이다. 동시에 태평양으로 향하는 길목이 다. 나아가서 유럽,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의 해운 을 연결하는 더 이상의 좋은 요충지가 없을 만큼 완 벽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광동성의 젓줄인 주강 (珠江) 입구에 위치하고 있어 중국 내륙으로 진출도 쉽다. 게다가 서해로 거슬러 올라가는 길목을 차지하고 있다. 오늘날 시진 핑 주석의 핵심 정책인 세계를 하나의 띠와 하나의 길로 연결하자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의 그림이 그대로 보이는 곳이다.
홍콩섬은 수심이 깊어 큰 배가 정박하기 좋은 천혜의 항구이다. 그래서 홍콩은 옛날부터 바다를 오가는 세계인들에게 생필품 을 보급하는 보급기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 홍콩이 홍콩역사박물관의 ‘홍콩스토리’나 각종 교과서에는 아편전 쟁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고 서술된다. (이 부분에 대해선 뒷부분에서 좀 더 다루겠다)
홍콩을 알기 위해선 아편전쟁을 알아야 한다. 홍콩을 말하며 아편전쟁을 피해갈 순 없다. 우선 우리가 알고 있는 아편전쟁
에 대해 개요를 알아보기로 한다. 대략적이지만 일반적 이다. 중국은 물론 홍콩, 심지어 한국의 중국학계에서도 가장 넓은 범위를 차지하고 있는 담론이다. 이른바 ‘애국 주의 역사학’의 기본적인 시각이다. 특히 중국공산당은 가해와 피해라는 틀로 근대사를 재단한다. 그것의 중심 에 아편전쟁이 있고, 중국은 아편전쟁의 철저한 피해자 라는 것이다. 중국이 철저한 피해자가 되어야 중국공산 당은 중국을 구한 완벽한 구세주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 게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근대사는 오늘과 직결되어 있 다. 편 가르기 좋아하는 정치인들의 단골 메뉴가 되는 이
유이다.
우리가 아는 아편전쟁의 개요는, 대체로 이런 내용이다. 1. 청(중국)의 주요 수출품은 차(茶)였고, 영국의 주요 수출품은 모직물과 인도산 면화였다. 2. 영국의 차 수입량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났다. 영국의 무역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3. 영국은 이를 해소하기 위해 청에 인도산 아편의 (밀)수출을 허가했다. 4. 이후 영국의 대중국 무역은 균형을 회복했다. 청나라 재정의 30%가 아편을 구입하는데 소비되었다. 5. 청나라 전역에 아편 중독자가 창궐하여 온 나라의 경제와 사회가 마비되었다. 6. 도광제는 호광총독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임명, 아편 처리에 전권을 부여했다. 7. 1839년 임칙서는 막대한 양의 아편을 석회와 섞은 뒤 바다에 버렸다. 각국의 무역상인을 체포하여 앞으로 아편무역을 하 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았다. 8. 영국은 반발했고, 아편전쟁이 일어났다.
1840년 영국은 중국과 전쟁을 벌였다. 2년간의 전쟁 끝에 중국이 패배했다. 그리고 난징 부근의 영국 함상에서 두 나라는 조약을 맺었다.
『난징 조약』이다.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홍콩섬을 영국에 할양한다. 2.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5개 항을 개방한다. 3. 전비 배상금과 몰수당한 아편의 보상금을 영국에 지불한다. 4. 공행 같은 독점상인을 폐지한다. 5. 이 조약은 청나라와 영국 두 나라의 대등한 교섭의 결과이다.
특별히 ‘대등한 교섭의 결과’라는 조항을 두었다. 승자인 영국이 후환을 의식을 했다는 말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지금 까지 이 『난징 조약』을 불평등 조약이라고 원 망하고 있다. 이것이 불평등 조약이었다면, 근대식 무기와 장비 부족이 그 일차적 원인이 었다. 지금도 중국 정부가 사활을 걸고 군비 증강에 나서는 이유다.
『난징 조약』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홍콩섬’을 ‘할양’한다는 것이다. 국토의 일 부를 다른 나라에게 주는 것이다. 중국으로서는 대단한 굴욕임이 분명했다. 여기서 우리는 ‘할양(割讓)’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할(割)해서 양(讓)한다는 즉 ‘떼어서 남에게 넘겨준다’는 뜻이다. 당시 청나라 정부가 영국 정부에게 영구히 준 것이다. 이 렇게 해서 홍콩섬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고 우린 배웠다. 당시 중국 정부가 볼 때, 홍콩섬은 너무 멀고 관리하기도 힘든 섬이었다. 떼어주어도 크게 애석할 것 없는 섬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보자. 1840년에 시작된 이 2년간의 전쟁은 아편 때문에 촉발된 것이기 때문에 ‘아편전쟁’이라 부른다.
하지만 『난징 조약』의 내용을 보자. 아편 시장을 개방한다는 조항은 없다. 영국이 정말 (중국이) 아편시장을 봉쇄한 그 이유 때문에 전쟁 을 일으킨 것이라면, 『난징 조약』의 내용에는 아편시장 개방에 관한 조항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영국 측은 중국의 5개 항구의 개방과 독점 상인 등을 폐지하는 요구를 했고, 관철시켰다. 원래 영국의 목 표가 아편 판매에 있지 않고 통상에 있다는 뜻이다. 아편 때문에 일 어난 전쟁이라 하여 그 전쟁을 굳이 ‘아편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 는 ‘아편’이라는 ‘부도덕한’ 물질을 부각시켜 도덕적인 측면에서 집 중적으로 영국을 비난하기 위해서다. 외국을 파렴치한 존재로 만드 는 것은 정부와 정당이 자주 사용하는 정치 행위 중의 하나이다. 자 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쉽게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중국 정부는 ‘아편전쟁’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고 있다. 외
아편전쟁 이전의 홍콩, 애매한 땅
국과의 이해관계가 부닥칠 때마다 그들을 향해 다시 ‘아편전쟁’을 하자는 것이냐고 꾸짖는다.
