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우 구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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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충남원로예술인 구술채록집
화가
박준우
일러두기
1. 이 책은 충남문화재단의 <2020 충남원로예술인 구술채록사업> 일환으로 제작되었습니다. 2. 이 책은 2020 충남원로예술인 구술채록사업 연구단체로 선정된 당진시대 방송미디어협동조합의 연구진들이 구술대상자로 선정된 박준우 작가와의 수차례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채록하고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제작 되었습니다. 3. 이 책의 구성은 구술 채록 자료를 바탕으로 연구진이 재구성한 ‘박준우 작가의 생애사’와 ‘구술 채록 전문’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4. 전사본의 경우, 독자가 읽을 때 난해하지 않을 범위 안에서 구어체, 사투리 등을 살려 현장성을 전달하고자 하였습니다. 전사본은 처음 구술문을 그 대로 채록한 초본을 말합니다. 다만, 일부분 비공개 결정의 이유로 수록 되지 않은 내용이 있으며, 구술채록 이후 구술자가 수정, 보완한 내용은 기울여쓰기로 표시하였음을 밝힙니다. 5. 구술 채록 선정자는 ‘구술자’로 채록 시 질문 및 면담을 담당했던 연구자는 ‘연구자’로 통일했습니다. 6. 구술자의 구술 내용은 편집과 교정 과정에서 최대한 사실 관계를 확인 하여 정리하였습니다. 다만, 사진 자료의 연도, 개인의 생활사 등 일부 확인되지 않은 사항이 있을 수 있습니다. 7. ( )와 각주에는 면담 당시의 상황과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한 연구자의 덧붙이는 말 등을 적었습니다.
제1장
한국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도 예술혼을 피워온 박준우 화백
박준우의 구술 생애사
- 연구원 우희창
한국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도 예술혼을 피워온 박준우 화백
해방과 전쟁, 비교적 풍족했던 어린시절
그가 태어난 것은 일제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난지 두달이 지난 1945년 10월 29일 수원 서호 부근 임업시험장 관사에서이다. 임업시험장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와 평 범한 주부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5남매의 둘째로 태어나 어려서는 비교적 유복한 생활을 했다. 반남 박씨 가문으로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이며 선대에서 영의정을 5대째 했다고 전해온다.
박화백의 아버지는 일본에서 공부를 했고 당시 깨어 있던 분으로 그가 미술로 입 문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해방되고 그가 2살 되던 해 서울로 이사를 왔다가 6살 때 6.25전쟁을 맞는다. 가족들 모두 서울에서 천안으로, 천안에서 충남 서천의 한
산으로, 그리고 다시 목포로 피난을 떠났고 최종적으로 부산에 정착했다. 전쟁 중 경황이 없어 피난 경로만 알 뿐, 가는 곳마다 얼마나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 려서 임업시험장에서 참새를 잡아주시던 할아버지께서 피난도중 목포에서 돌아 가셨다는 사실만 기억에 남는다.
전쟁이 길어지자 정치·경제의 중심은 임시수도인 부산으로 옮겨갔고, 30만 명 에 불과하던 부산 인구는 몰려든 피난민으로 100만 명에 이르렀다. 서울에 있던 대학들이 ‘전시연합학교’를 만들어 구덕산 기슭에 가건물을 세우고 피난 온 학 생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시작하자, 중고등학교뿐 아니라 초등학교도 군용 천막 을 얻어 교실을 만들었다. 1952년인지 1953년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이 때 박화 백은 부산에서 피난민 천막학교에 2학년으로 입학했다. 이 당시 학교에서 형이 랑 도시락 1개를 가지고 둘이 나눠먹은 기억이 있을 뿐, 어수선한 시대적 분위기 로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휴전하자 가족들은 서울로 돌아왔다. 폐허가 됐지만 곧 일상을 되찾았다. 그는 서 대문구 천연동에 있는 금화국민학교에 2학년으로 입학했다. 아버지는 부산 피난 민시절부터 ‘대한증권’에서 중역으로 근무했다. 그리 궁핍하지 않은 생활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때 옆 여학생 짝이 일제 크레파스를 책상위에 꺼내놓는 것을 보고, 집에 오자마자 아버지에게 크레파스 사달라고 졸랐는데, 미제 크레용을 사줄 정 도로 집안 형편은 여유가 있었다. 이 당시 그가 첫 그림으로 노트 표지에 있는 나 폴레옹이 말을 타고 알프스를 넘는 그림을 그렸는데, 아버지로부터 “잘 그렸다” 는 칭찬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소질을 보였던 그의 그림은 늘 교실 뒤편에 붙었 다. 돌이켜 보면 그의 아버지도 그림 실력이 상당히 있었고 바로 아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그림을 곧잘 그렸다고 한다. 박화백이 그중 가장 앞서가는 그림 실
력을 보였다. 당시 사회분위기로 보아 공부를 강요했을 법 했지만 아버지는 민주 적이고 개방적이어서 나쁜 짓을 하지 않은 이상 성적이 나쁘다고 혼내지는 않으 셨다.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차남이기 때문에 형에 비해 모든 게 비교적 자유로웠다.
