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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의 구술집

이북 원문에서 글자만 옮긴 전체 텍스트입니다. 표·그림·사진과 원래 모양은 이북에서 확인하세요.

5쪽

당진문화예술인 구술총서 01

시조시인,향토사학자

6쪽

일러두기

1. 이 책은 당진문화재단의 「 2019 당진문화예술인기록사업 」 일환으로 제

작되었습니다.

2. 이 책은 구술 채록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독자가 읽을 때

자 하였습니다.

난해하지 않을 범위 안에서 구어체, 사투리 등을 살려 현장성을 전달하고

2-1. 본문에서 ‘전사본’은 처음 구술문을 그대로 채록한 초본을 말합니다. 본문

에 전체 들여쓰기 한 것이 ‘전사본’입니다.

2-2. 원 전사본은 질문과 답이 있는 대담 형태였으나, 독백의 형식으로 다시

엮었습니다. 질문(고딕체)은 구술자의 생애사를 전달하는 스토리텔링 형

식으로 연구자의 해설을 덧붙여 재구성하였습니다.

2-3. 구술의 시간차가 있는 경우, 전사본과 전사본 사이에 한줄 띄어쓰기 하였

습니다.

7쪽

3. 구술 채록 선정자는 ‘구술자’로 채록 시 질문 및 면담을 담당했던 연구자는 ‘조사자’로 통일했습니다.

4. 구술자의 구술 내용은 편집과 교정 과정에서 최대한 사실 관계를 확인하 여 정리하였습니다. 다만, 사진 자료의 연도, 개인의 생활사 등 일부 확인 되지 않은 사항이 있을 수 있습니다.

6. 부록으로 참고문헌을 수록하였습니다. 각주에는 구술자의 작품 중 전부 혹은 일부를 인용, 발췌한 것에 대한 출처와 함께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

구술 조사 일시 : 2019년6월11일 - 10월25일 장소 : 당진시 남산 마주카페

한 연구자의 덧붙이는 말도 수록하였습니다.

8쪽

글 싣는 순서

일러두기

1 . 어린 성의, 시조를 만나다 아비를 닮은 큰 아들 시조를 짓고 만난 자신감 <집배원의 하루> 삶의 자세 혹은 글 짓는 신조

2 . 나루문학회 초석을 다지다 나루문학회에 들어가다 나루문학회 당진문학 지평을 열다 나루문학회, 지역 옛 문인을 기리다 당진 지역 문학회의 통합과 신설

3 . 한국문인협회 당진지부의 탄생 지역 문인들의 구심점, 당진문인협회 『당진문학』 창간호를 낳기 위해

9쪽

4 . 윤성의가 사랑한 심훈 「심훈의 시 바로 읽기」 필경사에서 찾아낸 오류 「소설 상록수와 공동경작회」 「소설 상록수와 공동경작회」 발표, 그 후

5 . 지역 문인의 발자취를 찾아서 지역 문학 답사 코스를 제안하다 ‘표제 단편소설’의 초시, 『모란봉』과 이종린 손병희 선생 은거지를 발견하다

6 . 성실한 향토사학자의 삶 고향에 돌아와, 고향을 돌아보다 당진향토문화연구소에 들어가다 향토사학자의 역할과 중요성

7 . 윤성의가 글을 대하는 자세 표절에 관한 불편한 속내 “말과 글이 같은” 시조시인 시조시인, 윤성의

·참고한 문헌과 언론보도 ·윤성의가 걸어온 길

11쪽

어린 성의, 시조를 만나다

아비를 닮은 큰 아들 시조를 짓고 만난 자신감 <집배원의 하루> 삶의 자세 혹은 글 짓는 신조

13쪽

“그래도 의지할 건 큰아들밖에 없다, 생각하신 거 아니었을까.”

굉장히 가난했거든. 가난해서 신발을 사 신었던 기억이 없어. 게다 라고 알어? 게다 신고, 짚신 신고 그랬거든. 학교 간다고 신을 사 주셨거든. 검정고무신. 그런데 그걸 학교 가는 첫날 잃어버린 거 여. 누가 헌신을 벗어놓고 내 새신을 신고 가버린 거여. 굉장히 아 픈 거여. 그걸 찾는다고 공부도 안 들어가고 복도를 돌아다녔어. 내 신발 알거 아냐. 그런데 못 찾았어. 공부 안하고 돌아다닌다 고 선생님한테 굉장히 혼난 기억. 그러니 굉장히 슬픈 기억이지.

