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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4.19 역사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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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66주년 기념 수유리 일대 독립·민주 근현대 역사 탐방

○ 일시: 2026. 4. 18(토) 오전 11시~오후 2시(3시간) ○ 4.19민주묘지와 독립운동가 묘역이 있는 곳 ○ 탐방 길: 4·19민주묘지 입구 – 아침이슬 노래비 – 4·19민주묘지 – 4·19기념관 – 근현대사 기념관 – 이명룡(민족대표 33인)의 묘 – 이준 열사의 묘 – 김창숙의 묘 ○ 탐방 길 소개

① 아침이슬 노래비 노래 <아침이슬>은 김민기(1951-2024)의 대표적 노래이다. 김민기는 서울대 미대에 다니면서 수유 리에 살던 시절, 정릉 공동묘지 근처에서 살던 어 릴 적 경험을 담은 노랫말로 <아침이슬>을 작곡 하였다. 서울시는 이를 기리기 위해 2021년 11월 4·19민주묘지 앞 소공원에 아침이슬 노래비를 설 치하였다. 노래비 설치와 함께 소공원의 이름도 무궁화 공원에서 아침이슬 공원으로 바꿨다. 1970년에 만들어진 <아침이슬>은 이후 대학생들의 시위 등에 불리는 애창곡이 되면서 1975 년에 금지곡이 되었으나,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금지곡에서 해제되었다.

② 4·19민주묘지와 4·19기념관 4·19민주묘지는 이승만 독재 정권의 3·15부정선거 에 맞서 1960년의 4·19혁명에 참여했다가 돌아가 신 분의 무덤 186기는 물론 이후 돌아가신 분들이 무덤이 함께 있는 곳이다. 4·19민주묘지는 1961년 2월 국무회의의 의결로 조 성되기 시작하여 1963년 9월 20일에 준공되었다. 1963년 12월 3일에는 서울시로 소유권이 변경되 었다. 4·19민주묘지가 국립묘지로 승격한 것은

<아침이슬> 노래비

4·19기념관 1993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가 그 계기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4·19민주 묘지의 성역화 사업도 진행되었고, 1995년에 국립묘지로 승격되었다. 국립4·19민주묘지에는 임동성(당시 종암초 4년)과 전한승(당시 수송초 6년), 진영숙(당시 한성여중 2년)과 김주열(당시 마산상고 학생), 고순자(당시 서울대 미대)과 김태년·서영무(당시 중앙대생) 등 의 묘가 있는데, 당시 한양대생으로 시위에 참여 했다가 순국한 정임석(기계 58, 1묘역 B 97), 안 경식(광산 59, 1묘역 B 84)도 이곳에 안장되어 있다. 참배 중인 한양대청년동문회 회원들(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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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민주묘지에 딸려 있는 4·19기념관은 4·19혁명의 전후의 시대상황과 전개과정에 대한 이해 를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다.

③ 근현대사기념관 입구에서 만나는 독립유공자 흉상 서울수유국가관리묘역 탐방은 입구에 있는 근현대사기념 관을 먼저 둘러본 후 진행하면 더 좋다. 근현대사기념관 은 서울 강북구가 지난 2016년에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 는데,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한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근현대사기념관을 북한산 서울수유국가관리묘역 입구에 세운 것은 이곳 북한산 둘레길 일대에 안장되어 있는 여 러 독립운동가를 기리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근현대사기념관 입구에는 이 일대에 안장되어 있는 인물 열네 명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이 중 열셋은 서울수유 국가관리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독립유공자의 흉상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관리묘역에서 제외된 서상일의 흉상이 다. 반면, 국가관리묘역에 포함되어 있는 김법린과 조병 옥의 흉상은 없다. 김법린의 묘가 강북구가 아닌 도봉구 쌍문동에 있다는 점, 조병옥의 경우는 제주 4·3 사건 당 시 미군정 경찰의 책임자인 경무부장으로 있으면서 제주도민 학살을 주도한 인물의 하나라는 점이 반영된 결과이다. 흉상 옆에는 ‘독립민주기념비’도 있다. 이 기념비는 2016년 8·15 광복절에 즈음하여 3·1운동 과 4·19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네티즌들이 모은 돈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독립운동가 묘역 과 국립4·19민주묘지가 함께 있는 강북구만이 가질 수 있는 기념비이다.