경복고등학교를 나온 형은 인하공대 화공과로 진학했다. 본인은 경영학을 전공하 고 싶어 했지만 당시 화학공장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진로를 공과대학 으로 바꿨다. 물론 아버지의 회사가 부도나면서 가업을 잇지 못했지만 형은 장남 이라는 굴레로 본인의 뜻과는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형은 5공화국 시절 내외경제신문사에서 경리과장으로 재직했다.
중학교에서 만난 평생 스승 김찬희 화백
1960년 그는 덕수중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식 날 아버지는 가족들을 데리고 명동 에 가서 돈까스로 외식을 시켜주셨다. 난생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었다. 평범한 일 상을 보내던 중학교 1학년 때, 그의 삶의 길을 결정할 중요한 일이 생겼다. 친구 와 학교 건물에서 뛰어 놀다가 미술 선생님에게 붙잡혀 벌을 받게 되었다. 선생님 은 무릎 꿇고 손들고 있는 두 학생에게 스케치 종이 한 장씩 나눠주고 그림을 그 려 내도록 했다. 울퉁불퉁한 나무 마룻바닥에서 무엇을 그렸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림을 냈더니 선생님이 내일부터 미술실에 들렀다 가라고 하셨다. 그의 평생 스승인 김찬희 화백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선생님이 내가 그린 그림 보고 너 그림 잘 간직해 둬라 하셨고, 아마
그때 그 선생님이 저를 기억해두신 거 같아요. 그 선생님 성함이 김찬 희 화백이라고…”
김찬희 선생님은 일본 태평양미술학교를 졸업했으며 인천화단의 초창기 멤버로 큰 영향력이 있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실제 작품은 거의 전해지고 있지 않다. 박준우 학생의 미술 스승이자 그의 삶 전반에 영향을 끼친 인생선배로 깨달음, 사색, 낭만, 동경을 준 분이기도 하다.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대학교까 지 그림 지도를 했고, 활동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교류하며 조언을 주었다. 김찬희 선생님은 화단의 이단아 같은 인물이었다. 국전 심사 등에 뒷거래나 부정이 횡행 한다고 보고 기성 화단의 인물들과 마찰을 많이 빚었다. 이러한 스승님의 성격과 화풍을 이어받은 이는 제자로 그가 거의 유일했다. 그가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면 서도 기성 화단과의 교류에 소극적인 이유도 스승님의 영향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박준우 학생이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 미술반에 들어가면서부터다. 선생님으로부터 벌 받은 일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3학년이 되 어서야 미술반 문을 두드린 것이다. 미술반에는 7-8명 정도 있었는데, 학교 지원 금으로 스케치 여행을 자주 다녔다. 강화도 전등사에서 며칠간 묵으면서 스케치 활동을 한 기억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그 여행에서 미술 선생님은 그를 적극 지도 했다. 자신의 진정한 제자로 받아들여 그를 화가로 키워보겠다고 결심한 것처럼 보였다. 스케치 여행을 다녀온 뒤 박준우 학생은 아버지께 유화 그림 도구를 사달 라고 졸랐다. 아버지는 당시 동화백화점(현재의 신세계백화점)에 가서 유화 도구 일체를 사주었다. 화가의 길을 걷겠다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이다. 그때부
터 그는 유화를 그리며 화가의 꿈을 키워갔다.