홍콩은 아편전쟁을 통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고, 대륙의 교과서에도 홍콩의 교과서에도 물론 홍콩역사박물관의 ‘홍콩스 토리’에도 그렇게 기술되어 있다. ‘역사의 전면에 등장’이라 … 아메리카 대륙이나 어느 별자리가 누구누구에 의해서 발견되었 다는 말처럼 하릴없이 들리는 말도 드물다. 태고부터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던 것을 발견했다는 말이 가당치나 한 것인가? 홍 콩을 포함한 주룽반도와 주변 섬들은 ‘역사’에서 소외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남들이 알아주든 아니든 자 신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중국이 통일되기 전인 춘추전국시대의 홍콩부터 말해보자. 홍콩은 중국 남부와 함께 월나라 의 영토였다. 월나라의 영토는 중원의 입장에서는 너무 멀고 사람이 살기 너무 더운 오랑캐의 땅으로 인식되었다. (참고로 월 나라의 남쪽에 있다 하여 베트남의 명칭이 ‘월남’이 되었다) 이후 홍 콩지역은 수많은 경계의 변화를 겪다가, 진시황의 진(秦)나라가 중국 을 통일하면서 중국의 행정구역인 남해군(南海郡) 번우현(番禺縣)에 정식으로 편입되었다.
중국이 통일된 이후로 여러 왕조에서 홍콩 지역은 마음에 안 드는 신하를 귀양 보내기 좋은 멀고 먼 유배지였다. 내 손에 피 묻히기 싫 을 때 쓰는 그 방법은 효과가 탁월하여 가는 도중에 세상을 뜨는 사람 들도 많았다. 그렇게 홍콩 지역은 ‘중원’에서 볼 때 너무나 먼 곳이었 다. 크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땅이 아니었다. 중국의 영토라고 주장하 기엔 너무 멀고 아니라고 하기에는 아까운 그런 지역이었다. 영국에 할양할 때는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땅’ 하나 떼어준다는 생각도 있 었다. (중국의 역대 조정은 중원에서 먼 변방지역은 크게 중요한 곳이라 생각지 않았다. 대만도 청나라에 편입된 게 겨우 300 년 전이다. 홍콩이나 대만의 가치를 알았다면, 진작에 홍콩이나 대만을 관리했을 것이다. 반면에 영국은 홍콩의 지리적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홍콩을 표현할 때 줄곧 ‘애매한 신세’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소속 등 정체성이 애매하다 는 뜻이다.
아편전쟁 이전의 홍콩 지역 사람들
예로부터 해안 지역은 중앙조정에서 볼 때 골치 아픈 곳이었다. 수시로 해외로 도망가거나 밀수 혹은 해적질을 하는 유랑자 들이 살기 좋은 곳이었다. 이에 대해 조정은 수시로 해안 통제를 하는 것으로 대응해왔다. 마침내 명나라는 해안선 4km 내에 는 주민이 살아서는 안 되는 ‘해금(海禁) 정책’을 채택하였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이 없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 여 아예 그 싹을 잘라버린 것이다. 이 해금 정책은 명초에 제정되어 17세기까지 3백년 이상 지속되었다. 하지만 위에서 정책
류의 역사이다.
을 마련하면, 아래는 대책을 마련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반복되는 인
강력한 해금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를 짓고 외국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뿐만 아니라 큰돈을 벌기 위해 해외를 수시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도 많았 다. 해적이 바다에서 어민을 습격하거나 내륙으로 들어와서 한 마을 전체를 습격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해적들은 한때 일본인이 다수를 점유하기도 했지만, 지역 적 혈통적 정체성이 매우 복잡하여 점점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애매 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체제 안에서는 농민이고 어민이지만, 체제 밖에서는 이 곳저곳을 떠돌던 유민이었다. 밀무역을 하기도하고, 바다 길잡이 역할도 하는 다 양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그들에게 국적을 묻는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들은 중국 대륙, 대만, 동남아시아, 한반도, 일본 열도, 류큐(오키나와) 등지의 출신으로서 이익만 생긴다면 이곳저곳을 다니는 자유인이었다. 상당수의 학자들은 그들 모 두가 ‘왜구’라는 이름으로 억울하게 특정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네덜란드의 지배하에 있던 대만을 수복한 정성공(鄭成功)이나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상무역을 활성화 시켰다는 장보고 를 그들의 대표 격이라고 생각한다. 정성공이나 장보고가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논쟁은 어쩌면 무의미한 것인지도 모른다. 물 론 해당 국가들은 어떤 인물과의 관련성을 부인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어떤 인물을 미화하기도 한다. 대만을 중국 의 영토로 편입시킨 정성공은 아버지가 중국인이고 어머니가 일본인이었는데, 그렇다면 그는 어느 나라 사람일까? 청해진을 설치했다고 알려진 장보고는 정말 한반도인일까? 장보고는 산동인들이 자랑하는 장보자(張保仔)와 다른 사람일까? 하나하나 따져보면 의문은 끝이 없다.