근현대사기념관 입구

④ 근현대사기념관 근현대사기념관은 강북구청에서 만든 기념관이 다. 북한산 기슭에 있는 강북구 우이동·수유동 일대에 이준, 손병희, 여운형, 이명룡, 이시영, 신익희, 김도연, 신숙, 김창숙, 김병로, 신하균 등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인물의 무덤이 있어 이를 결합시켜 만든 기념관이다. 근현대사기념관 입구에는 이 일대에 묘소를 두 고 있는 역사적 인물의 흉상이 설치되어 있다. 근현대사기념관은 한국 근현대사를 담은 전시뿐만 아니라 강북구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전 시관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북한산 순례 길에 있는 수유리 애국선열 묘역은 2021년 국가관리묘역으로 지정되었다.

서울수유국가관리묘역 일대의 주요인사 묘역

⑤ 북한산 둘레길에서 만나는 열다섯 분의 독립유공자 서울수유국가관리묘역은 북한산 둘레길 1구간과 2구간에 걸쳐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김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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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1967), 김법린(1899-1964), 김병로(1887-1964), 김창숙(1879-1962), 손병희 (1861-1922), 신숙(1885-1967), 신익희(1894-1956), 신하균(1915-1975), 양일동(1912-1980), 여운형(1885-1947), 유림(1898-1961), 이명룡(1873-1956), 이시영(1869-1953), 이준 (1859-1907), 조병옥(1894-1960) 등 독립유공자 열다섯 분의 묘소를 만날 수 있다. 원래는 열일곱 분의 독립유공자가 안장되어 있는 한국광복군 합동묘소도 이곳 국가관리묘역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들 열일곱 분의 유해는 2022년 8월 14일에 대전현충원 독립유공 자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다행히 한국광복군 합동묘소 터와 조형물은 그대로 남아 있어 이들 열일곱 분의 한국광복군 대원들의 행적을 조금이나마 되짚어볼 수 있다. 서울수유국가관리묘역에는 동암 서상일(1886-1962)의 묘소도 있다. 대동청년당과 대한광복단 등에서 활동한 서상일은 지난 2016년 그의 친일행적에 대한 <뉴스타파>의 보도 이후 친일논 란에 휩싸였다. 이 일대가 지난 2021년 서울수유국가관리묘역으로 지정될 당시 서상일의 묘소 가 국가관리 대상에서 제외된 사정이다.

독립과 민주·통일에 평생을 바친 사람들 이곳에 안장되어 있는 독립운동가의 면면을 보면 일찍 돌아가신 이준 열사와 손병희 선생을 제외 하고는 독립운동만이 아니라 광복 이후에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한 분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림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은 국망 의 위기를 맞아서는 외세와 매국세력에 맞서 을 사오적 처단 상소와 애국계몽운동 등 국권수호운 동에 나섰고,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와 친일부역자들에 맞서 비타협적인 항일투쟁을 흔들림없이 벌였다. 이런 김창숙이 해방 후에는 고령의 나이에도 일제의 고문으로 인한 불편한 몸을 마다 하지 않고 분단ㆍ독재세력에 맞서 평화통일과 민주주의 실현에 앞장서다 돌아가셨다. 김창숙 은 평생 시대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고 시대의 불의에 맞서 독립, 민주, 통일의 대도를 온몸으 로 헤쳐나간 ‘마지막 선비’라는 호칭이 결코 아깝지 않은 인물이다. 김창숙 외에도 임시정부요인 출신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섰던 이시영과 신익희, 아나키스 트 독립운동가로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섰던 유림, 이승만독재정권에 맞섰고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나섰던 신숙, 유신독재정권에 맞섰던 양일동 등이 새롭게 다가오는 공간이다. 일제에 맞선 우리의 독립운동은 자유, 평등, 연대의 민주공화국을 목표로 한 미래지향적인 독 립운동이었기에 1919년 위대한 3·1운동의 열기를 흡수하여 곧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 할 수 있었고, 1945년 8·15 광복 이후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분단에 반대하는 통일민족 국가 수립과 독재에 반대하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여생을 바칠 수 있었던 것 이 아닐까 한다.