김찬희 화백 작품
중학교 졸업 무렵 그는 이화예고(현재의 서울예고)로 진학하려고 했다. 본격적으 로 미술을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미술 선생님은 아버지를 설득해 덕수상업고 등학교로의 진학을 유도했다. 중·고등학교가 붙어있기 때문에 고등학교에서도 자신이 계속 그를 지도하려고 했던 것이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미술반 활동 과 스케치 여행은 계속됐다. 특히 여름방학 때는 야외스케치 활동을 열심히 했다. 미술지도는 여전히 김찬희 선생님 몫이었다.
3학년이 되면서 영어나 국사 등을 빼고는 수업엘 잘 들어가지 않았다. 담임 선생 님이 각 과목의 담당선생님들에게 부탁한 이후부터였다. 물론 담당선생님들은 허 락하지 않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짓궂은 장난을 많이 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영화 를 좋아하고 문학을 좋아했다. 고교시절 등교하다가 늦으면 발걸음을 영화관으로 돌렸다. 지금의 조선일보 건물 2층에 있는 동시상영관인 시네마극장엘 자주 갔다. 당시 인기 있던 ‘길’, ‘마야’, ‘애수’ 등을 감명 깊게 보고 철학적 사고를 키워나갔다.
학교에는 미술 선생님 방이 따로 있었는데, 고3 때 선생님께서는 그 방에 들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셨다. 다른 미술반원들과는 차원이 다른 대우 였다. 물감이나 스케치북이 모자라면 캐비닛 안에 있는 선생님 것을 갖다가 쓰도 록 해주셨다.
사실 고등학교 때 미술실에는 켄트지나 물감 같은 것을 무제한으로 쓸 수 있었 던 것이 좋았다. 그는 종종 켄트지를 잘라서 화판에 넣고 덕수궁, 창경궁 등을 다 니며 야외 그림활동을 했다. 아쉬움 없이 물감과 종이로 장난을 치기도 했다. 유 화 빠레트 나이프로 수채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것이 다 나중에 그림 그리는데 도 움이 됐다.
그렇게 야외로 그림 그리러 다니다가 목격한 것이 ‘덕수궁 벽전’이었다. 당시 벽 전은 우리나라 미술사에 있어 일대 사건이었다. 국전 위주의 답답한 미술정치에 넌더리를 내던 작가들이 ‘반 국전’을 기치로 국전이 열리던 덕수궁 바깥 돌담에 그림을 내건 사건이었다. 당시 국전의 관료주의와 선정작의 보수성 등을 문제 삼 으며 열린 ‘벽전’은 어린 박준우의 눈을 끌었다. 아스테이지, 셀로판지 등을 씌우 고 수채화 작품들을 담벼락에 쭉 걸어놓았다. 30호 50호 등 대작들이 내걸린 벽 전은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광경이었다. 그 때 벽전을 주도했던 선배들을 나중에 박화백이 수채화협회에 가입하면서 만나게 된다. 수채화협회의 역사에서 매우 중 요한 사건이었음에도 한국 수채화사에 이 사건이 공식적으로 기록되지 못한 것 을 박화백은 아쉬워한다.
“그 이전에는 그런 벽전이 없었죠. 그분들이 수채화 벽전을 최초로 한 거예요. 지난번에 수채화 역사 50회째 이렇게 나왔는데, 한참 후배들 이 당시 상황을 몰라요. 그때 그 상황을 모르니까 당시의 선배들도 작 고하고 해서 잘 몰라요. 거의 다 빠지고 해체되고 몇 년 있다가 그렇 게 되어서…”
고3 때 국전 최연소 입선, 화가로 입문
고교 3학년 초에 목우회(木友會) 1회 공모전이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단 체로 1957년 창립한 목우회가 매년 회원전을 개최하다가 1963년에 이르러 공 모전을 열었다. 사실화의 등용문인데, 여기에 응모해 입상을 했다. 아파트를 닭장
처럼 그린 그림이었다. 고등학생이 최고 권위의 공모전에 입상한 것은 대단한 일 이었다. 각 대학에서 실시하는 실기대회에 특선이나 입선은 흔한 일이지만 목우 회 입상은 격이 달랐다. 이제 선생님들도 수업에 안 들어오는 것을 묵시적으로 인 정하게 되었다.