홍콩 지역의 사람들 또한 줄곧 체제 안팎을 넘나들고 있었다. 아편전쟁 이후 홍콩섬을 포함한 광동 연해가 영국의 감독 하에 편입되었다. 이곳에서 활동하던 정체불명의 사람들(해적, 유민 등)은 내륙 수로로 쫓겨 들어갔다. 이들 때문에 광동과 광서지 방은 점차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홍콩 지역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홍콩의 처지가 홍콩섬에 살던 이 정체불명의 사람들과 같았다.
아편전쟁의 진실
① 아편으로 나라가 정말 위기에 처했었는가?
에 빠진 아편을 건져 올려봤자 쓰지 못하게 한 조치였다)
1840년에 일어난 ‘아편전쟁’이라고 불리는 전쟁, 그 전쟁은 중국의 역사에서도 홍콩 의 역사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다. 앞에서 청 황제 도광제는 임칙서를 흠차대신으 로 임명하여 아편 근절에 대한 전권을 부여했고, 임칙서는 막대한 양의 아편을 몰수하여 석회와 섞은 뒤 바다에 버렸다고 했다. (아편은 석회와 소금에 반응하면 못 쓰게 된다. 물
임칙서는 아편을 매우 싫어한 사람이었다. 지금도 아편 등의 마약류에 대한 인식은 사람마다 천양지차를 보인다. 당시에도 아편에 대한 지방 관리들의 인식은 너무나 달랐 다. 위정자들이 아편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 에 대한 대처는 다르게 된다. 신중한 황제는 제대로 된 판 단을 위해 몇 번씩이나 지방 관리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하 지만 이런 경우 원래 시원한 결론은 얻기가 힘들다. 세상 만사가 그러하듯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팽팽하게 유지되 던 균형이 깨지는 시점이 오고야 만다. 임칙서가 평소 아 편 금지를 지지하는 정치인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가 황제 에게 끊임없이 아편 근절을 주장했다는 점을 우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황제가 상황을 위기로 인식하도록 몰아갔다.
통계 수치를 보면, 당시 청나라 전체 인구 4억 명 중 아편 흡연자는 1백만 명이 되지 않았다. 임칙서는 특히 1949년 중화인 민공화국 건국 이후 구국의 절대 영웅으로 신격화되었다. 중 국과 영국의 담판 단계에서도 그는 범인 인도와 아편 금지 등 을 무리하게 요구하여 담판을 끝내 결렬시켰다. 전권대신으 로서 그는 이후 벌어진 일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간신히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던 평화는 그렇게 깨졌다. 아편 은 변화의 구실에 불과했던 것이다.
문제의식은 매우 필요하고 중요한 능력이다. 문제의식을 가 지려면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으려면 확신을 가지면 안 된다.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어둠에 갇혀 버릴 수 있다. 확신을 가지는 순간 진실은 저만큼 달아 난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은 진실에 얼마나 가까운 것일까?’는 평생의 화두가 될 만하다.
영어 오피엄(OPIUM)의 음역이 분명한 아편은 양귀비라는 식물의 덜 익은 열매에서 뽑아낸 진액을 건조시켜 만든 것이다. 나의 고등학교 때 생물 선생님은 군 위생병 출신이었다. 어느 날 선생님은 군에서 많이 보았던 아편 이야기를 꺼냈다. 하나만 가지고 나왔더라도 이후 진통제는 살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아파서 떼굴떼굴 구르던 사람도 그 시커먼 덩어리를 한 번 만 핥으면 금방 헤헤하고 웃는다는 말도 했다. 부엌칼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흉기도 되고 이기도 되는 것처럼, 예로부터 아 편은 마약이기도 하고 약재이기도 했다.
실제로 아편은 중국의 상류층에서는 오랫동안 광범위하게 사용해온 약재였다. 아편은 13세기경 중국에 전해졌고, 17세 기경부터 그것을 흡연하기 시작했다. 확산세가 커지자 18세기 에는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중국인들의 아편 흡연이 본격 적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들어서였다. 뒤이어 영국이라는 변수가 하나 더 보태졌다. 영국이 대량의 아편을 중 국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영국의 입장에서 식민지인
인도에서 대량 재배된 아편의 소비처로 인구 대국인 중국은 매우 적절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영국이 중국과의 주거래 품목으 로 아편을 선택한 것은 역사적 우연일 뿐이라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영국을 포함한 외세는 통상의 확대를 지속적으로 요구 하고 있었다.
② 아편전쟁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들 언제나 그러하듯 학설은 여러 가지 일 수 있다. 우선 당시 중국의 상황을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아편으로 나 라가 정말 위기에 처했는가? 아니면 위기인 것으로 인식되기를 원하는 세력들(외국과 통상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있었던가? 청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들 이 한족이 아닌 만주족이라는 사실을 시시각각 떠올려야 한다. 청나라를 무너뜨린 세력도 지금의 정부도 모두 한 족이다. 1911년 중화민국을 건국한 손문(孫文, 혹은 쑨 원)은 만주족의 청 정부를 철천지원수로 이해하고 존재해 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당시 역사를 서술 하고 있는 주도 세력은 한족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중국이 한족의 땅임을 주장하는 그들은 만주족 인 청나라의 무능과 부패를 최대한 부각시켰고 지금도 그 렇게 하고 있다.
