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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니인생20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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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쪽

# 1. 고향집앞에서, 큰누나결혼식이후가족친지들과함께

전라남도영광군법성면용덕리발막부락에서태어났다. 아버지이두만, 어머니진소임, 부모는가난한농민이었다. 열명의자식을낳았지만한국전쟁중에두아들을잃었고

두형의죽음으로삼남인여니는장남이되었다.

딸하나는어릴적에병으로떠나보냈다.

여니는집안의기둥이었다. 전쟁통에두아들을앞세운어머니는 장남을위해모든정성을기울였다. 생일이되면참기름종지에실로만든심지를넣고불을밝혀 지극정성으로기도했던어머니모습을여니는기억한다.

3쪽

부모님두분다무학이셨지만삶의지혜를터득한분들이셨다.

“

아버지는호인이셨지만원칙에서벗어나고, 양심적이지않은행동을눈감아주지않았다. 아버지를통해여니는사회정의에눈떴다.

제가어렸을때아버지가민주당지방당원이셨습니다. 아버지의영향으로그는권력에대한 저항의식과정의감을가슴속에키우며성장했어요.

어깨너머로정치를배웠다고할까요.

”

# 2. 7남매와그가족들

4쪽

# 3. 광주북중졸업사진

용덕리에있는자그마한분교, 삼덕초등학교를다녔다. 공부도잘했지만 연날리기같은놀이도즐겼다.

가을이면추수를거들었다.

농촌의다른아이들처럼봄이면모내기

매번일을못한다고야단맞기일쑤였다.

체구는작았지만어려서부터어른들로부터 어른대접을받아서인지책임감이남달랐다. 목소리도낮고굵어‘생영감’이라는별명이붙었다.

시골학교에20대총각선생님이부임해오셨다. 박태중선생님은여니의영민함을알아보시고 광주로중학교를가라하셨다.

간식거리와수련장을들고수시로가정방문을오시는 선생님의열정과설득에힘입어광주로유학을떠났다. 광주북중입학은인생의커다란전환점이되었다.

5쪽

1964년여니가만난광주는낯설었다. 싸게하숙치는집에들어간탓에영양섭취도부족했다. 2주에한번씩시골집에가서하룻밤을자고 용돈과먹을거리를챙겨광주로다시향했는데

집을떠나기싫어매번길모퉁이에서서울었다.

아버지께들키면야단을맞으니까 아버지가보시지않을때만울었습니다. 그런데제가시골집을떠날때마다 아버지몰래운다는것을 어머니가눈치채셨습니다. 하루는어머니께서제게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광주가기싫으면가지마라. 내가자전거사줄게. 법성으로학교가거라.”

(<어머니의추억>중에서)

# 4. 광주북중친구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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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때마다선생님들이버팀목이되어주셨다. 광주북중1학년때의담임을맡은정종선선생님은 쇠고깃국이올라간밥상을차려주셨다. 고등학교에가서는고3 담임이셨던김정수선생님께서 종종고기를먹여주셨다. 김선생님은밤이면골목길하숙방창문을두드리며“공부하냐?” 제자의안부를물으셨다.

훗날여니는“중요한고비마다선생님들이크게도와주셨고, 올바른길을제시해주셨고, 거의정기적으로고기를먹여주셨다.”라며감사를표했다.

# 5. 광주일고친구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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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고등학생시절, 친구들과함께

1967년호남의최고명문광주제일고등학교에입학했다. 학생독립운동의진원지인광주일고의교정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이자랑스럽게서있다. “우리는피끓는학생이다. 오직바른길만이우리의생명이다.” 기념탑의글귀는평생의지침이되었다.

여니는책읽기와글쓰기를즐겼다.

시인문병란선생님의국어시간을좋아했던

당시국어선생님들사이에서“이낙연이틀리는문제를만들자.”라는 얘기까지나올정도로여니의국어실력은뛰어났다.

신문, 특히동아일보의사설과칼럼을읽으며매일일기를썼다. 어느날동생은일기장에적힌 “내몫으로한방울의피도남기지않겠다.” 는글을보고 형의책임감과부담을절절히느꼈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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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서울대법대70학번으로서울생활을시작했다. 1학년때입주가정교사를하다가나와 학교가있는동숭동근처의선배하숙집, 친구자취방, 독서실등을전전했다. 설거지해주고이삿짐을나르며친구집에얹혀살았다.

장난처럼‘법대가아니라밥대를다닌다’라고했으나

# 7. 대학입학식아버지와함께

끼니챙기기도쉽지않았다. 영양실조로체중이50㎏아래로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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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육군훈련병

한국사회는박정희장기독재에질식할위기에처했다. 영양실조로파리해진청춘에게신민당후보로 대통령선거에처음출마한김대중전대통령의 유세를듣는일은큰위안이고희망이었다. 대학강의보다김대중전대통령님연설을들으러다녔다.