고3 여름방학이 되면서 미술 선생님은 아침에 그를 자기 방에 들어가게 하고는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그림만 그리게 했다. 8월부터 거의 두 달 가까이 그림을 그렸다. 김찬희 선생님은 그림에 점 하나 안 찍어주신 분이다. 본인이 스스로 모 든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지도 해 주었다.
“어느 날 한 번 처음에 시작할 때 ‘이놈아 이건 이쪽에다 해야지’ 하면 서 그것도 목탄으로 한 번 딱 해주시고… 목탄은 털어내는 거잖아. 그 리고 이제 명암 한 번 알려주시고…”
두 달 가까이 그린 그림을 선생님은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에 내도록 했다. 여름 방학 때 인천으로 스케치 여행을 가서 그렸던 그림 중 두 개를 골라 하나는 100 호짜리 캔버스에, 다른 하나는 60호짜리 캔버스에 그렸다. 입선된 작품은 100호 짜리고 제목은 ‘청관’(淸館)이다. 작품 소재가 됐던 건물은 개발의 여파로 사라져 이제는 찾을 수 없다. 인천 차이나타운을 그림의 배경으로 삼은 이유도 인천이 김 찬희 선생님의 연고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방학 중 수차례 기차를 타고 인천을 왕래했고 선생님 방에서 두문불출하고 그림을 그렸다.
“고3 때 방학 때마다 스케치를 갔다고 했잖아요. 학교에서 인천 쪽으
<1963 청관>
고등학교 3학년 때 인천 차이나타운을 소재로 그린 유화 ‘청관’이 1963년에 국전에 입선함으로써 박화백은 최연소 국전 입선작가가 되었다.
로 해서 스케치를 하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래서 인천을 들러서 스케 치를 하고 섬에 갔다가 왔는데, 혼자 따로 스케치를 갔었죠. 스케치를 갔다 와서 스승님이 스케치북을 가져오라고 하셔서 미술반에서 스케 치북을 다시 한 번 훑어보시고 거기서 한 점 고르신 게 청관을 그린 스 케치로 이거 좋으니까 100호 캔버스를 준비해서 시작하라고 하셨죠.”
그림을 그리기 전 스승님은 그에게 흰색과 붉은색 물감을 만들도록 했다. 화방( 화공약품 상점)에 가서 안료를 사고 집에서 가져온 들기름을 섞어 개었다. 아연화 와 지단 두 가지를 기름으로 개어 흰색 물감과 주황색 물감인 버밀리온을 만들었 다. 이렇듯 그의 스승은 물감의 성질을 알려주기 위해 물감을 직접 만들도록 했다.
100호짜리 캔버스도 만들어오라 했다. 제재소 가서 각목 사다가 잘라서 틀을 만 들고 남대문 시장가서 천막 텐트 천을 사고, 철물점에 가서 아교 사다가 끓여서 캔버스에 직접 칠해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캔버스에 자신이 만든 물감으로 그림 을 그렸다. 캔버스를 만들다 보니 캔버스의 성질을 알게 되고 유화를 그리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스승님은 늘 물감과 캔버스 등 회화 재료에 대한 인식을 심어 주는 등 그림 그리는 원리를 스스로 깨닫도록 했다. 원리를 알게 되니 데생도 쉬 워지고 물감 그림도 쉬워졌다.
문제는 출품자격이었다. 지금이야 출품에 나이 제한이 없지만 당시 20세 미만인 고등학생은 출품자격이 없었다. 나이를 22세로 고쳐 출품했고 이 작품이 입상을 했다. 실제로는 최연소 국전 입상이었다. 학교에서는 국전 입상으로 난리가 났다. 박준우라는 학생을 새롭게 주시했고 미술반의 위상도 높아졌다. 물론 부모님과 선생님들이 기뻐하시는 것은 당연했다. 아버지는 학교 선생님 모두를 명동으로
모셔 한턱 쏘았다. 이제 그는 어린 나이에 화가로 당당하게 입문을 하게 되었다.