학교에서 돌아오면 소꼴을 베야하는데 풀 벨데가 마땅치 않은 거 여. 왜냐면 소를 기르는 집이 많았으니까 자기 밭뚝서 못 베게 하

아비를 닮은 큰 아들

14쪽

1955. 2. 25. 조일사진관 가까이 지내던 급우들과 함께. 가운데가 윤성의

15쪽

는 거여. 벨만한 데를 찾아 풀을 베야 는데 굉장히 괴로운 거여. 지 금 생각하면 추억인데 그때는 괴로운 거야.

여든을 넘긴 윤성의가 기억하는 어린 성의는 가난한 농부의 맏이다. 살을 에이는 겨울바람을 이렇다 할 외투하나 없이 온몸으로 맞아가며 학교를 걸어 다녔다. 그 땐, 다 그랬다. 그 시절엔 너나할 것 없이 가난했다. 그렇다 해도 당시의 가난을 추억이라고만 포장하기엔, 수십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여전히 어린 성 의가 안쓰럽다. 윤성의는 1938년 당진군 송산면 매곡리에서 태어났다. 3남4녀 중 맏이다. 학교에 다닐 형편이 아니었지만, 부친은 농사를 지어 큰 아들을 고등학교까지 뒷바라지 하셨다. 하지만 큰 아들에 대한 기대만큼 사랑은 드러내어 놓고 표현하지 않으셨 다. 유독 큰 아들 성의에게만 엄하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제와 부모에 대한 원망이랄 건 없다. 가난하고 싶어 가난한 이가 어디 있나. 그래도 돌이켜보 면, 떠오르는 기억은 아팠던 것들이다.

당신이 보통학교 밖에 못 나왔으니까 못 배운 데에 대한 보상심리, 이런 것까지 해서 기대가 크셨던 거여. 부모 기대에 부응하는 자식 은 별로 없어요. 왜냐면 부모의 기대가 많이 크거든. 부응에 미치 지 못하니까 많이 꾸중하셨지. 살림이 어렵다보니까 공부할 시간이 별로 없었어. 학교 갔다 오면 소꼴을 베야 돼. 소 풀 뜯기고 그러다 보니까 공부할 시간도 없고. 예를 들어 참고서 같은 거 사줘야 공부 를 하는데 12년 학교 다니는 동안 참고서 한 권 산 적이 없어. 다른 애들 다 참고서 갖고 공부하는데, 교과서만 가지고 공부하니께 따

16쪽

1957. 12. 21. 현대사장 현대사장 얼마 남지 않은 졸업을 앞두고 가까이 지내던 급우들과 겨울 방학 앞에 만났다. 위 사진은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의 원판을 가지고 윤성의가 직접 인화한 사진이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 사진에 관심을 갖고 집에서 방 문을 가려 암실로 만들어 사진을 직접 인화했다.

17쪽

라갈 수가 없는 거여. 60여명 중에 10여등 하는 아들을 당신은 굉 장히 만족치 않았겠지. 당신 스스로는 왜 이런지는 모르고. 가난하 다보니까 방이 두 칸 밖에 없었어. 안방은 어머니가 쓰셔야 되니, 웃방에서 공부를 해야 되는데, 시골이라 사람들이 마실을 와요. 마 실을 오면 웃방에서 얘기를 하는데 그 사람들 담배연기 때문에 공 부를 제대로 할 수 있겠냐구. 내가 생각할 땐 그 당시 꼴찌를 안 한 것도 내 딴엔 대단한 건데 아버지 입장에서는 아주 못 미치는 거지.

봄이면 뒷산에 함박꽃이 피고 겨울이면 학교 가던 길목이 꽝꽝 얼어붙던 시절이 었다. 고등학생 시절 학비를 내지 못해 들어야 했던 선생의 쓴 소리는 고스란히 가 슴에 박혀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됐다. 가난이 죄 같던 시절, 그땐 엄하고 융통성 없는 부친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그 시절 아버지의 나이를 훌 쩍 넘어서고야 알았다. 그나마도 어렴풋이.

내 성격이 아버지 영향이 많아요. 아버지는 전혀 융통성이 없는 거 여. 예를 들면 비 오는 날 학교에 우산을 쓰고 갔을 거 아냐. 바람 불어 뒤집혔어. 그럼 꾸중을 하는 거여. 그거 불가항력인거여. 바 람이 불면 우산이 뒤집어 질 수도 있는 건데, 근데 보통 꾸짖는 게 아니라고. 그런데 지금도 이해를 못하는 게. 나한테는 요것만큼만 있으면 꾸지람을 하셨는데 … 내가 아버지 대소변을 2년을 받아 냈 어요. 둘째 아들 그렇게 사랑한 둘째 아들은 와서 옷을 한번 갈아 입혀 드리라고 해도 안 해. 아프면 아프다고 말씀을 하시면 병원을 모시고 가던지 약을 사드

18쪽

리던지 할 거 아냐. 어느 날 보니 종기가 났어요. 욕창이라고. 언제 부터 그러냐니까 오래 됐대. 왜 말씀 안하셨냐니까 그거 뭐 일일이 이야기하느냐는 거야. 그래서 약을 사다 몇 번 붙이니까 금방 나아 요. 말하자면 아들한테 부담주기 싫다 그런 생각이셨던 거 같아요. 그게 말하자면 부모의 마음 아니었나. 그러니 늦게 철이 난거 같아.