1974년졸업식을며칠앞두고영장이날아오자곧바로육군에입대했다. 신병훈련을마친뒤카투사에배속돼미8군제21 수송중대에서병장으로 만기제대했다. 십대이후상체를벗었을때갈비뼈가보이지않은것은 이때가처음이었다.

제대하자한친구가고시를준비하라며후원을자처했다. 억울한사람들을돕는변호사가되고싶었다. 그러나남에게신세지는것이불편하고, 장남으로서집안을책임져야한다는생각에 7개월만에공부를접고취직했다. 첫직장은투자신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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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동아일보로옮겨기자가되었다. 정치부에서1980년대격동의현장을취재했다. 이기자는팩트로대결하는원칙주의자였다. <가디언>지편집장찰스스콧의‘논평은자유다. 그러나사실은신성하다’라는격언에매료됐고신봉했다.

동아일보기자들은권력의감시자로정권에정면으로맞섰다. 1 985년안기부는포괄적보도금지지시를어겼다며 김충식기자등을남산으로연행해가혹한고문을가했다. 총선때정권에비판적이었던것에대한보복이었다.

이를알게된편집국기자들은안기부에‘우리의입장’이란제목으로 언론자유와인권침해에대한비판의글을전달했다.

여니는이글의대표집필자였다.

# 9.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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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4월에미술교사김숙희와소개로만나다섯달만에결혼했다. 친구에게돈을빌려봉천동에전셋집을구했다. 결혼한지2년만에아이가태어났다. 여니는가장행복했던순간으로‘아들이태어났을때’를꼽는다.

“

제가아버지가됐다는어리둥절한실감, 아들이라는한인간의일생을책임져야한다는벅찬의무감, 한 생명을낳고탈진한아내를보는애잔한마음등등형언할수 없는감동에온몸이떨렸습니다. 그날이제인생의가장큰변화였습니다.

”

# 10. 결혼

수차례이삿짐을싸고풀다가13평짜리아파트를사서 내집마련의꿈도이뤘다. 정치부기자로쉴틈없이보내는사이아이는부쩍부쩍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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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기자시절

1987년6월항쟁때야당을출입하면서광장에서최루탄도많이마셨다. 이후평화민주당김대중총재께서 두번째대통령선거에도전하셨을때전담기자가되었다.

훗날영광을방문해여니의아버지를만났을때

김대중대통령은승용차옆자리를내주셨고, 동교동서재에출입을허락하셨다.

“이낙연은변함없는사람”이라고했던김대통령의말씀이 아버지에게는여생의자랑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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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도쿄특파원

1989년도쿄특파원에내정됐다. 동시에총선출마제안도들어왔다.

김대중총재의천거였고, 결과는거의승리로예상되었다.

두가지갈림길에서여니는도쿄특파원은선택했고.

특파원3년2개월동안일본의속살을이해하며

일본어공부에돌입했다.

일본을통해세계를보려고노력했고, 현지인들과깊은교류를나누었다.

여니가임기를마치고떠나자그를그리워하는일본인들은

“

‘이낙연회’라는모임을만들기도했다.

나는국회의원보다특파원이더하고싶었다. 그기회를놓치면나는무식쟁이가될것같았다. 3년2개월동안나는일본을경험했고, 세계를짐작했다.

동아일보기자로21년을살았다.

그러나그것은행운이었다.”고압축했다.

”

스물여덟부터마흔아홉까지의시간을여니는

“내가동아일보기자가된것은우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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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김대중대통령의천거로16대총선에출마해 전남함평·영광의국회의원이되었다.

초선부터국정감사에서원자력발전소, 노숙인, 택시운전사, 임대주택 등에대해르포를냈다. 의원실보고서는야당의원들이국감에서 주로다루는‘정부.여당공격형’ 이슈와도거리가멀었다. 그래도시대의중요한이슈를찾아꾸준히르포를발간했다.

여니는새천년민주당대변인을맡았고, 여러어록을남겼다. 2002년쓴마라토너손기정선생에대해추도성명에서‘42.195㎞를 세계에서가장빨리달린사나이가이제저희에게한걸음도오시지 못합니다’라고표현했다. 코미디언이주일씨가작고하셨을때에는

“선생께서주시는웃음이있었기에, 우리네서민들은못남이덜못났고, 약함이덜약했으며, 외로움이덜외로웠고, 아픔이덜아팠습니다.” 라고추모해공감을얻었다.

# 13. 르포국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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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6대대선에서는대변인으로 노무현후보를엄호했다. “지름길을모르거든큰길로가라. 큰길도모르겠거든직진하라. 그것도어렵거든멈춰서서생각해보라.” 는그의논평은오래회자되었다.