대학 진학, 하지만 계속되는 불운
자연스럽게 진로를 미술대학으로 했다. 대학 진학도 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서울 대나 홍익대는 성적이 모자랐다. 당시 선생님의 친구들이 많이 있다고 서라벌예 대를 추천해 주었다. 하지만 대학생활은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별로 없었고 김찬희 선생님만한 스승도 만나지 못했다. 대학 가서도 여전히 그림 지도는 김찬희 선생님에게 받았다. 학교에서는 본격적인 실기 지도조차 받 지 못했고 그냥 강의만 들었다.
대학교 1학년 때 국전에 출품한 작품이 낙선하면서 공모전과의 인연도 없었다. 당 시 봉은사까지 가서 스케치한 작품을 보고 스승님께서는 특상감이라고 칭찬했지 만 낙선하고 말았다. 이후로는 각종 공모전이나 국전에 출품을 하지 않았다. 공모 전이라고 하는 것이 실력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 까닭이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대학교 1학년말부터 집안사정이 궁핍해지기 시작했다. 아 버지가 운영하시던 화학 공장이 부도가 난 것이다. 몇몇 직원들이 사기 치는 바람 에 공장 문을 닫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풍족하게 살면서 어려움을 몰랐는데, 이때 부터는 물감 조달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돈을 벌기 위해 1학년 말에 충정로 북 아현동의 한 일본식 2층집에 월세 5천 원짜리 화실을 열었다. 그림은 그려야겠고, 또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봐야 그림밖에 없었다. 화실을 꾸밀 능력이 안 되어 모 교로 김찬희 선생님을 찾아갔다. 스승님이 석고와 이젤을 챙겨 트럭에 실어주었 다. 화실을 꾸미고 부러진 책상과 의자로 간판도 만들었다. 이곳에서 고등학생들
1970년대 친구들과 야외스케치 (오른쪽부터 박준우, 손순영, 강건호)
을 지도하기도 하고 본인의 그림 작업도 했다. 기울어진 가세는 회복하지 못했고 결국 2학년 등록을 포기해야 했다. 화실도 오래 운영하지 못했다. 겨우 6개월 남 짓. 화실 문을 닫고 집으로 미술도구들을 옮겼다. 2학년 등록을 하지 못한 그는 집 에서 그림을 그리며 지내다 금성출판사에 취직했다. 디자인 작업을 했는데, 급여 도 시원치 않고 적성에도 맞지 않아 얼마 다니지 않고 퇴직했다.
대학을 다니면서 인맥이 쌓였다. 당시 미술 관련 대학이라고 해봐야 서울대. 홍익 대, 서라벌예대가 전부였다. 가장 친한 친구는 중학교 때 미술실 앞에서 함께 벌을 받았던 강건호였다. 중·고등학교, 대학교까지 함께 다녔고 나중에 한일미협 부회 장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두각을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대학 졸업 후 구상계열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다른 한 친구는 양정고등학교와 홍익대를 나온 손순영이었다. 국전에서 특선과 문 공부장관상을 받았던 인물로 구상작가계열에서 두드러졌다. 손순영의 주변에 그 림 그리는 친구들이 많았다. 사실 손순영을 처음 만난 것은 고1때 창경궁에서 열 린 어느 실기대회에서였다. 김찬희 선생님이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니까 잘 봐 두라”고 일러두기도 했다. 손순영은 우리나라 미술계의 거목으로 알려진 손응성 씨의 아들이다. 손응성 화백은 태평양미술학교 출신으로 김찬희 화백의 1년 선배 이면서 막역한 사이였다. 선생님은 자신의 제자와 손화백의 아들과 은근히 경쟁 시키고 싶었던 심산이었다. 손순영과는 학교 졸업 후 자주 만났다. 그 바람에 그 림 그리는 많은 친구들도 만날 수 있었다. 화단에서는 박준우와 강건호, 손순영 을 삼총사라 불렀다.
물론 안 좋은 인연들도 있다. 대학 1학년 때 그의 작품을 복사한 듯한 똑같은 작 품을 국전에 출품한 친구도 있었다. 똑같은 작품이 출품되었으니 둘 다 낙선한 것
은 불을 보듯 뻔한 일. 이후 이 친구는 그가 월남전에 참전하자 집에 있던 미술도 구를 모두 가져가기도 했다. 심지어 애써 만들었던 간판까지도 가져갔다. 그 바 람에 제대 후 어려운 형편에 미술도구들을 다시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 는 후에 H 대학 교수도 지내고 한국화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지만 박화백은 그를 멀리했다.