그다음 문제로는, 전쟁이라는 초강경책을 채택해야만 했던가? 현상 유지라는 온건책은 처음부터 배제되었던가? 우리가 자 주 간과하는 것이 있다. 우리는 지금 유지되고 있는 체제나 질서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의 두뇌는 무언가를 바꾸 어야 한다는 논리로부터 늘 도발당하고 있다. 일본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은 ‘지금 이렇게라도 유지되고 있는 현상은 혁명보
병사들이거나 무고한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다 더 혁명적인 노력의 소산’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도 한다. 문 제는 혁명보다 더 큰 노력으로 유지되고 있는 평화임에도 불구 하고,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기에는 사람들의 기억력과 인내 력이 매우 약하다는 것이다. 전쟁의 피해를 생각해보면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다. 최종적으로 전쟁의 피해자는 말단
청 황제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자. 이 신하와 저 신하의 의 견이 다르다. 심지어 해당 지역에서 올라오는 보고도 책임자에 따라 다르다. 청 당시 지방정부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는 사실을 보고 하기보다는 지방관리 자신의 책임을 면하기 위한 증명서 로서의 역할이 더 컸다. 이후 아편전쟁 기간 중에도 연전연패하면서도 연전연승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올릴 정도로 시스템은 이 미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1911년 청나라가 무너지고 세워진 중화민국의 총통이 되고 나중에 다시 황제를 칭한 원세개 (袁世凱, 혹은 ‘위안스카이’)는 이런 시스템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은 정확한 정보를 위해 특사를 파견하는 방법을 썼다. 우선 한 명을 파견해서 상황을 듣고, 다시 한 명을 더 파견한다. 두 명의 의견이 일치할 경우는 그대로 믿었다. 아닐 경우 다시 한명을더 파견해서 상황을 파악했다. 아편과 관련하여 최고 책임자인 황제의 시름은 깊어만 갔다.
아편은 나쁜 것인가? 아편 때문에 정말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는 말인가? 그래도 지방경제에 활력을 가져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가? 이 보고서는 상황에 대한 정확한 보고일까? 자신의 책임을 벗어나기 위한 술수로서의 보고일까? 이 팽팽한 긴장을 깰 것인가? 아쉬운 대로 현상을 유지할 것인가? 아편을 허용하면서 평화를 얻을 것인가? 아편을 불허하고 자존심을 얻 을 것인가? 한번 시작된 질문은 끊임이 없다. 불행하게도 역사는 강경파의 승리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강경책은 늘 자존심과 연결된다. 통상을 반대하고 아편 확산을 막는 것이 중국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 되면, 이제 누구도 반대할 수 없게 된다. 우리 의 역사에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많다.
동아시아인들의 ‘중국 근대사’를 지배하는 패러다임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영국이 인도에서 생산된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하여 중국 경제가 무너지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게 되 었다는 것이 중국 또는 중국공산당의 논리다. 자신을 철저한 피해자로 만들고 반드시 구국의 영웅을 등장시키는 것이 그것의 특징이다. 물론 과도한 자기연민이나 낭만주의적 서사 방식을 기조로 한다.
서두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아편전쟁이 일어난 과정을 말했지만, ‘애국주의 역사학’의 틀을 말하기 위해 다시 한번, 학계는 물 론 일반인에게 지금까지 가장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는 아편전쟁 스토리를 말해본다. 백성들이 아편에 중독되어 그것을 사기
아편을 몰수하고 폐기 처분했다.
위해 가산을 탕진하여 국부(은)가 대량으로 유출되었다. 아편 중독 때문에 심신이 피폐해진 백성들이 생업을 포기하여 나라가 망해갔 다. 보다 못한 임칙서(林則徐)라는 지방 총독이 황제를 설득하여 드 디어 민족의 자존심 찾기에 나섰다. 제국주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하 여, 아편이라는 마약으로부터 백성들을 구하고, 나라의 돈(은)이 유 출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임칙서라는 ‘애국자’가 나섰다. 황제로부 터 전권을 위임받은 흠차대신 임칙서는 광저우로 내려가 거래되는
당시 영국의 지식인들은 영국 의회가 상인들의 요구에 역사적으 로 가장 수치스러운 전쟁을 승인했다고 비판했다. 찬성 271표, 반 대 262표였다. 간발의 차이로 전쟁이 승인된 것을 보면, 영국의 정 치인 그들 자신도 전쟁의 명분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국의 조야는 비교도 안 되는 열악한 무기로 침략자 영국에게 맞 섰지만 분패를 했다. 영국 측은 5백 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에 중국 측은 2만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만 보아도 얼마나 일방적인 전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중국은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하여 할 수 없이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이 패러다임은 지금 까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중국인 나아가서 동아시아인들이 쓰는 중국 근대사를 완전하게 지배하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화의 가치를 몰랐던 대가는 혹독했다
영국과의 전쟁은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약 20년 뒤, 1856년부터 전개된 2차 아편전쟁은 더욱 참혹했다. 1차 아편 전쟁에서 이미 청 제국의 약점이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협상이 가능했던 상황을 전쟁으로 몰고 간 1차 아편전쟁이 두고 두고 아쉬운 이유이다. 『난징 조약』의 결과는 중국이나 영국 모두에게 불만이었다. 청은 아편 (밀)수입량이 증대되는 것과 점 점 확대 심화되고 있는 기독교 전도 등에 불만이었다. 반면 영국은 생각한 것처럼 상품수출이 증대되지도 않고 베이징에 외교 공관을 개설하지 못한 점 그리고 선교의 자유도 확보하지 못한 점에 불만이었다. 조약 개정의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던 영 국에게 기회가 왔다. 영국인 소유의 선박인 ‘애로호’에 청나라 관리가 올라가 해적 혐의로 중국인 선원들을 체포하고 영국 국기
은 1차 아편전쟁보다 훨씬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영불(영국, 프랑 스) 양국은 톈진(天津)을 점령하여 기독교 전도의 자유와 북부의 항구 개항 등이 약속된 『톈진 조약(1858)』을 체결하였다. 이 조 약의 비준과정이 여의치 않자 영불은 다시 베이징을 공격하였다.