19쪽

‘나도 시조를 쓸 수 있지 않을까’

시조를 짓고 만난 자신감

윤성의는 소극적이고 수줍음 많은 학생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송산에서 당진읍내 까지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소꼴을 베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었다. 마땅히 내가 해야 할 일이라 여겼다. 동네 친구들과 몰려다닌, 누구에게 나 있는 기억도 그리 많지 않은, 조용한 아이였다. 고등학생 시절, 우연히 얻게 된 헌 카메라로 흑백사진을 찍었던 일이 학창시절 유일한 일탈이었다. 그러던 중, 윤 성의 이름 석자가 모두 앞에 내 걸리는 일이 벌어졌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교내 백일장을 했어요. 그래 나는 시조 분야를 들어가서 했는데 내가 제일 따돌릴 수 없는 게 이근배야. 근배는 학교 다닐 때부터 기성시인 못지않게 시를 썼어. 그 사람이 시를

20쪽

1957. 4 봄 고등학교 수학여행 중 공주 공산성에서 고물 Folding 카메라로 잡은 공주읍의 전경

21쪽

조금 예민하니까.

했기 때문에 나는 시조를 한 거야. 그런데 얘가 시, 시조 두 개를 다 하더라고. 시조는 내가 1등을 했는데. 근배를 1등보다 앞에 상 을 주더라고 특별상이라고. 하여튼 그때 내가 아, 시조란 건좀쓸수 있겠구나 생각한 거지. (그 전에 글을 쓴 일은 별로 없지만)시조는 많이 읽었거든. 고시조 를 많이 읽었어. 시조에 대한 개념은 어느 정도 있었고. 현대시조 는 육당 최남선, 그 분의 시조를 많이 읽었어. 아마 내 기억에 중 학교 국어선생님이 시조 작품을 많이 소개해줬어. 그때 감수성이

말하자면, 그건 윤성의의 ‘첫 작품’이었다. 어쩌면, 스스로에 대한 ‘첫 자신감’이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어린 윤성의는 가난하고 수줍었지만 누가 말하지 않아도 제 할 일을 알았다. 소설책을 빌려 읽고 최남선의 시조를 읊조리는 것이 유일한 사치였다. 대한민국예술원 원장이자 전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지낸 시인 이근배는 그의 오랜 친우다. 두 사람은 초•중•고등학교를 모두 함께 다녔다. “맨날 문학 이야기만 하던” 이근배와 가까이 지내면서도, 소설책을 빌려 읽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으면 서도, 윤성의는 그전까지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그러던 중 만난 상이었다. 교내 백일장 시조부문 1등 상은.

시조라는 게 전통문학이잖아요. 우리 전통문학이라는 데에 대한 애착도 조금 있었고. 우리 정서에 맞지. 우리말하고 잘 어울린다 고. 그래서 자연히 배어들었던 것 같고 시는 굉장히 어렵게 생각 했던 게 어떻게 써야 할까, 형식도 없고. 시조는 형식이 있으니 그

22쪽

1959. 4 봄 어느 날 시루지 해변가

23쪽

걸 맞추면 조금 쉽다고 생각했던 거 같아. 백일장 후에 ‘나도 시조 를 쓸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어.

24쪽

<집배원의 하루>

“글을 쓴다는 생각을 할 시간이 없었어”

상 한번으로 변한 건 없었다. 여전히 가난했고, 사는 게 바빴다. 학교를 졸업하자 막막함은 더해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하고 첫 직장을 다니면서도 한

동안은 시조를 잊고 살았다. 무엇보다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백일장 이후에 학교를 졸업하고 한 1년, 집에서 농사를 거들었고. 대학을 못가니까. 그리고 답답하니까 해군을 지원해서 갔어요. 해 군 갔다 와서 또 한 1년 집에 있다가 서울서 친구 형이 회사한다고 해서 올라갔지. 올라와서 경리를 보면 좋겠다 해서 갔는데 결국 경 리는 못보고 이것저것 했어요. 그래서 글을 쓴다는 생각을 할 시 간이 없었어. 너무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으니까. 살기 바쁘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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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배원의 하루