심산 김창숙의 묘

묘소의 흔적이 남아있는 지청천 장군 묘소 터, 흔적조차 찾을 길 없는 강우규 의사의 묘소 터 기독교계를 대표하여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던 이명룡(1873-1956)의 묘는 근현 대사기념관 건너편에 있는 통일교육원 경내에 있다 보니 탐방객이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 다. 이명룡은 1954년에 결성된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인 독립운동가 1백여 명이 함께 한 친목 단체 갑오구락부(甲午俱樂部)의 회장으로 있었는데, 갑오구락부에서 교류하던 김재호(임정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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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남의사 출신), 김병호(전 한독당 중앙집행 위원, 전 사회당 조직부장) 등이 당시 대통령인 이승만을 독재자로 규정하고 1955년 10월 3일 개천절 행사에 맞춘 저격 계획을 수립하여 추 진하던 중 육군특무대(대장 김창룡)에 체포·구 속되는 ‘대통령저격음모사건’이 벌어지기도 했 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신익희와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한 신하균 부자의 묘소도 다른 독립운동가 의 묘소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다보니 접근이 어려운 편이다. 이준 열사의 묘소와 신익희· 신하균 부자의 묘소를 연결하는 길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지 금은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묘역에 있는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의 묘소도 원 래는 수유리 북한산 자락에 있었다. 1994년에 이장했지만, 지금도 북한산 자락에는 지청천 장 군의 묘소 터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한국광복군 합동묘소 터와 마찬가지로 정비하여 탐방객이 찾을 수 있도록 관리하는 편이 낫지 않나 싶었다.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에 있는 강우규 의사의 묘소도 수유리 국가관리묘역 인근에 있었 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강우규 의사는 1919년 9월 2일 새로 부임해오는 조선총 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투척한 인물이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한 강우규 의사의 유 해는 원래 신사리(현 은평구 신사동) 수인묘지에 안장되었다, 1954년 강우규 의사의 고향인 덕천 군민회는 서울시의 협조를 받아 수유리 우이초등 당시 언론에 보도된 강우의 의사의 묘소 위치 학교 맞은편(산107-1)에 묏자리를 마련하여 강우 규 의사의 유해를 이장하고 이듬해에는 묘비도 세웠다. 이 수유리 강우규 의사의 묘소는 1966년 국립묘지로 이장되기 전까지 12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우이초등학교와 건너편 우 이감리교회 사이에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서울현충원으 로 이장하면서 땅 속에 묻었다는 묘비는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까. 궁금해지는 대목이 다.

이명룡의 묘

분단극복을 위해 싸우다 역사의 제단에 목숨을 바친 여운형을 생각하며 여운형은 일찍이 중국에 망명하여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8년에 신규식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 조직에 앞장섰고, 김규식을 3·1운동의 전야에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면서는 대중 적인 독립운동의 확산을 위해 만주와 일본, 국내에 대표를 파견하는 등 동분서주한 인물이었 다. 1929년 일제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던 여운형은 감옥에서 나온 후 조선중앙일보 사 장을 맡기도 하였고, 1940년대에는 건국동맹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여운형은 해방정국에서 분단을 거부하고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였 지만, 1947년 7월 19일 분단이 기정사실화되는 흐름 속에서 극우파 청년 한지근의 총에 혜화 동로터리에서 암살당하고 말았다. 여운형의 장례식은 인민장으로 치러졌고, 무덤은 미군정의 반대로 서울 시내에 마련하고자 하는 계획이 좌절되면서 우이동 지금의 자리로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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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의 묘소가 다시 한 번 대중적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1991년 남북여성토론회 에 북측 대표로 참석한 여운형의 딸 여연구가 묘소를 참배했을 때였다. 딸이 44년 만에 처 음으로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했다는 사실 자 체만으로도 분단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끼는 장면이었지만, 합의에 없던 김일성의 조화가 등장하면서 벌어진 남북의 옥신각신은 분단된 한반도에서나 벌어질 수 있는 비극적 장면이 었다.

몽양 여운형의 묘

※ 대수유리 산속 – 김상옥 의사가 숨어 있던 곳 1920년 10월 암살단의 김상옥(1890-1923)은 유득신(1896-1958)을 상왕십리 김태현의 집에서 만나자고 하여 암살단에 가입시키고, 중국 탈출 계획을 설명한 후 권총을 주면서 군자금마련 을 요청했다. 3-4일 후에는 대수유리 산중에서 다시 만나 폭탄도 지급했다. 유득신은 엄준 (1900-1960, 엄우룡)과 함께 경기도 평의원 임종상으로부터 2,000원을 받아내는 등 7차례에 걸친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여 김상옥이 은거해 있던 대수유리 산중에서 다시 만나 전달했다. 이후 김상옥은 중국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유득신과 엄준은 체포되어 각각 징역 12년 형과 10년 형을 언도받고 옥살이를 했다. 상해로 탈출에 성공한 김상옥 의사는 의열단 단원이 되어 1922년 겨울 조선총독 처단을 위해 다시 서울에 잠입해 들어왔고,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다음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처단하기 위해 준비하던 중 일제의 추적을 받고 몇 차례 총격전을 벌인 끝에 효제동에서 순국 하였다.