청나라 황실의 정원이었던 원명원을 야만적으로 철저하게 파괴 한 것도 이때였다. 1860년에 톈진 개항과 홍콩 주룽(九龍)반도 할 양 등의 혁혁한 전과를 확인하는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었다. 러 시아도 이 조약에 상당하는 대우를 요구하여 헤이룽장 이북의 영 토와 연해주 지방을 할양받았다. 한 번 노출된 약점과 손상된 권위
는 것이 새로운 전쟁의 이유였다.
는 면적을 빌렸다. 99년 동안 임대하는 것으로, 기한은 1997년 6월 30일까지였다.
를 강제로 내리게 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영국 국기를 모독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기독교라는 서구를 상징하는 종교이다. 서구의 종교인 기독교가 중국의 질서와 전통 사상 체계 를 한꺼번에 파괴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던 청나라는 초기부 터 매우 조심스럽게 대응해왔다. 교황청을 비롯한 서구 기독교 세 력은 완전한 전도의 자유를 얻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해 왔다. 이 문 제는 기독교 신자든 아니든 간에 한 번쯤 심사숙고해 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도 중국 정부가 기독교를 긴장해서 주시하고 있 는 것을 보면 쉽게 풀 수 없는 고리가 분명히 있다. 이후 전개된 태 평천국 등 일련의 국내 동란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중국에 기독교 전 도를 목표로 삼는 학생이 있다면, 중국과 근대사와 기독교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라고 내가 권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차 아편전쟁
는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두고두고 이용당했다. 대대로 간신 히 유지되어 오는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이제 종이 호랑이라고 공인된 대국의 몰락은 의외로 매 우 빨랐고, 타의에 의한 근대화는 더 큰 대가를 지불하게 되었 다. 이때부터 중국은 외세에 대해 천추의 한을 품게 되었다.
홍콩섬과 주룽반도 그리고 신계(新界) 지역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홍콩을 구성하고 있다. 영국은 프랑스가 광저우만 을 조차하자 안전을 구실로 더 많은 땅을 요구했다. 『홍콩 경 계 확대 조약』을 통해 지금 홍콩 전체 면적의 90%를 차지하
류영하 교수┃ 백석대학교 중국어중국학과 *딴지일보(2021. 7. 12)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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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PBL 주제 선정 및 조별 활동 1 12 PBL 설계 및 조별 활동 2 13 PBL 조별 발표 1 14 PBL 조별 발표 2 및 종합토론 15
강의 내용
5 문학 및 예술로 만나는 기차와 도시 1 : 기차의 탄생, 조선적 근대의 탄생 6 문학 및 예술로 만나는 기차와 도시 2 : 식민지 근대와 기차 7 문학 및 예술로 만나는 기차와 도시 3 : 국경을 넘어 이동하는 사람들 1 중간고사 9 문학 및 예술로 만나는 기차와 도시 4 : 국경을 넘어 이동하는 사람들 2 10 문학 및 예술로 만나는 기차와 도시 5 : 기차역과 도시의 풍경
기말고사
강의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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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발표, 강의 토론, 발표, 강의 PBL 조별 활동 PBL 조별 활동 PBL 발표, 질의응답 PBL 발표, 질의응답
배지연 교수┃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교과목 개요
도시인문학 수업사례 2
지역문화의 이해
<지역문화의이해>는 한국형 무크(K-MOOC) 수업으로서, 먼저 온라인 강의를 학습한 다음, 다시 대구·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지역 문화와 문학 현장을 실제로 탐방하고, 그에 따른 내용을 토론하고 공유하는 프로젝트형 교과목입니다. 지역에 대한 주관 적인 견해에서 벗어나, 지역의 가치에 대한 실제 경험과 이해를 통해서 얻은 소중한 체험으로 지역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인식 의 전환을 이룰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교과목 특징 ㆍ지역과의 직접 접촉
학생들은 지역의 문화와 문학이 탄생하고 형성된 지리 공간을 직접 답사함으로써, 문학과 문화의 현장이 주는 직접적인 현 장의 감각을 체험하는 과정을 경험합니다. 이로써, 스스로가 문화의 주체 단위임을 자각하고, 지역에 대한 이해를 심화할 수 있습니다. ㆍ자기주도형 수업
학생들은 교과에 참여하는 팀 프로젝트를 수행합니다. 팀 프로젝트는 1차와 2차에 걸쳐 실시되는데, 관련 주제의 설정, 팀원 의 역할 배분과 같은 프로젝트 과정을 자율적이며 주도적으로 진행하면서 자율적 소통과 문제해결 능력을 배양하게 됩니다. ㆍ지역에 대한 바른 이해와 창의적 환원
이상과 같은 활동을 통해 학생들은 자신의 지역에 대한 편견을 깨고, 자신의 삶이 이루어지는 곳에 대한 공정하고 폭넓은 이
누가 수강하면 좋을까
지역을 자기 삶의 터전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학생 지역문화를 자기 삶으로 체험하고자 하는 학생
해에 도달함으로써, 변화하는 지역의 문화자산을 주도적이며 창의적으로 환원하게 됩니다.