한여름 뙤약볕에

황토길 꼬불꼬불

지는 해 마음이 바빠

러니까, 그런 걸 생각할 수가 없었지. 내가 우연히 공무원 시험을 봐서 공무원이 됐어요. 첫 부임지가 홍성인데 그 우체국에서 근무 하면서 무슨 일이 있었냐면 안면도우체국 집배원이, 겨울에 눈이 많이 왔어. 외딴집 편지 한 통이 남았는데 그걸 꼭 갖다 줘야겠다 는 생각 때문에 갖다오다 죽었어. 그걸 보고 시조를 한 편 지었어. 그게 내 첫 번째 시조집에 나오는데.

1)

동지섣달 논보라속

돌아드는 험한 산길

발바닥에 불난다.

군대간 아들 소식 벌이간 남편 기별

1) 윤성의 첫 시조집 『꽃은 지기위해 피느니』(도서출판 글방, 1998) 수록

26쪽

가방에 가득 담아 어깨에 둘러메고

편지요 편지가 왔소 하루해가 짧아라.

윤성의는 주로 삶 속에서 시제를 찾았다. 그는 문득 뇌리를 스쳐가는 문구를 손 닿는 대로 기록한다. 살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탐구한 내용도 때마다 놓치지 않 고 글로 남겼다. 그는 그렇게 쌓인 원석을 때가 되면 다시 꺼내어 다듬고 작품으 로 완성해 왔다. 살다보면 누구나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일들이 있다. 막상 풀어놓아보면 딱 히 특별하진 않아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되새기게 되는 일들이다. 그런 일들 은 대게 조금이나마 생각이나 마음의 전환점이었던 경우다. 윤성의는 그런 일들 을 시조로 풀었다. 때로는 동인지에 수필 형태로 남기기도 했다. 그 중 하나가 강 경우체국 근무 시절 겪은 일이다.

내가 강경우체국 가서 담당한 업무가 전신전화 계장이었거든. 전 신전화계장. 그런데 전신전화계장을 하면 뭐가 골치가 아프냐하 면, 지금은 전화가 자동식이라 그냥 본인이 걸고 싶은데 걸면 되 잖아요. 그때는 그런 게 아니고 공전식이라 그래가지고 수화기를 딱 들면 교환에게 신호가 딱 떨어져요. 그럼 연결해주고 그러는 거 란 말이에요. 그게 왜 골치 아프냐면 잘못 연결한다던가, 늦게 연

27쪽

1974. 1. 13. 진산우체국에서 직장동료들과 함께. 뒤로 보이는 [총화로 전진하는 체신의] 현판 글씨는 윤성의가 직접 썼다. 당시는 해마다 대통령이 체신부의 구호를 정하면 각 우체국에서는 현판을 만들어 현관에 걸었다

28쪽

친다고. 금방 울 것 같데.

결한다던가 하면 말썽이 많이 나거든요. 민원인한테 신고가 들어 온 거요. 무슨 신고가 들어왔냐면 강경은 상업이 많이 발달했어요. 포구가 되어 놔가지고. 자기가 대달라는 데 안대주고 엉뚱한 데를 대줘서 교환원이. 영업기밀이 샜다는 거요. 그래서 자기가 손해를 봤다는 거요. 그럴 수 있지. 다른 사람한테 알려지면 안될게알 려질 수 있잖아. 잘못대주니까. 자기가 통화하고 싶은 사람인줄알 고 이야기를 했는데 딴 사람인거야. 그래 손해를 봤다는 거야. 그 렇다고 전화가 왔어요. 신고가 온 거야 말하자면. 알았다. 내가 조 사를 해보마. 조사해보고 결과를 알려드리마하고, 조사를 해보니 까 사실이야. 잘 못 연결해준 게 사실이야. 그럼 벌을 받아야 하잖 아. 왜냐면 신고가 들어왔으니까. 처리 상황을 그 사람에게 알려 줘야 한단 말이여. 그런데 시말서를 써오라고, 징계하기 위한 절 차지. 시말서를 써오라고 했는데. 써가지고 와서 이게 그냥 눈물 이 글썽해가지고, 죄송하다고 제가 잘못해서 계장님까지 폐를 끼