그의논평은노전대통령의의중을가장 잘짚어내고, 가장노무현다운화법과 의지를드러내는것으로유명했다.

# 14. 대변인

김근태새천년민주당최고위원은이대변인의특출한능력을 두가지로압축했다.

“10시간짜리회의를1줄로요약할줄아는유일한사람, 우울한분위기를밝게만드는사람.”

노무현대통령당선인시절에도대변인으로동행했고, 대통령취임사를최종정리했다. 이시절을여니는 ‘인생에서가장충실하고치열했던기간’으로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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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열린우리당이과반의석을차지했고, 여니가잔류한새천년민주당은17대총선에서위축됐다. 재선에성공, 새천년민주당원내대표와사무총장등을역임했다.

열린우리당과민주당이다시합친이후18대국회에서3선의원으로 농림수산식품위원회위원장을맡았다. 20년묵은난제인농협법개정을2009년여야만장일치로처리했다.

2010년, 상임위를복지위로옮긴뒤에는 국내최초로고독사문제를제기했다. 복지의사각지대를줄이려다양한길을모색했다. 특히“겨울은힘든사람이더힘들고, 외로운사람이더외로운계절” 이라며경로당의난방예산을챙겼다.

# 15. 의정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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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선을하는동안국회의원으로할수있는모든일을해냈다. 당에서대변인과사무총장, 원내대표등중책을두루맡았다. 상임위도외교통일·산업자원·국방·건설교통·보건복지·기획재정· 예산결산·농림수산위등다양한상임위에서폭넓은경험을쌓았다. 한일의원연맹간사장과수석부회장을역임하기도했다.

이런경험과이력은2019년한일관계가강제징용판결과 수출규제문제로얼어붙어있는상황에서구원투수로등판하게했다. 어디에서는있는자리에서최고의성과를내려했고, 최대로경험을넓히려했다.

상도많이받았다.

# 16. 국정감사

국정감사NGO모니터단이선정하는우수의원에거의해마다올랐다. 보건복지위원으로대한노인회로부터최초의노인복지대상도받았다. 한국문화예술유권자총연합회가주는국정감사최우수국회의원상, 국제평화언론대상의정부문최우수상을받았다. 국회의장으로부터‘입법및정책개발우수의원’으로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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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도지사출마

득표율로당선했다.

2014년전남도지사에도전했다.

이기기어려운싸움이라는예측을 뒤엎고민주당경선에서승리

본선에서는77.95% 전국최고의

취임첫해에고용노동부의‘일자리종합대상’을받으며주목받았다.

농번기마을공동급식, 공공산후조리원, 장애인전용산부인과

작은영화관, 개천에서용나게하는사업

서민빚100억탕감프로젝트등서민시책을이어갔다.

문재인대통령의대선공약으로채택됐다.

2017년에는전국2위를차지했다.

주민들에게가장인기를끌었던‘100원택시’는

광역단체장평가조사에서지지도가계속상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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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2019년강원도고성산불

2017년5월31일문재인정부의초대국무총리로취임했다. 문대통령의국정파트너로내각을안정적으로이끌었다는평가가높았다. 특히산불, 태풍, 지진, 메르스, 조류인플루엔자, 아프리카돼지열병등에성공적으로대처했다.

총리취임직전겨울에3천여만마리의닭과오리를살처분했으나 그의집중력으로‘살처분제로’를달성했다. 그기록은여니가퇴임한뒤깨지고말았다. 총리직퇴임뒤문재인대통령은재해재난대처경험을 책으로써보라고권유했다.

외교에서도총12번의해외순방을통해28개국을방문했다. 친화력높은화법으로순방국가마다경제외교의성과를냈고, 친구를만들며외교지평을넓혔다. 2020년1월14일, 취임2년7개월13일만에민주화이후 최장수총리로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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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2020.8.당대표기자간담회

2020년, 6년만에국회로복귀했다.

민주당공동상임선대위원장을맡아21대총선의압승을견인했다.

민주당대표에올라192일간공수처설치

서울종로구에서당선해5선국회의원이되었다.

검찰·경찰·국정원개혁, 공정경제3법등422건의법안을통과시키는등

민주화이후가장크고많은개혁을입법으로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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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9일대표직에서물러났다.

‘뜻은높게, 몸은낮게’를가슴에품고 대한민국의새로운미래를준비하고있다. 안으로는복지를충실하게만들고, 중산층을두텁게하는‘내삶을지켜주는나라’, 밖으로는세계의신뢰와존경을받는 ‘품격있는선도국가’로나아가도록역할을하려한다.

7월5일20대대통령선거출마를공식선언했다.

# 20. 출마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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