대구경북과 그 주변의 지역 문화를 체험하며 자기의 지식으로 만들고자 하는 학생
주 제 01 지역의 바른 이해 02 지역 사랑의 바른 자세 03 지역을 기록하는 좋은 방법 04 변화하는 지역, 흥이 많은 지역
05 여기는 대구(1) 06 여기는 대구(2) 07 여기는 대구(3) 08 09 저곳이 경북(1) 10 저곳이 경북(2) 11 저곳이 경북(3) 12 지역 주변의 지역(1) 13 지역 주변의 지역(2) 14 지역과의 공존과 상생 15
소주제 1. 지역 편견과 선입견 성찰 2. 지역 실체의 이해 3. 지역 미래의 상상 1. 지역을 사랑하는 사람들 2.지역을 사랑하는 작은 방법 3. 내가 사는 지역, 어떻게 사랑할까?
1. 지역 기록의 중요성 2. 지역사가 중요한 이유 3. 지역으로 온 사람들 1. 지역 축제와 지역의 흥(1) 2. 지역 축제와 지역의 흥(2) 3. 지역 축제 한류로 성장하다.
1. 지역의 과거 조망 2. 대구의 다른 이름, 달구벌 3. 대구 경계 밖, 경주의 원형 1. 경상감영의 이해 2. 북성로에 서서 3. 근대골목의 진풍경 1. 대구 사회적 기업의 역할 2. 대구 협동조합의 역할 3. 대구 마을 공동체의 역할
중간시험(평가) 1. 동아시아의 가장 멋진 도시, 경주 2. 경주의 스토리 읽기 3. 경주 답사 실행
1. 우리나라 내륙 동쪽 바로 안동 2. 안동의 역사적 인물 3. 안동 답사 실행 1. 숨은 역사가 빛나는 도시, 밀양 2. 밀양을 빛낸 인물들 3. 밀양 답사 실행 1. 너른 바다가 만든 제의 도시, 부산 2. 개항장 부산의 현장 3. 부산 답사 실행
1. 에머랄드 바다 도시, 통영 2. 통영이 낳은 예술가들 3. 통영 실제 답사 1. 지역과 삶의 터전 2. 지역문화 소통하는 방법 3. 여러 사람과 함께하는 지역 기말시험(평가)
강의담당 : 양진오 교수┃ 대구대학교 한국어문학부
지역문화의 이해 KMOOC 링크
시네마 기행
트랜스-로컬 시네마 포럼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는 학생들과 학내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매년 <트랜스-로컬 시네마 포럼>을 개최해 왔다. 영화 관람 및 토론을 통해 예술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인문적 소양을 함양하기 위해서 마련된 본 포럼은 기존에 진행해왔던 <시 네마 포럼>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연구소의 장기 프로그램이다. <트랜스-로컬 시네마 포럼>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 하에 인문 과학연구소가 진행하는 ‘LMS-ACE 교육과정 개발 및 인문교육 시스템 구축’ 사업의 일환으로 새롭게 거듭나게 되었는데, ‘트 랜스-로컬’이라는 주제에 집중함으로써 보다 밀도 있고 일관성 있는 문제의식을 담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는 ‘철길로 이야 기하는 동아시아 도시인문학’이라는 본 연구소 사업의 부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근대적 모빌리티와 그 확장으로서 지역성을 파악하고자 하는 본 연구단은 특히 근대의 발전과 근대적 생활양식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기차’를 매개로 다양 한 근대성의 특징 및 포스트모던, 포스트콜로니얼 현상을 분석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진 행된 본 포럼은 지금까지 ‘열차와 영화’, ‘열차와 근대’, ‘동아시아와 근대 도시’ 등의 주제로 정기적으로 영화를 감상하고 토론 해 왔다. 이번 학기에는 총 4회에 걸쳐 포럼이 진행될 예정인데, 상영 일시와 영화는 아래와 같다.
철도원(Il Ferroviere) (1956, 이탈리아) 2021년 10월 14일(목) 오후6시 : 鉄道員 ,Poppoya (1999, 일본) 2021년 10월 28일(목) 오후6시 : 철도원( 哦 香雪 ) (1989, 중국) 2021년 11월 11일(목) 오후6시 : 오, 시앙쉬에( 서울역(seoul station) (2016, 한국) 2021년 11월 25일(목) 오후6시
이번 포럼은 동아시아의 대표 3국인 한국, 중국, 일본의 영화를 각각 한 편 씩 포함하고 있으며, 이탈리아 영화도 한 편 소개하고 있다. 기차가 서구에서 발명되고 발전된 매체라는 사실을 주목해 본다면, 기차의 등장이 이후 근대인 의 삶에 끼친 영향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먼저 서구를 참조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각 영화들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 는 시간을 가져보겠다.
철도원(Il Ferroviere) (1956, 이탈리아)
전후 이탈리아에서는 새로운 영화 장르가 탄생하게 되었는데 ‘네오리얼리즘 (neorealism)’이 바로 그것이다. 30년대에서 40년대 중반까지 현실도피적 인 오락물로 전락한 풍조에 반기를 들고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서 전쟁 의 폐해와 참상을 비극적 정조로 표현하는 영화 사조로서 네오리얼리즘은 비 참한 현실을 직시하려는 리얼리즘 양식을 현대에 부활시켰다. 서민들의 삶에 대한 진실한 재현을 목표로 하는 네오리얼리즘은 노동자, 농민, 도시 하층계급
을 소재로 전쟁의 황폐함, 전후의 경제적 파탄, 파시즘의 폐단, 실업과 매춘, 일상의 곤경과 인간관계의 단절, 가족의 해체 등 현대인의 어둡고 암울한 삶을 다루고 있다.