베트남전 참전, 그리고 첫 개인전
학교를 그만 둔 그는 1967년 군에 입대했다. 논산에서 훈련을 받고 25사단으로 배속됐다. 이곳에서 다시 육군단 하사관 교육을 받고 GOP까지 갔다 온 그는 베 트남전 참전을 신청했다. 보리밥에 소금도 넣지 않은 콩나물국 외에는 부식도 없 는 부대환경이 싫었다. 이런 곳에 있느니 차라리 베트남전에 참전하자고 맘먹었 다. 죽음이 두렵기는 했지만 또 다른 세계를 보고 싶은 호기심도 참전지원 동기였 다. 화천에 있는 훈련소로 가기 전 집에 들러 파월 지원 사실을 알렸다. 아버지께 서 말리셨지만 끝내 고집을 부렸다.
맨처음 도착한 곳은 베트남 중부 퀴논이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M16을 지급받고 6개월간 작전 지역에서 근무했다. 정글을 수색하고 베트콩과 만나 교전하면서 위 험한 고비도 넘겼다. 이후 사단본부에서 5개월가량 1종 보급업무를 수행하고 사 이공 주월사령부로 자리를 옮겼다. 사령관 비서실에서 근무했는데, 이 당시 스케 치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채명신 장군이 사령관으로 재직할 때였다. 사령관 비서실 이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여유는 있었다. 종군화가로 참전했더라면 좋을 터이지 만 형편이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사이공으로 옮기기 전 전투지역에서는 겨
군대에서 휴가 나왔을 때 모습 (69년 겨울 친구 강건호와)
우 1~2점밖에 못했다. 부대밖에 나가 물감을 좀 얻고 닭털 몇 개 묶어서 붓을 만 들어 작업했다. 스케치에 담채 정도였다. 사이공(호치민시)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 서는 문구점에 가서 종이와 연필을 사고 물감도 구입할 수 있었다.
전투장면은 기억에 의존해 그려야 하기 때문에 작업이 불가능했다. 사이공 거리, 어린아이 모습, 씨클로 등 주로 사이공의 시내 풍경을 그렸다. 그래서 그린 것이 대략 20-30여점. 주월사령부에서 1년 정도 근무하다 귀국해 1970년에 제대했다.
제대를 하고 보니 집안 사정은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 한차례 사업이 부도가 나고 다시 증권회사에 다니던 아버지는 동생(작은 아버지)의 빚 보증을 잘못 서큰돈을 떼이게 되는 일을 겪었다. 이 일로 한동안 작은집과 불편한 관계를 가질 수밖 에 없었다. 베트남에서 꼬박꼬박 보내준 월급도 다 흔적이 없이 사라졌다. 집안에 두었던 미술도구는 친구가 거짓말을 하고 모두 가져가 버려 거의 없었다. 빈털터 리였다. 남은 것이라곤 베트남에서 해온 스케치 작품뿐이었다.
오랜만에 스승을 만나 베트남에서의 군 생활 얘기도 하고 스케치 작품을 보여드 렸더니, “이거 전시회 한번 해보자” 하셨다. 장소도 소개해주셨다. 제대 후 1년 만 의 일이자 박화백 최초의 개인전이었다. 20여점의 스케치와 스케치 담채화 등의 작품을 가지고 ‘종군 스케치전’이란 이름으로 명동에 있는 ‘엘리자베스’라는 커피 숍에서 열었다. 유명한 마담이 운영하던 커피숍으로 예술가들이 많이 모이는 곳 이었다. 가족들과 친구들 등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알린 소박한 전시회였다. 전쟁 터라고 하는 베트남에서의 그림이었기 때문에 나름 의미가 있었다.
화가는 소재 불문, 재료 불문해야
이후 박화백은 수채화를 많이 그리기 시작했다. 친구가 가져간 탓에 미술도구는 거 의 없었고 유화물감이나 캔버스를 마련하기조차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달 지나고 나서 동대문구 전농동에 빚을 내어 이젤, 석고 등을 갖다 놓고 화실을 다시 시작했다.