※ 소설가 한강의 옛집, 우이동 주택 소설가 한강이 어린 시절부터 20대까지 살았 던 우이동 주택(22-3)이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 상을 계기로 주목받고 있다. 대지면적 259㎡ 규모의 지하 1층∼지상 1층의 단독주택인 이 집은 한강이 초등학생 무렵 수유동으로 상경 해 학창 시절을 보내며 문학적 소양을 다져온 공간이다. 그동안 한강은 여러 작품과 인터뷰에서 수유 리(현 우이동)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소설 <희랍어 시간>에선 “수유리의 우리 집 기억하 니, 방이 네 개나 되는…마치 황홀한 환각 같던 그 광경”이라는 말로 회상한 바 있다. 또한 한 인터뷰에선 “저에게 집이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공간이 수유리 집”이라는 말로 애틋한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강북구는 최근 ‘지역 문화공간을 보존하여 미래세대와 공유한다’는 차원에서 이 우이동 주택 을 구입하였다. 강북구는 이곳을 단순한 기념 공간을 넘어 주민과 방문객이 문학의 가치를 함 께 배우고 즐길 수 있는 문화 시설로 탈바꿈시킬 계획이다.

소설가 한강의 우이동 옛집(강북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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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익환 통일의집 박물관 문익환 통일의집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 그리고 한 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헌신했던 문익환 목사 (1918-1994)와 박용길 장로(1919-2011)가 1970년 부터 살던 집을 (사)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가 개조하 여 만든 박물관이다. 1994년 문익환 목사가 별세한 이후 ‘통일의집’ 현판을 걸었으며, 2011년 박용길 장로가 별세한 이후인 2013년에는 서울미래유산으 로 등재되었다. 2018년에 ‘문익환 통일의집 박물관’ 으로 재개관하였다. 시인 윤동주의 친구이기도 한 문익환이 본격적으로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것은 1976년 3·1구 국선언에 참여하면서 부터다. 1975년 친구 장준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건도 문익환이 민 주화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한 요인이었다고 한다. 이후 문익환은 1994년 별세하기 전까지 재야 민주화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문익환 목사는 1989년 4월 정부에 신고하지 않고 방북하여 김일성, 허담 등과 회담하고 통일 방안에 대한 합의를 담은 ‘4·2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특히 공동성명 4항은 “남북 쌍방이 공존의 원칙에서 연방제 방식으로 통일하는 것이 우리 민족이 선택할 필연적 통일 방도이며 이는 한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고 되어 있다. 이는 평소 ‘연방제 통일 3단계론’ 을 견지하고 있던 문익환 목사가 북이 연방제 통일을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처음으 로 수용하도록 관철한 결과였다. 이 합의는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에 이루 어진 ‘6·15 남북 공동선언’에 나오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는 개념의 토대가 되었다.

※ 윤극영 가옥 윤극영(1903-1988)은 동요 <반달>과 <고드 름>, <설날> 등을 발표한 동요 작곡가이자 아 동문학가이다. 방정환과 더불어 색동회 창립동인이었으며, 우 리말 동요 창작을 시작했다. 1923년 7월 서울 에서 개최된 ‘전조선소년지도자대회’에 참가하 여 「동요에 대한 실재론」이라는 제목으로 강 연을 하기도 했다. 1924년 일본에서 돌아와 동요단체 ‘다리아회’를 조직하고 어린이문화운 동과 동요 창작과 작곡 운동을 전개했다. 1926년 이후 만주와 일본 등지를 오가며 활동

문익환 통일의 집

윤극영 가옥 하였다. 1941년 용정에서 역마차 사업을 하다가 친일단체인 간도성협화회 회장을 맡기도 했 다. 해방 이후에도 하얼빈에서 예술 활동을 했는데, 1946년 용정에서 경비대에 붙잡혀 3년형 선고를 받고 복역 중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 톈진에서 손수레를 끌다가 귀국하여 1947년 ‘노래동무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윤극영 가옥은 윤극영이 1988년 별세할 때까지 살던 집이다. 2014년 서울시가 인수하여 윤극 영의 유품과 자료를 전시하는 전시관으로 개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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