이번에 소개하게 될 ≪철도원(Il Ferroviere)≫은 피에트로 제르미(Pietro Germi) 감독이 감독, 각본, 주연까지 일인삼역을 맡은 작품으로 이탈리아영화제 최우수작품상 및 감독상, 산세바스티안영화제 여우주연상 등을 수상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 후 이탈리아 서민의 팍팍한 일상과 따뜻한 심성, 가족 구성원의 분열과 화해를 그린 영화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을 향한 마 지막 위대한 표현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철도노동자로서 권위적인 아버지, 인자한 어머니, 백수로 빈둥거리는 큰아들, 혼 전 임신과 순탄치 못한 결혼생활을 이어가는 딸, 가족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귀염둥이 막내 등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서민 가족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막내아들 산드리노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 어른들의 세계, 가족 구성원들의 갈등 과 분열, 그리고 화해가 진행되는 과정을 함께 따라가다 보면 관객들은 진한 감동과 여운을 느끼게 될 것이다.
鉄道員 , Poppoya) (1999, 일본) 철도원(
浅田 次郎 )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후루하타 야스오(降旗康男) 감독, 다카쿠 두 번째로 소개하게 될 영화는 아사다 지로( 라 켄(高倉健) 주연의 《철도원》이다. 공교롭게도 이탈리아 영화와 같은 제목으로 한국에 소개된 이 작품은 한 평생을 철도 역무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일에 충실했던 한 남자와, 그런 그를 이해하고 자
작품은 몬트리올 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었고, 따라서 기차의 쇄락은 일본 산업화 세대의 쇄락을 의미하며, 이 영 団塊の世代 )의 운명을 암 화에 나오는 폐쇄 직전의 기차역은 단카이 세대( 시한다고 한다. 풍부한 노동력으로 일본의 경제 고도성장에 기여한 기성 세대의 쇄락이 일본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에 경청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원으로 살아온 가장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도 지니고 있다. 이 영화의 원제는 ‘Poppoya’인데, ‘폿포’(ぽっぽ)는 우리말의 ‘칙칙폭폭’을 뜻하고 ‘폿포야’(ぽっぽや)는 어린 아이들이 철도원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이 표현은 어린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는 느낌을 준다고 하는데, 경제 부흥기 시절에 대한 기성세대의 향수를 담고 있는 제목이라고 할 수 있다.
랑스러워하는 딸의 모습을 통해 구세대와 신세대의 화해를 그리고 있는 이
일본의 근대화와 산업의 부흥은 열차 산업의 발전을 통해 이루어진 것
哦 香雪 ) (1989, 중국)
오, 시앙쉬에(
세 번째 작품은 우리에게 다소 낯선 영화인 왕하오웨이(王好爲) 감독의 ≪오, 시앙쉬에(
哦 香雪 )≫이다. 티에닝(鐵凝)의 동 명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산업화라는 변화의 길에서도 유지되는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마음과 우정을 그리고 있다. 이 영 화에서 기차는 소녀들로 대표되는 농촌 공동체의 아름 다움을 파괴할 듯이 흔들지만, 소녀들은 자신의 순수한 마음으로 기차가 가져온 근대 도시의 유혹과 자기비하 에서 벗어나 농촌 공동체의 가치를 회복한다.
영화에서 거대한 산맥을 뚫고 달리는 기차는 원시 자 연과 현대 문명의 공존을 보여주지만, 미묘한 긴장감을 전달한다. 마을에 새로운 역이 생기면서 기차와 매우 가 까이 접촉하게 된 아이들은 이제껏 만나보지 못했던 사 람과 사물을 접하게 된다. 기차가 가져온 도시문화는 그 녀들의 마음을 동요시켜 도시에 대한 환상과 동경을 품 게 하지만, 동시에 이들이 간직한 전통 문화의 고유성을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느끼게 하고 부끄러워하도록 만든다. 도시에 대한 동경이 만들어내는 환상이 커질수록 자신에게 더 크게 실망하게 되고, 이런 불편한 마음을 서로를 비난하는 것으로 해소 하면서 갈등관계가 생겨난다. 이와 같은 내적 갈등이 어떻게 해소되는지, 기차로 상징되는 도시에 대한 농촌의 도전과 극복 과 정을 함께 따라가 본다.
서울역(seoul station) (2016, 한국)
≫의 프리퀄(Prequel)이다. ≪부산행≫의 가출소녀가 이 작품의 가출소 녀 ‘혜선’과 동일 인물이다. 이 작품은 제 34회 브뤼셀 국제 판타스틱 영 화제에서 실버 크로우상(Silver Crow)을 수상했으며, 앙시 국제 애니메 이션 영화제, 몬트리올 판타지아 국제 영화제, 에든버러 국제 영화제, 뉴
International Fantastic Film Festival of Catalonia), 부천 국제 판타
영화제 측은 “날카로운 사회비판, 높은 완성도, 그리고 훌륭한 각본을 겸 비한 놀라운 작품”이라고 밝히고 있다.
아다니는 아버지 석규가 주요 등장인물들이며 서울역에서 좀비가 발생하
이 애니메이션 영화는 연상호 감독 작품으로 같은 해 공개된 ≪부산행
샤텔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Neuchâtel International Fantastic Film Festival), 뉴욕 아시안 영화제, 스페인 시체스 판타스틱 영화제(SITGES
스틱 영화제 등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브뤼셀 국제 판타스틱
거리를 떠도는 가출 소녀 혜선과 남자 친구 기웅, 그리고 집 나간 딸을 찾
자 이들은 탈출구 없이 지옥이 된 도시를 헤매 다닌다. “<서울역>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스케치라고 생각했다. 관객들이 느끼고 있는 사회적 공기 같은 것들이 영화에 담겨 있다고 생각해줬으면 좋겠다”라는 감독의 말처럼 이 영화는 재난 영화이면 서 우리의 일상을 담고 있는 세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좀비를 피해 달아나던 주인공들이 깨닫게 되는 우리 사회의 참혹함에 대해 함께 공감할 수 있을지 기대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번 포럼은 국가별로 기차와 관련된 다양한 서민들의 삶의 모습을 담으려고 기획하였다. 근대화의 양상과 영향력이 국가별 로 어떻게 상이하게 나타나는지, 기차가 표상하는 사회적 상징기제의 다양성에 대해서 숙고하고 토론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를 희망한다. 본 포럼은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세미나실(3102호)에서 개최된다. 코로나 상황에 따라서는 온라인 줌 회 의 방식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된다.