1971년부터 수채화가협회 전신인 협회에 가입하면서 협회 활동을 시작했다. 당 시 협회에는 박기태, 전상수, 김용길, 권오웅, 박영성, 전호 같은 쟁쟁한 화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초기 수채화의 화맥을 구성한 사람들이다.
70년대 초반부터 매년 회원전에 작품을 출품했다. 막내라고 그림을 구석에 걸어 놓으면 떼를 쓰기도 했다. 그 당시의 작품들은 화실 이전하면서 많이 훼손됐다. 판 매된 것들도 누구에게 판매 되었는지 기록하지 못해 소재를 파악할 수도 없다. 아 쉬운 대목이다. 학생지도만 해서는 수입이 안 되니 작품을 판매해 충당했다. 왕성 한 활동을 하던 시기라 작품 판매도 꽤 됐다. 1970년대 초반, 대부분의 작품들을 반도호텔 옆 ‘수화랑’에 위탁판매 했는데, 좀 시간이 지나니 수금이 안됐다고 하 면서 대금을 주지 않는 일이 종종 생겼다. 많은 화랑들이 신진작가의 작품을 이런 식으로 가로챘다. 이후 그는 화랑을 통해 작품 거래하는 것을 중단했다. 70년대말 80년대 초반까지 주로 지인을 통해 판매했다. 1979년 개인전을 열었는데, 이 때 3분의 2가 비싸게 팔려나가기도 했다.
그림의 소재는 가리지 않았다. 다만 인물보다는 주로 풍경, 정물을 했다. 사람들 이 선호하는 작품이 풍경이다. 하지만 풍경화를 많이 그린다고 풍경화가는 아니 라고 한다. 어떠한 소재도 대상을 불문하고 그릴 수 있어야 진정한 화가라고 그는 말한다. 야외를 다니면서 풍경을 스케치하고 정물을 그리고 했는데, 그림은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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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감각에 많이 좌우된다고 한다. 입시생처럼 몰입해서 그린다고 되는 것은 아니 라는 얘기다. 본인 스스로가 미술학원을 다녀본 적도 없고 어려서 지도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뭔가 감수성이 남달라야 눈에 보이고, 보이는 것과 동시에 저걸 어 떻게 그릴까 하는 게 보인다고 한다.
아울러 박화백은 본인이 수채화가로 알려진 것에 대해 몹시 못마땅해 한다. 수채 화가협회 회원으로 초창기부터 그렇게 알려져 온 것이지만 수채화가로 한정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수채화가라 하면 수채화만을 그리는 화가들인데, 본인은 수 채화, 유화를 가리지 않으며 오히려 유화를 더 많이 그렸다고 한다. 또 유화를 그 리면서 수채화의 독특한 매력에 대해 영향을 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림 그리는 작가면 수채화든 유화든 재료만 바뀐 것뿐이지, 작가는 어떤 재료가 와도 심지어 는 조각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 스스로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었 다면 조각, 도자기 다 해봤을 것이라고 한다.
“유화는 유화대로 중후하고 깊은 맛이 있는 거고 수채화가 도저히 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단 말이죠. 그리고 색채 자체도 오랫동안 보관되 고, 제일 오래 보관되는 재료가 유화란 말이죠. 근데 요새 수채화도 재 료가 좋아져서 오래가긴 하지만, 색채의 깊이와 중후함에 있어서 많 이 떨어지죠. 다만 수채화는 유화가 갖지 못한 경쾌함이라든가 담백 함 또 맑은 느낌 깔끔한 느낌은 또 유화가 못 내죠. 번지고 스미고 수 채화의 독특한 느낌이 유화는 흉내도 못 내니까. 그러니까 결론은 작 가라면 소재에 따라서 재료를 자유자재로 바꿔가면서 표현할 수 있어 야 하지 않을까…”
계동 화실에서
보통 유화는 두껍게 하기 때문에 중후할 순 있어도 맑고 담백한 느낌을 주기는 어렵다. 그래서 수채화의 장점을 유화에 접목시킬 수 있다고 한다. 작가는 자유 자재로 영역을 넘나들어야 새로운 작품도 나올 수 있다는 게 박화백의 생각이다.