근데 그게 내가 볼 때 진심이야. 허위로 하는 게 아닌 거 같은 느낌 이 들더라고. 그때 만해도 나도 젊을 때니까. 저걸 저렇게 스스로 반성하는데 처벌을 해야 하냐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 어떻게 할까. 그래 이제 내가 감수해야겠다. 이런 생각이 든 거여. 그래서 시말서를 도로 줬어요. 서양의 지금 그 눈물을 믿고 싶다. 이 일은 내가 책임지고 해결할 테니까. 시말서를 이 자리에서 찢어버려라. 이러니까 얘가 펑펑 우는 거요. 이제 가봐라. 보내놓고 처리를 해야 할 거 아녀. 신고가 들어왔으니까. 그게 문

29쪽

제지. 어떻게 처리하느냐. 찾아갔어요, 내가. 사장님이 말씀하신 거 다 사실이더라. 우리 직원이 잘못했더라. 사장님이 손해를 보셨 으면 응당 내가 그걸 책임지고 보상을 해드리던지 해야 하는데 사 장님이 아시다시피 공무원이 그럴 능력이 없다. 그럴 재량도 없고. 제가 사장님한테 할 수 있는 게 잘못한 그 직원 벌주고 그 결과 알 려드리는 것밖에 없다. 내 능력이 그거 밖에 없다. 근데 우리 생각 해보자. 그 직원을 처벌한다고 해서 사장님 손해가 보상되는 건 아 니지 않냐. 직원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더라. 내가 볼 땐 진짜 반 성하고 있더라. 용서를 해주면 다시 그럴 일 없을 것 같더라, 내가 볼 때. 이 말은 내가 책임지겠다. 그러니 한번만 우리 용서해주자. 그러니까 그 사람이 그러는 거요. 아, 젊은 사람이 당신처럼 정직 한 사람 처음 본다는 거여. 그래가면서 좋다는 거요. 젊은 사람이 와서 이렇게 정직하게 이야기하고 터놓고 이야기하는데 내가 아니 라고 하면 내가 인간이 아닌 거 같은 생각이 든다. 좋다. 그 직원 이 다시는 과오를 안 한다고 계장님이 말씀하시니까 믿겄다. 나도 계장님 믿고 계장님도 그 사람 믿었듯이. 고맙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 그 친구를 불러서 일은 내가 잘 처리했으니 열심히 일해라. 그런데 진짜 그렇게 고마워 할 수가 없는 거요. 고맙지. 왜냐면 처 벌 기록은 공무원의 전 생애를 따라다니는 거요. 그 기록이. 승진 에도 지장이 있고 계속 지장이 있거든. 그게 지금은 나까지 밖에 모르지만 징계하게 되면 다 알잖아. 미운털 박히지. 그런데 계장이 책임지고 없는 일 해주니까 제 딴에는 고맙지. 근데 고참이었어요. 또 나이도 어지간히 있고. 그래서 이제 교환실에 감독이란 게 있어

30쪽

값진 눈물

는가.

요. 교환원 중에 감독이 있어요. 그걸 시켰어. 감독을 시켰어. 감 독이 셋 있었는데 걔까지. 모든 교환원들이 걔하고 같은 조에서 근 무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직원들한테 잘한 거요. 업무도 잘할뿐만 아니라. 내가 그때 생각했지, 참 내가 이거 하나는 잘 한 거다. 처벌했으면 과연 쟤가 반성을 하고 일을 저렇게 까지 열심히 할까.

사기에“군자는 잘못을 저질렀을 때 성의를 다해 사과 하고 소인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말로만 사과 하는체 한 다.”는 말이 있다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살 수만 있다 면 작히나 좋을까만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일 것이 다. 사람은 신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신이 이 세 상을 만들 때에 어떠한 것도 신 자신과 똑 같은 능력을 가진 존재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이것은 신의 차별화 정책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신과 똑같은 능력을 가진 자가 있다면 신의 권위에 도 전을 받을 것이요. 그 위치가 위태로워질 것이 뻔한 일 인데 어찌 그런 능력을 자기의 피조물에게 부여 했겠

그러니 실수든 고의든 사람은 잘못을 저질러 가며 살게 끔 숙명 지어진 것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31쪽

01 당진문화예술인 구술총서

윤성의 시조시인, 향토사학자

구술 윤성의 조사 남연숙, 우현선 채록연구 우현선 사진 김형태, 윤성의(제공) 표지그림 최하진 표지글씨 윤성의

ISBN 979-11-966078-1-4

총괄 문옥배(당진문화재단 사무처장) 기획 최종길(당진시대방송미디어협동조합 이사장) 제작 당진시대방송미디어협동조합

발행일 2019년 12월 10일 발행인 김규환(당진문화재단 이사장) 발행처 당진문화재단 (우)31774 충청남도 당진시 무수동 2길 25-21 전화 : 041-350-2911 팩스 : 041-352-6896 http://www.dangjinar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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