양종근 교수┃대구 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국제학술대회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 공동주최 국제학술대회
“길 위의 경계인: 환대의 부재와 떠도는 영혼”
지난 8월 11일 제주대학교 현석재에서 대구대학교 인 문과학연구소(소장 권응상)와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 원(원장 전영준) 공동주최로 국제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소 지원사업으로 진행된 이번 국제학술대회의 주제는 “길 위의 경계인: 환대의 부재와 떠도는 영혼”으로, 지역의 경계를 넘어 이동(이주)하는 삶 의 문제를 조망하는 두 연구소의 연구 지향과 성과를 아 우르고 있다.
이번 국제학술대회에서는 미국, 이탈리아, 일본, 중국, 한국 등 5개국의 연구자들이 지역과 국가의 경계를 넘어 서는 다양한 주제의 연구 성과를 발표하고, 그에 관한 열 띤 토론으로 이어졌다.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 직하다 현재 미국에서 독립학자로 활동 중인 로버트 파우 저 박사는 “일본의 ‘낙오 문화’ 속에 한인 디아스포라 작가 의 진정성과 힘”을 주제로 한 기조발표에서 재일한인문학 이 지닌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또한 “사회 저항과 제도의 변천: 신도시화 배경에 서의 중국 도시의 재생 연구”(중국 화동사범대 장전 화 교수), “제주 4.3 당시 일본으로 건너간 제주민 들: 밀항/난민을 둘러싼 포용과 배제”(일본 리츠메 이칸대 문경수 교수), “유럽의 난민 조약체제 흔들기 인가?: 유럽 난민재판소 판례분석을 중심으로”(이탈 리아 베니스 카포스카리대 안종철 교수), “재한 조선 족 문학의 ‘대림동’ 재현 양상”(연세대 전은주 교수) 등의 다양한 주제발표를 통해 경계를 넘는 인간의 삶 과 제도의 문제를 중층적으로 탐색하였다.
사회 공간 안팎을 넘나드는 다양한 이동과 이주의 문제를 다룬 이번 국제학술대회는 제주대(현석재)와 대구대(인문과학연구소)의 이원 현장과 줌(zoom) 과 유튜브, 페이스북을 활용한 하이브리드 국제학술 대회로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국가와 지역, 시차가 다른 곳에 거주하는 발표자, 토론자, 그리고 연구주 제에 관심을 가진 여러 연구자들과 일반인들이 다양 한 방식으로 접속하여 연구 성과와 문제의식을 공유 할 수 있었다.
이번 국제학술대회는 일상화된 이동과 이주의 시대에 국경과 지역의 경계를 넘어선 사람들에 대한 환대의 가능성을 모색하 고, 그에 대한 학술적 연구의 필요성을 제고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시효성 있는 통찰을 제시하였다. 앞으로 두 연구소에서 이뤄 질 인문학의 사회적 역할과 확산이 기대된다.
배지연 교수┃대구 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영남일보(2021.8.18)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2021년 상반기 지역 & 시민인문강좌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는 지역 시민을 대상으로 한 인문지식 확산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2021년 상반기에 진행된 지역 & 시민인문강좌 프로그램을 소개합니다.
2021년 5월~6월에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주관하는 <인문독서아카데미> 사업에 구수산도서관(대구 행복북구문화재단)과 협업하여 프로그램 기획과 시민인문학 강연을 진행하였습니다. <도시 속 인 문학 이야기-동아시아 편>이라는 주제로 한중일 3국의 주요 도시에 대한 인문학 강연 및 랜선 탐방이 이루어졌습니다.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에서 2020년부터 진행해온 <도서관 특강-찾아가는 인문학>이 “with 대구대학교 인문 과학연구소 2021 고산 인문아카데미”라는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지난 6월부터 시작된 고산인문아카데미 는 <동아시아 도시기행>이라는 주제로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의 도시들을 둘러보는 도시기행의 형식으로 진행되었 습니다.
콜로키움
일시 : 2021년 10월, 11월 예정 장소 : 대구대 인문과학연구소 세미나실(인3102호) *주제 및 세부일정은 추후 홈페이지 공지
교과목 개발 워크숍
일시 : 2021년 9월, 11월 예정 장소 : 대구대 인문과학연구소 세미나실(인3102호) *주제 및 세부일정은 추후 홈페이지 공지
트랜스 로컬 시네마 포럼
장소 :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세미나실(인3102호)
인문과학연구소 2021년도 2학기 행사 안내
2021년 10월 14일(목) 오후 6시 : 철도원(Il Ferroviere) (1956, 이탈리아) 鉄道員 ,Poppoya) (1999, 일본) 2021년 10월 28일(목) 오후 6시 : 철도원( 哦 香雪 ) (1989, 중국) 2021년 11월 11일(목) 오후 6시 : 오, 시앙쉬에( 2021년 11월 25일(목) 오후 6시 : 서울역(seoul station) (2016,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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