고단한 화실 이전, 스승님의 별세와 개인전
군에서 제대하고 전농동 음악학원 옆에 후배 소개로 화실을 차렸다. 거기서 1-2 년 있었다. 이후 수차례 작업실을 옮겨 다녔다. 70년대 초부터 말까지 7-8년 간 방황을 한 시기였다. 작업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매번 공간을 빌려서 옮겨 다 니느라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작품 활동은 작품 활동대로 쉽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작품의 보관이었다. 주로 화실에 보관해야 했기 때문에 넓은 공간이 필요 했다. 학생들도 지도해야 했고, 작품도 보관해야 했기에 화실의 이전은 보통 고단 한 일이 아니었다.
한때는 미술학원을 운영하려고 시도해 본 적도 있다. 1978년 종로구 명륜동에 있 는 건물 2층에서 꽤 넓은 화실을 운영할 때였다. 마침 중구 회현동에서 미술학원 하시던 분이 학원 인가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인수해 학원을 운영하려고 했 다. 그러나 전례가 될 수 있다고 교육당국이 허가내주지 않아 처음으로 해보려던 미술학원은 포기하고 말았다.
이곳저곳 전전하다 거의 마지막에 정착한 곳이 종로구 계동 화실이다. 한옥 건물 에 양실로 꾸며진, 당시 국회의원을 지낸 계광순씨의 집으로 그 아들이 살고 있었 다. 응접실로 쓰던 곳이라 거실도 괜찮았고 특히 채광이 좋았다. 1979년에 계동
으로 옮긴이래 10년 정도 있었으니 가장 오랫동안 화실을 유지한 곳이기도 하다. 작업실 환경도 좋았고 이곳에서 그는 오롯이 작품 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다. 80 년대 초반까지 여러 점의 작품을 팔기도 했다.
1979년은 그에게 변동이 많았던 해였다. 2월에 김찬희 스승님이 돌아가셨고, 9 월에는 계동으로 화실을 이전했다. 그리고 그해 말에 두 번째 개인전을 인사동 덕 수미술관에서 열었다. 유화를 가지고 규모를 갖추어 연 개인전이었다. 고3 때 국 전에서 입선한 작품과 대학교 1학년 때 국전에 출품한 작품도 있었다. 대학교 때 그린 ‘전설에서’라는 작품을 포함해 70년대에 그린 작품 ‘어촌의 정오’, ‘겨울 속초 항’, ‘초가’ 등을 총 망라했다.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였지만 작품 판매로 비 용을 충당했다. 개인전을 연 덕수미술관은 1976년 김찬희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 제자들이 스승님 전시회를 열어드렸던 뜻 깊은 곳이기도 하다.
부모님 같았던 스승님이 돌아가신 것은 충격이었다. 인생의 선배로 많이 의지했던 분이기 때문이었다. 손응성, 박득순, 김흥수, 권옥연, 도상봉 등 당시 화단의 중심 에 있던 쟁쟁한 분들과 비슷한 연배였다. 하지만 국전 불공정 심사 등을 두고 술 자리에서 화단에 있는 사람들과 툭하면 다투었다. 결국 사회 활동을 접고 혼자서 술을 드시며 외롭게 사시다가 돌아가신 것이 가슴 아팠다. 그들과 함께 활동했으 면 사회적으로 이름을 널리 알리셨을 분이었다.
“알게 모르게 스승을 많이 닮은 것 같더라고, 사회에 비판적이거나 저 항적인 그런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사회의 부조리함이 있는 것인데, 그것을 부드럽게 소화를 못 시키고 대개 예술가들이 그런 것들이 있어 요. 그래서 손해 보는 것도 많고 우리 스승도 그래서 약주를 많이 하시
1978 작품 <어촌의 정오> - 2회 개인전
2020 충남원로예술인 구술채록집
박준우
화가
구술 조사 채록연구 사진 디자인
발행일 발행처
ISBN 979-11-966078-6-9
박준우 우희창, 김영호 우희창 우현선, 박준우 (제공) 김상아
기획 최종길 (당진시대방송미디어협동조합 이사장) 제작 당진시대방송미디어협동조합
2020년 11월 27일 (대표이사 김현식) (우)32263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읍 상하천로 58 3층 전화 : 041-630-2900 https://www.cac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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